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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교정상화 위한 ‘땅고르기’/북송 일본인처 고향방문 의미와 전망

    ◎왕래지속 여부는 식량지원·국제정세가 변수 1959년12월14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본 니가카항에 북송 재일동포를 실은 ‘클리리온’호가 인공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9백75명의 재일동포를 싣고 출항했다. 그 뒤 84년까지 9만3천명이 북송선에 몸을 실었다.60년 한해동안에만 4만9천36명이 동해를 건넜다. 북송자 가운데는 일본인 국적자가 6천6백명 포함돼 있었다.일본인 배우자는 2천여명으로 일본인 처가 1천8백31명,남편이 2백여명이다. 재일동포들이 북송선을 타게 된데는 재일동포의 희망과 일본,북한의 계산이 맞아들어간 때문이다. 일본은 50년대 들어서서는 재일동포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송환시키자는 방안이 외무성,적십자사 등을 중심으로 논의돼 왔다. 재일동포들은 당시 80%가 실업상태로 학교에 보낸 자녀들 10명 가운데 8­9명은 차별과 이지메(집단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일본 전국의 생활보호대상자 비율은 2% 수준이었지만 재일동포들의 경우는 24%에 달했다. 이 무렵 전후 복구가 꽤 진행된 북한은 대외적 명분과 노동력·기술자 확보라는 면에서 재일동포 귀환을 적극 환영하고 나섰다. 일본인 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무렵부터다.생활의 곤궁함,지상낙원에 대한 실망,돈 요구 등이 잇달으면서 일본인 처 고향방문을 허용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80·90년대에 일본측은 안부조사를 요청해 왔었다. 일본인 처 고향방문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올해.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한 인도적 지원과 관련,일본측은 북한도 일본인 처 고향방문 허용,납치의혹사건 해결 등 인도적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했다.양측은 지난 8월 북경에서 열린 양측 외교접촉에서 고향방문 허용에 합의했다.북송 사업개시 37년 만의 일이다.일본은 이에 따라 곧 식량지원 의사를 밝혔고 오는 11일에는 여당 대표단을 파견한다.고향방문을 계기로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를 위한 땅고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일본인 처들은 일본과 북한 양측의 계산을 이어주는 ‘인도의 다리’가 되고 있다. 앞으로 고향방문 사업이 지속될 지 여부는 이번 방문 결과와 양측관계,국제정세등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현재로서는 지속여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대상에서 제외돼 초조해 하고 있는 나머지 일본인 처의 고향방문이 빨리 실현돼야 하는 것은 물론 일본인 처에서 나아가 모든 북송동포의 자유왕래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 재일동포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일본인 처 관련 연표 ▲50년대 중반 일본 적십자사등 재일동포 송환 모색 ▲58년 8월 일본 가와사키 거주 재일동포 청년들 김일성에게 귀환 희망 서한 보냄. ▲59년 8월 북한 일본 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 조선인 귀환협정’ 체결 ▲59년 12월 제1차 북송선 클리리온호가 일본 니가타항 출항.북송사업은 60년 4만9천36명을 피크로 줄어들어 갔지만 84년까지 지속돼(68년부터 70년까지 중단) 모두 9만3천명이 건너감. ▲81년 10월 스즈키 젠코(영목선행)총리가 일본인처 고향방문 문제가 진전을 보이지 않는 데 대해 유감의 뜻 표명. ▲91년 11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제5차회의에서 일본이 고향방문을 희망하는 일본인처 32명의 안부에 대해 회답. ▲97년 5월 과장급 외교접촉에서 북한이 고향방문 허용의사 표명. ▲97년 8월 양측 심의관급 외교접촉에서 고향방문 허용키로 합의. ▲97년 9월 양측 적십자사 연락회의에서 제1진을 가급적 1개월 안에 10­15명 규모로 1주일정도 보내기로 합의.
  • 북한군 장성은 총1,200명/대장 위 차수만 현재 11명

    북한 군에는 고위직이 많다.한국군의 계급은 대장이 최고인데 반해 북한에는 대장 위에 차수가 있고 또 그 위에 원수가 있다.원수는 김정일과 호위사령관인 이을설 2명이 있다.그러나 격이 달라 김정일은 ‘공화국 원수’이고 이을설은 ‘조선인민군 원수’이다.망명설이 나도는 이두익은 북한군 원로로 92년에 차수로 승진했다.현재 차수는 이두익 외에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총참모장 김영춘 등 11명이나 된다.북한 군 장성수는 대장 19명을 포함 약 1천2백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정규군(1백6만명)의 0.11%로 중국이나 미국보다 2배 정도 높은 비율이다.계급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몽골 어느 탈북자의 삶과 고백(흑룡강 7천리:9)

    ◎노동·농사·목부… 고독한 이방인/“자본주의가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에 고향을 뛰쳐 나왔디요 외몽골·소련을 거쳐 구라파로갈 타산으로…”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들이 꽤나 되는 모양이다.탈북자라고 부르는 북한 동포들의 중국 월경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식량난으로 허덕이는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요즘의 탈북은 설득력을 갖는다.그런데 중국 보다 살기가 좀 나아서 밥술이나 먹던 시대에도 탈북자가 있었다.금을 캐는 노구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한우씨(62·가명)가 그런 장본인이다.그것도 두차례에 걸친 탈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지금도 떠돌아 다니는 신세다.내몽골에 처자가 산다고 얼버무릴뿐 가족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다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대륙에서 살아온 힘겨운 시절만을 털어놓는 것으로 일관했다.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목소리를 낮추었다.그가 살아온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신분노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선땅이 가까운데서 온 작가선생이라 내레 믿고 얘기합네다.내 이름을 구태여 알라고는 하지 마소.수소문만 하면 형제들이 조선에 살지 않갔수.어디 살던 아무개가 중국에 산다는 것이 소문나면 좋지 않을 것입네다.내레 처음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화물차를 탔으니까,고향이 어디쯤이라는 것은 짐작하실 거우다.선생도 그쪽 사람들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소리 들었디요.내 가족들은 죽지나 않았는지…” 그는 1961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무작정 화물열차를 탔다.화물차에 숨어 꼬박 이틀을 달려 어느 역에 닿았다.지금 생각하면 아성이었다는 것이다.중국말을 모르는 지라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밥을 빌어 먹었다.그리고 걸어서 하얼빈에 온 그는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화물차에 올랐다.열차는 쉬지도 않고 하루낮 하루밤을 달린 끝에 내몽골 하이라얼(해라이)에 도착했다. 중국은 당시 살기가 어려웠다.나무껍질과 같은 먹을수 있는 것이라면 다 먹었던 이른바 대식품시대라서 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다.주린 배를 움켜 쥐고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잘 수 밖에….그러다 경찰에 잡혔다.조선인민군 정찰병으로 권투에도 능했던 그였지만,석탄차를 타고온 주제 꼴은 말이 아니었다.자신이 보아도 의심을 받기 딱 좋았다.붙잡히고 나서 곧바로 수용소로 직행했다.그러나 수용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식량난이 극심해서 죄수가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그는 수용소에서 만난 몽골족과 함께 탈출한 뒤 말을 훔쳐타고 외몽골로 들어갔다.조선인(북한인)넷에 몽골족 둘을 합해 일행은 여섯이었는데,몽골족 도움으로 조선족들도 모두 몽골족 차림을 했다.중국에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떼지어 들어가던 시절,그는 왜 탈북자가 되었는가.그의 말을 들어보면 탈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가족들 죽지나 않았는지…” “외몽골과 소련을 거쳐 서구라파로 들어갈 타산을 댔디요.자본주의가 하도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네다.지금은 부자로 사는 남한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네다.여하간 호기심이 많아서리 고향을 뛰쳐나왔디요.중국과 몽골공화국은 다 같은 공산국가고 우호 인방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내몽골 들어가기가 쉬웠드랬습네다.순라병은 그림자도 없고 철조망 서너 가닥을 늘여 놓았더라 이겁네다.” 그는 일행과 초원 풀더미속에서 잠을 청하다 또 붙잡히고 말았다. 하이라얼 감옥에서 꼬박 두달을 살았다.그리고 나서 추방을 당했다.그를 기다린 곳은 함경도 아오지탄광이었다.그래도 하루 쌀 300g을 배급받았다. 북한은 당시 중국에 비해 사정이 좋아 노동개조를 받는 죄수에게도 쌀을 주었다.요즘 북한과는 천양지판이었으나 그는 또 탈북을 꿈꾸었다.1961년이 돌아오고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오지를 탈출했다.두만강을 건너 도문에 와서 화물열차를 탔다.그래도 있던데가 좋았는지,다시 하이라얼에서 내렸다. ○아오지탄광서 또 탈출 그는 배가 무척 고팠다.자신도 모르게 식당 앞을 서성거리다 식사를 하던 노년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짓 발짓으로 식사를 구걸했다.여인은 측은한 눈길을 주면서 얼결에 말을 걸었다.조선말이었다.내몽골에서 조선말을듣는 것은 엄동설한에 불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모든 사연을 실토하고 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그 여인은 당시 쉰 살의 조선족이었는데,몽골족 남편과 산다고 했다.이름은 이영숙,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내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묻습데다.내 거절할 이유가 없었디요.하이라얼에서 90리가 떨어진 그 집을 따라 갔더니,몽골족 남편이 양자를 삼겠다고 제의를 해왔디요.그분은 자기 이름을 투린자라고 소개합데다.촌의 당서기고 해서 사는 것도 그만했디요.몽골 초원에서 당서기 양아들로 사니끼니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모처럼 좌정을 하게 되었다 이겁네다.” ○넓은 초원서 3년을 목부로 몽골 유목민들은 양자를 두거나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을 해운으로 여기기 일쑤다.그래서 여남은 살을 먹은 소년을 소나 말,양 따위와 바꾸어 데려다 키우는 경우도 있다.이는 초원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의 하나인데,온정을 베푼다는 의미도 지녔다.‘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양쪽 모두가 손해볼 것이 없는 양속인지도 모른다.어떻든 초원에서 석 삼년을 목부로 살았다.그러는 동안 몽골말도 배우고 짐승을 방목하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이웃에는 28가구가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었으나 가난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초원에 겨울이 오면 유목민들은 정거생활에 들어간다.그 때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우물이다.그래서 이한우씨는 목축을 하면서 우물을 파는 일에 매달렸다.우물을 파서 돈도 제법 번 일이 있다는 그는 노다지 소문을 듣고 흑룡강상류로 들어왔다고 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독한 이방인으로 초원을 잊지 않았다. “몽골 노래가 왜 음이 길고 높은지 아오? 망망한 초원엔서 방목을 하다 보면 고독할 때가 많디요.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길고 구성지게 부르는 겁네다.”
  • 막하·목릉현의 ‘노다지 바람’(흑룡강 7천리:8)

    ◎“노다지 캐자” 골짜기마다 채금선 북적/100년전부터 채금… 한때 금갱 500여곳/지금도 두곳서 한해 1만6천여냥 캐내 흑룡강성 막하시에서 약 50㎞를 올라가면 나무를 베어냈던 벌목현장인 노구임장이 있다.지금은 주변에 210가구가 사는 임산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나,한 때는 금이 많이 나와 산간도시를 이루었다고 한다.한 기록을 보면 노구임장 부근은 노다지를 찾는 사람들로 해서 꽤나 흥청댔던 모양이다. 그 기록은 ‘광서 10년(1885년) 도강한 도채황금자가 4천명,막집이 700여간,금갱이 500여개가 되었다’고 밝힌다.이와 더불어 철공소와 상점,술집이 즐비했다는 것이다.한창 번성기에는 산골 인구가 1만5천명까지 불어났다.러시아인이 가장 많아 9천명,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미국인들도 들어왔다.이 무렵에 러시아인 세레스킨은 노구지에다 이른바 사얼투자(살이국가)라는 이름의 사설공화국을 세우고 스스로 수령이 된 기상천외한 일도 일어났다. ○한때 산골인구 1만5천명 금을 오죽 탐냈으면 남의 나라 땅에 제멋대로 공화국을 세웠을까.어떻든 그는 공화국 의정청을 설치하고 법률도 만들었다.그리고 150명의 무장조직을 두었다.러시아 상점과 교회,병원,여관과 목욕탕도 세웠다.해도 너무했던 터라 소식을 접한 청조는 그 러시아인들을 금도둑,즉 금비로 몰아붙였다.청조 총리아문은 러시아공사에게 금비 소환을 요구했다.그러나 러시아가 말을 듣지 않자,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노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중국역사는 이를 호금전이라 기록했다. 청나라는 1885년 길림성 고급관리 이김용을 보내 금광을 직영체제로 운영했다.1889∼1899년 10년동안 금 생산량은 18만냥이 되었다.당시 자희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노구에 금이 많다니 내 지분을 살 돈걱정을 덜었다”고 기뻐했다는 것이다.그리고 노구를 연지구로 하라는 분부도 내렸다.오늘날도 노구를 연지구라 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금이 많다고 해서 금구라고도 하는 노구에는 요즘도 채금꾼들이 몰려들어 북적댔다.4㎞가 실한 만두산 골짜기에는 크고 작은 채금선 100여대가 밤낮없이 땅을 파헤치고 있다. 노구의 금캐기는 10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산량이 만만치 않다.한 해에 평균 5천냥의 금을 캐내고 있다.1944년부터 정부가 개인 채금을 허용하고 나서 임장 노동자의 절반인 300여명이 나무 베는 일을 버리고 채금에 매달렸다.노동자 한 사람이 연평균 6천원의 소득을 올린다니 수입치고는 아주 괜찮은 편이다.임장책임자 기림위씨의 말을 들어보면 금에 얽힌 사연도 많았다. “백년을 채굴하고 있지만 금이 아직도 많이 나옵니다.금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때는 아마 일제시기가 아닌가 합니다.일본인들이 중국 노동자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데려와서 마소처럼 부려 금을 캤으니까요.멀건 죽물을 먹으면서 혹사시킨 바람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친 사람도 많았습니다.그중에는 일본인 몰래 노다지를 묻어놓고 달아난 사람도 있었나 봅니다.얼마전에 산동에 산다는 한 중년이 할아버지가 남겼다는 약도 비슷한 지도를 가지고 여길 찾았습데다.그런데 우리 임장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서 금항아리를 파냈지 뭡니까.부자가 된 것이지요.” ○부부가 하루 1백만원벌이 조선족 고준강·장효매씨는 노구에서 금을 캐는 부부다.매일 1.06돈쭝을 캐는데,본전을 뽑고 남는다고 했다.재수가 좋으면 2돈쭝을 넘겨 건진다는 부부는 7만원을 주고 아예 채금선을 샀다는 것이다.흑룡강성 수하시에서 장사로 모은 돈을 가지고 들어와 2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노구임장에서 20년동안 벌목노동자로 일했던 단문과씨는 올 여름에 하루 21.5돈쭝이나 되는 금을 캤다.하루에 중국돈 1만원을 벌었으니까,한국돈으로 1백만원 수입을 올리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그렇다고 너나 모두가 노다지를 캐는 것은 아니다.지난해 서울에서 온 이동기씨(44)와 함께 채금업에 손을 댄 김지한씨(46)는 본전도 다 날렸다.국가공무원 출신인 그는 중국공민이 아니어서 채금허가를 받지 못하는 이동기씨 대신 자신이 허가를 얻어냈다.그러나 한 해를 못버티고 손을 들었다.일확천금의 꿈이 분명한 노다지 캐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김지한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 황금회사 비준을 따는데만 5만원을 때려 넣었디요.금이 난다고 사람들이 쉬파리처럼 모여들어 1만6천원이면 일년동안 빌릴수 있던 채금선 임대료도 3만원으로 뛴데다,거기다 뜯어먹는 자들이 얼만지 아우? 지질탐사비에 토지사용비,산림파괴비는 물론이고 세금도 그런대로 내야디요.하지만 산림경찰이나 현지 책임자,심지어는 깡파까지 섬겼수다,금전판이 돈벌이판이 아니라 망하는 판일수 밖에…” 황금바람은 막하현 노구임장뿐 아니라 흑룡강성 목릉현에도 불었다.흑룡강지류인 뇌봉하유역 뇌봉구 골짜기는 옛부터 백리금천이라 했다.그래서 채금꾼들이 눈독을 들였다.목릉현 하서향 갱신촌에서 할아버지때부터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조선족들도 행여 뒤질세라 채금에 나섰다.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맨손으로 일구어낸 논바닥을 파서 사금을 캤다.목릉현 전체의 최근 연간생산량은 평균 1만1천800냥에 이른다는 것이다. ○목릉현이 ‘만냥현’으로 목릉현은 흑룡강성에서 금이 가장 많이 나는 ‘만냥현’이 되었다.하지만 논이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명줄이 끊겼다.조선족 못자리판 하서향만 해도 400㏊가 자갈밭 황무지로 변했다.하서향 갱신촌 당서기 박영선씨의 말을 듣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채금열이 일자 조선족들은 자기 논을 까뒤엎었디요.폐농을 스스로 채촉한 거입네다.이제와서리 벼농사를 짓고 싶어도 어디 논같은 논이 있어야디요.논을 복구는 하고 있습네다만,자갈 모래논에서 소출이 나면 얼마나 나겠습니까.”
  • 북 김정일 총비서 공식추대/당중앙위·군사위 발표

    북한은 8일 김정일이 노동당총비서로 공식추대됐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이날 하오5시 중앙방송의 당중앙위원회와 당군사중앙위원회 특별보도에서 “조선노동당중앙위와 당중앙군사위는 (김정일 동지가) 우리당의 공인된 당총비서로 추대됐음을 엄숙히 선포한다”고 보도했다.〈관련기사 2·6면〉 북한은 또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군대표회,도대표회 등에서 김정일 동지를 당총비서로 높이 추대할데 대한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은 전당 전군 전민이 김일성동지의 위업을 완성하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김정일은 김일성사후 만3년3개월만에 당총비서로 공식추대됐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추대발표는 당중앙위 전원회의소집 등 공식절차를 거쳤는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지만 승계작업은 완료된 것으로 본다”면서 “북한내부에서는 김정일을 ‘선출’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추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오키나와에 위안부 위령비/새달 9일 제막

    ◎일 단체 모금운동 5년만에 태평양 전쟁중 일본 오키나와(충승) 등에 강제 연행돼 희생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가 11월 9일 오키나와에 제막된다. 6일 마이니치(매일)신문에 따르면 이 위령비는 올해 84살인 다치바나다 하마코(모자이크 작가)씨가 중심이 돼 일본 국내에서 전개돼온 5년간의 모금 활동으로 모아진 1천3백만엔(약9천7백만원)으로 제작됐다. 건립 장소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한사람인 배봉기 할머니(91년 작고)가 연행됐던 오키나와 도카시키(도가부) 섬이다. 일본에 위안부 위령비가 건립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환생’을 주제로 한 위령비는 재일동포 3세가 제작했으며 5백여평 부지는 한 현지인이 무상 제공했다.
  •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작품/금주발매 뉴스피플 단독보도

    ◎중국지시 거부 독자구상… 제작 명령 지금까지 박영효가 만든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최초의 태극기는 중국이 조선의 국기를 만들 것을 요구한 내용에 반발한 고종 황제가 직접 독자적으로 구상,만들 것을 지시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자매지인 ‘뉴스피플’ 취재팀이 단독입수한 1882년 10월 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 축쇄판 기사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고종의 태극기 제작과정을 처음 보여주는 자료여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46)가 도쿄중앙도서관에서 발굴해 ‘뉴스피플’(9일자,1일부터 발매)에 공개한 이날자 시사신보는 당시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들어간 수신사 일행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게재한 잡보란에 ‘조선국기’라는 설명이 붙은 태극기와 함께 국기의 제작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지난달 28일(1882년 9월28일)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으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당시 중국측이 조선에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넣을 것을 지시했으나 고종이 이에 격분해 중국국기를 흉내내지 않을 것을 고집,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했다고 한다”라고 작성돼 있다.따라서 박영효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고종의 지시내용에 따라 일행과 숙의해 태극기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단국대 김원모 교수는 “이번 기사는 고종이 태극기 제작과정에서 중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독자성을 유지한 사실을 보여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기록으로 태극기 연구에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 권력 이미 일원화… ‘직위 승계’ 성격/김정일 총비서 추대 의미

    ◎총비서 이어 내년9월 주석승계 가능성/대내외정책·남북관계 큰 변화 없을듯 북한이 평안남도 평성에서 21일 열린 노동당 평안남도 대표회에서 김정일을 ‘당총비서’로 추대키로 결정한 것은 김정일 공식 권력승계의 구체적인 절차를 밟고 있음을 의미한다.따라서 북한은 평남에 이어 각도별로 당대회를 열어 분위기를 확산한뒤 오는 10월10일 노동당창건 52주년 기념일을 전후해 전체 당대회나 대표자회의를 열어 김정일이 총비서직을 승계토록 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당국도 최근 북한의 해외공관 등을 통해 지방당대회를 개최하려는 분위기를 전해듣고 김정일이 권력승계가 임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이 당 최고위직인 당총비서직을 승계할때 국가주석직도 함께 승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내년 9월9일 정권창립 50주년을 앞두고 평양시가지를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에 착수한 점으로 미루어 내년 정권창건일을 전후해 김정일이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또 남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연말쯤 승계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김정일이 김일성 사후 3년2개월이 넘도록 공식승계를 미루어 왔고 아직까지도 김일성의 ‘유훈통치’에 권력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직은 공석으로 남겨둘 공산도 있다. 김정일이 오는 10월 당총비서직을 공식 승계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권력 승계’라기 보다는 ‘직위 승계’의 성격에 가깝다.이미 김정일은 조선인민군총사령관직과 국방위원장직을 갖고 있고 실질적으로 당·정·군의 최고권력을 휘둘러 왔다.최근 북한 금호지구에서 만난 북한의 고위관계자도 ‘김정일비서가 언제 국가주석직을 승계하느냐’는 질문에 “지도자동지는 이미 국가의 중심이며 자리가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해 북한에서 최고권력자로서 김정일의 위치는 확고부동하다. 정부당국도 김정일이 당총비서직을 승계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북한의 대내외 정채나 기존의 남북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다만 김정일이 당면한 식량난과 함께 경제난 극복의 탈출구로 삼고 있는 대미·대일관계 개선에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경우 ‘직접대화를 기피하는 우회전략’에서 직접대화에 나서는 등 남북관계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총비서 승계절차/당대회·당대표회 소집 등 두가지 방법/당대표회 중앙위 회의통해 추대 유력 북한 노동당규약에 따르면 당총비서 선출과정은 두가지로 나뉜다.첫째는 당의 최고지도기관인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을 선출해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선출하는 것이고,둘째는 당의 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을 토의결정하는 당대표자회를 열어 중앙위원을 선출,중앙위 전원회의를 여는 방법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번 김정일의 선출과정은 두번째 방법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이미 평남에서 당대표회를 열어 추대를 발표한데다가,당대회는 개최 3개월전 공고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연내 당대회가 개최되기는 시간상 어렵기 때문이다. 통일원 이호 정보분석실장은 “평남도를 비롯해 각도별로 당대표회를 연뒤 10월10일을 전후해 중앙당대표회에서 김정일을 총비서로 공식선출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과거 김일성의 당총비서 선출은 반드시 당대회를 소집,당대회 마지막날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선출했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주석직 선출은 빠르면 연말이내 또는 정권창립 50주년이 되는 내년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된다. ◎총비서와 주석/당 인사는 총비서 권한/주석은 국가수반 위치 북한 노동당총비서는 당비서국의 총수다.당비서국은 당인사 및 당면과제 등 모든 당내문제를 토의결정하고 집행을 조직지도하는 곳으로 정치국보다 더 큰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따라서 당총비서는 노동당뿐아니라 국가전체의 최고지위다. 당총비서는 10여명의 비서와 조직지도부,선전선동부 등 22개의 전문부서를 총괄함으로써 당·정·군 간부들을 총감시한다.임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은 없고 당대회나 당대표자회 개최까지로 관례화되어 있다. 국가주석은 지난 72년 수상제를 폐기하고 도입된 제도.북한 헌법에 따르면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고 중앙인민위원회 수위로 명실공히 북한최고의 권력자다.그러나 북한은 92년 개정헌법을 통해 최고인민회의에 주석소환권,국방위원장에 무력지휘통솔권을 각각 부여함으로써 주석의 권한은 상당히 약화됐다.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 “식량·전력난에 인심 흉흉”/일 아사히 신문기자 방북기

    ◎도둑 들끓고 장례식은 야간에 치러/김일성 호화 영생탑 방문객 줄이어 식량난이 심각한 북한에서는 최근 식량을 태연하게 훔치는 등 인심도 사나워지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기자와 재일동포 방북자들의 견문을 종합해 보도하고 있다.아사히신문은 또 나진 선봉지구에서는 1평 정도의 매점이 등장하고 있다고 사진을 곁들여 전하면서 매점은 가족 경영에 한해 지난 6월부터 허가되고 있다고 전했다.다음은 기사 전문. 올 가을 김정일 비서의 권력승계가 예상되는 북한은 대일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에 합의하는 등 대외관계에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하지만 식량난에 시달리는 국내의 분위기는 어둡고 인심도 점점 황폐해지고 있는 듯하다. 평양 교외에 있는 고 김일성 주석의 유체를 안치한 금수산기념궁전에는 만3년 탈상에 맞춰 높이 90여m의 ‘영생탑’이 세워졌다.궁전을 방문한 한 재일조선인(북한 국적의 재일동포)은 터미널 주차장에 이르는 2㎞ 남짓한 도로 가운데 1.5㎞정도의 지하도부분에 들어서서 몹시 놀랐다.너비 10m 높이 6m정도의 터널은 대리석이 사용됐으며 움직이는 보도가 길게 길게 연결되는 등 대단히 호화로왔다.터널과 영생탑을 포함한 금수산 지구 정비에 2억달러 이상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됐다고 한다.방문한 사람들은 ‘충성심은 이해되지만 이 자금을 식량 구입에 돌리지 않았단 말인가’라면서 한탄했다. 북한의 농업부진은 홍수와 가뭄이라는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화학비료의 부족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전력난으로 비료공장이 마비되고 있다.발전소로서 풀 가동되고 있는 것은 자유무역지구안 선봉에 있는 중유발전소 정도다. 주민의 자위책은 주택의 빈 터에 작물을 심어 농민시장 등을 이용해 파는 것이다.나진 선봉 시내에는 농가의 부인 등 십수명이 노상에 작물을 늘어 놓고 팔고 있었다.일본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돈과 물자를 받아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영양실조에 따른 사망은 확실히 늘어나는 듯하다.지난해까지는 ‘사람이 죽어도 소리를 내 울지마라’라는 고시가 있었지만 지금은 ‘장례는 야간에,조용히 치를 것.친척도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받고 있다고 한다.
  • 조선족 어린이에 민족긍지 심기 8년/화랑청소년연 이사장 권윤홍옹

    ◎한­중 수교 5주년 남다른 감회/열악한 교육여건 보고 헌신적 지원/건물 보수·책­걸상 교체·컴퓨터 전달/‘중국 손자·손녀’ 감사편지에 큰보람 “설봉 할아버지,언제 또 오시나요.다음에 오시면 제가 아리랑을 불러드릴께요” 경남 마산의 교육봉사단체인 화랑청소년연합회 이사장 권윤홍씨(76)는 중국의 ‘손자·손녀’들로부터 날아오는 감사의 편지를 읽으면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설봉은 권씨의 호. 중국 조선족의 교육현장을 뛰어다닌지 만8년.‘어머니의 땅’을 그들이 느끼도록 하는데 작은 보탬이 됐다고 믿기에 한·중 수교 5주년을 맞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중국 길림·흑룡강·요녕성 등 ‘동북 3성’에 연간 7∼8차례씩 선물꾸러미를 안고 가 어린이들을 찾아다녔다.그 거리만도 지구 둘레의 3분의 2인 2만5천㎞에 이른다. 그의 교육사업은 올해로 23년째.와당문에 정통한 동양화가로 중·고교에서 미술과 윤리를 가르치다 75년 화랑청소년연합회를 설립,중·고생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사회사업을시작했다. 권씨가 중국내 조선족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68살인 89년부터였다. 권씨 본인이 어릴 적에 연변에서 살은데다 사학자였던 선친의 영향으로 중국 고전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그해 가을 흑룡강성 기풍소학교의 한 교사가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 왔다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 그를 병원에 데려가 정성껏 치료해준 인연으로 그해 말 권씨는 기풍소학교를 방문했다.하지만 열악한 교육현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낡은 교실,턱없이 부족한 책·걸상을 보고 배움에 대한 동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재를 턴 권씨의 도움으로 기풍소학교는 번듯한 새 건물을 가질수 있게 됐다.또 하얼빈의 조선족 제2중학에는 32대의 컴퓨터와 수백개의 책·걸상이 놓여졌고 흑룡강성 조선어 방송국을 통해 매년 어린이 작문대회가 열렸다. 동북 3성의 대부분 조선인 학교에는 민족의 뿌리와 긍지를 찾을수 있도록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급했다. 이렇게 해서 혜택을 받은 학생이 1만여명.하지만 한때 박물관을 차릴 정도였던 그의 그림·서예작품·골동품 등은 자금을 마련하느라 이제 바닥이 나 버렸다.지금은 그림을 그려 팔거나 각종 강연을 통해 비용을 충당한다. 그는 “중국의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한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줘 훌륭한 인재로 자랄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국 속에 한국을 심는 주춧돌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 “위안소 경영 일인 유죄 판결”/1937년 일 대법판례 발견

    ◎“위안부 연행은 국외유괴” 【도쿄 연합】 일본군 위안부로 고용시킬 목적으로 일본인 여성을 해외로 데려간 일본인 위안소 경영자들이 당시 형법의 ‘국외이송,국외유괴죄’ 위반으로 1937년 일본 대심원(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고 도쿄의 조선신보가 21일 보도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최근 오사카 부립 도서관의 ‘대심원 형사판례집’에서 확인한 것으로 ‘위안부’연행은 일본 국내법상으로도 범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외이송유괴 피고사건’으로 취급된 이 판례에 따르면 중국상해에서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하고 있던 일본인 업자들은 1932년 상해사변으로 늘어난 해군군인을 위해 ‘해군지정 위안소’의 명칭하에 영업 확장을 계획했다. 이들은 이를 위해 매춘을 숨기고 여급 등으로 고용하도록 속여 여성들을 이송할 것을 모의,나가사키에서 15명의 일본여성을 상해로 보냈으나 국외이송,유괴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위안부로 연행된 여성들의 경우 대부분 감언이설에 속아끌려간 것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이 판례에 따르면 이같은 행위도 ‘국외이송죄’에 해당하는 범죄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 ‘일제 강제징용’ 일인들이 진실추적

    ◎일 시민단체,기슈광산의 ‘은폐 캐내기’ 광복절 앞두고 내한활동/근로자 875명 한푼 안주고 노역강요/생존자 7명 만나 눈물의 증언 채록/‘왜곡된 역사 바로잡는 계기됐으면’ 일본의 한 시민연구단체가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확인하는 추적작업을 벌여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결성된 ‘미에현(삼중현) 기슈(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그 단체.모임을 이끄는 일본인 사학자 사토 쇼진씨(좌등정인·50)와 교포2세 역사학자 김정미씨(48·여)는 최근 광복절을 앞둔 시점에 때맞춰 내한,강원도 평창군 구석구석을 뒤져 최동규(78)·추교화(76)씨 등 7명의 생존징용자들을 만나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록했다. 당시 소유주였던 이시하라(석원)산업이 패전후 미군정청에 보고한 문서에 근거하면 문제의 기슈광산은 2차대전 종전 직전까지 모두 875명의 조선인들이 일했던 곳.이시하라산업은 보고서에서 강제징용 사실을 완강히 부인한채 조선인 근로자들에게 퇴직금과 연금을 정당하게 지불하는 등 “할만큼 했다”고 강변했다.그러나 이 모임은 일부 생존자들의 증언과 보상문제와 관련한 일본내 재판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따라 지금까지 징용됐던 어느 누구도 퇴직금은 커녕 일체의 보상을 받지못한 상태로 확신하고 있다.이들이 기슈광산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26년 이곳에서 일본주민들에 의해 조선인 근로자 2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때로부터.이유는 단지 “식민지인들이 건방지게 군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현지답사와 당시 조선인 근로자의 징용을 담당했던 생존자(나고야 거주) 인터뷰 등으로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곧바로 생존징용자 찾기에 나섰다.그러나 당사자들 대부분이 징용당한 사실조차 확인해 주기를 꺼려 작업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지난해 10월부터 4차례에 걸쳐 강원도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지금까지 인제군에서 4명,평창군에서 7명 등 모두 11명만 만날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토씨는 “얼마 남지않은 생존징용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사실을 밝혀야 한다”면서 “묻혀버린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한·일 양국 국민들이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조사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조사활동은 1차로 오는 10월중 도쿄에 본부를 둔 아시아문제연구소의 학술지 등에 발표한뒤 계속된 조사로 드러나는 사실은 각종 문헌과 사진·증언 등으로 구성,자료집을발행할 예정이다. 아시아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열린 국제역사교과서학술회의에서 독도가 명백한 한국땅임을 주장하기도 했던 사토씨는 “우리 모임은 역사적 진실을 아는 일본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조사를 벌이는 것”이라면서 “독도문제나 정신대문제·징용자문제 등은 결국 일본이 천황제라는 잘못된 제도를 신봉하기 때문이며 천황제의 굴레를 벗지 않고서는 일본인들이 침략책임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모임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 현대사연구소와 긴밀한 협조아래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현재 일본의 학자와 시민·공무원 등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 조선인학교 일 차별 유엔제소/재일 조선인인권협 대표

    재일 조선인인권협회의 대표자들이 조선인학교(조총련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을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의 ‘차별방지 및 소수자보호위원회’에 제소하고 있다고 인권협회가 12일 밝혔다. 조선인 학교는 일본 학교와 달리 교사 신·개축시 건축기부금에 대해 세 공제가 인정되지 않을뿐 아니라 국립대학 입학자격 등이 부여되지 않아 문제가 돼 왔다. 재일 조선인인권협회의 윤동환 사무국장은 “똑같은 각종학교인 아메리칸 스쿨 등에 대한 기부에 대해서도 세 공제가 인정된다”면서 “이는 명백한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 “패망전 일인 위안부업자 국외유괴죄로 유죄판결”

    ◎위안부 존재 증명 30년대 판례 발견 일본이 패망하기 전 종군위안부로 삼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여성을 속여서 중국 상해로 데려간 일본인 위안부 업자가 국외이송 목적의 유괴를 금지한 일본 구형법 226조 ‘국외 이송,국외유괴죄’로 1937년 일본 대심원(대법원에 해당)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6일 보도했다. 이 판결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학자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 오사카 부립도서관의 ‘대심원형사판례집’에서 확인한 것이다. 일본의 구형법은 일본이 강제로 합병한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있었으며 이 판결은 당시 여성들을 속여서 일본군 주둔지로 데려가 위안부로 삼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조선인 징용희생자 73명 확인/일 도치기현 조사단

    ◎광산·군수공장서 강제노역/1살미만 유아 22명 포함 【도쿄 연합】 태평양전쟁중 일본 도치기현의 광산이나 군수공장 등에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도치기현 조선인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은 5일 현내 아시오(족미)광산에서 사망한 조선인수가 모두 73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이들 사망자의 성명과 생년월일·본적지·사망원인 등이 적힌 명부를 작성,발표했는데 사인은 주로 폐렴이나 장티푸스,낙반사고에 의한 압사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들 73명의 사망자 가운데는 1살 미만의 유아도 22명이나 포함돼 있다.
  • 북 정전협정 위반 1년에 1만건꼴/협정체결 44돌 현주소

    ◎준수사항 전체 63개항중 7개항 불과/협정 사문화 겨냥 94년 군정위서 철수 27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44주년이 된다.그러나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려는 북한의 책동으로 이 협정은 전쟁재발 방지라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25일 국방부에 따르면 53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지난해 말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42만9천673건으로 매년 1만건 가까이 위반한 것으로 집계됐다.지상 42만9천466건,해상 105건,공중 102건이다. 북한의 협정위반 행위는 군사분계선 침범에 따른 총격전·무장간첩 침투 등 도발행위(165건)외에 ▲비무장지대의 4㎞ 거리유지 의무위반 ▲비무장지대의 중무장지대화 ▲비무장지대 유지·관리의무 위반 등 이루헤아릴 수 없다.지금까지 북한이 준수한 정전협정 항목은 전체 63개 항 27개목 가운데 7개항 1개목에 불과하다. 북한은 그나마 91년3월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 수석대표로 임명된 것을 트집삼아 군사정전위 회의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94년4월에는 군정위 북한측 대표를 아예 철수시켰다.대신 94년 5월 조선인민군판문점대표부를 설치했다.따라서 정전협정을 위반하더라도 항의할 공식적인 통로마저 없어진 셈이다. 한국을 배제한 채 북·미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전단계로 ‘정전협정의 사문화’를 겨냥한 계산된 술책이라는게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민족통일연구원 제성호 박사는 “남북한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91년 말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기존 협정을 유지·준수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주제가 있는 답사기’출간 바람

    ◎일본을 걷는다­일이 뺏어간 우리문화재/나의 문화유산3­4개 문화권에 서린 미학/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쓰여지지 않는 문화’ 조명 ‘주제’가 있는 답사기가 여름 독서계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최근 출간된 중국 선불교 답사기 ‘밥그릇이나 씻어라’‘한국의 묘지기행’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세권의 역사·문화답사기가 새로 나왔다.‘일본을 걷는다’(한양출판)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창작과비평사),‘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일본을 걷는다’는 건축학자인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의 도도부현을 직접 돌아다니며 쓴 역사체험기다.모두 3부로 1부는 일본이 탈취해간 우리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였던 자선당을 비롯,평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애련당,지금도 남아있는 관월당,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 총독이 탈취해간 박물관을 만들 정도로 많은 문화재들,조선을 사랑한 인사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수집해간 문화재로 가득한 일본 민예관 등을 소개한다.2·3부에서는 조선침략의 자취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현장들과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한이 서린 장소들을 찾아간다.게이오 의숙,도쿄대학,오이소(대기)의 통감도,백제인이 지은 오사카의 진자(신사),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기사 게오르그 데 라란데,일본의 기차역들,히비야(일비곡)공원,미츠비시 재벌의 상징 마루노 우치 빌딩,일본 국회의사당 등 일제침략의 현장을 낱낱이 살핀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는 서산 마애삼존불로부터 출발해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부여에서 끝난다.지난 93년 발간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1백만부이상 팔려나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강조했던 지은이는 2권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줬다.이번의 3권에서는 우리 문화유산의 미학을 이야기한다.이 책은 답사장소를 네개의 문화권으로 나눠 접근한다.부여 공주 익산 서울 등지에 남아있는 백제 문화유산의 미학,경주 불국사가 보여주는 통일신라의 ‘조화적 이상미’,안동문화권에 서려있는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미학,그리고 섬진강·지리산변의 옛 절집들에 녹아있는 산사의 미학 등을 다룬다.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은 그의 또다른 저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와 맥을 같이 하는 인문기행서.‘어디를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의 답사기를 지양했다는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려청자처럼 보란듯이 번듯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쓰여지지 않은 문화’‘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다.외면도의 당숲에서부터 수원 화성에 이르기까지의 여로가 담겼다.
  • 조총련 탈퇴 재일교포 상공인 51명/북한 비판모임 결성

    조총련(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산하 상공단체의 전 간부들이 최근 북한정부를 비판하는 단체인 ‘북한의 민주화와 재일의 내일을 생각하는 모임,민주 무궁화’를 결성했다고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13일 보도했다. ‘민주 무궁화’는 지난 7일 조총련 탈퇴자를 중심으로 한 51명으로 결성됐는데 조총련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온 상공관계자들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모임의 대표간사에는 조총련 효고현 니시고베상공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김정일씨(56)가 취임했다.
  • 범민련 간부 2명 구속/북 성금 불법송금 혐의

    서울지검 공안2부(신건수 부장검사)는 1일 북한동포 돕기성금을 모아 반국가단체인 조총련에 송금해 국가보안법 위반(편의제공) 혐의로 구속영장이 미리 발부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권한대행 이종인씨(74)와 상임부의장 이천재씨(66) 등 2명을 붙잡아 구속했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모금한 돈 2천7백여만원 가운데 1만5천달러(1천3백여만원)를 조총련 산하 재일조선인 평화통일협의회에 전달한 경위 등을 캐물었다.
  • 일본인의 의심증/강석진 도쿄 특파원(오늘의 눈)

    일본 고베시에서 5월24일 초등학교 6년생이 실종된 뒤 토막살인된 사건이 일본사회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주고 있다.날로 범죄가 흉포화되고 있는 우리로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들이 많으리라.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또 하나 지적할 일이 있다는 것도 착잡한 일이다. 사건 발생후 2주쯤 지난 6월7일 민방인 TBS는 시사프로그램인 ‘더 브로드캐스터(The Broadcaster)」에서 느닷없이 범인이 한국인임을 시사하는 내용을 방영,물의를 빚었다.범인이 범행 후 고베신문사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국적이 없으며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부분을 들어 한 출연자는 “범인은 일본에서 차별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면서 재일동포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또 다른 참가자도 이를 받아 “일본인 전체에 대한 행위로 느껴진다』면서 『일본의 확실치 못한 전후처리” 운운하는 발언으로 동의의 뜻을 표명하는 등 범인을 일방적으로 재일동포로 몰아갔다. 다른 민방과 잡지에서는 편지에 쓰인 한자가 중국에서 쓰는 한자와 비슷하다면서 중국계가 아닐까 의심하는 내용을 내보내 재일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고통과 자괴감,분노를 안겨 주었다. 범인의 이름은 아직 공표되지 않고 있다.그가 어느 나라 국적이든 이번 사건은 좁게는 일본 교육현장,나아가 일본 사회에서 씨가 뿌려지고 싹이 트고 악의 열매가 열린 일이 아닌가.범인 검거 후 일본 매스컴에서 외국인임을 시사해온데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내용의 기사를 보이지 않는다.범인 검거후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사건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자녀들이 받을 충격 때문이다.재일외국인들은 사건의 경과와 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녀들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멀리는 관동대지진 당시 죄없는 조선인을 살륙하고 가까이는 고베지진 때 재일동포를 절도범으로 의심하거나 옴진리교 사건 때에는 이리저리 한국과 관련지어 보려고 당치도 않은 시도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달 중순 오키나와를 방문했을때 한 오키나와인은 『야마토인(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털이 적다고 차별하면서 우리는 털이많다고 차별했다』고 말해 쓰게 웃은 적이 있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걸핏하면 외국인을 의심하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의 버릇이 여전함을 확인한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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