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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 我 朝鮮

    최근 재일조선인총연합회(朝總聯) 기관지 조선신보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기술한 일본 어린이용 도서‘我朝鮮’(우리의 조선)을 공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은 조총련계 역사연구가 남영창씨가 일제시대에 약탈된 조선 문화재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것이다. 책의 제목 ‘我朝鮮’에서 ‘我’는 일본을 가리킨 것이다. 한·일합방 다음해인 1911년 일본이 발행한 이 책의 내용은 조선합방의 전말 및 합방 이후의 이왕가(李王家) 처리문제를 비롯해서 조선의 지리,역사 등 총 90쪽 분량이다. 또 일본의 조선합방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천년 전부터 정해진 것이라면서 ‘기자(箕子)건국설’을 제시하며 조선의 5,000년 역사도 3,000년으로 깎아내렸다. 특히 조선에 대한 멸시의식을 유포하는 가운데 “조선은 일본천황의 정치아래 들어서야 처음으로 조선인의 행복이 이루어진다”는터무니 없는 강변으로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 침략자의 그릇된 우월감을 일본 소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으며 조선민족에 대한 철저한 모멸감을 고취시키는 패권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식민정책의 치밀함과 교활함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안고 있다. 100여년 전 일본이 펴낸 ‘我朝鮮’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위해 온갖 흉계를 꾸미고 있을 때 우리 선조들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사색당파 싸움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운명을 좌초시킨 결과를 초래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세기 초 세계적인 변혁의 거센 조류가 동아시아로 이동해올 때 일본은 과감하게 개혁과 개방을 수용,근대화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를 포함하는 대동아공영권의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로 부상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이 수구적인 폐쇄성을 탈피하고 좀더 진취적인 개방을 선택했더라면 일제의 강점과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는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일본의 ‘我朝鮮’ 공개를 계기로 우리가 다져야할 교훈은 진정한 의미의 극일(克日)의식을 갖추는 일이다. 한·일관계가 호혜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500여명의 일본인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새로운 각오가 절실히 요청된다.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거주지번을 독도로 옮겨놓는 현실상황에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극일이 요원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장청수 논설위원
  • 유영식감독 데뷔작 ‘아나키스트’중국 상하이 올 로케

    곧게 뻗은 남경대로,황포(黃浦)강가의 유럽식 건물,‘동양의 베니스’로 불리는 소주(蘇州)의 수로마을….영화‘아나키스트’를 촬영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 처둔(車墩)세트장에는 1920년대 상하이의 모습이 그대로재현돼 있다. 사방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이 이국적인 오픈 세트장이야말로피끓는 열혈남아들의 액션과 사랑을 다루는 ‘아나키스트’를 찍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유영식 감독(33)의 장편 데뷔작‘아나키스트’는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던 1920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의열단의 항일 테러활동에 가담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활약상을 담은 액션느와르.첫 한·중 합작 영화로 상하이 필름스튜디오는 8억원을 받고 세트와 소품,의상,엑스트라등 촬영에 필요한 모든것을 지원했다.‘중국 중앙정부의 공식경로를 통해 촬영허가를 받아내기는이번이 처음’이라는게 제작사인 씨네월드측의 설명.100% 중국 현지에서 촬영될 ‘아나키스트’의 제작진은 내년 5월 개봉을 목표로 영화찍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쵤영 일주일째가 되는 29일 밤.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처둔 세트장은 100여명의 한·중 스텝과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했다.허무주의 지식청년 세르게이(장동건)가 일본 경찰 사무소를 폭파하는 것이 이날 촬영의 주요 내용.창백한 갓등이 을씨년스럽게 거리를 내리비추는 일본인 거주지역,감독의 “액션”소리에 멀리 인력거 뒤로 한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온다.이내멈춰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그 순간 일본 경찰사무소는 풍비박산돼 화염에휩싸인다.감독은 이 폭파장면을 실감나게 찍기위해 두 대의 카메라로 정상촬영과 고속촬영을 동시에 진행했다. 아나키스트는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에서만 전체의 60% 가량을 촬영할 예정. 유영식 감독은‘격동기 역사에 묻힌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발굴하는 자세로 제작에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상하이 김종면기자 jmkim@ * ‘아나키스트’ 주연 장동건 깎은 밤 같이 반듯한 얼굴에 크고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조각미남’ 장동건(28).그는 이제 미남배우나 청춘스타가 아니라 ‘연기할 줄 아는’ 배우로 불리길 원한다.올초개봉된 ‘연풍연가’와 최근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등을 통해 연기폭을 넓혀온 그가 ‘아나키스트’에서는 허무주의 인텔리청년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제가 맡은 세르게이는 테러단체의 리더에서 일제의 고문 후유증 때문에아편쟁이로 파멸하는 비운의 인물입니다.낙차 큰 주인공의 캐릭터를 어떻게입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아나키스트’의 촬영에 임하는 그의 눈빛에는 연기다운 연기를 해보겠다는 열의가 가득 담겨 있다. “‘아나키스트’는 치열한 대의명분을 추구하되 달콤한 낭만을 잃지 않는‘감성적인’ 영화입니다.뜨거운 가슴 하나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사라진 아름다운 남자가 제가 해낼 역활이죠”.장동건의 이름 앞에 진정한 ‘연기자’란 이름이 붙게 될지,말쑥한 외모로만 기억되는 ‘거품배우’에 그칠지 ‘아나키스트’는 그 관건이 되는 작품이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동양의 할리우드 1905년 최초의 자국 영화인 ‘유원경몽(游園驚夢)’에서부터 중국 영화는늘 그 위대한 자취를 상하이에 남겨왔다.1920년대 상하이는 이미‘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리며 아시아영화의 중심지로 군림했다.오늘의 홍콩·상하이·베이징·타이완 영화들은 모두 그 뿌리를 상하이 영화에 두고 있다.유구한역사를 지닌 영화의 도시 상하이.이곳의 명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하이필름 스튜디오’(SFS)다.상하이 국제 공항에서 이곳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베이징·창춘(長春)과 함께 중국의 3대 스튜디오로 꼽히는 중국 영화의 산실.지난 49년 건립된 이래 수많은 걸작 영화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장이모 감독의 ‘상하이 트라이어드’,첸 카이거 감독의‘패왕별희’‘풍월’등이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에서 찍은 대표적인 작품이다.스필버그 감독의 ‘태양의 제국’‘상하이 1920’을 비롯한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레드 바이올린’등 유럽합작 영화들도 이곳 신세를 졌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특히 첨단장비를 이용한 디지털 특수효과와 15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유일의 영화 스턴트팀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스튜디오 2층 벽에는 중국 배우 차이추성(蔡楚生)·완링위(阮玲玉),‘상하이의 조선인 영화황제’김염 등 당대 명배우들의 사진이 나란히 결려있어 중국영화사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중국에는 각 성(省)마다 대형 스튜디오가 있다.등소평시대 이전에는 전액정부의 투자로 운영됐다.그러나 등소평의 개방화 정책 이후 각 스튜디오는정부의 독립채산제 운영지침에 따라 해외합작 등을 통해 재원을 보충해오고있다.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해외합작을 추진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현재 상하이 외곽지역에 60만평 규모의 초대형 오픈 세트를 건설중이다.이 프로젝트는 지난 93년부터 진행돼 온 것으로 50%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오픈 세트내에는 영화‘아나키스트’의 무대인 1920년대 상하이의 중심가 남경대로를 비롯해 홍등가·아파트·백화점 등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세트는 중국 5대 감독 첸 카이거가 직접 설계한 것이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상하이 김종면기자
  • [김삼웅 칼럼] 정례 여야 총재회담을

    왕대비의 3년상(喪)이냐 1년상이냐,제상 과일 순서가 청동백서(靑東白西)냐 그 반대냐 따위로 피투성이 싸움을 벌인 조선왕조의 정쟁을 두고 일본 관학자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인 혈맥에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당쟁이 여러 대(代)에 걸쳐 계속되고 결코 고칠 수 없다는 ‘체질론’을 폈다. ‘당쟁’이란 용어도 대한제국의 학정참여관을 지낸 시데하라(幣原坦)가 1907년에 처음으로 이 용어를 쓰면서 조선시대를 당쟁사로 규정했다. 이들의 주장대로 우리(민족)는 체질적으로 정쟁이 심한,고칠 수 없는 고질인가.어느 나라든 정쟁은 있기 마련이다.우리보다 심한 나라도 있고 덜한 나라도 있다.그런데도 일인들이 유독 한국인을 당쟁이 심한 민족으로 폄하하면서 체질론을 편 것은 열등민족으로 만들어 저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음모가 깃들였다. 이같은 사력(史歷)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정치판을 보면 정쟁이 심해도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국민은 정치불신이 정치혐오감으로 번지는데 여의도에서는 뜻 있는 소수의 작은 ‘자성(自省)’의 목소리뿐이다.우리정치는 정책대결이나 새 밀레니엄 준비,국민통합 등 본연의 아젠다는 증발한 지 오래이고 폭로와 독설과 변칙과 파행으로 세월을 보낸다.사사건건 대결이고 원색적인 욕설 아니면 상대방 뒤통수 치기다. 지금 국회에는 민생과 직결된 법안,시급한 세법개정안,개혁입법 등 584건이낮잠을 자고 있다. 금융소득종합과세의 2001년 시행을 내용으로 하는 소득세법개정안,비위공무원의 관련업체 취업금지를 위한 부패방지 기본법,불고지죄 등을 삭제하는 국가보안법개정안,방송법,통신비밀보호법 등 시급히 고치거나 제정해야 할 법안들이 산적해 있다.사고가 터지고 문제가 일어나면 법률과 제도를 고쳐서라도 시정하고 개선토록 하는 것이 국회의 본분이다.그런데 이런 노력은 하지않고 정치투쟁으로만 소일하니 나라꼴은 엉망이 되고 국회는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국정이 표류하고 국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정치가 혐오받는 데는 일차적으로 거짓과 폭로와 폭언으로 국회의원의 품위와 기능을 망가뜨린 ‘망둥이’들에게 책임이따르지만 결과적으로는 3당 총재에게 귀책된다.순자(荀子)의 치사(治事)편에 “나라의 치평(治平)은 군자가 낳고 나라의 혼란은 소인이 낳는다”고 했다.비록 소인들이 혼란을 만들었지만 ‘군자’들이 이를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3당 총재는 한 달에 한번 또는 두 달에 한번씩이라도 정례 총재회담을 열어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정치의 패턴을 바꿨으면 한다.여당 총재는 대통령이니까 국정의 1차적 책임이 있고,공동여당 대표도 ‘집권당’의 위치에서 책임이 크지만 야당총재도 ‘원내 제1당’의 책임이 적다고 하기 어렵다.우리는 정당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원내정당의 책임은 국정에서 면탈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3당 총재는 권위와 당파심과 이해득실을 넘어서 정례 총재회담을 갖고 국사를 사심없이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대통령은 포용력있는 지도자로서 국정의 파트너인 야당 총재에게 필요한 정보와 현안을 알리고 야당 총재는 미래를 내다보는안목으로 국정에 협력과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흔히 오늘의 ‘정치부재’의 원인은 여당의 경우 “위만 바라보는 ‘비서정치’적 사고, 1인 중심의 의사결정구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과 야당의 경우 “집권경험이 있는 정당다운 신중함과 국가이익을 생각하는 긴 안목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한국일보,신효섭 기자) 이제 3당 총재가 정치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11월 한달 동안 평균 23%나오른 국제원유값은 올해안에 배럴당 30달러를 넘어설지 모른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2년에 급한 불은 어느정도 껐지만 위기는 도처에 남아있다.빈부격차,실업자,절대빈곤인구,지역갈등,각종 사회병리가 심각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이 아집과 독선과 파당심리에서 정치개혁과국정협력을 외면한다면 국민의 심판은 매서울 것이다.3당 총재 회담을 정례화하여 얽힌 실타래를 풀고 밝고 희망찬 정치로 21세기를 맞기를 촉구한다. ‘당쟁’이 심한 민족이라는 멸시도 떨쳐버리고. [주필 kimsu@]
  • 인터넷TV 서비스, 내년3월 본격개시

    TV로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인터넷TV’서비스가 내년 3월 본격 개시된다. 삼성전자는 조선인터넷 TV㈜ 등 6개업체로 된 인터넷TV 서비스 컨소시엄과29일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전략적 제휴 조인식을 가졌다.인터넷TV는 TV에 셋톱박스를 내장,TV화면을 통해 인터넷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첨단기기로,고속 인터넷이 가능한 모뎀과 LAN(근거리 통신망) 기능지원이 가능한 쌍방향멀티미디어다. 인터넷 TV서비스는 기존 인터넷과 전자우편은 물론,주식거래 원격진료 노래방 인터넷화상 전화 등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는 일체형 인터넷TV가 동급의일반TV보다 40∼50% 이상의 원가 상승요인이 있지만 소비자 부담을 줄이고인터넷TV 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10% 정도만 제품 가격에 반영키로 했다. [김환용기자]
  • [의열 독립투쟁] (13)곽재기 의사

    곽재기(郭在驥·1893∼1952)의사는 1920년대 항일 독립투쟁사의 전설적 존재인 의열단(義烈團)의 초대 부단장으로서 창단 직후 추진된‘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행을 국내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겪었다.흔히‘밀양폭탄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거사 계획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을 만큼 대담무쌍했으며,일제의‘문화정치’틀속에 안주하려던 각계 유지층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893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곽 의사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청남학교(淸南學校) 교사로 다년간 봉직했다.곽 의사의 항일운동 이력은 1909년에 창립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3.1의거가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곽 의사는 1919년 7월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壽鉉)을 남겨둔 채 중국 동북지방 지린(吉林)으로 망명했다.서너달 후 곽 의사는 투탄·암살 등 의열투쟁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의 지린 지부장으로 등장한다. 이 해 10월 중순곽 의사는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의열단장) 등과 알게 되었는데 그 무렵 이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조직하고자 동지를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다.소수 정예의 결사적‘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타격하며 독립운동의 전투적 기운을 드높이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곽 의사는 곧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약했다.이들은 11월9일 밤 지린성 밖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창단 회합을 갖고 10개조의 공약을 정했다.단장에는 김원봉,부단장에는 곽 의사가 추대됐다.서상락(徐相洛)·배중세(裵重世)와 함께 27세의 최연장자라는 점 이외에 교사 경력과 그동안의 항일 경력,그리고 식견과 지도력이 두루 참작된 결정이었다. 의열 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표적은 총독부 일본인 고관과 친일 반역자,그리고 식민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이 계획은 테러리즘의 소치가 아니라 민족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행해질 기습 특공작전이요,그 원초적 범례가될 것이었다. 단원들은 지체없이 국내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 폭파와 사이토(齋藤)를 비롯한 총독부 수뇌·요인들을 저격,포살키로 목표를 정했다.김원봉은 중국에서의 제반 준비와지원을 책임지고 국내 현지에서의 거사 추진 및 실행은 곽 의사가 전담,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창단 직후부터 추진한 무기 구입 노력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성과를 보았다.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탄피 3개와 폭약을 이용하여화약 투입식,도화선 점화식,투척 즉발식 폭탄 1개씩을 각각 제조했다.4월 하순 김원봉과 이성우가 폭탄 13개(점화식 7개,투척식 6개),제조용 폭약과 탄피,권총 두 자루,탄환 100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4월 초와 5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식으로 수행되었다.1차분 폭탄 3개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의이름을 빌려 안뚱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친 후 곽 의사가 따렌(大連)을 거쳐 안뚱으로 가 소포를 찾아그 곳의 상주연락원 이병철(李炳喆)에게 넘겨주었다.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경남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친 후 기차편으로 밀양으로 가서 화물을 찾아 폭탄만 따로 빼내 청년회장 김환(金煥)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2차분 무기 묶음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성우가 의류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뚱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이병철은 지난번처럼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로 위장해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해서 비밀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 강산진(姜祥振)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무기 반입이 완료되자 지도부는 인원 배치와 임무 분담,자금 조달 등의 후속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4월 중순 국내로 잠입한 곽 의사는 밀양으로 내려가 1차분 폭탄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먼저 귀국한 단원들을 만나 임무를 부여하고 격려하였다.그리고는 상하이로 돌아가 김원봉에게 제반 준비작업의 진척도를 보고한뒤 이성우와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지휘소를 두고 단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가며 거사날짜만을 기다렸다.거사는원래 6월 초 이내에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밀양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가택수색 끝에 적발,압수되어버린 것이다.이 때문에 경성부 관내에는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지고 엄중한감시망이 가동되었다.게다가 이수택은 거사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반입무기의 서울 이송을 누차 미루었다.자금마련을 위해 곽 의사가 대구와 청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그래서 거사날짜는 7월8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잠행하며 대기중이던 단원 5명이 6월20일경 조선인경부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말았다.곽 의사는 무기 보관 상태 점검차 부산에 잠시 내려갔다가 김기득과 함께 부산서 체포되었다.다른 단원들과협력자들도 속속 검거되고 창원에 은닉해뒀던 무기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6월2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곽 의사는 상고를 포기한 채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복역 중 1927년 1월 특사조치로 1년10개월 감형돼 이 해 1월22일 만기출옥했다.출옥 후 3년 뒤 곽 의사는 다시 만주·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재투신한 것으로 전해진다.광복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곽 의사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이끄는 등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에 타계했다.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곽재기 의사 후손들 근황 곽재기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에 속한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묘소가 마련된 것 외에는 기념사업회는 물론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워진 것이 없다.‘못 배우고 못 사는’ 후손 덕분(?)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하나 제대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후손들 역시 곽 의사의 이름 석 자를 겨우기억하고 있을 뿐 곽 의사가 해방 후에 타계한 탓으로 연금 한 푼 주어지는것이 없다. 곽 의사의 부인 윤씨는 곽 의사보다 먼저 작고했다.두 아들 가운데 장남 대현(大鉉)씨는 일제때 작고했으며,차남 수현(壽鉉)씨는 80년대 중반 작고했다.장손 기수(琦洙·65)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일제때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일제가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못 치르게 해 입학이 늦어졌다.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기수씨는 62년부터 10여년 동안 교통부에서 역무원으로 종사한 바 있는데 지난 95년 부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떠 현재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슬하에 2남2녀.최근 해방 후 작고한 독립운동가들의 손자들이 자신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조상들의 건국훈장을 반납,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기수씨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조상을 팔아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단지조부님께서 해방 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황야의 女戰士들

    지난주 서울에 있는 정신대연구소에서 부쳐온 책 한 권을 받았다.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3’이 나온 것이다.당시 눈코 뜰 새 없이바빠 대양을 넘는 비행기 속에서 완독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가 우선 흥분한 것은 증언이 기록을 이겼다는 점이다.당사자의 반세기후 증언이 50여년 전 제3자의 ‘증언’을 이겼다는 점이다.1984년 필자는 동남아에서 미군 포로가 된 한인 군속과 사병의 심문기록을 채취하는 데 열을올리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두 쌍의 자매를 포함한 5명의 한인 군위안부의포로 심문문서를 발견했는데 이 문건은 그후 널리 유포되었다. 문건에서는 5명이 너무 가난해 자신의 몸을 팔아 대만에 가 일본군을 상대로 일을 하다가 귀국했고 다시 필리핀으로 차출되어 후퇴하는 일본군을 따라 산 속을 방황하다 미군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대만에 간 적이 없으며 자매 모두 간호보조원으로 취직되는 것으로 속아 필리핀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처음 군위안부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정신대연구소 연구원들이 천신만고 끝에 5명 중의 유일한 생존자를 찾은 이야기도 눈물겨운 노력의 연속이었다.활자화된 문건은 믿을 수 있지만 위안부의 증언은 날조라는 것이 일본 극우논자들의 일반적인 논리였다.공평한 국제법정에서 한번 붙어보면 좋겠다. 증언의 채취라는 것은 공평하고도 섬세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모름지기 이들 5명을 심문한 일본계 미군 병사는 선입감이나 편견을 가지고 그들의 ‘증언’을 채취한 게 틀림없다.만약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생존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끝내 미군의 문건이 ‘진상’으로 둔갑하고 있을 것이다.역사 서술이란 두려운 것이다.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자매가 같이 매춘업자에게몸을 팔고,그 어머니가 부산 부두까지 환송하러 나갈 수가 없지 않은가. 필자가 또 흥분한 것은 진주에서 근로정신대로 동원돼 일본 군수공장에 배치된 30명이 모두 인도네시아의 군위안소에 보내졌다는 증언이다.이것은 생생하고 민간에 펴져 있던 확신과 일치한다.또 우리 한인연구자들이 꾸준히주장한 것이기도 하다.여기에 일본 우익이 어떻게반박하는지 보고 싶다. 셋째로 흥분한 것은 한 증언이 근로 동원이 할당되었고 부잣집을 대신해 빈한한 가정의 자녀들이 할당인원으로 채워져 공장에 동원되었고 다시 군위안부로 차출됐다고 규명돼 있는 점이다. 참으로 엄청난 일을 정신대연구소 연구원들이 해냈다.돈도 없고 사명감 하나로 악전고투하는 여성들이 여기에 있다.일반연구자들이 상아탑에 매몰돼추상적 학문에 정성을 들이는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이렇게 묵묵히 큰일을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이들 정신대연구소의 연구원들과 봉사자들은 군위안부 진상 추구의 일환으로 옛 일본군 안의 한인 군속과 사병들의 증언 채취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돼 있는 홍종태씨의 증언도,담담한 서술도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10년 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기의 한인들의 증언 채취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해왔는데 이것을 큰 기관도 아닌 작은 연구소의 봉사자들이 묵묵히 해내고 있는 데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극우파들은 군위안부 조성과정에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논리 하나에만 집중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다.사실상 관헌들이 트럭에 여성들과 노동자들을 마구 잡아 채우고 위안소나 노예노동에 보냈다는 이야기는 중국에서는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드문 현상이기는 했다.그렇지만 강제연행은 분명히 있었고 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필자의 주장에 의심이 가는 분은 이 책을 사보시라.단돈 1만2,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1만2,000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돈이겠지만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계층에는 설렁탕 한 그릇 값이다.힘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연구소의 특별후원회원 회비는 1년에 10만원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필자도 머리 숙여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줄 것을 호소한다.미국 서부영화 ‘황야의 7인’에 나오는 정의한(正義漢)들은 멕시코의 한 마을주민들을 산적떼로부터 방어하는 데 심신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필자의 인상으론 이들이 바로‘황야의 정의한’들이다!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재미사학자]
  • 효봉스님은 판사 아니었다

    ‘일제 초기 최초의 조선인 판사로 알려진 효봉(曉峰·1888∼1966) 스님은판사가 아니었다’ 경기도 이천 지족암에 한거하고 있는 혜봉(慧峰) 스님은 최근 발간한 ‘종정열전’(가람기획)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효봉 스님의 판사이력을 부정,주목을 끈다. 효봉 스님은 한국인 최초의 판사로 임용돼 평양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 재직하다가 사직서도 쓰지않고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연보와 그에 관한 기록엔 빠짐없이 판사이력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혜봉 스님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직원록’ 등 관련문헌을 훑어봤지만 효봉(속명 이찬형) 스님이 판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혜봉스님은 ‘한국법관사’(1981년 법원행정처)의 법관 명단,‘조선총독부직원록’(1911∼1925년 조선총독부)을 샅샅히 훑었지만 효봉 스님의 속명인이찬형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 온 일본인 판사가 함께 판사로 활동했던 이홍종을 효봉 스님과 착각했거나 스님의 연보 등 문헌이 처음부터 잘못됐을것이라는게 혜봉스님의 주장이다. 김성호기자
  • [의열 독립투쟁](12)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28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남대문로 2가)과 동양척식회사(을지로 2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공격 대상이 토지를 장악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집중되던 일제의 기관이었으니 조선인들로선 그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씻어주는 쾌거였다.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나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1세에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였다.15세에 고향 마을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해신학문을 배우고,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養山學校)를 다녔다.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 의사를‘제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나 의사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고자맹세하고 1913년 21세때 1차 망명길에 올랐다.만주로 건너간 그는 북간도를거쳐 이동휘(李東輝)가 개설한 나자구(羅子溝)의 무관학교에 입학,군 간부로 성장하였다.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사리원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한 그는 결국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말았다.훗날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게 된 것은 이 일이 한 계기가 됐다.3·1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겸이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미곡상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1920년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을 계획하였다.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한 후 일경에 쫓기던 그는 마침내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마련을 위해 중국으로 제2차 망명길에 올랐다.상해로 간 나 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백범 김구 밑에서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 드는 밀정을 찾아내 박멸하고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특히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의 경찰과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 의사가 소속된 경무국 경호원들은 정보수집과경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들어 김구·여운형(呂運亨) 등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이는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 양성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1922년 10월 조직한 것이 한국노병회다.정부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하니 한 사람이라도 군사훈련을받아 군사요원이 되고 또 노동자가 돼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 출전하는 계획이었다.즉 한 사람이‘노동자’요‘병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군간부 양성을 위해 요원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나 의사는 첫 요원으로 파견된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3년 초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교,사관훈련을 받고 이듬해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그는 국내 침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세가지구도 위에 전개되고 있었다.임시정부와 한국노병회를 대표해 김구,제2차 유림단의거를 진행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그리고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金元鳳)이라는 세 세력의 협조에 의해 나 의사를 비롯한 요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는 투쟁이었다.즉 김구가 키운 군사 간부로서,김창숙이 국내 유림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원으로서 국내로침투하는 것이다.목표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5년 중국인으로부터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국내로 잠입하고자 하였다.그 과정을 보여주는 나 의사의 서신(금년 6월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 4권에 실림)을 보면 그가 천진에서 이승춘(李承春) 한봉근(韓鳳根)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내 침투용 선박 구입자금을 준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계획이 연기되다가 끝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변경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고,실행은 1926년으로 연기되었다.마침 1926년(병인년) 1월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조직됐다.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가 정체현상을 보이자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나 의사는 여기에 가입한 후 국내 침투계획을 재추진,1926년 12월26일 단독으로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마중덕(馬中德)이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갖고 들어왔다. 이틀 뒤인 12월28일 오후 2시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불발이었다.곧바로 인근 동양척식회사로 이동한 나 의사는 일본 경찰과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 불발이었다.거사 준비과정이 너무길다보니 폭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나 의사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자 마침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나의사는 숨지기 전 본인의 이름과 의열단 소속이란 것만 밝혔을 뿐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순국하였다./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나석주 의사 후손과 추모사업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대치 끝에 권총으로 자결,순국한 후 장남 응섭(應燮)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순국 직후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당시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무런 표식이나 봉분도 만들 수 없었는데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수 없다.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나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다.장남은 일찍 사망하고 장녀 응서(應瑞·1918년생)는 9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현재 나 의사는 직계 후손이 절손된 상태다. 지난 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나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당시동양척식회사 본점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 터)에서 나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추모 단체로는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으며 동상 건립도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결과다. 나 의사는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9)장진홍 의사

    1927년 10월18일 11시20분경 대구시 중앙통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청년은 곧바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네개의 상자 가운데 한 개를 창구로 내밀면서 창구의 직원에게 “이것은 벌꿀인데 우리 여관에 든 손님이 지점장님께 전해달라고 한선물입니다”고 디밀었다. 군대에서 포병대 근무경력이 있는 창구직원 요시무라(吉村)는 상자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상자를 열었다.아니나 다를까!상자 안에는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어있었다.깜짝놀란 요시무라는 도화선을 끊고청년으로부터 보자기를 빼앗아 다급하게 나머지 상자를 열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10여명의 순사들이 도화선을 끊으려고 하였으나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폭탄 하나가 터짐과 동시에 뒤이어 두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이것이 저 유명한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다.폭탄을 전한 청년은장의사가 심부름을 보낸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으로 이 사건과 별다른 관련은 없다. 장의사는 1895년 6월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인동(仁同),호는 창려(滄旅).장의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했다.칠곡소재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군사지식을 배운 장의사는 1916년 고향에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으나 일경의감시가 심해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동지인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명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1919년 3·1 의거가 일어나자 장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동생 진환(鎭煥)으로부터 600원을 받아 전국 각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사실들을 조사,수집하였다.이 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장의사는 경북출신조선인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영문으로 번역,세계 각국에 배포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장의사는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일제의 만행을 응징키로 결심하고 대한광복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내성에게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호리키리 시게미쯔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아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에 직접 제조한 폭탄의 성능실험을 마친 장의사는 동지들과 경북도청·경북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고 10월16일 폭탄 여섯개를 제조했다.이튿날 6개의 폭탄 가운데 5개를 가지고 대구로 향한 장의사는 조선은행에서 가까운 덕흥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18일 오전 10시40분 장의사는 여관의 사환을 불러 “이것은 조선꿀인데조선은행·도청·식산은행·경찰부 순서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어 11시40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일본인순사 4명과 은행원 1명,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부상을 입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유리창 60여장이 깨졌다.그 순간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모자를쓰고네 대의 금니를 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던 장의사는 말쑥한 양복 차림에 흰 운동화로 갈아신고 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다부원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경찰은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범인색출에 나섰으나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장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동생 의환(義煥)에게 몸을 의탁하고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등을 왕래하며 1년반 동안을 지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 엿장수로 변장,장의사 고향집 부근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한 형사가 장의사가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일본경찰은 조선인 여자첩자를 오사카로 파견,장의사 동생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장의사가 2층에 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29년 2월14일 밤 동생 장의환의 안경공장에서는 술자리가 벌어졌다.일본경찰에 매수된 한 조선인 첩자가 안경 1만5,000개를 산다며 계약금조로 30원을 내놓은 것이었다.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장의환이 벌인 술자리에는 조선인첩자를 포함해 김해중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던 장의사도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취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장의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전등을 손으로 쳐서 깨뜨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으나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장의사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며 심문하는 일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취조하던 조선인경찰에게는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가 확정된 장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30년 7월31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장의사의 순국소식이 옥중에 퍼지자재소자들은 ‘조선독립만세’,‘장진홍만세’를 외쳤고 이에 당황한 교도소측은 서둘러 장 의사의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전시부 연구원] *장진홍 의사 후손들 근황 장진홍 의사는 후손으로아들,딸 각각 3형제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 속에 살고 있다.세아들 가운데 장남만 보통학교 4년 중퇴를 했을 뿐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무학자이다. 96년 83세로 작고한 장남 형옥(衡玉)씨는 생전에 부친 장의사의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차남 형술(衡述·81)씨는 구미시 옥계동에 살고 있는데 연로해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또 대구에 살고 있는 3남 형태(衡泰·73)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행상 이발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장남 형옥씨는 7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8명이 생존해 있다.장손 상규(相圭·63)씨는 칠곡에서 전자제품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IMF 사태 후 모기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아서 살고 있는 집마저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 장의사의 후손 가운데 그나마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은 세 딸이 고작이다.세 딸 가운데 위로 두 딸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막내딸 형필(衡必·70)씨만 구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장의사 추모단체나 기념사업회는 특별히 구성된 것이 없고 낙동강 기슭에 서있는 추모비 하나가 고작이다.장의사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으며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128번)에 마련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8)김익상 의사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10분경.일제의 조선 통치의 거점인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현 중구 예장동 일대)의 조선총독부 청사(구 한국통감부 청사)2층에서 굉음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터진 이 사건으로 일제가 초긴장함은 물론 경성(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다.일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않았다. 일제로서도 이 사건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총독부 관리나 고용원이 아니면 임의로 출입을 못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인물이,그것도 벌건 대낮에 총독부 청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사건의 진상은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육중한 몸체의배 한 척이 상하이 부두에 입항하였다.상하이는 국제도시인 만큼 평소에도중국인·조선인·서양인·인도인·일본인 등 여러나라 사람들이 들끓었다.특히 이 날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상하이에 들르기로 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후에 수상 역임)를 맞기 위해 중국의 고관,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직원,각국 신문기자,일본거류민이 부둣가로 몰려나와 더욱 혼잡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나카는 출영나온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중국인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세 발의총성이 울리자 총을 든 청년은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그러나불행하게도 총탄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총탄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다나카 앞을 급히 지나던 젊은 서양 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청년은 다나카가 맞은 줄 알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놀란 다나카일행은 황급히 달아났다.그런데 이번엔 양복을 입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달아나는 다나카를 권총을 쏘고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이 총탄도 역시 다나카에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도 불발되고 말았다.다나카는 두번의 피습을 용케피했고 두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중국 옷을 입은청년은 오성륜(吳成崙·본명 李正龍)이었고,양복을 입은 청년은 김익상(金益相)이었다.6개월전에 일어난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은 김익상 의사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김 의사의 의거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상하이에서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의사는 당시 28세로 아내와 딸 하나를 조국에 두고 온 몸이었다. 서울 태생인 김의사는 15세때부터 서울 용산역 철도노동자,용산전기회사,황해도 수안의 광업회사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일본인 밑에서 일한 까닭에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인들의 습관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어 거사에 나섰을때 능숙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 곳곳의 일경들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김익상 의사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장차 비행사가 돼 폭탄을 싣고 일본을 향해 투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유년시절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멸시·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김 의사도 일본인밑에서 냉대와 학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김 의사는 이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고통이란 사실을자각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국을 떠나,1921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만난 뒤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조국독립을 위해 일제 통치거점에 폭탄을 안기자는 의열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의사는 거사를 자청했다.1921년 9월10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개와 권총 1정,탄환 100발 및 현금 200원을 받아 베이징을 출발했다.김원봉 이하 동지들이 베이징역두에 나와 장도에 오르는 김 의사를 전송하였다.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壯士一去兮 不復還일세(壯士가 한번 가면,돌아오지 못하는구나)”하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김 의사는 “쓸데없는 소리 말게.이제 1주일이면 내 넉넉히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잘 차려놓고 기다리게”하고 껄껄 웃으면서 화답하였다. 그처럼 담대했던 김 의사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경계망을 돌파한 뒤 서울로 들어와,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구내로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후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홀연히 김의사는 청사를 빠져 나왔다. 다나카 저격직후 체포된 김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됐고 1923년 11월 6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황태자(후에 昭和천황이 됨)의 결혼식으로 일제로부터 은사(恩赦)를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또 1932년 2월에는 만주국 독립기념 명목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1942년 김 의사는 30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래 20년만에 50대 중노인이 돼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왔다.서울로 돌아온 김의사는 해방직전한 일본인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그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재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있었던 자리 인근(현 예장동 숭의여자대학 입구)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이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 하나만외롭게 서 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 -金의사 투탄 조선총독부는…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광화문 청사가 아니라 남산에 있던 초기 청사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일제는 한국통치기관으로 한국통감부를 만들었다. 청사는 남산 중턱에 있던구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했다.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찬탈한 일제는 남산 통감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간판을 내걸고 이 건물을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1926년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까지 16년동안 이곳은 일제 조선통치의 본거지였다. 김익상 의사는 바로 이곳에 전기수리공으로 변장,잠입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 6월 2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되어 10년만인 1926년 10월 1일 ‘시정(始政)기념일’을 맞아 준공하였다.일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만엔을 들여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을 조선의 영구통치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다.그러나 신청사 준공 19년만에 패퇴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다. 정운현기자 jwh59@
  • 59개 시민단체 ‘노근리’ 진상규명 촉구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59개 시민·사회·종교단체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해결을 촉구했다. 이들은 “노근리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는 시효없이 철저한 진상조사가이뤄져야 한다”며 “AP통신의 보도를 계기로 노근리 사건이 공론화된 것은 ‘끝’이 아니라 불평등으로 얼룩져온 한·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들은 또 “이미 1950년 8월 ‘조선인민보’에 AP통신이 보도한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기사가 두 차례에 걸쳐 실렸으며 지난 60년대부터 생존자들이 줄기차게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한국과 미국 정부는 증거 불충분을 핑계로 역사의 진실을 철저히 외면해 왔다”고 주장했다. 참가단체들은 ‘노근리사건 진상규명 공동 대책위원회’(가칭)를 결성,▲노근리 주민 지원 ▲한·미 양국 조사단 활동 감시 ▲마산,창녕,사천 등 다른지역에서의 유사사건 조사 등의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창구기자 window2@
  • 관동대지진 기록화 日서 첫 발견

    지난 1923년 9월1일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그린기록화가 발견됐다.76년전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다룬 서적은 그동안 많았으나 그림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일교포 시사정보지인 ‘월간 아리랑’ 9월호는 완구사 연구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다다 도시쓰카(多田敏捷·58·일본 오사카 거주)가 지난 96년 고베대지진 때 불탄 민가에서 나온 물건더미에서 찾아낸 이 그림을 입수,공개했다. 두루마리 형태로 된 이 그림의 정식명칭은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眼錄)’.가로 45㎝,세로 11.5m의 채색화로 제작연도는 지진 발생 이듬해인 대정 13년(1924년) 3월 중순이다.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시 27세의 일본인화가 하쿠도(白洞·본명 竹尾·1896∼1951)다. 그림에는 지진 직후 도쿄 인근 고토쿠(江東區)·스미다구(墨田區) 일대의상황이 11장면에 걸쳐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이 가운데 조선인과 관련된 것은 두 장면.일본도와 죽창·곤봉을 든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을 학살하는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돌아온 權禧老씨 애끊는 사모곡

    “어머니,당신이 태어나신 고향에 희로가 왔습니다.이제 제곁에서 편안히쉬세요” 7일 오후 2시25분 부산시 연제구 거제1동 자비사 법당.칠순을 넘긴 권희로(權禧老)씨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박득숙(朴得淑)씨의 유해와 영정 앞에 무릎꿇고 앉아 눈을 감은 채 파란많은 지난 세월을 용서받으려는 듯 두손을 모아 합장했다.일본땅에서 천대와 울분속에 살아온 한맺힌 70평생과 어머니에대한 아스라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가 “한국인 인종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야쿠자 두목 2명을 살해하고인질극을 벌였던 68년 그에게 흰색 한복을 건네며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느니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라”고 권할만큼 강직한 어머니였다.종신형수감생활이 시작되자 족발장사를 해가며 82년 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형무소로 아들을 찾아 옥바라지를 했던 사랑의 어머니.“아들이 석방되면 함께 깡통을 차고 빌어먹더라도 부산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조국의 품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되뇌다 끝내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지난해 11월 일본의 한 시립양로원에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기구한 운명의 어머니.“나와 희로만 국적이 한국이며 따라서 내 자식은 희로밖에 없다”고말한 한국의 어머니.부산에서 태어나 소학교도 못다닌 채 7살때부터,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결혼할 때까지 10년간 일본인 지주집에서하녀노릇을 했던 한많은 어머니.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희로씨는 정의감이강하다.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여린 마음의 효자이기도 하다. 희로씨의 비극은 그가 세살때인 지난 31년 부두노동자이던 아버지 권명술씨가 작업도중 사고로 숨지면서 시작됐다.그후로 그는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2년후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그는 의붓아버지의 구박과 폭행에 시달리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조선인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조롱과 함께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결국 13살때 집밖으로 뛰쳐나와 연탄회사와 항만 인부 등을 전전했다.배고픔을 참다못해 먹을 것을 훔치다 소년원에 들어갔다. 그후 야쿠자 살해 전까지도 강도 공갈 횡령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도합 20년간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31살때 일본인 처와 결혼했으나 8년만에 결국 실패했다. 권씨는 이제 고국에서 ‘일본사람처럼’이 아니라 한국사람으로서,소외계층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살기로 다짐하며 법당을 떠났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北 “서해분계선 침범땐 강력 조치”/정부 원론적 입장 재확인

    북한은 지난 2일 일방적으로 선포한 서해상 군사분계선을 침범할 경우 이를 도발로 간주,“강력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7일 경고했다.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북측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할 경우 강력 대응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거론하며 “이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별보도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북한이 선언한 서해상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정과 국제법 요건에 부합되는 정당하고 확고한 것”이라며 “남조선 호전광들은 불법적인 NLL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는 남조선 호전광들이 서해상 군사분계선을 도발할 경우 온갖수단과 방법으로 강한 자위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남조선측에 있다”면서 “남한 당국자들은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가 설정한 군사경계선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와함께 우리의 ‘자위 발포선’안에선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란 위협도덧붙였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북한측의 발표는 NLL 침범시 강력 대응하겠다는 우리측 입장 천명에 대한 답신 성격으로,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대미협상용으로 계속 활용하려는 의도로 관측된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노동당 산하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등의 기관 명의가 아닌 언론기관을 통해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고 밝혔다. 이석우기자 swlee@
  • [외언내언] 흡연損賠訴

    오래 된 일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비유한다.그러나 문헌상으로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부터이며 빠른 속도로 민간에 널리 퍼져 최고의 기호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하멜표류기’에‘조선인들 중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시대때는 담뱃대의 길이가 신분 차이를 나타내 길이가 긴 장죽은 양반층이,짧은 곰방대는 평민이 사용했다.장죽이 양반 담뱃대가 된 것은 담배통에 혼자 불을 붙일 수 없어 하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담배 판매는일제하인 1921년 수입증대를 위한 전매사업으로 자리를 굳혔다.해방과 더불어‘승리’라는 담배가 나오면서 드디어 담배의 일반상품화가 이루어졌고,한국전때는‘파랑새’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었으며,경제발전기에는‘새마을’이 산업현장 근로자들의 땀을 씻어주었다. ‘연간 생산량 1,000억 개비,매출액 4조7,000억원,15세 이상 남성 흡연율세계 1위,흡연 관련 사망자 연간 3만5,000명,흡연으로 인한 직·간접적 경제손실 연간 6조원’.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된 한국의 흡연실태와 피해의현주소이다.우리나라 15세 이상 흡연인구는 68.2%로 미국 28%의 2배가 넘는다.남고생 흡연율도 35%로 미국(18%),일본(22%) 학생에 배해 훨씬 높다.한국인들의 흡연위험 수준은 지금 적색경보 상태다. 최근 폐암 말기 환자인 56세의 한 외항선원이 지난 36년간 하루 두갑 정도의 담배를 장기 흡연한 것이 폐암을 유발했다며 국내 처음으로 한국담배인삼공사와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관심을 끌고 있다.흡연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은 미국에서 일부 인정됐고 일본에서는 공익 차원의소송이 계류중이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이어서 재판결과가 주목된다. 그는 소장에서 ‘담배인삼공사는 지난 89년까지 담배의 유해성을 알리는 구체적인 경고문구를 표시하지 않아 소비자에 대한 위험성 고지 및 설명의무를 위반했다’며 ‘특히 국가는 재정수입을 위해 담배 판매를 장려,촉진해왔다’고 덧붙였다. 이번 소송은 흡연피해 보상이라는 상징적 의미 외에도 지금까지 국내 흡연자 보호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던 공사측이 흡연자 보호에 적극 나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정부는 한국담배인삼공사의 민영화를 서둘러 국가가국민건강을 담보로 수입을 올린다는 비난을 받지 말아야 한다.이밖에 공사측은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흡연자 피해보상뿐만 아니라 간접 흡연피해자에 대한 권익도 보장해야 할 것이다./이기백 논설위원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北 서해NLL 무효화 파장] 北 발표문 요지

    조선반도의 불안정한 군사정세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긴장한 상태에서 지속되고 있다.이러한 상태는 지난 6월15일 서해 해상교전이 있은 이후더욱 엄중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서해해상 충돌이 있은 직후 우리는 문제 수역에서 충돌의 재발을 막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6차례의 조미(朝美)군부 장령급회담을 주동적으로 소집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여왔다. 그러나 미군측은 정전협정과는 배치되게 이 문제 토의를 외면하고 가동되지도 않고 있는 북남 군사공동위원회에 밀면서 실무접촉을 거부하였으며 놈들이 우리 영해에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따라서 북방한계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측의 주장은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로 된다.더욱이 문제 토의에서 회피하려는 미군측의처사는 조선정전협정에 따라 주어진 자기들의 권한과 의무를 다 포기하였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서해해상 군사분계선 문제를 협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하지만 미군 측이 끝내 문제 토의를 외면하고 비법적이고 강도적인 북방한계선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의 당당한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지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엄숙히 선포한다. 1.조선서해 해상 분사분계선은 ▲정전협정에 따라 그어진 선인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 (가-나)선의 (가)점과 우리측 강령반도 끝단인 등산곶,미군측 관할하의 섬인 굴업도 사이의 등거리점(북위 37도18분30초,동경 125도31분00초) ▲우리측섬인 웅도와 미군측 관할하의 섬들인 서격렬비도,소협도사이의 등거리점(북위 37도1분2초,동경 124도55분) ▲그로부터 서남쪽의 점(북위 36도50분45초,동경 124도32분30초)을 지나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해상경계선까지 연결한 선으로 하며 이 선의 북쪽 해상수역을 조선인민군측 해상군사통제수역으로 한다. 2.조선서해 해상영해안에 제멋대로 설정한 미군측의 강도적인 북방한계선은 무효임을 선포한다. 3.조선서해 해상군사분계선에 대한 자위권은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에 의하여 선포될 것이다.
  • 北, 장성급회담서 위협

    유엔사와 북한군은 1일 오전 판문점 군사정전위 회의실에서 제11차 장성급회담을 갖고 북측이 제기한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조정문제를 놓고 논의했으나 서로 종전 주장만 되풀이했다. 북측은 이날 회담에서 지난달 17일 열린 제10차 장성급회담에서 자신들이제의한 새로운 해상경계선 설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한국이 참여하는 실무급회담에 유엔사측이 호응할 것인지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유엔사측은 이에 대해 ‘NLL은 지난 46년간 쌍방이 준수해온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협상 대상이 아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협의할 사안이며 북측이 요구하는 실무협의도 군사공동위의 테두리 내에서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응수했다. 북측 대표단은 “경계선 설정을 거부하고 NLL을 고집하는 것은 정전협정을포기하고 침해하는 행위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조선인민군은 북측수역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북측 대표단이 주장한 ‘단호하고 결정적인 조치’와 관련,북측의 상투적인 위협 표현으로 평가했다. 이날 장성급회담에는 유엔사측에서 던 미군 소장·금기연 한국군 준장·베이커 영국군 준장·토레스 프랑스군 대령이,북한군에서 이찬복 중장·조동현소장·박임수 대좌가 참석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일본속의 한국인] 김희로씨 석방결정 계기로 본 현주소

    재일동포 무기수 김희로(金嬉老·71)씨의 석방결정을 계기로 일본내 한국인의 삶과 인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일제의 강제이주로 고국땅을 등지고 일본에 뿌리내린 재일 한국인들은 어느 이국땅의 한인들 보다 고단하고 힘겨운한세기를 살아왔다.64만 재일동포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여류작가 유미리(柳美里·30)씨는 97년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한 뒤 우익세력의 협박에 시달렸다.‘일본인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게 이유였다.일본 전국을 돌면서 친필사인회를 가지려던 유씨는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사인회를 취소했다.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은 이처럼 뿌리깊다.일제가 노동력을 착취하기위해 데려온 수백만의 조선인은 ‘일하는 기계’에 불과했다.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을 살인자 집단으로 몰아 학살했는가 하면,2차대전 패전 직후에는 100만명의 한국인을 ‘범죄분자’로 분류했다. 이같은 인식은 전후에도 이어져 21세기, 새 세기를 앞둔 지금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이나 취업 등에 큰 제약을 받으며살고 있다. 나고야에 사는 구모씨(55)는 10년전 마쓰모토(松本)로 성을 바꾸고 일본으로 귀화했다.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였다.그의 딸(29)은 일본 명문대를 졸업한 뒤 일류 직장인 도쿄미쓰비시 은행에 취직해 일본인과 결혼을 준비하고있다.한국 국적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라고 구씨는 생각하고 있다.대부분의 재일 한국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일본의 공직이나 일류 대기업에 취업하기는 힘들다.제출서류인 호적등본에 한국인이라는사실이 드러나면 입사를 거절당하기 일쑤다. 도쿄에 거주하는 박모씨(54)의 아들(16·고1)은 성인이 되면 귀화할 생각이다.아버지 박씨도 그런 아들을 말릴 뜻이 없다.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에 강상중(姜尙中·49)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정교수로 채용된 것이나 가나가와(神奈川)현 등 극소수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인을 채용한 것도 불과 1년전의 일이다. 공무원의 경우 이들이 오를 수 있는최고의 자리는 국장급인데 그것도‘결재권이 없는’자리뿐이다. 한국인에게‘문호’를 열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시늉 정도라 할 수 있다.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총련계 여학생들이 폭행과 놀림을 당하고 외국인 등록 때마다 범죄자처럼 지문을 찍는 수모를 재일 한국인들은 일상사로 겪어왔다.한국인의 자긍심을 택할 것인가,생활을 택할 것인가,재일 한국인들의 50여년간 고민은 새 세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기자 marry01@*在日 韓人 최대현안은 참정권·戰後보상 일본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법률과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한국인들을푸대접해왔다.외국인의 지문날인제가 폐지되는 등 일본의 악법들이 하나둘씩없어지거나 고쳐지고 있긴 하나 지방참정권이나 전후보상문제 등은 재일 한국인의 숙원으로 남아있다. ■지방 참정권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경제 활동에 따른 각종 세금을 일본인과 똑같이꼬박꼬박 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91년 한·일 외무장관 각서교환에 이 문제가 포함된 이후 민단은 전국조직을 총동원,지방 참정권 획득운동에 나섰다. 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본 방문 당시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부여를 일본 정부가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자민당이 진지하게 검토하토록 노력하겠다”고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 여야는 물론 정부 내에서조차 참정권 부여에 대해 의견이 팽팽히 엇갈려 있다.민주당 등은 이미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는 법안을 국회에제출해놓은 상태.반면 자민당 일부에선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나라가거의 없고,한국정부가 재한 일본인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는‘상호주의’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반면 지방자치단체는 3,302개 지자체의 41%인 1,364개 지방의회가 참정권 부여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전후보상 2차대전 때 일본군에 강제징집 당해 부상을 입은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과 똑같이 연금과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해 놓고있다. 일본 법원은 그러나 이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국적조항’을 들어 패소판결을 내리고 있다.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관방장관 같은 실세 정치인의 “금세기 문제는 금세기에 푼다”는 전향적 태도에도 불구,“전후보상은 한일기본조약으로 매듭됐다”는 관료들의 저항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황성기 기자*제일교포 關西지방에 31만으로 가장 많아 외교통상부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64만5,000여명.상사 주재원이나 외교관,유학생 등 일반 체류자를 뺀 순수 영주자들은59만명이다.이중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은 2만명 가량 된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65년 35.8%이던 재일동포 1세는 30년 뒤 7%로 줄어들었다.2,3세가 늘면서 일본 귀화도 증가해 50년 이후에는 20만명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오사카(大阪) 등 간사이(關西)지역에 가장 많은 31만명,도쿄 등 간토(關東)지역에 17만명 등이 몰려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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