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인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불꽃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토양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흥행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동북아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067
  • 金正日 ‘조총련 개혁’ 지시 안팎

    북한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개혁과 변신’을 지시한 것은 조총련 붕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최근 이탈자가 속출하면서 뿌리부터 휘청거리는 조총련을 붙들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지난 4월 서만술(徐万述) 조총련 제1부의장은 평양에 갔다.김일성(金日成)탄생 기념식 참석이 명분이었으나 김정일(金正日) 총서기와 조총련 회생을논의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노동당내 조총련 담당 김용순(金容淳)서기를 배제한 3시간 가량의 독대 끝에 나온 조총련 개혁안은 언뜻‘북한 추종노선’의 포기로 비쳐진다. 북한에맹종해온 조총련으로선 대변신이 아닐 수 없다. 수년간 6,000여명이 한국국적을 취득,65만명의 재일동포중 4분의 1만이 조총련에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등 경직된 체제에 대한 내부 반발이 커지고 있다.‘이념’의 1세대와 일본에서 뿌리박고 싶어하는 현실적인 대다수 2·3세대들 사이에서 이념보다 권익을 강조하는 상호부조 활동으로의 노선 변화는 당연한 측면이 많다. 이와 함께 북한의 경제난에 일본의 불황까지 겹쳐 진행되고 있는 조총련 기업,금융의 파산도 조총련을 변화의 길로 떠밀고 있는 중요한 요소다. 33개 신용조합중 13곳은 문닫기 직전에 몰려있고 한때 300억엔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던 동해상사가 60억엔의 부채를 안고 파산하는 등 조총련의 경제기반마저 동요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개혁안’은 조총련을 떠받쳐온 경제력을 응집,부흥시키기 위한 속셈도 있어 보인다. 조총련을 북·일 국교정상화의 지렛대로 삼기 위한 의도도 숨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북한은 일본과 수교 때 거액을 기대하고 있다는게 마이니치(每日) 분석이다.이럴 경우 조총련이 일본 비판 일변도의 북한을 추종하기 보다는 양측의 ‘조정역’으로 변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북한은 판단했다는 것이다.이처럼 북한의 필요에 따른 전술적 포석인 조총련 ‘개혁’이 과연 얼마나 융통성을 갖고 진행될지 주목되고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본사 정운현차장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출간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그러나우리의 현대사는 권력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 얼룩져 있다.현대사의 왜곡은해방 후 당연히 단죄됐어야 했던 친일세력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불행한 일로부터 시작됐다.많은 것을 희생하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애국투사들은 독립된 조국의 무대에서 밀려나고,친일세력이 옷을 갈아입고그 무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민족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부끄러운자화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나왔다.(개마고원 8,500원) 이 책은 정운현 대한매일 문화부 차장이 1998년 8월14일부터 올 4월26일까지 대한매일(98년 11월11일 이전에는 서울신문)에 ‘친일의 군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에다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만들어졌다.친일파 문제가 일간지에 연재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친일파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온 지은이는 일본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등을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뛰어넘는 알찬 내용을 담아 이 책을 꾸몄다.강화도조약 체결 때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1호’ 김인승,조선인 출신신직(神職) 이산연,만주 특무공작의 거두 김창영 등은 ‘친일의 군상’ 연재를 통해 처음 공개된 친일파들이다.지은이는 또 최남선의 친일 행적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 먼저 시작됐음을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 책은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근택,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공주갑부 김갑순,박흥식,이선근,이항녕,김활란,윤치호,윤보선 일가,최남선,김성수,방응모,주요한,김동환,이광수,여자 밀정 배정자,무용가 최승희,승려 이종욱,최린,이갑성,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고등계형사 선우순·갑 형제 등많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인물별로 소개한다. 저자는 집필동기를 이렇게 말한다.“친일파 문제는 법적·역사적 청산이 안됐다.많은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권력 엘리트로 군림해 옴에따라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민족사를 더럽힌 사람은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된다는 엄숙한 경고를 보여줘야한다”. 친일파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현장은 우리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 민족의 성지인 국립묘지에도 백낙준·진의종·백두진·엄민영·황종률·이은상·이선근·조진만·이응준을 비롯,10명이상의 친일경력자들이 국립묘지에묻혀 있는 것이다. ‘위대한 3·1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된 3·1문화상 예술분야 수상자중에도 조연현·안수길·백철·모윤숙·최정희·이상범·김인승·김기창·김성태 등 모두 13명의 친일파가 포함돼 있다.정부차원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친일파가 포함됐는가 하면 ‘동인 문학상’‘난파 음악상’등 친일파 인사들의 이름은 딴 여러가지 상이 만들어졌다.최근에는 이화여대에서 친일파인 김활란의 이름을 딴 ‘우월 김활란상’을 제정하겠다고 밝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겼다. 저자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친일문제의 청산은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중요한 작업이다.그 작업은 역사의 시계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창순기자 cslee@
  • 北“카렌 한 오늘 석방”

    ?서울 AFP AP 연합?북한에 억류중인 한국계 미국인 카렌 한(여·58)씨가 20일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고 북한 중앙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한씨가 지난달 1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법질서를 크게 위반해체포됐으나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한 점을 참작,추방이라는 너그러운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씨는 지난달 병원 및 의류제조공장 건설 타진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던 중북한당국에 의해 억류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뉴저지주에 주택을 갖고 있는 한씨는 북한당국에 억류된 뒤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서 조사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 질곡의 역사 담긴 우리 옛건축 얘기

    누군가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가.600년이 넘는역사를 가진 고도(古都) 서울은 말 그대로 ‘역사의 현장’이다.그리고 그현장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곳곳에 말없이 서 있는 건축물들이다.고궁의추녀 끝에서는 왕조시대의 권위주의 문화가 묻어나고 남산 자락의 왜색 민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애환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근대건축사의 독보적 연구자인 김정동(金晶東) 목원대 건축도시공학부교수가 펴낸 ‘김정동 교수의 근대 건축기행’은 이러한 건축과 우리 근대사를 아우르는, ‘발로 쓴 문화사’라 할만 하다. 김 교수는 평소 사료 조사와함께 ‘발품팔기’를 아끼지 않는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그가 지난 20여년간 수도 없이‘가고 또가고’해서 눈에 익힌 근대 건축물들의 ‘애환사’를 건축사가의 눈으로 쓴 글들의 엮음이다. 도시화와 재개발 열기에 밀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진 옛 건축물들.새 것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는 반기를 들고나선 김 교수는종로의 화신백화점,정동(貞洞)의 손탁호텔, 옛 경기도청 청사, 동양극장 등유서깊은 건축물이 사라진데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한 때 ‘조선인의 자부심’으로 불렸던 화신백화점은 주인의 영욕과 함께이미 자취를 감췄다.또 한말 각국 외교사절과 개화파들의 사교장으로 유명했고 국내 최초의 양식호텔로 우리 건축사에 기록될만한 건축물인 손탁호텔 역시 몇번 주인이 갈리면서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형해(形骸)를 전해주고있다.시인 이상(李箱)이 몇 푼의 커피값이 없어 발길을 돌렸던 경성역(현 서울역) 2층 그릴 역시 지금은 전시관으로 변해 그 시절 경성 멋쟁이들의 얘기는 이제 더이상 들을 수가 없다. 지난 역사 속에서 외세,식민화,전쟁,그리고 파괴로 우리 건축사는 질곡의역사를 기록해 왔다.지난 87년 서울지역에서만도 80여채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무단철거,혹은 훼손됐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50대 초반의 김교수는 명동 국립극장 건물을 그리며 ‘명동 국립극장사(史)는 명동사(史)이며,명동애사(哀史)’라는 말로 감정을 대변한다. “1960년대까지 명동이 문화인의 서식처로 절정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명동에 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명동 국립극장은 명동의 한 복판에서 있으며 미도파백화점으로부터 명동성당까지를 한 축으로 묶는 서울 유일의 문화지대였다.…안수길의 ‘학마을 사람들’이나 이어령의 ‘무익조(無翼鳥)’,폴 뉴먼의 영화도 그 때 거기서 보았다.첫사랑의 여인도 명동에서 만나 헤어졌고,지금의 아내도 거기서 만났다”. 바로 그 명동 언덕배기에 서있는 ‘고단한 자의 안식처’ 명동성당.원래 그 자리는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였다.일제 때는 이 일대 명례동(明禮洞)을 일황의 호칭을 따서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땅이라는 의미였다.지난 1세기 동안 우리 근·현대사를 지켜본 명동성당은종교적 의미를 넘어 시대의 조감자(鳥瞰者)로 자리매김되고 있다.김 교수는“건축물은 역사·인간·문화 이 모든 것을 담고 ‘무언의 기호’로 우리에게 그때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한다.푸른역사 9,000원정운현기자 jwh59@
  • 다시 불붙은 ‘화랑세기’ 眞僞논쟁

    지난 89년 부산에서 필사본이 발견된 이래 사학계에서 줄기찬 진위논쟁을벌여온 ‘화랑세기(花郞世紀)’가 완역,출간됐다.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5일한문 원문에 한글 번역본을 붙여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이야기’ (소나무펴냄 1만3,000원)를 출간,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논쟁에 새로운도전장을 던졌다.만약 이 교수의 주장대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일 경우 신라사는 물론 화랑·고대 한일관계사 등을 새로 써야할 상황이어서 국내사학계에 일대 소용돌이가 예상된다. ‘화랑세기’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김대문이 680년경 편찬한 것으로 화랑들의 전기(傳記)다.이 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후대 문헌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조선초에 멸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진위논쟁이 시작된 것은 지난 89년 부산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되는 32쪽짜리 필사본 일부가 발견된데 이어 95년 노태돈 서울대교수가 보다 완전한 모습의 162쪽짜리의 또 다른 필사본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이 두 필사본들은모두 일제당시 일본 왕실도서관에 근무하던 조선인 박창화(65년 사망)가 필사한 것으로 많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그동한 사학계에서는 이 필사본들을 두고 필사자인 박창화씨가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만든 허구라는 조작설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맞다는 진본설로 팽팽히 맞서왔다. 이 필사본을 두고 가짜라고 주장하는 측은 우선 필사본의 내용중 화랑들과관련한 내용이 종래의 학설과 너무 딴판이라는 것.그동안 화랑은 ‘세속5계’로 상징되듯 충효를 바탕으로 한 청년 무사집단으로 인식돼 왔다.그러나필사본에 등장하는 화랑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관(神官)의 보조역할자로나와 있다. 특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이 난잡한 섹스집단 정도로 묘사된점도 의외다. 이에 대해 완역자 이 교수는 “신라사를 유교적 도덕관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그런 식이라면 ‘화랑세기’와 유사한 내용이 포함된 ‘고려사’에 대해서도 진위논쟁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반박했다.이 교수는 특히 필사본에 등장하는 남여 400여 명의 계보가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봐 원본을 보고 베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사본‘화랑세기’는특히 가야 멸망시기 등을 기존 사서(史書)보다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가 562년에 멸망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56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멸망시킨 후 세운창녕순수비는 561년에 건립됐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이 책은 또 김유신이 김춘추와 몰래 정을 통해 아이를 밴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할 때 문희를 구해준 사람이 ‘선덕여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달리 ‘선덕공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뒷날 문무대왕이 된 문희의 아들은 선덕여왕이왕위에 오른 것보다 6년전에 태어났으므로 ‘선덕공주’라는 표현이 맞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서 비교적 중립적 견해를 보여온 이도학한양대 강사는 “신라시대의 역사를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전제하고 “기존상식이나 선입관에 위배된다고 해서 모두 가짜라고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본 가능성 쪽으로 견해를 폈다.현재 학계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본론보다는 가짜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번 논쟁으로 어느 한 쪽은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경조금과 미풍양속

    반만년 우리의 역사동안 우리만이 가진 미풍양속 가운데 경사나 애사가 있을 때 정성스럽게 마련한 경조금을 주고받는 것을 두고 중국이나 일본이 몹시 부러워했다.청나라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는 ‘조선인이 갖고 있는 뜨거운 마음의 표시’라 했고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福澤)는 ‘조선인의주고 받는 인심이 곧 그들의 친선과 국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외국인도 경조사에 성금을 주고받는 것을 인심의 총체와 국력의 상징이라고 칭송했다.그것은 곧 ‘품앗이’로서 주고 받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며 품위와 생활의 척도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두레 형식에서 부터 이웃돕기 전통이 싹터 고려,조선조 이후 오늘날까지 아름답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고려때의 보(寶) 이후 조선조에서는계(契)가 크게 유행했다.이는 친목을 목적으로 했으나 공제·식산의 의미로확대,보급되었다. 그중 공제계에는 혼상계(婚喪契) 등이 10여 종류가 있어 혼례때와 장례때마음으로부터 성금을 듬뿍 주어 상대를 기쁘게 했고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했다.이것이 곧 미풍양속이다.지금도 그 당시의 축의금 방명록이나 장례부의금명단이 발견되곤 하여 우리 선조들의 경조금 전통지키기가 연면성을 띠고오늘에 이르고 있음이 증명된다. 얼마전 정부는 ‘옷로비사건’등 불미한 일이 계속 터져나오자 공무원 10계명이라는 준수사항을 총리훈령으로 만들었다.이는 흩어진 공직기강을 쇄신하려는 고육책에서 고심해 만들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당위성이나 필요성·명분에 누구도 이의를 달 여지가 없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볼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맞으며 시행방법·절차상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이 찬성하고 적극 협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공직자의 경조비는 1급이상 고위공직자의 경우 못받게 되어있다.그러나 공무원이 아닌 형제자매는 받을 수가 있다는 것으로 되어있다.1급 이상의 공직자들에게 뇌물성 경조금을 줄 사람이라면 ‘현장’ 아닌 뒷거래나 음성적이고도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수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될 것이다. 경조금을 주고받는 일은 아름다운 한국인들의 풍속이며 국력신장의 상징이라는것을 외국인들도 지적한 바 있다.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경조금의 수수는 계속 지키게 하되 소위 ‘뜨는 자리’나 ‘인허가 업무 담당자’등 뇌물성경조금을 받을 수 있는 자리의 업무규제를 대폭 풀던가,민간기관으로 이양해서 그야말로 상호 품앗이로서 인심에 상응하게 미풍양속을 지키게 계도하고권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내기만 하고 받지는 말라는 것은 오히려 본래의 뜻을 떠나 더 반발하게 하는 등 분란의 요인이 된다고 본다.우리 사회에서 경조사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것이 상식이고 이것이 관례가 되어 잘 지켜 진다면 모를까 우리의 미풍양속인 경조금 주고받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또 적발해도 처벌조항이 없는 미비점이 악용될 소지를 낳고 있다.자칫 잘못 다루다가는 공직사회뿐 아니라 국민간의 경조사에 불신감이나 왕래 조차하지 않는 극한적,무미건조한 사회로 전락되지나 않을까 싶어 나라의 인심고르기를 염려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오히려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액수 상한제도 문제가 있다.받은 만큼 주는 것이 관례며 상식이 된 마당에경조금액수를 규제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잘 안지켜져 오히려 있으나마나한 ‘우스운 상한제’가 될 공산이 크다.권세에 따라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뇌물성 경조금은 더이상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사실이다.모범을 보여야할 공직자들이나 사회지도층에서부터 솔선수범,경조사때 성금을 받지 않는 풍조가 있어야 아래로 확산된다. 장제스(蔣介石)총통은 1949년 대만으로 옮겨온 이후 단돈 5만원 정도의 부정한 사실이 적발되었을 때 친인척까지 극형에 처했던 경우를 생각해봄직하다.그뒤 공직사회는 물론 일반국민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비리가 근절됐다는 소식은 우리를 부럽게 한다. 우리 역사속의 아름다운 풍속인 경조사때 성금 주고 받기가 뇌물성으로 흐르지 않고 예전처럼 순수한 뜻에서 오갈 수만 있다면 그대로 둬도 좋을 것이다. [李 炫 熙 성신여대 교수·현대사]
  • [기고] 6·25 유일의 海戰이야기

    “1950년 7월2일 새벽 미국 군함들이 주문진 앞바다에서 10척의 소형 운반선을 호위하는 북한 어뢰정 네척과 조우했다.어뢰정들은 어뢰 한발 발사할 시간 여유도 없이 모두 격침되었다” 이것은,1997년 미국에서 출간된 6·25전쟁 백과사전이 전쟁기간의 유일한해상교전이라고 서술한 대목이다. 한편 북한 신문들은 그해 7월10일 미 순양함 한척을 격침한 어뢰정 분대의위훈을 칭송하는 김일성(金日成)사령관의 방송내용을 보도했다.18일자 보도는,7월5일 주문진 앞 약 10마일 해상에 나타난 미 해군 순양함 두척과 구축함 한척 가운데 순양함 한척을 격침한 반면 제 21·22·23·24호 어뢰정 가운데 두척을 잃은 것으로 서술했다.이 해전을 지휘한 김군옥 제2정대장은 생환하여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고 북쪽 해군의 전설적인 영웅이 됐다. 미국측 백과사전의 기술이 옳은가,북한측 보도가 옳은가? 사실은 둘 다 잘못이 있다.특히 ‘미 순양함 격침’이란 아예 없었다.군함들의 항해일지를보면 안다. 주문진 앞바다를 순찰한 군함은 북한 보도대로 순양함 두척과 구축함 한척이었다.즉 미 순양함 ‘주노’와 영국 순양함 ‘자메이카’,영국 구축함 ‘블랙 스완’이다.‘주노’의 항해일지를 보면 아침 6시17분 해안선 가까이에서 선단을 호위하는 어뢰정 네척을 발견했다.포격을 가해 먼저 한척을 격침하고 해안으로 피신한 두척마저 격파했다.김군옥 정대장이 지휘하는 어뢰정은 교묘하게 지그재그 운항을 해 외해(外海)로 달아났다. 영국측 기록에는 어뢰정들이 “지극히 용감하게 돌격했다”고 칭찬했다.다음날인 7월3일 오후 북한 공군기 두대가 이 해역에 날아와 기총소사를 퍼부었다고도 기록했다. 이상이 내가 조사한 주문진 해전의 내용이다.6·25전쟁에서 미 군함 66척이 피격되고 6척이 침몰했지만 육지에서의 포격과 기뢰에 의한 것일뿐이지 북한 해군과의 해상전투는 주문진 해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결국 6·25때 바다에서 북한 해군에게 격침된 미 함정은 한척도 없었다.그런데도 주문진 해전에서 북쪽이 미 순양함을 격침하였다는 전과는 시간이 갈수록 부동(不動)의 사실로 굳어지는 듯하다.김일성수상이 사망한 뒤 북쪽에서 출판한 ‘김일성전집’은 그가 조선인민군 해군사령관에게 주었다는 ‘미제침략군 전투함선 집단을 소멸할 데 대하여’라는 장문의 지시문을 수록했다. 1950년 6월30일에 시달하였다는 지시문에는 “적의 순양함은 뱃머리가 높기 때문에 어뢰정이 가까이 접근하면 함포사격을 할 수 없다”“이번 해상전투에서 주타격대상은 적의 순양함 ‘빨찌모르’호이다.해군사령관 동무는 속초항에 가 7월2일 새벽3시에 공격을 개시해야 하겠다”등의 구절이 들어 있다. 나는 2,000자가 넘는 이 지령문의 진위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아마도 전후세대인 ‘김일성전집’의 편집자들이 역사적인 사실로 교육을 받아 스스로확신하고 있을 미 순양함 ‘빨찌모르’호 격침 사건,그 쾌거의 영광을 전적으로 수상에게 돌리려고 한 결과일 것이다.이 ‘우물 안 개구리’식 공작은오히려 고인이 된 수령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좋겠다. 내가 알기에는 미국 전사관(戰史官)들은 북한 전사관들과 무릎을 맞대고 6·25전쟁의 실상을 진지하고 화기애애하게 토론하고 싶어한다.가령 그 대상은,미 24사단이 북한군과 맞붙어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등 대패했던 50년7월의 대전(大田)지구 전투가 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미국 공문서관은 이 제2어뢰정대에 관한 북한측 문서도 대량 보존하고 있다.인민군 전사관들이 미국 수도를 방문하여 허심탄회하게 6·25전사(戰史)를추구하는 기회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6·25를 맞이하여 하나의 감상을 적는다. [方善柱 在美 사학자 한림대 객원교수]
  • [리뷰] 손진책 연출 ‘그, 불’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그,불’(김용옥 작·손진책 연출)은 한눈에 봐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평소 말수가 적은 연출자의 성격을 나타내듯 대사를 뼈대만 남기고 군더더기는 모두 잘라냈다.대신 배우의 동작이나 이미지 중심으로 극을 간결하게만들었다.특히 무대 좌우와 뒷면을 도자기 보관대로,앞쪽을 가마로 활용한세트 설정이 관객을 끌어당긴다.장중한 음향도 작품의 멋을 한껏 높여준다. 이런 치밀한 연출에 힘입어 14대 400년을 이어온 ‘조선 도공(陶工)의 한(恨)’은 공연시간 1시간3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다소 의고적인소재를 짜임새 있게 얽어,‘고리타분함’을 잘 피했다. 작품을 지탱하는 축은 둘로 나뉜다.15대 심수관(이기봉)의 ‘뿌리 찾기’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뿌리 지키기’이다.도공이 아닌 다른 길도 있지만 운명적으로 가마에 이끌리는 15대 심수관의 방황 장면에는 1대 심당길을 비롯한 선조 도공들의 수난사가 겹친다.그 속에서 조국의 흙·물·불과 그 결합체인 도자기를 향한 ‘예술혼’ 등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잦은 장면전환에 현재와 과거,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구성은 관객의 상상력에 불씨를 지핀다.백색의 옷에 은은히 비치는 청색 조명과 가마니의 붉은 빛이 대비되면서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하지만 ‘실험의 목마름’이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상징과축약이 지나쳐 ‘뭘 말하려는 것일까’란 의문이 남는 것이다.조선인 만의가슴도 아니고 일본인 만의 가슴도 아닌,둘이 합쳐서 ‘하나의 가슴’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느껴진다.하지만 너무 어렴풋하고 희미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게다가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신비한 여인’(김성애·김성녀 더
  • 건국대 신복룡교수 ‘한말 외국인 기록’ 선집 19권 출간

    한 정치학자가 3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근대 이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집대성,출간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주인공은 건국대 정외과신복룡(申福龍·57)교수.신교수는 집문당에서 ‘한말 외국인 기록’ 선집(전19권)을 출간한다.14권은 이미 출간됐고,나머지는 금년 여름방학 무렵에 출간될 예정이다.‘선집’에는 기록물 몇 종을 묶어서 한 권으로 엮은 것도 더러 있어 ‘선집’에 포함된 기록물 종 수는 모두 22종. 이번에 신교수가 출간한 ‘선집’은 서세동점이 시작된 18세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우리나라를 찾아왔던 서구의 여행자·선교사·의사·탐험가·외교관·화가 등이 남긴 기록 가운데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22종을 골라 신교수가 번역·주석하여 출간한 것이다.신교수는 “이 기록들은 당시의 역사를현장에서 목격한 인물들의 1차사료라는데 의의가 있다”며 “당시의 역사·민속·종교·정치·외교 등 사회제도와 음악·미술·의학,심지어는 동물상이나 식물상을 이해하는데도 귀중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가 외국인들의한국방문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0년대말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근대정치사를 공부하면서 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을번역하면서 부터다.73년 첫 작품으로 ‘대한제국멸망사’(H.B.헐버트)를 출간한 이후 신 교수는 꾸준히 이 일에 매달려 왔다.신교수는 그간 작업의 ‘고통’ 가운데 하나는 “촌철살인처럼 묻어나오는 필자들의 백색우월주의와그들의 눈에 비친 비하된 조선인의 모습”이었다며 그러나 “그들이 역사현장의 증인이었고 우리가 보지못한 우리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는점에서 참고 작업을 마쳤다”고 털어놨다. 신교수는 ‘선집’ 가운데서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매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등 3권을 학술적 자료가치가 우수한 기록으로 꼽았다.선교사 헐버트는 고종의 요청으로 내한,육영공원의 교사를 지냈으며 헤이그밀사사건 때 밀사들과 헤이그까지 동행하기도 했던인물.1949년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했다가 방한 1주일만에 별세,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뤄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영국 ‘데일리 메일’의 극동특파원으로 한국을 방문,러일전쟁에 종군했던 매켄지는 뒤이어 두 차례나 방한,의병활동과 3·1의거를 취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대한제국의비극’‘한국의 독립운동’을 출간하였다.미국인 그리피스는 자연과학도로고조선 이후 ‘을사조약’까지의 통사를 기록했다. 이밖에도 신교수는 미국외교관 출신으로 고종의 정치고문을 지낸 샌즈의‘조선비망록’,화가출신의 새비지-랜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또스페인의 저명한 사냥꾼 출신 베리만의 ‘한국의 야생동물’ 등을 들었다. 이 가운데 베리만은 1935년 방한,2년간에 걸쳐 조류만도 380종 이상을 포획해 갔는데 이는 당시 조류학자이던 창경원장이 파악한 350종 보다도 많은 종수다.베리만이 포획해간 조선산 야생동물들은 현재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에서보관중이다.신교수는 “베리만이 조선 전국의 산야를 다니며 시라소니·매·멧돼지·부엉이·날다람쥐·영양 등을 직접 포획하면서 기록한 그의 저서는 당시 조선의 식생·동물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것”이라며 이번에 출간한 ‘선집’이 근대제도사·생활사·예술사 등 관련학계에서 적극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화제의 책>

    [월스트리트 누구를…] 루디거 돈부시 미국 MIT경제학 교수는 “국제통화기금은 미국이 해외 경제정책을 추진하는데 쓰는 장난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 등을 통해 주식시장이 금융과 기업을 통제하는 미국식주식시장 모델을 아시아와 제3세계,옛 사회주의국가 등에 강권해 왔다. 이러한 ‘세계 금융의 미국화’는 세계 금융시장이 미국 금융시장의 메카인월스트리트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더그 헨우드의 ‘월스트리트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는 우리에게도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과 금융논리를 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이주명 옮김,사계절 1만3,000원).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에서 경제전문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라고 전제하고 주식·채권·파생상품·뮤추얼펀드 등의 금융상품에서부터 증권시장과 기업의 관계,금융과 실물경제,미국정부의 거시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월스트리트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편제국 일본] 일본 아이치대학의 구라하시 마사나오 교수가 펴낸 ‘숨겨온 국가범죄를 파헤친다!-아편제국 일본’은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적 마약범죄를 고발한다.(박강 옮김,지식산업사 1만원). “일본은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아편을 활용했으며 식민지였던 한국·대만·만주 등에서 아편을 통한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은 1919년 이후 한반도의 마약재배 면적을 크게 늘리고 교묘한 방법을이용해 아편습관이 없던 조선인들을 중독자로 만들어 갔다”고 지은이는 강조했다. 그는 1932년 일본 내무성 발표는 조선인의 마약중독자가 4,044명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70여만명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산한다. 19세기 후반부터 70년대까지의 일본 마약정책 흐름을 통시적으로 파헤친 이 책은 국제법상 범죄행위인 일본의 마약 제조·밀매행위는 패전후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은폐돼 왔다고 쓰고 있다.
  • [인터뷰] 병인양요 공동연구 추진 정문연 한상진원장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에 새로운 해법이 제시됐다.외규장각 도서약탈 사건의 도화선이 된 병인양요(丙寅洋擾)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 외규장각 도서 문제에 접근하자는 것이다.한상진(韓相震)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은 최근 대한매일신보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난달 말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과 관련,프랑스가 선임한 민간 전문가 자크 살로와와 가진 4차례 협상에서 이같은 해법에 합의했다고 밝혔다.그는 병인양요 사태를 연구하게 될 학자,서지학자 등민간 전문가팀을 이 달말 또는 다음달 초에 구성할 것이라며 과거사 정리는 문화재 반환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병인양요는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병인사옥)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으로 앞서 일어난 병인사옥(丙寅邪獄)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됐다.인터뷰 내용을 간추린다. ●병인양요에 대해 공동연구를 제의하게 된 배경은. 외규장각 도서반환에 있어서 두 나라는 서로 평행선만을 그어왔다.우리는불법으로 약탈해간 도서를 돌려달라는 것이고 프랑스는 등가(等價)의 문화재를 주면 무기한 대여하겠다는 것이다.서로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한 해결책은 찾기 어렵다.그래서 도서약탈의 원인이 된 병인양요에 대해 먼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협상은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민간 공동연구의 효과로는 어떤 것이 있나. 프랑스 국민들은 외규장각 문제에 대해 너무 모른다.따라서 외규장각 도서약탈사건을 촉발시킨 병인양요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외규장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병인양요를 다루다 보면 자연 가톨릭교도들도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알다시피 프랑스는 가톨릭세력이 강하다.프랑스 외방정교회 소속으로 우리나라에서 45년간 살고 있는 드봉주교 등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그들은 또 프랑스 가톨릭에 일정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공동연구는 누가 제의했나. 내가 했다. ●자크 살로와의 이에 대한 입장은. 전폭적으로 동의했다.이달말이나 6월초 서로민간차원의 연구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본질을 흐려놓는다는 비난이 제기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우려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서로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 현재의 대치 국면에서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당시 가톨릭이 박해를 받은것도 사실이고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을 불지르고 도서를 약탈해간 것도사실이다.민간 차원의 연구가 진행되다 보면 우리나라나 프랑스나 자기성찰의 기회가 될 것이다.과거의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이를 함께 집필하는것은 과거청산과 화해를 위한 필요한 과정이다.나아가 문화재 반환의 토대가 될 것이다. ●자크 살로와와 몇번 협상을 했으며 협상분위기는 어떠했나. 4월29,30일 오전,오후 모두 4차례 만났다.통역없이 영어로 협상을 했다.우호적인 분위기였으며 서로가 여론 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첫날에는 단둘이 만났으며 이튿날에는 기록자가 배석했다.5월1일에는 해인사,2일에는 경주 석굴암,3일에는 서울대 외규장각을 함께 방문했다.상호신뢰를 많이쌓았다. ●자크 살로와에 대한 인상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 회담은 언제 열리나. 오는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다.
  • [외언내언] 북한 군사우위정책 /장청수 논설위원

    4월25일은 북한 인민군 창건 67주년 기념일이다.북한은 48년 2월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당초 이날을 창군일로 기념해 오다가 지난 78년부터 김일성(金日成)이 만주에서 조직했다는 반일인민유격대 결성일인 32년 4월25일로 바꿨다.알려진대로 북한 인민군은 6·25동족상잔을 일으킨 주력군으로 또는 북한 사회주의 존립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군의 위상과 역할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金正日)체제 출범이후에도 지속돼 무소불위를 자랑하고 있다.김정일체제 출범 이후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이며 당’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당우위에서 군사우위정책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체제고수를 위한 군대의 중요성을 거듭강조하는 등 북한군의 제고된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북의 이같은 군사우위정책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으며 김일성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해 군장성 79명을 대거 승진시킨 것은군사우위성을 잘 보여준 대목이다.북한의 이같은 군사중시 정책은 김정일이군에대한 지속적 관심과 배려를 표명함으로써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위축된군의 사기진작을 통해 절대적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군부에 대한 카리스마가 약한 김정일로서는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통치 전략으로 이해된다. 김정일체제 출범과 맞물린 북의 군사우위정책은 과다한 군사유지비로 북한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북한 군부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할 경우 한반도 안보에 위기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도 군사우위정책은 포기돼야 한다.총칼로 유지되는 정권은 총칼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은 세계사적 교훈이다.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도 결국 비극적 종말을 고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며 이는역사의 필연이다.현 시점에서 북한당국이 선택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무리한 군사우위정책을 포기하고 남북당국간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을 제도화하는 일이다.그리고 과다한 군사비 지출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중단하고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그 길이 바로 북한의 체제말기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제2공화국과 張勉](17)-봇물터진 통일론:上

    제2공화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단 이후 통일논의가 가장 활발한 시대였다는 점이다.‘반공으로 동이 트고 해가 저무는’이승만(李承晩)정권 때나 5·16후 한세대 동안 지속된 군부권위주의 정권 때는 물론이고,그후에도 2공(共)시기처럼 남북통일이 국가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활기찬 이슈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면서 ‘북진통일’로 대표되는 무력통일론은 자연히 도태된다.허정(許政)과도정부가 1960년 5월3일 국가의 근본방침을 밝히면서 “과거보다 더 견실하게 반공정책을 펴 나가겠지만 허장성세하는 물질적·정신적 낭비를 없애는 대신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방위태세를 확립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로써 집단이건,개인이건 통일방안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민·참의원을 새로 뽑는 ‘7·29총선’이다가오자 통일론은 주요한 선거 이슈가 되었다. 통일론을 먼저 제기해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킨 정치세력은 혁신계였다.하지만 혁신계의 분열을 반영하듯 그 무렵의 주장은 다양했다.한국사회당(대표 錢鎭漢)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되 통일조국은 민주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고,혁신동지연맹(張建相)은 “민주적인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혁신당(高貞勳)은 “김일성(金日成)괴뢰가 타도돼 자유로운 정권으로 바뀌면 남북교류를 허용하고 그 다음에 남북 총선거로 평화통일을 기한다”는 일정을 발표했다.혁신계라고는 하지만 통일정책은 이처럼 ‘반공’의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보수·혁신 양 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당과 사회대중당도 총선 직전 통일정책 공약을 내놓는다.사회대중당(徐相日)은 7월22일 성명에서 ▲정당·학계를망라한 협의기구를 설립하고 ▲유엔이 선정해 우리가 승인한 국가로 감시단을 구성,자유총선거를 치러야 하며 ▲경제건설 및 대외정책이 국토통일의 성취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개했다. 민주당도 나흘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자유선거 ▲선거감시단은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회원국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선거전 남북연합위원회 구성’과 ‘통일 전 남북교류’는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 총선이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8월13일 취임사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이보다 앞서 이루어야 할 근본문제는 남한이 혼란에서 벗어나 국력을 부강케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장면(張勉)총리도 민의원에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같은 통일방안을 밝힌다.‘선(先)건설,후(後)통일’이 장면정부의 기본정책으로 확립된 것이다. 장면정부가 ‘선건설 후통일’을 내세운 데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4월혁명 뒤처리를 맡은 정부로서 당면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어차피 단기간에 해결하지 못하는 통일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는 어려웠다.따라서 장면정부는통일논의에서 소극적·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면 내각에서 내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김영구(金永求·고려대 법학과교수출신)는 “그때 시급한 과제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어떻게 먹여살리느냐와,4·19이후 쏟아진 각계의 욕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면서 “솔직히 통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김 전차관은 “통일문제는 형식상 외무부에서 관장했지만 사실은 주무부처가 따로 없었던 셈”이라면서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장총리가 그때그때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7·29 총선’에서 참패해 원외 세력으로 남은 혁신계는 돌파구를 통일논의에서 찾는다.총선 당시의 애매모호하던 통일논리를 강화해 ‘선통일후건설’을 내세웠다.장면정부의 ‘선건설 후통일’이란 결국 통일을 하지않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통일지상주의를 강조했다. 혁신계 정당·단체들은 통일에 관한 이념과 행동을 통합하고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를 구성한다.9월15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민자통은 사회대중당·사회당 등 혁신정당,천도교·유도회 등 종교단체,민주민족청년동맹·4월학생혁명연합회 등 청년단체가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혁신계가 새로 가다듬은 ‘무기’가 남북교류운동,그리고중립화통일운동이었다.남북교류운동이란 사람·편지·문화예술·체육 교류를 가져민족의 동질성을 살리자는 것과,남는 경제재(經濟財)를 주고 필요한 것을 받아오는 물물교환을 하자는 두가지였다.이는 국민의 감성과 경제난에 호소하는 바가 커 큰 호응을 얻었다. 중립화운동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민자통은 9월 말 발표한 ‘통일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즉각적인 남북협상 ▲남북대표들의 ‘민족통일 전국최고위원회’구성 ▲외세 배격 ▲통일을 협의하는 남북대표자 회담 개최를 주장했다.그리고는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을 택할 것이냐,아니면 다른 형태를 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중립화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달쯤 뒤인 10월22일 미국에서 중립화론이 터져나왔다.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극동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한 것처럼 미국이 여러강대국들과 협의,한국을 중립화해 통일시켜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맨스필드의 제안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크게 고무돼 혁신동지연맹·사회대중당·사회당 등이 잇따라 지지성명을 발표한다.이어 부산대 학생들이 11월5일 ‘통한(統韓)궐기대회’에서 ‘외세의존적인 통일을 배격한 중립적인 무혈(無血)통일’을 제의하고 나섰다.학생들은 또 “현 정부와 국회는 실천 가능성이 없는 통일방안을 주장하지 말고 국민투표로써 통일방안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중립화 바람’은 통일논쟁이란 불씨를 거대한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그불길은,남북대치의 냉전구조에 토대를 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을 뿌리까지태울 기세로 밀려왔다. 이용원기자 ywyi@*북한의 대남정책 제2공화국 시절 통일논의의 세 축은 장면(張勉)정부,혁신계와 일부 학생 등 급진주의자들,그리고 북한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쪽은당연히 북한이다. ‘3·15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두차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인민봉기’로 규정했다.지난 97년 모 주간지가 공개한 푸자노프(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비망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960년 4월11일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이 발견돼 제2차 마산시위가 일어나자 조선노동당은 이를 ‘인민대중의 진정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한 데 이어 “시위가 인민봉기 유형을 띠고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대도시를 휩쓸고 있다”고 판단했다. ‘4·19’이틀 뒤 노동당은 “파국에 처한 남조선의 현사태를 수습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를 긴급 소집하자”고 제의한다.아울러 “평화적 통일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전체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남북조선 총선거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이 ‘7·29총선’국면에 들어가자 북한은 혁신계 정당·단체의 창설을적극 지지하고 나선다.6월13일 푸자노프를 만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는단 하나의 (혁신계)대중정당이 아니라 여러 당을 지지하며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대중사회당과 기타 정당이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7·29총선’결과에 큰 기대를 걸어 “혁신계에서 35명 가량이 당선될 것같다“고 전망하지만 실제로 당선자는 민·참의원 합해 7명에 그쳤다.게다가 그들은 북한이 보수파로 분류한 인사들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듯 북한은 전략을 바꿔 ‘남북연방제’를 제안한다.김일성은 8월14일 열린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남조선 당국이 아직 자유로운 북남(北南)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먼저 민족의 긴급한 문제를해결하는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한다”면서 남북연방제를 처음 내놓는다. 김일성은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는 남북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보존하면서,두 정부 대표들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해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실시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남북연방제’제의는 과도적이자 단기적인 성격을 가졌다.연방을형성하면 곧바로 남북한 총선거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북한이 연방제를 제의하며 통일공세를 적극 강화한 이유는,혁신계의 평화통일 주장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유연한 통일방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남북연방제 안은 50년대후반 북한학계가 전체적으로 동원돼 벌인‘과도기논쟁’을 이론적으로 수렴한 것이기도 했다. 북한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일성의 남북연방제를 재확인하는 내용의 각서를 11월11일 유엔에 제출한다. 남북 총선거의 전단계 또는 대안으로 북한이 마련한 ‘과도적 연방제’안은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이용원기자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31)문명기

    ◆경북 영덕 최고부자 文明琦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기자를 찾아와 친일파·현대사 인물 등에 관한 자료(정보)를 제공해주는 분이 한 분 계신다.겨우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 분의 신상에 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다만 그 분이 건넨 자료 가운데는 대단히 우수한 것들이 많음에 번번이 놀랄 뿐이다.자료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통해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뿐이다. 특히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고,누구는 누구와 사돈간이고… 등등의 ‘사람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공간(公刊)된 자료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때로는 문헌자료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지난 겨울에 찾아와 건넨 그 분의메모 속에는 일제때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에 군납(軍納)을 하면서 떼돈을 번 손창식(孫昌植)을 비롯해 여러 명의 친일파가 등장한다.그런데 그중 한명은 한 때 자신이 그의 ‘괴짜인생’을 교훈으로 삼을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70년대 초반 어느 신문에서 그 사람의 출세비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그때는 그의 친일행적을 전연 몰랐다는 것이다.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일제때 경북 영덕 읍내 영덕경찰서장집 마당에 아침마다 팔뚝만한 삼치 한마리가 떨어져 있곤 했다.이를 이상히 여긴 그 집 식모가 어느날 아침 이를서장에게 고하자 서장은 주인공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며칠 만에 식모가 삼치를 떨어뜨리는 주인공을 잡고 보니 그는 지게에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파는 생선장수였다.마침내 서장이 나와 무슨 연유로 매일 아침 마당에 생선을 놓고가느냐고 묻자 그 생선장수는 “서장님께서 치안을 잘 유지시켜 주시니 덕택에 저 같은 사람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해서제가 파는 생선이나마 드려서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탄복한 서장이 “내가 뭐 도울 것은 없소?”하고 묻자 그는 “특별한 부탁은 없습니다만…밑천이 달려 물건을 많이 받아올 수가 없어서 겨우 지게꾼 행상을 하는 것이…”하고는 말끝을 흐렸다.그러자 서장이 “그럼내가 생선도매점에 소개장을 하나 써주겠소” 하고 약속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경찰서장의 소개장 덕에 그는 이 일대에서 생선장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생선을 미끼로 출세길을 튼 이사람은 일제 당시 경북 영덕 일대 최대의 부자 문명기(文明琦·창씨명 文明琦一郞)였다.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민족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문명기는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문승환(文承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씨 부자가 언제,어떤 경로로 경북 영덕에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1935년 간행)에 따르면 그는 29세 때인 명치 40년(1907년)쯤 제지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있다. 생선장사로 돈을 모은 그가 제지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 일대가 종이원료가 풍부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그는 자기 공장에서 종이를 생산하면서 다른 공장의 종이를 사서 이를 만주로 내다팔기도 하였다.사업이 번창해지자 그는 제지업계의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광제회(廣濟會)라는 재단법인을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아울러 그는 이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산업과 제지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금광사업에투자하였다.일제 당시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조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운(運)을 담보로 한 금광사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분야는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로부터 별 간섭 없이 진출할 수 있던 분야이자 조선인 토착자본의 집중 투기대상이기도 했다.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에 있던 금은광산을 인수,자신의 이름을 따 ‘문명광산’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향후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경북지방의 모퉁이인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35년 그가 육·해군기 각 1대씩 비용으로 10만원을 헌납하면서부터다.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금광을 일제 당국의 주선으로 일본유수의 미쓰코시(三越)측에 12만원을 받고 매각하고는 그 대금 가운데 10만원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다.어림잡아도 현재의 10억원 규모의 거액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문명기호(文明琦號)’로 명명하였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의 해군대신 대리가 참석하였고 행사 후 해군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매일신보 1935.4. 7). 이후 그는 곧바로 영덕 국방의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다시 재향군인회 특별회원,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 등에 선임되었다.일약 이 지역의 명사로 등장한 그는 뒤 이어 경북도회 의원,중추원 참의에 피선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명성과 함께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그는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하고는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전개했다.이후 전국에서 군 단위나 단체별로 헌납 주체의 이름을 딴 ‘애국기헌납운동’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밀양 지역의 ‘밀양호 (密陽號)헌납운동’의 경우 총모금액은 10만원,모금대상은 전 밀양주민인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당시 ‘헌납병 환자’ 또는 그의 이름을 빗댄 ‘야만기(野蠻琦)’ 등으로 불린 그는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원,4만원을 헌납하였다.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제창하고는 솔선하여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하였다(매일신보 1943.1.24).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강요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동적·소극적 친일을 한 반면 그의 친일은 다분히 의도적·적극적이라는 데 분명한 차이가있다.중일전쟁이 발발(1939.7.7)하자 그는 황군(皇軍·일본군) 위문차 북지(北支·북중국)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전쟁 미화를 골자로 한친일연설을 하였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경부선 주변 각도시를 순회하며위문결과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듬해에는 의남(義男)단원을 강제로 모집,수많은 조선청년을 북지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일어판 친일지 ‘조선신문’사장,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협조에 광분하였다. 그의 대표적 친일행각 중 하나는 그가 전시하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조선 내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비치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가미다나’란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영부(靈符)를 안치한 것으로,이를 집안 높은 곳에 비치해 조상신으로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국으로 보급하기 위해 광제회라는 보급단체를 조직,자신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을 명예회장에 추대,남산 조선신궁에서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는 1차로 서울시내 각 정회 총대(町會 總代,동장) 130여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눠주었다.이후로 조선 내 각 가정에서는 신사참배와 함께 일본황실의 조상을 강제로 받들어야만 했다. 평소 일본 신도(神道)의 철저한 맹신자였던 그는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것으로도 유명하다.집안 치장이나 의복·언어는 물론 생활방식까지도 전부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였다.1943년 7월 그는 황도선양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1949.1.29)돼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호적에 따르면 이후 행방불명돼 생사확인이 곤란하다.
  • 南北선박 충돌 별도 위로금 있나

    현대가 선박 충돌사고로 침몰한 북한 선박과 실종 선원에게 별도의 위로금을 지급할까. 이를 가늠해 볼 잣대는 두가지다. 국제관행에 따라 보험사가 피해를 충분히 보상할 지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플러스α로 반영될 것인가에 달려있다.사고처리와 관련,현대측 관계자는 “인도적 차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별도의 보상방침을 시사한다.반면다른 관계자는“국제관례에 따를 뿐”이라며 국제적인 보상원칙을 강조한다. 사고선박에 대한 보상은 남북선박사가 가입한 보험사의 사고조사 결과에 달려있다.현대는 현대해상과 국제선주상호책임보험인 영국 P&I브리태니아사에 보험을 들었다.북한측은 조선인민보험공사에 가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원인과 과실비율은 두 보험사가 합의한 국제전문기구에서 실사,책임과피해보상을 결정하게 된다.현재 피해액은 듀크호가 50만달러,만폭호가 100만달러로 추정되고 있다.현대의 최고보상금 규모는 4,243만달러,1인당 10만달러에 이른다. 북한측은 앞으로 별도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더군다나남북한 간에 정치외교적으로 미묘한 시점에서 북한이 순수한 해난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경우 해법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금강산사업의 분쟁시 제3국에서 해결을 모색한다는 양측간 합의가 실제로이번 선박사고에 준용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국내 대형사고시 보상금 외에 플러스 α가 보태져 해결된 전례 역시 현대측에 부담이 되고 있다.
  • [대한광장] 백년간의 대화, 근대화와 세계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1년간의 성과에 대해 그간 각계에서 다양한 평가와 검토가 있었다.경제위기를 극복한 것이나 남북관계의 진전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국내의 정치개혁이나 실업자 문제에는 미진했다는 비판도 있다.숱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론하는 것은 보다 거시적안목에서 철학과 세계관,그리고 역사적 평가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돌려 1세기 전 역사로 돌아가 보자.당시 우리사회의 화두는 ‘근대화’였으며,그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 ‘개혁’이었다.민중세력인 갑오농민군도 ‘폐정개혁안’을 제시했으며,개화파를 비롯한 선진적 근대화론자들도개혁을 주장하였다. 근대화 도정에서 이런 개혁안들은 피상적으로 보면 상당히 비슷한 것 같지만,기저의 세계관을 보면 ‘민족자주’와 ‘민중생존’ 등 두 문제에서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다.갑오정권의 수장 김홍집이 광화문에서 민중의 돌에 맞아죽은 것은 이러한 대립이 빚어낸 비극이었다.이후 근대화론자 중에서 ‘민족자주’와 ‘민중생존’을 방기한 자들은 식민주의자로 전락했고 그것을 수렴한 이들은 민족운동의 선진적 견인차로 역사에 등록되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사회의 화두는 ‘세계화’이고,그 방편으로 누구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현재의 문제도 본질적으로는 개혁이냐 수구냐가 아니라,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대립이며,그 축은 여전히 ‘민족자주’와 ‘민중생존’이다.더욱이 IMF 위기 후 두 문제는 생활현장에서 깊이 결합하여,이제 국제금융자본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 휴전상태가 전쟁위기설이라는 대립과 북미·북일 수교라는화해의 양면 갈등을 통해서 다시 조정되는 제도적 전환기이다.즉 우리는 ‘민족자주’와 ‘민중생존’,그리고 남북통일의 문제가 그 어느 시기보다도긴밀하게 연계된 역사적인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철학으로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하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그러나 워싱턴합의(Washington Consensus)나 국제금융자본의 이해에 자주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으며,민중의 생존권 또한 정리해고와 실업으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있다. 또 한·일어업협정이나 독도문제에서 보듯,일본은 여전히 국가이익에 매우충실하지만 우리는 ‘세계화’에 더욱 충실하다.앞으로 북·일간의 수교가진행될 때,우리가 맺은 한·일간 협약이 하나의 준거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1990년 북한 노동당과 일본 자민당·사회당의 3당합의문을 비교하면 그것을 유추할 수 있다.3당합의문에 명시되어 있는,하나의 한국과 평화통일에 대한 지지(5항)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인권과 민족적 권리에 대한 법적보장(4조) 등은 찾아볼 수 없고,약간의 경제적 지원과 일본과의 공동 군사훈련이 예정돼 있다.요컨대 이런 혼선은 ‘국가와 민족의 시대는 가고 이제 세계화의 시대’란 설익은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이다. 세계유수의 4대 강대국에 휩싸여 있는 한반도가 강대국이 되는 길은 한판승부나 단기간의 전략으로 성공할 수 없다.이것은 무엇보다 세기적인 과업,다시 말하면 자자손손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업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역사는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지 못한 극단의 시기,한반도에는 사대·식민·분열·망국이 찾아왔음을 증언하고 있다. 근대화의 도정에서 최고의 개혁가들이던 개화파들의 실수를 ‘세계화’의시기에,그것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반복하지는 말자.장기적인 안목에서 민중생존,민족 자주의 철학으로 차근차근 전진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도진순/창원대교수 한국사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