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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辛의장부친 日軍지원 독려 글 발견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辛相默)씨가 일본군 헌병으로 복무하면서 조선인들의 일본군 입대를 독려하는 글을 월간지 ‘삼천리’에 기고한 사실이 18일 확인됐다.신씨는 1941년 월간 ‘삼천리’ 1월호에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신상묵씨의 창씨 개명 이름)라는 이름으로 ‘지원병 일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출신지와 이력을 소개한 뒤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은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며 “물은 얕은 데로 흘으며(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외레이할(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자신의 일본군 입대 배경을 밝혔다.신씨는 이어 “내선일체가 되는 데 가장 먼저 할 것은 지원병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라며 조선 젊은이들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했다. 인천 연합
  • 계간지 ‘시평’ 가을호

    일본이 딴죽을 걸어온 독도 문제에다,중국이 고구려사를 두고 벌이는 음모적 편입시도가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인들의 현해탄을 노래한 시편이 소개돼 관심을 끈다. 계간 시전문지 ‘시평’ 가을호는 특집으로 ‘일본의 현해탄 관련 시들’을 기획,일제 때 서울에서 태어난 사이토 마모루의 ‘관부연락선’과 ‘달마 벼루’,다키구치 마사코의 ‘회상의 현해탄’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시편이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가 역사적 수탈과 수난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는 현해탄이 일본인들에게도 결코 고통 이상의 기억일 수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이토 마모루는 ‘관부연락선’에서 패망한 제국주의 신민의 회한을 왜곡없이 읊고 있다.‘배 아래의 삼등객실에 몸을 움츠리고/나는 어뢰가 숨겨진 바다의 겨울 추위에 눈을 감는다’거나 ‘나라가 망하고 난민으로서 부산의 불빛을 응시하던 날/나는 한 사람의 ‘왜놈’이었다’에서 드러나듯 패전으로 위태하게 몰려 벼랑 끝에 선 일본인의 표피적 감상이 자괴와 뒤섞여 역사의 복원력으로 나타나고 있다.그는 ‘조선 글자가 새겨진 연락선이 미끄러져 간다/아아,저것은 백제 관음상의 내 고향의 배’라며 태생지에 대해 갖는 원초적 향수와 ‘우리 민족의 죄없음’,‘조선인의 까닭없는 수난’에 대해서도 시인다운 회한을 토로한다. 그의 이런 정서는 ‘달마 벼루’에도 이어져 ‘나라가 망하고 목표도 없이 현해탄을 넘던 날/손에 익은 달마 벼루는 등에 있었다’며 자신의 일상을 단번에 바꿔버린 결정적 동인(動因)으로서의 패전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이토 마모루의 시가 지적 편향성,이지적 면모를 가졌다면 다키구치 마사코의 그것은 다분히 여류적이다.‘해조는 자라고/섬 게는 웅크린다/현해탄/그 앞에도 뒤에도/고향은 없었다’에서처럼 시인의 감성은 현해탄을 보며 ‘어디에도 없는 우리 민족의 실향’을 향해 시린 위안을 보내고 있다.또한 그것은 일본이든 중국이든,모든 나라의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에 대한 문학적 양심의 경고일 수도 있고….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서울광장] 남북경색 마침표 찍자/오풍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남북경색 마침표 찍자/오풍연 논설위원

    남북 관계가 답답하다.올여름 지루한 폭염만큼이나 숨막히는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지난달 19일 열기로 했던 남북 장성급 군사실무회담이 무산된 이후 경색국면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북측은 이달 3∼6일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던 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도 아무 연락없이 불참했다.언제 회담이 속개될지 모르는 형국이다.북측이 무성의하게 나오다 보니 우리로서도 자의든,타의든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북한이 왜 이렇게 나올까.첫 장성급 회담에 이어 군사실무회담을 잇따라 열고 서해상에서 핫라인 등을 가동하기로 합의할 때까지만 해도 남북 관계는 순항을 계속했다.그러나 우리 정부가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 조문을 불허하고,동남아 A국에 머물던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여기에 미국 하원은 얼마 전 탈북자들에 대한 막대한 재정지원을 담은 북조선인권법을 통과시켰다.말하자면 북한의 자존심과 체제 정통성을 건드린 셈이다. 무엇보다 탈북자 문제가 북한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듯하다.북 언론의 보도를 보더라도 그렇다.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지난 3일 조선중앙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탈북자들의 대규모 입국과 관련,“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라면서 “더욱 간과할 수 없는 것은 A국이 공모해 나선 것”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그동안 쉬쉬해왔던 북한이 A국을 지목한 것은 사실상 탈북자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이 A국을 겨냥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앞서 북한은 지난달 29일에는 조평통 대변인 성명을 통해 “남한 정부가 탈북자들을 대량으로 끌어가는 반민족행위를 감행했다.”고 비난했었다.제3국을 공식언급한 것은 처음이다.북한은 이번에 468명이 입국한 데 대해 놀란 것 같다. 국내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동남아 지역이 본격적인 탈북루트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A국뿐만 아니라 인근 동남아 국가들과 비정부단체들의 협조 가능성에 제약을 가하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는 국제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더 꼬여가고 있다.실제로 A국은 최근 탈북자 100여명을 중국으로 추방했다는 소식이다.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한 그들을 다시 사지(死地)로 돌려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이는 우리 정부가 외교력을 총동원해 해결할 일이다.이 문제를 제때,제대로 풀지 못하면 남북간 경색이 예상보다 오래갈 수 있다. 남북은 하루빨리 머리를 맞대야 한다.경색국면이 계속되면 남북 모두 득될 게 없다.장관급 회담과 군사실무회담을 빨리 속개하길 바란다.거기서 모든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면 된다.따지고,해명하고,의견을 같이하면 그만이다.동족끼리 ‘기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다. 다행히 북측은 최근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비무장지대내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중단했던 긴장완화 작업을 재개했다는 것이다.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북측은 지난 10∼11일 서너차례씩 남측 함정을 호출했다고 한다. 북측이 ‘한라산’을 먼저 부른 것은 지난 6월15일 핫라인이 가동된 후 처음이어서 주목된다.아울러 지난 8일부터는 북측이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물을 제거하는 작업도 관측됐다는 것이다.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기폭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9월말에는 제4차 6자회담이 예정돼 있다.또 북한의 정권창건일인 9·9절 행사도 기다리는 중이다.그 전에 물밑 협상을 갖고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경색국면의 ‘마침표’는 일찍 찍을수록 좋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왜놈 대포·탱크 못쓰게 만들라”

    일제 치하에서 광복군이 일본군에 끌려간 한국인들에게 일본군의 분열과 내부 교란을 유도하는 내용의 전단이 처음으로 13일 공개됐다.이 전단은 김우전(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 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된 것으로 밝혀져,광복군 활동상과 관련해 주요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는 올 3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전단을 확보했으나,작성자를 알 길이 없어 광복회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선전문을 쓴 당사자가 다름아닌 김 회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으로 시작되는 전단에는 “조국이 광복할 시기는 왔다.…일군 내에서 작전에 방해와 손상을 주는 임무가 크다.…” 등 일본군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를 놓고 특정인의 친일 행각 여부를 판단할 때 일본군에서 활동했느냐의 사실만으로는 잣대로 삼을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광복군의 지시에 따라 일군을 탈출하지 않은 채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며 은밀히 내부교란 작전을 수행하다 광복을 맞았다면 친일파로 매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국사편찬위가 전단과 함께 공개한 자료 중에는 한 어머니가 일본군에 끌려간 아들에게 일제 만행을 고발하며 복수를 당부하는 내용의 서신도 포함돼 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아들 김명진에게 전해주시오.”라고 시작되는 편지는 “너는 왜놈들의 군대에 있는 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 왜놈의 대포와,탱크,비행기를 비밀리에 파괴하고 못쓰게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강제이주 한인들의 서러운 역사

    강제이주 한인들의 서러운 역사

    EBS는 광복절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주돼 아직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한인들의 아픈 역사를 조명하는 특집 다큐멘터리 2부작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연출 안태근)을 방영한다.제작진은 일제치하 한인들의 강제이주와 귀환 루트,규모 등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 30여명의 학자들과 함께 일본·러시아·중국 등 7개국에 걸쳐 현지 취재를 벌였다.그 결과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주 한인들이 500만명에 이른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 1부 ‘고향을 떠난 사람들’(14일 밤 11시)에서는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돼 일본 규슈와 기타큐슈,나가사키 등지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한인이 당시 조선인구의 20%에 이르는 500만명이나 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다. 2부 ‘머나먼 귀환’(15일 밤 11시)에서는 강제 이주된 한인 500만명 가운데 고국으로 귀환한 사람이 불과 300만명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그 이유가 일본의 책임 회피와 미군정의 소극적인 한인 귀환정책,대한민국 정부의 부재와 정치적 혼란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제작진은 강조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뉴스플러스] 北, 연일 ‘탈북자 입국’ 비난

    북한은 탈북자 468명의 남한 입국과 관련,대남 비난성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북한 조선인권연구협회는 30일 대변인 성명을 발표,“남조선 집권세력이 미국의 조종 아래 있지도 않은 우리의 ‘인권문제’를 거들며 ‘탈북자문제’를 정치화,국제화하고 있다.”며 “남조선 당국은 유인납치 만행이 빚어낼 엄중한 후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협회는 또 열린우리당이 탈북자 정착제도 개선안을 마련중이라고 지적한 뒤 “이는 6ㆍ15공동선언에 대한 전면도전”이라고 주장했다.앞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29일 탈북자 대규모 입국에 대해 “남조선 당국의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유인납치행위이자 백주의 테러범죄”라고 맹비난했다.
  • [하프타임] 北, 9개종목 36명 올림픽출전

    북한은 아테네올림픽에 9개 종목 36명의 선수를 포함,75명의 선수단을 파견한다고 조선신보가 29일 보도했다.29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판에 따르면 이동호 체육지도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한선수단은 마라톤(남 1,여 3) 유도(남1,여 5) 역도(남 1,여 3) 레슬링(1) 복싱(2) 다이빙(남 2,여 2) 체조(남 2,여 6) 탁구(남 1,여 3) 사격(남 2,여 1) 등 9개 종목에 출전한다.
  • 日 호세이大 국제문화학부 다카야나기 교수 본사 방문

    “서울신문의 100년 역사는 한국 근대 100년을 꿰뚫는 영광과 오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한국근현대사와 재일(在日)조선인 역사를 연구하는 저에겐 더없이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1904년 7월18일 창간된 이래 지난 18일 100번째 생일을 맞은 대한매일신보의 후신(後身) 서울신문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국제문화학부 다카야나기 도시오(高柳俊男·49) 교수가 29일 서울신문 100년사 편찬위원회를 방문했다. ‘항일언론사의 전설(傳說)’ 대한매일신보 영인본을 대학도서관에서 뒤지며 읽었다는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역사를 계승한 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했다는 지난 8일자 서울신문 보도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핏줄을 이어받은 서울신문의 역사는 한국근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므로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배우는 일본 대학생들에게 서울신문 100년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나름대로 연구해보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해외연구기간(안식년)을 맞아 9월 말까지 머물 예정인 그의 한국,한국사,한국인에 대한 천착은 지독한 구석이 있다.한국과 일본의 젊은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민족문제학회’의 멤버인 탓도 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대한매일신보 이외에도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친일파 단죄문제 등 광범위하다. 한국에서 배우지 않았음에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어지간한 사람은 일본인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다.일본에서 발행되던 계간지 ‘삼천리’의 영향을 받아 한국과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게된 그는 스터디그룹을 통해 한국말을 배우면서 국영 NHK TV가 한글강좌를 개설하도록 압력을 가해 관철시킨 이색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신문이 100년사를 발간하면서 ‘영광의 역사’인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오욕의 역사’인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역사도 함께 다룬 것을 뜻있게 생각한다.”며 ‘의미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노주석기자 joo@seoul.co.kr
  • [창간 100주년- 학술대회·지면분석]

    서울신문이 국내 현존 언론 중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독립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에도 바른 보도로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신보에서 시작되는 민족언론의 뿌리가 서울신문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이 시대에 대한매일신보가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학술회의가 지난 7일 열렸다.서울신문사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다. ●정리 논설위원실 1. 창간의 역사적 의의 /정진석 외대 명예교수 대한매일신보 창간 이래 오늘날까지 100년을 이어온 발자취는 한국 현대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암과 굴절이 많았다.이 신문이 한국의 언론사와 더불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고 중요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강의 침탈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창간돼 1904년부터 6년 동안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력한 항일언론을 펼쳤다.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는 매일신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됐다.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재출발했다가 한때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고,이제 또다시 서울신문이 됐다.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굴절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신문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자 소유주였던 배설이 영국인이었고,그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발행인 배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영국인이었기에 대한제국의 법률로는 처벌할 수 없었으며,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도 그를 추방하거나 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수 없었다.대한매일신보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됐다. 한국의 민족진영은 이 신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성원했다.반면에 일본은 이 항일신문을 침략정책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여겼다.영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치외법권을 손상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영국과 일본이 처음에는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 또는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결국은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하는 재판에 회부하게 됐다.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던 한말에 있었던 재판은 다섯 차례나 됐고,한국·영국·일본의 법관이 이를 다루었으며,재판 장소도 서울과 상하이까지 걸치게 됐다.재판은 한일병합 후까지 계속됐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기도 했고,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은 논설로써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으로는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따라서 이 신문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말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신문의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국한문·한글·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자주개화운동의 근본으로서 한글 사용을 주장했다.또한 지면에 실린 항일 시가(詩歌) 등은 국문학상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을 고종 또는 민족진영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나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경영한 주체는 배설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고종이나 민족진영의 자금지원이 있었지만,그것이 신문발간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울신문을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과거의 역사로부터 단절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관(史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그것은 언론의 역사를 민족사관(民族史觀)에서 파악하는가,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증사관(實證史觀)의 입장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1945년 11월23일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뀔 때에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이어받아 13738호부터 시작했다.제호는 바뀌었지만 신문의 역사는 계승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 3월23일부터는 매일신보의 역사를 단절하고 지령을 다시 조정했다. 1998년 11월11일부터는 단절시켰던 과거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지령도 새롭게 계산했다.대한매일신보를 지령에 넣되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부분은 지령에서 뺌으로써 매일신보를 건너뛰고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혔다.2004년 1월1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환원했다.이 날짜 지령은 20095호로 역시 한말 대한매일신보 지령을 합친 것이다.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역사를 이은 것이다. 2. 참여인물·언론사상/박정규 한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한 인물 중 배설과 양기탁에 대해서는 완벽할 정도로 연구가 이뤄져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객이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재직 기간 중 활동,지사(支社)설치 상황과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또,기명이 안된 사설의 집필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배설은 영문 논설이나 기사 외에 국한문판 신보에 직접 집필한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배설이 한국어로 쓴 기사라기보다 한국인 기자들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배설의 이름을 빌려 사회문제 등에 대해 맘껏 필봉을 휘둘렀다고 보아야 한다. 박은식은 성리학자였던 만큼 전통 한문체의 글을 썼다.1907년 박은식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신채호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논객이다.신채호는 애국사상이 담긴 특유의 선동적 문장을 통해 국민들의 국권회복 정신을 북돋우는 등 독자를 감동시켰다.양기탁의 글로 알려진 ‘학계(學界)의 화(花)’ 등 2편의 논설은 집필시점과 문체로 보아 신채호가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 경영 외에 국채보상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해 논설집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보는 국한문판 발행을 본격화하면서 1905년 평양,선천,장련 등 관서재방 세 곳에 최초의 지사를 설치하게 된다.장련의 지사는 백범 김구가 운영했다.1908년 평양 태극서관 지사장을 맡은 안태국은 교사이자 이 지역 신민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신보의 전국 지사 중 절반이 평안도에 집중 돼 있었던 것은 총무 양기탁이 이 지역 출신이었고 안태국과 같은 지사원의 활약에 힘입었기 때문이다.1910년 6월 전국 지사 수는 59개소,지사원은 250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신민회의 지방거점,국권회복운동가들로 추정할 수 있다.회계 임치정은 양기탁이 가장 신임한 동지였다.이완용 암살미수사건,신민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신채호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3. 국채보상운동 주도/이연 선문대 교수 차관을 이유로 조선민중을 식민지의 올가미에 옭아 매려는 일제의 획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현 수창초등학교 뒤 대성사 자리)에서 시작됐다.“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우리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강점하의 물산장려운동이나 해방 후 국산품 애용운동,1998년 IMF 이후의 금모으기 운동처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운동으로,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운동이었다.최초 발의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나,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농민들이나 봇짐장수,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적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을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게 동력이 됐다.이 신문들은 기사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와 당위성을 호소하면서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 및 납부금액을 게재해 온 국민들의 동참을 역설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조선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개탄했다고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조선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면서 갖은 탄압과 모략을 획책했다.일제는 을사 5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용구 등 친일파를 동원해 반대하는 책동을 일으키게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 배설 사장과 양기탁 총무는 이러한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일제는 결국 이들의 언론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배설의 국외추방과 양기탁을 탄압해 제거하기에 이른다. 4.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논설/김덕모 호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평가된다. 제1기는 창간 때부터 1905년 3월10일 일시 휴간 때까지의 시기이다.6면중 4면은 ‘The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영문면을 만들고,나머지 2면은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로 국문면을 만들었다. 제2기는 대한매일신보를 속간하기 시작한 1905년 8월11일부터 1907년 3월말까지의 단계다.이 시기에는 ‘을사5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제3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기 시작한 1907년 4월 초부터 대한매일신보사가 이장훈에게 팔려 양기탁 등 신민회 간부들이 대한매일신보사를 떠난 1910년 6월13일까지의 시기다. 제4기는 배설에 이어 사장직을 승계한 만함이 일제의 공작에 말려들어 회사 일체를 사원 이장훈에게 매도하고 귀국해버린 1910년 6월14일부터 일제가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병합하여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켜버린 1910년 8월29일까지의 2개월 반 간의 기간이다. 제1기에는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국가의 안녕질서에 대한 모든 주제에 대해 공평한 변론을 전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2기는 한국인의 문명지식을 계몽하고 세계 각국에 대한 견문을 공유하기 위한 개화의 목적에 역점이 두어졌다. 제3기 이후는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에 초점을 맞춰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가 개화기 구국계몽운동의 선봉이 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에 광무신문지법에 의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어왔다. 그러나 신용하 교수 등의 연구는 이러한 외적요인에 더하여 대한매일신보가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기관지가 된 이후 더욱 과감하게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논설 분석 결과로도 입증된다. 이 시기 논설은 민족의 자립정신,교육과 나라정신,산업진흥,친일언론과 단체에 대한 비판,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식민 지배를 감추기 위한 기만책임을 통렬히 비판하고,국채보상운동,헤이그 특사 파견,고종황제 퇴위,한일병합조약,동양척식회사 설립 등 역사적 사건을 맞을 때마다 과감하고 열렬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제 오늘의 신문들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5.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광고/안종묵 외대 연구원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게재했다.사기업인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의 안정적인 발행을 위해 광고가 중요했다. 창간 초기의 광고료는 1인치에 50전이었고 한달에 5원이었다.발행부수가 다른 신문의 3배 이상이어서 광고의 효과면에서 대단히 컸다.한글과 영문이 혼용된 6면이 발행된 시기에는 운수광고(16%),은행(14%),잡화점(9%) 등이 주요 광고주였다.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 13%,외국이 43%,미상이 44%다. 1907년 5월23일부터 발행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는 그해 하루 평균 5.26개이던 것이 1910년에는 10.25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대 광고업종은 약국,서적,사고광고 등이었다.약국 가운데 이응선의 종로 화평당약방과 이경봉의 남대문 제생당약방이 최대 광고주였다. 서적광고는 전체의 16.5%를 차지했다.애국계몽운동가인 이승훈이 운영하던 태극서관이라는 서점 광고가 집중적으로 등장했다.‘국한문신옥편’이라는 실용적인 서적부터 ‘서사건국지’‘애국부인전’ 등 국권회복을 자극하는 계몽적 성격의 서적들이 광고됐다. 1908년과 1909년에는 사고(社告)광고가 많이 등장하는데 명함 인쇄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사고였다.국채보상운동 취지를 제일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흥미로운 것은 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촉구하고 있을 때 일제 담배광고가 많이 광고되었던 점이다.이는 광고가 국채보상운동과는 큰 관계없이 운영되었음을 말해준다. 6.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독자 인식/김영희 서울대 강사 대한매일신보 독자들이 투고한 기서(寄書)에서 신문에 대해 가장 자주 요구한 것은 춘추필법으로 공정하게 계도하는 엄한 스승으로서의 언론의 모습이었다.다음으로 많이 주문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는 문명진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이 두 요인 또는 인식은 지금까지 개화기 신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설명된 것으로,이 시기 신문발행에 참여한 발행 주체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 일반 신문 독자들의 인식으로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로 자주 언급된 것으로 신문이 독립자유의 감발심(感發沈)을 격동케 하고,새로운 자각을 유발시킨다는 인식이었다.이러한 인식은 신문의 춘추필법과 지식 제공으로 자극을 받아 생성되는 기쁨,감격,분노,안타까움,흐뭇함 등의 정서적 반응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은 독자들이 남긴 다양한 글에서도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황현은 대한매일신보를 설명하면서 “각 신문사에서도 의병들을 폭도나 비류(匪類)로 칭하였지만 오직 매일신보는 의병으로 칭하며,그 논설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모두 폭로하였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 상태에까지 이르렀고,1년도 못되어 매일 간행되는 신문이 7000∼8000장이나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읽었던 김윤식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통쾌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이러한 논의들은 신문의 공공성을 지키면서 보도와 논평 기능을 통해 환경을 감시하고,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을 개명 진보로 이끌고자 한 대한매일신보의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한 대한매일신보의 모습을 신문의 전형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준다. 7.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잡보(사회면)/채백 부산대 교수 오늘날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하는 것이 ‘잡보’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 중에서는 사실보도가 전체의 76.1%를 차지했다.반면 의견이 개입된 기사,즉 사실+해설과 해설기사를 합치면 전체의 14.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독립신문의 분석결과와 비교해 보면 의견기사가 줄어들고 사실보도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부 관련 정보였다.전체의 24.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문제,유명인사 동정,관의 비리와 폐해 순서로 나타났다.사회문제 기사에서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활발했던 의병 관련 기사나 교육 관련 기사가 포함됐다. 독립신문에서는 해외토픽류의 흥미 위주의 기사가 있었지만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런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반면 일식이나 태풍,자살 기사 등이 ‘사고와 흥미거리’ 기사에 포함됐다. 잡보란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관련지역을 보면 한성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아 전체의 59.6%에 이른다.그밖의 지역은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외국에 대해서도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특히 일본이 가장 많았다. 잡보기사의 주인공도 다양했다.잡보 기사의 주인공으로는 지식인과 단체가 26.3%로 가장 많았고,그 다음으로 왕실과 정부가 22.3%를 차지했고,일반인이 15.6%로 그 뒤를 이었다. 잡보기사의 보도태도를 긍정,중립,비판 세가지로 분류해보면 긍적적이 6.8%,중립적이 85.8%,비판적이 7.4%의 분포를 보였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에 나타난 주요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기사의 건수가 독립신문에 비해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지면의 판형이 커지고 단수가 늘어나는 등의 외형적 요인 외에도 신문이 정착기에 들어가면서 취재여건이 다소나마 좋아졌던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다음으로는 사실보도와 중립적 보도태도가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이는 신문이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객관저널리즘에 좀 더 접근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사실보도 위주로 가면서 단위 기사의 분량도 점차 짧아지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세번째로는 기사의 관련 지역이나 주인공,정보원 등에서 특정의 편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이다.지역면에서는 한성,주인공이나 정보원 측면에서는 정부나 관리에 대한 의존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임영숙 칼럼] 서울신문 다시 보기

    “대한매일신보 100년의 역사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한국언론학회와 서울신문이 지난주 마련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토론자로 나선 한 언론학자가 던진 질문이다.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언론구국운동,애국계몽주의를 실천한 민족언론으로 요약되는데 언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보내는 그같은 찬사가 지닌 함정을 한번 생각해 보자는 얘기였다.즉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막강한 언론권력으로 비판 받고 있는 일부 신문의 일제 시대 ‘민족지적 성격’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역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그 진의가 무엇이건 간에 한국언론사에서 차지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전설적인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1945년 혁신 속간된 서울신문에 대해서는 일반의 이해가 부족한 듯싶다.4·19의거 때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사옥이 불탄 신문,군사 독재 정권시절 ‘권력의 나팔수’역할을 한 신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의 민족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민중주의를 실천하는 참신하고 진보적인 신문으로 출발했다.따라서 해방공간에서 가장 권위있는 신문이었다고 평가하는 언론학자들도 있다.당시 서울신문의 초대 사장은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으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위창 오세창이었다.한국 근대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만세보,대한민보 등 항일민족지를 창간한 언론계의 선구자였다. 또 한국 역사소설의 기념비적 걸작인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가 서울신문 고문으로 참여했고 어문학계의 권위자였던 그 아들 홍기문이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5년 11월23일자로 처음 발간된 서울신문은 창간호가 아닌 혁신속간호로 나왔다.지령도 1호가 아닌 제13738호였다.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은 것이지만 “일제의 괴뢰였던 매일신보의 성격을 불식하고 구국독립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였다. 좌우이념 대립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서울신문은 사설을 통해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하고 적확한 보도’를 다짐했다.특정 정치단체의 선전 전단 같은 신문이 난무했던 시절 좌우익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는다는 뜻에서 중립을 표방했다.서울신문의 혁신속간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어느정도였는지는 미 군정장관 아널드,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국민당 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조선공산당 이현상 등이 축하인사를 보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가 매일신보로 전락했듯이 서울신문도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중립적 노선을 지키지 못하고 독자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됐다.이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서울신문은 1998년 대한매일로 재창간됐고 사원들이 제1대 주주인 민영화를 이룩했다.그리고 5년동안 공정보도를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서울신문이 다시 태어났다. 앞서 한국언론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주문한 언론학자의 지적대로 오늘의 한국 언론은 독자의 신뢰를 잃었다.언론을 신뢰하는 독자는 19.5%,즉 5명중 1명도 안 된다는 것이 한국언론재단의 최근 수용자의식조사 결과이다. 대한매일신보를 뿌리로 해서 창간 100주년을 맞는 서울신문은 그 언론학자의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초심으로 돌아가 독자의 신뢰를 다시 찾도록 노력하겠다고.그것이 신문의 위기,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는 깨우쳐 준다고. 주필 ysi@seoul.co.kr˝
  • ‘성냥·담배 생산 극장·자장면·축구’ 인천이 효시네

    ‘성냥·담배 생산 극장·자장면·축구’ 인천이 효시네

    ‘우리나라에서 축구경기가 처음 열리고 성냥·자장면·쫄면 등이 탄생된 곳은 어디일까.’ 인천시는 최근 ‘개항과 교류의 도시 인천의 뿌리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최초·최고 54개 항목을 발굴해 발표했다. 국민적 스포츠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축구는 인천에서 비롯됐다.고종 19년인 1882년 6월 영국 해군함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온 영국 군인들은 선상 생활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부두에서 공을 찼다.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연안 주민들은 흰색 저고리에 대님을 맨 채 영국 선원들이 두고간 공을 찼던 것.이것이 한국 근대축구의 효시다. 또 다소 저급하지만 1950∼1970년대 군대 및 시중에서 널리 유행했던 노래 ‘성냥공장 아가씨’의 유래도 인천이다.성냥공장은 1886년 인천에서 처음 생겼다.이후 1917년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 2000여평 규모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朝鮮燐寸)’이 설립됐다.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이 회사에서는 남녀 직공 500여명이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생산했다. 지금은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공장’이 전국에서 유일하다. 외식하면 떠오르는 자장면과 쫄면의 원조도 인천이다.우리나라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중구 북성동에 1905년 생긴 중국음식점 ‘공화춘(共和春)’에서 부두노동자 등 서민들을 위해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도록 개발한 음식이 바로 자장면이다. 쫄면은 1970년 중구 경동에 있던 ‘광신제면’ 창업주가 냉면을 만들다가 우연히 불거져 나온 굵은 국수가락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이 청소년들이 즐기는 쫄면의 유래가 됐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땅의 기가 가장 센 곳은 인천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이다.마리산(摩利山),두악산(頭嶽山)으로도 불리는 마니산은 지기 탐지기의 분당 회전수가 65회로,기가 센 것으로 알려진 다른 지역 20∼30회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마니산을 기준으로 한라산 백록담과 백두산 천지의 거리가 똑같다고 한다.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현 애관극장),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최초로 담배를 생산한 동양연초회사,최초의 기독교 포교지 등이 인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말말말˙˙˙

    미국이 지난달 북핵 제3차 6자회담에서 내놓은 제안은 ‘트로이의 목마’일지도 모른다.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대미관은 의연히 엄하고 신중한 것이다.-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가 발행하는 조선신보 인터넷판,5일 시론에서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면서-˝
  • 위안부 강제징집 증거 일제때 판결문 첫 발견

    일제시대 일본군이 조선인 부녀자 현황을 파악,이를 근거로 종군위안부를 강제로 징집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판결문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가기록원은 2일 갑오경장 이후 일제시대까지의 판결문 45만건을 분류,정리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모집 상황 등을 가늠케 하는 판결문 9건을 확인했다고 밝혔다.1938년 10월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이 송명심(당시 43세·여·영암군 덕진면 장선리)씨에 대해 내린 판결문에는 마을 구장(현재 이장)이 동네 부녀자 현황을 조사할 때 송씨가 이웃 주민으로부터 송씨의 딸이 명단에 포함됐다는 얘기를 듣고 “무슨 까닭으로 조사표에 내 딸을 기재했느냐.황군 위문을 위해 12세 이상 40세 이하 처녀와 과부를 모집해 만주에 보낸다고 하는데 이번 조사도 그것 때문이냐.”고 따진 것으로 돼 있다.결국 송씨는 기소돼 유언비어 유포로 금고 4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러·日·몽골 “중국 고구려사 편입 난센스”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가 28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개막됐다.새달 7일까지 계속될 이 총회에서는 북한과 중국이 함께 심의를 요청한 ‘고구려 유적’이 동시에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될 것이 확실시된다.세계유산위 총회 개막일에 맞춰 한국JC(중앙회장 박상용)와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서경대교수)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고구려의 정체성’이란 주제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몽골 터키의 학자 81명이 참가해 30일까지 진행하는 이 학술회의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의 허구성을 비판하고,고구려뿐 아니라 중국 인접 민족과 국가의 학자들의 발제문과 토론을 통해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리여서 각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중국과 제3국 학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요약한다. ■ 중국의 입장과 반론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당초 3명의 중국 학자가 참가해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중국 정부가 세계유산회의 기간 중 학자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불발에 그쳤다.대신 중국학자들은 논문을 보내와 ‘고구려는 동북지역의 고대민족이며,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일제히 반발하며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우선 쑨진지(孫進己) 중국 선양동아연구중심 주임은 “고구려를 고려,오늘의 조선인으로 보는 선입견을 배제해야 하며 역사귀속과 현실의 계승을 분명히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와 중·한의 관계 및 귀속’이란 발제문을 통해 “왕씨 고려가 고구려의 3분의1의 토지와 4분의1의 인민을 계승했기 때문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지만 고구려의 다른 3분의2의 토지와 4분의3의 인민은 중국이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단지 조선(한국)인의 선인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특히 “고구려가 건립 초기 한(漢) 현토군 관할하의 한개의 후국이었고 후에 왕국으로 승진했으므로 고구려의 전기에는 조선(한국)역사상의 정권의 관할에 속할 수 없었고 후기에 고구려가 비록 중국의 중원의 전란을 틈타 중국의 많은 군현을 점령하였지만 고구려는 시종 중국의 역대 정부가 책봉한 고구려왕의 직을 접수하고 조공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에 고구려가 고조선 부여 신라 백제 등과 함께 기재되어 있고 조선시대 편찬된 동사강목,동국통감 등에도 고구려가 기재되어 있음을 들어 그것은 선입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박했다.최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을 문제삼아 두나라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공책봉관계는 남북조시대 중원왕조와 주변 제국의 군장들 사이에 책봉을 통한 외교적 관계에 불과하다.”며 “역사적 계승관계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후대에 누가 계승의식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응대했다. 장잉(張英) 지린성 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장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중국학자의 관점’에서 “중국학자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점은 일관되게 ‘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이란 점이며 일부 ‘일사양용론’(一史兩容論),혹은 고구려가 고대조선(한국)의 국가임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최근 모두 고구려사의 중국사임를 강조하고 있다.”며 그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 영토에 건립됐고 줄곧 중원왕조의 신복으로 책봉받았음을 들었다. 이에 대해 장보영 경북대 교수는 “고구려가 동북지역에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동북지역이 항상 중국민족의 영역인가.”라고 묻고 “중국역사상 여진의 금,거란의 요,만주의 청 등은 비중국민족으로 동북지역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했지만 중국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문화와 통치방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들이 후에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해서 이들을 중국인이라 부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제3국 학자들 입장 ●1세기에서 7세기에 걸친 왜(倭)와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의 성격에 대해(후루하타 도루·일본 金澤大學) 고구려가 존재한 시대의 왜(倭)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 관계를 검토하면 일본은 ‘외(外)’,즉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의 밖의 존재로서 자리매김됐다.고구려·백제·신라에서는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와 ‘외’의 이중성이 나타난다.이것은 한(漢)무제(武帝)가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해 ‘내’에 편재한 것과 관계돼 있다.중국왕조로서는 직접 통치할 수 없어도 그 땅까지 황제의 지배가 미친다고 이해한 것이다.그렇더라도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분리,취급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당대 사료에 보이는 ‘해동삼국(海東三國)’용어는 삼국을 일체의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현재의 중국이 고구려만을 분리해서 ‘고구려는 중국사(史)상의 변경지역민족정권’으로 주장함이 얼마나 비역사적인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몽골과 한국의 관계에 대하여(A 오치르·몽골국립역사박물관장) 고구려의 대부분 영토는 오늘날 한국인이 사는 지방 이외의 땅으로 분리되어 나갔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만들고 국가정책을 세우고 정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은 한국인이다.어떤 지역사회의 역사는 국가역사의 한 부분이다.그 국가를 최초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해 정책을 만들어 통치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 어느 민족의 정권임이 명확히 드러난다.고구려를 만든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며 고구려 역사도 한국의 역사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고대 한국인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아바예프 N 비아체스라보비치·러시아 투바대학) 원(原) 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 등과 맞물려 중요한 주제다.사얀-알타이 지역의 지명·인명이나 한국 고대문화의 주몽신화와 단군신화도 사얀-알타이민족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사에서의 유사성을 보여준다.그러나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특히 중원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았다.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쌍비,고대 투르크,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이 인종적·민족적 원류를 갖추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
  • 독립신문, 다시 읽기/서울대 독립신문강독회 엮음

    1896년 4월7일부터 1899년 12월4일까지 약 3년8개월 동안 간행된 ‘독립신문’은 한국의 근대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문학적 텍스트이자 사료이다.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아관파천,만민공동회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던 한국은 이른바 ‘안팎곱사등이’의 처지에 놓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조선’이라는 파이를 차지하려는 세계 열강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채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상황이었다.‘독립신문’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좌표 또는 방법을 선명하게 제시하면서 등장했다.서재필·윤치호·아펜젤러·앰벌리 등 계몽적 지식인과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이 신문은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문명의 바다’로 나아가자는 슬로건을 선명하게 내세운다. 바야흐로 ‘문명개화’의 계절이었다.문명개화라는 이름의 도도한 물결을 타지 못하는 한,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시대에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독립신문’ 곳곳에서 분출한다.자연스럽게도 조선의 문명화=서구화=근대화를 가로막는 모든 것은 ‘악’으로 간주된다.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듯이 문명의 시선에 포착된 조선의 풍경은 암울하기 이를 데 없다.무위도식하는 자가 판을 치며,거리는 불결하기 짝이 없고,관리들은 자기 뱃속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뿐만 아니라 ‘인민’들은 구습에 젖어 헤어나올 줄 모르고,제도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채 헛돌고만 있었다.깊디깊은 ‘조선병’! ‘독립신문’의 필진들은 이를 일컬어 ‘고질병’이라 했다. 이 고질병을 치유하고 ‘당당한 자주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이 신문은 교육의 진흥과 실업(實業)의 장려 그리고 제도의 개선 등등 일련의 개혁프로그램을 제시한다.즉 국가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내정을 닦아 외국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외교에 힘써서 통상 권리를 외국 사람에게 뺏기지 아니하며,토지를 외국인에게 주지 말며,정부를 조직하되 어진 사람과 능한 사람을 신용하여 외국 사람의 현혹한 말을 듣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인민들은 ‘시계의 부품’처럼 일체가 되어 각자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정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지 못할 경우 ‘불쌍한 조선인’은 남의 나라의 ‘노예’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 또한 잊지 않는다.이처럼 ‘독립신문’은 ‘계몽의 열정’으로 넘쳐흐른다. 서울대 정치학과 독립신문강독회에서 약 7년에 가까운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간행한 ‘독립신문,다시 읽기’(도서출판 푸른역사)는 ‘독립신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논설들을 가려 한자리에 모아놓았다.한글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100년 전의 텍스트에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이를 감안하여 이 책은 모든 논설들을 현대어로 바꾸고 세세한 주석을 달아 접근성을 높였다.독자들은 ‘말과 글에 의한 새로운 공론장’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독립신문’의 실질적 면모가 어떠했는지 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또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고 했던가.19세기말 한국의 계몽적 지식인들의 거친 호흡이 시간의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독립신문’의 문제의식과 개혁프로그램에 동의할 수도,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이다.1만 4500원. 정선태(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한신대 겸임교수)˝
  • 고이즈미, 조총련대회에 축전

    |도쿄 이춘규특파원|2002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1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일본 내에서 반북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활동이 크게 위협받았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지난 22일 2차 북·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조총련은 28일 도쿄도내 조선문화회관에서 최고의결기구인 제20회 전체회의를 개막했다.대회에서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축전을 통해 “북·일 관계개선을 위한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고,고이즈미 총리도 자민당 총재로서는 처음으로 조총련 전체대회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 대독하도록 하는 등 양자간에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기류였다. 3년마다 열리는 행사에서 서만술 의장은 개막사를 통해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관계정상화 의지를 표명,재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며 북·일 정상회담의 내용을 중점 보고했다. 조총련은 이날 새 시대를 이끌기 위한 동포 3,4세대의 전진 배치 방침을 밝히며 민족교육과 동포생활 봉사활동 등을 통해 재일 한국인 등과의 연대 강화도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아마리 아키라 자민당 수석 부간사장이 대독한 ‘자민당 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자민당을 대표해 축하의 뜻과 인사를 드린다.”면서 김정일 위원장과의 2차 북·일정상회담 내용을 4개 항목으로 나눠 소개했다.특히 조총련계 동포에 대한 차별 중지와 우호적 대응 방침을 전달했다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한반도의 안정과 일본과 한반도의 우호적 관계는 일본 자신의 안전보장과 동북아시아지역 평화·안정에 매우 중요하다.”면서 “북·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이에 대해 조총련 관계자는 “지금까지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겠다는 표현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taein@˝
  • 남북 장성급회담 26일 첫 개최

    제1회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26일 오전 10시 북한의 금강산지역에서 열린다. 국방부는 25일 “남북이 이날 오전 전화통지문을 통해 수석대표 직급문제를 비롯해 양측 대표단 명단 교환 등 사전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앞서 남북은 지난 14일 비무장지대 내 남북관리구역에서 연락장교 접촉을 갖고 회담 장소와 대표단 구성,왕래 절차 등을 논의한 뒤 전통문을 통해 추가 협상을 벌여왔다.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로는 매년 5∼6월 꽃게잡이철마다 서해상에서 조성되던 남북간 긴장완화 문제가 집중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회담 관계자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위한 문제들을 협의할 방침”이라며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 대책도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서해상 꽃게잡이로 인한 충돌방지에 초점을 맞춘 뒤 여건이 나아지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한 본질적인 군사문제로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회담 장소로는 금강산지역 내 온천장 인근의 북측시설로,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다.이번 회담의 양측 대표는 당초 소장급 이상의 장성이 맡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준장급 장성이 맡게 됐다. 남측에서는 수석대표인 박정화(합참 작전차장) 해군 준장을 포함해 5명이 참석하고,북측에서 안익산(준장에 해당) 인민무력부 소장 등 5명이 참가한다. 수석대표의 계급이 예상보다 낮아진 것은 당초 북측 대표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의 이찬복(중장) 상장의 건강이 나빠져 일선에 나서지 않고 있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한편 남북은 지난 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 13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쌍방 군사당국자회담을 ‘조속히’ 개최한다.”고 합의했고,5월 평양에서 열린 제1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회담 개최에 합의했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北·日 정상회담] 귀국2세 5명 ‘불안한 日정착’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인 피랍자 2세’ 5명이 22일 귀국했지만 이들이 일본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까지 상당한 시련이 예상된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만 16∼22세의 이들은 대학진학률이 10%선인 북한에서 모두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 또는 입학예정인 엘리트들이다.하지만 이들이 북한에서 습득한 교육학,컴퓨터·기계공학 등의 지식은 일본생활에 큰 도움이 안될 전망이다.이들의 부모들은 “일본어 회화 구사가 무리일 정도여서 아이들이 온 게 기쁘지만 심경은 복잡하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피랍자 2세중 일부는 귀국 뒤 불안해하는 모습을 비쳤고,부모들도 “지금부터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불안하다.애들도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특히 피랍자 2세가 지난 20년의 기억을 지우고,난생 처음 밟은 낯선 일본 땅에서,북한인에서 일본인으로 변신한 뒤 겪을 ‘정체성의 위기’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상호방문이란 정상외교 관례를 깨면서까지 재방북하도록 한 ‘일본인 납치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은 지난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총리의 첫번째 평양 방문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공식 시인,일본 내에서 우경화 바람이 거세게 일게 한 핵심 문제다. 일본인 납치는 주로 1977∼1980년 냉전 절정기에 이뤄졌다.2002년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를 인정한 일본인 13명 가운데 10명이 1977년부터 3년간 실종됐다. 일본인 납치는 북한의 대남공작 변천사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된다.북한은 한국전쟁 후 초기에는 직접 양성한 북한 공작원을 남파했고,이후에는 재일 조선인을 보내다가,이마저도 어려워지자 일본인을 활용하기로 방침을 바꿨다는 게 한·일 공안당국의 견해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된 김현희가 1991년 일본수사관의 사진대조 조사에서 실종된 일본인 다쿠치 야에코가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이은혜 선생’과 동일인물이라고 밝혀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었다.˝
  • 박영심할머니 북한 생존

    사진과 문서자료,증언 등이 일치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열리고 있는 제2회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에 참가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 니시노 루미코(52) 공동대표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박영심(82) 할머니가 사진과 문서자료,증언 등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공식 확인됐다고 20일 밝혔다. 니시노씨는 “박 할머니는 지난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지난 1944년 9월 미군 사진팀이 중국 윈난성 ‘라모’지역에서 찍은 4명의 조선인 위안부 사진 중 만삭의 위안부로 판명됐다.”고 밝혔다.지난해 미연방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발견된 25명의 조선인 전쟁포로 심문기록에도 박 할머니의 신상기록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심문기록에는 박 할머니가 지난 1939년 8월 북한 남포에서 난징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된 것으로 나와 있다. 니시노씨는 또 지난해 11월 북한,중국,일본 등 3국으로 구성된 위안부 공동조사단이 박 할머니와 함께 1939년 8월부터 1944년 9월까지 성노예로 일했던 중국 난징,미얀마 ‘라시오’지역,중국 윈난성 ‘라모’지역을 돌며 확인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연합˝
  • 계간지 ‘시평’ 여름호 아시아의 저항시인 특집

    “(전략)우리들은 함경도 남자와 여자/착취자의 반항에 대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온 조선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 차례 봉기에/피를 쏟은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고개를 처박고 염치없이 진지를 적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민족시인 누구인가가 썼음직한 이 시는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 시인 마키무라 고( 村浩·1912∼1938)가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 쓴 ‘간도 파르티잔의 노래’라는 시다.그가 이 시를 썼을 때는 고작 열 아홉살이었으며,어릴 때부터 ‘고치(高知)현의 천재’로 불렸던 이 소년작가는 그러나 ‘군국 일본’에의 맹종을 거부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 여섯에 정신병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이 시는 당시에 빛을 보지 못하고 출판사주가 기름종이에 싸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가 죽은지 25년 만에야 세상에 내놓았다.일본의 시인 사가와 아키(佐川亞紀)는 그를 두고 ‘반전과 아시아 침략 반대를 관철한 시인으로,일본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전한다. 시전문지 ‘시평’ 여름호는 마키무라 고를 비롯,항일 중국시인 따이왕수(戴望舒)와 히우 로안,프랑스에 저항한 베트남의 부 까오 등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저항시인들의 시편을 묶은 특집을 꾸몄다.그 시편에 드러나듯 전란에 휩싸인 지난 세기의 아시아 대륙은 살육과 착취,억압과 강탈이 이어져 어둡고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도 시인들은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진 나의 손바닥으로/이 광활한 대지를 어루만진다/이 쪽은 이미 잿더미로 변했고/저 쪽은 피와 진흙뿐이다(후략).” 이 시는 중국의 시인 따이왕수가 1942년 일제에 의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뒤 자신이 겪은 중일전쟁의 기억을 담아낸 항일시로,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렇듯 거칠 것 없이 내닫는 일본의 침략 행보였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심지어는 일본 내에서조차 저항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3년 전의 여름/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3000개의 뼈를 보았다/반 세기 전 그 마을에 일본 군대가 와서/마을 사람들을 벼랑 아래 모아놓고 총살시켜(중략)/나는 가끔 생각한다/그 뼈를 부러워하고 있어서/내가 살해당할 때도/그랬으면 좋겠다(후략).” 전후 세대로,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시인 도쿠히로 야스요(德弘康代)는 이렇게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양심으로 통렬한 자기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의 저항시도 처절하고 강인하다.“(전략)들판 가운데 흰 비석에/당신이 열사라고 써놓았다/당신을 그리며 나는,당신!동지!라고 불러본다/수 만의 마음중 일편단심이라고.” 베트남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시는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웠던 ‘시인 전사’ 부까오의 ‘도이산’이라는 시다.시편은 지난 세기 저항시들이 의도를 앞세워 포기해야 했던 문학적 미감(美感)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는 순수이면서 동시에 이념일 수 있고,싸움이면서 또한 화해이기도 하다.최근 다시 군국화하는 일본,그리고 모든 강대국에 대해 아시아인이 이 시에 담아 보내는 메시지는 ‘화해 그리고 끝없는 저항’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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