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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중국을 겨냥하여 ‘서해안 시대’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천은 서해안의 대중국 창구이자 교두보였다. 강화 고인돌과 단군의 유향(遺香)이 전해지고,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미추홀과 비류백제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의 거점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인천시의 남동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였기에 문학산과 승학산이야말로 지리·환경적으로 초기국가 단계의 도읍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외 창구로 기능하여 오늘날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를 거점으로 해 중국과 넘나들었다. 한강 하류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야말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때 이용한 바로 그 항로이다. 오늘날 능허대는 아파트촌에 뒤덮이고 말았으나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 하였듯 역사의 현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인천이 한반도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뜬’ 것은 역시나 조선시대가 아닐까.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온갖 역사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서해 뱃사람들에게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수, 즉 밀물이 몰려들면 바닷물은 강물 위로 뜨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물은 밑으로 깔리는 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천쪽에서 한강을 거슬러 행주나루를 거쳐 마포까지 직행하는 뱃길 노정을 이르는 말이다. 바로 그 뱃길을 따라서 열강들이 빈번하게 침범을 강행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포대가 이를 웅변해준다. 대개의 개항장이 시련을 겪으며 탄생했지만 인천만큼 열강들의 침략의 손길이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 뻗친 곳이 또 있으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는 바로 이런 개항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는 증거물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인천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으로, 선조들은 이들의 도래를 온몸으로 싸워 막았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운요호(雲揚號)사건(1875)을 감행했고, 끝내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으로 문을 열게 되었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구미 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니 은둔국 조선은 갑자기 봇물 터진 외압을 직접 받게 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는 하룻밤 새 개항장으로 둔갑하여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았다.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다.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다.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다. 수출입세를 관장한 해관(海關)만큼은 조선정부 관할이었다. 물론 해관 운영에 ‘왕초보’였기에 대대로 영국, 독일, 일본인 등이 도맡아 했고 그들은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개항장을 농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잘못된 협약서를 근거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수탈 과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시 수입된 면직물은 대부분 영국제로 일본인이 수출을 독점했는데 영국도 저렴한 세금을 관철시켰다. 제국주의 경제침탈의 전형적인 모습이 인천항에서 관철되었다. 개항 당시 서울은 ‘좋지 않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천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적었고, 총인구 2649명 중 쓰시마, 나가사키 사람들, 그리고 시모노세키가 위치한 야마구치(山口), 규슈의 오이타(大分)사람들이 주류였다. 일제침략기를 통해 대개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쪽 방언들이 즐겨 쓰였으며, 도쿄, 오사카, 쓰시마 등 여러 곳의 언어가 섞인 것을 ‘인천어’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인천에는 관리 세관원 은행원 회사원 무역상 중개인 운수업 하역업 여관 요리점 목욕탕 음식점 양주집 일본주점 약국 의사 사진사 이발업 재봉업 활판인쇄업 세탁소 양조장 대장간 오락실 과자점 창고업 고용직과 잡상 목수 석공 농업 등 온갖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장차 식민지가 될 조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청일전쟁 등이 터졌을때는 자발적으로 전선구호와 간호 등에 힘을 보탰으며 스스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즉, 개항장에 나와 있던 일본거류민들을 순수한 의미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일본의 관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움직였다.‘생돈’이 생기는 만큼 화려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치를 부렸다. 웅장한 반양반일(半洋半日) 가옥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개항장은 일본거류지, 각국거류지, 중국거류지로 삼분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확연하다. 은행건물 등이 남아있는 일본인 거리, 음식점이 즐비한 중국인 거리가 그것이다. 각국 거류지라고는 해도 19세기말에는 영국인 7명, 독일인 13명,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등이 거주했을 뿐이고 대개 일본·중국인들이었다. 그런데 각국거류지 회의는 인구비례가 아니라 국적별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서양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조차 영어로 진행하니 일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간척을 통해 땅을 확보, 도심을 불려나갔다. 오늘날 인천항 주변이 대부분 간척지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무하였던가. 인천 출신의 역사학자 임학성(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천객주협회를 모체로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역주한 ‘인천개항25년사’(1907)를 보면, 조선인들은 오늘로 치면 송월·전·복성·인현·경·신포·답·신생·사·유·신흥·선화·도원동 등에 몰려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항 초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상권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상업적 재기를 토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중국 상권도 몰락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다시금 성실하게 상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시가 중국인거리를 대대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집이나 운영하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들은 옥양목 같은 옷감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상권을 장악해 ‘비단장사 왕서방’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조선의 쌀을 싸게 사들여 일본에 되팔아 엄청난 돈을 거머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인철도가 부설되자 서울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는 물론이고 석유장사 등으로 일본인들 역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군인들이 자주 부르는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도 당시 이후 첨단 공장인 성냥공장이 인천에 많았음을 방증하며, 그만큼 선진적 공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의 하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제 인천은 일본인 대신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거니와 산둥반도 등지를 오가는 페리에서 사람과 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면 대하소설 삼국지를 연작 벽화로 그려놓아 길거리를 걸으면서 책읽기를 끝낼 수 있게 해놨다. 게다가 원조자장면집을 아예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박물관만큼은 ‘대박’이 예감된다. 하고많은 박물관 중에 자장면 박물관은 특이성도 돋보이지만 인천에 딱 어울리는 까닭이다. 김춘선 인천해양수산청장은 “거대한 대중국 서해시대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대북 통일시대의 거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포, 해주 등지를 오가는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지만 바닷길만큼은 항상 열려 있어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다. 인천항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건설된 파나마식운하의 물을 가두었다 풀어 놓는 갑문이 낙후해 머잖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야 할 형편이다. 갑문으로 가보니 5만t,10만t급의 거대한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인천항도 이제는 외항시대로 접어들었다.“인천항도 북항 등을 대대적으로 건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일제시대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연락선이 오고갔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바다를 통한 국제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의 교류가 근자에 이뤄졌음을 감안할 때, 바다를 통한 교류는 무려 반세기나 묶여 있다가 재개된 셈이다. 당시 인천은 ‘완연한 한국의 요코하마’로 불렸다. 국제 첨단 신도시로 개발되는 송도신도시가 완공되면 인근 인천공항과 더불어 인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니 돌고 도는 역사의 변화가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 日강제징용 진상규명 한·일 시민단체 연대

    일본 시민단체들이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피해 실태조사를 위해 전국 시민단체들의 연대모임인 ‘진상규명네트워크’를 결성키로 한데 이어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연대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방한한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에서 징용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이 활기를 띨 전망이다. 6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전기호)에 따르면 일본 시민단체들은 지난 3일 고베에서 조선인 징용자 피해 실태조사를 위한 진상규명네트워크 결성 예비모임을 가진 데 이어 오는 9일 방한, 국내 시민단체들과 연대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그는 또 “현재까지 접수한 진상조사 의뢰 23건 가운데 일본인들이 절반에 가까운 11건을 신청했다.”면서 “일본 시민단체들의 징용 진상조사 요청도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책꽂이]

    ●인도건축기행(안영배 지음, 다른세상 펴냄) 건축공학 교수를 지낸 지은이의 발과 시선을 따라 인도 전역의 중요 건축물 세계를 들여다본다. 인도건축은 중국, 한국, 일본을 잇는 동북아 건축과 서유럽 건축 사이에 있는 제3의 건축이라는 게 지은이의 시각이다.1만 8000원. ●아이코놀러지: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WJT 미첼 지음, 임산 옮김, 시지락 펴냄) 시카고대 영문학·미술사 교수인 지은이가 언어적 관점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다룬 저작이다.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고, 그 이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파헤친다.1만 8000원. ●고대사의 블랙박스(권삼윤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라있는 왕릉 가운데 세계문화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들을 직접 찾아보고 살펴본 테마기행서.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 등 고대 그리스 왕릉과 한·중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인 고구려 고분 등이 포함되어 있다.1만 2000원. ●중앙유라시아의 역사(고마쓰 하사오 등 지음, 이평래 옮김, 소나무 펴냄) 초원과 산악, 사막으로 이루어진 유라시아대륙의 통사를 담은 책.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신장위구르자치구, 우즈베키스탄, 티베트자치구, 중국 네이밍구자치구, 러시아 부랴트공화국, 투바공화국 등의 역사를 다룬다.3만원. ●미의 법문(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최재목·기정희 옮김, 이학사 펴냄) 일제 강점기때 일본의 조선 수탈정책과 조선인 동화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던 일본인인 지은이가 말년에 개척한 ‘불교미학’의 세계를 다룬다. 미에 관한 불교적 사색으로 세계를 반성하는 글을 담았다.1만 2000원. ●지식-생명·자연·과학의 모든 것(데틀레프 간텐등 지음, 인성기 옮김, 이끌리오 펴냄) 인류가 쌓아올린 자연과학이라는 지식의 탄생과 발전을 다룬다. 대륙과 대양, 동물과 인간, 뇌와 정신, 식물과 동물, 노화와 죽음을 폭넓게 기술하고, 각 지식간의 복잡한 연관관계와 진행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3만 8000원. ●에로스의 탄생(후베르투스 쿠들라 지음, 오순희 옮김, 이룸 펴냄)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속에 등장했던 연인들 32쌍의 이야기를 묶었다.‘큐피드와 프시케’ 등 신화속 연인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주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등 다채로운 사랑의 모습을 담았다.2만 3500원. ●젊은 날의 깨달음(조정래 등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조정래(소설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박노자(한국학교수) 고종석(언론인) 장회익(물리학자)김진애(건축가) 등 이 시대의 전문가이자 글쟁이 9인이 들려주는 삶과 젊음에 대한 에세이.1만원. ●열대우림에서 2년(윌리엄 로렌스 지음, 유인선 옮김 모티브북 펴냄) 스미스소니언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지은이의 열대우림 생태보고서. 호주 퀸즐랜드 열대우림지역에서 18개월간 현장연구를 수행하며 만난 동식물과 원주민,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펼쳐나간다.1만 2800원.
  • [韓·日 ‘징용자 유골’ 조사] 日 ‘한국인 유골’ 알고도 방치

    “유골 봉환은 최우선 해결책이 아니다.” 4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로 끌려갔다가 희생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유골문제 해결에 나서자 유족과 전문가들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 지적을 내놨다. 일본의 유골정책은 자국민 보호책의 일환으로만 진행돼 왔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인 유골이 매몰된 사실을 알고도 발굴하지 않았거나 사찰과 지방자치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관련자료에 대한 조사·공표작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지난 1948년부터 일부 봉환이 이루어졌지만 사망자의 신원과 사망원인 등이 파악되지 못한 상황에서 ‘봉환’에만 초점을 맞춰 수많은 문제점이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사망자 명부 발굴과 신원 확인, 유족확인, 미발굴 유해의 발굴작업 등 철저한 실태조사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고 있다. ●희생된 한국인 20만∼60만명 유골문제는 지난 60여년 동안 피해자의 정확한 수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제 말기 강제동원됐다 희생된 한국인의 숫자는 20만∼60만명으로 추산될 뿐이다. 정혜경 일제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조사1과장은 “강제연행 시기 동원인력에 대한 부조규정은 마련돼 있지만 유골처리에 관한 규정은 없고 일부 기업들이 규정을 마련했다고 하나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망자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위패와 유골이 합산돼 봉환된 경우, 관리부실로 썩은 유골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연대협의회에 참석했던 한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자국 중심적인 유골수집’ 문제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일본 후생성은 지난 1967년부터 2004년까지 유해수집사업의 예산을 153억 7000만엔으로 산정했지만 조선인 유골문제는 제외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 과장은 “무엇보다 유족들이 유골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큰 문제”라면서 “지난 2002년 일본 홋카이도지방에서 발굴된 유골사태는 가장 인도적으로 처리해야 할 유골문제를 얼마나 방치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태조사가 급선무 전문가들이 유골봉환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자는 취지다. 김창록 건국대 교수는 “유골의 사망과정과 원인을 규명하고 강제 동원된 지역의 미발굴 유골조사, 유류품 명부 등의 관련자료를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유족 확인이 될 경우 봉환의사를 물은 뒤 예의를 갖추는 것은 물론, 무연고 유골을 망향의 동산에 안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산 영산대 최영호 교수는 “이번에도 봉환중심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면 경색된 한·일관계를 외교적으로 타결하는 결과만 초래해 일본의 전후 책임을 자유롭게 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4일 연세대 연희관에서는 ‘대한제국기의 근대화’와 개혁사업을 주제로 연대 국학연구원과 UCLA간 공동학술대회가 열렸다. 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시기로 꼽히는 대한제국기를 되돌아보기 위한 자리다. 한국의 근대화 성격을 두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갈리는 지점도 여기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서 있기도 한 이번 공동학술대회의 좌장을 맡은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 교수를 학술대회 전에 만났다. 초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는 기자에서 생수 한 통을 건넨 뒤 김 교수는 “학계에서 일제시대 경제발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럼 무엇에서 차이가 나는가.“결국 역사변혁의 주체세력이 누구냐, 또 지금 한국 사회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기본생각 자체가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소농사회론의 맹점은 민중변혁 부정 식민지근대화론은 조선에는 서구적 근대화의 계기인 ‘경영형 부농(富農)’이 없고 자급자족적인 ‘소농(小農)’만 있었다는 ‘소농사회론’을 내세우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소농사회는 부르주아처럼 서구적 방식의 근대화를 이끌 계층이 없어 강력한 국가권력이 개입합니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 권력을 1930년대 일제 파쇼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이들은 또 그 이전 갑신정변 같은 개화파의 움직임이나 광무개혁 같은 고종의 근대화 작업을 모두 부정할 뿐 아니라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적 변혁의 가능성도 부인한다. 조선의 변혁가능성 자체를 봉인한다는 점에서 일제가 내세웠던 ‘조선정체론’과도 비슷하다. 이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긍정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침 식민지근대화론자로 꼽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지난달 29일 열린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서 박정희 시대에 따라다니는 ‘저임금에 기반해 성장했다.’는 꼬리표를 떼버리자고 주장했다. 임금률과 한계노동생산성의 증가 추이가 비슷해 결코 저임금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교수의 논리상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수탈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본이 축적되니까요. 수탈은 결국 저임금구조입니다. 이건 영국 등 수많은 국가에서 확인된 사례들입니다. 박정희 시대라면 저임금 대상은 노동자·농민이고, 식민시대라면 조선인이 되는 것이지요.”박정희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계급·계층간 차별을 함께 봐야 하듯, 식민시대에서도 경제성장과 동시에 일본인·한국인간 차별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식민시대를 긍정하려면 박정희 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려면 식민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서 나온다. 한·일 양국 우익 세력의 논리적 친화성에 대한 설명이다. ●식민시대 ‘삶의 질’·‘역동성’ 주목해야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역사란 사실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따져야 합니다.” 김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 ‘민족’ 같은 개념이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개인이 쓰는 일기에도 ‘나’라는 주인공이 있지 않습니까.”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간 논쟁에 대한 대안으로 김 교수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들이 빚어내는 ‘역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했다.“고종과 개화파와 농민운동 등 조선 내부에서도 근대화 움직임이 있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현실은 힘의 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국면마다 이들간 역학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다이내믹한 상황을 봐야 합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종 보면 근대화 파악 가능 고종은 개명군주였나, 도학군주였나, 절대군주였나. 지난해 교수신문 지상을 통해 6개월여 동안 벌어진 논쟁의 주제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고종이 근대화를 지향했느냐, 안 했다면 전통적 유교 군주에 불과했느냐 아니면 러시아의 차르와 같은 서구적 의미의 ‘왕’을 지향했느냐다. 이 논쟁은 단순히 고종 개인에 대한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고종 시대가 곧 한국 근대의 뿌리였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근대화의 싹이 한국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 논쟁의 뿌리는 30여년 전인 1976년 광무개혁 성격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무개혁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부터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작업이다. 이 작업이 실체가 있었느냐를 두고 두 입장이 다퉜다. 신용하 교수 등이 주도한 쪽에서는 개화파에 무게를 뒀기에 왕권강화에 초점이 맞춰진 광무개혁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반면 김용섭·강만길 교수쪽은 외세에 기댄 개화파보다 동학혁명에서 엿볼 수 있는 농민의 자생적 힘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뒀다. 이 관점에서 광무개혁은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특히 김용섭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경제를 분석, 이때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 주장은 박정희시대 국사교육 강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신화라는 비판도 받았다. 시간이 흐른 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조금 색다른 관점을 내놨다. 김용섭·강만길 교수처럼 조선 스스로 근대화하려 했다고 보되 그 힘을 농민에게서가 아니라 고종에게서 찾은 것이다. 이 교수가 고종과 광무개혁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 등 최근 부상하고 있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반대로 대한제국은 파탄 직전이었기에 굳이 살펴볼 가치를 못 느낀다는 입장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고종은 외세의 바람 앞에서도 유교 경전이나 외우던, 혹은 이미 기진맥진한 조선을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도학군주일 뿐이다. 반면 고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과대평가하는 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쪽에서는 고종이 서양의 절대군주제를 지향했다고 보는 지적도 있다. 고종의 지향점을 러시아의 차르로 보고 있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가 대표적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리민(李敏·81) 여사는 10년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을 지낸 천레이(陳雷·90)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다. 12살에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여 동안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과 함께 당시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인근 브야츠크 마을의 소련군 야영지에서 88특별여단에 편입됐다. 리 여사는 이 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났다. 리 여사는 후에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리 여사는 하얼빈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노전사답게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60년이 넘는 과거사임에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2~45년까지 김일성부부와 활동 리 여사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북한 지도자로 옹립됐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리 여사는 “당시 88여단 내에서 최용건과 김책 등이 김일성보다 상급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투쟁 방향과 진로를 모색하는 내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해방 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88여단의 소련측 책임자가 ‘조선인 가운데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최용건 등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우리보다 젊다.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추대 이유를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문학적 재능 많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88여단 시절 ‘단결무’라는 가무극을 직접 만들어 조선인 부하들과 함께 공연하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리 여사는 “정열적이고 활달했던 김일성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줬으며 문학적 재능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여사는 당시 김일성이 직접 작사했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해….”라는 노래인데 당시 조선인 전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결혼 주례 김일성과의 일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 주례 사건이다. 당시 리 여사는 중국인 천레이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다. 천레이는 자아비판과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된 상태였고 조선인 동지들도 리민의 장래를 위해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가 아닌 ‘혁명적 동지의 결합’이란 김정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일성이 중국인 지도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1943년 섣달 그믐날 리민 부부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날 최광·김옥순 부부도 백년가약을 맺었다. 리민 부부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는 각별한 관계였다.9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통역없이 이들을 단독 접견했다. ●김정일은 전쟁놀이 즐겼던 골목대장 리 여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을 42년 가을로 기억하고 있다.“42년 가을 강보에 싸인 젖먹이 김정일을 처음 봤다. 이후 45년 8월15일까지 김정일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당시 리 여사는 통신대대에 근무, 상관인 최용건을 자주 만났다.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막사에 가면 가끔 어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피부가 검은 데다 키가 작고 총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김정일은 아버지의 큰 모자를 쓰고 목총을 갖고 군대놀이를 즐겨했다. 큰 모자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막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중국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엄마, 아빠’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전해지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파티가 벌어지고 흥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바지를 입기 싫어하던 김정일이 이날만은 스스로 바지를 찾아 입고 또래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94년 7월20일 김일성 주석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리민 부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대는 무례를 범했다.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김 위원장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서였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의 천레이 부부 접견 사진은 이례적으로 노동신문에 공개됐다. 리민 부부는 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만주 항일전사 리민 리 여사의 항일 투쟁은 남한의 역사책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30년대 만주 항일 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조선의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창립했다. 이 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45년 종전 당시 1000여명 가운데 3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리민은 중국인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1로군(동만주),2로군(지린성 동부),3로군(북만주)으로 재편된다. 당시 김일성은 1로군 제2방면 6사장(師長·대대장급)으로 일본군에 의해 동북항일연군이 와해되는 시점인 41년 전후로 상급자들이 대부분 사망,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최용건은 2로군, 김책은 3로군 소속이었지만 김일성보다 나이는 물론 직책도 높았다. 1924년 헤이룽장 오동하에서 태어난 리 여사는 부모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너 헤이룽장 삼강평원에 정착했다.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했고 천레이는 오빠와 절친한 전우였다. 리 여사는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유격대원들의 취사 보조원, 간호원 등 비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리 여사는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7∼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완달산 등지에서 큰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3로군은 기병대가 주력인 일본군에 맞서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의 늪지대로 퇴각하는 유격전술을 폈다. 1938년 여름 완달산 전투에서는 300여명의 부대원 가운데 고작 60여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군인과 개척단 수천명을 동원, 동서남 3면을 포위하고 고립 전술을 폈다. 서서히 좁혀 오는 포위망 속에서 6일간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결국 북쪽 절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상당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리 여사는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가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고 회상했다. 일본군은 30년대 말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앴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런 대로 참았지만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전우들의 배반이 가장 가슴 아팠다. 리 여사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그가 속한 3로군은 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갔다. 천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66∼76년) 당시 반동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실권 장악과 함께 복권됐다. oilman@seoul.co.kr ● 리민 여사는 1924년 중국 헤이룽장성 오동하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942∼1945년 김일성 주석과 부인 김정숙 등 북한 핵심 인사들과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중국인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식 주례를 김일성 주석이 할 정도였다.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렸다가 복권됐으며, 남편 천은 후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10년간 지냈고, 리 여사 역시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설훈 전의원 만난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항일 전사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천레이(陳雷·90)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의 부인이자 정협 부주석을 지낸 리민(李敏·81)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리해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기 위해 찾아온 설훈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항일동북연군에서 10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리 여사는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6·15 공동선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리 여사는 “2002년 6·15선언 2주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도자기’ 2개를 만들어 그 중 하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지만 김대중 선생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동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은 설 전 의원은 “리민 여사의 통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남은 여생 동안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말했다. 리민 여사가 기증한 통일기원 도자기는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oilman@seoul.co.kr
  • 日외상 “시베리아 억류 한인피해자 지원 검토”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구혜영기자|독도 및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본 정부의 고위인사가 ‘시베리아 억류 한국 피해자’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자발적인 지원의사를 언급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2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무라 외무상이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와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의 지원 문제를 관계 부처와 협의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언급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공조 분위기 확산으로 번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치무라 외무상의 언급은 이날 외무위원회에서 곤노 아즈마(일본 미야기 1구 소속) 중의원이 지난 1945년 종전 이후 시베리아에 억류된 한국인 피해자의 지원요청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나왔다. 이에 따라 한·일협정 당시 제외됐던 전후 한국인 피해자 지원 문제도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곤노 의원은 이와 관련,“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큰 진전”이라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치무라 외무상의 발언은) 향후 사태해결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의원 회의 당시 한국에 대한 전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곤노 의원의 질의에 대해 마치무라 외무상은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됐고 법조문에도 전·후 관련 별도 조항은 없다는 식으로 일단 단호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 이병주 회장은 “향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 병사 유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인 전몰자 참배와 위령비 건립, 피해자 보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고 한국 정부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문제는 지난 1945년 8월 종전 이후 60여만명의 한·일 양국 출신 징용자들이 4년여 동안 시베리아 지역으로 압송,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제징집과 강제노역 등에 따르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koohy@seoul.co.kr
  • “혹한·배고픔에 韓人 1000여명 목숨 잃어”

    “혹한·배고픔에 韓人 1000여명 목숨 잃어”

    “동토(凍土)의 땅에서 떠도는 동료들의 원한을 이제야 풀려나….”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마치무라 외무상의 대답을 전해들은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朔風會)’ 이병주(81·인천 계양구 오류동) 회장의 첫마디였다. 삭풍회는 1945년 8월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강제징용됐다가 종전과 동시에 구소련군에 의해 전쟁포로로 억류된 뒤 시베리아 지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피해자들의 모임이다. 대부분 80대 고령자들로 1990년 창립 당시 60여명에 이르던 회원이 지금은 30여명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26일 “1944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부족한 병력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인 청년을 강제징집해 최전방에 배치했지.”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관동군에 편입된 사람들은 소련군 공격수로 배치된 뒤 1945년 8월9일 소련군의 침공으로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면서 60여만명이 무장해제당했다. 이 회장은 “소련 점령군의 전쟁포로가 돼서 극동·중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등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분산수용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조선인은 약 3500명에 이른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중부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탈곡기 공장에 배당됐다.‘노르마(책임할당제)’ 100% 달성이라는 미명하에 벽돌·시멘트공장과 벌목작업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피해자들은 영하 50도나 되는 추위와 극심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채 억류 첫해인 1945년 6만여명이나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회장은 “여름에 끌려온 바람에 반팔 옷으로 그 매서운 추위를 당해야 했고 죽과 귀리빵으로 연명했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1948년말, 전후 복구공사를 끝낸 소련군의 송환조치가 시작돼 2300여명의 조선인들도 악몽 같던 소련땅을 벗어났다. 그러나 정착금과 노역의 대가는 한푼도 없었다고 한다.1990년 소련과 국교를 맺을 때까지 시베리아 억류자들은 “우리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말도 떳떳하게 할 수 없었다고 이 회장은 하소연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보상을 위한 법안을 심의하고 있고 매년 시베리아 현지 묘지 참배비와 위령비 건립을 위해 지원하고 있지만 똑같은 아픔을 겪었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해 왔다. 지난해 6월에는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소송을 벌여놓고 있다. 이 회장은 “조국에서도, 가해국에서도 버림받았던 우리의 청춘을 위해서라도 죽은 동료들의 묘비라도 세워줬으면 좋겠다.”며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이 회장은 다음달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의 과거청산 촉구를 위한 국제협의회’에 참가해 마치무라 외상을 만나 과거청산의 진정한 의지를 보여달라고 촉구할 계획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압록강의 신의주, 대동강의 진남포, 한강의 인천, 금강의 군산, 그리고 영산강에 목포가 건설되었다. 개항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해양제국들이 젖줄인 강을 따라서 식민 내륙까지 뻗어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1897년 7월4일, 조선정부는 각국 사신 앞으로 동년 10월1일을 기해 목포와 진남포 두 항구를 외국통상을 위하여 개항하고 외국인 거주를 허가하는 칙령을 통보한다. ●1897년 10월 자주적으로 개항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이노우에(井上馨)영사는 1895년 1월6일 기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약 한달반 동안 서남해안을 시찰하고 현재의 목포가 가장 합당한 지역임을 건의한다. 그러나 일본의 외압과 무관하게 개항 초기는 아직은 대한제국기로서 제한적이나마 자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개항이 서둘러지기는 했으나 상업을 확장하여 민국의 이익을 발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칙령에 의해 자주적으로 개항한 셈이다. 목포의 출발은 매우 활기찼다. 자주적이었던 만큼 초기 건설도 일본 뜻대로 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힘이 미쳤기 때문. 조계지 이외의 도시건설은 전적으로 조선인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헌병대목포분견소가 들어서서 위압적으로 나선다. 마침내 1906년에 목포주재 일본 이사청 이사관인 와카야마(若松兎三郞)는 각국 거류지에 관한 권한을 빼앗아 간다. 이로써 목포개항장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는 가장 먼저 시가지를 33정 51구획의 일본식으로 바꾼다. 마치(町)는 일본인 거리, 한국인거리에는 동(洞)을 붙여 이름에서부터 차별한다. 즉 목포는 도시계획상의 이중성을 갖고 태어났다. 서울 북촌의 양반, 남촌의 일본인처럼 일본마을(각국공동거류지역)과 조선마을(옛 목포부)로 나뉜다.‘제국주의신도시’ 목포출신의 동반작가 박화성은 데뷔작 ‘추석전야’에서 ‘남편으로는 늘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와 넷 긔와집이 섯겨있고,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있는 외에 몇 긔와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을 보자, 집은 돌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히 빈민굴이다.’고 하였다. 일본과 한국으로 분명하게 갈려진 목포시의 이중적 성격을 주목한 고석규(목포대·‘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의 저자) 교수는 ‘일제 강점기 서울을 비롯한 식민지 근대도시는 왜곡된 근대 도시화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이중성과 식민지라는 억압구도가 낳은 대중문화의 이율배반성, 신파성을 동시에 갖는 기이한 도시’라고 압축정리한 바 있다.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목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산강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래서 영산포 북관정에서 목포하구언까지 내려가는 뱃길을 택하였다. 마침 영산강살리기운동이 한창 벌어지면서 도지사 이하 여러 기관장들이 탄 배에 동승하였다. 배는 영산강을 내려가다 영암 몽탄나루에서 잠시 쉬고 다시 유장하게 흘러가다 하구언에서 막혔다. 그쯤에서 전남도청 이전부지인 ‘남악신도시’가 강가에 보인다. 다시 말하여, 목포는 영산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요충지인데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엉망이 돼버렸다. 바닷배가 오르락거리면서 바다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도시였던 광주시도 바다는커녕 강물조차도 끊긴 단절의 도읍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이중환도 택지리에서 ‘영산강은 서쪽으로 흘러 무안 목포에 이르는데…강 건너는 큰 평야를 이뤄…풍기가 화창하고 땅은 넓고 물자도 넉넉하여 서남쪽 강과 바다는 운수의 이익을 통제하여 광주와 함께 명읍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주를 오로지 내륙도시로만 간주함은 대단히 그릇된 시각이며, 하구언만 터진다면 충분히 해양연계도시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일본인·조선인 마을 차별 심각 목포는 발전을 거듭했다. 전남의 현관이요 물산집합의 중심지로 조선에서는 제3위를 점할 만한 중요항이자 상업의 요지로 자리잡았다.1930년대에 인구 6만을 돌파하였다. 전남에서는 최초 최대로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전국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 세례는 사람이나 구역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내려졌던 것은 아니다. 차별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히 일본과 조선인마을에 대한 차별은 일제강점기 목포도시화의 주요특성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기 편하도록 도시를 꾸몄다. 정거장, 관청, 은행, 학교, 시장 그밖에 근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기관을 자신들과 가깝고 편리한 곳에 세웠다. 상하수도, 도로포장, 교통통신, 전기, 가스, 보건, 위생 등도 예외없이 일본인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그네들 거리는 짜임새 있고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반면에 조선인거리는 무참하기 그지없었다. 농촌에서 패잔한 무리와 봇짐행상들이 방황하는 곳이 상업도시 목포항의 이면이었다. 청년은 생선장수·지게벌이, 여자는 덕장수·고구마장사, 소년은 겐마이빵·덴뿌라·수건양말장사, 소녀는 콩기름·나물장사 등으로 길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교통정리를 한답시고 내쫓는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가련한 신세였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걸인도 무리지어 나다녔다. 엄청난 숫자의 유곽거리가 존재하여 창녀들이 득실대고 성병이 만연하였다.‘항구의 낭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참하였다. ●목포시내는 ‘거리 박물관’ 영산강하구언에서부터 찻길을 내달리며 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목포시 구분법을 제시하였다.“영산강변의 전남도청부지가 21세기형이라면,1980년대 매립지에 1990년대 세워진 하당신도시는 합리주의식이지요. 신식모텔들이 아파트와 공존하는 90년대식 합리주의의 거리를 벗어나면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같은 공공시설이 몰려있는 문화의 거리가 나오지요. 세계은행(IBRD)차관으로 만들어진 1970년대식 거리가 나오는데 보행자중심 거리를 만든다고 어정쩡하게 T자형도로를 만들어 어데서고 직진이 불가합니다. 저기에 삼학도가 보이고 유달산이 있지요. 거기가 조선인과 일본인거리가 판이하게 갈렸던 목포시내지요.” 이쯤되면 ‘거리박물관’이다. 일본식과 한국식,70년대식,80년대식,90년대식,21세기식이 병존하면서 차곡차곡 쌓여져서 항구도시를 만들어 왔다. 지난 백년사를 웅변해주는 목포답사 1번지는 오늘날 목포문화원으로 쓰이는 일본영사관이 아닐까.1900년(고종37년) 러시아건축가의 손으로 지어졌는 바, 최고급 대리석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등 백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견고한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는 동척을 비롯하여 일본인 조차지역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권위적인 위치에 도도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쓰이다가 광복 후에는 시청, 시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 문화원에서 조금 내려오니 동양척식회사 석조건물이 나온다.1920년대 영산포에서 엄청 몹쓸 짓하다가 이리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바, 남도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장한 기관이다. 동척 목포지점은 전국 최대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였으며 부동산 담보 대부, 고리대 등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다.1930년대 유행한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이같은 슬픈 사연을 안고 흐르는 것이리라. 해군 소유였다가 철폐될 위기에 몰린 것을 시민들이 되살려서 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추고 있으니 동척 부산지점과 더불어 전국에 유일하게 남았다. 백미는 역시 이훈동정원이다.1999평이라는데 우치다니 만빼이란 사람이 1930년대에 세웠다. 광복 이후에 해양경비대가 주둔하였고, 국회의원 박기배 소유를 거쳐서 1947년에 조선내화를 설립한 이훈동(1917년 해남출신)에게 넘어갔다. 목포의 진산인 유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입구정원, 알뜰정원, 임천정원, 후원 등으로 이루어진다. 남도에서 가장 큰 정원으로 나무 종류만 113종에 이르러 난대지방식물의 보고다. 일본식 석등은 물론이고 일본식다원정, 연못, 석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정원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노적봉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적을 시험할 요량으로 위장볏가리를 두르게 하여 싸움 한번 없이 물리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왜식정원을 굽어보고 있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다. ●충무공 진지가 목화수탈 현장으로 노적봉에 오르니 코 앞에 고하도가 보인다. 이순신이 명량대첩 후에 1597년 10월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가 이듬해 2월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까지 108일 동안의 진영터다.1722년,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이 유허지에 이충무공 고하도유적비를 세워 오늘에 이른다. 고하도선착장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으니 조선육지면발상지비다.1899년 일본영사가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으로 육지면이 퍼졌다. 수확기에는 목포항이 온통 흰 목화로 뒤덮였으니 쌀과 더불어 남도수탈의 상징이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영사의 공적비까지 세웠으니 충무공의 진지가 목화수탈의 현장으로 뒤바뀐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목포 100년은 이렇게 슬프게 흘러갔다. 누가 식민지근대를 이야기하는가. 그 누가 계량적 통계수치만으로 식민지축적론과 식민지개발론을 논하는가. 식민지시대의 인간군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항구의 삶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오로지 일본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열매는 조선인과는 무관함을 웅변한다. 목포항에 산처럼 쌓였던 쌀과 솜은 남도 백성 수탈의 상징이었다. 그러한즉,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서 강조되고 있는 식민지근대론의 허구와 결과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국내 일부의 탁상이론가들에게 목포항 방문을 강권하고 싶다. 목포항을 1시간만 걷는다면 근대적 개발이 오로지 민족차별 및 착취를 바탕으로 한 날조였음을 금세 느낄 수 있으리라.
  • 日법원 “조총련 세경감 정당”

    |도쿄 이춘규특파원|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관련 시설은 ‘공익성이 있기 때문에’ 재산세와 도시계획세 등 세금감면 혜택을 줄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일본 구마모토 지방법원은 21일 구마모토 조선회관에 대해 재산세 등 세금 일부를 감면해준 것은 위법이라며 납치피해자 지원단체인 ‘구출회 구마모토지부’회원들이 구마모토 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세금감면조치 취소 및 면제분 납부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구마모토 지법의 판결은 재일 조총련 시설 세금감면조치에 관한 첫번째 사법적 판단으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건의 유사한 소송과 감사청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가마쓰 다케모토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시설 이용자의 대부분이 재일 조선인이라고 해도 다른 공민관 유사시설과 마찬가지로 교양 향상과 사회복지 증진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면서 “따라서 조선회관에는 공익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특정 정당의 이해에 관한 사업이 이뤄지거나 영리행위, 위법행위가 이뤄졌다는 증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원고는 소장에서 구마모토시가 “조총련은 영리사업과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로 그 시설에 공익성이 없다.”면서 “세금감면은 평등을 규정한 헌법과 지방세법에 어긋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측은 판결에 불복,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taein@seoul.co.kr
  • 세월속의 서북간도와 조선인, 나의 생활/이지북스 펴냄

    우리 나라 정형외과학의 태두로 알려진 이선호 박사가 자전적 회고록 ‘세월속의 서북간도와 조선인, 나의 생활’(이지북스 펴냄)을 냈다. 지은이는 어릴 적 서북간도에서 생활하며 동포들의 삶을 직접 경험했고,6·25전쟁때는 군의관으로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했다. 조국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며 어린 눈에 비친 동포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또 피란지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기, 전쟁터에서 날마다 짤막하게나마 적어나간 일지 등을 통해 혼란과 공포, 그리고 기아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격동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온 지은이와 그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인의 끈기와 삶에 대한 투지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1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韓·日 교과서 전쟁] (3) 한·일 양심세력에 듣는다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파문을 지켜보는 우리나라 시민운동가들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의 일부 ‘양심세력’들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지난 2001년 1차 교과서 파동 이후 한·중·일 시민사회단체들은 일본의 전후 처리방식과 역사왜곡에 저항하며 힘겹게 공동 연대를 구축해오던 터에 파문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올바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중인 한·일 양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김은식(35) 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 추진위원회 사무국장과 후쿠도메 노리야키(55) ‘일본의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히로시마 모임’사무국장은 이번 파문을 계기로 양국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후쿠도메 사무국장은 “4년 전 처음 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보다 일본 사회 전체가 우경화됐다.”면서 “특히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사회화되면서 언론도 하루종일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전달하고 있다.”며 현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일본이 양국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지적했다. 독도의 경우 “일본인들은 독도가 1905년 전후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부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을 뿐, 역사적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많다.”며 ‘이해’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와 자매결연한 일본 지자체간에 친선을 넘어선 도움이 절실하다고 요청했다. 후쿠도메 사무국장은 80년대 중반 대구 계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유골봉환 문제 등 한·일 과거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최근 일본에서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와 ‘교과서 네트워크’를 구성해 ‘왜곡 교과서 불채택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다. 지난달 18일에는 일제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1945년 발생한 일본 나가사키현 이키 지역의 ‘조선인 귀국선 해난사고 및 희생자 유골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김 사무국장은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새역모’의 핵심멤버들이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한·중·일 연대를 강화해 범 아시아적인 가치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어 자칫 잘못 문제를 제기할 경우 ‘비국민’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라 시민단체들도 독도문제를 전면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일 관계의 갈등과 대결구도가 어려워질수록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활성화시켜 일본 사회의 여론이 일방적인 흐름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김 국장은 제안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韓·日교과서 전쟁] (1)‘개악 검정’ 의도뭔가

    [韓·日교과서 전쟁] (1)‘개악 검정’ 의도뭔가

    5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8종의 역사·공민교과서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역사관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교과서의 경우 현행본에 비해 그다지 개악되지 않았지만, 공민교과서는 독도 기술을 강화하고 동북아 근린국가와의 긴장관계를 과도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후소샤 교과서는 독도 기술에서 합격본이 신청본보다 왜곡이 강화돼 검정과정에서 일본 문부과학성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의심되고 있다. 중국과 북한 관련 내용도 양이 늘어나거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강화해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교과서 “개악은 아니지만…” ‘2001년도 검정결과본에 비해 악화되지 않고 일부 개선된 점이 있다.’는 것이 정부와 학계의 전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 조공설을 삭제하고 동학난을 갑오농민전쟁으로 표현하는 등 8개 항목이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후소샤판 교과서 역시 현행본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개악’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검정신청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이라는 제목이 합격본에서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으로 변했을 뿐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937년 전시동원체제 부분에서도 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강제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는 “현행본이 이미 ‘왜곡’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악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개선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인식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개악’의도 드러낸 공민교과서 독도 관련 기술이 신설·강화됐고 동북아 근린국가들과의 관계를 과장되게 기술해 ‘위험한’ 시도가 엿보인다. 검정통과된 8개 교과서 가운데 독도 관련 기술이 언급된 곳은 후소샤와 도쿄서적, 오사카서적 등 3개 출판사다. 후소샤는 현행본 권두화보에 독도 사진이 없지만 신청본에서는 권두사진과 함께 “한국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다케시마”라는 표현이 합격본에서는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는 다케시마”로 강화됐다. 도쿄서적은 합격본에서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기술을 추가했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학습지도요령상 명백한 사실에 대한 오인이 아닌 이상 교과서 기술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점에 비춰보면 검정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중국에 대한 내용이 늘어나고 과도한 긴장관계를 기술해 적대적인 이미지를 드러낸 점도 눈에 띈다. 평화헌법 개정과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등의 정당성을 위한 배경이 아니겠냐는 분석이 힘을 얻는 대목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日 역사 ‘날조’] 日 15개 시민단체 “채택 반대”

    |도쿄 이춘규특파원|‘교과서에 진실과 자유 연락회’‘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등 일본의 15개 시민단체들은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검정 결과가 발표된 5일 오후 합동기자회견을 통해 “위험한 교과서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개악됐다.”면서 채택반대를 선언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담긴 공동호소문을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한국과 중국의 시민단체들과 연대, 채택 반대 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권위원회에도 일본 정부와 여당이 교과서 검정과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전해,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우리측의 최대 관심사인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3개의 공민교과서에 기술된 것에 대해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라이 신이치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는 개인적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일부 잃은 상태에서 다케시마(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까닭에, 독도문제는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문제”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민단체 대표로서 시민운동의 책임문제가 있다는 그는 “일본 국민과 한국민의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의 온도차가 너무도 크다.”면서 “영토와 역사문제는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정리한 뒤 냉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향후 왜곡 교과서 반대운동의 어려움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공동호소문에서 후소샤 교과서는 청일·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전쟁을 미화, 정당화하고 있으며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는 등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왜곡 교과서라고 강조했다. 또 난징대학살이나 조선인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등을 일절 기술하지 않는 등의 문제도 지적했다. 특히 일본이 다시는 침략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국제적 선언·공약인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국제공약 위반’이라면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런 국가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이 없다.”(노히라 신사쿠·피스보트 공동대표)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울러 후소샤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출판사 교과서들도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대리 등 정치인과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 등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압력을 가해 식민지 시대의 침략·가해 부분 등이 개악됐다며 국제사회에 일본 정부와 정치인의 문제점을 고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2년 전부터 활발해진 헌법 개악 반대 지역시민운동단체나 풀뿌리 시민운동조직과 연대,‘위험한 교과서’ 채택 반대운동을 전개해 후소샤의 10% 채택 추진을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다짐해 귀추가 주목된다. taein@seoul.co.kr
  • 일제 피해 보상 사할린 징용자 첫 조사

    정부가 ‘사할린 강제징용자 문제해결을 위한 테스크포스’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실태조사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한·일협정 당시 논의대상에서 제외됐던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가 지난 17일 ‘대일 독트린’에서 종군위안부와 사할린 강제징용자, 원폭 피해자 등 한·일협정 미논의 대상자들에 대한 구제방안을 마련할 것이라는 범정부 차원의 의지를 밝힌 후 첫 실행프로그램이다. 이에 따라 일제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탄력을 받은 것은 물론 이를 계기로 식민지 전후 피해 처리방식에 대한 양국 정부차원의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할린 강제징용자 문제해결을 위한 테스크포스’는 외교통상부와 보건복지부, 대한적십자사, 일제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 등 관련부처 관계자들로 구성돼, 조만간 활동에 들어갈 것으로 31일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일본측에 잘못된 역사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일제 피해자들의 보상을 촉구하기 전에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면서 “조만간 관련부처가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의 숫자와 생활 등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를 벌인 뒤 영구귀국과 보상문제 등 지원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할린 강제징용자 문제 해결은 ‘현원징용’(이중징용)된 사람들에 대한 처리와 귀국 희망자에 대한 지원이 관건이다. 정부는 현재 3만 6000여명이 사할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잠정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939년부터 징용노동자로 사할린에 들어간 뒤 1944년 말기 일본 정부가 사할린 탄광을 폐광시키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일본 혼슈나 규슈 지역의 탄광으로 돌아갔지만 강제로 현지에 남게 돼 이산가족 문제가 발생하는 등 중복적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사안으로 꼽히다. 한·일관계 한 전문가는 “사할린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일본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와 교섭, 일본인만 귀국시키고 강제징용되었던 조선인과 타국민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며 그냥 버려 두게 돼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영호 부산 영산대 교수는 “징용이 확실한 데도 한·일협정 당시 이들에 대한 보상규정이 전무했다.”며 한·일 양국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 현재 사할린에 있는 ‘이중징용진상규명협회’회원 100여명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제 강제징용과정에서 지급받지 못한 임금과 적금 등에 대한 소송을 벌이고 있다. 한·일 양국은 1994년 9월 ‘영주귀국 시범사업’에 합의, 우리측은 거주촌 설립부지를, 일본측은 32억 2000만엔을 부담했다. 이지운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브레이크 고장난 일본…우경화 누가 이끄나

    |도쿄 이춘규특파원|현직 각료가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망언하고, 전직 총리가 ‘일왕은 국민통합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등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경화를 이끄는 일본판 ‘네오콘’의 추동세력은 누구인가. 정부와 집권 자민당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 ‘전후세대’가 주축이라는 데 별 이견은 없다. 무엇보다 우경화에 제동을 걸었던 사민당 등 혁신세력이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 잇달아 참패하며 지금 일본은 브레이크 없는 페달과 같은 상태다. ●고이즈미 내각, 네오콘 전방위 포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2001년 4월 취임 이래 매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핵심 인물이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와 영토분쟁 중인 북방 4개섬을 직접 시찰, 분쟁을 선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집권 4년간 몇차례 개각을 단행하면서 강경보수 매파인 ‘네오콘’을 내각과 정당에 전방위로 배치했다. 내각 서열 1위 총무상인 아소 다로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던 것”이라는 등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우익단체인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 회장도 맡고 있다. 내각 서열 3위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상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두둔했다.2001년 후쇼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검정을 통과할 때 문부과학상이었다. 마치무라 외상은 올 초 직업외교관 최고위직인 외무성 사무차관에 대북 강경파인 야치 쇼타로 전 관방부 장관보를 기용, 외교실무라인의 보수색채를 강화했다. 이들 강경라인이 최근의 ‘실력외교’를 실무적으로 이끌고 있다. 일본 교육을 총괄하는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은 ‘일본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 출신으로 취임 후 “역사교과서에 군대위안부나 강제연행이란 말이 줄어 다행”이라는 망언을 했다. 급기야는 29일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산업정책을 맡은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은 “종군위안부에는 강제성이 없었다.” “반일적 교과서에서 배우는 어린이들이 맡을 차세대는 괜찮은가.”라는 망언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네오콘의 총본산 자민당 당직자 자민당은 네오콘들의 본거지이다. 차기 총리후보 1순위로 지목되는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북한 때리기’를 통해 성장한 인물이다. 강경 네오콘의 주축이다.“자위대는 군대다. 누가 총리가 되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야 한다.”고 호언하고 있다. 다케베 쓰토무 간사장은 “일본은 천황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30∼40대의 ‘젊은 우파의원’들은 전범국의 책임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신사참배 강행 등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들 당정의 핵심세력은 대부분 전범국으로서의 부채의식이 없는 ‘전후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A급 전범 용의로 투옥까지 됐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인 아베 간사장 대리, 아소 총무상, 나카가와 경제산업상 등 2∼3세 정치인들은 “선조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의 일본 외교’를 지향하고 있다고 외교소식통들은 분석했다. 아울러 고도성장기에 자라면서 ‘일본이 최고’라는 의식이 강해 경제력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아시아 일원이 아닌, 즉 140여년만에 다시 탈아(脫亞)를 외치며 ‘세계의 강국 일본’을 꿈꾸고 있다. ●뒤에서 미는 우익본류, 전전세대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자민당의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우경화의 상징인 개헌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모리 전 총리는 총리 때인 지난 2000년 9월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라고 망언해 물의를 빚었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직접적인 표현으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입장을 밝힌 인물이다. 그는 아울러 고이즈미 총리의 친위부대 역할을 하는 강경 우파 ‘모리파’의 수장이다. 자민당 신헌법조사위원회의 전문분야 소위원장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천황은 국가원수”,“일본도 이제 보통국가가 될 때가 됐다.”,“방위군 보유” 등의 발언으로 전후세대들을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taein@seoul.co.kr
  • 개발 없는 개발/허수열 지음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 혹은 ‘자본주의맹아론’간의 최근 논쟁에서 우세한 쪽은 놀랍게도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이 4% 수준의 기록적인 성장을 이뤘다는 통계자료를 ‘물증’으로 내놨기 때문이다. 근대경제학적 방법론에 따른 과학적 증거가 제출되자 ‘맹아와 수탈’에 대한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탈민족주의 바람까지 가세했다. 이제 물증을 내놓지 못하면 꼼짝없이 폐쇄적·국수적 민족주의자로 몰릴 판이다. ●조선인의 발전 아닌 일본인의 발전 충남대 허수열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 펴냄)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건 책이다. 책의 논지는 제목과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은 종속국가에는 ‘저개발이라도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은 ‘개발 자체가 없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또 ‘일제하 조선경제개발의 현상과 본질’이라는 부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통계수치라는 ‘현상’만 봤을 뿐 그 뒤에 숨겨진 민족간 차별이라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흥미로운 점은 허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자의 ‘대부’로 꼽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제자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반론의 무기도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쓰는 근대경제학적 통계수치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거칠게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선후기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둘째 일제시대 때 놀랍게 성장했다. 셋째 이런 기반이 해방 이후 한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 허 교수는 짧은 질문으로 두번째 주장을 반박한다.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777달러,1937년에는 1482달러를 기록하다 전쟁 때문에 1944년에는 1330달러로 줄었다. 그런데 해방되던 1945년에는 1911년만도 못한 616달러로 감쪽같이 내려 앉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바로 일제시대 조선의 성장은 조선인의 발전이 아니라 일본인의 발전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볼 때 일본인의 조선농지소유율은 18%정도지만 그 토지의 생산력까지 감안하면 이 수치는 50%대까지 치솟는다. 알짜 땅을 다 차지한 것이다. 교육·취업·승진 등에 있어서 조선인은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 물론 일제시대 말기에 이런 차별 가운데 일부가 완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허 교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일본인이 동원되면서 생긴,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시대 때 성장했다는 조선이 해방 직후 1911년 수준의 가난한 농업국가로 되돌려진 데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었다. 동시에 일제의 유산이 한국의 근대화에 그다지 기여한 것도 아니다. 근거는 맥아더사령부가 한국·타이완·중국 등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을 조사해 1948년 펴낸 통계다. 여기에 따르면 해방 뒤 한국에 남은 재산은 북한의 25% 수준이었다. 질적인 차이는 더 심했는데 주요 시설이 북한에 있었고 남한은 조선총독부가 서울에 있는 덕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마저도 한국전쟁에서 반 이상 파괴됐다.60년대 경제개발기 한국에 남아 있던 일제의 물적 자산은 원래의 10분의1 수준도 채 안 된다. 여기에 이승만정권이 미국원조로 연명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면 일제 유산의 영향이라는 것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이는 ‘물질적’ 유산에 한정된다. 그 외 법률이나 행정 등과 같은 제도적·정신적 영향에 대해서는 뭐라 대답할 것인가. 허 교수는 “경제사학자로서 계량화된 수치만 다룰 수 있다.”고 답한 뒤 “일제가 ‘남북분단과 민족갈등’을 남겼다는 점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계수치 뒤에 숨겨진 민족차별 허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똑같은 접근법을 썼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도 전체 통계만 보지 말고 더 깊이 연구한다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가 몹시 아쉽다. 허 교수는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데 지금같은 분위기에서 마땅한 비판이 없을 것 같아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첫번째 주장에 대한 반론은 ‘높은 교육열’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허 교수는 “전공분야가 아니라 말하기가 어렵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열린세상] 대국적,대양적 시야가 필요하다/이덕일 역사평론가

    광해군 15년(1623년) 3월 인조와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김류, 이귀 등의 서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객관적인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권 후 서인정권이 광해군의 실리외교 정책을 숭명반청(崇明反淸)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발생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소현세자 부처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인질로 잡혀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백성들이 선양의 서탑거리에서 노예로 팔리는 현상에 대해서도 오랑캐인 청나라를 적대했을 뿐 그 책임의 상당부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인들이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어보는 이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 이념으로 세상을 바라본 서인들은 선에 속한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고 이들의 사고와 행위는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해악을 끼친 비역사적 행위였다. 이념에 눈이 먼 서인들에게는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 중원의 패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현실에 굳이 눈을 감았던 조선에 닥친 것은 병자호란의 비극이었다. 이는 외교에서는 이념의 시각이 아니라 상황을 크게 보는 대국적 시야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이 있는 한국민으로서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과 부합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독도를 한국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가 커지는 것을 가장 원하는 세력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일부 우익세력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일부 우익세력들이 노리는 것은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 사법재판소나 유엔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독도문제가 국제적 논란거리가 되면 될수록 독도는 국제분쟁지역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지(斷指)나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의 시끄러운 외형적 대응보다 조용한 내면적 대응이 효과적이다.1945년 패전 이후 일본에는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형성된 다수의 민주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과 손잡고 모처럼 형성된 일본 국민들의 한류 열풍 등을 이용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세력을 일본 내에서도 고립되게 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일 것이다. 이런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비단 독도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동아시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재편되는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8∼9월 중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세력은 사상 처음으로 ‘우의(友誼) 2005’ 합동군사훈련을 산둥반도와 서해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과 독도분쟁이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미국이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거듭 지지하고 나선 것은 대륙세력 못지않게 해양세력도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세력의 이런 변화를 대결에서 평화로 유도할 능력이 있으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급격히 높아지겠지만 당장 북핵 문제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모두의 협력이 절실한 우리에게 이는 통일 후에나 가능한 전략일 것이다. 분단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몰라도 정치·군사적으로는 대륙세력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미 명확히 보여준 바다. 반면 현재 미국과 일본의 접근은 한국을 배제한 신 해양세력이 구축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자칫 한국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모두에게 배제된 고아신세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고아는 먹이일 뿐이다. 독도 시야를 넘어서고, 이념도 넘어서는 대국적, 대양적 시야 속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본지가 입수, 소개한다.20세기 초 20여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선교사 안드레 에카르트가 독일 귀국후인 1923년에 발간한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이하 문전). 건국대 명예교수인 류태영(69) 박사가 이스라엘에서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원래는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가 쓸 수 있는 어학교재용으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 눈에 비친 조선의 이런저런 민담과 풍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관심을 끈다. 문전은 책 구성에서부터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를 위한 어학교재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양 부분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씌어져 있다. 한국어 부분 역시 물론 에카르트가 직접 쓴 것이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됴션언문(朝鮮諺文)’에서는 한글자모의 발음을 로마자(羅馬字)로 설명하는 등 문자체계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리고 45개의 조선어로 된 이야기들로 본문을 구성했다. 부록으로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의 일부가 실려 있고 독일어 번역을 위한 짧은 연습문 45개도 있다. 책 마지막에 저자 이름으로 ‘옥락안(玉樂安)’이라는 에카르트의 한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정가금오원’과 ‘불허복제’라는 가격과 저작권 보호 표시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본문 내용이다. 에카르트는 서언(緖言)에서 본문의 45가지 ‘니야기’(이야기)는 “조선 13도를 통하야 방방곡곡을 천답(踐踏)하며 연구에 연구를 가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에카르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교재를 읽다보면 어떤 이야기들이 1920년대 당시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지 엿볼 수 있다. ●만담과 해학 산을 넘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도적을 만나 주인양반의 돈을 다 빼앗긴 하인이 “오늘 길에서 도적을 만났다하면 그 양반이 내 말을 곧이 아니 듣고 나를 의심하겠으니 당신 가진 육혈포로 내 옷에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보람으로 주인 양반에게 빙거(憑據·증거를 대다)하겠다.”고 도적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미련한 도적은 그만 “철환(총알)이 없다.”고 대답해버렸다.‘헛총만 가진 것’을 안 하인은 빼앗긴 돈을 되찾고 도적을 흠뻑 두드려주고 간다.(세번째 이야기 ‘도적을 속인 진담’) 이처럼 문전에는 만담류의 우스갯소리가 20여개로 가장 많다. 그냥 만담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판소리풍의 걸죽한 입담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땡볕에 김매는 팔자에 울상짓던 아내한테 괄시받은 한 농부는 벼슬하겠다며 서울로 훌쩍 올라간다. 이 농부 어찌어찌 벼슬얻어 풍악을 울리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데 이 풍악소리를 듣고 내뱉는 아내의 말이 감칠맛이다.“우리 양반인지 닷돈 세뭉치인지, 벼슬인지 닭의 벼슬인지, 군수인지 국수인지, 감사인지 곳감인지 한다고 시골인지 서울인지 가더니 아니오니 이 노릇을 장차 어찌하잔 말이냐.” ●조선의 풍습 조선의 풍습에 대한 글도 찾아볼 수 있다. 풍습에 대해서는 에카르트의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잘 드러난다.‘조선에서 혼인하는 법’에서는 에카르트가 마치 결혼식을 옆에서 지켜본 듯 신랑·신부의 행색부터 결혼식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 조선의 풍습을 잘 모르는 외지인과 조선사람간의 대화체로 꾸며진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에서는 성주·터주 등 전통신앙에서부터 종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제사 풍습에 대해 순차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 어학교재인데다 각 지방의 얘기들을 채록하는 형식이다보니 정치나 사회문제 같은 민감한 소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서울구경’편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김 생원이라는 사람의 서울 유람기가 담겨져 있다. 하루는 김생원이 임금 사는 곳을 보겠다며 경운궁으로 가는데 당시 경운궁에 유폐돼 있던 태황제(고종)를 두고 한 경인(京人)과 나눈 대화가 이렇다.“그러면 국사를 시방 누가 상관하오.”라고 김 생원이 묻자 “예 일본 통감부에서 모든 정사를 다 상관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그전보다 국민간에 모든 정사가 밝게 됩니까.”라고 묻자 “예 그 전보다 백성들이 참 평안히 살고 국사가 개명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한다.‘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된 한 촌부의 질문이 묘한 느낌을 준다. 또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가 겪는 고초도 ‘임금이 피란함’편에 상세히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카르트 신부는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선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조선어를 익힌 뒤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1928년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20여년에 이르는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뮌헨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언어, 미술, 음악, 무용,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글을 남겼다. 한국인 제자도 많이 길러냈는데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전혜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929년 쓴 ‘조선미술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조선 미술에 대한 최초의 통사 형식 서술이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거대하지만 실속은 없는 중국미술, 오밀조밀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일본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은 단아하고 소박한 자연미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다 개개의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의 미를 추출해내는 접근법을 쓰고 있어 책에 실린 500여점 도판은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카르트는 그다지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사가 2003년에서야 열화당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스라엘 유학중 ‘…文典’ 입수한 류태영박사 국내에서 이스라엘 전문가로 손 꼽히는 류태영 박사는 이 문전을 1973년 이스라엘 유학시절 히브리대 중앙도서관 서고에서 처음 접했다. 히브리대 중앙도서관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에카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단다. 류 박사는 “독일 선교사인데도 또록또록한 한글로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잘 풀어내서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읽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골치가 아프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책을 자주 읽다가 아예 복사본까지 마련해뒀다. 귀국한 뒤 이 내용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해줬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 최근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유 박사는 “출판사에 물어보니 펴낸 지 80년이 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문으로 풀어내 출간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히브리 도서관에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세계 각지에 흩어 살던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도 엄청난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독도관광 허용 검토

    독도관광 허용 검토

    일본 극우단체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개정판 중학교 공민교과서와 역사교과서가 독도 및 일제 식민지 통치 부분을 개악해 4년 전 ‘우익 교과서’ 파동이 재연될 전망이다. 우리의 사회 교과서격인 공민교과서는 “독도가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왜곡 기술해 영유권 분쟁을 시도했으며, 역사교과서는 “일제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식민통치에 대해 기존의 합법 주장을 넘어 아예 미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야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은 11일 국민적 분노가 증폭되면서 일본의 ‘노골적인 도발행위’ 즉각 중단과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범정부대책반을 구성하고 대응 조치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최근 독도 문제 등으로 야기된 한·일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아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독도 및 교과서 문제 등 대일(對日) 현안에 대한 대응 방침을 숙의했다. 정부는 특히 독도문제와 관련, 그동안 유지해온 일반 국민의 독도 방문 자제 방침을 재고해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대외적으로 부각시키는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시적인 수준의 대응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4년전 교과서 파동으로 최상용 당시 주일 한국대사를 9일간 소환했던 전례로 비추어, 일본 문부성의 검정 결과에 따라 이같은 사례가 반복될 개연성도 높다. 일본 우익계열 출판사인 후소샤(扶桑社)는 지난해 4월 이같은 내용의 교과서를 문부성에 검정 신청했으며 결과는 다음달 초에 나올 예정이다. 외교통상부 이규형 대변인은 이날 외신기자 간담회 등을 통해 “후소샤 교과서의 검정신청본이 자국 중심주의적 사관에 입각, 과거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인근국의 역사를 폄하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개혁시민연대 등 90여개 시민단체로 이뤄진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이날 오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은 역사왜곡 사실을 공개하고 일본 정부를 강력 규탄했다. 역사교육연대는 “2005년도 새역모의 교과서는 겉으로는 이전보다 표현을 부드럽게 했으나, 그 내용은 개악된 것이어서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이는 검정 무사 통과와 함께 교과서 채택률을 높이려는 고도의 전술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문제의 교과서는 조선인 강제연행, 위안부 문제, 남경대학살 문제를 기록하지 않았으며,‘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이라는 칼럼을 별도로 게재하고 독도가 영유권 분쟁 지역이 되고 있다며 사진도 실었다.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올바른 역사교육 의원모임’도 성명을 내고 “역사교과서 왜곡은 일제 수탈을 은폐하려는 비열한 술수”라며 교과서 왜곡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지운 구혜영기자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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