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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징용 한국인 1만996명 명부 발굴

    일제시대 남태평양 지역으로 끌려갔다 송환된 조선인 명부가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는 1930년대 후반 이래 남태평양 군도(괌·티니안·사이판섬과 팔라우제도 등) 지역으로 강제동원됐다 광복과 함께 한국땅으로 되돌아간 조선인 승선자 1만 996명의 명단을 발굴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들은 농업 및 일반인이 6880명, 군속(군노무자) 3751명, 군인 90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3799장에 달하는 문서는 미 태평양함대가 본국 귀환 희망자를 모은 뒤 미군함에 태운 사람들의 명단이다. 그래서 귀환자 이름과 함께 나이·직업은 물론 한국의 본적지 주소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제껏 일본측의 근거없는 주장(7727명)을 일축할 수 있는 자료다. 편찬위는 “자료가 워낙 충실해 추적조사가 이어지면 관련 연구를 크게 촉진시킬 것으로 본다.”면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넘겨 실질적인 조사·연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 ’ /류윤 옮김

    1945년 8월6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다.3일 뒤 두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떨어지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해 말까지 핵폭탄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사망한 히로시마 주민은 14만여명을 헤아린다. 이 중 1만여명은 조선인 징용자로 추정되고 있다. 원폭 투하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한반도를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전 세계인에게 이전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공포를 안겼다. 1903년 마리 퀴리가 피부병 치료에 활용한 기적의 물질,‘라듐’이 40년 후 이렇듯 막대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지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영국 역사가이자 방송인인 다이애나 프레스턴의 저서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류운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는 원자폭탄에 얽힌 반세기의 역사를 촘촘히 재구성함으로써 과학이 정치와 부적절하게 결합할 때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라듐 추출공정을 발견한 마리 퀴리에 이어 핵물리학의 세계에 한발짝 다가간 이는 영국인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다.1911년 원자핵을 발견했고, 원자를 쪼개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이후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등 여러 과학자들이 앞다퉈 핵물리학 연구에 나섰지만 누구도 원자 에너지가 대규모로 방출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핵분열의 위험을 최초로 감지한 과학자는 레오 실라르드다. 핵 연쇄반응을 지속해 폭발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실라르드는 1934년 봄, 특허를 신청한 뒤 안전을 우려해 이를 영국해군본부에 양도했다. 그로부터 4년 후 분열은 현실로 나타났다. “과학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물이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마리 퀴리처럼 대다수 과학자들은 지적인 모험을 연구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쟁의 시대가 도래하고 정치세력간에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불붙으면서 이들이 쌓아올린 연구성과는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활용됐다. 책은 과학과 현실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과학자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마리 퀴리에서 히로시마까지 원자폭탄에 얽힌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들을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엮어나간 글은 긴박감마저 느끼게 한다.2만 8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평생 모은 작품과 고향에 묻혔으면…”

    “평생 모은 작품과 고향에 묻혔으면…”

    “고향을 위해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3일 광주를 방문한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河正雄·66)씨는 “나의 영혼이 미술작품들과 함께 광주에 영원히 묻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이 개관한 이듬해인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미술관측에 자신이 평생 모아 소장하고 있던 세계 유명작가의 미술작품 1800여점을 기증했다. 이 중에는 20세기 서구미술사 거장들인 루오, 뭉크, 샤갈, 달리, 피카소, 아르망, 로랑생 등의 그림과 판화·조각 등이 들어 있다. 사토 구라지, 야스유키 등 일본의 유명작가와 재일교포 화가 전화황·송영옥 등의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그가 30여년 동안 수집한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광주시립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작품은 전국 유명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대여 품목’으로 대접받고 있을 정도이다. 고향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그의 삶의 이력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의 부모는 당시 ‘핏덩이’를 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산골 오지였던 아키타현으로 이주했다. 수력발전소가 많아 노동강도는 셌지만 일거리는 많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그의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사카로 되돌아 왔다.2년 동안 기다렸으나 배표를 구하지 못한 그들의 고향행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또다시 아키타현으로 향했다. 호구지책 때문이었다. 그는 소학교 2학년부터 고교를 그곳에서 졸업했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냉내와 차별을 받기 일쑤였다. 일본인 동기생들은 모두 일자리를 구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졸업식날 바로 무작정 동경으로 향했다. 재일교포가 운영하던 전기제품 생산회사에 일당 250엔을 받고 가까스로 취업했다. 점심은 빵 한조각으로 때우며 돈을 절약, 야간에는 ‘디자인 스쿨’을 다녔다.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부모를 졸랐다. 그림공부를 할 요량에서였다. 어머니는 “미쳤느냐.”며 만류했다. 스스로 “꿈을 이루겠다.”며 야간학교에 다녔으나 이 과정에서 영양실조로 두눈의 시력을 잃고 만다. “병도 고쳐주고 그림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한 때 북송선을 탈까도 고민했단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조총련에서 일할 것을 권유받았다. 조총련은 당시 동포들의 인권운동과 상공회, 납세조합 건립 등에 열중하고 있었다. 차별과 설움을 가슴 한쪽에 안고 살아온 터라 열심히 일했다. 당시 스물네살이었다. 그는 결혼과 함께 동경의 한 전자상가에서 전자제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주인의 말에 속아 돈을 모두 털리고, 그를 계기로 그 전자제품 상가를 떠맡게 됐다.1964년 동경 올림픽 직전이었다. 올림픽과 함께 일본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고, 그 특수로 인해 TV, 냉장고 등 전자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월급으로 1만 3000엔을 받았던 그는 하루에 2000만엔을 넘게 벌어들였다. 단기간에 천문학적인 돈을 손에 쥔 그는 자연히 ‘어릴 적 꿈’ 실현에 나섰다. 닥치는 대로 내로라 하는 작가들의 그림을 사모았다. 유명전시회는 빠짐없이 찾아가고, 교포 및 일본 화가들과 두터운 교류를 했다. 그의 그림 실력도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키타현 다자와코(田澤湖町)에 ‘기도의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설계까지 마쳤다. 위령·기도·진혼의 뜻을 담고 차별과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기원의 뜻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일간 위안부 배상 등 정치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자와코 읍측으로부터 미술관 기증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결국 광주에 영원히 둥지를 틀게 됐다. 그는 “기증한 작품들이 ‘광주 문화중심도시’ 육성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오늘의 눈] 무책임한 일제피해 진상규명위/윤설영 사회부 기자

    서울신문은 12일자 8면 기사를 통해 “조선인 징용피해자 중 생존자 5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최초로 밝혀졌다는 정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도했다. 살아 있는데도 ‘일제 전범(戰犯)들의 사당’인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으로 처리된 김지곤(88)씨가 이미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얘기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일제강점하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가 12일 아침 보도를 반박하는 해명자료를 냈다. 위원회는 “야스쿠니 신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것은 처음이 맞다.”면서 보도가 ‘허위’라고 주장했다. 이전에 일본 정부에서 확인을 해줬다손 치더라도 야스쿠니에서 직접 확인을 한 것은 처음이라는 얘기였다.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의 동일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해명으로 군색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위원회는 당초 기자들의 사실확인 과정에서 확인 주체가 야스쿠니인지 일본 정부인지 명확히 밝히지도 않았던 터였다. 기자들의 질문에 무턱대고 “처음”이라고만 둘러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둘 중 하나다. 위원회가 김지곤씨의 합사가 이미 확인된 사실을 알고서도 일부러 처음이라고 ‘포장’만 새로 했을 수 있다. 아니면 생존자인 김씨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위원회의 말로 보면 둘 중에 후자인 듯하다. 한 관계자는 “김지곤씨가 사망한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다른 관계자는 “우리가 전문가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항변했다. 위원회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위원회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해 특별법까지 제정해 만든 국가기관이다. 담당자 스스로 전문성이 없음을, 최소한 확인해보려는 노력도 안 했음을 자인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오랜 염원으로 발족된 위원회의 존재이유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출범(2004년)한 지도 벌써 3년째다. 진정 피해자를 위한 국가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때다. 윤설영 사회부 기자 snow0@seoul.co.kr
  • 일제피해자규명위 ‘실적 튀기기’

    2004년 출범한 국무총리실 산하 일제강점하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가 과도한 실적 부풀리기 논란에 휩싸였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9일 “조선인 징용피해자 중 5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자 가운데 합사자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확인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미 2001년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두 명의 생존자가 합사자 명단에 있음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광주에 살고 있는 김지곤(88)씨는 200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까지 내 지난 5월25일 패소 판결을 받고 항소 중이다. 김씨는 2005년 5월 진상규명위원회에 피해자 신고까지 마쳤다. 따라서 위원회가 이번이 첫 확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숨겼거나 생존자인 김씨의 존재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진상규명위원회가 9일 이같은 내용을 발표하자 유족들은 “위원회가 사실 확인도 않고 실적만 부풀리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이희자 회장은 “위원회가 출범 3년이 지나도록 변변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자 ‘최초’라는 식의 수식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국가기관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내놓아 신인도를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는 “(처음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으나) 야스쿠니에서 공식적으로 생존자 합사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은 처음”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2001년 확인된 두 명도 일본 정부가 자료를 통해 합사 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음이 확인됐다.피해자 김씨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망자 명부에 올라 있는 것도 기분 나쁜데 나라에서 보상은커녕 연락을 한 일도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메구미 유골 사무실에 보관”

    납북 고교생 출신 김영남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특수부문(통일사업 관련)에 근무하는 남쪽 사람은 혼자뿐이라고 주장했다고 재일본 조선인총연합(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판이 10일 보도했다.조선신보 보도에 따르면 김씨는 6일 일본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자신 외에 남측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아느냐는 질문에 “우리 부문에서는 나 혼자뿐이고, 그런 사람(남쪽 사람)들을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그는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 등 고교생 5명은 북한에서 ‘이남화 공작교관’ 등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김씨는 또 “(아내)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을 (화장 이후)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그는 일본에 전달한 메구미 유골 가짜 논란에 대해선 “그 동무(메구미)가 생각날 때마다 가끔 그것(유골함)을 열어도 보고, 만져도 보고 손을 댄 경우는 있지만 ‘유골이 바뀌었다, 가짜다.’고 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주장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부고] 北 최고 여배우 오미란 사망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인 오미란(52)이 사망했다고 2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상 계관인’인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오미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미란의 사망 원인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954년 평양에서 출생한 오미란은 72년 평양예술단 무용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80년 ‘축포가 오른다’라는 작품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87년 9월 제1차 평양 비동맹영화제에서 ‘도라지꽃’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특히 90년 10월 제1회 뉴욕 남북영화제에서 최우수 남북영화예술인으로 선정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도라지꽃’,‘생의 흔적’,‘민족과 운명’(6∼10부) 등이 꼽힌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정신나간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가 보훈의 달을 기념해 출시한 앨범에 친일가요를 일부 개사(改辭)한 노래가 수록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보훈처는 ‘휘날리던 태극기’ ‘전우야 잘자라’ 등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널리 불렸던 군가와 진중(陣中) 가요 12곡을 편곡한 앨범 ‘리멤버 유’(Remember U)를 지난달 출시했다.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한편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기존 군가와 진중가요를 록, 댄스, 국악,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편곡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앨범에 친일가요인 ‘혈서지원’에서 일부 가사만 바꾼 ‘혈청지원가’라는 곡이 포함된 사실이 일부 시민의 제보로 드러났다. ‘혈청지원가’는 6·25 당시 국군 자원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으로 ‘혈서지원’ 중 일부 가사만 바뀐 채 불렸던 곡이다. ‘혈서지원’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일제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해군장병을 모집하기 위해 우리나라 유수의 작곡가와 가수들을 동원해 제작한 대표적인 친일가요로 알려져 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라는 내용의 1절을 포함해 총 5절로 구성돼 있다.‘혈청지원가’는 원곡 가운데 ‘일장기’를 ‘태극기’로,‘성수만세’를 ‘천세만세’로,‘나라님의 병정’을 ‘대한민국 국군’ 등으로 일부 가사만 바꿨을 뿐 멜로디 등이 원곡인 ‘혈서지원’과 거의 동일하다. 국가보훈처는 원곡이 친일가요인 ‘혈청지원가’가 앨범에 수록된 데 대해 “많이 불리는 순서대로 군가나 진중가요를 편곡해 수록했을 뿐 원곡이 친일가요인 줄은 몰랐다.”는 입장이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北 미사일발사땐 쌀지원 중단”

    “北 미사일발사땐 쌀지원 중단”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쌀과 비료 제공을 중단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은 완화된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다시 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21일 국회에서 한나라당 김영선 대표에게 북한 미사일 위기와 관련한 현안을 보고하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배석자들이 전했다. 이 장관은 “미사일 발사가 이뤄지면 개성공단 사업과 같이 현재 진행 중인 경우는 몰라도 추가 대북 지원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며 “기본적 경협틀은 유지하되 쌀이나 비료를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미사일이 발사되면 남북경협에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쌀과 비료 등에 대한 지원이 계속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 미사일을 쏘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가지는 않겠다.”고 말했다고 이정현 한나라당 부대변인이 전했다. 미사일 발사 가능성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서 “그러나 발사된다고 보고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사일이 발사되면 제한적이지만 분명한 대북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남북 관계의 전면적 중단은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 정부는 북한 당국이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장거리 탄도미사일(대포동 2호)을 발사할 경우 과거 클린턴 정부 시절 완화했던 대북 경제제재를 복원하거나 재발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완화된 조치는 북한인에 대한 미국인의 송금과 북한산 상품 및 원자재 수입 등이다. 미국은 조총련 자금의 북송 제한 등 일련의 경제제재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오늘의 사태가 심각하다면 지금 이 시각 무수단리에서 탄도미사일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강변하는 측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면서 미국에 직접 대화를 촉구했다. 조선신보는 “조선의 논리는 위성보유국으로 되는 것은 너무도 당당한 자주권의 행사라는 것”이라며 “논리적으로 말하면 운반로켓 백두산 2호에 의한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2호의 발사는 앞으로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한 달 후일 수도 있고 1년 후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박정현 박지연기자 jhpark@seoul.co.kr
  • 北 ‘대결 대신 딜’ 카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임박설이 잠잠해지면서 협상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일본내 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21일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촉구하고 나서 주목된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놓고 직접 입장을 표명하기 껄끄러울 때에는 조선신보를 종종 활용해 왔다. 따라서 조선신보의 보도 내용은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조선신보 보도내용의 핵심은 ‘미국이 먼저 움직이라.’는 것이다. 신문은 “오늘의 사태가 심각하다면 지금 이 시각 무수단리에서 탄도미사일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강변하는 측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초청 사실을 거론하면서 “미국이 조선의 초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발사를 염두에 두고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 대응책을 먼저 논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보도했다. 힐 차관보의 방북 촉구에 다름 아니다. 조선신보의 보도에 대한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메시지는 결국 딜(협상)을 하자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준비는 힐 차관보에 대한 초대장”이라면서 “당장 시험발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것을 카드로 삼아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도 “발사는 한 달 뒤일 수도 있고,1년 후일 수도 있다.”면서 발사임박설을 부인했다. 북한의 대화 촉구에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주목된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에 나선다면 6자회담과 별도로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와 미사일 발사가 논의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는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면 인공위성의 발사도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이 우려되는 것이고, 관계가 좋으면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서 인공위성 발사가 미국의 적대정책에 따라 언제든지 군사용 미사일로 전환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인공위성과 미사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점을 강조한, 일종의 ‘시위’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사설] DJ 방북 무산 유감이다

    오는 27일로 예정됐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무기연기된 것은 유감스럽다. 여러 배경이 작용했겠지만 북측의 소극적 자세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북측은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시위로 국제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과 일본도 이에 맞서 강경대응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럴 때 남북간이라도 고위급 대화의 통로가 열린다면 위기 타개책을 모색할 수 있었다고 본다. 김 전 대통령의 이달말 방북계획 무산은 미사일 위기로 촉발된 한반도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동시에 북측이 신뢰할 수 없는 상대라는 인식을 주고 있다. 김 전 대통령 방북초청은 북측이 먼저 했다. 실무접촉을 통해 날짜까지 합의했고, 열차이용 등 몇가지 세부 사안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런데 북측은 추가 실무접촉을 미루면서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꺼려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지난달 남북 열차 시험운행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무산시킨 데 이어 또 한번 신의를 저버리는 태도를 보였다. 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북측의 모호성 역시 심각하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어제 “대포동 2호라는 것은 미국·일본의 허구에 의한 여론오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공위성 발사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발사체에 탑재된 물체가 탄두(미사일)이건, 인공위성이건 간에 북측이 장거리 로켓추진체를 발사하는 것 자체가 동북아 평화를 위협한다. 발사 시점과 내용을 이리저리 호도하면서 벼랑끝 전술을 펼치다가 군사충돌까지 부를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미 국방부는 지상배치 미사일 요격시스템을 실전모드로 전환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북측은 그들의 체제보장을 위해 대화 이외의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사일 엄포를 당장 접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게 옳다. 어떤 형식이든 북·미 대화를 갖고, 김 전 대통령 방북 일정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 미국은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수석대표의 방북을 적극 검토하길 바란다.
  • [World cup] 北에 월드컵경기 위성으로 제공

    독일 월드컵 경기가 우리 정부 지원으로 북한에 중계된다. 11일 정부 관계자는 “지난달 북측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국제축구연맹(FIFA) 마케팅 대행사측과 협의, 북측에 월드컵 경기를 위성으로 제공하기로 했다.”면서 “9일 독일-코스타리카 개막전에 이어 10일 열린 잉글랜드-파라과이 경기 화면도 위성을 통해 북측에 보냈으며 북측은 이를 녹화해 지상파로 방송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번 위성중계에 드는 중계료와 위성사용료는 방송발전기금과 남북협력기금에서 부담할 것으로 알려졌다.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판은 이날 “조선(북한)의 수도 평양도 대회 개최 기간에 ‘월드컵 열기’로 들끓게 될 것 같다.”며 “축구 애호가뿐 아니라 전 인민의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회 개막 이틀 후인 11일부터 경기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녹화방영된다.”고 밝혔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의 TV 보급 대수는 약 300만대로 가시청 인구는 전체 인구(2200만명)의 절반에 못 미치는 1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열린세상] ‘역사만들기’ 상생의 카니발이어야/이덕연 연세대 교수

    영화배우 황정민의 영화제 수상소감이 참 진솔하고 겸손하다. 스태프들이 밥상을 맛나게 차려 놓았고, 맛있게 먹기만 하니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더라! 이전(泥田)격투기인지 이종격투기인지, 좌우의 도식으로 간명하게 구별되는 보수와 진보세력간의 갈등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격렬한 역사논쟁이 한창이다. 광복과 분단, 건국과 6·25전쟁, 과거청산 등의 역사 현안들을 둘러싼 상반된 관점들의 대립이 대한민국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이념적 갈등으로 증폭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익보수성향의 일부 시민단체와 교사모임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과 평가”를 위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을 위한 국민운동’의 깃발을 들고 나섰고, 이른바 ‘해방전후사인식’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핵심취지는 국가와 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파의 공세로부터 역사를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파가 승리하여 탄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우파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명시”하여 젊은이들이 우리의 현대사에 대하여 보다 ‘관대한 시각’을 갖도록 하는 개방적이고 현실적인 교과서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승리로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세계사의 흐름을 떠나서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시대착오적인 좌파 이데올로기의 집착과 체제전복의 불순한 의도 외에 ‘불행한 역사’ 만들기에 나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극도의 답답함과 분노가 뒤섞인 결연한 글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절박한 상황인식과 대응에 과장과 가식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순정함과 격렬함이 선뜻 말을 걸기 어렵게 만든다. 국가와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역사관과, 그에 따라 선택되고 강요되는 사실(史實)과 평가들은 맛있게 먹기에는 지나치게 격하고 거칠다.E 홉스봄 교수의 말대로 역사가들은 정치적 격정에서 한발 비켜서 있어야 한다.‘역사 만들기’는 상잔의 살육전이 아니라 상생의 카니발이어야 한다. 역사가 자유의 공간 속에서 내려졌던 선택의 과정이고 결과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판정은 오로지 역사의 몫이고, 역사의 주체는 모든 시민이다. 역사의 풍경과 지형을 바라보는 것 자체도 하나의 선택이고, 결단의 행위이다. 성공보다 불행한 실패의 역사의 측면을 주목하는 것은 다른 대안의 선택이 가능했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강조하는 관점의 선택일 뿐이다. 역사는 타자와의 공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가는 역사에 대한 ‘위대한 겸손’을 잊지 아니한다. 성공에 대한 행복한 기억과 자랑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역사와 그 속의 아픈 상처에 대한 반성과 과거청산의 과제에 대하여 눈가리개를 씌우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관중이 외면하는 저급한 샅바싸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 나물에 그 밥만 가지고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역사의 상이 차려질 수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주권과 정의의 이념을 공유한 ‘우리 대한국민’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제헌헌법 전문중 일부)하면서 창설하여 지켜왔고 또한 함께 가꾸어 갈 나라다. 대한민국의 개념과 역사는 완제품이 아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창조적인 상상력과, 적극적인 반성과 관용의 용기와 슬기가 없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헌법과제이다. 이 결의와 과제를 잊지 않고, 함께 풀어 나가는 행복한 역사를 만들어서 후대로부터 주연상을 받는 멋진 꿈을 가져보자. 따로 수상소감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 스태프들이 잘 차려준 밥상에 앉아서 그냥 맛있게 먹기만 했다! 이덕연 연세대 교수
  • [인천이 원조] (8) 공원

    [인천이 원조] (8) 공원

    지난해 맥아더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충돌해 유명세(?)를 치른 인천시 중구 북성동 자유공원. 인천을 대표하는 이 공원이 바로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1897년 생긴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응봉산 또는 응암산으로 불리는 자그마한 동산 위에 조성된 자유공원은 처음에는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各國租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14만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의 각국조계에는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일본조계는 관동·중앙동 일대 7000평, 청국조계는 북성동 일대 5000평에 불과했다. 각국조계가 이처럼 광대하자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획정리사업을 펴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틴의 설계로 각국공원을 만든 것이다. 당시 조계지 내의 외국인 지주들은 명목상 우리 정부에 지세를 냈다. 그러나 영구임대를 보장받은 외국인들은 조계지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해 심지어는 조선인 순검(巡檢·경찰)조차 드나들 수 없게 했다. 말하자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는 ‘나라 속의 나라’였던 셈이다. 따라서 조계지에 인접한 각국공원은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들을 위한 휴게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원은 내국인들에게 이색적인 볼거리로 등장해 서울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공원에서 바다를 보고 지금의 중구청 뒷길을 거쳐 인천항을 구경하는 것이 일종의 관광코스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후 조계는 일본의 압력으로 폐쇄된다.1913년 4월 각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계도 사라졌다. 그 뒤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워 동(東)공원을 만든 뒤 각국공원은 ‘서(西)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각계의 대표들은 4월2일 이 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탑골공원이 3·1운동의 발화점이 됐고, 이 공원이 3·1운동의 산물인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의 핍박을 피해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하는 회의를 열 수 있는 장소는 공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만국공원’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를 회생시킨 맥아더 장군을 기리는 맥아더동상을 세운 뒤 공원의 명칭을 ‘자유공원’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토사학자 조우성(58)씨는 “자유공원은 외세에 의해 휘둘려 시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격동의 한국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日법원, 한국인유족 소송 잇따라 기각

    |도쿄 이춘규특파원|옛 일본군 및 군속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들의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합사 취소 및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이 일본 법원에서 모두 기각됐다. 도쿄 지방법원은 25일 한국인 유족 440명이 “합사자 명부를 일본 정부가 신사측에 제공한 것은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위반”이라며 제기한 합사 취소 청구를 기각했다. 원고측은 전투 중 사망, 부상하거나 전범으로 처벌받은 데 대한 피해 배상과 징병·징용 및 시베리아 억류 중 노동에 대한 임금 등 총 44억엔(약 370억원)의 손해 배상도 청구했으나 역시 기각됐다. 원고단은 판결 뒤 기자회견을 통해 즉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법원은 “국가에 의한 전몰자 통지는 원고에게 강제하거나 구체적인 불이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족적 인격권 등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신사에 합사된 군인·군속은 246만 6000명이며 이 중 2만 1000여명이 조선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도쿄지법은 이날 이병주(81·시베리아 삭풍회 회장)씨 등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도 “1965년 일·한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주장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taein@seoul.co.kr
  • [인천이 원조] (7) 해외이민

    [인천이 원조] (7) 해외이민

    인천에서 하와이로 첫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초기에 대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그들의 거처인 농막(農幕)은 군대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들로 짐승 우리와 다를 바 없었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민자라기보다는 노예 생활과 다름없었다. ‘루나(하와이 말로 십장)’들은 툭하면 채찍을 들었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불렀다. 임금은 남자가 하루 1달러 25센트, 여자는 50센트에서 60센트 받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저축하거나 본국에 송금하면서 망향의 슬픔을 달랬다. 하지만 한국인의 근면성과 뚝심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돼 이민자들은 불볕더위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로 인해 농장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 자리를 점차 잡아가자 일본 이민자들이 “조선인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며 자국 정부에 항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이 금지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경제력뿐 아니라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했다. 때문에 1930년대에는 소수민족 최고의 학력 수준을 자랑했고, 백인에 버금가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민사회는 남자가 여자보다 무려 10배나 많아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이 즐비했다. 이 결과 이민 촌락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농장주나 하와이 당국은 이민자들의 결혼을 장려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현지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만을 고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등장한 것이 ‘사진 신부’다. 먼저 하와이 총각의 사진을 조선으로 보내고, 조선의 처녀가 그것을 보고 마음에 들면 하와이로 건너가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최초의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28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최사라로 그녀는 이래수의 부인이 되었다.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는 951명이었고, 미국 본토에서도 151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진만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다 보니 예기치 못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한인 사회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즈음 이민 1세대들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은 하와이 이민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당시 교민사회는 거의 공개적으로 돈을 모아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스스로도 ‘국민회’‘동지회’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하와이나 중국 등지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민의 출발지요, 고향인 인천에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교민들은 수십만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을 보내 인하공대의 건립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인천과 하와이의 혈연적 유대를 잊지 않도록 그 이름도 ‘인하(仁荷)’라 했다. 향토사학자인 조우성(58·인천광성고 교사)씨는 “하와이 교민들은 국권 상실이 나라의 힘이 약했던 데서 비롯됐으며, 이를 배양하자면 2세 교육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고국의 대학 설립에 적극 나섰던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시는 이민 한 세기를 기려 2003년 호놀룰루시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하와이 동포들은 인천·하와이 미술교류전 등을 개최하며 인천시민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이춘규특파원 도쿄이야기] 민단단장 총련 방문 ‘후유증’

    지난 17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를 방문, 반세기 만에 재일동포 사회의 역사적 화해를 연출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하병옥 단장이 연일 일본 언론의 공세와 지방본부 등 내부반발에 시달리고 있다.일본 언론들은 하 단장이 지난 2월 말 취임 뒤 총련과의 화해 추진으로 납치피해자 공조 대열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하는 기류다. 아울러 민단이 총련의 눈치를 보며 탈북자지원센터 활동을 보류했다며 상당수 민단 지방본부들이 반발하는 등 내부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급기야 하 단장과 정몽주 사무총장 등이 22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자 회견장을 메운 40여명의 취재기자 대부분을 차지한 일본 기자들은 ‘인사청문회’를 하듯 민단 수뇌부를 몰아붙였다.한 주간신문 기자는 하 단장에게 총련계인 조선대학교 졸업설과 조선학교 영어교사설을 추궁하며 사상검증을 시도했다. 하 단장은 조선대학 졸업설은 사실이 아니라며,1950년대 재일한국인 사회의 상황을 들어 대학생 시절 2년간 조선학교의 교사는 했다고 밝혔다.이어 중앙일간지와 통신, 방송사의 기자들도 비슷한 태도로 끈질긴 질문을 계속했다. 이들은 민단·총련의 화해과정에서 탈북자 정보가 민단, 총련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일본인 납치에 총련이 개입했다면서 이에 대한 민단의 입장을 묻기도 했다. 아울러 민단의 전 지도부는 총련을 비판했다면서 현 지도부의 입장은 뭐냐고도 캐물었다. 민단이 왜 일본이 아니고 총련과 접근하느냐는 취지였다. 이에 하 단장은 27일 일본에 올 예정인 한국측 납치피해자 가족들을 영접하러 나가고, 위로의 말을 발표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납치피해는 인권문제라면서 “민단이 총련과 일본 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적극 협력의지를 밝혔다. 그래도 질문이 그치지 않자 기자회견을 중도에 마치면서 정 총장은 일본 기자들에게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통해 일본에 기여해 달라더니 왜 이러는가. 일본 언론들의 너무나 비판적인 보도는 놀랍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하 단장의 화해 행보는 이제 첫걸음이다. 민단 내부의 공감대를 확산시켜 가야 한다. 총련의 반발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일본 여론의 견제도 극복해야 한다. 섣부른 기대보다는 주도면밀한 대응이 요구되는 이유다.taein@seoul.co.kr
  • 민단 “탈북자 지원 계속”

    l도쿄 이춘규특파원l 민단의 탈북자 지원이 계속된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하병옥 단장은 22일 도쿄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탈북자 지원센터 활동을 보류하거나 중지하지 않았다.탈북자 지원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일본 정부,적십자사 등과 협의를 거쳐 좀 더 효율적인 지원 방안을 찾고 있는 단계”라고 덧붙였다. 하 단장은 이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를 의식,탈북자지원활동을 중단했다는 보도를 부인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나가노·니가타현 등 일부 지방본부의 반발에 대한 지적에 하 단장은 “민단 중앙은 (지원) 방향을 정했지만 각 지방본부에 대해 강제성은 없다.”고 말했다. 하 단장은 서만술 총련 의장 등의 민단 답방과 관련,“민단에 와달라고 초청했지만 일정 등 결정된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taein@seoul.co.kr
  • 민단 “탈북자 지원 계속”

    |도쿄 이춘규특파원|민단의 탈북자 지원이 계속된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하병옥 단장은 22일 도쿄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탈북자 지원센터 활동을 보류하거나 중지하지 않았다. 탈북자 지원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일본 정부, 적십자사 등과 협의를 거쳐 좀 더 효율적인 지원 방안을 찾고 있는 단계”라고 덧붙였다. 하 단장은 이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를 의식, 탈북자지원활동을 중단했다는 보도를 부인하면서 이같이 밝혔다.taein@seoul.co.kr
  • “北 고위과학자등 2명 한국행 희망”

    북한을 탈출한 뒤 현재 제3국에 머물고 있는 북한 과학기술 분야의 간부와 의사 등 2명이 한국행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이날 “지난 3월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과학기술총연맹 00도 위원장 박원두(43·가명)씨와 1월 탈북한 조선인민무력부 산하 00호총국 병원장인 한영임(65·여·가명)씨 등 2명이 현재 동남아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탈북자 정착프로그램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미국보다 한국으로 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도 대표는 “지난 5월 동남아로 이동한 이들은 현재 안전한 장소에서 한국에 입국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계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진 박원두씨는 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한 과학자 가운데 최고위급으로 북한 과학기술과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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