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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간도 ‘민생단’ 학살사건

    1930년대 간도 ‘민생단’ 학살사건

    ‘민생단 사건을 아십니까.´ 민생단 사건은 1930년대 초반 중국 간도 일대에서 중국 공산당이 민생단에 일본 스파이들이 침투해 있다고 날조해 500명의 조선인 항일혁명가를 학살한 것을 일컫는다.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 있던 이 민생단 사건이 소설로 복원됐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작가 김연수(38)씨가 민생단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를 출간한 이후 1년여만에 내놓은 여섯 번째 장편 소설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초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서로 죽이고 배신하고 변절하고 미치광이가 되는 가혹한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측량기사로 파견된 김해연이 이정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그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긴 채 자살하는데, 편지를 통해 이정희가 혁명조직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정희가 내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소설은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하이네의 시구처럼 반짝이는 시적 영감을 오롯이 드러낸다.“먼저 사랑이 오고, 행복이 오고, 질투심과 분노가 오고,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온다.” 자신이 삶 앞에 정직하고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숨결, 가슴 아픈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 웅숭깊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소설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던 작가는 1995년 장편소설 형태로 썼다가 민생단 자료들을 다시 읽고 계간지에 연재하면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연재를 끝난 뒤에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이야기를 내서 뭣하겠는가?”라는 회의가 생겨 뒤로 밀쳐놨다. 그러다 이번에 내놓은 것은 지난 봄 촛불시위 현장에서 본, 전경들 앞에서 대중가요에 맞춰 춤추던 대학생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학생들이 춤추는 장면을 보면서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사실에 학생시절의 공포를 떨쳐버리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민생단 논문을 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며 “논문으로는 다 담을 길 없는 그 깊이 모를 혼돈과 암흑의 심연 속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에 빠져든 인간들의 이야기를 김연수는 처음 끌어안았다.”고 평했다.1만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아소 ‘극우본색’

    |도쿄 박홍기특파원|전통적인 극우 성향의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대동아전쟁’을 꺼내 들었다. 취임한 지 7일만이다. 이르면 다음달 초순에 치러질 중의원 선거를 겨냥, 전통적인 보수·우익 세력의 결속을 의식한 계산된 발언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아소 총리는 지금껏 창씨개명, 위안부,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과 관련, 숱한 망언을 쏟아냈지만 대동아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처음이다. 아소 총리는 30일 오후 총리실에서 일본의 과거 전쟁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일·청, 일·러(전쟁)와 이른바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과는 조금 종류가 다르다.”고 말했다. 또 “메이지 헌법 이래 약 120년, 일본의 역사로서 자랑할 만한 역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역사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대동아전쟁 자체가 일본이 2차대전 때 군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건 용어라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아시아가 대동 단결해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2차대전 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총사령부(GHQ) 측은 공문서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금지했다.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도 ‘태평양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용될 뿐이다. 이종원 릿쿄대 교수는 “아소 총리의 발언이 돌출적이라고 봐 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다.”면서 “외무상 시절, 역사적 발언에 대해서는 조심해 왔던 그”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대동아전쟁을 언급함으로써 우파적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려는 속셈 같다. 이게 끝이 아닐 수 있다.”고도 했다. 아소 총리는 외무상 시절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의식,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자제하며 실용적 외교를 펴왔던 터다. 일본의 한 외교 소식통도 “정권 유지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경기부양책으로 국민을 달래는 동시에 극우적 발언으로 보수·우파의 결속을 노리는 전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구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도 야스쿠니신사의 참배를 강행, 보수·우파들의 이탈을 막았던 정치 수단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아소 총리는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2차대전을 당시 어른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고 논란의 확산을 경계했다. 아소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어렸을 때부터 많은 영향을 끼친 일본 보수정치의 뿌리인 외조부 요시다 전 총리를 꼽고 있다. 아소 총리는 지난 25일 자신을 ‘호전적 국수주의’라고 비판한 미국 뉴욕타임스(NYT)에는 “국수주의자인지 아닌지 간에 내가 애국자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hkpark@seoul.co.kr ■아소 총리의 주요 망언 ▲2003년 5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 일본은 한글 보급에 공헌했다.”(도쿄대 축제) ▲2005년 10월-“우리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미국의 알링턴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영국 옥스퍼드대 강연) ▲2006년 8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 “중국이 중단을 말하면 말할 수록 가지 않을 수 없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더 피우고 싶은 이치다.”(자민당 총재 선거 유세) ▲2007년 3월 “(일본의 요르단계곡 개발과 관련) 일본인은 신용이 있다. 푸른 눈에 금발이었다면 아마 안됐을 것이다.”(나가사키 강연)
  • 김일성 편지 등 미공개 자료 전시

    김일성 편지 등 미공개 자료 전시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6·25때 중국군 사령관)가 6·25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신 등 미공개 자료와 영상물들이 건군 60주년을 맞아 공개된다. 26일부터 12월31일까지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건군 6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에서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공동 명의로 된 편지에서 각국 신문기자 20명이 유엔군 측 수행원으로 개성에 오는 것에 동의했다.“사소한 문제(기자 수행여부) 때문에 오랫동안 회담이 중지되거나 회담이 파국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귀측 제안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편지는 김과 펑의 사인은 없었고 영문을 타이프로 쳐서 만들었다. 시기는 1951년 7월 중순에서 8월로 추정된다. 이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에게 보낸 편지도 영문 타이핑으로 돼 있지만 이 대통령의 영문 이름 사인이 어제 쓰인 양 확연하다. 1951년 8월3일자 편지에서 이 대통령은 백 장군에게 “밀봉해 함께 보내는 편지는 극비(top secret)이니 밴 플리트 장군이나 조이 제독에게 직접 건네주어서 리지웨이 장군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다. 편지에서 또 이 대통령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유엔군 대표들이 어떤 (휴전) 분계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백 장군은 휴전회담에 지금처럼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이 자료들과 함께 미공개 자료 중에는 백선엽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휴전협정과 관련한 경과를 보고하는 편지 등 1급 비밀문서로 분류돼 있던 자료들이 들어 있다. 또 2000여점의 사진과 영상자료, 문서와 실물 자료들도 선보인다. 이와 함께 국군의 모태가 된 광복군의 군복과 무기, 훈련용 교재와 노트 등 건군 60년의 발자취가 담긴 각종 무기, 사진과 영상, 생활용품 등의 실물자료 등도 전시된다. 국방과학 코너에서는 군 위성통신 체계인 ‘아나시스’(무궁화 5호 위성) 모형을 비롯, 휴대용 대공 유도무기인 신궁, 함대함 유도무기인 해성, 차기 보병전투장갑차(K21), 차기전차(K2), 차기 소총, 국방 로봇인 ‘견마로봇’ 등 최신 무기의 실물과 모형도 등장한다. 이 무기들은 시뮬레이터를 통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군 생활과 군대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도록 60∼70년대,80∼90년대,2000년대의 내무반을 시대별로 실제 모습으로 재현했다. 군복의 변천사,10대 군가, 군인들의 먹거리와 놀거리, 얼차려 등 군대이야기도 자세하게 소개된다. 기념관 관계자는 “세계 각국의 군복과 군장류 등을 볼 수 있고 얼굴 위장, 각군 군복 입어보기 체험, 건빵 등 전투식량을 먹어 보는 체험 행사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기념관 내에 2500㎡(750여평) 규모로 마련된 기획전시실은 ‘건군 60년 발자취’ ‘국방과학’ ‘병영생활과 문화’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체험 이벤트’ 등의 주제로 꾸며졌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사설] 아소 내각, 한일 신시대에 역주행 말아야

    일본 자민당 아소 다로 총재가 어제 신임 총리로 취임했다. 한·일 관계가 극히 경색된 시점에 전임 후쿠다 총리보다 더욱 극우 민족주의적 성향의 그를 정점으로 새 내각이 발족한 것이다. 우리가 아소 체제의 출범을 축하하기에 앞서 우려섞인 눈길로 지켜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소 총리의 등장으로 우리에겐 걱정거리가 더 늘어난 꼴이다. 평소 그가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강제징용은 없었다.”는 둥 과거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드러낸 탓이다. 상대적으로 아시아를 중시했던 전임 후쿠다 총리 시절에도 일본의 독도 도발로 한·일 관계는 크게 꼬였다. 일본이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하면서다. 더군다나 현재의 불안한 자민당-공명당 연립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소 총리는 취임 초의 대중적 인기를 지렛대 삼아 중의원 해산 후 조기 총선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선거 결과를 떠나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만 더 심화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현해탄이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둔 한·일의 상호 의존관계는 숙명이자 업보다. 그러잖아도 북핵 6자회담 정상화와 미국발 금융위기 공동 대처 등 양국간 긴급 현안이 돌출한 시점이다. 부품·소재 산업의 기술이전, 지구온난화 등 환경 분야 협력, 나아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미래지향적 과제도 산적해 있다. 지난 4월 한·일 신시대를 열자고 했던, 양국 정상간 다짐을 되살려야 할 이유다. 그러려면 아소 내각이 불필요하게 이웃을 자극하는 일부터 삼가야 한다. 일본이 주도해야만 아시아의 번영이 보장된다는 대동아공영권식 망상 대신 주변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일본에도 이롭다는 점을 인식하란 뜻이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빠른 배들이었다. 청군은 그 배들을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한강이 얼어 있던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또 믿었다.‘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갑곶 방어선이 무너지다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 등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출발지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청군이 도해(渡海)를 시도하던 날 갑곶에 배치된 방어 전력(戰力)은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해안 방어의 주력은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 휘하의 수군이었는데, 광성진(廣城鎭)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강화성 방어를 맡은 초관(哨官)들 대부분도 장신의 선단에 소속된 배에 타고 있는 상태였다. 1637년 1월21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경징은 장신에게 휘하의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신은 급히 선단을 움직였지만 마침 조금(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스무사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금 때문에 전진이 여의치 않았던 장신의 선단은 이튿날 새벽까지도 갑곶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군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분전했다.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자신의 배 또한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의 수군이 도착했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등을 시켜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덩치가 훨씬 큰 조선 전함이 들이받자 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청군 병선들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선단을 향해 몰려들자 장신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정연 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광성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않고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강진흔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장신은 끝내 외면했다.‘인조실록’과 ‘병자록’ 등에는 격앙된 강진흔이 장신을 질타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장신,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지만 장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 등은 전진하여 강진흔을 구원하려 했으나 장신의 위세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갑곶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다 갑곶에서 강진흔의 수군이 무너지자 청군이 상륙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섣불리 건너오지 않았다. 척후병이 먼저 상륙하여 주위를 둘러본 뒤,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획책했다. 청군 대병력과 해안에서 직접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호조좌랑 임선백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대장이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봉림대군도 김경징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의 산 등지로 물러나 버렸다.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진해루(鎭海樓) 아래를 비롯한 험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곶 건너편에 있던 청군의 대병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병자록’ 등에서는 ‘청군이 마치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 달려들었다.’고 적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이미 청군에게 도해를 허용하여 사기가 저하된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황선신과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 초관 정재신(鄭再新)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이미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도주했다. 격분한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등의 휘하에서 강변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바다나 산으로 달아났다.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청군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갑곶 나루를 돌파한 청군은 사시(巳時·오전 9∼11시) 무렵 강화성으로 밀려들었다. 청군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성안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군을 배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선군은 조총과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집중 포격을 앞세워 몰려드는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강화성보다 몇 배나 견고한 대릉하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김경징 등 최고 지휘부의 오판과 태만,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강화성의 북문(北門)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청군은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지는 자결, 그리고 죽음들 불과 한나절여 만에 강화성은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또 ‘오랑캐’가 몰려오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남문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 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다. 그의 장렬한 죽음과 함께 문루도 사라져 버렸다. 김상용 말고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 도정(都正) 심현(沈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이 자결했다.‘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순절한 것이다.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비감했다.“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이 한마디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삶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다.‘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삼가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팽개쳤던 관인들 때문에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생령들의 희생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인(成仁)을 도모했던 관인들의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 가리어져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신념보다 국익… 한일관계 개선 기대

    |도쿄 박홍기특파원|22일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아소 다로 차기 총리는 전형적인 ‘보수·우파’ 성향의 정치인이다.‘매파’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일본’을 주창했던 아베 신조 정권 때 외무상과 자민당 간사장을 맡아 아베 총리를 뒷받침했다. 외무상 때 민주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이른바 ‘가치관 외교’에 치중, 중국과 서먹한 관계를 만든 적도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때도 외무상을 맡았던 ‘외교통’이다. 아소 차기 총리의 등장으로 일본 외교는 ‘아시아 중시외교’를 표방했던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노선에서 다소 벗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고이즈미·아베 정권의 ‘강경 우익’ 노선과 맥을 같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는 차이가 없다. 아소 차기 총리는 일본 보수정치의 뿌리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다.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은 까닭인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는 요시다 전 총리를 꼽고 있다.‘대단한 국가 일본’이라는 저서에서 요시다 전 총리가 자신에게 “일본인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일본은 반드시 잘된다.”라고 말한 점을 밝힐 정도로 ‘일본 우월주의’가 남다르다. ‘너무나 일본적인’ 아소 차기 총리인 탓에 그동안 한·일 역사와 관련, 적잖은 문제를 일으켰다.“창씨 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이뤄졌다.”거나 “일본은 한글 보급에 공헌했다.”는 등의 ‘식민지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아소 차기 총리를 두고 현실정치 및 외교에서는 ‘실용주의자’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단적인 예이지만 고이즈미 정권인 2006년 8월 외무상 시절 “신념과 국익이 부딪치면 국익이 먼저”라며 참배하지 않았다. 당시 “총리가 되면 재임 중에는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외무상 재직 전에는 두 차례나 참배했던 터다.‘신중론’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한국 징용자들의 유골 반환이나 사할린 영주귀국 확대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소 차기 총리는 중국에 상당히 신경쓰고 있다. 중국에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다는 인식에서다. 지난 12일 선거과정에서 “지난해 외무상 시절 엉망진창인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길을 텄다.”면서 “일·중 우호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다. 목적은 일·중 공동 이익이다.”라며 중국과의 우의를 강조했다. 또 전략적 호혜관계의 발전도 내세웠다. 반면 북한에 대한 강경론은 여전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과 관련,“‘이상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비틀거리고 있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북핵이나 납치문제에 대화와 압력의 병행론을 주장하고 있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아소 차기 총리는 외교정책에 큰 변화를 꾀할 수 없는 처지다. 총선거의 결과를 봐야 한다. 괜히 실수라도 할 경우, 총선거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전망했다. hkpark@seoul.co.kr
  • [사설] 日 독도 야욕 단발성 아닌 지속적 대응을

    그제 일본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전격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낮은 지지율 등 국내 사정 때문이라지만, 우리에게도 ‘강건너 불’일 순 없다. 일측의 독도 야욕으로 양국 관계가 급랭한 가운데 한·일 무역역조 심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한 형편인 까닭이다. 더욱이 후임 총리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아소 다로 자민당 간사장이 유력하다니, 정부가 일 정국을 예의주시하면서 장단기 대응책을 점검할 때다. 우리는 총리 교체 후 일본이 독도 도발을 멈추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요즘 일측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5일 각료회의에서 의결될 방위백서에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 명시한 사실이 그것이다. 그나마 일본 내 극우세력이 거론해 온, 독도주변 수역의 방위력 강화나 한국의 불법 점거 주장 등이 빠진 게 불행 중 다행일 정도다. 후쿠다 총리 이후가 걱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아소 간사장은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해 이뤄졌다.”는 등 국주수의적 인식으로 우리의 분노를 사지 않았던가. 우리는 일 보수우익의 간판인 아소 간사장이 총리가 되면 일본내 보수파를 설득해 오히려 유연한 대한 외교를 펼 것이라는 일부 전문가의 관측이 사실이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한 기대에 앞서 누가 총리가 되든 일측이 독도 야욕을 쉽게 접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일측의 간헐적 독도 도발에 냄비처럼 끓다가 말게 아니라 실효적 지배나 국제여론전 강화 등 파상적이고도 지속적인 대응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 “땅 못내놔” 친일파 후손들 대반격

    친일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이 제정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순순히 땅을 내놓을 듯했던 친일파의 후손들은 최근 ‘땅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 이의 신청이 81.5%에 이른다. 현재 국가에 귀속된 친일파의 땅은 환수 대상 토지의 절반을 웃돈다. SBS ‘뉴스추적’은 친일파 후손들의 반발에 삐걱거리고 있는 재산환수 실태를 집중 조명한다. 친일파 땅을 산 제3자들이 겪는 고충도 함께 들여다본다. 광복절을 맞아 마련한 프로그램 ‘8·15특집-위대한 유산 친일파의 반격’은 13일 오후 11시5분에 방영된다. 최근 한 친일파 후손은 192개 필지, 최소 300억원대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일제시대 조선인 가운데 최고 작위인 후작의 후손인 그는 “조상이 한일합병에 기여하지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며 승소를 장담하고 있다. 자작의 후손이라는 또다른 사람은 “귀족이었다고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 친일파라고 해서 재산을 환수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재산조사위는 ‘빨갱이’이고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비난한다. 친일파가 아니라며 법정 투쟁에 나선 이들. 취재진은 일본 현지 취재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자료를 입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129명의 50년 전 녹취록이 그것이다. 구식 릴 테이프 418개에는 총독부가 기억하는 훌륭한 조선인들의 친일 행각과 비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일본인 관료들이 이완용, 송병준, 박영효, 윤덕영 등 귀족을 포함해 친일파 20여명을 극찬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한편 친일파의 후손도 아닌데 억울한 처지에 빠진 사람도 있다. 연천의 한 농민은 빚까지 내서 땅을 샀다. 하지만 그 땅은 일제시대 귀족의 땅이라는 이유로 1년 만에 국가에 귀속됐다. 그가 정부를 비난하는 사이, 친일파는 땅 판 돈을 챙겼다. 이같은 제3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엇갈리고 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독립유공자 361명 광복 63주년 포상

    국가보훈처는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한 이춘숙(李春塾·1889∼1935)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李惠鍊·1884∼1969),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1927) 여사 등 361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한다고 11일 밝혔다. 이번에 포상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66명(독립장 2명, 애국장 59명, 애족장 105명), 건국포장 65명, 대통령표창 130명 등이며, 이 가운데 생존자는 4명이고 여성은 10명이다. 이들은 오는 15일 광복절 중앙경축식장과 지방자치단체 주관 경축식장에서 훈장을 받거나 추서되며, 국외 거주자는 재외공관을 통해 본인과 유족에게 훈장이 전달된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이춘숙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 등을 오가며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한 뒤 같은 해 4월 상하이로 망명해 1920년 4월까지 임시의정원 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이후 임시정부 군부차장과 학무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헌법 개정, 공채발행 조례 등의 제정에 참여하고, 상하이 민단장 여운형 선생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 등에 각각 참여해 활동했다.1920년 11월 일경에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출소했으며,1927년부터 1931년 5월까지 신간회 경성지회의 총무간사,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같은 독립장이 추서된 유기석(柳基石·1907∼?)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을 결성했고,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1932년 이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북의용군 등의 항일단체에 가입해 톈진 일본총영사관 및 일본기선에 수류탄을 투척했다.1938년 김구 선생과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난징에서 한족동맹의장 겸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활약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는 1909년부터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미국 LA에서 조직된 부인친애회,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1907년 국채보상의연금을 기부하고 1926년에는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직접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정막래(丁幕來·1899∼1976)·이소선(李小先·1900∼?) 여사는 기녀 출신으로 1919년 경남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에서 동료와 함께 기생단을 조직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돼 각각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건국훈장 독립장 柳基石(중국방면) 李春塾(임시정부) ●건국훈장 애국장 具錫圭(의병) 權能道(만주방면) 金炳鉉(만주방면) 金士極(만주방면) 金相周(만주방면) 金瑞雲(만주방면) 金錫元(의병) 金錫弘(만주방면) 金演性(의병) 金用三(만주방면) 金龍玉(만주방면) 金龍澤(만주방면) 金允涉(만주방면) 金俊元(만주방면) 金昌鉉(만주방면) 金恒龍(만주방면) 盧秉漢(인니방면) 朴基運(의병) 朴貞鍵(중국방면) 朴定勳(만주방면) 朴琮植(국내항일) 方成柱(만주방면) 裵敬鎭(국내항일) 白圭三(노령방면) 白一龍(만주방면) 徐光道(의병) 徐允峯(만주방면) 孫亮燮(인니방면) 孫正彬(만주방면) 申英七(의병) 申應奎(만주방면) 申 훤(만주방면) 吳民聲(중국방면) 李灌鎔(국내항일) 李光河(만주방면) 李相寬(만주방면) 李錫吉(의병) 李成鎬(중국방면) 李元甫(국내항일) 李泰涉(만주방면) 李赫魯(국내항일) 李鉉稷(국내항일) 李華榮(의병) 任成祐(국내항일) 鄭天和(3·1운동) 鄭泰玉(국내항일) 趙正來(국내항일) 崔敬京(만주방면) 崔文武(만주방면) 崔文鳳(노령방면) 崔聖必(의병) 崔承觀(만주방면) 韓慶錫(학생운동) 韓大弘(만주방면) 許璋煥(국내항일) 玄思桂(만주방면) 黃甲用(의병) 黃稷淵(국내항일) 黃海龍(국내항일) ●건국훈장 애족장 姜極模(만주방면) 姜明秀(3·1운동) 高圭永(국내항일) 高德鳳(만주방면) 權靑松(의병) 金敬俊(3·1운동) 金光壽(3·1운동) 金大支(3·1운동) 金東赫(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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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琪煥(국내항일) 洪思哲(3·1운동) 洪鎭玉(3.1운동) 黃乭伊(3·1운동) 黃萬模(3·1운동)
  • 日 아소 간사장 ‘또 구설수’

    |도쿄 박홍기특파원|아소 다로 일본 자민당 간사장이 취임 사흘만인 4일 제1야당인 민주당을 독일 나치에 비유, 구설수에 올랐다.10개월만에 화려하게 간사장으로 복귀,‘포스트 후쿠다’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그다. 신중치 못한 ‘입놀림’으로 설화에 휩싸인 적이 적잖은 아소 간사장은 이번에도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아소 간사장은 이날 취임 인사차 민주당 소속인 에다 사쓰키 참의원 의장을 방문, 환담하다 에다 의장이 “민심이 자민당에서 멀어졌다.”고 하자,“민주당은 정말로 정권을 차지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어 “민주당은 (여당과) 대화를 하려는 분위기가 안 돼 있다.”면서 “독일에서도 한번 시켜보겠다고 국민이 나치를 선택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에다 의장은 이에 “민주당이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대화 내용을 전해 들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간사장은 “민주당을 나치로 취급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폭언이다.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며 반발했다. 아소 간사장은 상황이 악화되자 “전혀 사실과 다르다. 민주당을 나치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참의원에서의) 심의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소 간사장은 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 때 중국과 일본의 쌀값 차이를 비교하다 “일본쌀은 표준미 한 가마에 국내에서는 1만 6000엔이지만 중국으로 수출하면 7만 8000엔에 팔린다. 어느 쪽이 더 비싼가. 치매에 걸린 사람도 이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발언, 곤욕을 치렀다.이보다 앞서 3월에는 중동에서 전개한 일본의 평화봉사활동과 관련,“일본인은 신용이 있다. 파란 눈에 금발이었다면 아마 안 됐을 것”이라고 발언, 물의를 빚었다.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던 2003년 5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해 이뤄졌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hkpark@seoul.co.kr
  • 아소 간사장은 누구

    |도쿄 박홍기특파원|아소 다로(67) 자민당 전 간사장이 당의 얼굴인 간사장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고자 간사장에서 사퇴한 지 10개월만이다. 총재 선거에서는 197표를 얻어 후쿠다 총리에게 패배했다. 이후 전국 지방을 돌며 터닦기에 나섰다.159곳에서 강연을 했다. 줄곧 일본인의 잠재능력을 고무시키는 주제를 다뤘다. 최근 지역구인 후쿠오카의 한 축제에 엉덩이가 드러나는 차림으로 참여할 정도로 서민 속으로 파고들었다.‘포스트 후쿠다’를 겨냥해서다. 대중적 인기는 높다. 아소 간사장은 9선의 중의원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 전 정권에서 당의 정책의장격인 정조회장, 총무상, 외무상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후쿠다 총리에게 패배한 뒤 입각 요청을 거부한 적도 있다.“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로 후쿠다 총리와는 거리를 뒀다. 고이즈미·아베를 잇는 강경 우파다. 그러나 당내 기반이 약하다. 아소파는 20명에 불과하다. 후쿠다 총리가 포함된 최대 파벌인 마치무라파의 지원 없이는 사실상 ‘총재’를 바라볼 수 없는 처지다. 철학은 달라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민당을 위해 후쿠다 총리와 손을 잡은 셈이다. 물론 차기 중의원 선거의 결과에 따라 후쿠다 총리와의 동반 몰락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베팅이다. 아소 간사장은 일본 보수정치의 뿌리로 꼽히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이자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사위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1만여명의 조선인을 징용, 강제 노역을 시킨 규슈의 아소탄광 소유자다. 아소 간사장도 32세때 아소시멘트 사장을 역임했다. 몬트리올 올림픽때 사격 국가대표로 출전한 이색 경력과 함께 만화를 애독하는 ‘만화광’이다. hkpark@seoul.co.kr
  • 외국 교과서의 한국 왜곡사례 한눈에

    외국 교과서의 한국 왜곡사례 한눈에

    한국인들이 중국어와 일본어를 쓴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948년부터 최근까지 외국 교과서 가운데 한국에 대해 잘못 기술된 사례 등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8월1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외국 교과서의 한국 이미지 기획 전시’가 그것이다. 전 세계 31개국에서 입수한 94권의 외국 교과서가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큰 주제는 ‘교과서와의 만남’. 대한민국 건국 60년사를 조망하는 ‘대한민국의 발자취’, 외국 교과서의 오류 유형을 소개하는 ‘도전받는 대한민국’, 이같은 오류를 수정한 사례들을 살펴보는 ‘바로잡는 진실’, 한국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함께 만드는 대한민국’, 기술 한국의 꿈을 담은 ‘파워코리아’ 등으로 꾸며진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주제는 ‘도전받는 대한민국’.“한국의 국교는 유교이다.”“한국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쓴다.”“한국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가족계획 정책을 실시한다.”(쿠웨이트),“한국인은 중국어를 쓴다.”“한국은 말라리아 전염국”(아르헨티나),“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목재이다.”(이집트),“한국은 다수의 한국인들과 중국인, 일본인으로 구성돼 있다.’(터키) 등으로 한국에 대한 외국 교과서의 갖가지 오류 유형이 소개된다. 특히 후소샤 교과서(일본)는 “고대 한국에는 ‘임나일본부’가 설치됐었다.”“조선통신사는 일본 축하사절단이었다.”“일본을 침략한 외구(外寇)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등으로 한국 역사를 왜곡해 기술하고 있다. 지명 표기에도 오류가 눈에 띈다. 서울은 시울(쿠웨이트), 목포는 무큐(쿠웨이트), 대구는 타이주(이집트)나 티주(쿠웨이트), 부산은 부잔(이집트·쿠웨이트), 제주는 쉬주(이집트), 태백산은 티박찬(쿠웨이트)으로 오기돼 있다. 이밖에 러시아 교과서에 한국 소개 페이지를 신설한 점, 미국 교과서에서 ‘얄루강’을 ‘압록강’으로 바로잡은 점, 칠레 교과서에서 전쟁고아 사진을 삭제한 점 등도 눈길을 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소영 연구원은 “이번 전시는 1948년 건국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외국 교과서에 그려진 한국 관련 기술의 참모습을 확인해 보기 위해 마련됐다.”면서 “한국 관련 기술의 왜곡 사실만을 부각하기보다 외국 교과서에 기술된 한국의 다양한 이미지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날로 어려워지는 산성의 사정을 바깥에 정확히 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청군이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 때문이었다. 청군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과 목책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방울 등 쇠붙이를 매달았다. 조선군 전령이 목책을 넘으려 하면 어김없이 매복한 청군이 뛰쳐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책은 서서히 산성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다. ●‘술과 고기’의 굴욕 12월27일 조정은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냈다. 세시(歲時) 인사를 하면서 적정(敵情)을 떠보려는 깜냥이었다. 대사간 김반(金槃), 승지 최연(崔衍), 교리 윤집(尹集)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적진에 사람과 선물을 보내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김반 등의 주장을 일축했다. 대신을 보냈다가 혹시라도 억류될까봐 하급 관원을 한 사람 골랐다. 이기남(李箕男)이 그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서자인 그는 영리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10병을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영리한 그도 청군 진영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실언을 하고 말았다. 연말 인사차 왔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날씨도 추운데 우리 전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특별히 술과 고기를 보냈다.’고 했다. 청군 장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하늘이 조선 팔도를 우리에게 주었으니 술과 고기 등 모든 물자가 다 우리 것이다. 국왕은 지금 골짜기에 갇혀 있고 안팎이 가로막혀 신하들은 모두 굶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문득 획득한 물품을 국왕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이 술과 고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도로 가져가 굶주린 너희 신료들에게나 주어라.’ 그러면서 청군 장수들은 조선 근왕병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성세(盛勢)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기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적정을 엿보려고 갔다가 도리어 적이 산성 내부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기남이 돌아온 직후 독전어사(督戰御史) 황일호(黃一皓) 등이 인조를 뵙자고 청했다. 황일호는 인조에게 빨리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자고 촉구했다. 그는 당시 형세를 ‘주객(主客)이 뒤바뀐 상태’라고 진단했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황일호는, 병사들은 사기(士氣)를 먹고 사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가만히 앉아서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혹독한 추위 막을 가마니조차 부족 1636년 연말, 산성의 조선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군사들의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방한복’이라 할 수 있는 빈 가마니(空石)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황일호는 산성의 주민들에게 벼슬을 팔거나 면천첩(免賤帖)을 팔아서라도 병사들에게 군막(軍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사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자기 몸을 가리고,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산성 주민들에게 무슨 물자가 있을 것인가. 도무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12월28일, 술사(術士) 몇 사람이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日辰)을 뽑았다. 도체찰사 김류는 술사들의 얘기에 솔깃해졌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해야 한다는 건의도 들었던 터라 병력을 뽑아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했다. 노살(勞薩) 등이 이끄는 청군은 골짜기 여기 저기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미끼’를 던졌다. 다름 아닌 포로로 잡은 조선인 노약자들과 가축들이었다. 그들을 본 김류는, 달려 내려가 공격하면 조선인 포로와 가축들을 구해올 수 있다고 여겼다. ●패전 책임 하위 무관에 전가해 원성 김류는 체찰부(體察府) 소속 장졸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장졸들은 ‘함정’일 수 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몸을 사렸다. 그러자 체찰부의 비장(裨將) 유호(柳瑚)가 군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김류에게 건의했다. 유호는 머뭇거리는 장졸들에게 김류가 건네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떠밀린 장졸들은 할 수 없이 달려 내려갔다. 매복한 청군은 처음에는 조선군이 포로와 우마(牛馬)들을 거두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진이 비어 있다고 착각한 조선군 수백 명이 쏟아져 내려오자 청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청군이 만든 ‘함정’에 빠져 당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갖고 있던 화약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여 애초부터 화약을 조금밖에 지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화약을 더 달라는 고함과 아우성 속에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산성 쪽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김류는 조선군이 섬멸당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초관(哨官)을 시켜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고 있는 장졸들이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올라 퇴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형 사고’였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산성의 현실에서 이들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즉흥적이고 섣부른 작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김류와 유호의 책임이 제일 컸지만, 군사들을 제 때 물리지 못한 과오는 김류의 퇴각 명령을 전한 초관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참수되었다. 또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 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홍두표(洪斗杓)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홍두표는 신료들의 구원으로 죽음을 겨우 면했지만, 패전 책임이 엉뚱하게 전가되는 와중에 병사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홍타이지, 남한산성 압박 본격화 이 싸움을 계기로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누구도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더욱이 12월29일, 남하하던 홍타이지는 휘하 장수들을 먼저 도성으로 들여보내 숨어 있는 사람과 가축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자신은 직접 남한산성 근처로 나아가 인조를 더욱 압박할 심산이었다. 12월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하루 종일 청의 대군이 광나루, 마포, 헌릉(獻陵) 등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김류는 패전에 대해 사과하고, 적진에 사람을 보내자고 청했다. 패전을 계기로 다시 화의를 추진하려는 심산이었다. 김상헌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사간원 신료들도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길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선가 근왕병이라도 나타나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의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실의에 빠진 산성 사람들은 까치집을 바라보며 그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길조’가 나타난 이 날, 홍타이지는 탄천(炭川) 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했다. 1636년 12월30일, 남한산성 주변의 풍경은 스산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日네티즌, 한일합작영화 출연배우 맹비난

    日네티즌, 한일합작영화 출연배우 맹비난

    “사토시는 좋아하지만 독도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일본의 인기영화배우인 츠마부키 사토시가 한일합작영화 ‘보트’에 출연한 것과 관련 일본 네티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스포츠호치를 비롯한 일본 언론은 지난 24일 “사토시가 ‘보트’의 촬영현장에서 뛰어난 한국어실력을 선보였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일본 네티즌들은 “독도를 불법점유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과 국경을 넘은 우정이라니…”라는 등의 글을 올리며 사토시를 성토하고 나섰다. 야후재팬 뉴스 게시판에서는 “우선 독도를 탈환한 뒤에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일교류는 한국이 역사의 진실을 인정한 다음부터…” 등의 의견이 네티즌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또 “한국어 따위를 사용하다니 부끄럽지 않나? 너도 혹시 조선인이냐?”, “모든 것에서 김치냄새가 난다.”며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도 쏟아졌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한국어를 배운 츠마부키가 대단하다.”, “앞으로도 한일 양국의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 등 사토시를 옹호하는 소수발언도 있었다. 한편 한국 배우 하정우와 일본의 사토시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보트’는 일본으로 밀수 심부름을 하는 한국 청년과 일본인 파트너가 함께 한국 여자를 일본으로 밀입국 시키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내 청춘에 고함’의 김영남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메종 드 히미코’의 작가 와타나베 아야가 시나리오를 맡은 이 영화는 내년 상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사진=cinematoday.jp 서울신문 나우뉴스 김철 기자 kibou@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독도, 그리고 안용복을 돌아보다

    독도, 그리고 안용복을 돌아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억지 주장으로 온나라에 비상이 걸린 이때,19개 지역MBC의 연합채널인 MBC넷(NET)이 의미깊은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독도를 지키기 위한 선조의 노력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독도지킴이 대조선인 안용복’ 3부작과 ‘독도’ 2부작이 그것.MBC넷은 이들을 21일부터 25일까지 5일동안 특별 방영한다. ‘독도지킴이 대조선인 안용복’은 부산MBC에서 제작했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것’이란 내용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契)를 받아낸 인물. 그는 이를 위해 두 차례나 일본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용복이 받은 서계의 현존 가능성을 짚어보고, 그가 한·일 외교전에 미친 영향과 독도 문제와 관련해 후대에 차지한 위상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하지만 현재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일본 관변학자들은 안용복을 왜곡하는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민간인이 막부로부터 서계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주요근거로 내세운다. 제작진은 이같은 실상의 이면에 정치적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독도’ 2부작은 포항MBC에서 만들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독도가 더이상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우리 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를 위해 역사적인 증거들을 확인해본다. 동시에 국제법적인 정확한 이해와 증거 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하자원 개발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독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땅임을 재확인한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보고서없는 고구려 고분 발굴’ 추적

    ‘보고서없는 고구려 고분 발굴’ 추적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하기 이전인 1900년대 초부터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우리 문화유산을 조사했다.1909년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평양 일대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했다. 문제는 고고학 조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발굴보고서를 제대로 내지 않아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상당수 출토 유물은 일본으로 실려간 뒤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 학계의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연구가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소극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유적이 대부분 북한과 중국에 있어 자료의 접근이 어렵고, 조사 경험이 없다는 것 말고도 이런 이유가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프로젝트는 일제 강점기 고구려 유적 발굴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수습된 유물은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현재는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자는 뜻에서 기획되었다.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책임연구자로 하는 이 프로젝트는 5개년 계획으로 지난해 시작되었다. 최근 발간된 ‘일제 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관동지역 소재 고구려 유물 Ⅰ’은 첫 해의 연구성과이다. 이에 따라 황제묘 혹은 한평동 고분이라고 불리고, 북한에서는 경신리 1호라고 이름 지은 강동군의 한왕묘와 용강고분, 강서군의 간성리 고분군과 강서삼묘, 남포부의 매산리 고분군, 용강군의 화상리 고분군과 쌍영총 등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고분의 조사 경과와 내용이 구체적으로 복원되었다. 정 교수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이른바 ‘고적조사’를 거의 독점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 도쿄제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남긴 자료와 유물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도쿄대 고고학연구실에 유학하던 시절 그 정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동연구자인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도쿄대 대학원 한국조선문화연구전공 조교수도 도쿄대 고고학연구실 출신의 일제 강점기 고고학사 전문가이다. 정 교수에 따르면, 근대에 가장 먼저 고구려 고분을 굴착한 사람은 뜻밖에 강서군수 이우영이다. 그는 1904년 평안남도 강서군의 대묘와 중묘를 굴착했다. 강서고분은 1906년 일본군 위생병 오타 후쿠조(太田福藏)와 역시 일본인인 오카무라 고이치(岡村幸一)에 의해 잇따라 파헤쳐졌다. 이 고분은 예로부터 왕후묘로 알고 군수가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조선인 군수가 일본인의 강압적 요구에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김현숙 연구위원은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은 한 해에 한 권씩 앞으로 4권이 더 발간될 예정”이라면서 “일본의 협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북한이 일본 측에 우리의 북한지역 유적 및 유물 조사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 자료 및 유물 조사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단독]순국선열 지하에서 뿔났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역사왜곡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친일 경력의 인사가 정부의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는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조선인 항일유격대 소탕 작전에 종사하다 만주군 중위로 광복을 맞았던 백선엽(88) 전 육군 참모총장이 기념사업위 고문이다. 백 고문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가 올해 발간 예정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에 포함돼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것에 대해 백 고문 측은 이의신청을 하지 않았다. 기념사업위 추진기획단 관계자는 “산업화나 민주화 과정에서 기여한 측면을 고려해 각계각층의 추천을 받아 고문으로 위촉했다.”면서 “친일 이력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때려 잡던 사람이 건국기념사업위원회의 고문으로 위촉됐다는 것은 정부가 역사의식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놈놈놈’을 보는 두가지 시선

    ‘놈놈놈’을 보는 두가지 시선

    하반기 영화계 최대 기대작인 ‘놈놈놈’이 17일 개봉을 앞두고 베일을 벗었다.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1930년대 중국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20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 올해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 진출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법.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 두가지 관람포인트를 짚어가며 ‘놈놈놈’을 전격 해부한다. ●최신 감각에 아날로그 감수성 더한 ‘김치 웨스턴’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은 삭풍이 몰아치는 황야를 배경으로 긴장감 넘치는 총잡이들의 서부극에 매료됐고, 이를 이른바 ‘김치 웨스턴’으로 불리는 한국형 서부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로 구현해 냈다. ‘장화, 홍련’‘달콤한 인생’ 등 충무로에서 스타일을 강조한 영화로 일가를 이룬 김 감독은 중국 사막을 무대로 펼쳐지는 장대한 스케일과 시원한 영상미로 한국영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영화적 감각으로는 최첨단을 달리면서도 감독은 제작과정에서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견지했다. 서양에선 잊혀지고, 국내에선 1960∼70년대 유행했던 만주 웨스턴을 부활시킨 것은 물론 외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컴퓨터그래픽(CG)보다는 배우들의 실제 액션과 거친 카메라 워킹으로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정체불명의 보물지도를 놓고 세명의 조선인과 일본군, 마적단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꿈을 좇아 끊임없이 질주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반영한다. 김 감독은 “잊혀졌던 아날로그의 생생한 힘과 원시적인 기운에서 나오는 박진감을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단 스타일의 강조로 인한 상대적인 서사의 부재는 이 영화 성패의 최대 걸림돌이다. 국내 개봉판은 지난 5월 칸 영화제 출품 버전의 도입부와 엔딩을 수정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늘려 대중성을 높였다. 영화적 메시지냐, 순수 오락영화의 미덕이냐는 이제 온전히 관객의 선택에 달렸다. ●송강호+이병헌+정우성=? 이 영화의 제작자인 바른손의 최재원 대표는 “앞으로 주연급 톱스타 세명이 한 영화에 다시 모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놈놈놈’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스리톱 주연의 영화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The Good,The Bad And The Ugly)에서 제목을 빌려 왔지만, 세 인물 사이에 뚜렷한 선악의 기준은 없다. 대신 인물 캐릭터는 영화속에서 새롭게 구성됐다. 이 가운데 중심축이 되는 것은 단연 ‘이상한 놈’ 윤태구 역의 송강호.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모습부터 웃음을 자아내는 그는 코믹과 정극 연기를 오가며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극의 균형을 잡는다.‘스타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정우성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한줄로 밧줄을 타거나, 후반 추격신에서 말을 타고 장총을 쏘는 장면은 압권이다. “솔직히 영화 출연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힌 이병헌은 손가락을 서슴지 않고 자르는 등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남성팬들을 사로잡는다.“촬영현장이 열악해 경쟁의식보단 동지의식이 생겼다.”고 말하는 세 배우. 하지만 각자 맡은 캐릭터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해 오히려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단점이다. 이들의 의기투합이 의미있는 시너지 효과를 낼지,‘부적절한 조합’으로 주저앉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6者 “석달내 북핵 불능화” 제안

    |베이징 김미경특파원|10일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개막한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에서 한·미 등은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서 내용 검증체제를 구축, 다음달 중순 전에 영변 핵시설 현장 방문 등 검증작업에 착수하자고 북측에 제시했다. 한·미 등은 또 오는 9월까지 핵시설 불능화 등 비핵화 2단계를 마무리하는 방안을 북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측은 불능화에 따른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속도가 더디다며 중유 및 에너지 설비 지원이 완료돼야 핵 신고 검증체제 합의에 응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북측은 또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핵 신고서 내용 검증작업과 함께 3단계인 핵폐기 과정에 돌입하려면 경수로 등 추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김숙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이날 회담 후 브리핑에서 “핵 신고 검증·모니터링 메커니즘 구축 등 4가지 의제를 정하고 이 문제에 집중했으나 논의를 마무리짓지 못했다.”며 “내일쯤 열릴 비핵화 실무그룹회의에 전달할 검증 가이드라인에 대한 협의 후 의견 수렴 과정이 있었으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해 내일 속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날 오후 4시간여에 걸친 릴레이 회담에서 핵 신고 내용 검증작업에 협조하겠다는 원칙을 밝히면서도 핵시설 불능화 이행의 상응조치인 중유 95만t 규모의 경제·에너지 지원의 40%만 이뤄졌다며, 이에 대한 조속한 이행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이날 미국이 북한의 핵 신고서에 대해 검증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욕심부터 내세우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른 경제적 보상조치 등 ‘의무 이행’을 강조했다.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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