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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토야마 또 ‘한입으로 두말’

    │도쿄 이종락특파원│잦은 말 바꾸기로 눈총을 받고 있는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하토야마 총리는 지난 4일 오키나와현을 방문했을 때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과 관련해 “최소한 오키나와 현외 이전 발언은 당의 공약이 아니라 나 자신이 대표로서 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또 “생각할수록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대 억지력의 필요성을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하토야마의 발언은 후텐마 기지를 완전히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기기 어렵게 되자 현외 이전을 당의 공약이 아닌 개인 차원의 의견으로 의미를 축소, 자신의 사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 같다. 또 미 해병대가 오키나와에 없으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총리 취임 이전과는 달리 취임 이후 북한의 핵억제를 위해서도 미 해병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변명이기도 하다. 하토야마 총리의 ‘신중치 못한 입놀림’은 곧바로 야당뿐만 아니라 연립여당에서조차 성토의 대상이 됐다. 당 대표의 발언이 당 공약과 다를 게 뭐냐는 비판이다. 나아가 일본에 주둔한 미 해병대의 역할을 깨닫는 데 총리로서 무려 8개월이나 걸린 데 대해 충격적이라는 게 야당의 목소리다. 하토야마 총리는 전에도 오락가락한 발언으로 자주 원성을 샀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조선학교 수업료 면제 문제를 비롯해 아동수당 확대지급, 정치자금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즉흥적으로 입장을 내놓았다가 파문이 일면 뒤집는 일을 되풀이해 왔다. 아사히신문은 “정치가에게 말은 생명이고 일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면 더욱더 그러하다.”면서 “하토야마 총리는 그 중량감을 모른다.”고 꼬집었다. jrlee@seoul.co.kr
  • [3일 TV 하이라이트]

    ●책 읽는 밤(KBS1 오후 11시50분)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국 대륙을 제패하던 시절, 소현 세자가 볼모 생활을 마치고 환국하던 1644년 전후를 담고 있는 김인숙의 소설 ‘소현’. 교보문고 명예 북 마스터 클럽의 28명과 함께 철학자 탁석산, 역사학자 신주백, 문학 평론가 이명원, 소설가 이홍, 영화감독 이숙경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꼬꼬마 꿈동산(KBS2 오후 4시10분) 어느 날 퐁퐁 가족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식탁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지나가던 치키포키에 올라탄 퐁퐁 가족은 치키포키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그런데 치키포키가 출발하자 덜컹 덜컹 흔들리고, 식탁 위의 음식들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자리를 바꾼다. 퐁퐁 가족은 무사히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동이(MBC 오후 9시45분) 동이는 결국 감찰부 정기 시재에서 불통이 되어 쫓겨날 신세에 처하지만 인현왕후의 도움으로 사흘 후에 다시 시재를 치르게 된다. 숙종은 옥정을 후궁으로 책봉하고, 대비를 비롯한 서인세력은 긴장한다. 한편 영달은 천수가 수상하다며 황주식과 함께 천수의 봇짐을 뒤진다. 이 때 봇짐에서 검계 표식이 떨어진다. ●제중원(SBS 오후 9시55분) 고종을 진찰한 황정은 일본군이 순종에게 양위를 하라고 채근하자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일본공사로부터 의료선진화를 앞당기라는 주문을 받은 와타나베는 조선인을 대상으로한 생체실험을 계획한다. 한편 위생검사라는 미명하에 조선여성들을 농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석란은 분개한다. ●한국기행(EBS 오후 9시30분) 담양 봄나들이의 가장 좋은 벗은 대나무다. 성인산 자락의 오래된 대숲에는 죽녹원이 있다. 8개의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그곳에서 웅장하고 훤칠한 대나무와 댓잎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무릉도원이 이곳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평화로움을 노래하는 대숲과 죽향 가득한 담양을 만나본다. ●경찰 25시(OBS 오후 11시) 청주 일대의 중·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이른바 ‘발바리’가 검거됐다. 범행은 늦은 시각 학교나 학원에서 귀가하는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어졌고, 신고된 건수만 해도 16건.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경찰은 50대의 한 남자를 추적해 상습 성추행범으로 체포했다. 자신의 범행을 시인한 범인은 극히 말을 아끼는데….
  • [한·일 100년 대기획] 조총련은 지금

    │도쿄 이종락특파원│ 조총련은 교포 사회의 한 축이다. 조총련이 창립된 1955년만 해도 동포의 80%에 달하는 43만명이 조총련 소속이었다. 하지만 남북한 간 경제력이 벌어지면서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한국 국적행이 진행되고 있다. 조총련 소속원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일본내 외국인등록 서류에는 무국적(조선족)으로 분류된다. 해외여행이 금지되고, 은행 대출 등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핵무기 발사 등 일본과 북한의 뒤틀린 관계 때문에 일본 내 조총련 활동에 대한 제재가 만만찮다. 이런 이유로 최근 들어 한국 국적 취득자가 부쩍 늘었다. 조총련은 조직 가입자가 20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매년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9만명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이들 중 조선족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3만~4만명에 불과하다. 도쿄에 중앙본부를 두고 있고, 47개 도도부현에 본부를 별도로 설치하고 있다. 조총련은 일본 사회에서 ‘민족교육’에 치중했다. 교육기관만 조선대학교를 비롯, 전국에 초·중·고 103개교를 두고 있어 6000~7000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절정기였던 1970년에는 158개교 4만여명에 이르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수 감소로 통폐합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달부터 공립고의 수업료를 걷지 않고, 사립고의 경우에도 학생 1명당 연간 11만 8800엔(저소득 가구는 최대 23만 7600엔)을 지원하는 고교 무상화를 실시하면서 조선학교를 일단 제외했다. 이에 대해 조총련 간부는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동등한 납세자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데도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20년 싸운 우토로 한인들 삶터

    │우지 이종락특파원│세계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토부 우지 시에 군사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인 노무자 1300여명이 동원됐다. 비행장 옆 넓은 공터인 우토로 마을에 이들이 거주할 이른바 ‘한바’(飯場·노무자 숙소)를 조성했다. 해방 이후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고국에 돌아가길 원했지만, 경제적 현실 때문에 이곳에 눌러앉아야 했다. 일본 정부나 징용 당사자인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최소한의 생계지원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방치됐다. 막노동이나 고물수집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2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조국애가 강해 마을 한가운데에 일본 내 첫 민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1989년 닛산그룹 계열인 닛산샤타이로부터 토지소유권을 취득한 니시니혼쇼쿠산은 우토로 주민들을 상대로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우토로 마을 사람들도 정착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내세우며 맞서 싸웠지만 2000년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주민들은 법적으로 불법점거 상태가 됐으며 언제 퇴거당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부당함을 호소했다. 결국 이 문제는 한·일 정부 간의 외교 문제로 번졌다. 어렵게 삶터를 지켜온 마지막 남은 한국인 정착촌이라는 사실이 부각됐다. 재일교포들과 일본 내 양심 있는 시민단체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6억원을 모았다. 여기에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30억원을 토지 구입비로 배정했다. 하지만 소송기간 동안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6400평에 이르는 마을 부지 가격은 14억엔(약 168억원)에 이른다. 65가구 230여명의 주민들은 6개월째 의견수렴을 하고 있다. 주택을 배정받을 경우 우토로에 남을 주민들과 주택을 매매하려는 주민들이 섞여 있는 등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주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 집이 압류된 상태여서 전체 주민들이 만족하는 결론을 얻기가 쉽지 않다. 현재로선 전체 부지 중 3분의1 정도만 매입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가고 있다.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억압·멸시 이겨낸 재일동포의 삶 - 민단세대 고난과 과제

    [한·일 100년 대기획]억압·멸시 이겨낸 재일동포의 삶 - 민단세대 고난과 과제

    광복 이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억압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한 많은 타향살이를 견뎌야 했다. 재일동포들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나뉜 채 지문날인제를 폐지시키는 등 권익보호에 매진해 왔다. 여기에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뉴 커머(New comer)’들도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며 재일동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본인들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얼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해 본다. │도쿄 이종락특파원│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에 거주하던 많은 한국인들은 귀국을 원했다. 하지만 상당한 액수의 배삯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고향에서 이렇다 할 생계수단이 없는 한국인들은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200만명의 재일동포 중 140만명이 귀국하고 60만명이 일본에 체류했다. 이들은 광복 직후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두 패로 나눠졌다. 친공산주의계의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과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반공청년 조직인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이 결성됐다.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건청과 건동은 1946년 10월3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재일동포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재일본대한민국 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탄생시킨다. 당시 민단은 규모나 인력, 자금력에서 조련으로부터 발전한 조총련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악했다. 재일 한국인은 1947년 발표된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야 했다. 박병헌 민단 중앙상임고문은 “재일 한국인은 해방 전에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대우에서의 차별을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외국인 등록법이 제정돼 그 법에 의해 규제를 당하고 법률적으로 제한을 받았다.”고 말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차별의 벽을 견뎌야 하고, 일본 주류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된 셈이다. 그러다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라 재일 동포들은 특별 영주권을 받았다. 또한 일본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와 생활보호를 받을 권리,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권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취업에 제한을 받는 것을 비롯해 공영주택에 입주할 수도 없고, 국민연금 혜택을 누릴 수 없으며, 금융차별을 견뎌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을 견디다 못해 인질극을 벌인 이른바 ‘김희로 사건’이 터졌다. 부친의 성에 따라 이후 개명한 권희로씨는1968년 2월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한 뒤, 인근 하이바라군의 한 여관으로 도주해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다. 그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해 일본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1999년 우리나라 종교인들의 석방운동으로 가석방된 권씨는 지난달 26일 지병으로 숨졌다. 민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조총련계를 포함한 성묘단(省墓團) 모국방문사업을 벌여 조총련계 동포 4만 8000명의 조국 방문을 이끌어 내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일본 법무성의 2006년 통계에 따르면 재일교포는 59만 8219명에 달했다. 이들 중 민단 소속은 33만∼34만명, 조총련 소속은 9만∼10만명가량으로 추산됐다. 민단은 도쿄의 중앙본부 산하에 48개의 지방본부와 30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재일교포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매진했다. 일본의 한국인 차별에 반대하는 지문날인(指紋捺印)제도 철폐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1987년 외국인 등록법 개정을 이끌어 냈다. 이후 민단은 1994년부터 지방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재일동포들에게 지방참정권이 주어지는 듯했지만 자민당과 보수세력들의 반대로 올해 상반기 국회에서 법안제출이 무산됐다. 일본의 ‘귀화 권장정책’에 따라 2세, 3세 교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는 것도 민단이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민단 사이트에 따르면 매년 1만여명의 재일동포 2, 3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연히 민단의 구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뉴커머(New Comer)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2, 3세들을 가르칠 한국인 학교도 도쿄, 교토, 오사카 등 4곳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민단은 지난해부터 한국어 사용 운동에 나섰다. 날로 희미해지는 재일교포의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정진 민단회장도 올해 신년행사에서 신년사를 처음으로 한국어로 했다. 강우성 민단 사무총장은 “ 일본어 사용이 익숙한 2, 3세들을 대상으로 한국말 배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일본 내 한국계 은행 계좌 갖기 운동도 펼쳐 지난해 12월 말 현재 약 352억엔(약 4224억원)의 예금실적 올렸다.”고 말했다. jrlee@seoul.co.kr
  • 200여년… 경계인 울린 진혼곡

    200여년… 경계인 울린 진혼곡

    구효서(53) 소설은 경계짓기를 거부하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소설의 형식 또는 문체는 물론, 주제와 문제의식의 다양한 변주는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작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문학에디션뿔 펴냄)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작 ‘나가사키 파파’에서 혈육, 국가의 경계 언저리 범주만을 제시하던 그였다면 ‘랩소디’에서는 그 지평을 한껏 넓혔다. 민족의 경계, 국가의 경계, 혈육과 신분의 경계, 이념의 경계, 종교 속 신성(神性)의 경계 등은 그의 작품 안에서 형해(形骸)화된다. 그는 집착과 번민을 낳는 그 경계의 안과 밖을 쉼 없이 보여주며 경계의 끄트머리 지점을 확인시킨다. ‘랩소디’ 속 슬픈 페르소나들을 달래주고 지탱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웅장한 선율과 상실된 사랑이었다. 소설에는 두 편, 혹은 세 편의 서사(敍事)가 서로 이야기에 파고들며 씨줄 날줄이 되어 교직한다. 액자소설 형식이다. ●조선 짐작하게 하는 디아스포라 ‘아마도’ 조선에서 먼 땅을 건너온 이의 후손인 요한 힌터마이어는 교회 오르간 풀무꾼에서 일약 왕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궁정악단의 작곡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아무리 위장했더라도 비천한 신분에 주어진 음악의 과도한 천재성은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기기 어렵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경계선을 넘어섰던 열정과 재능은 그를 다시 조선땅으로 돌아오도록 만든다. 그가 남긴 악보마다 조선을 의미하는 ‘선(鮮)’의 문장(紋章)이 남겨져 있는 것으로 그가 조선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웅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離散)’ 이야기의 시작이다. ●비운의 천재 김상호 혹은 겐타로·토마스 김 그리고 200년 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 또 다른 비운의 천재 음악가 김상호, 혹은 겐타로, 혹은 토마스 김의 이야기가 사이사이 펼쳐진다. 재일 한국인 2세이면서 남과 북, 일본, 독일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그가 곳곳을 떠돌며 유랑하듯 노마드의 삶을 사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비운의 사랑에 내몰려 일본에서 독일로 와 음악에 몰두한 겐타로는 토마스로 살며 힌터마이어의 기록을 좇아 독일에서 평양으로 간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서울 연주에 초청받았으나 공항에서 곧바로 붙잡혀 17년의 감옥 생활을 거친다. 그리고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묘비에 첫사랑과 공유했던 강렬한 보랏빛의 배색기호만을 덩그러니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기억의 정리자 하나코·나 여기에 겐타로의 아름답고 강렬한 첫사랑, 그리고 40여년 전 의문의 이별을 나눴던 하나코가 ‘김상호이거나 겐타로이거나 토마스’인 그의 삶의 기억을 하나씩 하나씩 짜맞춰 나간다. 또한 소설의 주변부에 있지만 독일, 일본, 한국에 정주하지 못한 또 다른 경계인인 화자 ‘나’는 하나코와 함께 두 개의 이야기를 넘나든다. 한결같이 폭풍의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이니 소설 역시 폭풍 같을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을 훌쩍 넘나들고, 독일과 일본, 남한, 북한을 쉴 새 없이 오 가는 몇 개의 서사는 그 웅혼함은 둘째치고, 따라잡을 만 하면 저만큼 달아나고, 또 겨우 허덕거리며 손에 잡았나 싶으면 또다시 풀쩍 뛰어 크게 내뺀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 현대사 속 누군가의 신산했던 삶이 어른거린다.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비운의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 떠오르거나, ‘유학생간첩단 사건’의 서승, 서준식 형제가 생각난다. 초청을 받아 독일에서 입국하자마자 연행되며 분단의 질곡을 체감해야 했던 송두율이 떠오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모든 억압받고 추방당한 경계인들과 노마드들을 위한 진혼(鎭魂) 랩소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제중원’ 헤론 원장, 결국 목숨 잃어

    ‘제중원’ 헤론 원장, 결국 목숨 잃어

    ‘제중원’ 헤론(리키김 분) 원장이 결국 운명했다. 지난 30일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제중원’에서 조선인을 위해 의학을 널리 전파했던 헤론 원장이 죽음을 맞이해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날 방송에서 헤론 원장은 과잉 업무로 인한 과로 때문에 질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를 스승으로 모셨던 황정(박용우 분)과 도양(연정훈 분)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1대 제중원 원장 알렌(션 리차드 분)의 뒤를 이어 부임했던 헤론은 미국에서 파견된 첫 선교사다. 헤론은 일찍이 황정의 선천적인 의술 실력을 발견하고 그를 가르치며 조선 최고 의사로 만들었던 스승이다. 헤론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황정의 손을 잡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헤론은 “당신이(황정) 조선 의학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제중원을 부탁한다.”라며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한편 시청률 조사회사인 AGB닐슨 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이날 방송된 ‘제중원‘은 13.9%를 기록했다. 이는 전회 방송기록(13.7%)보다 0.2%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동시간대 경쟁작인 KBS2 TV ‘부자의 탄생‘이 15.9%포인트를 기록하며 월화극 1위를 굳건히 지켰다. 사진 = SBS ‘제중원’ 화면 캡처 서울신문NTN 김경미 기자 84rornfl@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막내린 ‘김의 전쟁’… 차별없는 하늘나라로

    막내린 ‘김의 전쟁’… 차별없는 하늘나라로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에 항의, 야쿠자를 살해한 뒤 무기수로 복역하다 영주 귀국한 권희로씨가 26일 오전 6시50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유인촌 장관이 주연 맡아 화제 권씨는 국내에서 펼쳐진 귀국운동에 힘입어 일본에서 31년여 간 복역한 뒤 석방돼 1999년 9월 귀국해 부산에 정착했었다. 그러나 11년여 간의 국내 생활도 교도소 복역을 하거나 병마에 시달리는 등 순탄치 못했으며, 이날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입원해 있던 부산 동래 봉생병원에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1928년 일본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모친의 재가로 김씨 성을 갖게 됐다. 그는 민족차별과 가난 등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권씨는 1968년 2월20일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모욕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나서 인근의 여관에서 투숙객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돼 1975년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화장 후 유골 한·일에 절반씩” 유언 당시 권씨는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려고 사건을 일으켰다.”며 일본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권씨는 한·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유명세를 타 ‘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권씨 일대기가 영화로 제작됐으며,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당시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권씨는 이후 부산 자비사 삼중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귀국운동에 힘입어 31년 8개월의 복역 끝에 1999년 9월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돼 영주 귀국했다. 삼중 스님은 20여년 전 권씨의 사연을 접하고는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국내 정착 이후에도 권씨를 계속 돌봐왔다. 삼중 스님은 권씨가 “스님 덕분에 형무소에서 죽을 사람이 아버지 나라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됐다.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뿌려주고,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에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삼중 스님 구명운동… 99년 영구 귀국 권씨는 1999년 9월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 연제구 거제동에 정착했다. 독지가와 국민 성금으로 정착금도 받아 여생을 고국에서 편안히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지난 2000년 10월 후원자의 남편을 흉기로 살해하려 한 혐의로 구속됐고,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또 동거녀가 정착금을 훔쳐 달아나면서 만년에 힘들고 궁핍한 삶을 살아왔다. 권씨는 최근 일본의 한 언론을 통해 “죽기 전에 어머니 묘에 절을 올리고 싶다.”며 일본 입국을 희망했었다. 발인은 28일 오전 8시30분에 치러지며, 부산 영락공원에서 화장된 뒤 유골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처리될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동래 봉생병원 장례식장 2호에 마련됐다. (051)531-7100.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제2기 한·일 역사공동위원회가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며 공식 활동을 종료했다. 2기 공동위원회는 한·일 고대사 중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를 냈다. 하지만 1기 위원회의 쟁점 사항이었던 근·현대사의 식민지 과정 등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을 보인 채 각자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 그쳤다. 또 독도와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논의조차 하지 못해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는 평가다. ●고대사… 임나일본부 허구 확인 2기 위원회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한 것. 한·일 고대사 부분을 연구한 제1분과에서 한국은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조의 해석을 통해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했다.”며 “임나일본부의 외무관서적 성격으로 미루어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시했다. 일본 또한 “한반도에서 왜인의 활동 흔적은 여러 곳에서 인정되지만, 왜국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며 “왜국이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군사 전개를 했다는 이해에는 재검토와 정정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아울러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 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사실에도 대체적인 의견일치를 보았다. ●중·근세사… 왜구는 일본 어부 1300~1400년대 한국 연안에서 출몰했던 왜구의 정체에 대해 ‘고려·조선인설’ ‘제주도 해민설’ 등의 주장이 그동안 일본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이들이 쓰시마와 이키, 마쓰우라 등의 영주와 해민(어부)들이었다는 결론을 냈다. 아울러 양국 연구진은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내부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인식을 같이했다. ●근·현대사… 양국 인식차 커 한일병탄 과정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성격 규정 등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 주류 세력도 이에 동조했다.”거나 “고종이 을사조약을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약의 주체로서 반대 운동을 탄압했다.”는 등 일본의 편향된 인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노동자 동원 과정에서 강제와 폭력이 없었다는 주장도 반복된 것으로 드러났다. ●교과서 왜곡관련 논의도 난항 2기 공동위원회에서 처음 수행한 양국 교과서에 대한 연구 역시 현저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일 관계의 지뢰밭’이라 할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 등은 주요 의제에서 제외됐다. 한국 측 위원장인 조광 고려대 교수는 “유럽이 30~70년 걸려 공동교과서를 만들었고 아직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 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지속적인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3기 위원회 출범 여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2001년 일본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이듬해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5년 6월 1차 보고서를 낸 뒤, 2007년 6월 34명의 위원이 참여한 2기 공동위원회를 출범시켰고, 24개 공동 연구주제에 대해 67차례 회의 끝에 이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월드 뉴스라인]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청구권 소멸”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이후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청구소송’ 변호인단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해 3월 이 소송 재판부인 도쿄지방재판소 민사합의32부에 ‘한일협정 이후 한국 국적을 회복한 한국인의 개인청구권도 소멸됐다.’는 주장을 담은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이에 외교통상부는 “한일협정 서명일 이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산권이 소멸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일본 법정에 제출했다.
  • [사설] 日 한일협정 관련문서 전면 공개하라

    일본 정부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 이후에도 강제 징용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협정 당시 정리했음을 보여주는 일본 외무성 내부자료가 확인됐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제출된 ‘평화조약에서의 국민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1965년 4월)’와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문제(1965년 9월)’ 등 3건을 통해서다. 이 문건들은 모두 한일청구권협정이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지, 개인청구권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협정으로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모두 포기됐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일본 정부가 분명하게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번 문건들은 일본이 한일협정 당시부터 나중에 불거질 강제징용자들의 소송과 배상문제에 미리 대비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법원은 소송이 불거질 때마다 ‘청구권 유효’와 ‘소멸시효 종결’의 모호한 입장과 판결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2007년 최고재판소(대법원)의 ‘재판상 청구권소멸’ 판시 이후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보상받으라는 정부 입장과 법원 판결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 진보적 정치인과 학자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던 한일협정의 효력과 배상문제에 일본 정부가 이제는 근본적인 입장을 정해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5년 한일협정에 관한 외교문서 전량을 공개했다. 협정을 둘러싸고 지속됐던 잡음과 의혹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다. 과거사 청산을 외쳐온 하토야마 정권이 진정한 의지를 보이려면 우선 음지에 묻히고 가렸던 진실부터 양지로 끌어내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번 자료도 사실상 우리 정부의 협정문서 공개 이후 일본 시민단체가 나선 소송으로 2008년 공개된 자료 중 하나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진실을 보여주는 회담 문건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최근 과거정권의 ‘미·일 핵반입 허용’ 밀약까지 공개하고 나선 하토야마 정권이다. 형평성 차원에서도 한일협정 문서를 전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도쿄 이종락특파원│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의 개인 청구권 범위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협정 제2조에는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해서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양국 및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등의 청구권 자금을 받은 것으로 위안부나 징용피해자 등 개인의 권리침해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1990년대까지 청구권 여지 인정 일본 정부의 입장도 수시로 바뀌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에는 ‘개인청구권에 대해 추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1990년대까지는 ‘한일협정 체결 후에도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중국인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낸 소송에선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까지 포기됐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조선인 근로자들의 미지급 임금과 한일협정 당시 무상 3억달러 지원금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피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007년 4월 “국가간 조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체적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재판상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판시했다. 이후 일본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자발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취지의 판결들이 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외무성이 1965년 협정 체결 전후에 한일협정과 개인청구권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검토했던 결과를 담은 내부 문서가 공개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온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직전에 내부적으로 법률관계를 검토한 뒤 개인청구권이 협정 체결 후에도 유효하다고 결론을 내린 사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외교전문가 “이미 소멸” 주장도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은 일단 부정적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14일 “정부는 1965년 당시 한일청구권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명기된 8개 항목에 대해서는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당시 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은 군위안부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개인청구권이 유효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사설] 일본 강제징용 한국인이 고작 245명?

    일본 정부가 1959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在日) 조선인 61만명 중 강제징용자는 단 245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단다. 외무성이 자민당 중의원에 제출한 자료를 인용한 산케이신문의 그제 보도 내용이다. 터무니없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수도 그렇거니와 징용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본에 잔류했다는 억지가 황당하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한반도에서 강제징집된 수만 조선인 희생자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상황이다.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 앞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궁색한 변명에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은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반작용이 잇따른 시점에서 나온 것이라 우려스럽다. 외무성 입장 보도가 있던 날 하토야마 총리는 고교 무상화 대상에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포함시키지 않을 뜻을 비쳤다. 똑같은 강제징용의 희생자들인데 굳이 조총련계 학교를 뺀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 재일동포가 대다수인 영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는 하토야마 정부의 중점 추진 사안이었지만 무산됐다. 금주 초만 하더라도 하토야마 총리가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배상 의사를 밝힌 즉시 일본 정부가 서둘러 부인하고 나섰던 터다. 강제징용의 배상은 청산차원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사안이다. 징용자들에게 99엔씩의 위로금을 슬그머니 지급하면서 공식적으론 징용·징집을 부인하는 이중성은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무고한 이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도 모른 체하는 처사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륜의 극치이다. 과거사 청산에 전향적이던 하토야마 정권이 보수·수구의 목소리에 눌려 수세에 몰린 탓이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의 청산은 분명 정치적 잣대로 가릴 일이 아닌 것이다. 일본 내에서조차 진실을 바로 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역사 왜곡을 중단하고 합리적 해결법을 찾기를 촉구한다.
  • “전쟁의 슬픔 넘어 해외로 퍼진 아리랑을 아시나요”

    “전쟁의 슬픔 넘어 해외로 퍼진 아리랑을 아시나요”

    “전쟁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아리랑이란 이름을 달고 해외에 퍼져 나가게 된 스카프, 손수건, 라이터, 엽서, 사진, 음반 등 아주 특별한 실물 희귀자료들을 공개하고 같이 추억해 보자는 것이지요.” 정선아리랑연구로 잘 알려진 진용선(47·민속학자)씨는 강원도 정선에서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을 5년전에 개관해 ‘딱지의 추억’, ‘노래책으로 보는 세상’, ‘아리랑, 일본에 스며들다’, ‘삐라의 추억’ 등 이색전시로 전국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삐라의 추억’은 5년 전 처음 전시할 때 뉴욕타임스에 크게 실렸고 일본 언론에도 소개됐다. ●아리랑 스카프·엽서 등 희귀자료 공개 올해에는 어떤 ‘관심거리’를 준비하고 있을까. 먼저 6·25 60주년을 맞아 ‘6·25전쟁, 아리랑의 기억’이란 특별전을 마련한다. 앞서 그가 언급한 대로 아리랑과 관계된 스카프 등 100여점의 실물자료들을 한데 모아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하는 것. 그는 “6·25를 전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요가 해외에 알려지는 광폭적인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7∼8월에는 19세기 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초창기 고려인의 모습을 담은 1900년대 초반의 엽서와 당시 원본 사진을 대거 선보이는 엽서전 ‘러시아 땅의 조선인’을 개최한다. 이 전시가 끝나면 가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러시아와 일본 등 해외에서도 전시하는 네트워크를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이들 국가에서 전시제의가 들어오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11월에는 일제 강점기 한강과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에서 목재를 실어 나르던 옛 뗏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한국의 뗏목 엽서전’을 준비한다. 아울러 지난 20년간 신문 광고지인 ‘찌라시’를 통해 탄광촌에서 폐광촌으로 전락한 신동읍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찌라시로 보는 신동읍 역사’도 마련할 예정이다. ●“코끝 찡한 향수 속으로 안내” 평소 진씨는 큰 박물관과는 다른 이색적인 주제와 내용의 전시를 통해 작은 박물관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방점을 찍고 꾸준히 노력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어려서부터 각별한 호기심으로 우표나 상표, 장난감과 딱지, 음반, 책 등을 부지런히 모아온 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가 됐다. 그는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에 대해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추억의 자료를 통해 코끝이 찡한 향수 속으로 안내하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면서 “옛 물건의 가치와 의미를 통해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문 부국장 km@seoul.co.kr
  • [모닝 브리핑] “1945년 도쿄 대공습때 한국인 1만여명 희생”

    │도쿄 이종락특파원│1945년 3월10일 미군의 도쿄 대공습 때 한국인 1만여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도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도쿄 공습 당시 일본에 끌려와 있던 조선(한국)인 9만 7000명 중 절반가량인 4만 1000여명이 공습 피해를 받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피해자 중 4분의1가량인 1만여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도쿄신문이 9일 보도했다. jrlee@seoul.co.kr
  • 정선 이색전시회 기대하세요

    강원 정선군 신동읍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이 이색 전시회를 잇따라 마련한다.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은 8일 한국전쟁이라는 절망과 슬픔 속에서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국외로 퍼져 나간 스카프, 손수건, 라이터 엽서, 음반 등 희귀 자료 100여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6·25전쟁, 아리랑의 기억’을 오는 6월부터 연다고 밝혔다. 이어 7∼8월에는 19세기 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초창기 고려인의 모습을 담은 엽서와 당시 사진을 선보이는 엽서전 ‘러시아 땅의 조선인’을 개최한다. 11월에는 일제 강점기 한강과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에서 목재를 실어 나르던 옛 뗏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한국의 뗏목 엽서전’을 준비한다. 이와 함께 10월에는 지난 20년간 신문에 끼워 배포하는 광고전단지를 통해 탄광촌에서 폐광촌으로 전락한 신동읍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색 전시회 ‘찌라시로 보는 신동읍 역사’를 마련한다. 추억의 박물관 진용선 관장은 “올해도 다양한 특별전, 기획전, 게릴라전을 열고 국외 네트워크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선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씨줄날줄] 전당포/이춘규 논설위원

    사채업의 일종인 전당포(典當鋪)는 물건을 담보로 높은 이자에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전당포라는 이름을 내건 점포들이 크게 줄었다. 아니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캐싱(Cash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Pawn Bank’, 혹은 ‘Pawn Shop’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미군부대 밀집지역에 가면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전당포가 핵심 무대다. 1866년에 죄와 벌이 나왔으니 그 이전의 러시아 대도시에 전당포가 있었다는 얘기다. 도스토옙스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입을 빌려 전당포 주인 노파를 해충인 송충이나 이, 벌레로 표현했다. 보석, 금·은 시계 등을 전당물로 잡아 ‘하루만 지나도 물건을 처분해 버리고, 이자만 한 달에 5부 내지 7부씩 받고, 물건의 반값도 안 되는 돈에 전당을 잡는’ 악질적인 수전노로 묘사했다. 조선시대에는 전당포가 없어 급하면 부자에게 돈을 빌려 썼다. 전당포는 일본인들의 사채업이 시초다. 19세기 말 한국침탈 이후 민족의 고혈을 짜내 갔다. 1910년쯤 경기도에만 150여곳이 있을 정도로 조선인들도 모방해 창업했다. 당시 서민을 위한 금융기관이 없어 돈의 융통이 힘들었다. 전당포는 서민들이 급전을 융통할 좋은 장소가 됐다. 높은 이율은 전당포 주인을 고리대금 업자로 보게 했다. 종종 강도들의 범죄 목표였다. 전당포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세월에 따라 바뀌었다. 1970년대에는 카메라, 시계 등이 인기였고 80년대에는 비디오, 휴대용 녹음기 등이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70년대 서민들은 급전이 필요하면 전당포에 가 시계, 반지 등을 맡기고 돈을 융통했다. 많은 경우 기한 내에 갚기도 했지만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포기해 버렸다. 특히 지방 출신 대학생이나 술꾼들이 전당포를 자주 이용했다. 요즘엔 명품가방 등이 맡겨진다. 최근 울산에서 30대 도둑이 훔친 노트북을 담보로 돈을 빌리려 전당포에 갔다가 마침 잠복근무 중이던 경찰에 붙잡혀 입건됐다. 새벽에 술집 앞에서 만취해 쓰러져 자는 시민의 가방을 훔쳤는데 그 안에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 MP3 등 170만원 상당의 물품이 들어 있었다. 도둑은 날이 새자 인근 전당포로 가 노트북 등 물건을 담보로 돈을 조달하려다 경찰에 붙들린 것이다. 전당포는 여전히 절도범들이 선호하는 장물 처분처이다. 전당포 이미지가 나쁜 다른 이유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월드 뉴스라인] “무상교육 조총련 제외 차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정치적 문제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의 조선학교를 고교 수업료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일본 정부 일각의 움직임을 다루기로 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5일 제네바발로 보도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재일 교포의 차별문제로 회의를 여는 것은 지난 2001년 3월 이후 9년만이다.
  •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다시 3·1절을 맞는다. 어김없이 오전 10시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1분간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 세련된 기념사와 우아한 독립유공자 포상, 장엄한 ‘기미독립선언문’ 낭독 등이 끝나면 “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으로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는 ‘삼일절 노래’를 부르고는 만세 삼창을 끝으로 뿔뿔이 제 갈 길로 흩어질 것이다. 묵념의 순간만이라도 순국선열들의 고통과 염원을 상기했던가. 식민통치 압제 아래서 2000여회에 이르는, 그리고 세계 최대의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 참가자 200여만명의 함성에 귀 기울였던가. 3·1운동 후 1년간 피살 7500여, 부상 4만여, 피체 5만여, 가옥 소각 700여, 교회 소각 60여, 학교 소각 3, 헌병 즉결 태형 1만여, 약식 태형 1500여….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일제 침략자들의 각종 고문들, 대나무 바늘로 손톱 밑 찌르기, 시신과 함께 잠재우기, 철사를 달구어 남자 성기나 여자 음문·유방 난자, 발가벗겨 담뱃불과 다리미로 지지기, 기름종이를 국부에 삽입하여 불붙이기 등등…. 그런데도 신문은 일본인 순사가 시위 군중에게 음경 절단을 당했다는 등 허위 기사로 ‘불법 폭력 시위’라 우겼고 일부 비뚤어진 동포는 거기에 동조하기도 했다. 아니, 그런 비뚤어진 동포가 그때만 있었고 오늘에는 없을까. 그런 만행에도 식민통치의 경제 개발로 우리나라가 더 살기 좋아졌다는 논리에 따르면 3·1운동은 ‘불법 난동’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헌법전문처럼 ‘삼일정신’은 근대 민족혁명사의 모태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천명하면서 “인류 평등의 대의”와 “전 인류 공존동생권(同生權)”을 위한 세계평화를 주창한다. 이어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타매(唾罵)하고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來) 하도다.”고 절규한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세계사적 관점으로 보면 한 나라가 남의 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될 당위성을 밝힌 미국의 ‘독립선언문’(1774)이나, 현대 인권사상의 교본인 프랑스의 ‘인권선언문’(1789)에 뒤지지 않는 명문이다. 약간 번잡스러운 앞의 글이나, 너무 간결한 법률 조항인 뒤의 글이 지닌 아쉬움을 극복하고 유려 장엄한 문체로 인권과 독립정신 이념에다 민주화와 도덕의식 강조, 세계평화사상을 동시에 접합시킨 게 ‘기미독립선언문’이다. 글쓴이와 민족대표 33인 중 3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옥에 티로 거슬리지만 그 정신은 고전적인 ‘홍익사상’을 제치고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외의 여러 항일투쟁 세력들이 삼일정신을 면면히 승계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를 가차없이 비판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헌법전문은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유일한 적통으로 ‘4·19 민주이념’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이미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화운동’ 역시 삼일정신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찬연한 민족 민주주의 이념의 모태인 3·1운동을 기리는 ‘3·1문화상’ 역대 수상자 가운데 13명의 친일파가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친일파 명의의 기념사업이나 포상제도 역시 헌법전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라는 삼일절 노래 가사는 선열들에게 이 나라를 봐달라고 할 만큼 우리가 떳떳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표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우리 힘으로는 헝클어진 이 나라를 어쩔 수 없으니 돌아가신 당신들께서 다시 민족을 굽어 살펴달라는 애원일까. 아무래도 우리는 아직까지 “이 날을 길이 빛내자.”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일제땅굴 역사체험관 만든다

    일제땅굴 역사체험관 만든다

    강서구는 25일 가양동에 있는 ‘궁산 일제땅굴’ 70여m를 일본강점기 만행을 청소년에게 알려줄 수 있는 강제징용 관련 체험관으로 꾸미기 위해 착공식을 갖는다고 23일 밝혔다. 강서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2008년 발견된 일제땅굴 안에 꾸며지는 이 체험관은 ▲동굴실 ▲전쟁실 ▲교훈실 ▲기획전시실 등 4개의 테마로 이뤄진다. 동굴실은 전략요지 궁산과 일제땅굴의 역사적 가치 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또 땅굴의 입면 절개모형과 궁산 일대 땅굴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 부대배치 모형이 전시된다. 전쟁실에는 당시의 공습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방공호 체험존과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관람객이 사진을 찍는 포토존을 설치해 태평양 전쟁시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꾸민다. 교훈실에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고난과 희생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궁산 일제땅굴을 비롯한 징용희생자들을 기려 추모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이곳은 관람 후 ‘평화의 벽’에 관람소감과 평화의 염원을 적어 붙일 수 있게 꾸몄다. 기획전시실은 가변형의 전시패널로 조성해 수시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궁산 일제땅굴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파놓은 것으로 폭 2m, 높이 2m로 당시에는 소형 차량도 진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륙침략의 주요기지이던 김포비행장과 한강하구를 감시하는 일본군부대의 본부 및 탄약고로 쓰이기 위해 비밀리에 건설되다 8·15 해방과 더불어 공사가 중단됐다. 구는 땅굴 인근 겸재정선기념관과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 한성백제시대 성곽인 양천고성지, 2005년 개관이래 관람객 40만명을 돌파한 허준박물관 등과 연계, 가양동 일대를 우리나라 역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역사문화탐방코스로 개발할 예정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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