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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민당 의원 ‘입국쇼’ 한·일 관계 망쳤다”

    “자민당 의원 ‘입국쇼’ 한·일 관계 망쳤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일본 사민당의 하토리 류이치(61) 의원이 14일 이달 초 자민당 의원들의 한국 입국시도와 관련해 “표를 의식한 퍼포먼스에 불과했으며 본인들의 기분은 고양됐는지 모르나 한·일 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하토리 의원은 광복절을 맞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사실을 공개하며 “아버님이 생전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심하게 다뤘다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고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거론했다. →부친이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것으로 아는데. -말단 공무원이었다. 철도 부설을 담당하는 젊은 기술자였다. 아버님은 생전에 일본인이 당시 조선인을 심하게 다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은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조선왕실의궤반환에도 적극 나섰는데, 가족사와 관계있나.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일본은 빠른 시기에 과거청산을 했어야 했다. 총독부가 조선왕실의궤를 빼앗아 왔기 때문에 명백히 ‘반환’인데 일본 정부가 ‘인도’라는 표현을 써 의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왔던 얘기를 꺼내다 가족사를 공개하게 됐다.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영토문제를 민족적인 배타주의로 불지피는 해결 방법은 잘못됐다. 자민당 의원 3명이 지난 1일 한국 입국을 시도한 것은 퍼포먼스이고, 다분히 표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 본인들은 기분이 고양된 것 같지만 한·일 관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징용 조선인 恨 오롯이

    “자유와 평화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몸을 움직이고 현장을 다니면서 기본적인 문제를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 일이다. 조금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 보면 역시 답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길을 간다는 것은, 아니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앞으로의 길이기도 하고 과거의 길이기도 할 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령처럼 우리 곁을 떠도는 식민지의 잔영과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삶의 흔적을 찾아 이 시대의 대표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인 이제갑씨는 걷고 또 걸었다. 15년 동안 맨발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잔혹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1996년 2월부터 한국 내 일본 잔재 중 근대 건축물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 뒤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과 그와 관련된 건축물에 대한 작업으로 범위를 넓혔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살림 펴냄)이다. 저자는 일본의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곳곳을 답사했다. 군부대 진지, 탄광, 광업소, 댐, 해저탄광, 지하터널, 비행장, 통신시설 등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역사의 흔적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후쿠오카 지역 41개 광업소에 배치돼 강제노역에 시달린 사람만 해도 11만명. 이 가운데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노동 착취가 가장 심했던 아소 탄광의 참혹상은 저자 특유의 관찰력과 감각적 렌즈로 세밀하게 담았다. 저자는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사진을 지향해 왔다.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으며 1989년 군 제대 이후 본격적인 사진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개인전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다섯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현대미술관센터 별관에서 열린 ‘영속하는 순간들-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에서의 시선들’ 등 다수의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는 인하대와 계명대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1만 4800원.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군은 지난 10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의 포격과 관련, ‘발파 작업을 오인한 것’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탐지 장비로 확인했기 때문에 포격이 확실하다는 게 우리 군의 확고한 입장이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11일 “당시 폭음이 북한 용매도 인근에서 들렸다는 초병의 보고가 있었고, 탐지장비로 낙탄지점을 확인했다.”면서 “두 차례 사격으로 발사된 5발 가운데 3발은 용매도와 가까운 NLL 북쪽에, 2발은 NLL 인근 해상에 떨어진 것을 정확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앞서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단장과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인터뷰 형식을 빌려 “10일 서해 5개 섬과 가까이 하고 있는 황해남도 일대에서 인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대상물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에 따른 정상적인 발파작업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또 오전 8시 40분쯤 이 단장 명의의 전통문을 우리에게 보내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을 문제 삼으며 “대화 분위기를 파괴하고 악화된 남북관계를 유지하려는 남측의 고의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명의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중지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사건을 날조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북한의 전통문은 상투적인 억지 주장이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군은 전날 용매도 인근에서 폭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지난달부터 서북도서방위사령부에 배치된 최신 음향 표적 탐지장비 ‘할로’(HALO)를 통해 포탄의 탄착지점 등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할로는 포 사격 때 발생되는 폭음 등을 추적해 탄착 및 발사지점을 분석해내는 장비다. 군 관계자는 “1·2차 포격 때 음향 표적 탐지장비를 통해 포탄의 궤적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과 미국 정부는 10일(현지시간) 이번 북한의 연평도 포 사격의 의미를 축소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워싱턴에서 미국 당국자들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이번 포 사격은 선박이나 영토에 대한 포격과 같은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천안함 공격 같은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한·미 간에 큰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인명 피해나 물질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안보상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부연했다.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남북 간 포 사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이번 사태가 종료된 만큼 이제는 현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에 우려를 표시해 왔고, 계속 자제를 촉구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메시지는 북한이 한국에 손을 내밀고 대화 진전을 위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서울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여군 장교가 민노당비 납부·시위 참석

    군 수사 당국이 4일 여군 중위 등 위관급 장교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해군사관학교 국사 교관인 K 중위가 이적표현물을 소지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데 이어 군의 안보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군 관계자는 “최근 여군 중위 1명을 포함해 위관급 장교 2명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관련 혐의를 확정해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군 내부에선 여군 장교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른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소수만이 선발되는 여군 장교들의 경우 엄격한 신원조회 등을 거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가입해 활동했던 이 여군 중위는 임관 뒤에는 휴가 기간 진보단체가 주최하는 집회·시위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또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해 당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군 수사 당국은 이와 함께 북한 노동당 225국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 조직된 지하당 ‘왕재산’ 사건과 관련, 사병 여러 명이 연루된 정황을 잡고 참고인 신분으로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군 수사 당국은 이들이 사병 신분인 점 등을 감안해 해당 부대 안에서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군 관계자는 “아직까지 해당 사병들이 왕재산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해군사관학교 보통검찰부는 최근 해사 국사 교관인 K 중위가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등의 서적을 소지하고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조선인민혁명군-기억의 정치, 현실의 정치’ 등 문건을 인터넷으로 내려받아 보관해 온 사실을 적발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군 검찰 조사 결과 K 중위는 사관생도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는 이적성을 띠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군 검찰에서 확인한 결과 유사 사건에서 대법원이 이미 판례를 통해 국보법 위반으로 인정하고 있어 공소 유지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김정은 대장동지에 충성”… 조총련 공식석상 첫 언급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 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김정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이름을 언급해 가며 충성을 다짐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8일 일본 내 단체인 ‘구출하자! 북한 민중 긴급행동 네트워크’(RENK)에 따르면 허종만 조총련 책임부의장은 지난 9일 열린 ‘총련 중앙위원회 제22기 제2차 회의’에서 “김정은 대장을 섬기며, 대장 복(福)을 향수하는 백두의 전통을 만대에 빛내고 대장의 영도에 복종하자.”고 발언했다. 이어 참석자들이 잇따라 일어나 “김정은의 위대성 교양을 추진하자.”는 등 지지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RENK는 “배진구 조총련 부의장이 지난 6월 중순 방북했을 때 조선노동당으로부터 ‘김정은 사상교육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조총련이 내부 반발을 우려해 사상교육 대상을 중앙위원으로 한정하고, 허 부의장의 관련 발언을 기관지인 조선신보에 싣지 않는 등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조총련 동포 상당수 한국국적 내년 재외국민선거 몰표 걱정”

    “조총련 동포 상당수 한국국적 내년 재외국민선거 몰표 걱정”

    14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개막한 세계한인회장 대회에 정치권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내년부터 실시되는 재외국민선거를 앞두고 주요 국가의 한인회가 무시할 수 없는 표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는 17일까지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80개국 284개 도시의 한인회장과 임원 380여명이 참가, 투표참여율을 높이고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정책포럼도 갖는다. 대회에서 만난 한재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부단장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민단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공존하는 특수한 지역인 만큼 선거로 인한 갈등에 대비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면서 “선거관리위원회 지원인력만으로는 부족해 대책본부를 발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진 피해에 물심양면으로 성원해준 국민들에게 무척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곧 재외국민선거 대책본부 설치 →재외국민 선거에 교포들 관심은. -지난해 11월 도쿄의 대사관과 오사카 총영사관에서 실시한 모의선거에서 투표율 60%를 기록했다. 걱정되는 것은 조총련 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부분이다. 2001~2009년 3만 5000여명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실제 유권자는 절반 정도인 1만 8000여명이다.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한통련(한국민주통일연합)은 현 정권을 앞장서서 비난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사전선거 위반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이 똘똘 뭉쳐 어느 한 곳으로 몰표가 집중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재일동포 유권자 규모는. -재일동포 유권자 수는 40만명 정도로 파악된다. 미주나 중국은 90% 이상이 여권을 갖고 있지만, 일본은 강제징용자이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여권을 취득하지 못한 경우가 절반이나 된다. 때문에 현재 여권 갖기 운동을 전개하고, 본적이 기록돼 있는 외국인등록증만으로도 투표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선관위와 정치권에 요청하고 있다. 실제 투표는 15만~20만명 정도가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100만명), 중국(50만명) 다음으로 큰 규모다. →정치권도 관심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각 정당에서 사무소를 열겠다는 요청이 많았지만, 일본 동포사회의 특성상 모두 거절했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져 있는 특수한 상황인데, 정치세력으로 민단마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선관위가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줄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선거열기가 과열될 텐데 대책은 있나. -곧 대책본부를 설치할 계획이다. 내년 2월에 민단 회장단과 집행위를 새로 선출하게 된다. 한국의 총선, 대선을 앞두고 교체될 예정이어서 매우 조심스럽다. 미국에서도 지난달 한인회장 선거 과정에서 큰 소동이 있었지만 선거 후유증이 생길까 봐 걱정이다. ●일본내 참정권 여전히 답보 →재일동포의 지방참정권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사실 지방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십년간 애쓰고 있는데, 재외국민 선거가 실시되면서 일본 국내 여론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2009년 8월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기대가 컸다. 오자와 이치로 당시 대표가 참정권을 반드시 허용하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그러나 집권 후 정치 이슈가 심화되고, 일본국민들의 압력,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현재 민주당 안에서도 극우계열 의원 10~20%는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고 있다. 자민당은 90% 가까이가 반대한다. 지역의 발전과 공생공영하는 입장에서 일본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 달라는 운동을 전개 중이다. 몇 십 년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김옥균,… ’ 펴낸 박은숙 씨

    [저자와 차 한 잔] ‘김옥균,… ’ 펴낸 박은숙 씨

    ‘1892년 2월 22일(양 3월 28일) 오후 4시경. 중국 상하이 미국 조계(租界) 지내 일본인 호텔 동화양행. 한복을 차려 입은 조선인 자객 홍종우의 권총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있는 김옥균을 향해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알은 머리와 몸통을 꿰뚫었고 김옥균은 즉사했다. 이 장면은 김옥균의 죽음을 둘러싼 상징적 기호들로 가득하다. 중국, 미국 조계, 일본, 조선, 한복, 홍종우, 자치통감…. 김옥균의 죽음은 이러한 상징적 기호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짜인 국제적 타살이었다. 신간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너머북스 펴냄). 첫 대목부터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저자 박은숙(55)씨는 이 책을 통해 김옥균의 뒤에는 유교 국가 조선이 있었고 앞에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세계가 있었다는 시대 변화를 중요한 배경으로 삼아 인간 김옥균을 새로이 조명하고 있다. 풍운아 이미지로 굳어진 채 애국과 매국 양 극단의 평가를 받아 온 김옥균에 대한 인간적 시선 또한 새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오늘, 김옥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지면서 역사 인식의 허점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려 애쓰고 있다. 지난 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저자를 만났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과 직업적 변화, 갑신정변과 역사의 저 편에 묻혀 버린 행동대원들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김옥균에 대해 느낀 점이 많았다.”면서 “어떤 시대, 전환기에 왔을 때 김옥균은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며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고민하는 부분에서 배울 점을 많이 던져 주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 휘하의 행동대원들은 모두 200여명이며 암호는 하늘을 뜻하는 ‘천(天)’이었다. “김옥균은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려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한다는 점도 특장입니다. 넓은 도량과 포용력, 유창한 언변, 강렬한 카리스마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김옥균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했다. 그의 무덤이 될 상하이행을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인간만사 운명’이라는 말로 ‘죽을 때’를 암시했다는 것. 결국 김옥균은 조선의 독립과 개화라는 너무나 무겁고 혹독한 숙명의 굴레 앞에서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김옥균의 파란만장한 인생 골목골목에 밴 절망과 아픔, 고뇌가 느껴져 무심하게 글을 엮어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정읍 출생으로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2005), ‘시장의 역사’(역사비평사, 2008), ‘한국노동운동사’(지식마당, 2004, 공저) 등 다수가 있다. 글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김일성·정일·정은 사진’ 사격표적은 도발 행위”

    “‘김일성·정일·정은 사진’ 사격표적은 도발 행위”

    북한군이 3일 국내 일부 예비군 훈련장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한 것에 대해 ‘특대형 도발행위’라고 규정하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을 가할 것”이라면서 위협했다.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및 노농적위군 부대들은 역적무리를 일격에 쓸어버리기 위한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행동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면서 “남조선 괴뢰당국은 특대형 도발행위에 대해 온 민족 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철저한 재발방지를 공식담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관진 국방장관을 언급하면서 “이번 사건의 주모자 처형과 사죄조치를 세울 때까지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대응 도수를 계단식으로 높여 나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이 같은 성명은 인민군 총참모부 명의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총참모부는 군부의 계획과 전략을 총괄하는 곳”이라면서 “최고지도자를 건드렸다는 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사건인 만큼 단순히 경고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달 30일 일부 예비군 부대에서 김일성 세 부자의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되고 있다고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방위 성명을 통해 “총포탄을 마구 쏘아대는 광기를 부렸다.”고 비난한 바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 군부가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활용하려는 것 같다.”면서 “군부내의 불만을 표출해 남측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번 성명은 이틀 전 국방위 대변인을 통해 남북 비밀접촉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성명은 “동족대결에 환장이 된 이명박 역적패당과는 애당초 마주 앉을 필요가 없고 오직 총대로 결판 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찾게 된 최종 결론”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이 같은 발언이 실제 도발로 이어질 수 있을까. 양무진 교수는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을 앞두고 있고 미국,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실제로 도발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면서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대화모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국방부가 표적을 없앤다는 명확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낮은 수준의 무력시위를 할 가능성은 있다.”면서 “인명 살상이 아니라 상징적인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써 내부 결속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군 관계자는 “군은 국방부 지침에 따라 표준 표적지를 사용할 예정”이라면서 “현재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한미 정보자산을 동원해 접경지역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이석·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일성·정일·정은 사진’ 사격표적은 도발 행위”

    북한군이 3일 국내 일부 예비군 훈련장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한 것에 대해 ‘특대형 도발행위’라고 규정하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을 가할 것”이라면서 위협했다.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및 노농적위군 부대들은 역적무리를 일격에 쓸어버리기 위한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행동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면서 “남조선 괴뢰당국은 특대형 도발행위에 대해 온 민족 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철저한 재발방지를 공식담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관진 국방장관을 언급하면서 “이번 사건의 주모자 처형과 사죄조치를 세울 때까지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대응 도수를 계단식으로 높여 나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이 같은 성명은 인민군 총참모부 명의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총참모부는 군부의 계획과 전략을 총괄하는 곳”이라면서 “최고지도자를 건드렸다는 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사건인 만큼 단순히 경고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달 30일 일부 예비군 부대에서 김일성 세 부자의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되고 있다고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방위 성명을 통해 “총포탄을 마구 쏘아대는 광기를 부렸다.”고 비난한 바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 군부가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내부 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활용하려는 것 같다.”면서 “군부내의 불만을 표출해 남측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번 성명은 이틀 전 국방위 대변인을 통해 남북 비밀접촉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성명은 “동족대결에 환장이 된 이명박 역적패당과는 애당초 마주 앉을 필요가 없고 오직 총대로 결판 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찾게 된 최종 결론”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이 같은 발언이 실제 도발로 이어질 수 있을까. 양무진 교수는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을 앞두고 있고 미국,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실제로 도발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면서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대화모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국방부가 표적을 없앤다는 명확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낮은 수준의 무력시위를 할 가능성은 있다.”면서 “인명 살상이 아니라 상징적인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써 내부 결속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군 관계자는 “군은 국방부 지침에 따라 표준 표적지를 사용할 예정”이라면서 “현재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한미 정보자산을 동원해 접경지역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이석·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정일 訪中] 김정은 어디서 뭘 할까

    [김정일 訪中] 김정은 어디서 뭘 할까

    중국을 방문 중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나흘째 강행군을 하고 있는 가운데 후계자 김정은(얼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70여명 규모의 방중단 공식 명단에 이름이 없는 데다 관련된 의전이나 움직임도 드러나지 않는 등 김정은의 동행 여부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일단 북한 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김정은이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만큼 가명을 사용하거나 비공식 수행원으로서 김 위원장을 수행할 가능성도 낮다. 김정은의 최근 동향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등 공식매체들이 지난 4일 김 위원장과 함께 조선인민군종합체육관 개관식에 참여했다고 보도한 것이 마지막이다. 김정은이 북한에 있다면 권력 2인자로서 김 위원장의 부재 상황을 커버하면서 내부적으로 충성심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버지 김 위원장이 없는 동안 컨트롤타워로서의 능력을 시험하는 기간인 셈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1인자와 2인자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지는 않는다.”면서 “3000㎞에 달하는 중국 대륙 종단에 나선 것도 북한을 오래 비워도 괜찮을 만큼 후계체제가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조선중앙TV는 김 위원장이 중국으로 간 이후인 지난 21일 왕재산예술단의 음악무용종합공연의 녹화실황을 방영하면서 김정은의 찬양가로 알려진 ‘발걸음’의 바이올린 연주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김 위원장의 방중 일정 도중에 합류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일본 TBS 방송은 중국 난징(南京)공항에 북한의 고려항공 항공기 한 대가 계류 중이며,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주요 인사가 김 위원장 일행과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15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간의 흐름. 찬란했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 피렌체와 일제 강점기 아시아의 소국(小國) 조선이라는 공간과 위상의 차이. 이 시대를 살았던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위대한 메디치’로 불리며 이탈리아, 아니 중세 유럽을 통틀어 가장 화려했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렌조 메디치(오른쪽·1449~1492)와 자국의 역사책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간송(澗松) 전형필(왼쪽·1906~1962). 겉으로 보이는 배경으로는 너무나 다르지만 이들에겐 엄청난 ‘돈’과 예술을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각각 피렌체 우피치미술관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 ‘인류의 유산’을 향유할 기회를 남겼다. 만약 그들이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쓰는 데만 골몰했다면, 또는 재산을 늘리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면 중세미술사와 한국미술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가상 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 주의 주인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꼽히는 로렌조 메디치와 전형필이다. 막대한 재산을 문화유산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이들의 노력이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는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서양미술사에만 관심을 갖다가 지난주 간송미술관을 다녀온 후 한국미술의 전통과 매력에 흠뻑 빠진 직장인 윤정은(33·여)씨가 궁금한 점을 모아 인터뷰에 나섰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물려받았다. 도대체 어떤 가문이었고 재산 규모는 얼마나 됐나. -메디치 내 증조할아버지인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지모는 피렌체인들 사이에서 ‘국부’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은행업을 통해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가문의 수장이 됐을 때 내 나이 고작 20세였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특히 우리 가문은 직물산업의 핵심이었던 ‘백반’(양모 세척제)을 움직였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회였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냥 피렌체가 메디치였고, 피렌체의 모든 것은 메디치 가문의 재산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에 와세다대 법대를 다니던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서울 일대는 물론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를 지나면서 우리 집안 땅을 밟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미곡상을 했는데 내가 24세에 물려받은 논은 4만 마지기(800만평)에 달했다. 1년에 소작농으로부터 쌀 2만 가마니(1만석)를 거둬들였는데, 이를 당시 기와집 값으로 환산하면 150채 정도였다. 현재 서울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매년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논을 몽땅 판다고 가정하면 6000억원 정도였는데, 이건 그냥 단순한 수치 환산이고 당시 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훨씬 더 가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1년에 나만큼 버는 조선인은 43명에 불과했다. →<윤정은> 역사적으로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흥청망청 쓰다 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한국의 재벌 집안만 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실패하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도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 -메디치 할아버지 코지모의 영향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피렌체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난 그들과 토론하는 법을 배웠다. 10대 때부터 이미 유럽 각국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한 덕에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로마어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리스어까지 능통하게 구사했을 정도였으니. 내 신분은 공식적으로는 돈이 많은 시민이었지만 피렌체 안팎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됐고, 그렇게 살았다. 물론 금욕적인 삶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난 바람둥이였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에게는 그런 게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전형필 난 원래 경성에서 대학을 다니며 조선어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호사가 될 것을 강권하셨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법을 연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가업인 장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부모의 상을 당한 상황에서 본인이 즐기는 데 그것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을 사랑했는데 특히 수집(蒐集)에 관심이 많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메디치 ‘위대한 로렌조’라는 호칭과 달리 난 콤플렉스가 많았다. 심한 주걱턱이었고,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었다. 코도 낮았고 목소리는 거칠었다. 하지만 난 비올라와 류트(당시의 현악기), 승마술, 매사냥까지 섭렵했고 유려한 글솜씨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예술에 대한 조예는 못난 겉모습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가를 지원해 그들의 작품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했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난 할아버지나 아버지, 다른 귀족들과는 좀 달랐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 이외에 고대 미술품을 수집하고 동양의 예술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 사회상에서 난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무엇보다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고희동(1886~1965·서양화가) 선생과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서예가) 선생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두 분은 내가 어릴 때부터 책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고 선생은 나에게 “글을 읽으면서 학문을 닦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 결과 나는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위창 선생은 나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주셨고, 내 수집활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작품을 모아야 하는지, 어떤 눈을 갖춰야 진품을 구분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윤정은> 돈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사실 취미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재산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는데, 다른 목적은 없었나. -메디치 (웃음) 난 상인이었지만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치인에게 100% 순수한 호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밀라노에 보내고 1488년 안토니오 다 산갈로를 나폴리에 보냈다. 그 공국들에 내가 후원하던 예술가를 보내는 게 좋은 작품을 선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호의를 베풀면서 실은 정치를 한 거였다. 솔직히 내가 예술가를 후원한 돈은 대부분 내가 피렌체의 공직을 겸하면서 공금으로 썼다. 내 재산은 오로지 내 수집품을 모으는 데 집중적으로 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에 대한 환상이 좀 깨지지는 않았나. -전형필 왜 수집에 나섰느냐고 위창 선생이 물었을 때 난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선이 언젠가 독립될 것이란 믿음이 없었는데도 수집을 계속했을지는 나도 자신이 없지만, 난 반드시 독립될 것으로 믿었다. 1933년 성북동에 터를 구해 미술관을 지은 것도 독립이 됐을 때 후손들에게 우리 문화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팔려 갔던 고려석탑을 다시 사 오면서 난 한번 유출된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해방된 후에는 이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제에 더 이상 빼앗길 염려가 없어진 후에는 조선 사람이 모은 것은 모두 조선 것이기에 해방 후에는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에만 전념했다. →<윤정은> 소장품들에 대해 묻겠다. 두 사람의 노력은 우피치와 간송 미술관으로 남았지만 두 사람 모두 박물관의 개관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메디치 우피치는 영어로 하면 ‘오피스’(사무실)를 뜻한다. 그곳은 내 증조부 코지모의 집무실이다. 물론 내가 가장 주목받기는 하지만 우피치 수집품은 우리 가문 전체의 공이다. 14~16세기 르네상스 화가부터 17~18세기 바로크와 로코코에 이르기까지 소장 규모 자체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조토의 ‘성모자’, 다빈치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도록으로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우피치를 박물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 이후로 200여년이 지난 후 메디치가 최후의 후손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토스카나 공국에 기증하면서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남겼다.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보물을 볼 수 있도록 어느 것도 피렌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형필 간송미술관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운학문매병’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이 있다. 1937년에는 영국 변호사 개스비에게서 청자 20점을 40만원에 사기도 했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가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가치는 후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고, 그것이 원래 내가 수집을 시작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잡스러운 그림을 그린다고 폄하됐던 겸재 정선(1676~1759)을 화성(畫聖)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을 내 최대의 성과로 생각한다. 그럼 내가 묻겠다. 지금 간송미술관에서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끼나. →윤정은 당대 최고의 좋은 자재로 지었다는 미술관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1930년대의 근대식 2층 건물과 창틀에는 현대미술관처럼 멋진 조명도 없고 첨단 잠금장치도 없다. 화장실 냄새도 코를 찌른다. 아이들이 유리에 온갖 손자국을 내며 코를 박고 보는 모습은 유럽 미술관의 풍경과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전시하지 않아서 좋았고, 온전히 우리 것이라는 것이 더 좋았다. 내가 보고 있는 전시품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조상의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다. 바티칸이나 루브르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친구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간송미술관에 가면 간송이라는 사람과 그가 남긴 뜻이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참고서적 간송 전형필/이충렬/김영사 조선의 그림수집가들/손영옥/글항아리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최완수·한상남/샘터 조용헌의 명문가/조용헌/랜덤하우스코리아 메디치 머니/팀 팍스·황소연 옮김/청림출판 메디치‘의 음모/피터 왓슨·김미형 옮김/들녘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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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조평통 “MB 베를린 발언은 도전적 망발”

    북한이 11일 이명박 대통령의 ‘베를린 발언’을 ‘도전적 망발’이라고 비난하면서, 이 대통령의 핵안보정상회의 초대 제안을 거부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이 대통령을 ‘역도’로 지칭하면서 이 대통령의 천안함 및 연평도 포격 도발 사과 요구에 대해 “대화를 하지 않고 우리와 끝까지 엇서려는 흉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비핵화 요구에 대해서는 “그 누구의 핵 포기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역시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미국과 함께 북침 야망을 실현해 보려는 가소로운 망동”이라고 밝혔다. 조평통 대변인은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서도 “남조선을 세계 최대의 핵전쟁 전초기지, 핵화약고로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그 무슨 핵 수뇌자회의 개최요 뭐요 하고 희떱게 돌아치는 것도 가관”이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역도가 끝까지 대결로 나가려는 것이 명백해진 조건에서 허황한 미련과 망상에 빠져 동족대결에 환장이 된 자와 마주 앉아 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며 앞으로 남북대화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어 “우리의 존엄과 체제를 모독하고 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무자비하고도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도 이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초대’라는 제안을 했는데, 서로 차원이 다른 문제를 억지로 결부시키는 논법에는 불순한 기도가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또 “전 미국 대통령의 조선 방문을 평가절하하고 그의 전언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이는 다름 아닌 조선의 영도자가 직접 의향을 표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청와대에서 조용히 전달받았으면 묵살했을지도 모른다.”면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당국자에게 전달하지 않고 회견장에서 밝힌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서울신문 4월 29일자 6면> 조선신보는 “베를린 회견의 내용은 카터 ‘전언’에 대한 직접적 회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남측은 소극성을 부리며 여전히 그 무엇이 풀려야 만날 수 있다는 식의 조건부 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해 천안함 및 연평도 사태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새달부터 국내외 투어 나서는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새달부터 국내외 투어 나서는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

    수필가 고(故) 피천득 선생은 5월에 대해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에다 아카시아가 짙어지는 계절을 덧붙여 본다. 휘영청한 달밤의 그 향기는 목소리가 곱다던 꾀고리마저 기절시킨다. 천지 사방이 농염하게 유혹하는 계절이다. 그렇다면 5월의 소리를 어떻게 들어볼거나. 딱히 생각이 안 나거들랑 해금을 떠올려 보자. 왼손의 마디에서 심장을 타고 흘러 오른손 마디로 전해진다. 하여 가슴을 후벼 판다. 그래서 ‘어찌 해(奚)의 금(琴)’이다. 최근 들어 새롭게 창작된 퓨전음악과 대중음악 중에서 국악기를 사용하는 곡이 늘어나 해금의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동이’와 ‘추노’ 같은 인기 드라마나 영화, 광고에서도 그렇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자유로운 음악적 조율도 있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음색이 단연 압권이다. 애절함이 있는가 하면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시원함도 갖추고 있다. 한의 눈물도 담겨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해금의 시대다. 고려 시대인 1116년에 해금이 처음 등장한 이래 현대에 이르러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있다. 손마디가 갸냘프다. 하지만 활대질(Bowing)은 천년의 한을 토해 낸다. 열정의 소리가 가슴 가득한 아카시아 향기로 울려 퍼진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쥐락펴락한다. ●감정을 자극하는 음색이 압권 국악계에서 가장 개성 넘치는 해금 연주가로 손꼽히는 강은일(44)씨. 요즘 뜨고 있는 신세대 해금 연주가 꽃별의 스승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교수이자 해금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그가 푸른 5월을 시작으로 해금을 들고 국내외 투어 공연에 나선다. 5월 20일 경북 울진 공연을 시작으로 26일 경기 고양, 6월 24일 경북 문경, 26일 서울, 8월 27일 경북 울주로 국내 공연이 이어진다. 또 9월 미국, 10월 터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해외 공연도 줄줄이 예정돼 있다. 6월에는 4집 앨범 ‘해금 랩소디’까지 나온다. 강씨는 자신이 이끄는 소리 그룹 ‘해금플러스’를 비롯해 미국의 가수 바비 맥퍼린, 일본의 전통 악기 샤미센 연주자인 요시다 형제, 일본 NHK체임버오케스트라, KBS국악관현악단 등 국내외 유명 연주자 및 오케스트라, 국악관현악단 등과 많은 협연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영화감독 김기덕, 일본의 피아노 연주자 유키 구라모토 등과의 작업을 통해 해금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가느다란 두줄의 활대 움직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아지경의 소리를 추구하면서 말이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포이동 연습실에서 강씨를 만났다. 우선 5월 공연의 의미를 물었다. “싱그러운 5월입니다.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주제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솔리스트인 저를 비롯해 ‘해금플러스’ 단원들과 함께 국악과 서양 악기가 합쳐진 동·서양의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해금 외에 가야금, 장고, 꽹과리, 건반, 드럼, 기타 등이다. ‘해금플러스’는 창단 12년째다. ●장르를 넘나드는 국악기로 인정 받아 “요즘 들어 해금이 많이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찾아 주시는 관객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지요. TV드라마에서도 그렇고 그림이나 사진 등에서도 해금이 자주 등장합니다. 장르를 넘나드는 국악기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금 연주가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1986년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양대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니 올해로 해금 인생 25년째를 맞는 셈이다. 대학에서는 4년 동안 장학생으로 다녔고 졸업 후 KBS국악관현악단을 거쳐 프로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88올림픽과 2002월드컵 등의 굵직한 행사에서 기념 공연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해금이란 무엇일까. “처음에는 갸냘픈 두줄의 해금이었다가 지금은 ‘해금플러스, 그리고 무엇’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위대한 악기로 존재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소중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해금은 천변만화(千變萬化), 즉 천번을 변하고 만번을 이룬다고 합니다.” 1990년 ‘타악기의 천재’로 불리던 음악인 김대환(2004년 작고)씨와 함께 한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매년 10여 차례 해외 공연을 가져 일본과 유럽에서는 그의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중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차례 이상씩 공연을 해 왔다. 강씨는 김씨를 추억하면서 “나의 멘토였다. 흑우(黑雨)라는 음반도 같이 냈다.”고 말했다. 해외 공연 때의 에피소드도 많을 터. 한두 가지만 얘기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본에서 바로크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텔레만 앙상블과 협연할 때였지요. 공연 시작 한 시간을 앞두고 연습하다가 줄 부분이 깨져 무척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부랴부랴 수소문해서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 관계자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해금을 급히 구해 무대에 올랐지요. 그 사정을 관객들에게 미리 얘기해 주었고, 공연이 끝나자 한 관객이 다가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더군요. 사할린 공연 때는 관객들에게 ‘어떤 좋은 자동차라도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해금의 소리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프랑스 리옹오페라극장과 벨기에 유럽의회에서의 공연, 미국 디즈니홀 공연과 일본 도쿄돔에서 인기 배우 배용준과 함께한 공연 등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정악과 산조, 창작 음악으로 대별되는 전통 기악에서 그동안 해금의 위상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들어 해금의 가능성은 확 달라졌습니다. 무용, 문학, 영화, 클래식, 재즈, 세계 민속음악 등과 접목해 세계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지요.” ●창작곡 위주로 관객과 소통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공연 때마다 주제를 정한다. 예를 들어 ‘오래된 미래’ ‘불광불급’(不狂不及) ‘미래의 기억’ ‘활의 노래’ ‘나비가 되어’ ‘고요한 아름다움 愛’ ‘멘토’ 등이다. 그때그때의 관객층과 계절, 공연 장소에 맞는 음악적 특색으로 차별화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창작곡 위주의 공연이다. 우리의 전통 음계인 ‘황 태 중 임 남’을 통해 애간장을 녹이는 온갖 오묘한 소리로 신들린 듯 연주하면서 관객들과 무아지경에서 만난다. 원래 그는 연극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가야금을 배우고 싶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 성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가야금 과목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부르더니 “그러면 해금이나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해금을 배우려는 학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야금보다 더 선호하는 인기 종목이 됐다고 말한다. 18~19세기에 거문고, 20세기에 가야금이었다면 21세기에는 ‘해금이 대세’라며 웃는다. 이는 강씨와 같은 해금 연주가들이 전국을 돌며 대중들과 부지런히 만나 온 결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해금 소리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며 보람을 찾는다. 2000~2003년에는 모색 단계였다면 2003년부터 크로스오버 등을 통해 본격적인 대중화와 세계화에 나섰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강사준 선생님을, 대학 때에는 김천흥과 심인택, 이기설 선생님 등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지금 박사 과정에서는 김영재와 이기설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의 파가니니가 되는 것입니다.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하면서 해금의 예술적 지평을 꾸준히 넓혀야 한다는 그런 소명으로 말입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강은일 교수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6년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나와 1990년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1990~1998년 KBS국악관현악단 단원, 경기도립국악단 해금 수석을 역임했다. 2006~2010년 숙명여대, 경희대 겸임교수로 있었으며 지난해 9월부터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있다. 1998년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대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 국회 대중문화&미디어대상과 KBS국악대상 등을 받았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2005년), 기독교 문화예술원 ‘기독교문화대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주요 앨범으로는 ‘오래된 기억’ ‘미래의 기억’ ‘선물’ 등이 있으며 그동안 미국,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180여회 순회 및 초청 공연을 가졌다. 올해 들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초청 공연으로 신년음악회를 열었고 지난달에는 대만국립극장에서 초청 공연을 했다. 다음 달 20일 울진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하며 미국, 멕시코, 온두라스, 터키, 에스토니아 등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아쟁과 사물놀이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다.
  • 남북 첫 비핵화 회담 성사 가능성은

    남북 첫 비핵화 회담 성사 가능성은

    한국과 미국, 중국이 북한에 남북 비핵화 회담 개최를 압박함에 따라 회담 전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이 비핵화 회담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분석이 나오는 배경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비핵화 논의는 6자회담에서 다룬다.”는 기본 원칙을 대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핵문제를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 남한과 먼저 협의해야 한다는 것은 그동안 북한이 유지해 오던 핵 관련 기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이 남북 간 비핵화 회담을 수용하더라도 “한반도 비핵화, 일본 후쿠시마 원전 등을 포함한 핵문제”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의제를 설정하거나 “6자회담의 큰 틀 속에서 수석 간의 만남”으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회담의 구체적인 장소나 의제에 대해 남북이 실무적으로 협의를 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려 실제 회담이 열리려면 5월은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지만, 식량지원과 6자회담 재개 등 결실을 얻으려면 명분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는 2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은 비핵화 회담을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카터 전 대통령에 앞서 북한을 방문했던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지원과 승인 하에 가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미 정부의 뜻을 전하고, 남북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주 중으로 발표되는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식량보고서와 대북지원 호소가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방북 때처럼 카터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한다면 의례적인 수준의 방북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보다 하루 앞선 25일은 북한 조선인민군 창건일(79주년)로 매년 군부의 입장을 밝혀 왔다. 군사퍼레이드를 통해 핵무기 능력을 과시하거나, 성명·결의를 통해 핵능력에 대해 밝힐 경우 비핵화 논의는 다시 걸림돌에 부딪힐 수도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日 교과서 역사왜곡, 독도만이 아니다

    日 교과서 역사왜곡, 독도만이 아니다

    대담하게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워낙 자주 분기탱천하다 보니 ‘실효적 지배’ 같은 어려운 단어가 별스럽지 않게 쓰여질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독도만이 아니란 것이다. 때문에 역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독도에 다른 문제가 파묻히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애초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출판사는 이쿠호샤와 지유샤. 이 두 출판사는 1997년 출범한 우익단체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교과서가 애초부터 주목받은 이유려니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쯤으로 치부하기 곤란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고대사 깎아내리기 여전 기본적으로 한국 고대사 깎아내리기는 여전하다. 가령 한사군 이후 2세기에나 들어서야 한국에 고대국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묘사한다. 고조선은 신화에 불과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겨우겨우 국가를 세우기 시작한다는, 국내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 식민사관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도래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했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도 눈에 띈다. 다른 출판사들은 도래인이 존재했고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와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식으로 서술돼 있는 반면 이쿠호샤는 도래인 대신 ‘귀화인’이란 용어를 앞세웠다. 이는 지유샤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보다 일본이 알아서 이들을 잘 포용했다는 점을 강조한 서술이다. ●임나일본부 기정사실화 여기에다 임나일본부 서술도 강화됐다. 다른 교과서들은 ‘임나 지역에 일본이 진출했다는 주장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 반면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임나일본부를 기정사실화했을 뿐 아니라 지유샤의 경우 ‘5세기 동아시아’ 지도를 통해 임나가 한반도 남부 전역이라 표시까지 해 뒀다. 왜구의 구성도 논란거리다. 지유샤는 왜구에 대해 “일본인 외에 조선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고 서술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왜구는 일본의 잔학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국제 학계에 통용된다.”면서 “그런 비판적 인식을 피하기 위해 왜구의 활동 책임을 한국으로 떠넘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조선의 건국을 서술하면서 조선이란 국호 대신 굳이 ‘이씨 왕조’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것도 이들 두 교과서다. 임진왜란 서술도 마찬가지다. 다른 교과서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조선인들이 많은 피해를 봤다는 식의 건조한 서술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기충천을 강조한다. 특히 지유샤는 도요토미가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공략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한론에 대한 서술도 두 교과서는 유독 편파적이다. 다른 교과서들에는 조선이 일본의 과도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의견이 대두됐고, 이 의견은 일본 내에서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정한론을 주장했던 이들이 실각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유독 이들 두 교과서만큼은 조선의 폐쇄적인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한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만 서술해 뒀다. 1910년 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이들 두 교과서는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데 강조점을 찍는다. 다른 교과서들은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권을 틀어쥐어 이 과정에서 많은 저항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반면 이쿠호샤는 “일본도 인접한 조선이 러시아 등 구미열강의 세력에 놓이게 되면 자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강해졌다.”고 서술했다. 일본으로서는 선택할 카드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지유샤는 아예 한술 더 떠서 “러일전쟁 뒤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두고 근대화를 추진했다.”고 썼다. ●3·1운동 폄하… 종군위안부 서술 없애 이는 자연스레 3·1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다른 교과서들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지만, 이쿠호샤는 시위 사진 1장으로 대체해 버렸고 지유샤는 ‘초기엔 비폭력, 나중엔 충돌로 사상자 발생’ 정도로만 간략히 언급하고 만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도 다른 교과서에는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교묘하게 이를 비튼다. 가령 종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은 사라졌고 창씨개명의 강제성과 저항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여기에다 지유샤는 “미혼 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고까지 해 뒀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김(金)의 전쟁/이춘규 논설위원

    1928년 일본 시즈오카현 출신 김희로. 일본을 상대로 ‘김의 전쟁’을 벌였다. 그는 원래 권희로였다. 세살 때 생부가 숨져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김희로가 됐다. 극빈층 조선인. 초등학교 때부터 민족차별을 겪게 되자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된다며 학교를 그만뒀다. 의부의 학대에 시달리다 열세살에 가출, 굶주림에 음식을 훔쳐먹었다. 일본의 냉대 속에 감옥을 드나들었다. 전과 6범.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차별에 대한 그의 항거는 집요했다. 1968년 2월 20일.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빚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이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하자 격분해 권총으로 사살. 직후 미나미알프스 산록 스마타쿄온천 여관에서 13명을 잡고 인질극을 벌인다.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며 일본의 사과만 요구했다. 88시간 만에 경찰에 체포된다. 구마모토 형무소 등지에서 32년을 복역. 1992년 영화 ‘김의 전쟁’의 모델이 됐다. 그는 귀국해 지난해 부산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 시사사전의 소개는 비아냥조다. ‘(생중계돼 유명해진)극장형 범죄의 첫 사례다. 채무관계가 범죄의 동기였지만 경찰과 인질극을 벌이는 내내 조선인·한국인 차별에 대한 사과만 요구했다. 한국에서는 차별과 싸운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됐다. 형무소에서는 독방의 열쇠를 채우지 않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법무성 교정국장 이하 13명이 정직·감봉·경고·훈계 등 처분을 받았다. 칼 차입을 도운 의혹을 받은 간수는 뒤에 음독자살했다.’ 김의 전쟁은 재일 한국인의 저항을 상징한다. 한국·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일본에서 갖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의 한(恨)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종전 후 일본에 남겨진 재일동포는 70여만명이지만 일본인들의 차별과 배척은 일제식민지시대 못지않게 심했다. 한국·조선 국적을 버리고 일본인이 되라는 귀화 압력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지금은 40여만명만 남았다. 독도 지킴이 가수 김장훈이 ‘김의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일본의 왜곡교과서 검정 발표날인 그제 “일본 각료·정부가 야비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변함없이 야욕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본에 계속 맞서겠다고 밝혔다. 제2 김의 전쟁이다. 김장훈의 말대로 일본은 원래 그런 나라다. 왜곡·조작을 서슴지 않는다. 집요하다. 우리가 지진 복구를 지원해 줬다고 일본이 변할 것이라 기대하면 순진하다. 착각 말라. 김장훈처럼 집요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日 유언비어 난무… 교민 “불똥튈라” 불안

    日 유언비어 난무… 교민 “불똥튈라” 불안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서의 또 다른 공포는 바로 유언비어다. “외국인 절도단이 있다.” “전기가 앞으로 10년 동안 들어오지 않는다.” “강간 사건이 수시로 일어 나고 있다.”와 같은 근거 없는 소문들이 휴대전화나 이메일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피해 주민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미야기현 경찰에 따르면 일본 경찰의 신고 접수 전화번호인 110번으로 이런 내용의 신고가 하루에만 500∼1000건씩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목격자의 착각이나 뜬소문 등에 의한 신고가 적지 않다. 특히 건강과 관련된 뜬소문이 이재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시노마키시의 피난소에 있는 이재민들에게는 지난 18일 밤 송신자를 알 수 없는 휴대전화 메일이 쇄도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관련해 “내일도 비가 내리면 절대로 비를 맞지 말아라. 확실히 방사능에 피폭된다.” “정부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원전의 정확한 상태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거짓 정보도 확산 중이다. “폭동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집은 물론 옷, 음식, 물, 전기, 가스도 없으니까.” “2, 3건의 강도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등의 무기명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미야기현 경찰은 초등학교 등에 설치된 대피소를 방문해 전단을 나눠 주며 이재민들의 냉정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지만 유언비어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부 교민들은 혹시 간토 대지진 때처럼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 도쿄, 가나가와, 지바, 시즈오카 등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재일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된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정완영 “시를 안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정완영 “시를 안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자네는 왜 시를 쓰지 않나?” 노(老) 시인은 대뜸 묻는다. 그저 농담인가 싶어 머뭇거리니 다시 묻고 재촉한다. “자네도 시를 쓰시게. 제대로 된 시 두편만 남기면 그 어떤 훌륭한 정치인, 그 어떤 훌륭한 학자보다 더 오랫동안 역사가 기억할 거야.” 진지했다. 65년 시력(詩歷)의 시인답게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식과 지혜를 내보였고, 92세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얘기 중간중간 유쾌한 농담을 잊지 않던 그는 지긋한 눈빛으로 정색한 채 손주뻘 되는 기자에게 시 쓰기를 권했다. 머리를 배반한 입이 절로 움직였다. “네,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4일 시조시인 정완영을 만났다. 최근 열일곱 번째 시집 ‘詩菴(시암)의 봄’(황금알 펴냄)을 내놓은 그다. 공식 집계는 없건만 창작 시집을 내놓은 최고령 시인임에 분명하다. 경북 김천시에 있는 그의 집과 백수문학관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제 강점 기 고문이 시로 터져나와 그의 호는 백수(白水)다. 정갈히 맑은 물이라는 뜻과 함께 고향 김천의 천(泉)을 쪼갠 글자(破字)다. 2008년 정부와 경북도 등이 예산을 들여 백수문학관을 개관했다. 시조시인으로 개인의 문학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난 시 지상주의자이면서 시 전도사야. 남녀, 학력, 노소 가리지 않고 늘 시를 권하지. 시를 쓰는 것이 즐거우니까 권하는 거지. 시를 안 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시에는 별 재주 없는 이가 많을 텐데 무작정 시를 권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짐짓 놔보는 어깃장에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면 많이 거두는 이도 있고, 조금밖에 못 거두는 이도 있지. 그러나 아무것도 못 거둔 이는 없는 법이야. 타고나지 않아도 노력한 만큼은 반드시 거두게 돼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말 그대로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다. 정완영은 일제 강점기 ‘불령선인’(일본을 따르지 않는 조선인)으로 찍혀 경찰에게 고문당해 오른쪽 중지를 쓸 수 없게 됐다. 고통은 시가 되어 터져나왔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김천에서 ‘시문학 구락부’를 만들며 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민족적 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장르로서 시조만을 고집해 온 민족사적 배경이자 개인사적 이유다. 1970~8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시조 ‘조국’에서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와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게끔 살아온 것이다. 정완영은 청마 유치환의 강권으로 공식 등단의 필요성을 느꼈고 곧바로 1960년 서울신문, 국제신보, 1962년 조선일보, 1967년 동아일보 등 신춘문예를 휩쓸다시피하며 중앙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몸으로 꿰뚫고 살아온 시 세계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시인이 가난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의 가난함은 훈장이라고 머리로 외면서도 몸은 한사코 명예와 돈을 좇아 두리번거리는 것이 여느 시인들의 비루한 현실이니 말이다. “시는 벌판에서 와. 외롭고 쓸쓸할 때, 그때 시가 나와. 안일하거나 가득 차면 시가 안 나오거든. 시가 떠오를 때는 일부러 밥도 두세 끼니씩 거르기도 해.” 하지만 어쩌랴. 짜여진 형식의 틀과 고루한 인식에 갇혀 있는, 낡은 장르로 치부되는 것이 문단에서 시조가 겪고 있는 대접이다. 그는 “시조의 형식에는 종장 세 글자를 제외하면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들어 있다. 시의 정서와 시어 역시 다루지 못할 것이 없다.”면서 “시조를 모르는 이들의 편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시조 변형 자유로워… 낡은 장르 치부는 편견” 그의 신작 시집 ‘시암의 봄’을 펼쳐 읽어 보면 시조에 대한 편견이 단박에 허물어짐을 느낄 수 있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감꽃’ 중), ‘동구 밖 개 짖는 소리로 먼 마을에 눈 내렸다’(‘먼 마을에 내리던 눈’ 중),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것인가’(‘적막한 봄’ 중) 등과 같은 시편들은 젊은 시인의 모던함과 무람 없이 견줘도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길 만하다. 특히 ‘함부로 꽃 피지 않고, 함부로 열매 안하는 석류나무’를 보여준 ‘우리 집 석류나무는’는 품격 있는 시어 조련과 범우주적 가치에 대한 사유의 정수를 확인시켜 준다. 지금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시를 공부하고, 생각하고, 쓰고 있다는 진짜배기 시인 정완영. 그러고 보니 김천은 소설 쓰는 김연수(41), 시 쓰는 문태준(41)의 고향이다. 그냥 불쑥 튀어나온 문재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글 사진 김천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日위안부 피해’ 송신도 할머니…정대협 “도쿄로 안전하게 대피”

    ‘日위안부 피해’ 송신도 할머니…정대협 “도쿄로 안전하게 대피”

    동일본 대지진으로 연락이 끊겼던 재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89) 할머니가 도쿄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지난 11일 연락이 끊겼던 송 할머니가 일주일 뒤 미야기현 대피소의 대피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송 할머니는 자신을 찾아 수소문했던 ‘재일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지난 19일 상봉했다. 회원들은 송 할머니가 평소 돌봐주던 민생위원이 “쓰나미를 피해 대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강아지를 챙기느라 시간을 지체하다 그 사이 대피소가 물에 잠겨 다른 곳으로 피해있었다고 전했다. 송 할머니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충남 유성 출신인 송 할머니는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유일한 생존자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10년 동안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일본 정부와의 긴 싸움은 다큐멘터리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로 제작돼 2009년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대재앙 넘은 한·일 지식인 우정… 그들의 아주 특별한 편지

    대재앙 넘은 한·일 지식인 우정… 그들의 아주 특별한 편지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거쳐 일본 도쿄대에서 석사,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근대 한·일 관계사. 이마니시 하지메는 일본 아오모리현 도호쿠 공업대학 교수다. 도호쿠 공대는 이번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센다이에 있다. 이마니시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구조역학과 지질구조 전문가다. 삼성물산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 건축물의 지질구조도 오래 연구했다. 이때 정 이사장과 친분을 쌓게 됐다. 2005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는 양국 최대 규모 교류행사인 한·일 축제한마당 운영위원장(2008년)도 맡았다. 창졸간에 덮친 대재앙 직후 두 사람이 황망히 주고받은 이메일에는 국경과 지배·피지배 역사를 뛰어넘어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한·일 지식인의 우정과 인간애가 깃들어 있다. 그 내용을 공개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센다이의 이마니시 선생께 16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메일을 열어 보니 선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후딱 훑어보아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써내려간 선생의 간결한 문장을 되씹어 읽으면서, 동북관동대진재(東北關東大震災)를 겪은 일본인의 심경과 자세에 대해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일본이 미증유의 재난을 하루빨리 극복하고 훌륭하게 재건하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고 편지를 공개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한국의 독자들에게 피해지의 현황과 당사자의 상황을 육성으로 전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짧은 편지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 앞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하는 일본인의 모습이 군더더기 없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3.16 정재정 #정재정 선생께 연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려를 끼쳤습니다. 이곳은 괜찮습니다, 처도 개도 집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전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부터 개통했기 때문에 메일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가스와 수도는 안 됩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어떻게든 해 나가고 있습니다. 걱정을 끼치게 되었습니다만, 오늘 나토리시 유리아게하마와 센다이공항 가까이까지 걸어서 가봤는데, 95%의 목조 건물이 소멸되었습니다. 항상 들렀던 식당도 없었습니다. 쓰나미는 눈물도 나지 않을 만큼 차가운 재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라기보다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이 정직한 감상입니다. 이곳은 괜찮습니다. 우선 연락만으로 그칩니다. 3.15 이마니시 하지메 지난 11일 오후 저는 공무에 바쁜 관계로 일본에서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가서 그 심각함을 알고 센다이에 계신 선생의 안부가 궁금하여 저와 아내가 몇 차례 전화를 했습니다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틀 만에 간신히 연락이 된 요코하마의 지인을 통해서도 선생의 안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15일에 선생께 직접 메일을 보냈는데, 위와 같은 답신을 받았습니다. 편지를 읽고 나니 선생과 나눈 우정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식민지 지배의 비참한 피해자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까지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90여년 전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이런 자세를 보인 것은 한·일 관계의 획기적 진화를 보여 주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저는 선생을 비롯한 일본인 수강생들에게 동북 지역의 한·일 관계사 유적지 답사를 안내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재난에 휩쓸린 그 지역이 하루빨리 복구되어 일본에서 저의 강의가 속개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부디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18 정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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