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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화해무드 남북관계 활용… 美의 강경기류 우회돌파 전략

    북한이 지난달 30일로 예정됐던 로버트 킹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 특사 방북 초청을 철회하는 한편 우리 정부에는 남북대화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잇따라 내보냈다. 북·미대화나 6자회담 등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 석방 카드를 잠시 보류하고 남북관계를 지렛대 삼아 미국의 태도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우회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배씨의 석방을 위한 킹 특사의 방북을 북미대화 등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미국이 요지부동이자 실익을 기대할 수 없는 ‘케네스 배 석방’ 카드를 쓰는 것 보다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등 이미 대화 일정이 잡혀있는 남북관계를 우선 공략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달 31일 ‘민족분열의 비극을 끝장내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남북 간 대화에서 ‘흥정’을 지양해야 하며 한반도 관련국들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 개최 날짜를 놓고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는 국면에서 우리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는 내용을 담긴 했지만, 핵심 메시지는 민족적 관점에서 남북간 현안을 조속히 매듭지을 것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도 이날 ‘조선이 구상하는 과감한 평화조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반도 평화정착과 관련)대범한 행동 계획, 통이 큰 문제 타결안이 구상됐을 수 있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이 움직일 때까지 우선은 남북관계에 집중하면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좀 더 전향적인 입장에서 ‘빅딜’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미국을 유인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편 북한은 킹 특사 초청 철회와 관련, 지난달 31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외무성 대변인 문답을 통해 “미국이 한·미 합동군사연습 기간 중에 전략폭격기를 출격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에 대한 가장 명백한 핵 공갈이며 군사적 위협행위”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케네스 배 석방이 어렵다는 일종의 ‘시위성’ 메시지로 해석된다. 미국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킹 특사 방북 무산에 대해 “놀랍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살해’로… 日 요코하마시, 중학교 교과서 왜곡

    일본 요코하마시 교육 당국이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군인과 경찰, 자경단이 저지른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교과서 기술을 왜곡한 사실이 확인됐다. 28일 NHK는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 지역 중 한 곳인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가 중학생용 부교재인 ‘요코하마 알기’ 올해 판에서 ‘군대나 경찰 등이 조선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자행하고 중국인을 살상했다’는 내용 가운데 ‘군대와 경찰이 관여했다’는 부분을 삭제하고 ‘학살’이라는 단어를 ‘살해’로 바꿨다고 보도했다. 요코하마 교육위원회는 일부 시의원이 “아이들의 역사 인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자 교과서 내용을 이같이 수정했으며, 기존에 배포된 부교재는 전부 회수했다고 밝혔다. 이에 일본 역사연구가와 대학교수 등 30여명은 이날 내용 수정 취소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교육위원회는 “중학생의 심신 발달 정도를 고려해 ‘학살’이라는 표현을 없앴으며, 군대나 경찰이 학살에 관여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표현을 바꿨다”고 해명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2만3058명”

    1923년 9월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3.4배 많은 2만 3058명에 이른다는 독일 정부의 사료가 발굴됐다. 지금까지는 1923년 12월 독립신문이 밝힌 6661명이 한·일 양국에 의해 공식적인 희생자 규모로 알려졌으며, 문헌에 따라서는 1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돼 왔다. 강효숙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국가보훈처 공훈전사자료관에서 발굴해 21일 공개한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Ⅲ): 독일 외무성편(2)’의 사료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학살자는 모두 2만 3058명으로 집계돼 있다. 1924년 3월 영문으로 작성된 사료에는 ▲학살 장소와 시신이 모두 확인된 피해자 8271명 ▲장소 미확인, 시신 확인 피해자 7861명 ▲장소 미확인, 시신 미확인 피해자 3249명 ▲경찰에 학살된 피해자 577명 ▲일본 기병(군인)에게 학살된 피해자 3100명으로 기록돼 있다. 문서 마지막 부분에는 익명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나온다. 강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관련 사료 중 최종적인 조사 결과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서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학살 조선인을 포함한 1만 4747명은 당시 일본 최고의 지식인으로 존경받던 요시노 사쿠조가 확인한 것으로 기록돼 더욱 의미가 있다. 앞으로 이 사료를 보다 더 치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관동대지진 90주기를 맞아 22~23일 개최하는 한·일 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을 발표한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당신의 책]

    경제분석의 역사 1·2·3(조지프 슘페터 지음, 이상호 외 옮김, 한길사 펴냄) 혁신, 창조적 파괴, 기업가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인 저자가 경제학의 역사를 과학적 경제분석의 발전사로 풀어쓴 책. 1914년 저서 ‘학설사와 방법론사의 시대’를 토대로 마지막 9년을 쏟아부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숨졌다. 이상호 원광대 교수 등 5명이 1996년부터 번역을 기획해서 무려 17년 만에 출간이 완료됐다. 644~764쪽. 각 권 3만 5000원. 청소년 정치의 주인이 되어 볼까?(이효건 지음, 사계절 펴냄) 민주주의 원리부터 정치 참여까지 알기 쉽게 설명한 청소년용 정치교양서. 두발 자유화를 위해 학생들이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항의 의사를 표시한 사건 등 청소년들이 스스로 나서서 민주주의를 실현시킨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한편 청소년의 선거권 보장 등에 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200쪽. 1만 2000원. 산체스네 아이들(오스카 루이스 지음, 박현수 옮김, 이매진 펴냄) 20세기 빈민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산체스네 아이들’의 출간 50주년 기념판이 국내 출간됐다. 인류학자인 저자가 멕시코의 빈민가 카사그란데에서 살아가는 가족을 4년간 취재해 1인칭 서사 형식으로 기록한 이 책은 1961년 발간 당시 멕시코 빈곤의 실상을 생생히 드러내는 바람에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2011년 발간된 50주년 기념판에는 산체스네 가족의 후일담 등이 추가됐다. 759쪽. 2만 8000원. 에라스뮈스(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 ‘호모 루덴스’, ‘중세의 가을’로 유명한 사상가 요한 하위징아가 광기로 얼룩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 애쓴 고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에 대해 쓴 평전. 하위징아는 에라스뮈스의 대표작 ‘우신 예찬’을 비롯해 그의 정신과 사상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472쪽. 1만 8000원. 불멸의 이론(샤론 버치 맥그레인 지음, 이경식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250년 전 탄생한 통계학 이론 ‘베이즈의 정리’는 사전 경험을 통해 확률을 도출한다는 점 때문에 통계학자들의 비난 속에 묻혔다. 하지만 주관성에 의지한 이론의 결과가 너무나 잘 들어맞으면서 실제 현실에서는 꾸준히 주목받아 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냉전시대에는 핵잠수함을 찾는 데 사용됐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론이 어떻게 해서 인류 역사상 위대한 논쟁 가운데 하나를 촉발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 준다. 640쪽. 2만 8000원. 확신의 힘(웨인 다이어 지음, 김아영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행복한 이기주의자’로 유명한 저자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의 힘’을 키우는 5단계 기술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미 이루어 놓은 것처럼 확신하면 과거의 나에 얽매이지 않고 내 안의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88쪽. 1만 5000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안병직 번역·해제, 이숲 펴냄) 일제강점기에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2년 5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 경기도 파주에 있는 개인 박물관 운영자가 10여년 전 경주에서 우연히 원본을 발견한 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제공했고,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하는 낙성대 경제연구소 팀이 현대어로 번역했다.424쪽. 2만 5000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정구현 지음, 청림출판 펴냄)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이자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인 저자가 분석하는 한국경제의 위기와 재도약을 위한 제언. 저자는 한국경제가 직면한 위험은 성공 속에 싹트기 시작한 나태함, 이익집단의 고착화, 리더십의 부재, 고비용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정부와 기업이 한국경제의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316쪽. 1만 6000원.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한·일 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은 오는 22~23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90년 전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발생한 재일조선인 학살사건을 주제로 한·일 학술회의를 연다. 이번 학술회의에선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관련 연구와 역사교육, 시민운동 전개 과정 등을 확인하고 나아가 한국에서의 역사교육과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강덕상 재일한·일역사자료원 관장과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가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 등에 대해 기조강연을 한다. (02) 2012-6062.
  •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경북 예천의 윤우식 생가와 대구의 옛 교남(嶠南) YMCA회관 등 항일유적지 2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14일 밝혔다. 남석(南石) 윤우식(尹雨植·1906~1934)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단체인 무명당(無名堂)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33년 9월 예천 지역에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구속돼 이듬해 재판 중 사망했다. 그의 예천 생가는 영남 지역의 전형적인 가옥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ㄴ’ 자형 건물인 사랑채와 ‘ㄱ’ 자형 건물인 안채가 ‘ㅁ’ 자형 배치를 이루며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당이 자리한다. 옛 교남 YMCA회관은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이 회합하던 장소다. 교남 YMCA의 임원과 회원 등 17명은 해방 뒤 건국훈장 애국장 등 포상을 받았다. 또 물산장려운동과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新幹會)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 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곳이다. 1914년 건립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1층과 2층 사이가 ‘돌림띠’(Cornice)로 장식됐다. 창 위쪽은 아치로 인방(引枋)을 만들어 사각형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1920년대 조적조(組積造) 건축양식을 대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향후 30일간의 등록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광복 68돌…역사 부정하는 日] 한국 역사 소개하는 일본인… 강화군 문화해설사 와카즈키 에이코씨

    [광복 68돌…역사 부정하는 日] 한국 역사 소개하는 일본인… 강화군 문화해설사 와카즈키 에이코씨

    “일본에서 8월 15일은 전쟁이 끝난 날이고, 미국에 패배한 날이에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날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느낌이 사뭇 달랐어요.” 150여년 전 강화도 조약으로 한국의 슬픈 근대사가 시작된 현장에서 한·일 사이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자 팔을 걷어붙인 일본인이 있다. 주인공은 인천 강화군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와카즈키 에이코(50)씨. 그는 14일 30도가 넘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문화관광 안내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강화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995년 한국으로 시집오면서 강화군에 정착한 와카즈키씨는 2006년부터 8년째 관광객에게 강화도의 문화 유적지를 소개하고 있다. 와카즈키씨는 “한국에 와서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면서 “일본에서는 한·일 근현대사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얘기로 끝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역사교과서와 비교해 보니 일본 교과서는 한·일 관계사를 왜곡한 것도 많고 아예 다루지 않는 사실도 많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에 와카즈키씨는 일본 사람들이 그동안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께 마땅히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와카즈키씨가 한국에서 역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시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시집온 첫날 시아버지가 보여준 전주 이씨 족보에 매료됐다. 이후 강화군에서 지원하는 해설사 교육을 받았고 정식으로 문화관광 해설사가 됐다. 그는 “한국의 문화 유적지에는 일본과 얽힌 아픈 역사가 적지 않아 설명할 때 조심스럽다”면서 “한 번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한 어르신이 일본을 욕해서 얼굴이 화끈거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와카즈키씨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일이 뿌듯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일본의 친정어머니가 한국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꾼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어머니는 한국인을 ‘조선인’이라고 불렀고, 한국에 시집간다고 했을 때는 아예 모녀의 연을 끊자고 했을 정도였다”면서 “그런데 경복궁을 보고서는 ‘한국은 참 고운 나라’라며 ‘그동안 한국을 잘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결혼을 반대해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부와 같은 나라”라면서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일본이 역사를 정확하게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길섶에서] 미신/문소영 논설위원

    ‘선풍기의 진화’ 이후 선풍기를 틀어 놓고 밀폐된 방에서 자면 죽는다는 주장은 미신(迷信)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비싼 에어컨을 팔기 위한 가전사의 판매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여름마다 선풍기 주의보를 울렸던 일이 무색했다. 비위생적인 술잔 돌리기로 B형 간염에 걸린다는 세간의 상식도 미신이란다. B형 간염 백신을 대량으로 팔아야 하는 제약사의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백두대간에 쇠말뚝 등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8·15 광복절 전후로 자주 들어오던 이야기다. 과연 쇠말뚝이 한반도 영웅의 탄생을 막았는지 그 진위를 따지기보다 그저 분노했다. 한동안 뜸하더니 최근 민족정기를 막고자 일제가 혈맥을 눌러놓은 목돌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이미 서양식 사상과 철학에 동화됐는데, 왜 이런 엉뚱한 일을 벌였을까. 풍수에 집착한 조선인의 감정을 악용한 심리전 아니었을까. 광복 68주년이다. 왜곡된 민족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야스쿠니 반성을” “한국인은 꺼져라”

    지난 10일 오후 도쿄 지요다구 사루카쿠초에 있는 재일본 한국 YMCA호텔. 이곳은 ‘두 개의 일본’이 존재하고 있음을 극명히 보여 주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열린 제8회 안티 야스쿠니 행사에 일본 제국주의 과거를 반성하자는 일본인들이 모여든 한편 “일본은 책임이 없다”고 외치는 우익들의 난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모토 아래 열린 안티 야스쿠니 행사에서는 심포지엄과 평화 콘서트,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들의 퍼포먼스 등이 진행됐다. 1인당 1000엔(약 1만 1500원)을 내는 유료 행사였음에도 220석가량의 행사장은 발 디딜틈 없이 꽉 들어찼다. “태평양전쟁을 성전화하고 전사자들을 호국 영령으로 떠받들면서 야스쿠니신사가 무엇을 숨겨 왔는지 직시하자”는 행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 바로 밖에는 우익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삼삼오오 모여든 우익들은 호텔 안을 말없이 주시했다. 소요 사태를 우려한 경찰들이 행사장 근처를 지키고 있어 YMCA호텔에서는 조용했지만 날카로운 대치가 오후 내내 계속됐다. 우익들의 본격 난동은 오후 7시부터 시작된 가두 촛불집회에서 시작됐다.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 반대’, ‘노(No) 야스쿠니’ 등의 팻말을 들고 합사자 유족을 비롯한 100여명의 참가자들이 약 40분간 행사장 근처 도로를 따라 걷는 동안 우익들은 일장기와 ‘일본애국자연합회’ 등의 플래카드를 매단 대형 승합차 5~6대에 나눠 타고 불쑥불쑥 나타나 집회를 방해했다. 확성기로 “조선인은 일본을 떠나라”고 떠들며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근처 진보초 거리에서는 욱일기를 든 50여명이 모여 “집회를 당장 그만둬라”, “한국인은 꺼져라”라고 외치는 모습도 보였다. 경찰들의 진압으로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촛불집회가 끝난 뒤 우익들은 자진 해산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또다른 위안부 시각… 불편한 재인식

    한·일 과거사의 청산과 해결에 관한 한 양국 정부는 늘상 평행선을 달려왔고 지금도 표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표류하는 과거사 청산의 중심엔 위안부라는 거대 사안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위안부의 실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국의 위안부’는 그 청산의 큰 단초로 자리매김된 위안부의 실체를 일반의 인식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부해 눈길을 끈다.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인 위안부. 세종대 일문과 교수인 저자는 그 위안부를 향해 고정된 민족주의적 시선이 위험하고 그 편향의 인식을 바꿀 때 오히려 과거사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몸에 경험한 존재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이 분명했지만 사기 등의 불법적 수단으로 강제로 끌고 간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는 사실을 저자는 위안부의 증언을 통해 밝힌다. 물론 저자 역시 조선인 부모에 의해 팔려가거나 조선인 업자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되는 구조를 기획하고 마지막 순서로 가담한 이들은 일본군이었다고 명쾌히 말한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가 야기한 야만의 폭력인 위안부 문제를 지금처럼 장기화하고 미해결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냉전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책에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불편하게 여기고 인내가 필요할 만큼의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들을 담담히 말해왔던 위안부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들어왔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그들의 체험을 왜곡하는 데 가담해온 셈이라는 주장이 괜한 것만은 아닐 성싶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일본軍 위안부 직접 관리, 그 명백한 증거

    일본軍 위안부 직접 관리, 그 명백한 증거

    ‘병참에 가서 사쿠(콘돔) 배급을 받았다.’, ‘병참의 군의가 위안부의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새로운 자료가 공개됐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는 8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42년 8월부터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의 종업원으로 일한 조선인의 일기 원본을 공개했다. 한국사연구소에 따르면 일기 작성자(1905∼1979)는 1942년 처남과 함께 동남아로 떠나 2년 5개월간 체류했다. 1922년부터 35년간 적은 그의 일기 가운데 위안소 관련 내용은 1943∼1944년 2년치에 담겨 있다. 작성자는 일기에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 실태에 관한 기록을 여러 차례 남겼다. 일기를 보면 작성자는 매일 오전 일본군 병참사령부에 위안부 관련 영업 일보를 제출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3년 1월 12일자 일기는 ‘항공대 소속 위안소의 수입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제출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결혼한 뒤 위안부를 그만둔 여성에게 일본군이 복귀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복귀한 기록도 담겨 있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킨센관에 있게 되었다더라’는 내용이다. (1943년 7월29일자) 박한용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군이 절대적인 인사·명령권을 갖고 위안부에 대해 직접적인 명령과 통제를 한 것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고국의 거리서 스러진 고려인 마지막 길만은 외롭지 않았다

    고국의 거리서 스러진 고려인 마지막 길만은 외롭지 않았다

    “먼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 당신이 한국에 도착해 겪었을 아픔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에 미리 손 내밀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질병 속에서 고통받을 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있도록 치엔씨의 얼굴을 마주한 채 마음의 문을 열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동신병원 장례식장. 조근조근한 말투의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조사를 낭독했다. 주변에는 서대문구, 우즈베키스탄 영사관, 한국이주노동재단 관계자들만 보였다. 장례식이라면 응당 눈에 띄어야 할 격렬하게 울어 대는 유족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치엔(57)씨는 살아서도 혹독하게 외로웠을, 그리고 죽어서도 배웅하는 이 하나 없이 떠나야 하는 무연고 사망자다. 원래 무연고 사망자는 장례절차 없이 화장된다. 연고자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화장 뒤 10년간 안치하고 그다음 집단 매장된다. 이렇게 이승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하나의 물건처럼 ‘소각 처리’될 치엔씨에게 온당한 죽음의 형식을 갖춰 준 것은 지난 5월 출범한 마을장례지원단 ‘두레’다. 두레는 서대문구 사회복지협의회, 동주민센터의 지역사회복지협의체, 교원라이프, 동신병원 등이 함께 출범시켰다. 두레는 장례뿐 아니라 두레를 처음 기획했던 3월 13일을 기념해 매년 이날에는 무연고 사망자들을 위한 ‘추모의 날’도 운영할 계획이다. 장례에서 화장, 유골 안치는 물론 제사까지 치러 준다. “병원에서든 빈민촌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 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라며 “죽음의 공동체만이 사랑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어느 철학자의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서대문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치엔씨에 대한 사망처리 의뢰를 받은 것은 지난 18일. 지난 3월 한국에 방문취업으로 입국한 뒤 경기 안산에서 살았던 치엔씨는 지난달 10일 은평구 길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 직후 숨졌다. 조사 결과 치엔씨는 고려인으로 밝혀졌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 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17만 조선인의 후예였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방문취업 고려인 무연고 동포’여서다. 법무부는 2007년부터 모국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앙아시아 국가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국가별 쿼터에 따른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고국 땅에서 무연고자로 죽어야 했던 치엔씨는 강제이주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무연고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대문구와 두레는 고려인 치엔씨에게 한국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그렇게 치엔씨는 일산 화장장을 거쳐 파주 추모의 집으로 갔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여자 동아시안컵] 피는 진했고, 北은 강했다

    [여자 동아시안컵] 피는 진했고, 北은 강했다

    태극낭자들이 강호 북한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졌다. 그러나 피는 하나로 흘렀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여자축구대표팀은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3동아시안컵 여자부 1차전에서 북한에 1-2로 역전패했다. 김수연(스포츠토토)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허은별(4·25축구단)에게 거푸 연속골을 내줘 무너졌다. 2005년 8월 16일 고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 이후 8연패. 국제축구연맹(FIFA) A매치 상대전적에서도 1승1무10패로 열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북대결인 만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관중들은 따뜻한 박수로 격려했고, 흰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선 북한 선수들은 관중석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화답했다. 오길남 북측 선수단장과 문장홍 북측 축구협회 부회장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 박종길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등과 함께 VIP석에 앉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약 35명도 관중석을 지켰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회원들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국은 하나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기 내내 “조~국통일”을 외쳤다. 관중은 총 6530명. 훈훈한(?) 공기와 달리 그라운드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북한 선수들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전사’로 돌변했다. 왼쪽 가슴에 백호와 인공기를 나눠 단 선수들은 90분 내내 몸을 날리며 서로를 쫓았다. FIFA 랭킹 16위 한국이 한 수 위인 북한(9위)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했다. 김수연이 전반 26분 먼저 골망을 갈랐다. 지소연(아이낙)이 때린 슈팅이 수비수에 맞고 나오자 달려들며 강력한 슈팅을 다시 날렸다. 1-0. 그러나 리드는 잠시였다. 전반 36분 코너킥 때 한국 수비가 흐트러진 사이 허은별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허은별은 2분 뒤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머리로 정확히 받아넣어 역전까지 시켰다. 두 팀은 후반에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추가골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로 짜여진 북한 선수단은 승리가 확정되자 껴안고 환호한 뒤 골대 뒤 관중석으로 뛰어가 손을 흔들며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에게 답례했다. 두 골을 몰아친 허은별은 단단한 체격(165㎝ 60㎏)과 저돌적인 돌파로 승리를 견인했다. 포지션은 수비수로 등록됐지만 A매치 7골(20경기)을 터뜨린 라은심(압록강축구단)과 ‘투톱’으로 자주 나섰다. 2011년 독일 FIFA여자월드컵에서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와 18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최근에 복귀했다. 북한은 당시 도핑에서 5명이 걸려 2015년 캐나다 월드컵 출전길이 막혔고, 국제 무대에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1990년 남북통일축구 때 선수로 만난 뒤 23년 만에 조우했다는 두 감독은 덕담을 건넸다. 윤덕여 한국 감독은 “2015년 캐나다월드컵을 앞두고 일본, 북한 등 세계적인 팀들과 겨루는 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면서 “북한이 잘했던 부분을 배우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겠다”고 했다. 김광민 북한 감독은 “남측이 전보다 많이 발전했다”면서 “남측의 완강한 공격에 우리는 소심한 경기를 했고 선제골까지 내줘 당황했지만 두 골을 넣어 회복할 수 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국은 오는 24일 화성에서 중국과 2차전을 치르고, 북한은 25일 같은 장소에서 일본을 상대한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야사로 엮어낸 당대의 꼬집음과 웃음 일제시대 굴절상 고스란히…

    식민지 시대 야담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냈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식민지 시기의 야담이 보여주는 다채롭고 역동적인 양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서가 한 권도 없다는 점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책이 전달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하려면 야담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만큼 야담은 이제는 잊힌 개념, 지칭할 대상을 잃어버린 사어(死語), 문학 쪽 전문가들이나 가끔 입에 올리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야담은 간단하게 말해 민간에 떠도는 야사를 바탕으로 꾸민 이야기로, 태생부터 주변성을 보이지만 일반 대중의 삶과 가깝고 당대의 굴절과 변화상을 예민하게 담고 있다. 야담은 식민지 라디오 시대의 총아였다. 라디오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이른바 요즘 말로 ‘엔터테이너’들이 나타났다. 당시 라디오라는 첨단문명을 누구보다 발빠르게 수용한 대중문화인은 윤백남이었다. 그는 제2조선어 방송의 초대 과장을 역임하면서 ‘라디오 야담’을 개척해 야담의 오락성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월간 야담’이라는 야담잡지를 조선에서 처음 발간해 다른 대중잡지들을 따돌리고 월등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이 책의 3장은 야담의 프로파간다(선전 또는 선전 도구)를 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야담이 전시 분위기를 반영하여 체제내 프로파간다로서 어떻게 재조직되었는지를 이인석의 사례와 혈서 쓰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이인석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 제도가 실시된 이후 중국 전선에서 사망한 첫번째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이다. 그가 죽은 뒤 벌어진 대대적인 추모 열기는 1932년 상해사변에서 사망한 일본의 ‘3용사’에 비견될 만했다.전쟁미담의 전성시대는 또한 혈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 수많은 혈서의 사연이 대중매체를 수놓았고 야담은 대중 선동에 나름대로 한몫을 한다. 일본의 전쟁 확대로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이 병사로 강제 차출됐고, 이에 따른 대중 계도가 불가피하게 됐다. 여기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야담이었다. 책에 실린 다양한 신문과 잡지의 기사는 독자들에게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해주기 위한 것으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현대적 표기법으로 고쳐졌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우선 어려운 단어들이 눈에 많이 띄고, 식민지 시대가 오늘날과는 너무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리랑TV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전쟁의 비극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 ‘미싱’(Missing)을 17일부터 4주간 수요일 오전 9시 방송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동편과 서편 출입구에서 제복 차림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은 뒤 5조 63항으로 작성된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한다. 주인공은 유엔군 수석대표인 미 육군 중장 윌리엄 케이 해리슨과 북한군 및 중공군 수석대표인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다. 두 사람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협정에 관한 협정’이라는 긴 제목의 문서에 서명한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각각 작성된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교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2분. 세계 최장의 정전 체계가 비롯된 한국 정전협정에 서명한 잉크는 말라버려 빛바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가슴 시린 사연을 폐부 깊숙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미싱’은 그들의 비극을 그린다. 1부에서는 재미 이산가족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미 이산가족들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북 이산가족상봉 협상 대상에서 제외돼 생이별의 아픔을 60년 동안 참아내야 했다. 상당수가 가족을 만나겠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2부 ‘전장의 나이팅게일’은 외국인 간호사들의 사연을 전한다. 외국인 간호사들은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부상병을 돌보다 숨져간 동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3부는 전쟁고아를 살리려고 군법까지 어겨가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어느 미군 장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중공군의 남하로 서울이 점령당하기 직전 한 학교에 피신해 있던 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후송한다. 그를 ‘아버지’로 기억하던 고아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한다. 4부에서는 세계 분쟁지역 아이들을 돕는 한국인들을 조명한다. 시리아는 60년 전 한국의 상황처럼 3년째 내전이 이어지고 있는 곳. 이곳의 소녀 디나는 부모가 처참하게 학살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디나를 구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나섰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北 여자축구팀 한국 방문 승인

    北 여자축구팀 한국 방문 승인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 36명이 오는 20~28일 서울에서 열리는 ‘2013동아시아연맹(EAFF) 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8일 한국을 방문한다. 통일부는 5일 동아시안컵에 참가하는 북한 여자팀의 한국 방문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 대한축구협회가 북한팀 여자선수 21명과 임원 15명의 한국 방문을 승인해 달라며 통일부에 신청한 데 따른 것이다. 북한 여자팀은 18일 베이징~인천 간 항공편으로 입국해 21일 한국, 25일 일본, 27일 중국과 각각 경기를 한 뒤 28일 출국할 예정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응원단 41명도 북한 여자팀 응원을 위해 입국할 예정이다. 동아시안컵은 한국·북한·중국·일본·호주 등 11개국이 참가하는 국제대회로, 2~3년을 주기로 개최되고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예선을 통과한 한국·북한·중국·일본·호주 등이 참가한다. 한편 정부는 지난 3일 오전 동해상에서 조난당한 뒤 구조된 북한 주민 3명을 이날 오후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인계했다고 밝혔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민단 상공인들, 한인사회 주도권 다툼… 한인회는 신·구 집행부 알력

    [주말 인사이드] 민단 상공인들, 한인사회 주도권 다툼… 한인회는 신·구 집행부 알력

    일본 내 60만 한국인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인 단체 내 세력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등 내홍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두 개의 거대 한국인 단체가 있다. 1946년에 결성된 재일동포의 대표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재일민단·단장 오공태)과 2001년 5월 만들어진 ‘재일본 한국인연합회(한인회)’다. 민단은 1945년 해방 직후 좌우익의 대립이 본격화 된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맞서며 일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정통 단체로 자리매김해왔다. 민단은 도쿄의 중앙본부 산하에 48개의 지방본부와 30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재일교포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매진했다. 재일동포 32만명이 소속돼 있다. 여기에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뉴 커머’(New Comer)들도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며 재일동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본 유학파와 한국기업의 일본주재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다. 새 터전을 찾아온 만큼 무역·정보통신·경영투자 등 직업군도 다양하다. 16만명 정도를 뉴커머로 분류한다. 이들 중 한인회 소속 회원은 8000명 정도 인것으로 알려졌다. 민단내 분열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단내 재일한국상공회의소(이하 한상련) 선거에서 레저업 등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가 최종태 후보와 파친코 회사인 ‘마루한’ 회장 한창우 고문계의 후보가 대립했다. 최 회장이 가까스로 당선된 뒤 한 고문을 해임했으며 한창우계가 장악했던 3개 지방한상(후쿠우카, 지바, 도치기현)을 한상련에서 축출했다. 그러자 한 고문계는 세계한국인상공인총연합회(세총)를 결성, 최 회장과 맞섰다. 민단 지도부엔 한 고문측인 세총계 인사들이 포진, 최 회장과 반목을 거듭했다. 급기야 최 회장은 한상련을 민단에서 따로 떼낼 수 있는 사단법인화를 주장하고 2011년 5월 총회에서 사단법인화 추진을 결의했다. 결국 최 회장은 같은 해 11월 경제산업성으로부터 일반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12월 한상련이 민단 중앙본부의 산하단체에서 이탈하는 독립을 선언했다. 최 회장측은 “한상련이 민단 산하단체로 남는 것은 일본 상공회의소법에 저촉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후 민단과 한상련 측은 주일 한국대사관의 중재로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됐다. 그러자 신각수 당시 대사 등이 나서 한상련을 민단의 직할단체라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민단은 한상련 사무실을 접수하는 한편 문서를 압수하고 신임 회장에 홍채식 전 회장을 선출했다. 민단 측은 또 최 회장을 비롯해 박충홍 회장 등 측근 4명을 제명조치했다. 그러자 최 회장 측은 민단을 상대로 한상련 명칭사용 중지, 건물명도 청구, 제명무효 청구, 손해배상 등 7개 본안소송을 일본 법원에 제기하고, 일본 경시청에 형사고소하는 등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결국 한상련은 최 회장 측의 ‘구 한상련’과 민단 산하단체인 ‘신 한상련’으로 갈려 도저히 접점이 없을 듯한 대립을 지속 중이다. 조직이 양분된 상태여서 서로 한상련 명칭을 쓰고 있어 양측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이다. 한상련 지방조직도 분열됐다. 22개 지방 조직 중 17개는 민단과 함께하기로 결의했고, 효고 상공회는 최 회장을 지지했다. 교토 상공회는 해산을 결정했고, 기후, 와카야마, 군마현 상공회등은 휴회 중이다. 오공태 민단 중앙단장은 한상련 문제와 관련해 “재일 한국인 사회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일본 사법부와 경찰을 끌어들이는 행위는 선배들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최 회장 측을 비난하면서 “재판이 아닌 대화로써 서로 상의하며 문제를 해결하자”고 말했다. 민단 측에 의해 새로 선임된 홍채식 신 한상련 회장도 “구 한상련의 결정과 행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차원에서 이뤄지는 결정과 행위”라며 “구 한상련은 재일한상의 50년 역사를 계승하는 단체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반면 최종태씨 측은 “재일동포가 일본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안정된 사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법과 도리를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며 “최근 도쿄고등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한상련의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뉴 커머들이 조직한 한인회도 최근 분규에 휩싸여 있다. 한인회는 2001년 창립한 뒤 10년동안 별다른 문제 없이 원활하게 운영됐다. 하지만 2010년쯤부터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우리 정부가 민단에 지급하는 지원금 중 일부인 400만엔을 매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회장을 차지하기 위한 선거전이 치열해졌다. 여기에다 지난해 3월 신주쿠 발전위원회 독립을 놓고 신구 집행부가 대립했다. 한인타운으로 불리는 신주쿠구 신오쿠보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아 2008년 신주쿠 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가 한인회 소속이다 보니 음식업협회, 농식품유통연합회, 신주쿠 민단, 한인무역협회 등이 모여 독립 방안을 논의했다. 5대 박재세 회장이 중심이 돼 신주쿠 발전위원회를 한인회에서 독립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3~4대 한인회 회장을 지낸 조옥제 고문이 반대하고 나서 백지화되자 회원들 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지난해 6대 백영선 회장이 이끄는 집행부는 구 집행부와의 다툼 끝에 회장직을 그만둬 조 고문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한인회 한 관계자는 “한인회에 비대위가 구성돼 있다고 하지만 누가 비대위원인지도 모를 정도로 외면을 받고 있다.”며 대표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 비대위원장은 “백 전임회장이 사임한 것은 건강상의 이유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백 회장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해 할 수 없이 맡았지만 후임 지도부를 선출한 뒤 바로 그만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대위는 오는 8일과 9일 차기 회장 선거 공고를 내는 등 새 집행부 구성을 서둘러 마친다는 입장이다. 한인단체의 잇따른 내분으로 주일본 한국대사관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이병기 신임대사가 지난달 부임한 상황이라 한인 사회의 내분을 봉합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고심 중이다. 5일 신오쿠보에서 한인 간담회를 연 데 이어 오는 18일에는 주일 지역 공관장 회의를 열어 재일 한인사회 통합을 위한 해법을 찾는 의견수렴에 나설 계획이다. 하지만 한인 단체 회원들 간 내부갈등이 워낙 뿌리가 깊어 좀처럼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에서 사업체를 운영중인 김모(38)씨는 “민단이 우리에게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고 한인회 역시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기는 아직 한참 멀었다.”며 재일 한인 단체의 현주소를 지적했다. 그는 이어 “솔직히 신세대 뉴커머들은 일본에서 정착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들어 한인 단체 내분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면서도 “한인 사회 분규가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질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北, 케네스 배 수감생활 이례적 공개

    ‘반공화국 적대 범죄’ 혐의로 북한의 특별교화소(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씨의 생활이 일부 공개됐다. 북한 입장을 대변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서다. 조선신보는 3일 “배준호는 오전 6시에 기상해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노동하고 있다”면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현지에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일 경우, 미 국적자가 북한의 교화소에서 실제로 수감생활을 하는 것은 배씨가 처음이다. 북한이 배씨의 수감생활을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미 정부를 압박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이날 함께 공개된 사진 속에서 왼쪽 가슴에 ‘103’이라는 숫자가 적힌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배씨는 지난 5월 14일 교화소에 입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신보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 국교가 없는 조건에서 스웨덴 대사관이 대신해 배준호를 1차례 면회했다”면서 “배준호는 구속된 이후 전화통화, 편지, 면회 등을 통해 거듭 자신이 풀려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소개했다. 배씨는 “원래 당뇨병, 고지혈증, 지방간, 동맥경화 증상이 있고 10여년 전에 허리를 다쳤는데 통증이 재발됐다”면서 “공화국 정부에서 선처해 주시고 미 정부도 더 노력해 주셔서 조속한 시일 내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북한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던 배씨는 지난해 11월 북한에 들어갔다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꽃제비’(유랑 고아)를 촬영했다는 이유로 억류됐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풍경1> 흐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고갯길·골목길들 육조대로·운종가 조선시대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길 현대를 도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만약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는 인간의 걸작품이다. 사대문 안 ‘원(原)서울’은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만든 무위(無爲)의 도시 같다. 풍수지리와 도교 사상이 저변에 깔렸다. 도성 앞뒤에 산이 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지형이다. 모든 인공건조물은 구릉과 물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갯길과 골목길이 자연 생성됐다. 서울 지명에 황토마루(세종로 사거리), 구리개(을지로입구), 운현(운현궁), 진고개(충무로), 박석고개(명륜동), 배고개(종로4가), 맹현(삼청동), 안현(안국동), 야주개(당주동), 무학재 등 고개(현)가 유독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종로가 생성됐고,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 홍제천과 정릉천을 따라 내부순환도로가 지어진 것도 물길에 순응한 결과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은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에 만들어졌다.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그렇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되 인위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크기나 위치에 따라 오솔길, 한 길, 두렁길, 골목길, 고갯길, 샛길이 됐다. 상태에 따라 흙길, 황톳길, 진창길, 박석길(포장길)이 됐으며 쓰임새에 따라 피맛길, 순라길이 됐다. 조선시대 서울의 숱한 길 중 정사(正史)에 지명이 등장하는 길은 단 두 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길은 육조대로(세종로)와 운종가(종로)뿐이다. 태조실록에 운종가라는 기록이 나오고, 인조실록과 영조 당시 승정원일기에 육조대로가 나온다. 그 밖에는 관도(官道), 어가(御街)라는 불특정 길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과천로, 시흥로, 강화로, 고양로 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간선도로명이 기록됐다. 대한제국 시기 들어 정동을 공사관거리라고 부르거나, 황토현이나 신작로라는 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풍경2> 좁고 불결, 그리고 황량 : 개항기 외국인 눈에 비친 도성 길 먼지·진흙 뒤범벅… ‘눈 돌리면 매혹적인 풍경’ 애정 어린 눈길도 개항 이후 길에 관한 기록의 칠팔 할은 소설이나 외국인의 여행기, 수기와 함께 전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트인 길, 트인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다”는 인상기를 남겼다. 당시 대표 길인 육조거리와 운종가는 폭이 각각 60m, 20m로 큰길이었다. 이 길을 본 외국인의 입이 벌어졌다. 16세기 중세 도시로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운 마치 광장 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길은 대체로 좁고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한 실학자들이 저서를 통해 도로의 확장과 정비를 지적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시중의 주민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만나면 다닐 수 없는 때도 있다”면서 가로 정비를 촉구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는 무슨 말인가. 수레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도로가 나빠서 그렇고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실학자들과 개화파 주도로 도로의 정비 개선이 실제 이뤄졌다. 외국인들은 길이 좁고,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렸다. 1883년 미국인 천문학자 로웰은 “제물포와 서울 간의 풍경은 황량하다”고 썼고, 1894년 영국인 여행가 비숍은 “네 사람의 가마꾼이 멘 가마 한 채가 지나는데도 양쪽 인가의 처마에 걸려 애를 먹기 일쑤였다”고 전했다. 1882년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는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1908년 펴낸 ‘서울견문기’에서 “당나귀, 마차, 전차 그리고 사람들이 먼지와 진흙 속에 뒤범벅되어 있다”라고 혹평했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도 “좁고 불결하며 늘 오물이 널려 있다”, 미국 해군장교 보스트윅은 “하이에나의 소굴보다 더한 지독한 악취로 진동하고 있다”고 악평했다.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특유의 풍광에 반한 외국인의 칭송도 있었다. 1892년 ‘서울풍물지’를 발간한 미국인 신학자 길모어는 “한국인들은 누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결하지 않으며 서울 근교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눈을 매혹할 전경을 발견하게 된다”고 감탄했다. 비숍도 1897년이 되자 “인구가 25만명에 이르는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이며, 이만큼 좋은 입지를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처음 한국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은 이제 거의 애정 수준의 관심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풍경3> 모든 길은 한양으로 :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 상경·낙향… ‘어떻게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광적인 인구집중 증보문헌비고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서울 밖으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주요 국도라고 보면 될 터다. 제1로는 중국 가는 길인 의주로였다.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로 이어졌다. 제4로는 남대문~한강진~판교~용인~부산의 부산 가는 길이다. 이 밖에 평해 가는 길, 고성 가는 길, 상주와 통영 가는 길, 정읍을 거쳐 제주 가는 길, 강화 가는 길 등이 있다. 고전소설 ‘이춘풍전’에는 “무악재 넘어 홍제원(홍제동)에 다다르니…”라면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춘향전’에서 “역졸을 거느리고 숭례문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 동작강 얼른 건너”라는 구절은 한강을 건너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이다. 오늘의 숭례문~이문동~청파동~노량진 구간을 이른다. 또 ‘홍길동전’에서는 “양천 강변을 지나 서울 서강으로 대령하라” 하였는데 숭례문~약현(만리동)~노고산(신촌 뒷산)~양화~서강(서강대교 북단)에 이르는 길을 이른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라고 읊은 구절은 동쪽 방면의 동대문~왕십리~살곶이다리~송파로 가는 길의 하나다. 조선시대는 한양이 곧 나라였다.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가 판쳤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향(落鄕)이라고 할 정도였다. 문외송출(門外送出)이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성문 밖으로 내쳤다. 사대부가 서울 밖에 사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유배 살던 정약용은 “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라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낼 정도였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 집중은 예고된 ‘참사’였다. <풍경4> 청계천 따라 북촌-남촌 : 계층 생활권 나뉜 이중도시 오늘날엔 한강을 경계로 강북 -강남으로… ‘스타일’ 차이 뚜렷 오늘의 서울에 강북과 강남의 문화 차이가 있듯이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북쪽 5대 궁궐 주변 일대에는 사대부 지배층과 궁 관련 아전들이 주로 살았다. 청계천 아랫동네는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와 상민들의 거처였다. 청계천 변에는 하층민과 거지들이 살았다. 엄연한 계층 차이가 존재했다. 남산 기슭의 남촌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됐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묘사된 것처럼 끼니가 없으면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고서 갓을 고쳐 쓰고 앉아 헛기침하며 글을 읽는 ‘남산골샌님’이 그들이다. 진흙탕 길에 나막신을 신어야 했기에 ‘딸깍발이’로 불렸다. 북촌과 남촌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1935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수가 서울 총인구의 30%에 육박하는 11만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인 거주 지역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남산 아래 필동, 회현동을 비롯해 후암동, 청파동 등 용산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변했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이 사는 곳으로 양극화됐다. 일본인 거주지를 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남대문통(남대문로)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전기와 전차, 상하수도가 갖춰졌다. 조선인 중심지인 종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소설가 박태원은 ‘천변풍경’에서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이어서 달리느냐. 어디 장이 선 듯도 싶지 않건만, 사람은 또 웬 사람이 그리 거리에 넘치게 들끓느냐”라고 남촌의 휘황찬란한 풍경을 비아냥댔다. 북촌과 남촌 간 민족적 갈등이 밤거리의 주먹 세계에서 격렬하게 분출된 시절도 있었다. 서울은 일찍부터 민족적·계층적으로 분리되거나, 생활권과 상권 그리고 문화가 갈리는 ‘이중도시’(Dual City)의 양상을 보였다. <풍경5> 일제의 길 확장 : 서울다움을 잃다 전차 궤도 부설 핑계로 도읍 상징 성곽 허물어 깊은 생채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시행한 길 확장이 서울의 서울다움을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인력거 및 자전거의 도입과 마차를 대체한 달구지, 자동차, 전차의 도입은 한양도읍의 상징인 성곽을 철거하는 구실이 됐다. 전차 궤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1899년부터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성곽 일부가 차례차례 헐렸다. 일제는 1907년 성곽처리위원회를 구성해 동대문 북쪽 성곽과 남대문 남쪽 성곽을 뜯어냈다. 성곽의 철거는 서울의 공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곧게 뻗은 포장도로와 전차 궤도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홍보됐다. 일제는 성곽 철거를 통해 ‘낡은 도시구조’와 ‘왕조의 잔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역사가 살아 있는 구시가지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전쟁과 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서울은 600년 된 전통 도시의 향기를 잃었다.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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