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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각사지 석탑, 10층 아닌 13층… 100년 전 日학자의 연구 오류”

    “원각사지 석탑, 10층 아닌 13층… 100년 전 日학자의 연구 오류”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원래 13층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00여년 전 일본인 학자의 잘못된 연구 결과에 따른 10층설이 비판 없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사를 연구하는 남동신 서울대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1일 공개한 학술지 ‘미술자료’ 제100호에 낸 논문에서 “현재 국가가 공인하고 있는 원각사지 석탑 10층설에는 역사적 오류가 있어 13층설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각사지 석탑은 조선 세조가 1467년 세운 12m 높이의 탑이다. 문화재청은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 구조 등이 고려시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천사지 석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남 교수는 과거 여러 기록에 원각사지 석탑이 13층으로 기술됐다는 점을 반박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19세기 전반 서양의 이방인은 이 탑을 한성의 유일한 볼거리로 여겼다”며 “언젠가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이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연산군 지시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반출 시도설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조선시대까지 13층으로 인식된 석탑이 일본 도쿄제국대 교수를 지낸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에 의해 10층으로 바뀌었다. 세키노는 한국 건축을 조사해 1904년 보고서를 펴냈는데, 원각사지 석탑에 대해 “10층으로서 삼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기에 속칭 십삼층탑파(탑)라고 함”이라고 서술했다. 남 교수는 세키노가 원각사지 석탑을 1348년 제작된 경천사지 석탑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봤다. 이후 1906년 조선에 온 일본 법관이자 수집가인 아사미 린타로가 ‘속동문선’이라는 조선 기록에서 그간 판독하지 못한 ‘대원각사비’의 ‘십유삼층’(十有三層)이라는 문구를 찾아내 원각사지 석탑이 13층임을 확인했으나 세키노는 이를 알고도 모호한 ‘다층설’을 제기했고, 일제가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활동한 세키노의 견해를 택해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게 남 교수의 주장이다.
  • 청각장애 학생의 ‘눈으로 듣는 서울의 역사’

    청각장애 학생의 ‘눈으로 듣는 서울의 역사’

    “우리가 쓴 시나리오가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질지 자신이 없었는데, 완성되고 나니 뿌듯하고 성취감을 느꼈어요.”(윤지우 국립서울농학교 고2) 청각장애 학생들이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과 유물 등을 수어로 소개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농학교는 수어 전시해설 영상 제작 프로젝트 ‘눈으로 듣는 한양’을 진행했다고 11일 밝혔다. 청각장애 학생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에 참여한 것은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시도라고 박물관 측은 전했다. ‘눈으로 듣는 한양’은 친구 사이인 두 명이 학교 역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전시를 같이 보며 대화하면서 얘기를 풀어 간다. 수어통역사 한 명이 수어로 해설하는 방식을 벗어나 청각장애인의 눈높이에 맞게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비장애인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수어와 자막, 풍부한 시각자료로 화면을 구성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더 많은 청각장애인이 서울 역사를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궁녀 눈으로 본 사랑 궁금해 더 끌렸어요”

    “궁녀 눈으로 본 사랑 궁금해 더 끌렸어요”

    정조·후궁의 애정담 그려내 마지막회 시청률 17% 기록 자기 삶 중요한 주체적 인물왕의 승은 거절한 내면 초점 “배우도 작품 해야 기량 유지‘옷소매’ 계속 걷다 받은 선물”“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질문을 뒤집은 MBC 주말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하 옷소매)에서 성덕임은 능동적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궁녀다. 배우 이세영은 그런 덕임을 섬세하게 표현해 설득력 있고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 냈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이세영은 “그동안 많은 사극이 궁녀의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더 끌렸다”고 했다. 정조 이산과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옷소매’는 5%대 시청률로 시작해 지난 1일 마지막회는 17%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했다. 2007~2008년 드라마 ‘이산’에서 다룬 적이 있는 내용이지만 궁녀의 관점에서 차별화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산(이준호)과 성덕임의 사랑을 주축으로 하면서 생각시, 나인, 제조상궁, 승은을 입은 후궁까지 다양한 궁녀의 모습을 그려 냈다. 강미강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힘없고 보잘것없는 여인의 사랑을 보여 드리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이세영은 덕임에 대해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하는 소박한 인물이지만 궁녀로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아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덕임은 권력을 쥐고 싶다거나 승은을 입고 중전까지 오르려 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중요한 인물”이라며 “조선시대 여성임에도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의빈 성씨를 재조명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조를 사랑했으나 평범한 일상을 잃은 점, 원작 소설처럼 승은을 거절한 덕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왕의 길’(1998), ‘대장금’(2003), ‘왕이 된 남자’(2019)에 이어 이번에도 사극 불패를 이어 오며 ‘사극 여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생각시로 출연했던 ‘대장금’ 속 대사를 인터뷰 도중 기억해 내기도 한 그는 “사극퀸이라는 말씀은 과찬”이라며 “‘옷소매’가 뜨거운 사랑을 받아 앞으로 사극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부담을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1997년 아역배우로 데뷔한 후 단 한 해도 쉬어 본 적 없는 그에게 원동력을 물으니 단단한 소신으로 답했다. “모든 직업군의 평범한 모든 분들이 휴일 빼고는 계속 일을 하며 사시는데, 저도 제 일이니 계속할 수 있다. 소모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평소 축구 경기를 즐겨 본다는 이세영은 “축구 경기도 계속 뛰어야 기량이 줄지 않고 기회도 있듯 배우도 끊임없이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높은 목표나 꿈도 중요하지만, 일단 꾸준히 해 나가는 모습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옷소매’도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니 얻은 선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그는 “매번 선물을 받을 순 없고 내가 열심히 해야 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새해에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 이세영 “주체적인 덕임이에게 제가 배웠죠…싱크로율은 95%”

    이세영 “주체적인 덕임이에게 제가 배웠죠…싱크로율은 95%”

    MBC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사극퀸’ 증명“덕임은 소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주체적인 의빈 성씨 재조명 의미 남달라”“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질문을 뒤집은 MBC 주말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하 옷소매)에서 성덕임은 능동적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궁녀다. 배우 이세영은 그런 덕임을 섬세하게 표현해 설득력있고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냈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이세영은 “그동안 많은 사극들이 궁녀의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더 끌렸다”고 했다. 정조 이산과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옷소매’는 5%대 시청률로 시작해 지난 1일 마지막회는 17%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했다. 2007~08년 드라마 ‘이산’에서 다룬 적이 있는 내용이지만 궁녀의 관점에서 차별화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산(이준호)과 성덕임의 사랑을 주축으로 하면서 생각시, 나인, 제조상궁, 승은을 입은 후궁까지 다양한 궁녀의 모습을 그려냈다. 강미강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힘 없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의 사랑을 보여드리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이세영은 덕임에 대해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하는 소박한 인물이지만 궁녀로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아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덕임은 권력을 쥐고 싶다거나 승은을 입고 중전까지 오르려 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중요한 인물”이라며 “조선시대 여성임에도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의빈 성씨를 재조명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조를 사랑했으나 평범한 일상을 잃은 점, 원작 소설처럼 승은을 거절한 덕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하기도 했다. 자신과 덕임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이세영은 “공통점은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고 초반부 쾌활한 덕임이와 비교한다면 싱크로율은 95%”라며 “덕임의 주체적인 모습에 나도 배우게 됐다”고 덧붙였다. ‘대장금’(2003), ‘왕이 된 남자’(2019)에 이어 이번에도 사극 불패를 이어오며 ‘사극 여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생각시로 출연했던 ‘대장금’ 속 대사를 인터뷰 도중 기억해 내기도 한 그는 “사극퀸이라는 말씀은 과찬”이라며 “‘옷소매’가 뜨거운 사랑을 받아 앞으로 사극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부담을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1997년 아역배우로 데뷔한 후 단 한 해도 쉬어본 적 없는 그에게 원동력을 물으니 단단한 소신으로 답했다. “모든 직업군에 평범한 모든 분들이 휴일 빼고는 계속 일을 하시면서 사시는데, 저도 제 일이니 계속 할 수 있다. 소모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평소 축구 경기를 즐겨 본다는 이세영은 “축구 경기도 계속 뛰어야 기량이 줄지 않고 기회도 있듯 배우도 끊임 없이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높은 목표나 꿈도 중요하지만, 일단 꾸준히 해나가는 모습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옷소매’도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니 받게 된 선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그는 “매번 선물을 받을 순 없고 내가 열심히 해야 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새해에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 직접 잠수해 ‘바닷속 문화재’ 찾아내…수중발굴 경험 연구인력 전국 9명뿐

    직접 잠수해 ‘바닷속 문화재’ 찾아내…수중발굴 경험 연구인력 전국 9명뿐

    낚시꾼들이 팽팽하게 걸린 손맛에서 희열을 느끼듯 양순석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뿌연 물속에서 손끝에 전해지는 유물을 찾는 손맛을 찾아 바다를 뒤진다. 그렇게 바닷속에서 잠자고 있던 조선 중기 개인용 화기였던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과 고려청자를 비롯한 유물 수만 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3일 인사혁신처 도움을 받아 20년째 수중문화재 발굴 한 길을 걷는 공무원을 만났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국내에서 유일한 수중문화재 발굴 기관이다. 전남 목포시는 사실 연구소를 두기에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부산, 전남 여수에서 개경이나 한양으로 갈 때는 모두 목포 앞바다를 지났다. 중국을 오가는 무역선도 목포 주변을 많이 지났다. 1975년 전남 신안군에서 이른바 ‘신안선’을 발견한 게 우리나라 수중발굴의 첫 사례였다. 당시는 문화재관리국 시절이라 문화재는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고 선체와 목재 보존을 위해 만든 목포보존처리장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뿌리가 됐다. 신안선 보존 처리가 1990년대 완료되면서 해양유물전시관으로 정식으로 새 출발한 게 1994년이었다. 전시관 소속 학예연구실로 있다가 기관 및 연구 기능을 확대하면서 2009년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수중발굴과도 그때 생겼다.” -수중문화재발굴은 언제부터 하고 있나. “목포대 환경공학과에서 보존과학을 전공했다. 석사를 마치고 우연한 계기로 1994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 뒤에 잠수도 배우고 물리탐사장비를 맡았다. 수중발굴에 참여한 건 2002년부터였다. 고고학이나 역사학 관련 공부는 일하면서 독학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발굴부터 보고서 작성까지 모든 단계가 우리 업무에 속한다.”-바닷속에서 유물을 찾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수중문화재 발굴은 장비부터 시작해 성격 자체가 육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중에선 해양물리탐사장비를 사용해 해저지형을 본다거나 해저지층을 단면으로 자르면서 탐사를 한다. 그다음에 수중문화재를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더라도 문화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잠수해서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 연구소 직원들은 모두 잠수사 자격증이 있다.”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2007~2008년 충남 태안에서 도자기 운반선 발굴할 때는 주꾸미가 건져 올린 도자기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5월에 갔는데 도자기가 많이 흩어져 있었다. 긴급발굴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바로 발굴허가를 받아 한 달가량 발굴을 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고려청자 2만 5000점에 묻혀 있던 선박까지 발굴했다. 제주 신창리 앞바다에선 13세기 남송 도자기 운반선 유물을 조사했는데 도자기 2000여점을 찾아냈다. 특히 납으로 봉한 함 안에 들어 있는 나무 인장, 그리고 인장에 묻은 인주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특히 보람 있었다.” -언젠가 거북선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진도 울돌목에서 남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있는 벽파진에서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재 목표에 비해 20%도 채 하지 못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이 골고루 나오고 있다. 아직까진 판옥선이나 거북선 유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찾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어떤 것인가. “지금도 2012년에 소소승자총통 3점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 느꼈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바닷속에선 앞이 거의 안 보이는데 제토를 하다가 손에 막대 같은 게 잡혔다. 쇠 종류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다. 물 위로 갖고 올라와서 보니 총통 종류였다. 총통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4년 전인 1588년에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했다는 명문도 나왔다.” -출장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다. “발굴뿐 아니라 신고가 들어오는 현장을 조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년에 200일 넘게 출장을 한 적도 있다. 과거엔 출장비는 적고 일은 해야 하니까 아예 현지파견근무 형식으로 근무하곤 했다. 출장수요에 출장예산을 맞추는 게 아니라 출장비 예산에 출장수요를 맞추는 식이었다. 지금은 출장비 예산이 늘어서 다행이다. 나는 행정업무도 해야 하니까 출장은 줄었지만 그래도 1년에 두세 달은 출장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직원들은 지난해에도 발굴현장에서 150일가량 출장을 했다.”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태안 해역과 울돌목 등은 발굴해야 할 수중문화재가 얼마나 많이 갯벌에 묻혀 있을지 짐작조차 안 된다. 현재까지 발굴한 난파선이 14척인데 거북선이나 판옥선이 나올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일할 사람이 부족한 게 아쉽다. 연구인력 충원과 교육프로그램 확보가 특히 시급하다. 우리나라에 수중발굴 경험과 능력 있는 연구인력이 나를 포함해서 연구사 6명, 전문임기직 3명으로 전국에 9명밖에 없다. 그나마 수중문화재 발굴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하다 보니 직원들이 새로 들어오면 선배들이 하나씩 알려 주는 식이다. 10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1년에 9건가량 신고 들어오는 걸 조사하고 정기적인 발굴도 하고 있다.”-그런 와중에 연구보고서에 논문까지 쓰려면 부담이 클 듯한데. “책임운영기관이다 보니 학예연구관들은 의무적으로 2년에 한 편은 논문을 써야 한다. 현장에서 작업하다 보면 연구논문 쓸 시간이 부족하다. 잠수 자체도 힘든데 유물 발굴해서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까지 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유물 발굴과 정리, 보고서 작성으로 1년이 다 간다. 민간 잠수사 하루 인건비가 최소 30만원은 되는데 우리는 위험수당으로 한 달에 5만원 받는 게 고작이다. 우스갯소리로 공무원 퇴직하고 민간잠수사로 아르바이트하는 게 급여가 몇 배는 더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보람과 자부심으로 일하긴 하지만 솔직히 처우 개선이 시급하다.” 
  • 정기룡 장군 일대기 정리한 책 ‘新매헌실기’ 출간

    정기룡 장군 일대기 정리한 책 ‘新매헌실기’ 출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친 경남 하동 출신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 ‘新매헌실기’가 출간됐다. 매헌(梅軒)은 정기룡 장군의 호다.하동군과 (사)충의공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는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하동군 공무원 김회룡(52)씨가 3여년 집필 작업 끝에 ‘新매헌실기’를 집대성했다고 4일 밝혔다. ‘新매헌실기’는 조선시대 개별 의병장들의 문집과 역사서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서 정기룡 장군의 생애와 주요 활동상황을 찾아내 연령별·연대별로 정리했다. 가계도, 임진왜란·정유재란 이전과 이후, 광해군시대, 1622년 사후 기록 등으로 구성돼 있고 모두 490여쪽 분량이다. 책 편저자인 김씨는 “정기룡 장군에 관한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이 한 권도 없는 점이 늘 아쉬워 직접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며 “장군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분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충의공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는 “‘매헌실기(梅軒實記)’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충의공의 전적을 찾고 연구하고 있으나 사료가 부족해 안타까웠는데 김씨가 각종 조선의 전적에서 장군의 기록을 찾아내 방대한 역작을 엮었다”면서 “이 책을 2022년 장군의 순국 400주년에 봉헌하고자 한다”고 책 출간 취지를 밝혔다. 2019년 출범한 충의공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는 하동군과 함께 탄신제 등 다양한 정기룡 장군 기념사업 및 선양사업을 한다. 책을 집필한 김씨는 지역 향토문화연구에도 매진해 그동안 ‘하동의 토속어’ 등 3권의 책을 펴냈다. 2020년 하동문화원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 신통방통 호랑이… 귀신막는 보디가드, 귀여움 뿜뿜 친구

    신통방통 호랑이… 귀신막는 보디가드, 귀여움 뿜뿜 친구

    국립고궁박물관 ‘인검’ 상설 전시청화랑 ‘호랑이의 세상 밖 외출’展2022년 임인년을 맞아 미술·문화재계에서는 호랑이의 강인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전시를 다수 선보인다. 악귀를 쫓으려고 제작한 조선시대 민화와 옛 유물부터 현대 작가들이 재해석한 호랑이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이 관객을 기다린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호랑이 기운이 깃든 칼인 ‘인검’(寅劒)을 선정하고, 상설전시장에서 공개한다고 3일 밝혔다. 인검은 십이지 중 세 번째 동물인 호랑이를 뜻하는 ‘인’ 자가 들어가는 때에 제작한 의례용 칼이다. 양기를 뜻하는 동시에 의(義)를 상징해 나쁜 기운을 막고, 한편으로는 임금과 신하의 도리를 나타낸다. 또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오래된 철을 사용하고, 특별히 선정된 장인만 제작할 수 있는 등 엄격하게 관리됐다. 인검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 네 시기에 맞춰 제작한 ‘사인검’과 세 시기를 맞춘 ‘삼인검’으로 나뉜다. 박물관이 소장한 인검 22점 중 전시실에 나온 사인검은 한쪽에 한자와 산스크리트어 주문이 새겨졌고, 반대쪽에는 북두칠성과 별자리 28개가 표시돼 있다. 하늘의 힘을 빌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은 유튜브 계정을 통해 인검 관련 영상을 공개하고, 소장품에 있는 호랑이에 착안한 그림 달력 이미지 파일도 홈페이지에서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5월 1일까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호랑이 그림 18점을 공개한다. 호랑이와 용을 함께 화폭에 담은 ‘용호도’, 호랑이와 까치를 묘사한 ‘호작도’ 등이다. 19세기 용호도를 보면 호랑이의 성난 얼굴에서 긴장감이 느껴지고,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용은 신비감을 전한다. 솔숲 사이를 지나는 호랑이 11마리를 그린 ‘월하송림호족도’,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눈이 빨간 호랑이를 나란히 배치한 ‘산신도’도 감상할 수 있다.현대적인 감성으로 호랑이의 다양한 모습을 이끌어 낸 전시도 눈길을 끈다. 서울 청담동 청화랑은 ‘호랑이의 세상 밖 외출’전을 열고 안윤모 작가의 그림을 오는 10일까지 소개한다. ‘부엉이 작가’로 유명한 작가답게 “여유와 편안함을 담아 그렸다”는 호랑이들은 무서움보다는 귀여운 모습을 가득 뽐낸다. 그림 속 호랑이는 까치와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 보름달이 있는 들판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며, 두 마리 호랑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서울 대치동 슈페리어갤러리 제1전시관에서 열리는 ‘호!호랑!호랑이!’전에서 손우정, 정해진 작가는 한층 색다른 그림을 선보인다. 손 작가의 작품 속 호랑이는 어린 시절 이별한 반려묘를 상징한다. 강인한 모습으로 환생한 호랑이는 꿈을 현실로 연결해 주는 매개로 기능하며 동화적 이미지를 보여 준다. 정 작가는 호랑이 자체보다 최근 디자인 분야에서 큰 인기를 끄는 ‘애니멀 스킨’에 주목하고, 이를 대표하는 호피 무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오는 12일까지.
  • 임인년 범 내려온다…병 몰아낸다

    임인년 범 내려온다…병 몰아낸다

    십이간지 동물 중 호랑이만큼 한국인에게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동물이 또 있을까. 1988 서울올림픽,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전 세계에 뽐낸 한국의 캐릭터는 ‘호돌이’와 ‘수호랑’이었고, 2020 도쿄올림픽 한국선수단의 캐치프레이즈는 ‘범 내려온다’였다. 대한민국 육군의 마스코트는 군모를 쓰고 있는 ‘호국이’고, 축구 국가대표팀은 상징 엠블럼을 태극 마크에서 호랑이로 바꿨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은 호랑이 중에서도 검은 호랑이의 해다. 십간 중 아홉 번째인 ‘임’이 검은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호랑(이)’이라는 용어는 범과 이리를 뜻하는 호(虎)와 랑(狼)에서 비롯했다. 원래 무서운 동물을 의미했지만, 후대로 가면서 범이라는 특정 동물을 일컫는 단어로 굳어졌다. 범은 호랑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전 세계에서 호랑이는 아시아 대륙에만 분포해 있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10만년 이상 사람과 함께 살아왔다. 충북 청주 두루봉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호랑이 뼈는 12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호랑이는 오랫동안 한민족과 함께했지만,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포호정책과 일제강점기 해수구제정책 등 맹수 사냥의 여파로 20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호랑이가 잡힌 것은 1940년대다. 북한에서는 1987년 자강도에서 수컷 호랑이가 포획됐다. 수천년간 호랑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우선 사람을 해치는 파괴력에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꼈다.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 것, 즉 호환(虎患)을 역병 못지않은 재앙으로 여겼을 정도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힘과 용맹함을 사랑하고 부러워했다. 때문에 호랑이는 영험한 동물로 대접받았고, 산신령이나 산군으로도 여겨졌다. 선조들은 호랑이가 많이 나오는 지역 또는 호랑이의 형상을 한 지역을 일컬어 범골 마을, 복호봉, 범바위 등으로 불렀다. 여기서 호랑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을 대변해 징벌받는다는 의미일 때도 있고, 반대로 신성성이 강조돼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는 의미일 때도 있다.그만큼 우리 문화에서도 익숙하고 관련이 깊다. 고조선 단군신화에서 환웅의 배필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곰이었지만, 전통 풍습과 민속에서는 호랑이가 훨씬 많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그림이나 부적 등에 새겨져 나쁜 기운을 막는 벽사의 수단으로 쓰였다. 새해 첫날 호랑이 그림을 그려 붙이는 세화(歲), 단오에 쑥으로 호랑이 형상을 만드는 애호(艾虎) 등은 모두 범의 용맹함에 기대 불운을 막으려 했던 조상들의 풍습이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범굿’을 지내기도 했다. 전통문학이나 설화 등에서도 호랑이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구비문학 자료를 모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십이지와 관련한 설화 1283건 중 호랑이와 관련된 게 501건으로 약 40%에 달한다. ‘호랑이와 곶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팥죽할멈과 호랑이’ 등 제목만 들어도 낯익은 각종 전래동화에서 복합적인 모습으로 읽혔다. 설화 속 호랑이는 때로 인간과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소통하고 선한 사람의 은혜를 갚지만, 때로는 포악하고 어리석으며 우스꽝스럽다. 호랑이를 둘러싼 각종 단어, 속담, 고사성어도 여럿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현재까지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많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임인년 호랑이띠 해를 맞이해 3월 1일까지 ‘호랑이 나라’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에서는 과거 혼례 때 신부의 가마에 덮곤 했던 호피 모양 천, 상여 장식에 조각한 호랑이 모양 인형 등 각종 전시품을 선보인다. 호랑이의 민족답게 고위 관리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호랑이를 큰 상징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시대 대표 공용 해시계 ‘앙부일구’ 보물 된다

    조선시대 대표 공용 해시계 ‘앙부일구’ 보물 된다

    조선시대 대표 공용 해시계였던 ‘앙부일구’(仰釜日晷) 3점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미국 경매에서 구매해 들여온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을 비롯해 국립경주박물관, 성신여대박물관에 있는 앙부일구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앙부일구’는 솥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당시 천문사상이 담긴 과학문화재로 ‘앙부일영’(仰釜日影)으로도 불린다. 세종 16년(1434) 장영실, 이천, 이순지 등이 왕명에 따라 제작해 종로에 있던 다리인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길 옆에 둔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직제학 김돈의 설명이 있다.조선시대 전기 앙부일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전하며,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유물 3점도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국립고궁박물관의 다른 앙부일구 2점은 17∼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앙부일구 3점의 겉면에 새겨진 글씨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 三十七度 三十九分 一十五秒)의 위도 값이 1713년 이후 사용됐다는 사실이 문헌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 남아 있다. 오목한 몸체를 다리 네 개가 받치고 있으며, 다리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이 표현됐다. 안쪽에는 북극으로 향한 그림자침인 영침(影針)이 달렸다. 15분 간격의 시각선과 계절과 절기를 알려주는 눈금도 있다. 세 유물은 재질이 금속이며, 형태와 제작 기법이 유사하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 출생에서 제례까지… 한국인의 과거와 현재

    출생에서 제례까지… 한국인의 과거와 현재

    조선시대와 현대 한국인의 삶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국립민속박물관은 중요한 의례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일생’을 소개한 상설전시관 제3관을 개편해 재개관했다고 29일 밝혔다. 새 전시실은 한국인의 삶을 출생, 교육, 성년식, 관직과 직업, 혼례와 가족, 놀이, 수연례(壽宴禮·60세 이후 생일과 특별한 날에 벌이는 의식), 치유, 상례, 제례 10개 주제로 꾸몄다. 전시에 나온 자료는 1160여점에 달한다. 특히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집안 사람들의 생애에 초점을 맞췄던 이전과는 달리 조선부터 현대까지 한국인의 삶이 변화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엔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삼신상에 차린 쌀과 미역으로 첫 밥국을 해 줬다면, 오늘날엔 병원 출산이 늘며 금줄도 삼신상(왼쪽)도 사라졌다. 과거엔 자수를 놓을 때 필요한 실, 헝겊 조각을 담아 두는 ‘색실첩’이 중요한 혼수물품이었다면, 현대에 와선 재봉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의복도 달라졌다. 한 세기 전 여성이 혼례를 치를 때 입은 예복인 활옷과 1998년에 제작된 웨딩드레스, 1932년과 2009년에 만든 배냇저고리도 각각 비교하며 살필 수 있다. 아이의 학문 성취와 건강을 바라며 1000명에게 한 글자씩 받아 만든 ‘천인천자문’에서는 과거 어린이들을 위한 선조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 ‘우리들은 1학년’(오른쪽), ‘국어와 산수 교과서’, ‘종합장’, ‘가방’, ‘건강기록부’ 등은 기억 속의 가까운 과거를 소환해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를 위한 태교 지침서인 ‘태교신기’, 민속학자 송석하가 수집한 탈 등도 관람객과 만난다. 퀴즈로 알아보는 폐백 상차림, 칠교와 고누 놀이, 서당 문자도 그리기 등 다양한 체험 활동도 즐길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저반사 유리, 점자 패널, 다채로운 실감형 콘텐츠 등을 활용해 흥미를 높였다”며 “시대에 따라 풍속은 변화했지만, 오래 살고 복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호랑이 ‘으르렁’에 아이 울음 뚝…일시 마비 부른 초저주파 때문

    호랑이 ‘으르렁’에 아이 울음 뚝…일시 마비 부른 초저주파 때문

    ‘흰 소’가 퇴장하고 ‘검은 호랑이’가 등장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2022년은 60갑자의 서른아홉 번째, 십이지 동물 중 세 번째인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이다. 일부에선 임인년을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부르는데 이는 십간(十干)의 아홉 번째 ‘임’(壬)이 열 번째 ‘계’(癸)와 함께 물의 기운을 상징하고 방향으로는 북쪽, 오방색 중 검은색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가 창경궁 뒤편 숲에서 새끼를 낳았다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다. 영국,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한국 공동연구팀은 “1870~1900년 조선을 여행했거나 거주했던 서구인의 책과 현장노트, 편지, 일기 등을 분석한 결과 한양 도성 안에서 표범을 직간접으로 목격했다는 기록 12건을 찾았다”는 내용의 논문을 생명과학 국제학술지 ‘최신 보전과학’ 11월호에 발표한 바 있다. 조선시대엔 ‘착호군’이라는 이름으로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일종의 특수부대까지 운영했을 정도로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해수(害獸·해로운 짐승)구제사업은 이 땅에서 호랑이 씨를 말리는 데 결정타가 됐다. 2015년 독일, 영국, 덴마크 과학자들은 호랑이 2000마리 두개골과 100마리의 호랑이 가죽 색상, 줄무늬, 생태학적 특성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 지구상에 있는 호랑이는 순다 호랑이, 대륙 호랑이 2종으로만 구분된다는 연구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에 발표했다. 그렇지만 2018년 미국 야생동물보전협회, 중국 베이징대 중심의 국제공동연구팀은 호랑이 32마리 유전체 전체를 비교분석해 호랑이 아종은 2종이 아닌 6종이라는 연구결과를 생물학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호랑이 아종을 6종으로 보고 있다. 호랑이가 몇 종인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종을 정확히 알아야 보호를 위한 효과적인 맞춤 전략을 세울 수 있다.호랑이는 사자, 표범과 함께 대표적인 고양이과 맹수이지만 옛날 이야기나 민화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해 어려서부터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다. ‘달님과 햇님’에서 호랑이는 떡을 이고 가는 엄마 앞에 나타나 으르렁대며 떡을 빼앗아 먹다가 결국 엄마까지 잡아먹고 ‘곶감과 호랑이’에서는 할머니가 계속 울어대는 아이에게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라며 달랜다. 엄마가 호랑이와 맞닥뜨렸을 때 꼼짝없이 떡을 내놓을 수밖에 없고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에 울음을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과학자들은 호랑이 울음 소리에 섞인 초저주파 때문으로 보고 있다. 소리에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를 가진 것이 있는가 하면 파장이 너무 길거나 짧아 들을 수 없는 소리도 있다. 가청 주파수는 20~2만㎐(헤르츠)이고 2만㎐가 넘는 소리는 초음파, 20㎐ 미만은 초저주파이다. 초저주파를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동물들도 있지만, 호랑이는 초저주파로 먹잇감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호랑이는 가청주파수의 포효를 내기도 하지만 들을 수 없는 초저주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호랑이가 내는 17~18㎐의 초저주파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실험을 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으스스한 느낌’을 받고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초저주파가 신경을 자극해 일시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조선시대와 현대를 비교해 본다…전시 ‘한국인의 일생’

    조선시대와 현대를 비교해 본다…전시 ‘한국인의 일생’

    조선시대 사람들과 현대인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인의 일생’을 소개한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관 제3관이 개편 작업을 마치고 재개관했다. 29일 박물관 측에 따르면 새 전시실은 한국인의 삶을 출생, 교육, 성년식, 관직과 직업, 혼례와 가족, 놀이, 수연례(壽宴禮·60세 이후 생일과 특별한 날에 벌이는 의식), 치유, 상례, 제례 등 10개 주제로 꾸몄다. 또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집안 사람들의 생애에 초점을 맞췄던 이전 전시와 달리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인의 삶이 변화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1160여 점의 자료를 소개한다. 아이의 학문 성취와 건강을 바라며 1000명에게 한 글자씩 받아 만든 ‘천인천자문’과 현대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 ‘우리들은 1학년’을 볼 수 있다.한 세기 전 여성이 혼례를 치를 때 입은 예복인 활옷과 1998년에 제작된 웨딩드레스, 1932년과 2009년에 만든 배냇저고리 등 시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실과 헝겊 조각을 보관하는 색실첩, 아버지를 위한 태교 지침서인 ‘태교신기’, 민속학자 송석하가 수집한 탈 등도 관람객과 만난다. 전시실에는 국립민속박물관 연구 성과물을 검색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2017∼2018년에 박물관이 모은 의례 관련 영상도 일부 공개됐다. 다양한 체험 활동도 즐길 수 있도록 퀴즈로 알아보는 폐백 상차림, 칠교와 고누 놀이, 서당 문자도(文字圖) 그리기 등도 준비돼 있다. 
  • 동대문, 주민 주도형 지역균형 뉴딜 우수사업 선정

    서울 동대문구가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하는 주민 주도형 지역균형 뉴딜 우수사업에 최종 선정돼 국비 1억 5000만원을 확보했다고 28일 밝혔다. 주민 주도형 지역균형 뉴딜 사업은 지자체가 지역 특성에 맞는 뉴딜 사업을 기획·발굴하고 지자체에 재정 지원을 하기 위해 올해 처음 추진됐다. 동대문구는 약재 전통시장인 서울약령시장에 스마트 기술을 접목한 ‘박물관과 함께하는 AR기억여행과 메타버스 약령시장 구축’ 사업을 신청했다. 해당 사업은 서류 심사 및 컨설팅, 발표 평가를 거쳐 우수 사업으로 최종 선정됐다. 구는 확보한 국비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사업은 ▲조선시대 빈민구제 구휼기관인 보제원의 역사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한 박물관 실감 콘텐츠(AR) 개발 ▲서울약령시장의 형성 과정을 보여 주는 AR 기억여행 ▲메타버스 약령시장 제작 등 3개의 테마로 구현할 계획이다. 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약재 전통시장에 조선, 근대, 현대를 잇는 한방 의료와 발전상을 역사 문화 스토리로 구현하고, 서울한방진흥센터(서울약령시한의약 박물관)와 연계해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전통시장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이수정 “남편에 사과한 김건희… 진정성·용기 보여줘”

    이수정 “남편에 사과한 김건희… 진정성·용기 보여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허위 경력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과 관련, 이수정 공동선대위원장이 ‘국민이 아닌 남편에 대한 사과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감성적인 사과문이 진정성과 용기를 보여줬다”라고 두둔했다. 이수정 위원장은 이전에도 ‘쥴리설’ 등 김건희씨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 “여성들에게 가혹한 것 아닌가”라며 “국모를 뽑는 게 아니며, 조선시대도 아니고 국모란 용어도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반박한 바 있다. 허위 이력과 관련해서는 “이게 대학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 윤석열 앞에 저의 허물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김건희씨는 26일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이 있었다”리며 “저 때문에 남편이 비난 받는 현실에 너무 가슴이 무너진다. 과거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김건희씨는 “많이 부족했다. 남은 선거 기간 동안 조용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 부디 노여움을 걷어 달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남편을 처음 만난 날, 검사라고 하기에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녀도 자신감 넘치고, 호탕했고, 후배들에게 마음껏 베풀 줄 아는 그런 남자였다”라며 “제가 없어져야 남편이 남편답게 평가받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저는 남편에 비해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 윤석열 앞에 제 허물은 너무 부끄럽다”라며 사과문 대부분에서 남편을 향한 미안함을 전했다. 사과문을 읽고 나가는 김건희씨에게 기자들은 “허위 경력 의혹에 대해서는 다 인정하시는 건가요”라며 질문을 했지만, 김 씨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김건희, 남편에 대해 사과할 수 밖에” 이수정 위원장은 2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유산 얘기는 굉장히 프라이버시한 내용이기 때문에 직접 쓴 사과문으로 보이고, 눈물이 쏟아질 만한 대목이 많았던 걸로 보인다”라며 “결혼 전 이야기다 보니까 사과의 대상이 남편일 수 밖에 없는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남편 사과는 집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사과문에는 감성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상당히 진정성 있는 사과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 선 것은 굉장히 용기를 낸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회견이 끝나고 질문을 받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는 “언론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분이고, 캠프 내의 전략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이수정 위원장은 “쥴리설은 말도 안되는 음란 판타지”라며 “우리나라의 국내 수준을 정말 땅 바닥에 떨어뜨린, 특히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공적인 존재로 나설 때마다 음란한 이런 내용들로 제발 좀 음해하지 마시라”며 “김건희씨가 선거 기간에 나서지 않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고 밝혔다.부풀렸지만 허위는 아니라는 김건희 김건희씨는 지난 26일 “잘 보이려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이 있었다”며 포괄적으로 사과하면서도 구체적인 의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측은 김씨가 경력을 돋보이게 하려 하거나 오류를 기재한 적은 있지만 ‘허위’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은 김씨의 회견을 “신파 코미디”라고 평가절하했다. 국민의힘 선대위는 수원여대 강사 지원서의 ‘㈔한국게임산업협회 기획팀 기획이사’ 허위 경력 의혹에 대해 선대위는 “무보수 비상근직으로 상시적인 활동이 없었음에도, 그럴듯한 경력처럼 기재한 것은 잘못”이라며 “경력을 돋보이고자 했던 마음이 컸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어 구체적 활동 내역과 기간에 대해서는 “20여년이 지나 증빙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수원여대·안양대 이력서에 기재된 ‘대한민국애니메이션대상’ 수상 경력에 대해서는 “데이터베이스 ‘아라리스’에 ‘김명신’(김씨의 개명 전 이름) 기획으로 참여한 기록이 확인된다”며 증빙 자료를 첨부했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대상’ 수상 경력에 대해서는 단체 수상임을 명기했어야 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2004년 서일대, 2007년 수원여대, 2013년 안양대에 제출한 자료에 자신이 근무한 영락여상을 영락고로 기재한 것과 관련해선 “영락고와 영락여상이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2001년 학교 통폐합 및 교명 변경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변경된 교명을 혼동했다”고 했다. ‘서울대 경영대 경영대학원 석사’를 ‘서울대 경영학과 석사’로 쓴 데 대해선 “일반대학원으로 오인할 수 있는 표기를 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송구하다”고 했다. 각종 이력서에 기재된 뉴욕대 연수 경력 허위 의혹에 대해서는 “당시 서울대 GLA(Global Leader Association) 6개월 과정을 다녔고, 그 안에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포함됐다”고 선대위는 반박했다. 삼성미술관 전시 논란에는 삼성플라자 갤러리를 ‘삼성미술관’으로 썼다는 등 관련 내용을 제대로 기재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선대위는 김씨가 과거 유흥접객원으로 종사했다는 이른바 ‘쥴리 의혹’을 제기한 여권 성향 유튜브 열린공감TV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주장에 대해서는 “객관적 사실과 완전히 배치되는 터무니없는 허위 선동으로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일부 의혹에 대한 설명은 누락됐다. 이날 김씨가 서울대 GLA 과정에 지원하며 에이치컬쳐테크놀러지의 ‘기획이사’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직위는 ‘감사’였다는 민주당의 추가 의혹 제기에 대한 해명 등은 빠졌다. 여권은 김씨 발언이 상당 부분 감정에 호소했을 뿐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민주당 김용민 최고위원은 “사과가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민석 의원은 “사과를 빙자한 가정사 하소연, ‘신파 코미디 같은 황당 회견’”이라고 맹폭했다.
  • 새해 2월 전라도 관찰사 밥상 맛볼 수 있다

    새해 2월 전라도 관찰사 밥상 맛볼 수 있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인 전북 전주시가 내년 2월부터 조선시대 전라도 관찰사 밥상을 일반에 선보이기로 해 미식가들의 관심이 높다. 전주시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관찰사 밥상을 ‘맛의 고장’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전주시는 이달 중에 관찰사 밥상을 판매하는 음식점 2곳을 선정해 업주와 종업원들에게 전라감영 음식, 문화, 역사, 조리법 등을 교육한 뒤 새해 일반에 정식 판매할 계획이다. 관찰사 밥상은 정식상(9첩 반상), 간소상(5첩 반상), 국밥 2종(소고기뭇국, 피문어탕국) 등 3종이다. 전주시는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했던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였던 조지 클레이튼 포크의 일기장, 전라감사 서유구가 기록한 완영일록, 유희춘의 미암일기 등을 토대로 조선시대 전라도 식재료와 조리법을 연구해 관찰사 밥상을 재현했다.관찰사 밥상에 오른 기본 음식은 쌀밥, 고깃국, 김치(생강뿌리를 넣은 김치, 배추김치, 물김치), 장류(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찌개(생선조치, 조기찌개), 닭찜, 소고기전골 등이 선정됐다. 반찬은 무생채, 미나리나물, 숭어구이, 생치조림, 양하전, 죽순해, 소고기자반, 새우젓, 어채 등이 이름을 올렸다. 전라 관찰사 밥상은 현재의 전주 한정식의 원형이 됐고 음식문화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새해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다. 호랑이 중에서도 검은 호랑이다. 하필 검은 호랑이인가. 우주 만물은 오행, 즉 목·화·토·금·수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음양을 합치면 10이 되는데 이게 바로 10간이다. 십간은 각기 특정한 색과 방향, 시간을 상징한다. 갑·을은 청색, 병·정은 적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이다. 임은 검은색이고, 해를 나타내는 ‘년’의 인이 호랑이이기 때문에 새해를 검은 호랑이라고 칭한 것이다. 임인년은 하늘과 줄기를 상징하는 천간 임(壬)과 땅과 가지를 상징하는 지지 인(寅)을 짜 맞춘 것이다. 임은 맡은 바를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만물이 싹을 틔우는 모양새다. 호랑이 인은 펼쳐 자라나는 것을 이른 연(演)으로, 만물이 자신을 드러내 처음으로 땅 위로 솟아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시간도 여명을 알리는 새벽 3시부터 5시로 하고, 계절도 봄이다. 한마디로 임인년은 만물이 음기 속에서 양기를 받아 호랑이처럼 힘을 펼치는 해라 하겠다. 호랑이의 호(虎)는 호(?ㆍ호랑이 가죽)와 인(?ㆍ사람의 발 모양)이 합쳐진 글자다. 중국의 용, 이집트의 사자처럼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부귀와 권위의 상징이요, 잡귀와 부정을 막는 수호신으로, 해학적이며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동물이다. 때론 시집가는 새색시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호피)을 덮어 부정과 잡귀를 막고, 부녀자들은 액을 막기 위해 호랑이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차고 다녔다. 조선시대에는 무관의 관복 앞뒤에 단 흉배에도 늠름한 호랑이를 수놓아 부귀와 권세를 상징했다. 심지어 밥상 다리를 호랑이 다리 모양으로 만들어 호족반이라 했다. 새해 첫 달 정월에는 문배라 하여 호랑이 그림이나 ‘虎’ 자를 대문에 붙여 부정과 잡귀를 막았다. 흔히 띠를 속상 또는 생초라 하는데, 상이란 면상으로 얼굴을 뜻한다. 한마디로 자아의 내면세계를 열두 동물의 얼굴로 대변한 것이 십이지다. 그래서 띠는 사람의 심장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 생각해 그해의 동물 이미지가 심성에 투영돼 성향이나 운명이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호랑이해에 태어나면 범처럼 용맹하고 날쌔게 될 것처럼 말이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토정비결과 사주를 보고, 혼인을 앞둔 신랑신부는 슬며시 궁합도 본다. 호랑이띠는 개띠와 말띠와 서로 좋고, 닭띠와는 상극이다. 호랑이의 포효와 개의 쇳소리, 말의 울음소리는 서로 화합한다. 반대로 호랑이는 닭 우는 소리를 싫어하고, 주둥이가 짧은 것을 싫어한다. 또한 방위로 볼 때 닭은 서방이고, 서방은 흰색이기 때문에 호랑이는 흰색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닭이 홰를 세 번 치고 꼬리를 흔들면 사냥하는 것도 멈추고 동굴로 들어간다. 호랑이가 양에 속하는 동물임에도 주로 밤에 사냥하는 야행성인 것도 같은 연유다. 새해 태어나는 아이는 기왕이면 낮보다는 밤에, 그것도 한밤중에 태어나면 더욱 좋다. 한때 공자가 제자들과 여행하는 도중 무덤 앞에서 구슬피 우는 아낙을 보고 제자 자공에게 사연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 부인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해 슬픔을 가눌 수 없는데, 이번에는 자식마저 호랑이에게 잡혀 먹게 됐다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그럼 왜 이 땅을 떠나지 않는가. 호랑이가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부인은 “이 땅에는 가혹한 정치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법이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누구보다도 위정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 북한산 인수봉 고려 유적 발견…석축·기와·도자기 파편 쏟아져

    북한산 인수봉 고려 유적 발견…석축·기와·도자기 파편 쏟아져

    국립공원공단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는 북한산 인수봉 근처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흔적을 확인하고 다양한 유물을 찾아냈다고 26일 밝혔다. 백두문화재연구원이 지난해 석불입상이 발견된 인수봉 인근 50만㎡ 면적을 조사한 결과 백운대피소(옛 백운산장) 근처와 인수봉 동쪽 암벽 아래쪽에서 오래된 건물 흔적인 상단 길이 6m·높이 2m, 하단 길이 9m·높이 1.5m의 석축(石築·사진)이 발견됐다. 또 대피소 주변에서는 연꽃무늬가 있는 원형 주좌(柱座·기둥 받침)와 건물 받침돌, 탑과 불상 등의 기단석으로 짐작되는 석재, 잘 다듬은 장대석, 기와·도자기 조각이 나왔다. 인수봉 동쪽 하단부 골짜기에서도 길이 5m·높이 3.6m의 또 다른 석축이 발견됐다. 조사단은 “인수봉 근처에 고려시대 불교 관련 시설이 여러 곳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선시대에는 빈번한 자연 재해와 북한산성 축조에 따라 폐사됐다가 근대 이후 종교 활동이 재개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려 도읍지인 개성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북한산 서쪽과 남쪽뿐 아니라 북쪽과 동쪽에도 사찰 흔적이 드러났다”면서 “북한산 전체가 고려시대 불교 성지이자 수행처였던 듯하다”고 주장했다.  
  • [포토] “조선시대 감옥 구조, 옥문 나서면 관리 집무실”

    [포토] “조선시대 감옥 구조, 옥문 나서면 관리 집무실”

    조선시대 감옥은 유일한 출입구를 지나면 바로 옥을 감시하는 벼슬아치인 옥리(獄吏) 집무실이 있어서 감옥을 드나들려면 반드시 옥리를 지나쳐야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또 감옥을 에워싼 둥그런 형태의 담장은 높이가 3m에 이르고 기와를 올렸으며, 동쪽에 남성 옥사를 두고 서쪽에는 여성 옥사를 배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경주옥·포항 연일옥 발굴조사 결과와 공주옥 관련 사료 등을 분석해 이 같은 조선시대 옥의 구조를 처음으로 파악했다고 26일 밝혔다. 이 소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문화재’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2003∼2004년 발굴조사가 이뤄진 포항시 남구 남성리 일대 연일읍성 유적의 한 시설물 터에 주목했다. 이 시설물은 반원형 담장 안에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있고, 담 바깥쪽에 또 다른 건물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담과 인접한 외부 건물은 기단의 한 변 길이가 8.2m인 정사각형이며,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으로 조사됐다. 칸은 전통 건축물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을 뜻한다. 이 소장은 지금까지 성격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설물 터는 조선시대 감옥의 흔적이며, 담과 맞닿은 외부 건물터는 옥리 집무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옥사 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대기하는 공간이 있고, 옥리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구들장 깔린 온돌방과 사무를 보던 곳으로 짐작되는 마루도 있었다”며 “남성리 연일읍성은 1421년부터 1743년까지 300년 넘게 사용됐다는 점에서 이 옥리 공간은 조선시대 감옥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어 “옥에서 나오는 문은 길이 2.68m·폭 1.7∼2.0m이며, 높이는 성인이 머리나 허리를 숙여야 하는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9세기 말 풍속화에는 수감자가 옥문에 뚫린 동그란 구멍으로 면회 온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묘사됐다.하지만 오늘날 복원된 읍성 감옥은 이러한 옥리 집무실 없이 담 안에 건물 두 채만 지어 놓은 곳이 대부분이라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연일옥 담장 내부에서 동쪽 건물은 남성 옥사이고, 서쪽 건물은 여성 옥사라고 봤다. 기단부 길이는 동쪽 건물이 8.5m, 서쪽 건물은 6.7m로 전자가 더 길었다. 전체 면적도 남성을 가두는 동쪽 건물이 넓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원형 담 안에 건물을 나란히 세운 구조는 경주옥에서도 확인됐다. 경주옥 유적은 1997년 옛 문화고교 부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경주옥에서는 남성 옥사 추정 건물의 기단부 길이가 10.9m이고, 여성 옥사로 보이는 건물은 7.8m였다. 두 건물 외에도 여성 옥사 북쪽에 동서 4.4m·남북 2.1m 길이의 자그마한 별도 건물이 있었다. 다만 연일옥처럼 옥리 집무실로 생각되는 건물터는 온전하게 발견되지 않았다. 이 소장은 “여성 옥사 북쪽 소형 건물은 관헌들이 수감자를 감시하는 초소이거나 중죄수를 가두는 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여성 옥사 서남쪽 바깥으로는 화장실로 추정되는 작은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 가둔 이유에 대해 “세종 때 남녀 옥사를 구분하라고 했는데, 유교적 통치 개념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며 “세종은 여름용과 겨울용 감옥, 중죄수와 경죄수 감옥도 나누도록 했으나 지방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고 짚었다. 이 소장은 “경주옥 옥사 규모는 연일옥의 두 배가량 된다”며 “지방 행정체계에 따라 옥의 규모도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고 덧붙였다. 경주옥 담에 대해서는 “30∼40㎝ 크기 돌을 너비 2.8∼2.9m로 축조했으며, 높이는 3m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경주옥과 연일옥 구조가 1914년까지 유지된 공주옥 사진과도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진을 보면 원형 담장 바깥에 초가 건물이 확인되는데, 이 건물이 바로 옥리 집무실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다. 이어 옥사와 담만 기와를 올린 이유에 대해서는 “옥사 지붕을 초가로 하면 천장을 뚫고 도망칠 우려가 있었을 것”이라며 “담장도 기와로 쌓지 않으면 무너졌을 때 죄수들이 탈출하기 쉬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소장은 “읍성을 발굴하고 정비할 때 성곽과 성문뿐만 아니라 부속 건물도 원형을 찾아내는 고증 작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책으로 보는 광화문 앞길 600년 역사… 서울역사편찬원 ‘광화문 앞길 이야기’ 발간

    책으로 보는 광화문 앞길 600년 역사… 서울역사편찬원 ‘광화문 앞길 이야기’ 발간

    서울역사편찬원이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앞길이 600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핀 ‘광화문 앞길 이야기’를 발간했다고 24일 밝혔다. 이 책은 광화문 일대 변천사를 조선시대·근대·현대로 시기를 나눠 살펴본다. 문학·영화·지도·대중가요·그림 등에 나타난 광화문 앞길의 변화상을 다룬 글도 실었다. 조선 왕조는 한양 천도 이듬해인 1395년 경복궁을 건립한 뒤 광화문 앞쪽에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이 있는 ‘관청거리’를 조성했다.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광화문통’으로 불리다 광복 직후에는 세종로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0년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가 건립되고, 그 맞은편에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쌍둥이 빌딩도 세워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현대빌딩과 교보빌딩 등 민간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고층의 민·관 건물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서울시는 작년 말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향유할 수 있도록 광화문광장을 넓히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이 광화문 일대가 시민들과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책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1층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tory.seoul.go.kr)에서 1월부터 전자책으로도 볼 수 있다.
  • [서울광장] 장릉 아파트와 시대정신/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장릉 아파트와 시대정신/서동철 논설위원

    부산 여행길에 찾았던 동래부 관아에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기관 유적으로는 흔치 않게 제법 많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내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이런저런 안내판을 모두 읽고 나니 10개가 넘는 관아 건물 가운데 조선시대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忠信堂)과 부사의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연심당(燕深堂)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래부 동헌은 부산지하철 4호선 수안역에서 내려 아직도 이름이 기억나는 ‘슬프도록아름다운의원’ 골목을 따라 동래시장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만난 망미루(望美樓)는 매우 당당했다. 관아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는 동래독진대아문(東來獨鎭大衙門)은 건물 자체의 연륜은 느껴졌지만 계단과 석축은 석물대패로 깎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망미루가 독진대아문 앞 지금의 도로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두 건물은 일제강점기 금강공원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두 건물이 뜯겨진 뒤 조선으로 몰려온 일본인들이 개발한 동래온천장으로 쫓겨나 일종의 액세서리 노릇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충신당, 연심당, 망미루, 독진대아문을 제외한 다른 건물을 모두 최근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동래부 관아는 지금도 동래시장에 둘러싸여 있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주변에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으니 아쉬우나마 이 정도 옛 모습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래부 관아는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 부사와 동래부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몰려든 왜군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버티다 몰살당한 비극이 어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니 일제의 동래부 관아 훼손은 ‘항일 역사의 무자비한 말살’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광복 이후 더 큰 역사의 말살을, 그것도 우리 손으로 전국 곳곳에서 저질렀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앞 정부서울청사가 조선시대 삼군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곳에 1967년 당시 정부종합청사 건설 공사 착공 전까지 삼군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적을 것이다. 삼군부의 중심 건물인 총무당은 일찌감치 1930년대 서울 삼선교 지금의 한성대 곁으로 옮겨졌다. 삼군부 청사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는 청헌당은 종합청사 건립과 함께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에 이건됐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에 앞선 중앙청사 앞 도로 발굴조사에서는 삼군부의 담장 석렬과 행랑 기단, 배수로가 나오기도 했다. 경기 김포 장릉의 문화재구역에서 고층 아파트를 문화재 심의도 받지 않고 지어 논란이 이어지고 있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파트 공사가 중단되자 입주 예정자들은 “장릉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헐어 내려면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정부서울청사부터 헐어 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경복궁 앞 정부청사’는 매우 상징적인 개발시대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장릉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의 항변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정부중앙청사를 지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시대정신은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문을 찾아봐도 삼군부 건물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중앙청사를 짓는 데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물론 언론 역시 역사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매우 희박했음을 깨닫게 된다. 무지(無知)의 시대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중앙청사도 조선시대 삼군부만큼이나 중요한 우리 근현대사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근현대 문화유산에 적용하는 등록문화재 제도의 기준도 50년이다. 중앙청사의 연륜은 이미 이 기준도 훌쩍 뛰어넘었다. 정부청사를 이 자리에 지은 것이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은 2021년이다. 중앙청사가 무지의 소산이라면 장릉 아파트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국민, 특히 입주 대상자를 희생의 대상으로 삼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러니 입주 예정자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아야 한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공동책임이 있는 인천시와 건설회사들이 입주 예정자들에게 더 좋은 아파트를 주는 것이다. 입주가 늦어지는 만큼 추가될 수밖에 없는 주거 비용도 당연히 부담해야 한다. 장릉 아파트 사건의 교훈은 ‘개발 과정에 문화재를 외면하면 결국 더 큰 불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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