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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현동/지명 유래:2(서울 6백년 만상:33)

    ◎어진 선비들 모여 살던곳/뚝섬/정도후 군훈련장 자리… 사냥터로 유명/임금 행차때 둑기 꽂혀 둑섬→뚝섬으로 태조 이성계가 6백년전 지금의 서울땅에 수도를 정했을때 인구는 5만여명에 불과했다. 그때만해도 장안의 곳곳마다 땅이름이 있을리 만무했다.무학대사의 꿈속에서 「십리를 가라」는 현몽을 받았다해서 「왕십리」로 붙여지는 식이었다. 80년대초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아이들이 몰려들어 물놀이를 즐겼을만큼 물맑고 모래가 유난히도 고왔던 장안 제일의 유원지 뚝섬의 땅이름 또한 그러했다.뚝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본류와 북쪽에서 흘러 한강에 합류하는 중랑천사이에 자리해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삼각주이다.땅이 평탄하면서도 기름져 풀들이 무성해 정도직후부터 말목장이 들어섰고 자연스레 군대들의 훈련장이 됐다.89년 8월까지만해도 뚝섬에서 말들이 갈기를 치켜 세운채 모랫벌을 질주하던 경마장이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 지금의 뚝섬일대에는 강가의 버드나무를 비롯,갖가지 관엽수로 우거져 산짐승들이들끓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옛 문헌들은 고려 현종때만해도 뚝섬일대 숲속에 호랑이들이 들끓었고 나라에서는 유명 장수들을 시켜 호랑이를 사냥토록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뚝섬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뚝섬은 한양을 지키는 주력부대의 훈련장이었다.역대 임금은 사냥놀이를 겸해 자주 이곳을 찾았고 그때마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둑기가 꽂혔다.임금의 둑기가 세워지고 언뜻보기에 섬 같아 「둑섬」으로 불리다 「뚝섬」으로 정해졌다. 땅이 기름져 대궐에 바쳐지는 곡물과 채소류가 재배되기도 했던 뚝섬이 오늘날의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은 1908년 최초로 이곳에 상수도 수원지가 들어서면서 부터였다.어찌된 영문인지 뚝섬은 동명으로도 채택되지 않은채 「성수1가 2동」「구의 몇동」등 멋없는 이름으로 매겨져 있지만 시민들 가슴엔 여전히 「모래곱고 물맑은 뚝섬」으로 남아 있다. 뚝섬만큼이나 옛과 지금이 크게 달라진 곳으로는 서울 중구 회현동을 빼놓을 수 없다.회현동은 말그대로 조정의 어진 선비(현)들이 많이 모여(회) 살았다해서 붙여졌다.세조와 중종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을 비롯,선조때 상당부원군 한준겸,문강공 조말생,윤시동,정여창,강세황등 웬만큼 한학에 관심이 있고 익히 아는 명유와 명현이 회현동에서 배출됐거나 살았다. 회현동에서는 이같이 올곧은 선비들이 대거 배출되자 곳곳에 얽힌 민화도 적지 않다.지금의 회현동 1가 14에 있던 정광필의 집앞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어느날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나무에도 서각대 열둘을 걸게 되리라」했다.이후 동래정씨 문중에서 실제로 정승 열둘이 배출됐다고 한다. 이같이 삼강오륜을 경전으로 삼는 사대부들이 대대로 지켜온 회현동이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한때 유흥가로 변한 것을 보면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속설이 실감난다.일본인들이 진고개,지금의 충무로를 상권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며 명동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인근의 회현동이 덤으로 「타락골」이 돼버린 것이다.
  • 국립극단 신인배우 한희정양(인터뷰)

    ◎“연기로만 승부거는 알짜배우 되고 싶어요” 『화려한 출발이 성공적인 무대생활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죠.이제 겨우 첫 걸음을 떼었을 뿐이에요.연기로써만 승부를 거는 알짜배우가 되고 싶어요』 국립극단의 정단원 선발에서 올초 50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성한 신인배우 한희정양(23).여배우 기근의 국립극단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고있는 그가 새달 2일 막을 올리는 연극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김상열 연출)에서 몸종「이쁜이」역을 맡으며 발 빠른 스타진입을 예고하고 있다. 국립극단이 우리명작 시리즈의 하나로 선보이는 「맹진사댁…」은 불구의 신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한 어여쁜 신부의 이야기를 통해 인도주의적 도덕관을 강조한 작품.특히 이번 무대는 해외공연에 대비,무대장치를 단순화·조립화시켰으며 새 얼굴 발굴에 역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원로배우 김동원씨의 은퇴무대 「이성계의 부동산」에서 눈에 띌듯 말듯 처음 얼굴을 내민 한양이 이번에 일약 주역급으로 발탁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차분한 이미지가 극중 「이쁜이」의고운 심성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 선이 분명한 이목구비에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당당한 시선이 인상적인 한양은『「국립배우」로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25시의 삶」을 살고있다』는, 요즘 젊은 세대답지 않은 매서운 일면도 갖고있다. 『실험성에 치우친 창작극이나 번역극 위주의 우리 연극계 풍토에서 토속정취 물씬한 정통 창작극으로 본격 데뷔하게 돼 연기자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배우로서 마력을 갖고 있는 메릴 스트립을 연기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그의 연기 이력은 상당히 깊다.서울 장충국민학교 3학년때 「꽃사슴 아동극단」이란 단체에서 연극에 접했고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때에는 은사인 최형인 교수의 애제자로 「한여름밤의 꿈」 「갈매기」 「세일럼의 마녀들」등 10여편의 번역극에 출연,연기에 대한 꿈과 애정을 키워왔다.『이번 작품이 우리의 전래민담에 바탕을 둔 「신고전」이니 만큼 대학 워크숍시절 영미 사실주의극에 경도됐던 저로서는 색다른 체험입니다.조선시대 여인의 어투·감정을 어떻게 연기해낼 수 있을지걱정이에요』 선한 웃음 뒤에 자신의 장단점을 꿰뚫는 냉철함을 감추고 있는 시선에서 그가 빈틈없는 연기인임을 직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 “국보급 고미술품”/신윤복화첩 되찾아왔다

    ◎동호인 모임 인우회,새달 3∼14일 덕원미술관서 전시/고려청자·「백자조문각병」 등 총 122점/문갑·책장 등 조선조 생활품도 선보여 세계 각급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점차 한국 미술품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등 해외에 유출됐던 우리의 귀중한 고 미술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자리가 동호인들의 노력으로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고 미술품 수집을 통해 결성된 40대후반의 고 미술품 동호인모임 인우회(회장 진이근)가 오는 6월3일부터 14일까지 덕원미술관(723­7771)에서 여는 「고미술정품전」이 그것으로 서화 57점,도자기 38점,민속공예품 27점이 선보인다. 전시품들은 인우회 회원들이 해외에서 수집한 귀환문화재가 대부분으로 혜원 신윤복(1768∼?)이 술을 마시고 그린 「취화첩」과 속화첩등 조선시대 회화와 고려청자·백자청화등 자기,그리고 문갑 책장등 조선시대 생활품이 다양하게 전시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미술품은 신윤복의 취화첩 6폭과 속화첩 10폭. 신윤복은 18세기 조선화단에독특한 화풍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연기를 써넣지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이번 전시에 나온 취화첩은 그림마다 시를 써놓고 곁에다 「술에취해 썼다」(취서)고 밝히고 있으며 작품에 「무진맹추」로 기록해 혜원이 54세때 그린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이와함께 속화첩 10폭도 현존하는 그의 풍속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혜원풍속도」(간송미술관 소장)보다 먼저 것으로 추정돼 주목된다. 이 속화첩가운데는 혜원풍속도와 비슷한 화풍의 것도 4폭이나 들어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보다 먼저 그린 혜원의 초기작이다. 이 속화첩에는 교미중인 개를 보고 있는 야릇한 모습의 부인과 처녀를 그린 것과 등을 든 소년을 앞세우고 세남녀가 밤 길을 가는 모습,기방에서 남녀가 얼싸안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등 에로틱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도자기는 고려시대 청자와 함께 18∼19세기의 백자청화가 주류를 이루어 청화의 원속에 점을 찍듯 그린 새와 각진 병 어깨 양쪽에 두마리의 다람쥐가 납작 엎드린 모습을 한 「백자청화원권조문각병」과 주둥이가 밖으로 휘어지면서 띠를 둘렀고 몸통에 원을 그려 그안에 매화를 간결히 처리해 여백의 공간과 원속의 매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보이는 「백자청화매화문지통」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와함께 이층 책장과 주칠용문 3층장등도 실용성과 평민적인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공예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 녹청자/고려청자의 시원 아니다

    ◎연세대 「고려·조선시대 사기그릇 특별전」서 밝혀져/귀족용 청자·서민용 녹청자 함께 제작/굽없는 납작밑바닥 형태,조선초까지 사용 고려시대 녹청자는 중국 청자의 영향을 받아 신라 질그릇과 청자 중간에 나타난 청자의 시원인가,또 당시에 이 그릇을 사용한 계층은 누구인가.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연세대박물관 주최 「고려·조선시대 사기그릇 특별전」(5월9∼6월17일)을 통해 명확히 제시되었다. 녹청자는 우선 서민들의 수요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청자와 함께 제작된 막청자라는 결론이 나왔다.이같은 사실은 연세대박물관이 특별전을 위해 녹청자를 수집하는 가운데 전국의 가마터를 조사한 결과 밝혀졌다.그러니까 고려왕실을 비롯한 귀족사회는 양질의 청자를 사용한 반면 일반계층은 조잡한 막청자에 해당하는 녹청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녹청자는 청자의 시원이 아니라는 것이다.녹청자를 같은 가마에서 청자와 함께 구어냈던 옛가마터는 전국에 널리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10세기말 고려초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기가마터는 경기도 용인군 서리,전남 해남 진산리와 함평 양재리,인천시 경서동 등에 남아있다.그리고 고려중기(1100∼1250년)의 가마터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지역에 널리 흩어졌다.특히 11세기 후반부터 해안 가마들은 녹청자 대량생산시대를 맞아 전국적으로 보편화 됐다는 것이다. 그같은 근거는 지난 84년 전남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인양된 3만6백72점에 이르는 고려 녹청자에서 찾고있다.왜냐하면 방대한 분량의 녹청자가 한꺼번에 해저에서 인양되었다는 것은 대량제작에 따른 대량수송과정에 일어난 선박침몰사고로 볼 수 있기때문이다.어두리 해저유물 녹청자는 전국 청자가마터 출토품이나 각 지역에서 수집한 녹청자처럼 그릇생김새가 다양한 것으로 가려졌다. 녹청자는 대접류와 보시기,접시,잔과 잔받침,몸통이 큰 유병과 광구병,고려의 전형적 매병,합,항아리 등이 전해지고 있다.녹청자 항아리의 경우는 고려시대 질그릇 항아리 모양을 닮았는데,인천 경서동과 전남 해남 진산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되었다.이같은 전통으로 미루어 녹청자는 토착적도자문화로 재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녹청자 그릇생김새의 특징중 하나는 굽이 없는 납작밑바닥(평저)이 많다는 점이다.납작밑바닥은 병과 항아리는 물론 접시에서도 발견된다.이는 선박 등을 이용해 그릇을 운송할때 넘어져 깨지는 것을 미리 막기위해 고안된 기형으로 풀이됐다.이번 특별전에는 납작밑바닥 녹청자가 많이 출품되어 일본학계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본학계는 지금까지 일본에 산재된 납작밑바닥 녹청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반자기성 그릇으로 해석해왔다.그러나 이번 특별전을 통해 납작밑바닥 녹청자가 한국에서 많이 수집됨으로써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녹청자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갔을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이번 전시회를 위한 가마터 조사결과 녹청자의 전통이 고려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가마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이처럼 녹청자가 15∼16세기쯤 조선시대에 분청사기와 함께 구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녹청자란 모래 따위의 잡물이 섞인 태토 위에 회유계통의 유약을 씌워 구어낸 조질의 청자.그래서 표면이 거칠고 녹갈색이나 고동색의 유색을 띠고 있다.지금까지는 중국의 청자 영향을 받아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만들어진 시원적 청자 성격의 그릇으로 보아왔다.따라서 질그릇에서 청자로 가는 중간단계쯤의 그릇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 철원 비무장지대서 통일신라산성 발견

    【춘천=정호성기자】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확실한 자모산성등 유적·유물 71점이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발견됐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3월28일부터 4월16일까지 20일동안 비무장지대일대 유적지 1백3곳에서 벌인 1차학술조사 결과 71점이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적·유물임이 확인됐다고 18일 밝혔다.
  • 어른되는 날(외언내언)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만고불변의 진리를 찾았다.『요즘 젊은이는 이해할수 없다』는 명문을 읽어낸 것이다. 이해할수 없는 젊은이들이 기성세대가 되기를 수없이 반복한 것이 인류역사건만 이 진리는 지금도 유효하다.요즘 젊은이들은 「신세대」를 넘어 「X세대」로 불리는 것이다.「X세대」의 X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라는 뜻으로 수학방정식의 X에서 유래한 것.지난해 미국의 한 광고 전문지가 특집제목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 후 한국에도 재빨리 도입됐다. 이 세대의 특징은 그 이름만큼 모호하다.구속이나 관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어디로 튈지 알수 없는 럭비공에 비유되기도 하고 컬러TV를 보며 자란 비디오 세대라 하여 「호모 비디오쿠스」로 불리기도 한다.다양성,폐쇄성,극도의 이기주의도 이들의 특성으로 꼽힌다.기성세대는 이 세대의 특징적 모습으로 무엇보다 「피터팬 증후군」「마마보이 증후군」을 찾아 내기도 한다. 어제가 「성년의 날」이었다.권리와 책임을 지닌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만 20세가 되는 이들을 축하하는 날이었다.올해 성년이 된 이들은 전체인구의 2%인 88만여명.물론 「X세대」에 속한다. 「X세대」의 「성년의 날」을 지켜본 기성세대들은 성년식의 옛풍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동서를 막론하고 옛날에는 어른으로 대접받기 위해 힘든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원시사회에서는 등짝 뚫고 새끼줄 꿰기,할례,발치,문신등 가혹한 의식이 행해졌고 조선시대만 해도 가파른 벼랑틈 뛰어 넘기,외줄 그네타기,무거운 돌 들기등을 해야만 장가 갈 자격을 얻고 품을 팔더라도 반품에서 온품을 받을수 있었다. 오늘의 성년식은 대학입시와 군복무라고도 하지만 결혼을 하고도 부모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X세대」,권리만 알고 책임을 모르는 그들이 성인답게 되려면 어떤 고행이 필요한지 부모세대가 생각해 볼 일이다.
  • 「받들어 칼」 의장대(청와대)

    「받들어 칼!」이란 독특한 의전관행이 청와대에 있다.관행이라 해봐야 역사가 3년도 안되긴 했다.그러나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외교의전인데다 양식의 독특함으로 해서 국제외교가의 화제행사가 됐다. 어느나라나 임지에 부임한 대사들은 그나라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마련이다.본국에서 받아 온 신임장을 주재국 원수에게 전달하는 행사다.대사들에게 있어 신임장 제정은 주재국에서의 첫번째 공식행사이자 그나라 원수와 대면하는 첫 기회가 되고 있다.그만큼 대사들에겐 의미있는 행사다.이 행사에서 대사들은 전통의장대를 사열하면서 「받들어 칼!」이란 경례의 특이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다. 30명의 국방부 전통의장대는 청와대 본관 현관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의 10m 거리에 양쪽으로 도열한다.조선시대의 포도청 군사복장에 왼손에 긴칼을 쥐고 있다. 신임장을 제정할 대사가 차에서 내려 현관에 들어서면 의장대장(장창구소령)의 「받들어 칼!」이란 구령이 떨어진다.의장병들은 허리를 15도쯤 구부리면서 두손으로칼을 받들어 순한국식 경의를 표시한다.「받들어 칼!」 경례를 받으면서 대사들은 온몸을 훑는 짜릿함을 맛본다고 한다. 전통의장대는 청와대를 방문하는 국빈들에게 서울이 도쿄나 워싱턴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고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청와대 앞뜰에서 열리는 국빈환영행사 때 국빈은 육·해·공군 의장대에 이어 전통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덤덤하게 「받들어 총!」 경례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국빈들도 전통의장대 앞에 이르면 묘한 긴장을 느낀다고 한다.오색찬란한 5방6정기 22기가 「받들어 칼!」 구령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국군국악대(대장 김호석소령)의 대취타조가 「무령지곡」을 연주하면 「원더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는 것이다.「무령지곡」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중한 음악.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찬가에 해당한다. 현대도시 서울만 생각하고 있던 국빈들도 「무령지곡」과 「받들어 칼!」 경례를 받고는 서울이란 도시의 역사와 한국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때의 전통의장대는 43명으로 늘어난다. 국방부에 전통의장대가 탄생한 것은 91년 9월이다.91년 6월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미국방문에서 독립전쟁 때의 군복차림으로 나온 전통의장대로부터 상당한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노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전통의장대의 구성을 지시했고 같은 해 10월 몽골대통령의 청와대 방문때 처음으로 이 의장대가 선을 보였다. 기수단의 5방6정기는 예전 왕의 행차때 사용하던 기를 고증해 재현했다.5방은 동서남북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이 그려져 있다.6정은 6명의 의로운 신하를 뜻하며 12간지중 짝수 간지의 상징동물로 그려져 있다. 전통의장대의 복장은 조선조 말기의 포도청 복제를 고증해 재현한 것이다.의장대장은 포도대장의 복장이고,의장병은 포도대장밑의 장교복장을 입는다. 요즘 사람들에겐 생소한 「받들어 칼!」 구령은 「받들어 총!」에서 따왔다.본래 조선시대에 검으로 예를 표할 때는 땅에 무릎을 꿇고 칼을 받쳐드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의장대가 무릎을 꿇기는 어려워 칼을받쳐들되 허리를 15도가량 굽히고 있다.
  • 과거재현(외언내언)

    이도령은 춘향과 애끓는 이별을 한뒤 한양으로 떠난다.마침내 과거에 장원 급제한뒤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남원땅으로 내려간다.「암행어사 출또」의 대갈일성에 탐관오리며 춘향을 사경에까지 몰아넣었던 남원부사 변학도는 응징되고 춘향은 감옥에서 풀려나 이몽용과 극적인 해후를 한다.우리민족의 대표적 고전인 「춘향전」의 클라이막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과거는 입신양명의 길이요,최고의 이상이었다.서울에서 과시가 있으면 전국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한양으로 몰려들었다.이런 선비들을 「과유」또는 「과군」이라 불렀다.이들중에는 환갑이 넘은 노인들도 섞여 있었다하니 과거에 대한 집념을 알 만하다. 급제자들에게는 임금이 친히 어사화를 내린다.어사화를 꽂고 고향으로 가는길,그것은 출세와 영달이 보장된 길이다. 과거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9년(958).조선시대에는 문·무양과와 잡과로 제도가 정비되어 시행된다.3년마다 한번씩 과거를 보는 식년시가 원칙이었으나 후대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치르게 한 증광시·별시등이 겹쳐 거의 해마다 과장이 열렸다. 인재의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는 후기에 오면서 문란해져 온갖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된다.시험장안에 책이나 문서를 들고 들어 가기도하고4,5명의 대리시험자를 데리고 들어가 그중 가장 잘된 답안지를 골라 제출하는일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커닝과 대리시험이 공공연히 자행된 과거시험은 1894년 갑오경장때 성균관의 개편과 함께 폐지된다.근대적인 관리등용법에 밀려난 것. 서울시는 정도6백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과거시험을 1백년만에 재현한다고 한다.서울시민중에서 1백명,전국향교에서 1백명의 응시생을 선발해 내달11일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서 정식으로 치러진다.임금의 행차인 어가나 급제자들의 행렬까지 재현한다고 하니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전과자(외언내언)

    얼마전 미국의 「3스트라이크 아웃법」이 화제가 됐었다.캘리포니아주정부가 야구의 「스리 스트라이크 아웃」규칙을 본떠 만든 법률이 그것.두차례이상 중죄를 저지른 범인이 또다시 중죄를 범할 경우 25년동안 집행유예를 허용하지 않고 종신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상습누범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정은 무의미하고 흉악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위해서는 「격리수용」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서 이법률이 채택됐다.전과자문제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고 경국대전은 전한다.절도를 3차례 한 자와 재범자는 모두 교수형에 처해 사회와 격리시켰던 것이다.이같이 예나 지금이나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과자들이 말썽이 되어온 것을 알 수 있다.지난 1일 발효된 「성폭력 특별법」이 성폭행 피의자를 중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도 성폭력범죄가 그만큼 많아 사회문제화돼 있기 때문이다.중형으로 다스리지 않고서는 성범죄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 전과자범죄가 해마다 급증하고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전과자대책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나 심각한 상황으로 서둘러야한다는 것이다.전국교도소의 기결수 가운데 60%가 전과자이고 누범비율은 80년 27.5%에서 90년 45.1%로 급격한 상승세다.이처럼 많은 범죄가 전과자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대책은 형벌및 보호감호처분 이외에는 뾰족한 게 없다는 데서 문제가 된다. 이래서는 안된다.우리가 미국의 「3스트라이크 아웃법」을 도입할 수 없다면 교화행정을 꾸준히 필 수 밖에 달리 방법이없다고 본다.교정분야에 집중투자가 있어야한다.교정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우선 문제다.교정전문가에 대한 처우가 좋아야하고 교정행정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야한다.또 현행 보호감호제도 운영의 개선이 있어야하겠다.수형자를 보다 세분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범법행위를 미리 막는 노력 못지않게 재발을 방지하는 전사회적인 조치가 절실한 때이다.
  • 「좋은만화 잔치」 구경 오세요/서울Y,25일부터 교보문고서 열어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를 모니터하고 있는 서울YWCA는 25일부터 5월5일까지 교보문고에서 올해의 좋은만화 잔치를 마련한다. 「어린이 날 선물은 좋은만화로 합시다」를 행사표어로 내건 이 행사는 서울Y 어린이만화 모니터회가 최근 1∼2년동안 동안 선정한 오락·학습만화 57종 1백30권을 전시 판매하는 행사로 수익금은 소년·소녀가장 돕기 기금으로 사용된다. 특히 좋은만화 잔치기간중 이달 30일과 5월1일·5일의 하오2∼4시에는 인기만화가 이향원 이희재 윤승운 이정문 김형배씨등이 현장에 나와 만화를 구입하는 어린이들에게 사인회를 가질 계획이다. 한편 서울Y 어린이만화 모니터회가 선 뵐 주요만화는 다음과 같다.심술북­작가 이정문,겨레인걸(1∼4권)­윤승운,조선시대­윤승운,두손이­이두호, 즉흥환상곡­김형배,천지­한재규,엄마는 요술쟁이­문계주,나의라임오렌지나무 1·2권­이희재,오추매의 0점일기­이진주,악동이 1∼3권­이희재,떠돌이 검둥이 1∼3권­이향원,우리선조의 참다운 삶­이두호,아버지와 아들­이숙희(번역),코망쇠형제들­오원석,돌배군1∼3권­신영식,공룡나라 우리엄마­박수동,날아다닌 바위의전설1·2권­윤승운,검정고무신­이우영,하나뿐인지구­신영식,귀여운쪼꼬미­김수정,신판오성과한음­박수동,8인작가모음집­김수정,아기공룡 둘리­김수정.
  • 조선왕조실록/콤팩트 디스크에 담는다

    ◎문체부,최근 국역 완료된 「실록」 98년까지 마무리 하기로/국역본·표점원문 살린것 두종류 간행/방대한 분량의 원본 찾기쉽게 전산화 조선왕조 실록이 읽기전용 콤팩트 디스크인 CD­ROM에 담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문화체육부는 올해부터 98년 까지 5개년 계획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민족문화추진회,서울시템과 공동으로 최근 국역이 완료된 조선왕조실록을 최첨단 과학고 접목시키는 CD­ROM간행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국역본만 담는 것과 국역본에 표점원문 까지 수록한 것 등 두가지로 진행된다.표점은 한문원문에 구두점을 찍거나 인명,지명,관직명 등 고유명사를 나타내 이해를 돕는 기호다. 국역본만을 수록하는 사업은 ▲1차로 올해말 까지 태조부터 성종까지 98책 ▲95년 연산군에서 인조까지 1백58책 ▲96년 효종부터 철종까지 1백45책등 3개년 계획으로 추진하며 97년에 전질 3매를 보급한다. 표점원문을 함께 수록하는 사업은 ▲올해 태조∼태종 3대조 ▲95년 세종∼성종 6대조 ▲96년 연산군∼선조 5대조 ▲97년광해군∼경종 6대조 ▲98년 영조∼철종 5대조 등의 순서로 5년에 걸쳐 완료한다. 수록자료에 대한 교열 및 감수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가 맡고 자료의 입력과 CD­ROM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의 제작은 서울시스템이 담당한다.원문표점 등과 같은 연구업무에는 역사학 등 관련분야 연구자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할 계획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25대 4백72년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한문원본의 경우 1천8백93책에 수록글자수가 5천3백여만자에 이른다.최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26년만에 완료한 국역본은 모두 4백13권으로 수록된 글자수는 무려 1억5천여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이 때문에 찾고자하는 자료에 대한 정확한 사전정보 없이는 자료의 조사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며 가격도 전질의 경우 4백40만원이나 돼 개인은 소장하거나 활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CD­ROM사업은 바로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서울시스템의 이웅근사장은 『치열한 국제경쟁시대에 우리 전통문화와 학문은 훌륭한 자산인데도 소수 동호인들의 기호품 정도로만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면서『이번에 국역이 완료된 조선왕조실록을 첨단산업과 접목,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사업에 참여하게돼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사장은 『방대한 분량의 실록의 국역이 활용도를 높이는 기초작업이었다면 이번 CD­ROM사업은 이를 완결짓는 작업이니만큼 모든 기술과 인력을 동원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제작 실무책임자인 이 회사 데이터 베이스실장 김현박사도 『오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젊은 한국사학자와 한학자들을 되도록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등 책을 다시 펴낸다는 각오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문화체육부는 이 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김도현차관(위원장)과 박종국세종대왕개념사업회장,이원순민족문화추진회장,이웅근서울시스템사장,김명곤교육부 대학정책실 학사심의관 등 6명으로 간행위원회를 구성,운영키로 했다.또국역본의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많아 실록의 용어를 풀어쓴 용어사전도 개발하기로 했다.
  • “21세기는 중국어시대”/최두삼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8·15광복이래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한국사회를 이끌어 온 계층은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었다.영어를 할줄 알아야 행세하고 출세할 수 있었다.조선시대의 한자문화에서 일제때의 일어시대를 거쳐 약 반세기동안 미국영향력하의 「영어시대」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영어지배시대가 언제까지 지속돼 갈 것인가.요즘 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일부 한국인들은 『멀지않아 영어시대가 거하고 중어시대가 도래한다』는 전망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한국에서 들으면 한낱 우스갯 소리 정도로 들릴지 모르겠다.하지만 늦어도 21세기초에 접어들면 한국에도 중어시대가 펼쳐지면서 중국어를 구사할줄 모르면 오늘날 영어를 못하는 사람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될 것이라는 얘기는 이곳 한국인들에게 꽤나 설득력있게 들리고 있다. 이같이 중어시대의 도래를 점치는 사람들은 21세기가 아시아태평양시대이며 그 주역은 중국이 맡게될 것이라는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때문만도 아니다.실제로 중국땅에 살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런 생각들이 들게 마련이다. 중국은 이제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거대시장이다.이 시장 공략을 위해 지난 한햇동안에만도 외국업체들은 1천1백억달러를 중국에 투자했다.중국행 열차에 오르지 못하면 영원한 낙오자라도 될것처럼 앞을 다투어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 마치 거대한 고깃덩이에 몰려드는 개미떼 같아보인다.이같은 거대고깃덩이에 한국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아직 1%에도 못미친다.지난해 우리나라기업체들은 계약기준 6백29건 6억2천만달러를 중국에 투자,전체 외국기업이 중국에 투자한 총액의 겨우 0.5%를 차지했을 뿐이다. 전세계 인구의 22%인 12억이 드디어 고도소비시대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지난해 중국은 1천2백만대의 전화용량을 증설했다.이는 전세계 전화증설량의 3분의1을 차지한다.전체 중국인들에게 운동화 한켤레씩만 팔아 먹어도 12억켤레이며,이들이 자가용시대를 맞는다고 할때 팔아먹을수 있는 차량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중국이 경제발전을 통해 국력을 키워나간다는 관점보다는 이처럼 거대한 중국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지않고는 국제경쟁에서 낭오자가 될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중국의 중요성이 부각되고,그래서 중국어시대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 경주 동악미술관에 「구면천정천문도」·「혼상」복원 전시

    ◎“신라의 옛 하늘을 보여 드립니다”/구면…/637년 별모습 1,319개 인조다이아로 새겨/혼상/360도 회전… 계절변화 알리는 하늘의 시계 국내 과학계와 한 독지가가 세계 최초의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을 복원,전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국내 최초로 신라 전통과학실험의 장을 마련한 경주시에 위치한 동악미술관 천문지리실이 바로 그것. 경주시 민속공예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동악미술관(관장 석우일)은 연세대 나일성교수팀,세종대 강영훈교수팀,그리고 충북대 이용삼교수팀등 국내 천문학계의 무보수 도움을 받아 제작비 2억원을 들여 세계최초의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을 완성했다. 천면천정천문도는 조선시대 천문학자 남병길의 성경(1861년판)을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6년인 서기637년의 별자리 위치로 세차 계산한 것으로 2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미술관 2층 천장에 지름 6m의 반구를 만든뒤 1천3백19개의 별로 이루어진 2백90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새겨 놓았다. 특히 1천3백19개의 별을 6등급으로 나누어 인조 다이아몬드로 모두 장식,신라시대의 밤하늘의 별이 영롱한 모습으로 빛나 관람객의 눈길을 황홀하게 한다. 또한 지름 1m크기로 복원한 혼상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에 따라 천구면에 표시한 것으로서 평면에 그린 천문도와는 달리 일주운동에 따라 회전하면서 별들이 지평선에 뜨고 지는 것을 보여주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하늘의 시계 역할을 한 고대의 위대한 천문기기였다. 지난 26일 열린 개관식에 참석한 성신여대 명예교수 전상운박사는 『경주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문화 유산의 본고장일 뿐 아니라 신라의 상징적 유물인 첨성대를 인류공유의 세계 고대 천문학의 유산으로 알릴수 있는 실험주의 방법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며 후세의 교육효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호평했다. 이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 제작을 총괄 지휘한 나일성교수는 영국·일본·중국등에서 관련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천문도와 혼상을 전시할 경주에 그들을 초청,조언을 구하는데 앞장 섰다.이 가운데는 영국 더햄대 스티븐슨교수(과학사학자),중국 북경 고관상대최석죽대장,북경 천문관 최진화관장,서안천문대 리치완박사등 10여명의 외국 학자들이 방문,의견을 내놓았다. 나교수는 『석관장과 천문학자들의 의견수렴을 위해 거의 1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며 『우리나라도 세계인을 향해 내보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전통과학실험의 장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지 4백평 규모에 연건평 1백50평의 동악미술관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천문지리실에는 천장에 장치된 구면천정천문도와 바로 아래에 혼상을 설치한 이외에 5분의 1과 10분의 1로 축소한 첨성대 모형 3기가 전시돼 있다.한국과 중국의 고대 천문도 2점과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시대 해시계 파편을 완전히 복원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그리고 조선시대 앙부일구를 비롯해 중국의 혼천의와 적도의 축소 모형등이 전시돼 있어 한국이 전통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통과학기술까지도 감상 할 수 있다. 한편 천인감응사상을 부르짖는 석관장은 중앙벽 전면에 천정천문도를 펼쳐놓은 듯한 크기인 가로 6m,세로2.5m크기에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한눈에볼수 있는 왕경도를 사학계의 도움을 빌려 제작,「하늘에는 천문도,땅에는 왕경도」를 입체 전시하고 있다.
  • 전쟁기념관 6월에 문연다/서울 용산에…개관 앞두고 마무리단장 한창

    ◎디오라마·영상시설 갖춰 입체적 전시/군사유물,6·25 무기 등 7만여점 확보 서울 용산의 옛 육군본부 자리에 국내 최초로 건립되는 전쟁기념관이 오는 6월 개관을 앞두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88년 특별입법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90년 9월 착공한 이 기념관은 지난해 12월까지 건축공사를 완공하고 현재 6개 전시실 가운데 4개실의 전시품 비치등 내부단장을 마무리했다.나머지 2개 전시실도 오는 4월까지 전시품을 모두 제자리에 진열한뒤 전 전시관의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기념관은 대지 3만5천평 위에 연건평 2만5천평의 지하 2층,지상 4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과 전우회관·간이식당·지하주차장·수장고·사무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졌다.6천1백59평에 이르는 전시실은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대형 장비실과 아직 완공되지않은 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 등 6개실과 비행기·탱크 등을 전시한 옥외 전시실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군사유물과 한국전쟁 참전 16개국등 각국의무기와 장비·복식·군기·문서 등 7만8천35점이 전시되며 현재 83%를 확보했다. 이 기념관의 특징은 정적이고 폐쇄적인 지금까지의 전시방식에서 탈피,생생한 체험적 전시가 될 수 있도록 디오라마와 영상시설을 많이 설치,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한 점이다. 우선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설치된 호국추모실은 호국의 의지를 담은 서울대 미대 한운성교수의 천장화와 동양화가 박정규씨의 「단장의 산하」,통일을 상징하는 윤동구씨 등의 작품 「빛과 물」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이어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외침에 맞서 싸웠던 주요 대외항쟁과 각종 무기·장비·복식·기치·군사제도 등을 문헌자료와 조각·그림·사진 등으로 전시했다.특히 살수대첩과 한산대첩·귀주대첩·처인성전투·매소성전투·진주대첩·행주대첩 등의 전투상황은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했으며 안시성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은 기록화에 담아 선보이고 있다.이와함께 성곽과 봉수대·거북선·조선시대의 범선과 병선,대한제국의 신식군대 훈련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했으며 서구열강의 당시 군사력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6·25전쟁의 발발배경과 남침·반격·중공군 개입·전선교착·휴전 등으로 구분해 6·25를 객관적인 사실로 보여준다.전선에서의 장병들의 전투상황은 물론 후방 국민들의 전시생활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보여준다.특히 전후세대들을 위해 「전쟁체험실」을 설치,전쟁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해외파병실은 우리 국군의 파병배경과 의의 그리고 월남에서의 활동상을,국군발전실은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창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의 발전과정을 각각 실물·사진·그래픽·모형 등으로 소개한다. 강의용전시본부장은 『우리 민족은 전쟁의 영향을 그 어느 민족 보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직 전쟁박물관 하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번듯한 기념관을 갖게돼 다행』이라면서 『국민에게 전쟁의 교훈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산교육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흥국사/조선 불교미술 “보고”

    ◎1693∼1759년 4차례 걸쳐 제작/탱화·경전 등 다양한 유산 간직 전남 여천시 흥국사는 조선시대에 독특한 사찰위상을 정립하면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한 불교미술의 보고.이는 한국고고미술연구소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장기학술조사(71∼92년)결과를 토대로 간행한 「미술사학지」제1집을 통해 흥국사 불교미술을 집중조명함으로써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 조사에서 불교회화로서의 흥국사 불화조성은 4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냈다.1693년에는 대웅전의 「영상회상정화」가 제작되었고 1723년에는 16나한탱화 6점과 관셰음보살탱화,또 다른 영상회상탱화가 만들어졌다.그리고 1741년에는 영상회상탱화와 감로탱화,천장지장회존탱화,천룡탱화가 만들어져 팔상전에 봉안되었다.1759년에 만들어진 괘불탱화와 석제천룡태자도 현재 흥국사가 소장하고 있다. 이같은 불화의 집중적 조성은 흥국사의 독특한 위상에서 찾았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부분의 사찰들이 군역과 수성,제지와 제와등 잡역에 시달린 것과는 달리 흥국사는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즉 1594년 이후 주진사로서 3백명의 의승군이 상주,잡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이는 경전강행으로도 연결되었다.1660년 「천지명양수륙의찬요」와 「수륙수차평등재의요」등의 개판을 시작으로 1665년까지 많은 경전을 찍어냈다.이들 경판은 모두 흥국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이와 더불어 1690년에는 승군 3백명과 대중 4백명이 나서 대웅전 확장불사를 마무리짓는다.현재까지 화려하고 장엄한 색조를 풍기는 대웅전 내외의 단청은 사실상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 동학군,공주우금치서 일군과 결전(동학의 함성을 찾아서:5)

    ◎서울난입 소식에 전봉준 등 전국서 봉기 동학혁명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깨끗한 정부를 표방한 항쟁이다.그러나 외세에 대한 항쟁 역시 민족자존의 의지가 서렸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은 그 초기부터 「왜인과 양인을 쫓아내자」(축멸양위)는 구호를 내걸었다.이는 외국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항일전쟁으로서의 민족의식을 일깨웠지만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외세와 조우하는 숙명을 겪게되는 것이다. 이른바 전주화약에 이어 집강소가 설치되는등 호남은 일단 위급한 형세를 넘기는 듯했다.그러나 조정내 민씨 일파의 난국수습책에 따른 청나라로부터의 청병의도와 맞물려 1894년6월5일 정여창이 이끄는 청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온다.이어 6월5일과 8일에는 청의 육전대가 아산쪽으로 상륙하기에 이른다. 청의 출병소식을 들은 일본은 이에 뒤질세라 6월9일 군함 3척을 인천항에 투입시키는 한편 육전대를 서울로 몰고들어왔다.일군은 쿠데타를 통해 민씨 일파 대신에 대원군을 옹립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한다.일본군은 7월26일 충청도 앞바다에서 청의 함대에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봉준은 서울에 난입한 일군의 횡포를 소식으로 듣고 귀를 기울이다 마침내 전주에서 기병한다.손화중은 광주에서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 호남 각지역의 남접군 11만5천명과 충청,경기,강원도의 북접군이 삼례에서 합세했다.전국 각처에서기병한 동학군은 일군의 전신선을 끊고 병참기지를 습격하는등 항전에 나선다.이때의 동학군의 활동은 군으로의 성격보다는 동학교도로서 일군에 대한 봉기항쟁으로 기록된다. 당시 관군은 일군과 행동을 같이했다.이때문에 동학군은 담은 안은채 11월9일 공주의 관문격 요충지 오금치·웅치에서 장렬한 최후의 결전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우금치는 어디 있나/농민군이 일군에 참패 당한곳/동학사 있는 계룡산국립공원 지척에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참패를 당한 우금치는 공주시내에서 부여쪽으로 가다 마주치는 첫번째 고개에 있다.오금치는 글자 그대로 소도 못 넘어갈 만큼 가파른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학혁명기념비가 서 있는 고개마루에 서면 장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향해 죽창을 들고 달려드는 농민군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서 참패한 농민군의 시체를 거두어 한데 묻었다는 송장배미는 거리상으로 우금치에서 십리안쪽이다. 금성여고앞,지금은 논으로 변한 송장배미에서는 몇해전까지만해도 농민군의 유골이 쟁기에 걸려나오곤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공주는 백제의 고도이자 조선시대에는 감영이 있었고 19 27년까지만해도 충남도청이 자리잡고 있었던만큼 찬란한 역사의 고장이다. 그만큼 주위에는 볼거리가 널려있다.시내에 있는 박물관과 송산리 고분군,공산성은 물론 갑사와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 국립공원이 지척이다.
  • 「유연한 곡선」이 조선여인의 옷맵시

    ◎금기숙교수,「조선복식미술」서 예찬론/치마선 허리서 의도적으로 부풀려/버선 수눅선에 연결시킨게 공통점/조선시대 그림속의 미인복장 연구 조선시대의 옷은 멋이 있다. 여인의 옷가지가 특히 그러했다.이 시대 복식은 백자항아리와 자주 비유되었다. 항아리의 전체 분위기와 평상복은 조형적 특성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그 조형적 특징은 바로 탄력성을 지닌 유연한 곡선이라고 한다. 이같은 조선시대 복식 예찬론은 금기숙교수(홍익대)의 저서 「조선복식미술」(열화당간)에서 제기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에 나오는 여인들의 옷가지를 통해 그 매무새를 함께 다루었다.신윤복(1758∼?)의 「미인도」와 「야금모행」,김희겸(1711∼1775년)의 「석천한유」,작가미상의 「여인도」속의 여인들 옷가지를 대상으로 분석한 것이다. 우선 「야금모행」의 경우는 편안한 치마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 매어 긴장감이 넘친다.그래서 의도적으로 곡선을 형성했다.상체에 달라붙은 저고리에 비해 부풀어 오른 치마의 형상은 머리와 함께 강↓약↓강의 조화를 이룬다.특히 치마아래로 드러낸 단속곳과 바지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폐쇄적 복장을 뛰어넘어 오히려 선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선을 느끼게 하는 「미인도」의 주인공 앳된 미인은 넓은 허리말기를 상체에 밀착시키고 아주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여기에 풍성하고 긴 치마가 어울려 굴곡이 심한 윤곽선을 드러낸다.상체를 한번 틀면 금세 바느질이 터질듯한 이 옷매무새는 숨겨진 상체 부위를 오히려 강조,은근히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미상으로 돼있는 19세기경의 「미인도」 주인공은 선정적 부위를 가장 잘 자아내게 하는 옷을 입었다.가슴을 가리지 못한 좁은 허리말기와 짧은 저고리를 입고 왼쪽팔을 위로 들어올림으로써 가슴노출을 유도하고 있다.그럼에도 저고리의 안고름과 겉고름을 늘어뜨려 젖꼭지를 살짝 가렸다.사내아이를 낳은 여인들의 가슴노출 풍속과 무관하지 않은 복식으로 보았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공통점은 허리선으로부터 시작,밖을 향해 의도적으로 작출한 부풀어진 치마의곡선. 이 윤곽선은 너무 부드러워서 둥근 맛을 준다.신윤복의 「미인도」에서는 치마선이 치마아래로 드러난 누비바지와 버선 수눅선으로 연결되어 곡선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 그림의 부풀어진 치마의 곡선을 백자항아리같은 조선시대 조형물의 우아함에 연관지었다.
  • 거리:하(서울 6백년 만상:17)

    ◎80년대 유행창조 압구정로시대 개막/고급 의류상가 밀집… 젊은층문화 선도/대학로 문화예술거리­이태원 환락가로 서울의 역사를 거리기준으로 본다면 정도이후 구한말까지가 종로시대였고 해방후 80년대 중반까지는 명동시대,그 이후는 강남의 압구정로시대로 크게 나눌수 있다. 종로는 1894년 갑오경장이후 외국의 값싼 상품이 밀려오면서 구역별로 기능을 떠맡는 거리분화현상이 일어난다.관청가인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상업가인 종로가 T자로 교차하는 청진동일대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관리들에게 향응을 베풀면서 이른바 요정이 들어서며 고급 환락가가 형성된다.고급 환락가 뒤편 골목길에 있던 목로주점들은 서민들이나 하급관리들이 즐겨 찾으면서 「해장국집」으로 변신,오늘날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씨앗을 싹틔웠다.종각앞에는 근대 백화점의 효시인 화신·신신백화점이 86년까지 자리잡았다.종로 2가의 명물은 역시 1908년 처음 3층높이로 세워진 YMCA건물.6·25때 불에 타 67년 지금의 8층건물로 재건된 YMCA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많이 몰려 자연스레 학원가가 형성됐고 서점들도 뒤따라 문을 열었다.그러나 종로2가의 학원가 명성은 80년 7월 과외및 재학생학원수강 금지조치가 발표되면서 빛을 잃고 남아 있는 몇몇의 대형서점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탑골공원에서 종로3가까지의 뒷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색주가로 널리 알려졌다.이곳 창기들의 반일 성향이 짙은 탓에 항일운동가들의 단골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이른바 「종삼」은 68년 시행된 종로정비사업으로 5백74년의 오명에 종지부를 찍게됐고 그 이후 종로는 제1의 상권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됐다. 종로시대에 이어 진고개로 통하던 명동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이곳은 구한말까지만해도 권문세도가들이 거주하던 북촌과는 대조적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벼슬길이 막힌 선비들의 삶의 터전이었다.토착민들의 세가 약한 탓에 늘 외세에 시달렸다.임오군란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공략했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인들도 그랬다.일본상인들은 명치정이라고 지명까지 바꿔 상권을 형성해갔다.특히 1912년 한국은행자리의 조선은행을 필두로 저축은행(구 제일은행본점),조선신탁은행(구 한일은행본점)이,26년에 조선호텔,34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백화점등이 잇따라 세워져 명동가가 활기를 띠었다. 시인,소설가,가수,배우등 문화·예술인들이 명동의 충무로일대를 드나들어 훗날 영화의 메카로서 충무로의 명성은 시작됐다.예술·유행의 메카로 그리고 금융가로서 하루 1백50만명이상의 인파가 출렁거렸던 명동도 70년중반이후 강남개발붐에 힘을 잃었다. 강남개발붐이 낳은 대표적인 거리는 압구정로로 부와 유행,소비의 최첨단지대로 부상한다.특히 「오렌지족」이라는 부유층 자녀들이 몰려 다른 지역과는 전혀 이색적인 젊은이 풍속도를 그려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국내 패션유행을 이끌어가는 로데오거리도 눈길을 끈다.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강남구청까지 3백m의 가로변으로 미국 베벌리 힐스의 세계적인 패션거리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세조때 한명회가 갈매기를 벗삼아 한가롭게 노닐던 땅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것이 고작 75년이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실감난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네거리에 이르는 1.1㎞의 대학로는 젊은이들의 무대이다.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단체및 시설들이 대거 들어서자 서울시가 85년 5월 젊음의 거리로 조성했다.무대공연,전시회,연주회가 끊이질 않는 대학로는 옛 정취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태원도 6백년 애환이 깃든 거리중 하나다.콜터장군 동상이 서 있던 반포로4거리에서 옛 한남동 면허시험장에 이르는 1.4㎞의 이 거리는 62년 직업군인출신인 황모씨가 「세븐클럽」이라는 미군전용 술집을 열면서 비롯됐다.70년대 미8군 121후송병원이 미8군영내로 옮겨오면서 유흥음식점외에 의류상등 1천2백여곳의 상가가 들어섯으며 88년에는 상가수가 1천8백여곳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는다.압구정일대가 제1의 거리가 될것이라고 아무도 알수 없었듯 압구정이 언제 또 서울의 제1거리 자리에서 물러설지 모를 일이다.
  • 낡은 한옥 천정 철거하다 상평통보 한가마니 쏟아져(조약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폐였던 「상평통보」가 28일 주택개량공사를 벌이던 낡은 한옥 천장에서 한가마니 가량 쏟아져 내려 화제. 충북 중원군 소태면 복탄리 집주인 이종화씨(51)에 따르면 28일 상오 11시쯤 포클레인으로 천장 구조물 철거작업을 벌이던중 조선시대 화폐로 쓰였던 상평통보 한 가마니가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는 것.엽전 한쪽면에는 상평통보라 쓰여있고 다른 한면에는 「훈정 십」 「훈정 팔」 「훈정 사」 「훈정 이」와 「훈중 칠」 「송 이」 등이 적혀 있는데 「훈정 십」의 크기는 1백원자리 동전과 비슷하고 이 가운데 가장큰 「훈정 이」는 지름이 3㎝,두께 1.5㎜정도로 5백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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