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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동악미술관에 「구면천정천문도」·「혼상」복원 전시

    ◎“신라의 옛 하늘을 보여 드립니다”/구면…/637년 별모습 1,319개 인조다이아로 새겨/혼상/360도 회전… 계절변화 알리는 하늘의 시계 국내 과학계와 한 독지가가 세계 최초의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을 복원,전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국내 최초로 신라 전통과학실험의 장을 마련한 경주시에 위치한 동악미술관 천문지리실이 바로 그것. 경주시 민속공예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동악미술관(관장 석우일)은 연세대 나일성교수팀,세종대 강영훈교수팀,그리고 충북대 이용삼교수팀등 국내 천문학계의 무보수 도움을 받아 제작비 2억원을 들여 세계최초의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을 완성했다. 천면천정천문도는 조선시대 천문학자 남병길의 성경(1861년판)을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6년인 서기637년의 별자리 위치로 세차 계산한 것으로 2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미술관 2층 천장에 지름 6m의 반구를 만든뒤 1천3백19개의 별로 이루어진 2백90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새겨 놓았다. 특히 1천3백19개의 별을 6등급으로 나누어 인조 다이아몬드로 모두 장식,신라시대의 밤하늘의 별이 영롱한 모습으로 빛나 관람객의 눈길을 황홀하게 한다. 또한 지름 1m크기로 복원한 혼상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에 따라 천구면에 표시한 것으로서 평면에 그린 천문도와는 달리 일주운동에 따라 회전하면서 별들이 지평선에 뜨고 지는 것을 보여주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하늘의 시계 역할을 한 고대의 위대한 천문기기였다. 지난 26일 열린 개관식에 참석한 성신여대 명예교수 전상운박사는 『경주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문화 유산의 본고장일 뿐 아니라 신라의 상징적 유물인 첨성대를 인류공유의 세계 고대 천문학의 유산으로 알릴수 있는 실험주의 방법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며 후세의 교육효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호평했다. 이 구면천정천문도와 혼상 제작을 총괄 지휘한 나일성교수는 영국·일본·중국등에서 관련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천문도와 혼상을 전시할 경주에 그들을 초청,조언을 구하는데 앞장 섰다.이 가운데는 영국 더햄대 스티븐슨교수(과학사학자),중국 북경 고관상대최석죽대장,북경 천문관 최진화관장,서안천문대 리치완박사등 10여명의 외국 학자들이 방문,의견을 내놓았다. 나교수는 『석관장과 천문학자들의 의견수렴을 위해 거의 1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며 『우리나라도 세계인을 향해 내보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전통과학실험의 장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지 4백평 규모에 연건평 1백50평의 동악미술관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천문지리실에는 천장에 장치된 구면천정천문도와 바로 아래에 혼상을 설치한 이외에 5분의 1과 10분의 1로 축소한 첨성대 모형 3기가 전시돼 있다.한국과 중국의 고대 천문도 2점과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시대 해시계 파편을 완전히 복원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그리고 조선시대 앙부일구를 비롯해 중국의 혼천의와 적도의 축소 모형등이 전시돼 있어 한국이 전통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통과학기술까지도 감상 할 수 있다. 한편 천인감응사상을 부르짖는 석관장은 중앙벽 전면에 천정천문도를 펼쳐놓은 듯한 크기인 가로 6m,세로2.5m크기에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한눈에볼수 있는 왕경도를 사학계의 도움을 빌려 제작,「하늘에는 천문도,땅에는 왕경도」를 입체 전시하고 있다.
  • 전쟁기념관 6월에 문연다/서울 용산에…개관 앞두고 마무리단장 한창

    ◎디오라마·영상시설 갖춰 입체적 전시/군사유물,6·25 무기 등 7만여점 확보 서울 용산의 옛 육군본부 자리에 국내 최초로 건립되는 전쟁기념관이 오는 6월 개관을 앞두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88년 특별입법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90년 9월 착공한 이 기념관은 지난해 12월까지 건축공사를 완공하고 현재 6개 전시실 가운데 4개실의 전시품 비치등 내부단장을 마무리했다.나머지 2개 전시실도 오는 4월까지 전시품을 모두 제자리에 진열한뒤 전 전시관의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기념관은 대지 3만5천평 위에 연건평 2만5천평의 지하 2층,지상 4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과 전우회관·간이식당·지하주차장·수장고·사무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졌다.6천1백59평에 이르는 전시실은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대형 장비실과 아직 완공되지않은 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 등 6개실과 비행기·탱크 등을 전시한 옥외 전시실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군사유물과 한국전쟁 참전 16개국등 각국의무기와 장비·복식·군기·문서 등 7만8천35점이 전시되며 현재 83%를 확보했다. 이 기념관의 특징은 정적이고 폐쇄적인 지금까지의 전시방식에서 탈피,생생한 체험적 전시가 될 수 있도록 디오라마와 영상시설을 많이 설치,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한 점이다. 우선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설치된 호국추모실은 호국의 의지를 담은 서울대 미대 한운성교수의 천장화와 동양화가 박정규씨의 「단장의 산하」,통일을 상징하는 윤동구씨 등의 작품 「빛과 물」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이어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외침에 맞서 싸웠던 주요 대외항쟁과 각종 무기·장비·복식·기치·군사제도 등을 문헌자료와 조각·그림·사진 등으로 전시했다.특히 살수대첩과 한산대첩·귀주대첩·처인성전투·매소성전투·진주대첩·행주대첩 등의 전투상황은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했으며 안시성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은 기록화에 담아 선보이고 있다.이와함께 성곽과 봉수대·거북선·조선시대의 범선과 병선,대한제국의 신식군대 훈련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했으며 서구열강의 당시 군사력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6·25전쟁의 발발배경과 남침·반격·중공군 개입·전선교착·휴전 등으로 구분해 6·25를 객관적인 사실로 보여준다.전선에서의 장병들의 전투상황은 물론 후방 국민들의 전시생활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보여준다.특히 전후세대들을 위해 「전쟁체험실」을 설치,전쟁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해외파병실은 우리 국군의 파병배경과 의의 그리고 월남에서의 활동상을,국군발전실은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창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의 발전과정을 각각 실물·사진·그래픽·모형 등으로 소개한다. 강의용전시본부장은 『우리 민족은 전쟁의 영향을 그 어느 민족 보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직 전쟁박물관 하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번듯한 기념관을 갖게돼 다행』이라면서 『국민에게 전쟁의 교훈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산교육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흥국사/조선 불교미술 “보고”

    ◎1693∼1759년 4차례 걸쳐 제작/탱화·경전 등 다양한 유산 간직 전남 여천시 흥국사는 조선시대에 독특한 사찰위상을 정립하면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한 불교미술의 보고.이는 한국고고미술연구소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장기학술조사(71∼92년)결과를 토대로 간행한 「미술사학지」제1집을 통해 흥국사 불교미술을 집중조명함으로써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 조사에서 불교회화로서의 흥국사 불화조성은 4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냈다.1693년에는 대웅전의 「영상회상정화」가 제작되었고 1723년에는 16나한탱화 6점과 관셰음보살탱화,또 다른 영상회상탱화가 만들어졌다.그리고 1741년에는 영상회상탱화와 감로탱화,천장지장회존탱화,천룡탱화가 만들어져 팔상전에 봉안되었다.1759년에 만들어진 괘불탱화와 석제천룡태자도 현재 흥국사가 소장하고 있다. 이같은 불화의 집중적 조성은 흥국사의 독특한 위상에서 찾았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부분의 사찰들이 군역과 수성,제지와 제와등 잡역에 시달린 것과는 달리 흥국사는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즉 1594년 이후 주진사로서 3백명의 의승군이 상주,잡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이는 경전강행으로도 연결되었다.1660년 「천지명양수륙의찬요」와 「수륙수차평등재의요」등의 개판을 시작으로 1665년까지 많은 경전을 찍어냈다.이들 경판은 모두 흥국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이와 더불어 1690년에는 승군 3백명과 대중 4백명이 나서 대웅전 확장불사를 마무리짓는다.현재까지 화려하고 장엄한 색조를 풍기는 대웅전 내외의 단청은 사실상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 동학군,공주우금치서 일군과 결전(동학의 함성을 찾아서:5)

    ◎서울난입 소식에 전봉준 등 전국서 봉기 동학혁명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깨끗한 정부를 표방한 항쟁이다.그러나 외세에 대한 항쟁 역시 민족자존의 의지가 서렸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은 그 초기부터 「왜인과 양인을 쫓아내자」(축멸양위)는 구호를 내걸었다.이는 외국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항일전쟁으로서의 민족의식을 일깨웠지만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외세와 조우하는 숙명을 겪게되는 것이다. 이른바 전주화약에 이어 집강소가 설치되는등 호남은 일단 위급한 형세를 넘기는 듯했다.그러나 조정내 민씨 일파의 난국수습책에 따른 청나라로부터의 청병의도와 맞물려 1894년6월5일 정여창이 이끄는 청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온다.이어 6월5일과 8일에는 청의 육전대가 아산쪽으로 상륙하기에 이른다. 청의 출병소식을 들은 일본은 이에 뒤질세라 6월9일 군함 3척을 인천항에 투입시키는 한편 육전대를 서울로 몰고들어왔다.일군은 쿠데타를 통해 민씨 일파 대신에 대원군을 옹립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한다.일본군은 7월26일 충청도 앞바다에서 청의 함대에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봉준은 서울에 난입한 일군의 횡포를 소식으로 듣고 귀를 기울이다 마침내 전주에서 기병한다.손화중은 광주에서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 호남 각지역의 남접군 11만5천명과 충청,경기,강원도의 북접군이 삼례에서 합세했다.전국 각처에서기병한 동학군은 일군의 전신선을 끊고 병참기지를 습격하는등 항전에 나선다.이때의 동학군의 활동은 군으로의 성격보다는 동학교도로서 일군에 대한 봉기항쟁으로 기록된다. 당시 관군은 일군과 행동을 같이했다.이때문에 동학군은 담은 안은채 11월9일 공주의 관문격 요충지 오금치·웅치에서 장렬한 최후의 결전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우금치는 어디 있나/농민군이 일군에 참패 당한곳/동학사 있는 계룡산국립공원 지척에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참패를 당한 우금치는 공주시내에서 부여쪽으로 가다 마주치는 첫번째 고개에 있다.오금치는 글자 그대로 소도 못 넘어갈 만큼 가파른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학혁명기념비가 서 있는 고개마루에 서면 장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향해 죽창을 들고 달려드는 농민군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서 참패한 농민군의 시체를 거두어 한데 묻었다는 송장배미는 거리상으로 우금치에서 십리안쪽이다. 금성여고앞,지금은 논으로 변한 송장배미에서는 몇해전까지만해도 농민군의 유골이 쟁기에 걸려나오곤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공주는 백제의 고도이자 조선시대에는 감영이 있었고 19 27년까지만해도 충남도청이 자리잡고 있었던만큼 찬란한 역사의 고장이다. 그만큼 주위에는 볼거리가 널려있다.시내에 있는 박물관과 송산리 고분군,공산성은 물론 갑사와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 국립공원이 지척이다.
  • 「유연한 곡선」이 조선여인의 옷맵시

    ◎금기숙교수,「조선복식미술」서 예찬론/치마선 허리서 의도적으로 부풀려/버선 수눅선에 연결시킨게 공통점/조선시대 그림속의 미인복장 연구 조선시대의 옷은 멋이 있다. 여인의 옷가지가 특히 그러했다.이 시대 복식은 백자항아리와 자주 비유되었다. 항아리의 전체 분위기와 평상복은 조형적 특성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그 조형적 특징은 바로 탄력성을 지닌 유연한 곡선이라고 한다. 이같은 조선시대 복식 예찬론은 금기숙교수(홍익대)의 저서 「조선복식미술」(열화당간)에서 제기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에 나오는 여인들의 옷가지를 통해 그 매무새를 함께 다루었다.신윤복(1758∼?)의 「미인도」와 「야금모행」,김희겸(1711∼1775년)의 「석천한유」,작가미상의 「여인도」속의 여인들 옷가지를 대상으로 분석한 것이다. 우선 「야금모행」의 경우는 편안한 치마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 매어 긴장감이 넘친다.그래서 의도적으로 곡선을 형성했다.상체에 달라붙은 저고리에 비해 부풀어 오른 치마의 형상은 머리와 함께 강↓약↓강의 조화를 이룬다.특히 치마아래로 드러낸 단속곳과 바지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폐쇄적 복장을 뛰어넘어 오히려 선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선을 느끼게 하는 「미인도」의 주인공 앳된 미인은 넓은 허리말기를 상체에 밀착시키고 아주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여기에 풍성하고 긴 치마가 어울려 굴곡이 심한 윤곽선을 드러낸다.상체를 한번 틀면 금세 바느질이 터질듯한 이 옷매무새는 숨겨진 상체 부위를 오히려 강조,은근히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미상으로 돼있는 19세기경의 「미인도」 주인공은 선정적 부위를 가장 잘 자아내게 하는 옷을 입었다.가슴을 가리지 못한 좁은 허리말기와 짧은 저고리를 입고 왼쪽팔을 위로 들어올림으로써 가슴노출을 유도하고 있다.그럼에도 저고리의 안고름과 겉고름을 늘어뜨려 젖꼭지를 살짝 가렸다.사내아이를 낳은 여인들의 가슴노출 풍속과 무관하지 않은 복식으로 보았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공통점은 허리선으로부터 시작,밖을 향해 의도적으로 작출한 부풀어진 치마의곡선. 이 윤곽선은 너무 부드러워서 둥근 맛을 준다.신윤복의 「미인도」에서는 치마선이 치마아래로 드러난 누비바지와 버선 수눅선으로 연결되어 곡선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 그림의 부풀어진 치마의 곡선을 백자항아리같은 조선시대 조형물의 우아함에 연관지었다.
  • 거리:하(서울 6백년 만상:17)

    ◎80년대 유행창조 압구정로시대 개막/고급 의류상가 밀집… 젊은층문화 선도/대학로 문화예술거리­이태원 환락가로 서울의 역사를 거리기준으로 본다면 정도이후 구한말까지가 종로시대였고 해방후 80년대 중반까지는 명동시대,그 이후는 강남의 압구정로시대로 크게 나눌수 있다. 종로는 1894년 갑오경장이후 외국의 값싼 상품이 밀려오면서 구역별로 기능을 떠맡는 거리분화현상이 일어난다.관청가인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상업가인 종로가 T자로 교차하는 청진동일대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관리들에게 향응을 베풀면서 이른바 요정이 들어서며 고급 환락가가 형성된다.고급 환락가 뒤편 골목길에 있던 목로주점들은 서민들이나 하급관리들이 즐겨 찾으면서 「해장국집」으로 변신,오늘날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씨앗을 싹틔웠다.종각앞에는 근대 백화점의 효시인 화신·신신백화점이 86년까지 자리잡았다.종로 2가의 명물은 역시 1908년 처음 3층높이로 세워진 YMCA건물.6·25때 불에 타 67년 지금의 8층건물로 재건된 YMCA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많이 몰려 자연스레 학원가가 형성됐고 서점들도 뒤따라 문을 열었다.그러나 종로2가의 학원가 명성은 80년 7월 과외및 재학생학원수강 금지조치가 발표되면서 빛을 잃고 남아 있는 몇몇의 대형서점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탑골공원에서 종로3가까지의 뒷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색주가로 널리 알려졌다.이곳 창기들의 반일 성향이 짙은 탓에 항일운동가들의 단골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이른바 「종삼」은 68년 시행된 종로정비사업으로 5백74년의 오명에 종지부를 찍게됐고 그 이후 종로는 제1의 상권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됐다. 종로시대에 이어 진고개로 통하던 명동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이곳은 구한말까지만해도 권문세도가들이 거주하던 북촌과는 대조적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벼슬길이 막힌 선비들의 삶의 터전이었다.토착민들의 세가 약한 탓에 늘 외세에 시달렸다.임오군란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공략했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인들도 그랬다.일본상인들은 명치정이라고 지명까지 바꿔 상권을 형성해갔다.특히 1912년 한국은행자리의 조선은행을 필두로 저축은행(구 제일은행본점),조선신탁은행(구 한일은행본점)이,26년에 조선호텔,34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백화점등이 잇따라 세워져 명동가가 활기를 띠었다. 시인,소설가,가수,배우등 문화·예술인들이 명동의 충무로일대를 드나들어 훗날 영화의 메카로서 충무로의 명성은 시작됐다.예술·유행의 메카로 그리고 금융가로서 하루 1백50만명이상의 인파가 출렁거렸던 명동도 70년중반이후 강남개발붐에 힘을 잃었다. 강남개발붐이 낳은 대표적인 거리는 압구정로로 부와 유행,소비의 최첨단지대로 부상한다.특히 「오렌지족」이라는 부유층 자녀들이 몰려 다른 지역과는 전혀 이색적인 젊은이 풍속도를 그려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국내 패션유행을 이끌어가는 로데오거리도 눈길을 끈다.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강남구청까지 3백m의 가로변으로 미국 베벌리 힐스의 세계적인 패션거리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세조때 한명회가 갈매기를 벗삼아 한가롭게 노닐던 땅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것이 고작 75년이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실감난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네거리에 이르는 1.1㎞의 대학로는 젊은이들의 무대이다.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단체및 시설들이 대거 들어서자 서울시가 85년 5월 젊음의 거리로 조성했다.무대공연,전시회,연주회가 끊이질 않는 대학로는 옛 정취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태원도 6백년 애환이 깃든 거리중 하나다.콜터장군 동상이 서 있던 반포로4거리에서 옛 한남동 면허시험장에 이르는 1.4㎞의 이 거리는 62년 직업군인출신인 황모씨가 「세븐클럽」이라는 미군전용 술집을 열면서 비롯됐다.70년대 미8군 121후송병원이 미8군영내로 옮겨오면서 유흥음식점외에 의류상등 1천2백여곳의 상가가 들어섯으며 88년에는 상가수가 1천8백여곳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는다.압구정일대가 제1의 거리가 될것이라고 아무도 알수 없었듯 압구정이 언제 또 서울의 제1거리 자리에서 물러설지 모를 일이다.
  • 낡은 한옥 천정 철거하다 상평통보 한가마니 쏟아져(조약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폐였던 「상평통보」가 28일 주택개량공사를 벌이던 낡은 한옥 천장에서 한가마니 가량 쏟아져 내려 화제. 충북 중원군 소태면 복탄리 집주인 이종화씨(51)에 따르면 28일 상오 11시쯤 포클레인으로 천장 구조물 철거작업을 벌이던중 조선시대 화폐로 쓰였던 상평통보 한 가마니가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는 것.엽전 한쪽면에는 상평통보라 쓰여있고 다른 한면에는 「훈정 십」 「훈정 팔」 「훈정 사」 「훈정 이」와 「훈중 칠」 「송 이」 등이 적혀 있는데 「훈정 십」의 크기는 1백원자리 동전과 비슷하고 이 가운데 가장큰 「훈정 이」는 지름이 3㎝,두께 1.5㎜정도로 5백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컸다.
  • 거리:중/을지로엔 약종상 밀집 “의료타운”(서울6백년만상:16)

    ◎서민촌 충무로,일제시대 환락가 변모/동대문부근 배오개길 상인들로 북적 조선시대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가 사대부 양반이나 부유층의 거리였다면 구리개(일명 동현·을지로)는 서민들의 거리였다. 구리개는 지금의 을지로입구에서 동대문운동장앞까지의 거리로 요즘의 표현을 빌리면 의료타운이라고 볼 수 있다.지금의 국립의료원자리에 조선조 개국초부터 국립의료원격인 혜민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양으로 천도한후 궁궐,종묘등을 1년여에 걸쳐 완성한 태조 이성계는 천도 그 이듬해인 1395년 음력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1396년1월부터 2차에 걸쳐 본격적인 도성축조에 들어갔다.1·2차에 걸쳐 축조에 동원된 인력이 19만7천여명.당시 상주인구가 5만여에 불과했던 한양으로서는 도성축조에 동원된 역군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대군이었다.그러다보니 숙박시설이나 음식이 변변치 못해 역군들의 한양생활은 참혹했으며 1천명에 가까운 역군들이 부상이나 동상으로 죽거나 다쳤다한다. 이때 사상자를 치료하기위해 세워진 것이바로 혜민서였고 그이후로 구리개일대에는 자연스럽게 약방골이 조성됐다.구리개 앞옆으로 당시 한의원 양성기관인 전의감 졸업생들이 독점적으로 개업한 한의원이나 동의수세보원이니 연년익수라고 써붙인 약종상(한약방)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에는 내의원,전의감,혜민서의 허가없이는 한의원이나 약종상을 개업할 수없었고 이들 한의업 특권층들은 한약업계의 메카인 구리개에 개업을 했다.따라서 시골에서 약재를 팔러온 사람은 구리개아니면 한약재를 팔 수없게 구리개는 서민층 아픈사람이나 한약재를 팔려는 시골뜨기로 연중 북적거렸다고 옛문헌들은 적고 있다. 구리개는 한일합방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약방골로 명성을 누렸으나 지금의 충무로에 뿌리를 내린 일본상인들이 서서히 잠식해오면서 미두시장으로 바뀌게 된다.그리고 서울의 약방골은 종로4가와 경동시장근처로 옮겨 옛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또 하나의 서민의 거리는 배오개(이현)길과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이현)길.당시에는 동대문근처에 산림이 울창해 1백명이 모여야 지날 수있다해서 백고개혹은 백채라고도 불렸다는 배오개길은 지금의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동국대학교자리까지 이르는 길로 배오개장(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그후 한양의 인구가 크게 팽창하며 배오개장 중심의 상권이 당시 물품의 유일한 대량수송로였던 한강변의 나룻터를 중심으로 다변화되며 서울의 거리도 크게 늘어난다. 특히 조선조 중기의 황금시대인 영조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한양의 인구가 20만을 훨씬 넘어서고 노들나루를 비롯 뚝섬,용산,마포,왕십리,서강,서빙고,망원정,연서,안암,전농,두모포등 12강이라 불리는 나룻터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며 마포로,서강길등 현재의 주요도로 골격을 갖추게 됐다. 배오개길과 함께 한양의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거리는 진고개(이현)길.비가 올때면 남산으로 이어진 고갯길이 온통 진흙탕을 이뤄 통행자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해서 진고개로 불리게되었다고 전해진다.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천도해서 조신들에게 집지을 땅을 나누어주면서 계급과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고 벼슬아치나 양반들은 모두 청계천북쪽으로 배정해 진고개일대는 요즘말로 달동네인 남촌을 이뤘다. 구한말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진출을 꾀하면서 경제적 기반구축을 맨처음 시도했던 곳이 진고개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한양도성 10리안에 발조차 제대로 들여놓지 못했던 일본상인들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위상이 높아지자 진고개일대 가가(가건물)를 하나둘 사들여 진고개의 면모를 일신해갔다. 급기야 5년후 한일합방이후에는 마을이름을 전부 일본식으로 뜯어고치고 일본상권을 형성해 서서히 구리개까지 그들의 상권으로 편입시켜 갔다.특히 진고개일대에는 1887년의 정문루라는 요정을 시작으로 개진정,남산정,송본루등이 즐비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환락가였다고 한다.
  • 「무구정광 다라니경」 이동전시/김홍도 등의 전통회화 20여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23일 문화소외지역과 사회시설,벽지학교등을 직접 찾아가 우리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움직이는 박물관」의 올해 사업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올해사업은 「인쇄문화발달사」를 주제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니경등 우리나라 고인쇄문화의 대표적 영인본과 목활자,금속활자 등 10여종의 활자와 설명패널 20여종과 함께 구석기·신석기문화와 불상,금속공예 등 시대별 문화를 설명하는 대형컬러 만화패널 31점,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제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의 전통회화 20여점 등을 이동전시하는것으로 되어있다. 지난 90년 부터 지역문화 행사장,복지공단 등을 찾아가 이동전시하는 이 사업의 올해 전시지역은 오는 28일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서울시립양로원과 서울장애인 종합복지관을 시작으로 ▲3월 구로공단 및 안양소년원 ▲4월 경남지역 ▲5월 제주지역 문화행사 ▲6월 인천지역 산업체 ▲7∼8월 해변지역 ▲9월 전남지역 ▲10월 요청이 있는 지방문화행사장등 20여곳이다.
  • 「정도 6백년 지도전」/서울의 변화상 한눈에

    ◎28∼4월25일까지 성신여대박물관서/조선이후 서울지도등 1백종 자료 전시/행정·정치도등 다양… 「경조오부도」 눈길 조선시대 지도책의 첫장에 그려지곤 했던 「천하도」는 중국을 중심대륙으로 비해와 환대륙,영해가 차곡차곡 감싸고 있는 모습을 담은 원형의 세계지도이다.유독 조선에서만 크게 번성한 「천하도」의 사상적 기원은 중국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당시의 세계관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지도는 이처럼 그 지역의 문화사를 간직한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된다.「천하도」가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각 지도에는 당시에 필요로 하였던 요소들이 당시 의식하에 그려져 있어 그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서울정도 6백년 서울지도전」은 바로 지도에 나타난 서울의 변화상을 통해 지도가 지닌 이같은 의미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성신여대박물관(관장 허영환)이 28일부터 4월25일까지 여는 이 전시회에는 조선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50종의 지도를 포함한 1백여종의 서울 관련 자료가 선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이미 지도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한반도의 모양이 실제와 비슷한 정도까지 파악되고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옛지도는 모두 조선시대 것이다.조선시대의 지도제작술은 천문도를 그리는 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태조4년(1395년)에 1천4백63개의 별을 그린 대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기술은 태종2년(1402년)에는 상당히 정확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까지 만들어 낼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72종의 서울지도가 만들어 진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번 전시회에는 그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 완성한 「대동여지도」의 제1첩인 「경조오부도」와 이보다 20년 앞서 만든 목판본 「수선전도」를 비롯,필사본으로 1780년대 만들어진 「한양도성도」와 「도성지도」등 30종이 출품된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국립지리원과 천문대 기상대의 기능을 합친 서운관과 도화서에서 정치·군사·산업·운수등 국가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출품된 지도 가운데 1394년 서울에 정도하고 경복궁 조성을 시작한뒤 그린 「경복궁도」나 1620년 경희궁을 완성하고 그린 「서궐도」등이 정치도에 해당한다면 1454년 인구 10만명인 서울을 5부49방으로 나눈 「경성도」는 행정도에 해당한다.또 1750년대 「도성삼군문분계지도」는 서울방위용 군사지도이며 1765년의 「사산금표도」는 벌목·매장·개간등의 금지지역을 표시했다.행정도인 「경성도」는 행정단위가 5부47방으로 바뀐 17 92년에는 「성시전도」가 제작되는등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새로 그려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시대 것 뿐 아니라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 만들어진 지도도 각각 10종씩 선을 보여 그동안 서울의 변화상을 확연하게 보여준다.예를 들어 1939년 제작된 「최신대경성전도」에 나타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일대의 거대한 모래사장은 1987년 만들어진 「서울특별시 행정안내도」에는 시가지로 변했다.
  • 무장서 동학혁명 1차기병(동학의 함성을 찾아서:3)

    ◎안핵사 폭거에 분노… 동학과 농민 결합 민란은 고부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다.바로 전해에는 전주와 익산에서,고부봉기 직후에는 순천과 영광등지에서 부사나 군수의 학정에 반발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는 일이 잇따랐다.고부의 경우는 다른 곳들과도 달랐다. 우선 전봉준이 고부관아를 습격했다는 소식은 태인 금구 부안 무장등 이웃지방으로 퍼져나가 농민들을 술렁거리게 했다.여기에 「고부민란」을 수습하라고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 이용태의 폭거는 군민들의 분노를 오히려 격화시켰다.그리고 고부봉기 이후 은신해있던 전봉준에게 모종의 결단을 부추겼다. 전봉준은 드디어 손화중과 최경선 김기범등과 함께 무장현에서 일어섰다.「보국안민을 위한 의거」임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선포했던 것이다.전봉준의 창의는 이웃 10개읍으로부터 호응을 받아 순식간에 수만명이 몰려들었다.동학교도가 아니면서도 갖가지 학정의 폐해에 지친 농민들이 상당수였다.동학과 일반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시작됐다.1894년4월의 일이었다.이것이 이른바 동학혁명 제1차기병이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호남창의대장소」로 명명한 고부 백산에 집결시켰다.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동도대장」이라고 쓴 흰깃발을 앞세우고 각 대오는 청황적백흑의 5색기를 들었다.전봉준은 서슬퍼런 행동강령을 선포했다.▲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할 것 ▲왜놈오랑캐를 몰아내어 성도를 밝힐 것 ▲서울로 달려가 권세를 쥐고 악정을 휘두르는 자들을 없앨 것등 4개항이 그것이다. 농민군의 백산 집결 소식에 전라감사 김문현의 명을 받은 향군·영병·보부상대가 백산을 포위했으나 농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물러섰다. 이에 김문현은 다시 혼성군 6천명을 보내 본격적인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그러나 황토현에서 1천여명의 사상자가 나는 참패를 당했을 뿐이었다. 백산·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했다.연이어 일대를 휩쓰니 감영의 병력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전봉준이 「창의문」 선포한 곳/고창서 30리…관아정문 예 그대로/무장은 어디있나 판소리후원자였던 신재효의 고택과 모양성이 있는 고창에서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쪽으로 30리쯤 가다보면 이제는 작은 면소재지가 된 무장에 닿는다. 전봉준등 농민군의 지도부가 창의문을 선포한 무장은 아마도 조선시대 현아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시 무장현 관아의 정문인 진무루는 시가지의 초입에서부터 눈에 띈다.진무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고색창연한 객사가 나그네를 맞는다.전봉준이 창의문을 선포한 곳이다.이 객사가 남아있기까지는 농민군과 내응한 무장현 이서들의 공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혁명 이후 농민군 연고를 없애기 위해 불태우려는 현감을 설득,혁명의 본격 발원지로 보존할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무장은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및 석정온천과 이웃한 지역.황토현전적지·백산·고부관아와 함께 고창일대를 묶으면 동학역사기행을 겸한 빠듯하지만 의미있는 1박2일의 여행코스가 된다.
  • 삽살개들의 당한 화/하지홍(굄돌)

    삽살개는 신령스런 개이다.예부터 불교문화권 안에서는 털 긴 개들을 귀하게 여기며 아끼던 전통들이 있어왔다.티베트의 라마사원에서 기르던 귀신쫓는 털 긴 사자개,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받으면서 왕궁에서만 길러졌다는 황금사자개 페키니스,일본 왕가나 신사를 지키는 신당수로서의 사자개 고마이누,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신라왕손 김교각스님이 데리고 다녔다는 신라의 삽살개.묘하게도 티베트 중국 일본 한국의 신령스런 개들은 모두가 사자개란 별명을 지닌 털 긴 개들인 것이다. 삽살개에 관한 옛기록들은 신라이후의 전 역사기간을 통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고려장수 유천매는 시 속에서,길들이기 어려운 북쪽말들에 대응하여 짖어대는 남쪽의 삽살개떼를 노래하고 있다.고려불화중 지장보살도를 보면 털이 많은 개가 등장하며,조선시대에 그려진 여러 그림속에서도 역시 털 긴 삽살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춘향전,숙향전,가사,민담등 여러곳에서 발견되는 삽살개는 우리 조상들의 정감에 깊이 연루되어있던 우리의 신령스런 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받던 우리의 삽살개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1930년대초 일본에서는 각 분야에서 자기것 찾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지역마다 특색있는 개들을 찾아내어 토산품종으로 정착시키는 일을 추진한다.아키다,도사,기주견,일본 스피츠등 10여종에 이르는 고유개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일제는 당시 식민지인 조선 반도의 개도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경성대의 모리교수가 1937년 한국을 방문한 후 1938년에 조선총독부는 모리의 추천에 따라 진도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케 된다.일본 기주견의 표준특징을 차용하여 이와 닮은 진도의 조선개를 진도개 순종으로 인정하고 닮지않은 개들을 대규모 도살하는,세계사 어디에도 그 유래가 없는 일을 해방에 이를때까지 한반도에서 추진한 것이다. 일본 왕가를 지켜주고 또 그들이 모신 온갖 신들을 지키고 있던 고마이누(고려개 또는 털많은 사자개)의 석상과 목상들은 바다건너 조선의 살아있는 고마이누인 삽살개들이 당한 화를 아는지 모르는지….역사의 아이러니는 묘하기만 하다.
  • 학교에서 「서명관습」 길러야 한다(최택만 경제평론)

    금융실명제를 실시한지 6개월이 지났다.실명제를 종합평가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당초 우려됐던 금융시장·증권시장·부동산시장에 대한 교란행위나 투기행위가 나타나지 않아 초기단계는 연착륙한 것으로 보인다. 실명제실시이후 걱정했던 경기침체 현상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실명제 정착을 위해 정부가 통화를 과감하게 풀면서 경기진작에 주력한 결과 경제성장률이 실명제 실시이전 보다 높아지고 경상수지도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선 것은 특이할 만한 일이다.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는 금융기관 일부 점포에서 실명위반 사건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이 제도를 널리 홍보하고 있고 시민들도 실시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같다. 이제부터는 초기단계의 연착륙을 발판으로하여 실명제 제도 자체를 정착시키는 데 우리 모두의 관심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실명제는 단순한 제도개혁이 아니고 돈거래에 관한 오랜 관습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정부조치나 제도와 같이 단기간에 정착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우리 국민은 돈거래가 노출되는 것을 아주 꺼리는 경향이 있다.이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유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에 일부 탐관오리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지주들로 부터 돈과 재물을 끌어 모으자 그들은 돈을 숨기는 데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일제치하에서는 총독부가 전쟁에 필요한 물자조달을 위해 우리기업인이나 지주들로 부터 강제로 성금을 받거나 재산을 헌납토록 함으로써 돈을 가진 사람들은 물론 일반서민까지 돈거래를 비밀리에 하는 습성이 길러지게 된 것이다. 해방이후에도 6·25 전쟁을 겪으면서 돈이나 값진 물건을 깊숙이 간직하는 습성이 그대로 전수되었다.근대적인 은행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일반인들이 돈을 금융기관에 예치하기 보다는 집안 금고에 넣어 두거나 사채거래를 선호했다.이런 관습이나 거래형태는 돈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과거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실명제 실시이후 그 이름이 한층더 유명해진 차명예금이나 도명예금은 과거의 비밀거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피해의식에다가 사채가 갖고 있는 고리의 매력이 금융기관 거래보다는 사채거래를 선호토록 했고 설사 금융기관을 통한 거래일지라도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관습이 습성화된 것 같다.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있는데도 차명거래와 도명거래가 존속하고 있는 것은 오랜 관습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실명제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고 금융거래에 관한 오랜 관행과 습성을 바꾸는 것이다.따라서 정책당국이나 금융기관은 예금에 대한 비밀을 반드시 보장하여 예금자가 갖고 있는 잠재적인 피해의식을 불식시켜야 한다.동시에 금융거래의 관습을 바꾸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특히 금융기관은 유교문화권에서 쓰고 있는 인장거래를 어떻게 하면 서명거래로 바꾸느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금융거래가 서명에 의해서 이루어질 경우 차명이나 도명거래는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그러나 서명거래를 일시에 실시하면 금융거래에 충격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상당기간 동안은 현재의 인장거래와병행해서 실시하되 서명거래 비율을 높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서명거래자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개발하는 한편 고의성이 있는 거액의 차명예금은 법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 차명거래를 해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는 한 현재의 차명예금은 줄어지지 않을 것이다.현재 차명거래를 하는 사람은 자기소득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다.법적인 제재가 없는한 이들은 차명거래를 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대책이 강구돼야 한다.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도 일부는법을 어기면서 차명예금을 할지도 모른다. 실명제를 활착시키는 최선의 길은 제도적 개선과 함께 관습을 바꾸는 것이다.관습은 어려서 고치는 것이 효과적이므로 학교에서 인장 대신 서명(Sign)을 쓰는 관습을 길러 주어야 한다.각급학교가 학생들의 인장사용을 없애고 서명을 유도한다면 서명문화의 정착이 예상보다 빨라질 것이다.오랜 관습을 바꾸는 것은 정부나 금융기관의 힘만으로 어렵다.실명제 실시 반년을 맞아 범국민적인 참여와 노력이 없이는 이 제도의 정착이 힘들다는 사실을국민 모두가 다시 확인했으면 한다.
  • 시인 이근배 그산하에 가다(동학의 함성을 찾아서:1)

    올해 2월10일은 동학혁명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가렴주구의 만석보 수세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18 94년 이날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쳐들어간 것이다.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미완의 혁명이었지만,그 정신은 우리의 자아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외세에 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요,부패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이기도 했다.서울신문사는 동학혁명 1백돌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격동의 현장에 취재팀을 보냈다.거기서 이근배시인은 대서사시를 쓰고,동행한 기자는 역사를 엮었다. ◎횃불 타오르다/「풀뿌리 혁명」 100년 서사시로 돼새긴다 해가 뜬다 둥둥 배들평야에 해가 뜬다 황토재에 해가 뜬다 갑오년의 해가 뜬다 전봉준의 해가 뜬다 흰옷 입은 백성들아 뜨는 해를 보아라 이 기쁜 설날 아침 가슴에 뭉친 설움일랑 털어버리고 천지신명께 비는 마음으로 뜨는 해를 보아라 오백년 왕조의 기둥뿌리는 썩어가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 설날이 와도 먹을 것이 없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꽝꽝 얼어붙은 배들평야녹이려 해가 뜬다 더냐 황토재 몰아치던 눈보라 쓸어내려 해가 뜬다 더냐 고을마다 백성들 피고름 짜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같은 탐관오리 천벌주려 뜬다 더냐 난리 난다 난리 난다 쥐불처럼 번지는 소문 틀어막으려 해가 뜬다 더냐 오냐 오냐 알겠다 다섯자 남짓 작은 키에 상투 쫓은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땅 새집 마을 한 귀퉁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눈 부릅뜨고 앉은 전봉준이 일어서라는 해로구나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일러주는 해로구나 아니다 아니다 전봉준이의 해는 백성이다 전봉준이의 하늘은 백성이다 전봉준이는 백성들의 가슴속을 본다 그 끓어오르는 설움을 본다 나라를 살리려는 붉은 마음을 본다 전봉준이는 산을 본다 들을 본다 이나라 백성들 말고 누가 이땅을 밟으랴 왜놈들이 어디라고 넘보느냐 양놈들이 어디라고 기웃거리느냐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 갓 마흔살 녹두 전봉준이 일어선다 서마지기 논밭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글방샌님 전봉준 동네 아이들 네댓 가르치고 무덤자리 골라주며 끼니를 이어가던 외톨배기 전봉준 남들 보기에는 그러했겠지만 사실은 녹두만큼 작은 덩치속에 해를 하나 품고 있었다 새 세상을 껴안고 있었다 백성들이 주인인 나라 백성들이 하늘 대접을 받는 나라 배달의 자손끼리 오손도손 깨를 쏟으며 사는 나라 전봉준은 새 나라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어둠속을 헤매이며 빛을 모으고 있었다 동학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1893년 계사년 음3월 초열흘은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스물아홉번째 제삿날이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 날을 맞아 보은 속리산자락 장내 마을에 전국 동학교도들을 집결시키라는 통유문을 팔도 각읍 접주들에게 내린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척왜양창의」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려고 대의로 일어선다 드높이 올린 깃발아래 2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충의대접주 손병희 충경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금구대접주 김덕명 정읍대접주 손화중… 보은 장내 집회가 있은지 열달 전봉준은 어둠속에서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정읍,금구,부안,태인을 오가며 곳곳에 불씨를 묻어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갑오년 음 정월 마침내 횃불에 불을 붙일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보은집회는 고부봉기의 “전야제”/사회변혁 시도한 세력의 애타는 몸짓/사상적 구심점 잃은 민중의 호응받아/보은에서 고부까지 약사 한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왕조가 해체되는 시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통치기강은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농민전쟁과 변란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렸다.여기에 이양선이라는 외국배들은 협박에 가까운 통상요구와 함께 약탈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즈음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급기야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돼 황제가 피란을 떠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실학도 역부족이었다.그러자 기층사회에는 정감록같은 도참사상과 후천개벽설이 구석구석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수운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 대응책을 구하고 나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서학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민중사상의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수용했다.그러나 최제우 당시 동학은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래서 동학혁명이란 곧 「사회변혁세력이 동학을 정치·사회운동으로 활용코자 했던 몸짓」으로 평가한다.19세기 변혁운동을 이어받고 있던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계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최시형의 북접계와는 달리 현실투쟁이 그 목표였다.전봉준계는 이를 위해 북접계를 끌어들여 남·북접이 연계되어 일본과 서구제국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의 대중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서 1893년3월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던 보은집회가 그것이다.북접이 남접의 뜻에 호응해「척왜양창의」를 내건 평화적 집회였다.그러나 같은 시간 전봉준의 남접계는 전라도 금구에서 따로 집회를 가졌다.보은의 교도들과 합세한뒤 제물포로 올라가 직접 위와 양을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금구집회도 4월2일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막을 내렸다. 1890년경 입교한 전봉준의 지도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세력이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893년4월 금구집회 해산에서부터 1894년2월 고부봉기까지는 바로 혁명의 기운을 결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혁명이 싹이 튼 땅/「척왜양창의」 깃발 흔적 간데없고/충북보은군 장내마을 가는길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는 동학혁명의 전야제라 할만한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보은에서 상주가는 길을 따라 20분쯤 달리다보면 면사무소와 농협을 표지판으로 쉽게 찾을수 있는 전형적인 면소재지이다. 장내는 현재 1백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요즈음의 지리감각으로는 왜 이곳에서 그같은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다.그러나 장내는 남으로는 영동,동으로는 상주,서로는 옥천·대전,북으로는 청주가 모두 1백여리 상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에서는 이제 서쪽의 옥녀봉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삼가천을 경계로 농성하던 2만 동학교도들의 주문외는 소리와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깃발의 흔적은 찾을수 없다.다만 속리산 쪽을 향해 마을을 2백∼3백m쯤 벗어난 왼쪽 논 사이에 남아있는 동학교도들의 얕은 돌성만이 지나간 역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삼가천 너머에 있는 선씨 문중 아흔아홉간 고옥은 옥녀봉과의 절묘한 구도로 찾는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 다리:상/구릉·계곡따라 80여개 산재(서울 6백년 만상:10)

    ◎영제­옥천­금천교 궁중위험 갖춘 “조형예술”/세종때 건립 수표교는 치수의 지혜 엿보여 다리는 떨어진 두곳을 잇는 매개체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단순히 지나는 곳만이 아닌 「만남」의 중심이요 무대인 것이다. 그해 신수가 좋아진다고 믿으며 정월 대보름달 아래서 청춘남녀들이 즐긴 다리밟기와 불가에서 절을 지을 때 속세와 불국토,즉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믿고 다리를 함께 놓은 것에서 다리의 이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다리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강이나 개천 또는 언덕과 산을 쉽고 편하게 건너거나 넘기 위해 놓여진 것이다.오늘날 토목학자들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 가운데에 가장 길고 큰 것이 다리이기에 다리를 「토목구조물의 꽃」이라 일컫는다.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서울은 한복판에 청계천이 흐르는등 구릉과 계곡이 많아 다리 역시 많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서울에 얼마나 많은 수의 다리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선조 고종때를 전후해 작성된「한경식략동국여지승람」 「수전지도」 「서울지도」등에 따르면 서울에 산재해 있던 다리는 성안 76개,성밖 10개등 대략 86개로 알려지고 있다.경복궁의 영제교를 비롯,창경궁의 옥천교,창덕궁 금천교등 궁궐안 다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다리들은 정전에 이르는 외당앞에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위에 건설된 것이어서 단순한 다리기능외에 다양한 조형미를 연출한 예술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제교는 다리바닥의 가운데가 높은 어도이고 좌우는 낮은 삼도로 이뤄져 신분에 맞게 다니도록 했다.폭이 10.2m로 어가의 행렬이 지나는데 꼭 맞고 난간과 멍엣돌에는 재앙을 막고 왕조를 지키기 위해 귀면이나 석수를 조각했다. 영제교는 새 왕조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경복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원래 근정전앞 총독부청사 뒤쪽에 있었으나 일제가 총독부건물을 지으면서 헐렸다 지난 74년 복원됐다. 궁중다리 가운데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옥천교 역시 삼도로 되어 있으며 중앙의 벽면에 삼각형 모양의 귀면을 조각해 벽사시설을 했다.창덕궁 금천교는 1411년에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한 현존하는 궁안의 돌다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난간 밖으로 내민 멍엣돌에 용두상이 조각돼 있다. 그러나 시정의 일반시민들의 귀에 가장 익은 다리이름은 아마도 수표교일 것이다. 수표동 43번지와 관수동 152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이 다리는 1420년 세종때 건설될 당시의 이름은 마전교였다.그러다 세종 23년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리 돌기둥에 「경진지평」넉자를 새겨 수표석을 세워 수량을 측정하면서 수표교로 불리게 됐다.청계천복개에 따라 철거된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안에,수표는 홍릉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졌다 현재는 여주 영릉에 보존돼 있다.이 다리는 교각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네모와 육모기둥의 석재를 2단으로 세워 우리 조상들의 이수·치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서울의 다리로 살곶이다리를 빼놓을 수 없다.한자말로는 전곳교인 이 다리는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남쪽에 위치한 돌다리로 살곶이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폭 5.95m,길이 75.75m로 조선시대에 세운 교량으로는 가장 긴 살곶이다리는 세종 21년(1439년)에 가교공사를 시작했으나 진척이 지지부진하다 착공 60여년만인 성종 14년(1483년)에야 승려들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완성했다.기록에는 『스님이 살곶이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하였다』고 전한다.대원군때 경복궁을 지으면서 모자라는 석재를 보충하기 위해 살곶이다리의 석재 절반을 갖다 쓴데다 1920년 장마에 떠내려가 폐교상태였다 지난 77년 서울시가 복원했다. 이름없는 수많은 다리와 달리 한강에 다리가 생겨나고 서울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한강교량의 건설이 서울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게 되면서 다리는 통행로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다.
  • 2월의 문화인물/황희 선생/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청백리 사표

    ◎생애·업적 재조명 기념행사 잇달아 문화체육부는 2월의 문화인물로 조선시대 명재상인 황희선생을 선정했다. 문체부는 바람직한 공직자상 정립의 일환으로 2월을 「황희의 달」로 정해 청백리의 사표인 황희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한편 위국애민의 정신을 재조명하므로 오늘의 교훈으로 삼기위해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한국문화예술진흥원등 관련단체와 함께 학술대회,백일장,기념도서발간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황희선생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일생을 청렴한 생활로 일관하며 백성을 위해 바른 국정을 펴므로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져 세종시대의 황금기를 이룬 청백이이다. 황희선생은 온화하고 도량이 넓은 성품으로 백성으로 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검소하고 청렴한 공직자세는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황희의 달인 2월 한달동안 펼쳐질 주요행사는 다음과 같다. ▲종합학술대회=16일,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 ▲방촌사상 학술 강연회=23∼25일,파주군청 회의실. ▲황희의 생애와 사상 강연회=19일,국립중앙박물관 회의실. ▲청백리 황희정승 토론회=25일,전북 한약협회 회의실. ▲황희 청빈사상 강연회=18일,옥구문화원. ▲방촌선생 유덕추앙 글짓기 공모전=1∼19일,파주문화원. ▲황희선생 관련도서 전시회=1∼28일,국립중앙도서관 로비. ▲책자발간=「황희선생의 사상과 얼」,경기도 주관,2월중.
  • 장터:상/조선왕조 천도후 종로에 시전 설치(서울 6백년 만상:7)

    ◎2천간 규모… 관주도 독점상권 형성/어물 등 6개조합… 육의전으로 불려/남대문밖 칠패·동대문 배오개장터 유명 예나 지금이나 장터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가장 진하게 스며있는 곳이다. 「남이 장에 가니까 씨 오쟁이 떼어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터에는 모두를 설레게 하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애환도 많고 또 풍성함의 이면에는 가난한 자의 한숨도 흐른다.한편에서는 흥정이 깨져 고성이 오가고 바로 곁에서는 또 만병통치약장수의 사탕발림 달변에 폭소가 터지기도 한다.소박한 시골아낙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후리려는 야바위꾼과 소매치기들도 설쳐대는 천태만상의 곳이 바로 장터다. 오만가지 인간군상들이 서로 얽혀 어깨를 비벼가며 사는 장터는 한마디로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수 있으며 그래서 장터의 역사는 곧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대변한다.서울 장터의 역사는 한양천도 가까이로 거슬러 올라간다.천도를 단행한 조선왕조는 궁궐과 관아를 지어 정도의 기틀이 어느정도 잡히자 곧 상가건설에 착수,정종 원년(1399)부터 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2천간 안팎의 시전을 세웠다.현재 보신각이 있는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로 연건동과 광화문우체국,남북으로 을지로2가와 안국동에 걸쳐 자리잡은 이들 시전의 관허상인들은 관에 임대료인 행랑세를 내는 대가로 독점판매권(금란전권)을 거머쥐었다.이때부터 종로거리는 전국 최대의 상거래지역으로 자리잡게 되고 인조 15년(1638)에 이르러서는 이들 시전상인들이 취급품목별로 입·면포·내외어물·지·저포·청포전등 6개의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으로 불리면서 18세기 초까지 조선의 상권을 지배한다. 이들은 성안 사람들의 생필품을 조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관의 보호를 받아가며 관수품과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의 공급기능을 맡았다. 이들 종로의 시전상인들이 관주도의 상거래를 장악해가는 동안 지방에서는 닷새장제도가 생겨나고 서울에서도 성문근처를 비롯한 도성내 곳곳에 자연발생적으로 장터가 생겨났다.그 대표적인 것으로 동대문근처 배오개장(이현·현 광장시장자리),남대문밖 칠배장(현 봉래동일대)이 있다.이 두 장터의 형성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종로에 시전이 자리잡힌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들은 오늘날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모태를 이루면서 동시에 서민장터의 쌍벽이 되어 한국 상거래사의 한장을 이룬다. 서울의 물산시장을 가리켜 「동부채칠배어」라는 말이 있다.이는 동대문근처 배오개장에는 과일·채소가 많고 남대문밖 칠패에는 생선이 많아서 생긴 말이다.또 「왕십리 미나리장수는 목덜미가 검고 마포 생선장수는 얼굴이 새까맣다」는 말도 유행했다.왕십리 미나리장수는 아침햇살을 등지고 동대문으로 향해 목덜미만 검게 타고 마포 생선장수는 반대로 햇볕을 안고 남대문으로 향해 얼굴이 타서 나온 말이다. 처음 배오개와 칠패장의 상거래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시전의 금난전권 행사로 상설점포를 갖지 못한데다 그 위세에 눌려 상품마저 마음대로 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장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당시의 장터에서는 오늘날 서울시내 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목격되는 단속반과 노점상들의숨바꼭질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사회현상의 변화가 더뎠듯이 상업활동의 변화도 느린 속도로 진행됐다.그러나 18세기에 들면서는 저자거리에도 한바탕 돌풍이 일었다.인구의 증가로 시장규모가 커진데다 금속화폐의 유통으로 상거래형태가 보다 복잡해지자 관주도 상업활동은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시전상인들의 위세에 눌리면서도 꾸준히 부를 축적해온 사상들은 이 때를 맞아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에 정면으로 도전,마침내 정조 15년(1571) 신해통공조치로 시전상인들의 모든 특권을 철폐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에따라 18세기 중반부터 서울 상권의 무게중심은 종로로부터 성밖 나루터와 남대문·동대문의 양대장터로 옮겨가게 된다.바야흐로 장터의 남대문·동대문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 「블루 시걸」/첫 성인 만화영화 해외진출 노린다

    ◎용성시네콤,새달초 촬영/세계수준의 기술인력 동원/제작비 15억원… 미·일 하청 탈피계기로/여성미 영상화… “대의와 사랑 보여줄것” 국내 최초로 성인용 만화영화가 제작된다.용성시네콤(대표 김종성)과 만화영화제작사 애니피아(대표 오중일감독)가 손을 잡고 제작에 착수한 「블루 시걸」(Blue Seagull)이 화제의 작품.직역하면 「외로운 갈매기」이지만 우리말로는 「고독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미국으로 밀반출된 조선시대의 보검을 찾기위해 마피아와 전쟁을 벌이는 하일이라는 청년과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그의 연인 채린이 주요 등장인물.이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대의와 사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제작의도다. 오는 2월초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가 추석쯤 개봉하고 해외영화제에도 출품한다는 계획.제작비는 15억원 안팎을 예상하고 있다.작가 김경우씨의 시나리오를 기초로 수십차례 수정작업을 가졌으며,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국 홍콩 일본 현지를 답사했다. 제작 초기단계부터 이 영화가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아무래도「성인용」이라는데 있다.이에대해 오중일감독(46)은 『상상력이 가미되는 만큼,일반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체의 아름다운 굴곡과 연인들의 품위있는 사랑을 볼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포르노영화를 연상하면 곤란하다』고 밝혔다.또한 어린이용 만화영화에 엄청난 물량을 투입하는 미국·일본작품과의 경쟁이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또다른 이유는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수준있는 만화영화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오중일감독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지 자본뿐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수준의 제작기법과 실력있는 애니메이터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자금이 없어 외국의 하청작업에만 참여해왔다는 것이 오씨의 설명이다.그는 사실 지난73년부터 20여년간 미국과 일본의 TV만화영화 제작에 참여해오면서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이 작품은 그 성공여하에 따라 우리 영화계가 해외시장 개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2조8천억원 규모로 평가되는 만화영화시장은 일본이 65% 정도를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또 이처럼 일본이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인 배우가 출연하는 극영화로는 세계시장 개척에 어려움이 많다는 판단아래 만화영화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때문에 우리도 이 분야에 정성을 쏟으면 세계시장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 백제왕족 수레 복원길 열린다

    ◎부여 궁남지서 발굴된 나무조각 용도 규명 계기/“직경 140∼150㎝ 수레바퀴 조각” 결론/전문가,“농사용보다 커 귀족의 용품”/인근 부소산성서 수레용 금동장식도 발굴… 가능성 높여 사비시대(AD538∼660년) 백제의 왕이 타던 수레의 바퀴인가,아니면 평범한 농사용 오차의 바퀴였을까.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해말 부여 궁남지에서 발굴한 수레바퀴의 용도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수레바퀴는 지난해 12월29일 궁남지 발굴작업 당시에는 목선의 부재인지 바퀴조각인지가 채 규명이 되지않았다.함께 출토된 특이한 형태의 새(조)모양목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가치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부여박물관의 실측 결과 이 나무조각은 직경 1m40㎝∼1m50㎝짜리 대형수레바퀴의 부재라는 결론을 얻었다.이는 삼국시대 유적가운데서 최초의 수레바퀴로 밝혀졌다. 한국 고대사회의 수레는 현재 두방향에서 찾아볼수 있다.첫번째는 4세기 중반의 안악3호분등 모두 10여개가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나온다.또 하나는 기원전 1∼2세기 위만조선시대의 마차.이것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카우치 마쓰다네교수가 위만조선시대의 차축이 발굴되자 이를 근거로 1979년에 당시의 마차를 추정해 복원한 그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수레와 마쓰다네가 복원한 위만조선의 수레는 모두 두바퀴 짜리로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다만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수레는 모두 한마리의 소가 끄는 반면 위만조선의 수레는 두마리의 말이 끈다.또 햇빛가리개가 고구려 것은 넓은 채양을 단 반면 복원된 그림에서는 일산을 달고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 서울대고고학과 최몽용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형태의 수레는 한대의 것이 한반도에 들어온뒤 위만조선과 낙랑을 거쳐 삼국시대까지 일반적인 왕족 또는 귀족들이 타는 수레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다.따라서 백제시대 당시에도 왕 또는 귀족이 타던 수레라면 이와 비슷한 모양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궁남지에서 출토된 바퀴가 높은 신분층이 타던 수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이에대해 신광섭부여박물관장은 『농사용 수레는 수레바닥이 낮아야 짐을 싣고부리기에 편하기 때문에 바퀴의 높이 또한 1m20㎝ 안팎인 것이 보통』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아직은 무어라 확언할수는 없지만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수레바퀴를 소의 크기와 비교하면 축척상 농사용보다 상당히 크다는 점에서 궁남지의 바퀴는 일단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쓰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최근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굴한 금동일산살대투겁(김동개궁모)의 한자 뜻은 수레에 달린 일산꽂이장식이라는 점에서 이 수레바퀴와 관련해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이 일산꽂이장식은 특히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서 적어도 왕족 이상 신분을 가진 사람의 용품으로 추정된다.또 궁남지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옛부여박물관 자리에서 일직선상에 자리잡은 이궁의 정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때 궁남지 수레바퀴의 발굴은 비록 4조각의 나무조각에 불과하지만 사비시대 백제왕족의 화려한 수레를 복원할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 「박문수 영정」 보물 지정/문체부/「묘법연화경」 등 7건도

    문화체육부는 최근 조선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1691∼1756년)의 영정등 8건을 보물 1189∼1196호로 지정했다. 지정된 보물은 △박문수 영정 1189호△전 오자치 영정 1190호△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제30 1191호△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제38 1192호△상교정본자비도장참법 권 제1­51193호△묘법련화경 권 제2 1194호△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 권 제9­10 1195호△묘법련화경 권 제1­7 1196호등 8건이다. 「박문수 영정」은 분무공신상으로 38세때의 모습등 2폭으로 조선후기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제30」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사및 인쇄술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제38」은 동진의 불화발타라가 한역한 60권본 화엄경가운데 제38권으로 고려말의 중요한 서지학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묘법련화경 권 제2」는 조선시대 가장 널리 알려진 불경으로 조선초기 불서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묘법련화경 권 제1­7」은 조선 세조1년(1456년)에 찍어낸 것으로 초간본은 아니나 판본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완질본이어서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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