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시대
    2026-01-22
    검색기록 지우기
  • 4대 그룹
    2026-01-22
    검색기록 지우기
  • 금천구
    2026-01-22
    검색기록 지우기
  • 광주시민
    2026-01-22
    검색기록 지우기
  • 양적완화
    2026-01-2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47
  •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서울논단)

    오늘은 일흔일곱해째를 맞는 3·1절이다.만만치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역사에 각인된 그날이 조금도 마모한 흔적이 없다.더구나 일본이 우리 동해 먼 바다의 섬 독도를 이러쿵저러쿵하는 통에 더욱 새로워질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일본의 망언을 못된 잠꼬대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요즘 일본 고위관료들의 잇따른 망언은 사정이 달랐다.어떤 계략을 망언의 복선으로 깔았다는 사실이 이내 드러나고 말았다.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면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한다는 것이 그 계략이었던 것이다.주권국가의 영토를 넘보는 일본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극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따위의 감상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차원을 넘어섰다.독도문제는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어 스스로 지키지 않을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한 느낌이다.그래서 세개의 작은 바위섬이 뚜렷하게 떠올랐고,옹색한 섬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졌다.그 절해고도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국토 사랑에 있다.머나먼 섬일지라도 마음속에 좀더 가까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국민 누구인들 독도를 생각하지 않을까마는 어민들의 심정을 더 헤아려본다.남쪽 제주도 북제주군 어민들이 일본 망언을 규탄하러 독도로 떠날 것이라는 뉴스가 며칠전 신문에 났다.선조들이 띠배를 저어 파도와 싸우면서 바다를 지켰을 때 입었던 제주도 전통의 갈옷차림으로 떠날 것이라고 했다.독도를 지키지 않으면 생존의 터전 동해어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뱃길을 재촉했을 어민들의 절박한 얼굴을 보는듯 눈에 선하다. 조선시대 숙종때 부산사람 어부 안용복은 일찍 독도에 눈을 돌렸다.태어나고 죽은 연대가 불분명한 하찮은 신분이었지만 그는 선각자였다.16 93∼96년까지 울릉도·독도 근해에 출어하면서 몰래 고기를 잡는 일본어민을 힐책하고 배를 내쫓았다.심지어는 일본어선을 추격,일본땅에 들어가 담판까지 지은 인물이다.그뿐이 아니라 근래에도 독도를 지킨 민간인들이 있다.삼대에 걸쳐 울릉도에 살면서 19 53년 독도의용대를 조직한 홍순칠이라는 이가 바로 그다. 오늘날 주권국가들이 선포를 서두르는 EEZ도 수산자원과 해저광물자원을 보존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특히 수산자원은 해저광물자원에 비해 곧바로 손을 댈 수 있는 가시자원이어서 우선은 수산자원을 중시하는 경향이다.그래서 수산업계의 어민들의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 EEZ라 할 수 있다.일본이 만약 독도를 기선으로 EEZ를 설정한다면 어민들의 장래는 뻔한 것이다. 그러나 경상북도 울릉군 도동 3번지 독도는 사수의지가 살아있는 한 엄연한 우리땅이다.고대 사료나 영유권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만든 각종 관찬자료는 이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또 지리나 지질학,국제법과 같은 현대학문을 동원해도 우리가 독도를 영유하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그리고 독도를 늘 임시 어로기지로 삼았던 울릉도 사람들은 독도를 가지도라 했다.울릉도 방언으로 물개가 「가제」니까,가지도는 물개가 많은 울릉도 말의 우리 섬인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일러 부르는 다케시마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일본의 왜구들은 중·근세를 통해 노략질한 우리땅 모두를 뭉뚱그려 다케시마라고 하지 않았던가.침략의 치부만을 드러내는 의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아무쪼록 일본은 2일 한·일 정상의 방콕대좌에서 우리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바란다.그것은 과거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자 아시아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 재미 일본어연구가 박병식씨 서울신문 뉴스넷 보고 기고

    ◎“독도는 어원으로도 한국 땅”/조선인들,울릉도·독도 포함해 우산국으로 불러/일본의 죽도(다케시마)는 우산국 이두음의 일본식 발음 독도를 부르는 일본식 이름 「다케시마(죽도)」는 우리말에서 비롯됐으며,따라서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태도는 근본적으로 허구임을 지적한 주장이 나왔다.현재 미국에서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박병식씨(66)는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전송되는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에서 독도 관련 보도를 접한후 21일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실에 보낸 기고문에서 다케시마가 독도의 조선시대 표기 가운데 하나인 「무릉」에서 나왔음을 설명했다.박씨는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다 지난 8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그곳에서 「야마토언어와 고대조선어」,「일본어의 비극」등 일본어 어원을 활용해 한일고대관계를 밝힌 논문·책 20여종을 냈다.그의 기고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일본인들은 17세기 초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로 불렀고 나중에는 「다케시마(죽도)」라고 불러왔다.바윗덩어리나 다름없는 섬,소나무나 대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섬을 일본인들이 소나무섬(송도)또는 대나무섬(죽도)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일본인이 독도를 다케시마나 마쓰시마로 부른 까닭을 어원으로 따져보면 그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섬이다.그래서 울릉도에 속한 섬쯤으로 여겨졌고,조선 중기 「독도」라는 이름을 따로 갖기까지는 울릉도가 곧 독도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울릉도의 첫이름은 「우산국」으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이두이다.우산국의 「우」는 「우/오」라는 우리말 발음을,「산」은 「마/무(뫼의 옛말)」라는 뜻을 각각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또 울릉도의 「울」은 「우/오」,능은 「리/라」를 의미한다.곧 「우산」은 「우마」,「울릉」은 「우리/우라」라는 말을 한자로 쓴 데 지나지 않는다.우리 옛말에서 「우/오」는 「위(상)」또는 「크다(대)」는 의미이고,「마」는 「뫼(산)」를 뜻한다.또 「리/라」는 「신성함」을 나타냈다.따라서 「우마(우산)」는 「(바다에 우뚝 선)큰산 같은 섬」,「우리/우라(울릉)」는 「크고(또는 높고)신성한 섬」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일본 「대일본지명사서」에도 『울릉도를 조선사람이 「우마」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섬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 중기이후 역사책·지도에서 「무릉」이라고도 표기됐다.「무」는 「무(마)」,「릉」은 「리/라」이니 「무릉」도 결국 「무리/무라=신성한 산」이란 의미로 「우산」 「울릉」과 별차이가 없다.이 「무릉」에서 일본이름 「마쓰(송)」와 「다케(죽)」가 나왔다.「무리(무릉)」란 발음은 일본으로 건너가 「마르」,다시 「마쓰」로 바뀌었다.「마쓰」를 일본 한자로 표기한 것이 「송」이다. 「무릉」은 또한번 재주를 넘는다.이번에는 일본인들이 한자음대로 읽어 「다케루」라 한 것이다.「다케루」는 「다케」로 발음이 줄었고,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죽(다케)」다.정리하면 「마쓰시마」의 「마쓰」는 「무릉=무리」란 우리말 발음에서,「다케시마」의 「다케」는 한자말 「무릉」을 저들 한자음대로읽은데서 나온 이름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나무 한그루 변변히 없는 섬 독도가 한때는 「마쓰시마(송도)」로,지금은 「다케시마(죽도)」로 불린 원인을 일본인들이 안다면 지금처럼 억지주장을 되풀이하지는 못할 것이다.이름으로 봐도 독도는 엄연한 우리땅이다.
  • “독도는 우리 땅” 변할 수 없다/국내외 고지도로 본 영유권

    ◎문헌·지질학상으로도 우리 영토/동국여지승람 등 국내자료 다수/풍신수길 지시로 제작… “독도는 조선땅”­일 팔도총보/표준지도 66년판부터 우리이름 표기­미 지리학회 독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땅이다.이는 단순히 민족감정에 바탕둔 주장의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고문헌이 입증해주는 사실이다.그 가운데서도 특히 옛날지도들은 「독도는 우리땅」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또한 지질학·지구물리학등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독도는 우리땅으로 입증되고 있다.고문헌과 지형학을 통해 독도 영유권을 살펴본다. 지난 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선역도」와 유럽지도 2점이 발견됐다.모두 17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중 한국땅을 도별로 그린 「선역도」는 강원도편에 독도를 옛 명칭인 「우산도」로 표기하고 울릉도 바깥쪽에 정확히 그려넣었다.또 상단에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이 동해 한복판(정동해중)에 있으며 조선 성종왕이 울릉도근처에 따로 삼봉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내용이한문으로 적혀 있다.함께 발견된 유럽지도에는 동해를 「한국해」(MerdelaCoree)라고 표시했다. 충남 부여에서 93년 발견된 가로 72㎝,세로 1백15㎝ 크기의 「해좌전도」도 선역도와 마찬가지로 울릉도 옆에 독도를 「우산」으로 표기해놓았으며 「울릉도는 본시 우산국으로 신라시대 이사부가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을 한자로 기록했다.이밖에 「동국지도」「조선팔도고금총도」가 독도가 우리땅임을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제작한 지도에도 독도는 한국영토로 표시돼 있다.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일본 텐리(천이)대에서 입수,지난 3일 공개한 「일본변계약도」는 일본이 독도가 한국땅임을 인정한 흔치 않은 증거다.동해를 「조선해」로,독도를 울릉도의 옛 명칭인 「우산도」로 쓴 이 지도는 에도막부시절인 1809년 서양식 측지법에 따라 처음으로 제작된 것.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부하 장수를 시켜 만든 「팔도총도」도 독도를 조선땅으로 명기한 것으로 지난 14일 서지연구가 이종학씨에 의해 밝혀진바 있다. 성균관대 최박광 교수가 갖고 있는 「한상 성차여향」은 1720년 일본 교토(경도) 유지헌 서림에서 간행한 책자.이 자료는 당시 대마도에서 조선에 대한 외교창구 노릇을 한 「우삼방주」란 사람이 울릉도를 둘러싼 조선·일본간 외교마찰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여기 첨부된 지도에 울릉도는 독도 바깥쪽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됐고,그때 일본이 울릉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한 만큼 한반도에 더 가깝게 표시된 독도는 당연히 조선땅으로 보았음을 알려준다.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1845∼6년쯤 프랑스어로 기록한 「조선전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들어가 있고 독도는 옛 지명인 「Ousan(우산)」으로 표기했다. 이 지도는 당시 사람의 영토관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그러나 더욱 중요한 물증은 정부 공식지도인 「관찬지도」다.조선시대 관찬지도로는 현재 세종때 만든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성종때의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동국여지도·원명 팔도총도」등이 남아 있다.이 지도들이독도를 우리땅으로 기록한 것은 물론이다. 여지란 일정지역 지명을 그대로 실은 것으로 생산자원분포에 따른 조세재원을 파악하거나 지방행정권한을 명시하는 의미가 강하다.한반도주변에 독도와 비슷한 크기의 이름 없는 섬이 3천5백여개 있는데도 독도만을 여지에 표기한 것은 당시 정부가 독도의 가치를 중시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울릉도·독도주변에서는 해산물이 다양하게 많이 잡혀 경제성이 높으므로 정부의 행정력이 미친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따라서 정부가 행정력을 행사했고,그 사실이 지도로써 표시된 사실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주장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이와 관련,국경연구단체인 토문회 양태진 회장(57)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독도영유권을 우리가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제작시기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 관찬지도를 근거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현재 세계는 독도를 어느 나라 땅으로 보고 있을까.미국 지리학회(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가 발간하는 세계표준지도는 독도를 한국땅에 포함시키고 있다.또 지난 65년까지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시했지만 그 다음해부터는 우리 이름인 독도로 표기하고 있다.
  • 중요민속자료 3종 지정

    ◎산천 전주최씨 상여/홍성 엄찬 고택/해남 윤두서 고택 문화체육부는 10일 「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를 중요민속자료 제230호,「홍성엄찬고택」을 중요민속자료 제231호,「해남윤두서고택」을 중요민속자료 제232호로 각각 지정했다. 경남 산청군의 만석꾼 필주공의 상여인 「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는 제작연대(1856년)가 분명하고 지금까지 지정되거나 발견된 상여와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있다.조선시대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은 뒤주간과 다락구성,대청나락뒤주등 당시 전통가옥의 독특한 구조양식을 보여준다.또 정선,심사정과 함께 조선 3재의 한 사람인 윤두서가 살던 집은 1670년 건립된 전통가옥으로 안채의 평면구성과 견실한 결구방식 등이 전통주거생활의 옛 모습을 그대로 찾아볼 수 있게 한다.
  • 전북 부안 동문안 돌장승(한국인의 얼굴:62)

    ◎갓 쓰고 마을가는 이웃집 할아버지상/수장승이 암장승보다 키 작고 몸도 여려 한국의 인상이 각인된 풍물의 하나인 장승에는 가식이나 허식이 없는 어줍은 솜씨가 깃들였다.장승에서 자연스럽고도 소박한 민예의 정감이 우러나는 까닭도 여기있다.그런데 나무장승은 비바람에 오래 견디어 내지 못하는 수명의 한계성을 지녔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 돌장승이다. 돌장승은 조선후기인 17세기말부터 18세기전반에 걸치는 시기에 나타났다.돌장승에 새긴 기명이나 관련자료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의 돌장승은 전북 부안군 부안읍내 두 군데에 자리한 돌장승들이다.이 가운데 조선시대의 부안읍성동문 청원루에서 가까운 부안읍 동중리3구의 돌장승 한쌍 동문안 장승이 있다.장승 유형을 굳이 분류하면 읍장승이라 할 수 있다.옛 고을에 읍성을 쌓고 그 앞에다 세운 장승이기 때문이다. 이들 암수 돌장승 한쌍은 동문안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모두 화강석으로 투박하게 깎아 기대석 위에 세웠다.여기 사람들은 수장승은 당산하나씨,암장승은 당산할머니라고 불렀다.당산하나씨 수장승은 당산할머니 암장승보다 50여㎝정도 작은 1백80㎝의 키를 했다.몸둘레도 수장승이 더 가늘다.수장승과 암장승에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이라고 각각 오목새김한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수장승은 벙거지를 썼다.몸전체에 굴곡이 진 쪽도 수장승이다.암장승의 네모꼴 기둥형 몸통에 비해 동적 유연성이 수장승에서 더 엿보였다.얼굴은 달걀형으로 갸름한데 이마에는 백호를 새겼다.양쪽 귀는 본래 실했던듯 싶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눈가장자리를 깊게 오목새김으로 파놓아 눈망울이 주먹만하게 보이고 이빨을 드러냈다.그리고 큼직한 콧방울께서 시작한 돋을새김 볼록선을 귓가를 향해 돌렸다.얼핏 수염인가 했으나 사실은 볼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표현기법임이 이내 드러났다. 커다란 눈망울 위에 바짝 붙은 눈썹이 무척 가늘다.그래서 수장승 당산하나씨가 무섭잖게 보이는데 눈썹이 한몫을 거들었다.수장승에 비록 신성을 가미했겠지만 그저 갓쓰고 마을가는 부안사람 할아버지 표정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현존하는 돌장승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룹에 속한다.그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간접적 징표가 있다. 이들 동중리 동문안 돌장승과 같은 시기에 세웠을 서외리 서문안 장승과 솟대당산 석간석의 새김글씨가 그것이다.이 석간석에는 청나라 연호로 강희 28년에 세웠다고 기록했다. 1689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서문안 장승을 세우면서 같은 때 동문안 장승도 읍장승으로 함께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동문안 장승을 일러 문지기장군이라 하는 것은 부안읍성 축조 당시 이미 지킴기능을 부여한 흔적일 것이다. 이들 돌장승 한쌍은 나이가 꽤 들어서인지 성에는 관대한 모양이다.정월 보름께 당산제 제의놀이로 그 앞에서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할 때면 서로 심한 음담이 흉허물없이 오간다는 것이다.
  • 「초·중등 필수과목 국사 제외」 논란/교개위에 관련학회 강력반발

    ◎사학회­“사회교과로 편입은 신한국 창조 역행”/교개위­“국정지표 세계화… 특정 교과 이기주의” 한국사연구회·한국고고학회 등 한국사관련 14개 학회및 단체는 7일 최근 교육개혁위원회가 마련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개혁방안에서 국사과목이 필수과목에서 제외된 것에 반발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단체들은 성명을 통해 『교육개혁위원회가 국사를 독립된 필수 교과목에서 통합사회교과의 일부로 다루기로 결정한 것은 신한국 창조의 주역이 될 국민을 양성하는데 역행하는 조치』라면서 『국사를 필수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꾸는 것은 민족혼을 쓰러트리는 행위이며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정책과 상반되는 행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남북한의 역사 연구가 갈수록 이질화 경향을 보이는 시점에서 고교에서조차 역사를 외면함은 인접 국가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정신적 패배를 자초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세계화 추진과정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국사교육을 강화할 것과 ▲민족통일을 위한 밑거름인 국사연구의 객관성유지와 보급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국사교과 독립 및 충실한 교육방안 강구를 촉구했다. 이날 성명에는 한국고고학회·한국사연구회·역사학회·역사교육학회·한국사학회·진단학회·한국미술사학회·한국고문서학회·한국경제사학회·한국고대학회·한국중세사연구회·한국과학사학회·조선시대사연구회·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등이 참여했다. 오는 97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새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혁방안은 기존의 제6차 교육과정과는 달리 고교과정에서 국사를 독립된 필수과목이 아닌 통합사회교과의 일부내용으로 다루도록 하고 있다.따라서 고교 2·3학년 인문영역과목에서 국사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국사가 고교의 전 교과과정에서 배제되게 돼있다.선택과목인 인문영역과목은 역사 1·2,국사 1·2,세계사 1·2,유럽사,미국사,중국사,근대사,현대사,역사고전,윤리,철학,철학고전,논리학,논리와 컴퓨터,종교등으로 분류돼 있다. 이와 관련,최충옥교육개혁위원회전문위원(46)은 『세계화라는 국정지표를 고려할 때 교육 담당자 측면에 집중됐던 국사교육을 피교육인 학생 입장에서 고려한 방안』이라면서 『특정 교과 이기주의에 빠진 집단적 행동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과기원/첨단기술단지 건립/97년까지 대덕연구단지에

    ◎기술혁신·산학교류센터 등 설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오는 97년말까지 1천2백억원의 건설비를 투입,대덕연구단지의 산학연 협동연구 구심체 역할을 할 첨단기술종합단지(KAIST High­Tech Complex,KAIST­HTC)를 건립하기로 했다. 3일 한국과학기술원에 따르면 이 단지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술혁신센터(TIC)와 첨단기술창업 보육센터(TBI)의 활동을 지원하고 신기술 창업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기존 KAIST의 TIC부지에 건립해 KAIST,대덕연구단지내의 출연기관 및 민간연구기관,TBI 입주 기업들에게 제공된다. HTC는 첨단 지능형 복합건물로 연건평 1만2천평,15층 쌍둥이 빌딩으로 지어지며 기술혁신센터 6천6백평,첨단기술창업교육센터 1천5백평,산학교류센터 3천평,부대시설 6백평 등 총 4개부문으로 구성된다.빌딩내 공간은 입주 기업들에게 20년간 사용권을 주는 방식으로 기여 분양되며 대덕연구단지내 연구기관과 입주기업들의 협의체가 구성돼 운영될 예정이다. HTC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건물사용권은 물론 KAIST 및 대덕연구단지 연구소들의 보유자원 이용,각종 교육 훈련프로그램 참여,졸업생 취업 연결등 각종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 건물은 올해 상반기에 건물설계를 완료,하반기 착공될 예정이며 97년 하반기에 완공,98년부터 본격 가동된다. 과학관 육성법의 규정에 의한 사설 과학관 2곳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국립중앙과학관(관장 권갑택)은 3일 서울의 육영재단 어린이회관(관장 박서영)과 경북 경주의 신라역사과학관(관장 석우일)등 2곳이 처음으로 사설과학관 등록을 마쳤다고 밝혔다. 어린이회관은 3만1천평의 부지에 8백50여평의 전시실과 1백여평의 작업실,80여평의 천체과학실등을 갖추고 지난 70년 문을 연 사립 종합과학관이다.기초과학,우주,지구과학등 각종 전시실에는 5백70여점 이상의 전시품이 소개되고 있으며 천체과학실에는 프라네타리움(별자리 투영기)도 설치돼 이미 많은 어린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곳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쪽을 향해 버스로 5분 거리,신라민속공예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과학관이다.지난 88년 대지 6백평,연건평 3백평에 1백80평의 전시실을 갖추고 개관한 이 과학관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각종 과학기술 발명품을 복원하고 다양한 모형으로 제작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특히 일반공개가 금지된 석굴암의 경내를 축소 모형으로 복원하고 뛰어난 조형미와 축조기술 원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느껴볼 수 있도록 면밀하게 전시한 공간은 청소년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명물」로 등장했으며 이밖에도 모형 첨성대,천구의,신라역법과 천문의기,신라왕경도등의 전시품을 갖추고 있다. 정부는 지난 92년 청소년 및 일반인을 위한 과학 교육 시설 건립을 촉진·지원키 위해 과학관 육성법을 제정했으나 과학 시설에 대한 이해및 홍보 부족으로 1건의 등록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난해 과학관용 부동산에 대한 지방세 감면,수입 견본등 물품및 자료에 대한 관세및 농어촌 특별세 감면등 추가적인 세제 금융 지원 조치가 잇따르면서 과학관 등록및 설립에 대한 이해도 증진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설과학관은 개인이나 법인의 후원회 설치는 물론 운영 경비 일부를 예산에서 보조받을 수도 있으며 각종 기념품및 교재 판매,과학원리를 이용한 놀이시설과 매점등 편의시설 운영도 할 수 있다. 국립과학관 권갑택관장은 『정부는 사설과학관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관 등록 범위를 확대하고 관람료를 자율화하는 것등을 골자로 한 과학관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앞으로 다양한 사설 과학관이 설립·등록돼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쉽게 과학을 공부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서울 어린이회관·경주 신라과학관 사설 과학관 2곳 탄생

    ◎서울­별자리 투영기 등 570점 전시/경주­모형 석굴암·첨성대 갖춰 인기 과학관 육성법의 규정에 의한 사설 과학관 2곳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국립중앙과학관(관장 권갑택)은 3일 서울의 육영재단 어린이회관(관장 박서영)과 경북 경주의 신라역사과학관(관장 석우일)등 2곳이 처음으로 사설과학관 등록을 마쳤다고 밝혔다. 어린이회관은 3만1천평의 부지에 8백50여평의 전시실과 1백여평의 작업실,80여평의 천체과학실등을 갖추고 지난 70년 문을 연 사립 종합과학관이다.기초과학,우주,지구과학등 각종 전시실에는 5백70여점 이상의 전시품이 소개되고 있으며 천체과학실에는 프라네타리움(별자리 투영기)도 설치돼 이미 많은 어린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곳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쪽을 향해 버스로 5분 거리,신라민속공예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과학관이다.지난 88년 대지 6백평,연건평 3백평에 1백80평의 전시실을 갖추고 개관한 이 과학관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각종 과학기술 발명품을 복원하고 다양한 모형으로 제작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특히 일반공개가 금지된 석굴암의 경내를 축소 모형으로 복원하고 뛰어난 조형미와 축조기술 원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느껴볼 수 있도록 면밀하게 전시한 공간은 청소년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명물」로 등장했으며 이밖에도 모형 첨성대,천구의,신라역법과 천문의기,신라왕경도등의 전시품을 갖추고 있다. 정부는 지난 92년 청소년 및 일반인을 위한 과학 교육 시설 건립을 촉진·지원키 위해 과학관 육성법을 제정했으나 과학 시설에 대한 이해및 홍보 부족으로 1건의 등록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난해 과학관용 부동산에 대한 지방세 감면,수입 견본등 물품및 자료에 대한 관세및 농어촌 특별세 감면등 추가적인 세제 금융 지원 조치가 잇따르면서 과학관 등록및 설립에 대한 이해도 증진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립과학관 권갑택관장은 『정부는 사설과학관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관 등록 범위를 확대하고 관람료를 자율화하는 것등을 골자로 한 과학관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앞으로 다양한 사설 과학관이 설립·등록돼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쉽게 과학을 공부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19세기말 조선시대 풍물 묘사/영 외교관 여행기 LA서 발견

    19세기말 조선시대 풍물을 자세히 묘사한 영국외교관의 조선 여행기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됐다. 지난 1884년 조선주재 영국부총영사로 부임한 WR칼스가 1887년 북경에서 저술했고 1년뒤 영국의 유명출판사인 맥밀란에서 발간한 여행기 「한국의 삶」(Life In Coree)은 당시 우리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사료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백17쪽 분량의 이 책은 교포 고서수집가 맹성열씨(55)가 노스 할리우드의 고서점에서 입수,1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정부에 기증했다.
  • 단색화 「모노크롬」의 진수 재조명

    ◎현대화랑­70년대 대표작가 김창렬 등 15인전 기획/국제화랑­유럽등서 활약… 세 젊은작가 새모습제시 「모노크롬」.일반인에게 생소한 이 단어는 「단색화」를 지칭한 것으로 외국은 물론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미술유형이다. 전위의 무한한 혼재속에 고전적 평면회귀가 강조되고 있는 최근 세계미술계 흐름속에서 새해들어 국내 두 주요 화랑이 이들 「모노크롬」회화의 진수를 선보이는 자리를 차례로 마련한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의 갤러리현대가 올해 첫 기획전으로 「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전(2월1일∼25일)을 갖고,한 동네의 국제화랑이 국내외 젊은 작가 3인의 회화전 「표면과 이면사이」(3월12일∼4월2일)를 통해 새로운 「모노크롬」회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자리를 펼치는 것. 두 전시는 구상회화와 달리 단색화면위에 특별한 그림이 없어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이해가 힘든 「모노크롬」이라는 장르가 국내 미술계에서조차 이제 「고전」적 위치에 가 있는 현실이어서 관심있는 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모노크롬」은 한국의 서양미술이 서구영향에 묻힌 50년대말 무정형의 「앵포르멜」과 60년대 「추상표현주의」를 거친 것과 달리 70년대 중반 우리 정신이 담겨진 회화로 꽃피워낸 장르. 단색화면위에 덧칠하고 긋는등 다양한 기법아래 탈속적 느낌으로 단아하게 창출된 한국의 「모노크롬」은 국내 서양화단의 거물급 작가들의 화폭에서 그 빛을 발했다. 현대화랑의 「1970년대…」전은 바로 이 한국의 「모노크롬」을 꽃피운 대표작가들을 내세운다. 출품작가는 한국 서양화단의 큰 맥을 이뤄온 박서보·정창섭·윤형근·김창렬·정상화·하종현·이우환·김기린·이승조·서승원·최명영·이동엽씨등 15명. 작가 박서보씨는 『우리의 모노크롬은 다색주의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탄생한 서구 모노크롬 회화와는 달리 동양정신에 바탕을 둔 자연관의 회복에 근원을 두고 있다』면서 흰색을 주조로 미묘한 느낌의 중간색을 사용하면서 조선시대 백자의 빛과 같이 우리민족의 정신을 표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국제화랑의 전시는 한국과 미국,유럽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과거 모더니즘회화의 뿌리를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는 3명의 젊은 작가를 통해 새로운 「모노크롬」을 제시한다. 한국의 이인현(41),미국태생의 교포2세 바이런 킴(35),이탈리아태생의 유럽작가 루돌프 슈팅겔(40). 지난60년대 모더니즘 작가들이 추구했던 절제된 색과 기하학적 조형위에 현대적인 분석과 위트,아이러니를 담고있는 이들은 새 세대의 후기모더니스트로 불리운다. 형식면에서는 「모노크롬」을 탈피하지 않지만 그 위에 설명을 함축하는 매우 「개념적」이라는 점에서 70년대 우리 「모노크롬」 작가들과 다른 이들은 「형식 이어받기와 내용 새로 집어넣기」면에서 80년대이후 신개념주의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주게 된다.
  • 입도세(외언내언)

    지난해 6월 민선단체장시대가 출범한 이후 지방자치단체들이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과거와 달리 주민에게 봉사하려는 행정의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대민접촉도 활발해져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바람직한 현상이다.일요일에 동사무소 문을 여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단체장들이 세일즈맨으로 나서는 곳도 있다. 그러한 변화 중에 지자체의 재정확충을 위한 세수확대 노력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취약한 재정을 위해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국세의 지방세 전환요구를 비롯해 시세인 담배세를 구세로 바꿔달라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또한 택지개발·위락단지 건설·복합상가 신축·보트장 설치등 수익사업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실정.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긴 했지만 아직 지방의 재정 자립도가 취약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긴 하다. 지난해 6월말 현재 15개 시·도의 빚은 16조 3천억원으로 지난해 예산의 38.3%를 차지한다.가장 많은 서울시의 빚은 4조6천만원.전국 시·도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63.5%.50%가 넘는 도는 경기(78.7%)와 경남(57.2%)뿐이고 최저인 전남도는 23.4%에 불과하다.따라서 인건비도 못대는 자치단체가 무려 60곳이나 된다.이런 형편이니 단체장들이 세일즈맨으로 뛰고 기업경영 방식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부지사나 부시장을 기업인 중에서 영입하는 까닭도 재정확충을 위한 자구책이다. 최근 경기도에서는 세원 확보를 위해 도에 전입하는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입도세」라는 걸 추진중이라고 한다.헌법에 엄연히 거주의 자유가 있는데 입도세라니,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하더라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또 비현실적인 발상이다.입도할 때 세금을 받는다면 타도로 옮길때는 출도 장려금을 지급해야 할게 아닌가.조선시대에도 4대문을 드나드는 백성들에게 통행세를 받은 일이 있었다.그러나 백성들의 원성때문에 곧 폐지되었다.거두기 쉽다고 세금을 쉽게 생각해선 안된다.
  • 정치판의 영입바람/정종석정치부차장(오늘의 눈)

    『옛날에는 정당 간에 토담같은 경계라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토담은 고사하고,창호지를 바른 문짝 하나 없는 느낌입니다.이렇게 마구잡이로 바람처럼 정당을 넘나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는 4월의 총선을 앞두고 이당 저당을 기웃거리던 정치철새들이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당에 마구잡이로 영입되는 것을 보고,지난 30여년을 정치판에 몸을 담아온 한 정당당료는 회한에 잠긴 듯 이렇게 한마디를 불쑥 내뱉는다. 정치판에서 당적을 옮기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오히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종래의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가 깨지면서 현재의 4당 구도아래서는 재야출신과 제도야권,구 여권 및 정부인사,유신 또는 5·6공 핵심 등 여러 뿌리의 인사들이 각당에 혼재한다. 하지만 불과 3년전 재벌 출신 대통령 후보의 특보를 맡았던 소설가가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입당을 놓고 왔다갔다 하다가 국민회의를 선택했고,한 코미디언 출신 여당의원은 공천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민련으로 적을 옮길 움직임이다.또 슬롯머신 수사담당 검사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당 저당을 저울질한 끝에 신한국당을 택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인 또는 지망생들의 행태는 대학입시에서의 막판 눈치작전이나,아침에는 1만원을 부르다가 생선이 물간 저녁 때면 3천∼5천원,또는 아예 몇마리씩 묶어서 막판떨이 세일을 하는 어물전의 상술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영입철새들이 부쩍 늘어난 것은 최근 일었던 정당간 색깔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정당에 개성이 없고 고유의 색깔이 불분명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당선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이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영입하는 정당들의 자세는 더 큰 문제이다.여기에 어떤 이들이 공천되더라도 지역맹주가 공천하면 맹신적으로 표를 몰아주는 유권자들의 투표행태와 지역감정은 오늘날 영입철새들을 양산한 근본원인일 지도 모른다.모두가 공범인 것이다. 과거 조선시대 중종조의 조광조가 부르짖던 도학정치 같은 개혁을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다만 정당이 이념과 정책노선을 보다 분명히 하고 후보자들이 눈앞의 이해관계보다도 개인의 소신과 절개를 조금이라도 더 영예로 아는 풍토가 아쉽다.
  • 외규장각 고문서 불 반환 불투명

    ◎미테랑 전 대통령 사망으로 협상 진전도 없어/“약탈문화재 반환 선례 만들라” 전문가 촉구 한국 정부는 과연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이 그의 생전에 우리측에 반환키로 약속했던 외규장각 고문서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그가 지난 93년 9월 방한 때 합의한 한·불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협상의 귀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는 반환협상이 고착상태에 빠져있는 데다 특히 미테랑 전 대통령이 이미 반환협상 대상인 외규장각 고문서 1권(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권)을 상징적으로 우리측에 전달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협상 주무부서인 외무부와 문화체육부에 따르면 한·불 양국은 지난 93년 외규장각 고문서의 반환에 합의,프랑스 정부가 외규장각 고문서 2백96권을 영구임대하는 대신 한국정부가 그에 상응한 고문서를 대여키로 한 원칙을 지키고 있으나 우리측이 대여할 고문서 협상에 막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협상의 창구역할을 맡고 있는 외무부는 『현재 프랑스측이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의 대가로그에 못지 않은 문서들을 요구하고 있어 협상진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이에 비해 문화체육부는 『현재 협상이 답보상태에 빠진 것은 사실이나 미테랑대통령 사후에도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은 변함없이 추진될 것』이라며 비교적 밝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정기영문체부문화정책국장은 『김영삼대통령이 지난해 10월 뉴욕에서 시라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고문서 반환문제를 거듭 거론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이 문제 해결원칙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한 만큼 결코 비관적인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프랑스 정부가 기본적으로 외규장각 고문서에 상응하는 우리측 고문서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고 이미 두 차례나 우리 정부가 제시한 「대여 문서목록」을 거부한 사실을 들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대 이태진교수(역사학)는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은 정부간 협상인 만큼 미테랑 전 대통령의 후임인 시라크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면서 『이미 외규장각 도서 1권이 한국에 상징적으로 넘겨져있어 한국정부는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받을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이교수는 특히 『지금까지 우리측이 협상단계에서 고문서들을 돌려받는데 급급,타협에 우선했지만 세계 각국에 산재해 있는 우리 약탈문화재 반환의 바람직한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도 좀더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전란을 대비해 경기 강화행궁에 설치된 외규장각에는 원래 전적 6천4백권이 소장돼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가 행궁과 함께 전적을 불태우고 이 가운데 3백40권만을 추려 약탈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외규장각 고문서들은 1975년 프랑스 베르사유 국립도서관에서 도서관 사서 박병선씨에 의해 발견됐으며 서울대는 지난 91년 10월 외무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총장명의로 외무부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반환을 공식요청했고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한 지난 93년 9월 마침내 반환에 합의했다.
  • 전기공 바웬사/반영환논설고문(외언내언)

    옛날 동양에서는 높은 관직에 있다가 물러나면 귀거래사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간다.조선시대에는 정승벼슬을 한 뒤 강호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하며 저술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미덕으로 돼 있었다.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으려 했다.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이나,고산 윤선도의 시조문학은 그런 은거에서 나온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오히려 돋보이는 인물이다.1980년 재선에서 낙선한 뒤 고향 조지아주로 낙향해 카터 평화센터를 설립,국제분쟁 해결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평양에도 다녀왔고 아이티·보스니아·수단 등 분쟁이 있는곳 어디든지 나타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활약하며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지난해에는 「늘 생각하며」란 시집을 출간,베스트셀러가 되었다.낙선후 써 낸 회고록 「신념을 지키며」도 베스터셀러였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 초대총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원래의 생업인 구둣방을 차렸다.우리로 말하면 「신기료 장수」다.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행복한정치인들이다. 최근에는 대선에서 실패한 레흐 바웬사 폴란드 전 대통령이 원래의 본직인 조선소 전기기술자로 복귀하리라는 외신이 전해지고 있다.우리에겐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다.자유노조의 기수로,자유폴란드의 첫 민선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옛 동료와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전직대통령의 만년은 참담하다.이승만대통령은 하야후 망명,장면총리는 강제 하야,박정희대통령은 재임중 피살,그리고 전두환·노태우대통령은 군사반란죄와 거액뇌물수수죄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던 전·노전직대통령은 평범한 시민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축재와 부정을 저질렀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전직대통령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우리도 이젠 대통령직을 물러난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전직대통령을 갖고 싶다.
  • 고려석탑 등 한국문화재 11점/일 도쿄 오쿠라집고관서 확인

    ◎일 한글잡지 「월간아리랑」 보도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 도쿄시내에서 고려시대 초기 5층석탑 등 한국문화재가 대량 확인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한글잡지 월간 아리랑은 1월호 표지스토리에서 오쿠라호텔옆 오쿠라 슈코칸(집고관) 주위에 충주 탄금대 부근 정토사에서 가져간 고려시대 초기(10∼11세기) 5층석탑 등 11점의 석재문화재가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확인된 문화재가운데는 이밖에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사에서 가져간 고려중기(12∼13세기) 팔각5층석탑과 조선시대 석인상4점,화표 4점,석양 등이다. 이들 문화재는 오쿠라재벌총수이던 오쿠라 기하치로(대창희팔낭)가 일제시대 한국문화재를 대량수집하면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씨는 『보존상태가 좋을뿐 아니라 고려시대 초기 석탑 등 시기적으로도 문화재가치가 높은 것같다』면서 『옥외에 있는 이들 문화재뿐 아니라 슈코칸 내부에도 한국문화재가 다량 소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한편 오쿠라호텔측은 경복궁에서 가져간 자선당을 최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한국에 돌려보낸 바 있다.
  • 고금 한한자전/남광우 엮음(화제의 책)

    ◎한자의 음·뜻 변천사 가나다순으로 정리 한자가 비록 중국문자이지만 우리도 오래 써 온 만큼 글자마다 한국 고유의 성격이 더해졌다.이 책은 역대 우리나라에서 나온 자전을 망라해 한자의 음과 뜻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담은 첫 자전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기준은 물론 조선시대에 나온 훈몽자회·신증유합·천자문 등 각종 자료,북한에서 정한 교육용 한자까지도 두루 참고해 한자의 정확한 음과 뜻,장단음을 가렸다.또 우리가 만들어 쓰는 한자도 소개했다. 한자마다 표준음,뜻,소리의 길고 짧음과 용례를 자세히 밝혔다. 표제로 올린 한자는 7천3백52자.그러나 표제 한자를 설명하면서 함께 다룬 속자,본자,고자를 합치면 수록한 한자 수는 10만자를 넘어 중국의 대표적 자전인 「강희자전」을 능가한다.한글 옛글자도 2천5백여자 사용했다. 또 일반 자전과는 달리 한자를 음에 따라 가나다 순으로 실어 독자의 편의를 도왔다. 엮은이는 인하대 명예교수이자 한국어문회 회장으로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10여년에 걸쳐 이 자전을펴냈다고 한다.인하대 출판부 10만원.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병세 선생

    ◎“을사5적 처단” 궐밖서 상소항쟁/79세 노구 이끌고 “조약체결무효” 호소/국권회복 가망없자 유서남기고 자결 국가보훈처는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충정공 조병세(1827∼1905년12월1일)선생을 선정,발표했다.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광무황제(고종)에게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를 각국에 밝힐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뒤 자결,순국한 애국지사다. 서울 회동이 고향인 선생은 26세때인 1852년 관계에 나가 사간원 정언·헌납·홍문관교리 등 조선시대 대쪽 같은 선비가 거치는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개혁파 인사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기까지 10여년간 선생은 이조·예조·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면서 갈수록 커지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수호에 힘썼다. 그러나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의 국권침탈이 더욱 심화되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선생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1896년난국을 헤쳐갈 인재의 등용과 재정안정을 골자로 하는 19개조의 차자(상소의 일종)를 올려 서정개혁을 건의했다. 그럼에도 정국은 외세의 간섭 속에서 자주적 외교노선과 부국강병책을 강구하지 못했고 일본과 러시아에 각종 이권을 내주는 등 혼미를 거듭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으로 1904년 한·일협정이 맺어져 일제가 추천하는 재정·외교고문관이 한국의 재무·외무관계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다음해 2월 재외국공사들이 소환되어 한국의 외교활동이 중단되는 등 국권은 더욱 기울어갔다. 이렇게 조국이 백척간두의 어려움에 처하자 선생은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폐 5조의 상소를 올려 광무황제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간곡히 상소했다. 선생의 노력도 헛되이 1905년 11월17일 일제의 강권으로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은 한국의 외부대신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한국의 개항장과 필요한 곳에는 일본인 이사관을 두어 모든사무를 관리한다는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자주적 외교권을 상실한 것은 물론 내정조차 일본통감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신하로서 따라 죽음이 마땅하다』는 비장한 각오로 신병을 무릅쓰고 상경,광무황제에게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이 무효임을 각국에 밝힐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에 눌린 황제는 선생의 상소에 미온적이었다.선생은 다시 대신을 이끌고 의분에 찬 상소를 올리는 한편 영국·독일·미국·프랑스·이탈리아등 5개국 공사에게 공한을 보내 국제공법에 따라 합동회의를 열어 조약을 부인하는 성명을 낼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측은 황제를 협박,이들을 궁궐에서 내쫓게 하였으나 선생은 대한문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상소항쟁을 계속했다. 거듭된 상소에도 국난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통분히 여긴 선생은 가마에서 극약을 마셔 자결한다. 자신의 목숨으로서 광무황제를 비롯한 국민 모두의 자각과 국가존망의위급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자결하기 전에 써놓은 유언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서한,국민에게 당부하는 피끓는 유서를 남기고 이날 하오6시쯤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이 79세였다. 선생의 순국소식을 접한 조야의 수많은 인사가 국가의 장래와 더불어 선생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종로 네거리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유생은 물론 기생조차 참여한 수천명의 군중이 선생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렸다. 선생의 유서를 게재한 대한매일신보는 논설에서 「한마디 한글자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선생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선생의 유서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이 죽은 후에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제순·지용·근택·완용·중현 등 5적을 대역부도로 처단하시고 각국 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국가의 명맥을 회복하신다면 신의 죽는 날이 사는 해가 되겠습니다」 그의 죽음이 곧바로 국권회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독립운동의 큰 거름으로 1945년 광복을 일궈낸 힘이 되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순국 90주기를 맞아 선생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 괴산 고성리 목장승(한국인의 얼굴:55)

    ◎긴 코에 이빨 듬성… 시골할아버지 모습/머리엔 갓… 눈썹은 붓으로 그려/천하대장군·지하장군 한쌍… 음력정월 장군제 올려 우리는 키가 큰 사람을 일러 과장하기를 「장승만 하다」고 말한다.그렇듯 장승은 키가 크다.기둥형 나무를 사람 모습으로 깎아 만든 나무인형(목우)이 장승이다.이를 목장승이라 하는데,돌을 쪼아 만든 석장승도 있다. 목장승은 장생이라는 이름으로 15세기말 기록인 「태평한화골계전」에 처음 나온다.「군수가 길가에 세운 장승을 보고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장생이 사람모습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다.이 장생이 17세기이후부터는 장승으로 표기되었다.장승을 말하는 장생의 생자에는 나무 목이 들었다.그러고 보면 장승이 발생한 시기부터 나무로 장승을 만든 것이 분명해진다.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목장승은 오늘날까지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에서 만난 장승은 사람얼굴을 한 인면장승이었다.마을 사람들은 장승이라 하지 않고 장군으로 불렀다.오른쪽 천하대장군과 왼쪽 지하장군이 한 쌍을 이루었다.바깥 세상과 큰 거래가 없고 인적마저 드문 외진 마을인지라 마을 어귀의 장군이 사람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런데 말이 장군이지 무섭지 않은 얼굴을 했다.무척이나 긴 인중,듬성듬성한 이빨에서 우러난 장군의 인상은 모나지 않은 성격의 촌 할아버지다.응석꾸러기 손주를 두었을 법도 한 나이인데,손주가 꺼들어 볼 수염은 없다.다만 눈썹은 코끝에서부터 붓을 대어 그려넣었다.돋을새김의 동그란 눈은 튀어나왔고 얼굴의 3분의 2를 차지한 코가 유별나게 길다.그래서 얼굴은 온통 코치레를 한 느낌이다. 천하대장군은 갓모양의 모자를 썼다.관모를 제대로 갖춘 천하대장군은 옆에 있는 지하장군과 함께 한 해에 한차례씩 대접을 받는다.음력 정월 열나흘이면 마을 사람들이 산신제에 이어 장군제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제사를 모신지가 3백년이 넘고 보면 장군제는 꽤나 오래되었다.제삿날에 비는 기원내용은 대개 농사의 대풍과 마을의 평안,무병,복 들기,잡신과 악살 막이 등이다. 이들 두장군을 모시는 장군제는 철저한공동체신앙이다.제주로 제관과 축관을 뽑는데,제삿날 10일전에 생기복덕한 사람을 반드시 가려서 선출했다.상을 당한 사람,상가와 접촉한 사람은 제주로 뽑지않는 불문율이 있다.제물은 고기를 전혀 올리지 않는 소제로 치렀다.이에 따라 삼색과일과 북어·메·탕·과가 제물로 올랐다.그 경비는 한 집에서 3천원씩 4만5천∼5만원이 든다고 했다. 이 고성리 장승인 두 장군 말고도 마을 어귀에는 다른 공동체신앙 대상이 더 있다.선돌과 돌탑·신목이다.그러니까 장군은 복합형태를 한 신앙대상물인 것이다.장군은 나무인지라 3년마다 드는 윤달이 있는 해에 새로 세운다.마을 아무 산에서 나무를 베어 만들지만,새가 둥지를 튼 나무는 제외시키는 금기사항도 있다.
  • 「조선 남과 여 공간」 도쿄전 성황

    ◎한·일 국교정상화 30돌 기념… 일 아자부 미술공예관서/“한국인 생활·정신세계 이해할 좋은 기회”/문방사우·장죽·노리개·비녀 등 340점 선보여/하루 3백∼4백명 관람… 24일까지 전시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 아자부미술공예관에서 지난달 25일부터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조선시대­남과 여의 공간」특별기획전이 일본인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도자기만으로 알려진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을 「문화의 결과」 뒤에 자리잡고 있는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한국문화의 배경에까지 이해를 넓힌다는 기획의도로 마련된 것. 선비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남성의 공간」인 사랑방은 문방사우,도자기,가구,병풍,장죽,부채,해시계등이 전시돼 있으며 「여성의 공간」인 안방은 장도,빗,노리개,비녀,경대,신발등이 보여지고 있다.전시품은 대부분 문화재급으로 3백40여점에 달한다. 「조선시대­남과 여의 공간」전시 실행위원회(위원장 정양모)는 일본에 한국도자기등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민족 고유의 생활문화를 문화인류학,사회학적 시각에서 접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면서 이번 전시회가 조선시대 문화와 도덕의 배경이었던 독자적 미적 감각을 포착,한국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이곳 전시장에는 전시회가 시작된지 1주일동안 하루 1백80명 정도의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이달 들어서는 더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와 하루 평균 3백∼4백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아자부미술공예관측도 최근 들어 가장 좋은 전시회라고 입을 모으고 있고 이번 전시회를 위해 학예관들이 한글 공부에 입문할 정도로 열성을 쏟고 있다. 이 전시회를 관람한 일본인 스기야마 노리코(삼산교자·인테리어 코디네이터)씨는 『한국인 미의식의 기품에 놀랐다』면서 『옛날의 풍부한 생활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흥미 깊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안빈낙도의 생활을 이상으로 삼아 무채색 위주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단조로운 모습의 사랑방과 토속적인 민간신앙,불교,신선사상,현대적인 유교가 화려한 색채속에 융합된 안방의 모습을 전시,한국인들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본인들에게 한국문화 이해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꾸며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번 행사를 후원한 주일한국문화원의 박정호 원장은 『광복 50주년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번 전시회가 우수한 한국문화를 보여주고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만족해 했다.
  • 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의미

    ◎한국문화재 3점 인류 문화유산으로/고대·중세·근세 것 1개씩 채택… 더욱 값져/세계 100국 440개 등재… 기술·재정지원 받아 한국의 문화재들이 4일부터 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산하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되었다.세계유산위원회 21개 이사국은 이번 총회 기간중 지난 7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 회의를 거쳐 권고된 각국 문화재의 세계유산등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어서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집행이사회에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토록 권고된 우리 문화재는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사적,명승 제1호)와 판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및 판고(국보 제52호)·해인사(사적,명승 제5호),그리고 종묘(사적제125호)등 3건.우리나라의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문화재는 고대에서 중세,근세를 망라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세계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제도는 지난 72년 유네스코 제17차 총회에서 체결된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75년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 가입국의 유산중 오늘의 인류들이 뚜렷하게 보존할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는 유산을 유네스코 세게유산일람표에 등재하는 제도다.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고 세계유산협약국이 매 5년마다 그 보전상태를 모니터해 보고하도록 돼있다.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보전 관리가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국내외 대상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에는 관광객이 증가돼 고용기회와 수입이 늘어날 수 있다.특히 유산에 대한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켜 국가적 책임감도 형성시키는 이점이 반드시 뒤따른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일 것이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3백26개를 비롯해 자연유산 98개,복합유산 16개등 모두 1백개국에서 4백40개가 등록돼있다.문화유산에는 미국의 독립기념관,자유의 여신상,차코 문화국립공원이 북미에 분포되었다.이밖에 유라시아의 그리이스의 아폴로신전,델피 고고유적,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데스 중세도시,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유적도시,피사의 사탑등을 망라했다.아시아만 하더라도 중국이 만리장성,진시황릉,명청대궁전,라사폰텔라궁등 14건이 등록을 마쳤다.일본의 경우 5건,인도 21건,인도네시아 4건,필리핀 2건,태국 4건,베트남 2건등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8년12월 세계 1백2번째로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했다.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과 인연을 맺은지 7년째지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문화·자연 유산도 등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번 문화유산 등록은 국가적으로 매우 뜻이 깊다.따라서 이번 세계유산 등록은 우리 문화재가 유수한 세계의 문화유산과 동등하게 평가되고 비교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보고/우리 문화유산 사랑 계기되길/최몽룡 서울대 박물관장 우리나라의 불국사­석굴암,해인사 대장경판­장경판고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민족의 얼과 솜씨가 밴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서기 710년(경덕왕 10년)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여기에는 다보탑(국보 20호),삼층석탑(국보 21호),연화칠보교(국보 22호),청운백운교(국보 23호),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과 사리탑(보물 61호)이 있다.또 19 66년 10월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수리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동경,옥류와 은제사리함 등은 국보 126호로 일괄 지정받았다.그중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은 8세기경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석굴(국보 24호)은 751년(경덕왕 15년)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후원전방의 석실이다.그안에 본존불을 비롯해 십일면관음보살,십대사천왕상,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상들이 조각되어 있다.종교성과 예술성을 공유한 이들 조각은 세계적 예술품이거니와 우리조상이 남긴 걸작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1233년∼1248년에 걸쳐 판각하였는데 매수가 8만여판에 이른다.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다.장경판고(국보 52호)는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홍치원년명의 기와(1488년)가 나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시설로 통풍시설 등 선조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이들 이외에도 해인사에는 고려각판(보물 206호),대장경 판본(보물 972호),목조희랑대사상(보물 999호),석조여래입상(보물 264호)과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호)이 있어 해인사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킨다. 종묘(사적 125호)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태조의 묘인 태묘의 정전(국보 227호)과 조묘인 영녕전(보물 821호)으로 이루어진다.이 건물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에 둔것으로 1394년(태조3)터를 보아 1546년(명종 1)에 완공되었다.그후 임진왜란때 불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증건되어 오늘에 이르른다.이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격식과 장엄함을 건축공간에 잘 표현한 조선조의 뛰어난 건축물이다. 이들 세곳은 국보와 보물의 창고로 여겨질 만큼 많은 중요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이와같이 우리나라에는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직까지 없었다.이미 등록된 중국의 14건과 일본의 5건에 비하면 우리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이 빈곤했던 것도 사실이다.이들 외에도 앞으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