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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윤복 ‘심계유목도’의 여인들(한국인의 얼굴:123)

    ◎계곡서 목욕 즐기는 모습 담아/원색옷차림 애로틱하게 묘사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은 풍속화를 대담하게 마무리지었다.그래서 유교적 도덕사회라는 시대상황을 무시한 그의 그림에서는 진한 에로티즘이 뿜어 나온다.혜원은 좀처럼 바깥에 드러내기를 꺼렸던 여러 짓거리를 화폭에 담아냈다.여인네들이 속내로 즐기는 여속이나 남녀간의 색정을 즐겨 묘사한 그는 당대의 이단이 분명했다. 그의 속화 ‘심계유목도’는 지극히 컬러풀한 수작이다.국보135호인 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했다.화제대로 깊은 계곡에서 목물을 즐기는 여인들을 앞세운 그림이다.그래서 ‘심계유목도’라는 화제가 붙었으나 그네를 타는 여인과 목물 뒤에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여인들이 모이는데를 부러 찾아나선 도붓장사 아주머니와 여인들만의 세상을 훔쳐보는 동자승까지 끼어들었다. 그네에 오르는 여인을 보면 계절은 단오무렵이 분명하다.다홍치마와 노란 삼호장저고리 차림의 여인은 그네에 오르느라 속곳 가랑이를 다 드러냈다.원색에 가까운 옷차림과흰색 속곳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목물을 하는 여인네들 보다 먼저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옛 사람들은 다홍빛깔 자체를 에로틱한 색채로 보았다.특히 남정네들의 젊음을 자극하는 색깔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포인트는 저고리를 벗어 젖히고 허벅지를 내놓은 물가의 여인네들이다.맨 위쪽 여인은 홑치마를 훌떡 걷어올려 볼기짝이 다 보인다.그래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여인은 목물 따위는 뒷전에 두고 시선을 멀리돌렸다.풍만한 젖무덤 한쌍이 허연 뱃살과 함께 치마말기 위로 튀어 나왔으나 그 또한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체면치레를 겁내지 않는 몸짓이나 뱃살이 오른 것으로 미루어 이 여인을 낫살이나 제법 든 퇴기쯤으로 보는이들도 있다.그런데 아직은 여인네 몸매에 탄력이 붙었다.가느다란 눈매에 코가 오뚝하고 유엽미의 눈썹이 또렸하다.그리고 붉게 물든 작은 입을 토라진듯 다물었다.한껏 멋을 부려 머리에는 다리를 얹었다. 여인의 얼굴은 제법 반반하여 몇몇 한량들의 애간장을 태웠을 법도 하다.가는 붓을 쓴 세필이라서 몸매가 뚜렸한 여인은 뱃집 말고는 탈잡을 데가 없다.그만하면 조선시대 미녀였을 것이다. 그 아래쪽 세 여인은 쪼그리거나 털석 주저않아 마주하고 있다.눈을 감은채 얼굴을 닦는 여인,머리에 얹은 다리 가체를 매만지는 여인,팔뚝을 닦는 여인 등 물을 즐기는 꼴이 제각각이다.
  • 수원 화성/정조의 효심 스민 성곽예술의 꽃(테마 탐방)

    ◎부친 사도세자묘소 화산 이장뒤 정조가 모후와 여생보내려 축성/정약용이 만든 기중기 첫사용/성의 방어기능 완벽하게 구현 성은 옛날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그곳에는 그 옛날사람은 더이상 살지 않치만 역사가 남아 있다.성돌위의 푸른 이끼,벽돌 한장 한장에 세월이 남기고 간 숱한 얘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원시내 한복판에 있는 화성(수원성은 일제시대에 부쳐진 이름)은 200여년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정조의 효심이 어린 조선시대최고의 성으로 성곽의 꽃,우리나라 축성술의 정수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화성은 또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신도시이기도 하다. 정조는 1789년 영조의 미움을 받아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초라하게 뭍혀 있던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읍지가 있던 화산으로 옮긴다.대신 수원 읍지를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한다. 5년뒤인 1794년 정조는 노년에 왕위를 아들인 순조에게 물려주고 어머니 헤경궁 홍씨와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고 화성축조에 나선다.정조의 꿈이투영된 화성은 정양용이 설계한 기중기가 동원되고 우리나라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의 축성술이 가미되는 등 당시 과학기술이 총동원돼 2년반만인 1796년 10월에 완공된다. 팔달산과 평지를 끼고 있는 화성은 계곡과 지형의 높낮이,굴곡에 따라 성곽이 둘러져 있어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그대로 드러난다.축조 당시에는 8.3㎞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5.5㎞만 남아 있다.화성의 가장 큰 특징은 성이 갖는 방어적 기능이 완벽히 구현된 것.장안문,팔달문,창룡문,화서문 등 4개의 성문에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성문에서 불이 나거나 적이 불을 질렀을때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물탱크는 구멍이 5개 뚫려 있어 오성지라 불린다.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심돈도 같은 맥락이다.벽돌로 성벽보다 높이 망루를 쌓아올린 공심돈은 멀리 있는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기에 용이하다.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자리하고 있다.화성의 총지휘본부로 성안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사방 백여리를 살펴볼 수 있다.성위에 누각 모양으로 집을 지은뒤 화포를 감춰두고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게 한 서포루도 빼놓을수 없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방화수류정이라는 정자.전시에는 적군을 감시하는 곳이지만 평시에는 휴식을 취할수 있도록 정자앞에 연못과 나무들을 가꾸어 놓았다. 그러나 화성은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그대로 방치돼 평범한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만다.뿐만 아니다.조선조말과 일제시대,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훼손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정조는 책자를 남겨 화성 복원의 길을 열어 놓았다.화성 축조에 동원된 인력과 경비,사용한 기계,각 구조의 설계도 등을 담은 ‘화성성역의궤’가 바로 그것이다.지난 75년부터 78년까지 3년여에 걸쳐 화성이 복원된 것도 바로 이 책에 힘입은 바 크다.당시 복원작업에서는 화성의 48개 시설물중 장안문 등 30개가 복원되고 팔달문 등 11개는 보수됐다.남수문 등 7개는 복원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한편 현재 화성은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했다.등재여부는 5일 로마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정조의 천도계획설/“인공호 만든건 천도 예비단계” 주장 제기/“실록 등엔 기록 없다” 학계선 천도설 부인 많은 사람들이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성한뒤 서울을 이 곳으로 옮기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정조의 천도계획은 사실일까. 정조가 화성을 축조한 1천700년대 후반은 정치적 안정기였다고 할수 있다.비대해지던 신권이 탕평책 등을 통해 잠시 위축되고 반면 억눌렸던 왕권은 강화되던 시기였다.그러나 왕권이 강화됐다고 하지만 사대부 등 당시 지배세력이 왕권에 완전 종속됐던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특히 정치적 안정기의 천도는 생각하기 어렵다.정치적 지배세력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려 있기 때문이다. 화성 천도문제는 지난해 4월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에서 열린 기념세미나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됐다.당시 주제발표를 한 한신대 유봉학 교수는 정조의 천도계획이 사실이었느냐는 질문에 정조가 서울을 화성으로 옮기려 했다는 기록은 문헌에 남아 있지않다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유교수는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와 행궁을 보호하고 나아가 왕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보내기 위해 성을 축성한 것으로 나와 있다며 그러나 정조실록을 포함,어느 문헌에도 천도계획은 비쳐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서호 등 인공호수를 축성,농수로를 확보하고 수원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경감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주장한다.물론 문헌상의 뒷받침은 없다. 유교수는 이에 대해 정조가 농업과 상업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자족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지 결코 천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성곽 둘러보는 법/서장대서 시계방향으로 난 산책로 일품/대중교통 이용땐 팔달·장안문서 출발을 역사의 뒤안길을 거닐어 보자. 수원시내 한복판에 있는 화성은 팔달산을 정점으로 시내를 감싸고 있다.성길이는 5천520m로 10리가 넘는다.이 가운데 5천99m는 복원이 됐지만 팔달문에서 남수문에이르는 421m는 아직 미복원 상태다. 화성을 둘러보려면 승용차 보다는 산책로를 따라 도는 것이 훨씬 운치가 있고 구경하기에도 편하다.승용차를 이용하게 되면 도로를 뺑뺑 돌아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 따라서 승용차를 몰고 왔다면 경기도청뒤 팔달산으로 올라가 서장대에 마련된 임시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이 곳에서 답사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좋다. 서장대에서는 시계방향으로 돌 것을 권한다.화서문,장안문,화홍문,동북각루,동장대,창룡문,봉돈,동남각루의 순서로 둘러본 뒤 시내에서 식사를 하면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고 팔달문,남치,화양루를 거쳐 서장대로 올라가면 된다. 전철을 타고온 사람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팔달문이나 장안문으로 와 순례를 시작하면 된다. 팔달문에서는 바로 서장대로 가는 것이 좋다.팔달문에서 서장대코스는 비교적 경사가 급한데 아직 힘이 많이 남아 있을때 오르는 것이 훨씬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반대로 장안문에서는 서장대로 먼저 간다.그러면 서장대와 팔달문사이의 오르막길이 내리막이되기 때문이다. 성곽을 따라 난 산책길은 대부분 잘 닦여 있어 자녀들 손을 잡고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성곽을 다 둘러보려면 3시간 가량 걸린다.
  • 김득신의 ‘밀희투전’의 인물(한국인의 얼굴:122)

    ◎노인들,몰래 벌인 투전관 묘사/패 잡은 안경낀 노인 표정 이채 조선왕조 후기는 회화의 한 장르로 속화가 자리매김한 시기이기도 하다.크게 보면 풍속화도 그 장르에 속한다.그러나 풍속화와는 구별되는 일면도 있다.이를테면 당시 사회에 나타난 잡스러운 일이나,민중들이 연출한 여느 풍물의 그림이 속화다.사대부들이 고상한척 격식을 따져 감상한 그림과는 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속화는 민중들이 낄낄거리며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새를 열어주었다.긍재 김득신(1754∼1822년)은 그런 속화를 잘 그렸다.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거의 같은 시대를 살면서 함께 화원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그의 속화가단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병아리를 챈 고양이를 쫓아내는 그림 ‘야묘도추’의 인물상 골격은 실제 단원의 필치를 많이 닮았다. 그의 속화에는 ‘밀희투전’이라는 그림이 있다.노인들이 모여 몰래 벌인 투전판을 묘사한 그림이다.투전꾼 중에서 안경을 끼고 패를 쥔 노인은 사뭇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상대방 눈치와 패를 살피느라 백수정 안경알에 어린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할기족족한 눈에는 약간의 핏발이 섰다.행세 깨나 하는 노인인 듯 탕건을 갖추어 썼으나,잡기에 손을 대고나면은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놀음판에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본디 점잖았을 노인이다.비록 놀음판을 찾았을 지라도 동저고리 바람이 아니고 배자까지 입었다.아직은 초로기라서 소담한 구레나룻 수염이 검다.‘수염이 대자옷이라도 먹어야 양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기왕 노름판에 궁둥이를 붙였으니 기어이 돈량이나 만져보고 말겠다는 눈치다.일찌감치 패를 버리고 들어가 판세를 관망중인 노인과는 대조를 이룬다. 노름패를 잡은 노인은 당시 하이컬러라 그런지 흔치 않은 안경을 썼다.우리나라에서 안경 이야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처음 나온다.그 뒤에 1560년대초 ‘오봉집’에도 소개는 되었으나,본래 중국을 거쳐 들어온 외래박물의 하나였다.그런데 투전판 노인은 안경을 썼다.안경이 아직 덜 발달해서 다리대신에 실고리를 걸었다.그리고 코거리를 망건속에 집어넣었다.‘매천야록’의 저자 황현(1855∼1910년) 초상화의 안경에 비하면 너무 구식이다. 이들 노인이 어울려 노는 투전 역시 중국에서 들어왔다.17세기 숙종때 역관 장현이 노는 방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와 좀 고쳐 만들었다는 것이다.조선시대 문헌 ‘경도잡지’와 ‘오주연장전산고’에 투전 이야기가 나온다.
  • 남산골 공원/도심속에 재현된 600년전 서울

    ◎2만4천평 규모의 시민공원 조성/타임캡슐광장­생활문물 600점 매장… 2394년 공개/전통정원 조성­향토수중 식재… 옛남산 정취가 물씬/한옥마을 복원­민속적 가치 높은 한옥 5채 재건립 서울은 도읍지가 된지 600년이 넘었지만 ‘역사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경복궁,비원 등 일부 고궁과 남대문,동대문 등의 유적이있지만 전체적으로 유구한 역사에 비해서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다.보존보다는 허물고 새로 짓는데 길들여진 탓이다. 내년 봄이 되면 서울 남산에 서울의 과거,현재,미래를 볼수 있는 곳이 들어선다. 중구 필동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 2만4천여평에 조성되고 있는 남산골 공원이 바로 그 곳.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한옥마을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공원은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은 이미 조성이 끝났고 한옥마을은 거의 마무리단계에 와있다. 남산골 공원의 상층부에 위치한 타임캡슐광장은 서울의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문물 600점이 지하 15m에 매장돼 있다.서울 정도 600주년인 지난 94년 11월29일의 일로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타임캡슐은 정도 천년이 되는 2천394년에 공개될 예정이다.그래서 분화구모양으로 된 광장의 회랑을 거닐면 600년전과 400년뒤가 함께 느껴져 상념에젖게 한다. 타임캡슐광장에서 내려오면 전통정원과 마주친다. 남산의 산세를 살리기 위해 구릉지와 계곡을 완만하게 조성한 이 정원에는 소나무 등 향토수종이 주로 배치돼 있으며 느티나무,수양버들 등이 뒤를 바치고 있다.옛 남산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골짜기도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았다.하류의 연못에서 물을 끌어올려 계곡으로 방류하는데 내년 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골짜기 중턱에는 수필집을 통해 청렴,결백으로 상징되는 남산골선비의 모습을 일깨워준 일석 이희승 선생의 추모비가 서 있다. 또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면 꿩과 까치가 양지바른 곳 잔디밭에서는 한가롭게 뛰노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곳곳에 정자가 있어 발걸음을 쉬게 한다.전체적으로 번잡하지 않고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도심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이 전통한옥 복원지역.2천400여평에 형태가 독특하고 원형을 잃지 않아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정규엽가옥 등 5채가 복원되고 있는데 11월1일 현재 92%의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올 연말까지면 벽지,천정,장판,창호지 마감작업 및 마을 공동광장 마사토 포장이 모두 끝나게 된다. 이와 함께 내년 3월까지 가옥 내부에 장롱,문갑,뒤주 등 전문가의 고증을거쳐 제작한 가재도구를 배치할 예정인데 현재 75%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한옥촌이 문을 열면 침선,공예,민화교실과 서당 등 다양한 취미강좌가 개설돼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한편 한옥촌 초입에 있는 공예전시관은 이미 공사가 끝났다. 이곳에서는 나전칠기 전통매듭 등을 만드는 방법이재현되고 각종 공예품도 판매된다. 공예전시관 앞 빈터는 소극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소극장은 누각과 연못을 마주보고 있어 널뛰기 그네뛰기,윷놀이 등 민속놀이와 전통혼례식을 개최하기에 적격이다. ◎남산골 공원지역 유래/조선시대 벌칭 청학동… 시인 묵객 많이 살아/1730년경 군대첫 주둔… 이후 군사용 활용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는 곳은 옛부터 시인 묵객이 많이 살아 조선시대에는 청학동이라고 불려져 왔던 곳이다. 도교에서 청학은 영생하는 학을 말하는데 경치가 절경인 곳에서 산다.이곳이 청학동이라고 불린 것은 청학이살만큼 산수가 좋았기 때문이다. 빼어난 산수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을 끌어 모운다. 조선조 초기 좌의정을 지낸 용재 이행은 이곳에 천우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여름철 더위를 피했다.그는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찾았을 정도로 시에 능했다.또 그의 증손자인 이안눌도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은 수도 서울의 중앙에 있는 산이다.시민들의 쉼터도 될수 있지만 군사목적으로 이용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조선초 태조가 인왕산,남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축조한 것이라거나 봉수대로 활용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남산골 공원이 군사용으로 활용된 것은 한참뒤의 일이다.영조때인 1천730년대 조정은 이곳에 139칸의 집을 짓고 수도 서울을 지키는 남별영이라는 군대를 주둔시켰다.얼마전까지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묘한 인연이다. 일제시대에는 헌병대사령부가,해방후에는 수경사가 들어서 지난 94년까지 주둔했다. 남산골 공원에 가는 방법은 지하철 4호선 충무로 역에서 내려 ‘한국의 집’쪽으로 가면 된다.공원내에 주차장이 없기 때문이다.전통 한옥촌은 공사가 한창이지만 이미 완공된 타임캡슐광장과 전통정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여유있게 구경할 수 있다. ◎복원예정 한옥 5채의 특징/정규업 가옥­순종때 지은 왕제사 행차용 집/이진승 가옥­철종때 부마 박영효의 개인집/서용택 가옥­정문 계단 난간석은 미의 극치/김홍기 가옥­안채∼사랑채 연결한 사대부집/조흥은 가옥­유리문 등 개량한옥 양식 도입 서울시내에 산재해 있다 남산골로 이전 복원되는 5채의 한옥은 모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동대문구 제기동 정규업 가옥은 조선 순종의 처삼촌인 윤덕영이 왕의 제사행차때 편의를 돕기 위해 지은 제사가옥이다.위에서 내려봤을때 사당을 정점으로 가옥구조가 으뜸 원꼴을 하고 있으며 목재는 경운궁을 헐면서 나온 홍송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경인미술관에 있던 이진승가옥은 조선말 철종때 영혜공주의 사위 박영효의 집으로 서울 8대가 중의 하나다.부엌과 안방이 일자로 남향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보기 힘든 개성지방의 주택양식이다. 종로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은 조선말 순종 윤비의 저택이었다고 전해진다.이 가옥은 정문 계단 양쪽의 난간석이 매우 아름다운 구한말 최상류층의 가옥이다. 종로구 삼청동 김홍기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연결돼 있다.사대부의 가옥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선말기 서민주택의 양식을 볼수 있다. 중구 삼각동 조흥은행 관리가옥은 전통적인 안채와 별당채를 갖추면서도 유리문 등 개량한옥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지붕의 한쪽이 길고 한쪽은 짧은 특이한 양식을 띠고 있다. 서울시는 당초 이들 한옥을 뜯어 남산으로 옮겨 복원하려 했으나 70% 정도는 새 것으로 교체했다.대부분 지은지 100∼200년이 지나 목재의 상당부분이 썩거나 안전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그러나 외국산 소나무를 전혀쓰지 않고 강원도 강릉과 설악산에서 소나무를 벌채,6개월간 건조시켜 사용했다.
  • 강희언 ‘사인시음도’의 선비(한국인의 얼굴:121)

    ◎선비들 모여 시 읊는 정경 묘사/각양각색의 자세 구체적 표현 조선시대 후기 그림에는 새로운 화풍이 배어들었다.그것은 중국에서 좀 늦게 들어온 남종의 산수와 사경산수다.이와 더불어 속화도 그림 한 복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속화는 인물화를 빌려 실감나는 그림으로 빨리 자리를 잡았다.그 길목에서 속화의 징후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그림이 더러 있다.본격적인 속화는 아닐지라도 속화의 범주에 들어갈만한 그림들인 것이다. 그 대표적 그림의 하나가 담졸 강희언(1710∼1782년)의 ‘사인시음도’다.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는 정경을 묘사한 이 그림에는 다섯 선비가 나무 그늘에 들었다.자세는 제 각각이다.경상앞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이를 베끼느라 꿇어 엎드린 사람,글을 쓰고 베끼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이 한쪽에 자리잡았다.그리고 장죽을 문 사람,그 옆에 팔벼개를 하고 비스듬 누운 사람,뒷전을 서성대며 수염을 꼬는 이도 있다. 그러니까 시를 읊조리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음서화 모임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 표정이나 동작은 요즘 사진에서 말하는 스냅쇼트와 같은 것이다.선비들의 습속을 담은 이그림은 세 점을 한 시리즈로 묶은 ‘사인삼경첩’ 가운데 한 컷이다.그런데 그림속에는 화가 자신도 들어있다고 한다.또 그림을 평하면서 제목을 달아주고 이를 설명하는 제발문을 써주었던 강세황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여름 선비들의 모임을 그린 것인데,요즘으로 말하면 기념사진 같은 그림이다.갓 쓰고 장죽을 문 자세로 부채를 든 이를 화가 자신으로 보고 있다.또 사방관을 갖추어 쓰고 두루마리에 붓을 댄 이는 그림에 제발문을 써준 강세황이라는 것이다.인품으로 치면 왼쪽 무릎을 고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한 선비가 으뜸이다.이 선비의 눈꼬리는 한껏 치켜 올라갔다.그러나 눈썹은 매섭지 않다.유엽미로 보아도 좋을 눈썹이 눈꼬리를 눌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긴 얼굴에 수염도 제법 자랐다.관록이 보인다. 유건을 쓴 선비는 나무에 기대듯 섰다.왼손으로 뒷짐을 짚고 오른손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그리고 먼 허공을 올려다 보는 자세인데,이를 강세황은 제발문에서 ‘시를 읊조리는 것 같다’고 했다.글과 그림을 짓기 위해 모인 아회를 이렇듯 구체적으로 묘사한 그림은 흔치 않다.서로 다른 자세와 각양각색의 다른 표정을 포착한 이 그림에서는 한가로운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 17세기 조선백자대호 9억2천만원에 낙찰/미 크리스티 경매장

    【뉴욕 연합】 조선시대 17세기 ‘백자대호’가 25일 하오(현지시간) 미 뉴욕시내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수수료를 포함,미화 82만7천500달러(약 9억2천8백45만원)에 팔렸다.이날 경매에서 뉴욕의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가장 관심을 끌었던 백자대호(높이 54.7㎝,지름 43.4㎝)는 예상 경매가격이 1백만달러에서 1백50만달러였으나 실제예상가를 훨씬 밑도는 가격에 경매됐다.
  • 조선시대 신분사연구/한영우 지음(화제의 책)

    ◎조선초 사회계층·신분이동 다룬 연구서 조선초기 사회계층과 신분이동에 관한 시론적 성격의 연구서.특히 조선초기의 신분계층구조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조선초기에는 무엇보다 노비세습제를 강화하고 양인과 노비의 혼혈과 상호이동을 막는 데 주력했다.다만 혈통에 의한 노비세습이 강요되었지만 그들의처우는 전대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국가의 적극적인 변정사업에 의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자나 양천의 피가 섞인 자는 상당수가 다시 양인으로 환원된 것이다.양인과 노비의 구별이 중세적 신분유형에 가까운 귀속적 성격의 것이라면,양인 자체내의 신분구별은 근대적 계급유형에 가까운 성취적 성격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게 지은이의 견해다. 이 책에서는 조선초기 양반의 개념에 대해서도 폭넓게 살핀다.조선초기의 양반은 문무 관료집단을 총칭하는 대명사로 쓰였다.문반과 무반,유품관과 서리,실직과 산직을 구분하지 않고 품질을 가진 자는 모두 양반이라고 불렀다.심지어는 아전중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인 일수에게까지도 ‘일수양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양반은 때로는 사대부로도 불렸다.사대부는 사,곧 5품 이하의 관리와 대부,곧 4품 이상의 관리의 합칭으로 ‘주례’의 사대부 개념을 빌어온 것이다.한편 조선초기 신분이동 측면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것은 공신과 당상관,그리고 일부 참사관의 자제였다.이들에게는 문음의 혜택이 있어서 간단한 시험만 거치면 남행출사가 가능했다.그러나 고급관료가 되려면 어차피 문과와 청요직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남행출사는 초입사의 길을 유리하게 열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집문당 1만원.
  • 언어와 자동차 소재 이색공연 2제

    다음주 서울에서는 아주 독특한 공연 2편이 선을 보인다. 24일 대학로 성좌소극장에선 원로시인 성찬경씨(67)가 조선시대 선비복장으로 하오 4시30분과 7시30분 두차례 무대에 오른다.공연제목은 ‘말예술­포폴로좌의 별들’.지난해 12월에 이은 성씨의 두번째 ‘말예술’ 소개무대다. ‘말예술’이란 성씨 스스로 주장하는 예술의 신장르로 말을 가장아름답고 품위 있게 공연으로 보여주는 것.예컨대 “아아,오늘은 날씨가 좋구나!”라는 말 한마디라도 수없는 연습을 통해 공연작품으로 승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성씨는 자작시를 포함해 12편의 시를 낭송이 아니라 공연으로 선보인다.또 재즈 뮤지션인 아들 성기완이 라이브 무대로 분위기를 살린다.(문의 591­0513) 29,30일 하오5시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마련되는 심철종 캠페인 퍼포먼스 ‘자동차씨 모의재판’은 제목 그대로 캠페인성이 강한 야외공연.자동차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켜 올바른 자동차문화를 정착시키자는 취지가 담겨있다.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스크린을 자동차가뚫고 나오는 사고상황,자동차를 즐기고 파괴하고 해체하는 일련의 광경이 연극과 무용,영상,음악등 다양한 공연요소들로 연출된다.관람료 무료.(문의 338­9240)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저 ‘분단과 한국사회’

    ◎민족분단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4·19혁명 10월유신 교원노조운동 등 실어/천민자본주의·지배이데올로기 문제 분석 “한국 자본주의 혹은 한국사회의 역사구조적인 기초는 한국전쟁과 민족의 분단입니다.식민지 경험이나 조선시대의 사회 문화 등도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낸 기초가 되었지만 한국전쟁과 분단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외적 조건이자 변수라고 할 수 있어요”김동춘 성공회대 교수(39·사회학)가 한국전쟁과 분단을 중심에 놓고 한국문제를 분석한 논문집 “분단과 한국사회 역사비평사”를 펴냈다. 이 책은 “산업화,자본주의,민주화,시장.계급 등 근대사회 일반에 나타나는 보편적 개념들은 수없이 논의되어 왔지만 분단과 민족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는 문제의식 아래 김교수가 지난 10년동안 쓴 논문들을 묶은 것.분단에 따른 사회현상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춘 “분단과 한국사회” “한국전쟁과 지배이데올로기의 변화”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지배질서” “사상범 통제의 한국적 특성” “남북한 이질화의 사회학적 고찰” 등의 논문과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다룬 논문인 “4.19혁명의 재조명” 민족민주운동으로서의 4.19 시기 학생운동 “왜 60,70년대 민주화운동은 10월유신을 저지하지 못했는가”교사집단의 계급적 성격과 한국 교원노조운동 등 모두편의 글이 실렸다. 김교수는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영국의 사회학자 라쉬와 어리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시장의 성장과 자본의 국적성 희석화,화이트칼라와 서비스 계급의 비중강화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런 관점에서 한국사회는 “탈조직화된 자본주의 징후를 지니고 있다는 것.그는 또한 1980년대 한국사회를 이른바 시장권위주의 내지 시장기제적 억압체제로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이같은 입론은 자유경쟁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복지국가로 연결되는유럽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뿌리를 둔 “시장”과 “국가”의 개념을 한국사회에 무매개적으로 적용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김교수는이 책에서 소유권 절대주의 등한국의 천민자본주의와 지배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양상을 꼼꼼히 살피고 있어 주목된다.해방전의 친일파와 해방후의 친미세력으로 이루어진 지배집단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안보국가 군사주의 성장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으며,이는 노동자 시민사회 등 피지배계급에 대한 무시로 이어졌다는게 김교수의 견해.때문에 ”일반적인 삶의 조건은 황폐해질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김교수는 우리 학계는 이같은 문제점들을 방치한 채 서구이론에만 매달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황동용(외언내언)

    용은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이기도 하고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기도 했다.따라서 4천년 전부터 그 조형적 표현이 이루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회화·조각·공예 각 분야에서 용의 형상이 발견된다.왕궁이나 불교사원 건축에서는 권위의 상징으로 쓰여졌고 민간에서도 도자기나 민화 등에 친근하게 표현돼 왔다.특히 조선시대 청화백자·철화백자 항아리에는 “자유와 치기가 한데 곁들여져서 일종의 마음 개운한 해학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최순우) 용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용은 한국보다는 중국을 더욱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지고 있다.용 그림은 발가락의 숫자로 그 품격을 나누는데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 발가락 용을 쓸 수 있고 한국의 임금은 네발가락 용을,일본의 왕은 세발가락 용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복궁 경회루 연못의 준설작업중 발견된 황동 용은 여러가지로 흥미롭다.지금까지 우리나라 용조각은 ‘용두보당’(호암미술관 소장)이나 화재를 막는 방화신으로서 지붕 용마루에 장식된 용두처럼 부분적인 형태만 보여주는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용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갖춘 조각품으로는 처음인 것이다. 게다가 이 용은 다섯개의 발가락을 지니고 있다.우리 민화에서는 다섯 발가락 용그림이 자유롭게 그려졌으나 정통회화에서는 다섯발가락 용은 찾기 힘들다. 대권을 노린 용들의 싸움이 한창인 지금 발견된 용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옛 문헌이나 설화·민속등에서 용의 등장은 반드시 어떤 미래를 예시한다.‘문헌비고’에는 신라 시조 원년부터 조선조 숙종 40년 사이에 29차에 걸쳐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그리고 이 기록뒤에는 빠짐없이 태평성대,성인의 탄생,큰 인물의 죽음,군사의 동태,농사의 풍흉 등 거국적인 대사의 기록들이 따른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여의주까지 찾아내 완벽한 형태의 황동 용 조각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는 날을 기다리면서 이 용의 출현이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를 기원해본다.
  • 조선후기 김홍도의 ‘우물가’(한국인의 얼굴:120)

    ◎물긷는 아낙네에 남정내 불쑥/남녀유별 강조한 사회상 표출 조선시대 후기를 살았던 김홍도는 당시 풍속을 잘 그린 화가다.회화에서 풍속화라는 한 장르를 새로운 시작으로 개척하고 또 이 분야 그림에 불을 당긴 화가이기도 했다.풍속화에는 화가 주변의 세정이 짙게 배어들기 마련이다.그래서 민중 친화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궁중에 속한 화원 신분이기는 했으나 시정풍경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그의 풍속화첩에 나오는 ‘우물가’는 그런 조선의 정경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처럼 구성한 그림이다.남녀유별을 강조한 당시 사회상을 은연중 표출한 이 그림은 여인네들 끼리만 자유로워야할 우물 언저리를 소재로 했다.그런데 불쑥 나타난 남정네가 여인네들 판을 깨놓았다. 그 남정네는 창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걸쳤다.그리고 옷섶을 다 열어놓아 배꼽까지 드러났다.힘깨나 쓸만한 체구이나 우물가 여인들이 보기에는 민망한 꼴이다.정말 목이 말라서인지,아니면 부러 끼어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어떻든 내외를 할 수 밖에 없는 아낙의 볼에는 벌써 홍조가 피어났다.필부필부로 인연을 맺어 사는 아낙일 터이지만 얼굴이 퍽이나 곱다. 아낙은 갸름한 얼굴을 했다.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크지는 않으나 오뚝한 코,작게 다문 입이며 나무랄 데가 없다.과장되지 않은 미인이다.수수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은 큰 머리다.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앞쪽 아낙도 그런 머리다.당시 유행한 머리모양인가 보다.그런데 젊은 아낙 오지랖 아래로 아직은 몽실한 젖무덤이 삐죽 나왔다.치마말기속에 감추어 두어야할 부분이다.그러고 보면 아마도 초산때 첫아들 옥동자를 낳았던 모양이다. 젊은 아낙은 아들까지 낳았으니 큰일 하나는 치른 어느 집 며느리다.그러나 난데없이 우물가에 나타난 무뢰한 앞인지라 아직은 수줍다.옷고름이라도 자근자근 물고싶은 마음이지만 두레박줄을 두손에 쥐었기 때문에 그럴 처지도 아니다.엄청 수줍어하는 아낙 표정에 비해 두레박물을 마시는 남정네는 숭굴스럽다.그래서 묘한 대비를 이룬다.그림의 뜻을 말하는 화의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남정네는 망건을 쓰고 뒷짐에 갓까지 걸어두었다.막무가내로 우물가를 찾기는 했으나 그런대로 백면서생의 이력은 지녔을 법하다.남정네 얼굴을 가만히 살피면 우스꽝스러운데가 있다.자라목처럼 목이 밭고 두상도 잘 생기지는 않았다.그 두상에 그 얼굴이라고 눈과 코,입이 별 간격을 두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있다.〈황규호기자〉
  • ‘아프리카미술전’·‘우리 옛 돌조각의 힘전’전 눈길

    ◎그로리치 화랑 이화여대 박물관서 전시 지난 1일부터 그로리치화랑(720­5907)에서 열리고 있는 ‘아프리카미술전’(15일까지)과 4일부터 이화여대박물관 조각정원(98년 10월31일까지 360­3152)에서 마련되는 ‘우리 옛 돌조각의 힘전’은 현대미술 일색인 요즘 전시와는 차별화한 참신한 볼거리로 눈길을 끈다.두 전시 모두 원시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조각들이란 점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아프리카미술전’은 미국인 소장가가 평생동안 수집한 아프리카 각국의 원시적인 가면과 인물상 120점을 들여와 보여주고 있고 ‘우리 옛 돌조각의 힘전’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에 걸친 돌조각 71점을 엄선해 전시한다.‘아프리카미술전’에 선보이고 있는 작품들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드러난 것처럼 20세기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력을 강하게 드리우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면 ‘우리 옛…’ 전시 돌조각들은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담은 대표적인 것들이다.‘아프리카미술전’에서는 나이지리아 가봉 자이레 가나 이디오피아 말리 등의 부족 가면과 인물들이,‘우리 옛…’에선 동자상 부부상 맷돌 장승 문인석 등 우리의 설화나 옛 이야기들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돌조각들이 각각 독특한 인상을 전해준다.
  • 김홍도의 ‘선동취적도’(한국인의 얼굴:118)

    ◎티없이 해맑은 소년신선 피리부는 모습 화폭 담아 단원 김홍도는 여러 신선을 그리면서 나이 어린 신선도 화폭에 담아냈다.소년 신선이 피리를 부는 ‘선동취적도’가 그것이다.어떤 신선인지는 불분명하나 소년티가 역력한 신선은 혼자서 피리를 분다.그 유명한 서양화가 E 마네의 1866년 작품 ‘피리부는 소년’보다 한 세기 가까이 앞선 그림이다.그럼에도 ‘선동취적도’는 마네의 작품처럼 예사롭지도 않을 뿐더러 심오한 모티브를 함축하고 있다. 소년신선의 얼굴은 달덩이 만큼 둥글다.하관이 부풀어 더욱 둥근얼굴이다.피리를 부느라 붉은 입술을 한껏 오므려 귀여운데,입속으로 바람을 잡았다.그래서 볼이 부풀어 오른 모양이다.그린 것마냥 또렷한 눈썹에서 한참을 내려온 눈이 총명스럽게 빛난다.그리 크지는 않은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콧날이 길게는 내려왔으나 유순하게 마감되었다.소년신선은 일찍 자기인상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마가 넓다.비록 어리기는 하나 도량도 넓을 법하다.쌍뿔머리를 틀고 남은 머리카락으로 넓은 이마를 약간가려놓았다.그리고 소담한 귀를 좀 덮어놓은 머리카락이 귀밑으로 흘러내렸다.쌍뿔머리를 누군가가 댕기로 동여매어 주었다.그래서 헤어스타일이 독특한 소년신선은 얼핏 불가의 동자같기도 하다.그러나 차림새 행색자체가 사뭇 선풍이다. 얼굴이 티없이 해맑은 소년신선은 가랑이가 치렁치렁 내려와 짚신속 발등에 와닿는 긴 바지를 입었다.오른쪽으로 옷섶을 여민 우임의 두루마기 위에 학날개 같은 덧옷을 걸치고는 춤 낮은 대바구니를 메었다.불로장생 먹거리 영지며 솔잎이 바구니에 들었다.어깨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붉은 호리병도 보인다.‘군선도’에 나오는 주량 큰 신선 이철괴가 술 생각이 더 나서 들여다 보았던 그런 호리병이다. 소년신선이 불고있는 악기는 세로로 부는 피리다.세로로 부는 피리를 꼽자면 소,적,통소,단소 등이 있다.이 ‘선동취적도’의 피리는 흔히 퉁수라고도 부르는 통소가 아닌가 한다.통소는 관대의 밑이 막히지 않은 관악기다.이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원의 또다른 ‘선동취적도’(1779년 작품)에 써넣은 글을보면 ‘옥을 뚫어 아홉구멍을 냈으니…’라는 구절이 나온다.조선시대 음악교본인 ‘악학궤범’에서 소를 설명한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인 것이다.〈황규호기자〉
  • 김용두옹 일서 수집 우리 유물 114점 기증

    ◎재일교포 평생 모은 문화재 고국 품에/17·18세기 도자기 등 국보급도 상당수 포함 한 재일교포가 평생동안 모은 소중한 우리 문화재중 1백여점이 그의 뜻에 따라 고국의 품에 돌아왔다. 재일교포 김용두옹(75·일본 효고현 소재 천리개발주식회사 회장)은 그동안 일본에서 수집한 우리 도자기 60점,서화류 34점,공예품 및 목가구 20점 등 문화재 11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국립중앙박물관측이 23일 이를 공개했다.기증유물은 모두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이중에는 17세기 후반의 ‘백자철화죽문죽절형병’과 18세기 전반의 ‘청화백자매죽문각병’ 등 조선시대 자기와 고려말 청동제 ‘금은입사향로’,조선후기 화가 김득신(1754∼1822)의 ‘추계유금도’,17세기 전반의 것으로 보이는 작자미상의 10폭짜리 ‘산수도’병풍 등 국보·보물급 희귀 문화재들이 상당수 들어있다. 경남 사천출신으로 8세때 가족과 함께 도일한 김옹이 우리 문화재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청년시절인 1945년,히로시마의 한 골동품상에 들렀다가 한국유물에 관심이 쏠리면서부터.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던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만을 수집,지금까지 수집한 것만 해도 1천여점이 넘는다. 지난 86년 일본 나라(나양) 대화문화관에서 그의 수집품 전시회가 열리면서 비로소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93년엔 국내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의 소장명품 210점을 수록한 ‘두암 김용두 소장품도록’을 출판했다.이듬해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직접 나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김용두 옹 소장유물특별전’을 열기도 했다.지난 3월 김옹을 방문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황수영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정영호 교원대 교수 등이 그의 기증의사를 확인한 후 반년뒤에 마침내 유물은 고국에 돌아왔다.김옹과 그 자손들은 “우리 문화재들이 고국을 찾아갈 수 있게돼 기쁘다”면서 흔쾌히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 남양주 먹골배/달콤하고 시원한 ‘황갈색 꿀단지’

    ◎바람적고 일교차 커 수분많고 단단/별내·진접 500농가서 연8,892t 생산/43번 국도 주변 80여개 직판장 운영/요즘 수확철… 가족 주말나들이 인기 해마다 10월이 되면 남양주시 전역은 먹골배 잔치로 풍성하다. 별내면과 진접읍 진건면 등 먹골배 산지에는 본격적인 출하기를 맞아 농민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시내 곳곳은 축제가 한창이다.품평회와 시식회,한마당 농악 대잔치,먹골배 견주기와 까기 등 생산농가들의 흥을 돋우는 행사들이다. 남양주 먹골배는 조선시대 궁중 진상품이다.최근에는 해외 수출 길까지 열리며 지역 특산품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먹골배의 우수한 맛은 이곳 지형에서 나온다.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적고 일교차가 큰 탓에 과질이 단단하고 수분과 당도가 단연 뛰어나다. 주산지는 별내면 광전리 남양주∼의정부간 43번 국도변 일대다.면적만 463㏊에 달한다. 이곳 5백여 농가에서 거둬들이는 한해 수확량은 8천892t.전국 생산량의 10% 안팎이다.다른 곳과는 달리 판로 걱정은 없다.서울과 가까워 주말 나들이객들이 앞다퉈사간다.특히 국제품평회에서 맛과 당도를 인정받아 올해부터는 싱가폴 등 동남아지역에 수출길까지 열렸다. 시도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 주요 도로변에 80여개소의 직판장을 개설해줬다. 지난해 재배농가가 벌어들인 소득은 2백60여억원.농가당 5천3백여만원이 높는 고소득이다. 이곳의 광활한 배밭은 전원도시 남양주를 상징하는 관광자원 노릇도 톡톡히 해낸다. 하얀 배꽃이 산 전체를 휘감으며 만발하는 4∼5월쯤이면 연인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또 수확철인 요즘은 가족단위 행락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직판장 배값은 품질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시중보다 30% 정도 싸다.길가에서 팔기 때문에 물류비용이 줄어서다.최상품 15㎏ 한박스당 3만∼3만5천원 중품은 2만7천원선이다. 소비자들을 위해 시가 품질을 보증하는 품질보증표를 박스마다 부착,구입후 낭패를 보는 일은 없다.함량미달이나 미규격품에 대한 작목반별 자율정화활동도 활발하다. 남양주시는 수출을 확대해 생산농가들의 경작기반을 돕는데 힘을 쏟고 있다.시 농촌지도소는 UR개방화에 대비,근교농업의 잇점과 기술농업을 집중 육성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이에 따라 재배농가들도 종자를 신고 추황 영산 등 신품종으로 교체해 나가고 있다. 또 7개년 계속사업으로 Y자형 밀식재배과원을 조성,노동력 절감효과와 함께 재배면적을 현재의 2배로 확대하고 있다. 최고 품질생산에 대한 농민들의 의욕도 대단하다.재배농가들이 주축이 돼 ‘먹골배영농협의회’(회장 한동수)가 구성돼 생산에서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공동방식을 취했다.또 기술을 공유하고 마을단위 공동직판장을 운영,생산 및 판매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최소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품질 차별화를 시도하고 독특한 로고가 세겨진 고급박스 제작에 6백여만원을 투입했다.또 각 작목반별로 선진지 견학과 수범사례발표회 등도 갖는 등 우수배 생산에 땀을 쏟고 있다. 소비자들이 우수 먹골배를 고르는 요령은 우선 선명한 황갈색을 띤 원형이 뚜렷한 지를 눈여겨 보고 과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것을 고르면 된다.또 깨물었을때 텁텁한 식세포가 적으면서 시원하면 일등품이다. ◎별내면 ‘평양작목반’/꽃가루 채취·수분 등 공동작업 “품질 최고” 남양주 먹골배 주산지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평양작목반이다. 별내면 화전1·6리,광전2리 등 3개 마을 생산자 150명이 모여 결성된 평양작목반(반장 우동현·45)은 재배방법이나 기술 등 전 과정을 작목반 공동형태로 이끌어 나간다. 재배면적은 60여㏊로 한해 생산량은 5백여t에 이른다.배 농사는 4∼5월 인공수분 작업으로 시작된다.40∼50명씩 꽃가루 채취에 나서는 것.채취된 꽃가루를 중량제에 섞어 일일히 붓으로 발라주는 인공수분 작업은 손이 보통가는 작업이 아니다. 6∼7월 과일솎기 작업에 이어 수확철을 앞둔 9월부터는 봉지싸는 일에 매달린다.수십t씩 따내는 배 한알 한알마다 정성을 기울인다. 대다수 농가들이 직판장을 두고 직접 자신의 상품을 내다팔고 있어 배 한개한개가 바로 자신들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출하를 조절해 가격폭등 등에 대비하는 일도 작목반이 할 일이다.질이 떨어지는 상품이나 규격미달 등소비자를로부터 외면받게 하는 행위는 외부제재보다 먼저 작목반 자율 규제에 걸린다.
  • 한국전통 도량형기 한자리에/국립박물관

    ◎저울·쇠사슬자 등 350점 전시 국립민속박물관은 22일부터 11월24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한국의 도량형전’을 개최한다.이 전시는 서양의 도량형이 들어오면서 설 땅을 잃게된 우리 전통계량법과 자,되,저울 등 도량형기의 변화상을 더듬어보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미터법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도량형 문물을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도량형 사용은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척도와 부피관련 단위가 나오고 삼국시대 돌 저울추와 거푸집이 출토돼 이 시기 저울의 역사가 실물로 확인되고 있다.이후 고려시대까지 변화없이 지속되다가 조선시대 세종때 도량형을 통일하고 기기를 제작해 썼으며 1902년 서양식 도량형제가 도입되면서 바뀌기 시작,종전의 도량형제는 1964년 미터법으로 전환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전시에는 모두 350점이 나오는데 삼국시대 발굴자료에서부터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달라지는 도량형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모습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꾸며진다.제1부는 자의 역사와 쓰임새를 중심으로 구성된다.조선시대 사용되던 놋쇠로 만든 주척,영조척,포백척,목공 연장에 쓰인 자와 함께 소머리가지자,쇠사슬자,탄광용자 등 일반인이 쉽게 보지 못했던 자료들이 대거 나온다.2부는 부피(양)를 잴때 사용되던 홉,되,말이 전시된다.민간에서 만들어 사용한 크고작은 되에서부터 관에서 만든 정형화한 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것들을 전시하며 서양의 영향을 받아 도량형법이 개정되면서 제작한 개량기기를 전통 도량형 기기와 비교해 놓는다.3부는 무게를 다는 저울이 전시된다.
  • 경기 동구문화제서 태조 이성계 제례봉행

    ◎선조들 위업·전통문화 계승 ‘태조 이성계의 유업을 오늘에 되살리자’ 19일 낮 12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서는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동구문화제’가 열렸다. 올해로 15번째를 맞는 동구문화제는 선조의 위업을 기리고 한국혼의 정신을 후손들이 본받도록 제전위원회(위원장 이용곤 서일전문대 이사장)가 마련했다.동구릉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선조·영조 등 조선시대 왕과 왕비 9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날 행사에는 남양주·구리시민,전주 이씨 종친회 회원 등 8백여명이 참가했다.행사 가운데 참가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태조 이성계의 묘가 있는 건원릉에서 펼쳐진 제례봉행행사.제례는 전통제례복을 입은 15명의 제관이 국악에 맞춰 입장을 하면서 시작됐다.1시간여동안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된 제례를 지켜보던 참가자들은 우리의 전통제례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제례행사와 더불어 동구릉에서는 주부백일장,유치원생의 사생대회,전국 게이트볼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함께 펼쳐졌다. 이위원장은 “이 행사는 단순히 옛것을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건국이념을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로 무너진 도덕과 윤리를 새롭게 일으켜 보기 위한 것”이라며 “앞으로 범국민적 차원의 문화행사로 확대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동구문화제는 20일까지 계속된다.
  • “검찰 불개입” 자신 국민회의

    ◎검찰총장 “신중”발언 고무 공세 전환/여 폭로전 ‘이회창 게이트’ 규정 비난 15일 국민회의에는 ‘이제 비자금정국의 질곡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감돌았다.김대중 총재에 대한 수사여부와 관련,전날 김태정 검찰총장의 ‘신중에 신중을 다해 검토하겠다’는 답변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김총재의 지지율이 38.1%를 기록했다는 지난 12일 당내여론조사 결과도 한몫을 했다. 김총재는 법사위에 긴급수혈되어 ‘공격’과 ‘훼방’으로 각각 큰 몫을 한 박상천 원내총무와 조홍규 의원에게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이같은 자신감은 즉각 대변인단을 총동원한 대신한국당 전방위 파상공세로 이어졌다. 김민석 부대변인은 김총재 고발방침을 밝힌 신한국당에 대해 이날 아침 ‘검찰로 부터 외면받은 가련한 적반하장’이라고 약을 올렸다.‘고발해서 될 일이면 벌써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을 것’이라는 비아냥도 뒤따랐다. 정동영 대변인은 ‘신한국당의 폭로전은 이회창 게이트’라면서 “닉슨을 파멸시킨 워터게이트와는 ▲정권욕 ▲증거조작 ▲불법수단 동원 ▲개인사찰 ▲정보기관 동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이회창 총재에 비난의 촛점을 맞추었다.윤호중 부대변인은 친인척의 예금계좌를 제시한데 대해 “3족을 멸하던 조선시대에도 덕이 있는 임금은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이총재의 박덕을 강조했고,박선숙 부대변인은 ‘신한국당의 경제인 달래기는 악어의 눈물’이라고 혹평했다. 장성민 부대변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회창의 친위대 5인방’이라며 강삼재 총장과 정형근 김영일 이사철 송훈석 의원을 지목했다.정의원은 안기부 출신의 공작정치전문가,김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밀정보를 빼돌린 사람,이의원은 공안검사를 하며 어떻게 30억원의 재산을 모았는지 모를 사람,송의원은 정재철 전 의원의 비자금을 관리해 온 당사자라는 의구심이 드는 사람,강총장은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이라고 각각 인신공격성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회의는 16일에도 공세의 끈을 늦추지 않을 방침이다.검찰의 김총재의 근심을 덜어줌으로써 그동안 맞대응 자제를 외치던 국민회의를 한순간에 강력대응으로 선회시킨 셈이다.
  • 한폭의 ‘파스텔화’ 가리왕산

    ◎빨강·노랑·파랑 원색의 단풍 물결이 ‘손짓’/참나무 등 빽빽한 수림과 절벽의 계곡 비경/중봉까지 이어진 임도는 MTB코스로 최고/인근 소금강·물운대 등 화암팔경도 들러 볼만 멀리서 바라보면 산 정상은 명암이 뚜렷하지 않은 고동색의 파스텔화다.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노랑,빨강 등 원색의 단풍이 물결친다. 흔히 산세가 험한 남성스러운 산을 악산이라고 하고 수림이 풍성한 산을 육산이라고 한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회동리에 있는 해발 1천561m의 가리왕산은 육산계열에 속하는 산이다. 중년부인의 둔부처럼 산세가 완만해 원경은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치마를 살짝 들치고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빽빽한 수림과 우거진 계곡이 비경이다. 가리왕산은 초입부터 침엽수림의 바다다.그 사이로 난 널직한 길은 계곡을 끼고 가다 온산을 휘감으며 해발 1천m의 중봉까지 이어진다.나무를 수송하던 임도인 이 길은 최근에는 산악자전거(MTB)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MTB 동호인들은 전국 최고의 MTB도로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MTB를 타고 산을 거슬러 올라가면 곳곳에서 박달나무,자작나무,물푸레나무,참나무 등이 빨갛고 노란 옷을 입고 반긴다.공해에 찌들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에 치이지 않은 탓인지 단풍빛깔이 한결 선명하다.다람쥐들도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고 단풍에서 낙엽으로 변한 나뭇잎이 힘에 부친듯 소리없이 떨어지기도 한다.50㎞ 남짓한 이 길은 확실히 MTB 동호인들을 흥분하게 만든다. 중봉에 오르면 삼산봉표비가 있다.조선시대때 이 곳에서 산삼을 채취,임금에게 진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가리왕산의 풍성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안내자는 요즘도 산삼을 캤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며 산삼 뿐만 아니라 자작나무 수액,두릅,표고버섯 등이 곳곳에 숨어 있다고 귀띰한다. 정선은 가리왕산 외에도 동면에 있는 화암8경에서도 가을을 만끽할수 있다. 그림바위(화암)라는 말처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소금강,몰운대,광대곡 등 8개의 절경이 4㎞의 계곡에 퍼져 있다. ◎가리왕산 입구 갈왕산장/광원 사택을 관광숙박시설로 개조/식당·농구장·캠프파이어장도 마련/영동고속도 새말IC서 국도 이용을 음산했던 광원들의 사택에 주말이 되면 활기가 넘친다. 가리왕산 입구에 갈왕산장.이곳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집 한채에 2가구가 살 수 있게 된 전형적인 광원들의 사택이었다.그러나 석탄산업합리화로 지난 92년 인근의 대성탄좌가 폐광하면서 광원사택은 흉가터로 변했다.모두 떠나는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95년 유홍식씨는 광원들의 사택 25개동을 사들여 관광숙박시설로 개조했다.난방을 위해 기름보일러를 설치하고 수세식 변기 및 싱크대 등을 마련,하룻밤을 보내는데 불편이 없도록 했다.방에 벽난로도 설치했다. 콘도와는 달리 한채 한채 독립가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밤이면 별이 쏟아질듯 하늘에 가득하고 풀벌레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노래방과 식당을 물론 빈터에 농구장,캠프파이어장도 마련돼 있으며 주변에 패러글라이딩 연습장,낚시터 등을 끼고 있다. 하루 숙박료는 방 2개에 6만원.여름에는 한달내내 붐비지만 요즘은 주말이 되면 절반정도 찬다고 한다.(0398)63­7977∼9. 가리왕산으로 가는 길은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국도로 빠져 나아 안흥∼평창∼미탄을 거쳐 가리왕산자연휴양림 팻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고속도로 정체가 없을 경우 2시가40분 걸린다.새말을 지나 장평에서 국도를 타고 들어오면 3시간이 소요된다.원주에서 제천까지 아 제천∼영월∼정선국돌르 타면 3시간20분 걸린다.
  • 김홍도의 ‘공독선록도’ 신선(한국인의 얼굴:117)

    ◎단잠 동자 깨기 기다리는 노선/낭만적인 선경분위기 화폭에 단원 김홍도가 신선사상에 얼마나 심취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그림이 있다.요새 미국에서 들어온 ‘공독선록도’라는 그림이다.그는 두루마리 다발을 든 신선과 동자,사슴을 먼저 화폭에 그려놓았다.그 다음 자신이 마치 신선과 자리를 함께라도 한듯 착각에 사로잡혀 글귀를 그림 여백에 남겼다.‘속세에 태어나서 이 노인과 어찌 사귀었는지 모르나 신선이 쓴 글을 함께 읽었다’는 내용이다. 글귀는 자못 환상적이다.그러나 여유롭고 낭만적인 선경의 분위기가 화폭에 넘친다.신선 만나는 꿈을 늘 꾸어온 단원은 글에서나마 자신이 그린 신선을 만난 것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조선시대 사람들은 신선을 만나고 싶어하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그래서 이를 이야기로 엮어 그 소망을 풀어냈다.신선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선설화가 그것이다. 단원이 글을 함께 읽었다는 신선은 맷방석에 바로 앉아있다.단좌의 자세에서 두루마리 다발을 드느라 왼팔목을 올렸다.글이 든 두루마리 다발을 어디 보낼 참인데,심부름 할 동자가 꼬부리고 앉은채 그만 잠이 들었다.신선은 “어허! 그 녀석…”하는 표정을 지었다.동자는 먹을 갈다 잠이든 모양이다.벼루와 연적,붓 두 자루가 신선앞에 가지런히 놓였다.그리고 신선을 따라나선 사슴은 편히 넙죽 엎드렸다. 그런데 사슴은 시장기가 들었는지,바구니에 담아온 먹거리 불감과 영지에 눈길을 주었다.한낮이 기울었나 보다.동자는 여전한 단잠이다.신선은 작은 눈매로 쌍뿔머리 동자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급할 것이 없다는 눈치다.눈매가 작으면 좀 모질어 보이는 법이나 ‘공독선록’의 신선은 그렇지 않다.나이가 들도록 선도를 닦고 익혔으니 어찌 세속의 여느 사람에 견주랴.동자가 잠에서 부시시 깨어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신선은 두건을 썼다.두건밑으로 옆머리칼만 삐죽 내려왔다.머리칼이 아직은 검고 수염 역시 검다.그러나 노선은 분명했다.불로장생의 섭양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신선의 나이는 꽤 들어보인다.학창의와 바지 무릎주름이 정두서미묘법으로 잡혔다.단원다운 필치다.〈황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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