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시대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의사 부족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지주회사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종전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 유죄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80
  • 붉은 왕세자빈/마거릿 드래블

    붉은 왕세자빈/마거릿 드래블

    소녀는 유난히 빨간 비단치마를 좋아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자 처음으로 손수 치마를 만들어 선물했다. 아주 먼 훗날, 소녀는 생각한다. 자신에게 떨어진 모든 재앙의 원인이 혹시 빨간 비단치마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하고. 소녀는 혜경궁 홍씨(1735∼1815)이다.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자 정조의 생모.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죄책감과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며,80평생을 버틴 그녀는 살아 생전 네번에 걸쳐 자신의 기구한 삶을 담은 회고록을 펴냈다. 영국 여성 작가 마거릿 드래블(66)의 장편소설 ‘붉은 왕세자빈’(원제 The Red Queen·문학사상)’은 18세기 조선시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나침반삼아 21세기 지식인층 영국 여성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한 내면을 좇는 이중구조의 소설이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벽을 넘어 두 여인의 닮은 꼴 인생을 정교하게 교차시킨 이 책은 지난해 영국에서 영문으로 출간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됐다.‘먼 옛날, 광기의 역사’는 사후 200년이 지난 뒤 혜경궁 홍씨의 혼령이 화자로 나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한중록’을 역사적 사료로 삼았지만 작가는 혜경궁 홍씨의 가치관이나 삶에 대한 태도, 세상을 읽는 통찰력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동·서양의 철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소설 속 ‘한중록’은 단숨에 읽힐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원전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것이 혜경궁 홍씨의 재능인지, 아니면 마거릿 드래블의 탁월함 때문인지 궁금해 당장 서점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 것이다. 2부 ‘오늘날, 시간의 터널을 지나’와 3부 ‘먼 훗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의학윤리를 전공한 여성학자 바바라 할리웰 박사의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따라간다. 편집증적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 피터, 병에 걸린 아들 베네딕트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남편을 억압해 결국 실패자로 만든 시아버지 등 바바라의 처지는 기이할 정도로 혜경궁 홍씨와 닮았다.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바바라는 ‘한중록’에 나오는 여러 장소를 찾아다니며 자신을 사로잡은 왕세자빈의 그림자를 훑는다. 바바라의 눈에 비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단상들을 엿보는 재미도 크다. 동료와의 대화 속에 김대중, 김정일, 청와대, 비빔밥, 불교와 유교 등이 자연스럽게 섞여나온다. 왕세자빈이 집착한 ‘빨간 비단치마’의 이미지가 바바라가 공항 면세점에서 충동구매할 뻔한 ‘빨간 실크블라우스’, 서울의 노점에서 산 값싼 ‘빨간 스타킹’으로 이어지는 대목도 흥미롭다. 마거릿 드래블은 부커상 수상자인 언니 A S 바이어트와 함께 ‘현대의 브론테 자매’로 불리며 영국 문단을 대표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제1회 서울국제문학포럼’때 한국을 방문했다가 영문판 ‘한중록’을 접하고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 지난 5월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도 참가했다. 전경자 옮김,9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관악산 火氣 막으려 휘어진 것 아세요”

    서울 세종로 일대가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지로 형성된 과정과, 일제 이후 어떻게 왜곡·훼손됐는지 등을 다룬 단행본이 출간됐다. 서울시는 11일 “도심 광장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세종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종로 이야기’라는 책자로 펴냈다.”고 밝혔다. 원래 세종로는 조선시대 때는 ‘육조 거리’ ‘해태 앞’ ‘비각 앞’ 등으로, 일제 때는 ‘광화문통’으로 불리다 광복 후인 1946년 10월부터 ‘세종로’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성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과 정궁인 경복궁은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 위에 지어졌다. 그러나 화산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종로는 광화문 앞길 130m까지 직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가 동쪽으로 최대 39m가량 휘어진 구조로 조성됐다. 또 광화문 앞에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인 해태상 두 개를 세우고, 숭례문 밖에 남지(南池)라는 연못도 팠다. 이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16년 경복궁 안에 조선의 상징축선에서 동쪽으로 5.6도 틀어진 곳에 ‘日’자 모양의 총독부 청사를 짓고,1920년에는 남산 아래에 일본 조상신을 모시는 신전 조선신궁을,1925년에는 덕수궁 앞에 ‘本’자 모양의 경성부 청사(현 시청사)를 지어 ‘일본의 축’을 형성했다. 또 일본 축을 따라 세종로에 은행나무를 심어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세종로의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립 당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광화문은 68년 복원됐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제가 틀어놓은 자리에, 그것도 목조가 아니라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광화문을 잘못 짓는 우를 범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광화문 위치를 원래대로 돌리고, 일제 유산인 세종로의 은행나무를 없애는 등 세종로의 역사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조선왕실유물 새 보금자리에

    조선왕실유물 새 보금자리에

    ‘양탄자가 깔린 전시실에서 MP3로 안내방송을 들으며 조선왕실의 유물을 감상한다.’ 오는 15일 개관하는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의 새로운 시도다.‘고품격·엄숙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박물관내 모든 전시실에 부드러운 양탄자를 깔았다. 안내원의 ‘시끄러운’ 설명 대신 MP3 음성안내기로 정보를 듣는다. 이렇게 다른 박물관들과 차별화한다는 전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유물들이 가득해 화려한 ‘왕궁’ 같은 느낌을 준다. 궁궐 자료를 비롯해 어보·어책, 의궤, 제기·악기, 과학기기, 금속공예·도자기, 복식·장신구, 가구 등 국가적 행사와 왕실생활, 궁궐건축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 4만여점이 소장된다. 그동안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과 종묘, 창덕궁 등에 흩어져 있던 유물들이 새 보금자리를 찾아 한자리에 모인 것. 우선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유물 2만여점이 지난 5월부터 2개월에 걸쳐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머지는 오는 12월까지 옮겨지게 된다. 지난해 10월 용산으로 옮긴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리모델링한 궁중유물전시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에 모두 15개 전시실로 꾸며진다. 올해는 2층 900평에 5개 전시실이 문을 연다.▲제왕기록실 ▲종묘제례실 ▲궁궐건축실 ▲과학문화실 ▲왕실생활실 등이다.5개 전시실에 1차로 전시되는 유물은 700여점.1층과 지하층은 2007년까지 전시준비를 완료, 공개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국보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별자리지도)과 보물 845호 앙부일구(해시계), 어보(御寶)와 편종, 주칠경대 등 국보·보물급 유물이 대거 포함됐다. 또 왕의 임명교지 등을 묶은 옥책(玉冊)과 금책(金冊), 간책(簡冊)과 철퇴, 의궤 등 그동안 장소가 비좁아 전시되지 못했던 비공개 작품들도 선보인다. 고궁박물관은 개관 기념으로 ‘달항아리 특별전’도 마련했다. 다음달 25일까지 조선백자의 일종인 달항아리 중 국보·보물 7점과 일본·영국박물관 소장품 2점 등 9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를 시작으로 기획전시실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특별전을 지속적으로 열 계획이다.15일 개관식 이후 오후 4시부터 일반관람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1000∼2000원이다. 다음달 말까지 무료 공개된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스님도 담넘는다는 ‘불도장’

    스님도 담넘는다는 ‘불도장’

    오는 14일은 말복.더위에 지친 몸을 위한 보양식을 찾을 때다.입맛 없는 여름철에 몸을 보할 수 있는 건강식으론 흔히 삼계탕이 꼽히지만 여름 보양식의 으뜸은 단연 불도장(佛跳牆,호티아오치앙)이다.불공 드리던 스님도 그 냄새에 이끌려 담을 뛰어넘는다는 불도장.그 깊은 맛과 멋의 세계에 빠져보자. 글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광둥성 지방의 고급요리 불도장은 원래 중국 광둥 지방의 고급요리다. 한국에서는 10여년 전부터 특급호텔 중식당을 중심으로 확산돼 지금은 웬만한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서도 불도장 맛을 볼 수 있다. 불도장 요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 청나라때 푸젠성의 한 관원이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그의 부인이 20여 가지의 각종 고기를 소흥주 항아리에 채운 뒤 한참을 고아 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맛본 사람들은 크게 감탄했고, 훗날 정춘발이라는 요리사가 그 부인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특히 해산물을 많이 써 맛과 향을 보탰다. 불도장 요리는 이렇게 진화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합작품 불도장의 재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진귀하다. 몸에 좋은 것은 거의 다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프라자호텔 중식당 ‘도원’에서 23년동안 일해오고 있는 조리장 유방녕(49)씨는 이렇게 말한다.“불도장에 이것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육·해·공, 즉 들짐승과 해산물, 날짐승이 모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요.”‘도원’에서는 돼지고기 힘줄, 도가니, 관자, 전복, 해삼, 상어지느러미, 오골계 등을 주된 재료로 사용한다. 또 자연송이와 표고버섯 등이 1인분에 한 두 쪽씩 들어간다. 이밖에 은행, 인삼, 동충하초, 산약, 녹각 등 약재도 곁들인다. 불도장에 쓰이는 재료는 각 중식당의 전통이나 주방장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재료의 양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도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죽순, 양 허벅지, 돼지발굽 힘줄, 부레, 사슴 힘줄, 상어 입술, 돼지내장, 비둘기알, 오리, 조개, 새우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불도장 재료 중에는 국내에서는 유통 자체가 불법인 것들도 적지 않다. ●소흥주로 맛낸 찜 혹은 탕 불도장의 조리법은 간단한 편이지만 상당한 정성이 필요하다. 유 조리장은 자신의 불도장 조리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불도장은 찜과 탕의 중간 단계다. 불도장 재료를 토기에 담고 노계(老鷄)를 이틀 정도 고아 만든 육수를 채운다. 늙은 닭을 쓰는 것은 그 육수가 진하기 때문이다. 소금과 소흥주를 넣고 180도쯤 되는 펄펄 끓는 찜통에서 5∼6시간 동안 흠뻑 쪄낸다. 그렇게 하면 건더기는 흐물흐물해지고, 바닥에는 그야말로 진국만 남는다. 조리의 핵심은 영양소가 파괴되는 것을 막는 일. 요리할 때 ‘숨쉬는 그릇’, 즉 토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코냑 한 방울의 여유와 미학 불도장은 다른 음식에 비해 재료가 고급이고 다듬는데 손이 특히 많이 간다. 정성으로 똘똘 뭉친 음식이다. 불도장을 먹을 때는 굴소스 원액에 홍초와 생강즙을 첨가한 불도장 소스를 찍어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코냑을 한 방울 떨여뜨려 먹기도 한다. 그러면 해산물 특유의 냄새가 줄어든다. ■ 어디서 먹을까?서울프라자호텔 ‘도원’(02-310-7345)에서는 불도장을 1인분에 6만 5000원(세금, 봉사료 별도)에 판매하고 있다. 불도장이 포함돼 있는 봉황(1인 19만원)과 도원(1인 26만원)등 두 가지 코스요리도 마련돼 있다. 서울프라자호텔이 운영하는 서울역사 4층에 위치한 캐주얼 중식당 ‘티원’(02-392-0985)에서는 9월까지 한시적으로 불도장 세트 메뉴를 5만원(1인분, 세금별도)에 판매한다. 서울 밀레니엄 서울힐튼에서는 중식당 ‘타이판’(02-317-3237)의 불도장(1인 6만원, 세금·봉사료 별도)외에 캘리포니아 레스토랑 실란트로(02-317-3062) 뷔페에서도 불도장이 있다. 점심 4만 2350원, 저녁 4만 4770원(세금·봉사료 포함)이다. 불도장으로 유명한 일반 중국 레스토랑으로는 종로구 부암동 하림각(02-396-2442·1인 6만원·부가세 포함)과 강남구 역삼동 대려도(02-555-0550·1인 9만원·부가세 별도)가 있다. ■ ’서울 광화문 장뚜가리’ 퓨전 한식당 ‘장뚜가리’ 세종문화회관점은 국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음식점이다. 이 집에서 파는 ‘김치감정’과 ‘12오겹살’의 맛에 매료돼 일본 관광객은 물론 주변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일본 아사이 TV에 ‘한국의 맛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집이 원조 맛집들이 즐비한 광화문에서 새로운 ‘외식 코드’로 자리잡은 비결은 젊은 감각에 맞춘 깔끔한 맛과 분위기에 있다. 강원도 사투리로 ‘장독’을 의미하는 장뚜가리의 대표 메뉴는 ‘12오겹살’. 오겹살의 두께가 자그마치 ‘12㎜’에 이르는데 이 두께가 가장 맛있는 오겹살 두께라고 한다. 일반 오겹살의 두께가 5㎜안팎인 것과 비교해 두배이상 두껍다. 고기도 수입산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최고 품질의 국내산 돈육만 고집한다. 무엇보다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없다는 게 장점이다. 고기를 굽기 전에 파인애플과 양파로 비린내를 제거한 뒤 아삭한 김치와 함께 구워 곁들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오겹살의 고소한 맛의 여운이 입안에 오래 감돌아 감칠맛을 낸다. 김치는 전남 순창과 광주에 주문 제작해 가져온다. 무공해 유기농으로 재배된 배추를 원료로 하여 전통적인 방법으로 담아 1년 이상 숙성된 묵은 김치다. 김치감정은 조선시대 궁중 수라간에서 왕을 위해 만든 매운 김치찌개의 맛을 재현해 낸 것이다. 잘 익은 김치를 사용해 조미료를 넣지 않았으며,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멸치로 다시 한번 국물을 우려냈다. 찌개에 돌솥밥이 곁들여 나오는데 시원한 맛이 느껴진다. 여기에 살얼음 동동주와 김치치즈계란말이를 함께 먹으면 무더위쯤은 시원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 모든 메뉴를 이 집 사장인 유성호(38)씨가 직접 고안해 낸 것이다. 유씨는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영국 유학시절 한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살려 2년간 전국을 돌며 김치와 돼지고기의 맛을 찾아다녔다.12오겹살은 직접 1∼20㎜까지 잘라 구워 먹으며 수십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것이다. 김치도 유씨가 직접 맛을 보고 선별한다. 장뚜가리 1호점인 광화문점을 외국계 은행에 다니던 부인 김지현(35)씨에게 맡기고 최근 이곳에 2호점을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유씨는 음식은 비법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철저한 맛에 대한 연구와 분석, 여기에 정성을 더하면 새로운 전통 맛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충남 당진군 ‘게눈 감추듯’ 간장게장은 ‘밥도둑’이다. 입맛에 착착 당기는 이 한 가지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 내도(안섬)에 이처럼 밥을 해치우는 것을 묘사한 ‘게눈 감추듯’이라는 간판을 내건 간장게장 집이 있다. 주인 이은순(48)씨는 “집에서 20년간 간장게장을 담가 먹어왔는데 맛을 본 이웃들이 ‘맛있다. 음식점 한번 내봐라.’고 해서 1년3개월 전 게장 전문점을 차렸다.”고 말했다. 뛰어난 맛은 담글 때의 비법도 있지만 원료가 좋기 때문이다. 주인이 해마다 5월 인근 포구나 태안 안흥항 등에서 알이 꽉 찬 꽃게만을 골라 사온 뒤 냉동시켜 1년 내내 쓴다. 냉동시켜야 게장을 담글 때 살이 빠져나가지 않고 질기지가 않다. 비린내도 안 나고 맛이 좋아지는 점도 있다. 냉동게를 꺼내 8시간쯤 내놓으면 자연히 녹는다. 이를 제조한 간장에 통째로 담가 냉장고에서 3일간 숙성시킨다. 게장을 담그는 간장은 감초, 월계수잎, 참숯, 양파, 파, 마른 고추 등을 넣고 3∼4시간 졸인 뒤 식혀 만든다. 참숯과 감초는 혹시 남아 있을 비린내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넣고 있다. 숙성된 게장은 잘라서 손님상에 올린다. 다른 양념을 넣지 않아 순수한 게장맛이 나지만 매운 맛을 즐기는 이에게는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주기도 한다. 꽃게도 국산이나 곁들여 나오는 녹두빈대떡, 머위무침, 늙은오이무침 등 밑반찬 원료도 모두 직접 가꾼 것이다.1인분에 꽃게 한 마리가 들어간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돌솥밥이 함께 나온다. 아직은 덜 알려져서인지 주말보다 평일에 손님들이 많다. 인근 직장인들이 평일에 찾아서다. 이 집은 50m 거리에 ‘대현수산’이라는 수산물 판매점도 운영, 산 꽃게와 주꾸미, 낚지 등을 시중보다 20%쯤 싸게 살 수 있다. 지금은 금어기로 9월 들어서야 구입이 가능하다. 게다가 70m 앞이 바닷가여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는 점은 이 집을 찾는 또 하나의 덤이다. 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강숙자씨 ‘한국여성해방이론’ 책 내

    강숙자씨 ‘한국여성해방이론’ 책 내

    “중세 암흑시대를 끝냈다는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인문주의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교라 하면 케케묵었다고 합니까?”페미니즘. 이거 위험하다. 조금만 삐끗하면 남자는 ‘고추나 덜렁대는 마초’이기 십상이고, 여자가 ‘싸가지 없는 년’ 소리 듣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 과감하게 ‘유교의 음양론’으로 페미니즘을 재구성하자는 주장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숙자 연구원.‘한국여성해방이론-유토피아에서 헤테로피아로’(지식산업사 펴냄)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집대성했다. 여성해방이론을 총정리한 책은 시종 차분한 톤이지만, 강 연구원은 인터뷰 내내 격정적이었다. 이유를 미뤄 짐작할 만도 했다. 책 서문에 스스로 밝혔듯 강 연구원의 자료집을 폐기하고 한국여성학회 정기간행물 논문집에도 싣지 말라는 게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여성성’ 부정은 자가당착 우선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을 사회적으로 학습된, 사회적 구성물로 여기는 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논리적으로 자가당착입니다. 원래 여성성이 없는데 어떻게 ‘여성’해방이라고 합니까. 차라리 ‘인간’해방이라 해야죠. 여성성이 없으면 여성의 연대도 불가능합니다. 아무 공통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뭉칩니까.” 실제 역사도 들었다.“법적·제도적 양성 평등에서 서구사회는 30여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여성 직업의 대부분은 ‘전통적 여성역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즉,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여성성은 없다는 결과가 안 나온 겁니다.” ●왜 ‘잘난’ 여성들만 해방돼야 하나 그렇기에 남·여 대립·갈등구조를 만든 뒤 여성들끼리 잘해보자는 ‘분리주의’가 못마땅하다. 이 분리주의는 곧 레즈비언에 대한 찬양, 레즈비어니즘이다. 애킨슨 같은 미국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은 이론이고, 레즈비어니즘은 실천이다.”라고 공언했다. 레즈비언이 아닐지라도 정치적으로 레즈비언을 지향하자는 주장이다. 이 같은 급진 페미니즘은 이중의 폭력을 행사한다.“자신들 선택이 중요하면 전업주부와 이성애를 선택한 여성들도 인정해야 합니다.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존재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안 그래도 여성으로서 벽을 느끼는 사람들을 왜 또 ‘의식 없는’ 여성으로 만듭니까.” 진짜 레즈비언들도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레즈비언도 남성, 여성 역할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이것 자체를 부정하거든요. 그러니 서로 불편한 거죠.” ●이분법에서 벗어나라 문제의 핵심은 이런 논의 자체가 서양의 문제틀이라는 데 있다.‘여성=자연’,‘남성=문명’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해 여성을 ‘결핍된 존재, 그래서 남근을 선망하는 존재’로 묘사해온 서양의 전통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미국식 교육이 판치다 보니 그런 문제틀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게 문제입니다.”여기서 유교의 음양론이 나왔다.“‘음양’ 하면 서구인들은 대뜸 strong과 weakness로 번역합니다. 그게 바로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죠.” 음양론은 음과 양의 성질에 대한 설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조선시대와 유교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태도도 버리라고 지적했다.“전근대시대 생산양식은 가내수공업입니다. 가내수공업, 그건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생산노동’ 아닙니까.” 다른 예도 들었다.“18세기 박석무가 쓴 글에 보면 아내들이 남편을 업수이 여겨 때리고 욕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성의 발언권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조선·유교 하면 떠올리는 모습은 일부 양반, 그것도 벼슬 자리에나 오른 양반의 모습이 전부라는 것. 물론 이들 문화가 지배적이었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해석이다. ●열린 페미니즘을 위해 결국 해법은 여성성과 그로 인한 차이를 인정하되, 가치는 똑같다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성성을 약함이 아니라 개방성과 수용성으로 규정하고 자매애를 통해 연대하는 것. 즉, 전업주부끼리, 아가씨들끼리, 직장여성들끼리의 연대와 이를 포괄할 수 있는 페미니즘. 이게 바로 강 연구원의 희망이다.“남성·여성 대립짓기는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틀입니다. 페미니즘은 그 틀 속에서 놀지 말고, 그 틀 자체를 깨야죠.”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새와 쥐/진경호 논설위원

    조선시대 하인들 가운데 ‘규비(糾婢)’가 있었다. 힘깨나 쓰는 양반가를 기웃거리며 그들의 은밀한 얘기들을 엿듣는 계집종들을 일컫는다. 오늘로 말하면 첩보원이자, 도청 전문가들이다. 나라가 새삼 시끄럽지만, 우리를 포함해 인류 역사로 보면 도청(盜聽)은 이처럼 매춘(賣春)과 더불어 가장 오랜 기원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역(聖域)이 없기로는 더 윗길일지도 모를 일이다. 독재자 스탈린이나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 브라질의 페르난두 카르도수 대통령 같은 수많은 절대권력자들조차 도청에 시달렸다. 안기부 도청팀 ‘미림’도 성역을 두지 않기로는 남 못지않았던 듯하다. 한 문헌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도 1990년대 중반 도청을 당했다. 당시 안기부장이던 모 인사가 천주교 고위인사에게 “추기경님을 도청 대상에서 빼주겠다.”고 했고, 곧바로 사제관에는 도청 탐지기가 설치됐다고 한다. 김 추기경을 들여다보신 분이 하나님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미림팀의 활약은 당시 야권의 중심이던 김대중(DJ)씨에 대한 감시로 정점을 이룬다. 김 추기경이 도청받던 이 무렵 DJ의 동교동 자택 주변은 사실상 첨단 도청설비로 채워져 있었다.DJ 자택 양 옆의 178의 16호와 177의 6호는 전체가 안기부의 도청시설이었다고 한다. 특히 178의 16호에 있던 가건물은 DJ 집 지하서재 환풍구로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도청하던 시설로 알려졌다. 당시는 92년 대선 패배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DJ가 아태재단을 만들어 정계복귀를 검토하던 때였다. 물론 DJ는 이런 도·감청에 익숙해 있었다. 전화를 하다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DJ는 “이 사람아, 이거 도청되는 거 알지?”라고 물어 상대방 말을 끊었고 은밀한 얘기는 필담(筆談)으로 나눴다. 도청과 사찰에 치를 떨던 DJ였건만 도청은 그가 집권한 기간에도 계속돼 온 사실이 드러났다. 마약보다도 강하다는 중독성을 다시 한번 내보인 셈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제 세상은 ‘에셜론’이라는 국제적 도·감청망이 지구촌 전체를 감시하고, 휴대전화마저 도청당하는 시대가 됐다.‘낮말은 새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예언이었던 게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지난 초여름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함께 차를 재배하고 제다를 하는 남천다회 식구들과 차 제다를 마친 후였다. 차를 가꾸고 차를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곡우 전부터 입하까지가 제일 바쁜 철이다. 차인들에게 차를 제다한 후의 충만함은 그 어떤 풍족함에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다. 평소 존경하는 어른스님들, 선방의 수좌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통씩 보내며 푸릇한 찻물이 든 뭉툭한 손을 바라보면 그저 한없는 우주를 담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과 충만함을 ‘확’깨버리는 전화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전남 지리산 화계에서 차를 재배하며 차를 만드는 젊은 차인이었다.“스님! 스님께 차를 맛있게 해서 보냅니다.”“그래 고맙다. 무슨 차를 했니?”“구증구포로 해서 만든 차입니다.” 순간 그 갸륵한 정성과 고마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스쳐갔다.“찐차를 했니, 아니면 덖음차를 했니?”“예 스님 물론 덖음차로 했습니다.”“구증구포를 했다면서 어떻게 한번도 찌지 않고 차를 제다할 수 있니?” 그 젊은 차인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자생설·전래설·해양설 등 다양 ‘구증구포’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이다. 매달 발간되는 차(茶)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제다법은 구증구포(九烝九曝)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전통적인 제다를 복원하고 알리기 위해 섬진강변에서 제다학교를 만들어 우리 전통차 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진 곳에서 우리 차문화 보급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높이 살 일이다. 그 글대로 하자면 좋은 일이며, 일견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린다.‘구증구포’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차를 직접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어제 오늘 일처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구증구포’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우리 전통차인 덖음차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찐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제다(製茶)의 또 다른 ‘유령’인 것이다. 실제로 차를 제다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면 차 잎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찢어지고 발겨질 수밖에 없다. 맛과 향도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구증구포’에 의한 제다법으로 만든 차는 극소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시장’에 정식으로 출품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다법은 아닌 것이다.‘구증구포’라는 말은 주역에서 최고의 양극수인 ‘九’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는 한약재를 달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 차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자생설’과 ‘전래설’ 그리고 ‘해양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태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차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화는 다양한 교류에 의해 ‘전통’과 ‘변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문화학자가 21세기 우리 문화코드의 사이클은 이제 ‘6개월’이라고 말할 정도로 짧아졌다. 광고 패션 노래 등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이며 빠르게 대중들의 기호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적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신라 고려시대에도 문화적 ‘전이(轉移)´와 그에 따른 변종의 양상은 매우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차도 마찬가지다. 가야 신라 고려시대에도 지배엘리트들은 우리차를 당시 문화중심국이었던 중국에 보내기도 하고 역수입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없는 우리차에 대한 ‘자생설’과 ‘전래설’역시 그런 점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의 핵심은 우리 고대국가인 가야국의 가야차에 대한 것이다. 우리차의 독자성과 관련이 있는 가야차의 존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능화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 가야국의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어서 된 것이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여진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인도를 건너 가야국까지 오며 피곤해진 허왕후의 측근들에게 난액(蘭液:향기로운 음료, 즉 차)을 주어 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난액’을 차 연구가들은 바로 ‘차’라고 하는 것이다. 가야국 ‘죽로차’의 존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신라에 차씨를 가져와 심은 김대렴의 전래설보다 적게는 400년 많게는 600년 전으로 우리 차 역사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가야차의 존재는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에도 중국의 차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문화가 나름대로 위치를 점하며 존재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현재 몇몇 차인들에 의해 가야차랄 수 있는 ‘장군차’‘황차’ 등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은 차인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의 전래설에 따르면 ‘지난 12월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명차 ‘구화산차´ 신라서 가져가 우리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김교각(704~803:지장) 스님이다. 김지장 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김지장 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1703년)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김지장 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설’도 많은 타당성을 가진다. 해상왕 장보고는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중 하나였던 차 무역을 전개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지만 중국의 차와 우리차에 대한 교환, 그리고 인근 대흥사 스님들과 교류를 통해 차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것은 ‘환경과 지정학적인 요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자생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차나무가 생장할 수 있는 최적지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지대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차나무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 새나 배, 바다의 조류, 지형의 변화 등으로 ‘차씨’가 계속 옮겨져 번식했으므로 백제와 가야지방에는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이전부터 차나무가 이미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좀더 주목할 것은 차나무의 존재에 대한 유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차를 ‘약용’이든 ‘음료’든 직접 제다해서 마셨다는 점이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차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차의 기원과 그 관련된 논쟁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다. 가야를 비롯한 우리고대국가에서는 차가 약용보다는 떡이나 술과 같이 귀족계급의 기호음료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야의 종묘제사에서는 해마다 세시 때가 되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점에서 고대의 음다풍속은 중국과 다르게 일찍이 ‘기호음료’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고대국가 중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보유했던 고구려에서도 차는 기호음료로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만들고 마실 수 있는 ‘단차(團茶)´가 유행했다. 그같은 사실은 일본의 유명한 사학자 아오키 박사가 고구려의 옛 무덤을 발굴하면서 3개의 단차를 발견해 우리차계에 많은 충격을 준 것에서 증명되고 있다.‘구다국(句茶國)´이란 차 관련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차 지명 중 가장 오래된 지명이랄 수 있는 ‘구다국’은 차가 당시 일반민중의 생활양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일상화되어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백제도 그 문화의 섬세함과 우수성, 지형적 특성을 볼 때 음다풍속이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차를 재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땅이 바로 백제였고 자연스럽게 자생차가 그 생명의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으면서 활발한 차 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행기 스님 일본에 전래한 인물로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본 ‘동대사요록´에 나오는 행기 스님의 존재다. 행기 스님이 일본에 차를 전래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지도층과 스님들이 7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산선문을 통한 남종선과 차의 유입을 통해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시작한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최고의 문화로 꼽혔던 차문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지리산이라는 차의 최적지에 차나무를 생산 보급할 것을 명령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왕, 승려,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차를 마셨다는 다양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다소마을(茶所村)´,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휴대용 다구(茶具)를 지고 차공양을 가다 경덕왕과 만난 충담 스님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당시 차 문화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의 차방(茶房)이었던 ‘원효방’의 존재는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2.4m크기의 ‘원효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4m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 스님의 초상화, 외실에는 병하나, 찻잔과 불경을 놓는 책상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차방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에도 다채로운 형태의 다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의 전성기는 이어진다. 당시 차는 치국(治國)의 도구로 사용됐다.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신라귀족들과 승려들에게 통치자의 ‘격려금’으로 차를 하사했다. 또한 차를 준비하고 베푸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청인 다방과 다원이 존재했다. 다방은 다방시랑(정3품)에서부터 다방별감까지 있었고 직급에 따라 모자, 옷, 허리띠등이 달랐다. 각 지역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를 소유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다원은 경북다방원, 경남다견원, 황해다정원, 충남·경북다정원 등이 있었다. 고려 때는 또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그에 필요한 짐을 담당했던 다군사(茶軍士)가 존재했고 차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차 상인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명전(茗錢) 즉 투다(鬪茶:차의 맛을 겨루는 것)를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행다(行茶)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왕조의 차 문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박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수없이 밀려드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차문화를 주도했던 사찰의 급격한 몰락은 조선시대 차산지의 폐쇄를 불러왔고 차문화를 소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과중한 차세와 차 공납의 심화는 어려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稅茶 등 백성들 수탈 도구로 이용도 세차(稅茶)를 내기 위해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말,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꾸었을 정도로 차의 폐해는 심각해졌다. 김종직은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청용 차밭을 일구고 차 공납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음다풍속이 존재했다. 궁궐이나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차를 주관하는 다방, 관청에서 제대로된 판결이나 회의를 하기 위한 다시(茶時:차 마시는 시간)가 있었다. 그중 ‘야다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야다시(夜茶時)는 밤중에 관리들이 다시를 갖는 것으로 파렴치한 치부나 도덕적 패륜을 저지른 관리들을 골라 그 죄상을 흰 널빤지에 써서 그 집 문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뒤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야다시를 받게 된 사람은 그집에 평생 유폐되어 다시는 세상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 안방극장에 등장했던 ‘다모(茶母)´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했다. 그러나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직도 한국 차 문화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거의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차는 군자와 같아서 품성에 삿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차가 역사속에서 다양한 편린에도 불구하고 당시대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온 고고한 정신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도 우리생은 늘 피어나듯 하얀 황금의 꽃술을 머금은 차꽃도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가없이 피어난다. 수없는 역사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배워야 할 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일지암 암주)
  • 천자문으로 조선 엿보기

    ‘하늘천 따지’ 서당에서 읊던 천자문이 새로운 우리 고전 작품으로 태어난다. 6세기 중국 주흥사가 만든 천자문이 고려말 조선초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단순히 중국문화의 산물로 여겼던 천자문. 또 조선시대의 학습 교재서로만 평가 절하됐던 천자문. 이 천자문이 조선 500년의 역사·문화·철학을 살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자 ‘보고’로 변신했다. 조선중기의 서예가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작고 400주년 기념으로 오는 16일부터 다음달 19일까시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하늘천 따지-천자문과 조선인의 생각·공부·예술전’이 열린다. ●조선왕실 제왕교육의 출발은 천자문 왕실은 물론 문인사대부, 민간에 이르기까지 천자문은 교육의 첫 걸음마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박팽년, 이황, 정약용 등 유학자 및 실학자의 천자문을 비롯, 중국 당·송·원·명대의 천자문, 석봉 천자문의 여러 판본 등이 전시된다. 우리나라 천자문의 경우 조선 500년과 개화기, 일제시대 만들어진 100여종의 서로 다른 천자문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들 천자문을 통해 내용은 물론 천자문과 결부된 인쇄문화, 글씨 예술, 한자 구성원리, 한글변천과정, 전통교육제도, 일제시대 민족교육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예를 들어 천자문에는 한글로 토를 단 것이 있어 한글연구에 도움이 되고, 일본어로 토를 단 것도 있어 슬픈 우리의 식민역사가 느껴지기도 한다. 알기쉽게 한자를 그림으로 설명한 도상천자문도 있다. 특히 선조의 어명을 받아 석봉이 쓴 ‘석봉천자문’은 국가에서 찍어내고 보급해 가장 널리 쓰였던 천자문이기에 따로 전시장이 꾸며진다. ●이항복 천자문 등은 처음 선보여 봉선사 간인의 천자문(사찰본,1471년, 성종2))은 현존하는 천자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한글 토가 없는 이 천자문은 해서체로 판본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처음 공개된다. 교서관 간인 중보본(1650년, 효종1)은 한석봉의 천자문으로 ▲한자서체 ▲한글표기 ▲책판본 등에 있어 3가지 표준을 제시하고 있어 중요한 문헌이다. 일본을 비롯해 현재 3권밖에 없어 더욱 귀중하다. 성주 간인의 백사 이항복 천자문(1734년, 영조 10)은 유학자 이항복이 손자의 교육용으로 쓴 것으로, 처음 공개된다. 한석봉이 직접 쓴 ‘대자 해서 천자문’은 사찰·궁궐 현판이나 비석문에 쓰이는 글씨‘원조’격이다. 천자문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천자에 천자를 더해 이천자문을 쓴 정약용의 ‘아학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천자문. 너무 학문적이다 싶으면 한자 컴퓨터 놀이를 할 수 있는 이상호의 ‘게임을 이용한 한자여행’과 ‘천자문 탁본찍기’등 다양한 놀이공간에서 쉬었다 가도 좋다. 예술의전당 전시팀 이동국 차장은 “천자문의 1000자 250구 125절의 방대한 서사시 안에는 인간의 도리와 기강, 역사등이 담겨 있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종합교재”라고 평가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7일 TV 하이라이트]

    ●우리말 우리글(EBS 오후 4시40분) 우리나라에는 4000여 종의 식물이 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식물들 하나하나에도 그에 걸맞은 이름이 있다. 풀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준다면 자연과 더욱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산으로 바다로 여행하기 좋은 요즘, 밖에 나가 우리 풀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자.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미국에서 가장 춥고 광막한 곳 알래스카. 알래스카는 자연 그대로의 황무지와 원유 매장지라는 서로 다른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어느 새 송유관과 정유공장, 원유 수출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부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2005 대한민국 음악축제(MBC 오후 6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인정한 국가대표급 가수 김건모, 아시아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Girls on Top’ 보아, 동방의 여심을 사로잡은 다섯명의 꽃미남 동방신기, 록의 계보를 잇는 신세대 록그룹 버즈 등 신세대 최고의 가수들이 뜨거운 여름,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다. ●도전!1000곡(SBS 오전 8시30분) 21세기 꽃미남으로 불리는 오지헌의 노래 실력은? 또 매력적인 가수 린, 이소은, 별의 열창 무대도 지켜본다. 린과 이소은 그리고 별은 댄스곡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 솜씨를 뽐낸다. 아이돌스타 SS501의 환상적인 매트릭스 댄스와 길건의 뜨거운 무대도 흥미를 끈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지난 달 8일, 진품명품 코너에 커다란 분청 항아리 한 점이 의뢰되었다. 광주에 사는 의뢰인의 집안에서 무려 13대를 걸쳐 대물림되었다는 이 도자기는 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감정가를 받은 것일까? 또 조선시대 여성들이 사용했던 장신구들도 선을 보인다. ●반올림#2(KBS2 오전 8시) 욱이의 존재를 알고부터 말수가 적어졌던 여명. 하지만 여명은 왜 그러느냐며 다그치는 옥림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않겠다면서 노란손수건을 건넨다. 옥림의 정확한 마음이 알고 싶은 여명은 우체국 봉사활동 기간 동안 옥림이 손수건을 집 앞에 매달아 놓으면 자기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 김별아 신작소설 ‘영영 이별 영 이별’

    신라 ‘화랑세기’에서 희대의 주체적 여성상인 ‘미실’을 복원시켰던 작가 김별아(36)가 이번엔 조선시대 비운의 여인, 정순왕후의 혼백을 불러냈다. 신작 소설 ‘영영 이별 영 이별’(창해)은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열일곱 나이에 목숨까지 빼앗긴 단종의 비 송씨의 한맺힌 일대기다. 소설의 모티프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50년 만에 제 자리를 찾는 영도교(永渡橋).1408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귀양갈 때 정순왕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정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곳이다. 영영 이별한 곳이라 하여 영이별다리, 영이별교, 영영건넌다리로 불렸다는 슬픈 전설이 깃든 다리다. 작가는 지금은 자취없이 사라진 이 다리를 이정표삼아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도 모질게 여든 두해를 살아낸 한 여인의 인생 궤적을 좇는다. 소설은 궁에서 내쳐진 정순왕후가 왕비에서 서인으로, 걸인으로, 날품팔이꾼으로 서럽게 목숨을 부지하다 최후의 육신을 의탁한 정업원에서 숨을 놓으며 과거를 회고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지옥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 가혹한 운명은 비단 정순왕후만의 불행은 아니었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속에서 언제든 한낱 낙엽처럼 스러질 수밖에 없는 비운은 조선시대 모든 여인들의 태생적 굴레였다. 단종 폐위 이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는 후대 군왕들의 피비린내나는 권력 쟁투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리없이 아우성쳐야 했던 왕가 여인들에 대한 정순왕후의 회상은 때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때론 무상한 삶에 대한 체념의 어조로 가라앉는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는 왜 자결하지 않고, 욕된 목숨을 모질게 이어간 걸까. 이 소설이 그저 단종을 향한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비극적 순애보에 머물지 않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다.‘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세상의 눈초리가 따가워질수록 나는 더욱 이 불가해한 삶을 끝까지 견디고 싶었습니다. 이상스러운 빛으로 번쩍이는 나의 생애에, 마지막 목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206쪽) 인생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일상을 견디는 힘 또한 우리네 삶의 원형임을 작가는 정순왕후의 영혼을 빌려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8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주말에 뭘 보러갈까]

    어린이 ■ 꼬방꼬방 28일까지 사다리아트센터 네모극장. 전래동화로 엮은 극단 사다리의 놀이음악극.(02)382-5477. ■ 판도라의 날씨상자 7일까지 서울열린극장 창동. 번개와 천둥 등 첨단 장치로 즐기는 기상과학 체험 뮤지컬.(02)3445-3435. ■ 가루야 가루야 28일까지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한톨의 밀알이 자라 밀가루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놀이연극. 이영란 작·연출.(02)569-0696. 연극 ■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9월25일까지 산울림소극장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한 연극.91년 초연 이후 10만 관객을 모은 화제작으로 배우 박정자가 네번째 무대에 선다. 임영웅 연출. 정세라 출연.(02)334-5915. ■ 품바 무기한 상상아트홀. 각설이 타령의 한과 해학을 밀도있게 조명한 모노드라마. 김시라 작·서상규 연출, 박동과 김기창 출연.(02)741-3934. ■ 나의 교실 28일까지 창조콘서트홀. 집단 따돌림을 소재로 청소년들의 불안한 심리를 움직임과 이미지로 표현한 퍼포먼스극. 김낙형 작·연출. 정승길 이지연 출연.(02)762-0010. ■ 풍인 9월4일까지 아룽구지소극장.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극작가 이만희의 데뷔작.(02)872-4974. 미술 ■ 이영학의 돌조각전-20일까지 갤러리 현대 두가헌 돌과 물, 풀이 어우러지는 조각들. 움푹 파인 돌안에 물을 채우기도 하고, 풀도 심는다. 덕분에 돌안에 작은 연못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예쁜 풀밭처럼 변한다.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돌 조각에서 한국적인 선과 자연과의 융합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세계가 읽혀진다.(02)3210-2111. ■ 조선시대 문양전 흙, 나무, 쇠등으로 만든 떡살, 소반 등에 나타난 문양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실용적인 우리 조상들의 미의식을 엿보는 자리.(02)766-6494.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전 결정적인 순간을 찍어 ‘찰나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진작가의 타계 1주기 전으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던 것을 연장전시한다.21일까지 선화랑·모란 갤러리.(02)737-1854. 뮤지컬 ■ 돈키호테-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셰르반테스의 명작을 뮤지컬로 본다. 삽입곡 ‘더 임파서블 드림’으로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김성기 류정한 강효성 출연.(02)501-7888. ■ 청년 장준하 5∼15일 문예진흥원예술극장 대극장. 독립군이 되기위해 중경 임시정부로 가는 대장정을 그린 로드 뮤지컬. 조한신 작·연출, 서영주 최성원 출연.(02)722-1467. ■ 밑바닥에서 21일까지 예술극장 나무와물, 막심 고리키의 원작을 세미 뮤지컬로 각색. 왕용범 연출·박용전 작곡, 황태광 이창욱 출연.(02)745-2124. ■ 풋루스 10월16일까지 연강홀. 반항과 억압, 사랑과 고통 등 분출하는 젊음의 열정을 춤과 노래로 풀어낸다. 서지영 이한 김영민 출연.(02)766-8551. 클래식 ■ 서울신문 청소년 음악회-4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클래식 음악과 국악 등 ‘퓨전 공연’.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을 박성현씨의 지휘로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허 트리오 멤버인 바이올리니스트 허희정, 열성 팬들을 확보한 기타리스트 이병우, 젊은 소리꾼 김병우, 대표적인 국악 타악그룹 ‘공명’이 총출동, 화려한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 대관령 국제음악제 3∼19일 강원도 용평리조트 등.(033)249-3374. ■ 충무아트홀 서머페스티벌 8∼25일 충무아트홀 대극장.(02)2230-6600. ■ 모차르트 마술피리 6∼21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02)580-1300. ■ 평창 메밀꽃마을 오페라 문화체험축제 6일까지 평창 메일꽃마을 오페라학교.(02)2256-8800.
  •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경북 울진군이 오지 아닌 오지와 국내 최대의 원전(原電)지역이라는 오명을 벗고 ‘친환경 농업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를 개최할 만큼 자연친화적 농업을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고 있다.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울진은 한반도 동단부에 자리잡은 인구 6만의 미니 자치단체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아울러 푸른 동해의 200리 해안선과 기암괴석, 망양정 등 7개 해수욕장, 성류굴 등 각종 관광자원이 어우러진 관광의 고장이다. ●왕피천에서 푸른 생명의 축제 열리다 이곳에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독일,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다.‘친환경 농업! 인간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15일까지 울진 왕피천 엑스포공원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 등 28개국의 친환경 농업 및 관련 단체들과 국내 92개 자치단체 등이 참가해 역대 최고다. 이번 행사는 한국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한편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 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울진농업엑스포의 시작은 김용수 엑스포 조직위원장이 울진군수로 취임한 지난 200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위원장이 공약사업으로 농업엑스포 개최를 발표했으나, 주민들은 물론 중앙정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주위의 이런 냉대에도 불구, 국제 농업 환경이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 농업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해 농업엑스포 개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여기에 울진은 전체 면적(989.07㎢)의 86%가 임야여서 산림 부산물을 퇴비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다 전체 농가가 친환경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소규모 경작지 위주라는 이점도 감안됐다. 김 위원장은 “WTO,FTA 체결 등으로 고사 위기에 처한 국내 농업을 살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농업 엑스포 개최를 구상했다.”면서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울진군은 같은 해 12월 엑스포 개최를 위한 기본방향 등을 정한 뒤 2003년 6월 국무총리실로부터 국제행사로 승인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정부의 사업비 보조는 물론 인력·홍보 등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오리·우렁이 등 이용한 특수농법단지 확대 이에 따라 군은 성공적 엑스포 개최를 위해 그 해 9월 조직위 사무국을 출범시키는 한편 친환경농업 기반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군은 우선 주민들을 대상으로 ‘3·3·3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 운동은 ▲3무(無)=무농약·무제초제·무화학비료 농업 실천 ▲3유(有)=메뚜기·허수아비·반딧불이가 있는 들판 조성 ▲3실천=퇴비증산·녹비작물(토끼풀, 풋베기풀 등) 재배·볏집 되돌려주기 등이다. 또 땅심을 높이기 위해 5740㏊ 전체 농경지에 대한 단계적 객토사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군은 화학비료 및 농약 사용 절감과 오리, 미강, 우렁이 등을 이용한 특수농법 단지 조성을 확대했다. 이런 노력으로 울진군은 2003년 전국 친환경 농업 우수마을 최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4년 친환경 농업 대상 자치단체 부문에서 우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올해 울진지역 농경지 855㏊에서 생산될 무농약 인증 친환경쌀 ‘울진 생토미(生土米)’ 13만 5000포대(40㎏들이) 중 절반이 훨씬 넘는 8만 포대가 이미 판매 계약된 상태다. ●전체 농지의 15% 친환경농산물 재배 울진군은 농업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올해 말까지 총 74억원의 예산을 들여 친환경 농업 기반조성 면적을 전체 경지면적 5740㏊의 27%인 1549㏊로, 친환경 농산물 인증면적을 경지면적의 15%인 880㏊로 확대 추진할 계획이다. 또 195개 전체 리·동별 토질에 맞는 환경친화형 맞춤비료를 공급하고, 농업인들의 의욕고취를 위해 친환경 농업 실천농가에 ㏊당 60만원의 생산장려금을 지원한다. 울진군은 또 10개 전체 읍·면별 친환경 농업 추진위원회 구성, 농업인 교육, 특수농법 재배단지 등을 추가 조성하는 한편 벼 도정공장을 설치해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 과정까지 일원화시킬 방침이다. 이재동 울진군 부군수는 “농업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군의 친환경 농업 육성사업으로 울진은 국내 최고의 친환경 농업지역으로 탈바꿈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세계 농업엑스포 현장 가보니 친환경의 땅 울진의 왕피천 엑스포공원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는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는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다양한 농업문화 전시 및 공연, 각종 체험행사, 국내외 친환경·유기농산물이 망라돼 있다. 20여만평의 엑스포 행사장에는 ▲친환경 유기농업을 접해볼 수 있는 친환경농업관 ▲조선시대 온실을 재현한 친환경농업문화관 ▲300평 경작지에 미생물을 이용해 과채류를 재배한 유기농 경작지 ▲80여종의 야생화를 심은 야생화관찰관 ▲전통 작물과 오리, 거위, 흑염소 등이 노니는 ‘시골농장’ 등이 마련됐다. 특히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행사기간 내내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생명·생태환경·문화’를 주제로 한 주제공연과 상설행사가 야외공연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행사장 내에 마련된 전통문화체험마당과 주말농장, 민물고기잡이 체험장 등지에서는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전통문화체험장은 짚풀문화, 길쌈, 옹기, 한국의 탈 등 전통농업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학습 프로그램 위주로 짜여져 인기다. 특히 친환경농업관에서는 감자·고구마·옥수수·고추 등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작물을 직접 수확하며, 친환경 농업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행사 기간 내내 공연장에서는 친환경을 주제로 한 국내외 공연이 잇따라 열리며, 국방부 취타대 및 전통의장대 시범공연, 미8군 군악대 공연팀 초청공연 등 문화예술행사도 함께 마련된다. 또 매일 오후 2시와 5시 두차례에 걸쳐 친환경농산물 무료 시식회가 열린다. 조직위원회는 효과적인 관람 순서로 정문→울진 금강송 산책로→유기농경작지→친환경농업관→세계관→시골농장→민물고기체험장 건강흙체험관→주공연장→건강먹을거리마당→전통문화체험장→야생화관찰원→바이오산책로를 제시했다. 성인 1만 2000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7000원인 입장권으로는 울진의 관광 1번지인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을 무료 입장할 수 있고,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온천인 덕구온천과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백암온천, 신라 고찰 불영사, 향암미술관도 50% 할인받을 수 있다. 조직위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1일 최대 1만 7000여명의 숙박시설과 행사장 인근 바닷가 1만여평에 24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친환경 캠프촌도 조성해놓고 있다. 군청 전 공무원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휴일을 반납한 채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김용수 울진군수 “울진친환경농업엑스포에서 인간을 살리는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의 모든 것을 체험해 보세요. 분명 인간과 친환경, 유기농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조직위원장인 김용수 울진군수는 “올 하계휴가를 자녀들과 함께 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는 ‘땅속까지 깨끗한 울진’에서 보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엑스포 홍보에 열을 올렸다. 김 군수는 “이번 엑스포는 국내외 친환경농산물 재배 및 친환경 농업의 정보, 친환경 제품, 농업문화 체험 등 친환경의 모든 것을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산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알차게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를 통해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김 군수는 피서철 동해안의 교통이 혼잡하다는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 대구∼포항고속도로 및 울진∼영덕 7번 국도 개통으로 서울∼울진 4시간, 대구∼울진 3시간대로 접근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국민들이 농업엑스포를 찾아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하는 등 급변하는 국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침체돼 가는 우리 농업의 활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에 80만명의 관람객들이 찾을 것으로 전망돼 150억원 이상의 직접적 관광수입이 기대된다.”며 “엑스포 개최로 인한 ‘환경농업 1번지’라는 이미지 구축과 울진의 농·수·축산물에 대한 친환경 제품 인정 등 부수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효과”라고 설명했다. 친환경 농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는 그는 국내 최초로 개최되는 농업엑스포를 반드시 성공시켜 울진을 친환경 메카로 육성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장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친환경농산물 장터 및 전국 친환경 농업 상설교육장으로 운영하는 등 국내 친환경 농업의 중심센터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신세계·롯데 경쟁 명동 상권 ‘어깨춤’

    신세계·롯데 경쟁 명동 상권 ‘어깨춤’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새로 문을 열면 명동이 어떻게 변할까. 롯데·신세계백화점 경쟁으로 명동 상권이 부활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공사 중인 명동입구의 ‘토투앤’과 명동역의 ‘하이 해리엇’이 완성되면 명동 중심지가 다변화할 전망이다. ●구매력 높은 소비자가 몰려든다. 명동의 하루 유동인구는 150만명에 달하지만,13∼24세 젊은이가 대부분이어서 구매력은 강남권에 뒤진다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롯데가 명품관 에비뉴엘을 건설하고 신세계가 본점을 오픈하면서 구매력 높은 소비자의 발길이 잦아질 것으로 상인들은 예상하고 있다. 의류매장의 한 운영자는 “다양한 소비자가 명동을 찾으면서 ‘황금 쇼핑지구’란 명동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명동점 김행석 점주도 “롯데타운이 생겨 외식업체의 매출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면서 “백화점 영업이 끝난 8시 이후 고객이 점차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명동 상권이 다방면으로 뻗어나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통적으로 명동의 중심은 ‘명동길’이었다.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건너편 ‘아바타’쇼핑몰에서 우리은행 명동지점,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아바타는 명동입구라 불렸다. 명동 2가 우리은행 명동지점은 2003년까지 14년간 제일 비싼 땅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달라졌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밀리오레∼명동빌딩∼유투존 구간인 ‘명동 중앙길’에 사람이 더 몰리기 시작한 것. 밀리오레와 맞붙은 충무로 1가 카페 파스꾸찌(CAFFE PASCUCCI·옛 스타벅스)는 가장 비싼 땅으로 평당 1억 3900만원에 달한다. 이 거리엔 ‘로이드’‘푸마’‘게스’ 등 의류매장만 30개가 넘는다. 하이 해리엇도 건설 중이어서 전망도 밝다. 명동 밀리오레측은 “강남과 강북을 잇는 명동역이 명동 상권의 새로운 입구로 자리잡았다.”면서 “중앙길이 명동 중심지로 확고히 뿌리내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동상권이 다방면으로 이동 쇼핑몰 아바타와 스타벅스는 생각이 다르다. 신세계·롯데 전투가 명동 상권의 다각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아바타측은 “백화점 경쟁으로 소비자들이 2호선 을지로입구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명동길이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지난 4월 생활용품 유통업체인 ‘코즈니´를 1층에 입점시켰고,3층 의류매장도 싹 바꿔 마케팅을 강화했다. 특히 아바타 맞은편에 토투앤이 들어서면 시너지 효과를 낳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랜드 패션브랜드 ‘후아유’도 중앙길에서 명동길로 자리를 옮긴다. 스타벅스는 신세계가 활성화되면서 ‘명동의류 길’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를 것이라 예측했다. 마케팅팀 이민규씨는 “회현역을 통해 신세계를 방문한 소비자들이 명동의류 길을 통해 명동으로 들어올 것”이라 말했다.2000년 현재의 파스꾸찌 자리에 둥지를 틀어 이곳을 최고의 상권으로 탈바꿈시킨 저력으로 새로운 중심지 개발에 나서겠다는 각오다. 그는 “스타벅스가 당시 밀리오레 옆에 자리를 잡을 때 누구도 명동길에서 중앙길로 상권이 이동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면서 “충분한 시장조사를 통해 명동의류 길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스타벅스는 명동의류 옆에 명동점을 오픈하고, 파스꾸찌 대각선으로 15m 떨어진 4층짜리 건물(옛 MLB빌딩)에도 국내 최대 규모인 160평 300석 매장을 짓고 있다. 전통적인 패션거리 명동길과 신흥 중심지인 중앙길에 이어 명동의류 길도 새로운 상권으로 떠오를 지 주목된다. 변화의 날갯짓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2∼3년간 명동에선 보세매장이 절반 이상 줄었다. 비싼 임대료만큼 매출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 이 자리를 각 브랜드의 플래그십(Flagship)숍이 메웠다. 플래그십숍이란 ‘깃대를 꽂는다.’는 의미로 그 브랜드를 대표할 만한 매장을 뜻한다. 제일모직 ‘빈폴’,‘패션피아’(Fashionpia),F&F의 ‘AMH’, 이랜드 ‘티니위니’·후아유·‘푸마’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젊은 여성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화장품 브랜드숍도 즐비하다. 태평양은 지난 23일 ‘디 아모레 스타’를 열었고,‘휴영’‘스킨푸드’‘도도클럽’‘바디숍’‘뷰티크리딧’ 등도 자리잡았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미샤’ 5개,‘코스메틱넷’ 1개를 명동에 입점시킨 에이블씨엔씨 마케팅본부 김보동 이사는 “유행의 첨단인 명동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한국 소비자를 만족시키면 세계 어디서든 경쟁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명동은? 서울을 상징하는 번화가이자 유행을 창조하는 패션의 거리다. 조선시대에는 주택지였지만, 일제시대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상가로 변했다.1955년 이후 종로, 광교 등에서 영업하던 양장점이 명동으로 옮기면서 패션1번지로 발돋움했다. 명동성당과 전국은행협회,YWCA, 유네스코 회관, 중국대사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상가지역이다. 롯데·신세계는 물론 금융기관, 의류·화장품매장, 음식점, 미용실 등 3600여 점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2000년 3월 관광특구 지역으로 지정, 일본 관광객이 찾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지하철 2,4호선이 지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명동상가 ‘몸단장’ 한창 젊은감각 살리기 경쟁 서울 중구 명동상권에 리모델링 바람이 몰아쳤다.1955년부터 ‘패션1번지’로 불리던 명동이 젊은 감각으로 변신하고 있다. 완성품은 2007년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명동 옛 국립국장인 ‘명동예술극장’이 2007년말까지 600석 내외의 극예술국장으로 재탄생한다.1층에는 로비가,2∼4층에는 객석이 들어서고 5층엔 카페가 자리한다. 옛 건물의 뼈대만 남긴 채 전체를 새로 앉히는 격이다. 오는 10월에 착공한다. 국립극장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공연예술의 본산이자 명동의 상징이었다.1934년 일본 건축가 이시바시가 지은 바로크 양식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일제 때 영화관, 서울시 공관을 사용하다 1959년 국립극장으로 변모했다.1975년 대한종합금융(옛 대한투자금융)에 팔리면서 노랫소리가 멈췄다. 외환위기 이후 명동상권이 급속히 침체하자 문화·예술인은 물론 상인들도 ‘국립극장 되찾기’운동에 참여했다. 그 결실이 곧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국립극장 맞은 편 우리은행 명동점도 몸단장 중이다. 명동성당도 리모델링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국립극장에서 명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옷을 갈아 입고 있는 하나은행 건물(옛 서울은행)이 나온다. 복합쇼핑리조트 ‘토투앤’으로 한창 리모델링하고 있다. 명동 토투앤은 건물연면적 1만 3000평으로 지하 3층∼지상 17층 규모.4∼5층에 이종격투기장 등 각종 이벤트홀이 자리잡고,10층 이상은 고급 호텔로 꾸며진다. 전문병원, 피트니스센터, 전문식당가, 보석 등을 지하 1층∼지상 3층,6∼8층에 입점한다. 내년에 문을 열면 맞은 편에 위치한 아바타와 함께 명동입구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4호선 명동역 입구에선 ‘하이 해리엇’이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표준지 공시지가 1억 3200만원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비싼 ‘금싸라기’땅에 11층짜리 명품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 지하 2층에는 푸드코트, 지하 1층∼지상 2층 준보석 패션잡화 액세서리점,3층∼4층 캐릭터 상품 등이 들어선다.5∼7층에는 명품브랜드 매장,8∼9층 뷰티존, 맨 위 10층∼11층은 영화, 게임존으로 꾸며진다. 맞은 편에 위치한 명동 밀리오레와 더불어 명동중앙길 상권을 강화시킬 재목이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의 저자들 중에도 비교적 낯선 인물이 있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계 역시 조선시대엔 상당히 유명한 예언가였다. 서계가 살던 16세기는 우리 역사상 별들의 시대였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거장들이 일시에 배출되어, 성리(性理)를 궁구했다. 노수신·백인걸·유희춘임억령 등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이도 많았고, 최경창·백광훈·이달 등 시문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 등은 신선의 세계를 드나들어 이채를 띠었다. 불가(佛家)에도 서산대사 같은 거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16세기의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우선 토정과 북창이 그렇고, 격암과 서산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서계도 이 부류에 속한다. 서계는 유학자인 동시에, 역술가요 음악가였다. 그가 지었다는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臧訣)은 현재 ‘정감록’의 일부로 되어 있다. 서계는 누구였는가? 그의 저술로 알려진 ‘서계이선생가장결’은 또 어떤 책인가? 그리고 서계가 살던 16세기가 ‘예언가들의 전성시대’로 불릴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서계 이득윤이란 예언가 서계는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를 많이 했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진사(進士)가 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서계는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밝았다. 당시 역술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방문해 수준 높은 토론을 펼쳤다 하며, 이를 계기로 역학의 대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우주자연의 생성과 운행원리에 관한 전문가였다. 쉽게 말해, 서계는 주역 점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런 덕택이었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서계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처음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밖에 한두 가지 벼슬을 더 지냈다. 그러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조정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이 서계의 고향이었다. 그는 낙향 직후인 광해1년(1609) 미원면 일대 9곳에 이른바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정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푸젠성 무이산에 머물며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묻혀 지낸 사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서계는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만경대(萬景臺), 후운정(後雲亭), 어암(漁巖), 옥화대(玉華臺), 천경대(天鏡臺), 오담(鰲潭), 인풍정(引風亭) 및 봉황대(鳳凰臺)를 두었다. 옥화구곡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구곡 가운데서 서계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제4곡 옥화대였다. 옥화란 옥구슬이 떨어지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옥화대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원면 옥화리엔 서계가 지은 추월정(秋月亭)도 남아 있다. 서계처럼 ‘구곡’을 정해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는 태도는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같은 이도 ‘고산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서계는 옥화구곡에 칩거했다. 이 때 그는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통해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되듯, 일평생 서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역학이었다. 그에겐 또 하나 전문분야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정두원(鄭斗源)을 상대로 거문고에 관한 지식을 교류했는데, 나중에 서계는 한국의 역대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만들었다. 일종의 거문고 악보였고, 이를 통해 서계는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남겼다. 서계가 못마땅하게 여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관직에 복귀했다.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충청도 괴산 군수에 임명됐다. 바로 그 때의 일이다.‘실록’에 보면, 서계는 서울에 올라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는 길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서계가 이렇게 말했다.“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맞았다며 그의 예언능력에 감탄했다. 예언가 서계는 매우 유능한 지방관이기도 해 통치 실적이 당대 최고였다 한다(실록, 인조8년 5월28일 정미). 요컨대, 서계는 주역(周易)의 대가로 출세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었고 정묘호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예언가 서계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주역 실력에 기인했다. 뒷날 서계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들은 서계를 주역의 대가로서보다는 성리학자의 전형으로 기렸다. 이것은 예언가 서계에 관한 일반 민중들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의 내막 서계가 남겼다는 예언서의 제목엔 ‘가장결’이란 용어가 포함돼 있다. 말 그대로라면 집안에 보존되어 오던 비결이어야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후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서계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였다. 그런데 그 ‘가장결’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서계의 집안에 전승된 비결은 아니었다. “선생이 사기막(沙器幕)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 와서 여쭸다. 임진(壬辰)의 화는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뒤엔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선생이 그럼 네게 말해줄까 라고 대답했다.”(서계이선생가장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문제의 예언서는 서계 집안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서계의 제자로 추측되는 최씨가 애써 부탁해서 얻은 예언서였던 만큼 그 전승과정에서도 최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최씨는 서계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까? 우선 당장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예언서가 ‘정감록’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적호(赤虎):이인(異人)이 남쪽으로부터 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倭人)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중략) 청계(靑鷄):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뉘니 어찌할 것인가.(중략) 흑룡·현사(黑龍·玄蛇): 푸른 옷과 흰옷이 함께 동쪽과 남쪽에서 나온다.”(‘서계이선생’) 위에 인용한 내용은 말세의 시운을 말하는 것인데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말세엔 이인 또는 진인이 등장한다. 둘째, 국토가 분단된다. 셋째,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해, 인용문에 나오는 ‘적호’와 ‘청계’ 같은 것은 60갑자를 이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청계’의 ‘청’은 갑(甲)과 을(乙),‘계’는 유(酉)를 가리킨다. 청계는 곧 을유년이다.‘서계이선생은’ 을유년에 천리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3국 분국설은 18세기 이래 정감록의 골자를 이뤘다.‘서계이선생’은 그 전통에 충실한 예언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이 바로 을유년이었다. 예언서의 내용과는 달리 나라는 셋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해에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적호(병인)에 이인이 나와 화친을 주장한다는 내용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고종 3년의 병인양요(1866)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흑룡(임진) 현사(계사) 연간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고 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병인양요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면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창작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서계이선생’은 일단 1860∼187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계이선생’의 저술연대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첫째,‘서계이선생’이 19세기 후반에 저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 근거는 예언서에서 발견된다.“이상하도다, 세상의 재난이여! 병란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로다. 가뭄이 아니면 수재요, 흉년이 아니면 역병이다.”(‘서계이선생’) 여기서 보듯, 이 예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조짐은 외침이나 내전을 비롯한 전쟁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연재해와 전염병이었다. 인플루엔자와 장티푸스, 콜레라가 한국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에 ‘서계이선생’은 쓰여졌다고 본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민중을 몹시 괴롭히던 때 ‘서계 이선생’을 빙자한 말세의 예언이 나왔다고 추정된다. 그 때는 다름 아닌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갑오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 같은 대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병인년(1866) 이후 갑오년(1894) 이전에 저술됐다는 이야기다. 둘째,19세기 후반 창작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도 ‘서계이선생’에서 발견된다. 문제의 예언서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기회에 ‘서계이선생’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서계이선생가장결’의 특징 이 예언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말세의 징후를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정감록’은 대체로 전쟁의 발발을 말세의 시작으로 본다. 둘째, 피란지를 충청도, 그것도 주로 충청북도에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이 주요한 길지로 부각된다. 충청남도의 경우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도 거론된다. 길지로 선정된 지역이 충청북도에 많고, 특히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서계 이득윤의 고향이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연치 않은 것 같다. 설사 말세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서계의 붓끝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지에 관한 언급은 서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서계와 동시대의 인물이던 격암 남사고가 그랬듯, 서계도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길지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셋째, 이 예언서엔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 나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돼 있다.“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 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농사일에 진력하면 난세를 이겨낸다고 주장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여느 예언서와는 다른 점이다. 간혹 ‘정감록’에 밭(田) 또는 개활지에 살길이 있다고 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서계이선생’처럼 뚜렷하게 독농(篤農)을 주장한 경우는 없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계이선생’은 힘써 농사짓기를 거듭 강조한다. 이런 대목은 생전에 훌륭한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계의 진심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계이선생’엔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지 싶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서계가 작고한지 300년가량 지난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 ●16세기는 예언가들의 전성시대 신기하게도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문화계에 많은 별들이 등장했다. 특히 그 가운데 이름난 예언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것은 내 억단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이유를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한다. 첫째, 당시 사회가 무척 불안정했다는 점이다.16세기에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길흉화복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런 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선비들도 생겨났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쟁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왜적이 침략해 사회는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16세기에 활동한 기인(奇人)과 이승(異僧)의 언행에서 예언을 발견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됐다. 둘째,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계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 시기엔 성리학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두해 자웅을 겨뤘다. 하지만 조선의 사상계는 아직 그다지 경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 이단으로 지목한 불교, 도교 및 음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학계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격암 남사고의 경우처럼 역학 또는 음양학의 대가들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 번호의 주인공 서계 이득윤 역시 그러했다. 셋째, 한국역사상 드물게 지방문화가 융성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급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수도에서만 가능했다. 그 시대엔 지방에 고급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편차는 조선시대에 들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창안된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전해지면서 지역개발 붐이 일어났고, 새 시대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전원문화(田園文化)가 고급문화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16세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가 경제적인 면에서 골고루 개발됐고, 그 문화적 수준도 서울과 비등하였다. 각지에 고급문화의 거점이 들어섬으로써 성리학이든 역술이든 대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예컨대 남사고는 경상도 출신이며, 이지함과 이득윤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도 사회적 불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더욱 심해졌다고까지 하겠다. 지방의 문화적 수준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비해 서울과의 문화적 편차는 더욱 커졌다. 사상적인 면에선 어떠했나? 이른바 ‘이단’(異端)이 공식적인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쳤다. 지배층이 내세운 이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멀쩡한 성리학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되었다. 이처럼 사회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새 예언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예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더욱 늘었지만 누구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가로 행세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이라 16세기를 수놓은 예언가들의 화려한 이름은 계속 도용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래 예언가로 정평이 나있던 토정이나 서계의 이름을 빌려 새 예언서가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해묵은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녹색공간] 北 주석궁 정책실무자 귀하/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북한당국의 담당관 이름과 주소도 자세히 모르면서, 결례에도 불구하고 제가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최근 일련의 사태와 귀국(貴國)의 환경보호법,1995년의 시행령을 간단하게 검토해본 결과 귀국의 법률에 중요한 결함이 있어서입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노출된 현재의 위기에 동일하게 노출돼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지금 누가 진짜 무서운 사람들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군인들은 지난 10년간 귀국 군사지출비의 몇 배를 지출하면서 보다 강력한 공군과 해군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도 말은 무섭게 하지만, 그렇게 유능한 사람들은 아니라서 짧은 시간에 귀국 담당관들의 눈을 속이면서 전격적인 뭔가를 수행할, 그렇게 효율적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진짜 무서운 사람들은 따로 있고, 당신들은 세계에서 가장 무섭고 효율적인 집단과의 전면전 앞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부도 이들을 별 거 아니라고 여겼다가 정권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평당 2000만원’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서울의 작은 아파트들은 물론이고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가 있는 울산에서도 얼마 전에 평당 2000만원이 넘는 땅이 나왔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지요? 남한 땅을 팔면 캐나다를 여덟 개 사고, 심지어 귀국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미국 땅도 전부 사버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더 무서운 건 이 조직이 부녀회와 반상회 같은 세부조직, 즉 게릴라전의 편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들이 실제로 싸워야 하는 건 탱크와 비행기를 운용하는 남한의 군대가 아닙니다. 실제로 돈을 가지고 절대로 노출되지 않으면서 전격 작전을 수행하는 투기세력입니다. 평양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평당 가격으로 따지면 도라지아파트와 소나무타워, 두 개만 손잡아도 평양 땅을 전부 사버린다니까요. 아파트 1000만달러어치를 갖고 있는 사람 100명이 마음을 합치면 그렇게 된다는 얘기입니다.10억달러? 이 사람들에겐 돈도 아닙니다. 벌써 금강산에 골프장 4개나 들어갔고, 개성공단에도 골프장 허가가 났다지요? 조금 있으면 격자형 도로가 들어갈 거고, 그 옆으로 늘어선 땅에 대한 매입이 시작될 겁니다. 물론 당장은 아니지만, 당신들이 힘이 빠지면 가장 먼저 움직일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될 겁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지요. 문제는 이 사람들이 정부와 담당공무원, 그리고 지역정치인을 설득하고 매수하는 데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귀국의 환경보호법은 이걸 ‘정부기관’이 관리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은 몰라도 당신들이 힘이 약해지는 그 시점에서는 정부기관의 오래된 관료들은 이미 매수되고 당관료들은 “개발해야 산다.”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손을 들어줄 겁니다. 아직 입법의 능력이 있을 때 환경영향평가라는 제도를 법률에 도입하십시오. 물론 남한은 실패했지만, 이 때 주민동의와 함께 ‘광역생태평가’라는 말을 넣어놓으십시오. 물론 불충분합니다. 남한의 20년 역사가 그걸 증명했고요. 그리고 헌법에 환경소유권이라는 상징적 조항을 하나 넣어두십시오. 불충분하지만, 약간의 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법계가 그때까지 부패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남한의 농촌지역이 지난 3년간 무너진 것보다 더 무섭게 북한 전지역은 10년 안에 무너지게 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지방의 관료들은 조선시대부터 중앙에 의해 제대로 제어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특히 위기가 닥칠 때는 말입니다. 저도 귀국이 나름대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길 바라지만, 그 위기가 극복되었을 때 진짜 위기가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움직이길 바랍니다.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 돌연사…탈진…전국이 헉헉

    돌연사…탈진…전국이 헉헉

    장마가 끝난 뒤 연일 30도를 넘는 극심한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져 전국이 더위를 먹었다. 서울의 경우 23일과 24일 아침기온이 26도를 넘으면서 끈적끈적한 무더위에 많은 시민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곳곳에서 탈진 등 무더위로 인한 사고가 잇따랐고 전력수요량도 최고치를 경신했다. 도시를 빠져 나가지 못한 시민들은 강변이나 공원·할인마트 등에서 더위를 쫓았다. ●전력소비 껑충…정전사고 속출 24일 0시50분쯤 광주 북구 중흥동 서모(45)씨 집에서 평소 특별한 지병이 없는 서씨가 TV를 보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23일 오전에도 광주 북구 용봉동 고속도로 철조망 밑에 박모(62)씨가 탈진해 숨졌다.23일 오후 2시10분쯤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조선시대 왕궁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던 행사요원 윤모(22)씨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정신을 잃어 병원으로 후송됐다. 전력 소비량이 늘면서 정전사고도 잇따랐다.23일 오후 9시20분쯤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아파트에서 전기가 끊겨 50여가구가 무더위 속에 고통을 겪었다. 이어 10여분 뒤에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200여가구도 정전으로 불안에 떨었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오전 1∼6시 시간당 평균 전력수요는 지난 6일 3450만㎾에서 22일 3610만㎾로 뛴 데 이어 23일에는 3670만㎾를 기록했다. 또 24일 오후 9시에는 4400만㎾로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앞서 금요일인 22일 오후 3시에는 전력수요가 5371만 2000㎾로 사상 최대였던 하루전 5272만 5000㎾를 경신했다. 훨씬 더 더웠던 23일 오후 3시에는 5023만 9000kW로 다소 줄었으나 주5일 근무제에 따른 토요휴무를 감안하면 가정 등 비(非)산업 수요는 최고치를 경신했을 것으로 추산됐다. ●극장으로, 공원으로…찜질방 찾아 ‘이열치열’도 더위를 피해 지난 23일 모두 33만여대의 차량이 ‘탈(脫)서울’을 한 데 이어 휴일인 24일에도 26만여대가 빠져 나간 것으로 추산됐다. 이날 대천 해수욕장을 비롯한 충남 서해안 해수욕장에는 40여만명이 찾아왔으며 부산 지역 해수욕장 6곳에도 200만명의 피서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국내 최대 워터파크인 경기 용인 캐리비안베이도 1만 4000여명이 찾았다. 피서를 떠나지 못한 시민들은 극장가나 공원을 찾아 1주일 동안 계속됐던 무더위를 떨쳐냈다. 회사원 김은석(29)·이지영(27·여)씨 커플은 주말 심야영화를 보며 더위를 식혔다. 이씨는 “해가 진 뒤 느지막이 만나 영화관으로 직행했다.”면서 “시원한 극장 안에 있으니 더위는 남의 얘기 같았다.”고 했다. 이희원(40·주부)씨는 가족들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한강시민공원을 산책하며 더위를 잊었다. 늦은 시간까지 야외에서 더위를 피하던 시민들 덕분에 공원 근처 상점과 할인마트 등은 ‘무더위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57)씨는 “평소보다 빙과류나 음료수·주류 등의 판매량이 30% 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안동환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 개그계 대부 김웅래 인덕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 개그계 대부 김웅래 인덕대 교수

    ‘그분의 시대’가 왔다. 만병(萬病)을 통치한다. 설명할 수 없는 묘약, 웃음이다. 고종 황제 때였다. 유성기(留聲機)가 황실에 처음 나타났다. 이를 본 고종 황제는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시험해보려고 소리꾼 박춘재를 불렀다. 영문도 모르는 박춘재는 황제의 거듭된 독촉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기계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부른다.‘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에∼’ 이어 고종은 유성기 기술자를 불러 기계 작동을 재촉했다. 그러자 기계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난다. 박춘재의 목소리가 그대로 재현된 것.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한 물체를 통해 흘러나오자 박춘재는 깜짝 놀라 거의 까무러쳤다. 이를 본 고종 황제가 “수명이 십년은 줄었겠구나. 자네의 정기를 기계에 빼앗겼으니.”라고 했다. 이때부터 ‘십년감수’란 말이 생겨났다. 박춘재는 당시 소문난 소리꾼이기도 했지만 임금의 심사(心思)를 즐겁게 해주는 공인된 재담가였다. 팔도의 온갖 장사꾼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도 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가무별감(歌舞別監)의 직책까지 얻었다. 이런 까닭에 학계에서는 박춘재를 현대 코미디언의 효시로 해석한다. 구한말의 박춘재 재담에서 오늘날의 만담가-코미디언-개그맨 등으로 변천돼 왔다는 것이다. 김웅래(60)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 우리나라 개그계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한국 코미디 역사를 한달음에 관통할 만큼 많은 연구와 발품을 통해 내로라하는 이 시대의 ‘웃음스타’들을 배출했다. 임성훈 최미나 고영수 정광태 곽규호 김학래 임하룡 심형래 전유성 김형곤 김미화 김한국 이봉원 김국진 이창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금도 김 교수를 ‘형님’ ‘스승’ 으로 깍듯이 모신다. 김 교수를 더욱 주목케 하는 것은 그가 최근 국내 처음으로 ‘웃음문화학회’를 만든 일. 웃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금이라도 진지한 연구를 통해 더욱 많은 웃음을 창출해보자는 취지로 학회 창립을 선언했다. 학자와 개그맨들이 함께 뭉쳤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회장은 서대석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맡았고, 김 교수는 수석 부회장. 전유성 김성녀씨가 부회장단에 합류했다. 오는 27일 첫 임원 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과 향후 계획을 논의한다. 이뿐만 아니다. 김 교수는 강원도 평창에 200여평 규모의 ‘코미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내년 4월 완공 예정으로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쯤되면 김 교수의 ‘웃음 열정’이 궁금해지지 않을까.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33년동안 방송에서 개그프로 연출만 전문적으로 맡아오다 지난해 3월 정년 퇴임한 뒤 인덕대를 비롯, 몇몇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방학이었지만 방송국을 오가며 개그맨 오디션 심사위원을 맡으랴, 대학로 모 극장에서 개그맨 조련을 하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KBS개그프로인 ‘개그콘서트’와 ‘폭소클럽’에 최근 두 팀씩을 투입해 웃음작전을 지휘 중이다. 먼저 국내 코미디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박춘재에 이어 ‘신불출’을 거론했다. 구한말의 박춘재를 거친 재담은 일제시대의 신불출을 만나 ‘만담’으로 자리잡았다는 것. 신불출은 월북한 문예인 중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유일무이하게 별도의 연구소가 생길 만큼 북한 내에서도 최고의 만담가로 명성을 날렸다. 자료에 따르면 신불출은 월북 후 1957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중앙위원,1961년 국립만담연구소 소장,66년 중앙방송위원회 만담가로 활동했다. 서울의 전력난을 풍자한 ‘서울의 전기세’, 미국을 비난한 ‘승냥이’ 만담은 주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남한에서는 장소팔 고춘자 부부, 김영운씨 부부, 김뻑국씨 등으로 대표되는 만담이 TV가 생기면서 코미디를 이어주는 웃음사(史)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됐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웃음문화학회 출범과 관련,“현장에 있는 연기자들과 여러 학자, 교수들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가슴을 맞대고, 무릎을 맞대고 얘기할 수 있어야 좋은 결과물이 생겨난다.”고 했다.“PD 활동을 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가 ‘코미디가 저질이다.’ ‘소재가 한정돼 있다.’라는 말이었다.”면서 “앞으로 웃음 연구를 통해 이 두가지 문제를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방송프로 ‘웃찾사’ ‘웃으면 복이 와요’ ‘개그콘서트’ 등도 사랑받아야 하지만, 잊혀져 가는 만담을 되살려야 한다.”면서 “조선시대의 ‘앙천대소’ ‘소천소지’ 등 과거의 유머를 알리고 미래의 웃음을 창조하기 위해 격월간지를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기자와 학자들이 상호협력할 경우 극대화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웃음도 패션이듯, 복고풍도 있고 시대에 맞는 웃음도 있게 마련이 아니냐는 반문도 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코미디는 쇠퇴하고 대신 개그가 살아났다는 그는 웃음 발전을 위해 매년 ‘올해의 웃음대상’을 제정하겠단다. 올 연말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웃긴 사람을 선정, 신선한 충격을 주겠다는 것. 국내 처음 개관될 코미디 박물관에는 대한민국 웃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겠단다. 고 서영춘씨의 유물도 처음 공개하며, 고구려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PD 활동을 하면서 수집한 각종 자료 100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왕년의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 개그맨 전유성 심형래 등이 박물관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학창시절 서울 YMCA에서 레크리에이션 진행방법과 포크댄스도 배웠지요. 학교 시험이 있던 전날에도 이기동 서영춘씨가 등장하는 ‘웃으면 복이와요’ 프로그램을 꼭 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학교 수업 빼먹고 서울 명동의 시공관 극장의 연극관람도 자주 했지요.” 김 교수는 민통선 지역인 경기도 파주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6·25전쟁으로 서울로 피신해 수색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대성동이 낳은 인물이 아니냐고 하자 웃을 뿐이다. 이곳엔 아직도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어릴 때부터 유머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73년 동양TV에 입사했다. 면접 때 코미디프로를 맡고 싶다고 해 ‘코미디전망대’의 고 김경태 PD와 사수-조수로 만났다. 이어 양훈-양석천 콤비 프로그램인 ‘좋았군 좋았어’를 처음으로 맡았다.75년에는 ‘살짜기 웃어예’라는 최초의 개그프로를 연출했다. 외국잡지를 들여다보고 대학 축제 현장을 다니며 꾸준히 개그 아이디어를 모았다. 대학 다닐 때 다 외우다시피했던 ‘세계 해학전집’(정음사刊) 등의 자료도 많은 참고가 됐다. 밤이면 서울 무교동 일대를 뒤지며 DJ쇼에 출연했던 임하룡 김학래 주병진 등을 만나 방송에 출연시키는 등 웃음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동서고금 어디를 가나 웃음처럼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웃음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내친김에 서울 대학로에 개그 전용극장을 짓고 있다.160석 규모로 이달 말 간판을 내걸 예정이다. 그동안 거쳐간 수백명의 후배와 제자, 여러 개그맨들이 드나들 것으로 보여 ‘웃음의 메카’가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46년 경기 파주 대성리 출생 ▲66년 배재고 졸업 ▲73년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73년 동양방송PD ▲80년 한국방송공사PD ▲93년 중앙대 신문방송학 석사 ▲94년 제34회 골든로즈상 심사위원(이후 4회) ▲98∼2000년 한국방송공사 코미디프로그램 담당 전문프로듀서 ▲2002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 ▲2004년∼현재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 ■ 주요 작품 최초 개그프로 ‘살짜기 웃어예’ 연출(75년),‘유머1번지’연출(82∼92년), 시트콤 ‘아무도 못말려’ 연출(97년)시카고 코미디페스티벌 참가(2000년) ■ 주요 저서 유머개그야사(91년), 입술터진 하마도 노래방 가냐(92년), 웃음은 국민의 기본권이다(93년), 훔쳐보는 공포(94년), 김웅래PD폭소카세트북(96년), 한국을 웃긴 250가지 이야기(96년), 잡담으로 성공하기(98년) km@seoul.co.kr
  • 2007년 발행 새 1만원권 용비어천가등 도안

    2007년 발행 새 1만원권 용비어천가등 도안

    2007년 상반기에 발행될 새 1만원권의 앞면 배경 그림이 현재의 흉배무늬와 물시계에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용비어천가 제2장으로 바뀐다. 또 같은 시기에 발행될 새 1000원권의 앞면 배경그림은 흉배무늬와 투호 대신 매화와 명륜당으로 변경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1일 본회의를 열고 이같은 도안의 새 1만원·1000원권을 발행하기로 의결했다. ●뒷면 주제는 혼천의로… 앞면주제는 현행대로 새 1만원권의 앞면 부제로 실릴 일월오봉도는 해,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진 그림으로 조선시대 임금의 배후 병풍으로 사용됐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앞면 부제로 함께 채택된 용비어천가 제2장은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새1000원권 앞면배경 매화·명륜당으로 새 1만원권 뒷면 주제는 현재의 경회루에서 혼천의(渾天儀)로 바뀐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 등을 관측하고 시계역할을 하던 천체 관측기구로,1만원권에 실리는 것은 국보 제23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송이영의 혼천시계 일부다. 새 1만원권 앞면 주제는 현행대로 세종대왕이 유지된다. 또 새 1000원권의 앞면 부제로는 매화와 명륜당이 실리며 앞면 도안 인물은 현행대로 퇴계 이황이 유지된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 “수량경제사는 통계자료 해석 오류”

    지난해 서울대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한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는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 따위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주된 비판은 ‘우리 땅에서 우리 학문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는, 고상하게 보자면 역사철학적 접근이었다. 그러던 차에 본격적인 서평이 나왔다. 염정섭 서원대 교양학부 교수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의 ‘한국문화연구8권’에 ‘과잉해석의 성긴 틈새를 빠져나오지 못한 수량자료’라는 글을 냈다. 염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자다. 염 교수의 비판은 신랄했다. 그는 총평에서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면서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접하게 되면서 저절로 생겨나는 기분 좋은 흥분이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계속 스스로 질문하고 확인하게 하는 어색한 흥분이었다.”고 밝혔다. 염 교수 주장의 포인트는 낙성대팀의 주장 자체가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통계자료를 엄격하게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엄격함’의 대상은 두 가지다. 우선 수치·수량상의 엄격함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수치와 수량에 조선시대의 성격까지 배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전통사회라는 배경에 대한 고려없이 조선시대에 현대적 시장경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책에 실린 9편의 논문 역시 이런 엄격함을 지키려는 연구자들의 태도가 간간이 눈에 띈다는 게 염 교수의 평가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가 집필한 총설에 가면 이런 태도가 싹 사라진다. 이 교수는 과감하게 새로운 이론이 제시됐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정작 총설 말미에 가면 이 교수 역시 “과연 전국적인 현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한 발 뺀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발을 뺄 여지를 마련해 둔 혐의가 엿보인다는 것. 염 교수는 “이 교수의 책이 발표됐을 때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너무 띄우는 과정에서 ‘보기드문 연구성과’로 치장됐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 교수는 낙성대팀 자체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경제사적 입장에서 사료를 정리하고 통계를 냈기 때문이다. 염 교수는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방대한 호적과 양안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