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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보로 즐기는 문화산책코스 3선

    도보로 즐기는 문화산책코스 3선

    ‘낯선 도시를 여행하듯 600년 고도 서울을 걸어보자.’ 유럽에 배낭 여행을 가면 ‘도보관광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꼭 쥐고 도심을 활보한다. 문화재 설명판을 꼼꼼히 읽고 카메라를 연신 눌러대며 낯선 도시를 탐험한다. 연휴를 맞아 유럽을 관광하듯 서울을 걸어보자. 자동차 속에서 보던 낯익은 풍경 같지만 걸어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도보 관광코스를 소개한다. ●전통문화 중심지역-북촌·운현궁 코스 한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가회동 31번지. 민화 250여점과 민속자료 750점이 소장되어 있는 가회박물관과 전통 공방들이 자리한 북촌은 한국 고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전통주 빚기와 자수, 국악 등 다양한 문화강좌를 열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추석 연휴기간에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한다. 찾아가는 길: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대문화 중심지역-덕수궁·정동 코스 돌담길을 이어가는 정동길은 낭만이 가득해 연인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숨겨진 옛 덕수궁터는 가슴아픈 한국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시립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도 있어 문화산책 코스로 제격이다. ▶찾아가는 길:지하철 1·2호선 시청역 ●역사·생태 복원지역-청계천 코스 조형물 스프링(Spring)과 분수와 폭포 등으로 꾸며진 청계광장과 95년 만에 복원된 조선시대 대표적 석교인 광통교,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난 수표교, 패턴천변, 빨래터, 참여와 화합의 벽, 하늘물터, 버들습지 등 ‘청계천 8경’을 감상할 수 있다. 청계천문화관에는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호선 왕십리역 이밖에도 경복궁·인사동 코스, 종묘·창경궁 코스, 대학로, 남대문·명동 도보관광코스도 유명하다. 전문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도보관광을 하고 싶다면 관광 희망일 3일 전에 서울시 문화관광 홈페이지(www.visitseoul.net)를 방문, 예약하면 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강강술래·부채춤 체험해 보세요

    강강술래·부채춤 체험해 보세요

    한가위를 앞두고 경기도내 곳곳에서 다채로운 민속놀이 체험행사가 펼쳐진다.2일 경기관광공사에 따르면 5일부터 8일까지 수원시 화성행궁에서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수위의식과 군례가 펼쳐지는 것을 비롯, 민속전통 무예공연인 무예24기, 전통줄타기 등의 공연이 열린다. 추석인 6일에는 민속촌 궁중줄놀이팀이 나와 전통 줄타기를 선보이고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리는 상설체험마당에서는 왕·왕비 의상 입어보기, 화전 만들기, 도자기 체험 등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된다. 8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가위바위보 대회가 열리고 오후 1시부터는 조선시대 최정예 부대였던 장용영의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된다. 추석날에는 화성행궁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한가위 맞이 민속한마당’이 열리는 용인 민속촌에서는 8일까지 한가위 맞이 큰굿, 거북놀이, 성주고사 등의 공연과 함께 도리깨, 풍구, 키 등 추억의 농기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또 표주박과 박바가지, 채색박인형만들기, 박터뜨리기 등 주체체험 행사도 열린다. 용인시 기흥읍 경기도박물관에서는 15일까지 널뛰기, 윷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민속놀이와 북, 장구, 꽹과리, 징 등 풍물놀이가 열린다. 용인 에버랜드에서는 팽이치기, 제기차기, 고리던지기, 투호놀이, 버나돌리기 등 5종의 민속놀이를 체험하면 기념품을 증정하고 남사당공연팀의 줄타기, 풍물놀이도 준비했다. 과천 서울랜드에서도 5일부터 8일까지 투호놀이, 제기차기, 굴렁쇠, 공기놀이 등과 더불어 부채춤, 소고춤, 강강술래 등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민속놀이체험행사가 열린다. 부천 아인스월드는 3일부터 8일까지 가족과 함께하는 투호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윷놀이 등의 체험행사와 함께 잔디광장 개장 기념으로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할 수 있는 깜짝 이벤트도 마련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강강술래·부채춤 체험해 보세요

    강강술래·부채춤 체험해 보세요

    한가위를 앞두고 경기도내 곳곳에서 다채로운 민속놀이 체험행사가 펼쳐진다.2일 경기관광공사에 따르면 5일부터 8일까지 수원시 화성행궁에서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수위의식과 군례가 펼쳐지는 것을 비롯, 민속전통 무예공연인 무예24기, 전통줄타기 등의 공연이 열린다. 추석인 6일에는 민속촌 궁중줄놀이팀이 나와 전통 줄타기를 선보이고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리는 상설체험마당에서는 왕·왕비 의상 입어보기, 화전 만들기, 도자기 체험 등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된다. 8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가위바위보 대회가 열리고 오후 1시부터는 조선시대 최정예 부대였던 장용영의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된다. 추석날에는 화성행궁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한가위 맞이 민속한마당’이 열리는 용인 민속촌에서는 8일까지 한가위 맞이 큰굿, 거북놀이, 성주고사 등의 공연과 함께 도리깨, 풍구, 키 등 추억의 농기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또 표주박과 박바가지, 채색박인형만들기, 박터뜨리기 등 주체체험 행사도 열린다. 용인시 기흥읍 경기도박물관에서는 15일까지 널뛰기, 윷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민속놀이와 북, 장구, 꽹과리, 징 등 풍물놀이가 열린다. 용인 에버랜드에서는 팽이치기, 제기차기, 고리던지기, 투호놀이, 버나돌리기 등 5종의 민속놀이를 체험하면 기념품을 증정하고 남사당공연팀의 줄타기, 풍물놀이도 준비했다. 과천 서울랜드에서도 5일부터 8일까지 투호놀이, 제기차기, 굴렁쇠, 공기놀이 등과 더불어 부채춤, 소고춤, 강강술래 등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민속놀이체험행사가 열린다. 부천 아인스월드는 3일부터 8일까지 가족과 함께하는 투호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윷놀이 등의 체험행사와 함께 잔디광장 개장 기념으로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할 수 있는 깜짝 이벤트도 마련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조선시대 ‘태교 지침서’ 엿보다

    고서(古書)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다양한 문화·생활양식이 가득 담긴 고서를 들여다보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다큐멘터리 전문 Q채널은 고서를 통해 전통생활 속에 녹아든 삶과 생활의 지혜를 발견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고서, 지혜의 문’(8부작)을 2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방송한다. 민족의 사상과 문화가 응축돼 있는 고서가 안내하는 길은 과거로만 향하지 않는다. 현재를 명석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길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조선 영조때 사주당 이씨 부인이 쓴 태교지침서인 ‘태교신기’(胎敎新記)를 통해 전통태교의 우수성을 살펴보고 현대의학과의 접목 가능성을 검토한다.2부는 검시(檢屍)에 관한 방법론을 다룬 법의학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통해 조선시대의 법정신과 형벌제도를 살펴본다.3부는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통해 동양무예의 정수와 한국무예의 긍지를 보여준다.4부는 조선시대 양반음식 146가지 조리법을 한글로 소개한 요리지침서 ‘음식지미방’(飮食知未方)을 통해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 보고, 우리 전통음식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규명한다. 5부에 소개되는 ‘승총명록’(勝聰明錄)’과 ‘용하기’(用下記)는 전통 상업정신을 재조명하는 귀중한 고서다.6부와 8부에서는 각각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통해 과학기술 및 주거문화에 대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본다. 이와 함께 7부에서는 미국 인류학자인 스튜어트 컬린의 저서 ‘한국의 놀이(Korean Game)’를 통해 세계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놀이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교육적 가치를 재조명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2) 용인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2) 용인길

    충북 음성군 생극면을 지난 영남대로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는 경기도로 접어든다. 종착지인 서울이 얼마 남지 않아 행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음 직하다. 교통의 요지인 용인으로 가는 길목인 옛길은 경기도 안성에 첫발을 내디딘다. 경기도 관문인 죽산에서 시작되지만 17번 국도와 맞물려 옛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도로가 직진화되면서 군데군데 남은 길은 인근 마을의 진입로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 가는 첫길 죽산 죽산에 들어서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당간지주와 미륵입상이다. 그나마 옛길의 흔적을 알려준다. 미륵입상 앞에는 향토유적 제20호인 오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도로 서편으로 나있는 좁고 긴 콘크리트 도로는 지금은 사라진 안성선 철도 노반이 있던 자리다. 경부선 천안역에서 출발해 안성평야를 지나 안성에 이르는 철도였다.1927년 9월15일 이천시 장호원까지 개통되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1944년 11월1일 안성∼장호원이 철거되고 1989년 1월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폐선되었다. 정양화 용인시 전통문화연구소장은 “철로가 전쟁물자로 공급되는 바람에 철거됐다.”고 전했다. 500여m쯤 오르면 오른쪽으로 비석거리 마을이다. 옛 과거길이자 관리가 다니던 관도임을 증명하듯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리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재임기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영남대로에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공덕비도 섞여 있다. 비석거리를 지나면 말을 바꾸어 타던 분행역터다. 지금은 분행마을이다. 청미천을 넘은 옛길은 17번 국도를 따라 10여㎞를 내달아 용인시 백암면에 다다른다. 국도가 옛길을 덮어 자취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자투리 옛길은 좌항초등학교 쪽으로 접아들면서 잠시 국도와 이별한다. 좌찬역이 있던 좌전마을이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은 양옆이 무성한 잡초로 덮여 있다. 동네 한가운데 마을의 입구를 표시하던 비석이 서있었다는 이문(里門)터가 있다. 지금은 매몰돼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잡았다. 국도와 다시 연결되는 길목이 좌찬고개다. 이 고개는 박포라는 장수가 정도전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그 대가가 보잘 것 없다고 비난하다 귀양을 온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박포의 벼슬이 좌찬성이고 귀양지가 좌항리라서 좌찬현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개는 완만하지만 걸어서 넘기가 쉽지 않다. 좌전마을 뒤편에는 밤나무 5000여그루가 들어선 농원이 있다. ●수탈용 수여선 아스라히 국도 건너 남아있는 옛길에는 의병장 임경재의 비석과 석상이 자리잡았다. 양지 인터체인지를 지난 영남대로는 42번 국도와 만난다. 폐도화되다시피 한 길 옆으로 수인선과 함께 우리나라 첫 협괘열차가 운행되었던 수여선 철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농로지만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것이 철로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시대 때 사설철도회사인 ‘조선경동철도’에서 여객열차와 화물열차를 운영하던 것으로 이천쌀과 소금을 강탈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수탈의 현장이다.1930년 개통해 삼박골과 김량천교를 건너 용인으로 들어갔던 이 열차는 1972년 적자운영으로 모습을 감췄다. 인근 양지천에는 일제시대부터 최근에 새로 놓은 다리까지 3개의 교각이 나란이 버티고 있는 일명 3세대 다리가 있어 세월의 흐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다리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실물 박물관인 셈이다. 여기서부터 옛길은 용인을 포함한 수도권의 대규모 택지개발붐에 밀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인근에 동백지구와 구갈 2·3지구를 포함한 크고 작은 아파트단지가 빼곡히 들어찼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영남대로와 지금의 지도를 비교하면서 옛길을 회상하며 대로변을 걷는 모양새다. 그나마 남아있었다던 용인시 처인구청 인근 옛길은 소멸됐고 번잡한 시내 중심가 도로들로 자리메움했다. ●산천개벽의 상징 용인시청 국도를 따라 3㎞가량 지나면 오른쪽으로 기초자치단체의 청사로는 최대규모로 알려진 용인시 행정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 옛길은 잠시 국도 신세를 면한다. 멱조고개부터 어정리를 지나 판교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최근 입주를 시작한 동백지구 연결로로 사용되는 데다 대규모 어정가구단지가 자리잡아 옛길의 정취는 온데간데없다. 대부분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길이야 어찌됐든 멱조고개(일명 메주고개)는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옛날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부역 때문에 집을 비우게 되었고 시아버지가 대신 나무를 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아이를 업고 고갯마루에서 기다렸는데 어느 날 밤이 깊어도 오지 않는 시아버지가 걱정되어 찾아나서다가 길을 잃었다. 한참을 헤매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혹시나 하여 달려갔더니 그곳에는 시아버지가 배고픈 호랑이를 만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본 며느리는 호랑이에게 배가 고프다면 내 아이라도 줄 터이니 시아버님을 다치게 하지 말라며 아이를 던져주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가 자신은 늙었기에 죽어도 한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어린 손자를 죽게 했느냐고 꾸짖자, 며느리는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으나 부모는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느냐며 모셔왔다고 한다. 멱조고개는 이렇듯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연과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 넘던 고개’라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경찰대학 앞을 지나지만 이 길이 영남대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다. 그나마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이 용인 향교이다. 그렇지만 이 향교도 원래는 구성면 마북리에 있었던 것을 이전·복원한 것으로 6·25때 소실된 후 남아있던 부재를 사용해 다시 지은 것이다. 구성동사무소를 지나면 연원마을이다. 이곳도 온통 아파트단지다. 옛날에는 마을 이름었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 이름으로 변했다. 바로 옆마을 새터말에는 장승이 있지만 길목에는 월마트가 자리잡아 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옛길은 풍덕천으로 이어진다. 곧바로 수지구청이다.23번 국도를 따라 간다. 풍덕천에서 옛길은 공사가 한창인 판교택지개발지구로 이어져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흔적이 남아있던 낙생초등학교 옆 너더리 마을도 얼마 전까지 부동산중개업소로 가득 찼으나 지금은 개발로 모두 철거돼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이어 영남대로는 청계산을 거쳐 종착지인 서울로 치닫는다. 글 사진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판교의 유래 개발이 한창인 판교(板橋)는 옛 명칭이 널다리였다. 마을 이름을 ‘널다리’라고 부르다가 ‘너다리’로, 다시 한자표기인 판교동으로 굳었다.‘널다리’란 이름은 마을 앞을 흐르는 운중천에 넓은 판자로 다리를 놓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석이 분분하다. 정양화 용인시 전통문화연구소장은 다리의 경우 들(坪)의 뜻을 가지는 이름으로 교각을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 말대로라면 ‘널다리’의 경우 넓은 들판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돼 판교의 명칭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 판교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 것은 정씨의 해석대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수 있는 천혜의 ‘넓은 들판’이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최근 자신이 연구한 자료에서 이같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 연구자료에 따르면 용인시 원삼면 맹리와 독성리에 각각 위치한 느다리와 쪽다리는 마을이 아닌 들(坪)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다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흔히 개울에 놓여있는 다리(橋梁)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흥구의 잔다리와 이웃하고 있는 백암면의 홈다리와 같은 뜻을 가지는 전형적인 땅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잔다리와 홈다리는 다리(교량)가 아니라 ‘작고 좁은 들(坪)’의 뜻을 가지는 이름이며 느다리와 쪽다리도 같은 발상에서 붙은 이름이라는 것. 잔다리는 현재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홈다리도 몇 집이 살고 있지만 느다리와 쪽다리는 그저 들판으로 논이 주를 이루고 있다. 느다리는 구한말 ‘지명지’에 늘다리라고 나오고 있으며 판교평(板橋坪)이라고 옮기고 있다. 또한 쪽다리는 편교평(片橋坪)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늘다리의 경우 ‘널+다리’라고 생각해 널빤지의 뜻을 가진 판(板)자를 쓰고 다리는 교량으로 생각하여 다리의 의미를 지닌 교(橋)자를 사용한 것으로 편교도 조각의 뜻을 가진 편(片)자와 교(橋)를 사용했으니 판교나 편교나 소리나는 발음의 뜻을 임의로 취하여 붙인 표기라는 설명이다. 느다리는 맹골 마을에서 발원하여 미평리의 청미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이 있어서 다리(橋)를 놓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쪽다리는 작은 도랑이 전부이기 때문에 굳이 다리를 놓을 필요는 없어 위의 들(坪)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판교 시가지 명칭은 판평(板坪)으로 봐야 한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강명관 지음

    조선시대의 대표적 저작인 ‘삼강행실도’ 열녀편을 보면 열녀 110명 가운데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으로 열녀가 된 사람이 80명에 이른다. 죽지 않은 열녀 30명은 왕비 같은 고귀한 신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강명관 지음, 길 펴냄)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열녀 대부분이 남편을 위해 죽음을 자처하거나 몸을 내던졌는데 아내를 위해 대신 죽은 남편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유교윤리에 대한 반성적 독해를 시도한다. 학문, 교육, 정치, 문화, 자연 등 다양한 소재에 대한 생각들을 고전에 빗대어 풀어내는 저자는 조선조 유교윤리가 얼마나 생명을 경시하고 특히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소상히 살핀다. 저자(부산대 교수·한문학)가 ‘조선의 뒷골목 풍경’ 이후 3년만에 내놓은 역사교양서. 고종이 자신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합격장을 팔아먹었다는 일화, 유배간 형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며 동생 정약용이 개고기 요리법을 손수 편지글로 보낸 일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실렸다.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신나는 과학이야기] 도르래와 축바퀴 뭐가 다르지?

    [신나는 과학이야기] 도르래와 축바퀴 뭐가 다르지?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아침 저녁엔 선선하고 한 낮에는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서울특별시과학전시관의 물놀이 체험마당에서 시원한 과학의 바람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물놀이 체험마당은 아르키메데스 운동 장치, 음악 분수, 파이프 전화, 다람쥐 펌프 등 직접 작동해볼 수 있는 전시물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베이터·거중기도 도르래 원리 이용 바퀴에 줄이나 체인 등을 걸어 힘의 방향이나 크기를 바꾸는 도구를 도르래라고 한다. 하나의 축에 크기가 다른 두 바퀴를 고정시켜서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는 도구를 축바퀴라고 한다. 도르래에는 힘의 이득은 없고 방향만 바꿀 수 있는 고정 도르래와 적은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움직 도르래가 있다. 도르래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엘리베이터에 사용되고 있고, 조선시대에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에도 활용되었다. 체험마당에는 대형 고정 도르래, 움직 도르래, 축바퀴와 연결된 의자에 앉아 줄을 당기면서 일정한 높이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힘의 크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왜 얼음판 위의 요정들이 팔을 오므리고 회전할까? 각운동량 체험기의 회전 원판에 올라서서 팔과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면, 몸이 회전하는 속도가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각운동량이란 회전운동하는 물체의 운동량을 가리키는 것인데, 물체의 질량과 속도·회전 반경의 곱으로 구할 수 있다. 회전하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일정하게 보존되는데, 팔이나 다리를 오므리면 회전 반경이 작아지므로 회전 속도가 빨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이빙할 때 몸을 움츠리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보자 물 종합 운동 장치는 물의 낙차를 이용한 전시물인데, 자유낙하 수차와 물 소용돌이 실험장치가 눈길을 끈다. 자유낙하 수차는 물레방아에 달린 8개의 양동이에 물이 떨어질 때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전시물이다. 그런데 이 물레방아는 한 방향으로 돌지 않고, 양동이 안에 든 물의 양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회전한다. 물의 소용돌이는 물이 담긴 통의 밑바닥 구멍으로 물이 빠져나갈 때 통이 회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물이 원심력에 의해 바깥 쪽으로 밀려서 물 기둥의 가운데에 공기 기둥이 생기는 것이다. 통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수압이 커지기 때문에 공기 기둥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집에서도 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볼 수 있다. 페트병 하나에 물을 반쯤 넣고 페트병의 입구에 또다른 페트병의 입구를 대고 고무찰흙으로 단단히 붙인다. 물이 담긴 페트병을 위쪽으로 오도록 하고, 고무찰흙으로 붙인 부분을 손으로 잡고 빠르게 돌리면 된다. ■ 서울특별시과학전시관 가는 길 서울특별시과학전시관에는 물놀이 체험마당뿐만 아니라 화훼원, 작물원, 곤충생태관, 암석관찰원, 야생화관찰로 등이 있어 다양한 분야의 과학을 맛볼 수 있다. 특히 30일까지 호주국립과학기술센터의 전시물을 체험해볼 수 있는 ‘생각을 키우는 과학체험전’이 열린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 w.ssp.re.kr)를 참조하면 된다.(02)881-3000. 김경은 영동중학교 교사
  • “대동여지도 만들때 김정호 답사 안했다”

    조선의 ‘대동여지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직접 전국을 답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리서와 지도를 편집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기봉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조선의 고지도와 김정호’를 주제로 29일 오후 2시 서울대 인문주간 행사로 열리는 규장각 학술대회를 앞두고 28일 미리 공개한 강연문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김정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통설은 잘못됐다.”면서 “그는 ‘동국여지승람’,‘문헌비고’ 등 조선시대 지리지와 정상기의 ‘동국지도’ 등을 참조해 자신의 집에서 각종 지리 정보를 취합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1만 3000여개의 지명을 혼자 측량할 수 없고 ▲이미 조선은 상당히 자세한 위치정보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 다른 지역에 비해 위치 정보가 부족했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부정확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 답사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김정호는 남북 6.6m에 이르는 조선에서 가장 큰 ‘대동여지도’를 목판본 지도로 제작해 조선의 지도를 집대성했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다.”고 평가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종교·문화재플러스] 새달 1일부터 창건 8주년 특별전

    천태종 관문사는 창건 8주년을 맞아 다음달 1일부터 3층 성보박물관에서 ‘관문사 성보박물관 등록 및 개관기념 특별전’을 개최한다.‘목판에 새긴 불심’ 제하의 특별전에는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1’(보물 964호),‘지장보살본원경’(보물 966호) 등을 비롯해 고려·조선시대에 간행된 각종 불교 경전의 변상도와 다라니 판화가 전시된다.(02)723-7645
  • 차례 지내고 고궁·박물관으로

    추석을 맞아 30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경복궁·현충사 등 고궁과 능원, 유적관리소 등이 전통문화행사 등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했다. 특히 이 기간 중 한복을 입고 고궁 및 왕릉을 찾는 관람객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경복궁에서는 조선시대 과거제와 훈민정음 반포 재현, 궁성문 개폐, 수문장 교대의식 등을 볼 수 있다. 창경궁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와 궁중무악인 무고, 향발무, 포구락, 처용무, 수제천, 여민락 등을 선보인다. 덕수궁에서는 평택농악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생활다례 체험, 전통 탈모형 목걸이 만들기 등을 통해 우리 민속의 멋과 흥을 즐길 수 있다. 또 정릉·서오릉·융건릉 등 13개 능원 및 현충사,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칠백의총관리소 등에서는 세시 민속놀이인 널뛰기, 제기차기, 윷놀이, 팽이치기 등을 직접 즐길 수 있다. 이와 함께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집’에서는 부채춤, 남도민요, 농악 공연을 볼 수 있으며, 전통음식 전시·시식도 제공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음달 5∼7일 널뛰기·목판 인쇄 등 전통놀이·문화 체험과 함께 판줄·북청사자놀음 등 민속공연 한마당을 선보인다. 특히 극장 ‘용’에서는 고구려 춤극 ‘THE HAN-무천’을 볼 수 있다. 민속박물관은 다음달 1∼8일 택견과 퓨전국악, 황해도굿, 서울풍물굿 등을 공연하며,3∼8일에는 전통탈 만들기 등 다양한 민속문화 체험마당을 진행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고] 역사학자 이수건 영남대 명예교수

    조선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이수건 영남대 명예교수가 25일 새벽 자택에서 타계했다.71세. 경북대 출신인 고인은 1969년 영남대 교수로 부임한 이래 정년퇴임할 때까지 봉직했다. 특히 지방사와 영남지역 사림파·고문서 연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다. 대구사학회장과 고문서학회장, 국사편찬위원,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조선시대 지방행정사’‘한국중세사회사연구’‘경북지방 고문서연구’‘영남 사림파의 형성’ 등이 있다. 유족으로 부인 박옥주씨와 아들 섭(대구가톨릭의대 교수)씨 등 1남5녀가 있다. 빈소는 대구가톨릭의대병원, 발인은 27일 오전 9시.(011)802-203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목조각 5000여점 모아 ‘목인박물관’ 설립 김의광 관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목조각 5000여점 모아 ‘목인박물관’ 설립 김의광 관장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가마를 타고 간다. 에구메라, 여러 목인(木人)들이 외로울까봐 함께 벗을 하잔다.‘따라와∼’ 창을 들고 호랑이를 탄 남자, 해태 위에 걸터앉은 선비, 물구나무 선 광대, 학을 타고 천도복숭아와 술병을 든 신선, 머리에 뿔이 두개가 나 있는 도깨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들갑이다. 기왕지사, 가는 길에 노래나 몇술 뿌려보자. 자, 이승과 이별하는 최후의 마당이 아닌가.‘이제 가면 언제 오나/허어야 허어야/간다 간다 나는 간다/북망 고개로 나는 간다/서른 서이 상두꾼아/발맞추어 나아가세’ 처량하면서도 차원 높은 해탈의 노래다. 목인(木人), 풀어보면 나뭇조각 인간을 뜻한다. 비록 말이 없지만 웃음과 울음이 있다. 풍자의 여유가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주술 및 벽사, 그리고 각종 의례에 사용했다. 죽은 이를 저승길로 무사히 안내하고 극락세계로 모시는 역할도 했다. 무덤의 부장용으로 쓰였던 목용(木俑), 마을의 수호신, 일상 생활에서 각종 민예품으로 사용됐던 흔적들이 뜸뜸이 전해내려온다. 아울러 이들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당시의 생활 풍습과 토속신앙, 복식문화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치로 평가된다. ●목인은 민화와 함께 민중공예문화 대표 특히 상여장식에 표현된 다양한 목인들은 민화와 함께 우리 민중의 공예문화를 대표한다. 하지만 상여소리를 하는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에서 그 맥이 끊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잠깐,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국내 유일의 ‘목인박물관’을 설립한 김의광(57) 관장이다. 강산이 세번 바뀌는 지난 30년 세월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3000여점의 목인과 목조각을 옹골지게 ‘목인석심(木人石心)´으로 수집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상여문화를 알 수 있는 목인을 비롯, 신당(神堂), 절에 있던 목조각 등 귀중한 작품들을 많이 모았고 올 3월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박물관을 열었다. 그랬더니 오늘날 민속학자,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쓰레기통 언저리에 버려졌거나, 그랬음직한 목인들이 일약 스타가 된 셈이다. 그동안 말없이 방치됐던 목인들이 김 관장의 노력에 의해 당시의 생활풍습과 의식문화 등을 알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로 떠올랐다. 이쯤되면 김 관장을 가리켜 별난 사람이라기보다는 단절되가는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지난 19일 목인박물관에서 김 관장을 만났다.2층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역시나 애지중지 목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최근에 열린 ‘목인, 세속에서 얻은 성스러움’의 특별전에 대한 마무리 손질작업이기도 했다. 김 관장은 먼저 안에 전시된 여러 목인들을 설명해준다. 전시실에는 300여점의 목인과 상여 앞에 매달렸던 꽃나무 조각 200여점이 벽면에 가득 전시돼 있었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으나 당시의 생활상을 연상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연꽃, 학, 닭, 기러기, 사당패, 가슴을 드러낸 기생, 봉황탄 어린이 등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조상들의 숨결이 새록새록 느껴진다. 그는 “삶을 마감하고 가는 길은 우울하고 어두웠을텐데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준 조상들의 마음이 정말 아름답지 않으냐.”고 하면서 죽음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새삼 느끼게 한다고 설명했다. 쭉 둘러보노라니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줄타기 하는 목인,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붉은 치우천왕, 첩과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는 본처 목인, 아들을 손꼽아 바라는 부부 목인…. ●인도·태국 등 동남아 목조각도 2000여점 모아 그는 “이 박물관 집은 단기 4288년, 흔히 쌍팔년 4월에 지어졌다. 여기 목인들이 있기엔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면서 이들을 불러모으느라 애를 많이 썼다며 웃는다. 특히 이 박물관 1층 지하에는 요즘 보기 힘든 방공호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1970년대초였어요. 외국인 친구네 집에 갔는데 우리나라 전통 민속품이 진열돼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취미로 목조각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 ㈜태평양에 입사, 근무했던 시절이어서 퇴근 후나 주말 등을 이용해 골동품 가게를 뒤졌다. 주로 인사동이나 청계천 일대였다. 갈 때마다 맘에 드는 목인을 보고 가격이 비싸 만지작거렸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인이 상여장식을 모은다고 하자 ‘귀신이 붙었다.’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그럴수록 목인은 그에게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다가왔다. 이름없는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혼, 보면 볼수록 감동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 둘 수집한 것이 3000여점. 최근 2∼3년 사이에는 행동반경을 넓혀 인도, 태국 등의 동남아 목조각 2000여점을 모았다. 당연히 현지에서 발품을 팔았다. “목인 중에서도 상여 목조각에는 그 사회의 시대상이 그대로 담겨 있어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상여 목인은 주로 조선 후기에 왕성하게 만들어졌지요. 그땐 관을 지키는 사람이 장군이었다가 일제 시대에 와서는 순사로 변합니다.” 김 관장은 “사실 상여문화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풍습이다.”면서 죽은 자가 현세에 누리는 마지막 호사였고 평민에게는 평소 고관대작이나 탈 수 있는 가마를 죽을 때 타보는 영광(?)도 있었다고 했다. ●올겨울 ‘목인도록´ 제작… 특별전 계획 김 관장은 또 “누군가 그런 것(목인을)들을 모으지 않았다면 쓰레기통 비슷한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목인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함께 살아온 우리 시대의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런 명분으로 박물관을 열었더니 민속학자 등 주변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이들에 대한 보답으로 올 겨울에는 ‘목인도록’도 제작하고 특별전을 열 예정이다. 내년 3월 개관 1주년 때에는 그동안 모아온 동남아의 목인들도 전시해볼 계획이다. “우리 박물관은 목인들과의 대화의 장소입니다. 음악과 역사가 공존합니다. 옛날의 목인을 보며 차도 마시는 문화공간이지요.”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 못했지만 60을 바라보는 지금 나이에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 너무 뿌듯하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김 관장은 서울 출신. 연세대 정외과를 나와 75년 설록차를 생산하는 태평양에 입사했다. 이후 태평양 계열사인 장원산업 회장으로 있던 2004년 목인들의 반란(?)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박물관을 설립했다. 그가 박물관과 인연이 된 것은 부친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자유당 시절 상공·교통·내무장관을 지낸 부친(김일환)이 이화여대 이사로 있었던 1999년에 김활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십장생도 병풍’을 기증했다. 조선시대 궁중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병풍은 1972년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선물받아 30년 가까이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것이다. 김 관장은 이때 ‘적재적소’라는 말을 생각해냈다. 즉 물건이나 사람이나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수집했던 목인들을 모아 박물관 설립을 생각하게 됐다. “공예품이 청자라면 목인은 백자입니다. 또 청자가 귀족의 애장품이라면 목인은 민초의 삶, 애환과 고통 그 자체이지요. 사람에게도 적재적소가 있듯이 목인들도 제자리가 있는 것이지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9년 서울 출생 ▲68년 대광고 졸업 ▲72년 연세대 정외과 졸업 ▲74년 동대학 석사 ▲75년 ㈜태평양 입사 ▲83년 태평양 장업㈜ 전무 ▲92년 태평양 돌핀스야구단 대표이사. 대통령 표창(전통차 계승발전) ▲2002년 장원산업㈜ 회장 ▲06년 3월 목인박물관 관장, 옛돌조각 사랑모임 회장, 사단법인 한국민속박물관회 이사, 서울시박물관협회 이사
  • [녹색공간] 클레오파트라의 화장품/김판기 용인대 산업환경보건학 교수

    어느덧 개강한 지 4주가 되었다. 한가롭던 캠퍼스에 생기가 넘친다. 리모델링공사가 덜 끝난 우리 건물은 마무리공사 소리와 어우러져 소란스러운 하루를 보낸다. 큰 변화는 건물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화장실의 진화는 남다르다. 센서가 부착돼 세련되게 변했으며 여자 화장실이 더 커졌다. 이미 평등은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취업의뢰서의 노골적인 선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취업에서 자연스레 얻었던 남성 우선권은 사라지고 전전긍긍하는 남학생이 늘고 있다. 외국어 능력과 자격증 등과 함께 외모의 중요성이 그래서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비단 여학생뿐만 아니라 남학생도 외모에 대한 관심은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자기만족을 넘어 취업을 위한 생존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비장하기까지 하다. 피부를 깨끗하게 한다는 화장품, 그리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고급화장품인 줄만 알고 있었던 S화장품의 일부 제품에서 크롬과 네오디뮴이라는 중금속이 검출되었다는 서울신문 보도 (9월22일자)가 있었다. 중국에서의 검출 보도 이후 해당 제품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 중국 등 10여개국에서, 특히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관심있는 아시아권 나라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외형보다는 내면의 미를 강조하여 단정하고 깔끔한 몸가짐을 간직하려 하였다. 화려한 화장보다는 피부손질 위주의 단장을 주로 하였는데, 양반계급을 상징하는 하얀피부를 위하여 여성은 물론 남성도 분세수를 하였다 한다. 합성 화학물질이 없었던 옛날에 어떤 소재를 이용하여 화장품을 만들었을지 궁금한데, 주로 천연원료를 사용하였다. 금, 은, 옥, 돌, 나무, 흙, 화초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색조화장, 눈썹화장, 기초화장, 세안 등에 이용하였다. 고려초기 교방의 기생은 백분, 납분, 연지, 향수를 사용하였다.1922년 박가분 발매를 시작으로 여성의 하얀얼굴 화장이 유행하였으나, 납성분 함유로 인한 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화장품의 기원은 종교·주술·의료의 목적으로 고대문명의 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년전 이집트 티니스왕조시대 왕의 부장품에서 화장품이 발견되었고, 투탕가멘왕 무덤에서 향료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절정에 달한 화장은 로마시대에 궁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피부를 하얗게 하고 눈화장을 진하게 하는 화장법이 유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비소를 넣은 화장품이 사용되었다. 화장품의 중금속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하얀 얼굴을 위하여 비소나 납을 함유한 화장품을 만들고, 이로 인한 중독이 문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크롬이나 네오디뮴은 비소나 납처럼 특정 목적을 위하여 첨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크롬은 안료, 착색제 등의 성분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피부를 통하여 흡수되면 피부염, 피부궤양을 일으키고 점막을 헐게 한다. 또한 혈액을 타고 전신에 퍼져 여러 장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특히 6가 크롬은 발암성을 나타내는 유해 중금속이다. 네오디뮴은 건강영향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지만 높은 농도로 단기간 노출될 경우 피부자극, 눈자극, 설사, 간장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화장품관련 법규에서는 유해중금속으로 납, 비소, 수은 이외는 굳이 관리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여타 중금속의 함유 여부를 파악하기 쉽지 않게 되어 있다. 화장품에서 검출되었다는 크롬과 네오디뮴의 건강 영향은 화장품에 함유된 양과 화장품 사용량, 그리고 개인의 감수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의 수많은 클레오파트라들에게 화장품에서 검출된 중금속은 위해성에 문제가 없다는 이모 교수의 주장이 옳은지, 발빠른 소비자의 판단이 옳은지 알려줘야 할 일이다. 김판기 용인대 산업환경보건학 교수
  •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주지 도공 스님). 신라 진흥왕조인 553년 의신 스님이 창건했고 혜공왕조인 776년 진표 율사가 중창한 ‘호서제일가람’이다.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졌지만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1624년에 복원된 사찰.‘법이 머문다.’란 뜻의 법주(法住)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했던 창건주 의신 스님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후학을 양성할 절터를 찾기위해 머물렀다는 연기설화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법상종 종찰의 면모를 유지해 왔으며 지금은 국내 대표적인 미륵도량이자 화엄사찰이기도 하다. 산내암자 11개, 말사 80개를 거느린 주요 본사답게 이런저런 사연이 많지만 아무래도 법주사의 핵심은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다. 흔히 사찰의 탑이라면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을 떠올릴 만큼 나무로 세운 목탑은 생소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원시불교 이래 탑전은 목조의 전통을 유지해 왔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탑의 시원이 목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도 목탑이 세워진 사실이 만복사지 탑지에서 밝혀졌고 조선시대까지 전해져왔음이 각종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법주사 팔상전으로, 이 팔상전은 현재 목조 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1984년까지만 해도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탑의 쌍벽을 이뤘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법주사 경내의 중심에 선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석조 기단위에 5층으로 올린 5층 목탑이지만 내부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한 통간 건물로 되어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사찰 전각 기단은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특히 동서남북에 배치된 계단은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한다. 기단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벽면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했고 불상 앞에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 5층 가운데 1·2층은 5칸,3·4층은 3칸,5층은 1칸으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팔상전이란 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신 전각. 쌍계사.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등의 팔상전에서도 이같은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사찰의 팔상전에 모셔진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한꺼번에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한가운데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각 벽면에 두 폭씩을 배치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팔상도의 8폭을 전부 보기 위해선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팔상도를 따라 돌다보면 결국 가운데 벽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게 되는 셈이다.(지난 1968년 팔상전을 해체수리할 때 심주(心柱) 밑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어 이곳이 불사리를 봉안한 장소임이 확인되었다. 목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처음이다.) 팔상도를 따라 탑돌이를 한 뒤 문을 나서서 지붕을 올려다보면 2층 처마 아래 모서리에 새겨진 난쟁이 모습의 인물과 용 형상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려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친 모습의 난쟁이상이 흥미롭다. 왕방울 눈에 나선형 눈썹과 짙은 수염을 갖고 있는데 부처님을 공양하고 불전을 수호하는 불교 외호신 중 하나라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불사리를 봉안한 탑에 더해 예배 공간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의 내부를 예배공간으로 썼던 기록은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의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이라는 구절에 처음 나타나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사람이 탑 안으로 숨어든다는 것은 탑 내부에 큰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법주사 팔상전이 바로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 형식의 목탑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팔상전은 지난 1968년 해체 보수공사 이후 내부 통풍이 안되고 벽면에 습기가 심하게 차오르는 등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법주사 주지 도공 스님은 “미륵신앙과 화엄사상을 함께 담은 법주사의 중심건물인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 성격과 예배장소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유일한 탑전인데 예산과 보존 처리의 어려움 때문에 훼손되어 가는 문화재를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법주사의 명물들 법주사 경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명물들이 들어서 있다. 팔상전을 비롯해 석련지, 쌍사자석등이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도 12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보물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과 사천왕상, 석련지, 대웅보전, 금동미륵대불은 신도와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문화재들이다. 우선 일주문을 지나 팔상전과 대웅보전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국내 사찰중 가장 큰 규모. 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인데 중앙 통로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 크기의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해 천왕문을 통과하는 이들의 시선을 제압한다. 사리각 옆 암벽에 조각된 전체 높이 6.18m 크기의 마애여래의상도 독특한 불상. 둥근 얼굴과 감은 듯 뜬 눈에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인 추상이 인상적이다. 연꽃 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싼 연봉이 불상을 둘러싸고 발 아래엔 반쯤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석련지는 원래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의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 신라 성덕왕조때 화강석으로 조성됐는데 8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굄을 만들고 다시 굄돌을 올려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무량수의 감로천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 진흥왕때 창건된 대웅보전 안의 불상 3구는 국내 사찰 법당에 봉안된 소조불 좌상중 가장 큰 것.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측에 노사나불(아미타불),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각각 마음, 덕, 육신을 뜻한다고 한다. 최근 개금불사를 마치고 점안식을 가졌다. 팔상전 왼편, 미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금동미륵대불은 국내 최대의 규모.8m 높이의 기단 위에 25m높이로 조성됐는데 소요된 청동만도 160t이나 된다고 한다.
  • ‘경복궁쌀’ 한번 맛보세요 서울 농산물 싸게 직거래

    “서울에서 수확한 농산물 맛보세요.”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서 한가위를 맞아 경복궁쌀과 먹골배 등 서울 외곽 그린벨트 지역 등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직거래 기회를 마련했다. 경복궁쌀은 김포평야와 맞닿은 강서구 일대에서 재배된 쌀로 오대벼 등 고품질 조생종 품종이다. 먹골배는 조선시대 단종이 유배를 갈 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관직을 사직하고 봉화산 아래에서 키우기 시작했다는 유래가 있다. 이름도 중랑구 묵동의 지명을 딴 것으로, 씹을수록 단맛이 나고 당도가 뛰어나다. 농산물 직거래에 대한 신청 및 문의는 농업기술센터 홈페이지(agro.seoul.go.kr)와 전화로 하면 된다.459-6752∼3.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데스크시각] 서울시장님,그거 문화재 되겠습니까? /서동철 공공정책부장

    육조(六曹)거리였던 세종로에서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67년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원군 시대에 부활된 삼군부(三軍府)의 청헌당(淸憲堂)이 남아 있어 옛 체신부의 일부가 들어 있었다. 이 청헌당을 공릉동의 육군사관학교로 옮기고 지은 것이 정부중앙청사이다. 문화재를 몰아낸 자리에 관청 건물을 세운다는 것은 요즘 같은 ‘보존 지상주의’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 정부는 아예 청헌당을 건축자재로 매각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자칫 붐을 이루던 일본인 기생관광용 요정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조선초기 삼군부에서 예조(禮曹)로, 다시 삼군부로 역사를 이어온 터에 중앙청사가 지어지는 과정을 몰문화적 군사정권의 횡포로만 보고싶지는 않다. 개발시대에도 개발시대 나름의 논리는 있게 마련이다. 당시 청헌당 보존과 중앙청사 건립을 국민투표에 부쳤다면 ‘조국 근대화’시대에 걸맞은 현대식 정부청사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질 국민이 아마도 더 많지 않았을까. 요즘 경복궁이 단계적으로 복원되어 옛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면서, 조선시대 육조거리도 복원하면 더욱 훌륭한 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2000년 역사도시 서울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찾기를 바라는 보통사람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이들은 세종로 주변의 정부기관들이 옮겨간 이후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황당한 꿈만은 아니라고 날개를 편다. 물론 문화예술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벌써부터 정부기관이 떠난 세종로는 문화공간과 열린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중앙청사까지 매각해 행정도시 건설비에 충당하겠다는 완강했던 방침에서 한발 물러서 길 건너편의 문화관광부 청사만 매각한다는 수정안을 최근 내놓았다. 문화재로 떠받들어지는 건축물이라고 지을 때부터 후세의 인정을 받겠다고 벼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궁궐도 아닌 관아는 쓰임새에 충실하면 되지 않았을까. 청헌당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조선시대 조정의 관아라는 희소성이 먼저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지금도 날선 듯 치켜올라간 청헌당의 처마선에서 열강의 침략이 가시화되던 시기, 문약(文弱)해진 조선의 분위기를 추슬러 보겠다는 의지를 읽었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깊은 뜻은 몰라도, 중앙청사라도 보존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일단 환영할 만하다. 중앙청사의 보존은 20세기 후반기 대한민국 정부의 ‘물리적 흔적’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조거리가 복원되면 참 멋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흔쾌하지 않았던 것도 한 시대를 조금 더 되살리기 위해 다른 한 시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앙청사는 예술품일 수 없지만 ‘정부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화재라고 생각한다. 개발독재시대 권위주의의 상징이라는 비난은, 한편으로 이 건물에 내포된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같은 차원에서 이조(吏曹)터에 자리잡은 문화부 청사를 팔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아쉽다. 조선왕조에서 대한민국에 이르는 ‘관가(官街)’라는 세종로의 역사성이 훼손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다. 정부청사를 보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도 이렇듯 골치가 아픈데, 고유한 건축양식마저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버린 마당에 상징성있는 관청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다. 21일 아침 서울신문은 서울시가 새청사를 세우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판에 박힌 충고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문화시장’이 되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이것만은 묻고 싶다. “시장님, 새로 짓는 건물이 훗날 문화재가 되겠습니까?” 서동철 공공정책부장 dcsuh@seoul.co.kr
  • 이 거대한 ‘술통’속에선 술 한 방울 마실 수 없다

    이 거대한 ‘술통’속에선 술 한 방울 마실 수 없다

    글 박재곤《산따라 맛따라》저자, www.sanchonmirak.com ’대한민국 술박물관’에는 무려 34,000여 점의 민속주 자료와 전통 술 빚기 도구 등이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다. 안성 서운산의 북쪽자락, 마둔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 313번 지방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스무 살 나이에 3·1독립선언서를 영역, 해외에 보내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 는 논개의 높은 절개를 노래한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선생은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을 남겼다. 명정(酩酊)의 명(酩)은 ‘술 취할 명(酩)이고, 정(酊) 또한 ‘술 취할 정(酊)’이다. 그러고 보면 ‘명정 40년’은 ‘술 취하고 술 취한 40년’이라는 뜻이겠다.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보면 몇 날 몇 밤을 앉은자리에서 꼬박 새우며 술을 마셨다는 얘기부터 배꼽을 잡고 웃어야만 할 ‘술 취한’ 얘기들이 수두룩하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 《山》에 등장하는 등산만화 ‘악돌이’도 이제 40의 나이로 접어 드는데 돌이켜 챙겨보니 어느 한 달 술 안 마셨던 달이 없었다. ‘악돌이’는 만화의 주인공이지만 만화를 그리는 박영래 화백 바로 그 사람이다. 악돌이는 천하에 이름 높은 술꾼이자 산꾼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의 아내는 악처(惡妻. 岳妻)가 되었다. 홍두깨 같은 빨래방망이가 아니면 연탄집게를 하늘높이 쳐들고 남편의 뒤꽁무니를 따라 잡으려 악을 쓰는 악처다. 악돌이는 이 악처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고는 도망을 치듯 산으로 간다. 덕분에 악돌이는 세상이 알아주는 공처가가 되고 말았다. 등산 헬멧을 눈까지 가릴 정도로 깊숙이 내려쓰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계속 범하면서도 어김없이 매달 산행을 하고 어김없이 술을 마신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장마 중의 나흘 동안 경기도 안성땅 서운산 주변을 헤매다가 마지막날 우리는 ‘대한민국 술박물관’이라는 거대한 술독으로 빠져들었다. ‘술박물관’이라는 ‘술독’에서 자꾸 떠오른 인물이 바로 수주 변영로 선생과 악돌이 박영래 화백이었다. ”술도 엄연한 하나의 문화인데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던 ‘대한민국 술박물관’에는 무려 34,000여 점의 민속주 자료와 전통 술 빚기 도구 등이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다. 서운산의 북쪽자락, 마둔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 313번 지방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국호 대한민국을 술박물관 이름으로 쓰고 있다기에 첫 느낌은 ‘지나치구나’ ‘건방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지만 박물관을 둘러보고 박영국(朴泳國. 51) 관장을 만나보고서는 금방 그런 생각의 경솔했음을 뉘우쳤다. 슈퍼마켓과 술 도매점을 운영하며 술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박 관장은 세상에 태어났다가 스스로 무엇 한 가지라도 남겨야겠다는 신념에서 23년 전부터 이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버려진 양조장이나 고물상을 닥치는 대로 뒤져가며 자료를 찾아 다녔다. 고물상에서 술병 하나를 찾으면 2~3일 동안 일을 도와 주고 그 병을 얻어 왔다고 한다. 남들이 하찮게 보는 병마개 하나 얻으려 외진 시골을 찾아가느라 십만 원 정도의 교통비를 뿌린 경우는 부지기수로 꼽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에게 지금은 전국 각지의 고물상이 자료수집의 창구가 되어 있고 돈독한 친분이 쌓이게 되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한 그가 이제사 건물을 북향으로 지어 술병의 상표가 빛에 바래지지 않도록 하는 등 독특한 형태의 2층 건물에 박물관의 문패를 걸었다. 대한민국 술박물관에는 우리 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박물관 1층에는 쳇도리(깔대기)와 소주를 받는 증류기인 소줏고리, 내린소주를 보관하는 기기인 술춘 등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전통 술빚기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두밥을 짓고 발효시켜 청주와 소주를 만들어내는 전통주 제조과정도 한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소주·맥주·와인·양주·전통민속주 등 다양한 술의 광고와 홍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민속주에 대한 기록이 담긴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와 조선시대 술에 대한 예법을 그린 향례합편(鄕禮合編) 같은 희귀본도 소장해 놓았다. 대형 술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는 옥외 전시장에서는 술꾼들의 추억과 흥미를 돋우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전통주를 직접 빚을 수 있는 부뚜막 시설과 발효와 숙성과정을 거치는 술방에서 술빚기 시연을 보고 스스로 체험도 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술통’속에서는 술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 어디까지나 박물관일 뿐, 술을 마시는 주장(酒場)은 아니다. 전시된 34,000여 점의 자료들은 지금까지 모아 온 자료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태산보다도 더 크다며 즐거워하는 박영국 관장. 그는 전통주를 보존 계승하는 일에 계속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이며 술체험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던 원대했던 꿈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주’나 ‘악돌이’같은 당대 최고 주당들의 면면들도 자신의 술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밝혔다. 문의: 031-671-3903     월간 <삶과꿈> 2006.09 구독문의:02-319-3791
  • “조선통신사 납시오”

    조선시대 한·일간 문화첨병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의 선린우호 정신을 기리는 ‘2006 조선통신사 한·일문화교류축제’가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 부산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다양한 행사는 용두산공원내에 마련된 연고지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조선통신사들이 거쳤던 도시인 한국의 충주·안동·의성·경주·밀양·부산과 일본의 쓰시마·시모노세키·구레·시즈오카·히코네·세토우치·도쿄의 관광지 및 특산물이 소개되며 다양한 먹을거리와 전통놀이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조선통신사들의 무사항해를 빌었던 ‘해신제’와 경상좌수사가 통신사들을 위해 베풀었던 전별연이 195년만에 원형대로 재현돼 눈길을 끌고 있다.22일에는 용두산공원 특설무대에서 양국간의 민속춤과 가야금, 샤미센 등 전통악기 연주를 비롯해 설운도 등 인기 대중가수들의 공연이 열린다. 용두산공원 특별전시실에서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간 자매결연 30주년을 기념해 두 도시의 문화와 관광지, 축제, 산업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60여점이 전시된다. 조선통신사의 날인 23일에는 축제의 백미인 통신사 행렬재현 행사가 오후 3시 용두산 공원 및 중구 광복로 일대에서 펼쳐진다. 통신사 재현행사는 당시 동래부사가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식인 접영식에 이어 광복로를 따라 동래부사기수와 군관, 사령, 포졸 등이 행진하는 조선통신사 3사(정사 부사 종사관)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어 오후 7시에는 중구 영주동 코모도호텔 대연회장에서 경상좌수사가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일행을 위해 베풀었던 전별연이 열린다.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 강남주 회장은 “조선통신사야말로 한류의 원류였다.”며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이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민간교류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멸종위기 ‘표범장지뱀’ 서울서 첫 발견

    멸종위기 ‘표범장지뱀’ 서울서 첫 발견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서울환경연합은 지난 4월과 7,8월 서울 노원구와 도봉구에 걸쳐 있는 초안산 일대에서 생태조사를 한 결과 멸종위기종 2급인 표범장지뱀과 맹꽁이를 비롯해 서울시 보호종인 무당개구리, 땅강아지, 제비가 서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표범장지뱀은 길이 15∼20㎝로 등에 호랑이무늬 모양의 얼룩반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 사구나 모래땅에서 드물게 발견되고 있다. 서울환경연합은 초안산에서 표범장지뱀이 서식하는 이유로 이 산에 조선시대 궁인들의 묘가 산재해 있어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하는 뱀이 생활하기 좋고 배회성 거미 등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환경연합 관계자는 “내륙지역에 사는 표범장지뱀은 서해안에서 발견되는 종과 다른 유전적 특징이 있을 것으로 예상돼 생태적, 학술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문화재 숨결을 찾아서] 구 벨기에 영사관

    [문화재 숨결을 찾아서] 구 벨기에 영사관

    지난 9일 관악구 남현동 1059의13 사적 254호 구 벨기에 영사관을 찾았다. 현재 이 문화재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악구청이 관리하며 인근에 있는 백제요지와 효민공 이경직의 신도비와 함께 관악구의 몇 안 되는 문화재이다. 지하철 2호선 사당역 6번 출구에서 불과 50m쯤 떨어진 이곳을 지나가는 행객들은 건물을 한 차례 훑어보고 간다. 빨간 벽돌로 지은 이 유럽식 건물은 현관 앞 두 개 돌기둥과 발코니에 길게 늘어선 돌기둥이 장식품 역할을 해 전체적으로 수려한 느낌을 준다. 서울대 건축과 전봉희 교수는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유럽식 건물도 들어섰지만 그 뒤엔 일본식으로만 짓게 했다.”면서 “구 러시아 공사관 등과 함께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유럽식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구 벨기에 영사관은 원래 중구 회현동 2가 72의2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남현동으로 옮겨졌다. 현재 우리은행으로 합병된 상업은행은 1970년 본점을 신축하기 위해 영사관이 있던 부지를 사들였고 1982년 착공을 하면서 영사관을 옮겼다. 원래 영사관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의 집터였다. 이 집안에서만 12명의 정승이 배출돼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상업은행이 이 부지를 매입한 데는 이 점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사관 건물 소유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영사관으로 쓰인 것은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충무로 1가로 이전하기 전 1918년까지이다. 그 뒤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쓰였다. 광복 후 1970년까지 해군 헌병대 청사였다. 1982년 이전된 뒤 관리가 안 돼 민원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관계자는 “2004년 이명박 전 시장이 우리은행 고위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시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자 우리은행 측이 이를 서울시에 무상임대해 미술관으로 쓰이게 됐다.”고 미술관이 된 배경을 전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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