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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7)] 사회-생활상징(하)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7)] 사회-생활상징(하)

    입고, 먹고 자는 것을 의(衣)식(食)주(住)라 한다. 프랑스에서는 먹는 것을 앞세워 식의주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주라 한다. 그것은 먹고 자는 것에 비해 의생활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입어온 우리의 옷, 한복은 이미 철 지난 패션이 되어 설이나 추석과 같은 특별한 날 입는 옷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삶과 온기가 스며 있는 한복과 온돌같이 자꾸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가 한국의 100대 상징 사업으로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돼 반갑기 그지없다. 한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왠지 고와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 한마디로 매력 만점이다. 우리 옷의 가장 큰 특징은 품새가 넉넉하다는 점이다. 한복은 느슨함이 구조적 생명이다. 풍성하고 헐렁해 한번 입어 맛 들이면 한복만큼 편안한 옷도 없다. 한복은 단순한 옷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다. 서구가 서는 입식문화라면 우리는 앉는 좌식문화이다. 양복은 서는 문화권의 옷이다. 서는 문화권의 옷은 몸에 꽉 끼게 만들어진다. 한복은 그렇지 않다. 옷이 몸에 꽉 맞으면 앉는데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옷 자체의 구조가 좌식생활에 편리하도록 돼 있다. 양복이 입체 재단하는 옷이라면 한복은 평면 재단이다. 양복은 몸에 맞춰 재단을 하기 때문에 몸이 뚱뚱하거나 키가 커지면 체형이 바뀌어 입지 못한다. 하지만 한복은 체형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체형에 따라 맵시가 달라질 뿐이다. 양복이 디자이너에 의해 맵시가 결정되는 옷이라면, 한복은 철저하게 입는 사람 중심의 옷이다. 또한 여성의 한복은 삼각형 라인이다. 삼각 형태는 동양에서 천지인의 완전한 조화를 상징한다. 더욱이 색동옷은 우리만의 독특한 옷이다. 상생의 원리로 배합된 색동옷은 한국인의 뛰어난 색채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겨운 다듬이질’ 한국의 참소리 한복과 다듬이질은 불가분의 관계다. 단순히 옷감을 손질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밤늦도록 다듬이질을 하는 아낙의 정겨운 방망이 소리와 창가에 비친 모습, 달 밝은 가을 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창살에 어린 그림자로부터 흘러나오는 청아한 다듬이 방망이 소리는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정겨운 한국의 소리이다. 거기에 아낙들의 고달픈 시집살이의 한을 달래는 분출구로서도 훌륭했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 강해진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세계 어느 나라 부모들보다도 교육열과 모성애가 강하다고 한다.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와 비견되는 한국 어머니의 올바른 교육상과 자식사랑을 상징한다. 조선 중기에 활약한 석봉은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 연습을 했다. 특히 그가 1583년에 완성한 ‘석봉천자문’은 조선 천자문의 표준이 됐고 왕실과 사대부가 뿐 아니라 전국 각지 서당으로 퍼져 나갔다. 그 뒤에는 끼니를 거를망정 자식의 재질을 키워주기 위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것이 한국의 어머니 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석봉 천자문은 서당에서도 필수과목이었다. 서당은 향촌사회의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초등단계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교육을 맡기는 사숙 또는 독서당의 형태, 문중에서 학계나 학전을 마련하여 운영하는 동계서당의 형태 등 다양했다. 서당은 책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힘쓰는 한국인의 교육적 정서를 잘 보여주는 기초교육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윷놀이·씨름 민족화합 이끌어 우리나라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놀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가 바로 윷놀이다. 윷놀이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실외든 실내든 어디서도 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미와 승부를 함께 맛볼 수 있어 그야말로 신명 나는 놀이이다. 때문에 마을축제로서, 가족간의 화목을 다지는 데도 으뜸이다. 또한 정초에 윷놀이를 통해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고 개인의 운수를 보기도 한다. 윷은 도, 개, 걸, 윷, 모로 각각 돼지, 개, 양, 소,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친밀성과 경제적인 가치를 지녔던 동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윷판은 윷말이 돌아 나오는 양상을 춘분, 하지, 추분, 동지 사계절에 비유하고, 윷판은 음양을 나타내는 천원지방(天園地方)의 우주적인 구조를 표현하는 동시에 28수의 순환을 보여주는 우주관을 담고 있다. 우리 놀이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씨름이다. 씨름은 한자어로는 각저(角抵), 각력(角力), 각희(角戱), 상박(相撲)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본의 스모는 씨름을 의미하는 한자어 상박(相撲)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다. 씨름은 그 역사가 깊어 이미 4세기 고구려 각저총고분에 씨름하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굉장한 구경거리로 정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씨름이 훨씬 대중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우리의 씨름은 경쟁 요소와 전통적인 수련의 의미가 강한 놀이로서 오늘날에도 전승시켜야 할 대표적인 문화상징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뭐라 해도 태권도와 인삼은 외국인에게 한국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태권도는 심신을 단련하고 강인한 체력과 굳센 의지로 자신감을 길러 강자에게 강(强)하고 약자에게 유(柔)하게 하는 그야말로 지덕체와 예가 겸비된 스포츠이다. 그러나 올림픽의 정식 경기종목임에도 태권도는 일본의 스모나 중국의 쿵후처럼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문화산업의 콘텐츠로 개발하여 세계인이 즐기는 태권도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인삼’ 건강·활력·지혜 코드로 인삼(人蔘)은 그 뿌리가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일찍이 국제화되어 불로장수의 명약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호주의 일간지 ‘더 에이지(The Age)’에서 한국산 인삼이 건강·활력·지혜·남성다움의 원천이라고 집중 소개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문화상징 선정으로 한국인삼은 ‘서양의 명약 알로에’에 버금가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웰빙 상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TV 드라마 주몽이 대인기이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고주몽은 활 잘 쏘는 신궁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스포츠에서 양궁은 한국의 메달밭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천부적인 활쏘기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 우리 민족의 활쏘기는 그 역사가 깊다. 전쟁무기로, 사냥도구로, 나아가서 건전한 신체단련과 오락도구로 사랑을 받아왔다.100대 문화상징 계기로 이제는 건전한 국민스포츠로, 정신 수양의 도구로서도 국궁이 널리 보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돌은 좌식문화의 산물 지금은 거의 잊혀가고 있는 것 중 우리 의식주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돌문화이다.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시물 중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코너가 김치와 구들로 된 초가이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난방을 하며, 음식은 어디서 무엇으로 조리를 하는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 설명을 듣고 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을 한다. 난방과 조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우리 온돌문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온돌문화는 의식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초현대적 생활에까지 이어져 온 우리만의 고유 주거문화이다. 온돌은 입식문화를 좌식문화로 바꾸었고, 집안을 보다 청결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좌식문화는 신발을 벗고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내부가 깨끗해진다. 온돌의 문화상징화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를 부활시키는 시도이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
  • ‘조선 족보’ 콜로키움 내일 개최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소장 한영우)는 6일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를 초빙,‘조선시대의 족보’를 주제로 19회 콜로키움을 연다. 미야지마 교수는 안동 권씨 가문의 족보를 분석한 ‘양반’이라는 저서를 통해, 상식과 달리 조선후기 양반층은 몰락한 게 아니라 소농층이 편입하면서 대거 확대됐으며 양반층의 몰락은 산업화가 시작된 60년대에나 이뤄졌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사회·생활상징(중)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할 때 일본은 날(生)문화, 중국은 불(火)문화, 한국은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는다. 대표적인 것이 생선회이다. 소나 돼지처럼 네발 달린 동물을 주로 먹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라 한다. 중국 음식은 거의가 높은 온도에 순간적으로 데치거나 튀겨 먹는다. 물론 이는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비빔밥- 조선 3대음식중 하나로 멋·맛 듬뿍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일본처럼 날 것을 먹거나 그렇다고 중국처럼 전적으로 튀겨 먹거나 데쳐 먹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음식은 비빔밥처럼 여러 가지를 섞었을 때 본래의 재료와는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그래서 한국 문화를 비빔밥 문화라 한다. 이 같은 삼국의 문화 차이는 집과 탑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듯이 집들의 재료도 하나같이 나무를 써 집도 깔끔하고 반듯하다. 그래서 탑도 목탑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의 전통 집들은 거의가 불로 구운 벽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탑도 구운 벽돌로 만든 전탑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우리나라 집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나무, 돌, 벽돌을 두루 써 탑도 목탑, 석탑, 전탑 등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문화는 한마디로 다양한 문화가 섞인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특징처럼 비빔밥은 쌀과 달걀, 참기름, 나물, 쇠고기, 김 등 온갖 재료를 넣어 고추장에 비벼 먹는 복합음식이다. 비빔밥의 특징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가격에 비해 영양과 내용물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특별히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없고 또 저 열량이면서도 맛과 멋의 흥취를 느낄 수가 있어, 기능성 식품 또는 다이어트식품으로도 개발이 가능하다. 비빔밥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주비빔밥이다. 전주비빔밥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하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산물의 사용과 거기에 장맛과 깊은 정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전주비빔밥에 포함되는 자료는 무려 30여 가지에 이르며, 모두 음양오행에 근거를 두고 오색오미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후기 고추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음식문화에 혁명을 가져온다. 강렬하고 매운 맛의 고추장은 김치와 함께 한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와 소스는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고추장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음식이다. 정작 고추를 우리나라에 전한 일본도 먹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도 부족해 매운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다. 맛 중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매운맛이라 한다. 그래서 고추장과 김치는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잊지 못한다. 고추장은 강렬한 맛으로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이를 이용한 비빔밥은 물론 각종 반찬과 국, 찌개, 심지어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사용범주는 반찬 가지 수 만큼이나 무한하다. ■ 된장 -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정수 김치와 밥처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된장이다. 거기에 항암효과까지 있다하여 웰빙 식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마디로 된장은 식물성 단백질문화의 정수이다. 장맛은 그 집안 음식 맛의 척도다. 그래서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 난다.’,‘장맛 보고 딸 준다.’고 했다.‘동의보감’에 의하면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된장의 주원료는 콩이다. 우리는 콩으로만 된장을 만드나 일본에서는 콩과 쌀누룩으로 빚는다. 만주어로는 장을 미순이라 하고, 우리는 메주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이를 미소라 부른다. 장은 고구려 때부터 있어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의 장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의 된장, 미소가 된다. 우리가 즐겨먹는 청국장은 삶은 콩을 짚에 감싸서 온돌 방의 뜨끈한 아랫목에 모셔놓고 발효시킨 ‘즉석된장’이다. 볏짚에 붙어 있는 야생 고초균이 번식하여 실 모양의 끈끈한 점물질을 생성하여 일종의 항생물질이 된다. 장기적으로 먹는 저장식품인 된장과는 달리 즉석된장이지만 그 영양가와 항암효과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 김치 - 한국문화 상징 ‘미래의 식품’ 이제 김치를 빼놓고 한국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김치하면 한국, 한국인하면 김치라 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상징이 되었다. 김치는 배추김치를 비롯해 무김치, 오이김치, 해조류 파김치 등 가지 수가 무려 187종이나 된다. 김치의 독특한 맛과 영양학적 가치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많은 국내외의 영향학자들에게 ‘미래의 식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욱이 조류독감이나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빠른 속도로 세계인의 음식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김치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 마늘, 파,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버무려 담가놓고 먹는 반찬이다. 김치에 있는 고추를 먹으면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에 의해 몸의 많은 에너지를 사용토록 하여 체지방을 분해시킨다. 고춧가루가 범벅인 김치를 오래 먹으면 자연히 다이어트가 된다. 또한 김치는 담근 직후보다도 완전히 익었을 때 비타민이 가장 많이 함유된다고 한다. 그래서 김치는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철 비타민 A,B,C 등의 공급원으로, 김치에 첨가된 부재료와 함께 다양한 영양성분을 공급해 주는 한마디로 종합 영양식품이라 할 수 있다. 불고기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맛이 있어 누구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불고기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때 고기구이인 맥적(貊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어 역사가 아주 길다.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음식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도 있지만 우리처럼 양념에 저민 고기를 불로 연기를 내며 구워 먹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 삼계탕- 여름철 보양식의 백미 우리나라처럼 음식종류가 다양하고 철에 따라 체질에 따라 달리 먹는 나라도 없다. 여름철의 보양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계탕이다. 삼계탕은 100일쯤 자라 볏이 돋아 제 빛을 띠어갈 무렵에 영계를 잡아 뱃속에 수삼, 마늘, 대추, 찹쌀 등을 넣어 배를 실로 아물려놓고 푹 끓여 먹는다. 삼계탕에는 허한 기를 보충해주는 인삼, 몸속의 혈액을 보족해주는 보혈(補血)식품인 대추, 양(陽)이 허한 것을 보해주는 보양식품인 닭고기 같은 요소들이 음양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궁합을 맞춰 몸에 더 좋다. ■ 냉면 - 담백·고상한 민족적 풍미 삼계탕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 것이 냉면과 자장면이다. 냉면은 겨울철에는 이열치열의 음식으로, 여름철에는 그 자체 시원한 국수 맛으로, 가히 사계절음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로 뽑은 면발을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찬물에 바로 씻어내 국수사리를 만든다. 여기에 육수를 부으면 물냉면, 비벼서 먹게 되면 비빔냉면이 된다. 소고기, 돼지고기, 김치, 배, 파, 마늘, 깨소금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냉면은 뛰어난 맛과 높은 영양가, 고상한 민족적 풍미로 입맛을 돋운다. 국수를 주재료로 한 음식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도 많지만 냉면처럼 영양가가 복합적이고 담백한 맛을 내는 국수는 많지 않다. 소주와 막걸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 대중·서민문화를 상징한다. 소주는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뜻으로 증류방식에 의해 만든 술로서 노주(露酒)·화주(火酒)·한주(汗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하기 위해 고려 왔을 때 전해졌다고 한다. 소주는 특히 몽골의 주둔지이던 개성, 전진 기지가 있던 안동, 제주도에서부터 소주 제조법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막걸리는 한국에서 개발된 전통술로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도수가 낮으며 탁주(濁酒)·농주(農酒)·재주·회주라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이화주(梨花酒)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배꽃이 필 무렵 누룩을 만든데서 유래되었다. 막걸리는 술밥에다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오지그릇 위에 #자 모양의 체다리를 걸치고 체로 막 걸러 만들었다. 막걸리라는 이름은 ‘막걸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 협찬: 삼성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충주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충주길

    문경새재 넘기가 숨이 차기는 찼던 모양이다. 제3관문을 넘어 산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마을이 나온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고사리마을. 조선시대 충청도로 접어드는 영남대로의 첫 숙박지 신혜원(新惠院)이 있던 곳이다.17∼18세기에는 주막만 100여가구가 될 정도로 많았으나 광복후에 자취를 감췄다.3관문을 지나 2㎞쯤 밑에 있는 고사리는 새재 7∼8부 능선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주민 이종언(73)씨는 “옛날에 제1관문과 대안보에 역촌이 있었는데 상놈이 많다며 양반들이 두곳을 피해 ‘고 사이에서 잠을 자고 가자.’고 하면서 ‘고사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고 전했다. 마을에는 말을 재우며 묶어놓았던 마방터가 있었으나 10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현재 민박집이 있고 이 집 유리문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진 ‘마방터’라는 글씨만이 옛날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단한 나그네들의 쉼터 고사리 마을 1914년까지 이 마을은 연풍현(군) 고사리면이었다. 산속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상당히 번화했음을 알 수 있다. 면사무소가 있던 터에는 한 기독교인이 철제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세월이 꽤나 흘렀는지 녹이 슬어 있다. 마을 안으로 폭 2m쯤 되는 길이 나 있다. 이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에 갔다가 경호원을 따돌리고 혼자 문경새재를 넘어 이곳을 거쳐 충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귀경한 직후 도로포장을 지시, 공사가 시작됐으나 갑작스러운 서거로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고 김옥길씨가 이 마을에서 은거하기도 했다. 공사가 중단된 얼마 후 김씨의 별장을 찾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같은 사연을 듣고 도로를 완공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부인 홍기 여사가 김씨의 별장에 머물자 이곳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별장은 길 옆에 있다. 대문 양쪽에 ‘금란서원(金蘭書院)’과 ‘이화학당’이라고 새긴 문패가 달려 있다. 지금은 이화여대 수련원으로 쓰인다. 마을 밑에 이 대학 대형 수련원도 있다. 이 마을에서 문경장은 40리, 충주장은 61리이다. 이씨는 “어릴 적에 장날이면 걸어갔는데 충주장보다 문경장을 더 많이 다녔다.”고 회고했다. 관광지로 변한 이 마을 산기슭 여기저기에는 외지인들이 지은 펜션이 들어차 있다.20여가구 주민들은 관광객과 문경새재 신선봉을 찾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점과 상점을 열고 있다. 마을에서 내려오던 길은 다시 높아지며 작은새재(소조령)에서 이화령쪽으로 뻗어나온 국도 3호선과 만난다. ●냉천에서 목 축이고 수안보로 고사리 길이 소조령과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자 충주시 수안보면 화천리 사시마을이 나온다. 지난해 4월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는 ‘냉천(冷泉)’이 있다. 주민들은 ‘찬물내기’라고 부른다. 주민 김지연(84)씨는 “길(국도 3호선)을 넓히면서 샘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면서 “냉천의 전설까지 명맥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평생 약초를 캐 살아가던 노인이 삶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이 옹달샘에서 선녀와 동자가 ‘이곳에 한양가는 길이 나고 목마른 행인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노인은 이 물로 농주(濃酒)를 빚었고 이를 얻어 마신 한 유생이 이를 ‘냉천’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이후 영남대로가 나면서 마을에는 목을 축이고 가려는 행인들이 줄을 이어 마방과 주막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2㎞를 채 안 내려와 ‘대안보’ 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 ‘안부역’이 있던 곳이다. 수안보보다 커 대안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역(驛)은 말만 갈아타는 곳이고 원(院)은 말도 바꿔타고, 잠까지 자던 곳이다. 마을 주민 허남순(83)씨는 “지금은 마을 옆으로 큰 도로가 났지만 옛날에는 마을 한가운데로 난 게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이었다.”고 내려오는 얘기를 전했다. 이 길은 마을 안에 있는 구릉 위를 오솔길처럼 지나는 형태로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회관 도로 옆에는 공덕비 등 비석 여러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옛길에 늘어섰던 것을 마을회관을 신축하면서 주민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길경택 충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당시 이 길로 행인들이 많이 다니다보니 현감 등이 자기 공적을 자랑하려고 비를 많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마당처럼 넓은 바위 천하명당 ‘패랭이번던’ 대안보에서 2㎞ 더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가 있다. 당초 ‘물탕(온천이 나오는 샘)’만 있었던 거리였다. 수안보 전문 향토사학자 조일환(70)씨는 “수안보가 대안보보다 커진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됐다.”면서 “일제가 수안보 온천을 개발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충주시내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수안보면 수회리가 나타나고 도로변에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이 산이 ‘패랭이번던’이라고 불리는데 유래가 재미있다. 번던은 ‘언덕’을 의미한다. 조선 명종 때 한 지관이 충주에 머물다 꿈에 선인을 만나 따라간다. 선인은 이 마당바위에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서쪽 산을 가리킨 뒤 구름을 타고 날아가버리면서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지관은 선인이 가리킨 방면으로 가다 이 바위에 패랭이를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발견하고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를 보고 몰려든 행인들이 ‘패랭이번던’이라고 불렀고 이 길을 지날 때면 경치를 구경하며 쉬어가곤 했다. 이 산은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주민들은 이 바위가 국도 3호선 확장공사로 절반쯤 잘려나갔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길 실장은 “산림종자연구원 안의 ‘서유돈 불망비’가 새겨진 바위가 마당바위”라고 확인해줬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접근이 쉽지 않다. 서유돈은 조선조 현감이다. 이 바위 앞으로 영남대로가 지나갔었다. 1950년대까지 주막 3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국도 3호선이 생기면서 완전 폐쇄됐다. 길 실장은 “행인들이 많이 지나는 큰 길이어서 선정비를 새겨 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당바위 앞과 중앙경찰학교 등을 지난 옛길은 국도 3호선과 겹치거나 갈라지면서 충주시내로 들어간다. 글 사진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난동부리는 사람 곤장 30대씩 쳐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거나 길거리에서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은 서른대의 볼기를 치고 관청에 보고한다.” 1700년대 관청에서 고사리면 온정동(수안보온천)과 관련해 승인한 동규절목(洞規節目·향약)의 한 대목이다. 주민들이 8개 항목의 이 향약을 만들어 관에서 허가를 받아 시행할 정도로 질서가 문란했음을 보여준다. 향토사학자 조일환씨는 “당시에는 온천이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수안보가 대형 병원역할을 했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부모께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사람은 법적 조치한다.’‘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경멸하면 서른번 볼기를 친다.’‘남녀간에 분수를 모르면 볼기를 친다.’는 것 등이 있다. ‘소나무를 마구 베거나 산불을 내면 마을에서 볼기 서른대를 친다.’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조씨는 “환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지만 숙박집이 부족해 노숙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난방이나 밥을 해먹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면서 산들이 모두 벌거숭이로 변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관인’이 선명히 찍힌 동규절목 원본은 수안보면 온천1구사무소에 보관돼 있고 기념비도 물탕공원에 설치됐다. 수안보는 18세기 초 안보뜰에 보(堡)가 축조되면서 그 안쪽을 물탕거리라고 해 ‘물안보’로 불렸다가 ‘물’이 ‘수’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한 걸인이 이곳으로 추위를 피해 왔다가 피부병이 나은 것을 보고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때부터 수안보온천이 기록에 나타나고 태조와 숙종 등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녀탕이 따로 만들어진 것은 1885년에 이르러서였다. 현재 수안보에는 호텔과 콘도가 3개씩 있고 여관 등 숙박업소 21개, 욕탕 2개가 영업을 하고 있다. 조씨는 “동규절목은 영남대로상 교통의 요충지로 온천창과 온정원이 설치됐을 정도로 수안보온천이 큰 영화를 누렸음을 방증하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다른 온천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해외여행 선호 등으로 갈수록 찾는 이들이 줄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충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궁중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주말을 이용, 성큼 다가온 가을 정취를 느껴보자. 멀리 나가지 않아도 가족과 함께 가을을 느끼면서 문화 행사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풍성하다.●왕가 전통의상 입고 사진 `찰칵´ 궁중에서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희궁을 거니는 왕과 글 공부를 하는 왕세자, 다도를 즐기는 구중궁궐 사람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서울시가 마련한 궁중의례 재현행사 ‘경희궁, 궁중의 일상’. 이 행사는 이달부터 다음달까지 매주 토·일 오후 2시부터 3시30분까지 경희궁에서 열린다. 왕이 기침해 대비에게 문안을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왕실의 다례, 왕가의 산책, 왕세자 교육과정 등으로 꾸며진다. 재현행사가 끝나면 왕가의 전통의상을 입고 숭정전 내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조선시대 무예도 빼 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숭례문 광장에서 조선시대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쳤던 왕궁수문장 24반 무예가 시연된다. 무예시범 역시 이번 주말부터 다음달까지 매주 토·일 오후 2시에 숭례문 광장에서 열린다.●지하철 역사서 즐기는 북남미 민속음악 서울도시철도공사는 가을의 서막을 여는 라이브 공연을 선보인다. 9월 한 달간 역사 곳곳에서 포크송 라이브 공연과 색소폰 연주, 북남미 민속음악 공연이 펼쳐진다. 이들 공연은 24개 역사에서 104회나 열릴 예정이다. 눈길을 끄는 공연은 2일 오후 4시부터 고속터미널역에서 진행되는 혼성 3인조 아파치(Apache)의 공연이다. 먼 옛날 북아메리카의 광활한 자연을 표현한 민속음악으로 독특한 허밍과 리듬이 색다른 매력이다. 또 매주 금요일에는 이수역 상설공연무대에서는 금요음악회가 열린다. 오후 6시부터 2시간가량 열리는 금요음악회에서는 발라드와 세레나데를 들으며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유림 속 한자이야기] 提調(제조)

    儒林 (664)에는 ‘提調’(통솔할 제/고를 조)가 나오는데,‘조선시대에 雜務(잡무)와 技術(기술)계통 機關(기관)에 兼職(겸직)으로 任命(임명)되었던 고위 관직’을 이른다.異字同音語(이자동음어)에는 ‘制條:제정(制定)된 조규(條規)’‘製造:큰 規模(규모)로 物件(물건)을 만들거나 原料(원료)에 人工(인공)을 가하여 精巧品(정교품)을 만듦’‘啼鳥:우는 새, 또는 새의 울음소리’같은 것들이 있다. ‘提’자는 ‘들다’라는 뜻을 나타냈으나 그밖에 ‘끌다’‘들다’‘걸다’‘거느리다’‘던지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참고적으로 是는 해를 향하여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을 통하여 ‘똑바로’의 뜻을 나타냈으나 후에 ‘옳다’의 뜻으로 널리 쓰였다.用例(용례)로 ‘提供(제공:갖다 주어 이바지함),提起(제기:의견이나 문제를 내어놓음),提携(제휴:행동을 함께하기 위하여 서로 붙들어 도와줌)’같은 것들이 있다. ‘調’자는 ‘言’(언)과 ‘농작물이 빼곡히 들어선 밭’의 상형인 ‘周’가 어울려 ‘잘 어울리다’란 뜻을 나타냈다. 후에 ‘맞다’‘길들이다’‘속이다’‘뽑히다’‘고르다’‘살피다’같은 뜻이 派生(파생)했다.‘調練(조련:군사를 훈련함),調味(조미:음식의 맛을 알맞게 맞춤),調査(조사:사물의 내용을 명확히 알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보거나 찾아봄)’등에 쓰인다. 조선시대에는 기술 계통의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나 기구에는 자체의 首長(수장)이 아닌 사람이 兼職(겸직)으로 임명되어 指揮(지휘)監督(감독) 임무를 수행하였다. 보통 종1품, 또는 2품의 品階(품계)를 가진 사람을 임명하는데, 이를 提調(제조)라고 하였다. 중요한 업무를 관장하는 곳에는 提調 위에 正一品(정일품)의 都提調(도제조)를 임명한다.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機構(기구)에도 도제조와 제조 및 부제조를 두었다. 事大(사대)와 交隣(교린)에 관한 문서를 管掌(관장)하고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 실무 교육을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 국가의 祭祀(제사) 諡號(시호) 籍田(적전)과 勸農(권농) 屯田(둔전) 敎樂(교악) 등의 일을 관장하는 봉상시(奉常寺), 왕실의 譜牒(보첩)을 관리하는 종부시(宗簿寺),宮中(궁중)음식과 生活瓷器(생활자기)를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 궁중의 醫藥(의약)을 관장하는 내의원(內醫院),兵器(병기)의 제조 등을 관장하는 군기시(軍器寺),軍糧(군량)을 관리하는 군자감(軍資監), 번역·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京鄕(경향)의 선박과 군함의 관리를 맡아본 전함사(典艦司),宗廟(종묘)의 守衛(수위)를 맡아보던 종묘서(宗廟署), 사직단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와 東園秘器(동원비기:왕실에서 쓰던 관)를 관리하는 장생전(長生殿),大同米(대동미)와 大同布(대동포) 등의 출납을 관장하는 선혜청(宣惠廳),都城(도성) 내의 治水(치수)를 관장하는 준천사(濬川司),首都(수도) 警備(경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軍國機務(군국기무)를 관장한 文武(문무) 合議機構(합의기구)인 비변사(備邊司), 궁성과 도성의 修築(수축)과 消火(소화)를 담당한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등이 도제조와 제조의 직제를 두었던 곳이다. 宮人(궁인)인 尙宮(상궁)에도 提調가 있었다.內殿(내전)의 御命(어명)을 받드는 으뜸 위치에 있는 제조상궁(提調尙宮), 내전의 별고(別庫)를 관리하는 부제조상궁(副提調尙宮) 등이다. 김석제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이주일의 어린이책]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와 함께 박물관에 가본 부모라면 한번쯤 난감함을 느꼈을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본 듯한 유물들인데 어떻게 설명하고 감상해야 할지 갑갑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여기 고려청자 있네. 교과서에서 봤지?”라며 얼렁뚱땅 넘어가기 쉽다. 15년째 역사를 가르쳐온 장콩선생(장용준 함평고 역사교사)이 쓴 ‘박물관 속에 숨어 있는 우리 문화이야기’(살림 펴냄)는 박물관에서 느끼는 이같은 갈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다. 정치·사회사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교과서에서 벗어나 실제로 접하는 유물·유적을 중학생 수준의 눈높이로 바라본다. 박물관의 어려운 설명문을 보며 지루해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저자는 ‘옛 그림편’‘옛 도자기 금속공예편’으로 나눠 박물관 체험을 통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게 풀어낸다.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2학년인 ‘참치’와 ‘늘보거북’의 질문에 ‘장콩선생’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유물로 선정된 과정과 발굴 당시 이야기, 모양과 색깔 등 미적인 부분까지 친절한 답변을 통해 학생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선사시대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김정희의 세한도까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서 삼국시대 금동반가사유상, 조선시대 달항아리까지 풍우한 실물 사진들과 함께 퀴즈를 푸는 형식의 대화가 눈길을 끈다.특히 유적이나 유물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나도야! 역사탐정’ 코너도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저자는 “문화유산을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우리 정신과 문화를 아끼게 된다.”면서 “유물은 고리타분하며, 국사는 지루한 암기과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밝혔다. 각 1만 2000원.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4) 강역·자연상징(하)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4) 강역·자연상징(하)

    어느 민족이건 그 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동식물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식물은 무엇일까. 우선 많은 사람들은 소나무를 떠올릴 것이다. 소나무는 1940년대만 하더라도 전체 산림면적의 60%를 차지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수종이었다. 즉 우리나라 어디서도 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전근대 시대 소나무는 난방용으로 가장 뛰어난 장작이었고, 관솔 가지는 조명용으로, 목재는 건축과 조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먹을거리와도 관련이 깊다. 솔잎으로 만드는 송편, 한약재로 쓰이는 송진에서 기근이 들었을 때 요긴했던 솔잎가루와 소나무껍질까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삶과 깊은 인연을 가진 대표적 식물이 소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철 푸르른 소나무에 우리 민족은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라는 의미를 부여해 왔다.“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고 애국가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신성한 영물 호랑이 동물 가운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로 이용되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고대로부터 호랑이는 신성한 영물이었으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산신이나 산신의 사자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남아 있는 산신도 가운데 꼬리를 소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 구름까지 닿게 하는 호랑이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던 호랑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요즈음 소나무 숲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와 그 결과 발생하는 소나무 재선충과 솔잎혹파리 등 열대성 병해충 때문이라고 한다. 호랑이와 소나무 숲의 감소가 우리 민족의 기상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마저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빛나는 과학기술 측우기 현재는 과학기술의 시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 과학기술의 전통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측우기와 물시계, 해시계일 것이다. 측우기는 하늘이나 기후를 경험적으로 살피던 것에서 벗어나 수치에 입각하여 기상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장비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또 다른 발명품으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해시계가 있다. 한자를 풀이하자면,“하늘을 우러르는 솥에 비추는 해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인류가 가장 먼저 발견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해시계이다. 지면에 막대기만 꽂으면 그림자가 생겨 시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앙부일구는 단순히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절기까지 알려주는 정밀한 시계였다. 앙부일구의 안쪽 면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위선(緯線)과 시각을 나타내는 경선(經線)이 그어져 있다. 태양은 지축을 기준으로 23.5도 기울어져 운행하기 때문에 해 그림자의 길이는 계속 변하게 된다. 세종대의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태양 빛을 받는 면을 오목하게 해서 절기까지 표현할 수 있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측우기와 앙부일구가 가지는 과학기술사적 의미는 그것이 단순히 세계 최초의 발명품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는 한성의 중요 궁궐과 관서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여러 곳에 설치되어 이용되었다. 특히 앙부일구는 휴대용으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일찍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널리 보급되어 활용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가운데 천상열차분야지도도 빼놓을 수 없다. 전근대시대에는 천문현상을 아는 것이 왕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 세워진 조선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문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많은 별들을 새로이 관측해서 위치를 정하고 별자리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조선 태조에게 고구려 때 돌에 새겨 만든 천문도를 탁본한 것을 바쳤다. 그러나 이 고구려 천문도는 연대가 오래되어 조선시대의 하늘과는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 이에 조선초기 서운관에서 새로이 천문을 관측하여 만든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고구려 천문학의 전통을 조선시대에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은 조선 나름의 독자적 천문학 확립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세종은 간의, 혼천의, 일성정시의 등의 장치를 두고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 칠정산이라는 우리나라 독자의 역법서였다. 칠정이란 해와 달, 그리고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말하는데, 이들 7개 별의 운행을 계산해 놓은 책이 칠정산이다. 천문 관측과 시계의 제작은 서로 상보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모두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발전해온 것들이다. 조선(造船) 기술의 상징 거북선 민족의 상징은 무엇보다도 전통이 있어야 한다. 전통이란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우리의 전통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조선기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고려는 원나라와 연합하여 원종과 충렬왕대에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선 적이 있다. 이때 유명한 가미카제(神風)를 만나 원정군의 군선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독 고려에서 만든 배는 파손 정도가 경미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조선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이러한 한선(韓船)의 우수한 전통을 이은 대표적인 배가 거북선이다. 거북선의 전통은 고려시대로 소급된다. 고려는 11세기부터 함경도 지방 여진 해적을 방비하기 위해 과선(戈船)이라는 특수한 군선을 만들었다. 과선은 여진족들이 배 안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뱃전에 짤막한 창을 꽂은 배였다. 이 뒤에도 여진 해적이나 왜구를 막기 위해 창이나 칼을 꽂은 검선(劍船)은 계속 만들어졌는데, 개판 위에 칼과 송곳을 꽂은 것으로 보아 거북선은 고려시대 과선과 검선의 후계자임이 분명하다. 다만 거북선은 대형이고, 검선과 과선은 소형 선박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거북선은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것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의 주력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3척밖에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투는 판옥선이 담당했다. 거북선과 판옥선은 장단점을 각기 공유하고 있는데, 거북선은 방탄이 잘되어 있고 적의 접근을 방지할 수 있어 전투 초기의 돌격선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덮개로 인해 공간이 좁아 많은 인원의 승선이 불가능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 추격전에 불리하며, 노꾼과 전투원이 섞이게 되어 전투원의 활동이 원활치 않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거북선은 상징이다. 우리 한선 내지 군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 상징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최무선의 등장 이후 여말선초부터 우리 수군은 대포와 같은 중화기를 이용했다. 그런데 일본은 육전용 경화기는 사용했지만, 해전용 중화기는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일본 군선의 주재료가 삼나무로, 함포 사격으로 인한 엄청난 반동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약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 군선을 부딪쳐 깨뜨리는 전법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소나무로 만들어진 조선의 군선이 일본 군선보다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세계조선소 순위 10위 안에 한국 조선소가 7개가 들어가고, 더욱이 세계 5위까지의 조선소는 모두 한국 조선소라고 한다. 가히 조선 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굳이 신라 때 장보고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의 배 건조 실력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적 상징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진돗개· 한우· 수원화성 그리고 IT 이 외에도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강역 및 자연상징에 진돗개와 한우, 수원화성과 정보통신(IT)이 뽑혔다. 모두 한국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4개의 선정에는 대표성 외에도, 어떤 절박함이 들어있는 것 같다. 현대는 생명산업(BT)과 정보통신산업의 시대이다. 세계적인 종자전쟁에서 우리의 우수한 종자를 다수 확보해야 하고, 과학기술의 전통이 미약한 가운데 정보통신사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신견(神犬)으로 불리는 진돗개와 훌륭한 맛의 한우, 정조대의 과학기술이 집대성된 화성의 선정에는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어 보인다. 이정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Zoom in서울] 왕십리 ‘변신의 해’

    [Zoom in서울] 왕십리 ‘변신의 해’

    서울 성동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낙후지역의 대명사였던 왕십리가 대변신을 시도한다. 민자역사와 초고층빌딩, 가로정비를 통한 제2대학로 조성 등으로 젊은 도심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27일 성동구(구청장 이호조)에 따르면 내년 4월 민자역사 완공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왕십리 일대 개발사업이 연차적으로 마무리된다. ●한양대 앞을 젊음의 거리로 행당동 19 일대 4만 5000여평에 대해 현재 ‘환경정비형 지구단위계획’을 수립중이다.2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환경정비사업 등을 벌이게 된다. 특히 한양대∼동마중학교간 사근동길 460m가 시범가로로 지정돼 폭 20m로 확장된다. 전선 지중화 등을 통해 전봇대를 없애고, 거리와 건축물 외관정비 등을 통해 바뀌게 된다. 성동구는 사업의 빠른 추진을 위해 건물소유주, 영업주, 한양대, 구의원, 동장 등으로 주민협의체를 구성키로 했다. ●행당동 도시개발사업 실시설계 행당동 87-4 일대는 소규모 무허가 공장들이 밀집돼 있던 지역으로 도시개발 방식으로 복합개발하는 사업.2만 2666평 규모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부터 어린이공원, 성동구보건소 등이 들어서게 된다. 오는 2008년말 완공을 목표로 현재 실시설계 중이며 내년초 보상을 마치고, 하반기에 착공을 하게 된다. 한국토지공사가 시행을 맡았다. 성동구와 토지공사는 이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성동경찰서의 이전 협상을 벌이고 있다. 경찰서측이 “지은 지 20년이 안 됐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지만 이전부지 문제만 타결되면 의외로 쉽게 이전이 이뤄질 것으로 성동구는 전망하고 있다. ●왕십리 민자역사 내년 4월이면 완공된다. 지상 8층 연면적 2만 6000여평 규모로 대형 복합시설로 개발된다. 왕십리역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4개 노선의 환승역(지하철 2·5호선, 국철, 분당선)인 데다가 인근에 뉴타운과 행당도시개발사업, 한양대 주변 정비사업 등이 마무리되면 왕십리의 변신에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왕십리는 성동구 하왕십리와 행당동 일대의 왕십리역과 왕십리로터리 부근을 말한다. 성동구의 중심지이만 낙후된 지역의 대명사였다.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태조의 지시로 천도를 위해 지금의 왕십리 일대에 와서 한 농부에게 묻자 ‘십리만 더 가라(往十里).’고 해 오늘의 서울도심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을 왕십리라 불렀다고 한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Zoom in 서울] 왕십리 ‘변신의 해’

    [Zoom in 서울] 왕십리 ‘변신의 해’

    서울 성동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낙후지역의 대명사였던 왕십리가 대변신을 시도한다. 민자역사와 초고층빌딩, 가로정비를 통한 제2대학로 조성 등으로 젊은 도심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27일 성동구(구청장 이호조)에 따르면 내년 4월 민자역사 완공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왕십리 일대 개발사업이 연차적으로 마무리된다. ●한양대 앞을 젊음의 거리로 행당동 19 일대 4만 5000여평에 대해 현재 ‘환경정비형 지구단위계획’을 수립중이다.2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환경정비사업 등을 벌이게 된다. 특히 한양대∼동마중학교간 사근동길 460m가 시범가로로 지정돼 폭 20m로 확장된다. 전선 지중화 등을 통해 전봇대를 없애고, 거리와 건축물 외관정비 등을 통해 바뀌게 된다. 성동구는 사업의 빠른 추진을 위해 건물소유주, 영업주, 한양대, 구의원, 동장 등으로 주민협의체를 구성키로 했다. ●행당동 도시개발사업 실시설계 행당동 87-4 일대는 소규모 무허가 공장들이 밀집돼 있던 지역으로 도시개발 방식으로 복합개발하는 사업. 2만 2666평 규모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부터 어린이공원, 성동구보건소 등이 들어서게 된다. 오는 2008년말 완공을 목표로 현재 실시설계 중이며 내년초 보상을 마치고, 하반기에 착공을 하게 된다. 한국토지공사가 시행을 맡았다. 성동구와 토지공사는 이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성동경찰서의 이전 협상을 벌이고 있다. 경찰서측이 “지은 지 20년이 안 됐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지만 이전부지 문제만 타결되면 의외로 쉽게 이전이 이뤄질 것으로 성동구는 전망하고 있다. ●왕십리 민자역사 내년 4월이면 완공된다. 지상 8층 연면적 2만 6000여평 규모로 대형 복합시설로 개발된다. 왕십리역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4개 노선의 환승역(지하철 2·5호선, 국철, 분당선)인 데다가 인근에 뉴타운과 행당도시개발사업, 한양대 주변 정비사업 등이 마무리되면 왕십리의 변신에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왕십리는 성동구 하왕십리와 행당동 일대의 왕십리역과 왕십리로터리 부근을 말한다. 성동구의 중심지이만 낙후된 지역의 대명사였다.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태조의 지시로 천도를 위해 지금의 왕십리 일대에 와서 한 농부에게 묻자 ‘십리만 더 가라(往十里).’고 해 오늘의 서울도심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을 왕십리라 불렀다고 한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감사원 확인… 궁중인장 훼손 심각

    감사원 확인… 궁중인장 훼손 심각

    정부가 나라의 상징인 국새(國璽)를 새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정작 조선시대에 쓰여진 국새는 모조리 잃어버리는 등 문화재 관리가 한심한 수준인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국새는 조선시대 국가적 행사를 치르는데 필수적이었던 상징적 유물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감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조선시대 국새가 몇 과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사원은 지난해 11∼12월 문화재청 등 10과 기관에서 ‘문화재 지정·관리실태’를 감사한 결과를 24일 발표했다. 감사 결과 조선시대에 제작·사용된 국새는 왕권승계 및 외교문서에 사용한 옥새(玉璽) 13과와 일반 공문서에 쓴 26과 등 모두 39과였다. 하지만 왕권승계 등에 쓰인 옥새는 조선왕조가 처음 만든 ‘조선국왕지인’을 포함해 모두 분실됐고, 일반 공문서용 21과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71년 각 고궁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인장을 정리해 발간한 ‘고궁인존’에는 실려 있으나,1985년에 재발행한 ‘국릉소장유물목록’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분실을 넘어, 누군가가 고의로 빼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국가적 행사를 위해 제작된 인장인 어보(御寶)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316과를 보관하고 있으나, 녹슬고 깨지는 등 온전한 상태로 보존처리된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나마 갖고 있는 왕실 인장도 방치다다시피한 수준이다. 문화재청은 왕실 인장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나 검토는 물론,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기초적인 작업조차 소홀히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조사에 참여한 감사관은 “모든 어보에 유성매직으로 관리번호를 써놓는 등 관리상태가 기가 막힌 수준”이라면서 “보관장소도 온도나 습기 조절이 안 되는 건물”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조사 권한이 없다는 한계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관리하고 있는 귀중본 1만여권은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박물관 전시품에 사실과 다른 설명을 붙여 관람객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해온 사례도 여럿 확인됐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은 관우를 기념하는 ‘북묘비’를 야외에 전시하면서 명나라 장수 진린의 기념비로,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 헌종이 수집한 인장들을 모아 찍어 만든 책인 ‘보소당인존’을 청나라 옹방강의 인보로 각각 잘못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3)강역(江域)-자연상징(상)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3)강역(江域)-자연상징(상)

    한반도의 모양은 흔히 대륙으로 도약하려고 웅크린 호랑이에 비유된다. 이때 호랑이의 등뼈에 해당하는 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백두대간이란 용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신경준의 저술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에 처음 등장한다. 민족의 발상지 백두산 우리 조상들은 산을 이어지는 줄기로 파악하였는데, 우리 국토의 뿌리인 백두산에서 시작해 낭림·금강·설악산 등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속리·덕유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에서 멈춘 가장 크고 뚜렷한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불렀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생명선이다. 한반도의 주요 강이 백두대간에서 시작되고, 대부분의 산이 백두대간으로 연결되어 생명의 통로가 된다. 또한 백두대간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의 저장고이다. 옛 사람들에게 백두대간은 신앙의 대상이자 수련의 장소였으며,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고 고달픈 삶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두대간은 가장 중요한 자연유산이며, 여가와 관광, 그리고 교육의 공간으로 그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백두대간의 시작인 백두산(白頭山)은 우리나라 산의 시조(始祖)이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졌는데,‘조선왕조실록’에는 1597·1668·1702년에도 백두산에서 분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큰 산으로, 머리에는 천지(天池)라는 커다란 호수를 이고 있어 사람들이 외경심과 신비감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여기고, 성산(聖山) 또는 영산(靈山)으로 신성시해 왔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에 걸쳐 있다. 그래서 백두산을 둘러싼 양국의 분쟁도 끊이지 않았는데, 최근 중국이 백두산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상품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음이 편치 않다. 백두대간에 속한 산 가운데 경치로는 금강산(金剛山)이 최고로 꼽힌다.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를 받아 만들어진 ‘일만 이천 봉’과 기암괴석, 그리고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인들도 금강산을 직접 구경하는 것을 소원하였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도 금강산 구경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뿐 아니라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답사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금강산은 사찰과 문화재, 전설을 많이 간직한 산으로도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산 여행이 오늘날의 해외여행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을 통해 간접 여행하는 ‘와유(臥遊)’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금강산은 남북화해의 상징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아직 금강산의 절반인 외금강만 구경할 수 있는 반쪽 관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더 좋아했고 그래서 더 많이 찾았던 내금강을 하루빨리 구경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며칠 전 광복절을 맞아 생각나는 강역으로 독도(獨島)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국토의 동쪽 끝인 독도는 동해(東海) 한가운데 있는 섬이다. 독도는 행정구역 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이며, 우편번호는 799-805이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독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도와 서도 2개의 큰 섬과 주위에 89개의 부속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독도(獨島)’라고 표기해 ‘외로운 섬’,‘홀로 섬’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돌섬’을 ‘독섬’으로 발음하면서 ‘독도’로 표기한 것이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측 자료에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나, 일본은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강역과 관련된 민족문화상징으로 독도를 꼽은 것은 이러한 일본의 억지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우리 국토의 막내이기 때문이다. 일본자료에도 “한국땅” 독도 독도를 품고 있는 동해(東海)도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바다이다. 동해를 둘러싼 문제는 영역이 아닌 명칭 때문인데, 같은 바다를 두고 우리는 동해(East Sea),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동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기원전 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에 대한 기사에 동해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약 2000년 전부터 동해라 부른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자체가 7세기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해 명칭이 일본해에 비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만큼 동해는 동해로 불러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지도에서 동해 표기는 90% 이상이 일본해로 되어 있다. 국제사회에서 동해가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족문화상징에 해양강역으로 동해가 선정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 강역에 대한 정보를 조선시대 사람의 눈으로 집대성한 것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이 지도는 한반도를 북에서 남까지 동서로 끊어 22폭으로 나누어 담았다. 이 22폭을 상하로 모두 이으면 가로 약 3.3m, 세로 약 6.7m의 거대한 대축척 전국지도가 만들어진다. 대동여지도는 한반도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렸을 뿐 아니라 백두대간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도로망·역·창고·성곽 등 각종 인문지리 정보도 풍부하게 담고 있어 19세기 중엽 우리 국토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한마디로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고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우리 문화와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문화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자연경관으로는 황토, 갯벌, 풍수 등 3가지가 선정되었다. 황토(黃土)는 한국인과 가장 친한 흙이다. 우리 조상들은 황토로 만든 집에서, 황토로 빚은 옹기에 저장한 음식을 먹으며 평생을 보냈다. 황토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할 뿐 아니라 습도도 저절로 조절된다.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종자로 쓰기 위해 황토벽에 걸어두면 이듬해 봄까지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화·산업화의 바람 속에서 황토벽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시멘트벽에 걸린 종자는 겨울을 나는 동안 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황토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적당히 가열된 황토가 몸에 이로운 원적외선을 방출한다고 하여 ‘황토침대’,‘황토방’이 유행한다. 옛날 어른들이 온돌방에서 ‘지지고’ 나면 몸이 가뿐해진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자연경관 ‘황토·갯벌·풍수’ 황토는 바다의 적조 제거에도 한몫을 하며, 가축의 사료로도 쓰인다. 황토의 흡수력, 해독력을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과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황토를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한하운의 시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이라는 대목이 나오듯이, 우리나라 황토가 누런색이 아닌 붉은색을 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술용어로는 ‘적색토’라 불린다. 황토는 전국적으로 나타나지만, 특히 서해안의 해발 150m 이하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에 넓게 분포한다. 갯벌은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운반해온 미세한 흙이 쌓인 해안의 평평한 땅을 말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발달한 갯벌은 그 규모에서 세계적이다. 우리는 과거 갯벌을 쓸모없거나 간척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갯벌은 일찍부터 ‘바다밭’이라 불린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갯벌에 자라는 각종 조개를 캐거나 어살을 설치해 물고기를 잡는 일은 서남해안 어민들의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우리가 갯벌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무분별한 대형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많이 사라지고 나서부터이다. 갯벌은 어민들의 생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다양한 동식물이 자라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동시에, 각종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거대한 정화조’이다. 우리나라 갯벌은 국토면적의 2.5%를 차지하는데, 돈으로 따지면 연간 10조원에 가까운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갯벌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다. 보존과 함께 지속가능한 이용도 필요할 것이다. 풍수(風水)는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된 전통적 환경사상이다. 풍수는 그 이론들이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8세기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뒤, 우리 나름의 생각과 가치가 더해지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풍수를 묘 자리나 보는 지술(地術)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풍수는 죽은 사람의 쉴 자리보다는 산 사람들의 살 자리를 찾는 일종의 입지론이다. 풍수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수도에서부터 마을의 터 잡기까지, 그리고 도시와 마을의 공간배치와 구성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따라서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상징이 풍수인 것이다. 정치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우리 여인네들의 멋내기 佛여성들에 뽐내 뿌듯”

    “우리 여인네들의 멋내기 佛여성들에 뽐내 뿌듯”

    “우리나라 전통 화장(化粧)유물을 아름다움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이게 돼 가슴이 뿌듯합니다. 우리 전통문화의 멋스러움을 제대로 알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오는 9월11일부터 23일까지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우리나라의 화장문화를 최초로 소개하는 특별전이 열린다.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코리아나화장박물관(관장 유상옥)이 주최하는 ‘자연을 닮은 아름다움, 한국의 화장문화전’이 그것이다. 그동안 주불 한국문화원에서 미술전이나 패션쇼 등은 수차례 열렸으나 전통 유물을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화장박물관에서 만난 유승희(42) 학예연구실장은 특별전 포스터와 도록 제작, 유물 정리 등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는 “삼국시대부터 개화기에 이르는 화장유물 3000여점 가운데 200여점을 엄선했다.”면서 “단순히 유물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단정히 하고 얼굴과 머리, 옷과 장신구까지 갖추는 화장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 화장그릇부터 고려시대 화장용기인 ‘청자상감모자합’, 조선시대 나전경대·노리개,19세기 ‘대한제국은제이화문분합’, 최초 근대 화장품인 ‘박가분’ 등 시대별 화장용기와 도구, 장신구, 화장재료, 미인도 등이 전시된다. 이와 함께 홍화씨·쌀·살구씨 등으로 만든 화장유 제조, 봉숭아물 들이기 등 체험행사도 이뤄진다. 유 실장이 이번 특별전을 추진하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 박물관을 보러온 프랑스대사관 관계자들과 한·불 수교 120주년 관련 이야기를 나누면서부터. 박물관으로서도 첫 해외전시인 만큼, 현지 박물관·미술관 등을 접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마침 주불 한국문화원에서 120주년 문화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고 가능성을 타진, 우리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첫 유물전 개최를 성사시켰다.“화장유물 대부분이 크기가 작고 다루기 쉽지 않은데도 프랑스 기메박물관이 유물 크기에 맞는 전시대를 빌려줘 무리 없이 진행하게 됐습니다. 아기자기한 화장유물과 천연 재료 등을 부각시킬 생각입니다.”이와 함께 삼국시대 화랑 등 남성들이 썼던 화장도구인 살쩍밀이·족집게·면빗·동곳 등도 비교전시하고, 화장유물이 시대별로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는 그림들과 영상도 보여줄 예정이다. 유 실장은 전통 화장문화가 단순히 얼굴에 분·연지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화장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가꾸면서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면서 “홍화꽃잎으로 만든 화장재료 등은 한국과 프랑스가 비슷하고, 서양인들이 천연 성분으로 만든 동양의 화장에 관심이 높은 만큼 동서양 화장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70년대부터 아버지인 유상옥 관장(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이 화장유병·분접시 등을 수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장유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유 실장은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우리 전통 화장문화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해외전시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고] 정달영 前 한국일보 주필 별세

    한국일보 주필을 지낸 언론인 정달영씨가 21일 오전 11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탄현마을 자택에서 별세했다.67세. 충북 진천 출생인 고인은 한국외국어대 독어과를 졸업하고 1962년 한국일보에 입사, 문화부장·편집부국장·편집위원·편집국장·주필 등을 역임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설립기획위원회 간사위원, 방송위원회 어린이프로그램 위원장, 안익태 기념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다. 간결하고도 따뜻한 글로 유명했던 고인은 특히 문화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한국일보에 연재한 ‘정달영 칼럼’을 통해서는 사회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전망을 담아냈다. 그를 가리켜 지인과 후배들은 “조선시대의 올곧은 선배 같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고인은 가톨릭언론회장을 역임하며 언론과 종교를 접목한 활동에도 참여했다.1992년 가톨릭언론대상을 비롯, 서울언론인상·대한언론인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라인여로’‘하늘의 길, 땅의 길’‘할 말은 많아도’‘나는 부끄러움을 찾았다’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전복자(69)씨와 욱(41·말레이시아 거주)·민(38·한국언론재단 교육2팀 차장)씨 등 2남. 빈소는 일산백병원, 발인은 24일 오전 8시.(031)919-2099.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중) 인문학 변신, 고정관념 깨자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중) 인문학 변신, 고정관념 깨자

    ■ 콘텐츠 보물창고는 ‘보통 사람들’ 인문학과 콘텐츠의 만남에서 관건은 역시 고전이다. 옛 사람들의 삶 자체가 ‘생생한 이야기’라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전이야말로 콘텐츠의 ‘보물창고’이자 ‘광맥’이다. 이미 보물찾기는 시작됐다. 단 새로운 상상력이 가미돼야 한다. 그래서 잊혀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부각된다. 군림했던 왕보다 잡초같던 백성들이 부상한다. 설혹 왕이라 해도 초인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이 부각된다. 여기에는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의 근본적인 변화가 놓여져 있다. 김호 경인여대 교수가 ‘무원록’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80년대 ‘민중사’가 유행이긴 했는데 정작 민중의 목소리가 담긴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사를 전공하면서 남들이 안보는 각종 의료·살인사건 기록들을 들췄다. 김 교수는 “이런 기록들은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조선민중실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문학자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도 1930년대 문예지를 뒤지다가 ‘자본주의에 탐닉해가던 조선민중’을 발견했다.‘착취와 수탈’만 알고 있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를 정리한 게 최근 영화화가 논의되고 있는 ‘황금광시대’다. 이번에는 일제시대 살인사건과 스캔들을 묶어 ‘경성기담’도 펴냈다. 이 책은 아예 영화화를 전제로 시나리오 쓰듯 책을 꾸몄다. 그가 꿈꾸는 인문학은 “사람 냄새나는” 인문학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숨은 공로자였던 사진실 중앙대 교수도 마찬가지다. 국문학 전공자로 그의 관심사는 광대나 기생들의 문예활동이다. 그것들은 당대 민중의 욕망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광대를 연구한 그의 논문이 ‘왕의 남자’로 발전했다. 송화섭 원광대 교수는 ‘무속’의 복권을 꿈꾼다. 그의 관심은 한국의 전통 의례. 이게 지방자치제를 맞아 꽃피웠다. 송 교수는 “무속도 우리의 전통풍속인데 미신이니 뭐니 하면서 너무 쉽게 버렸다.”면서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문화로서 접근한다면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콘텐츠업체 여금의 유동환 대표는 아예 동양철학자의 길을 접고 콘텐츠생산쪽으로 나선 사례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고조선시대 때부터 최근까지 각종 정변이나 민란 등을 DB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포인트는 지도자들의 삶이 아니다.“정변이나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모순 아래서 고민한 보통 사람들”이 중요하다. 이런 경향에 대해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럼에도 “역사·민속·신화 등에서 콘텐츠를 발굴해 문학의 스토리텔링 구조를 씌우고, 철학에서는 인간의 논리·체험구조나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배우는” 과정은 이미 대세에 접어들었다.‘상업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세상은 과거에서 점잖은 교훈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뜻을 품고 있어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 ‘학자’의 위기 사람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영원할 것” “인문학, 달리 말해 휴매니티스(Humanities)는 사람에 대한 얘기라는 뜻입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 모든 게 인문학의 소중한 연구대상입니다.‘지구’라는 물질 자체가 물리학자에게 연구대상인 것과 마찬가지죠.” 철학자 김용석 영산대 교수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인문학이,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많지만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는 질문도 대답도 없습니다.” 그 시대 사람의 삶과 욕망이 담긴 대중문화야말로 인문학의 훌륭한 텍스트다. 세속적인 대중문화를 비웃으며 고고한 척 할 게 아니라, 무엇 때문에 대중들이 즐거워하는지, 또 대중들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석하는 게 인문학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인문학은, 철학은 지금보다 좀 더 수다스러워져야 한다.“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게 인문학이라면,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인문학 자체는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십수년 전부터 나온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인문 ‘학자’의 위기입니다.” 이런 주장은 그가 펴낸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 철학을 뽑아낸 ‘일상의 발견’, 음식·학교·친구·회사 같은 두음절 단어를 파고든 ‘두 글자의 철학’, 인기 애니메이션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등이 대표적이다.“이런 상황이라면 인문학자들의 연구과제는 길가의 돌멩이들처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대중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그는 ‘피드백 작용’을 꼽았다.“과학이란 대상에서 규칙을 뽑아내는 과정입니다. 물리학이 물질에서 규칙성을 찾듯, 인문학·철학도 대중문화에서 인문학·철학적인 요소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문화를 두텁게 해 창조를 낳는 토대가 됩니다.” 철학이 좀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설명할 때 듣는 사람의 반응을 고려해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듭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서양에서 게임이나 애니를 만들 때 철학자의 얘기를 듣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김 교수는 이제 인문학자의 임무는 ‘아름다운 글쓰기’에 있다고 강조했다.“인터넷 때문에 글쓰기는 이제 끝났다고 했지요. 그런데 외려 더 늘었습니다. 이제는 글 자체의 멋, 우아한 멋까지 살려내야 인문학자입니다. 앞으로의 철학은,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문예’이거든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난항겪는 고전번역원 설립 고전 번역은 쉽지 않다. 전혀 다른 세계관 아래 이미 죽어버린 언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이라도 번역하려면 최소 10년 공부는 쌓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고전번역원’과 ‘고전번역대학원’을 세워 국가가 고전번역가를 키우자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고전번역하면 역시 민족문화추진회(민추)다.1965년 설립 이래 40여년 동안 정부보조금으로 ‘연명’해오면서 번역사업을 거의 도맡다시피했다. 번역좀 한다는 사람 가운데 80% 이상이 민추의 국역연수원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지금 민추에다 주는 돈에 조금만 더 얹으면, 비용도 그리 큰 부담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과의 업무분장이 걸림돌이다. 한중연 고위 관계자는 “한중연이 연구중심 기관이긴 하지만, 연구·번역사업을 합쳐놓아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번역원·번역대학원 설립을 처음 제기했던 신승운 성균관대 교수는 이런 주장이 못마땅하다. 그는 “고전번역은 누구나 쉽게 고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는 ‘자료의 민주화’에 그 참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자들이 연구하면서 번역서를 내는 것과 숙련된 번역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것은 다른 작업이라는 지적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사업이 ‘밥그릇 싸움’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교육부는 “이제까지 번역 실적을 보면 민추의 말이 옳지만,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효율성 등을 감안하면 한중연의 주장도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며 고민에 빠졌다. 여기다 교육부총리 인사 문제까지 겹쳐, 일러야 내년에나 구체적인 틀이 나올 전망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벽란도 만드는 에이스토리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벽란도 만드는 에이스토리

    최근 준비에 들어간 고려시대 수사극 ‘벽란도’가 관심을 끌고 있다. 단순히 최완규(‘상도’,‘올인’,‘허준’ 등)를 중심으로 스타작가들로 뭉친 드라마제작사 에이스토리가 나서서가 아니다. 계속되고 있는 ‘사극실험’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벽란도’ 기획 자체가 인문학과 콘텐츠의 결합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물 제작은 쉽지 않다. 정밀하게 묘사하려면 과학이나 의학지식은 물론, 심리에도 정통해야 한다. 국내 영화나 드라마의 법정물이 할리우드 흉내내기에 그치는 것도 이런 어려움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이스토리가 수사물을, 그것도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만들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수사기록 ‘무원록(無寃錄)’이 있어서다. 말 그대로 ‘억울한 원한을 없도록 하라.’는 의미의 무원록은 각종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경험을 기록해둔 책.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법의학서인 셈이다. 이를 근거로 인기 수사드라마 ‘CSI’와 의학드라마 ‘ER’를 뛰어넘는, 고려시대 ‘감검청’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무원록’은 그러나 그동안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묻힌 자료였다. 정치사·왕조사 위주로 연구가 이뤄지다보니 살인사건 기록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그러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가 이 자료에 주목, 연구·번역하면서 수사물 제작에 목말라하던 작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세세하게 기록된 이 자료가 나오자 이를 토대로 영화 ‘혈의 누’, 드라마 ‘별순검’이 만들어졌다.‘혈의 누’는 영화로서는 위험부담이 있는 사극추리장르임에도 흥행에 성공했고,‘별순검’은 시청률이 높진 않았지만 일부 드라마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사실성 때문이다.‘벽란도’는 바로 그런 바탕 위에 서 있다. 다만 ‘재미’를 위한 드라마적 배려는 있다. 드라마의 시공간적인 배경을 조선에서 고려시대 벽란도로 옮긴 것이 그 한 예다. 이상백 에이스토리 대표는 “당나라·거란·여진·일본은 물론, 동남아 상인과 멀리 아랍 상인들까지 드나들었던 벽란도를 배경으로 삼으면 다양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수출시장인 이들 지역에 친숙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벽란도’의 장점은 여러가지다. 우선 수사물에 대한 꾸준한 수요를 들 수 있다.‘범죄’라는 극한상황은 그 자체가 가장 드라마틱하고 인간적이다. 그것은 ‘수사반장’에서 ‘CSI’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첩보물 형식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스토리에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제작비 부담이 적다. 대작으로 찍으면 대규모 군중신이나 전쟁신이 빠질 수 없다. 그러나 추리물에는 이런 장면들이 필요없다. 그런 만큼 드라마만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인문학적 연구성과가 구체적인 콘텐츠 사업과 완벽하게 연결된 하나의 모범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한국인인 나는…태극이요… 무궁화요… DMZ이다

    ● 고종이 태극 고안…본지 특종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을 상징하는 국기를 갖고 있으나, 우리나라처럼 그 상징에 우주만물과 철학을 담고 있는 예는 찾기 힘들다. 바로 태극(太極)과 괘(卦)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홍으로 이루어진 태극은 음(청색)과 양(홍색)의 상호 작용에 우주만물이 생성·발전하는 대자연의 영원한 진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창조와 발전을 의미한다. 태극은 우주자연의 생성근본원리이며, 창조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이러한 태극기는 1882년 8월9일 박영효(朴泳孝)가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위에서 만들었고, 이를 8월14일 고베의 숙소 니시무라야에 게양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7년 10월9일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뉴스피플’ 제288호에 실린 특종 기사에 따르면, 태극기를 직접 도안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인물은 고종(高宗) 임금이라고 한다. 박영효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면서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극 문양을 사용한 연원은 매우 오래 되었다. 우선 선사시대 때의 고령과 울산 암각화에서도 발견되며, 고구려의 고분벽화 사신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682년(신라 신문왕 2년) 경주 감포에 세운 감은사의 기단석에도 태극 문양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태극 문양은 종묘와 궁궐 및 왕릉, 사찰 등 도처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특히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된 어기(御旗) 채색도를 보면, 중앙에 4개의 동심원을 수직으로 나눈 태극과 그 주위에 8괘를 배치한 그림을 조선시대의 임금을 표상하는 깃발로 사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굳이 의미를 달자면 태극기의 시조쯤 되지 않나 생각된다. 2002년에도 그랬지만, 석 달 전 밤잠을 설치게 했던 2006년 월드컵 때에도 변함없이 태극 문양은 붉은색과 함께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 상하와 좌우가 융합하지 못하고 커다란 장막에 꽉 막힌 듯한 세상, 태극 창제의 정신으로 극복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여겨진다. ● 산해경에도 ‘훈화초가 아침에 피고… ’ 기록 애국가를 보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후렴의 첫 구절을 장식하고 있다. 매사 따지기를 좋아하는 혹자는 이 구절이 잘못됐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노랫말처럼 무궁화가 우리 강산 삼천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못한 까닭이겠다. 그런데 옛 기록들을 보면 한반도가 무궁화 자생지였고, 한반도의 특징으로 인식될 만큼 도처에 만발했음을 알려준다. 무궁화가 한반도와 관련된 사실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다. 이 책의 ‘해외동경’편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훈화초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고 하였다. 북방에 있는 군자의 나라는 한반도이며, 훈화초(薰花草)는 무궁화를 일컫는 중국의 옛 명칭이라 한다. 또한 신라의 효공왕이 897년 7월 당나라의 광종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는데 그 국서 가운데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사실도 확인된다.‘근화’ 또한 무궁화의 또다른 이름이다. ● 한국인 뿌리 밝혀주는 단서 역사상징 가운데 선사시대의 것은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을 우리의 민족문화상징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할 듯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출토·발굴된 수많은 선사 유물과 유적 중 이들만큼은 한반도가 주인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전역에서 만들어 쓴 토기에 대한 통칭으로, 한국인의 뿌리를 밝혀주는 단서가 된다는 데서 그 중요성을 더한다. 빗살무늬토기 발견 분포도를 보면, 바이칼호 일대가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중심지이며 빗살무늬토기는 여기로부터 동으로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서로는 볼가강 유역을 거쳐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전해졌다는 것이 세계 고대사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바이칼호 일대로 보는 근거가 된다. 발굴 현장에서 깨진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맞추어 원래의 형체를 되살린 빗살무늬토기가 이처럼 장구한 민족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파편 어느 것 하나조차 조상의 신주 모시듯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민족상징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거석(巨石) 문화유산이다. 한자로 지석묘(支石墓:일본), 석붕(石棚:중국)으로 표현되는 고인돌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아프리카 등에서 약 5만 5000여 기가 확인되는데, 그 중 약 3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전세계 고인돌의 중심국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반도에 그 분포가 집중되어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바다를 통해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 관련 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다. 자생설은 한반도가 동남아시아나 중국 동북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고인돌이 많다는 점, 그리고 축조 연대가 이들 지역의 것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은 선돌(立石)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석문화의 요체이며, 조상들의 정신세계가 구현된 귀중한 민족상징이다. 이에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스에서 열린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나라의 고창·화순·강화 등 3개 지역의 고인돌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민족의 상처…지금은 희귀동물 서식지로 비무장지대(DMZ)와 길거리응원은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의 상처와 냄비 기질을, 또 어찌 보면 우리민족의 기회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마치 야누스와 같다고 하겠다. 비무장지대는 민족의 아픔인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한 유엔군과 북한·중공군이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합의하면서 한반도 중앙의 동서 248㎞ 길이를 군사분계선으로 삼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비무장지대는 우리 민족이 입은 커다란 상처덩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자유로운 출입이 막힌 결과 비무장지대는 희귀동식물들의 주요서식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한 남북학술조사단의 구성과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는 민족분단의 아픔은 물론, 자연 생태의 보고(寶庫)와 민족화합, 평화공존의 현장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주요 문화상징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문화국민으로서 성숙된 질서의식 표출 2002년뿐 아니라 2006년에도 세계를 놀라게 한 길거리응원은 남녀노소가 너나할 것 없이 공간과 시간에서 동질화되고 균일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문화행위였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을 비롯하여, 부산·대구·광주·인천·대전·울산·전주·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적게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명이 ‘애국’으로 하나 되어 우리 축구대표팀을 함성과 율동으로 응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길거리응원은 오직 신기록 수립과 문화국민으로서의 성숙된 질서의식만이 관심사였지 이를 가능케 한 ‘변화’에 대한 인식은 가려져 있었던 듯하다. 예전 같으면 수십만명이 한 곳에 모이는 사건(?)이 어찌 가능했을까. 우리의 기억에는 ‘집시법’이라는 반(反)민주적 잣대를 들이댄 강제해산만이 남아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아마도 찾기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길거리응원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또 내후년, 또 그 다음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이에 더해 자부심을 갖게 되는 점은 이번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나타났듯이 우리의 길거리응원이 세계 각지에서 벤치마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23세 요절 헌종은 ‘전각’ 애호가

    23세 요절 헌종은 ‘전각’ 애호가

    조선시대 임금들이 서책이나 회화, 편지봉투 등에 찍었던 개인 인장(도장) 250여점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새·어보 등 공적인 도장과 달리 임금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이 담겨 있어 조선시대 학문·예술세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개관 1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조선왕실의 인장’을 15일부터 10월8일까지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특별전에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재위 1834∼49년)이 직접 사용했거나 수집한 인장 150여점을 비롯, 정조·순종·고종·흥선대원군 등이 사용했던 인장 100여점 등 총 250여점이 전시된다. 인장은 초기에는 주로 사용자의 이름이나 호, 직위를 새겨 신분과 신용을 나타냈으나 중국 송·원대에 이르러 교훈적인 문구나 좋은 시 등을 인용, 개인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또 돌·금속·나무·흙 등을 이용, 색채와 조형적 장점을 살리면서 전서를 글씨로 새겨 전각으로 불렸으며, 시(詩)·서(書)·화(畵)가 집약된 종합예술로 발전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23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헌종의 방대한 인장 컬렉션이다. 문예에 뛰어났던 헌종이 700점이 넘는 인장을 날인, 펴낸 인보(서책)인 ‘보소당인존’에서 확인된 다양한 글귀·모양의 인장 150여점이 공개됐다. 이 가운데에는 헌종이 정약용·김정희·강세황·신위·권돈인·조희룡 등 당대를 대표한 문인 석학들과 학문·예술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수집한 인장이 포함돼 있으며, 문팽·옹방강·오숭량 등 청나라 문인들의 인장도 볼 수 있다. 소재구 관장은 “헌종이 문인들과 교감하고 청나라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문화군주로서의 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10여점에 이르는 김정희 인장을 수집한 것은, 헌종이 금석학적 측면에서 추사 일파와 긴밀히 교류할 만큼 학문적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또 헌종이 서화 감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장소인 창덕궁 낙선재와 보소당 등 궁궐 전각의 이름을 새긴 인장을 통해 왕의 풍류를 뽐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1725년 발간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5022책에 모두 찍혀 있는 정조의 ‘극(極)’ 날인과, 크기가 서로 다른 5개 인장을 포개 1개 도장에 넣은 이하응(흥선대원군)의 ‘투인’ 인장 등도 전시된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문경길(하)

    고모산성을 지난 옛길은 문경읍을 거쳐 새재길로 들어선다. 문경읍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하늘재길을 이용했다. 안태현(38)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하늘재는 문헌상 가장 오래된 고개로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에 개통됐다.”며 “신라시대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도로 등의 역할을 했으나 조선초 문경새재에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관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옛길의 중심에 있다. 당시 새재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 일행과 중앙에서 부임하는 관리들, 과거길에 올랐던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들로 늘 붐볐던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이 새재를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다. ●조선시대 한양·동래 잇는 옛길의 중심 따라서 예로부터 ‘문경’이라 하면 ‘새재’를 연상케할 정도로 문경새재의 명성은 높았다. 새재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새들도 이 고개에 막히면 넘지 못한다고 해서 유래됐다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또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옛 문헌의 기록도 있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어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새로운’으로 풀어 ‘새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전멸당한 통한도 간직하고 있다. 새재공원 입구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3.5㎞.‘영남제일관’이라는 현판글씨가 보인다. 주흘관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으며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어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1관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편에 큰 기념탑이 하나 나온다. 경북도가 개도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6년에 세운 타임캡슐이다. 첨성대형을 띠고 있으며 100품목 475종의 물품이 매설돼 있다. 이 캡슐은 경북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 10월 23일에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개봉된다. 타임캡슐 건너편에는 고려와 백제시대의 왕궁, 초가집 등이 들어선 KBS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이 보인다. 이 곳이 문경새재를 ‘한국의 할리우드’로 도약시켰다.‘무인시대’,‘불멸의 이순신’,‘해신’ 등의 대하드라마가 촬영됐고 최근 흥행 신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의 장면 일부도 문경새재에서 촬영됐다. 이 곳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이승원(58)씨는 “드라마촬영장 일대에는 20여가구의 주민들이 살았으나 지난 1996년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밑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촬영장을 지나면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이용됐던 조령원터가 나온다. 지난 1977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벌여 기와와 토기, 자기, 담뱃대, 손칼 등이 출토 되었다. ●드라마 ‘태조왕건´등의 촬영장 조령원터에서 용추로 오르다 보면 왼편에 초가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청 엄원식(38) 학예사는 “이 초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을 오르던 선비와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품고 새재길을 넘다들던 사람들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정분을 나누던 주막이다.”고 설명했다.1993년까지 장사를 했으나 지금은 건물만 남아있다. 팔왕폭포라고도 불리는 용추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인 팔왕과 선녀가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새재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추 바로 위 오른쪽 길가에 있는 교구정은 관찰사들이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 곳이다. 안 학예연구사는 “교구정은 조선시대 새로 도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계하던 곳”이라며 “지금은 건물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고 주춧돌만 남아 옛 정취를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500m쯤 더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표석이 눈에 띈다. 당시에도 산불이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제2관문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조곡폭포는 근래에 문경시에서 만든 폭포. 비록 인공폭포이긴 하나 시원한 물줄기가 무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관문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 3개 관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 설치됐다. 제1,3관문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1907년 일제에 의해 없어졌으나 1975년 복원됐다. 문루이름도 옛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라고 적었다.2관문을 지나자 관광객들 발길이 뜸했다. 안 학예연구사는 “대부분 관광객들이 2관문 옆에 있는 조곡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되돌아 간다.3관문까지 왕복하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조곡관을 지나 500m쯤 가면 자연석을 깎아 ‘새재아리랑’을 새긴 비를 만난다.‘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문경새재 넘어 갈제/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라는 노래에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고개를 넘나들었던 나그네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새재아리랑비에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진을 쳤다는 이진터를 지나 1㎞쯤 가면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돼 있는 동화원이 길손을 맞는다. 동화원은 제3관문 못미쳐 있는 새재의 마지막 마을이다. 고려 왕건이 남쪽을 칠때 행재소로 사용한 곳이다. 고려 공민왕은 이 곳에 행궁을 짓고 홍건적의 난을 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떠났다. 마침내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때 쌓았고 숙종때 중창했다. 제3관문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다. 제3관문 오른쪽에는 군막터가 있다.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가 있었던 곳이다. 왼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새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여기에서 빌기도 했다. 새재를 넘으면 한양은 삼 사일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장원급제 길’ 문경새재 예로부터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는 한양으로 가는 길이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문경새재가 있었다. 그런데 영남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경새재를 ‘과거길’ 또는 ‘장원급제의 길’로 부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문경새재입구에는 선비상이 우뚝 서 있다. 또 제2관문에서 동화원을 지나 제3관문 아래쪽에는 책바위가 있다. 책바위에는 장원급제와 관련된 전설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해 용한 도사를 찾아가 물으니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부자는 도인의 말대로 3년 동안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하나씩 책바위 뒤로 옮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들의 몸이 튼튼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했다는 것. 현재의 책바위는 지난 1998년 문경시가 이 전설에 따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입시 철만 되면 하루 수백여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책바위를 찾아와 합격을 빌고 간다. 문경시는 최근 책바위 주변을 새단장했다. 책바위 뒤편 돌무더기 위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6m, 폭 0.5m크기의 입석을 세운 뒤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등산로를 보수했다.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경쟁률은 자그마치 수천대 1이나 되었다.”면서 “이런 이유로 문경새재를 넘은 영남선비들의 합격률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크게 높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경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데스크시각] 청계천의 첫 여름 ‘상상+’ /박선화 지방자치부장

    개구쟁이들의 물장구 소리가 요란하다. 올젠버그의 작품 스프링의 설치공사에도 아랑곳없이 미니 청계천을 뛰노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총총하다. 때마침 아트페스티벌이 벌어져 여기저기서 추억을 담는 여인네의 셔터 소리가 흥겹다. 청계천의 여름은 그렇게 청계광장에서부터 길손을 맞는다. 계단을 내려선 모전교 아래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어릴 적 개울가만큼이나 왁자지껄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그 개울의 추억을 길어올리듯 첨벙첨벙 손발을 적시기 바쁘다. 단지 더운 탓만은 아니리라. 청계천의 첫 여름, 처음 맞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적잖은 시민의 돈 3900억원을 들여 지난해 10월1일 개장한 이래 가을과 겨울, 봄을 지나 한여름 사이로 청계수가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 세종 시절에야 치수가 목적이었다지만 2006년 여름의 청계천은 그 면면한 역사의 개울을 넘어 시민의 품에 안겨 있다. 하루 5만명이 넘는 인파가 찾는다는 청계천에서 시민들은 성하의 선물을 즐기고 있다. 모전교에서 고산자교에 이르는 22개의 다리 밑은 모두가 도심 피서지의 명당으로 자리잡았다. 예의 돌계단마다엔 애틋한 연인과 자녀를 거느린 부모, 여유를 즐기는 중년, 백발의 지기들도 물장구에 고단함을 풀어 보낸다. 압권이야 역시 또래 아이들의 천연욕만 하랴. 허리춤 깊이의 물 속에선 아이들의 자맥질하는 모습이 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3대가 손잡고 내를 건너거나 벽안의 외국소녀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다. 간간이 버들치와 붕어, 피라미들이 놀라 쏜살같이 달아나는 모습을 살필라치면, 광교까지 진출한 잠자리가 콧등을 스치기도 한다. 수변 수양버들과 우거진 수풀 사이론 야생화와 잡초가 어우러져 물씬 시골정취를 풍긴다. 어느덧 이름모를 풀벌레가 눈에 띄고, 여치가 가을이 곁에 왔음을 알린다. 이처럼 청계천은 불과 1년새 시민 모두의 넉넉한 쉼터로 자리잡았다. 홍수에도 시공상 큰 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시설물의 파손도 거의 없다. 특히 식물의 활착은 도심 생태하천의 복원 의미를 넘어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설 정도로 가까워졌다. 청계천을 걸을 때마다 세 가지 색깔을 더듬어보곤 한다. 청계수가 탁수가 되어 어둠에 갇혔다가 우리품에 돌아온 역사적 사연을 더듬다 보면, 열섬현상을 빚어내는 콘크리트 빌딩들이 그리 밉지만은 않게 된다. 청계천 복원이 누구의 치적이라기보다 당시의 치수(治水)처럼 오늘날 이수(利水)의 혜택을 시민들에게 가져다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계천변에는 여전히 고단한 삶이 존재한다. 수표교에 이르자 리어커에 기대 지쳐 보이는 한 상인이 눈에 띄었다. 단지 그뿐일까. 많은 상인들이 청계천에 밀려 아직도 생계의 막막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서울시의 세심한 정책 배려가 아쉽다. 또한 동대문타운 개발에는 친환경적이면서도 개발수요를 조화시키는 방안이 강구됐으면 한다. 동대문운동장을 지하로 개발하는 대신 지상은 녹지공원으로 해 관광수요를 한껏 높이는 것이다. 세운상가지구는 층고를 최대한 높여 랜드마크화하되 그만큼 녹지를 늘리면 생산성과 환경보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청계천의 끝에서 서울숲에 이르는 길에도 멋지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갖춘다면 관광상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청계천의 참뜻은 물이 흐르고 싶은 대로 살려둔 데에 있다. 그 물이 흘러 자연을 되살리고, 그 자연이 벌써 도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서울시가 청계천과 한강을 시민에게 더욱 값지게 되돌려주려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할 참이다. 자연이 개발을 치유하는 지혜를 발휘해주길 기대한다. 박선화 지방자치부장 pshnoq@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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