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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톱스타 출연 ‘대장금’ 연극무대 오른다

    日톱스타 출연 ‘대장금’ 연극무대 오른다

    한류 대표 드라마 ‘대장금’이 일본 톱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재탄생돼 다시 한번 인기몰이에 나선다. 지난 2004년 일본 NHK를 통해 방송돼 큰 인기를 끈 ‘대장금’은 이번에는 일본 스태프들을 통해 연극 ‘장금이의 맹세’로 각색된다. ‘대장금’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그 인기를 이어갔으나 연극으로 또한 외국인들에 의해 연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5일 열린 연극 ‘장금이의 맹세’ 제작발표회에서는 출연진들의 배역소개와 무대에서 선보이게 될 궁정의상에 대한 설명 등이 이어져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관심을 모은 장금이 역(이영애 분)에는 일본 최고의 지성파 여배우 키쿠가와 레이(菊川怜·29)가 맡아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성의 매력을 뽐낸다. 연극배우 야마구치 마키야(山口 馬木也·34)는 민정호(지진희 분)역을 맡아 따뜻하고 사려깊은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레이는 “평소 씩씩하고 총명한 장금이에게 푹 빠졌었는데 연극에 캐스팅 돼 기쁜 나머지 울 뻔했다.”며 “TV드라마와는 다른 색깔로 연기에 임하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어 “한국의 전통의상은 그 자체가 지위를 나타내고 있어 일본옷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다.”며 “무대에서 직접 선보이게 될 조선시대의 궁정요리도 볼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극 ‘장금이의 맹세’는 오는 12월 3일부터 26일까지 도쿄 닛세이(日生)극장에서, 내년 2월 1일부터 23일까지는 나고야(名古屋) ‘미소노자’(御園座)에서 공연된다. 사진=아사히신문 인터넷판(사진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금이 역의 키쿠가와 레이, 최금영 역의 타카시로 케이, 정 최고상궁 역의 마에다 비바리, 민정호 역의 야마구치 마키야) 서울신문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2)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역관 김지남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2)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역관 김지남

    조선시대 과학자는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다. 양반 출신의 과학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관청이 자주 바뀌다 보니 평생 과학 연구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남병철·병길 같은 천문학자 집안 말고는, 중인 집안에서나 대대로 과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결혼도 자기들끼리 했고, 직장도 자기들끼리 소개하거나 물려주었다. 이남희 교수의 박사논문 ‘조선시대 잡과합격자연구’에 의하면, 현재까지 확인된 잡과 합격자는 역과 2976명, 의과 1548명, 음양과 865명, 율과 733명을 합하여 6122명이다. 산학(算學)은 정조가 즉위하던 1756년부터 주학(籌學)이라 하여 취재(取才) 형식으로 간단하게 뽑았는데 1627명 이상 선발하였다. 4대가 같은 잡과에서 합격한 세전성(世傳性)은 의과, 음양과, 역과, 율과 순으로 강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보고 들어야 대물림하기 쉬웠으니, 책에 없는 비법은 핏줄로만 상속되었다. 세전성을 거꾸로 설명하면, 역과 출신은 다른 잡학도 연구하여 전공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역관 김지남이다. ●외교사 자료집 ‘통문관지´를 아들과 함께 편찬 김지남(金指南·1654∼1718) 은 호조 주사(籌士) 김여의와 전의감정(典醫監正) 이몽룡의 딸 사이에 태어나 역관이 되었다. 주학(籌學) 집안과 의학 집안이 만나 역학을 전공한 아들을 키운 것이다.18세에 급제하여 28세 되던 1682년에 일본에 다녀왔다.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장군직을 물려받자 축하사절로 파견되었는데,6개월 동안 1만 1000리 먼 길을 여행했으며, 사행일지인 ‘동사일록(東日錄)’을 기록했다. 그 해에 청나라까지 다녀왔으니, 지남(指南)이라는 이름 그대로 길에서 나그네로 한 해를 보냈다. 환갑이 넘도록 중국에 자주 드나들며 유창한 중국어로 외교상의 문제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도 많이 해결하였다.1710년에 정재륜을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우연히 심양의 장수 송주와 며칠 동안 이야기했는데, 우리 나라가 제후의 법도를 잘 지킨다는 사실을 많이 말했다. 나중에 송주가 재상이 되자 그러한 사실을 황제에게 직접 아뢰어, 황제가 조선에서 바칠 공물을 줄여 주었다. 국가 재정이 그만큼 절약된 셈이다. 김지남이 역관으로 활동하며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외교사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를 편찬한 사실이다. 이 책의 공동 편찬자인 아들 김경문은 서문에서 편찬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예부터 우리나라는 인접한 중국·요(遼)·연(燕)·여진·일본 등과 어려운 문제를 타결한 법례가 많았지만, 이를 수록한 문헌이 없다. 그래서 고증할 길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 영의정 최석정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에 김지남이 전고(典故)에 밝다는 사실을 알고, 외교 고사를 수집 정리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에는 사역원의 관제, 역과(譯科), 여로(旅路), 출장비부터 중국과 일본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접대하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역관들이 알아야 할 모든 항목이 설명되어 있고, 대표적인 선배 역관들의 간단한 전기도 실려 있다.12권 6책의 방대한 분량인데, 후배 역관들이 비용을 갹출하여 출판하였다. 조선시대에 17회나 재판을 찍을 정도로 많이 읽히고 참고가 된 책이다. 김지남은 역관 박정시의 딸과 혼인하여 7남 3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아들 5형제가 모두 역과에 급제했다. 이창현이 편찬한 ‘성원록´에는 경문(慶門)·현문(顯門)·순문(舜門)·유문(裕門)·찬문(纘門)의 가계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어, 대표적인 역관 집안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화약 만드는 법을 연구하고 책까지 쓰다 김지남은 한 사람의 역관으로 편하게 살지 않고, 중국어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정묘호란 뒤에 청나라와 싸우기 위해 화약이 많이 필요해지자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우선 흑색화약의 원료인 유황과 염초를 많이 만들어야 했다. 김양수 교수는 ‘조선후기 전문직 중인의 과학기술활동’이라는 논문에서 1635년에 이서(李曙)가 편찬한 ‘신전자취염초방(新傳煮取焰硝方)’의 염초 제조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마 밑의 흙과 미리 준비해둔 재·오줌 등을 화합했는데, 뇨분 속에 있는 질산암모늄과 재 속에 있는 탄산칼륨을 반응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려면 가마를 때기 위해 막대한 나무가 필요했다. 김지남이 개량한 제조법은 나무 대신에 일년생 잡초를 써서 비용이 줄어들고 품질은 더 좋아졌다. 1692년에 부사로 연행 길에 오른 민취도가 김지남에게 염초 제조법을 알아보라고 하자, 요양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들어가 사례금을 주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인이 죽어 비법을 익히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화약 만드는 것을 국법으로 엄하게 금했으므로, 목숨을 걸고 배워야 했다. 조선이 비록 항복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가상 적국이기 때문이다.2년 동안 실험 끝에 성공했으며,1698년에 그 방법을 책으로 써서 출판한 것이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다. 화약 만드는 여덟 가지 과정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요약하였다.“먼저 흙을 모으고(取土) 재를 받아서(取灰) 같은 부피의 비율로 섞는다(交合). 섞은 원료를 항아리 안에 펴고 물을 위에 부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篩水) 가마에 넣고 달인다(熬水). 이 물을 식혀서 모초(毛硝)를 얻고 이 모초를 물에 녹여 다시 달여서(再煉) 정제시킨다. 재련 후에도 완전히 정제되지 않았으면 또 한번 달인다(三煉). 이렇게 얻은 정초(精硝)를 버드나무 재, 유황가루와 섞어서 쌀 씻은 맑은 뜨물로 반죽하여 방아에 넣고 찧는다(合製).” 이렇게 만든 화약은 땅 밑에 10년을 두어도 습기에 변질되지 않고, 흙과 재도 예전의 3분의1밖에 들지 않아 자주 국방과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장인들이 읽기 쉽도록 한글로 언해하였다.1796년에도 다시 출판했으니,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두산 기행일기 ‘북정록´ 남겨 김지남은 한국사에 여러 차례 이름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에 역관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백두산은 지형이 험해 조선 쪽에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는 황실의 근본이라고 해서 아무도 살지 못하게 했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 결국 중원과 북경을 포기하고 몽골로 돌아간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피차간에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국경선이 엄격하게 없었다. 1692년에 청나라에서 백두산을 조사하며 조선 측에 길을 안내하라고 했는데, 길이 없다고 핑계를 대어 무마하였다.1710년에 우리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 살인하자 청나라에서 조사관이 나왔는데, 김지남이 추운 겨울날 길을 안내하지 않고 열흘이나 버텨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1712년 2월24일에 청나라에서 자문(咨文)이 왔는데, 얼음이 녹으면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 국경을 조사할테니, 조선 측에서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은 수십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2월15일에 이미 북경을 떠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김지남을 수역(首譯)으로 임명하였다. 김지남은 아들 김경문을 데리고 갔다. 이들은 혜산을 출발하여 오시천, 서수라, 화덕, 지당을 거쳐 박봉곶에 도착하여 압록강 근원을 조사하였다. 백두산 천지에 이르러 확인한 다음, 분수령에 내려와 정계비를 세웠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으므로 밀림과 벼랑, 강줄기 사이로 말 타고 갈 수 있게 길을 닦는 것만도 큰 일이었다. 천지 가까이 오자 목극등은 노인이라는 핑계를 대며 박권과 김지남을 떼어내려고 애썼다.5월6일에 백두산 등반 인원이 확정되었는데,59세 되던 김지남은 끝까지 우겨 따라가게 허락받고,55세 되던 박권은 결국 오르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가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기 위한 것인데, 책임자 양반은 빠지고 역관 김지남이 목극등과 대담하며 모든 일을 진행하였다. 백두산을 오가며 세 사람이 모두 기행일기를 썼는데, 김지남의 ‘북정록’이 박권의 ‘북정일기’나 김경남의 ‘백두산기’보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훌륭하다. 박권의 기행문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던 것이다. 양반 관원은 중도에 포기했지만, 전문가는 끝까지 따라가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의 증인이 되었다. 비록 정계비를 세웠지만, 나라가 약해지면서 국경도 없어졌다. 조선통감부를 설치해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에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정계비마저 없앴다. 최근에 한국 연구자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정계비의 받침돌을 발견하였다. 백두산 관광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김지남같이 책임있는 전문지식인을 다시 생각해 본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문화마당] 한국어의 시련/전기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얼마 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서 한국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했다고 한다. 이는 한국어가 국제 공인언어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다. 영어의 지배권이 점점 확대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소수 민족의 언어뿐만 아니라 약소 민족의 언어까지도 위협받고 있다. 반면 영어의 지배권은 점점 넓어져 가고 있다. 지구상에는 대략 5000개의 언어가 있다. 이중 3000여개의 언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고,2주에 하나씩 없어져 가고 있다고 한다. 언어가 없어진다는 것은 그 언어권의 문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로 크나큰 시련에 처해 있다. 미국의 세계 지배로 인해 사람들은 영어 실력을 쌓는 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인이나 일반 주부들까지도 영어 배우기에 열중할 뿐 아니라 각 지방자치단체나 학교에서는 앞다퉈 영어구역을 만들어 영어를 쓰지 않으면 그곳에서 생활할 수 없게 한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지경이다. 한국어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은 역사이면서 철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말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철학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곰’이라는 말은 ‘웅(熊)’이나 ‘베어(bear)’와 다르며,‘도깨비’라는 말은 ‘독각귀(獨脚鬼)’나 ‘고블린(goblin)’과 다르다.‘곰’은 ‘웅’이나 ‘베어’와는 달리 웅녀를 생각하게 하며 곰 토템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또한 ‘독각귀’나 ‘고블린’에는 씨름을 걸어 오는 장난스러운 ‘도깨비’가 떠오르지 않는다.‘곰’이나 ‘도깨비’라는 말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묻어 있고 우리 민족의 철학이 배어 있다. 바로 이 언어 속의 역사와 철학이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의 가치이며 힘이다. 우리는 한국어로 상상하고 한국어로 마음을 표현한다. 이는 단순히 거래나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영어와는 다르다. 우리가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묻어 나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한국인이 영어를 잘 구사한다고 해도 그는 생각을 한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어 속에는 우리 민족의 삶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시장경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영어의 지배권력이 점점 심화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만큼 우리말은 시련을 맞고 있다. 우리말의 시련은 이제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우리말의 시련은 있었다. 그 당시 지배계층은 우리말로 말하면서 한자로 표기하는 이중의 언어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말은 그러한 시련을 극복했다. 우리말의 역사는 이같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응전력을 갖고 있다. 우리말은 우리 민족의 시련과 늘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말은 민중의 애환과 함께해 오면서 성장해 온 민중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어의 시련은 한국어만의 시련이 아닌 우리 시대 민중의 아픔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금만능의 시대에 보수적인 가치가 횡행하고,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민중은 말과 더불어 아프다. 이 아픈 한국어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우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차별과 반인륜적인 전쟁을 끝내도록 해야 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정립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 다문화적 가치가 인정되고 한국어 또한 스스로 시련을 극복하리라 믿는다. 전기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9) 불암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9) 불암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

    마애불(磨崖佛)이란 벼랑바위에 새겨놓은 부처이지요.‘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바위 속에서 부처가 걸어나오고 있는 듯 높게 돋을새김해놓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부터는 갈수록 평면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아예 선각(線刻)에 가까워지지요. 이런 현상을 두고 조각기법이 퇴화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떨어지는 마애불은 이렇듯 세상의 평가가 후하지 않으니, 기대를 갖지 않게 마련이지만 뜻밖에 조선 후기 것이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그렇습니다. 학도암(鶴到庵)은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불암산(佛巖山) 남서쪽 기슭에 있는 작은 암자입니다. 관음보살상은 절 바로 뒤에 우뚝 솟은 높이 22m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졌지요. 학도암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멀리 삼성동 무역센터 너머로 청계산이 산세를 자랑하고, 가운데로 눈길을 옮기면 관악산과 남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산 아래 마들에서 시작된 건물 숲은 끝간 곳이 없는데, 군데군데 솟은 산은 회색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불경에 관음보살은 작고 흰꽃이 피어 있는 바닷가 봉우리에 살고 있다고 했으니, 이곳에 관음보살좌상을 새긴 사람도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학도암 마애불은 1872년 명성황후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사지(寺誌)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도암은 1624년(인조 2년) 창건된 이후 줄곧 작은 암자였다고 하지요. 절터가 가파른 경사지여서 앞으로도 큰 규모의 중창불사는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왕실의 발원으로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꼭 맞는 환경조건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학도암 마애불이 예기치 않은 감동을 주는 것도 이처럼 현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상징성이 더해졌기 때문이겠지요. 높이가 13.4m에 이르는 학도암 관음보살은 일단 크기로 참배객을 압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의 성격에 걸맞게 부드럽고 넉넉해 보이지요. 전체적으로는 조각이라기보다 그림처럼 느껴집니다.‘화폭’으로 쓰여진 바위는 자연석으로는 보기 드물게 희고 판판합니다. 좋은 ‘그림’의 바탕에 좋은 재료가 뒷받침되었습니다. 실제로 학도암 마애불은 화승이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새긴 것입니다. 마애불에는 명문(銘文)도 남겨놓았는데, 화승을 뜻하는 금어(金魚) 장엽의 이름이 보입니다. 명문에는 또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 등 석수(石手) 5명의 이름도 올려놓았지요. 마애불전문가인 이경화는 법명(法名)을 쓰지 않는 석수들을 1865년 시작되어 1872년 마무리된 경복궁 중건과 연결지었습니다. 선의 강약과 리듬을 살려내는 솜씨로 보면 궁중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장엽의 작품인 삼척 신흥사 아미후불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균형감각과 유려한 필선을 장기로 하는 그가 비계에 매달려 초본대로 바위 표면에 관음보살상을 그려놓으면 궁중 석수들이 선을 따라 새겨나갔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쯤되면 마애불 전통의 퇴화가 아닌 회화와 조각이 만나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불암산이 뒷동산이나 다름없는 중계동 주민이라면 우리 동네에 정말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다는 자부심을 한껏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종갓집 며느리/함혜리 논설위원

    경북 봉화 유곡리의 풍수는 예부터 영남의 대표적 길지(吉地)로 꼽힌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고 불린다. 조선 중종 때 충재(忠齋) 권벌이 자리를 잡은 이래 안동 권씨 집성촌을 이룬다. 이 마을 안쪽에 500년 세월을 고고히 지켜낸 권씨 종택이 있다. 마당 한쪽엔 조선시대 정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고 평가받는 청암정이 있다. 거북 모양의 바위를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의 높이를 조절해 가며 지었다. 자연미와 인공미를 조화시킨 충재 선생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지난 주말 안동 지역에 내려갔다가 닭실마을에 들렀다. 평소 굳게 닫혀 있던 고택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들여다 보니 대청에 광목 포장이 쳐져 있고 마당에는 조화가 늘어서 있다. 마을 사람에게 들으니 이날 종손의 발인이 있었다고 했다. 상여가 나간 빈집을 며느리들 대여섯이 지키고 있었다. 부인들은 운구행렬을 따르지 못하는 전통 때문이다. 종가 며느리, 듣기엔 좋지만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희생이 따르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8) 전주 원동 ~ 익산 여산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8) 전주 원동 ~ 익산 여산

    옛길은 이야기속으로 사라진 길이다. 한때 민족 이동의 대동맥이었던 호남대로는 이제 역사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길이다. 하지만 옛길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간직한 보고이다. 길을 다니던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옛길의 생명력은 또한 끈질기다. 국토의 개발이라는 거대한 밀물에 사라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원형이 보존된 곳이 적지 않다.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지역은 그런 의미에서 옛길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일 수 있다. 원(院)과 주막(酒幕), 객주(客主)는 사라지고 없지만 기쁨, 슬픔, 절망, 한의 역사를 간직한 옛길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전주의 뒤안길이 된 옛길 전북 지방의 옛길은 전북의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의 서쪽 변두리를 지난다. 호남대로란 옛말이 무색할 정도다.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지나는 옛길은 한적한 2차선 도로로 변했다. 옛날 원이 있었다 해 붙여진 전주시 원동을 지난 옛길은 전주∼군산간 국도 26호선과 교차한다. 국도 26호선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길이다. 봄이면 전국에서 가장 긴 일백리 벚꽃터널을 이룬다. 벚나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일교포들이 전해준 것이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길에 재일교포들이 일본의 나라꽃을 심은 길은 이제 전주와 익산, 군산을 연결하는 산업도로로 변했다. 옛길이 국도 26호선과 교차하기 직전 오른쪽에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이 자리잡고 있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남은 땅에 다양한 수목과 희귀식물을 심어 꾸민 수목원이다.33만 9380㎡의 부지에 178과 3010종의 수목을 재배하고 있다. 인터체인지 부근은 일제 시대에 미쓰비시 재벌이 운영하던 동산농장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이 있었던 곳이다. 전라선 철도도 동산농장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부설된 사설 협궤 철도였다. 그러나 동산농장이 있던 곳에는 전주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섰다. 옛길은 용덕·용정·구정마을을 지나면서 호남고속도로와 교차해 완주군 삼례읍을 향한다.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에 끼고 삼례까지 펼쳐지는 평야지대를 나란히 달린다. 옛길은 아련한 모습으로 논밭 사이를 지나다 만경강 상류인 삼례 한내 천변에서 끊겼다. 강을 건너던 다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내를 건너면 완산팔경(完山八景)의 하나인 비비정(飛飛亭)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비비정은 1573년(조선 선조 6년) 무관이었던 최영길에 의해 건립됐다. 이곳에 오르면 전주시내와 호남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한내가 흐르고 주변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풍광이 대단히 아름답다. 유유히 흐르는 물위로 기러기들이 내려앉는 풍경을 볼 수 있어 옛 조상들은 이곳을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했다. 양반들은 이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정취를 달랬다고 한다. 깊고 천이 넓어 군산, 부안에서 온 소금배와 젓거리배가 쉴새 없이 오르내렸다. 백사장 한쪽에는 큰 시장이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전주·남원·통영 방면으로 가는 ‘6대로’가 분기하는 곳이다. 호남대로는 비비정 옆 언덕을 지난다. ●동학농민군 2차 집결지 삼례 비비정 마을을 지난 옛길은 삼례읍 중심지에 들어선다. 삼례초등학교 앞을 지나 원삼례마을을 향하면서 헤어졌던 국도 1호선과 다시 교차한다. 국도 1호선은 익산쪽을 향하지만 옛길은 호남고속도로와 나란히 삼례중앙초등학교 옆을 지난다. 삼례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1894년 9월(음력) 10만여 농민군이 항일 투쟁의 깃발을 앞세우고 재집결한 2차 봉기 장소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과 탐관오리를 아내기로 결의한 농민군들은 삼례뜰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삼례봉기는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출발이요 새로운 한국사회를 밝히는 위대한 횃불이었다. 이에 앞서 1892년 11월(음력)에는 동학교도 수천명이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탄원하기 위해 모인 장소다.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다. 삼례집회는 전라감영의 무력진압을 각오한 것으로 실은 탐관오리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들은 삼례역에 모여 두차례 전라감영에 의송(議送)을 보내 동학 교조의 신원(伸寃)을 할 것과 동학도에 대한 수탈 중지를 요구했다. 삼례집회는 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동학도에 대한 부당 주구금지 조치를 얻어냈다. ●백제 도읍지 익산 호남고속도로 삼례인터체인지를 지나면 행정구역이 변한다. 옛길 남쪽은 완주군 삼례읍, 북쪽은 익산시 왕궁면이다. 왕궁은 백제문화제가 널리 분포되고 있는 지역이다. 제석사지(사적 제405호),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함벽정(전북도 유형문화제 제127호) 등이 있다.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학술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설이 전해지고 있다. 왕궁리 유적지에는 백제계 석탑 형식에 신라탑 형식이 가미된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국보 제289호)이 남아있다. 옛길은 왕궁면 남촌마을과 삼례읍 농원마을 사이를 지나 봉광동을 스친다. 통정·역기·신기마을을 지날 때까지 왼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계속해 달린다. 전광리에서 호남고속도와 교차한 옛길은 왕궁저수지를 향한다. 왕궁저수지는 1931년 일제시대에 준공됐다. 옛길은 왕궁저수지 건설로 일정 부분이 수몰됐다. 대동여지도에 옛길은 왕궁저수지 중앙을 통과하는 것으로 기록돼있다. 저수지를 지나 연봉정 마을을 지난 옛길은 탄현고개를 넘는다. 연봉정 마을은 주막촌이었으나 현재는 초라한 농촌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탄현고개를 넘으면 익산시 여산면이다. 이곳부터 옛길은 국도 1호선과 다시 한몸이 된다. ●천주교 성지 여산 여산은 한양에서 내려올 때 호남의 초입 고을로 위세를 떨쳤던 지역이다. 호남에 들어가기 전 중요한 길목이어서 주막과 객주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장급 여관 하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면소재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여산은 한때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천주교의 전래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빨랐다. 그만큼 박해도 많이 받았다. 여산성당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여산부의 속읍지였던 금산·진산·고산 등지의 심산유곡에 숨어있던 신자들이 여산관아로 잡혀와 모진 형별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고 1868년 처형돼 순교한 성지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철거된 동헌이 남아 있다. 동헌은 사또가 있었던 관아다. 여산동헌(전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은 조선 후기 관아 건물 가운데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된 몇 안되는 귀중한 문화재다. 동헌 앞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붙여 질식사시킨 ‘백지사(白紙死)터 성지’가 남아 있다. 옛길은 여산 동헌을 지난 뒤 1번 국도와 다시 만나 충청남도 논산시를 향한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신정일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 “옛길 복원해 보행권 되찾아야”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옛길을 복원해 국민들의 보행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53) 대표는 “옛길을 복원해 보행권이 확보되면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 우리 국토의 재발견과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땅 걷기 모임은 차를 타는 것 보다 느리게 걸으며 우리 국토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발족했다.‘보행권 되찾기 운동’과 ‘옛길 문화재 지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두발로 우리 땅을 걷자는 뜻으로 11월11일을 ‘길의 날’로 정했다. “우리 산, 우리 강, 우리 국토가 너무 아름다워 걷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며 얻은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을 책으로 쓰고 있다. ‘다시 쓰는 택리지’를 비롯해 그가 펴낸 책은 무려 32권이나 된다. 모두 그가 발로 뛰며 몸으로 느끼고 본 것을 엮은 것이다. 영남대로, 삼남대로는 물론 한강, 낙동강, 금강, 만경강 등 8개 강을 걸었고 400개의 산을 올랐다.25년 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걸은 거리만 해도 지구를 몇바퀴 돌 정도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현대판 김정호’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옛날 만경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주로 배를 탔지요. 비비정이 완산팔경으로 꼽히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현재 왕궁리 근처에 가면 축산 폐수가 악취를 풍기지만 옛 백제의 숨결을 느끼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의미 깊은 곳”이라며 “호남대로는 걸으면 걸을수록 깊은 맛을 느낄수 있다.”고 강조한다. “옛 선비들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답사를 하다 지치면 책을 읽거나 쓰고, 이 역시 지치면 다시 답사를 떠나지요.” 그는 이처럼 요즘도 일주일에 3일은 답사를 위해 걷고 4일은 책을 쓴다. 신 대표는 “걷는 것은 곧 자연 사랑이고 자연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하나의 첩경”이라며 옛길 복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Local] 진도 지력산에 승마장 조성

    전남 진도군은 고려시대 관마청이 설치됐던 역사, 지리적 여건을 활용해 승마장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군은 고려시대에 관마청과 조선시대에 국영 목장이 존재했던 지산면 지력산 일대를 승마장 조성의 최적지로 판단하고 이 일대에 승마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진도 서남쪽에 위치한 지력산은 기후가 따뜻해 초지 조성이 쉬울 뿐만 아니라 인근에 세방낙조,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지산 소포 농촌마을 종합개발 등의 사업지와 인접해 관광 연계 효과가 뛰어난 곳이다.
  • ‘글로벌 게이머 입맛’ 공략

    ‘글로벌 게이머 입맛’ 공략

    ‘이제 한국시장은 좁다.’ 온라인게임업체들이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산 온라인게임은 예전에도 해외시장에서 꽤 인기를 누렸다. 국내 인기작을 그대로 해외에 소개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국제용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게임 개발단계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고 있다. ●해당 국가 언어변환 자유자재 곧 선보일 대작 가운데 하나인 웹젠의 다중접속슈팅게임(MMOFPS) ‘헉슬리’도 이런 경우다. 김남주 웹젠 사장은 “헉슬리는 지난 2004년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 시장 등 세계 시장을 겨냥해 만든 게임”이라고 말했다. 탄탄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북미 시장의 기호에 맞췄다. 단순한 총싸움이 아니라 총싸움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북미 시장에서 콘솔게임(비디오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는 점도 주목했다.X박스360용 버전을 개발, 국내 최초로 PC온라인과 콘솔을 아우르는 ‘크로스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다.X박스360용 헉슬리는 내년 말 출시를 앞두고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비공개서비스 중인 예당온라인의 ‘프리스톤테일2’도 마찬가지다. 전작인 프리스톤테일이 수출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에도 브라질, 필리핀, 일본 등 해외 6개국에서 호평이 이어지자 후속작은 아예 처음부터 수출에 초점을 맞췄다. 해외 수출의 경우 해당 국가의 언어변환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 프리스톤테일2는 개발 때부터 다른 언어로 쉽게 변환할 수 있도록 해놨다. 서비스지역에 따라 정액제나 부분 유료화 모두 적용할 수 있다. 넥슨의 ‘카트라이더’도 비슷하다. 카트라이더는 최근 시나리오 모드를 추가하는 등 대수술을 했다. 시나리오 모드를 좋아하는 미국·유럽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넥슨 관계자는 “해외 이용자들의 취향에 맞춘 업데이트”라고 말했다. 또 차이나 드레스 등 아이템도 수출에 맞도록 만들기도 한다. 넥슨의 해외시장 공략의 ‘효자’인 메이플스토리도 아이템은 물론 해당 국가 고유의 맵을 선보였다. 타이완의 경우 타이베이 시내의 모습을 담기 위해 현지 파트너와 맵에 들어갈 상징적 건물을 협의하기도 했다. ●현지에 게임개발 스튜디오도 엔씨소프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북미에 게임개발스튜디오를 3개나 만들었다. 현지 개발자들을 통해 현지 게이머들의 입맛에 맞는 게임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첫 시험작이라고 할 수 있는 리차드게리엇의 ‘타뷸라 라사’가 다음달 북미 시장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해외용으로 만든 게임이 국내에서 히트치기도 한다. 한게임의 ‘군주 스페셜’이 좋은 예다. 인기를 끌었던 군주의 글로벌 버전인 군주 스페셜은 수출용인 만큼 배경을 조선시대에서 중세 유럽으로 바꿨다. 한게임 관계자는 “해외용으로 개발했지만 일본과 중국에서 반응이 워낙 좋아 국내에 소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은평구 미술품 ‘인사동 나들이’

    서울 은평구는 9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은평 문화예술전’을 연다고 5일 밝혔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지역 미술인의 모임인 은평미술인협회 작가들과 전국미술공모대전 수상자들의 서양화·동양화·공예·조각 등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또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옛 여인의 머리 모양을 시대별로 보여주는 ‘한국 여인의 발(髮)자취’전도 함께 열린다. 한국고전머리협회가 주축이 된 이 전시회는 증산동을 중심으로 한 선사시대 여인, 갈현동 박석고개를 넘던 백제 상류층, 불광동 지역의 어수정에서 숙종을 만난 장희빈 등 옛 여인들의 머리모양을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장녹수,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과 한상궁 등의 가체를 재현한 실물도 전시한다. 구는 이 행사를 매년 구민의 날 기념으로 은평지역 내에서 열었으나 은평의 문화예술을 많은 시민들에게 널리 보여주기 위해 올해부터 인사동 등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열기로 했다. 4일 열린 개막식에는 은평지역구 출신 이재오(한나라당)·이미경(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등을 비롯,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노재동 구청장은 이날 “한 점의 그림은 세상을 담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힘을 갖고 있다.”며 “은평구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한편 은평구에는 미술협회에 등록한 미술가 110명, 문인협회 회원이 47명이나 거주하고 있다.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씨줄날줄] 백두산 소나무/함혜리 논설위원

    한국인의 문화를 소나무의 문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기가 태어나면 치는 금줄에 솔가지를 꼽는 것을 시작으로,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삶이었다. 마을 어귀의 장승부터 건축, 가구, 기구를 만드는 데 소나무를 사용했고, 송홧가루로는 떡을 만들었으며, 솔잎이나 솔방울로는 술도 담근다. 지조를 얘기할 때에도 소나무에 비유하고, 시문학이나 회화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 민족정서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소나무다.‘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애국가 구절에서도 보듯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민요 ‘성주풀이’의 원래 이야기인 성주신화는 천상에서 살던 성주가 땅으로 쫓겨와서 안동에 거처를 정한 뒤 제비에게 소나무씨를 전국에 퍼뜨리게 했다고 전한다. 그 때문인지 소나무는 제주에서 울릉도,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다.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줄기가 붉은 적송이다. 줄기가 흑갈색을 띤 검은 흑송은 바닷가에 많다. 좋은 소나무가 나는 곳으로 경북 봉화, 강원 평창, 안면도 바닷가, 설악산 한계령을 꼽는다. 북한에도 좋은 소나무들이 많은데 특히 백두산의 이도백하(二道白河) 부근에 자생하는 미인송(美人松)이 유명하다. 미인송은 표피가 황색으로 약 40∼50m씩 수직으로 자라기 때문에 최양질의 재목으로 꼽힌다. 이런 질 좋은 소나무는 ‘황장목’이라고 해서 조선시대 왕궁의 건축에 주로 사용했다. 소나무숲에 ‘황장금표’라는 표시를 해 놓고 국가에서 특별 관리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특별 수행원으로 참가한 김근식 경남대 교수가 3일 평양 인민궁전에서 열린 문화·예술·학계 간담회에서 백두산 소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가져와 광화문 기둥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했다. 북측도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의 소나무가 광화문 기둥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이다.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큰 욕심은 아니길 바란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8) 예산 향천사 멸운대사 부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8) 예산 향천사 멸운대사 부도

    서양의 묘지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새겨놓은 무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수도원 묘지를 찾았을 때도 문호 도스토옙스키와 작곡가 차이콥스키·무소르그스키·글린카의 무덤에 예외없이 흉상이 세워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기념물에는 얼굴 옆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브람스 무덤에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물론 같은 묘지에 묻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처럼 하프나 음악의 요정같은 상징적인 장식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지요. 우리나라에는 무덤에 주인의 얼굴을 새겨놓는 전통은 없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큰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일종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면, 충남 예산 향천사(香泉寺)에 있는 멸운대사 부도는 유일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예산(禮山)은 백제시대에는 오산(烏山)으로 불렸습니다. 이 오래된 땅이름의 흔적은 지금도 예산의 안산인 금오산(金烏山)에 남아있지요. 향천사는 이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16년(656년) 의각대사가 세웠다고 창건 설화는 전합니다. 의각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한 뒤 불상을 모시고 돌아와 석달동안이나 절 지을 자리를 찾아다녔다고 하지요. 어느날 금빛 까마귀(金烏) 한 쌍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갔더니 향기로운 샘물(香泉)이 있어, 절을 짓고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고 붙였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예산과 금오산, 향천사가 서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읍내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을 만큼 가깝고, 풍광도 뛰어난 향천사와 금오산은 주민들의 가장 훌륭한 휴식처이자 등산코스가 되고 있지요. 향천사에는 두 기의 옛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밭은 절에서 개울 건너 100m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도가 멸운대사 것입니다. 몸통의 정면에 ‘멸운당대사 혜희의 탑(滅雲堂大師惠希之塔)’이라고 새겨놓았지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팔각 지붕돌의 정면으로 내민 추녀마루 끝에 작은 인물상이 하나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실성이 느껴지는 얼굴 모습은 왕방울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코가 커지는 바람에 다소 희화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장난스럽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고승다운 품격에 연륜이 더해져 너그러운 인상을 풍기지요. 향천사에는, 멸운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여 금산전투에 참여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불타버린 절을 중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합니다. 하지만 멸운대사 부도에는 숙종 34년(1708년)에 해당하는 강희 4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과는 100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요. 지금은 수덕사가 보관하고 있는 향천사 동종에 숙종 28년(1702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멸운대사가 주석하며 대대적으로 절을 중건한 시기는 숙종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높이 102.6㎝의 향천사 동종은 일제에 공출되어 예산역까지 실려갔다가 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멸운대사탑은 새로운 부도의 양식을 창조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후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멸운대사탑에서 보듯 초상을 새겨놓고보니 ‘깨달은 자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강조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dcsuh@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이영애 출연 DVD등 선물

    [2007 남북정상회담] 이영애 출연 DVD등 선물

    어두컴컴한 방. 벽에 걸린 소형 스크린에 이영애·배용준 등 한류 스타들이 등장한다. 소파에 앉아 화면에 빨려들 듯 몰입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끝나면 김 위원장은 당분간 여가시간을 이렇게 보내지 않을까 상상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영화광인 김 위원장에게 3일 남한 영화·드라마 DVD를 한아름 선물했기 때문이다.선물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념성이나 선정성을 띠지 않는 휴먼 드라마류가 주종이다. 박중훈·안성기가 출연한 ‘라디오스타’는 한물간 철없는 록스타와 그의 매니저 사이의 우정을 담은 훈훈한 이야기다.1905년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을 소재로 한 송강호·김혜수 출연의 ‘YMCA야구단’도 코믹 감동물이다. 또 조승우·김미숙 출연의 ‘말아톤’, 최민식·손예진 등이 공연한 ‘취화선’도 포함됐다. 영화 선물 중엔 ‘혈의누’ 같은 스릴러물도 있다. 차승원·윤세아 등이 공연한 이 영화는 조선시대 말 살인사건이 소재다. 또 애니메이션 판타지 영화인 ‘마리 이야기’도 포함돼 있어 김 위원장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한류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와 ‘대장금’ 같은 TV 드라마도 김 위원장에게 건네졌다. 특히 이영애씨 팬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을 위해 ‘대장금’ DVD에는 이씨가 친필 사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노 대통령은 숙소인 평양 백화원 영빈관을 찾은 김 위원장에게 DVD 선물을 보여주면서 “내용도 좋지만 화면도 좋다. 요즘은 줄거리 못지않게 화면을 화려하게 처리해서 관심을 끄는 영화가 많다.”고 우리 기술을 언급했다. ●나전칠기 병풍·8도茶도 선물 노 대통령은 경남 통영의 나전칠기로 만든 12장생도 8폭 병풍과 무궁화 문양의 다기 및 접시,8도 명품차 등도 선물로 준비, 진열해 놓고 일일이 설명했다.12장생도에 대해 노 대통령은 “남쪽의 장인(匠人)이 만들었다.”고 설명했고 김 위원장은 “귀한 진품을 가져다 주셨다. 감사하다.”고 답했다. 2000년 정상회담 때 남측은 진돗개 2마리와 60인치 TV 1대,VTR 3세트, 전자오르간 등을 선물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옛길 4곳 국가지정문화재로

    옛길 4곳 국가지정문화재로

    서울신문사가 지난해 4월부터 연재물 ‘다시 걷는 옛길’을 통해 재조명한 옛길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다. 옛길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2일 이달 중순 경북 문경새잿길 및 문경 관갑천(串甲遷·일명 토끼비리·‘비리’는 벼루의 사투리임), 경북 죽령(충북 제외) 등 서울신문 지면에서 재조명한 옛길 3곳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강원 대관령 옛길도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1개월간의 예고 기간에 토지 소유자 및 해당 지자체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11월 명승으로 지정고시할 방침이다. 옛길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 복원과 보수·정비, 개발 등에 필요한 예산 70%를 국비로 지원받는다. 문경새잿길은 조선시대 대표적 관도(官道)로 주요 시설이 잘 보전돼 있는 등 역사적·민족적 가치가 크다. 관갑천은 영남대로 중 험한 길로 유명하며 옛길 곳곳에 주막거리와 성황당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옛길 문화를 보여준다. 죽령은 길의 개척자인 신라 충신 죽죽과 고구려 명장 온달 등 역사 인물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오는 등 유서 깊은 옛길이다. 서울신문은 ‘다시 걷는 옛길’ 영남대로 후속으로 호남대로를 연재 중이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여성&남성] 미혼남녀, 양보 못할 내 반쪽의 조건

    [여성&남성] 미혼남녀, 양보 못할 내 반쪽의 조건

    “평생 내 옆에 있을 나의 반쪽에게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 만은 양보 못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이상형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씩 줄인다.“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기대했던 남자는 “밉상만 아니면 된다.”고 하고 “월급 1000만원 이상”을 기대했던 여자도 차츰 “남들 받는 정도만…”을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미혼 남녀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마지노선´이 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겐 이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남·여들의 속내를 들어봤다. ■돈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경제력 ●뭐니뭐니 해도 ‘머니’ 직장인 윤모(24·여)씨는 잘 나가는 전자회사의 신입사원이다. 대학시절 많은 연애를 경험했던 윤씨는 남자친구는 물론, 훗날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으로 단연 ‘경제력’을 꼽는다. 그는 “대학교 새내기 때 잘 생긴 남자들과 여러 번 사귀어 봤는데 외모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면서 “경제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이모(30·여)씨가 꼽는 ‘애정의 조건’ 역시 경제력이다. 늦깎이 의대생인 이씨는 동료들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 앞으로도 전공분야를 공부할 생각이다. 여기에 유학까지 계획하고 있어 미래의 남편이 최소한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래의 남편에게 모든 것을 기대려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해서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개업을 하지 않고 계속 공부할 생각이니까요.” 직장인 김모(26·여)씨도 마찬가지다. 김씨가 말하는 ‘남편 선택의 마지노선’ 역시 경제력이다.“경제적 여유가 마음의 여유로 직결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각박한 세상인데 힘들고 어렵게 살면 사람이 모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제가 경제력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김씨는 이런 자신의 마지노선을 속물 근성으로 이해하는 주변의 시선이 안타깝다고 전한다.“제가 경제력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속물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인 사회, 돈이 있어야 마음도 넉넉해지는 이 사회가 문제가 아닐까요. 어쩌면 저 역시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죠.” ●난 기독교, 그는 불교 절대 안돼! 약사로 일하는 이모(29·여)씨는 ‘종교’가 변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 사절”이다. 그는 “서로 사랑했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극렬하게 반대해서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면서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부모님의 말씀을 따른 데 만족한다.”고 했다. 이씨는 “내가 기독교인데 제사를 지내는 집안 사람과 혼인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죠.”라고 말했다. 새내기 은행원 홍모(25·여)씨는 배우자의 조건으로 돈, 외모, 학벌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저는 배우자라면 인생에 대한 철학과 기본적인 세계관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종교가 다른 사람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홍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집안 환경의 영향이 크다.“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종교가 다르고, 또 엄마가 믿는 신앙도 달랐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거든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홍씨는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같이 기도할 수 있는 배우자를 원한다.”고 털어놨다. 회사원 최모(33·여)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모태신앙으로 일요예배와 수요예배를 빼놓지 않는 최씨는 “남자 친구든 남편이든 무조건 교회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의다. 이유는 단 하나.“죽고 나서 저는 천국 가고 남편은 지옥 갈 텐데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래도 중요한 건 성격과 집안환경 까탈스러운 남자친구랑 사귀면서 많이 힘들었다는 회사원 박모(30·여)씨는 다른 건 포기해도 ‘성격’은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같이 밥을 먹을 때나 다른 여가시간을 보낼 때 남자친구가 이것 저것 따지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남자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회사원 임모(28·여)씨가 생각하는 마지노선은 ‘키’다.“소개팅 나가서 한 시간 동안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일어서는데 정수리가 보여서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보내버렸지요.” 많이 양보해서 남자 키가 175㎝ 정도면 만족할 수 있단다. 참고로 임씨의 키는 160㎝이다. 중학교 교사 김모(24·여)씨는 이성을 고르는 첫번째 기준으로 집안환경을 꼽았다. 김씨는 많은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것은 아니지만 예전 남자친구들을 생각해보면 집안환경이 한 사람의 품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가정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언제나 나를 배려해 준 반면 3대독자 아버지의 큰아들이었던 다른 남자친구는 늘 권위적이고 자기밖에 몰랐다.”면서 집안환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우자가 ‘적어도 나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기준을 마지노선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취업준비생 박모(22·여)씨는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일 것”이라면서 “자기보다 조건 나쁜 배우자를 원하는 경우는 없을 것 같아요. 과분한 상대를 원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나보다는 조금씩 나은 면을 가진 상대를 찾는 게 당연한 거죠.”라고 말한다.“집안이든 재산이든 외모든 학벌이든 제가 가진 것보다 더 못한 사람이라면 배우자로 선택하기 망설여질 것 같아요.” 강국진 이경원기자 betulo@seoul.co.kr ■결혼 후에도 함께 일해야 맞벌이 ●배우자가 튼실한 직장을 가졌으면 회사원 송모(26)씨는 맞벌이를 ‘애정의 마지노선’으로 꼽는다. 주식 등 재테크에 한참 재미를 붙인 송씨는 결혼 뒤에도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돈은 필요충분 조건입니다. 집 값에 교육비, 여가비 등 돈은 끝없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 일해서는 정말 벅차죠.” 회사원 원모(25)씨는 미래의 배우자가 ‘여유가 있는 직업’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씨는 아내마저 바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가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저처럼 바쁜 사람과 결혼한다면 가정은 파탄날 겁니다. 제 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가정생활까지 완벽히 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원씨는 집안일만 하는 여성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여자는 집안일만 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식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집안일은 당연히 함께 해야죠. 저도 맞벌이를 원해요. 단지 저보다 조금 더 신경써줄 여자를 원할 뿐이죠.” 연구원 이모(29)씨가 배우자를 고르는 마지노선은 ‘튼실한 직장’이다.“집안 배경이나 재력이 부족해도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 다른 게 다 만회가 돼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 집안이 어려워진 뒤부터는 그런 생각이 절실해졌어요.” 얼마 전 친구 소개로 만난 여성과 결혼한 공무원 김모(32)씨도 같은 생각이다.“성격이나 관심사가 비슷하다던가 하는 것은 기본이죠. 그것 이상을 찾는다면 역시 현실적으로 직업이죠.” ●성격도 맞고 종교도 맞아야 직장인 김모(27)씨는 이성 친구를 고르는 기준으로 성격과 가치관을 꼽았다. 김씨는 “얼마 전 4년이나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면서 “그렇게 오래 교제했지만 성격이 너무 달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교회를 다니는 여자 친구는 김씨의 종교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김씨는 앞으로 어떤 여자 친구를 만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서로를 잘 이해해 주고 성격이 잘 맞는 친구였으면 좋겠다.”면서 “서로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배려심 있는 여자라면 금상첨화”라고 답했다. 대학원생 우모(28)씨는 여자 친구를 고르는 기준으로 종교를 꼽았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라고 밝힌 김씨는 “서로 신념이 다른 사람과 한평생을 살거나 교제한다는 건 끔찍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같은 믿음을 갖고 살아가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가능하면 같은 종교를 지닌 여성과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몸 튼튼, 마음 튼튼 대학생 남모(24)씨는 배우자가 갖추어야 할 마지노선은 ‘건강’이라고 주장한다.“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겪었던 가족들의 고통은 말도 못해요. 특히 어머니가 고생을 정말 많이 하셨죠.”라는 남씨는 건강하고 밝은 사람이 좋다고 말한다. “다른 좋은 걸 아무리 갖고 있어도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배우자가 아픈 것만큼 괴롭고 힘든 짐은 없으니까요.” 회사원 김모(29)씨는 ‘낭비벽이 없는 여자’를 원한다. 명품만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있는 김씨는 낭비벽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몸으로 느껴봤다. “명품, 명품 타령하는 여자 친구 때문에 혼쭐이 났지요. 제 지갑이 얇아지는 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절약하면서 소소한 생활의 즐거움을 잘 아는 여자를 만나길 바랍니다.” 김씨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불어닥친 명품 코드가 못마땅하다. 그는 사랑마저 ‘명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사랑을 환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사랑도 생활의 일부입니다. 생활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사랑은 유효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바로 그 생활을 파탄내기 때문입니다.” ●연상이 좋다? 싫다? 회사원 민모(27)씨가 꼽는 ‘애인 자격’에는 나이제한이 있다. 민씨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결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지금까지 연상만 두 번을 사귀어 봤습니다. 그 때마다 여자 친구는 저를 동생으로 생각하더라고요. 그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당초 민씨의 이상형은 ‘누나 같은 여친’이었다.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 그러나 민씨는 누나와 여자 친구는 확실히 다른 존재라는 걸 곧 알게 됐다. “누나의 보살핌은 제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의 감정을 잘 끌어내지 못하더군요. 그건 사랑이라기보단 편안함이었습니다. 편한 친구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에요.” 감모(30)씨는 반대다.“장래 배우자는 꼭 연상으로 얻고 싶다.”는 게 그의 신조다.“나이 차가 나는 여자 친구도 사귀어봤고 동갑내기도 만나 봤지만 어리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맏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동생들 밥이며 빨래까지 챙겨주는 등 어머니 노릇까지 해야 했던 감씨는 “편안하게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그리웠다고 고백했다. 강국진 이경원기자 betulo@seoul.co.kr
  • 사명대사 호신불 100년만에 ‘햇빛’

    사명대사 호신불 100년만에 ‘햇빛’

    경북 포항시의 한 사찰이 소장하고 있던 금동여래좌상이 조선시대 사명대사가 호신불로 모셨던 불상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30일 “경북 포항 대성사에 있는 금동여래좌상이 정밀조사 결과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사명대사의 원불(願佛)로 확인됐다.”면서 이달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불상은 금강산 건봉사 낙산암에 소장돼 있다 1900년대 초에 사라진 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져 왔다. 그러다 문화재청과 불교 조계종이 지난해부터 함께 벌이고 있는 불교문화재 조사작업 과정에서 100여년 만에 발견됐으며, 지난 4월 포항시가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한 바 있다. 포항시 북구 용흥동 조계종 대성사가 소장해온 이 금동여래좌상은 높이 9.4㎝ 규모로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거의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상 내부에서 사명대사의 친필 원장도 국내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이 불상과 원장이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보고 이달 안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고시할 예정이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홍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다.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할 수 있는 명예직인 셈이다.‘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성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추석이후 이젠 어떤 영화 볼까

    추석이후 이젠 어떤 영화 볼까

    추석 연휴가 끝난 뒤 하반기 영화 판도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상반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물량공세에 밀린 한국 영화는 ‘디 워´ 등으로 겨우 자존심을 지켰지만, 최근 눈에 띄는 흥행작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추석 극장가 성적표를 통해 하반기 극장가의 흥행기상도를 살펴본다. 이번 추석 영화가의 화제 가운데 하나는 스타 감독들의 컴백이었다.‘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은 2년 만에 신작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을 내놨다.100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도 ‘라디오스타´ 이후 1년만에 ‘즐거운 인생’으로 극장가를 노크했다. 하지만 지난 12일 나란히 개봉한 ‘권순분’과 ‘즐거운 인생’은 추석 연휴 기간(21일부터 26일까지)에 각각 전국 관객 67만,44만명을 동원해 전작들의 화려한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다만 ‘친구’,‘태풍’의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감성 멜로영화 ‘사랑’(20일 개봉)이 같은 기간 110만명을 동원하며 체면을 지켰다. 이번 추석에는 익숙한 소재에 대중성을 내세운 코미디 영화들도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2007년판 ‘엽기적인 그녀’인 ‘두 얼굴의 여친(12일 개봉)은 추석 연휴 기간 21만명(누계 66만명)을 동원하는데 그쳤고, 조폭코미디의 대표작 ’두사부일체‘ 3편격인‘상사부일체’(19일 개봉)도 추석 기간 전국 58만명(누계 64만명)을 동원하며 1,2편 도합 960만명이라는 흥행 스코어에는 크게 못 미쳤다. 이처럼 스타감독들의 성적표는 제각각이지만, 하반기에도 명감독들의 신작 행렬은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8월의 크리스마스’‘봄날은 간다’‘외출’의 허진호 감독의 신작 ‘행복’이 새달 3일 개봉하고,‘고스트 맘마’‘하루’와 드라마 ‘연애시대’로 잘 알려진 한지승 감독이 11월중 영화 ‘싸움’으로 컴백한다. 또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형사’ 등 특유의 영상미학을 자랑하는 이명세 감독이 연출한 강동원 주연의 미스터리 멜로 ‘M’은 오는 10월26일 개봉한다. 영화인들에게 대중성과 실험성은 언제나 딜레마지만, 하반기 충무로는 대중성을 노린 작품과 신선한 소재로 다양해진 관객들의 입맛을 공략할 태세다. 전통적으로 멜로가 강세를 보이는 10월에는 임수정·황정민의 ‘행복´ 과 일본 원작 소설과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어깨 너머의 연인´,11월에는 김태희·설경구 주연의 ‘싸움´ 등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사랑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시각을 제시할 예정. 이밖에 조선시대 궁녀의 삶을 다룬 미스터리 ‘궁녀´와 요리를 주제로 한 허영만 만화 원작의 ‘식객´등 색다른 주제의 영화들도 눈길을 끈다. 이번 추석 극장가에서 눈에 띄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외화의 선전이다. 미국 영화의 비수기에 해당하는 추석은 한국영화의 독무대나 다름 없었지만, 이번에는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얼티메이텀´과 니콜 키드먼 주연의 ‘인베이젼´이 추석 기간 각각 81만명과 32만명을 동원했다. 특히‘본 얼티메이텀´은 같은 기간 서울 관객 동원 1위에 전국 관객 150만명을 돌파했다. 이 영화의 홍보 관계자는 “이번 추석은 지난해에 비해 전체 관객 수가 줄었고,TV에서 신작 한국 영화를 많이 방영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액션 외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트랜스포머´ ‘캐리비안의 해적3´ ‘스파이더맨3´등이 장악한 상반기에는 못 미치지만, 외화의 공세가 계속될지도 관심거리다. 지난해 개봉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은 뉴욕 상류층 코미디 ‘내니다이어리´가 새달 3일 개봉되는 것을 비롯, 할리우드에서 ‘디 워´와 대결을 펼쳐 관심을 모은 조디 포스터 주연의 ‘브레이브 원´도 11일 개봉한다. 또한 밀라 요보비치가 섹시한 여전사로 나오는 ‘레지던트 이블3´와 일본의 아이돌 스타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히어로´도 각각 18일과 25일 한국 영화팬들을 찾는다. 뚜렷한 대작이 없는 가운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충무로 기상도. 이것이 하반기 극장가에 탄생할 새로운 승자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한’(恨). 우리 민족의 지배적 정서로 가장 널리 꼽혀 온 단어다. 감정적 차원을 일컫는 단어 ‘한’은 명확한 실체를 갖는 예술과 역사의 차원으로 영역을 넓히며 ‘한의 역사’ ‘한의 예술’ 등 부자연스런 조합의 신조어를 양산해냈고,‘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恨民族)의 동음이의어적 경계를 오가며 양자의 의미를 뒤섞었다.‘한’이란 지극한 ‘비애미’(悲哀美)는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을 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언술과 맥을 같이 했고, 토끼 모양으로 형상화된 한반도 지도를 머릿속에 새기도록 만들었다. 딱히 증명할 근거도 없고, 때론 사실 관계와도 다른 이 같은 의미 확장의 배경엔 뜻밖에도 ‘한’을 심어준 나라 일본의 한 민예운동가이자 미술평론가의 역할이 지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한국식 이름 유종열로도 잘 알려진 사람. 야나기는 일제 식민지 시절 대표적인 친한파였다. 그는 조선시대 민화에 ‘민화’(民話)란 이름을 최초로 부여해 학술적 체계화를 시도했고,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해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자 철거를 적극 반대하며 한국의 예술품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1924년엔 서울에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36년엔 일본 도쿄에서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그가 수집했던 일본 내 조선 민화 120여점이 2005년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됐고, 역시 그가 수집한 260여점의 자료가 지난해 11월부터 3달간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란 제목으로 일민미술관에서 공개됐다.84년 9월엔 전두환 정권이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보관문화훈장도 추서했다. 야나기는 누가 뭐래도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같지 않은 일본인’이었다. 야나기는 그렇게 알려져왔다. 그렇게 알려지며, 야나기는 침략국 일본의 야만성에서 분리돼 ‘은인’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서울신문 기자를 그만둔 뒤 한·일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온 정일성 씨가 최근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이란 책을 펴냈다. 야나기의 또 다른 얼굴을 가감없이 들춰낸 저자는 야나기를 민예운동가가 아닌 ‘문화정치 이데올로그’로 파악한다. 저자의 야나기 평가는 가혹하다.“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통치술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는 데 일조한 제국주의 공범”이자 “일제의 무력진압에 상처받은 한민족의 마음을 달래려 한 심리요법사, 식민지 조선통치 훈수꾼”이라고 규정짓는다. 저자가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근거는 야나기의 친한파적 기질을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자료로 평가돼온 글,1919년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발표된 ‘조선인을 생각한다’다.3·1운동 당시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며 썼다는 이 글은 이듬해 4월 동아일보에 번역 게재됐고, 게재 직후엔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란 또 다른 글이 같은 신문에 실리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두 글이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조선 독립을 돕는 내용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며 몇 대목을 짚어낸다.“반항(독립만세운동)을 현명한 길이라거나 칭찬할 태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조선인을 생각한다’)”고 한 것이나 “우리가 총칼로 당신들을 해치게 하는 것이 죄악이듯이, 당신들도 유혈의 길을 택해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조선의 벗에게 드리는 글’)”고 강조한 점 등. 요컨대 야나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이렇다.‘사이토 마코토 3대 총독의 문화통치 두뇌’. 이 책을 통해 70년대 거세게 일었던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띌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30일부터 은평 파발 축제

    30일부터 은평 파발 축제

    조선시대의 통신망이었던 파발(擺撥)이 통일로에서 재현된다. 은평구는 30일부터 10월5일까지 구파발 인공폭포, 연신내 물빛공원, 구청광장 등에서 ‘은평파발축제’를 연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축제는 김종엽, 윤문식, 김성녀 등이 출연하는 마당놀이 ‘토선생전’(30일)을 비롯해 20개의 다양한 문화행사로 꾸몄다. 10월1일 오후 2시에는 구파발 인공폭포에서 ‘통일로 파발제’가 열린다. 파발의 지역노선 중 하나인 서발(西撥)의 첫 역참이었던 구파발의 지리적 역사성을 재조명하고,400여년 전 파발을 재현하는 행사다. 파발제의 개막을 알리는 북소리를 시작으로 320명으로 구성된 파발단이 구파발 인공폭포∼연신내 물빛공원∼불광사거리∼녹번삼거리∼구청광장에 이르는 약 5㎞ 구간에서 장대한 행렬을 선보인다. 파발단이 구청 광장에 도착하면 극단 ‘미추’가 파발문 전달 등의 파발 재현극과 파발무를 펼친다. 이 밖에 자치센터 프로그램 경연대회, 민속장기대회, 맛자랑 경연대회, 어린이 동요부르기 대회, 물빛공원 음악회, 영화상영 등이 주요 행사로 열리고, 각 동별로 곳곳에서 축제를 진행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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