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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8) 작은 학교 서당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8) 작은 학교 서당

    김홍도의 그 유명한 그림 ‘서당’이다. 앞에 사방관을 쓰고 도포에 검은 띠를 띠고 있는 근엄한 선생님이 앉아 있다. 앞에는 서안이 있고, 오른쪽에는 연상(硯床)이 있다. 선생님의 서안에 책이 없는 것은, 아마 그 책이 선생님의 머릿속에 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교육은 원래 텍스트를 외는 것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초학자를 가르치는 책쯤이야 다 외우고 있다. ●김홍도의 서당그림 당시의 글방 풍경 그려 그림 왼쪽에 머리를 땋은 아이 셋이 있고, 오른쪽에 넷이 있다. 오른쪽 맨 위에 역시 땋은 머리 넷이 있다. 그리고 그 위쪽에 초립을 쓴 약간 나이가 든 학생이 있는 바, 이 놈은 관례를 치른 놈이다. 서당의 학생은 모두 9명이다. 그런데 김홍도가 그린 서당 그림은 서당 안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된 서당의 전체 모습을 보려면, 작자 미상의 또 다른 그림 ‘서당’을 보라. 제법 규모가 잡혀 있다. 김홍도의 서당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림 중간의 매를 맞고 훌쩍이는 놈이다. 학생들이 모두 책을 한 권씩 앞에 놓고 있는데, 이 녀석은 책을 등 뒤에 두고 훌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안 왼쪽에 가는 회초리가 있는데, 아마도 이 회초리로 맞았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학생들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포도청에 전송해서 폭력 교사를 고발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아쉽게도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필자 연배 이상의 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맞고 오면, 속이야 쓰라렸겠지만 병원에 가서 입원치료를 받을 정도가 아니면, 도리어 네가 맞을 만하니까 맞았지 하고 자식을 나무랐다. 이건 조선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관념이다. 즉 선생은 자기 자식을 윤리적 인간으로 성장시키기에 ‘사람 되라고’ 체벌을 가했다는 그 관념은 조선시대의 유물이었던 것이다. 교사의 체벌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체벌을 받았다 해서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초학자를 가르치는 서당의 교육은, 선생님이 먼저 한문으로 쓰인 교과서를 천천히 읽고 한자의 음과 뜻을 일러주면, 학생들은 따라 읽고 머릿속에 새긴다. 그리고 선생님이 문장의 뜻을 천천히 새겨준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으로 끝이다. 학생들은 그 날 배운 한자를 반복해 쓰고, 문장을 외운다. 서당에 따라서는 그 날 배운 것을 그 날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고, 다음날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다. 테스트할 때 책을 등 뒤에 두고 전날 배운 부분을 암송하고, 번역하고 뜻을 풀이해야 한다. 만약 못하면 당연히 회초리가 따른다. 위 그림의 훌쩍이는 녀석은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기에 맞은 것이다. ●16세기 지방사림이 만든 성인교육기관 민간의 서당처럼 작은 학교의 존재는 저 멀리 삼국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우리가 서당 하면 떠올리는 그런 모습의 서당은 16세기 어림에 지방 사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서당은 원래 성인들의 교육기관이고, 어린아이들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안동의 도산서원도 원래 퇴계 선생이 열었던 도산서당 자리에 세운 것이다. 퇴계 선생의 문인이었던 황준량이 쓴 ‘자양서당기(紫陽書堂記)’란 글은, 김응생(金應生)이란 사람이 세운 서당의 기념문이다. 김응생은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에서 서당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건물이 10칸이나 된다고 하였으니, 어지간한 규모의 학교였다.‘자양서당기’에서 황준량은 서당이 학문과 도덕을 닦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고 사실 과거 준비가 더 큰 목적이었다. 조선중기 관료이자 학자였던 김응조(金應祖)의 ‘의산서당기(義山書堂記)’를 보면 의산서당에서 문장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쏟아졌다고 하니, 원래 서당이란 교육시설이 없는 지방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였던 것이다. 물론 퇴계의 도산서당처럼 도학을 공부하는 곳이 있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의 교육이란 것이 과거를 지향하기 때문에 서당은 자연히 과거 준비를 하는 곳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훈장 등 월사금 받아 생활비로 김홍도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이면 서울과 지방 모두 서당이 적잖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또 양반이 아닌 사람 역시 서당에 다닐 수가 있었다. 서당을 설립하는 것이나, 서당에 입학하는 데 무슨 자격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또 양반이 아닌 사람이 교육자로 나서는 일도 흔했다. 정조 때 천수경(千壽慶)이라는 사람은 양반은 아니고 서리층에 속하는 사람인데, 지금의 인왕산 아래 누상동 누하동 부근에 서당을 열었다.‘희조일사’란 책에는 그가 열었던 서당 규모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송석(松石, 천수경의 호)은 원래 가난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자신의 한 달 생활비를 학생들의 수로 나누어 받았다.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이 점점 불어났고, 월사금은 점점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한 달에 60전만 내게 하니, 사람들이 “하루에 글을 읽는 값이 어찌 동전 두 잎 밖에 안 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점점 더 불어나 많을 때는 300명이나 되었고, 좀 나이가 든 학생들이 어린 학생들을 다시 가르치니, 마치 군대에서 군법을 세운 것처럼 질서가 있었다.” 천수경은 양반이 아니니, 과거를 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평생을 시인으로 보낸 사람이다.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여 서당을 열었던 것인데, 교육 내용이 괜찮고 또 월사금이 저렴했기에 학생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천수경과 같은 사람은 이 시기에 많이 있었다. 양반 아닌 중인이나 서리들 사이에서 천수경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훈장님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천수경의 친구 장혼이란 사람은 교서관의 서리였는데,‘아희원람’‘계몽편’ 등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를 짓고 출판을 했으니, 이런 책들은 아마도 천수경의 서당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천수경이나 중인 서리들이 연 서당에서 배운 사람들이 양반일 리는 없고, 역시 자신들의 자제들이나 시정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천수경의 서당은 비양반층의 교육열을 반영해서 생긴 것이다. ●조선말 일반 상민들도 서당 열어 서당은 조선조 말이면 일반 상민들까지 다니는 교육기관이 된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보면 서당을 상민들이 어떻게 여는지 잘 알 수 있다. 상민이라 하여 천대를 받는 것이 억울했던 백범은 자신도 글을 배워 진사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아버지를 조른다. 백범의 부친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또 이웃 고을의 양반 서당에서는 받아 줄 리가 없으니, 아예 서당을 차리기로 한다. 문중과 동네 상놈 아이 몇을 모아 자기 집에 서당을 열고 청수리의 이생원을 선생으로 초빙한다. 이생원은 양반이지만 글이 짧아 양반에게는 초빙되어 가지 못하고 상놈서당의 선생이 된 것이다. 석 달 뒤 서당은 신씨 성을 가진 사람 집으로 옮겨가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이생원을 해고한다. 이유는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자기 손자는 열등생인데 백범은 최우등의 학생인 것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서당의 훈장은 가을에 쌀과 보리를 강미(講米)라고 하여 받기로 하고 초빙되었다. 백범의 회고를 들어보면, 아무 선생은 ‘벼 열 섬짜리’ 아무 선생은 ‘다섯 섬짜리’로 일컫는다 하였으니, 수강료의 다소가 그 선생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백범이 전한 청수리 이생원처럼 조선후기 서당의 훈장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몰락한 양반이거나, 양반은 아니지만 지식이 있던 사람이었다. 지식을 파는 것 외에 다른 생활수단이 없는 사람들이 훈장으로 나섰던 것이다. 서당 교육은 20세기 전반까지 성행했고, 시골에는 1950년대까지 있었다. 필자가 한문학을 하다 보니, 과거 서당에서 글(한문)을 배우신 선생님들을 종종 만나 뵌다. 그분들은 가끔 과거 서당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들려주곤 한다. 이제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서당에 대한 기억도 거의 사라질 것이다. 서당은 작은 학교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과 학생이 얼굴을 맞대고 가르치고 배우는 그 작은 학교가 정말 학교일 것이다. 나에게는 오직 대학입시를 위해 맹진하는 요즈음의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수용소로 보인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우리말 여행] 삼수갑산

    함경남도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을 이른다. 서로 이웃해 있다. 가장 험한 산골로 이름이 높았고,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의 하나였다.‘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혹은 ‘삼수갑산을 가서 산전을 일궈 먹더라도’라고 한다. 자신에게 닥칠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일을 단행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삼수와 갑산은 드나들기 힘든 곳이었다.
  • 조선시대 명문가의 가훈과 유언

    “벼슬 길은 산보다 어렵고 물보다 험하다. 도도한 벼슬 바다에서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다가 마침내 풍파를 맞는 것은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조선 선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유희춘이 자식들을 위해 쓴 훈계의 한 대목이다. 최근 정부 인사들이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하차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한 경구다. ‘한국판 안씨가훈(顔氏家訓)’으로 읽힐 만한 책이 나왔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가훈과 유언을 한 데 묶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정민·이홍식 엮어 옮김, 김영사 펴냄)가 그것이다.‘안씨가훈’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의 명재상 안지추가 자손들을 위해 지은 교훈서다. ‘호걸이 되는 것은’는 고산 윤선도의 ‘기대아서(寄大兒書)’, 유희춘의 ‘십훈(十訓)’, 신숙주의 ‘가훈(家訓)’ 등 여러 문집 등을 샅샅이 뒤져 골라낸 조선시대 명문가의 가훈과 유언 31편을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을 덧붙인 것.“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사람의 일도 늘 가득 찼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산 윤선도가 큰아들 인미에게 주는 훈계),“마음은 생각의 지배를 받고, 행동은 생각의 결과다.”(조선 중기 문신 허목이 자손들에게 내린 훈계),“젊어 노력하지 않으면 무정한 세월 앞에 안타까운 탄식만 남는다. 인생을 빈 배에 싣지 마라. 큰 뜻을 품어 그 길로 매진하라.”(조선 중기 문신 권시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등 시간을 뛰어넘는 삶의 지혜와 원칙이 녹아들어 있다. 이 같은 교훈적인 이야기가 조금은 고답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읽는 이들에게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1만 3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에릭ㆍ구혜선, 사극 ‘최강칠우’로 입맞춤

    에릭ㆍ구혜선, 사극 ‘최강칠우’로 입맞춤

    신화의 에릭(문정혁)과 구혜선이 새로운 정통사극 ‘최강칠우’로 6월초 안방극장을 찾는다. 지난달 30일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 KBS 2TV ‘최강칠우’(극본 백운철ㆍ연출 박만영)는 낮에는 조선시대 의금부 하급관리였다가 밤이 되면 억울한 서민들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어주는 자객 ‘칠우’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 ‘최강칠우’는 조선왕조실록에 ‘강변칠우’ 사건을 기초로 각색하여 흥미진진한 조선시대 풍속과 자객들의 박진감 넘치는 활약이 함께 펼쳐질 예정이다. ‘최강칠우’의 연출을 맡은 관계자는 “이 드라마를 통해 미국의 슈퍼맨이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다른 우리 주변의 형, 오빠, 삼촌 같은 정감 있는 한국판 슈퍼히어로를 창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최강칠우’는 ‘주몽’, ‘황진이’, ‘왕과 나’ 등을 연달아 제작하며 히트를 친 바 있는 올리브나인과 퓨처원의 새로운 야심작으로 오는 6월초 첫 방송 되며 에릭-구혜선 커플 외에도 임하룡, 이언, 유아인, 서우 등이 출연한다. 사진=올리브 나인 서울신문NTN 서미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교수 지음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교수 지음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지난 50여년간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의 생애를 추적해온 이정식(77)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그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경희대 석좌교수이기도 한 이 교수는 지난해 몽양 서거60주기 추모 학술심포지엄에서 “몽양이 박헌영 계열에 의해 암살됐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연구에 몰두해 온 이 교수는 새 책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 출판부)로 몽양의 사상과 삶을 재조명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없다. 진취적인 민족운동가였다고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공산주의에 도취됐던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하는 쪽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모호하고 실속 없는 ‘팔방미인’이라고 말한다. 여운형은 한·중·일 현대사의 어떤 페이지에도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았고 해방 이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좌우합작, 미·소관계 등에 관여했다. 그러나 ‘평화와 융합’을 고수하던 그는 좌익과 우익의 공세 속에서 1947년 암살됐다. 이 교수는 우리의 척도에 맞춰 몽양을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몽양은 20세기 초반의 사람이지만 20세기 사람이라기보다도 21세기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대와 사상을 뛰어넘어 평등하고 착취 없는 사회를 꿈꿨던 사람이지요.” 이 교수는 몽양의 이른바 ‘동양평화론’이 시대를 앞서나간 사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이 1970년대에 말한 ‘긍정적인 평화’가 바로 몽양의 평화와 같은 개념이라는 것. 현실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몽양의 자취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사뭇 의미있게 다가온다.“한국의 정치문화는 대화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양반들도 자기 파가 아니면 대화조차 않으려 했죠. 지금 한국사회 내부도 친북과 반북, 보수와 진보로 갈려 있습니다. 몽양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찾아다니며 의논을 한 사람이에요. 그게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그가 염원하던 평화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이상이지요.” 책은 여운형이 소련을 등진 이유에 대해서도 밝힌다. 과거의 소련은 제국주의를 반대한 나라였지만 해방 후 소련은 제국주의국가였기 때문이라는 것. 몽양 자신이 ‘변절자’가 아니라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박헌영 계열에 의한 암살 가능성’에 대해서 이 교수는 “하나의 가설로 제기한 건데 확대해석됐다.”는 견해를 밝혔다.“몽양 자신은 암살의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에 쓸데없는 얘기라고 웃었을 겁니다. 겨레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움을 살 수도 있고 위험이 수반될 수도 있는데 그걸 따져본들 뭐하냐는 것이죠.”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길상탑서 나온 소탑의 조형미에 감탄

    길상탑서 나온 소탑의 조형미에 감탄

    불교에서 탑(塔)을 세우는 것은 석가의 유골을 봉안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런데 석가는 열반에 들기 전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내가 설한 법(法)과 네 자신에 의지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흔히 신사리(身舍利)라고 부르는 유골뿐 아니라 설법을 담은 경전, 즉 법사리(法舍利)도 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하 무구정경)이 집중적으로 탑에 법사리로 넣어진 것은 통일신라시대이다. 황복사라고 전해지고 있는 경주 구황동 절터 삼층석탑의 사리갖춤이 출발점이다. 이 사리갖춤의 외함에는 99개의 작은 탑이 새겨져 있다.‘이 주문을 99벌 써서 탑 속에 넣고 공양하면 모든 죄를 멸하고 일체 소원을 이룰 것’이라는 무구정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기획한 ‘탑 안에 들어간 탑 이야기-전(傳)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은 바로 법사리로 무구정경을 봉안한 통일신라 조탑(造塔)공양의 역사를 보여준다. 상설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박물관 3층의 금속공예실 공간을 이용한 테마전시회로 지난달 29일 막을 열어 오는 8월31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황복사 삼층석탑의 사리함에서 나온 금제여래좌상과 금제여래입상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높이가 각각 12.4㎝와 14㎝로 극도로 정밀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면서도 조형성이 뛰어나다. 이어 99개의 탑이 새겨진 금동외함과 은합, 금합으로 이루어진 사리용기를 비롯한 한 세트의 사리갖춤이 전시되어 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과 합천 해인사 길상탑은 무구정경 사리신앙의 발전단계를 보여준다.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나원리 오층석탑의 금동제 사리함에는 무구정경과 불상, 금동제 삼층소탑과 3개의 구층소탑이 들어있었다. 해인사 길상탑에서 나온 소탑 176개는 그 흔치 않은 조형미가 눈길을 사로잡는데,176은 다라니경에 나오는 극락왕생의 숫자 77과 99를 합친 것이다. 무구정경은 진흙으로 작은 탑 77개를 만들어 탑 속에 공양하면 99개를 넣은 것과 같이 온갖 죄업이 소멸된다고 가르친다. 테마전시를 사리장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와 곧바로 연결시킨 것도 관람객들에게 사리가 무엇이고, 사리갖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아이디어이다. 경주 감은사 동탑에서 나온 한국 사리장엄의 백미를 감상할 수 있고, 이어 안성 장명사명(銘) 고려시대 청동제 사리갖춤과 조선시대 백자 사리갖춤까지 시대에 따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열린세상] 도(道)이름을 바꾸자/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열린세상] 도(道)이름을 바꾸자/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쯤 남행하면 ‘충청남도’라고 쓰인 도로표지판이 반긴다. 게서 좀 더 내려가면 ‘충청북도’를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라, 분명 남쪽으로 줄곧 내려왔는데 ‘북도’라니? 한참을 더 남행하면 다시 ‘남도’였다가 대전을 남동쪽으로 휘감아 돌아 충청도의 최남단에 들어서면, 또다시 충북 옥천군과 영동군에 들어선다. 동서남북 방위 감각이 마구 헝클어진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충남은 ‘충청서도’로, 충북은 ‘충청동도’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방위의 정확성을 중시했던 우리 선조들인데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는 걸까? 우리가 현재 부르는 도(道)의 이름은 조선시대 태종이 고려 시절 5도 양계를 혁파하여 당시 농경지 면적을 기준으로 전국을 8도로 재편한 것에서 비롯된다. 아다시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함경도는 함흥과 경원 등 각 도에 소재한 두 중심도시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조선 왕조가 방향감각을 잃은 채 허우적거리며 망국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던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뒤 고종이 신변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가 있던 아관파천 시절이다. 점령지를 잘게 쪼개어 통치하려는 습성이 있는 제정 러시아의 입김 때문이었을까.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는 8도중 5도를 남·북도로 구분,13도제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렇게 창졸간에 획정된 도명이 일본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한편 광복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과 교통·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생활권과 행정권의 괴리현상이 심화되자 정·관·학계 일각에서는 현행 ‘시·도-시·군·구-읍·면·동’ 3단계 지방행정 체제를 ‘광역시-기초행정구역’ 2단계로 간소화하자는 개편안을 꾸준히 제기했다. 그러나 행정구역을 개편한다고 행정중복이 사라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며, 전국을 60∼70개의 광역시로 쪼개면 오히려 지자체의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행정구역 개편의 실행에는 지자체간의 이권다툼과 지역이기주의, 전통에 대한 국민의 애착, 선거구 변화를 둘러싼 정쟁으로 변질될 우려 등 넘어서야 할 산이 첩첩이라 쉽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행정구역 개편 문제는 쉬운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선, 도명이라도 현실에 맞게 바꾸길 제안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충청남북도처럼 방위마저 틀리게 이름 붙인 행정구역의 예를 아직 찾지 못했고,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지금의 충남에는 충주와 청주가 없고 경남에는 경주와 상주가 없다. 지방행정 구역은 삼국시대에서 신라·발해(남북국)시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개편·개명되어 왔다. 그런데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왕국이 아닌 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60년이 되었는데도 지방행정 구역은 거의 변함이 없다. 중앙정부 조직은 새 정부가 들어서는 5년마다 한 번꼴로 개편·개명되는데 국토도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세계 유일 분단국이라는 처지도 답답한 일인데 도명마저 남북으로 갈라놓은 경계는 분열과 대립의식을 알게 모르게 국민 가슴에 새겨 놓을 수 있다. 끝으로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지역대립 구도가 연상되는 경상·전라·충청 등 낡은 도명에 대한 600여년 묵은 집착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환갑을 맞는 조국의 품에 현실에 기반하고 미래로 향하는 참신한 도의 이름을 선사하자. 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 “우리 딸 미술관 옆에서 공부하네”

    서울대가 26일 학부모 2400여명을 초청해 문화행사를 가졌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기하학적 형상의 미술관, 조선시대 설립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 등 학교 시설로는 드물게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문화 인프라를 활용해 ‘문화 캠퍼스’ 이미지를 부각시키겠다는 취지에서다. 학교 관계자는 “학부모들에게 학내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나아가 서울대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기 위해 기획한 행사”라며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서울대의 문화 역량을 더욱 개발해 일반인들도 학교가 가진 문화적 유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학부모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미술관, 규장각, 도서관 등 주요 문화시설을 비롯해 자녀가 다니는 단과대학 시설을 두루 둘러봤다. 특히 이날 많은 학부모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서울대 미술관(MoA). 재작년 6월 개관한 미술관은 건물 내에 기둥이 전혀 없고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이 연결돼 있는 독특한 구조여서 국내 미술계와 건축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반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마치 하늘에 둥실 떠있는 듯한 미술관을 둘러보던 학부모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멋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때마침 진행 중이던 인도현대미술전까지 관람했다. 한 학부모는 “다양한 미술관을 다녀봤지만 너무 잘해놨다. 가운데가 뻥 뚫려 있는 등 건물 자체가 작품 같다.”며 “서울대 안에 이런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의궤(儀軌·왕실이나 조정에서 치른 각종 의식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종합보고서) 등 평소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유물들을 선보인 규장각의 ‘명품전시회´도 학부모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도서관 정보 전시회´를 주제로 한 테마 이벤트가 마련된 중앙도서관에서는 학부모들이 수십만 권의 장서가 꽂혀 있는 서가를 일일이 둘러보며 오랜만에 학창 시절의 추억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서울의 봄 ‘宮’에서 핀다

    서울의 봄 ‘宮’에서 핀다

    서울의 대표적인 축제인 ‘하이서울 페스티벌’의 봄축제가 다음달 4일부터 11일까지 열린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은 27일 ‘서울의 봄, 궁(宮)에서 피다’를 주제로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5대 궁궐과 서울광장, 청계천 일대 등에서 다양한 봄축제를 펼친다고 밝혔다. ●시민이 함께하는 처음과 끝 4일 종묘부터 종각, 세종로, 서울광장까지 2.3㎞ 구간을 장식하는 시민 행렬 ‘만민대로락’으로 봄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행렬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제공되는 ‘서울탈’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사용했던 ‘방상시탈’을 응용한 것이다. 이번 하이서울 페스티벌 봄축제의 상징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행렬에는 해태상, 아기 임금님 형상물 등도 함께한다. 앞서 3일 전야제에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세종대왕 즉위식’을 재현한 ‘세종, 용상에 오르다’가 열린다. 또 귀신을 쫓는 의식으로 열리던 궁중 탈놀이 ‘대나의’가 처음으로 재현된다. 이날 경희궁 숭정문 앞에서는 정명훈 상임지휘자가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고궁음악회를 연다. ●마음껏 궁의 멋을 즐겨라 경희궁 숭정전에서는 매일 밤 뮤지컬 ‘명성황후’가 막을 올린다. 결혼식과 전투 장면을 객석에서 벌이는 등 관객이 역사의 현장에 있는 듯 느낄 수 있도록 기획했다. 또 창덕궁 숙장문 앞에서는 5∼6일 전통예술인 정악과 민속악의 명인들이 공연하는 ‘천년만세’가 펼쳐진다. 덕수궁 석조전 일대에서는 5∼10일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퓨전 콘서트’를 마련했다. 서울광장에는 여섯번째 궁궐인 ‘오월의 궁’이 만들어진다. 전통과 현대기술을 뒤섞어 빛으로 꾸민 ‘디지털 궁’이다. 매일 밤 국악과 라틴댄스, 스윙,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어우러진 ‘팔색 무도회’를 갖는다. 또 안은미 예술감독과 클론의 강원래가 만든 로고댄스 ‘봄바람’이 축제의 열기를 북돋운다. 낮에는 시민이 서울탈, 왕관 등을 만들고 서울을 상징하는 ‘로고 댄스’를 배우는 ‘열린궁전 상상공작소’를 준비했다. 청계천에서는 ‘청계 자유락’을 주제로 각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해 각종 전시와 공연을 선보이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3∼5일 조선시대 저잣거리가 재현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양반의 ‘자리 짜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양반의 ‘자리 짜기’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를 보면 아내는 물레로 실을 뽑고 있다. 무명을 짜기 위해서다. 무명을 짜는 것은 여러 목적이 있다. 조선 후기 양반이 아닌 상민은 16세부터 60세까지는 군역을 지고, 직접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바쳐야 한다. 백성들에게서 군포를 받아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니 젖먹이 어린아이도 군포를 내라는 황구첨정이니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의 남편은 양반이니, 아마 군포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른쪽 아랫부분의 자리를 짜는 남자다. 자리와 돗자리는 같다고 해도 그만이지만, 굳이 구별하면 할 수도 있다. 돗자리와 자리의 재료가 왕골이거나 골풀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돗자리는 베를 짜듯 날줄을 미리 걸어두고 바디를 움직여 짠다. 자리는 고드랫돌에 날줄을 감아두고 왕골 가닥을 더하고 고드랫돌을 앞뒤로 옮겨가며 짠다.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와 김득신의 그림 ‘병아리 훔치기’는 모두 고드랫돌이 보이니, 돗자리가 아닌 자리 짜기인 것이다. ●조선 후기로 오며 경제적 기반 잃은 양반 속출 각설하고, 자리를 짜는 사람은 사방관을 쓰고 있다. 사방관은 양반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그런데 양반이 웬일로 노동을 하고 있는가. 양반 노릇을 하자면, 한문을 읽고 쓸 줄 알고, 좋은 풍경을 만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면 한시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성리학을 이해해야 하고 ‘소학’을 익혀 점잖은 말과 행동이 몸에 배어야 한다. 여기에 봉제사(조상의 제사를 지냄), 접빈객(손님 접대)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든 양반다움을 실천하려면, 토지와 노비 소유라는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토지와 노비가 없으면, 자연히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없다. 한데 조선 후기로 오면서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양반이 속출하였다. 대부분의 양반은 육체적 노동을 기피하였지만, 이 그림에서 보듯 일하는 양반도 있다. 당연히 이 자리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자리를 짜는 데 생계가 달려 있을 것이다. 양반이 자리를 짜는 그림은 김득신의 ‘병아리 훔치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자, 마루에서 자리를 짜고 있던 남자가 담뱃대를 휘두르며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마당에 자빠져 있는 것은 이 사내가 짜고 있던 자리다. 사내의 오른손 아래에 있는 검은 물건은 바로 사내가 쓰고 있던 사방관이다. 역시 양반으로서 자리를 짜고 있었던 것이다. ●이원익이 귀양살이 하며 짠 자리 영의정 되자 보물로 생각이 트인 양반들은 자리를 짜는 것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원익은 훌륭한 재상으로 알려진 분이다.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있다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이이첨 일파에 대해 반대하다가 쫓겨났다. 심심하니 할 일이 없다. 이원익은 정치가이지 학자가 아니다. 이미 벼슬이 오를 대로 올랐고, 책도 읽을 만큼 읽었다. 귀양살이는 한편으로는 오랜만의 휴가다. 이 휴가에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리를 짜기 시작한다. 노동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솜씨랄 것도 없다. 한심한 작품이 나왔으나, 손수 노동한 결과물이라 소중하기 짝이 없다. 아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받기는 했지만, 그 한심한 물건을 즐거이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한데,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이원익이 다시 재상이 되자, 그가 짰던 한심한 물건은 영의정이 짠 자리가 되어 보물처럼 여겨졌다는 것이 아닌가. 자리도 누가 짜는가에 따라 이렇게 보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떤 분에게 듣고 과연 그랬을까 했는데, 장현광의 문집 ‘여헌집’에서 “완평(完平, 이원익)은 여주 호장(戶長)의 집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리를 짜고 있다.”는 기록을 보고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양반들이 생활고에 몰리면 더러 자리를 짜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인인 김낙행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직석설(織席說)’이란 글 한 편을 남기고 있다. 번역하자면,‘자리 짜기의 이로움’ 정도의 뜻이 된다. 어느 날 김낙행의 아내는 남편이 그저 밥만 축내고 하는 일이 없다면서 형제간을 돌며 왕골을 얻어와 자리를 짜란다. 이웃 영감까지 불러 짜는 방법까지 전수시킨다. 아내의 말을 이기는 남편은 드문 법. 내키지 않았지만 해 본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갈수록 손이 익고 재미가 난다. 이런저런 고민을 아주 잊고, 밥을 먹거나 소피를 보거나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자리 짜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자리 짜기의 찬미자가 되어 자신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짜겠노라 선언한다. 급기야 자리 짜기의 여섯 가지 이로움을 설파한다. 첫째, 자리 짜기란 노동을 하기 때문에 공밥을 먹지 않는다. 둘째, 집 밖으로 공연히 나들이하는 일이 줄어든다. 셋째, 무더운 여름날 졸음을 잊을 수 있다. 넷째 공연한 근심거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섯째, 잘 짠 자리는 늙으신 어머니께 올려 어머니를 편히 모실 수 있고, 좀 거칠게 된 것은 자신과 아내, 아이들이 깔기도 하고, 또 어린 계집종에게 주어 흙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하게 한다. 여섯째,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자신처럼 살림살이가 딱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리로 인한 깨달음인데, 아주 괜찮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로 돌아가자. 자리를 짜고 있는 남자 위쪽에 아이가 글을 읽고 있다. 큰 책을 펴 놓고 작은 막대기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고 있다. 이제 막 글자 공부에 들어간 꼬맹이인 것이다. 서당에서 혹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을 소리 내어 다시 읽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이가 아랫도리를 벗고 있다. 아마 가난 때문일 것이다. 자리 짜는 아버지,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라. 이 그림처럼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분화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그림은 없다. 가난한 양반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짜게 되었다. 하지만 양반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사방관을 쓰고 있다. 벌거벗은 아들의 독서는 아직 양반의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람들의 무서울 정도로 집요했던 교육열은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 했던 자리를 짜던 아버지, 길쌈을 하던 어머니의 열망에서 혹시 나온 것은 아닌가. ●정조 때 자리 짜던 장인들 열에 여덟·아홉은 유랑민으로 지금 세상은 자리 또는 돗자리라는 것을 쓸 기회가 많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자리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지금은 맨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집에서도 소파에 앉아서 지낸다. 또 결혼식 등의 의식이 있어도 모두 의자에 앉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모두 바닥에 앉아 생활하고, 의식이 있어도 모두 바닥에서 한다. 앞서 김낙행의 글에서도 보았지만, 노비의 경우 흙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예사였으니, 자리가 생활필수품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리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은 역시 국가와 왕실이었다. 고려와 조선은 장흥고란 관청을 두고 국용(國用)·왕실용 자리를 관장했다. 관장한다는 것은, 지방에 공물로 배정한 자리를 받아들여 보관하고 사용할 때 내어주고 하는 것이다. 지방에서 장흥고에 바치는 자리의 양은 얼마나 되었을까? ‘세종실록’ 7년 8월 22일조에 의하면,1년에 5148장을 바치고 1년에 소용되는 것은 2216장이라고 하였다. 자리는 모든 지방에서 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주로 경상도 안동 일대, 즉 순흥·예천·영천(榮川)·영천(永川)·풍기·의성·용궁 일대가 자리의 주 생산지였다. 여기서 매년 2월,8월에 장흥고와 상의원에 자리를 바쳤던 것이다. 장흥고가 일반 자리를 받는 곳이라면, 상의원은 꽃무늬를 넣은 매우 고급스러운 자리, 예컨대 용문석이나 만화석 등을 거두는 곳이었다. 그런데 안동 일대에서 자리를 짜서 바치면 장흥고나 상의원에서 퇴짜를 놓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자리를 짜는 석장(席匠)들이 땅을 팔고 집을 팔아 열에 여덟, 아홉이 유랑민이 되었다고 한다(‘정조실록’ 5년 12월28일조). 돗자리에도 이렇게 슬픈 역사가 어려 있다. 한데 요즘은 중국산 수입 자리 때문에 자리 짜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하니, 더 딱한 일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1828년 하회마을’ 그림 발견

    ‘1828년 하회마을’ 그림 발견

    조선후기 무렵에 안동 하회마을 모습을 담은 산수화(그림)를 국립중앙박물관 저장고에서 찾았다. 경북 안동시는 28일 하회마을 자료를 수집하다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828년 하회마을’ 그림을 보관 중인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림은 조선시대 화공 이의성이 그렸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경북 예천 지보에 이르는 낙동강 줄기의 명승지를 그려놓은 여덟 폭의 병풍 중에 한 폭이다. 당시의 경관, 가옥배치, 풍속 등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풍산 류씨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 하회16경에 나오는 강섶의 바위들, 강촌마을의 교통수단이던 나룻배와 섶다리,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 겸암 류운룡이 우애를 다지기 위해 서로 왕래했다는 부용대 아래 ‘층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전설로 전해지는 ‘안씨가 피 천석을 수확했다던 섬들’ 만송정의 솔숲, 하회마을의 풍수지리적 단점을 보완한 조산 등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동시 관계자는 “이 그림을 통해 하회마을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하회마을의 전통문화를 복원하는 고증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동대문구 “설렁탕 드시러 오세요”

    “선농대제 관람하고, 설렁탕 한 그릇 드세요.” 조선시대 임금이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다는 선농대제(先農大祭)가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사적 제436호)에서 25일 열린다. 농사일을 마치면 백성들을 대접하기 위해 소의 여러 부위를 넣고 푹 끓인 국밥을 돌렸는데 지금의 ‘설렁탕(先農湯)’의 유래가 됐다. 24일 동대문구에 따르면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동대문구청∼선농단(1.3㎞)구간을 주민과 자원봉사자 320여명이 참가하는 어가행렬로 시작한다. 취타대를 선두로 해 문무백관, 임금을 지키는 금군과 별시위군, 환관으로 이어지는 어가행렬이 볼거리를 선사한다. 어가행렬 관계로 오전 10시부터 10시40분까지 고산자로와 왕산로 일부가 통제된다. 오전 11시부터는 본 행사인 선농대제가 진행되는데 농업의 신에게 폐백(예물)을 드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술을 올리고 음복을 하는 본격적인 제사가 진행된다.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망요례가 끝나면 공식적인 선농대제가 끝나는데 이어 전통설렁탕을 재연해 구경나온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행사도 준비된다. 선농대제는 조선 태조 때부터 마지막 왕인 순종 때(1909년)까지 이어져오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중단됐다. 그 후 70여년간 굳게 닫힌 선농단의 문은 1979년부터 뜻있는 제기동 마을주민들이 모여 1년에 한번씩 제를 올리면서 다시 열렸다.1992년부터는 동대문구가 농림부, 동대문문화원, 선농제향보존위원회등과 함께 공동주관하고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흑돼지 품질 차별화로 승부

    ‘결론은 품질이다.’ 경북 김천 지례와 제주 흑돼지가 미국산 쇠고기와 진검 승부를 선언하고 나섰다. 김천과 제주가 승리를 위해 내세우는 비밀병기는 품질 차별화다. 맛을 특화하면 싼 값의 미국 수입 쇠고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김천 지례흑돼지는 조선시대부터 털색이 까맣고 덩치가 작은 것으로 유명했다. 담백하고 쫄깃쫄깃하며 지방이 적어 임금님 진상품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60년대 초 다른 개량종에 비해 사육 기간이 길고 번식률도 낮아 경제성을 이유로 도태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김천시의 꾸준한 복원 노력에 따라 80년대 들어 완벽한 옛 품종으로 재현됐다. 현재 10개의 사육농장에서 5000∼6000두의 흑돼지를 사육하고 있다.80㎏ 성돈 한 마리에 40만원으로 일반 돼지 28만원에 비해 40% 이상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이 같은 높은 가격에도 지례면 소재지인 교리에 20여개 흑돼지 전문 식당은 성업을 이루고 있다. 주말이나 성수기인 여름 휴가철에는 하루 매상이 1000여만원을 훌쩍 넘어선다.김천시가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갖는 이유다. 미국 쇠고기가 밀려와도 지례 흑돼지의 품질을 특화시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이다.김천시 관계자는 “지례흑돼지의 특징은 특유의 맛뿐 아니라 사육과 판매가 한 곳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며 “앞으로 예산 지원, 대기업 유통업체와 연계 등을 통해 최고 품질을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주도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맞서 제주 흑돼지를 명품으로 집중 육성한다. 돼지고기보다 싼 쇠고기 시대를 앞두고 육질이 우수한 흑돼지 명품화를 통해 저가의 수입 쇠고기와 차별화시켜 나간다는 전략이다. 제주 흑돼지는 지난 2월 정부의 향토산업 육성 지원대상으로 선정돼 2009∼11년 3년간 30억여원의 명품화 사업비를 지원받는다. 이에 따라 도는 민·관과 산업계, 학계, 연구기관 등이 참여하는 ‘흑돼지 명품화사업 추진단’을 구성, 제주 흑돼지의 혈통을 정립하는 등 명품화, 산업화 연구에 착수한 상태다. 도는 앞으로 제주 흑돼지 프랜차이즈 판매장을 확대 설치하고 브랜드 디자인 개발, 흑돼지고기 요리 축제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19억 2000만원을 들여 생산성이 낮은 재래 흑돼지와 외국산 흑돼지의 교배를 통해 제주형 흑돼지 품종을 새로 정립할 예정이다. 도는 이를 바탕으로 현재 6.4%인 흑돼지 사육 비율을 올해 말 15%,2017년에는 50%까지 연차적으로 늘려 나갈 계획이다. 제주도 관계자는 “최근 들어 흑돼지고기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음식점이 늘어나는 등 차별화가 시도되고 있다.”고 말했다.김천 한찬규·제주 황경근기자 cghan@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괴로운 편자 박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괴로운 편자 박기

    조선시대 문집에서 말에 관한 이야기, 특히 마정(馬政)의 개혁을 주장하는 글이 숱하게 나온다. 하지만 말을 생명의 차원에서 논한 것은 이익의 글이 거의 유일하다. 짐승을 부리되, 고통을 주지 말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김홍도의 그림 ‘편자 박기’다. 말의 편자를 박고 있다. 편자의 이름은 여럿이다. 말편자, 말굽쇠라고도 하고, 한자어로는 제철(蹄鐵), 영어로는 ‘horseshoe’라고 한다. 나는 말의 편자는 대장간에서 서 있는 말의 발을 들게 하고 박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말의 발을 모두 묶어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편자를 박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하면 말이 무척 괴롭지 않겠는가. ●중국에선 말을 세워둔 채 발굽 갈아 조영석의 그림 ‘편자 박기’ 역시 편자를 박는 것이다. 두 그림을 보건대, 조선시대에는 말의 네 발을 묶어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편자를 박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말을 타는 모든 문화권에서는 모두 이런 식으로 편자를 박는 것인가. 이게 늘 궁금했는데, 이덕무의 에세이집인 ‘앙엽기’에 편자 박기에 관한 글을 읽고 보다 정확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의 네 다리를 묶어 하늘을 보게 눕히고 칼로 발굽의 바닥을 깎아낸 뒤 못을 박는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두고 고르지 않은 발굽을 끌로 깎아낸 뒤에 말굽을 들어 무릎에 얹고 못을 박는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발굽을 갈고 그 뒤에 편자를 박지만, 조선에서는 말 다리를 묶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박았던 것이다. 말은 발굽이 있는 짐승이다. 발굽은 발가락에 있는 발톱의 한 종류다. 발굽이 있는 짐승은 여럿인데, 말은 발굽짐승 가운데서도 첫 번째, 다섯 번째 발굽은 퇴화하여 없어지고 3번째 발굽만 발달한 짐승이다. 당연히 편자를 박는 것도 3번째 발굽이다. 편자는 발굽이 닳는 것을 막고, 몸의 균형을 잡아, 걷거나 뛰는 데 편리하게 하는 도구다. 편자를 박을 때 쓰는 못을 대갈 또는 다갈,‘징’이라고 한다. ●태종 때에도 편자가 있었다는 기록 편자는 언제 생긴 것인가.19세기의 문헌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편자(대갈)에 대한 그럴싸한 유래가 있다. 이유원에 의하면,“옛날에는 말의 발굽에 쇠편자를 박지 않아서 얼음 위에서 말이 잘 걷지 못해 칡의 줄기로 말의 발굽을 쌌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종 때 윤필상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갔을 때 얼음 언 땅을 말이 디딜 수가 없었으므로 쇠로 발굽 모양의 편자와 편자를 고정시키는 대갈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기술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고, 이후 이 방법을 따라 여름이나 겨울이나 말의 발굽에 편자를 붙이고 대갈을 박았다는 것이다. 칡은 한자로 ‘갈(葛)’인데,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기에 그 못을 대갈(大葛)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종실록’ 10년 윤10월 4일조를 보면 윤필상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평안도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전다갈(錢多曷) 2000부(部)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임하필기’의 주장이 그럴듯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태종실록’ 18년(1418) 3월 21일조에 사헌부에서 진주목사 유염이 백성들에게 군량과 가죽, 마제철 등을 징수한 것을 탄핵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마제철, 곧 편자는 성종 이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편자가 있으면 곧 편자를 고정시키는 못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대갈이 성종 이전에 있었던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편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가. 이익은 ‘성호사설’의 ‘마제(馬蹄)’라는 글에서 중국 요동은 우리나라와 접해 있어 우리나라 말의 대갈을 분명 보았겠지만, 대갈을 채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832년 청나라에 갔던 김경선은 자신의 여행기인 ‘연원직지’에서 중국의 말에 튼튼한 쇠로 만든 편자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또 편자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인 이목이 고안한 것이라 하였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덕무의 ‘앙엽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말굽에 징을 박지 않고 짚신을 신긴다 하였다.1811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유상필의 ‘동사록’을 보면 5리나 10리마다 말의 짚신을 갈아 신겨야 하기 때문에 짚신을 짊어진 사람이 따라 다닌다 하였다. 편자는 말에 신긴 쇠신발인 셈인데, 과연 이게 말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이익은 ‘성호사설’ ‘마제(馬蹄)’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을 기르는 것과 부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말을 부리는 일은, 그 뜻이 오직 사람을 편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기구들을 아름답게 꾸민다. 재갈이며 굴레, 안장, 뱃대끈, 채찍 따위는 옛날부터 있던 물건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기다 편자와 대갈까지 더 박는다. 장사꾼들은 ‘말이 잘 달리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니고, 편자의 대갈이 있어 잘 달리는 것´이라고 한다. 말이 길을 잘 가는 것은 편자의 대갈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기르는 것으로 말하자면, 모름지기 말을 편하게 해 주어야만 싹이 트듯 자라나는 본성을 잘 길러줄 수가 있는 법이다.‘장자’에 이르기를,‘말에게 해로운 것을 없애야 한다.’고 했는데, 말에게 해로운 것으로 말하자면, 편자의 대갈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만약 말에게 물을 수 있고, 말이 대답할 수가 있다면, 반드시 편자의 대갈이 가장 해롭다고 할 것이다. 말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길을 오래 가면, 발굽에 구멍이 나고 발굽에 구멍이 나면 쉬어야 하는 법이고, 사람의 힘으로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갈이란 물건이 나오고부터는 가깝거나 멀거나, 춥거나 덥거나, 편하거나 험하거나에 관계없이 며칠도 편히 쉬지 못하니, 말이 어떻게 지치고 여위며 노쇠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대갈로 편자를 고정시켰기 때문에 말이 잘 달린다고 하지만, 이익은 그 일반적 상식에 반대한다. 길을 오래 걸으면 말의 발굽은 닳기 마련이다. 발굽이 다 닳으면 살과 땅이 맞닿으니, 말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발굽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사람은 발굽이 자라나는 그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말 역시 쉴 수가 있다. ●말을 쉬지 않고 부릴 수 있게 만든 편자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다른 존재의 고통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대상을 파멸시키고, 자신의 이익도 잃고 만다. 말에게서 최대한의 노동을 짜낸다. 곧 “놓아먹이는 말을 보면, 배가 부르면 누워 자는 것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말을 몰아 부릴 때면 낮에는 길에서 내달리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여물을 먹으니, 편히 쉬며 잠을 잘 틈조차 없다.”는 것이다. 말을 이렇게 부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편자와 대갈 때문이다. 이익은 또 말이 채 자라지 않아 힘이 여물기도 전에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는 것 역시 대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문집에서 말에 관한 이야기, 특히 마정(馬政)의 개혁을 주장하는 글이 숱하게 나온다. 하지만 말을 생명의 차원에서 논한 것은 이익의 글이 거의 유일하다. 짐승을 부리되, 고통을 주지 말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끝으로 말편자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백사 이항복 선생이 어렸을 때 젊은 대장장이 사내가 살았는데, 어린 눈에도 좀 멍청하게 보인다. 소년 항복은 글방을 다녀올 때 식히느라 늘어놓은 말편자 위에 앉았다가 편자를 엉덩이에 끼고 나온다. 대장장이는 대갓집 도련님에게 말은 못하고 어느 날 불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되는 말편자 하나를 던져 놓는다. 항복이 모르고 앉았더니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대장장이는 다시는 훔쳐가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여전히 편자는 없어진다. 세월이 흘러 대장간이 망하고 말았다. 밥을 굶고 있는데, 항복이 찾아와 다시 대장간을 열라며 말편자 한 자루를 내놓는다. 깜짝 놀라 물으니, 그렇게 망할 줄 알고, 도와주려고 하나씩 편자를 훔쳤다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어릴 적에 짐을 끄는 조랑말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 말은 우리 동네 대장간에서 편자를 박았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AI 불똥] “오골계를 지켜라”

    [AI 불똥] “오골계를 지켜라”

    “오골계와 재래닭을 살려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산되자 사육 농가와 관련 당국이 오골계와 재래닭 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AI와 격리시켜 ‘안전지대 모시기’로 모시기 위한 작업이다. 일반 닭이 무더기 매몰되는 반면 천연기념물인 오골계와 희소성을 가진 재래닭은 칙사 대접을 받는 셈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265호인 오골계를 기르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지산농원은 혹시라도 감염을 우려해 종계(알 낳는 어미닭)를 자체 도태시키고 있다. 이 농장에서 기르는 오골계는 병아리 7000여마리, 어미닭 2000여마리 등 9000여마리이지만 체형에 맞는 천연기념물은 수백마리뿐이다. 6대째 비법을 전수받아 오골계를 키우는 여주인 이승숙(45)씨는 “천연기념물 오골계는 우리 집에서 만든 발효 사료를 먹이고 운동량이 많아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에 AI에 감염될 우려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혹시나 해서 오래된 종계 280마리를 도태시키고 혈기 왕성한 종계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농장은 2006년 AI 발생때 4㎞쯤 떨어진 연산면 백석리로 종계 300여마리를 옮겨 키우고 있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담당자는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천연기념물 오골계 130여마리를 전국 10여곳에 분산, 사육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오골계는 뼈까지 새까맣고 체형이 작으며 발가락이 4개로, 동의보감에 약용으로 적혀 있다. 또 충남 천안시 성환읍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은 지난 10일부터 17일까지 복원에 성공한 재래닭 3품종 등 900마리를 수원 농촌진흥청 축산생명환경부로 옮겼다. 다음 주에는 종란 1000여개를 대관령 한우시험장으로 대피할 계획을 잡아놨다. 이 재래닭은 전국 산간지방에서 흩어져 있던 것을 찾아내 수십차례 순수혈통 교배로 적갈색, 황갈색, 흙색 등 3품종으로 복원됐다. 이 닭은 조선시대 이전에 농가에서 사육되던 것으로 장방형 체형에 꼬리 쪽으로 낮아진다. 우리가 말하는 토종닭은 재래종과 외래종의 교배종이다. 논산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경북 ‘영남 옛길’ 생태탐방로 1000㎞ 조성

    영남의 옛길이 복원된다. ‘영남 옛길’의 일부는 서울신문사가 지난 2006년 4월부터 연재물 ‘다시 걷는 옛길’을 통해 재조명했었다.18일 경북도에 따르면 올해부터 2015년까지 7년 동안 800억원을 들여 ‘영남 옛길’ 생태 탐방로 1000㎞를 조성한다. 대상은 영남대로(문경새재∼상주∼청도) 영남우로(죽령 옛길) 영남좌로(추풍령 옛길) 괘방령(김천) 계립령·이화령·토끼비리(문경) 관동대로(울진∼평해) 십이령길(울진∼봉화) 조선통신사길(문경새재∼경주) 낙동강 예던길(안동∼구미∼고령) 동해안길(경주∼울진) 간고등어길(영덕∼안동), 우산국 옛길(울릉) 등 11곳이다. 도는 우선 올해 봉화군 명호면 이나리 강가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15㎞에 이르는 청량산 예던 길을 옛날 그대로 복원해 낙동강 생태경관과 역사ㆍ문화 자원을 연계한 새로운 관광코스로 꾸밀 예정이다. 이 길은 신라시대 서예가 김생, 문장가 최치원 전설을 비롯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피난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이야기, 퇴계 이황의 학문과 발자취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또 퇴계 이황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기행문 배경이 된 경북 안동시 ‘퇴계 오솔길’에서 봉화군 ‘청량산 예던길’까지 20㎞도 시범 조성키로 했다. 이어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특히 옛길 주변에 많이 있던 역원과 주막 등 역사유적도 함께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키로 했다. 이와 함께 앞으로 탐방객들을 위해 생태 탐방 해설가를 양성하는 한편 관련 포털사이트를 구축해 다양한 생태탐방 정보를 제공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영남 옛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경북도 김남일 환경해양산림국장은 “각계 의견을 충분히 들어 옛길 복원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김찬웅 지음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김찬웅 지음

    “손자가 세 돌 되는/윤 3월27일에/학질이라는 병을 얻었다/먼저 몸이 차가워지고 그 후에 열이 난다(…)/소고기와 생과일이/어린아이에게 병을 잘 일으킨다는데(…)/주고 싶지만 먹으면 비장(脾臟)을 상하게 할 것 같고/주지 않으면 화를 내고 울며 보챈다(…)/손자야, 너도 네 아이를 키워봐야/마땅히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시대가 달랐다고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달랐을까.‘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글항아리 펴냄)는 함의가 다채로운 조선시대 육아해설서이다. ●묵재 이문건의 ‘양아록´을 현대감각으로 재구성 글쓴이는 시나리오, 소설 등을 통해 글맛을 다져온 김찬웅 작가. 하지만 그의 텍스트는 조선 최초의 육아기록으로 알려진 ‘양아록(養兒錄)’이다.‘양아록’의 지은이는 묵재 이문건(1494∼1567).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돼 유배됐고 을사사화에 휩쓸려 다시 23년의 기나긴 유배로 생을 마친 비운의 조선 학자였다.‘묵재일기’를 통해 방대한 시대적 사료를 남긴 주인공이기도 한 그의 육아일기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자식들과 부인을 모두 잃고 그 자신 세상을 뜨기까지 무려 17년 동안 유일한 핏줄인 손자를 키우며 남긴 기록이 ‘양아록’이다. 대부분 한시로 쓰여진 원문을 책은 현대감각으로 재구성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양육방법, 자녀훈육에 대한 당대의 시각을 두루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읽을거리가 됐다. 이문건의 유일한 손자 숙길이 ‘양아록’의 주인공.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초년기,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로 구분지어 서술한다. 풍열, 간질, 두창, 홍역, 이질, 학질 등 온갖 병치레를 달고 사는 손자를 보며 할아버지는 애가 끓는다. 달리 손 쓸 방도가 없어 굿을 했던 시대 정황이 생생히 재현된다. 천연두를 앓은 지 13일 전후, 환부에 딱지가 생기며 병이 끝날 즈음 마마신을 공손이 돌려보내는 ‘마마배송굿’을 약 대신 ‘처방’해야 했다. ●“손자 아플 땐 두렵고 겁 나…” 애틋한 사랑 모두 45편의 글 가운데 질병과 관련된 것이 16편이나 된다. 몇 편의 일기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만났던 일, 옥황상제에게 축문을 올린 일 등이 상세히 실렸다. 안타까운 마음이 행간에 절절하다.“두렵고 겁이 나서 침이나 약을 쓸 수 없었는데 얼굴이 여위고 누렇게 뜬 모습이 가엾기만 하다. 그 후로 답답함과 근심을 견딜 수 없어 한가로울 때면 한숨이 새어나온다.”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돌잔치 풍경을 옮겨놓은 대목 등은 특히 흥미롭다. 돌상에서 붓과 먹, 투환, 활, 쌀, 도장을 집어올릴 때마다 어른들이 아이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축원했는지 넘겨다볼 수 있다. 커가는 손자에게 ‘소학’‘대학’을 직접 가르치고 숙제를 내주며 때론 매를 드는 모습, 책을 읽지 않는다며 그네를 끊어버리겠다고 으름장 놓는 장면 등도 평범한 선비집안의 훈육과정을 가감 없이 대변해 준다. 조선의 출산, 육아문화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시대의 거울로서 자잘한 정보들이 풍성한 읽을거리이다.1만 5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관혼상제 의미 알면 지키기 쉽습니다”

    “관혼상제 의미 알면 지키기 쉽습니다”

    “무엇이든 세월이 가면 변하게 마련입니다. 아니, 변하지 않으면 오히려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혼례나 상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관행적으로 따르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의미를 알면 격식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바꾸어 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정종수(53)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이 ‘사람의 한평생’(학고재 펴냄)을 내놓았다.‘민속으로 살핀 탄생에서 죽음까지’라는 부제처럼 한국인의 통과의례를 정리한 것이다.16일 창밖으로 인왕산이 내다보이는 명당자리인 경복궁 안 민속박물관 3층의 유물과학과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본질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바꿔 가야 정 과장은 관혼상제를 다룬 그동안의 책들이 지나치게 딱딱한 규범만을 금과옥조인듯 담아 놓은 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읽히는 책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민속학자로 25년 남짓 내공을 쌓고서야 이 책을 세상에 펼쳐놓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조선시대 상장례가 전공이다. 수십년 동안 상갓집과 무덤만 찾아다니다 보니 주변에서는 그를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마을을 찾아갔지만, 요령이 생긴 다음에는 이장이나 지관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초상이 나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 ‘사람의 한평생’을 조사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책에는 민속학자로서 연구 결과는 물론 개인적인 경험담도 곳곳에 담겼다. 예를 들어 그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부인에게 ‘유언’을 한다.‘부의금은 절대로 받지 말 것이며, 매장이고 납골이고 다 부질없는 일이니 화장해 당신 마음대로 뿌리고 싶은 곳에 뿌려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하면 부인은 ‘아직도 살날이 창창한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고 손사래를 친다며 웃었다. 상장례를 공부하다 보니 나라가 온통 무덤이 돼 가는 땅 문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초상집에는 가려고 노력하지만, 결혼식은 봉투만 보낼 뿐 애써 찾아가지는 않는다고 했다.3만원,5만원을 넣어 결혼식장에 가서 5만원,6만원짜리 밥을 먹고 나면 폐만 끼칠 뿐이지 그게 어디 잔치를 십시일반 돕는 부조냐는 것이다. 젊은 사원이 사장이나 중역의 혼례나 상례에 눈치를 보며 봉투를 내미는 것도 ‘타 먹지 못하는 보험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관례 되살리면 어지러운 풍속 바로 설 것 제사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장남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장자상속이 일반화된 1700년대에 들어서서 시작된 것”이라면서 “최근에는 다시 조선 초기처럼 균등상속으로 돌아간 만큼 제사는 여자 형제를 포함한 형제 모두가 돌아가며 지내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제간, 동서간 갈등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설날이나 추석에 관광지 호텔이나 콘도에서 차례를 지내는 데도 긍정적이다. 사당과 위패를 그린 조선시대의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도 타관에 나가 있을 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대용품이지 않느냐는 것. 이렇듯 제대로 알면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모르면 바꾸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 까다롭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 과장은 “관혼상제 가운데 사라져버린 관례(冠禮)는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른이 되었다고 주민등록증만 줄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부여하는 관례를 범사회적으로 살려낸다면 어지러운 풍속도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1만 5000원. 글 사진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살인사건을 통해 본 조선시대

    [내 책을 말한다] 살인사건을 통해 본 조선시대

    최근 역사학계는 거시적인 정치사, 사상사 중심에서 미시적인 민중생활사로 연구영역과 방법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 중 범죄를 통한 사회상의 재인식은 이러한 움직임의 한 부분이다.‘미궁에 빠진 조선’은 범죄라는 극한적 요소를 통해 조선시대 민중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필자는 범죄는 인간의 부정적인 단면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 삶의 실존적 측면을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범죄는 인간 내면의 의식세계뿐 아니라 구성원간의 갈등과 긴장, 그것에 대한 사회통제와 질서유지, 민중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 책에서 범죄를 통해 조선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틀 속에 생활하고 있는 민중의 삶을 파악하고자 했다. 즉 역사연구에 있어 구조적 접근의 시각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그 속에서 백성들이 겪는 갈등으로 보충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거시적 시각을 입증해 줄 미시적 연구가 필요했고 그러한 목적에서 조선시대 범죄를 통한 ‘역사읽기’를 시도했다. ‘미궁에 빠진 조선’은 나 자신이 논문 속에서 다룬 테마나 사건들 중에 당대적 삶을 잘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간추려 쓴 결과물이다. 논문이 사실을 입증하고 시대적 특징을 읽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 책은 그런 해석보다는 그 당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완하고 읽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범죄 가운데에도 필자가 주목한 것은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살인범죄이다. 이유는 살인범죄가 주는 사회적 충격은 다른 범죄와 달리 사회적 반향이 컸으며, 그것의 발생 원인을 분석하면 경범죄와는 달리 당대의 사회적 특성이나 모순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총 14건의 살인범죄가 소개됐다.‘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등의 연대기와 범죄자에 관한 사건 처리 내용이나 과정을 기록한 ‘추관지’(秋官志) ‘심리록’(審理錄)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에 나타난 사실들을 재조합하고 정리했다. 조선의 살인 요인을 짚어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 배치되었던 여성들의 고뇌가 범죄의 한 원인으로 표출됐으며, 적자와 첩자, 적실과 첩실간의 대립, 노비와 주인 간의 대립 등 신분간 갈등구조가 살인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었다. 또 남편을 위한 아내의 복수, 아버지를 위한 자식들의 복수 등 복수로 인한 살인이 조선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범죄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범죄인의 의도, 범죄방법, 검험관의 검험방법 등 범죄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조선시대 수사 방법까지도 가능한 한 자세히 다루었다. 조선시대 범죄수사가 얼마나 과학적이고도 정밀하게 진행되는지, 범죄를 일으킨 정황이 실제 역사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아울러 범죄 뒤에 숨겨져 있는 당시의 사회적 갈등양상이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유승희 서울시립대 인문과학연구소 조교수
  • “경복궁 집경당은 새 문물 접하던 궁중도서관”

    “경복궁 집경당은 새 문물 접하던 궁중도서관”

    경복궁의 향원정 앞에 있는 집경당(緝敬堂)은 고종과 비빈들의 침전인 흥복전의 부속 전각이었다.2006년부터 흥복전 일대를 복원하면서 집경당과 이웃한 서쪽의 함화당(咸和堂)을 예전처럼 다시 연결하고, 사라진 회랑도 되살리는 작업이 올해 말 마무리를 목표로 벌어지고 있다. 집경당은 그동안 고종이 각국 공사를 친견했다는 ‘일성록(日省錄)’의 기록에 따라 내외 신료(臣僚)를 접견하던 장소로 알려졌다. 하지만 집경당은 2121질,2만 5203본에 이르는 서책과 서화를 수장하고 있었고, 고종이 신료들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토론하는 등 강학의 장소로 쓰여진 종합 궁중도서관이었다는 연구가 나왔다. 나아가 집경당이 당시 수장했던 자료의 목록을 살펴보면,‘옛것’보다는 당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고종이 대한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해외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연구원은 이 연구소가 발행하는 ‘문화재’ 최근호에 실린 ‘고종 연간 집경당의 운용과 궁중 서화수장’이라는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황 연구원은 규장각이 소장한 ‘집경당포쇄서목(緝敬堂曝書目)’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집경당포쇄서목잉흠총록(緝敬堂曝書目剩欠總錄)’을 분석했다.‘포쇄서목’은 전적이 상하지 않도록 볕에 말릴 때 작성한 목록이고,‘잉흠총록’은 이때 발견하지 못했던 자료를 별도로 정리한 것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전적의 분류체제는 ‘경사자집’의 사부(四部)분류법. 유교경전 등이 들어있는 경부(經部)와 역사책을 비롯하여 전기·금석·지리지 등이 포함되는 사부(史部), 제자백가를 비롯한 경사집부에 해당되지 않는 자부(子部), 그리고 시문을 특정형식별로 모은 집부(集部)로 나누었다. 하지만 ‘포쇄서목’과 ‘잉흠총록’은 집경당의 전적을 12부로 분류했다. 모두 302질,1073점을 차지하는 서화부(書畵部)를 비롯하여 운부(韻部)와 시첩부(詩帖部), 소설부(小說部)처럼 특정한 성격을 담은 자료를 별도로 분류했다. 특히 대수학·기하학 같은 수학 관련 서적을 모은 산부(算部)와 지리와 군사, 화학, 천문 관련 서양 서적을 모은 신기부(新奇部)를 두었다는 것은 당시 왕실이 전적을 수집하면서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적극 고려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서양 관련 서적들은 대부분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한역본으로,‘서양구도(西洋球圖)’나 ‘만국여도(萬國輿圖)’처럼 서양지도나 세계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 연구원은 “고종 왕실이 추구한 전적의 수장정책은 어느 선왕대보다 동시대 자료에 대한 시대성이 두드러진다.”면서 “그러나 유입된 외국의 최신 서책과 화보 등이 조선사회에서 충분히 융화되지 못하고 중국풍 일변도로 흐르는 결과가 초래된 것은 시대적 한계도 가늠케 한다.”고 설명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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