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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원, 조선의 민낯을 그리다

    화원, 조선의 민낯을 그리다

    어느 겨울 한 귀인이 휘하를 이끌고 야산에 올랐다. 몸종이 말을 끌고, 군복차림의 ‘일산(양산)’잡이가 멋진 일산을 받쳐 들었다. 중년의 귀인은 도포를 입고 훤칠한 말을 탔다. 말 뒤로는 꾀 많고 눈치 빠른 집사가 갓을 쓴 채 따른다. 술상을 인 건장한 찬비와 안줏감을 지고 가는 동자, 사냥몰이를 하며 짐을 진 하인 외에도 사냥개와 매까지 동원한 성대한 사냥이다. 조선시대 어느 고을의 원님 행차를 묘사한 이 그림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필치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농묵으로 균형을 잡고 여린 중담묵으로 감미롭게 표현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손길 닿는 대로 가볍게 쳐댔지만 빈틈없는 짜임새는 단원 김홍도(1745~1824)의 붓끝임을 말해준다. 1795년 안팎에 그려진 ‘호귀응렵’(호탕한 귀인의 매사냥)은 이 시기 연풍현감으로 재직하던 단원의 자화상에 다름없다. 단원은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화원’(畵員·궁중화가)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화원으로선 드물게 현감까지 올랐지만, 매사냥에 빠져 파직된다. 이후 ‘월하취생’ ‘낭원투도’와 같은 단원의 그림에선 술병과 사발, 벼루와 먹이 나뒹굴고, 신선과 선승이 등장한다.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단원의 마음은 스스로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중인(中人) 출신 화가의 울분을 위로했다. 한량처럼 밖으로 나돌던 혜원 신윤복(1758~?)은 또 어떤가. 아버지와 함께 2대째 화원으로 일한 혜원은 어려서부터 사대부 도령들과 어울리며 당시 은밀한 풍속을 그림으로 까발렸다. 조선시대 빨래터를 묘사한 ‘계변가화’에선 맑은 물소리와 방망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건장한 한량이 활을 든 채 여인들만의 세상인 빨래터를 지나다 눈길이 머문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추파와 웃통을 벗어젖힌 노파의 밉살스러운 표정까지 불꽃 튀는 연정이 담겨 있다.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를 비롯해 조선시대 화원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은 오는 13일부터 27일까지 올 하반기 정기 전시를 ‘진경(眞景)시대 화원전‘으로 마련했다. 진경시대는 조선 숙종부터 정조 때까지 120여년간의 문화 르네상스기를 이른다. 이 시기 특징을 잘 버무린 화원 21명의 그림 80여점이 전시회에 나온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진경시대는 조선 초기 지배이념인 주자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의 조선성리학으로 바뀌던 때”라며 “비로소 우리 자연과 풍속, 복식은 물론 내면을 보여주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시초는 사서삼경에 능했던 사대부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 진경산수화는 한 세대 뒤 단원과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궁중화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하지만 정선의 제자였던 현재 심사정(1707~1769)과 강세황은 진경산수에 반발해 명대의 남종문인화를 수용한다. 그렇게 겸재와 현재의 화풍은 화원인 진재해와 김희겸, 최북과 변상벽 등에 의해 제각기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선 풍속화가로만 알려진 단원의 빼어난 산수화, 사군자 등도 엿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 (02)762-0442.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조선사회의 불편한 진실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정약용 지음/노만수 엮어옮김/앨피/404쪽/1만 6800원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을 잠시 되돌아본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있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 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내와 성실, 용기로 큰 업적을 이루어 냈다. 불세출의 학자이자 경제가로 유명한 정약용은 그렇게 우리 후세들에게 남아 있다. 위당 정인보는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예(明?) 내지 온 조선의 성쇠존멸에 대한 연구”라고 말한 바 있다. 신간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는 조선시대의 불편한 사회 이면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정약용의 사회비판적 논설과 한시, 소설, 편지글 등을 주제별로 엮었다. 18세기 후반의 요동치는 정치사회사 및 다산 개인의 삶과 연결지어 흥미롭게 풀어 쓴 ‘참여작가 다산’ 연구서인 셈이다. 다산의 올곧은 성품과 치열한 사회비판 의식 및 인간적인 매력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던 각종 문제점들과 시대적 한계를 성찰한다. 이 책의 특징은 다산을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타이틀, 즉 참여파 작가라고 규정한 뒤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점이다. 다산을 실학자로 만든 사회 상황, 다산이 실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정치환경을 통해 다산을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한’ 깨어 있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는 대목에 방점을 찍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 환경과 그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 시대의 거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년 전 조선 사회, 그리고 지금의 한국 사회 현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귀양지에서의 가르침도 새롭게 다가온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웃으면 바뀌오 인상도 인생도

    웃으면 바뀌오 인상도 인생도

    ‘임금이 될 상(相)은 타고 난다(?).’ 조선시대 천재 관상가의 삶을 다룬 영화 ‘관상’이 지난 3일까지 관객 842만명을 끌어모으며 흥행하자 덩달아 ‘관상술’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도 커지고 있다. 영화는 ‘사람의 운명은 얼굴 생김새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전제하고 흥미롭게 전개된다. 하지만 현대의 인상 전문가들은 이런 전통적인 관상론에 고개를 젓는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는 대로 얼굴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라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얼굴에 새겨진다는 얘기다. 한 인상학자는 “인상의 30%는 타고나지만 70%는 후천적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은 인상을 만들 수 있을까. 한국인의 얼굴을 연구해온 얼굴·인상학자와 성형외과 전문의 등에게 비법을 물었다. 얼굴 전문가들은 인상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알면 길흉화복을 점치기는 어려워도 한 사람이 살아온 길과 심리 상태, 성향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웃고, 찡그리고, 울 때 얼굴 근육 46개가 주로 쓰이는데 이 움직임이 얼굴의 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국내 1호 인상학 박사인 주선희(54) 원광디지털대 얼굴경영학과 교수는 4일 “예컨대 인상학적으로 입이 작으면 내성적이며 치밀하다고 본다. 평소 호탕하게 떠들지 않고 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은 입 주위의 근육 16개가 안쪽으로 강화돼 입이 작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로 입이 큰 사람은 성격이 좋고 느슨하다고 보는데, 평소 어금니를 앙다물지 않고 입이 약간 벌어져 있고 잘 웃으면서 얼굴 근육이 발달해 입이 커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성장기 청소년은 평소 영양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얼굴 모양이 크게 변할 수 있다고 한다. 얼굴 전문가인 조용진(63) 한국얼굴연구소장은 “만 10~11세가 지나면 눈 아래쪽의 얼굴 뼈가 주로 성장한다”면서 “개인차는 있지만 영양 상태가 좋고 마음이 안정되면 턱과 코 등이 길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상학적으로 얼굴이 길면 성숙한 느낌을 준다. 사실 좋은 인상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전문가들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의 인상에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 교수는 “성공한 사람은 보통 눈동자가 촉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그윽한 눈을 특징으로 꼽았다. 그는 “눈앞의 상황만을 보지 않고 멀리 내다보며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눈빛을 가지면 신뢰감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밝은 표정도 성공한 이들의 특징으로 꼽혔다. 진세훈(58) 진성형외과 원장은 “성공한 사람 중 우거지상은 못 봤다”면서 “아무리 타고난 인상이 좋고 아름다워도 웃지 않으면 불 꺼진 형광등과 같다”고 밝혔다. 피부색이 건강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분석도 있다. 주 교수는 “피부가 희거나 검거나 노란 것은 상관없다. 다만 윤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장인은 오랫동안 집중력을 발휘한 까닭에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인 특징도 있다. 전문가들은 인상을 바꾸려면 우선 자주 웃으라고 권했다. 진 원장은 “성공한 정치인, 연예인 중에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또 동경하는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표정 연습을 하거나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상상한 뒤, 거울을 보고 그때의 표정을 기억해 연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주 교수는 “입꼬리와 양 눈썹 끝이 올라갈 정도로 많이 웃으면 볼과 코에 탄력이 붙는 등 좋은 인상으로 변한다”고 소개했다. 또 진 원장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성형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구타당해 생긴 상처는 비록 작더라도 트라우마로 남기 때문에 수술로 극복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상을 고치려고 성형 수술을 무차별적으로 하면 얼굴 균형이 깨지는 탓에 되레 좋지 않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좋은 인상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진 원장은 “‘아무리 사주가 좋아도 관상보다 못하고 관상이 좋아도 심상(心相)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면서 “평소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석보상절 활자체 살린 한글 글꼴 ‘석보체’

    석보상절 활자체 살린 한글 글꼴 ‘석보체’

    대한불교 조계종이 ‘석보상절’(釋譜詳節·보물 제523호)의 활자체를 원형으로 한 전통 문화 글꼴 ‘석보체’를 개발했다. ‘석보상절’은 세종 25년 한글 창제 이후 가장 먼저 반포된 최초의 한글 불서(佛書)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수양대군에게 명해 편찬한 석가모니의 일대기로, 문학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활자의 굵기가 일정하고 기하학적 특성이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계종이 3일 공개한 석보체는 석보상절 활자체의 형태적 특징을 살리고 현대적 미감을 더해 만든 것이 특징이다. 안국선원이 비용을 지원했으며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소장 안상수 전 홍익대 교수)가 개발 실무를 맡았다. 서체는 석보상절 글꼴 원형의 굵기를 그대로 따른 ‘석보체 보통’과 가늘게 보정한 ‘석보체 가는’, 두 종류다. 한글 1만 1172자, 로마자 94자, 기호활자 989자, 추가자(조계종 로고와 심벌) 4자로 구성돼 있다. 9일 한글날부터 조계종 홈페이지(www.buddhism.or.kr)와 네이버 소프트웨어 자료실을 통해 무료로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다. 조계종은 석보체에 이어 간경도감체, 인경체, 부모은중경체 등 다른 불경언해본의 글꼴 개발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오는 8일에는 석보체 개발과 한글날을 기념해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와 한글’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연다. 조계종 문화부장 진명 스님은 “최초의 한글 불서라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데다 글자체까지 아름다워 석보체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안상수 소장은 “불교는 조선시대에 억압을 받았지만 한글 언해 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글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며 “석보체는 단순하고 기하학적이면서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두달 동안의 짧은 만남… 조선왕실의 기품에 빠지다

    두달 동안의 짧은 만남… 조선왕실의 기품에 빠지다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원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전통 무용복 차림의 여성 무용수가 전통악기의 정갈한 음률을 타고 고아한 ‘춘앵전’의 춤사위를 펼쳐 보였다. 무용수의 얼굴에는 120년만에 돌아온 귀한 손님을 맞는 반가움이 서렸다. 이날 행사는 이튿날 개막하는 ‘미국으로 간 조선 악기-120년 만의 귀환’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춘앵전이 무엇인가.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40세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춤으로, 최초의 향악정재(鄕樂呈才·궁중행사에 쓰이는 전통 음악과 무용) 독무로 꼽힌다. 이른 봄날 아침에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춘앵전은 조선 최초의 해외공연으로, 1893년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던 것으로 기록된다. 이를 지켜본 당시의 클리블랜드 미 대통령은 “신비롭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대조선’이란 국호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한 10명의 조선 악공들이 품은 긍지도 대단했다. 그해 3월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정경원 출품사무대원의 인솔로 제물포에서 출항한 사절단은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한 달여 만인 4월 말 시카고에 도착했다. 유럽 열강에 자극받은 미국은 철학·경제·과학은 물론 음악·연극 등 예술 공연을 더해 성대한 박람회를 열었다. 매뉴팩처스 빌딩 구석에 전시관을 차린 조선은 여덟 칸의 기와집을 짓고 대포 등 무기류와 복식류, 가구, 방석 등을 전시했다. 조선 악공들은 전시관 내에서 전통음악을 연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이 갖고 간 악기 10점은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의 문물을 널리 알리려던 고종의 뜻에 따라 악기들은 보스턴 인근 피바디에섹스박물관에 기증됐다. 주재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은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한 상황에서 고종은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길 원했고 이를 위해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악기들은 국립국악원이 수년에 걸쳐 피바디에섹스박물관에 대여를 요청해 지난 1일부터 오는 12월 1일까지 두 달간 전시일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를 찾았다. 국립국악원은 해외 국악 유물을 소개하는 행사를 이어왔고, 지난해에는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국악기 11점을 프랑스음악박물관으로부터 가져와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는 본래 미국으로 건너갔던 10점 가운데 해금·용고 등 상태가 좋지 않은 2점을 제외하고 장구·당비파·양금·거문고·생황·대금·피리(2점) 등 8점이 돌아와 공개됐다. 파손 방지를 위해 특별 포장된 악기들은 애초 화물기편으로 운송될 예정이었지만 중앙박물관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여객기편으로 들어왔다. 지난달 24일 뉴욕 외곽의 케네디국제공항에선 철저한 보안 속에 악기들이 실렸고, 피바디에섹스박물관 관계자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밤을 꼬박 새우며 악기를 지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악기들은 줄 이음새 하나까지도 왕실의 기품을 내뿜는다. 장구의 가죽과 울림통을 고정시키는 가막쇠에는 왕실 상징인 용 문양이 새겨졌다. 가죽으로 만든 장구의 줄조이개에는 섬세한 수가 놓였고, 당비파 뒤쪽에 달린 줄은 군주를 뜻하는 화려한 붉은색으로 치장됐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4줄씩 총 56개의 철사 줄로 이뤄진 양금은 120년 전에 만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멀쩡하다. 모두 3부로 꾸민 이번 전시는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 전시실’(1부),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 음악’(2부), ‘국악 유물’(3부)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에선 120년 전 문화를 통해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고종의 노력과 함께 조선시대 기록으로 남은 다른 국악 관련 중요 유물들도 만날 수 있다. 관람은 무료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도난품 논란 ‘고종 투구’ 도쿄박물관 전시

    도난품 논란 ‘고종 투구’ 도쿄박물관 전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고종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투구를 비롯한 조선 왕실 물품 다수를 공개했다. 도쿄국립박물관은 1일 ‘조선시대의 미술’이라는 기획 전시에서 ‘용 봉황무늬 두정 갑옷과 투구’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왕의 갑옷과 투구를 선보였다. 박물관 측은 이 유물에 대해 19세기 조선 물품이며 ‘오구라 컬렉션’으로부터 기증받았다고 소개했다. 오구라 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남선합동전기회사를 운영한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1910~1950년대 한반도에서 수집한 1000여점의 문화재로 구성돼 있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이날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해 “박물관으로부터 왕실 물품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고 시기 등으로 미뤄 볼 때 고종이 사용하던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은 투구의 이마 가리개 부분이 백옥으로 돼 있고 발톱이 5개 달린 용이 새겨진 점, 투구 양쪽에 날개가 달린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투구 맨 위에 최고 지위를 나타내는 백옥 장식이 있는 점도 통치권자인 왕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객이 당시 방에서 들고 나온 ‘풍혈반’(風穴盤)이라는 이름의 소반도 전시됐다. 이 소반은 나무로 제작해 옻칠을 한 것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 기재됐다. 한편 이날 전시된 조선시대 유물이 도난품이라는 일부 주장과 관련해 혜문 스님은 “왕실 물품은 (왕족을 관리하는 부처인) 궁내청이 관리하던 것이고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것인데 도쿄국립박물관이 오구라 컬렉션으로부터 기증받았다면 도난품이라는 정황을 알면서도 받아들였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평등 외쳤던 정여립 되살리고 싶었어요”

    “평등 외쳤던 정여립 되살리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해 반역자가 된 불우한 정치가, 정여립을 픽션으로 되살려내 현재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첫 장편소설 ‘홍도’(다산책방)로 제3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김대현(45) 작가가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간담회를 열었다. 138편의 응모작을 제치고 당선된 ‘홍도’는 정여립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던 동현이 자신이 433세이며 정여립의 외손녀라고 주장하는 홍도를 만나며 시작된다. 노르웨이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8시간의 비행 동안 동현은 조선시대 중반부터 현대까지 휘감아도는 홍도의 이야기를 ‘소설’이라 생각하며 듣지만 어느새 빠져들고 만다. 기축옥사, 임진왜란, 천주박해 등 역사의 큰 물줄기와 홍도 개인의 역사가 섞여들며 흘러가는 서사가 흡인력 있게 전개된다. 특히 환생한 아버지, 연인과 거듭 만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죽지 못하는 여자 홍도라는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박범신 소설가는 “‘홍도’라는 캐릭터 덕에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와 달리 타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팽팽하게 살아 있는 또 다른 역사상을 갖게 됐다”며 “이것만으로도 ‘홍도’의 문제성은 단연 압도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정여립 누이의 손녀로 설정한 홍도는 내가 잘 아는 사람, 아내에서 캐릭터를 따온 인물”이라며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 인물을 통해 역사가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의미를 주고, 역사적 사실과 개인이 흘러온 시간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첫 소설로 문학상을 거머쥔 그는 영화계에서도 첫 작품으로 수상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1999년 단편영화 ‘영영’을 연출해 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며 핀란드 팜페레국제단편영화제에서 디플로마스오브메리트상과 이란 국제청년단편영화제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곧 풀릴 ‘전두환 컬렉션’ 낙찰가는?

    곧 풀릴 ‘전두환 컬렉션’ 낙찰가는?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집행팀(팀장 김형준)은 1일 전 전 대통령 일가로부터 압류한 주요 미술품을 공개했다. 검찰에 따르면 전씨 일가의 컬렉션에는 이대원, 겸재 정선, 김환기, 현재 심사정, 천경자 등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검찰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로 구성된 ‘전두환 압류 재산 환수 태스크포스’는 조만간 압류된 미술품들을 공매 처분할 예정이다. 검찰은 압류한 미술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은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에 있던 고(故) 이대원 화백의 ‘농원’이라고 설명했다. 가로 200㎝, 세로 106㎝ 규모(120호 규격)의 나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당초 1억원 정도로 추정됐으나 감정 결과 이보다 높은 가격대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그림의 절반 크기의 1978년작 ‘농원’은 2억 9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도 전씨 일가의 컬렉션에 포함됐다. 김 화백은 국내 미술 시장에서 박수근, 이중섭 등과 함께 작품 거래 가격면에서 가장 높은 작가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미술 분야에서는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의 작품과 함께 현재 심사정의 진경 산수화와 호생관 최북의 풍류화 등이 눈에 띈다. 이 밖에도 1960~80년대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던 천경자 화백의 ‘여인’,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설악산 그림으로 유명한 김종학 화백의 ‘꽃’ 등 근현대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또 영국 출신 인기 작가 데미언 허스트의 판화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중국 근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장샤오강의 판화 작품인 ‘혈연시리즈’, 프란시스 베이컨의 ‘무제’ 등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전씨 일가 컬렉션에 이름을 올렸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경복궁 이승만 낚시터 ‘하향정’ 문화재청 ‘철거·보존’ 놓고 고민

    경복궁 이승만 낚시터 ‘하향정’ 문화재청 ‘철거·보존’ 놓고 고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낚시터로 알려진 경복궁 하향정의 존폐 여부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경회루(국보 224호) 서북쪽에 자리한 육각형 모양의 정자인 하향정의 철거를 요구하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역사학계와 일부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향정이 문화재 당국의 ‘계륵’으로 떠오른 것은 지난 8월 초.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조선시대 왕들의 휴식처였던 경회루 연못가에 자리한 하향정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취미생활을 위해 급조된 정자라는 사실을 폭로하면서부터다. 이 단체는 이 전 대통령과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함께 낚시하던 흑백사진까지 공개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다 1950년 6월 25일 북측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도 최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복궁 원형에 손상을 가한 이 대통령의 낚시터가 철거돼야 한다”고 문화재청을 압박했다. 문화재청이 이른 시일 내에 하향정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할 경우, 이달 중순 국정감사에선 호된 비판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강조하는 ‘현상보존론’도 힘을 얻고 있다. 태조 4년(1395) 건립돼 고종 4년(1867) 중건된 경복궁에 60여년 전 지어진 정자가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경복궁 또한 해방 이후 대대적인 개보수 과정을 거쳐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고 볼 수 없는 상태다. 시민단체인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의 황평우 소장은 “역사에는 공과(功過)가 있는 만큼 모두 보존하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며 철거를 반대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하는 호국단체 회원들로부터 ‘하향정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항의 전화와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면서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만큼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 중이지만 딱히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지금까지 의견 수렴 과정에선 하향정의 존치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다만 문화재청은 유지냐 철거냐로 단정짓기보다는 제3의 장소로 하향정을 옮겨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을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130억원 들여 거리 새단장하니 ‘수원의 중심’ 옛 명성 돌아왔다

    화성행궁이 있는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은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의 성안 마을이다. 9월 한 달간 차 없는 불편을 체험하는 ‘생태교통 수원 2013’ 행사가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행궁동은 화성이 축성되고 1789년 정조가 수원 읍치를 화성으로 옮긴 뒤 팔부자거리, 팔달문지역 상가 등이 형성되며 2000년대까지 수원의 다운타운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은 화성 축성 당시의 역사와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다.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팔달문(八達門), 장안문(長安門), 화서문(華西門), 창룡문(蒼龍門) 등 4대문이 남아있고 어느 곳에서나 팔달산 화성서장대(華城西將臺)가 시야에 들어온다. 또 화성 축성 당시 인부들이 돌을 나르며 형성된 길, 조선시대 주민들이 화서문을 통해 팔달문 방향으로 다니던 길, 우리나라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이 학교에 다니던 길 등 옛길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고 동수원, 영통 등 신시가지로 상권이 옮겨가며 한때 낙후지역으로 위상이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생태교통 페스티벌을 계기로 수원시가 행궁동 시범지역에 130억원을 투입, 도시 면모를 깔끔하게 일신했다. 주요 도로를 자동차보다 보행자가 우선되는 생태교통 특화거리로 리모델링했고 거리 상가 간판과 벽면도 깔끔하게 단장해 행인들이 즐겁게 산책할 수 있도록 했다. 생태교통 페스티벌을 통해 환경도시 이미지를 구축하고 숙원인 원도심 부활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궁동 2200가구 주민 4300명은 지난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 동안 석유연료가 고갈된 상황을 전제로 자동차를 포기하는 헌신적 ‘불편체험’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김병일 시 생태교통추진단장은 “행궁동은 세계문화 유산인 화성의 중심에 있는 탓에 각종 규제로 낙후를 면치 못했으나 생태교통 행사를 유치한 덕분에 수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탈바꿈했다”며 “향후에도 주민 주축으로 차 없는 마을이 운영돼 관광명소, 수원의 명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포토 다큐 줌인] 전통 나침반 ‘윤도’ 만드는 무형문화재 김종대씨

    [포토 다큐 줌인] 전통 나침반 ‘윤도’ 만드는 무형문화재 김종대씨

    윤도장(輪圖匠)은 우리나라 전통 나침반인 윤도(輪圖)를 만드는 장인(匠人)이다. 윤도는 작은 원반형의 대추나무 표면에 24방위를 나누고, 각 칸에 음양(陰陽)·오행(五行)·팔괘(八卦)·십간(十干)·십이지(十二支)를 주역(周易)의 원리에 따라 새겨 넣은 다음 그 한가운데 항시 남쪽을 가리키는 자침(磁針)을 올려놓은 형태의 나침반이다. 나침반(羅針盤), 지남철(指南鐵), 지남반(指南盤),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서 패철(佩鐵)이라고도 한다. 윤도를 통해 지관(地官)들은 집터나 묘자리를 골랐고, 천문학자들은 시간과 별자리를 관측했으며 여행자들은 방향을 가늠했다. 김종대(81·중요무형문화재 110호)씨는 4대째 윤도 제작의 기법을 잇고 있는 국내 유일의 윤도장이다. 그가 살고 있는 전북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에서 만든 나침반을 조선시대 지명을 따 ‘흥덕패철’이라고 불렀는데 방향이 정확하고 견고해 유명해지며 전통 나침반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윤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이삼백 년은 넘은 속이 꽉 찬 대추나무를 구해 갈라지거나 틀어지지 않게 2~3년간 물에 불리고 건조시킨 뒤 원반형으로 납작하게 자른다. 그런 다음 작두를 이용해 가장자리를 깎아 판의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 등 준비 단계부터 녹녹지 않다. 이후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후 컴퍼스처럼 생긴 걸음새라는 전통 도구로 동심원을 그리고 칸을 일정하게 나누는 정간(定間) 작업을 한다. 동심원 1개를 1층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다섯 개의 동심원 칸이 있으면 5층 윤도가 된다. 층수가 많을수록 십간·십이지·24절기까지 확장되고 세분화된다. 지관들은 보통 5층짜리나 9층짜리 윤도를 쓴다. 조각칼로 글씨를 새기는 각자(刻字) 작업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딱딱한 나무를 끌칼로 파내기도 어렵거니와 밑글씨 없이 단 한 번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백 자를 써 넣었더라도 마지막에 한 글자를 실수하면 전체 표면을 갈아 내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방향타인 자침을 만드는 일은 윤도 제작 작업의 핵심이다. 철판을 두드려 펴고 줄로 갈아 만든 세침(細針)을 윤도판 정중앙에 삽입한 주석봉 위에 올려놓는데, 그 한가운데 구멍을 정교하게 뚫어 흔들림을 최소화하는 과정은 숙련자만이 할 수 있다. 형태가 만들어진 자침은 숯불에 한 번 단련시켜 강도를 높이고 천연자석에 30분 정도 붙여 자성(磁性)을 입힌다.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자침은 남북을 가리키게 된다. 자성을 띤 자침은 먹물을 입혀 검은 바탕 위에 백옥 가루를 개어 넣어 글씨를 도드라지게 한 윤도판 위의 둥근 홈에 놓여진다. 마지막으로 이 작은 원형 홈 위에 유리판을 덮으면 비로소 윤도가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에 사용되는 천연자석, 정, 송곳, 집게, 망치 등 대부분의 도구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200년은 족히 넘은 물건들이다. 과정에 공과 시간이 워낙 많이 들어가다 보니 부채 끝에 매다는 선추(扇錘)나 거울이 달려 있는 여성들이 사용한 면경철(面鏡鐵) 같은 작은 윤도를 만드는 데도 1주일 정도 걸린다. 지름이 20㎝가 넘는 큰 윤도는 4개월 이상 걸린다. 김종대씨가 큰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본격적으로 전수받은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다.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윤도를 배운 김씨의 손재주를 알아본 큰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를 전수자로 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서 일하던 김씨는 운명적으로 이 업을 전수하게 된다. 이제는 윤도장의 맥을 그의 아들 김희수(53)씨가 잇고 있다. 대기업에서 20년 동안 회사원 생활을 하다 가업을 물려받은 그가 윤도 전수자가 된 이유는 유일하게 남은 윤도장의 맥을 잇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김씨 부자는 현재 패철(평철), 선추, 면경철, 거북이패철 등 규모가 작은 네 가지 윤도를 주로 만들지만 스케일이 큰 창작품도 병행해 제작하고 있다. 전통적인 도구 제작을 넘어 예술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윤도의 가격은 비싸다. 예쁘게 생긴 선추나 면경철도 40만원, 지관들이 주로 쓰는 5층 윤도는 오륙십만원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돈이 되지는 않는다. 찾는 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사가는 사람 별로 읎제. 가보(家寶)나 기념 선물로 사는 사람이 간혹 있고, 지관들이나 찾는 정도여. 한 번은 외국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결혼 선물로 사가는 아버지가 있었는디, 그게 기억에 남는구먼. 인생의 길 잃지 말고 방향 잘 잡고 살라는 의미 였겄제.” 김종대씨의 바람 중 하나는 무엇보다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젊은 세대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대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며칠 묵으면서 같이 작업도 하고 그랬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어.” 김씨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전수자인 아들과 함께 고창의 작은 마을에서 매일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힘이 다할 때까지 손때 묻은 도구를 내려놓지 않을 생각이다. 나이가 들며 기력이 떨어지고 손끝의 힘도 예전만 못 하지만 그의 눈빛은 식지 않는 열정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다. 글 사진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수원 화성행궁 앞 광장

    [명인·명물을 찾아서] 수원 화성행궁 앞 광장

    지난 27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화성행궁 앞 광장. 반세기를 이어온 제50회 수원화성문화제가 광장을 중심으로 화성 일원에서 그 화려한 막이 올랐다. 이날 개막연에서는 시민 50명이 참여하는 색소폰 연주, 최소리의 물·불 퍼포먼스, 뮤지컬 갈라 콘서트, 가수 강산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을묘년 화성원행에 근거한 정조대왕 능행차, 무예종합예술공연, 혜경궁 홍씨 진찬연, 정조대왕 친림과거시험 등 다양한 행사도 선보인다. 행궁광장 한쪽에서는 오전부터 음식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한·중·일 동북아 3개국의 음식코너가 마련돼 한식, 일식, 중식을 맛볼 수 있고 수원양념갈비를 요리하고 시식하는 체험행사도 준비됐다. 또 이날 행궁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활쏘기, 권법, 마상기창, 마상월도 등 24가지 무예와 전통무용공연이 열렸다. 화성행궁 앞 광장이 수원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치단체 및 산하단체의 공식행사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의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다. 화성 국제 연극제, 어린이 문화축제. 각종 전시회, 무예 및 전통공연 등 주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씻어줄 만한 행사도 마련된다.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나온 시민과 행궁을 찾는 관광객들로 광장은 온종일 활기가 넘쳐난다. 그런데 화성행궁 앞에 소중한 광장이 만들어진 사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조선시대 왕궁 중 광장이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한데 수원시는 658억 9000여만원을 들여 2008년 10월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광장(2만 2331㎡)을 조성했다. 광장에는 길이 130m, 폭 15m 내외의 어도(御道)가 마련됐으며 봉수당진찬도(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모습), 낙성연도(낙성연을 베푼 모습), 신풍루사미도(백성에게 쌀을 나눠주던 모습) 등도 바닥에 새겼다. 화성행궁 광장이 조성된 것은 수원시가 급증하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광장 조성 특별 허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과 행궁 등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이 급증하는 데 반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부족해 전통공연이나 각종 문화 예술 행사를 개최할 광장을 요구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국내 왕궁, 행궁에 광장 문화가 없다는 점을 들어 광장 조성에 반대했으나 지속적인 수원시의 요청을 수용해 광장 조성을 허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성사업소 당준상 문화유산관리과장은 “조선시대 왕궁, 행궁을 통틀어 광장이 조성된 곳은 수원 화성 행궁이 유일하다. 화성을 축성한 정조가 만든 것이 아니라 200여년이 지난 후세에 조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화성행궁 소개도 빼놓을 수 없다. 화성행궁을 모태로 광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도 했다. 우리나라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행궁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수원시가 주요 건물 482칸을 복원해 2003년 일반에 공개했다. 화성을 축성할 당시 행궁을 비롯한 건축물 모습과 특징까지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TV 드라마 ‘대장금’, ‘이산’과 영화 ‘왕의 남자’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는 등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인기다. 지난 한해 동안 화성행궁을 포함해 화성을 찾은 관광객은 외국인을 포함해 모두 144만 6000여명이다. 올 들어서 지난달 현재 98만 7000여명이 찾았다. 행궁앞 길 건너편에 6·25전쟁 때 사라진 종각도 만들었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당시 만든 것이다. 화성행궁 앞에 조성된 화성박물관은 화성의 우수성과 정조의 개혁정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지 2만 3173㎡, 연면적 5635㎡의 규모로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 기획전시실 등 3개의 전시실에 야외전시장을 갖췄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화성행궁을 포함한 수원 화성은 과학적이고 실용성과 아름다움에서 뛰어난 점을 인정받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며 ”특히 화성행궁은 여러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커다란 광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자랑”이라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조선판 무한 경주 ‘GTA조선’ 네티즌 반응이…

    조선판 무한 경주 ‘GTA조선’ 네티즌 반응이…

    GTA조선 네티즌 화제 tvN ‘SNL코리아’에 유명 게임 GTA 시리즈를 패러디한 코너 ‘GTA조선’이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28일 방송된 SNL코리아에는 락스타게임즈 인기 게임 GTA 시리즈를 패러디한 ‘GTA조선’ 콩트가 전파를 탔다. 이날 방송에서 김민교는 게임 매장에서 한국의 천재 프로게이머가 개발했다는 GTA조선 소프트웨어를 입수했다. 김민교는 아직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매장 주인의 말에 혹해 게임에 도전했다. GTA조선은 조선시대 설정에 맞게 백정, 노비, 망나니 등의 캐릭터가 등장했다. 또 GTA조선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지도로 등장했다. 자동차가 아닌 가마를 빼앗아 타는 등 실제 GTA를 코믹하게 패러디했다. 네티즌들은 “GTA조선 너무 웃겨요”, “GTA 게임 아는 사람들은 GTA조선 보면서 배꼽 잡았을 듯”, “GTA조선 게임으로 만들어도 될 듯”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실패로 돌아간 육의전 재개발의 교훈/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실패로 돌아간 육의전 재개발의 교훈/서동철 논설위원

    로마나 아테네를 찾는 여행자들은 시내 어디를 파도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부의 강력한 문화재 보호 정책에 따라 누구도 삽질 한 번 잘못 했다가는 엄청난 처벌을 받는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로마나 아테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문화재 보존의 강도는 유럽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역사가 있는 나라라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재 보존 노력에는 찬사를 보내는 한국인들이 애써 외면하려는 사실이 있다. 서울 역시 어디를 파도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600년 동안 수도의 역할을 했던 도시다. 당시에도 갖가지 건물이 빼곡하게 사대문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 종로는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길 양쪽에는 오늘날과 다름없이 상점이 줄지어 있었는데, 태종이 추진한 시전행랑 조성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2010년 탑골공원 옆 모서리에는 육의전빌딩이 세워졌다. 일종의 국가조달 상점인 육의전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발굴 조사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광복 이후에 이르는 6개의 문화층이 드러났다. 조선시대 대표적 상업 시설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지하에 남아 있었던 셈이다. 빌딩 신축이 결정된 것은 2008년이다. 중요한 유적이었으니 훼손을 우려하는 여론을 무마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지하에 유구를 보존하고, 건물을 세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제시됐다. 박물관을 세우는 계획도 더해졌다. 지하의 선사 유적지를 보존하고, 아파트를 올린 프랑스 니스의 테라 아마타(Terra Amata) 고인류학 박물관의 전례가 있으니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종로구청이 건축주를 고발했다는 뉴스가 며칠 전 들려왔다. 건물주는 신축 계획이 통과되자, 박물관의 운영 재원을 마련하려면 건물을 한 층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지만 박물관 개설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육의전 유구는 결코 보존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몰골로 변했다. 건축 계획 당시 ‘개발과 보존의 윈윈전략’이라고 기사를 썼던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육의전의 사례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면 서울이 아니라 전국 어디든 지하 유적의 보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하지만 정부의 의지란 국민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하 문화재 보존에 대한 국민 전체의 컨센서스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실제로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각에 이르는 종로 초입은 이미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모해 버렸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법과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종로 유적을 부분적으로라도 보존하는 방안이 없지는 않다. 공공기관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세종시 입주 대신 종로의 건물을 매입한다면 사실상 영구적 보존 방안이 된다. 최종 결정 과정이 남아 있지만, 해양수산부가 세종시에 머문다면 부산청사 구입에 들어갈 비용을 돌려 쓰면 된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세종시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됐다면, 문화부는 고유 목적인 문화 중흥에 기여해도 좋을 것이다. 경복궁 터를 비워주어야 하지만, 이전 부지를 마련치 못해 애태우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당장이라도 종로 이전을 추진할 수 있다. 민속박물관이 종로의 도심형 박물관으로 거듭나면 교통의 요지에서 더 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된다. 사들인 건물은 리모델링하고, 지하 일부를 발굴하면 그대로 ‘조선 상업사관’이 된다. 지하 유구의 영구 보존을 겸하는 새로운 개념의 민속박물관은 세계의 어느 박물관 교과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명물이 될 것이다. 인사동과 민속박물관, 종묘, 국악의 거리를 잇는 일대가 거대한 전통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는 것은 덤이다. dcsuh@seoul.co.kr
  • [소설가 최인호 별세] 영원한 청년작가 깊고 푸른 밤에 별들의 고향으로…

    [소설가 최인호 별세] 영원한 청년작가 깊고 푸른 밤에 별들의 고향으로…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는 문단에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특별했다. 그에게는 ‘기록을 만드는 남자’라는 별명이 끊임없이 붙어다녔다.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 같은 수식어가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자리했다. 그러나 작가의 이름 석자보다 더 굳건한 상징어로 따라다닌 ‘영원한 청년 작가’라는 호칭은 비단 그가 서울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여덟살의 나이에 등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성과 청년 문화, 엘리트와 대중의 배타적 구분을 거부하면서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가 됐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퇴폐적이라는 비판에 휩싸이자 최인호는 1974년 발표한 ‘청년문화 선언’을 통해 이렇게 외친다. “고전이 무너져 가고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 가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 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해 등단한 최인호는 1973년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면서 최고의 대중 작가로 주목받았다. 젊은 여성 ‘오경아’의 삶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린 ‘별들의 고향’은 단행본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장호 감독·신성일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별들의 고향’을 비롯한 대중 소설을 발표하면서 ‘상업주의 작가’, ‘퇴폐주의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발표한 초기 소설은 산업화의 격랑에 휩쓸린 한국 사회의 변동과 개인의 문제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술꾼’과 ‘모범동화’, ‘타인의 방’, ‘가면무도회’, ‘다시 만날 때까지’, ‘깊고 푸른 밤’ 등을 발표하며 “1960년대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문학평론가 조남현)라는 찬사를 받았다.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을 받는 등 사상계 신인문학상과 현대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휩쓸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또 ‘바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 ‘고래 사냥’ 등의 각본을 쓰면서 영화 작업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80년대에도 ‘불새’와 ‘위대한 유산’ 등을 펴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던 작가는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제2기 문학’을 시작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는 달리 황폐해지는 내면이 그를 종교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은 그는 ‘잃어버린 왕국’과 ‘저 혼자 깊어 가는 강’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동화집 ‘발명왕 도단이’를 펴내기도 하며 가톨릭 전문지 서울주보에 칼럼을 연재했다. 1997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상도’는 300여만부나 팔려 나갔다. 조선시대 상인의 삶을 통해 돈을 벌고 쓰는 일의 도(道)를 그린 ‘상도’는 이후 중국에서도 출간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2003년부터는 3년간 서울신문에도 대하장편소설 ‘유림’을 연재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조선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비롯해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퇴계 이황 등 유림의 삶을 통해 2500년 유교 역사를 형상화했던 작품은 작가적 시야를 크게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 한순간도 시들지 않았던 푸른 창작열은 2008년 침샘 부근에서 암이 발견되면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나 생사를 초월한 의지로 펜을 내려놓지 않던 작가의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암을 통해 ‘제3기 문학’을 발아시켰다. 2011년 발표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 작품은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 하느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 ‘제2기 문학’에서 ‘제3기 문학’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하려 한다”면서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투병 중에도 산문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과 ‘천국에서 온 편지’ 등을 펴낸 작가는 등단 50주년을 맞은 올해 초 그동안의 연재 글 등을 묶은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을 펴냈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병마와 싸우는 고통과 공포를 솔직히 써내려간 책에서 작가는 “그동안 명색이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지냈음이 문득 느껴져 부끄럽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면서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고 적었다. ‘최인호의 인생’ 말미에 자리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는 그가 책으로 펴낸 마지막 글이 됐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한류 드라마 원조 ‘대장금’ 10주년 열기 속으로

    한류 드라마 원조 ‘대장금’ 10주년 열기 속으로

    MBC가 한류 드라마의 원조인 ‘대장금’ 방송 10주년을 맞아 특집 프로그램을 대거 방송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의녀로 왕의 주치의가 된 대장금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대장금’은 2003년 9월 15일 첫 방송 이래 평균 시청률 42.3%(TNmS 수도권 기준)를 기록하며 ‘국민 드라마’로 사랑받았다. 2004년 3월 23일 방송된 마지막 회(54회)는 55.5%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다. 이후 전 세계 87개국에 수출돼 한식과 한국의 전통문화를 전파하는 한류의 시초가 됐다. 새달 7일과 14일 밤 11시 20분에 방송되는 2부작 MBC 다큐스페셜은 ‘대장금’이 한류를 일으킨 ‘대장금 루트’를 따라가며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한 ‘대장금’의 열기를 전한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미국, 중국, 아프리카, 스리랑카, 벨라루스 등 전 세계 12개국을 돌며 취재했다. 루마니아의 공영방송 TVR이 경영 위기로 고사 직전 ‘대장금’을 방송해 위기를 극복했으며 이후 한국 사극 드라마 수입이 잇따랐다는 에피소드와 영국 BBC에서 ‘대장금’을 방송해 달라고 서명 운동을 펼치는 영국인 소녀의 이야기, 한국에 대한 향수를 ‘대장금’으로 달래는 벨라루스의 고려인 할머니 일화 등이 소개된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에라리온에서도 ‘대장금’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작진은 또 ‘대장금’의 주연배우 이영애와 지진희, 연출자 이병훈 PD, 극본을 쓴 김영현 작가를 심층 인터뷰했으며 스리랑카 현지에 이영애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장학재단을 찾아가 학생들과 인터뷰했다. 한편 MBC 예능 프로그램 ‘어서오세요’는 터키 국립앙카라대와 에르지에스대의 학생 8명이 한국에서 한국의 문화를 배우며 합숙하는 모습을 담았다. 두 개의 서당으로 나누어 합숙을 하며 대결을 벌인 뒤 1년간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생 한 명을 뽑는 과정이다. 이 프로그램은 오는 10월 중 방송될 예정이다. ‘대장금’이 보여준 문화 콘텐츠의 힘을 재조명하는 ‘2013 글로벌 문화콘텐츠 포럼(GCF)’도 오는 10월 18일 오후 2~8시 방송된다. 세계 87개국으로 퍼진 ‘대장금’은 수출 및 광고만으로도 약 380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2차 콘텐츠로 발전한 ‘대장금’의 생산유발효과도 무려 1119억원에 달한다. 이번 포럼은 ‘대장금’ 같은 문화 콘텐츠의 경제 효과를 분석하고 문화 강국이 되기 위한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다.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특별 강연과 세계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짐데이토 교수의 기조연설 등이 진행된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여기가, 영등포였대요

    여기가, 영등포였대요

    서울 영등포구는 서울 25개 자치구의 맏형 격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서울은 4개 출장소(용산·동부·서부·영등포) 체제였다. 그러다가 1943년 7개 구(종로·중구·용산·동대문·서대문·성동·영등포) 체제로 개편됐다. 이듬해 마포구, 광복 뒤인 1949년 성북구가 추가됐다. 6·25 전쟁 이전 한강 이남은 대부분 영등포였다는 이야기다. 영등포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 경제를 이끈 곳이다. 경인공업 지역의 한 축으로, 기계·섬유·고무·화학·피혁·약품·유리·가발·밀가루·설탕까지 온갖 공장이 꿈틀댔다. 국내 맥주의 쌍벽을 이루던 OB맥주와 조선맥주 공장도 있었다. 전국에서 꼬마부터 어른까지 일자리를 찾으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하지만 영등포는 지역 균형 개발을 위해 전국 곳곳에 새로 들어서는 공단에 조금씩 역할을 내줬다. 또 1973년 관악(동작 포함), 1977년 강서(양천 포함), 1980년 구로(금천 포함)가 차례로 떨어져 나가며 몸집도 줄었다. 하지만 쇠락의 길만 걸어간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말 목장으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군사 비행장으로 쓰이던 여의도가 1968년부터 상업·금융·주거 지구로 변신했다. 여의도는 나날이 솟구치는 금융기관, 기업, 언론사, 아파트 등과 더불어 한국의 맨해튼으로 불렸다. 1975년에는 국회의사당이 준공되며 한국 정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영등포가 제18회 구민의 날을 맞아 지역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담은 사진전 ‘옛기억 더듬어 찾아가는 영등포 추억 마중’을 연다. 오는 27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영등포문화원 1층 전시실에서다. 추억과 향수는 물론 지역 사랑을 불러일으켜 주민 화합과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사진전을 위해 구 홈페이지와 포토역사관을 꾸리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핀터레스트 계정을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오래 살았던 주민은 물론 학교와 기업, 종교단체 등에 협조를 구했다. 180여점을 모았다. 이 가운데 조선 말기부터 현재까지 변화 과정을 담고 있는 자연, 건축물, 주민 생활, 중요 사건 관련 사진 100여점을 전시한다. 전시실 입구에서는 40인치 대형 TV를 통해 영등포의 역사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또 옛 영등포 관련 대형 사진을 설치해 포토존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古, GO!… 종로구 전통과 현대의 한판 축제

    종로구는 조선 건국 이후 600여년에 걸쳐 서울의 중심이라고 자부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종묘, 사직단 등 여러 문화유산이 자리 잡았다. 북악산, 인왕산 등을 병풍 삼은 전통 한옥도 잘 보존돼 있다. 덕분에 전통미와 현대미가 공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는 전통과 현대가 하나되는 ‘고고(古GO) 종로 문화페스티벌 2013’을 오는 27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개최한다고 23일 밝혔다. 한자 ‘옛 고’(古)와 ‘가다’를 뜻하는 영어 GO를 함께 써 옛 문화를 체험해 보고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를 열어가자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구는 2011년부터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크고 작은 축제를 통합했다. 개막행사는 27일 오후 5시 마로니에공원에서 공원 재개장과 함께 열린다. 사물놀이, 마임, 코레아나 클래시카 오케스트라 축하공연 등이 이어진다. 인사동 일대에서는 다음 달 1일까지 전통 공예·다도·전통악기·김치 담그기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시민과 관광객들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130여개 문화업소가 참여하는 고미술·현대미술·공예품 전시인 ‘인사동전통명가전’도 눈여겨볼 만하다. 28~29일 청계천에서는 조선시대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은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인 ‘육의전’을 체험할 수 있다. 다음 달 1~2일 운현궁에서는 궁중과 사대부가 전통음식을 직접 만들어 보는 시간이 마련된다. 대학로에서는 다음 달 4일부터 20일까지 극장공연, 거리예술 학교 등 다양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소극장 축제’가 기다린다. 이 밖에도 삼청로 문화축제, 아름다운 종로박물관 나들이, 북촌축제, 전국 활쏘기 대회, 국제 꽃 장식대회, 별 헤는 밤 음악회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잇따른다. 구 관계자는 “올해 3회째를 맞지만 구민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호응을 얻는 축제”라며 “특색 넘치는 종로의 문화를 축제 기간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씨줄날줄] 어보와 국새/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조선시대의 어보(御寶)와 국새(國璽)는 왕실의 도장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다른 점도 많다. 어보는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이나 시호나 존호를 올릴 때 사용한 의례용 도장을 말한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고, 왕과 왕비의 어보는 사후 왕실 사당인 종묘에 안치했다. 왕과 왕비의 도장은 보(寶), 왕세자와 세자빈의 것은 인(印)이라고 했다. 어보는 금박을 입히거나 은 또는 구리, 옥과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국새는 외교 문서나 행정에 임금이 사용하는 도장이다. 국새는 금으로 제작되었다.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는 중국에서 받았다. 조선 태조는 명나라에서 ‘朝鮮國王之印’이라고 적힌 옥새를 받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이 옥새를 바치고 새 옥새를 받았다. 이 국새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유일한 국새였다.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 후 국새를 여러 개 더 만들었다. 국새는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금보(寶), 금인(印)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으며 상서원이라는 관청에서 도승지의 책임 아래 보관했다. 옥새는 옥으로 제작했고, 금보는 재질이 금이었지만 옥새로 통칭했다. 중국 진시황이 ‘화씨옥’(和氏璧)을 얻어 천자의 인장을 제작한 것이 최초의 옥새다. 대한민국의 국새는 건국 이듬해인 1949년 5월 1대 국새가 만들어졌고, 최근 가짜 파동까지 겪으면서 5대 국새가 제작됐다. 어보나 국새나 관리는 엉망이었다. 언젠가 감사원이 조사했는데 ‘조선국왕지인’ 등의 국새가 1971∼1985년에 분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조의 국새는 2009년 발견된 대한제국기의 국새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유일하다. 조선시대 어보는 총 366점이 제작되어 323점이 남아 있다. 43점은 행방이 묘연하다. 대부분 6·25전쟁 때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어보 가운데 316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7점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고려대 박물관,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LA 카운티 미술관에 있는 조선 중종 문정왕후의 어보가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6·25 당시 미군 병사가 종묘에서 가져간 것이다. 문정왕후의 존호(임금이나 왕비가 살아 있을 때 올린 칭호)인 ‘聖烈大王大妃之寶’(성렬대왕대비지보)’란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혼란 통에 약탈당하거나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수십만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반환은 되찾아 오려는 꾸준한 노력이 일궈낸 소중한 성과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문정왕후 어보, 62년 만에 돌아온다… “다음주부터 지체없이 반환 착수”

    문정왕후 어보, 62년 만에 돌아온다… “다음주부터 지체없이 반환 착수”

    조선시대 문정왕후 어보가 6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이하 라크마)이 19일 오후 3시(현지시간) 문정왕후 어보를 조건없이 한국 정부로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박물관 측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안민석 민주당 의원, 문화재제자치찾기 대표 혜문스님과 가진 면담에서 “그동안 제출해 준 증거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서울의 종묘에서 절도한 물건임이 충분히 입증된다고 생각한다. 박물관 측은 도난품인 경우 반환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미 우호 차원에서 한국 정부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박물관 측은 다음주부터 반환절차에 착수하겠다고도 설명했다. 안 의원은 회담 직후 라크마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추석날 역사적인 소식을 전하게 돼 기쁘다”면서 “문정왕후 어보 반환을 위해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들과 라크마 박물관, LA 카운티 수퍼바이져 등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 의원은 그러면서 “도난당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환수 노력과 환수운동가들에 대한 지원이 미진하다”면서 “이번 문정왕후 어보 반환의 결실을 계기로 정부의 지원이 대승적이고 전향적으로 변화되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남북한과 재미교포 등 7000만 겨레가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본다”면서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미군의 절도품이 반환되게 된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보 반환 결정은 민족사적인 쾌거를 넘어 제3세계 국가들의 문화재 반환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문정왕후 어보는 신속하게 반환절차가 진행, 수개월 안에 우리나라로 반환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정왕후 어보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한 문화재로 추정되어 2010년 이후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에 의해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어 왔다. 정전 60주년이 된 올해 본격적인 반환운동이 시작되어 지난 6월 안 의원은 어보 반환을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을 제출했다. 지난 7월 라크마에서 반환을 위한 1차 협상이 있었고 그 뒤 두달간 사회 각계층의 반환요구가 진행되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문정왕후 어보 반환 촉구를 위한 100인위’를 구성하고 백악관 청원운동을 진행, 6128명이 백악관에 직접 접속해 서명하기도 했다. 대검찰청도 문제를 인식하고 지난 8월 채동욱 검찰총장이 미국에 수사요청을 했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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