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시대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사모펀드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대졸 취업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어머니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 인질극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79
  • [명인·명물을 찾아서] 문경새재 아리랑은

    [명인·명물을 찾아서] 문경새재 아리랑은

    “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중략)/문경새재 넘어를 갈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근대 아리랑의 효시로 알려진 ‘문경새재아리랑’이 재조명받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인 아리랑이 유네스코세계무형문화재에 등록된 것을 계기로 문경 지역에서 문경새재아리랑에 대한 대중화와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경시 등은 문경새재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원조 격이지만 그동안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다 격(?)에 맞는 대접도 받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시는 우선 문경읍 진안리 문경새재 입구 1만 3000여㎡ 터에 총 1200억원(국비 1100억원, 지방비 100억원)을 투입, ‘아리랑박물관’ 건립을 추진한다. 그 배경으로 아리랑 가사에 있는 아리랑 고개가 조선시대 500년간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인 문경새재로 추정되는 데다 서양 악보로 작곡돼 최초로 국외에 소개된 근대 아리랑의 원형이 문경새재아리랑이란 점을 강조한다. 진도아리랑의 첫 사설도 ‘문경아 새재야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고 부르는 점을 들어 문경새재아리랑이 타 지역 아리랑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지난 8월에는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문경새재아리랑비’가 세워졌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우리나라 아리랑 가운데 유일하게 문경새재아리랑을 악보로 기록하고 해외에 최초로 알린 고종의 특사인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박사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7월에는 250여명의 공연진이 서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서 국내외 관광객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연해 호응을 얻었다. 최근에는 남궁진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돈희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위원장, 탤런트 최불암씨 등으로 국립아리랑박물관 문경 건립 추진을 위한 포럼을 구성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대표 아리랑인 문경새재아리랑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문경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한국고문서학회 지음/역사비평사/360쪽/1만 8000원 우리나라엔 소송이 넘쳐 난다. 2009년 고소된 인원은 이웃 일본의 67배, 인구 10만명당 비율은 171배이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조선 초기와 후기에도 그랬다. 조선 초기 실록을 보면 태종 14년인 1414년에는 소송 건수가 1만 2797건이나 됐다. 당시 인구가 600만~700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소송 건수는 엄청난 것으로 ‘소송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영광의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은 1870~1872년과 1897년 4년 동안 7291건의 민소(民訴)를 정리해 수록했다. 조선 말 개화기에는 일본인 법관들이 거의 모든 권리 분쟁들이 소송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조선인의 권리의식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공자와 유교 사상을 받들었던 동방예의지국 조선의 위정자들이 소송이 적은 사회를 지향했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흘러 동방소송지국(東方訴訟之國)이라 할 만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소송은 노비 소송, 전답 소송, 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인 산송(山訟)이었다. 명종 15년인 1560년 경주 양좌동의 양동 손씨가에 시집갔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요절한 최씨 부인의 재산을 친정으로 돌려 달라며 화순 최씨 측에서 양동 손씨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무자녀 망녀의 재산 귀속을 둘러싼 처가와 시가의 분쟁이다. 재판 결과 요절한 부인의 제사를 손씨 측에서 지낸다는 점이 참작돼 그녀가 시집갈 때 데리고 갔던 30명의 노비를 원고와 피고가 반반씩 나눠 갖게 됐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윤선도의 증손자로,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잘 알려진 윤두서 부부의 묘를 손자 윤굉이 1782년 경기도 파주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산송이 발생했다. 새 이장처가 역장(逆葬·후손의 묘가 조상의 묘 위쪽에 위치하는 형태)의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문중 내 일가가 강진현에 소장을 제출, 묘를 파내 줄 것을 요구했다. 재판을 맡은 강진 현감은 새로 이장한 묘가 혈맥을 누르지도 않고 또한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이지 않는 위치라고 판단해 피고인 윤굉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도 변호사라는 존재가 있었을까. 조선은 소송이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기에 소송을 확대하는 데 일조하는 변호사와 같은 존재를 당연히 부정했지만, 당시는 쟁송위업자(爭訟爲業者)나 외지부(外知部)가 변호사 업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06년 편찬된 법전인 전록통고(典錄通考)에 따르면 쟁송위업자는 쟁송(분쟁)을 교사(敎唆)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자로 법지식을 팔아 대가를 챙기는 사람이었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외지부는 법률을 암송하고 문권(소유권 등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을 위조하여 소송을 교사한 뒤 이기면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무뢰배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위직 재판관은 누구였을까. 국왕이었다. 직접 참여해 재판과정을 지휘하기도 했고 전국에서 벌어진 사형죄에 관한 재판의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왕의 권한이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오늘날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디지털 혁명으로 전 세계는 일일생활권으로 들어섰고 성장 속도 또한 가파르다. 과다경쟁 체제는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던져 놓았다. 이런 시대에 ‘가업’이란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는 수백년 동안 가업을 이어온 작은 가게와 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 국내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가끔 소개되며 한편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는 오랫동안 가업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함께 내려온 젊은 부부는 지역의 건강한 먹거리를 찾다가 전남 구례군 지리산 농부 홍순영이 재배한 쌀을 찾아냈다. 직접 산지로 찾아가 구입하면서 한 가족의 삶을 만났다.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땅을 가꾸고, 햇살과 바람에 가슴을 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을 봤다. 젊은 부부는 이 아가씨처럼 작지만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신간 ‘가업을 잇는 청년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언론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가업을 잇는 청년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서울, 충주, 대구, 부산, 구례를 오가며 3대에 걸쳐 70여년 가업을 잇는 대장장이, 우리나라에서 6명뿐인 시계명장의 한집안 내력, 여러 5일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림, 농부, 떡 기능인, 그리고 각종 가구에 덧대는 금속장식을 만드는 두석장 등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청년들의 일은 비록 인기 직업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긍심과 가업을 잇는다는 확신은 누구보다 단단하다. 일을 배우는 어려움도 있지만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점에서 감동이 느껴진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진정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이 오늘날 실업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올해 처음 시행한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에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개화산 정상에 자리한 강서 주민들의 새 쉼표

    개화산 정상에 자리한 강서 주민들의 새 쉼표

    강서구 개화산이 마침내 낡은 군복을 벗고 주민 쉼터로 변신했다. 11개월 동안 군부대 설득과 주변 공사를 벌인 끝에 일군 성과다. 구는 개화산 정상 2만 3000㎡ 부지에 ‘개화산 해맞이 공원’ 공사를 끝내고 4일부터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3일 밝혔다. 6·25 전쟁 때 개화산 전투 전적지로, 육군과 공군 3개 부대가 군사훈련장으로 쓰던 지역이다. 따라서 흩어진 군사시설로 활용이 어렵고, 능선을 따라 폐타이어 방공호, 묘지 등이 길게 분포하고 있어 사람 발길이 뜸했다. 이에 구는 폐타이어 350t, 폐드럼통 80t 등 낡은 군사시설을 걷어내고 생태복원과 친환경적 정비를 거쳐 누구나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공원 입구 진입로는 조경석과 산철쭉을 식재하여 아름다운 꽃길로 조성했다. 타이어 벽으로 둘러싸였던 낡은 포진지와 개인 방호진지 10여곳은 목재 축대벽을 쌓아 안전성을 높였다. 전망데크의 편의시설도 대폭 확충했다.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야외 테이블과 등의자 등을 마련, 등산객들과 지역 주민들의 만족감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또 전망데크 양쪽에 그늘막을 설치,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편이 없도록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위치했던 개화산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 높이 2m, 둘레 4m의 봉수대를 새롭게 설치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도 세웠다. 구 관계자는 “개화산 정상은 아름다운 일출은 물론, 방화대교와 한강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라면서 “앞으로 이곳을 강서구의 명소로 가꿔 가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전북 완주 삼례 예술촌

    [명인·명물을 찾아서] 전북 완주 삼례 예술촌

    전북 완주군 삼례읍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화려한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을 낀 삼례읍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 최대의 역참지.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운집해 2차 봉기를 했던 저항의 현장이자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대상이 됐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지역이다. 1980년대 이후 전주시의 위성도시로 전락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던 이곳이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군과 문화예술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역 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예술적 생명을 불어넣은 조그만 읍지역이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만경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건설했던 철도 역사와 양곡 보관창고들은 예술적 주제를 풀어내는 장소로 변신했다. 옛 삼례역은 막사발미술관으로, 양곡 보관창고는 문화예술촌으로 거듭났다. 전라선 복선화로 철로가 옮겨가면서 기능을 잃은 옛 건물들을 군이 사들여 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2년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 6월 문을 열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1920년대 지은 창고 5동과 1970~80년대 지은 창고 2동으로 구성됐다. 2010년 이후 기능을 잃은 이 창고들은 지방자치단체와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노력한 끝에 예술촌으로 재탄생했다. ‘삼삼예예미미’라고 이름 붙였다. 예술촌은 건물의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리면서 변신을 꾀해 근현대 예술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부는 현대 미술로 채웠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낡은 벽체, 녹슨 함석지붕 등은 어느 유명한 예술가도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신 높은 천장을 지탱하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고 통풍과 습기 제거를 위해 내부 벽면에 ‘W’자 모양으로 둥근 기둥을 설치했다. 또 ‘H’자 모양 사각 나무 기둥으로 벽면을 장식했다. 이 때문에 예술촌은 밖에서 볼 때는 낡고 거대한 창고에 지나지 않지만 안은 완전 딴판이다. 허름한 양곡창고가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대반전에 보는 이들은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예술촌은 책박물관, 책공방 북아트센터, 디자인 뮤지엄, 미디어아트 갤러리, 김상림 목공소, 문화카페, 서점 등이 어우러져 있다. 책박물관은 서울과 강원 영월에 있던 박물관과 서점을 옮겨왔다. 책의 시대별, 주제별로 4개 전시공간으로 구성됐다. 어린 학생에게는 책에 대한 흥미를, 전문 연구자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전시를 연출한다. 1999년 영월에서 책박물관을 시작했던 시절부터 삼례로 옮겨오기까지 과정을 전시로 구성했다. 옛 교과서, 교과서 삽화 등 흥미로운 전시물이 가득하다. 국내 최초의 무인 서점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정직한 서점’으로 헌책방이다. 책값은 한 권에 2000원 이상 내키는 대로 내면 된다. 정직한 서점에서 종종 열리는 고서, 헌책, 문방구를 사고파는 재활용 벼룩시장도 인기다. 정직한 서점은 가정과 기관에서 푸대접받는 책 기부를 연중 환영한다. 책 공방 북아트센터는 전시와 체험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책을 만드는 각종 기계와 도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책의 인쇄와 제본, 제책작업 등 책 제작 전 과정을 체험하고 견학하는 인파들이 줄을 잇는다. 직접 책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스크랩북, 티셔츠 인쇄, 가족앨범북 만들기 등 초·중·고생을 위한 방과후 특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디자인 뮤지엄은 삼례문화예술촌 탄생의 논의가 시작된 자리다.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가 주최하는 국제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수상 작품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 안타까워했던 예술인들이 양곡창고를 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재탄생시키자는 논의를 한 게 예술촌 탄생의 배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디자인 뮤지엄은 다양한 산업디자인 제품, 세계적 대표성 디자인, 역사성 디자인, 모자 디자인, 패션 디자인, 학생들의 졸업작품 등 다양한 작품을 전시해 디자인의 시대적 변천사를 정리해 놨다. 김상림 목공소는 책과 관련된 다양한 목가구의 전시, 제작 체험 공간이다. 사람 모양으로 깎아 만든 자목상, 못을 사용하지 않은 짜맞춤 가구, 장인들이 사용하던 공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목수교실, 목공교실도 운영해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다양한 목공예품 제작 체험도 가능하다. 미디어아트 갤러리에서는 시각 미디어, 설치·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나를 찾는 미술여행’이란 테마로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창의 인성교육도 한다. 예술촌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옛 삼례역사는 막사발미술관으로 꾸몄다. 김용문씨 등 작가 20명이 제작한 막사발과 해외 작품 등 300여점이 전시됐다. 이곳에서는 세계막사발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막사발 도예교실을 운영하는 등 막사발 연구와 체험활동을 펼치고 있다. 막사발을 굽는 재래식 불가마도 있다. 이같이 지자체가 사라질 위기를 맞은 애물단지 시설물을 예술촌으로 재생시키면서 삼례읍은 이제 완주군의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한국관광공사가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할 정도다. 삼례읍 외곽도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만경강을 굽어보는 비비정(등록문화재 221호) 옆에는 전망대를 겸한 휴게 공간 ‘비비낙안’이 들어섰다. 삼례와 익산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던 옛 양수장 옆에는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농가레스토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완주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옛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400년 동안 한지를 만들어 왔다고 전해지는 소양면 대승리 한지마을에 공예공방촌을 개관했다. 내년에는 구이면에 주류박물관을 열고, 국내 최초의 담배박물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담배박물관 건립사업은 관련 자료 8만여점을 모은 소장자와 협의를 하고 있다. 임정엽 완주군수는 1일 “과거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미래를 위해 과거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지역 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옛것들을 오늘에 되살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공간으로 풀어내고 이를 지역의 대표 상품으로 육성하겠다”고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서화 속 구구절절한 사연을 깨우다

    서화 속 구구절절한 사연을 깨우다

    명작순례/유홍준 지음/눌와/292쪽/1만 8000원 섬세하고 우아한 필치와 고전적이면서 단아한 구성이 일품인 허주 이징(1581~?)의 ‘난죽6곡병’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담겨 있다. 원래 여덟 폭이었던 이 그림에는 원작이 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가 폭마다 오언절구를 지어줘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 희대의 명물로 꼽혔던 윤언직의 ‘난죽8곡병’이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 데 두 선비가 8수 중 7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조광조의 후손이 당대 최고 화가인 이징에게 의뢰해 되살려냈다. ‘명작순례’는 조선시대 대표 서화 49점을 엄선해 작품 탄생의 내력과 예술적 가치를 쉽고 재밌게 해설한 명작 감상 입문서다. 저자가 2년 전 출간한 ‘국보순례’의 후속편이다. “원고지 5장 안팎의 짧은 글들로 이뤄진 ‘국보순례’가 맛보기용이었다면 ‘명작순례’는 예술을 보는 선현들의 안목을 제대로 들여다본 본격적인 순례기”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전보다 서너 배 긴 해설을 곁들였고, 관련 작품들을 포함해 총 150여점의 도판을 실었다. 책은 신사임당의 ‘초충도’에서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우암 송시열의 안목과 학림정 이경윤의 ‘산수인물화첩’에서 ‘말하는 것이 입이 아니라 손가락에 나타나 있다’며 그림의 내용까지 읽어내는 간이당 최립의 통찰력을 이야기하며 그림을 보는 데서 한 발짝 나아가 그림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알려준다. 또한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이 일본에서 밀려드는 그림 요청에 울려고 했다는 이야기, 유배지에서 딸에게 ‘매조도’를 그려 보낸 정약용의 절절한 사연 등을 통해 옛 그림과 글에 대한 흥미를 끌어올린다. 미공개 개인 소장품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낸 점도 눈길을 끈다. 표지에 실린 북산 김수철의 ‘산수도’를 비롯해 흑판 도판으로만 전해지던 이경윤의 대작 ‘사호위기도’, 홍랑의 ‘절유시’ 등을 전문 사진작가가 촬영한 생생한 도판으로 소개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대권, 야망의 목표 아니다…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미래 보일 것”

    “대권, 야망의 목표 아니다…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미래 보일 것”

    지난 23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안희정(49) 충남지사의 출판기념회에는 정계 거물 등 3000여명이 몰려 최근 그에게 쏠리고 있는 ‘정치적 무게’를 실감케 했다. 안 지사는 최근 충청권의 차세대 인물로 부상하면서 중앙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논란 과정에서 문재인 의원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고 다른 경쟁 주자들이 뚜렷하게 부상하지 못하면서 민주당 내 안 지사 역할론도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행보와 말에 실린 정치적 ‘함의’는 요즘 정치권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안 지사는 2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선 출마 의향 등 대권과 관련해 “야망의 대상으로 가져야 할 목표는 아니다”라며 “제가 도지사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지금 열심히 걸어가면 나오는 것이 미래”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는 또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가르는 20세기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해 달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강조했다. →출판기념회에 3000명이 모였다.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방정부 책임자로서 3년 반 동안 느낀 소회를 대한민국에 보고드리고 싶었고 제안드리고 싶었다. 긍정적으로 평가해 줘 보람을 느낀다. →현실은 냉혹하다. 충남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매우 낮은데 극복할 수 있겠나. -충남 도민들이 정당 지지율과 상관없이 지지해 주시고 있다. 자기가 가진 소신만큼 열심히 하다 보면 시대의 쓰임새가 있다면 쓰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또 다른 선택을 받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다른 고려는 없다. 연임이 허용된 지자체장들은 그동안 해 왔던 일들을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냐고 물어야 하는 게 의무다. 그동안 벌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임기의 연장성과 일을 성실히 하는 게 연임에 도전하는 목적이고 이유이기 때문에 별도의 선거 전략은 없다. →정치인 안희정의 장단점은. -모진 소리를 잘 못한다. 예전에는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의 소신으로 삼고 있다.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정치 영역에서 남의 얘기를 하거나 남을 비판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국민의 합의를 얻어 내는 게 논쟁이다. →책 속에 ‘더 좋은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나온 역사가 악하다고 지울 수 있겠는가. 지울 수 없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과거에 대해 각자가 인정하는 것만 인정해 국가의 역사 통합성이 떨어지고 있다. 생산적 논의를 토대로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친노(친노무현)의 강경함이 얘기되는데. -그것도 너무 표피적이면서 있지도 않은 사실에 기초한 지적이다. 친노가 어디까지냐고 물으면 아무도 답을 못 한다. 민주당과 야권의 분열을 바라는 분들이 올가미식으로 지어낸 것이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멀고 가까운 사람이 있다. 모든 정치인과 국민들께서 ‘너는 누구파’라고 이름을 짓는데, 구체적인 정책과 내용으로 그룹 짓는 것이 필요하다. →친노는 폐족이라고 말했었는데. -정파의 존재로서 친노는 없다. 친노라고 하면 제가 대표적인 친노 아니겠나. 애매하다. 일부에서는 안희정은 다르다고 말한다. 폐족이라고 한 것은 마지막까지 참여정부를 지켰던 분들이 책임 있는 반성을 해야겠다는 의미였다.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 아니다. 여의도에서 친노를 하나의 정파처럼, 실체처럼 이야기하는데 참여정부 이후 의미가 없다. →친노나 안희정에게 노무현이란. -그것은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어찌 됐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정체성 자체다. →1987년 개헌 이후 보수 10년, 진보 10년, 보수 10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정권 교체의 역사로 보면 그럴 수 있다. 지금까지는 모두 독재 대 반독재, 민주화 대 독재, 성장과 분배, 안정과 민주화 등 20세기 개념으로 편을 나눴다. 20세기 진보·보수로는 현실 문제를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조선시대 복식 논쟁이나 마찬가지다. 복식 논쟁을 한다고 해도 조선의 국운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20세기 때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싸우면 그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정치가 안 된다. 그래서 새 정치가 안 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잔영 속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새 정치는. -정치의 혐오 의식을 기반으로 출발해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충고를 했을 뿐이다. 국민들이 사랑해 줘서 안철수가 있는 것이니 존중해 줘야 하고, 어떻게 힘을 모으고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지도자들이 노력해야 한다. →청와대와 여당에 대한 주문을 해 달라. -가장 쉬운 대화가 중요하다. 힘으로 제압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압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제압되는 게 아니다. 대화를 통해 여당과 집권 세력은 맏이가 돼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가보안법, 사학법 개정 때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4~5개월 데모하니까 대화를 통해서 풀어 가지 않았나.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 화끈하게 멱살 잡고 끌고 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집권 세력이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이끌어 가야 한다. 좀 더 야당과 대화하는 자세로 국정을 이끌어 줬으면 좋겠다. →충청 인구가 호남보다 늘어 의석수가 늘어야 한다고 한다. 충청권이 주목받는 데 대한 소회는. -충청도는 개방화된 지역이다. 개방성과 통합성이 특색이다.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중심 지역이 될 것이다. 통합과 개방을 확대해 갈 것이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충청권 대망론이 나오고 있다. 안 지사도 대망론의 대상으로 거명되는데. -거론해 주시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내린 결론은 그걸 목적하고 그걸 바라고 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야망의 대상으로 가져야 할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도지사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우리 사회 구성에서 정치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걸어왔고 여러 가지 이유로 도지사를 시켜도 좋다고 생각해서 된 것 아닌가. 지금 열심히 걸어가면 나오는 것이 미래다. 좋은 평가가 있지만 먼 얘기처럼 들린다. →도지사로서의 3년간을 평가해 달라. -한국의 지방자치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 현실임을 여실히 느낀 3년이다. 중앙정부가 기획, 설계권을 가지고 있어 지방정부의 한계가 많다. 그럼에도 민관 협치 행정이나 마을의 주민자치, 풀뿌리 지방자치 등을 열심히 실천한다고 자부한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 -충남은 일본 구마모토현과 30년간 교류하고 있다. 올해 30년 기념식은 양측 지사가 상대 측을 방문해 도민들과 함께 했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데 이럴 때일수록 민간과 지방자치단체들의 교류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로는 부딪치지만 아시아 지역 주민들로서는 부딪치지 않을 주제다. 일본 정치인들이 국가주의라는 낡은 이념으로 정치를 하기 때문에 국가 간 분쟁이 된다. 일본도 한국에 투자해야 하고, 한국도 마찬가지이기에 교류를 심화시켜야 한다. 일본 국가 지도자들의 잘못된 정치 신념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대응할 것은 하더라도 주민 차원의 교류는 확대해야 한다. 진행 이춘규 선임기자 홍성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전두환 일가 압류 미술품 605점 총 낙찰가격 50억여원에 그칠 듯

    전두환 일가 압류 미술품 605점 총 낙찰가격 50억여원에 그칠 듯

    데미언 허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김환기, 이응노, 박수근, 배병우, 이대원….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납 추징금 환수 과정에서 검찰이 확보한 605점의 미술품이 다음 달부터 차례로 경매에 나온다. 국내 양대 미술품 경매사인 K옥션과 서울옥션은 다음 달 11일과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종로구 평창동의 전시장에서 추징금 환수를 위한 1차 경매를 각각 진행한다고 27일 밝혔다. 경매는 주요 작품 순으로 내년 초까지 수차례 이어진다. 앞서 검찰은 이달 중순 미술품 주관 매각사로 K옥션과 서울옥션을 선정해 K옥션에 300점, 서울옥션에 305점을 위탁했다. K옥션 관계자는 “작품들은 애초 수백억원대의 매각가가 점쳐졌으나 600여점을 모두 팔아도 50억여원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K옥션의 경매 작품 가운데 최고가는 국내 추상미술 1세대로 꼽히는 김환기의 유화 ‘24-Ⅷ-65 South East’(1965년)다. 경매 추정 최고액은 8억원 선이다. K옥션이 위탁받은 작품 가운데는 김환기 외에도 백남준, 이응노, 이대원, 변종하, 김종학, 오치균 등 국내 대표 작가의 작품과 육근병, 구본창, 주태석 등 전재국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시공사가 출간한 한국화가 화집 ‘아르비방’ 시리즈의 작가들이 대거 포함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국씨의 결혼을 축하하며 보내온 서산대사의 시를 옮긴 글씨(200만~400만원)도 나온다. 서울옥션이 위탁받은 작품 가운데 최고가 작품은 18~19세기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담은 16폭짜리 화첩으로, 추정가는 6억원 선이다. 전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화첩에는 겸재 정선의 ‘계상아회도’등 그림 5폭과 현재 심사정의 ‘송하관폭도’ 등 3폭을 비롯해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등 조선시대 거장 9명의 작품이 두루 담겼다. 현대미술품 가운데는 전씨의 자택에 걸렸던 120호짜리 대작인 이대원 화백의 ‘농원’(1987)이 눈길을 끈다. 최고가는 4억원 안팎. 외국 미술품으로는 이탈리아의 밈모 팔라디노의 작품 등이 나온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세상만사 온갖 시름 여기 물안개 품속에 살포시 놓고 가세요

    세상만사 온갖 시름 여기 물안개 품속에 살포시 놓고 가세요

    전남 나주(羅州)의 옛 이름은 금성(錦城)이다. 이게 고려 왕건 때 나주로 바뀐다. 이름은 바뀌었으되 뜻은 변한 게 없다. 금(錦)이든 나(羅)든 비단을 이르는 건 똑같으니 말이다. 대체 뭐가 그리 곱길래 비단 같다는 고을 이름을 늘 달고 다닐까. 나주는 어향(御鄕)이라 불린다. 임금을 낳은 고을이란 뜻이다. 여기엔 버들잎 전설이 깔려 있다. 목마른 남정네에게 버들잎 동동 띄운 물을 건넨 지혜로운 규수 이야기 말이다. 나주시청의 김종순 학예연구사가 전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나라 안 몇몇 곳에 비슷한 내용의 버들잎 고사가 전하는데, ‘나주 버전’의 주인공은 고려 태조 왕건과 나주 호족 오다린의 딸이다. 무대는 현 나주시청 앞 완사천이다. 내용은 익히 알고 있으니 건너뛰자. 중요한 건 만남 이후다. 두 남녀는 필경 ‘선수’였던 게다. 만난 첫날밤에 오씨 처녀(훗날 장화왕후)와 왕건은 서둘러 ‘원인’을 만든다. 그로부터 열 달 뒤 ‘결과’를 얻는데, 그가 바로 고려 2대왕 혜종이다. 당시 왕건은 군사 3000여명을 이끌고 후백제의 후방 지역인 금성(나주)을 공략하러 온 참이었다. 주변 다른 지역과 달리 나주는 왕건의 편에 섰고, 이 공로로 고려 성종 때 목(牧)으로 승격된 뒤 일제강점기 전까지 1000여년간 전라도 지역의 핵심 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다. 나주시가 내건 슬로건 ‘천년 목사(牧使) 고을’도 이 같은 역사에 기댄 표현이다. 나주의 풍경을 가르는 건 영산강과 금성산이다. 나주를 대표하는 명소들이 대부분 이 강과 산에 깃들여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도시 뒤엔 금성산이 우뚝하고, 가운데로 흐르는 영산강이 남북을 가르는 모습,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한양의 모습을 빼닮았다. 나주를 작은 서울 소경(小京)이라 부르는 이유다. 나주를 가르는 영산강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와 함평, 무안 등을 두루 적신 뒤 목포에서 바다와 만난다. 길이는 136㎞. 한강(515㎞) 낙동강(522㎞) 등에 견주자면 보잘것없는 크기지만 교통로로서의 비중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1970년대 말 강줄기 끝자락에 영산강 하구둑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뱃길은 목포항에서 강물을 따라 73㎞나 거슬러 올라갔다. 강줄기를 따라 수많은 나루터가 세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영산포다. 흑산도 옆 영산도 주민들이 고려 조정의 공도정책에 따라 이주해 살면서 홍어 산지로 이름을 알렸던 바로 그 포구다. 영산포는 일제강점기 무렵 번성했다. 비옥한 나주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내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산포 일대에는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살던 집과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등 일본풍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로즈미의 집은 나주시에서 인수해 최근 보수를 마쳤다. 올해 말부터 숙소로 사용될 예정이다. 동양척식회사 문서고는 찻집으로 쓰인다. 아름드리 팽나무 아래서 커피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S라인’을 그리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영산강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특급 포인트가 있다. 신곡리 봉곡마을 인근의 정자 금강정이다. 예서 샛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사방이 툭 트인 강 언덕이 나온다. 물안개가 자주 끼는 이맘때면 발 아래로 영산강과 물안개가 함께 흐르는 ‘비단결 같은’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너른 들녘을 하얗게 칠한 물안개는 희롱하듯 강변 산자락을 품었다가 떨쳐 내길 반복하는데, 단언컨대 이 풍경 앞에서 탄성을 내뱉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언덕은 가급적 이른 아침에 오르길 권한다. 물안개의 두께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선경은 대개 오전 9시를 전후해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이제 금성산을 밟을 차례다. 451m로 높지는 않으나 나주의 진산 대접을 받는 산이다. 제가 품은 고을은 진작 나주로 이름을 바꿨지만 스스로는 여태 옛 이름을 잃지 않고 있다. 금성산에 들면 먼저 다보사를 찾을 일이다. 산비탈을 따라 세워진 소담한 절집이다. 김종순 학예사는 “일제가 대처승 제도를 도입하는 등 조선 불교를 흠집 내고 탄압할 때 꿋꿋하게 이를 거부하며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어 온 사찰”이라고 소개했다. 다보사에서 잊지 말고 봐야 할 게 대웅전과 명부전의 불단을 장식하는 조각품이다. 꽃병 등을 조각해 뒀는데 이게 한국식 꺾꽂이의 원형이라는 것. 이는 꽃꽂이가 일본에서 시작돼 전파됐다는 주장을 뒤집는 증거라고 한다. 수수하면서도 정교한 대웅전 꽃문살도 빼어나다. 보물(제1343호)로 지정된 괘불탱도 아름답다던데 아쉽게도 이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다보사 앞쪽의 금성산 둘레길을 따라 휴양림 방향으로 15분쯤 걸어가면 난데없이 초록빛 세상이 펼쳐진다. 야생 차밭이다. 사방이 단풍으로 불붙고, 흰 눈에 덮여도 늘 푸른 빛을 잃지 않는 공간이다. 고려시대 임금께 진상했던 뇌원차도 이곳에서 비롯됐다. 흰빛의 녹차꽃은 10월부터 피기 시작해 12월이면 대부분 진다. 면적은 8㏊에 이른다. 자박자박 걸으며 푸른 빛을 완상하기 좋다. 이맘때 볼거리 딱 세 가지만 더 얘기하자. 메타세쿼이아길, 쌍계정, 노안천주교회다. 메타세쿼이아길은 전남산림환경연구소 진입로에 조성됐다. 전남 담양 메타세쿼이아 숲길에 견줘 짧지만 폭이 좁고 안온해 ‘사진발’을 잘 받는다. 쌍계정은 영암의 구림, 정읍의 태인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호남의 3대 명촌으로 꼽혔던 노안면 금안 마을에 있다. 세월의 흔적 더께로 쌓인 정자도 좋지만, 건물 앞뒤를 지키고선 아름드리 푸조나무와 느티나무의 자태가 더없이 빼어나다. 노안천주교회는 쌍계정과 이웃했다. 나주 최초의 성당으로, 근대문화유산 제44호로 지정된 붉은 벽돌의 단층 건물이 인상적이다. 교회가 깃든 마을 이름은 ‘이슬촌’이다. 주민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인 마을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 이색 마을 축제를 연다. 글 사진 나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해 호남고속도로 광주요금소를 지난 뒤 광산이나 산월 나들목으로 나와 광주 제2순환도로를 탄다. 순환도로 요금소를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나주에 닿는다. 서해안고속도로 함평나들목을 이용할 수도 있다. KTX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3시간 걸린다. →맛집: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홍어집들이 늘어서 있다. 영산포 홍어(337-5000) 등이 이름 났다. 나주곰탕은 시내 목사내아 일대에 몰려 있다. 하얀집(333-4292), 노안집(333-2052), 남평식당(334-4682)이 유명하다. 구진포 쪽엔 장어거리도 조성돼 있다. 영산나루(332-2131)는 동양척식회사 문서고와 한 울타리에 있는 찻집이다. 영산포 등대 바로 뒤에 있다. →잘 곳:단연 ‘목사내아’다. 옛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한옥집인데 리모델링을 마치고 곧 문을 열 예정이다. 330-8831. 나주시청 부근과 동신대 일대에도 깔끔한 모텔들이 몰려 있다.
  •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비운의 역사 함께한 방학동 은행나무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비운의 역사 함께한 방학동 은행나무

    왕릉은 경북 경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 시내에도 조선시대 왕릉이 곳곳에 있다. 한양 4대문 밖에 조성됐지만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수도 행정구역이 점차 넓어지며 자연스럽게 서울에 포함됐다. 도봉구에도 정식은 아니지만 왕릉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 묘다. 폭군으로 널리 알려진 연산군은 12년에 불과한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두 차례나 피바람을 일으켰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나 ‘군’으로 격하된 첫 임금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던 연산군은 6년 뒤 뭍으로 돌아온다. “시신만이라도 옮겨 달라”는 폐비 신씨의 간청을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산군이 다시 묻힌 곳이 도봉산 기슭으로 지금의 방학동 산77이다. 폐위된 탓에 연산군 묘는 왕릉이 아닌 왕자묘 형식을 따랐다고 한다. 신씨도 1537년 연산군 옆에 나란히 묻혔다.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봤을 은행나무가 언덕 아래에 우뚝 서 있다. 현재 신동아아파트 단지 내에 서 있는 이 나무는 높이가 25m, 둘레가 10.7m에 달한다. 이미 1968년 서울시 1호 보호수로 지정됐다. 수령이 800~1000년은 족히 됐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국립산림과학원의 조사 결과 이르면 1460년대, 늦어도 1510년대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르면 세조 후기, 늦어도 중종 초기에 심어졌다는 이야기다. 서울에선 문묘 은행나무(702년) 다음으로 가장 오래됐다. 원래 가까운 거리에 은행나무가 한 그루 더 있어 부부 은행나무로 불렸으나 인근에 아파트가 지어지며 암나무가 베어져 짝을 잃었다고 한다. 애국나무라는 별칭도 있다. 스스로 가지를 태워 나라의 변고를 예고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해 전에도 불이 나 소방차가 출동했다고 한다. 동네 주민 사이에서는 아들을 낳게 해 주는 신령수로도 통한다. 1991년 주변에 아파트가 지어지며 볕을 가리게 되자 환경운동가가 단식농성을 벌였고 건설사는 아파트 높이를 두 층 낮췄다. 구는 주민 의견에 나뭇가지를 가로막던 빌라 2동을 매입한 뒤 작은 공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인근에는 세종의 차녀 정의 공주와 부마인 안맹담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파평 윤씨 가문이 600여년 전 정착할 때 파 지금도 쓰고 있는 원당샘도 근처에 있다. 구는 이 일대를 명소로 가꾸기 위해 정비 작업을 벌였고 북한산둘레길 도봉구간의 출발점으로 지정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우리문화재 찾기 민간단체 팔 걷었다

    민간단체가 임진왜란과 구한말 열강의 침탈,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해외로 약탈당한 문화재 찾기 운동에 나섰다. 경북 구미에 있는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회장 박영석)는 해외에 밀반출된 문화재는 모두 15만 2000여점에 이른다고 26일 밝혔다. 이 중 절반이 넘는 6만 6000여점이 일본에, 나머지는 미국 등지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영석 회장과 임원단이 최근 일본 교토 고려박물관을 방문, 환수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고려박물관은 경북 예천 출신 재일교포인 고 정조문씨가 설립했다. 조선시대 등 우리 문화재만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알려졌다. 이곳에 전시된 우리 문화재는 모두 1700여점에 이른다. 고려박물관은 박 회장 등을 만난 자리에서 운동본부의 환수운동에 적극적인 공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려박물관 설립자의 아들인 정희두 상무는 문화재환수운동에 협력할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운동본부 임원들은 또 오사카 영사관 관계자와 교육계, 상공계, 학계 등 오사카지역에서 활동 중인 재일교포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환수를 위한 교류방안을 논의했다. 운동본부는 2년 전부터 오사카지역에 상주 조사요원을 두고 우리 문화재 유통과 소재를 파악하는 등 일본에서 문화재 환수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2011년 설립된 운동본부는 그동안 해외로 빠져나간 문화재의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지역별로 관련 증언들을 수집해왔다. 또 밀반출 문화재의 종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박영석 회장은 “우선 일본 내 박물관과 미술관, 교포들과의 광범위한 교류를 통해 신뢰를 구축한 뒤 본격적인 환수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공예사로 보는 조선왕실의 삶과 문화

    공예사로 보는 조선왕실의 삶과 문화

    한국전쟁 때 불법 반출됐다가 최근 미국에서 압수된 대한제국 국새와 조선왕실 어보 등 인장 9점은 역사적 의의와 더불어 조선 왕실 문화의 정수를 담은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조선은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유교적 예제에 따라 국혼·국장·종묘대제와 같은 왕실 의례를 국가적 행사로 치렀는데 이때마다 최고의 인력과 물질을 동원해 궁궐, 왕릉, 종묘에 최고의 왕실 의물(儀物)을 제작했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가 펴낸 ‘조선왕실의 궁릉 의물’(민속원)은 규장각과 장서각이 소장한 ‘도감의궤’의 문헌 기록을 씨줄로, 5대 궁과 왕릉 및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현존 왕실공예품 유물을 날줄로 삼아 조선 왕실 공예품의 제작 과정과 미적 특질을 살펴보고, 왕실의 삶과 문화를 현재적 관점에서 복원한 조선 왕실공예사 연구다. 1부는 왕실의 기쁜 날, 궁궐 내 정전과 침전에서 거행되는 가례(嘉禮)와 관련된 의물을 중심으로 다뤘다. 왕실 행사 중 하이라이트는 국왕의 즉위식이다. 즉위식에서 새 국왕은 왕권을 상징하는 대보(大寶), 혹은 옥새를 물려받는다.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대보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겹의 상자에 담아 전달한다. 조선 왕실의 의식을 그린 그림이나 반차도에는 정전 내에 대보와 그것을 담은 상자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행사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2부는 궁궐의 편전과 왕릉에서 거행되는 흉례(凶禮) 때 사용된 의물을, 3부는 왕실의 제삿날, 종묘에서 거행되는 길례(吉禮) 때 사용된 의장의물을 중심으로 살폈다. 장 교수는 책 말미에 조선시대 궁궐과 왕릉 및 종묘의 의물이 훼손된 채 방치되거나 잘못 복원된 현실을 지적하면서 문화재 정책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100년 전 고종도 절박함으로 대했다, 생존의 다른 이름 ‘영어’

    100년 전 고종도 절박함으로 대했다, 생존의 다른 이름 ‘영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 청어, 왜어, 몽골어를 모두 알지 못했습니다. 붓을 줘 쓰게 했더니 모양새가 구름,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1797년 부산 용당포. 이곳에 정박한 영국 함대 프로비던스호에 올라 서양인을 만나고 돌아온 관찰사 이형원은 영어 알파벳을 이렇게 표현했다. 1882년 제물포에 마련된 조미통상조약장에선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졌다. 청나라의 마젠쭝이 양측을 오가며 동시통역을 했던 것이다. 이후 영어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낀 사람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노쇠한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영어 교육에 적극 나선다. 미국의 고급 인력을 영어 교사로 초빙해 왕립영어학교를 만들고 경복궁에서 직접 영어 시험감독에 나설 만큼 열심이었다. 제국의 황혼기, 고종에게 영어는 근대화와 동의어였고 열강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였던 셈이다. 그로부터 100여년. 한국인에게 영어란 무엇일까. EBS 다큐프라임 5부작 ‘한국인과 영어’는 이 절실한 과제를 풀어 본다. 영어는 한국 사회에서 소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근·현대화의 시기, 영어는 한국인에게 꿈의 언어였다. 가난을 뛰어넘기 위한 생존 도구였고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했던 기회의 언어였다. 영어는 조기 교육을 통해 이미 모국어의 지위를 넘보고 있다. 영어 사교육비로 인한 가계 부담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해외 유학이 양산하는 기러기 아빠, 소득에 따른 영어 계급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프로그램은 영어가 유입되던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두 세기에 걸친 역사를 되짚어본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영어관(觀)의 뿌리, 영어와 한국 사회가 맺어 온 사회·문화·정치적 관계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25일 밤 9시 50분 방영되는 1부 ‘욕망의 언어 잉글리시’는 우리가 믿고 있는 영어 성공 신화의 진실을 뒤엎는다. 학부모들은 “(아이가) 남보다 먼저, 남보다 빨리 영어를 익히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30대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입사시험에서 토익 800점과 900점의 점수 차이를 1점 미만이라고 말한다. 26~27일에는 2부 ‘조선, 영어를 만나다’, 3부 ‘영어로 쓰는 대한민국 60년사’가 이어진다. 다음 달 2~3일에는 4부 ‘언어의 벽을 넘어라!’, 5부 ‘두 언어의 미래’를 통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떤 내용, 어떤 콘텐츠’를 갖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무도’ 유재석 얼차려 굴욕…하하 임금에 뭐라고 했길래

    ‘무도’ 유재석 얼차려 굴욕…하하 임금에 뭐라고 했길래

    유재석 얼차려 굴욕 MBC 무한도전의 대표 MC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재석의 얼차려 굴욕이 화제다. 팬과 네티즌들은 ‘유재석 얼차려 굴욕’이라는 캡쳐 영상을 퍼나르며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다. MBC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 23일 방송분에서는 멤버 7명이 조선시대 임금의 자리를 놓고 서울 시내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미션에 나섰다. 이날 하하는 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천민 3명을 잡아야 왕위를 확정짓게 되는 미션이 주어졌다. 하하는 방송에서 자신 보다 신분 계급 상 아래인 유재석을 만나자 곧 자신의 호위무사가 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재석은 “전하는 배움이 부족한 게 아니라 배움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라고 말해 하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화가 난 하하는 곧 유재석에게 ‘엎드려 뻗쳐’를 지시했다. 결국 유재석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 가운데서 얼차려를 받는 굴욕을 당하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네티즌들은 “유재석 얼차려 굴욕 너무 웃겨요”, “천하의 유재석이 얼차려 굴욕이라니”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양도성 성곽 100년 만에 ‘햇빛’…지자체들 지역문화재 복원 잰걸음

    한양도성 성곽 100년 만에 ‘햇빛’…지자체들 지역문화재 복원 잰걸음

    지방자치단체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문화재 복원에 나서 결실을 보고 있다. 서울 한양 도성 일부가 1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고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은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서울시는 지난 6월부터 남산 회현 자락 3단계 정비 사업 구간인 중앙광장 일대(교육정보연구원~분수대~옛 식물원 자리) 100여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옛 성곽 94.1m를 찾았다고 22일 밝혔다. 이 구간은 일제가 조선 신궁을 세우기 위해 철거하면서 땅속에 묻혔던 한양 도성의 남산 서북편 회현 자락 일부로 100여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성곽 축조 초기인 태조 시대에 처음 쌓아 세종, 숙종 이후까지 계속 보수했던 흔적을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사 조사와 시대별 축조 양식을 바탕으로 이 성곽이 지어진 시기를 밝혀냈다. 시는 2009년부터 한양 도성 복원을 목표로 회현 자락 정비 사업을 3단계에 걸쳐 추진하고 있다. 이번 발굴 작업은 지난 6월 지하 2.3∼3m 지점에서 유구(遺構·옛 토목 건축 구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성곽 바닥 부분 1∼2단을 이루는 기저부와 성곽 몸통을 이루는 체성부는 구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지표면 아래 3m 깊이에 묻혀 있었다. 성벽 4∼5단부터 6∼7단까지 남아 있었으며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특히 지적원도(1912년) 등에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남산 중앙광장 일대 성곽도 처음으로 실제 모습을 나타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성벽을 지키거나 쌓는 것을 관리한 관청명의 일부가 적힌 기와 조각과 바닥돌, 분청사기편, 왜사기 등 조선 초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시대의 다양한 유물도 함께 나왔다. 3단계 구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양공원(1910년)을 조성했고 조선 신궁(1925년)을 짓기 위해 한양 도성을 부수는 등 지형이 크게 변형된 지역이다. 시 관계자는 “3단계 구간은 일제 침략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가 많이 훼손된 지역으로 애초 기대보다 훨씬 원형에 가까운 성곽 일부를 복원했다”면서 “22일부터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발굴 성과는 한양 도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남산 회현 자락 정비 사업 등에 기초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전북도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오는 26일 착수식을 한다. 일제가 1915년 추가 붕괴를 막는다고 콘크리트로 보수한 부분을 98년 만에 걷어내고 2016년까지 복원한다. 이를 기념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는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이 열린다. 2009년 발견된 사리장엄 등 기단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진단 유물이 전시된다. 27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이어진다. 서울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열린세상] 소나무와 참나무, 우리가 그들을 지켜야 한다/윤영균 국립산림과학원장

    [열린세상] 소나무와 참나무, 우리가 그들을 지켜야 한다/윤영균 국립산림과학원장

    소나무와 참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에 가장 흔한 나무로 전체 산림의 48%를 차지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소나무, 참나무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왔다. 아이가 태어나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고, 사람이 죽으면 소나무를 잘라 관을 만들어 떠나보냈다. 특히, 조선시대 소나무는 궁궐을 짓고 전함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국가자원이었다. 그래서 봉산(封山), 금산(禁山), 송산(松山)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철저히 보호하였다. 한편 소나무는 먹거리로도 사용돼 허기를 달래는 구황식물, 봄철엔 노란 송홧가루를 모아 만든 송화다식, 가을엔 송편을 찌는 솔잎 깔개로 이용하였고 귀한 송이버섯이 나는 곳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 흙 한줌 없을 것 같은 바위 사이에도 뿌리를 내리고, 사계절 언제나 푸름을 유지하므로 무병장수와 지조, 그리고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소나무는 으뜸으로 여겨졌고 한자로는 나무 중의 귀족 ‘송’(松)으로 불렸다. 소나무와 더불어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무가 참나무이다. 나무 중에서도 진짜 나무라는 뜻에서 참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 우리 숲에 살고 있는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여섯 종류가 있는데 모두 다양한 쓰임새를 가진다. 상수리나무의 도토리는 묵으로 만들어져 식탁에 올랐고, 굴참나무 껍질은 굴피집을 짓는 데, 떡갈나무 잎은 천연방부제로 음식을 보관하는 데 쓰였다. 이외에도 화력이 세고 연기가 나지 않는 참숯, 와인의 향을 깊게 하는 참나무(oak) 술통, 무늬가 아름다운 참나무 가구, 영지버섯, 표고버섯 모두 참나무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사랑을 많이 받아 온 소나무와 참나무가 최근 병해충 피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요즈음 산에 오르자면 노란 비닐로 나무를 감아 놓았거나 녹색 비닐로 덮인 무더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주위에는 ‘소나무재선충병 또는 참나무시들음병 피해를 받은 벌채목으로 반출 및 접근을 금한다’라는 경고 표시가 눈에 띈다. 소나무 재선충병은 경북, 경남,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데 일단 감염되면 나무가 100% 말라 죽기 때문에 소나무 에이즈라고도 불린다. 아직까지 재선충을 직접 박멸하는 방법은 없고 재선충의 매개충 역할을 하는 솔수염하늘소를 방제 대상으로 한다. 즉, 매개충의 확산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약제 살포와 유충을 제거하기 위한 고사목 벌채 및 훈증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게 최선이다. 현재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57개 시·군에 걸쳐 5300㏊의 소나무림이 재선충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참나무시들음병이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참나무시들음병은 ‘라펠리아’ 병원균에 의한 피해로 ‘광릉긴나무좀’을 매개충으로 한다. 이 매개충이 참나무에 침입하여 곰팡이를 감염시키는데 감염된 곰팡이는 나무속에 퍼져 도관을 막는다. 도관이 막힌 나무는 수분과 양분이 차단되면서 시들어 고사하고 만다. 소나무와 참나무에 나타나는 병해충 피해는 산사태나 산불 같은 무생물적 요소가 아닌 생물적 요인에 의한 재해이기에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신속하고 즉각적인 방제뿐만 아니라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광범위한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 이미 경상북도는 범도민 소나무재선충병 박멸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경상남도는 방제가 부진한 시·군에 대해서 예산과 인사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하며, 제주도는 소나무재선충병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해병대 장병까지 나서서 방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같이 소나무재선충병과 참나무시들음병의 방제는 비단 관련기관, 관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대가 이뤄 놓은 울창한 숲을 우리 세대가 누리고 있고 후대에게 물려줄 자산의 일부를 우리 세대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년 4월까지가 병해충 피해목을 제거하는 데 적기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관심과 지혜를 모아 우리의 소중한 자원인 소나무와 참나무를 지켜야 한다.
  • 화마 소실 낙산사 3000일 만에 복원

    2005년 화재로 잿더미가 된 강원 양양군 낙산사(회주 정념 스님)가 3000일에 걸친 복원 불사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이에 따라 낙산사는 24일 오전 11시 경내 보타전 앞에서 ‘3000일 복원 불사 회향법회’를 봉행한다. 복원 공사의 공덕을 사부대중과 국민들에게 돌리는 행사다. 회향법회에서는 사적비 낙성을 비롯해 사리탑 준공, 건칠관세음보살님 및 보타전 1500관음 개금불사 등을 마무리지으며 3차에 걸쳐 3000일간 진행된 복원 불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지난 16일 보타전 앞에 조성한 탑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2011년 보물 제1723호 지정)는 2006년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보수 과정에서 탑신석 상면 중앙 원형 사리공 내에 금·은·동 3중으로 조성된 사리기와 호박사리호, 백지주서문서 등과 함께 출토된 것이다. 낙산사는 2005년 4월 5일 양양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이 옮겨 붙으면서 주요 건물이 전소됐다. 이후 2년여에 걸친 발굴조사와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2007년 끝난 1차 복원불사를 통해 원통보전을 비롯해 심검당, 선열당, 취숙헌 등 전각들이 다시 들어섰으며 2009년 마무리된 2차 복원불사에서는 빈일루, 정취전, 설선당 등 발굴조사 결과 드러났던 원통보전 주변의 전각들이 복원됐다. 이에 따라 낙산사는 조선시대 위용을 떨쳤던 해동제일의 관음기도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하게 된 셈이다. 한편 낙산사 주지 부임 보름 만에 화마를 당해 복원에 앞장섰던 회주 정념 스님은 이날 회향법회를 끝으로 회주에서 물러난다. 낙산사 주지는 도후 스님(철원 심원사 회주)이 맡는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 복원 불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를 출간, 복원 불사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선물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마포구 번창하게” 고려 공민왕 제사공간 지었다

    “마포구 번창하게” 고려 공민왕 제사공간 지었다

    고려 31대 국왕 공민왕의 사당은 어디 있을까. 놀랍게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다. 사연이 재밌다. 조선시대 때 창전동 일대는 한강 뱃길을 이용한 수운의 중심지. 관리들에게 줄 녹봉을 보관하던 광흥창도 여기 있었는데 이 창고를 지키던 사람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나를 기리는 사당을 여기다 지으면 앞으로 번창하리라’는 계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사당을 짓고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 최영 장군 등을 그린 그림을 걸어 뒀다. 조선시대인데 전 왕조 고려의 왕을 기리는 사당이다 보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도 강했지만, 일대 지역 사람들이 서강선착장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이 사당에서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다 보니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사당 건물 자체는 한국 전쟁 때 파괴돼 새로 지어졌다. 마포구는 21일 공민왕사당에서의 제사 등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 그 옆에 한옥문화공간인 ‘광흥당’(廣興堂)을 지어 준공한다고 밝혔다. 준공일은 매년 음력 10월에 올리던 공민왕사당제에 맞춰 22일 오전 10시로 잡았다. 국회의원, 시·구의원과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광흥창이 있던 곳에 지었다 해서 광흥당이라 이름 붙인 건물은 공민왕 사당 옆에 연면적 382㎡에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조성됐다. 1층에서는 전통 예절과 한문, 제사에 대한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지하층에는 관리사무소 등이 들어선다. 준공에 맞춰 사당 내부 담장, 계단, 배수로 등 노후 시설을 모두 다 고쳤다. 사당 주변에 사주문과 전통담장 등도 새로 만들었다. 구는 광흥당 건립과 함께 음력 10월 1일 진행하던 공민왕사당제의 규모를 키워 지역 전통 문화행사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팔만대장경 경판 일부 훼손 심각

    팔만대장경 경판 일부 훼손 심각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경판(국보 제32호)과 이를 보관하는 판전(국보 제52호)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대한불교조계종과 해인사 등에 따르면 1236년 완성된 팔만대장경 경판의 일부가 좀이 슬고, 표면 균열과 비틀림·굽음 현상이 생기는 등 훼손이 심화되고 있다. 톱을 사용해 글자를 훼손한 경판이 있는가 하면 벌레가 먹거나 곰팡이가 슨 경판도 발견됐다. 이 중 경판이 하나뿐인 반야심경의 경우 경전을 인쇄하는 인경(印經) 작업 과정에서 글자가 깨지고 마모되는 등의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팔만대장경 경판은 고려, 조선시대에 여러 번 인쇄에 사용됐는데 공식적으로 마지막 인쇄는 1965년 이뤄졌다. 경판은 산벚나무와 자작나무 등을 벌채해 3~4년의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었다. 덕분에 760여년의 세월동안 원형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다. 제작 당시부터 질이 안 좋은 나무를 사용하거나, 일제강점기 왜못(기계못)을 사용해 수리하면서 나무에 충격을 줬던 사실도 밝혀졌다. 아울러 팔만대장경 경판을 보관하는 4채의 판전 외벽 기둥도 지반 침하, 건물 전체의 뒤틀림 등으로 모진 풍파를 겪고 있다. 한편 문화재청과 해인사는 지난해 8월부터 6개월간 심층 조사를 벌여 1962년 국보 지정 당시보다 108판이 많은 8만 1366판의 경판을 확인했다. 다음 달 이를 공개하고 팔만대장경에 포함시킬지 여부도 발표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한눈에 국립나주박물관 22일 문열어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한눈에 국립나주박물관 22일 문열어

    구석기시대부터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이 오는 22일 개관한다. 1층 1전시실(1855㎡)에선 선사~조선시대에 이르는 고분문화를 중심으로 백제, 가야와 비교되는 마한의 독특한 역사를 공개한다. 나주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국보 제295호)을 비롯해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금판장식, 금동신발, 은제관식 등을 전시한다. 지하 1층의 2전시실(401㎡)에는 개방형 수장고와 고고학 체험 전시코너, 수장 전시코너 등이 마련됐다. 개방형 수장고는 유적의 발굴·보존·연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운영된다. 개관기념 특별전 ‘천년 목사골 나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1000년의 세월 동안 전라남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한 곳에 모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각하’와 ‘씨’/박현갑 논설위원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 등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 9기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재위 중 쌓은 업적에 따라 왕에 대한 호칭이 달랐다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나라를 세우거나 전쟁 등 국난을 극복한 경우는 태조, 선조 등 조(祖)를 붙였고, 선왕의 적통을 이어 즉위하거나 덕을 쌓은 경우에는 현종 등 종(宗)을 붙였다고 한다. 광해군, 연산군처럼 왕이면서도 폭정으로 쫓겨나면 군(君)으로 격하된다. 이 경우 다른 왕과 달리 재위기간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린다. 시신도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평범한 ‘묘’에 안치돼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황금색 겉옷을 입었다. 중국을 ‘큰 집’으로 섬겨야 했던 그전까지는 황제의 상징인 황금색 복장은 엄두도 못냈다. 왕에 대한 호칭과 복식 차이는 우리 역사의 흥망성쇠의 편린들인 셈이다. 최근 대통령 호칭을 둘러싼 막말 공방이 뜨겁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지난 9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심판·국정원 해체·공안탄압 분쇄 5차 민주찾기 토요행진’에서 ‘대통령’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박근혜씨’, ‘독재자’라는 말만 했다. 이 대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검찰총장까지 잘라내는 ‘박근혜씨’가 바로 독재자 아니냐”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에서는 “국기문란·내란음모에 휘말린 것만 가지고도 이정희 대표는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지난 12일 트위터에 “박근혜씨,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가리로 비하하고 육시럴X 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던 ‘환생경제’ 그렇게 재밌었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대통령 막말 논란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서는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서 키운 뒤에 나와야지”,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막말이 나왔다. 여야를 바꿔가며 공방전을 펼친 셈이다. 대통령 호칭은 군사정권 땐 ‘각하’였다. 국민의 정부부터 참여정부까지는 ‘대통령님’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님자도 빼라고 했었다. 국민의 민주주의 욕구상승에 따른 정권의 수용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한다.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편부·편모 가정을 한부모가정으로 부르는 것은 사회통합을 위해서다. 자기주장을 펴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품격있는 정치언어가 아쉽다. 사극에서처럼 “과인이 부덕한 소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