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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포구 번창하게” 고려 공민왕 제사공간 지었다

    “마포구 번창하게” 고려 공민왕 제사공간 지었다

    고려 31대 국왕 공민왕의 사당은 어디 있을까. 놀랍게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다. 사연이 재밌다. 조선시대 때 창전동 일대는 한강 뱃길을 이용한 수운의 중심지. 관리들에게 줄 녹봉을 보관하던 광흥창도 여기 있었는데 이 창고를 지키던 사람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나를 기리는 사당을 여기다 지으면 앞으로 번창하리라’는 계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사당을 짓고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 최영 장군 등을 그린 그림을 걸어 뒀다. 조선시대인데 전 왕조 고려의 왕을 기리는 사당이다 보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도 강했지만, 일대 지역 사람들이 서강선착장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이 사당에서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다 보니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사당 건물 자체는 한국 전쟁 때 파괴돼 새로 지어졌다. 마포구는 21일 공민왕사당에서의 제사 등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 그 옆에 한옥문화공간인 ‘광흥당’(廣興堂)을 지어 준공한다고 밝혔다. 준공일은 매년 음력 10월에 올리던 공민왕사당제에 맞춰 22일 오전 10시로 잡았다. 국회의원, 시·구의원과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광흥창이 있던 곳에 지었다 해서 광흥당이라 이름 붙인 건물은 공민왕 사당 옆에 연면적 382㎡에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조성됐다. 1층에서는 전통 예절과 한문, 제사에 대한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지하층에는 관리사무소 등이 들어선다. 준공에 맞춰 사당 내부 담장, 계단, 배수로 등 노후 시설을 모두 다 고쳤다. 사당 주변에 사주문과 전통담장 등도 새로 만들었다. 구는 광흥당 건립과 함께 음력 10월 1일 진행하던 공민왕사당제의 규모를 키워 지역 전통 문화행사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화마 소실 낙산사 3000일 만에 복원

    2005년 화재로 잿더미가 된 강원 양양군 낙산사(회주 정념 스님)가 3000일에 걸친 복원 불사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이에 따라 낙산사는 24일 오전 11시 경내 보타전 앞에서 ‘3000일 복원 불사 회향법회’를 봉행한다. 복원 공사의 공덕을 사부대중과 국민들에게 돌리는 행사다. 회향법회에서는 사적비 낙성을 비롯해 사리탑 준공, 건칠관세음보살님 및 보타전 1500관음 개금불사 등을 마무리지으며 3차에 걸쳐 3000일간 진행된 복원 불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지난 16일 보타전 앞에 조성한 탑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2011년 보물 제1723호 지정)는 2006년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보수 과정에서 탑신석 상면 중앙 원형 사리공 내에 금·은·동 3중으로 조성된 사리기와 호박사리호, 백지주서문서 등과 함께 출토된 것이다. 낙산사는 2005년 4월 5일 양양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이 옮겨 붙으면서 주요 건물이 전소됐다. 이후 2년여에 걸친 발굴조사와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2007년 끝난 1차 복원불사를 통해 원통보전을 비롯해 심검당, 선열당, 취숙헌 등 전각들이 다시 들어섰으며 2009년 마무리된 2차 복원불사에서는 빈일루, 정취전, 설선당 등 발굴조사 결과 드러났던 원통보전 주변의 전각들이 복원됐다. 이에 따라 낙산사는 조선시대 위용을 떨쳤던 해동제일의 관음기도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하게 된 셈이다. 한편 낙산사 주지 부임 보름 만에 화마를 당해 복원에 앞장섰던 회주 정념 스님은 이날 회향법회를 끝으로 회주에서 물러난다. 낙산사 주지는 도후 스님(철원 심원사 회주)이 맡는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 복원 불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를 출간, 복원 불사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선물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팔만대장경 경판 일부 훼손 심각

    팔만대장경 경판 일부 훼손 심각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경판(국보 제32호)과 이를 보관하는 판전(국보 제52호)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대한불교조계종과 해인사 등에 따르면 1236년 완성된 팔만대장경 경판의 일부가 좀이 슬고, 표면 균열과 비틀림·굽음 현상이 생기는 등 훼손이 심화되고 있다. 톱을 사용해 글자를 훼손한 경판이 있는가 하면 벌레가 먹거나 곰팡이가 슨 경판도 발견됐다. 이 중 경판이 하나뿐인 반야심경의 경우 경전을 인쇄하는 인경(印經) 작업 과정에서 글자가 깨지고 마모되는 등의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팔만대장경 경판은 고려, 조선시대에 여러 번 인쇄에 사용됐는데 공식적으로 마지막 인쇄는 1965년 이뤄졌다. 경판은 산벚나무와 자작나무 등을 벌채해 3~4년의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었다. 덕분에 760여년의 세월동안 원형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다. 제작 당시부터 질이 안 좋은 나무를 사용하거나, 일제강점기 왜못(기계못)을 사용해 수리하면서 나무에 충격을 줬던 사실도 밝혀졌다. 아울러 팔만대장경 경판을 보관하는 4채의 판전 외벽 기둥도 지반 침하, 건물 전체의 뒤틀림 등으로 모진 풍파를 겪고 있다. 한편 문화재청과 해인사는 지난해 8월부터 6개월간 심층 조사를 벌여 1962년 국보 지정 당시보다 108판이 많은 8만 1366판의 경판을 확인했다. 다음 달 이를 공개하고 팔만대장경에 포함시킬지 여부도 발표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한눈에 국립나주박물관 22일 문열어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한눈에 국립나주박물관 22일 문열어

    구석기시대부터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이 오는 22일 개관한다. 1층 1전시실(1855㎡)에선 선사~조선시대에 이르는 고분문화를 중심으로 백제, 가야와 비교되는 마한의 독특한 역사를 공개한다. 나주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국보 제295호)을 비롯해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금판장식, 금동신발, 은제관식 등을 전시한다. 지하 1층의 2전시실(401㎡)에는 개방형 수장고와 고고학 체험 전시코너, 수장 전시코너 등이 마련됐다. 개방형 수장고는 유적의 발굴·보존·연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운영된다. 개관기념 특별전 ‘천년 목사골 나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1000년의 세월 동안 전라남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한 곳에 모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각하’와 ‘씨’/박현갑 논설위원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 등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 9기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재위 중 쌓은 업적에 따라 왕에 대한 호칭이 달랐다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나라를 세우거나 전쟁 등 국난을 극복한 경우는 태조, 선조 등 조(祖)를 붙였고, 선왕의 적통을 이어 즉위하거나 덕을 쌓은 경우에는 현종 등 종(宗)을 붙였다고 한다. 광해군, 연산군처럼 왕이면서도 폭정으로 쫓겨나면 군(君)으로 격하된다. 이 경우 다른 왕과 달리 재위기간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린다. 시신도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평범한 ‘묘’에 안치돼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황금색 겉옷을 입었다. 중국을 ‘큰 집’으로 섬겨야 했던 그전까지는 황제의 상징인 황금색 복장은 엄두도 못냈다. 왕에 대한 호칭과 복식 차이는 우리 역사의 흥망성쇠의 편린들인 셈이다. 최근 대통령 호칭을 둘러싼 막말 공방이 뜨겁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지난 9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심판·국정원 해체·공안탄압 분쇄 5차 민주찾기 토요행진’에서 ‘대통령’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박근혜씨’, ‘독재자’라는 말만 했다. 이 대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검찰총장까지 잘라내는 ‘박근혜씨’가 바로 독재자 아니냐”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에서는 “국기문란·내란음모에 휘말린 것만 가지고도 이정희 대표는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지난 12일 트위터에 “박근혜씨,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가리로 비하하고 육시럴X 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던 ‘환생경제’ 그렇게 재밌었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대통령 막말 논란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서는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서 키운 뒤에 나와야지”,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막말이 나왔다. 여야를 바꿔가며 공방전을 펼친 셈이다. 대통령 호칭은 군사정권 땐 ‘각하’였다. 국민의 정부부터 참여정부까지는 ‘대통령님’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님자도 빼라고 했었다. 국민의 민주주의 욕구상승에 따른 정권의 수용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한다.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편부·편모 가정을 한부모가정으로 부르는 것은 사회통합을 위해서다. 자기주장을 펴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품격있는 정치언어가 아쉽다. 사극에서처럼 “과인이 부덕한 소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씨줄날줄] 박물관 옆 미술관 시대/서동철 논설위원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의 청계산 자락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 것은 1986년이었다. 휴식공간이라면 아늑한 환경에 훌륭한 시설이지만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현대미술관으로는 무리한 입지였다. 현대미술관이란 그저 평생에 한두 차례 소풍 삼아 가보면 되는 곳 아니겠느냐는 인식이 ‘동물원 옆 미술관’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런 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서울관을 마련하고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길 건너 경복궁의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잇는 마름모꼴의 ‘내셔널 뮤지엄 벨트’가 완성된 것이다. 미술인들은 이제 과천 미술관 건립 주체들에게 비난을 거두는 것은 물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이 처음부터 적절한 입지에 미술관을 지었다면 서울관과 과천관이라는 두 개의 미술관은 없었다. 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00년 고도(古都)에서도 전통과 현대가 가장 극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경복궁과 현대적인 문화가 중심을 이루는 삼청동 거리, 북촌 한옥마을,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현대적 공연예술의 메카인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하는 광화문광장이 둘러싸고 있다. 서울관은 그 자체가 조선시대 언론의 역할을 수행한 사간원과 왕실 친·인척을 관리한 종친부가 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군 정보기능을 맡은 국군기무사령부가 들어서면서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졌던 종친부 건물은 이번에 제자리에 복원됐다. 서울관 전면의 벽돌건물은 일제강점기 경성의전부속병원으로 지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수도육군병원으로 쓰였고 1979년 10·26사태 당시 총상을 입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으로 후송하는 동안 숨을 거뒀다. 이렇게 서울관에는 종친부, 수도육군병원, 새로 지은 미술관 건물이 공존한다. 서울관 개관의 의미는 바로 역사적 공간에 예술을 매개로 하는 미래의 개척이라는 새로운 임무가 더해진 데 있다. 서울관은 따분하고 어려운 미술관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는 열린 미술관을 표방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미술을 적극 소개하면서 작가들이 세계 미술과 협업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도 밝혔다. 옳은 방향이지만 실제로 관람객이나 미술인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전시와 연구, 사업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토록 염원하던 도심 미술관을 미술인들이 어떻게 도심 미술관답게 운영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현대미술관이 도심에 자리 잡고도 ‘그들만의 미술관’에 머물며 평범한 시민과 소통에 실패한다면 과천에 있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억새 뒤덮여 늦가을이 한창인 경기 양평 마유산

    억새 뒤덮여 늦가을이 한창인 경기 양평 마유산

    가을이 농익었다. 이른 추위가 불붙은 단풍의 열기를 식힌 탓에 여기저기서 겨울을 외친다. 한데 아직은 가을이다. 낙엽이 길 위를 뒹굴 때 옷깃 여미고 먼 산 보며 폼 한번 잡는 낡은 정취가 아직은 어울린다. 늦가을이 한창인 곳을 찾았다. 경기 양평의 마유산이다. 유명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산은 지금 무르익은 억새들이 한껏 서정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산기슭을 뒤덮은 억새 아래로 마루금을 좁힌 산들과 남한강 물줄기 그리고 그에 기댄 마을들이 오종종하게 어우러진 풍경은 나라 안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유명산(862m)에 오르면 다들 묻는 게 있다. 대체 뭐가 그리 유명하길래 산 이름이 유명산이냐는 거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이 산의 본디 이름은 마유산(馬遊山)이다. 조선시대 말을 놓아기른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다 1970년대 초에 한 산악회에서 마유산을 오르게 됐다. 당시 산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지, 이들은 일행 가운데 한 여성 회원의 이름을 따 유명산이라 불렀고 이후 일부 매체 등에 이 이름이 게재되면서 본명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양근읍지’ 등 대부분의 고문헌들은 이 산을 마유산이라 적고 있다. 지금도 이 일대의 지명 가운데 옥천면 신복리 ‘마골’ 등처럼 말과 관련된 이름을 곧잘 찾아볼 수 있다. 전인미답의 산에 처음 등반한 사람이나 산악회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멀쩡한 이름이 있는 산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건 온당치 않아 보인다. 마유산은 경기 양평과 가평 등에 걸쳐 있다. 오르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다. 가평 쪽 유명산 자연휴양림에서 짧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긴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휴양림 코스, 산 서쪽의 고개인 농다치나 선어치(서너치)에서 소구니산(800m)을 거쳐 오르는 코스(이상 3시간 30분 정도 소요), 산 동남쪽 배너미재(600m)에서 완만한 임도를 따라 대부산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정상을 돌아 원점 회귀하는 코스(3시간) 등이다. 이 가운데 이맘때 가장 적합한 코스를 꼽자면 단연 배너미재 코스다. 들머리인 배너미재의 고도가 높아 정상까지 오르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다. 거리는 3㎞ 정도다. 산책하듯 자박자박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풍경도 빼어나다. 배너미재에서 마유산까지 가는 동안 산은 다락에서 곶감 꺼내듯 한 구비 돌 때마다 빼어난 경치를 발 아래 펼쳐놓는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의 단골 촬영지 노릇을 한 것도 그런 이유다. 담긴 풍경에 견줘 이름이 덜 알려진 건 등산객 대부분이 유명산 휴양림 쪽에서 오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유산 정상을 찍고 원점 회귀하거나 소구니산을 거쳐 농다치 등으로 하산하게 된다. 배너미재 쪽에 펼쳐진 풍경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거다. 한때 오프로드 차량들로 배너미재 코스가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지금은 통제되고 있다. 다만 사륜구동차량(ATV)이나 산악자전거(MTB)를 즐기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배너미재에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갯마루 즈음에서 하늘이 툭 터지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 억새들이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일렁이고 멀리로는 남한강 물줄기가 유장하게 흘러간다. 그 산길 모퉁이에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 왠지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다. 어디서 봤을까. 억새밭을 헤치고 산 중턱에 오르면 의문은 저절로 풀린다. 영화 ‘관상’에서 내경(송강호)이 청운의 꿈을 품고 오두막집을 떠나는 진형(이종석)을 배웅했던 그 언덕이다. 언덕 위엔 오두막집도 세워져 있다. 여기 서면 풍경은 더욱 깊어지고 영화 내용도 또렷해진다. ‘관상’의 도입부, 그러니까 기생 연홍(김혜수)이 내경을 찾아오는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됐다. ‘관상’ 세트장은 원래 허름한 오두막 두 채였지만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와 ‘구암 허준’ 등이 뒤이어 촬영되면서 옹기 가마 등의 세트가 추가로 설치됐다. 예서 다시 임도로 내려선 뒤 산길을 30분쯤 걷다 보면 산기슭 위로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말 방목지였던 곳이다. 불과 20여년 전엔 고랭지 채소밭으로 쓰였다. 이러구러 채소밭도 자취를 감췄고 지금은 억새가 온 산자락을 점령했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다. 땅과 하늘이 똑같은 비율로 나뉘어 있다. 사방은 ‘첩첩첩 산산산’이다. 용문산(1157m)과 어비산(822m), 백운봉(940m) 등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산과 산 사이로는 남한강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 활공장 옆의 소나무 너댓 그루가 고고한 자세로 이 모습을 굽어보고 있다. ‘당연히’ 이 나무 아래서도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됐다. 대표적인 게 ‘왕의 남자’다.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 봉사놀이를 하며 서로의 정을 확인하던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자연 속에 인간 둘이 있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에서라면 둘은 경쟁을 했을 거다. 동성끼리 있으면 동성애가 생기고 이성끼리 있으면 이성애가 생길 만한 곳이 여기다.” 영화 개봉 당시 장소 선정을 두고 이준익 감독이 한 신문에 밝힌 내용이다. 혼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트레스 푼답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그도 지쳐 목 놓아 울지 않았을까. 활공장에서 마유산 정상까지는 약 300m, 15분 거리다. 아무때나 찾아도 되지만 가급적 이른 아침이나 해거름에 오르길 권한다. 산이 주는 위로가 정말 남다르다. 글 사진 양평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읍 쪽으로 가다 옥천면 고읍교차로에서 좌회전한 뒤 옥천냉면마을 지나 직진해 설매재자연휴양림을 지나 좀 더 오르면 배너미재 정상이다. 차 댈 공간이 넉넉하지는 않은 편이다. 농다치는 옥천냉면마을 지나 백현사거리에서 한화리조트 쪽으로 좌회전해 37번 국도를 따라 가평 설악면 방향으로 가다 중미산삼거리 못 미처에 있다. 한화리조트양평 투숙객은 리조트에서 조성한 산길을 따라 농다치까지 쉽게 이를 수 있다. →맛집 옥천리 황해식당(772-9693)은 냉면과 돼지고기완자 등이 맛있다. 한화리조트양평의 뜨락(772-3811)은 곤드레돌솥밥을 잘한다. →잘 곳 마유산 들머리의 한화리조트양평은 최근 대형 스크린을 통한 영화 감상과 캠핑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무비 글램핑 빌리지’를 선보였다. 메가박스의 최신 영화와 빈폴의 글램핑 장비, 한화리조트의 식음료를 결합한 이색 캠핑 체험 프로그램이다. 너른 잔디밭에 20여 동의 텐트와 대형 캐노피, 화로, 테이블 등을 조성했다. 대형 스크린에선 최신 영화가 상영된다. 삼겹살과 오리, 수제 소시지, 쌈 채소 등도 제공된다. 쉽게 말해 몸만 가서 즐기면 된다. 글램핑과 바비큐, 영화 감상이 모두 포함된 주말 이용 요금은 2인 9만원, 4인 13만원. 일~목요일 캠핑 장비만 이용할 경우 4인 3만원이다. 11월 31일까지 오후 4~8시 운영한다. 772-3811.
  • [씨줄날줄] 이판승 사판승/서동철 논설위원

    막다른 상황이 몰려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입에 담곤 하는 ‘이판사판’은 뜻밖에 불교에서 비롯된 말이다. 산중에서 수행을 전념하며 불교의 이치를 좇는 스님을 이판승(理判僧), 땅을 일구거나 세상과 소통하며 절의 살림을 책임지는 스님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한다. 그런데 둘을 합친 ‘이판사판’의 쓰임새는 본래의 뜻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니 재미있는 일이다. 이판과 사판의 역할 구분이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스님들이 자연스럽게 소임을 나누어 갖게 됐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수행을 이어가 학덕(學德)을 두루 갖춘 이판승은 세상의 존경을 받지만, 그들의 수행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사판승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후하지 않은 것이 세상 이치이다. 둘 사이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면서 ‘이판사판’ 같은 분위기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판과 사판의 역할 구분은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성립된 때부터 지금까지 이판승의 치열함이 없었으면 불법의 계승과 발전은 없었을 것이고 사판승의 노고가 없었으면 작게는 절 살림, 크게는 불교 종단의 유지부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단인 조계종 역시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이후에 이르는 기간 이판 비구승이 사판 대처승을 대체하며 선방(禪房)을 장악해 나갔지만, 누군가는 다시 사판의 소임을 맡아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했다. 이판과 사판에 앞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용어가 내호반(內護班)과 외호반(外護班)이다. 1928년 작성된 금강산 유점사의 용상방(龍象榜)에도 같은 뜻으로 내무원(內務員)과 외무원(外務員)이 보인다. 용상방이란 동안거나 하안거 결제 때 직위에 따른 소임을 적어 붙인 벽보이다. 내무원은 참선, 외무원은 선원 운영을 외곽에서 지원하는 역할이라고 명시했다. 자연스럽게 내무원의 윗자리에는 회주나 조실, 외무원의 윗자리에는 주지나 원주의 이름이 적혔다. 지난 금요일 조계종의 제34대 총무원장 취임식이 있었다. 종정이 이판승의 상징이라면, 총무원장은 사판승의 수반이다. 연임 총무원장으로 과제가 무엇인지는 자승 스님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진제 종정은 “화합이 근본이니, 자승 스님을 중심으로 이(理)와 사(事)가, 승(僧)과 속(俗)이 원융화합을 이루어 존경받는 한국불교가 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판·사판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시대 불교의 이미지는 사판이 좌우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무도 멤버 7인 관상…유재석 ‘양반’ 하하·길·노홍철은?

    무도 멤버 7인 관상…유재석 ‘양반’ 하하·길·노홍철은?

    MBC 무한도전 멤버 7인의 관상이 공개돼 화제다. 지난 9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에는 관상 전문가가 출연해 무도 멤버 7인의 관상을 분석했다. 이날 관상 전문가는 무도 멤버 7인의 관상에 대해 유재석은 우두머리상, 박명수는 욕심과다상, 하하는 쥐상, 정준하는 곰상, 길은 호색상, 노홍철은 사이비교주상, 정형돈은 돼지상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관상을 조선시대에 대입하면 정형돈은 왕, 박명수는 명예 욕심을 내는 상인, 유재석은 양반, 하하는 망나니, 정준하는 무역상, 길은 천민 중 기생, 노홍철은 광대가 될 팔자인 것으로 밝혀져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줬다. 네티즌들은 “무도 멤버 7인 관상 기가 막히게 잘 맞춘 듯”, “무도 멤버 7인 관상 정말 그럴까”, “무도 멤버 7인 관상 그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올해 마지막 한국사능력시험 작년보다 쉬웠다

    올해 마지막 한국사능력시험 작년보다 쉬웠다

    일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한국사능력자격시험(이하 한국사능력시험) 응시가 필수가 됐다. 지난해부터 국가직 5급 행정직·외무직 공무원 시험 및 입법고등고시에 도전하는 수험생은 한국사능력시험 2급 이상(고급)을 받아야 한다. 법원행정고등고시 지원자도 올해부터 2급 이상 성적이 필요하다. 중등교원임용시험도 올해부터 3급 이상(중급) 시험에 합격해야 지원 가능하다. 앞으로 국가직 7, 9급 공무원 시험에서도 공통 필수과목인 한국사 과목이 한국사능력시험 성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나올 만큼 공시생들에게 한국사능력시험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올해 한국사능력시험은 총 4번(제18~21회) 치러졌다. 이 중 마지막 시험인 제21회 한국사능력시험이 지난달 26일에 시행됐다. 출제된 고급 문제를 시대별로 구분한다면 조선시대 관련 문제가 13문제로 가장 많았다. 이어 남북국시대(통일 신라부터 발해 멸망까지의 시기)에서 8문제가 출제됐다. 일제강점기와 근대사에서는 각각 7문제가 나왔다. 중급 문제도 비슷했다. 고급 문제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문제가 최다(14문제) 출제됐다. 일제강점기(8문제), 근대·남북국시대(각 7문제)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권용기 에듀윌 한국사 강사는 “고급과 중급 모두 전체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와 근대 이후 관련 문제가 각각 3대2의 비율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앞서 실시한 세 차례 시험과 같은 출제 경향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하지만 한국사능력시험이 여러 공무원 시험에 활용되는 만큼 지난해를 기점으로 고급, 중급을 통틀어 문제 난도가 낮아졌다는 것이 권 강사의 분석이다. 그는 “특히 고급 시험에서 문제 수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면서 “행정고시(국가직 5급 행정직 공무원 공채)와 외무고시가 2급 이상 합격자에 한해 응시 자격을 부여하다 보니, 자칫 오랫동안 공부한 수험생의 발목을 한국사능력시험이 잡는 것은 아닐까 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려가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올해 고급 문제에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로 33번 문제를 꼽았다.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가상 회고록을 지문으로 제시했는데, 이준 열사가 죽은 해(1907년)로부터 4년 뒤에 볼 수 없는 건축물을 파악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조선총독부(1번)였다. 총독부 건물은 1926년에 완공됐다. 건물 모양과 완공 연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권 강사는 “이렇듯 고급 문제는 중급 문제와 달리 연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가 제법 많다”면서 연도 학습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급에서는 39번 문제를 꼽았다.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묻는 문제였다. 동학농민운동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험생은 문제에 주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서 특정 시대를 유추해야 했다. 권 강사는 “중급 문제는 함정이 없기 때문에 기본 개념에 충실하면 거의 정답을 맞힐 수 있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문화마당] 조선시대의 기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조선시대의 기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사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인간의 평균(예상) 수명은 짧아진다. 영아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후에도 수명 자체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30~40년 전만 해도 환갑잔치는 온 동네 경사였다. 1970년대 TV 인기프로였던 ‘장수만세’에도 6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종종 출연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여성의 평균 수명은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미 80세를 돌파했고, 남성의 평균 수명도 이제 80세에 들어섰다. 전철의 무료승차 나이를 현행 65세에서 70세로 올리자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것도 이런 추세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어땠을까. 1956년 대한민국 성인의 평균 수명이 42세인 점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잘해야 30대요, 그마저도 보장할 수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런 단순한 산술평균은 별 의미가 없다.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평균이 낮은 것이지 영·유아기만 무사히 통과하면 의외로 장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환갑을 인생의 큰 경사로 여겨 잔치를 베풀고, 고희를 넘은 이들을 국가 차원에서 경하하고 우대하는 ‘기로소’(耆老所) 제도를 둔 것을 보면, 조선시대만 해도 나이 60을 넘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로소는 2품 이상의 고위 문신 출신으로 나이 70을 넘긴 이들을 위로하고 대우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특별 기구였다. 그런데 70이 넘은 노인으로서 현직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말 그대로 기로(耆老)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국가의 현안에 대해 자문함으로써 존재가치를 인정받았으며, 국왕도 70세가 되면 스스로 기로소에 들어가 인간 대 인간으로 원로들과 어울렸다. 실권을 쥔 기구는 아니었으나 명망 있는 원로들이 교제하는 최고의 ‘서클’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원로들을 기로소에 모셔 우대하되, 실제 국정은 주로 중장년층이 이끄는 게 조선시대의 국정운영 양상이었다. 기로소의 원로이면서도 실직을 겸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양상은 인조반정(1623) 이후 조선후기에 주로 나타났는데, 바로 이 시기에 조선사회가 정치노선이나 이념과 사상 면에서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어 강성 보수의 길로 접어든 사실을 단순히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법적·사회적으로 정년제가 존재한다. 직업의 특성에 따라 정년 나이는 천차만별이지만 그 취지는 같다. 해당 분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지점, 곧 그 나이를 정년으로 삼은 것이다.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도 30대 중반을 넘기면 오랜 경험조차 후배들의 기술과 체력에 미려 은퇴를 고려하듯 대학교수는 그 지점을 65세로 잡은 것이다.  요즘 ‘신386’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돈다. 자기 분야에서조차 ‘힘’에 붙여 은퇴한 이들이 국가의 주요 실직을 장악하는 현실을 빗댄 풍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로를 기로답게 우대한 조선시대의 기로소 제도가 새삼 떠오른다.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도 살며시 머리를 스친다.  
  • 국내여행 | 비수구미-길 위에서 평화를 찾다

    국내여행 | 비수구미-길 위에서 평화를 찾다

    산천에 색이 스며드는 계절이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쾌청하기 그지없고 햇살은 노곤하다. 뚜벅뚜벅 걷는 산길,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이 찾아왔다. 발 아래 땅이, 머리 위엔 하늘이 해산터널을 갓 지나자 비수구미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몇 개의 표지판 뒤로 철망으로 만들어진 높은 문이 입을 꽉 다물고 있었고, 그 옆에 작게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둔 게 보였다. 찾아온 이를 반기지 않는 것 같은 풍경에 첫 발걸음이 조금 무거웠다. 길은 울퉁불퉁, 흙이 다져진 흙길이라기보단 돌이 쌓여 있는 돌길에 가까웠다. 운동화가 아닌 단화를 신었던 일행은 불편하고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엉성하게 묶었던 신발 끈을 다시금 조여매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출발 지점부터 비수구미 마을까지는 6.5km, 넉넉히 잡아 2시간이 걸린다. 길을 걷자고 찾아온 곳,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강원도 화천에 자리한 비수구미는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져 있다. 비수구미라는 명칭은 ‘신비의 물이 만든 아홉 가지 아름다움’이라는 이야기와, 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진상할 소나무 군락지였던 ‘비소고미’가 발음하기 쉽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천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1,190m의 해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파로호를 마주하고 있는 곳. 외로움과 고된 생활에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집은 4가구에 불과하다. 파로호의 물 높이에 따라 길이 잠기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선착장에서 마을 주민들의 보트를 빌려 타거나(인원 상관없이 왕복 3만원) 해산터널을 넘자마자 나오는 트레킹 길을 통해서 걸어 내려와야 한다. 트레킹 길은 해산령에서 비수구미 마을 방향으로 내려올 수도, 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와 해산령 방향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트레킹에 익숙하지 않다면 내려오는 길을 선택하는 편이 수월하다. 비수구미는 2012년 5월부터 2015년 5월까지 자연휴식년제가 지정돼 출입이 통제되고 취사나 캠핑도 불가능하다. 여느 여행지처럼 편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찾지 못해 안달이다. 트레킹 길 출발지와 선착장에도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고 조용하던 민박집에는 식사시간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단순히 오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집 한 채 없이 이어지는 산길, 그 위에 자꾸 사람들이 서려는 이유는 오감을 통해 채워지는 평안 때문일 것이다. 비수구미에선 조금만 발걸음을 늦춰도 금방 길 위에 혼자가 된다. 소리라고는 숲이 내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뿐이다. 보물같이 숨어 있는 길섶의 작은 꽃들은 비수구미 길의 숨은 재미다. 풀의 냄새를 실은 바람도 전해진다. 트레킹 길은 계곡을 옆으로 두고 나란히 이어지다 두어 번쯤 작은 물길이 길 위를 넘어간다. 한여름이라면 발을 담구고 쉬었다 가도 좋을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길, 산, 하늘과 물뿐이고 도시에서 찾기 힘든 화려한 색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펼쳐진다. 차를 타고 휙 지나가며 보는 풍경에선 알 수 없는 산천의 숨은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역사의 아이러니를 굽어보다 비수구미 마을과 닿아 있는 파로호는 지금은 잔잔한 물결을 만들며 고요함을 뽐내고 있지만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파로호는 1944년 일제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만든 화천댐 건설로 만들어졌다. 원래 이 지역의 호수는 ‘대붕호’라 불렸지만 일제가 대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화천호’로 불렸다. 수력발전소로 지어진 만큼 6·25 전쟁 때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이 중공군 약 3만명을 물리치며 승리를 거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뜻에서 파로호破虜湖란 이름을 붙이면서 명칭이 굳어지게 됐다. 파로호와 맞닿아 있는 또 다른 댐은 바로 ‘평화의 댐’이다. 80년대 북한 금강산댐에 대응하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국민모금운동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1990년에 완공된 댐은 수많은 논란이 일어 결국 감사원의 감사까지 받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현재의 모습은 2000년대 증축을 거친 모습이다. 그리고 화천군에서 2009년 평화의 댐 주변에 공원을 조성하고 여러 조형물과 비목공원 등을 설치하면서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공원에는 커다란 종이 자리하고 있다. ‘평화의 종’이 그것인데, 세계 각국의 탄피를 모아 만든 것으로 ‘전쟁과 분란 없는 세계’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자 세계에서도 3번째 크기라는데 탄피로 만들었다니 그 크기가 도리어 씁쓸하게 느껴졌다. 종의 윗부분에 있는 날개 한 쪽이 잘린 비둘기 모형은 북으로 갈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날개를 이어 붙일 예정이라고. 1인당 500원을 내면 타종 체험도 할 수 있다. 타종료 500원은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교육사업에 사용되는데 2010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총 3,000만원이 에티오피아에 전해졌다고 한다. 전쟁의 기억과 안보 위협을 오롯이 담고 있는 이곳에서 생각하게 되는 평화는 남다르다. 비목공원에 걸린 낡은 철모도 선전으로 시작한 댐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맛으로 느끼는 비수구미 동그랗게 말아 놓은 나물이 식탁에 올라온다. 얼핏 봐도 적은 양이 아니다. 꼭꼭 눌러 뭉쳤으니 자꾸만 옮겨 담아도 여전히 그릇 위에 수북하다. 아주머니는 “남으면 다시 올리지도 못하니까 싸 가요”라며 나물이 남은 테이블마다 비닐 팩을 나눠준다. 고사리, 곰취, 얼레지, 곤드레 등 계절마다 제철에 나오는 나물들로 상이 차려진다. 밥 위에 나물 몇 가지를 올리고 직접 담갔다는 고추장을 넣어 슥슥 비벼 한 입. 자근자근 씹기 시작하자 나물의 향과 고소함이 전해졌다. 질감도 맛도 하나같이 다르다. 상차림에 나오는 7가지 나물 하나하나마다 가장 맛 좋은 방법으로 무쳐내기 때문이다. 손이 많이 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맛있다. 조미료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쌉싸름한 고추장과 산나물의 조화는 바깥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에 단비와 같았다. 몇달 전, KBS <인간극장>에 나오기도 했던 비수구미 민박은 방송 이후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족히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보이는 식당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원래는 노부부가 하던 일을 지금은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들, 손자손녀들의 친구들까지 찾아와 돕고 있다고 한다.☞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travie info 평화의 댐 평화의 댐 주변에는 물문화관, 비목공원, 세계 평화의 종 공원 등이 있다. 물문화관은 물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모형과 영상 등 시각자료를 활용해 보여 준다. 비목공원은 가곡 <비목>의 탄생지로, 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매년 6월6일을 전후로 비목문화제가 열리기도 한다. 평화의 댐 뒤편으로 있는 세계 평화의 종 공원은 ‘염원의 종’, ‘마음의 종’ 등 여러 의미를 담은 종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소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2922-2 문의 033-480-1532 비수구미 민박비수구미 트레킹 길의 끝과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는 비수구미 민박은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숙박할 수 있는 방은 총 8개로 기본적으로 한 방에 4명이 묵을 수 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다. 비수구미 민박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직접 담근 고추장과 제철에 나는 나물들로 만든 산채비빔밥. 직접 기른 닭으로 만든 닭백숙, 닭볶음탕도 맛볼 수 있다. 가격┃숙박 1박에 3만원 음식 산채비빔밥 1인 1만원, 닭백숙과 닭볶음탕 3~4인분 4만5,000원 주소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2리 2715 문의 033-442-0145 물빛누리호 화천댐 주변의 파로호 선착장에서 출발해 평화의 댐까지 운항하는 유람선. 약 24km를 달리며 배 안에서 파로호의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과 공휴일에 운항한다. 10인 이상일 때 운항하며 평일에도 30인 이상이면 예외적으로 운항하기도 한다. 승선료 13세 이하는 왕복 9,000원, 14세 이상은 왕복 1만5,000원 주소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1177-3 문의 033-440-2575, 2557
  • 국내여행 | 가을빛 담아 빠알간 장수

    국내여행 | 가을빛 담아 빠알간 장수

    계절은 색色으로 다가온다. 입추가 지나니 벌써 울긋불긋한 색들이 튀어나와 몸소 가을을 알린다. 멋과 맛 모두가 붉디붉은 장수야말로 가을의 출발점이었다. ●주 朱 논개님의 성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전라북도 장수는 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다. 기녀로 평가절하된 논개가 마냥 애틋한 장수 사람들은 정성스레 제의를 지내고 붉은 사당을 세워 아름답게 가꿔 왔다. 땅에 발을 딛고, 오는 길에 움츠렸던 몸을 쭈욱 펴 본다. 서울에서부터 3시간 거리에 있는 장수에 도착했다. 버드나무에 실려 오는 싱그러움이 섞인 공기가 마냥 달다. 손끝 발끝까지 청정한 기운이 금세 퍼지도록 바지런히 숨을 삼켰다. 한달 넘게 이어졌던 여름장마, 그 뒤에 바짝 붙어 숨통을 조였던 폭염에 지칠대로 지쳤건만, 장수에서는 기분이 마냥 달뜬다. “아마 해발이 좀 높아서 그럴 겁니다. 장수는 관측 이래로 열대야가 있어 본 적이 없어요.” 장수군 문화해설사님이 읊는 장수군 예찬을 주욱 듣자니 괜스레 기분 좋아지는 장수군의 기후적 특성을 이해할 법도 하다. 평균 500m 이상의 해발고도에 위치한 장수군은 여름에도 공기 중 습도가 낮아 한낮에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훑는다. 살기 좋은 마을이니 사람이 모이지 않을 턱이 없었다. 장수에는 조선시대 때 중국에서 건너 온 주朱씨 일가가 모여 살았는데, 이 무리 안에서 왜군 장수와 함께 촉석루에서 몸을 던진 논개論介가 나고 자랐다. 양반 주달문의 딸로 알려진 주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 나섰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남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주 관기로 등록했다고 전해진다.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가 연회 준비를 지시하자 논개는 이 기회를 틈타 왜장을 바위 위로 꾀어내어 함께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에게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이라는 호가 붙여졌고 그녀의 의로운 행동을 입으로 전한 지역민들은 눈물로 추모했지만 논개는 언제나 평가절하 되었다. 유교 사상 아래서 기녀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던 논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에 의해 편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논개가 태어난 장수는 그녀를 더 애달프게 여기는 것 같다. 비록 사후지만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사당을 지어놓고 남녀노소 사당에 올라 그녀를 추모한다. 그녀의 성처럼 붉은색의 사당이 의암호 주변에 우거진 나무의 초록빛과 대조돼 더욱 아름답다. 사당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3층 높이의 계단을 타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의암호의 풍광이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게 만든다. 주씨 일가가 모여 살았던 주촌마을에는 아직도 논개 생가가 남아있는데 너와를 척척 얹은 기와집이 오순도순 모여 있어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祀┃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3 문의 063-352-2550 입장료 무료 논개생가마을┃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1013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홈페이지 nongae.go2vil.org ●홍紅 아삭하니 한 입, 구수하니 두 입 볕을 받을수록 붉어지고 밤낮의 일교차를 극복할수록 단단해지는 게 사과다. 장수를 사랑하는 사람 손에 길러진 소는 인간에게 땅의 기운을 전한다.오전을 걷는 데 보내고 나니 평온했던 뱃속에 한바탕 소란이 인다. 위장의 동요는 사무실에 앉아서는 느끼지 못할 건강한 식욕이었다. 장수군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를 찾아 나설 타이밍인 것이다. 향긋한 향이 감도는 사과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절로 입에 군침이 고인다. 하루하루 가을에 가까워지고 있는 하늘 아래서 뜨거운 태양을 받아 익어 가는 사과들이 붉은색의 명도를 차츰차츰 높여 가고 있다. 단단한 과육을 자랑하는 최상 품종인 장수의 사과를 키우는 것은 기후가 8할이요, 농부의 땀이 2할이라 했다. 여름 평균 기온이 22도 정도로 선선하고 일교차가 심한 장수는 사과가 자라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췄다. 가능성을 일치감치 알아본 농부들이 장수의 너른 터에 집중적으로 사과나무를 심은 결과 전국에 유통되는 사과 중의 25%가 장수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장수군은 일반 사람들에게 사과나무를 분양하기도 하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1년 동안 작은 농장의 주인이 되어 직접 농사에 참여하거나 수확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는 사과농장에 들렀더니 주인의 이름표를 단 나무들이 추석을 앞두고 열심히 과실을 살찌우고 있었다. 9~10월 수확철에는 6,000~7,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튼튼히 여문 사과를 똑똑 거둬들인다. 가을 내내 작은 마을이 가족들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하니 사과는 장수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 다시 이 땅에 생동감을 선사하는 보은報恩 식물 같다. 맑은 공기와 건강한 땅의 기운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건강함은 사람에서 가축에까지 전해진다. 쨍쨍한 볕을 받아 낮 시간 내내 유기물을 합성한 풀을 먹고 자란 소는 장수군의 또 다른 아이콘이다. 장수 어디서나 소의 먹이로 쓰기 위해 건초와 짚을 정성스럽게 묶어놓은 곤포가 눈에 띈다. “잡다한 고기 찌꺼기를 먹고 자라는 소들과는 차원이 다르단 얘기지.” 우리 한우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드는 장수 사람들의 자랑스러움이 느껴진다. 현재 장수에는 3만2,000두 이상의 한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장수군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많은 수라고 한다. 한우유전자뱅크에서는 장수 한우의 우수한 품질을 유지·개량하는 데도 애쓰고 있다. 우르르 쾅쾅, 텅 빈 위장 소리. 자, 공부는 그만하고 붉은 육질 사이로 하얀 마블링이 반짝반짝 빛나는 한우를 숯 위에 올릴 시간이다. 장수사과 사이버팜┃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와동길 56 문의 063-350-5348 분양가격 한 그루당 10만원 홈페이지 www.mtapple.go.kr ●적赤 적토마를 타고 내달리리 유일하게 동물과 한 팀이 되어 교감하는 스포츠, 승마. 가을볕 아래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기분은 그 무엇과 쉽게 대치될 수 없으리.잔뜩 보양식을 먹었으니 훌훌 발산할 차례다. 다음 행선지를 보니 주소에서부터 웃음이 인다.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있는 장수 승마체험장.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달리듯 리듬감이 한가득 하다. 승마는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말들이 뛸 수 있는 너른 땅 외에도 예민한 말이 조용하게 쉴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광활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캐나다나 미국에서 승마가 보편적인 운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좁기로 우리나라 버금가는 네덜란드를 여행했을 때 도심 공원에서 누구나 말을 탈 수 있고 어린 아이들이 익숙하게 말을 다루는 걸 보고 새삼 부러웠던 경험이 있다. 역시 세상만사는 갖춰진 환경보다 의지의 문제인 듯하다. 어찌됐든 ‘부자 스포츠’로만 여겨지는 승마를 장수군에서 저렴한 값에 즐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기승체험을 하면서 승마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비바람막이가 설치돼 있어 날씨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말을 타기 위해서는 머리에 꼭 맞는 승마모자와 종아리 보호대인 챕스chaps를 착용해야 한다. 승마체험장에 모두 구비돼 있으니 따로 챙겨 갈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말안장에 오르면 보기보다 체감하는 높이가 높다 보니 긴장하게 되지만 그도 잠시, 말이 이끄는 리듬에 몸을 맡긴다. 4명이 한팀이 되어 코치의 지시 아래 말 위에서 걷다가 뛰다가 달리다가 걷다가를 반복한다. 전신에 유연하게 흐르는 리듬을 타고 나면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트랙에서 타는 게 익숙해지고 나면 너른 목장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적갈색 말에 오르고 싶어진다. 승마체험장 내에는 아기 조랑말과 당나귀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 먹이 주기 체험도 할 수 있고 거대한 트로이목마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 좋다. 장수 승마체험장┃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176-7 문의 063-350-2579 운영요일 수~일요일(월·화요일 휴장) 운영시간 하절기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료 성인 2만5,000원, 청소년 1만8,000원, 어린이 1만2,000원 글·사진 양보라 기자 취재협조 장수군청 www.jangsu.go.kr☞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 9월6일부터 8일까지 장수군 의암공원 일대에서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가 열린다. 올해 7번째로 치러지는 중견 축제답게 다채로운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2박3일간 펼쳐지는 축제에 참가해 직접 수확한 사과를 맛보고 1,500명이 한번에 장수 한우를 시식해 보자.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한우곤포 나르기 대회’에 참가해 힘을 뽐낼 수도 있다. 축제 2일차(7일)엔 음력 7월 보름 불가佛家의 승려들이 부처를 공양하는 날 풍요를 기원하는 장수 지역의 영농문화인 깃절놀이가 펼쳐져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의 의미를 되새기며 흥을 돋운다. ‘장수 한우랑 사과랑 축제’가 열리는 의암호 주변에는 캠핑장이 설치돼 야외에서 묵으며 청정 장수를 체험할 수 있다.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의암공원 및 장수군 일원 문의 063-352-2011 운영시간 9월6~8일 오전 10시~밤 10시 홈페이지 www.jangsufestival.com
  •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 부인 주소지가 ‘경복궁’?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 부인 주소지가 ‘경복궁’?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 부인의 1970년대 초반 주소지가 경복궁으로 기재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 관심이 쏠리고 있다. 4일 김 후보자가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요청안에 따르면 부인 송모 씨의 1970년대 초반 주민등록표상 주소지는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1번지로 기재돼 있다. 송씨는 1971년 7월 30일 주민등록을 해당 주소지로 옮긴 것으로 나와있다. 이 주소는 경복궁의 주소지이다. 실제 이 주소를 검색하면 경복궁 3분의 2 정도가 해당 주소지에 위치해 있다. 민주당 등 정치권에서는 송씨가 조선시대부터 한 자리에 있었던 경복궁을 주소지로 기재한 데 대해 “허위 주소지를 기재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송씨의 주소지 ‘종로구 세종로 1-1번지’가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방 출신인 송씨는 당시 경복궁 인근에 위치한 진명여중과 진명여고를 졸업했다. 중·고교 재학 당시 송씨는 인근 주택에 거주했는데 해당 주택이 포함된 부지가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국가로 수용되면서 주소지가 모두 ‘세종로 1-1’로 통합됐다는 것이다. 김 후보자 청문회 준비단 관계자는 “후보자 부인이 거주하던 주택 등을 포함해 경복궁 인근 토지들이 국가에 수용되면서 지번이 모두 세종로 1-1로 흡수합병됐다”면서 “주소지를 허위기재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1981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기재된 송씨의 주소지가 이후 1984년까지 무단전출로 인해 직권말소된 데 대한 의문도 나온다. 청문회 준비단 관계자는 “김 후보자의 배우자는 1981∼1984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유학한 뒤 현지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했다”면서 “미국 체류 기간에 주소지가 직권말소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대한지적공사 신임사장에 김영표 前 국토연구원 부원장

    대한지적공사 신임사장에 김영표 前 국토연구원 부원장

    김영표(61) 전 국토연구원 부원장이 1일 대한지적공사 17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취임식은 오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열린다. 경남 남해 출신인 김 신임 사장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1979년 국토연구원 1기로 공직에 입문해 기획경영본부장, GIS(지리정보시스템)연구단장, GIS연구센터장 등을 지냈다. 2005년 GIS를 이용해 조선시대의 산경표(山經表)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산맥과 흡사한 ‘3차원 한반도 산맥지도’를 완성해 반향을 일으켰다. 공사 관계자는 “신임 사장은 우리나라에 GIS를 도입하고 상용화하는 데 공헌한 GIS 분야의 선구자”라며 “앞으로 공사 발전과 지적 재조사 등 현안 처리에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씨줄날줄] 한우농가의 한숨/문소영 논설위원

    고기가 흔하지 않았던 1960~70년대에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잔칫날이나 제사, 집안어른들의 생신 등 특별한 기념일에나 먹었다. 귀빠진 날에 먹었던 미역국의 소고기가 10번에 7~8번 정도는 질겨서 어린 치아로는 더 이상 씹지 못하고 꿀꺽 넘기고 했던 기억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운기나 트랙터 등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절, 특히 소는 농사를 짓는 도구였던 터라 귀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소를 도축하면 소머리, 혀, 양(위장), 대창, 막창, 꼬리, 우족, 소가죽 등 모든 부산물을 알뜰하게 소비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가 쓴 ‘우리 역사 읽기’ 시리즈를 보면 살생을 금한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가 되면 관에서 소고기를 금지시켰을 만큼 소고기를 즐긴 것으로 되어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소고기를 소비하기 시작한 일본에 비해 조선 사람들의 키가 더 컸던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구제역 파동으로 비싼 사료 먹여 키운 소를 살처분해야 했던 한우농가들이 한우가격 하락 등으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2008년 이래 환율상승으로 사료값 등 생산비는 올라갔지만,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기 때문이다. 육우소비 증가를 겨냥해 한우농가도 늘어났지만, 한우고기 가격은 비싸고 그 탓에 가격이 싼 수입소고기 등을 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우의 가격을 하락시키는 더 큰 요인이 있다. 사골이나 우족, 소꼬리와 같은 소 한 마리의 53%를 차지하는 이른바 부산물 부위의 소비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들 부위는 최근 3년 사이에 가격이 폭락했다. 특히 사골의 경락가격은 kg당 3317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56%나 떨어졌다. 올 초 대기업에서 부산물을 수입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소비자들은 소 한 마리를 잡으면 7%에 불과한 등심과 안심, 채끝 등 구이용 부위나 국거리용만을 찾는다. 여기에 가격 전가가 일어난다. 예전 시골집에서는 가마솥에 우족이나 사골을 온종일 고아 뽀얗게 우러난 국물을 가족들에게 내면 환영받았다. 보신용으로 최고였다. 신김치나 깍두기만 있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 살이가 보편화하면서 곰국 등을 여러 시간 펄펄 끓이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곰국과 같은 국물요리가 다이어트에 나쁘고, 동맥경화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에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부산물 소비에는 장애다. 어제(11월 1일)는 ‘한우의 날’이었다. 대형마트 등의 한우 할인행사에 손님들이 몰렸다고 한다. 소비자와 한우농가가 함께 웃을 수 있도록 한우 2차 가공산업이 더욱 발달하길 바란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조선시대 개성상인 복식부기’ 국제학술회의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3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한중연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개성 복식부기의 세계 회계사적 의의: 유럽과 중국, 일본과의 비교 연구’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한 개성상인이 1887년부터 1912년까지 현대식 복식부기 방식으로 작성한 1296쪽 분량의 회계장부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이 회계장부는 개성상인의 후손 박영진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개성상인들이 이미 19세기에 현대식 복식부기를 사용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자료를 연구한 전성호 한중연 교수는 학술회의에서 박영진가(家) 회계장부의 현대식 복식부기를 실증하고 동시대 유럽과 미국의 실증자료와 비교하는 내용을 발표한다.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장, 정기숙 계명대 명예교수, 서용달 일본 모모야마대 명예교수 등도 발표자로 나선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서울시장 공관 은평뉴타운으로 임시이전

    서울시장 공관의 혜화동 시대가 33년 만에 막을 내린다. 한양도성 보수·정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탈 없이 추진하기 위해서다. 시는 대신 은평뉴타운 우물골 7단지 226동 복층 아파트(전용면적 167㎡)를 임시로 활용한다고 30일 밝혔다. 시설 보완공사를 거쳐 12월까지 옮길 계획이다. 보증금 2억 8200만원의 1년 전세계약 기간에 의전 기능과 시민 소통, 신변 안전 등의 요소를 갖춘 곳을 물색해 새 공관으로 선정한다. 혜화동 공관은 한양도성 방문객 안내센터 등 시민 공간으로 활용된다. 1940년 지어진 혜화동 공관은 1959~1979년 대법원장, 1981년부터 시장 공관으로 쓰였다. 2004년 국정감사 이후 한양도성 보수에 장애를 준다는 논란이 계속되자 문화재청은 2007년 시에 이전을 요청했다. 시는 지난해 11월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보여주는 종로구 가회동 백인제 가옥을 검토했으나 문화재 훼손과 건축가의 친일 행적 논란 탓에 백지화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씨줄날줄] 현대판 늦깎이 ‘참봉’/정기홍 논설위원

    조선시대에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란 직책의 말단 관직이 있었다. 호랑이가 민가에 자주 출몰하자 나라에서 호랑이 사냥꾼을 둔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440명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맡은 일이 매우 위험해 출세의 길도 좋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들어 호랑이가 줄어들자 그 자리는 없어졌다. 임금 행차 때 “주상전하 납시오”라고 외치는 ‘중금’(中禁)도 비슷한 말단 직책이었다. 정년이 아주 짧았다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목소리가 낭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15세 아래의 나이에 임용돼 변성기 이전인 16세쯤이면 자리를 옮겼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외국어 통역관인 ‘통사’(通事), 법을 어기는 자를 잡는 ‘소유’(所由), TV 사극 대장금을 통해 잘 알려진 ‘의녀’(醫女), 말을 관리하는 ‘마의’(馬醫), 장부 관리와 측량을 맡았던 ‘산원’(算員)도 최말단 관리였다. ‘조선의 9급 관원들’의 저자 김인호는 이들을 ‘하찮으나 존엄한’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요즘엔 조선시대의 말단 관리를 ‘참봉’(參奉)으로 통칭하고 있다. 이는 18개 품계의 최말단직인 종9품의 문과 벼슬에 속한다. 지금의 9급 공무원과 가까운 직급이다. 참봉 가운데 왕릉을 관리하는 일을 관장하는 ‘능참봉’은 직위는 낮았지만 그 권위는 남달랐다. ‘나이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 하루에 거동이 열아홉 번씩이라’는 속담은 늙은 나이에 능을 찾는 고관대작들을 모시기 바빴다는 뜻이 담겼다. 종9품의 ‘녹봉’(祿俸)에 관한 기록도 있다. 나라님으로부터 한 해에 쌀 9석과 보리 1석, 콩 2석, 옷감 두 필을 받았다고 한다. 정승이 쌀 64석에 보리 10석, 콩 23석, 옷감 12필을 받은 데 비해 너무 초라해 근근이 살 정도였다. 이는 지방 관리의 잦은 수탈과 무관치 않다. 남명 조식 선생이 “이서(吏胥·아전) 때문에 망한다”고 개탄한 데서도 그 폐단을 짐작할 수 있다. 참봉 아래 아전(衙前)이지만 정식으로 품계를 받지 않은 직책이다. 57세(1956년생)인 임모씨가 경기 연천군의 사회복지직 9급 공채시험에서 최종 합격했다고 한다. 2009년 공무원시험 응시연령 상한을 없앤 뒤 최고령자다. 연천군은 “지역에 노령자가 많아 임씨의 다양한 경험이 상담과 안내에 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며 뽑은 이유를 밝혔다. 최근 몇 년간 40~50대 중·장년층의 공시 응시자가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이들의 합격률은 2009년 4%(98명)에서 지난해 7.9%(159명)로 크게 올랐다. 임씨가 공직에서 근무할 햇수는 공무원 정년이 만 60세이니 몇 년 안 된다. 그의 인생 이모작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최광숙의 시시콜콜] 황혼 이혼과 퇴계의 아내 사랑

    [최광숙의 시시콜콜] 황혼 이혼과 퇴계의 아내 사랑

    지난해 2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한 부부의 황혼 이혼이 처음으로 결혼 4년 미만의 신혼 이혼을 앞질렀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혼한 4쌍 가운데 1쌍이 황혼 이혼이라고 한다. 최근 한 방송사 여성 앵커의 진흙탕 이혼소송 소식도 들려온다. 이런 이혼 뉴스를 들으면서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퇴계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 번째 부인 허씨는 다섯 살, 한 달 된 어린 자식을 남겨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 권씨는 정성 드려 차린 제사 음식에 먼저 손을 대고, 남편의 흰 도포 자락을 빨간 헝겊으로 꿰맬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을 만큼 모자랐던 부인을 말없이 품었던 이가 바로 퇴계다. 퇴계의 부부관은 제자 이함형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이함형은 부인과 금실이 좋지 않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퇴계는 어느 날 제자가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슬며시 편지를 건넸다. “나는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렇지만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 노력해 온 것이 수십 년이 된다. 그동안 몹시 괴롭고 심란해 번민을 견디다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에 이끌려 대륜(大倫)을 소홀히 하겠는가.” 퇴계는 자신의 아픈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제자에게 부부간 도리를 일깨워줬다. 이후 잘못을 깨우친 이함형은 부인을 따뜻하게 대했고, 후손도 번성했다고 한다. 훗날 퇴계가 세상을 뜨자 이함형 내외와 그 자손들은 퇴계의 삼년상을 치렀을 정도로 퇴계를 부모처럼 여겼다. 퇴계는 장가 가는 손자 이안도에게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또한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퇴계의 결혼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군자의 도(道)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부부생활이야말로 치가(治家)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둘째 부부란 서로 손님 대하듯 공경해야 한다. 퇴계는 이를 ‘상경여빈’(相敬如賓)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퇴계가 살던 때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부부 간 갈등의 양상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게다. 더구나 부부 간 일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 않던가.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해로(偕老)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릴 때는 저마다 피치 못할 사연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이혼하는 게 ‘흉’이 아닌 세상이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한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온갖 화려한 것들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답다. 매사에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며 올바르게 처신하고,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퇴계의 말은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무게로 다가온다.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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