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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9세기 국내 축성술 변화·동아시아 건축 교류 증거”

    “7~19세기 국내 축성술 변화·동아시아 건축 교류 증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의 가치는 ‘비상시의 왕궁’이라는 데 방점이 찍혔다. 임진왜란(1592~1598)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국가전란 시 왕실과 조정의 명운을 보장하는 임시 수도의 역할을 했다. 또 방어력을 갖춘 산성도시로서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왕궁이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인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일상적인 왕궁과는 별개 산성이면서도 전란 때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곳은 남한산성 외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남한산성은 그 원류를 찾아가면 백제 온조왕 때 왕성과 통일신라 시대 주장성에 잇닿는다. 그러다 1624년 인조 때 뒤로 굽어지는 ‘굽도리 방식’의 산성으로 탈바꿈했다. 18세기 영·정조 때는 석재 중간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지지력을 높였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포좌와 포대를 만들었다. 이들 성벽은 시기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는 “남한산성은 7~19세기에 이르는 국내 축성술의 발달 단계와 무기체계의 변화상을 잘 드러낸다”면서 “동시에 16~18세기 동안 전란을 거치며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남한산성이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라는 점과 축조와 운용 과정에서 사찰과 승려가 동원된 점 등에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의 기념물 외에 남한산성 소주와 같은 유·무형유산 10점이 곳곳에 자리한다. 아울러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현대 도시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도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을 등재하는 기준은 ‘유적이 얼마나 잘 보존돼 있는지’와 ‘역사성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 ‘현대인의 삶과 얼마나 잘 조화되느냐’ 등이다. 여기에 인류의 보편 가치까지 강조된다. 이를 포괄하는 것이 ‘세계유산협약의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으로 남한산성은 특정 기간·지역 내에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발달 단계를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로 꼽힌다. 경기 광주시 중부면에 자리한 남한산성은 2009년 6월 세계유산 등재 잠정목록 후보로 선정된 뒤 지난해 1월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가 제출됐다. 지난 4월에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정선~광화문 옛길 260㎞ 관광자원화 서막

    정선~광화문 옛길 260㎞ 관광자원화 서막

    산골마을 강원 정선군 공무원들이 19일 정선~서울 광화문까지 260㎞의 옛길 걷기 답사에 나섰다. 정선군 김수복 문화관광과장을 단장으로 4명의 공무원이 8일간의 일정으로 2018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와 옛길 관광 자원화를 위해 자원하면서 성사됐다. 답사 코스는 127년 전 조선시대 오횡묵 정선군수가 걸어서 오갔던 옛길 탐방길로 이름도 ‘아리랑 로드’(Arirang Road)로 정했다. 코스는 오 군수가 1887년 쓴 정무일기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을 근거로 했다. 이 책에는 오 군수가 서울과 정선을 오간 여덟 번의 기록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김 과장을 단장으로 박종만 관광진흥계장, 이재열 아리랑계장, 조성윤 관광마케팅 주무관이 한 팀을 이뤄 이날 오후 출발한 뒤 8일간의 답사를 끝내고 오는 26일 종착지인 서울 경복궁에 도착할 예정이다. 답사팀은 기록홍보, 길잡이 등으로 임무를 나눠 옛 기록에 의존해 벽파령을 넘어 평창~횡성~원주~양평 등 10개 시·군을 지나는 옛길을 따라 걸어 이동한다. 옛길은 물론 127년 전 정선아리랑이 흘러간 흔적과 옛 모습 등을 찾아 표식하는 작업도 함께한다. 김 과장은 “127년 전 옛길을 찾아 떠나는 의미 있는 여정길인 이번 답사를 통해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와 아리랑 로드 조성 기초 자료를 만들 계획”이라며 “앞으로 정선군은 한강을 따라 아우라지에서 서울 마포에 이르는 수상 아리랑 로드도 답사하는 등 정선아리랑의 산길과 물길을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선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원로 사학자들 “식민사관 발언 文 물러나라”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각계의 사퇴 요구가 이어지는 가운데 원로 역사학자들이 문 후보자의 식민사관과 역사인식 등을 지적하며 사퇴를 촉구했다. 원로 한국사학자 10명은 1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 후보가 조용히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며 문 후보자의 사퇴를 종용했다. 이들은 원로 역사학자 16명이 서명한 기자회견문에서 문 후보자의 ‘조선인은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는 게 DNA로 남아 있다’는 발언을 들어 “조선시대를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라고 단언했다. 한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날 열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88) 할머니가 참석해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만 뽑으려고 하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이라면서 “문 후보자는 대통령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깨끗이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동대문 쇼핑몰 찍고, 다음 코스는 도보 여행!

    동대문구가 관광 인프라 확충을 위한 두 번째 프로젝트로 도보여행 코스를 선보였다. 고즈넉한 휴식과 적당한 운동, 문화유적지가 테마다. 구는 관광자원의 두 번째 코스로 ‘자연과 함께하는 도보여행코스’를 개발, 일상 속에서 휴식을 찾을 수 있는 녹지공간과 그곳에 있는 문화유적을 연계한 힐링코스로 구 홈페이지에 소개할 예정이라고 16일 밝혔다. 사계절 아름다운 꽃과 나무에서 피톤치드를 그득히 내뿜는 배봉산근린공원이 첫 코스다. 완만해 천천히 걸어도 40분 정도 걸린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250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숲 속 작은 도서관과 어린이놀이터 등으로 바쁜 일상을 떠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등산로에는 황톳길과 지압길, 무장애숲길 등이 갖춰졌다. 생태공원과 유아숲체험장도 찾을 만하다. 배봉산 일대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영우원) 터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휘경원) 터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화유적지가 있다. 아기자기한 숲 속 걷기를 끝내면 중랑천을 잇는 육교를 지나 서울시 선정 아름다운 장안동 벚꽃길이 손님을 맞는다. 이제 꽃은 다 스러졌지만 2.5㎞에 이르는 벚꽃터널은 시원함을 선사한다. 또 주변에 양귀비와 금계국, 원추리, 꽃창포, 코스모스 등 각종 야생화를 철마다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하천인 청계천이 곧장 나타난다. 한강 제2지류로 지하철 2호선 용두역을 나서면 마주치는 물길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까지 걸을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다. 유덕열 구청장은 “동대문엔 한방과 더불어 하루 동안 나무와 꽃, 하천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자랑할 만하다”고 말했다. 또 “잘 홍보해 많은 시민과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일제시대’ 발언,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두둔 논란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일제시대’ 발언,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두둔 논란

    변희재 트위터 “문창극 ‘일제시대’ 발언,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두둔 논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가 “일제 시대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과거 발언을 두둔하고 나섰다. 변희재 대표는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KBS에서 음해 나선 문창극 발언, 조선시대부터 미리 준비 안 해 일제 지배 당했고, 그 준비 안 된 상태로 미국 개입 없이 근대국가 갔으면 김일성에 먹혔을 것”이라면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역사관이다”라고 적었다. 변희재 대표는 또 “역사는 국익에 건설적인 방향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국가 전체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문창극 지명자 강연은 전혀 문제없다”며 “오히려 자학적, 친중 사대주의 역사관과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문창극 후보자를 옹호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지난 2011년 서울의 한 교회 특강에서 “일제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은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이조시대부터 게을렀기 때문이며 이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도록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알려져 자질 논란이 일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도 문창극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변희재 대표의 이번 발언을 놓고 일부 네티즌들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감싸기가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섶에서] 가게 이름/문소영 논설위원

    회사 근처 음식점 이름이 ‘마이 엑스 와이프 시크릿 레시피’다. 해석하면 ‘이혼한 아내의 은밀한 음식 조리법’이라는 상호다. 미인은 소박을 맞아도 음식 솜씨 좋은 여자는 소박을 피한다던 조선시대적 발상은 스파게티와 수제 햄버거를 파는 가게에는 적용되지 않나 보다. 하긴 미인 헬레네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그리스의 신들까지 편 갈라서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던 고대 유럽을 생각하면 음식은 미인보다 2차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혼한 아내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면 전 남편이 찾아와서 요리를 먹고 간다는 것인지 메뉴를 샅샅이 훑기도 하고, 이혼한 사이에 음식을 핑계로 서로 만나도 되는 것인지 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들춰 가며 농담을 한다. 재미난 음식점 이름이 많다. 국숫집인데 ‘면사무소’가 있는가 하면, 울산중공업 근처의 방자구이집은 ‘외식 중공업’이다. 돼지고기 구이집으로 ‘탄다무라’(탄다, 먹어라)처럼 사투리를 불교진언처럼 비틀어 쓰는가 하면 ‘저8계 콧9멍’이란 코믹 상호도 있다. 음식을 기다리며 가게 이름을 곱씹어보게 한다면 손님 유치는 성공하지 않을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죽음도 꺾지 못한 믿음, 여기에 잠들었네

    죽음도 꺾지 못한 믿음, 여기에 잠들었네

    “공주에서 순교하신 분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수는 오직 천주님만이 아시느니라.” 교회사가(敎會史家)였던 프랑스 선교사 달레가 기록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글귀다. 오는 8월로 예정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국내 가톨릭 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국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곳은 뜻밖에 백제의 고도 충남 공주에 있었다. ‘박해시대 교회의 심장’이라 불리는 황새바위 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는 수리치골 성지까지 묶어 돌아봤다. 충남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곳이다. 충청도를 통틀어 가장 큰 도시였다는 뜻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광풍은 공주에도 불어왔다. 삼남지방에서 끌려온 천주교도들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됐고,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처형된 장소가 바로 황새바위다. 황새바위 순교성지 사무국에 따르면 예서 처형당한 순교자 가운데 공식적으로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내포 사도’ 이존창 등 337위에 이른다. 국내 130여곳에 달하는 천주교 성지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다. 황새바위 성지는 제민천 옆에 있다. 공주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꼽히는 공산성과 무령왕릉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다. 황새바위 성지는 ‘몽마르뜨 광장’, ‘순교자 광장’, ‘황새바위 광장’ 등 세 개의 광장으로 구성됐다. 프랑스어로 ‘순교자의 언덕’을 뜻하는 몽마르뜨 광장은 주차장에서 성당 앞마당으로 올라가는 언덕까지를 이른다. 몽마르뜨 광장 계단 끝의 돌문을 나서야 비로소 순교자 광장에 들어서게 된다. 돌문의 높이는 150㎝.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높이다. 이는 순교자 광장에 들기 전 마음부터 먼저 정화하라는 주문일 터다. 순교자 광장에는 세 개의 특별한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무덤경당과 순교자의 탑, 그리고 12개의 빛돌이다. 무덤경당은 예수의 무덤이 모티브가 된 돌무덤이다. 순교자의 탑은 순교자들을 처형했던 칼과 그에 대항하는 칼이 맞닿은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12개의 빛돌은 예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조그만 경당과 불쑥 솟은 순교탑, 그리고 투박한 질감의 빛돌이 대립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오래전 이 공간에서 빚어졌던 순교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무덤경당 내부엔 순교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강서방’ 등으로 표현된 이름들을 보면 순교자들이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비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맞은편 순교탑은 잘 벼린 칼을 보는 듯하다. 날카로운 외모에서 순교자들의 한이 응어리로 맺혀 있음을 본다. 순교탑 가운데엔 41개의 계단이 조각돼 있다. 한데 이를 딛고 오르는 건 불가능한 구조다. 계단을 만들고도 오르지 말라고 강제한 건 대체 무슨 뜻인지 범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다. 황새바위 광장은 순교자 광장 위에 있다. 원래 ‘부활 광장’으로 불리다 최근 황새바위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황새바위 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한다. 고샅길 양쪽엔 이른바 ‘빛의 길 14처’가 마련돼 있다. 예수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14개의 구간으로 나눈 것이다. ‘빛의 길’ 끝자락 왼쪽엔 ‘순교자의 어머니 상’이 서 있다. 오른쪽의 황새바위 광장 끝은 야외성당이다. 12개 장대석과 바위 제대 등이 놓여 있다. 수리치골 성지는 조선 조정의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의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이 있었던 곳으로, 선교사들의 근거지이자 충청도 지역의 선교 중심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공주에는 여러 곳에 천주교인들의 은거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차령산맥의 줄기인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데다, 터도 넓어 많은 천주교인들이 은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지 끝자락에 게세마니 동산의 예수상과 잠자는 세 제자 등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글 사진 공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황새바위 성지(www.hwangsae.or.kr)는 공주의 대표명소인 공산성 바로 뒤에 있어서 찾기 쉽다. 854-6321. 수리치골은 공주 시내에서 공주치즈스쿨 방향으로 39번 국도를 타고 가다 청홍삼거리에서 우회전, 끝까지 가면 나온다. 신풍면 봉갑리에 있다. →맛집 내고향묵집은 닭백숙과 묵무침을 내는 집이다. 6대가 살았다는 옛 갑부의 한옥집에 음식점을 내 분위기가 그만이다. 반포면 공암리에 있다. 857-4884. 명성불고기는 금강 남쪽, 그러니까 공주 ‘강남’의 한복판에서 대를 이어 불고기를 내는 집이다. 857-8853. 아울러 초가집(856-7997)은 비빔칼국수, 이학(855-3202)은 국밥으로 입소문 난 집이다. 둘 다 중동에 있다. →잘 곳 공주한옥마을은 주말엔 좀처럼 방을 얻기 힘든 곳. 세월호 참사 이후 학생들의 단체 숙박이 대폭 줄어 수월하게 방을 구할 수 있다. 840-8900. 공주 ‘강북’에선 호텔 금강이 깔끔하다. 852-1071.
  • [씨줄날줄] 생활가전의 진보/문소영 논설위원

    국수는 밀·메밀·감자 등의 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썰거나 국수 틀로 가늘게 뺀 것으로 삶아 국물에 말거나 비벼서 먹는 음식을 말한다. 국수의 재료에서 따와 한자로 ‘면’(麵), ‘면자’(麵子)라고도 쓰는데 국수(?水)도 사실은 한자다. 삶은 면을 물로 헹구어 건져 올린다고 해서 부른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국수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려사’에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는 내용이 있어 아무리 시기를 늦춰도 고려 때는 먹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국수는 상품화됐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 따르면 국수의 주재료인 밀은 기원전 7000년쯤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던 야생종 밀이 그 기원으로, 기원전 1~2세기 서아시아에서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전한의 무제가 장건을 서역에 파견했는데 그때 밀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장건이 서역에서 가져온 새로운 품종은 밀 이외에도 포도, 수박, 참깨, 마늘, 후추, 호두 등이다. 중국은 처음에는 넓적한 수제비 형태로 먹다가 후한(後漢) 때 가늘고 긴 형태의 국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6세기 중국 농서인 ‘제민요술’에 국수 만드는 법이 자세히 나온다고 하니 대중화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중국 문화권 안에 있었던 삼국시대부터 국수를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학자들은 송나라 때 한반도에 국수 만드는 법이 전해져 통일신라 때부터 먹었다고 보수적으로 시기를 잡는다. 조선시대에도 밀가루는 진말(眞末)이라 부르는 귀한 식자재였다. 따라서 국수는 결혼식이나 회갑연 등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한반도는 특히 밀이 더 귀해서 근대 이전에는 주로 메밀을 비롯해 고구마, 옥수수, 녹두, 마, 칡, 도토리 등으로도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냉면도 국수로 분류된다. 기다랗게 생긴 것이 장수를 뜻한다고 해서 면을 잘라 먹는 것은 금기시했다. 국수를 만들려면 반죽도 어렵고, 밀대로 얇게 밀고자 노동력을 많이 써야 했기 때문에 외식이 활성화되기 전 칼국수는 별미였다. 하지만 조선 중기부터 이미 국수 틀을 사용해 국수를 만든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1900년대부터 가내수공업적인 회전압력식 국수 틀이 개발돼 건조 밀국수가 보급됐다. 최근 생활가전이 장족의 발전을 해 기름 없는 튀김기가 나오는가 하면 가정용 즉석 면 제조기가 개발돼 일본에서 시판됐다. 밀가루와 소금, 계란(또는 물)을 넣어주기만 하면, 10분 만에 생면이 뽑아져 나온다. 면의 종류도 국수, 파스타, 우동 등 종류별로 뽑을 수 있다. 굵은 팔뚝도 필요 없고, 얇게 면을 만들기 위해 힘 좋은 남편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공직 인사혁신안 대해부] “무분별한 민간 채용은 되레 ‘미국식 회전문’ 폐해 낳을 것”

    [공직 인사혁신안 대해부] “무분별한 민간 채용은 되레 ‘미국식 회전문’ 폐해 낳을 것”

    서울신문이 인사행정 분야 전문가 35명을 상대로 진행한 인식조사 결과에서 보듯 전문가들은 ‘고시’(5급 공무원 공채시험) 선발 규모의 축소 또는 전형 폐지로는 해묵은 민·관 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낙하산, 전관예우 등 문제의 원인을 공직사회 전체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입직 경로’에서만 찾는다면 민간 출신이 많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 이른바 ‘관피아’가 미국식 ‘회전문’으로 둔갑할 뿐이라는 것이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11일 “고시 제도를 없애고 7급 시험 등으로 선발하는 공무원 수를 늘린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비판받는 대상이 5급 출신에서 7급으로 바뀔 뿐,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밝혔다. 배귀희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밝힌 민간경력채용 인원 확대 방침이 공직사회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되는 것이라면 찬성하지만, 관피아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는 접근방식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최무현 상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책을 기획하는 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집행하는 공무원도 있다”면서 “가령 5급만 해도 지방자치단체에선 과장급이지만 중앙부처에선 실무진으로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현행 채용 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행 공개채용 방식은 최소한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공정성 시비도 없는 제도로 입증됐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핵심이 공직에서 민간 영역으로, 또 민간 부문에서 공직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이해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공직자윤리법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김영란법)이 조속히 통과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개방형 고위공직자를 단기간에 대폭 확대할 경우 “민간 전문가 중에서 공공봉사, 공직윤리 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 “개방형직위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온 민간 전문가, 예를 들어 기업 출신 등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칫 공정성을 해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민간 전문가의 청렴도가 높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라고 밝혔다. 공직사회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폐쇄성과 무사안일, 전문성 부족’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상만 볼 게 아니라 역사적·제도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조선시대 정1품, 종1품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계급제 구조에 기초한 직업공무원 제도는 역사가 오랜 국가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유럽에서도 공무원 조직은 계급제 구조를 근간으로 한다. 계급제에서는 인사 형태가 순환보직을 기본으로 한다. 직무 전문성보다는 종합행정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계급제에선 승진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조직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연공서열을 어느 정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강제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무사안일’이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금과 달리 볼 것을 주문했다. 그는 “무사안일하게 보이는 것은 대체로 공무원들이 정책을 입안할 때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걸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면서 “정책이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게 반드시 비난만 받을 일인지 따져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권 입맛에 따라 공무원 인사가 좌지우지되거나 법이 정한 임기조차 보장해 주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는 공무원들에게 복지부동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명식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는 “공직자들이 소신을 갖고 담당 업무에 최선을 다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게 심각한 문제”라면서 “공직자들은 온갖 사회 문제에 대해 한정된 재원과 정해진 법령 안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모색하고 집행하며 최종적으로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그런데 그간 정치권의 과잉 간섭, 외부의 과도한 직무 감사 활동, 공직사회 전반에 대한 폄하 보도 등으로 공직자의 사기가 극도로 위축된 상태”라고 말했다. 박현신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는 “내부에서 승진한 고위 관료의 경우 특정 분야의 전문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정책 조정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강점을 보일 수 있다. 반면 전문가로 공직에 들어온 경우 특정 분야에서는 두각을 드러낼 수 있지만 여러 부처에 걸친 종합적 정책 판단 역량은 떨어질 수 있다”면서 “하나의 인사 원칙을 전체 부처에 일괄 적용하기보다는 정책 성격이나 기능, 내용에 따라서 전문가와 일반 행정가의 인사 운영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영상] 영화 ‘군도’ 하정우 “말 타기 힘들어. 그냥 뛰고 싶었다”

    [영상] 영화 ‘군도’ 하정우 “말 타기 힘들어. 그냥 뛰고 싶었다”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는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 강동원, 이성민, 조진웅, 마동석, 윤지혜, 김재영, 김선균, 정만식이 참석해 촬영 뒷이야기를 전했다. ‘군도’는 19세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 주던 ‘의적단’과 ‘권력가’의 대결을 그린 액션 사극이다. 이 작품에서 강동원은 나주지방 부호의 서자로 최고의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조윤’역을, 하정우는 억울한 사연으로 군도 무리에 합류하는 ‘돌무치’역을 맡아 열연했다. 윤종빈 감독의 연출작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트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 이어 또 다시 윤 감독과 호흡을 맞춘 하정우는 “윤종빈 감독과 네 번째 작품이다. 매번 작업을 함께하는 것이 재미있다”며 익숙한 호흡을 자랑했다. 이어 그는 “캐릭터 때문에 출연을 결심했다. 이야기도 굉장히 명쾌하고 짜릿하다. 배우로서는 탐낼 만한 역할이 아닌가 생각됐다”며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연기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묻는 질문에 하정우는 “말 타는 연기가 힘들었다. 과거에 말을 타다가 떨어진 사고를 당한 이후 다시는 말을 안 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시나리오를 받고 보니 말 타는 장면이 있었다”며 “윤종빈 감독에게 그냥 뛰어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거절당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촬영 6개월 전부터 연습했는데 승마를 가르쳐주는 선생님과 상담치료부터 했던 것 같다”며 고생스러웠던 촬영과정을 예상하게 했다. 하정우와 윤종빈 감독이 의기투합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는 오는 7월 23일 개봉된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50년간 전통장례문화 물품 수집 ‘쉼’ 박물관 박기옥 관장

    [김문이 만난사람] 50년간 전통장례문화 물품 수집 ‘쉼’ 박물관 박기옥 관장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삶’과 ‘죽음’일 것이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다시 말해 ‘웰빙’과 ‘웰 다잉’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삶과 죽음’의 공존 속에 숨 가쁘게 살다가 편안한 ‘쉼’의 세계로 떠난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쉼 박물관’은 이 같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 주는 독특한 박물관이다. 현충일 이틀 전인 지난 4일 박물관을 찾았다. 입구 벽에 걸려 있는 명문목판(銘文木板)의 한시(漢詩)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나서 백년 누리기는 어려우나 죽어서는 천추를 누리니/돌아가는 객의 낯빛 속에 청산이 어리었구나/만금의 재물은 모두 덧없는 것이니/이 몸은 어디에 들거나 청산으로 가리라’ 또 있다. 동화작가 권영상의 ‘새’에 나오는 내용이다. ‘가벼운 것일지라도 새들은/가끔씩/깃털을 버리는가 보다/버릴 것은 버리면서/가볍게/하늘을 나는가 보다’ 박물관의 내부 분위기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하는 글귀다. 주택가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2007년 10월 개관했다. 박물관장이 20대 때부터 꾸준히 모아온 상여, 상여 장식, 요여 등 전통장례 용품 1000여점을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 내부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조상들의 해학과 순수성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편안히 누워 쉬고 있다는 생각으로 안방 침실에 상여를 전시한 것을 비롯해 옷방과 식당이 꼭두와 용수판, 자개 문갑 등 여러 가지 상여장식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1층 전시실에는 물구나무를 선 꼭두 등 눈길을 끄는 많은 목조각들이 진열돼 있으며 화장실에는 심청전, 오성과 한음, 도깨비 방망이, 이수일과 심순애 등 전통 이야기에 맞춰 전시품들을 배열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한다는 용, 봉황, 새, 닭 등 날개 달린 짐승의 상여조각들이 공중에 매달려 있거나 가지런히 벽 쪽에 진열돼 있다. 용을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하늘을 오르는 상여조각, 칼을 든 도깨비 양쪽 어깨에 용의 모습이 장식된 상여조각들도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례문화의 면모를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죽음을 장식했기에 박물관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창밖으로 보이는 북악산의 경치와 박물관 주변에 빙 둘러 서 있는 나무와 꽃 등이 더욱 그러하다. 이 박물관의 지하 특별 전시실은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로 만들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그동안 이걸재 소리꾼의 서민상여 퍼포먼스(2007년),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빛의 작가 제임스 터렐전(2008년), 한국 보자기와 부채전(2011년), 국제 보자기포럼 특별전(2012년) 등을 비롯해 2010년부터 세계인형전을 매년 열고 있으며 지금은 독일의 미술가 게하르트 바치전, 그리고 박물관장이 직접 제작한 부채와 보자기전이 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상례문화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여는 등 조선시대의 장례절차와 분묘, 묘비, 상여에 대한 논문 발표의 장소가 되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장례문화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 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박물관은 개관 당시 혼자 사는 한 여인이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박기옥(75) 박물관장과 마주 앉았다. “집도 쉼이고, 만남도 쉼이고, 영면도 쉼입니다. 죽음은 분명 슬프지만 제 남편이 자는 듯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진정한 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지요. 그래서 쉼 박물관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박물관이 비록 서울 도심 복잡한 곳에 있지만 잠깐 쉬듯 관람하는 만남의 장소가 됐습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쉬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삶과 계속 이어지는 것이 죽음의 철학이 아니냐는 것이다. 전시실 한편에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들을 지나는 사진이 걸려 있다. 슬프다기보다는 웃는 모습이다. 어릴 적 시골 동네에서 들었던 소리가 얼핏 들리는 듯하다. ‘북망산천 멀다더니 대문 밖이 북망일세 에헤 에헤~’ 박 관장은 “예부터 조상들은 죽은 자와 산 자들을 가급적 연결시키도록 했다. 죽은 자의 거처를 마련하고 기념하는 것도 그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왜 살고 있는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자기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졌다”고 대답한다. 박물관을 만든 계기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50년 전이다. 평소 우리의 민속품을 좋아해 서울 인사동 등 골동품 가게를 자주 찾았다. 처음에는 나막신이나 떡살, 작은 소반 같은 것을 모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소박한 상여에 부착된 여인의 목조각, 목조형물 등을 보고 우직한 오방색에 매료돼 그것을 수집했다. 보면 볼수록 옛날 서민들의 삶 등 하나하나에 특색과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계속 모으게 됐다. 결혼 후에도 상여에 부착된 여러 목조각들의 수집은 이어졌다. 남편한테 “그 빈대 나오는 것들 그만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10년쯤 지났을 때에는 남편도 오히려 협력자가 됐으며 나중에는 미술 하는 세 딸과 아들도 박 관장의 수집을 이해하고 도와줄 정도가 됐다. 그러던 중 2005년을 전후해 시어머니와 친어머니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 “죽음은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6년 10월 남편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철학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과정이자 연장이고 잠자듯 쉬는 거라는 것을 느끼게 됐지요. 또한 우리의 전통장례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북망산천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어서 다시 살 거처도 마련해 주거든요. 전통장례는 장엄하고 엄숙하지만 일종의 새로운 곳을 향하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박 관장의 안방에 상여를 배치한 것도 남편이 편히 쉬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인테리어는 박 관장이 직접 했으며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하던 막내딸이 소장품 배치를 도왔다. 개관 기념으로 소리꾼들을 불러 지게놀이 등 서민 상여 퍼포먼스를 하면서 상여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출발하게 됐다. 7년이 지난 지금은 국내 관람객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외국인도 많아졌으며 프랑스 박물관 포털사이트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지금도 전통장례문화와 관련된 물품들을 모으면서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박 관장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있기에 잠시 자랑을 하겠다고 말한다. 고인이 된 남편 남방희씨는 호남정유 계열사 중역으로 일했다. “거제에서 태어났고 남몰래 학비를 도와주는 등 불우이웃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또한 기부문화를 몸소 실천했고 가족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향 후학들에게는 덕불고(德不孤), 그러니까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했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주변에 새들이 많다. 땡그랑, 풍경소리도 들려온다. 평소 알고 지내는 소리꾼 장사익씨가 바로 윗집에 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장씨는 즉석에서 노래 한 곡을 읊어댄다. ‘잎사귀 가지 하나 놓는다/한세상 그냥 버티다 보면/덩달아 뿌리 내려 나무 될 줄 알았다/기적이 운다/꿈속까지 찾아와 서성댄다~’ 다시 장례 얘기로 돌아왔다. “예전 장례는 통곡했는데 그 이유가 한이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울음으로 한을 표출하잖아요. 물론 슬프지만 축제처럼 슬픔을 승화시켜 기왕 가시는 분에게, 잘 가시라고 하는 마음이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박물관에는 코믹하게 물구나무 놀이하는 꼭두도 있고 장난기 있는 해학적인 조각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여꾼들도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겠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예술꾼들이 조각도 만들고 조형물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강조한 부분을 다시 얘기한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부터는 우리의 전통 상여는 없어지고 온통 흰 국화로 장식한 운구차가 등장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기자가 서양화가 권옥연 화백과 함께 장례식 광경을 보면서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국장이나 국민장은 이제라도 우리 전통 장례식으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관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더니 “삶과 죽음은 공존이다. 적어도 우리나라 국장만큼은 전통장례식으로 치러야 한다. 그 운동을 펼칠 것”이라면서 뒤돌아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기옥은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옛 물건에 관심이 많았고 골동품 수집을 좋아했다. 이화여대 사학과 1회 출신이다. 결혼한 뒤 지금의 박물관 자리에 집을 꾸몄다. 1968년 동아일보에서 ‘꽃꽂이’를 테마로 집이 소개됐으며 대한민국 베스트 드레서 10위 안에 선정됐다. 1986년 ‘뿌리깊은 나무’에 ‘한국의 맛집-미더덕 찜’, 1989년 ‘행복이 가득한 집’에 ‘그림이 있는 집’ 등으로 소개됐다. 1999년 예술의전당 ‘코닝페어’를 시작으로 2002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한국의 모시작품전에 부채와 적삼 등 여러 작품을 출품했다. 2007년 박물관을 개관한 이후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빛의 작가 제임스 터렐전(2008년), 한국 보자기와 부채전(2011년), 국제 보자기포럼 특별전(2012년) 등 매년 굵직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인물을 너무 많이 배치하면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고, 너무 적게 하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져요. 그 적당한 간격을 찾아 캐릭터를 배치해야 합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만화공장’을 운영하는 만화가들은 이른바 문하생이라 부르는 만화가 지망생들을 고용해 창작 과정을 분화한다. 이야기 작가와 계약을 맺어 줄거리를 짜고, 문하생에게는 일종의 기능공 역할이 주어진다. 이때 만화가는 일종의 감독이 되는 셈이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이런 제작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홀로 창작에 매진하는 이들을 ‘작가주의 만화가’라고 불렀다. “창작의 양이 적으니 눈길을 끌자면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퇴르’(소신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는 헌사를 받은 로베르 브레송,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등 상업자본의 틀에서 벗어난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창적인 작화와 철학적 텍스트로 ‘만화가들의 만화가’로 불리는 박흥용(53) 화백은 대표적인 국내 작가주의 만화가다. 상업의 영역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 만화의 미학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는 데뷔작 ‘돌개바람’(1981년)부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995년), ‘영년’(2013년)에 이르기까지 30편 가까운 만화를 통해 30여년간 만화의 미학을 탐구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아르코미술관은 이런 박흥용을 ‘2014년 대표 작가’로 선정해 오는 8월 3일까지 전시회를 이어 간다. 만화가로선 고우영 화백의 전시 이후 두 번째다.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전에서는 펜 끝에서 흘러나온 선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문학·사회·철학적 깊이를 읽을 수 있다. 제1전시실에는 1980~199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담긴 작품들이 아카이브 형태로 놓였다. 제2전시실에선 최근작 ‘영년’의 인물 드로잉 과정부터 8분짜리 영상 작업을 볼 수 있다. 미발표작인 ‘6일 천하’도 처음 공개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품었다. 바로 그 낙원을 찾는 과정이 내 만화의 소재”라고 힘줘 말했다. 예컨대 2010년 이준익 감독이 동명 영화로 제작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조선시대 서자 출신 검객 이몽학과 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시대, 계급,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전형적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몽학이 혁명을 통해 세상을 뒤엎으려는 반면 견자는 “달은 구름과 똑같이 하늘에 떠 있어도 바람에 밀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수행에 매진한다. 이몽학이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눈다면, 견자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셈이다. 이 밖에 ‘무인도‘(1984년)나 한국전쟁 직후를 시대 배경으로 어느 마을 사람들의 피란 과정과 공동체를 되짚어 본 ‘영년’은 현실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어떤 종류나 장르의 공부를 하다 보면 나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미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재해석해 보니 내 생각을 그 위에 올려놔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작가의 만화는 한때 정부에 의해 강제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작가는 “평생 만화에 헌신한 모든 작가들을 존경한다”며 “내가 원하는 ‘낙원’과 독자들의 ‘낙원’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겠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영상] 강동원 4년 만의 복귀작 ‘군도’ “힘들고 답답했다”

    [영상] 강동원 4년 만의 복귀작 ‘군도’ “힘들고 답답했다”

    “오랜만에 연기를 하려니 호흡이 안 돌아와서 정말 힘들고 답답했다.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겨우 사람답게 뭔가 하겠구나 싶었는데 다시 힘들어졌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를 통해 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강동원이 10일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이같이 밝혔다. ‘군도’는 19세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 주던 ‘의적단’과 ‘권력가’의 대결을 그린 액션 사극. 이 작품에서 강동원은 나주지방 부호의 서자로 최고의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조윤’역을, 하정우는 억울한 사연으로 군도 무리에 합류하는 ‘돌무치’역을 맡아 열연했다. 4년 만의 복귀작으로 ‘군도’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강동원은 “윤종빈 감독과 처음부터 이야기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아 캐스팅에 응했다”며 감독에 대한 신뢰감을 내비쳤다. 이에 윤종빈 감독은 “강동원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에 꼭 한 번 (함께)작업을 하고 싶었다”며 “캐스팅 제의는 이전부터 여러 루트를 통해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고 저를 좋게 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재치있게 답했다. 이날 강동원은 “호흡이 안 돌아와서 힘들었다.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며 4년 만에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밝혔다. 한편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강동원을 비롯해 하정우, 이성민, 조진웅, 마동석, 윤지혜, 김재영, 김선균, 정만식, 윤종빈 감독이 함께 했다. 개봉은 7월 23일.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김만덕 정신’ 기리는 국제상 제정

    조선시대에 나눔 실천으로 굶주린 제주도민을 구휼한 여성 거상 김만덕(1739∼1812년)의 정신을 기리는 국제상이 제정된다. 사단법인 김만덕기념사업회와 전문직여성(BPW) 세계연맹은 세계여성을 대상으로 한 ‘김만덕 어워드’를 제정키로 했다고 9일 밝혔다. ‘김만덕 어워드’ 경제부문·봉사부문 수상자를 선정, 3년마다 열리는 BPW 세계대회나 아시아·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 5개 지역이 번갈아 개최하는 BPW 대륙별 대회서 시상하기로 했다. 양원찬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신분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엄존했던 봉건시대에 기생 출신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부를 사회에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김만덕의 정신이야말로 세계 여성들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김만덕은 1794년 제주에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산 곡식을 나눠줌으로써 도민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정조로부터 내의원에 속한 여의 가운데 으뜸인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도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는 뜻)라는 글을 지어 김만덕의 선행을 찬양했다. 제주도는 김만덕의 나눔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90년 ‘김만덕상’을 제정, 해마다 국내외 여성을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에 발버둥 친 여성 이야기] 문학에 저항 담아낸 조선의 언니들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에 발버둥 친 여성 이야기] 문학에 저항 담아낸 조선의 언니들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임유경 지음/역사의아침/248쪽/1만 4000원 쾌족, 뒷담화의 탄생/이민희 지음/푸른지식/288쪽/1만 4800원 “가만히 내 인생을 생각해 보니,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행운이었다.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 동방 문명국에 태어난 것도 다행이었다. 반면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이다.”(김금원의 ‘호동서락기’ 중) 1830년 열네 살 소녀는 그 ‘불행’에 맞섰다. ‘조신’을 강요하던 조선시대에, ‘논어’를 인용해 “증검이 행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며 노래도 부르며 돌아오는 것’을 본받고자 하니 성인도 마땅히 나에게 찬성하실 것”이라면서 부모를 설득했다. 남장을 하고 홀로 금강산 여정에 올랐다. 조선 후기 도학에 밝았던 강정일당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좌절을 겪는 남편 윤광연에게 “실제 덕이 있다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무슨 손해리오. 실제 덕이 없다면 헛된 명예가 있은들 무슨 보탬이 되리오”라며 격려했다. 정일당과 함께 문답하고 공부한 윤광연은 당대의 학자 송치규의 사문에 들어가고 명망 높은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인정받았다. 조선의 여인들이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덕으로 알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을 금기로 삼으며 나약한 존재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공고한 남성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지력을 쌓으며 존재의 흔적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 여성들의 이야기다. 임유경 대구가톨릭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당시 편지와 수필 등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학동들의 글짓기 연습 표본이 된 한 규수의 소지장(관청에 하소연하는 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몇 년 동안 추적해 복수한 모녀, 결혼한 손녀를 향한 그리움과 삶의 지혜를 담은 할머니의 편지 등 다양한 인물에게서 조선 여인들의 내면과 생활상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쾌족, 뒷담화의 탄생’은 고소설 속에 녹아든 인물을 통해 조선 여성들의 삶을 에둘러 엿본다. 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상하·남녀 관계가 불공평하게 편만해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이를 구속하려는 지배 이념의 갈등을 소설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면서 “일상을 말하고, 욕망을 갈망하며, 일탈을 꿈꾸고, 교화를 전하고자 한” 고소설에서 다면적인 시대상을 드러낸다. ‘방한림전’과 ‘김안국 이야기’에서 이상과 능력을 펼치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여성의 모습을 보고, ‘운영전’에서 신분과 생사의 벽을 뛰어넘은 대담한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한다. 익히 알려진 ‘심청전’에서는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심청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들추고, ‘장화홍련전’에서는 계모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치환해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면서 흥미롭게 풀어 간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사대’와 ‘자주’사이… 조선 지식인 지배한 중화관

    ‘사대’와 ‘자주’사이… 조선 지식인 지배한 중화관

    조선과 중화/배우성 지음/돌베개/616쪽/4만원 조선 왕조를 지탱한 사상 체계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리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성리학 못지않게 조선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세계관인 중화(中華)에 천착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을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중화는 엄연히 조선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럼에도 그저 문화의 범주에서만 이해됐던 중화는 과연 조선 지식인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과 중화’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핵심의 세계관이자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지성사로 중화를 파헤친 책으로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지난 20세기 한국사 연구에서 고착돼 왔던 중화의 이분법적 구분을 허문 게 큰 특징이다. ‘사대‘와 ‘자주’의 범주에 머문 논란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세계관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자는 시도가 신선하다. 저자는 한국 역사학의 ‘중화 오류’는 역사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20세기 초 민족주의 사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신채호의 조선 후기 인물 이종휘에 대한 평가로 도드라진다. 신채호는 이종휘를 단군과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려 했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실제는 영 딴판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종휘의 이른바 요동회복론은 오랑캐의 침략 위기로부터 중화문화의 계승자인 조선을 지키고 중화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족이 대륙에 세운 국가만을 중화로 인정하는 시각은 미미했다고 한다. 오랑캐가 세운 원나라를 중화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조선 왕이 능욕당하고 삼전도비가 세워진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당시 김수홍이 그린 지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조선팔도고금총람도’는 그 조선 지식인들의 바뀐 중화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명과 관련된 역사상 인물을 지도에 기입하면서 한족의 중화문명에 관련된 이들만 명기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 역사학이 또렷하게 구분짓는 ‘식민사관’이나 ‘민족사관’에 한정되지 않은 채 다양한 궤적을 그려나간 셈이다. 그 역사적 변수와 맥락을 따라 중화의 변화를 건져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그런 자신의 주장이 자칫 중화세계관의 본질을 옹호하는 인상을 부를까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역사적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입증하려는 게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중화세계관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그것이 그려낸 궤적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제주에 올레길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 동안 제주의 둘레만을 돌고 돌았던 당신에게 이제 제주의 속살을 밟아 보라고 말한다. 더 깊은 제주가 여기 있다.예술 따라 걷기 - 서귀포시 유토피아길추억 따라 걷기 - 제주시 두맹이 골목 자연 따라 걷기 -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예술 따라 걷기서귀포 70리 예술산책남인수의 노래 ‘서귀포 칠십리’를 아는 사람 혹은 서귀포 칠십리를 걸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서귀포 유토피아길을 걸어 본 사람은? 많다. 그러나 더 많아져야 한다.서귀포를 걸어야 하는 이유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입구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서귀포가 왜 칠십리인가?” 북쪽의 제주 시청부터 남쪽의 서귀포 시청간의 직선거리가 27.2km쯤 되는 걸 보니(70리는 약 27.5km이다), 그래서인가 했지만, 추측은 틀렸다. 1653년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칠십리길은 조선시대 새로 부임한 정의현 현감이 성읍의 현청을 출발해 서귀포구까지 초도순시를 나섰던 70리 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의 청사와 객사, 민가 등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관광 필수코스가 된 남제주군 표선면의 성읍민속마을이다. 그 옛날 현감이 걸었던 길이 칠십리건, 구십리건 민초들이야 무슨 상관이었을까 싶었는데, 또 틀렸다. 서귀포 사람들에게 서귀포칠십리는 단순한 거리 개념이 아니라 이상향과 피안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1938년에는 ‘서귀포칠십리’라는 곡(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 만들어져 서귀포가 제주를 너머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서귀포 뒤에는 서귀포칠십리축제, 서귀포칠십리 건강달리기대회, 서귀포칠십리 70경, 서귀포칠십리 감귤 등 칠십리가 꼭 따라붙는다. 아무튼 오늘 걸어야 할 길이 70리가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 서귀포 시내를 타원형으로 돌게 만드는 ‘유토피아 길’은 고작 4.7km의 워킹투어 코스다. 천혜의 자연포구와 섬, 기암들이 줄지어 선 해안절경으로 이뤄진 비경만을 쫓는 길이 아니다. 제주를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예술 풍경이 이 길에서는 더 중요한 테마다. 박물관을, 미술관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듯, 유토피아길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경고 하나. 하나하나 곱씹으며 걷다 보면 체감거리는 칠십리를 훌쩍 넘을 수도 있다.이중섭의 제주-추억유토피아길의 공식 추천 루트가 시작되는 곳은 이중섭 미술관이다. 사실 서귀포와 이중섭(1916~1956년)의 인연은 길지 않다. 1·4 후퇴 때 원산을 떠난 그의 가족이 부산을 거쳐 제주 서귀포에서 머문 시간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채 1년이 안 된다. 그러나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여러 작품이 제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주지 그리고 이중섭 공원과 거리까지 조성된 것에는 시의 노력과 미술계의 도움이 컸다. 2003년에 가나아트가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65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이중섭 전시관은 미술관으로 등록(2종)할 수 있었고, 2004년에 갤러리 현대가 ‘파란 게와 어린이’ 등 53점을 기증해 1종 미술관이 될 수 있었다. 서귀포시 중심에 위치한 이중섭 거리는 명소가 된지 오래다. 주말이면 지역 예술가들이 참가하는 목공, 도자기, 퀼트, 천연염색, 한지공예, 칠보공예, 민예품, 서화류 등을 판매하는 아트마켓(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이 열려서 더 북새통을 이룬다. 봄꽃이 만개한 이중섭 공원의 벤치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이중섭 조각상이 상대적으로 쓸쓸해 보일 정도였다. 사실 이중섭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가난하고 고독했다. 종이를 사기 어려워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은지화’ 탄생에 얽힌 그의 비화는 유명하다. 복원된 그의 서귀포 거주지는 꽤 커 보이는 초가집이지만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곳은 1평 남짓한 구석방이었다. 가난했지만 가족들이 함께였기에 그에게 서귀포는 가족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길 떠나는 가족’처럼 수레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상황이든, ‘게와 어린이’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든, 그의 작품 속 가족의 풍경은 항상 행복하다. 이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남덕)과 주고받은 애틋한 편지들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변시지의 제주-고독이중섭에 쏠린 관심에 비해 지난해 타계한 변시지(1926~2013년) 선생의 미술관 설립 계획이 무산 위기에 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외사촌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1987년에 설립해 시에 기증한 기당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일본에서 수학하고 서울로 돌아와 초창기에 정밀한 풍경화를 그렸던 변 화백의 화풍은 후학양성을 위해 1975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후 크게 달라졌다. 바닥 장판색에서 착안했다는 흙빛에 담긴 제주의 바다와 바람은 그에게 ‘폭풍의 화가’라는 별칭까지 선사했다. 초가, 소나무, 돛단배, 조랑말, 까마귀, 청년 등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작가의 심리상태가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그의 작품 2점이 살아있는 동양화가로는 최초로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전시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흥분했지만 멀리 워싱턴까지 갈 필요 없이 기당미술관에만 가도 그의 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기당미술관의 명예관장이기도 했다. 작품뿐 아니라 건물도 훌륭하다. ‘눌(땔나무 등을 쌓은 더미를 말하는 ‘가리’의 사투리)’에서 영감을 얻어 나선형으로 설계한 박물관은 자연채광이 잘 들어오고 숨은 정원까지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시 외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미술관 앞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전망도 최고인데 말이다. 그의 작품명이기도 한 ‘외로운 시간’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이왈종의 열정과 중도지난해 5월 서귀포에 문을 연 왈종미술관은 유포피아길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립이 아닌 사설미술관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왈종은 변시지와 더불어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유명하다. 전국적인 커피체인점인 드롭탑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의 그림이 새겨진 텀블러, 머그컵, 핸드폰케이스 등이 판매 중이기 때문. 민화풍의 그의 그림은 꽃과 자연을 화사하게 담고, 춘화적인 요소도 강하다. 들판에서 커플이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처럼 거침없이 묘사된 제주의 일상은 요새 ‘제주앓이’를 앓고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더 불타 오르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왈종(1945년~)이 제주를 선택했던 당시의 상황은 그리 밝지 않았다.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하다 그만두고 1990년 낙향했을 때 그의 소망은 남은 몇년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가족과 떨어진 고독한 생활을 20년 넘게 지탱해 준 것은 시와 그림이었다. 그런 그가 제주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태풍이 올 때를 꼽았단다. 변시지가 즐겨 그렸던 제주의 폭풍은 어쩌면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현재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주차장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다. 문화재보호지역이지만 미술관으로 겨우 허가를 받았다. 미술관 겸 그의 작업실, 주거지이지만 사실 그가 작품 300여 점을 기증해 설립한 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1층은 어린이 미술교육실, 2층에는 자신의 작품 90여 점은 전시했고, 3층은 그의 작업실, 옥상 황토방이 그의 잠자리다. 자신이 머물 공간이었기에 설계에만 2년이 걸릴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제주가 천국보다 좋다는 그는 여생을 제주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살 계획이란다. 현중화의 열정과 붓이왈종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글씨가 그림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왈종미술관에서 멀지 않다. 소암 현중화 선생(1907~1997년)의 서예 작품들을 전시한 소암기념관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즈음하여 2008년에 세워진 곳이다. 모든 서체에 능했던 현중화 선생은 ‘먹고 잠자고 쓰기’만 했다고 할 정도로 작품활동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특히 취중에 흘려 쓴 선생의 ‘취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하다. 서예를 전혀 몰라도, 한자를 잘 몰라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같은 서체의 같은 글자라도 쓸 때마다 모양이 다른 화첩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본에서 유학한 소암은 더 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49세에 귀국하여 여생 동안 서귀포를 떠나지 않았다. 기념관 옆에는 선생의 유택인 조범산방眺帆山房·돛단배가 바라보이는 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오른 경지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지만 무료 관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서예동호인들이 더 열광한다고 한다. 참고로 소암기념관 앞은 먼나무 가로수길이다. 제주와 보길도 등 남부의 저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먼나무는 가지가 꺾일 듯 흐드러지게 맺히는 붉은 열매로 여행자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가의 유토피아지금껏 대가들에게 헌정된 미술관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유토피아길의 진수는 길 위에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조각상, 설치 작품, 벽화들이 칠십리시공원과 서귀포시 이곳저곳에 자리잡고 있다. 2012년 진행된 마을미술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40여 점이나 되니 잠깐 한눈을 팔면 놓치고 지나칠 정도다. 조가비, 도자기, 유리, 테라코타, 아트타일, 유리자갈 등을 이용한 부조벽화 작품들은 조용한 포구마을을 야외 갤러리로 만들었다.유토피아길 덕분에 한때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서귀포 도심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중섭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인 옛 아카데미 극장도 현재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1960년대 건립된 아카데미극장은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방치된 상태였지만 조만간 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날 예정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예 서귀포행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대의 실험예술계를 이끌었던 퍼포먼스 예술가 김백기 선생도 2013년 서귀포에 자리를 잡았다. 2012년 마을미술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제주가 홍대처럼 될 것이라고 했던 어느 기자의 예언은 불과 2년 만에 (좋건, 나쁘건) 현실이 된 듯하다. 이효리 같은 슈퍼스타들도 제주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제주의 바다, 제주의 꽃, 제주의 오름과 산, 제주의 돌멩이까지, 제주의 모든 것이 예술가들에게는 영감과 위로의 대상인가 보다. 돈도 명예도 마다하고 이 작은 섬에 살기를 고집할 만큼. 특히 서귀포가 대한민국 예술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혹시 붓끝 모양을 닮았다는 섶섬의 기운 때문은 아닌지, 싱거운 생각마저 해 본다. 어떤 이유에서건 서귀포는 예술가들의 유토피아가 되고 있다.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호텔 섬오름 www.sumorum.com☞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찾아가기제주공항에서 600번 공항리무진탑승, 서귀포 경남호텔 하차. 이중섭거리에서 탐방 시작.문의 서귀포시 문화예술과 064-760-2481서귀포 유토피아길 | 서귀포 시내와 자구리해안로를 포함하는 총 4.7km의 워킹투어코스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이중섭 공원(출발)→이중섭미술관→이중섭거주지→동아리창작공원(아트하우스, 문화예술디자인시장)→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 자구리해안→소남머리→서복전시관→소암기념관 ▶프로그램 해설사와 함께하는 작가의 산책길 탐방 | 매주 토·일요일 오후 1시 출발,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 |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이중섭 문화의거리 일대 ▶통합입장권 이중섭 미술관, 기당미술관, 서복전시관, 소암기념관을 모두 입장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을 1,300원(총 600원 할인)에 판매 중이다.글·사진 손고은 기자 취재협조 제주관광공사 www.ijto.or.kr
  •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몰래 가져가 미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조선시대 문정왕후 어보는 못 돌아오는 것인가, 안 돌아오는 것인가. 3일 문화재계와 교민사회에 따르면 문정왕후 어보를 소장 중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박물관(LACMA)은 지난해 9월 프레드 골드스틴 수석 부관장이 어보의 반환 의사를 표시하며 60여년 만의 반환을 일단락짓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은 미 수사당국의 전격적인 어보 압수와 박물관 측의 법적 대응이 이어지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중종의 둘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이다. 1951년 미군이 종묘에서 불법으로 훔쳐간 40여 과의 인장 가운데서도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꼽힌다. LACMA 측은 도난품인지 모르고 2000년 경매를 통해 문정왕후 어보를 구입했다고 밝혔고, 지난해 9월 반환을 요구하며 박물관을 찾은 혜문 스님 일행에게 “조속한 시일 안에 일정과 방식 등을 (한국 정부와)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보는 지난 4월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한 때 대한제국 국새 등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수사당국인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은 “복잡한 법률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만 밝힌 상태다. 복수의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HSI는 지난해 9월 말 LACMA에 전시 중이던 문정왕후 어보를 전격 압수했다. 혜문 스님 일행이 박물관을 방문해 반환을 약속받고 나서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다. 이에 LACMA는 3만 쪽에 이르는 법리 검토서를 사법당국에 제출해 몰수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SI가 몰수 과정에서 LACMA 직원에 대한 사법 처리나 벌금형 등을 거론한 것도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는 것이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LACMA가 단단히 감정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리 검토를 마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HSI는 지난해 5월 문화재청의 수사 의뢰를 받으며 수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문화재청도 LACMA와 어보의 반환을 놓고 밀고 당기는 물밑 협상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 측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영구 임대 방식의 반환이 검토되기도 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에 약탈됐다가 2007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반환된 ‘어재연 장군기’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반환운동이 드세지면서 협상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HSI는 LACMA의 어보 구입 과정을 문제 삼으며 수사를 확대했다. LACMA에 어보를 판매한 사람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LA의 한 고미술품 수집가. 미 사법당국은 문정왕후 어보는 물론 이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현종 어보까지 압수했다.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보의 반환은 물론 향후 미국에 있는 국보·보물급 문화재의 반환 협상도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LACMA는 한국인 큐레이터를 고용할 만큼 한국 문화재에 큰 관심을 나타냈던 곳”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이 유통 경로가 불분명한 한국 문화재들을 전시실에서 치워 수장고에 감출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가정사와 공직/문소영 논설위원

    고시 3관왕이던 판사가 세도가의 사위로 ‘영입’되었다. 그는 장인이 소속한 정당과 다른 당으로 국회의원 출마도 시도했으나 장인의 반대로 좌절했다. 가족 내 존재감이 희미했다던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양육권도 박탈당했다. 이혼 2년 뒤 그는 재혼하고 국회의원도 됐다. 교육감 후보로 나선 뒤 여론조사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미국에 거주하는 딸이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우리를 버렸다’는 식의 폭로를 하자 큰 위기가 왔다.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이야기다. 고 후보는 사퇴발표인가 싶었던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딸의 폭로를 ‘정치공작’이라 주장하는 대응방식으로, 고시 3관왕의 정신세계가 4차원적임을 보여줬다. 심지어 ‘자수성가’형 인재의 이미지가 강했던 고 후보는 그 나름대로 명문가 출신임도 밝혀졌다. 아버지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 종로에서 개업의로 일했고, 외가의 한 삼촌은 대법관을 지냈다. 윤색된 이미지가 고착됐거나 의도적으로 ‘개천의 용’으로 코스프레한 거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부인을 포함해 가족들은 아버지(남편)가 선출직 공직에 나가면 반대하곤 한다. 선거기간에 폭로전으로 가족의 ‘흑역사’가 시시콜콜하게 다 드러나기도 하고, 잘못 입을 놀렸다가 세간의 뭇매를 맞기 때문이다.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개한 국민’ 운운한 사례가 그것이다. 또 공직에 나서면 유명한 아버지 탓에 ‘아무개의 아들’로 사는 것도 걱정거리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아들은 그런 걱정을 SNS에 올려 30만회 이상 조회 수를 올렸다. 선출직 공직이 아니더라도 표적수사를 하면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 우수수 쏟아지기도 한다. 최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식과 같은 사례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기 전에는 혼외자식 등과 같은 사생활은 용케 폭로전에서 비켜갔지만, 요즘은 가족이 SNS에 의견을 피력하기 때문에 의도적·비의도적으로 해를 끼친다. 공직 출마를 꿈꾼다면 깔끔한 사생활 유지와 가족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계집종에게 자식을 얻으면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 자식도 노비가 됐다. 어머니가 여종인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미암 유희춘과 같은 일부 양반은 얼자이자 노비인 딸 4명을 면천하려고 거금을 쓴 과정을 ‘미암일기’에 꼼꼼히 남겼다. 그것이 21세기에도 한국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자(녀)의 관계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고씨 부녀가 묵은 원한들을 정리하는 등 가정사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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