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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상업성 넘어선 만화, 한국을 말하다

    “인물을 너무 많이 배치하면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고, 너무 적게 하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져요. 그 적당한 간격을 찾아 캐릭터를 배치해야 합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만화공장’을 운영하는 만화가들은 이른바 문하생이라 부르는 만화가 지망생들을 고용해 창작 과정을 분화한다. 이야기 작가와 계약을 맺어 줄거리를 짜고, 문하생에게는 일종의 기능공 역할이 주어진다. 이때 만화가는 일종의 감독이 되는 셈이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이런 제작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홀로 창작에 매진하는 이들을 ‘작가주의 만화가’라고 불렀다. “창작의 양이 적으니 눈길을 끌자면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퇴르’(소신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는 헌사를 받은 로베르 브레송,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등 상업자본의 틀에서 벗어난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창적인 작화와 철학적 텍스트로 ‘만화가들의 만화가’로 불리는 박흥용(53) 화백은 대표적인 국내 작가주의 만화가다. 상업의 영역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 만화의 미학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는 데뷔작 ‘돌개바람’(1981년)부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995년), ‘영년’(2013년)에 이르기까지 30편 가까운 만화를 통해 30여년간 만화의 미학을 탐구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아르코미술관은 이런 박흥용을 ‘2014년 대표 작가’로 선정해 오는 8월 3일까지 전시회를 이어 간다. 만화가로선 고우영 화백의 전시 이후 두 번째다.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전에서는 펜 끝에서 흘러나온 선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문학·사회·철학적 깊이를 읽을 수 있다. 제1전시실에는 1980~199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담긴 작품들이 아카이브 형태로 놓였다. 제2전시실에선 최근작 ‘영년’의 인물 드로잉 과정부터 8분짜리 영상 작업을 볼 수 있다. 미발표작인 ‘6일 천하’도 처음 공개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품었다. 바로 그 낙원을 찾는 과정이 내 만화의 소재”라고 힘줘 말했다. 예컨대 2010년 이준익 감독이 동명 영화로 제작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조선시대 서자 출신 검객 이몽학과 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시대, 계급,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전형적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몽학이 혁명을 통해 세상을 뒤엎으려는 반면 견자는 “달은 구름과 똑같이 하늘에 떠 있어도 바람에 밀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수행에 매진한다. 이몽학이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눈다면, 견자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셈이다. 이 밖에 ‘무인도‘(1984년)나 한국전쟁 직후를 시대 배경으로 어느 마을 사람들의 피란 과정과 공동체를 되짚어 본 ‘영년’은 현실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어떤 종류나 장르의 공부를 하다 보면 나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미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재해석해 보니 내 생각을 그 위에 올려놔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작가의 만화는 한때 정부에 의해 강제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작가는 “평생 만화에 헌신한 모든 작가들을 존경한다”며 “내가 원하는 ‘낙원’과 독자들의 ‘낙원’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겠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사대’와 ‘자주’사이… 조선 지식인 지배한 중화관

    ‘사대’와 ‘자주’사이… 조선 지식인 지배한 중화관

    조선과 중화/배우성 지음/돌베개/616쪽/4만원 조선 왕조를 지탱한 사상 체계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리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성리학 못지않게 조선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세계관인 중화(中華)에 천착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을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중화는 엄연히 조선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럼에도 그저 문화의 범주에서만 이해됐던 중화는 과연 조선 지식인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과 중화’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핵심의 세계관이자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지성사로 중화를 파헤친 책으로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지난 20세기 한국사 연구에서 고착돼 왔던 중화의 이분법적 구분을 허문 게 큰 특징이다. ‘사대‘와 ‘자주’의 범주에 머문 논란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세계관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자는 시도가 신선하다. 저자는 한국 역사학의 ‘중화 오류’는 역사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20세기 초 민족주의 사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신채호의 조선 후기 인물 이종휘에 대한 평가로 도드라진다. 신채호는 이종휘를 단군과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려 했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실제는 영 딴판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종휘의 이른바 요동회복론은 오랑캐의 침략 위기로부터 중화문화의 계승자인 조선을 지키고 중화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족이 대륙에 세운 국가만을 중화로 인정하는 시각은 미미했다고 한다. 오랑캐가 세운 원나라를 중화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조선 왕이 능욕당하고 삼전도비가 세워진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당시 김수홍이 그린 지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조선팔도고금총람도’는 그 조선 지식인들의 바뀐 중화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명과 관련된 역사상 인물을 지도에 기입하면서 한족의 중화문명에 관련된 이들만 명기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 역사학이 또렷하게 구분짓는 ‘식민사관’이나 ‘민족사관’에 한정되지 않은 채 다양한 궤적을 그려나간 셈이다. 그 역사적 변수와 맥락을 따라 중화의 변화를 건져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그런 자신의 주장이 자칫 중화세계관의 본질을 옹호하는 인상을 부를까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역사적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입증하려는 게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중화세계관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그것이 그려낸 궤적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에 발버둥 친 여성 이야기] 문학에 저항 담아낸 조선의 언니들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에 발버둥 친 여성 이야기] 문학에 저항 담아낸 조선의 언니들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임유경 지음/역사의아침/248쪽/1만 4000원 쾌족, 뒷담화의 탄생/이민희 지음/푸른지식/288쪽/1만 4800원 “가만히 내 인생을 생각해 보니,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행운이었다.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 동방 문명국에 태어난 것도 다행이었다. 반면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이다.”(김금원의 ‘호동서락기’ 중) 1830년 열네 살 소녀는 그 ‘불행’에 맞섰다. ‘조신’을 강요하던 조선시대에, ‘논어’를 인용해 “증검이 행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며 노래도 부르며 돌아오는 것’을 본받고자 하니 성인도 마땅히 나에게 찬성하실 것”이라면서 부모를 설득했다. 남장을 하고 홀로 금강산 여정에 올랐다. 조선 후기 도학에 밝았던 강정일당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좌절을 겪는 남편 윤광연에게 “실제 덕이 있다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무슨 손해리오. 실제 덕이 없다면 헛된 명예가 있은들 무슨 보탬이 되리오”라며 격려했다. 정일당과 함께 문답하고 공부한 윤광연은 당대의 학자 송치규의 사문에 들어가고 명망 높은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인정받았다. 조선의 여인들이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덕으로 알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을 금기로 삼으며 나약한 존재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공고한 남성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지력을 쌓으며 존재의 흔적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 여성들의 이야기다. 임유경 대구가톨릭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당시 편지와 수필 등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학동들의 글짓기 연습 표본이 된 한 규수의 소지장(관청에 하소연하는 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몇 년 동안 추적해 복수한 모녀, 결혼한 손녀를 향한 그리움과 삶의 지혜를 담은 할머니의 편지 등 다양한 인물에게서 조선 여인들의 내면과 생활상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쾌족, 뒷담화의 탄생’은 고소설 속에 녹아든 인물을 통해 조선 여성들의 삶을 에둘러 엿본다. 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상하·남녀 관계가 불공평하게 편만해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이를 구속하려는 지배 이념의 갈등을 소설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면서 “일상을 말하고, 욕망을 갈망하며, 일탈을 꿈꾸고, 교화를 전하고자 한” 고소설에서 다면적인 시대상을 드러낸다. ‘방한림전’과 ‘김안국 이야기’에서 이상과 능력을 펼치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여성의 모습을 보고, ‘운영전’에서 신분과 생사의 벽을 뛰어넘은 대담한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한다. 익히 알려진 ‘심청전’에서는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심청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들추고, ‘장화홍련전’에서는 계모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치환해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면서 흥미롭게 풀어 간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국내여행 | 제주를 걷는 새로운 방법①예술 따라 걷기-서귀포시 유토피아길

    제주에 올레길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 동안 제주의 둘레만을 돌고 돌았던 당신에게 이제 제주의 속살을 밟아 보라고 말한다. 더 깊은 제주가 여기 있다.예술 따라 걷기 - 서귀포시 유토피아길추억 따라 걷기 - 제주시 두맹이 골목 자연 따라 걷기 -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예술 따라 걷기서귀포 70리 예술산책남인수의 노래 ‘서귀포 칠십리’를 아는 사람 혹은 서귀포 칠십리를 걸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서귀포 유토피아길을 걸어 본 사람은? 많다. 그러나 더 많아져야 한다.서귀포를 걸어야 하는 이유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입구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서귀포가 왜 칠십리인가?” 북쪽의 제주 시청부터 남쪽의 서귀포 시청간의 직선거리가 27.2km쯤 되는 걸 보니(70리는 약 27.5km이다), 그래서인가 했지만, 추측은 틀렸다. 1653년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칠십리길은 조선시대 새로 부임한 정의현 현감이 성읍의 현청을 출발해 서귀포구까지 초도순시를 나섰던 70리 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의 청사와 객사, 민가 등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관광 필수코스가 된 남제주군 표선면의 성읍민속마을이다. 그 옛날 현감이 걸었던 길이 칠십리건, 구십리건 민초들이야 무슨 상관이었을까 싶었는데, 또 틀렸다. 서귀포 사람들에게 서귀포칠십리는 단순한 거리 개념이 아니라 이상향과 피안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1938년에는 ‘서귀포칠십리’라는 곡(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 만들어져 서귀포가 제주를 너머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서귀포 뒤에는 서귀포칠십리축제, 서귀포칠십리 건강달리기대회, 서귀포칠십리 70경, 서귀포칠십리 감귤 등 칠십리가 꼭 따라붙는다. 아무튼 오늘 걸어야 할 길이 70리가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 서귀포 시내를 타원형으로 돌게 만드는 ‘유토피아 길’은 고작 4.7km의 워킹투어 코스다. 천혜의 자연포구와 섬, 기암들이 줄지어 선 해안절경으로 이뤄진 비경만을 쫓는 길이 아니다. 제주를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예술 풍경이 이 길에서는 더 중요한 테마다. 박물관을, 미술관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듯, 유토피아길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경고 하나. 하나하나 곱씹으며 걷다 보면 체감거리는 칠십리를 훌쩍 넘을 수도 있다.이중섭의 제주-추억유토피아길의 공식 추천 루트가 시작되는 곳은 이중섭 미술관이다. 사실 서귀포와 이중섭(1916~1956년)의 인연은 길지 않다. 1·4 후퇴 때 원산을 떠난 그의 가족이 부산을 거쳐 제주 서귀포에서 머문 시간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채 1년이 안 된다. 그러나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여러 작품이 제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주지 그리고 이중섭 공원과 거리까지 조성된 것에는 시의 노력과 미술계의 도움이 컸다. 2003년에 가나아트가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65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이중섭 전시관은 미술관으로 등록(2종)할 수 있었고, 2004년에 갤러리 현대가 ‘파란 게와 어린이’ 등 53점을 기증해 1종 미술관이 될 수 있었다. 서귀포시 중심에 위치한 이중섭 거리는 명소가 된지 오래다. 주말이면 지역 예술가들이 참가하는 목공, 도자기, 퀼트, 천연염색, 한지공예, 칠보공예, 민예품, 서화류 등을 판매하는 아트마켓(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이 열려서 더 북새통을 이룬다. 봄꽃이 만개한 이중섭 공원의 벤치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이중섭 조각상이 상대적으로 쓸쓸해 보일 정도였다. 사실 이중섭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가난하고 고독했다. 종이를 사기 어려워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은지화’ 탄생에 얽힌 그의 비화는 유명하다. 복원된 그의 서귀포 거주지는 꽤 커 보이는 초가집이지만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곳은 1평 남짓한 구석방이었다. 가난했지만 가족들이 함께였기에 그에게 서귀포는 가족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길 떠나는 가족’처럼 수레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상황이든, ‘게와 어린이’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든, 그의 작품 속 가족의 풍경은 항상 행복하다. 이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남덕)과 주고받은 애틋한 편지들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변시지의 제주-고독이중섭에 쏠린 관심에 비해 지난해 타계한 변시지(1926~2013년) 선생의 미술관 설립 계획이 무산 위기에 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외사촌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1987년에 설립해 시에 기증한 기당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일본에서 수학하고 서울로 돌아와 초창기에 정밀한 풍경화를 그렸던 변 화백의 화풍은 후학양성을 위해 1975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후 크게 달라졌다. 바닥 장판색에서 착안했다는 흙빛에 담긴 제주의 바다와 바람은 그에게 ‘폭풍의 화가’라는 별칭까지 선사했다. 초가, 소나무, 돛단배, 조랑말, 까마귀, 청년 등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작가의 심리상태가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그의 작품 2점이 살아있는 동양화가로는 최초로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전시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흥분했지만 멀리 워싱턴까지 갈 필요 없이 기당미술관에만 가도 그의 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기당미술관의 명예관장이기도 했다. 작품뿐 아니라 건물도 훌륭하다. ‘눌(땔나무 등을 쌓은 더미를 말하는 ‘가리’의 사투리)’에서 영감을 얻어 나선형으로 설계한 박물관은 자연채광이 잘 들어오고 숨은 정원까지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시 외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미술관 앞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전망도 최고인데 말이다. 그의 작품명이기도 한 ‘외로운 시간’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이왈종의 열정과 중도지난해 5월 서귀포에 문을 연 왈종미술관은 유포피아길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립이 아닌 사설미술관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왈종은 변시지와 더불어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유명하다. 전국적인 커피체인점인 드롭탑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의 그림이 새겨진 텀블러, 머그컵, 핸드폰케이스 등이 판매 중이기 때문. 민화풍의 그의 그림은 꽃과 자연을 화사하게 담고, 춘화적인 요소도 강하다. 들판에서 커플이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처럼 거침없이 묘사된 제주의 일상은 요새 ‘제주앓이’를 앓고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더 불타 오르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왈종(1945년~)이 제주를 선택했던 당시의 상황은 그리 밝지 않았다.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하다 그만두고 1990년 낙향했을 때 그의 소망은 남은 몇년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가족과 떨어진 고독한 생활을 20년 넘게 지탱해 준 것은 시와 그림이었다. 그런 그가 제주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태풍이 올 때를 꼽았단다. 변시지가 즐겨 그렸던 제주의 폭풍은 어쩌면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현재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주차장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다. 문화재보호지역이지만 미술관으로 겨우 허가를 받았다. 미술관 겸 그의 작업실, 주거지이지만 사실 그가 작품 300여 점을 기증해 설립한 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1층은 어린이 미술교육실, 2층에는 자신의 작품 90여 점은 전시했고, 3층은 그의 작업실, 옥상 황토방이 그의 잠자리다. 자신이 머물 공간이었기에 설계에만 2년이 걸릴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제주가 천국보다 좋다는 그는 여생을 제주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살 계획이란다. 현중화의 열정과 붓이왈종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글씨가 그림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왈종미술관에서 멀지 않다. 소암 현중화 선생(1907~1997년)의 서예 작품들을 전시한 소암기념관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즈음하여 2008년에 세워진 곳이다. 모든 서체에 능했던 현중화 선생은 ‘먹고 잠자고 쓰기’만 했다고 할 정도로 작품활동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특히 취중에 흘려 쓴 선생의 ‘취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하다. 서예를 전혀 몰라도, 한자를 잘 몰라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같은 서체의 같은 글자라도 쓸 때마다 모양이 다른 화첩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본에서 유학한 소암은 더 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49세에 귀국하여 여생 동안 서귀포를 떠나지 않았다. 기념관 옆에는 선생의 유택인 조범산방眺帆山房·돛단배가 바라보이는 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오른 경지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지만 무료 관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서예동호인들이 더 열광한다고 한다. 참고로 소암기념관 앞은 먼나무 가로수길이다. 제주와 보길도 등 남부의 저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먼나무는 가지가 꺾일 듯 흐드러지게 맺히는 붉은 열매로 여행자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가의 유토피아지금껏 대가들에게 헌정된 미술관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유토피아길의 진수는 길 위에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조각상, 설치 작품, 벽화들이 칠십리시공원과 서귀포시 이곳저곳에 자리잡고 있다. 2012년 진행된 마을미술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40여 점이나 되니 잠깐 한눈을 팔면 놓치고 지나칠 정도다. 조가비, 도자기, 유리, 테라코타, 아트타일, 유리자갈 등을 이용한 부조벽화 작품들은 조용한 포구마을을 야외 갤러리로 만들었다.유토피아길 덕분에 한때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서귀포 도심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중섭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인 옛 아카데미 극장도 현재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1960년대 건립된 아카데미극장은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방치된 상태였지만 조만간 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날 예정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예 서귀포행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대의 실험예술계를 이끌었던 퍼포먼스 예술가 김백기 선생도 2013년 서귀포에 자리를 잡았다. 2012년 마을미술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제주가 홍대처럼 될 것이라고 했던 어느 기자의 예언은 불과 2년 만에 (좋건, 나쁘건) 현실이 된 듯하다. 이효리 같은 슈퍼스타들도 제주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제주의 바다, 제주의 꽃, 제주의 오름과 산, 제주의 돌멩이까지, 제주의 모든 것이 예술가들에게는 영감과 위로의 대상인가 보다. 돈도 명예도 마다하고 이 작은 섬에 살기를 고집할 만큼. 특히 서귀포가 대한민국 예술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혹시 붓끝 모양을 닮았다는 섶섬의 기운 때문은 아닌지, 싱거운 생각마저 해 본다. 어떤 이유에서건 서귀포는 예술가들의 유토피아가 되고 있다.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호텔 섬오름 www.sumorum.com☞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찾아가기제주공항에서 600번 공항리무진탑승, 서귀포 경남호텔 하차. 이중섭거리에서 탐방 시작.문의 서귀포시 문화예술과 064-760-2481서귀포 유토피아길 | 서귀포 시내와 자구리해안로를 포함하는 총 4.7km의 워킹투어코스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이중섭 공원(출발)→이중섭미술관→이중섭거주지→동아리창작공원(아트하우스, 문화예술디자인시장)→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 자구리해안→소남머리→서복전시관→소암기념관 ▶프로그램 해설사와 함께하는 작가의 산책길 탐방 | 매주 토·일요일 오후 1시 출발,서귀포문화예술디자인시장 |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이중섭 문화의거리 일대 ▶통합입장권 이중섭 미술관, 기당미술관, 서복전시관, 소암기념관을 모두 입장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을 1,300원(총 600원 할인)에 판매 중이다.글·사진 손고은 기자 취재협조 제주관광공사 www.ijto.or.kr
  •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꽁꽁 숨어버린 문정왕후 어보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몰래 가져가 미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조선시대 문정왕후 어보는 못 돌아오는 것인가, 안 돌아오는 것인가. 3일 문화재계와 교민사회에 따르면 문정왕후 어보를 소장 중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박물관(LACMA)은 지난해 9월 프레드 골드스틴 수석 부관장이 어보의 반환 의사를 표시하며 60여년 만의 반환을 일단락짓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은 미 수사당국의 전격적인 어보 압수와 박물관 측의 법적 대응이 이어지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중종의 둘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이다. 1951년 미군이 종묘에서 불법으로 훔쳐간 40여 과의 인장 가운데서도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꼽힌다. LACMA 측은 도난품인지 모르고 2000년 경매를 통해 문정왕후 어보를 구입했다고 밝혔고, 지난해 9월 반환을 요구하며 박물관을 찾은 혜문 스님 일행에게 “조속한 시일 안에 일정과 방식 등을 (한국 정부와)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보는 지난 4월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방한 때 대한제국 국새 등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수사당국인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은 “복잡한 법률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만 밝힌 상태다. 복수의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HSI는 지난해 9월 말 LACMA에 전시 중이던 문정왕후 어보를 전격 압수했다. 혜문 스님 일행이 박물관을 방문해 반환을 약속받고 나서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다. 이에 LACMA는 3만 쪽에 이르는 법리 검토서를 사법당국에 제출해 몰수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SI가 몰수 과정에서 LACMA 직원에 대한 사법 처리나 벌금형 등을 거론한 것도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는 것이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LACMA가 단단히 감정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리 검토를 마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HSI는 지난해 5월 문화재청의 수사 의뢰를 받으며 수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문화재청도 LACMA와 어보의 반환을 놓고 밀고 당기는 물밑 협상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 측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영구 임대 방식의 반환이 검토되기도 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에 약탈됐다가 2007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반환된 ‘어재연 장군기’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반환운동이 드세지면서 협상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HSI는 LACMA의 어보 구입 과정을 문제 삼으며 수사를 확대했다. LACMA에 어보를 판매한 사람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LA의 한 고미술품 수집가. 미 사법당국은 문정왕후 어보는 물론 이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현종 어보까지 압수했다.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보의 반환은 물론 향후 미국에 있는 국보·보물급 문화재의 반환 협상도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LACMA는 한국인 큐레이터를 고용할 만큼 한국 문화재에 큰 관심을 나타냈던 곳”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이 유통 경로가 불분명한 한국 문화재들을 전시실에서 치워 수장고에 감출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가정사와 공직/문소영 논설위원

    고시 3관왕이던 판사가 세도가의 사위로 ‘영입’되었다. 그는 장인이 소속한 정당과 다른 당으로 국회의원 출마도 시도했으나 장인의 반대로 좌절했다. 가족 내 존재감이 희미했다던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양육권도 박탈당했다. 이혼 2년 뒤 그는 재혼하고 국회의원도 됐다. 교육감 후보로 나선 뒤 여론조사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미국에 거주하는 딸이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우리를 버렸다’는 식의 폭로를 하자 큰 위기가 왔다.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이야기다. 고 후보는 사퇴발표인가 싶었던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딸의 폭로를 ‘정치공작’이라 주장하는 대응방식으로, 고시 3관왕의 정신세계가 4차원적임을 보여줬다. 심지어 ‘자수성가’형 인재의 이미지가 강했던 고 후보는 그 나름대로 명문가 출신임도 밝혀졌다. 아버지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 종로에서 개업의로 일했고, 외가의 한 삼촌은 대법관을 지냈다. 윤색된 이미지가 고착됐거나 의도적으로 ‘개천의 용’으로 코스프레한 거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부인을 포함해 가족들은 아버지(남편)가 선출직 공직에 나가면 반대하곤 한다. 선거기간에 폭로전으로 가족의 ‘흑역사’가 시시콜콜하게 다 드러나기도 하고, 잘못 입을 놀렸다가 세간의 뭇매를 맞기 때문이다.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개한 국민’ 운운한 사례가 그것이다. 또 공직에 나서면 유명한 아버지 탓에 ‘아무개의 아들’로 사는 것도 걱정거리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아들은 그런 걱정을 SNS에 올려 30만회 이상 조회 수를 올렸다. 선출직 공직이 아니더라도 표적수사를 하면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 우수수 쏟아지기도 한다. 최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식과 같은 사례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기 전에는 혼외자식 등과 같은 사생활은 용케 폭로전에서 비켜갔지만, 요즘은 가족이 SNS에 의견을 피력하기 때문에 의도적·비의도적으로 해를 끼친다. 공직 출마를 꿈꾼다면 깔끔한 사생활 유지와 가족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계집종에게 자식을 얻으면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 자식도 노비가 됐다. 어머니가 여종인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미암 유희춘과 같은 일부 양반은 얼자이자 노비인 딸 4명을 면천하려고 거금을 쓴 과정을 ‘미암일기’에 꼼꼼히 남겼다. 그것이 21세기에도 한국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자(녀)의 관계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고씨 부녀가 묵은 원한들을 정리하는 등 가정사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조선시대 도성 축조에 얽힌 두 가지 설화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얼개인 도성을 짓는 축조도감을 1395년 설치했다. 삼봉 정도전이 성 쌓을 자리를 정했는데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고, 두 번째는 성리학과 풍수학의 정면 대결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 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雪)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얘기다.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인 서울의 유래는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정설로 돼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에서 보듯 서울을 ‘으뜸가는 선’인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풀이다. 입으로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는 희극적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은 여전히 경기도 경성부였다. 미 군정청은 1946년 ‘서울은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 자유독립시가 된다’라고 발표했다. 영어 원문에는 ‘Seoul established Independent City’(서울독립시의 설치)라고 기록됐다. 하지만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 한국인 직원이 서울독립시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서울특별시’라고 고쳐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의 한판 대결이다. 두 사람은 경복궁 명당이 앉을 자리를 정해 줄 주산(主山)을 백악(북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에서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수용하지 않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는 설화를 전했다. 무학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200년 후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뜻한다.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면서 주산은 백악으로 결정됐다. 무학은 굴하지 않고 도성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선바위를 왕성 안에 집어넣어 불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또다시 삼봉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났다. 2전 2패를 당한 무학은 “불교가 망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얄궂은 운명인지 스님의 형상을 닮은 선바위 옆에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느라 쫓겨난 국사당이 자리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500년이 지나고 나서 한자리에서 해후한 셈이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이 한양도성 건설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은 물론 관아와 시장의 터를 잡았고 도성 성곽의 윤곽도 결정했다. 서울을 5부(동·서·남·북·중부), 52개 방으로 나누고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하는 일도 모두 그의 생각대로 였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교 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신라 천 년과 고려 오백 년을 풍미한 불교와 풍수도참설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양도성’ 명명 4년… 안내판에 ‘서울성곽’ 한양도성이란 무엇인가.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한성부, 한성, 한양, 서울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한양도성이 곧 조선이었다. 더불어 수도, 수선, 도읍, 도성, 왕성, 황성, 궁성, 경조(京兆), 경도, 장안, 사대문 안의 통칭이기도 하다. 서울을 나타내는 모든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이고 권위 있는 명칭이었다.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영국 런던이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했다. 규모로 보아도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서울을 둘러싼 성곽이 가장 크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우리는 ‘한양도성=서울을 에워싼 18.672㎞의 성곽’이라고 범위를 좁혀 해석하고 있다. 내용물은 다 빼고 도성을 둘러싼 성곽만 내세우는 축소지향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 내내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부 전체를 지칭하는 당당한 국가권력의 표상이었다. 도성 밖 10리를 나타내는 성저십리(城底十里)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사대문 안과 같은 권역을 나타내지만, 의미는 훨씬 공식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성곽은 유일무이의 대도시인 한양도성 안을 관리, 운영할 목적에서 세워진 상징 벽이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인 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의문(서소문)~돈의문~창의문(자하문)~숙정문~혜화문은 한양도성의 관문이었다. 상경(上京)과 낙향(落鄕)이 구분되는 시대의 경계선이었다. 궁궐을 에워싼 백악~낙타산(낙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도성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상징이었다. 외적의 침입과 방비, 농성을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탕춘대성 등 산성을 따로 외곽에 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울성곽이라는 용어를 쓰려면 ‘서울성곽=조선시대의 옛 서울인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개발연대 몰지각한 권력자와 도시행정가들이 한양도성에서 성곽만 따로 떼 ‘서울성곽’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도성 안 문화재와 유물은 마구잡이로 깔아뭉개면서 일제가 조선 정체성 지우기의 하나로 헐어버린 성곽은 잇는다는 앞뒤 맞지 않은 복원계획이 화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구자춘 서울시장이 1975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계획’을 세웠고,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한양도성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성곽이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박한 역사인식과 자가당착이 빚은 비극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문화재위원회가 2011년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의 명칭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눈이 어두워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 성곽’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고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어정쩡하게 명명하는 과욕을 부려 또 다른 오해와 시비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서울성곽이라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도성을 둘러싼 성곽과 8개의 대·소문이 한 몸이란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국보 1호, 보물 1호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들 문이 한양도성의 출입문이라는 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곽을 상실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왔고, 출입이 통제된 숙정문과 차량통행에 방해된다며 철거해 버린 돈의문을 아예 보지 못한 탓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고 정식 등재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송인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유산가치와 진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성곽의 영어표기가 ‘Seoul Fortress’인데 반해 한양도성은 문화유산 등재 때 ‘Seoul City Wall’이라고 표기됐다”면서 “Fortress가 방어 요새로서의 역할만을 제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City Wall은 역사도시의 도시성곽으로서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양도성을 둘러싼 전반적인 용어와 개념 정리를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이라고 명칭을 바꾼 지 4년째를 맞지만 성곽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여전히 서울성곽이라고 표기돼 있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용어나 명칭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식민시기 서울의 조상 산인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엉뚱하게 이름 붙임으로써 정체성이 훼손된 것처럼 용어의 변질은 의미의 변질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을 헛갈리고 있다. 묵은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안내판부터 제때 바꿨어야 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자치구는 서울성곽이라고 우기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씨줄날줄] 방화광(狂)과 분노사회/서동철 논설위원

    “불을 확 싸질러 버리고 싶다”는 표현에서는 극도의 복수심이 읽힌다.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상대가 가진 것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상대가 가진 것이 활활 타오르다 폭삭 주저앉는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에 더욱 방점이 찍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병적 심리가 현대 사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펼쳐도 수많은 방화(放火)의 사례가 등장한다. 인명 피해가 수반된 방화는 참형이나 교형에 처해진 사례가 적지 않았고, 특히 궁궐의 화재는 실화라 하더라도 극형이 논의되곤 했다. 중국 명나라 기본 법전으로 조선왕조가 준용한 ‘대명률’(大明律)에 그렇게 명시돼 있는 까닭이다. 조선시대에도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방화를 저지른 모습이 보인다. 단종 2년(1452)에는 의금부 문서고에 불이 난 사건에 현상(懸賞)하여 범인을 수배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공조의 담장 3곳에 불을 지른 자에 치죄를 청하기도 했다. 인조 23년(1645)에는 순천부의 별시 무과 초시에 낙방한 사람들이 시험장에 난입해 불을 지르자 죄를 묻겠다며 보고서를 올린 기록도 남아 있다. 특정인에게 원한을 갖거나, 재물을 노린 방화로 사람이 죽거나 다친 사례도 보인다. 그런데 누가 죽어도 좋다는 식의 ‘묻지마 방화’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찾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른바 다중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방화의 이미지는 1930년 작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에서부터 극도의 비정상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밝게 빛나는 불꽃이라는 광염(光焰)을 미쳐 날뛰는 불꽃이라는 광염(狂炎)으로 비틀었으니 작품의 분위기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병리 현상을 자극하는 원인 물질로 불의 존재를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직설적으로 소개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방화를 저지르는 행위를 충동조절장애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어느 사회에도 충동조절장애를 앓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멀게는 대구지하철역과 숭례문 방화, 가까이는 도곡역 방화와 장성 노인요양병원의 방화 의심 사건에서 보듯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은 유독 심각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절차를 거쳐서는 풀 길이 없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진단이 그럴듯하다. 지금이 왕조 시대보다 더한 분노 사회라는 전제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노 게이지’ 눈금이 치솟아 있는 것은 현실이다.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또한 정치적으로 접근한다면 치유는 어려울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제주 토종 흑우 쉽게 맛보나

    제주 토종 흑우 쉽게 맛보나

    ‘임금님 진상품이었던 제주 흑우를 누구나 맛볼 수 있을까?’ 제주도가 제주대와 손잡고 천연기념물 제546호로 제주섬의 토종 자원인 흑우의 개체 수 늘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를 위해 양 기관은 30일 협약을 맺어 제주도가 씨를 생산하는 제주 흑우(씨수소)의 정액과 수정란을 생산하는 소(공란우)의 난소 채취에 협조하고 제주대는 제주 흑우 사육 농가에 체외 수정란을 무상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제주 흑우 대량 증식 사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현재 제주에서 사육 중인 흑우는 89농가의 1597마리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혈통이 확인된 순수 제주 흑우는 36농가 604마리 정도로 개체 수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털빛이 검고 육질이 뛰어난 흑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농가들이 사육을 기피함에 따라 1980년대 들어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또 제주 흑우는 개체의 특성상 초기 성장이 느려 그동안 사육 농가에 큰 소득원이 되지 못했다. 제주 흑우는 현재 혈통 보존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의 반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국립축산과학원이 제주 흑우 고기의 지방산 성분을 분석한 결과 올레인산, 리놀산, 불포화지방산 함량은 일반 한우보다 많고 포화지방산은 낮아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주 흑우는 지난해 10월 ‘맛의 방주’에도 등재됐다. 맛의 방주는 이탈리아 브라에 본부를 두고 150여 개국 10만여명의 회원과 1300개 지부를 두고 활동하는 국제비영리기구 ‘슬로푸드 국제본부’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각 지역의 토종 음식과 종자를 찾아 관심과 소비를 이끌어내며 사라져 가는 종 보호, 종 다양성 유지를 위한 사업을 전개하는 기구다. 맛의 방주는 슬로푸드 국제본부가 20여일간 공개 검증 과정을 거쳐 맛의 방주 목록에 공식 등재하게 돼 있다. 조덕준 도 축정과장은 “지난해 제주 흑우 14마리의 수정란을 이식한 결과 7마리가 임신하는 등 50% 성공률을 기록해 대량 증식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앞으로 증식 사업을 통해 개체 수가 크게 늘어나면 흑우의 뛰어난 고기 맛을 손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씨줄날줄] 사고현장의 의인들/박찬구 논설위원

    조선시대의 의인(義人)이라 하면 대개 권력의 횡포 앞에서 절개를 지키거나 목숨 바쳐 외침(外侵)에 맞선 분들이다. 인의예지를 앎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면암 최익현, 매천 황현…. 일일이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다. 수백년이 지난 후손의 사회에서도 의인은 종종 등장한다. 대형참사 현장에서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난세와 혼란의 시기에 헌신과 희생으로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오늘로 꼭 45일째를 맞는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도 생사를 넘나들며 친구와 학생, 승객을 살려낸 의인들이 있다. 살신성인의, 우리 마음속 영웅들이다.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수십명이 목숨을 잃은 지난 28일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재 당시 간호조무사 김귀남씨는 발화지점인 별관 2층 다용도실로 달려가 불을 끄려다 참변을 당했다. 고인은 바깥으로 피하지 않고 환자들을 살리려 마지막 순간까지 나이팅게일 선서를 실천하며 소임을 다했다. 같은 현장에서 소방관 홍모(41)씨는 이 병원에 입원한 부친의 생사도 모른 채 다른 환자들을 구조하다 끝내 비통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는 ‘아버지를 먼저 찾을 겨를이 없었다’며 고개를 떨궜다고 한다. 같은 날 서울지하철 3호선 도곡역 방화사건에서는 역무원 권순중(46) 대리가 70대 방화범의 3차례 방화시도를 몸으로 막아냈다. 순식간에 불길이 가슴 높이로 치솟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일반 승객들의 협조도 발 빠른 초동 대처에 도움이 됐다. 자칫 제2의 대구지하철 참사가 재연될 뻔한 위기상황을 권 대리와 시민들이 하나가 돼 모면할 수 있었다. 자본의 탐욕과 가치의 일탈, 허술한 안전망은 우리 공동체를 이미 위험사회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탈선과 붕괴는 일상의 위협으로 와 닿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전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기본 역할과 존재 이유를 묻고 따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주는 건 바로 우리 이웃인 갑남을녀의 의로운 행동인지 모른다. 의사자 지정에서 나아가 이들을 기억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는 건 당연한 책무이자 도리라 할 수 있다. 때마침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잊어선 안 될 5인의 세월호 의인들’이라는 글이 퍼지고 있다.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숨진 승무원 박지영씨의 희생정신을 기려 모교인 수원과학대는 재난안전학부를 신설하고 ‘박지영홀’로 명명한 강의실을 꾸린다고 한다. 학생들이 숭고한 의인의 정신을 이어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찬구 논설위원 ckpark@seoul.co.kr
  • 도난 추정 불교 미술품 경매 나와… 수사 착수

    도난 추정 불교 미술품 경매 나와… 수사 착수

    도난품으로 추정되는 불교 고미술품들이 경매시장에 나와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29일 대한불교 조계종은 고미술품 경매사인 마이아트옥션이 다음달 2일 ‘조선시대 불교미술 특별 경매’에 출품한 18점 중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시리즈 2점 등 모두 4점을 도난품이라며 문화재청과 경찰에 신고했다. 조계종 측은 마이아트옥션이 추정가 5억∼6억원에 경매에 출품한 ‘영산회상도’가 2000년 5월 경북 청도 용천사 대웅전 내에 있다가 도난당한 불화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普薩坐像·추정가 1억∼2억원)은 2004년 충북 제천 정방사에서 도난당한 충북 유형문화재 제206호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 또 다른 ‘영산회상도’는 1993년 4월 강원 삼척 영은사 대웅전에서 없어진 작품과, ‘신중도’(神衆圖)는 2000년 9월 경북 청송 대전사 보광전에서 없어진 작품과 각각 같은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조계종과 문화재청,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 등은 이날 서울 종로구 관훈동 마이아트옥션 본사를 찾아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마이아트옥션 측은 “경매팀 관계자들이 통상 출품 전 도난품 여부를 확인하는데, 도난된 불화들과는 크기나 특징이 조금씩 상이했다”면서 “해당 작품을 제외한 14점을 예정대로 경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한국사 수정심의위원들 좌·우 색깔 없었다

    교육부가 지난해 11월 구성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수정심의위원회 위원 중에는 눈에 띄는 진보나 보수 측 인사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교육부 수정심의위원회 명단에 따르면 위원회는 위원장 1명, 심의위원 8명, 연구위원 6명 등 모두 15명으로 구성됐다. 이 중 9명이 교수 또는 박사급 전문가이고 6명은 고등학교 교사, 지방교육청 연구원의 연구사, 학부모 단체 관계자였다. 위원장을 맡은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조선후기 대일정책의 성격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일 관계 연구분야의 권위자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개발한 공동연구진에 참여했으며, 지난 22일 교육부 수정명령에 대해 교과서 집필진이 제기한 소송에서 교육부 측 증인으로 나와 수정심의위원회 활동 내용을 증언하기도 했다. 심의위원 중 근·현대사 전공자는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김점숙 편사연구사다. 김광재 연구사는 ‘한국광복군의 활동 연구’, 김점숙 연구사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초기 물자수급정책’이란 논문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원인 이들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 강의’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고대사 전공자로 정운용 고려대 교수와 중세사 전공자로 신명호 부경대 교수가 참여했다. 연구위원에는 이정수 동서대 교수와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팀장이 포함됐다. 조선시대 전공자인 이훈상 동아대 교수는 우파 성향인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에 추천의 글을 쓴 적은 있으나 뉴라이트 계열 학자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또 김봉진 제주국제대 교수는 현재 재직 중인 학과가 관광경영학과이지만 서양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기본을 지키자] 책임 소재 밝히는 ‘정책실명제’… 인력·투자 없어 과부하 우려

    고구려 도읍이었던 평양성에는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공사 구간별 책임자 이름을 돌에 새겨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 때 건설한 수원 화성에도 공사 책임자 실명제를 시행했음을 보여 주는 유적이 남아 있다. 실명제를 통해 부실 공사를 예방했고 안전사고가 날 경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정책실명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공직사회의 투명성은 극도로 위축됐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격 실시한 금융실명제는 시대 변화를 상징하는 조치였다. 1998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서명만 있었기 때문에 실명을 확인하기가 힘들었지만 이때부터는 내부 결재 시스템에 실명을 공개하도록 했다. 지난해 정부는 일정 기준 이상의 정부 사업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해 국민에게 모두 공개하도록 했다. 중앙행정기관과 광역자치단체는 지난해 말까지 홈페이지에 정책실명제를 갖췄고 올해 초에는 기초자치단체까지 완비했다. 기관별 중점 관리 대상 사업 선정과 책임관 지정도 마쳤다. 중점 관리 대상 사업 선정은 외부 위원을 포함한 심의위원회에서 운영하도록 했다. 서울시는 중앙정부보다 먼저 자체적인 정책실명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2년 ‘누드프로젝트’ 발표를 통해 회의록과 주요 결재 문서를 단계적으로 모두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정책실명제는 국민을 위해 진행하는 정책에 대해 공무원이 국민의 공복으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기본 의식의 소산이다. 정보 공개는 국민의 눈을 존중하면서 정책 추진을 투명하게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추가 인력이나 투자 없이 기존 인력을 활용해 이뤄지다 보니 업무 부담 문제와 함께 꾸준한 정책 추진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고궁에 울려퍼지는 우리 가락

    고궁에 울려퍼지는 우리 가락

    고즈넉한 고궁의 품에 안겨 우리 음악을 만끽한다. 경복궁·창덕궁·덕수궁·종묘를 무대로 하는 ‘고궁에서 우리음악듣기’가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다. 24~25일 경복궁 집옥재에서는 왕과 대신들의 행차에 따르는 행진 음악 ‘대취타’와 조선시대 유쾌한 놀이 문화를 담은 궁중무용 ‘포구락’을 감상할 수 있다. 창덕궁 낙선재음악회(25일~6월 15일)에서는 정희왕후, 김만덕, 경빈 김씨 등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조선 여인들의 이야기에 산조, 가곡, 판소리, 궁중무용 등 풍류를 더한다. 황병기·안숙선 명인과 국립국악원이 공연하고 배우 유인촌, 임성민 전 아나운서가 이야기를 이끈다. 매회 티켓 오픈 10분 만에 매진되는 ‘창덕궁 산책’(25일~6월 22일)은 역사 인문학 강의로 꽉 채웠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실장 등이 ‘국왕과 세자의 사랑 이야기’, ‘정조와 세종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 왕이었을까’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효명 세자가 만든 춤 ‘춘앵전’, 대금독주 ‘요천순일지곡’ 등이 어우러진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홈페이지(www.kotpa.org)에서 매회 40명씩 신청을 받는다.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애니메이션 동화와 퓨전 국악이 어우러진 ‘동화음악회’(31일~6월 15일)가 열린다. 무료. (02)580-3275.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조선과 대한민국의 군, 세금, 당파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조선과 대한민국의 군, 세금, 당파

    최근 박시백 화백이 엮은 20권짜리 조선왕조실록을 일람했는데, 여러 번 놀랐다. 조선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현재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군, 세금, 당파를 둘러싼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70년 적폐’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지만, 우리 사회는 70년이 아니라 700년 묵은 적폐들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군 면제 아예 없애야 조선은 후금이나 청, 일본과의 전쟁에서 구조적으로 승리할 수가 없었다. 왕족과 양반, 천민이 군역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양민만으로는 충분한 군사를 확보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전쟁이 나면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갔다. 지금도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부유층 및 그 아들의 군 면제율은 입영대상자 평균보다 훨씬 높다.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에 ‘전쟁이 나면 도망가겠다’는 글이 오르자 추천이 비추천을 압도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대다수 입영대상자나 예비군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나라는 외부의 작은 도발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도망가려 할까. 애국심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군역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일까. 해결책은 군 면제를 없애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군 면제자 가운데 현재의 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남자는 없다. 특히 21세기의 군은 알통 나온 소총수보다 안경 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더 필요하다. 군 면제를 당장 없애는 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고위공직에는 군 면제자를 등용하면 안 된다. 그래야만 젊은이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유권자들은 불투명한 이유로 군역을 면제받은 공직선거 출마자에게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 전쟁이 터지자 백성들을 속이고 몰래 도망쳤던 왕과 대통령을 기억해야 한다. #세금 없는 나라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세금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었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천하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 시절에도 세금 부담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의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세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노비로 신분을 바꾸는 양민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도 세금은 납세자들에게는 큰 부담이고, 기업과 관료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부패의 고리다.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세금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세금은 부담이 적을수록, 제도가 단순할수록, 징세과정이 투명할수록 좋다.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이 벌어지면서 세금 문제가 부각됐었다. 직접세와 간접세의 조화나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 문제부터 시작해서 보다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쟁이 이어져야 한다. 좀 더 야심 찬 정치인이라면 아예 세금을 없애는 방안도 슬쩍 검토해보기 바란다. 현재 몇몇 산유국이나 군소국가들이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1년 예산은 300조원. 세금을 걷지 않고, 300조원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51%의 100% 독점은 정의가 아니다 상복을 3년 입느냐, 1년 입느냐를 두고 피바람이 불었다. 물론 본질은 상복이 아니다. 내가 살고 남을 죽이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조선의 당파는 꼭 이념이나 신념으로 분화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념을 공유해도 나눠 먹을 떡이 줄어 들면, 다시 말해 이익이 충돌하면 당파가 분화됐다. 지금도 여와 야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싸운다. 이념도 다르고 이해도 충돌하기 때문이다. 명목상 왕이 권력을 가졌던 조선시대나 국민이 주권자인 현재에도 권력 싸움의 양상은 놀라울 만큼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정치문화인가. 그렇다면 권력을 나누는 시스템을 통해 문화를 바꿔야 한다. 51%의 득표를 얻은 당파가 100%의 권력을 독점하는 현재의 체제로는 여야 간의 화합과 협력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49%의 지지를 얻은 세력에게도 권력을 배분해야 한다.
  • 설희 별그대 소송, 강경옥 작가 “3억 원 배상하라” 결국 법적대응

    설희 별그대 소송, 강경옥 작가 “3억 원 배상하라” 결국 법적대응

    ‘설희 별그대 소송’ 만화 ‘설희’의 강경옥 작가가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 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일 법무법인 강호에 따르면 강경옥 작가는 소장에서 “만화 ‘설희’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3억 원을 배상하라”고 ‘별그대’ 제작사 HB엔터테인먼트와 박지은 작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강경옥 작가의 법적대리인 강호 측은 “만화 ‘설희’와 드라마 ‘별그대’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이들 두 저작물의 주요 등장인물, 줄거리, 사건 전개과정이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강호 측은 “강경옥 작가는 ‘별그대’의 방송 초기 권리 침해 사실을 알고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소송 이전 단계에서 원만한 분쟁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소송에 이르게 됐다”고 소송 이유를 설명했다. 네티즌들은 “설희 별그대 소송, 과연 누가 승소할까”, “설희 별그대 소송, 강경옥 작가 정말 억울했나보다”, “설희 별그대 소송, 3억 원 받으면 대박이네”, “설희 별그대 소송, 별그대에 오점 남길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만화 ‘설희’는 400년 전 조선시대에 외계인이 등장했다는 ‘광해군일지’를 바탕으로, ‘별그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UFO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외계인과 현대인의 사랑을 그려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설희’ 강경옥 작가, ‘별에서 온 그대’ 상대로 손해배상 요구

    ‘설희’ 강경옥 작가, ‘별에서 온 그대’ 상대로 손해배상 요구

    20일 법무법인 강호에 따르면 강경옥 작가는 소장에서 “만화 ‘설희’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3억 원을 배상하라”고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제작사 HB엔터테인먼트와 박지은 작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강경옥 작가의 법적대리인 강호 측은 “만화와 드라마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이들 두 저작물의 주요 등장인물, 줄거리, 사건 전개과정이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한편 만화 ‘설희’는 400년 전 조선시대에 외계인이 등장했다는 ‘광해군일지’를 바탕으로, ‘별에서 온 그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UFO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외계인과 현대인의 사랑을 그려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강경옥 작가, ‘별에서온그대’ 표절 결국 법적대응

    강경옥 작가, ‘별에서온그대’ 표절 결국 법적대응

    20일 법무법인 강호에 따르면 강경옥 작가는 소장에서 “만화 ‘설희’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3억 원을 배상하라”고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제작사 HB엔터테인먼트와 박지은 작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강경옥 작가의 법적대리인 강호 측은 “만화와 드라마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이들 두 저작물의 주요 등장인물, 줄거리, 사건 전개과정이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한편 만화 ‘설희’는 400년 전 조선시대에 외계인이 등장했다는 ‘광해군일지’를 바탕으로, ‘별에서 온 그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UFO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외계인과 현대인의 사랑을 그려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목판으로 만나는 유교 집단지성의 산물

    목판으로 만나는 유교 집단지성의 산물

    강원 원주시 치악산의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에는 1797년(정조 21년) 왕명으로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합판본이 존재한다. 백제 도미 부인의 열녀설화 등을 새긴 것으로, 유일하게 전하는 오륜행실도 목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온전한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화로를 보호한다며 나무 싸개로 사용한 탓이다. 문집 간행을 위한 목판 제작에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아깝지 않게 써 버리던 우리 조상들이 알면 까무러칠 일이다. 예컨대 1843년 ‘퇴계선생문집’을 다시 간행하는 과정에선 책판 2500여장과 인력 2000명, 비용 4144냥이 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6억 2000만원을 웃도는 걸로 추산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문집을 찍어 내기 위해 정성을 쏟았고, 이렇게 책판 형태로 유교 덕목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다음 달 23일까지 제1기획전시실에서 ‘목판, 지식의 숲을 거닐다’ 특별전을 연다.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유교 목판(718종 6만 4226장)의 등재를 신청한 것을 기념해 준비한 전시다. 이곳에 나오는 목판 대부분은 경북 안동시의 국학진흥원이 2001년부터 ‘유교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벌여 모은 6만 5000여장 가운데 가려 뽑은 것들이다. 수집운동에는 전국 305곳 문중과 서원들이 참여했다. 대동여지도 목판(보물 제1581호), 도산서원 현판을 비롯해 포은 정몽주 초상, 포은 선생 문집 등 목판 관련 유물 총 122종 268점이 전시된다. ‘종이에 쓰다’, ‘나무에 새기다’, ‘세상에 전하다’, ‘생활에 묻어나다’의 4개 영역으로 구성된 전시는 다양한 문방구와 함께 판각 과정도 보여 준다. 국학진흥원 측은 “유교 목판은 편집과 판각, 간행, 전승 등이 민간의 자발적인 힘으로 이뤄진 세계사에 유례없는 집단지성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유교 목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원하는 뜻도 담겨 있다. 유네스코에 한국을 대표하는 12번째 세계기록유산 후보로 오른 유교 목판의 등재 여부는 내년 5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총회에서 결정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복제와 창조 사이… 경계 허무는 예술] 상상 이상 현실… 3D 프린팅 레고

    [복제와 창조 사이… 경계 허무는 예술] 상상 이상 현실… 3D 프린팅 레고

    3차원 입체(3D) 프린팅은 요즘 지구촌 경제의 화젯거리다. 완구를 비롯해 임플란트, 자동차·비행기 부품은 물론 인공장기나 총기류까지 대부분 복제가 가능해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분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3D프린터가 내연기관, 컴퓨터에 이어 3차 산업혁명을 이끌 것이란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 3D 프린팅이 미술과 만나면 어떤 새로운 창작도구로 변신할까.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은 오는 7월 6일까지 이어지는 ‘3D 프린팅 & 아트: 예술가의 새로운 창작 도구’전을 통해 답을 내놓았다. 국내 3D 업계 관계자들로 구성된 3D프린팅연구조합과 미술관이 손잡고 21명 작가들의 미디어, 설치, 조각, 회화, 디자인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들은 보급형으로 출시된 수지압출(FDM) 방식의 프린터를 사용해 다양한 상상을 현실에 녹여냈다. 단점이라면 플라스틱을 압출해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차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물은 각양각색이다. 권혜원은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이간수문’(二間水門)의 표면을 스캐닝해 질감을 그대로 살려 출력했다. 노세환은 실제 사과를 복제한 플라스틱 모조 사과를 출력해 이를 사진과 영상 작품으로 만들었다. 김창겸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레고 블록을 상상해 자신만의 독특한 ‘삐딱한 레고’를 내놓았다. 이 밖에 외국작가인 댄 마이크셀은 달팽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특수안경을, 이종호는 플라스틱 프라모델을 그대로 복제한 작품을 선보인다. 다만 국내 3D 프린터 기술의 한계로 외국과 달리 미세한 미적 감각을 살리는 질 높은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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