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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 국토기행] 든든, 구수, 쫄깃…고양 대표 먹거리 삼총사

    [新 국토기행] 든든, 구수, 쫄깃…고양 대표 먹거리 삼총사

    경기 고양시의 향토 음식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600년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 가며 고양 땅에서만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가 있다. 서민들의 고단한 배를 달래 주던 털레기, 임금에게 진상하던 물고기 웅어, 푹 곤 닭 육수에 쫄깃한 면을 넣은 닭칼국수까지, 고양의 먹을거리 삼총사를 소개한다. 고양 시민 최고의 보양식 ‘털레기’ 털레기? 음식 이름이 생소하다. 독특한 이름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털레기는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갖은 채소와 민물새우, 국수, 수제비 등 있는 것은 모두 털어 넣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털레기는 고양 서민의 최고 보양식이다. 미꾸라지는 먹을 게 없던 농한기에 서민들의 헛헛한 배를 달래 줬다. 고양의 털레기는 된장 대신 고추장을 풀어 넣고 국수와 수제비처럼 속을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재료들을 더해 만든 소박한 형태의 추어탕이다. 얼큰한 국물과 쫄깃한 수제비가 일품이다. 예로부터 미꾸라지는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왔는데 조선 의서 ‘방약합편’에 “미꾸라지는 맛은 달고 성질은 평하다. 기를 더하고 주독을 풀고 소갈증을 다스리며 위를 따뜻하게 한다”고 쓰여 있다. 꾸준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자골 토속음식점, 허름한 외관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고양시청 근처 벵게식당 등지에서 고양의 향토 음식인 털레기를 맛볼 수 있다. 한번 맛보면 못 잊는 왕의 생선 ‘웅어’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맛, 임금이 한번 맛보고 수라상에 항상 올리게 한 웅어다. 행주나루의 명물 웅어는 봄철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갈대밭 밑에서 산란한다고 해서 위어(葦魚)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봄철 생선으로 웅어를 별미로 여겨 이를 전담해서 잡는 위어소를 행주나루에 뒀다. 행주 지역 민가에서는 기름기가 가득한 웅어를 잘게 썰어 만든 웅어회비빔밥을 막걸리와 함께 새참으로 먹었다. 한강 하구에서는 봄이 오면 웅어를 잡아 온 마을에 웅어 굽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지만 아직도 웅어는 미식가들 사이에서 봄철 최고의 별미로 꼽힌다. 웅어는 성질이 급해 잡힌 즉시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내장과 머리를 떼어내고 얼음에 보관하는데 요즘은 냉동 기술이 발달해 사계절 언제든 웅어회를 맛볼 수 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은은한 향이 배어난다. 제철인 4~5월이면 살이 더욱 연하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수박향이 난다. 행주산성의 웅어회 전문점과 능곡역 근처의 자유로 민물장어집에서 웅어를 즐길 수 있다. 쫄깃한 면발·담백한 육수 ‘닭칼국수’ 지금은 경기도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닭칼국수는 원래 일산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었다. 닭으로 육수를 내고 푹 삶은 닭고기를 고명으로 얹는 닭칼국수의 맛은 국물에서 나온다. 북어, 무, 대파, 양파 등을 넣고 닭을 삶아낸 육수는 시원하고 담백하다. 직접 반죽해서 쫄깃한 맛이 일품인 면발은 육수와 잘 어우러져 아삭아삭한 겉절이 김치 하나만으로도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 닭고기는 단백질과 필수지방산이 풍부하게 들어 있고 진한 국물로 우려낼 경우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가격도 저렴해 부담이 없다. 원조 닭칼국수 전문점인 정발산동 일산칼국수는 20년 이상 한자리를 지켜 오며 현재도 영업 시간 내내 대기표를 받아야 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한국인 문화DNA 깃든 무형문화재의 의미를 찾아서

    한국인 문화DNA 깃든 무형문화재의 의미를 찾아서

    1964년 종묘제례악이 제1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뒤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동안 모두 126개 종목이 중요무형문화재에 이름을 올리며 보호받고 있다. 이 중 16개 종목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한국의 무형문화유산은 질적·양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를 구성하는 무형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는 여전히 소수의 관심사에 머물러 있다. ‘KBS 파노라마’는 24일 밤 10시 ‘한국무형문화유산 1편:풍류(風流)’를 통해 1500여년을 이어온 우리 무형문화재의 의미와 미래 가치에 대해 살펴본다. 프로그램은 우선 옛 그림 속에서 풍류를 읽는 ‘풍류콘서트’ 현장을 찾아본다. 미술평론가 손철주와 전통국악 해설자 송혜진 교수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음악과 그림이 만나는 옛 그림 속 풍류현장으로 안내한다. ‘풍류란 무엇인가’란 원초적 질문도 던진다. 질문의 답을 찾다 보면 어느새 글과 그림, 악기와 춤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종이로 된 창과 흙벽 집에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가나 읊조리며 살겠노라’는 선비의 초탈한 심사가 풍류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또 은일과 수양, 자연과의 합일, 탈속의 경지를 꿈꿨던 조선시대 선비의 흔적을 뒤쫓는다. 그 속에 고졸한 멋과 아취가 함께 온전히 자리했으니 이를 풍류로 불렀다고 강조한다. 당시 조선 후기 중인계급과 선비, 한량들, 풍류방의 악공, 기녀, 전문 가객들이 ‘여항문화’를 이끌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놀이문화로 발전했고, 오늘날에도 이런 풍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결론짓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문화재 공소시효/서동철 논설위원

    충북 제천의 정방사는 산 아래 청풍호의 풍경이 아름다운 절로 유명하다. 금수산 자락에 자리 잡은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의상대사가 절을 짓고자 지팡이를 던지자 이곳으로 날아와 꽂혔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큰법당에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는 편액이 붙었으니 관음도량이다. 실제로 관음신앙의 영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지면 많은 신자들이 찾는다. 주존(主尊)인 높이 60㎝의 아담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200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만들어질 당시에는 아미타삼존불의 좌협시보살이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목조관음상은 2004년 김쪽같이 사라졌다. 지난 5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전화가 걸려 왔다. 불교문화재 특별경매전에 출품된 불상이 아무래도 정방사 관음보살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의 제보였다. 불교계가 만든 도난 문화재 도록과 비교해 보니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이다. 관음상이 경매에 나온 것은 장물 취득 및 알선 범죄의 공소시효 7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이 탄로 나도 처벌받지 않으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매에는 정방사에서 훔쳐간 나한도도 나왔다. 현재 문화재청이 파악하고 있는 도난문화재는 모두 796건에 이른다. 문화재청은 인터넷 홈페이지로 ‘도난 문화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을 둘러보노라면 문화재 절도가 결코 옛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최근 도난당한 문화재는 경주 숭혜전(崇惠殿)의 하마비다. 대릉원과 이웃한 숭혜전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시대 것인 하마비(下馬碑)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내용의 글귀를 새겼다. 숭혜전보존회는 도난 사실을 지난달 알았다.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깊이 숨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작은 사자상은 3개가 사라지고 지금은 한 개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빼돌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석조문화재의 작은 부수유물이 여전히 문화재 절도범들의 손쉬운 범죄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북 영천시 공덕동의 고려시대 삼층석탑 앞에 놓였던 향로석도 2009년 도난 사실이 확인된 이후 아직 오리무중이다. 문화재 절도에는 공효시효가 없어야 한다. 버텨도 노다지를 캘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도 국외반출의 문제는 남는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문화재를 국외로 빼돌리다 걸리면 나머지 인생은 반드시 교도소에서 보낸다는 인식을 분명히 심어주어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어른 ‘대하’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어른 ‘대하’

    “자연산과 양식은 먼저 꼬리를 봐야 해요. 이것 보세요. 이렇게 꼬리가 분홍색을 띠면 양식이고, 뿔이 머리보다 밖으로 길게 나오면 자연산이죠. 마지막으로 수염이에요. 자연산은 (수염이) 자신의 몸보다 두 배 이상 길어요.” 충남 보령의 무창포 수산시장에서 살아 있는 대하를 수족관에 넣어 두고 젊은 아주머니가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이쯤이면 걸음을 멈출 만하지 않는가. 살아 있는 대하를 구경하는 것도 어려운데 양식과 자연산을 가려 준다. 양식은 중남미가 고향인 흰다리새우를, 자연산은 대하를 내보였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새우는 90여종에 이른다. 이 중 바다에 서식하는 새우는 도화새우, 보리새우, 대하, 중하, 꽃새우, 젓새우 등이다. 대하는 보리새우과에 속하는 새우로 왕새우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하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 서해 5도의 토산물로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대하는 경남, 전남, 충남, 경기 지역의 바다에서 잡히고 있다. 새우는 ‘사리다’라는 옛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새우의 굽은 모습과 바다에서의 움직임이 마치 몸을 사리는 것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긴 수염을 두고 ‘해로’ 즉 바다의 노인으로 표현했다. 새우는 암수가 구별된다. 크기만 보면 암컷이 수컷보다 두 배 이상 크다. 색깔로 보면 암컷은 붉은 보랏빛을 띠며, 수컷은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자산어보’에도 “대하는 빛깔이 희거나 붉다. 흰 놈은 크기가 두 치(한 치는 약 3㎝), 보랏빛인 놈은 크기가 5~6치에 이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붉은 수염이 몸길이의 세 배나 된다”고도 했다. 늘 느끼지만 손암(정약전)의 물고기에 대한 관찰과 해석은 지금 읽어도 감탄스러울 뿐이다. 동해가 단풍 물든 설악이라면 서해는 대하다. 외포, 대명, 소래, 태안, 보령, 남당, 무창포, 홍원, 마량, 군산, 법성에 이르기까지 온통 대하다. 안면도, 남당, 무창포 등은 가을철 대하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하는 명실공히 서해의 가을철 진객이다. 남당포구에서 대하를 팔던 한 아주머니는 “수컷이 이렇게 작아서 무슨 일을 하냐”는 필자의 농담에 “그래도 큰일은 수컷이 다 한다”며 새벽같이 나갔다가 새우를 잡아온 남편을 쳐다보며 웃는다. 중국의 약학서인 ‘본초강목’에 “혼자 여행할 때는 새우를 먹지 말라”고 했다. 특히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고 했다. 새우가 양기에 좋은 강장식품이기 때문이다. 한번에 10만개 이상의 알을 낳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일까. 대하는 장수, 다산, 부부의 해로를 상징한다. 대하는 봄바람 따라 서해의 얕은 바다로 다가와 산란을 한다. 다 자란 새우는 남서풍이 불 때 좀 더 깊은 바다로 나간다. 이때가 살이 통통하고 맛이 제일 좋을 때다. *어떻게 먹을까. 소금간을 해서 말린 대하는 조선시대 궁중 찬품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 11년(1429) 명나라에 보낸 선물 목록 중 건어물로 포함되었다. 바닷속 작은 새우가 조선의 상층부는 물론 명나라에까지 알려진 조선의 토산식품이었다. ‘난호어목지’는 “대하는 빛깔이 붉고 길이가 한 자 남짓 한데, 회에 좋고 그대로 말려서 안주로도 한다”고 했다. ‘도문대작’에서는 “대하는 서해에서 난다. 알로 젓을 담그면 매우 좋다”고 했다. ‘규합총서’에는 생새우꼬치구이, 새우 어육장, 대하를 넣은 열구자탕 등이 소개되어 있다. 옛날에는 대하를 살짝 쪄서 짚으로 조기처럼 엮어서 말렸다. 가을볕에 잘 말린 대하는 겨울철에 훌륭한 양식이었다. 좋은 새우는 껍질이 투명하고 윤기가 흐르며 붉은빛을 띈다. 머리와 꼬리가 제대로 붙어 있어야 하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대하를 손질할 때는 등을 구부려 두 번째 마디에 이쑤시개를 넣어서 검은 줄 모양의 내장을 빼낸다. 먼저 ‘대하장’을 소개한다. 게장은 익숙하지만 대하장은 생소하다. 하지만 그 맛을 보면 오랫동안 먹어 온 것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 집 아이들은 꽃게장보다 대하장을 더 좋아한다. 태안이나 서천에서는 물이 좋은 대하는 팔고, 머리나 꼬리가 떨어져 상품가치가 없는 대하로 장을 담갔다. 흰다리새우를 사용해도 좋다. 간장 3컵에 물 1컵을 넣고 통고추, 마늘, 생강, 양파, 소주 약간을 넣고 팔팔 끓인다. 그리고 간장만 건져서 식힌 뒤 갈무리해 둔 대하가 잠길 정도로 붓는다. 하루 정도 지나 새우를 건져내고 간장만 한 번 더 끓인 후 식혀서 대하가 잠길 정도로 부어 둔다. 사흘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다.짭짤한 대하살을 발라 채소를 넣고 비빔밥을 해도 좋다. 대하를 제대로 먹는 사람은 머리만 먹는다. 소금구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머리를 바삭하게 구우면 고소하다. 살만 있는 배보다 육즙이 더해져 감칠맛이 난다. 다만 내장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신선하지 않을 때는 머리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 대하와 꽃게를 넣고 된장으로 간을 해서 끓이는 대하꽃게탕은 시원함의 극치다.가을이다. 단풍구경도 좋지만 연인과 두 손 꼭 잡고 바닷가를 거닐다 대하에 눈을 맞춰 보길 권한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공직 파워 열전] 해수부 해양정책실장

    [공직 파워 열전] 해수부 해양정책실장

    해양수산부의 해양정책실장은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던 부처의 운명 속에서도 꿋꿋이 부처 내 구심점 역할을 해 온 대표 요직으로 꼽힌다. 1996년 8월 수산청과 해운항만청 등이 합쳐져 해수부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미래 해양정책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해양정책실장은 전통 수산·항만 분야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먹고살기 바쁜 마당에 실체도 없는 20년 뒤의 바다에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미래 먹거리와 해양 산업 분야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해양정책실은 명실공히 해수부의 주무부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해양정책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직위가 오르내리는 등 부침이 심했다. 해양정책실장(1급·현 고위공무원 가급)으로 출발했지만 2년 만인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조직개편의 일환으로 해양정책국(2급·현 고공단 나급)으로 조직이 축소됐다.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다시 해양정책본부장으로 승급했지만 이듬해 이명박 정부는 해수부를 아예 폐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소속 국장급으로 직위를 강등시켰다. 때문에 실장·본부장보다는 해양정책국장이 더 낯익다는 직원들이 많다. 조직이 공중 분해돼 5년간 국장급으로 지내오던 해양정책실장은 미래 해양 정책의 중요성이 재차 강조되면서 현 정권이 들어선 지난해 3월 해수부의 부활과 함께 해양산업정책관 등 3명의 국장과 11개 과를 거느리는 역대 최대 규모 진영의 주무 실장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해수부에서는 해양정책실장·국장을 거치면 차기 장·차관 하마평에 오른다. 차관이 된 사람도 3명이나 된다. 현 정권 초대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이 된 김영석 현 해수부 차관은 해양 업무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해양정책국장을 두 차례 지낸 김 차관은 공직에 대한 자존심이 강해 조선시대 선비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늘 정책을 공부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여 신임이 두텁다. 해수부 차관보, 국토부 2차관을 지낸 최장현 위동해운 사장은 ‘워커홀릭’으로 불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해수부 장관 시절 공보관(현 대변인)을 지냈다. 조직장악력이 뛰어나고 업무 추진력이 좋다. 국토부 차관 출신인 주성호 전 한국해운조합 이사장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최근 이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해수부 재임 시절 온화하면서도 세심하게 업무를 잘 챙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평식 2012여수세계박람회재단 이사장은 2년 6개월간 최장기 해양정책실장을 맡으며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김춘선 인천항만공사 사장은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 출신으로 해수부에 영입됐다. 예산·정책 등 업무를 두루 섭렵한 데다 쾌활하고 인맥도 넓어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용우 전 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은 원칙주의자로 통한다. 예리한 분석력과 강단 있는 업무추진력으로 당시 시화호와 새만금을 둘러싼 개발 갈등을 원만하게 풀어 주목을 받았다. 이 전 이사장과 행시 동기인 서정호 전 경기평택항만공사 사장은 업무 능력뿐 아니라 대인관계가 좋다는 평이다. 바다에 육상폐기물을 버리는 업체에 물리는 해양환경개선부담금 갈등을 매끄럽게 풀어 능력을 인정받았다. 새누리당 수석연구위원인 연영진 전 국립해양조사원장은 합리적인 성격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별명을 갖고 있다. 차분한 성격의 우예종 해수부 기획조정실장은 아이디어맨으로 불린다. 물류 항만의 전산화 시스템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관 비서관, 청와대 인사제도비서관을 지낸 문해남 현 해양정책실장은 정권이 바뀌면서 주요 보직에서 물러났지만 정무감각이 뛰어나고 해양 업무를 안팎에서 잘 추스르면서 해양정책실장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제주 말 풍경 사진 속 주인공 찾습니다

    제주 말 풍경 사진 속 주인공 찾습니다

    ‘그때 그 시절 사진 속 주인공을 찾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기획특별전 ‘한국의 마(馬)-시공을 달리다’에 전시한 근·현대 제주 말 풍경 사진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찾는다고 21일 밝혔다. 말 풍경 사진 50장 가운데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1950~1980년대 사진 4장이다. 첫 번째 사진은 1957년 제주의 목장 풍경을 담고 있다. 사진에는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오름이 군락을 이루며 그 앞으로 소와 말이 방목된 넓은 목장이 펼쳐져 있다. 두 번째 사진은 1958년 말과 소가 방목된 제주의 목장을 배경으로 외국인 일가족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사진엔 비포장 길에 트럭 1대가 세워져 있고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끌고 가는 풍경이 담겼다. 산방산이 사진 오른쪽에 있어 서귀포시 대정읍 지역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제주의 성화 봉송 장면을 담은 네 번째 사진은 조선시대 전통 복장을 한 주자 일행이 제주시 동문로터리를 지나 부두 방향으로 가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 네 장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진이 찍힌 정확한 위치 등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제주박물관 학예연구실(064-720-8104)로 연락하면 된다. 제주도가 전국 제1호 말 산업특구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기획전에는 국가지정문화재 9건 19점을 비롯한 유물 261건 490점이 전시된다. 한국 말의 역사와 문화를 총괄한 기획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자 최고 수준이다. 오는 12월 7일까지 계속된다. 조선시대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최문병의 말 안장(보물 제747호), 통일신라 때 발걸이인 ‘청동흑칠호등’(보물 제1151호), 정조 임금이 탔던 어승마가 그려진 ‘화성원행반차도’, 18세기 초 제주의 풍속이 담긴 ‘탐라순력도’ 진본 등 제주에서 최초로 전시되는 유물이 다수 포함돼 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기획] 우리 바주카포, 정말 北 전차에 무용지물일까

    [기획] 우리 바주카포, 정말 北 전차에 무용지물일까

    65년 전 6.25 전쟁 발발 직후 우리 군과 미군 선발대가 속수무책으로 연전연패했던 것은 북한의 전차부대 때문이었다. 우리 군과 미군이 보유한 대전차 무기인 일명 ‘바주카포’는 북한의 T-34 전차를 파괴하기에 역부족인 성능이었고, 이 때문에 바주카를 맹신하던 미 24사단 선발대 ‘스미스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에 대패하며 그 길로 대전까지 밀리기도 했다. 그런데 65년 전 전세를 불리하게 몰아갔던 대전차 무기 문제가 또 제기됐다. 국회 국방위원회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은 육군본부로부터 제출 받은 ‘대전차 미사일 현황’ 자료를 공개하면서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4만 6,000여 기의 대전차 미사일 가운데 수명이 남아 있는 것은 360여 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전차무기 6종 가운데 TOW와 판저파우스트(Panzerfaust) III(PZF-III), M72 LAW(Light Anti-Tank Weapon)는 100% 수명주기를 다했으며, 그나마 수명주기가 남아있는 무기는 러시아제 메티스(METIS)-M과 무반동총뿐”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우리 군이 대전차 미사일 노후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 북한군의 전차 전력은 급격히 강화되었으며, 우리 군의 대전차 무기가 북한의 전차에 무용지물인 것처럼 보도하며 스웨덴제 대전차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을 연달아 제기하고 있다. ▲ 北 전차 전력 수준이 어떻기에... 대전차무기를 이야기하기 전에 논란을 일으킨 북한의 전차 전력 강화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북한의 전차 보유량은 약 4,200여대 수준이며, 국방부는 이 가운데 약 900여 대가 천마호와 선군호 등 신형 전차라고 파악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군 관계자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2005년부터 약 900여 대의 신형 전차를 실전배치했다”고 밝히며 북한 전차 위협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진짜 전력 수준은 어떨까? 우리 국방부는 북한의 전차 전력을 4,200여 대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미 국방부의 연례 북한 군사력 동향 보고서나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rch Institute) 등은 북한의 전차 보유 수량을 3,500여 대로 평가하고 있다. 이 3,500여 대는 다시 최신예 선군호 전차 일부와 폭풍호 시리즈 500여 대, 천마호 시리즈 1,000여대를 주력으로 2,000여 대의 T-54/55, T-34와 PT-76 등의 경전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2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T-34나 등장한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PT-76과 같은 경전차는 우리 군 K-21 장갑차의 40mm 기관포로도 격파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북한의 실질적인 주력인 T-54/55 계열 전차는 전면장갑이 200mm에 불과하며, 천마호 시리즈 역시 천마호 가~다형은 주조제 단일 장갑인 소련의 오리지널 T-62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장갑 두께가 240mm 수준이다. 천마호 라형과 마형, 폭풍호 가~다형, 선군호 전차는 복합장갑과 반응장갑이 탑재되어 방호력이 증대되었지만, 그 수량은 북한군 전체 전차 전력의 1/3 수준인 1,000여 대 미만에 불과하다. 이 1,000여 대가 북한이 2005년부터 생산했다는 900여 대의 신형 전차들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900여 대의 신형 전차를 생산해 배치했다는 것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기간 우리 군은 K1A1 전차 3,4차 양산을 시작해 388대를 생산했다. 연평균 55대 수준이다. 그런데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경제 제재를 받으며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북한이 연평균 130대, 무려 1개 기계화사단분의 전차를 매년 찍어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난 2010년 7월 함경남도 일대에 내린 집중호우로 신형 폭풍호 전차를 생산하는 신흥군의 61호 군수공장이 치명적인 침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엄청난 폭우로 인해 인근 장진강 발전소가 수문을 열었고, 수위 증가에 대비해 공장 근처에 제방을 쌓았지만, 이 제방이 넘치면서 공장은 물론 신흥군 전체가 물바다가 된 바 있었다. 김정일의 긴급복구지시가 하달될 만큼 큰 피해를 입은 이 공장은 생산을 위해 구입해 놓은 중국제 엔진 230여 대가 쓸려온 토사에 침수되어 사용 불능이 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230여 대의 엔진이 날아가고 공장 전체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면 이는 단기간에 복구하기 어려운 수준의 피해다. 공장 손상과 엔진 소실로 약 2년 치 생산 분에 타격을 입었다면 북한은 6년간 연평균 150대 이상, 즉 우리나라의 3배 규모로 전차를 생산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기간 중 생산된 신형 전차는 중국제 엔진과 사격통제장치, 신형 반응장갑과 주포 등을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획득 비용이 기존의 구형 전차보다 대단히 증가했을 것인데,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핵개발에 매진하고 있던 북한의 호주머니에서 연평균 150대의 전차를 찍어낼 수 있는 비용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북한 신형 전차 900대 양산설’은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 정말 北 전차 파괴 못할까? K2와 K1, K1A1, M48A5 등 4종으로 통일된 우리 군 전차 전력과 달리 북한의 전차는 식별된 것만 12종에 달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나 대부분 소련제 T-54/55와 T-62에 기반을 두고 개량한 모델들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성능은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이들 전차의 방호력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군의 숫적 주력인 T-54/55와 오리지널 T-62 계열은 장갑 두께가 240mm 수준이다. 이는 정말 두께가 24cm라는 것이 아니라 장갑판의 소재와 경사도 등을 고려했을 때 균질압연강판(RHA : Rolled Homogeneous Armor) 환산치라 240mm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일부 배치된 폭풍호와 선군호 일부를 제외한 3,000여 대, 즉 85%는 우리 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대전차 무기로 격파가 가능하다. 물론 이는 전면장갑 기준이기 때문에 전면보다 더 얇은 측면이나 후면을 공격하면 더 쉽게 격파가 가능하다. 문제는 천마호 후기형 일부와 폭풍호, 선군호에 탑재되기 시작한 반응장갑이다. 같은 100mm의 장갑판이라도 100mm 장갑판 하나보다 10mm짜리 10장을 포개어 놓는 것이 운동에너지탄이나 화학에너지탄에 모두에 대해 더 우수한 방호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 면제배갑(綿製背甲)이나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총탄을 막는 원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번에 문제가 제기된 우리 군의 대전차 무기는 모두 화학 에너지탄, 즉 HEAT(High-Explosive Anti-Tank) 탄두를 가진 무기들이다. HEAT는 폭약에 원추 또는 반구형의 금속성 라이너를 넣은 폭약을 폭발시키면 라이너 방향으로 금속성 제트기류(Metal-jet)를 형성시키는 먼로효과와 탄두에 약간 이격을 두고 작약을 설치해 폭발시키면 추진 방향으로 폭발력이 집중되는 노이만 효과(Neumann effect)라고 불리는 화학적 현상을 이용한 탄두이다. 높은 열과 강력한 압력의 메탈제트로 장갑판을 녹이며 관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2차 대전 때부터 전차를 파괴하기 위한 대전차 포탄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문제는 이러한 먼로-노이만 효과에 의한 메탈제트는 장갑판과 장갑판 사이에 공간이 있을 경우 한 방향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기류와 에너지가 장갑판 사이의 공간으로 퍼지면서 관통력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장갑판에 약간의 폭약을 넣은 반응장갑이 있으면 명중과 동시에 반응장갑 속의 폭약이 포탄의 작약보다 먼저 터지면서 메탈제트의 방향을 포탑 반대 방향으로 바꿔 버린다. 북한의 신형 전차들이 포탑 주변에 벽돌과 같은 장갑판을 덕지덕지 붙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장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포탄에 여러 개의 탄두를 다는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오는 대전차 무기들은 탠덤(Tandem)식 탄두를 장착하는 경우가 많다. 전방 탄두가 반응장갑을 파괴하고, 두 번째 탄두가 본장갑을 관통하는 방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군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대전차 화기는 탠덤식 탄두가 아니기 때문에 반응장갑을 장착한 북한의 신형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 하지만 대전차 무기가 반드시 적 전차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도 아닐뿐더러, 최근 10여 년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례를 분석했을 때 대전차 로켓무기가 전차보다는 건물과 벙커, 기관총 진지 등에 대한 공격에 더 많이 쓰였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더욱이 최근의 전쟁에서 미군은 값비싼 신형 대전차 로켓보다 이미 도태시킨 낡은 M72 LAW가 더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리며 창고에서 이를 다시 꺼내 쓰기 시작했고, 새로운 대전차 무기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이를 사용할만한 북한의 신형 전차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각의 지적처럼 대량의 대전차 무기를 긴급히 도입해야 할 필요성은 아주 낮아 보인다.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우리 바주카포가 北 전차에 무용지물이라고?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우리 바주카포가 北 전차에 무용지물이라고?

    65년 전 6.25 전쟁 발발 직후 우리 군과 미군 선발대가 속수무책으로 연전연패했던 것은 북한의 전차부대 때문이었다. 우리 군과 미군이 보유한 대전차 무기인 일명 ‘바주카포’는 북한의 T-34 전차를 파괴하기에 역부족인 성능이었고, 이 때문에 바주카를 맹신하던 미 24사단 선발대 ‘스미스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에 대패하며 그 길로 대전까지 밀리기도 했다. 그런데 65년 전 전세를 불리하게 몰아갔던 대전차 무기 문제가 또 제기됐다. 국회 국방위원회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은 육군본부로부터 제출 받은 ‘대전차 미사일 현황’ 자료를 공개하면서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4만 6,000여 기의 대전차 미사일 가운데 수명이 남아 있는 것은 360여 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전차무기 6종 가운데 TOW와 판저파우스트(Panzerfaust) III(PZF-III), M72 LAW(Light Anti-Tank Weapon)는 100% 수명주기를 다했으며, 그나마 수명주기가 남아있는 무기는 러시아제 메티스(METIS)-M과 무반동총뿐”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우리 군이 대전차 미사일 노후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 북한군의 전차 전력은 급격히 강화되었으며, 우리 군의 대전차 무기가 북한의 전차에 무용지물인 것처럼 보도하며 스웨덴제 대전차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을 연달아 제기하고 있다. ▲ 北 전차 전력 수준이 어떻기에... 대전차무기를 이야기하기 전에 논란을 일으킨 북한의 전차 전력 강화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북한의 전차 보유량은 약 4,200여대 수준이며, 국방부는 이 가운데 약 900여 대가 천마호와 선군호 등 신형 전차라고 파악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군 관계자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2005년부터 약 900여 대의 신형 전차를 실전배치했다”고 밝히며 북한 전차 위협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진짜 전력 수준은 어떨까? 우리 국방부는 북한의 전차 전력을 4,200여 대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미 국방부의 연례 북한 군사력 동향 보고서나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rch Institute) 등은 북한의 전차 보유 수량을 3,500여 대로 평가하고 있다. 이 3,500여 대는 다시 최신예 선군호 전차 일부와 폭풍호 시리즈 500여 대, 천마호 시리즈 1,000여대를 주력으로 2,000여 대의 T-54/55, T-34와 PT-76 등의 경전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2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T-34나 등장한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PT-76과 같은 경전차는 우리 군 K-21 장갑차의 40mm 기관포로도 격파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북한의 실질적인 주력인 T-54/55 계열 전차는 전면장갑이 200mm에 불과하며, 천마호 시리즈 역시 천마호 가~다형은 주조제 단일 장갑인 소련의 오리지널 T-62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장갑 두께가 240mm 수준이다. 천마호 라형과 마형, 폭풍호 가~다형, 선군호 전차는 복합장갑과 반응장갑이 탑재되어 방호력이 증대되었지만, 그 수량은 북한군 전체 전차 전력의 1/3 수준인 1,000여 대 미만에 불과하다. 이 1,000여 대가 북한이 2005년부터 생산했다는 900여 대의 신형 전차들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900여 대의 신형 전차를 생산해 배치했다는 것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기간 우리 군은 K1A1 전차 3,4차 양산을 시작해 388대를 생산했다. 연평균 55대 수준이다. 그런데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경제 제재를 받으며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북한이 연평균 130대, 무려 1개 기계화사단분의 전차를 매년 찍어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난 2010년 7월 함경남도 일대에 내린 집중호우로 신형 폭풍호 전차를 생산하는 신흥군의 61호 군수공장이 치명적인 침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엄청난 폭우로 인해 인근 장진강 발전소가 수문을 열었고, 수위 증가에 대비해 공장 근처에 제방을 쌓았지만, 이 제방이 넘치면서 공장은 물론 신흥군 전체가 물바다가 된 바 있었다. 김정일의 긴급복구지시가 하달될 만큼 큰 피해를 입은 이 공장은 생산을 위해 구입해 놓은 중국제 엔진 230여 대가 쓸려온 토사에 침수되어 사용 불능이 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230여 대의 엔진이 날아가고 공장 전체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면 이는 단기간에 복구하기 어려운 수준의 피해다. 공장 손상과 엔진 소실로 약 2년 치 생산 분에 타격을 입었다면 북한은 6년간 연평균 150대 이상, 즉 우리나라의 3배 규모로 전차를 생산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기간 중 생산된 신형 전차는 중국제 엔진과 사격통제장치, 신형 반응장갑과 주포 등을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획득 비용이 기존의 구형 전차보다 대단히 증가했을 것인데,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핵개발에 매진하고 있던 북한의 호주머니에서 연평균 150대의 전차를 찍어낼 수 있는 비용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북한 신형 전차 900대 양산설’은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 정말 北 전차 파괴 못할까? K2와 K1, K1A1, M48A5 등 4종으로 통일된 우리 군 전차 전력과 달리 북한의 전차는 식별된 것만 12종에 달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나 대부분 소련제 T-54/55와 T-62에 기반을 두고 개량한 모델들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성능은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이들 전차의 방호력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군의 숫적 주력인 T-54/55와 오리지널 T-62 계열은 장갑 두께가 240mm 수준이다. 이는 정말 두께가 24cm라는 것이 아니라 장갑판의 소재와 경사도 등을 고려했을 때 균질압연강판(RHA : Rolled Homogeneous Armor) 환산치라 240mm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일부 배치된 폭풍호와 선군호 일부를 제외한 3,000여 대, 즉 85%는 우리 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대전차 무기로 격파가 가능하다. 물론 이는 전면장갑 기준이기 때문에 전면보다 더 얇은 측면이나 후면을 공격하면 더 쉽게 격파가 가능하다. 문제는 천마호 후기형 일부와 폭풍호, 선군호에 탑재되기 시작한 반응장갑이다. 같은 100mm의 장갑판이라도 100mm 장갑판 하나보다 10mm짜리 10장을 포개어 놓는 것이 운동에너지탄이나 화학에너지탄에 모두에 대해 더 우수한 방호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 면제배갑(綿製背甲)이나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총탄을 막는 원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번에 문제가 제기된 우리 군의 대전차 무기는 모두 화학 에너지탄, 즉 HEAT(High-Explosive Anti-Tank) 탄두를 가진 무기들이다. HEAT는 폭약에 원추 또는 반구형의 금속성 라이너를 넣은 폭약을 폭발시키면 라이너 방향으로 금속성 제트기류(Metal-jet)를 형성시키는 먼로효과와 탄두에 약간 이격을 두고 작약을 설치해 폭발시키면 추진 방향으로 폭발력이 집중되는 노이만 효과(Neumann effect)라고 불리는 화학적 현상을 이용한 탄두이다. 높은 열과 강력한 압력의 메탈제트로 장갑판을 녹이며 관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2차 대전 때부터 전차를 파괴하기 위한 대전차 포탄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문제는 이러한 먼로-노이만 효과에 의한 메탈제트는 장갑판과 장갑판 사이에 공간이 있을 경우 한 방향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기류와 에너지가 장갑판 사이의 공간으로 퍼지면서 관통력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장갑판에 약간의 폭약을 넣은 반응장갑이 있으면 명중과 동시에 반응장갑 속의 폭약이 포탄의 작약보다 먼저 터지면서 메탈제트의 방향을 포탑 반대 방향으로 바꿔 버린다. 북한의 신형 전차들이 포탑 주변에 벽돌과 같은 장갑판을 덕지덕지 붙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장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포탄에 여러 개의 탄두를 다는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오는 대전차 무기들은 탠덤(Tandem)식 탄두를 장착하는 경우가 많다. 전방 탄두가 반응장갑을 파괴하고, 두 번째 탄두가 본장갑을 관통하는 방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군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대전차 화기는 탠덤식 탄두가 아니기 때문에 반응장갑을 장착한 북한의 신형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 하지만 대전차 무기가 반드시 적 전차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도 아닐뿐더러, 최근 10여 년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례를 분석했을 때 대전차 로켓무기가 전차보다는 건물과 벙커, 기관총 진지 등에 대한 공격에 더 많이 쓰였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더욱이 최근의 전쟁에서 미군은 값비싼 신형 대전차 로켓보다 이미 도태시킨 낡은 M72 LAW가 더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리며 창고에서 이를 다시 꺼내 쓰기 시작했고, 새로운 대전차 무기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이를 사용할만한 북한의 신형 전차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각의 지적처럼 대량의 대전차 무기를 긴급히 도입해야 할 필요성은 아주 낮아 보인다.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국내여행 | 풍성한 장수 맛있는 유혹

    국내여행 | 풍성한 장수 맛있는 유혹

    하늘이 내린 축복받은 땅 태풍이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가기 직전,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 때맞춰 잡힌 출장 덕분에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벌써부터 답답하기만 했다. 전라북도 장수군의 면적은 약 533km2. 서울시 전체가 약 605km2임을 감안한다면 결코 작지 않다. 그런데 장수군의 넓은 면적 중 78% 가량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평균 해발고도가 약 500m로 높은 곳에 위치해 여름에도 서늘함이 감돈다. 한낮에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지만 시원한 바람이 일고 습도도 낮아 더위를 모른다. 그렇게, 답답했던 출장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이 여름을 나기에 적절한 곳이지만 사과가 자라는 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 무릇 사과는 볕으로부터 양분을 받고 밤에는 잠을 자면서 익는다. 일교차가 적어도 12℃ 이상이 되어야 당도 높은 사과가 탄생한다. 밤이 더우면 사과가 충분히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호흡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당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장수군은 여름 평균 기온이 22℃, 밤에는 20℃ 이하로 기온이 뚝 떨어져 사과가 포동포동 살을 찌우고 달콤한 과즙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 너른 초원에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소들은 장수군이 날씨의 축복을 받은 땅임을 또다시 입증하고 있다. 여름이 시원한 만큼 장수군의 겨울은 시리다. 가장 추운 날은 영하 23℃를 웃돌지만 이는 한우의 품질을 높이는 데 한몫을 한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육질은 단단해지고 체온 유지를 위해 에너지를 쏟다 보니 지방이 적어 명품 한우가 될 수밖에 없다. 장수군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한우가 3만5,000여 두, 인구는 약 2만4,000명이니 장수군에는 사람보다 한우의 수가 많다. 어느 산골마을로의 초대 태어나서 이토록 작은 마을은 처음이다. 장수군 천천면 섶밭들마을에는 총 27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단란한 삶을 꾸리고 있다. 섶밭들마을은 과거 땔감나무였던 섶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던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요즘 여유로운 여행을 오는 이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일급수 어종들이 많이 서식할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한 마을 앞 여울에서 천렵을 즐기고 마을 주민들이 가꾼 텃밭에서 옥수수나 토마토 같은 무공해 농산물 수확을 경험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천연 염색 체험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풍등 날리기를 하며 추억을 만들기 바쁘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놀랍게도 마을 공동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실제 노동이 가능한 인구는 매우 적지만 끈끈한 정으로 똘똘 뭉쳐 살림을 꾸려 나간다. 작은 공간이지만 숙박 시설도 만들었다. 마을 공동사업이니 수익금은 ‘행복해지기 위한 공동 기금’으로 쓰인다. 섶밭들마을에 거주하는 어르신들 중 상당수는 평생 타지로 여행을 가 본 경험이 없는 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수익금으로 늦게나마 함께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행복한 소비를 하고 있다. 이제 잠시 속도를 한 템포 늦출 시간이다. 삶은 옥수수를 소쿠리에 담아들고 마을 정자에 누워 보자.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오해는 그만, 논개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소서 “논개論介님의 성姓이 무언지 아십니까?” 대답하길 머뭇거리자 문화해설사님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논개님은 진주 기생이 아니었다는 첫마디에서부터 오랜 시간 쌓여 온 깊은 오해의 골이 느껴진다. 1674년 9월3일.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주논개는 타고난 사주만큼이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품었다. 논개는 양반인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의 나이에 현감의 부실로 들어갔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2차 진주성 싸움에 출전하는 남편과 함께 진주로 몸을 옮겼지만 싸움은 완패로 끝나고 만다. 그 책임을 묻고자 스스로 남강에 몸을 던진 남편. 논개는 남편을 잃고 조국마저 잃는 슬픔과 맞닥뜨렸다. 그런데 7월7일,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은 이를 축하하고자 성대한 잔치를 연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잔치에는 관기가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었는데, 기회를 잡은 논개는 스스로를 진주 관기로 등록하고 잔치에 함께한다. 술판이 벌어지고 취기가 한창 올랐을 때 논개는 왜적의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진주성 남강 의암바위로 유인해 왜장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동반 투신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논개를 진주 기생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신분을 낮춰 위장한 여인의 충절이 왜곡된 것.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녀라는 이유로 외면했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장수군에서는 주논개의 생가를 복원해 그녀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고 사당을 마련해 매년 7월7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논개 사당을 가는 길은 한 계단, 한 계단을 딛고 올라가야만 한다. 숨이 좀 가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땐 뒤를 돌아본다. 붉게 핀 자귀나무와 사당을 앞에 두고 펼쳐진 의암호의 모습이 퍽 감동적이다. 방문객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지만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속이 깊었던 논개는 따뜻한 눈빛으로 괜찮다며 미소 짓고 있었다. 논개 생가와 연결되는 길에는 주촌마을이 있다. 주朱씨 일가가 모여 살았던 곳으로 지금까지 그 터가 고스란히 건재하다. 아기자기한 돌담길, 집집마다 정성스레 가꾼 텃밭과 정원에 피어난 코스모스까지, 마을을 한 바퀴 걷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마을이 지금도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논개의 지조를 닮은 듯하다. 장수사과 사이버팜Jangsu Apple Cyber Farm 친환경농법으로 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장수사과 시험포에서는 장수군의 효자, 사과나무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1년 단위로 분양하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약 2만 그루의 사과나무를 분양했는데 매년 2월부터 인터넷으로 신청 가능하다. 사과 수확 시기는 품종마다 약간 다르지만 9~10월이면 1그루당 최소 30kg의 잘 익은 사과를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개정리 와동길 56 장수사과시험장 1그루 10만원(1년 단위) 063-351-1344 www.myapple.go.kr 섶밭들 산촌생태마을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신천마을 135-1 063-351-8300 객실 2인 기준 7만원, 4인 기준 10만원 농부 체험 40명 기준, 5,000원 경운기 체험 10명 기준, 3만원 염색 체험 40명 기준, 1만원 전통주 빚기 1말 기준 20만원 (1박2일 및 당일 8시간 체험 가능) 장수 ‘한우랑사과랑’ 축제 장수군을 대표하는 한우랑사과랑 축제가 8월29일부터 31일까지 장수군 의암공원 일대에서 펼쳐진다. 명품 한우와 당도 높은 홍로를 저렴한 가격으로 배부르게 맛볼 수 있는 기회다. 장수 사과 수확 체험을 비롯해 한우 곤포 나르기 대회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논개 사당 앞 잔디광장에서는 4인용 텐트 100동을 설치해 ‘적과의 동침’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축제의 즐거움과 더불어 청정 자연 속에서 캠핑의 추억까지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주소 전북 장수군 장수읍 한누리로 393 www.jangsufestival.com 063-352-2011 ▶travel info 구수한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 통통하게 불린 보리와 쌀, 흑미를 6:3:1의 비율로 섞고 가마솥에 밥을 지어 콩나물, 미나리, 녹두 나물 등 열댓 개 이상의 나물과 함께 내온다.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에 가죽 나뭇잎을 말려 볶은 나물만 비벼 먹어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보리밥집 전라북도 장수군 한서면 동화리 173-4 보리밥 7,000원, 콩나물국밥 5,000원 063-351-1352 노릇하게 구운 고기 한 점 ‘장수 한우명품관’은 식당과 바로 연결된 장수푸드 직매장에서 한우를 구입해 식탁에 올리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꽃등심, 부채살, 안심 등 구이용 쇠고기와 양지, 사태 등 국거리는 물론 장수군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먹거리도 제공한다. 장수 한우명품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489-5 꽃등심 1++ 3만8,000원, 안심 1++ 2만9,000원(600g 기준) 063-352-8088 승마는 스포츠다 복부는 물론 팔, 다리까지 전신 운동이 가능한 것이 바로 승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이 뛰는 리듬에 맞춰 함께 움직이면 수영이나 조깅보다 2배 이상의 운동 효과를 볼 수 있다. 성인부터 아이들까지 일일체험도 가능하니 망설일 필요가 없겠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노하리 284-14 일일체험 성인 2만5,000원, 청소년 1만8,000원, 어린이 1만2,000원 063-350-2579 장수 힐스리조트 가장 최근에 지어진 리조트로 모든 시설이 깨끗한 편이다. 온천 수영장을 비롯해 당구장, 스크린 골프 등 부대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리조트 뒤 쪽으로는 작은 별장과 같은 캐빈하우스와 캠핑캐러밴까지 갖추고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승마로 1005-31 12평 8만원, 22평 15만원, 27평 18만원(비수기 주중 기준) www.jshills.com 063-353-8880 글·사진 손고은 기자 취재협조 장수군청 www.jangsu.g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김문이 만난사람] 30년째 조선사발을 재현하는 사기장 신한균

    [김문이 만난사람] 30년째 조선사발을 재현하는 사기장 신한균

    때론 ‘무미평범’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유명한 민예 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大德寺)에 소장돼 있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본 후 이렇게 읊었다. “어디를 찾아도 이보다 더 평이한 기물은 없다.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 심상한 것이 없다. 그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가난뱅이가 보통 쓰던 사발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이 싼 물건이다. 그것은 평범, 더할 수 없는 범기(凡器)다. 흙은 뒷산에서 파 온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이상의 하이테크 첨단기술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런 백자를 국부(國富)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에서 얻은 백자기술을 활용, 도자기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특히 ‘막사발’은 일본에서 ‘이도다완’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다도에서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인들은 상거래와 약탈로 조선의 막사발을 호시탐탐 노렸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켜 우리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의 상류층과 무사들의 밥그릇과 찻그릇을 만들게 했다. 이들이 만든 그릇 중에는 현재 국보급도 여럿 있다. 사기장 신한균(54)씨는 2008년 ‘신의 그릇’이라는 두 권짜리 소설책을 출간해 주목을 끌었다. 그릇 빚는 사기장이 장편 역사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우선 그랬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신의 그릇’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뤘다. 그릇을 빚기 위한 사기장들의 처절한 분투와 절망을 심도 있게 표현해 냈다. 황도사발(이도다완)에 얽힌 비밀도 소설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씨는 ‘신의 그릇’을 일본에서 출판했다. 이보다 3년 앞서 국내에서 펴낸 ‘우리 사발 이야기’를 ‘이도다완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때 “책을 쓰지 않고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병을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사발의 기구한 운명과 아직도 일본식 미학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 무관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조선사발은 잡기 아닌 무위적 아름다움 표현한 창조물” 2009년에는 우리 사발에 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일본 노무라미술관 관장이자 일본다도문화학회 회장인 타니 아키라와 함께 ‘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를 공저로 출간했다. 우리나라 각 부문에는 장인(匠人)이 많다. 그러나 신씨처럼 많은 책을 펴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열정과 도예를 향한 시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학론으로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사발 등에 무작위, 우연이란 말을 쓰는 데 대해 반박을 한다. 전형적인 잡기(雜技)가 아닌, 또 우연이 아닌 장인의 철저한 정신에 따라 흙을 골라 만든 무위적 아름다움과 자연미를 표현한 창조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처럼 일본 학자들이 왜곡시킨 우리 도자기의 본질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일본인 차인들에게 틈틈이 강연도 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활동 또한 활발하다. 1989년 일본 도큐백화점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초대전을 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일본 언론에 100회 이상 소개됐다. 그렇게 조선사발의 진정한 혼을 알리고 재현한 지 30년이 됐다. 지난 9일 경남 양산에서 잠시 서울에 온 신씨를 만났다. “도자기는 그릇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그릇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지요. 특히 차인들이 애용하는 사발은 그 시대 사기장의 정성과 우리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습니다. 그런 사발들이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이름을 가지고 찻사발의 황제로 대접받다가 일본의 국보와 보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씨는 이런 상황을 떠올리며 일본인들이 우리 사발을 국보와 보물로 지정한 까닭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의 시각이 아닌 한국적 미학으로 그 진면목을 연구해 나갔다. 이도다완의 원류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각 지방의 사발을 서로 비교하고 옛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도자기가 과거의 영광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다시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동시에 작용했다. 그러는 동안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의 미가 이도다완에 깊이 녹아 있음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잠시 그의 도력(陶歷)을 살펴보자. 1960년 그는 우리나라 도예계의 거장이자 전통 조선사발 재현의 선구자인 고 신정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정희 선생은 조선시대 이후 명맥이 끊긴 황도사발을 1968년에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서울 인사동 골동품 상인들이 신정희 선생이 내놓은 작품을 조선시대의 진품이라고 감정하며 어디에서 훔쳤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외가이자 고향인 사천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 강단에 잠시 서기도 했으나 도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모태신앙’처럼 자연스럽게 도예 후계자가 돼 현재 양산에 있는 ‘신정희요’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흙을 만지작거렸고 15세에 물레질을 했던 터라 그 뒤를 이어 조선사발을 재현해 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것은 28세 무렵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89년 도큐백화점 미술화랑에서였다. 이후 후쿠오카 이와타야백화점 미술화랑 초대전(1990년), 미쓰코시백화점 미술화랑 초대전(1991년), 도쿄 마쓰야백화점 미술화랑 초대전(1992년), 일본 NHK TV 초대전(1994년), 니혼 TV초대전(1995년) 등을 잇달아 열면서 일본에서 이름을 알린다. 특히 그는 1996년 함경도 회령지방의 도자기를 최초로 재현해 냈는데, 그 과정이 NHK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영됐고 KBS TV ‘한국의 미’ 프로그램 등 각종 매체도 ‘신한균 사기장의 작품세계’를 소개했다. 회령도자기 재현 과정과 관련해 그는 일본 후쿠오카 당진소(唐津燒)전시회에서 오고려(奧高麗)라는 이름의 도자기를 보면서 회령지방의 도자기를 수년간 연구하게 된다. 일본에서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을 샅샅이 뒤지다가 놀라운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한다. 임진왜란 훨씬 전에 지금의 북한 땅 회령에서 왜구에게 납치된 사기장들이 ‘오고려, 조선당진’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오고려의 오(奧)자는 오지를 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989년쯤 일본의 한 미술관에서 개최한 일본 고유의 옛 도자기를 관람할 때였습니다. 그 전시회장에는 아주 특별한 기법의 도자기가 있었고 분류명으로는 ‘오고려(奧高麗·오크코리아), 조선 당진(唐津·가라쓰)’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사발을 고려다완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오고려’란 조선의 오지에서 온 도자기를 뜻합니다. 조선 가라쓰 역시 조선에서 온 사기장이 빚은 도자기를 말합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은 섭씨 1600도 이상의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굽는 기술이 없었으며, 조선에서 끌려간 도예가가 일본에 그 기술을 전수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유신 이후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도자기를 해외에 팔아 국부를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우리한테 가져간 도자기 기술이 조선을 향한 칼날로 되돌아왔다”고 개탄했다. 신씨는 또 “세월이 지난 지금 일본 국보 기자에몽 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는 일화가 있는 일본 중요문화재 쓰쓰이쓰쓰 이도 등의 원산지가 모두 한국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도는 그저 막사발로 불리며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이도다완을 황도사발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 고유의 진정한 이름을 찾기 위한 문제 제기 차원에서다. 혼자서 분류명을 짓는 것은 무리이며 도자사학자들과 공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달 22일~새달 10일 서울서 달항아리·사발 등 80여점 전시 그는 사발을 만들면서 조선의 달항아리도 꾸준히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는 22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백화점 개점 35주년 기념전을 연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백자 달항아리, 분청 달항아리, 회령 달항아리, 그리고 사발과 도판 등 80여점을 선보인다. 한국 여인의 치마곡선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좋은 사발, 좋은 달항아리를 만들고 특히 한국인이 만든 ‘도예백과사전’을 펴내겠다”고 답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신한균은 1960년 경남 사천에서 조선사발을 최초로 재현한 고 신정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4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일본 도큐백화점 미술화랑에서의 첫 전시 이후 거의 매년 초대전을 열고 있다. 후쿠오카 이와타야백화점 미술화랑(1990년), 미쓰코시백화점 미술화랑(1991년), 도쿄 마쓰야백화점 미술화랑(1992년), 일본 NHK TV초대전(한큐백화점 본점 미술화랑, 1994년), 니혼 TV초대전(메이데쓰백화점 미술화랑, 1995년), 부산 신세계갤러리(2013년) 등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함경도 회령도자기 국내 최초 재현(1997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도자기 자문위원(2004년), 청와대 귀빈 증정용으로 다기와 항아리 납품(2004~2007년), 차와 도자기 국제세미나 한국 측 대표로 강연(교토 국제교류회관, 2006년), 일본 노무라미술관 초청강연(2007년) 등을 했다. 저서로는 ‘신의 그릇1, 2’, ‘고려 다완’, ‘우리 사발 이야기’, ‘이도다완의 수수께끼’ 등이 있다.
  • 지금 사회의 모순·갈등은 모두 잘못된 역사교육 탓

    지금 사회의 모순·갈등은 모두 잘못된 역사교육 탓

    “국사 교과서 논란, 세월호 참사…. 지금 일어나는 모든 모순과 갈등은 잘못된 역사 교육이 그 뿌리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67)이 ‘역사 바로보기’를 여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 첫 작품으로 역사 에세이 ‘염불처럼 서러워서’(작은숲)를 펴냈다. 작가는 적폐의 근원을 일제로 규정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000년 전 궁예의 좌절부터 잘못된 역사가 쌓이고 쌓여 폐단이 불거진 것이지만 모든 적폐의 뿌리는 친일이나 친일 청산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일제 치하를 1876년 병자늑약(강화도조약) 때부터라고 본다. 130년이 훌쩍 넘는 동안 단 한 명의 친일파도 단죄하지 못했다. 청산은커녕 정치,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친일파 후손들이 득시글거리며 주도권을 쥐고 있다. 작가는 “이런 자들이 다스리는 이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라고 말한다.(36~39쪽) 작가는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인물, 사건을 사료와 증언 등을 토대로 바로잡으려 했다. 백제의 제1서울은 중국 산둥성 룽청현(山東省 榮成縣)이고 제2서울은 부여다, 가짜 중을 의미하는 땡초는 조선시대 혁명 승려들의 모임인 당취(黨聚)에서 유래했다 등 낯선 내용들로 가득하다. 궁예, 묘청, 신돈, 이징옥, 김개남, 서장옥, 최서해 등 승자들에 의해 후대에 잘못 알려진 패자들도 새로이 되살렸다. 보편이 아니라 보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 복개공사가 아니라 부개공사 등 잘못 쓰이고 있는 말들도 짚었다. 작가는 “승자들에 의해 구체적 사실 자체가 왜곡돼 버렸다”면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된 사실이 진짜 사실로 둔갑해 통용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작가는 1965년 고3 때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피해 입산(入山)했다.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의해서라기보단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역사 바로보기’ 작업을 준비했다. 30~40년간 서울의 청계천, 인사동 등 고서점 밀집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책은 상상이나 추론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단 한 줄의 기록일지라도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걸 찾는 게 지난한 싸움이다. 더구나 패자의 기록은 역사의 승자들이 전부 없애 버려 더욱 찾기 힘들다.” 작가는 그간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역사소설을 집필하려 한다. “이번 에세이는 문학 작업의 전 단계다. 못다 한 얘기를 소설로 쓰려 한다. 죽을 때까지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해서 쓰겠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공직사회 청렴도 향상을 위하여/ 지상배(서울 서대문서 홍은파출소 경사)

    공직사회 청렴도 향상을 위하여/ 지상배(서울 서대문서 홍은파출소 경사) 얼마 전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최근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군도’라는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의 내용은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한 조선 철종시대 힘없는 백성편에 서서 세상을 바로 잡고자 했던 군도의 이야기로 조선시대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처럼 탐관오리는 탐욕이 많아 남의 것을 빼앗고 부정비리와 부패를 일삼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청백리를 제도적으로 운영해 청렴한 관리중 산 사람은 염리 또는 염근리라 불렀고 사망한 사람은 청백리라 했다. 청백리가 되면 본인의 영광은 물론이고 자손들에게도 벼슬을 주는 등 여러 혜택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500년 역사에서도 청백리가 217명에 그친 것을 보면 당시 공직사회가 그다지 깨끗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요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렴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청렴한 사람 또는 청렴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최근 공무를 수행하는 공직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언론 등 대중매체를 통해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음주운전, 성추행, 도박 등과 같은 말들이 ‘공직자들 기강해이’ 라는 제목아래 뉴스, 신문 등에 자주 보도되고 있다. 타의 모범이 되는 공직자에 대한 보도내용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대다수의 공무원이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몇몇의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대다수의 행적이 무마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몇몇의 석은 사과들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공공기관이고 공직윤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청렴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청렴해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겨우 성취할까말까 한 일이다. 그러니 공복을 입고 공직자로서의 일할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마음속에 투명한 공직자로서의 성품을 새기고 대 국민 봉사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청탁이나 부정과 결탁된 유혹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이라고 믿는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고 무심코 행한 사소한 부정들, 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 없이 받아온 작은 사례로 말미암아 청렴이라는 고귀한 마음은 쉽게 상처 받고 비로소 공든 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 것은 곧바로 국가와 국민에게 거대한 태풍이 만들어낸 부정과 부패의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쳐 국가가 마땅히 지켜 내야 할 그들의 행복을 한 순간에 파괴 할 것이다. 우리 경찰은 2014년을 ‘청렴도 향상 원년의 해’로 지정하였다. 이 슬로건처럼 힘찬 발걸음으로 경찰관이라는 공직자로서 함께 동참하여 청렴한 경찰의 공직사회가 조성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청렴도 향상’이 아니라 ‘청렴도 완성’ 되길 기도한다. =================================================== ※‘자정고 발언대’는 필자들이 보내 온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글의 내용은 서울신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에 대한 권한 및 책임은 서울신문이 아닌, 필자 개인에게 있습니다. 필자의 직업, 학력 등은 서울신문에서 별도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보내온 그대로 싣습니다.
  • [新 국토기행] 청주

    [新 국토기행] 청주

    마한의 영토였던 청주는 삼국시대를 맞아 상당현(上黨縣)이라고 칭해지며 삼국이 각축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이 청주 땅을 번갈아 지배하면서 청주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모두 출토됐다. 이에 많은 사람은 ‘삼국 문화가 소통하는 지역’이라며 청주가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들어 서원경(西原京)으로 등급이 오르면서 교통과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됐고 이런 위상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서원경은 다섯 개의 작은 서울을 의미하는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지방의 중요 도시를 뜻한다. 청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1)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간행됐다. 조선시대 한때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청주가 쇠퇴기를 맞는 듯했으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다시 중심 도시의 명성을 되찾았다. 당시 경부선 개통은 수운 교통 중심 체제에서 육상로 교통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청주는 날로 융성해 1908년 충주에 있던 관찰사가 청주로 이전했다. 관찰사는 지금의 도청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청주의 도시화는 1910년 시작됐다. 이때 청주읍성 성벽을 허물고 그 돌을 이용해 하수도를 설치하고 간선도로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됐다. 박영수(76) 전 청주문화원장은 “청주읍성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가지 않고 청주읍성을 보러 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사업으로 인해 바둑판 같은 모양의 시구(市區)가 형성됐고 1920년 충북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정치·경제·산업 등 여러 측면에서 활성화됐다. 충북선은 1921년엔 청주~조치원 간, 1923년엔 증평까지, 1928년엔 충주까지 연결됐다. 1946년 미군정하에 청주읍은 청주부로 승격했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됐다. 그해 청주에는 해방 후 한강 이남 최초의 4년제 대학인 청주상과대학(지금의 청주대)이 개교했다. 당시 전문대학들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한 사례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해방 후 청주상과대학이 처음이었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불리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됐다고나 할까. 3년 후 청주부는 청주시로 승격했다. 당시 인구는 6만 4463명. 현재의 1개동 규모보다 적었다. 시로 승격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청주역, 형무소, 교량, 각종 군사시설이 많이 파괴됐고 휴전 후의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으로 도시 발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일부 지역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2개의 출장소가 설치됐고, 1995년에 출장소가 구청으로 승격됐다. 1차산업이 지배적이던 청주지역 경제는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개통, 청주산업단지 조성, 미호천 지역 농업개발사업, 청주~충주~제천 국도 포장, 대청댐 완공 등으로 급속하게 발전, 산업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박 전 원장은 “서울에 가려면 지금의 세종시인 충남 연기군 조치원까지 가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며 “시간이 한 시간가량 단축됐었다”고 회상했다. 산업단지 조성은 청주의 인구 급증을 가져왔다. 청주지역 제조업의 핵심인 청주산업단지는 1차로 1970년 11월 조성이 완료됐고 이후 단지를 넓혀 나갔다. 현재 36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총 근로자 수는 2만 7463명에 달한다. 청주는 도청 소재지로서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지만 타 지역 사람들에겐 작은 지방도시에 불과했다. 아직도 수도권의 적지 않은 사람이 충북의 도청 소재지를 충주로 아는 등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했으나 힘 있는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도세가 약해 중앙 정치권이 외면하면서 국가의 주요 사업에서도 항상 소외돼 왔다. 야구장 시설이 열악해 충청도 연고팀 한화이글스가 있는데도 1년에 프로야구 경기가 10경기 내외로 열리는 등 각종 인프라의 수준이 매우 낮은 실정이다. 2012년까지만 해도 백화점이 없어 많은 시민이 대전으로 원정 쇼핑을 가기도 했다. 지역 전체 인구에서 학생 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교육의 도시’로 알려졌을 뿐 오랫동안 내세울 게 없는 곳으로 인식돼 왔다. 한 시청 공무원은 “다선 의원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청주는 그렇지 못한 게 지역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청주시’로 통합되면서 이제는 중부권 핵심 도시로 성장할 가장 주목받는 지자체가 됐다. 우선 84만명에 육박하는 인구는 전국 230개 시·군·구 중 인구 규모 7위에 해당된다. 전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며 비수도권 중에는 경남 창원시(108만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행정구역 면적은 총 940.3㎢에 이른다. 전국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 가운데 2위로, 대전시(540㎢)보다 크고 서울시(605㎢)의 1.6배에 달한다. 공무원 1인당 담당 주민은 315명이다. 인구 80만명 이상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창원시 244명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예산은 1조 6000억원을 넘어 ‘광역시’에 버금가는 매머드급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창원시와 성남시, 수원시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다. 행정구역은 2개구 30개동에서 4개구 3개읍 10개면 30개동이 됐다. 오송첨단의료복합단지, 오창과학산업단지 등 완공된 산업단지 6곳과 조성 중인 산업단지 3곳을 거느리며 경제력도 막강해졌다. 이들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거나 입주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700곳이 넘는다. 옛 청원군에 위치한 청주국제공항과 KTX 오송역이 관내로 들어오면서 청주는 명실상부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할 기반도 갖추게 됐다. 내년 1월 KTX 호남선이 개통되면 오송역은 전국 유일의 KTX 경부·호남선의 분기역이 된다. 여기에 세종시와 청주공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구축되고 수도권 전철도 연결된다. 청주시는 최근 2030년까지 추진할 도시계획의 밑그림을 확정했다. 청원구는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정약수 주변에 세종문화치유단지를 조성하고 청주공항 주변에 항공정비 물류특화단지를 건설해 ‘문화와 항공의 고장’으로 꾸밀 예정이다. 상당구는 농촌지역에 전원지역특성화마을, 친환경유기농 특화단지, 치유 숲 등을 조성해 ‘자연이 숨 쉬는 생활권’으로 탈바꿈시킨다. 서원구는 충북대, 청주교육대, 서원대 등 교육자원을 활용해 교육특구를 조성하고 금강을 활용한 역사문화체험 수변공간을 만들게 된다. 흥덕구는 오송 첨단복지단지를 중심으로 바이오 및 화장품산업을 육성하게 된다. 청주·청원통합추진공동위원장을 지낸 김광홍(77) 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장은 “청주가 행정구역 통합을 통해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면서 “청주는 오송 바이오산업, 오창의 IT산업, 청주공항주변의 항공정비산업 등 미래산업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지역인 만큼 신수도권의 핵심 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청주를 전국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며 “오송역 명칭을 청주오송역으로 바꾸는 등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구봉, 율곡, 우계 역사문화벨트

    [서동철의 시시콜콜] 구봉, 율곡, 우계 역사문화벨트

    삼현수간(三賢手簡)은 구봉 송익필(1534∼1599), 우계 성혼(1535∼1598), 율곡 이이(1536∼1584)가 주고받은 편지를 후대에 4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나란히 한 살 터울인 구봉, 우계, 율곡은 서로 절친한 벗이자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대가(大家)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 현인의 손편지’라는 제목처럼 당시의 성리학 이슈를 치열하게 토론한 내용이 담긴 만큼 학술적·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아 2004년에는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구봉, 율곡, 우계가 살던 곳은 현재의 경기 파주시의 산남리, 율곡리, 눌노리다. 산남리는 출판단지와 맞붙은 심학산 아랫동네다. 심학산은 조선시대 구봉산(龜峯山)으로 불리며 구봉(龜峯)이라는 송익필의 호를 낳았다. 이곳은 지금 파주시지만 조선시대에는 고양 땅이었던 듯 하다. 그대로 율곡(栗谷)의 호가 된 율곡동(栗谷洞)은 임진각에서 멀지 않은 임진강변이다. 율곡동과는 지척인 우계(牛溪)는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눌노천(訥老川)변이다. 한강과 임진강은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합류하니 세 사람은 물길을 따라 사이좋게 줄지어 살고 있었다.개인적으로 파주 교하에 자리 잡은 것이 벌써 10년이 됐다. 내가 살아가는 고장의 역사와 그 자취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특히 구봉, 율곡, 우계처럼 우리 정신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킨 주역들의 체취를 가까이서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실제로 율곡리 화석정과 율곡의 무덤이 있는 자운서원, 우계를 배향한 눌노리의 파산서원을 종종 찾는다. 둘레길이 있는 심학산에도 자주 간다.율곡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하던 선조가 강을 건너려 할 때 화석정에 불을 붙여 폭우가 내리는 밤길을 밝혔다. 반면 우계는 달려오지 않아 노여움을 오래도록 샀다. 우계는 깊은 산으로 피란해 몽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산남리에는 ‘구봉산 아래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을 양성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구봉의 말년이 불우했던 때문인지 유허비 말고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율곡과 우계의 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爭)은 한국 철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상적 격돌의 하나이기도 하다. 율곡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고, 우계를 기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럴수록 친구지만 사상적으로는 방향을 달리했던 율우의 자취를 한데 엮어 의미를 부여하면 관심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구봉의 유적은 본격적인 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주시는 ‘구율우(龜栗牛) 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면 어떨까.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이웃 문화재가 시너지 효과를 거두는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14) 달걀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14) 달걀

    달걀은 고대로부터 생명과 부활을 상징했다. 고대 그리스, 이집트, 인도, 중국 등의 신화에서도 우주를 거대한 알로 묘사하거나 최초의 신이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역시 알에서 태어났다고 주몽신화가 이야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부활절에 달걀을 나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류가 달걀을 먹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00년 그리스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11세기쯤 교황청이 육식을 금지한 시기에도 달걀 요리는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금요일에 고기 대신 달걀을 먹는 관습도 생겨났다. 해마다 부활절에 달걀을 주고받는 관습은 17세기쯤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 이후 햄과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가 아침 식사로 각광받으면서 오늘날의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로 정착됐다. 동양에서 달걀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서양보다 빠른 편이다. 약 4000년 전에 인도,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에서 닭을 사육하면서 달걀을 먹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카시족과 마리오족은 부활의 의미를 지닌 달걀을 죽은 자와 같이 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근대에 달걀 요리가 급속히 발달해 오믈렛(오므라이스), 소바(메밀국수), 초밥, 카스도스(과자), 달걀 푸딩 등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400년 닭의 전래와 동시에 달걀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경주 고분군에서는 세계 최초로 썩지 않은 달걀 껍데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달걀 조리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규곤시의방’(閨?是議方), ‘주방문’(酒方文) 등의 서적에 등장한다. 난탕법(수란), 알찜, 난적법, 팽란, 알쌈 등이 기록돼 있으며 이 밖에도 지단을 만들어 고명으로 쓰거나 전을 부치는 데 이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 후반 축산 기술의 발달로 알을 많이 낳는 닭 품종이 보급되면서 우리 식탁에 흔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달걀은 닭이 낳은 알(계란, 鷄蘭)이라는 뜻으로 ‘닭의 알→닭이알→달걀’ 순으로 변화됐다. 전라도에서는 ‘닥알’, 제주도에서는 ‘독새끼’라는 사투리가 있고 북한에서는 ‘닭알’로 부르기도 한다. 서양의 속신(俗信)에서는 일몰 후에 알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거나 팔러 나가는 것은 불길하며 알 꿈은 악운의 전조로 생각한다. 영국에서 ‘에그 댄스’는 눈을 가리고 흩어놓은 알을 밟지 않고 춤을 추는 것으로 매우 곤란한 일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에서 달걀은 중요한 사물이나 희망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희망이 없거나 딱한 처지를 비꼬기도 하는 말이다. ‘달걀노른자’는 어떤 사물이나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뜻하며 ‘내일 닭보다 오늘 달걀이 낫다’는 이익의 의미도 있다. 반면 ‘조막손이 달걀 떨어뜨린 셈’, ‘곯은 달걀이 꼬끼오 하거든’ 등은 희망이 없거나 어려움을 비꼬는 말이다. 라틴어에 ‘달걀에서 사과까지’는 연회에서 처음에 달걀이 나오고 마지막에 사과가 나온 데서 유래한 말로 ‘풀코스’를 뜻한다. 달걀은 완전식품에 가장 가까운 식품이다. 우리 인체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한 개의 달걀에는 단백질, 지방과 리보플래빈, 니아신, B12 등 11종의 비타민과 광물질이 포함돼 있다. 지방 중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 함량은 약 60% 정도다. 반면 달걀 1개의 칼로리는 72㎉(전란 기준)에 불과하다. 단백질에는 류신, 아르기닌 등의 아미노산이 풍부하며 이를 이용한 스포츠용 보충제도 판매되고 있다. 난백에 함유된 생리 활성 물질로는 오브알부민, 오보트랜스페린, 라이소자임 등이 있으며 이들은 주로 항균 활성, 항고혈압, 면역 조절 등의 효과를 발휘한다. 난황에 함유된 루테인, 제아잔틴, 면역글로불린 등은 생리 활성 작용을 한다. 루테인 및 제아잔틴은 눈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화와 관련된 안 질환의 발생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이들 물질은 백내장 발생의 위험도를 감소시키고 노화에 의한 황반변성,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야가 흐릿해지고 일그러지는 현상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역글로불린(Ig)Y는 여러 종류의 항박테리아, 항바이러스, 박테리아 부착 억제 효과가 있다. 강근호 농촌진흥청 축산물이용과 이학박사 ■문의 douzirl@seoul.co.kr
  • 망원정 가는 길 훨씬 편해졌소

    망원정 가는 길 훨씬 편해졌소

    조선시대 왕과 선비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한강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망원정(望遠亭)에 오르기가 쉬워졌다. 마포구는 망원정 진입로 공사와 망원동~한강을 잇는 ‘망원초록길’ 조성을 마무리했다고 8일 밝혔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1425년 계속된 가뭄 때 농민들을 걱정한 세종이 이곳에 들르자 때마침 들판에 단비가 내려 기쁘다는 뜻에서 희우정(喜憂亭)이란 간판을 달았다. 이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크게 고치고 산과 강을 잇는 아름다운 경치를 멀리까지 바라본다는 뜻의 망원정으로 바꿨다. 1925년 대홍수와 한강 개발로 자취를 감췄다가 그 터가 서울시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다. 1989년 정자를 복원했지만 입구인 ‘솟을삼문’이 강변북로와 접한 데다 합정동 주택가 안쪽에 치우쳐 찾아가기 어렵고 주변에 벽돌공장과 건설 자재 판매장이 자리해 경관을 해친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에 따라 구는 서울시의 망원초록길 조성 사업에 망원정 진입로 개설과 주변 환경 개선 공사를 포함하도록 줄곧 요청했다. 망원초록길 사업은 망원·합정동에서 한강으로 가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강변북로 일부를 지하화하고 지상에 녹색 보행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시는 요청을 받아들여 망원정으로 진입하는 광장형 소나무숲길을 만들고 벽돌공장을 이전했다. 또 강변북로를 가리기 위해 성토작업과 함께 나무를 심었다. 회전식 교차로, 과속방지턱, 요철형 광장 조성 등 교통안전시설도 확충해 안전을 배려했다. 성경호 구 공원녹지과장은 “10일 오전 10시 망원정 마당 개장식을 갖는다”고 반겼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장원 급제의 꿈

    장원 급제의 꿈

    5일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제21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 참가자들이 열심히 답지를 쓰고 있다. 서울시는 선조의 선비정신을 되새기고자 매년 과거 재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 [新 국토기행] 성곽따라 뚜벅뚜벅… 이야기보따리 재잘재잘

    [新 국토기행] 성곽따라 뚜벅뚜벅… 이야기보따리 재잘재잘

    ●화성 & 화성행궁 도심 한복판에 있는 팔달산을 중심으로 5.7㎞에 걸쳐 있는 화성은 조선시대 성곽 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성문, 누대 등 건축양식이 동양 성곽의 웅대함과 서양 성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화기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춰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축성된 성곽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원시는 시민과 관광객들을 위해 성곽을 잇는 둘레길을 조성했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수원에는 ‘화성성곽둘레길’이 있는 셈이다. 코스는 서남암문(화양루)~서장대~화서문(서문)~장안문(북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창룡문(동문)~봉돈~동남각루를 잇는다.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시간 정도이며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길이 험하지 않아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화성의 북쪽 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문루의 높이가 13.5m, 너비가 9m에 달한다.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보다도 크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으나 1975년부터 5년간 복원했다. 또 눈여겨볼 만한 것은 7개의 아치형 수문을 거느린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다. 화홍문은 7칸의 홍예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 문루를 세운 것이다. 연못을 끼고 있는 방화수류정 주변은 경치가 아름다워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팔달구 행궁동에 있는 ‘화성행궁’은 정조가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 우리나라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행궁으로 꼽힌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리기도 했다. 일제가 훼손한 것을 화성 축성 당시 행궁을 비롯한 건축물 모습과 특징까지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주요 건물 482칸을 복원했다. TV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 등이 촬영되는 등 영화 촬영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 신풍루에서는 ‘무예 24기’ 공연을 볼 수 있다. 무예 24기는 조선 정조시대 때 지상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해 만든 24가지 무예로, 무예 교과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훈련도감, 장용영 등 중앙 군영을 비롯해 전국 군영에서 사용됐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크고 활달한 동작으로 단호하고 강인한 힘을 발산하는 게 무예 24기의 특징이다. 매주 일요일 2시 장용영의 수위 의식도 열린다. 정조대왕의 친위 부대였던 장용영 군사들의 화성행궁 수위 및 훈련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토요일에는 궁중무용, 무등돌이, 전통 줄타기 등의 상설 공연도 펼쳐진다. 장용영 수위 의식과 연계해 진행되는 정조대왕 거둥은 정조의 능행차를 축소한 것으로 매월 둘째, 넷째 주 일요일에 시연된다. ●공방거리 화성행궁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400m 구도로는 5년 전부터 공예작가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공방거리가 형성됐다. 규방공예와 한지, 서각, 칠보, 가죽 등의 공예공방과 갤러리 30여개가 자리 잡고 있다. 주말에는 거리 판매대가 설치되고 공예 체험 행사와 벼룩시장, 다양한 먹을거리 판매 행사 등이 마련돼 화성행궁을 찾는 관광객들의 코스로 자리잡았다. 신상옥 감독의 1961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실제 촬영 장소였던 한옥, 수원 최고의 헌책방 등 골목마다 이야기를 간직한 보물이 숨어 있다. ●광교 호수공원 광교신도시 내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 주변을 가꿔 조성한 광교호수공원도 새 명소로 떠올랐다. 호수공원의 전체 면적은 202만 5418㎡로 일산 호수공원(103만 4000㎡)보다 2배가량 크다. 광교 호수공원은 위락시설과 숙박시설이 난립하던 기존 저수지를 도심 속 힐링공간으로 새롭게 변모시켰다. 특히 저녁이면 호수와 광교신도시가 어우러진 야경이 장관을 이룬다. 광교호수공원은 올해 최고의 경관으로 뽑혔다. 국토교통부가 주최한 ‘2014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전국 50여개의 경관 우수작 가운데 종합 1위로 선정됐다. ●광교산 광교산(해발 582m)은 빼어난 경관은 아니지만 부드럽고 완만한 산세에 등산코스가 다양해 하루 5만여명의 등산객이 찾는 등 인기가 높다. 경기대 정문 또는 반딧불이 화장실 앞을 시작으로 형제봉~시루봉~통신대~지지대 13㎞에 이르는 코스 등 10개의 코스가 있다. 광교산에 눈이 쌓인 모습을 일컫는 ‘광교적설’은 수원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광교산에서 3㎞ 떨어진 곳에 화성행궁이 있는데 고려 궁터와 백제 온조왕의 숙소인 백제행전도 광교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허준의 지혜 축제로 부활

    허준의 지혜 축제로 부활

    조선시대 명의 허준(1546∼1615)이 강서구의 밤하늘을 수놓는다. 강서구는 오는 11~12일 열리는 ‘제15회 허준축제’를 맞아 10월 한 달 동안 허준박물관을 중심으로 가양동 일대에 허준 테마등을 설치한다고 1일 밝혔다. 테마등이 설치되는 곳은 허준박물관과 대한한의사협회 앞 50m와 양천로 55길 650m, 구암공원 주변 300m 등 모두 1㎞ 구간이다. 허준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주민의 흥미를 유발함으로써 축제 분위기를 한층 돋우기 위해서다. 이번 허준축제 슬로건인 ‘명의 허준, 세상을 치유하다’의 의미를 담아 주민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시간도 마련할 예정이다. 구 관계자는 “허준 테마등으로 불을 환하게 밝힌 밤거리를 걸으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보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면서 “이번 허준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주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허준축제는 인물 중심의 행사를 뛰어넘어 지구촌 건강·문화축제로 한 단계 도약해 오감(五感)으로 느끼며 치유할 수 있는 각종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허준추모제례를 시작으로 동의보감 힐링 요리대전, 허준 뮤지컬, 한약재 썰기, 한방 약장 전시회, 무료 한방진료 등과 같은 허준 관련 체험행사는 물론 화려한 지구촌 문화공연까지 선보이게 된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야경꾼일지’ 서예지, 정일우 향한 비극적 일편단심 웃을 날 올까

    ‘야경꾼일지’ 서예지, 정일우 향한 비극적 일편단심 웃을 날 올까

    배우 서예지가 MBC 월화드라마 ‘야경꾼일지’에서 지고지순한 순애보에서 활활 타오르는 복수의 화신을 오가며 팔색조 같은 연기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극중 정일우를 향한 일편단심이 어떤 결과를 얻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9월 30일 방송된 ‘야경꾼일지’ 18회에서는 월광대군, 이린(정일우 분)에 대해 강렬한 집착을 키워가는 박수련(서예지 분)의 모습이 담겼다. 수련은 이린과의 혼사를 위해 사담(김성오 분)과 부적절한 거래도 주저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특히 지난 17회 방송에서 이린에게 버림 받고 오열했던 그는 더욱 적대적인 태도로 주변을 바라보게 됐다. 현재 수련에게 가장 큰 적은 이린과 정을 나누고 있는 도하(고성희 분)다. 그는 도하 앞에만 서면 평소의 모습을 거두고 차갑게 돌변했다. 십 수 년을 짝사랑했던 이린이 도하에게 마음을 주자 마음에 한을 품게 된 것. 심지어 지난 방송에서 이린이 억귀에 씌어 자신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안 후 분노는 더 커졌다. 도하를 이린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혈안이 됐으며, 이를 위해 주술이 걸린 제웅을 만들어 도하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수련에게 위기가 닥쳤다. 월광대군의 이복형이자 폭군인 기산군(김흥수 분)이 수련을 자신의 첩을 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수련은 어떻게 해서라도 기산군과 연을 맺고 싶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안 사담은 물러설 곳 없는 수련을 꼬이기 시작했다. 사담은 후궁으로 들어가지 않게 도와주겠다며 매란방주가 될 것을 권했다. 이 제안은 수련을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앞서 이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담의 조종을 받고 있는 모연월(문보령 분)에게 혜민서 약재전매권을 넘기고 가족을 위기에 몰아 넣었던 수련이 또 한 번 사담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서글픈 순애보에서 복수의 화신을 오가는 수련의 캐릭터 변화도 흥미를 자극한다. 수련은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며 혜민서를 관리해왔으나, 사랑 때문에 마음에 칼을 품었다. 그는 이린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도하를 해할 각오까지 하는 등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순수하기만 했던 수련의 사랑이 원망과 집착이 더해지면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한편 서예지, 정일우, 정윤호, 고성희 등이 출연하는 ‘야경꾼일지’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귀신을 부정하는 자와 귀신을 이용하려는 자, 그리고 귀신을 물리치려는 자, 세 개의 세력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로맨스 활극으로, 매주 월, 화요일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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