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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2년간 묻혀 있던 금사제작·직금제직 기술 살렸다

    282년간 묻혀 있던 금사제작·직금제직 기술 살렸다

    “그동안 금실과 금실을 넣어 짜는 수동 직기가 없어 조선시대 왕실 복식을 복원할 수 없었습니다. 전통기술 복원 분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데다 전통 섬유 유물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성과입니다.” 한국 복식연구가 심연옥(55) 한국전통문화대 전통섬유복원연구소장이 조선시대 영조 때 맥이 끊긴 ‘금사(絲) 제작과 직금제직(織金製織) 기술’을 국내 최초로 복원했다. 사치를 싫어하던 영조가 1733년 직물에 문양을 넣는 데 쓰는 문직기(紋織機) 사용을 금지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282년 만이다. 심 소장은 11일 충남 부여 한국전통문화대에서 금사 제작과 직금제직 기술 복원 과정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그는 40년 전부터 스승 고(故) 민길자 교수와 금으로 실을 만드는 금사 제작 기술과 직물 표면에 금사로 문양을 넣는 직금제직 기술 복원을 연구했다. 2011년 제자들과 팀을 꾸려 복원 작업에 본격 착수, 4년간 연구 끝에 성공했다. 금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 섬유공예에 사용됐다. 배지(背紙·맨 아래 종이)에 아교 등 접착제를 바르고 금박이나 은박을 붙인 다음 일정한 너비로 재단해 만든다. 직금 기술은 의례용 복식 등의 제작에 쓰였다. 지금까지 고려시대 불복장(佛腹藏·사리를 비롯한 여러 물건을 불상 내부에 넣는 의식), 조선 시대 궁중복식 등 수준 높은 직금 유물이 다량 발견됐다. 연구팀은 2011년 문헌 조사를 통해 전통 금사 제작 체계를 규명했고, 이듬해엔 한·중·일 3국의 금사 유물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기술 조사를 통해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금사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금사 제작에 중국은 뽕나무 껍질로 만든 상피지나 대나무를 이용한 죽지, 일본은 산닥나무 종류의 껍질로 만든 안피지를 배지로 사용한 데 반해 우리는 한지를 썼다. 2013년엔 배지, 접착제, 금박 등 재료의 최적 요건을 찾아내 금사를 만들었고, 지난해엔 수공(手工) 문직기를 제작해 직금제직 기술을 복원했다. 보물 1572호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상 복장 직물인 고려시대 남색원앙문직금능(色鴛鴦紋織金·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조선시대 연화문직금(蓮花紋織金) 등 금사 직물 3점도 원형을 되살렸다. 심 소장은 “전통 직금 복식 분야는 물론 현대 공예 기법과의 접목을 통해 전통문화의 다각적인 활용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앞으로 기술을 숙달하고 장인으로 키워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서울광장] ‘다섯 살 훈이’ 오세훈이 돌아왔다/정기홍 논설위원

    [서울광장] ‘다섯 살 훈이’ 오세훈이 돌아왔다/정기홍 논설위원

    무상복지 논란의 중심에 섰던 두 거물 정치인이 며칠을 사이에 두고 다시 돌아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오랜 해외 칩거에서 지난달 말 언론에 얼굴을 드러냈고 문재인 대표는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수장이 됐다. 서로는 무상복지 정책의 대척점에 자리해 왔다. 예상대로 오 전 시장은 “정치복지 논쟁은 끝났다”고 했고, 문 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가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상반된 입장을 밝혔다. 오 전 시장은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2011년 8월 주민투표 승부수를 던졌지만 패해 시장직을 내놓았다. 당시 투표 참가율이 개표 기준 투표율(33.3%)에 못 미쳐 투표함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보수 진영의 환대가 있을 법하건만 미지근하다. 투표에 시장직을 걸어 야권에 넘겼다는 원죄 인식이 아직 저변에 깔렸다. 그도 “섣부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다섯 살 훈이’란 비아냥 섞인 별명도 받았다. 문 대표는 박근혜 정부를 조준했다. “꼼수 증세에 맞서 서민의 지갑을 지키고 복지 줄이기를 반드시 막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같은 시간 박 대통령은 복지증세 논란에 “경제성장 없는 복지 증세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문 대표의 주장과 여당 내의 법인세율 인상 등 증세 주장에 쐐기를 박은 측면이 다분해 보인다. 시간을 되돌려 보자. 전면 무상급식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무상 시리즈로 덩치를 키우며 선거 정국을 강타했다. 야권은 무상보육·급식·의료와 반값등록금을 ‘3무 1반’으로 묶어 지지를 호소했고 유권자에게 제대로 먹혔다. 대기업과 고소득자를 겨냥해 9(서민) 대 1(부자)의 싸움으로 불렸다. 야당의 원내대표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성과”라며 부추겼다. 복지 욕구의 둑이 터지자 여야 공히 퍼주기식 공약을 쏟아냈다. 돈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는 종이 위의 숫자놀음에 불과했고 선택적 복지는 온데간데없어졌다. 누가 복지 공약을 많이 하느냐의 경쟁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탄생했다. 그로부터 2년. 복지 논쟁은 2라운드를 맞고 있다. 이번에는 부족한 복지 예산의 해결책을 둔 진영 싸움이다. 돈이 나올 곳이 마땅찮으니 대책은 녹록할 리 없다. 전체 가계 부채는 1100조원을 앞두고 있고 세계 경기 침체와 엔저 현상 등은 대기업의 경영 여건을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있다. 최근 2년간 20조원의 세수가 구멍 났다. 쌓아 놓아 논란이 되는 사내 유보금과 별개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30대 대기업이 올해 내야 할 법인세는 지난해에 비해 15% 줄어든다고 한다. 여기에다 담뱃세 인상과 연말정산 사태, 건강보험 개혁안 파동은 ‘꼼수 증세’ 논란에 불을 지폈다. 복지 증세 논란은 이러한 여건에서 출발한다. 복지는 우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경기불황으로 우리의 복지모델인 유럽의 국가들도 예산을 감당하지 못해 혜택을 줄여 가는 추세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조세 저항에서 촉발됐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민란 발생도 세금 수탈에 따른 것이었다. 정치는 국민의 눈과 입을 보며 하는 것이다. 문 대표의 ‘복지 전면전’ 선언이 정략적 접근이라면 목소리를 고를 일이다. 경제성장 후 복지증세라는 박 대통령의 교과서적인 언급은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친노의 부활과 대통령의 고집으로 뇌리에 박힐 뿐이다. 단시일 내에 경제가 좋아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돈이 부족한데 메어쳐 본들 돌다리 더 놓기란 힘들다. 정치권의 잇(利)구멍에 눈먼 공방에 오 전 시장을 떠올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진영 간에 벌어지는 격한 입싸움 구도에서 본류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복지예산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인 논쟁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쉽게 끝날 것도 아니며 격해질 가능성은 커져 간다. 무상복지를 내팽개칠 게 아니라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도 방법이다. 어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대표단이 첫 회동을 갖고 무상복지와 관련해 당정청 협의체를 운영하기로 했다. 문 대표는 이날도 “증세 불가는 이중의 배신”이라며 각을 세웠다. 논란이 증폭되는 복지 구조조정과 법인세율 인상은 어쨌든 여야가 입장을 내놓아야 할 사안이다. 정치권이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힘겨루기로 일관한다면 2년 전 “시대정신을 놓쳤다”며 공격했던 오 전 시장의 손가락질을 되받아야 할 것이다. hong@seoul.co.kr
  • [씨줄날줄] 증도가자(證道歌字)/서동철 논설위원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는 당나라 승려 현각이 남종선(南宗禪)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으로부터 깨우친 도(道)의 경지를 설파한 ‘증도가’의 구절을 송나라의 남명 법천 선사가 해설한 책이다. 여말선초의 문인 최이는 이 책의 말미에 ‘참선을 배우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으로 입문하고 높은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도 전래가 끊겼으니 각공(刻工)을 모아 주자본(鑄字本)을 바탕으로 다시 판각하여 길이 전하게 한다. 때는 기해년(1239) 9월 상순’이라고 적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만든 책은 ‘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의 승려 경한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이다. 경한이 입적하고 3년이 지난 고려 우왕 3년(1377)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냈다. 당시 간행된 상하 2권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권이다. 하지만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2010년 ‘직지심체요절’에 앞서 인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2점이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최이가 언급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목판본의 원본인 주자본을 찍은 금속활자라는 주장에 따라 학계는 한순간 진위 논쟁에 휩싸였다.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논란이다. 이때 공개된 ‘증도가자’가 ‘직지심체요절’에 앞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하는 데 썼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는 적지 않았다. 목판본 ‘증도가’에 나타난 서체와 공개된 금속활자의 서체는 대부분 일치했고, 조선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밝을 명(明) 자의 닮은꼴 고체(古體)가 쓰인 것도 신빙성을 높이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증도가자’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특히 한문학자인 이상주 중원대 연구교수는 12점의 이른바 ‘중도가자’와 ‘증도가’는 서법적으로 한 글자도 같지 않다고 주장하며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금속활자의 가치가 치솟으며 중국산 가짜가 횡행하는 당시 상황에서 ‘증도가자’의 소장자가 여러 차례 문화재 도굴이나 모조품 논란에 휩싸였던 당사자라는 것도 부정적 기류를 형성한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다시 ‘증도가자’가 진품이라는 경북대 산학협력단의 연구용역 보고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제출됐다고 한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은 활자에 묻은 먹의 탄소연대 측정치다. 국립지질자원연구원의 측정 결과 1033년에서 1155년 사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증도가자’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도 좋고, 아니라도 나쁠 것 없다. 우리나라는 ‘직지심체요절’은 물론 계미자(1403)와 갑인자(1434)조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1434~1444)보다 앞서거나 비슷한 금속활자 왕국이기 때문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新국토기행] 경남 진주시

    [新국토기행] 경남 진주시

    ■ 남강변 따라 볼거리 한가득 ●김시민 장군이 왜군에 맞서 싸운 ‘진주성’ 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진주 8경 가운데 하나다. 진주성은 본성동과 남성동 일대 남강변을 따라 조성됐다. 언제 쌓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토성이었던 것을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해 1379년(고려 우왕 5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직전(1591년)에 외성을 쌓았으나 흔적이 없고 현재는 내성만 복원됐다. 내성 둘레는 1760여m, 외성 둘레는 4㎞가량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592년 10월 3800여명의 군사로 왜군 2만여명을 물리친 진주대첩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듬해 6월 왜군과 2차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민·관·군 7만여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순절한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한 데 이어 1975년에는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 일부와 내성 성곽을 복원했다. 1979년 성 안팎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고 2002년 공북문을 복원했다. 1963년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절벽 위 우뚝, 빼어난 절경 뽐내는 ‘촉석루’ 진주성 안 남쪽 남강변 경치가 빼어난 절벽 위에 솟아 있다. 남장대나 장원루라고도 부른다. 전쟁 때 지휘본부, 평화 시절에는 관리들의 놀이터와 과거시험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했다. 1241년(고종 28년)에 목사 김지대가 처음 지은 뒤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1365년(공민왕 14년) 처음 건립됐다는 주장도 있다. 벼랑과 강 주변 풍경이 절경이다. 우리나라 3대 누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쪽에서는 평양의 부벽루, 남쪽에서는 촉석루를 꼽을 만큼 영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이다. 1948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돼 1960년 다시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누각 돌기둥은 창원시 촉석산 돌이다. 대들보는 오대산에서 벌목해 만들었다. 북쪽 현판 글씨는 영조 때 송하 조윤형이 썼다. 남쪽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것이었으나 민주당이 집권한 뒤 판을 깎고 유당 정현복의 글씨로 바꿨다. ●논개가 임진왜란 때 몸 바쳐 뛰어내린 ‘의암’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졌던 바위다. 촉석루 아래 남강 가장자리에 있다. 윗면은 편평하며 크기는 가로 3.65m, 세로 3.3m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1593년 6월 29일 논개가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해 왜장을 이 바위로 유인한 뒤 두 팔로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순국했다. 논개는 왜장을 껴안은 손가락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개 손가락에 가락지를 꼈다고 전해진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의암’(義巖)이라고 부르게 됐다. 1629년(인조 7년) 정대륭이 바위 벽에 ‘의암’이란 글씨를 새겼다. 2001년 9월 27일 경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됐다. ●남강댐 건설 때 만들어진 인공 호수 ‘진양호’ 우리나라 다목적댐 1호인 남강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진주시 판문동과 대평면, 내동면, 수곡면 등에 걸쳐 있다. 덕천강과 경호강이 만나 호수를 이룬다. 1936년 착공한 뒤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1970년 7월 길이 975m, 높이 21m로 완공됐다. 그 뒤 길이 1126m, 높이 34m로 보강 공사해 1999년 완공했다. 댐 유역 면적은 2293.42㎢, 둘레는 328.01㎞다.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좋아 일년 내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호수 주변에 20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우거져 있고 물홍보전시관, 동물원, 365계단, 전망대, 소싸움장 등이 있다. ●각양각색 유등 띄워 소원 비는 ‘남강유등축제’ 해마다 10월 남강과 진주성 일대에 각양각색의 화려한 유등 조형물을 설치, 전시해 소원을 비는 유등 놀이 축제다. 물, 불, 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경관이 연출돼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몰린다. 개천예술제 행사의 하나로 열리다가 2000년부터 진주남강유등축제로 개최되고 있다. 진주 유등은 1592년 진주대첩 당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군사들이 남강에 유등을 띄워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 전술과 성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 등으로 활용했다. 1593년 진주성이 함락돼 성을 지키던 병사와 백성 7만여명이 숨진 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유등을 띄우는 행사가 축제로 계승됐다. 역사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과 유등을 창의적으로 결합해 성공한 축제다. 2006~2010년 5년 연속 최우수축제, 2011~2013년 3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됐다. 지난해 명예대표축제에 오른 데 이어 올해는 글로벌육성축제로 선정됐다.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의 1만 7930.66㎡ 부지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이다.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탑의 선을 고건축 양식으로 조화시켜 현대식 2층 건물로 지었다. 1984년 11월 개관했다. 전시실은 상설(임진왜란실)과 기획(두암실)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현자총통(보물 제1233호) 등 3500여점의 소장 유물 가운데 460여점을 전시했다. 특히 국내외 여러 곳에 분산된 임진왜란 관련 전적·서화류, 도자류 등 많은 유물을 모았다. 두암실(김용두실)에는 재일교포 김용두씨가 1997년부터 3차례 기증한 유물 179점 가운데 100여점을 전시해 놨다. ●2700여종 식물과 4개 온실 갖춘 ‘경남수목원’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 야산 58㏊에 조성됐다. 산림 학술연구와 나무 유전자 보존, 주민들의 자연 학습 및 휴식 공간을 위해 만들었다. 1993년 4월 5일 문을 열었다. 전문 수목원, 화목원, 열대식물원, 무궁화공원 등 우리나라 온대 남부 지역 수목 위주로 국내외 식물 2700여종을 수집, 보전하고 있다. 열대식물원과 난대식물원, 선인장온실, 생태온실 등 4개 온실이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산림박물관과 야생동물관찰원이 있다. 호수와 계곡, 언덕을 따라 수목원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숲 속에서 자연 학습을 하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녹색 휴식 공원으로 소문이 나면서 겨울철을 제외하고 평일 1000여명, 휴일에는 5000여명이 방문한다. ●진주성 북장대 아래 ‘인사동 골동품 거리’ 진주성 북장대 아래 남성동·인사동 일대 거리에 골동품을 거래하는 상점 20여곳이 늘어서 있다. 600m에 이르는 인사동 골동품 거리는 197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관광 명소가 됐다. 고문서를 비롯해 전적, 서화, 탁본류, 민속자료, 도자기, 조각품, 공예품, 석등 등 다양한 종류의 골동품을 사고판다. 경남 진주시는 도시 한복판에 맑은 남강이 흐르는 1000년 고도다. 임진왜란 때 온 시민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군에 맞서 싸웠던 구국, 충절의 고장이다. 1000년이 넘는 도시 역사만큼 명소와 사적지가 많고 문화예술도 번성했다. 1949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개천예술제는 한국 향토문화예술제 가운데 가장 오래된 행사다. ■ 눈과 입이 호강하는 먹거리 ●사골국으로 밥을 지어 독특한 진주비빔밥 진주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군인과 시민들이 전투 중 영양 보충을 하기 위해 소를 잡아 곰국으로 밥을 지어 먹었던 게 진주비빔밥의 시초다. 밥 위에는 육회와 숙주, 고추, 근대나물 등을 얹는다. 바지락을 다져 넣어 끓인 보탕국과 선지국이 비빔밥과 함께 나온다. 진주비빔밥의 독특한 맛의 비결은 사골국으로 밥을 짓는 데 있다. 장작불로 전통 무쇠솥에 밥을 짓는다. 밥에 얹는 나물 요리는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신선한 제철 나물로 만든다. 놋그릇에 담은 하얀 밥과 다섯 가지 나물이 어우러져 일곱 가지 색깔의 아름다운 꽃 모양을 나타낸다고 해서 꽃밥 또는 칠보화반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정승들이 진주비빔밥을 먹기 위해 1000리나 되는 진주를 자주 찾았을 만큼 유명하다. 해마다 5월 진주성 일대에서 진주비빔밥축제도 열린다. ●조선시대 관찰사에 대접하던 진주교방음식 조선시대 중앙에서 내려온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들을 접대하기 위해 진주교방청 연회장에서 차렸던 진주의 전통 한정식이다. 당시 연회장에는 술과 기생들의 노래, 춤이 곁들여졌다. 재료는 지리산 일대 청정한 농산물과 남해의 싱싱한 수산물을 사용한다. 술안주 위주의 음식으로 술과 함께 먹기 때문에 밥보다는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국물 음식이 많다. 갖가지 해물로 만든 해물찜과 해물전을 비롯해 조개구이, 백합탕, 갈비찜, 나물 요리 등 수십 가지 요리로 3~4차례 상을 푸짐하게 차린다. 진주냉면, 진주밀면 등 여러 가지 국물 음식과 조선잡채, 전복김치도 나온다. 겨자에 무치는 조선잡채는 발효돼 깊은 맛이 나도록 하룻밤 숙성시킨 뒤 먹는다. 음식물 보관이 어려웠던 시절에 지혜로운 요리법이었다. ●비린내 없고 담백하며 부드러운 장어구이 바다나 민물에서 나는 장어에 양념을 발라 구워 먹는 진주 지역 향토음식이다. 비린내가 없고 담백하며 맛이 부드럽고 고소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진주 장어구이는 석쇠에 올려 5분쯤 노릇노릇하게 초벌구이 한 뒤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대형 냉장고에 넣어 이틀 정도 급랭시킨다. 이 장어에 양념을 발라 다시 구워 내놓는다. 깻잎이나 상추에 싸서 먹는다. 양념구이는 장어 머리와 큰 멸치, 양파, 계피, 감초 등의 한약재를 넣어 푹 삶아 우려낸 육수에 간장, 고춧가루, 생강, 마늘, 참깨 등을 다져 넣어 만든 양념장을 발라 석쇠에서 5~7분쯤 굽는다. 양념을 3~5차례 발라 장어 살 속까지 스며들게 한다. 소금구이는 육수에 참기름, 마늘, 참깨 등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발라 굽는다. 진주성 근처 성북동 일대에 장어구이 전문 음식점들이 모여 있다. 진주 장어구이를 먹어 본 관광객들은 “독특하게 만든 양념과 장어구이가 잘 어우러져 느끼한 맛이 없고 구수하다”고 말한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국가권력 정통성의 상징’ 국새…붉은 빛깔 66년 현대사

    ‘국가권력 정통성의 상징’ 국새…붉은 빛깔 66년 현대사

    예부터 국새는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고려 말기 이성계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 새겨진 국새를 받고 나서 다음날 즉위식을 열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나라는 모두 다섯 번 국새를 제작했다. 국새 변천사를 살펴보면 전쟁의 상처와 압축성장을 비롯해 기록관리와 행정제도의 발달이라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느낄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9층 국무회의실 출입문 한쪽에는 커다란 잠금장치로 닫아 놓은 문이 하나 있다. 커다란 잠금장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3평 남짓한 작은 방이 나온다. 정면에는 꽤나 유행에 뒤떨어져 보이는 ‘대한민국 국새’라는 글씨 밑으로 금고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와 얽히고설킨 영욕을 함께한 ‘국가의 도장’인 국새를 보관하는 곳이다. 금고 안에서 보관함을 조심스레 꺼내면 봉황 두 마리가 무궁화 한 송이를 등에 얹은 모습을 한 국새가 드러난다. 한 손에 잡고 국새를 드는 순간 3.38㎏이나 되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 손으로 계속 들고 있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하루에 적게는 몇 십 장, 많게는 몇 백 장에 이르는 각종 임명장과 훈·포장을 숱하게 찍어내야 하기 때문에 붉게 바랜 탁자와 인주통이 국새실 한편을 채우고 있었다. 국새 관리는 행정자치부 의정담당관실이 담당한다. 먼저 대통령령에 따른 ‘국새의 사용’ 요건에 맞게 국새 날인 요청이 들어오면 타당성을 검토하고 국새를 찍는 일이 기본 업무다. 주로 공무원 임명장을 관리하는 인사혁신처, 훈장증과 포장증을 관장하는 행자부 상훈담당관실에서 공문이 도착하고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문서도 국새를 기다린다. 국새 날인의 달인들이 국새실에서 문서 한가운데에 ‘대한민국’이라는 인문(印文)이 선명히 드러나게끔 국새를 찍는다. ●한자로 쓴 유일한 1대 국새 행방은 오리무중 정부수립 이후 제1대 국새는 1949년 5월 5일부터 1962년 12월 31일까지 사용됐다.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고 한자로 쓴 유일한 국새다. 또 지금까지 제작한 국새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았다. 제1대 국새는 분실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떤 모양이었는지도 모른다. 분실했다는 사실 자체도 2005년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심지어 어떻게 해서 분실했는지조차 오리무중이다. 제2대 국새는 1963년 1월 1일부터 1999년 1월 31일까지 36년간 썼다. 처음으로 한글을 새긴 국새이자 최장수 사용 기록을 갖고 있다. 제2대 국새는 한국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했다. 거북이 모양을 한 손잡이로 고려·조선시대 전통 국새를 계승했다. 한글로 ‘대한민국’이라고 써 있지만 모양 자체는 한자체로 새겼다. ●훈민정음체로 새긴 3대… 손잡이 균열가 폐기 제3대 국새는 1999년 2월 1일부터 2008년 2월 21일까지 사용했다. 두 번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를 함께했다. 문화적 독창성과 국가 위상이 담긴 국새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반영해 ‘대한민국’을 훈민정음체로 새기고 손잡이도 쌍봉황 모양으로 변화를 줬다. 소재도 은에서 금 합금으로 바꿨다. 하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 손잡이와 인문 사이에 균열이 나타나 10년도 못 가 폐기됐다. 고도성장이 끝나가고 그 후유증이 나타나던 시대상과 닮아 있다. 국새 제작자의 사기 행각이 밝혀져 2년 9개월 만에 폐기된 제4대 국새는 정부로서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단봉(봉황 한 마리) 형태의 손잡이가 특징이다. 제작자 민홍규는 전통 기법으로 국새를 만들어야 한다는 계약 조건을 어기고 수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 현대적 방식으로 국새를 제작했다. 뉴타운, 영어마을 유치 등으로 국민 모두가 부자 되기에 혈안이 돼 있던 2008년 22일부터 2010년 11월 29일 사이 우리가 겪은 일이다. ●현재 위상 반영한 크고 무거운 5대 국새 2011년 10월부터 사용 중인 제5대 국새는 균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쌍봉황 모양의 손잡이와 인문이 분리되지 않은 일체형으로 만들었다. 3.38㎏으로 역대 최대 무게를 자랑한다. 크기 역시 가로 세로 10.4㎝로 전보다 0.5㎝ 커졌다. 선진국으로 도약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을 반영해 기존보다 더 무겁고 크게 제작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국새는 엄중한 관리 대상이다. 국새실 안에 있는 이중 금고에 더해 화재에 대비한 소방시설, 도난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갖춰져 있다. 정부서울청사 전체에 대한 보험과 별개로 국새실만 별도로 화재보험에 가입돼 있다. 제3대 국새가 사용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균열이 발생한 일을 교훈 삼아 제5대 국새는 손잡이인 인뉴(印?)와 아랫부분인 인문을 한 번에 주조하는 ‘중공일체형’(中空一體型)으로 제작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겨울 가족 나들이 어디로

    겨울 가족 나들이 어디로

    여행지 선정하기가 만만치 않은 계절이다. 날씨는 차고 볼거리는 많지 않다. 이럴 때는 실내 시설을 찾는 게 좋은 방법이다. 전국에 박물관, 미술관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가족과 함께 돌아볼 만한 독특한 체험 공간들을 추렸다. 강원 원주의 ‘뮤지엄 산’ ●조선시대 관찰사의 ‘사무실’은 어땠을까 원주는 조선 초기부터 500년간 강원 감영이 있던 도시다. 관찰사의 업무 공간이자 중앙의 정치 이념과 문화를 지역에 전하던 감영은 정보가 가득한 책도 출판했다. 자연스레 목판을 제작하고, 종이를 만들고, 책을 보관하는 기술도 발달했다. 원주 곳곳에 당시를 되돌아보는 문화 공간들이 늘어서 있다. 책을 만들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나무에 새긴 목판과 판화를 전시하는 고판화박물관, 한지부터 현대의 종이까지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뮤지엄 산(SAN), 책과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눈앞에 펼쳐 놓은 오랜미래 신화미술관이다. 고판화박물관 (033)761-7885, 뮤지엄 산 (033)730-9000, 오랜미래 신화미술관 (033)746-5256. 전남 목포자연사박물관 ●어린이바다과학관·근대 문화유산 ‘알찬 공부’ 목포는 박물관 투어에 맞춤한 도시다. 박물관 사이 거리가 가깝고, 자연사부터 수중고고학까지 테마도 다양하다. 갓바위 주변에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문학관, 남농기념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문예역사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등 박물관과 전시관이 모여 있어 도보로 이동하며 관람을 즐기면 된다. 아이가 있다면 목포자연사박물관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둘러보고, 차로 10분 거리인 목포어린이바다과학관까지 관람하는 코스가 무난하다. 여기에 목포의 상징 유달산, 구도심의 근대 문화유산, 목포진역사공원까지 둘러보면 알찬 목포 여행이 완성된다. 목포자연사박물관 (061)274-3655, 목포어린이바다과학관 (061)242-6359. 서울 국립한글박물관 ●한글 창제 원리부터 국어로 정착되기까지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난해 10월 9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에 문을 열었다. 2층 주전시실에선 ‘한글이 걸어온 길’을 주제로 한글 창제 원리와 한글이 국어로 정착되기까지 과정을 다양한 자료와 전시물을 이용해 소개한다.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현대미술로 새롭게 해석한 특별전 ‘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가 진행 중이다. 전시실 맞은편의 한글놀이터는 한글과 놀이를 결합한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전문 해설사가 동행하는 무료 해설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국립한글박물관 인근에 국립중앙박물관도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02)2124-6200, 국립중앙박물관 (02)2077-9000. 강원 속초 국립산악박물관 ●와, 박영석 대장님이 직접 쓰던 장비라니… 한국은 산악 강국이다. 19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에 오른 고 고상돈 대장을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를 배출했다. 속초 노학동에 세워진 국립산악박물관은 이 같은 한국의 등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박물관은 한국 대표 산악인 50여명의 발자취 등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2전시실 명예의 전당에는 고 박영석, 오은선 대장 등 5명의 산악인이 실제 사용하던 장비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암벽 체험실에선 전문가에게 인공 홀드(인공 암벽에 설치된 손잡이나 발디딤용 도구) 이용법과 자세, 이동법을 배우고 암벽 타기에 도전할 수 있다. 고산 체험도 이색적이다. (033)638-4459. 안산 대부도 유리섬·종이미술관 ●유리·한지로 내 작품 만들어 볼래요 안산의 대부도에는 순수한 감성을 일깨우는 체험 공간이 많다. 그 가운데 유리섬은 유리로 만든 예술 작품을 보고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리공예시연장에선 1200도가 넘는 가마에 유리를 녹이고 파이프로 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유리공예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종이미술관은 한지 공예 작품을 감상하고 체험하는 곳. 한옥 숙박 체험도 할 수 있다. 대부도 해안을 연결하는 ‘대부해솔길’ 4코스가 유리섬과 종이미술관을 지난다. 한적한 어촌마을을 구경하며 잠깐 걸어도 좋다. 이 밖에 베르아델 승마클럽, 안산어촌민속박물관, 정문규미술관 등도 볼만하다. 대부도 유리섬 (032)885-6262, 종이미술관 (032)887-0606. 전북 무주 태권도원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태권도 체험 공간 지난해 무주의 백운산 자락에 태권도원이 들어섰다. 태권도의 역사가 오롯한 태권도박물관,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 태권도 체험관 등 태권도의 모든 것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태권도원에는 도전의 장(체험 공간) 외에 태권도 수련에 필요한 도약의 장(수련 공간), 전통 정원 호연정부터 전망대에 이르는 도달의 장(상징 공간) 등도 마련됐다. 무주 읍내에는 기이한 행동과 작품 활동으로 ‘조선의 반 고흐’라 불리는 조선시대 화가 최북과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으로 절필한 뒤 36세에 짧은 생을 마친 문학비평가 김환태의 삶과 업적을 만나 보는 최북미술관, 김환태문학관이 있다. 태권도원 (063)320-0114, 최북미술관&김환태문학관 (063)320-5636. 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 ●선사시대부터 현대미술까지 시간여행 떠나요 공주로 떠나는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는 타임머신을 탄 듯 흥미롭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계룡산 갑사 인근의 임립미술관은 1997년에 문을 연, 충청남도 사립 미술관 1호다.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한 뒤 그리기, 만들기 등 체험도 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와 글램핑장도 마련해 뒀다. 웅진동의 국립공주박물관에선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 4000여점을 전시한다. 석장리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선사 박물관이다. 선사시대 인물 모형, 움막집 등을 배경으로 선사시대 체험도 즐길 수 있다. 임립미술관 (041)856-7749, 국립공주박물관 (041)850-6300, 석장리박물관 (041)840-8924. 경북 고령 대가야박물관 ●500년 역사, 가야인의 숨결 고스란히 느껴요 대가야의 수도였던 고령은 경주, 부여 등에 못지않은 고도다. 고령읍 대가야로 일대에 500년 대가야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지산삼거리의 대가야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대가야박물관과 남쪽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이웃하고 있다. 이들을 아우르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도 있다. 세 곳 모두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다.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역사관, 대가야왕릉전시관, 어린이체험학습관으로 구성된다. 끝자리 4, 9일에 열리는 고령 오일장도 다녀올 만하다. 대가야박물관 (054)950-7103.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걸작의 탄생(조완선 지음, 나무옆의자 펴냄) 조선시대 최고의 두 문장가 교산 허균과 연암 박지원이 각각 ‘홍길동전’과 ‘허생전’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과정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되살렸다. 17세기와 18세기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두 대학자의 여정을 추적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제5회 김만중문학상 금상 수상작. 320쪽. 1만 3000원. 잠실동 사람들(정아은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교육’을 좇는 부모들과 교육으로 먹고사는 학교 교사, 원어민 강사, 과외 교사, 학습지 교사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는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464쪽. 1만 3500원.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다이나 프라이드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문학과 요리가 감각적으로 뒤섞였다. 모비딕, 걸리버 여행기, 롤리타, 허클베리핀의 모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세계 문학 명작 속에 등장하는 50가지 식사 장면이 실제 요리로 되살아났다. 128쪽. 1만 3800원.
  • [영화 프리뷰] 탐정 사극 ‘조선명탐정2’ 전편 넘어설까

    [영화 프리뷰] 탐정 사극 ‘조선명탐정2’ 전편 넘어설까

    그동안 국내 영화계에서 사극 시리즈물의 성공은 흔치 않았다. ‘조선명탐정:사라진 놉의 딸’(‘조선명탐정2’)은 2011년 설 연휴 47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의 속편이다. 탐정 사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내세우며 오는 11일 개봉하는 영화가 전편의 인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선 명탐정2’는 일단 전편의 흥행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안정성을 추구했다. 특히 전편에서 관객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김민(김명민)과 서필(오달수)의 캐릭터를 더욱 강렬하게 다듬었다. 전편에서 의뢰인과 탐정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번에 명탐정 콤비로 호흡을 맞췄다. 한때 왕의 밀명을 받는 특사였으나 외딴섬에 유배됐다가 탈출한 김민. 천부적인 재능으로 다양한 추리와 발명품 개발까지 못하는 게 없는 명탐정이지만, 서필은 그의 숨겨진 ‘허당끼’를 자유자재로 요리한다. 정통사극을 보는 듯한 김명민의 정확한 연기가 시트콤을 방불케 하는 오달수의 코미디 연기로 간간이 쉼표를 찍는다. 전편에 이어 연출을 맡은 김석윤 감독은 “시리즈물은 전편의 캐릭터가 사랑받아야 제작이 가능하다. 1편에서 김명민과 오달수라는 배우가 신선한 캐릭터와 코믹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 만큼 캐릭터의 연속성과 전편의 흥행을 이끌었던 에피소드를 더욱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김명민은 “촬영하기 전에 1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면서 캐릭터를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옮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 완벽에 가까운 탐정 캐릭터를 구현하려고 했고, 캐릭터가 더 선명해졌을 거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오달수는 “주어진 상황에 캐릭터를 던져놓는 경우가 많았다. 바뀐 상황에서 변화된 캐릭터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조선 명탐정2’는 두 가지 사건을 엮어 가며 전편보다 좀 더 탄탄한 내러티브를 추구했다. 1편이 관료들의 공납비리를 파헤치는 다소 보편적인 이야기 구도였다면, 2편에서는 조선시대 경제를 뒤흔든 불량 은괴 유통사건과 동생을 찾아달라는 한 소녀의 의뢰에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액션 영역도 달라졌다. 전편에서는 주로 육지를 배경으로 했던 것이 바다와 하늘로 무대가 넓어졌다. 두 사람이 외딴섬에 도달하기 위해 조선판 행글라이더인 ‘비거’를 타고 조선 최초의 비행을 시도하는 장면은 특히 눈길을 끈다. 라이터, 어둠 속에서도 적을 쫓을 수 있는 야광물질 등 다양하게 등장하는 김민의 발명품이 화면에 흥미로운 요철을 만들어 준다. 추리극의 성격도 한층 짙어졌다. 불량 은괴 사건과 소녀들의 실종이 연결돼 있음을 직감한 김민이 탐정 본능을 동원해 범죄사건을 추리해 가는 그물코가 촘촘하다. 묘령의 여인 히사코(이연희)는 전편의 한객주(한지민)가 그랬던 것처럼 수사에 혼선을 빚게 만드는 인물로 등장한다. 시각장애인을 연기한 가수 조관우의 반전 캐릭터도 예상 밖의 재미 요소로 꼽힐 만하다. 조선판 ‘셜록 홈스’의 왓슨 커플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투톱 주인공의 캐릭터 호흡은 훌륭하다.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오락영화로는 손색없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의 이음매가 매끈히 다듬어지지 못한 데다 추리, 모험, 코미디 등 너무 많은 감상 포인트를 한꺼번에 욕심낸 부분은 과유불급으로 지적될 만하다. 12세 관람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김병일 사람과 향기] 평범한 어머니도 자식을 훌륭하게 기른다

    [김병일 사람과 향기] 평범한 어머니도 자식을 훌륭하게 기른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율곡 선생의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퇴계 선생의 고향인 안동으로 예상치 않은 손님들이 두 차례나 방문했다. 2월부터 방영 예정인 강원의 자랑스러운 역사 인물을 조명하는 ‘뿌리 깊은 강원’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지역 방송국 관계자들이다. 첫 번째 소재로 퇴계 어머니 춘천 박씨와 율곡 어머니 신사임당을 다룬다고 했다. 두 분이 어떻게 해서 자식을 위대한 인물들로 키워 냈는지 널리 알리려는 취지에서다. 두 어머니는 매우 대조적이다. 강릉이 고향인 신사임당은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훌륭한 어머니의 표본이다. 반면 춘천 박씨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어머니다. 고향도 강원도가 아니다. 본관은 춘천이지만 이미 고조부 때 경상도 용궁(경북 예천)으로 이사 온, 굳이 말하면 경상도 사람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두 분을 비교 조명하려는 이유는 왜일까? 자녀 교육에 열중하는 오늘의 어머니들에게 역사에 널리 알려진 어머니 못지않게 묻혀 있는 평범한 어머니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고 관심도 더 끌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옳은 판단이다. 성공한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인생 뒤에는 어머니가 계셨다고 말한다. 퇴계 역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라고 했다. 춘천 박씨는 과연 어떤 분이고 또 어떻게 자식을 길렀기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존경받는 퇴계가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을까. 자신이 직접 지은 어머니 묘갈지(묘비글)에서 퇴계는 회상한다. “어머니는 덕망 있는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타고난 품성이 아름다웠으며 시어머님 섬기는 데 정성을 다했고 제사를 성심껏 모셨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33살의 어머니 앞에는 나이 어린 7남매가 있었다. 삼년상을 마친 후 밤낮으로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에 매달렸고, 자식들이 성장하자 가난을 벗기 위해 더욱 힘을 쏟으셨다. 자식들이 원근의 스승을 찾아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늘 훈계하시기를 문예(지식)만 치중하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에 주의를 기울이거라, 또 세상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은 교양 없다 비방하니 너희는 남보다 백배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비록 글을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 아버님의 가르침과 아들들이 공부하는 것을 곁에서 듣고 깨쳐 학식과 생각이 여느 선비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를 안으로만 지니고 겉으로는 항상 고요히 품고만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이러한 삶은 아들의 삶에 나침판이 됐다. 어떤 점에서였을까. 먼저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 태도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는 안살림과 밖의 일을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일해 가정을 일으키고 자식 교육에 헌신했다. 쉼 없이 학문에 정진해 조선 최고의 학자가 된 퇴계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 다음으로 지식보다 사람됨을 더욱 중시하는 가정교육 분위기다. 사람은 지식보다 행실이 더 중요함을 자식들에게 독려하며 어머니 스스로 먼저 솔선해 실천하는 모습이 자식에게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퇴계가 늘 겸손과 배려를 실천한 것도 이 점을 어머니로부터 배워 몸에 배게 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도 자식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몰라 지식이 얕아도 끊임없이 견문을 얻어 지혜를 터득해 가면 올바른 처신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자녀로부터 얼마든지 존경받는 부모가 되고, 자녀 또한 이를 본받아 훌륭하게 자랄 수 있다. 퇴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식음을 전폐해 꼬챙이처럼 말라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지극한 효도는 삶의 정신적 멘토를 잃은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훗날 어머니 묘소 앞에 묘갈지를 직접 써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묘갈은 드물다. 그럼에도 퇴계는 어머니의 것을 직접 만들어 세웠다. 존경의 마음이 시대적 관행과 문화를 뛰어넘게 한 것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오늘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자녀를 훌륭하게 기르고 효도까지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는 사례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1·끝) 문학 작품 속 서울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1·끝) 문학 작품 속 서울

    ●문학작품 속의 서울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문학은 픽션이지만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망원경이거나 현미경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현실을 우화처럼 보여 주는 만화경(萬華鏡)이 되기도 한다. 역사가 서울에 관한 공식적이고 근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문학작품에는 역사에 나오지 않는 서울사람들의 내밀한 희로애락이 실려 있다. 공룡 같은 도시, ‘서울공화국’을 상징하는 거대한 빌딩과 아파트 숲에 가려진 서울사람들의 진면목은 역사보다 오히려 문학 속에 살아 숨 쉰다. 우리 문학작품 속의 서울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파리의 에펠탑이나 몽마르트르 언덕, 센강처럼 낭만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일까. 한번쯤 가 봐야 하는 버킷리스트에 올라가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시와 소설 속 서울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로 넘친다. 내 집 마련의 꿈과 전세살이의 고달픔, 실직과 타향살이의 애환,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투성이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과정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천민자본주의의 욕망이 꿈틀댄다. 한때 프랑스 도시사회학자들이 유행시킨 ‘Seoulization’이라는 용어가 서울을 상징하는 단어로 회자된 적이 있다. 미국 뉴욕의 고층건물 집적화를 꼬집을 때 쓰였던 ‘Manhattanization’처럼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Seoulization’이란 초거대도시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유형의 현상 중 하나로 흔히 ‘서울형’이라고 설명됐다. 환경오염과 파괴, 무질서, 범죄가 판치는 쓰레기통 같은 도시라는 뜻으로 쓰였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공화국’이라는 책을 펴내 서울을 아파트의 나라로 특징지었다. 한국과 프랑스는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대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파리는 프랑스 그 자체였고, 서울이 곧 한국이었다. 그런 공통점 때문에 보존으로 한발 앞서간 파리사람들이 개발에 목을 매는 서울사람들을 비하한 것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이전 서울을 그린 시가와 산문 작품들 어떤 문학작품이 단순히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서울을 다룬 작품이라고 보긴 어렵다. 우리나라 문학과 예술작품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생산되고 서울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당대 서울의 의미 있는 특성을 부각한 작품만을 대상으로 가려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문학은 시가 문학과 산문 문학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시가 문학은 조선의 개국과 한양천도를 알린 정도전의 ‘신도가’와 ‘신도팔경시’가 대표적이다. 신도가는 “아으 다롱디리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권근의 ‘신경지리’, 정이오의 ‘남산팔영’, 변계량의 ‘화산별곡’, 윤회의 ‘경회루시’ 등 한결같이 한양을 찬탄하는 내용이었다. 서거정 등의 ‘한도십영’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석형의 ‘호야가’에서 한양도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의 참상을 묘사했으며 임진, 병자 양란 이후 비판적 작품들이 나왔다. 박제가가 ‘성시전도’에서 근대지향적인 실사구시를 선보였으며 한산거사의 ‘한양가’와 작자 미상의 ‘장안걸식가’에서는 서울거리의 풍물이 생생하게 묘사됐다. 이동하 서울시립대 교수는 ‘국문학·국어학과 서울연구’ 논문에서 “조선 전기의 산문 문학은 성현의 ‘용재총화’, 허균의 ‘장생전’ 등 잡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傳), 야담, 소설 등 다양한 산문 장르가 경쟁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서울에 관한 자료가 여럿 발견됐다”고 말했다. 정내교의 ‘김성기전’과 ‘임준원전’, 박지원의 ‘마장전’과 ‘광문자전’, 유득공의 ‘유우춘전’, 이옥의 ‘시간기’(市奸記), 조수삼의 ‘육서조생전’ 등이 대표적이다. 이옥은 시간기에서 “서울에 세 군데 큰 장이 서는데 동편은 배오개, 서편은 소의문, 중앙은 운종가다. 모두 좌우양편으로 전이 늘어서 은하수처럼 벌여 있다.…”라고 19세기 초 서울의 시장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20세기 시와 소설… 근대문학 작품들 일제 강점기와 전쟁·분단의 비극과 참상 그리고 서울로의 미친 듯한 집중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무자비한 개발이 낳은 인간성 상실과 사회 병리현상의 실체를 문학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진에 찍히지 않는 실체적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이동하 교수는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 김광균의 ‘장곡천정에 오는 눈’, 오장환의 ‘수부’(首府), 서정주의 ‘광화문’, 정회성의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박노해의 ‘가리봉시장’,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연작 등 7편의 시가 1920~1990년대까지 서울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소설은 시대순으로 염상섭의 ‘사랑과 죄’,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박태순의 ‘밤길의 사람들’, 윤대녕의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등을 꼽았다. 서울은 물질적으로는 유토피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디스토피아이다. 빛과 그림자의 도시인 셈이다. 문학작품 속에서 서울을 읽는 코드는 다양하지만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근대화와 개발에 의해 소외된 군상, 아파트와 달동네로 대변되는 주거를 둘러싼 소시민 군상, 전쟁과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저항의 군상 등이 그것이다. 개발시대 인간군상을 다룬 시 중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1960년대 개발에 의해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쫓겨나는 인간의 애절함을 비둘기에 비유했다. 신동엽도 시 ‘종로오가’에서 이농과 도시빈민, 매매춘 같은 개발연대 희생자들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여주인공 영자는 70년대 우리의 딸들이 겪은 인생유전의 자화상이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서울 변두리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무허가 주택 마을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 줬다. 박완서의 소설 ‘이별의 김포공항’은 당대를 휩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그렸다. 신경림, 정희성, 장정일은 1970~80년대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무기력한 삶을 시로 읊었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2000년대 서울은 구원이 필요한 도시다. 서울은 소돔과 고모라로 그려진다. 주거를 둘러싼 인간군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김광식의 소설 ‘213호 주택’은 1950년대 서울의 대규모 공영주택단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상도동을 중심으로 정릉, 안암동, 청량리, 약수동 등 벽돌처럼 찍어낸 교외 단지주택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풍경이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소설가 최인호는 ‘타인의 방’에서 아파트 생활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미묘한 정서를 다뤘고 조세희는 ‘민들레는 없다’에서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 서 있다”며 요즘 잠실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양귀자는 연작소설집 ‘원미동사람들’에 수록된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에서 1980년대 서울을 떠난 서울사람이 아닌 서울사람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이문열의 ‘서늘한 여름’, 박영한의 ‘지상의 방 한 칸’, 신상웅의 ‘도시의 자전’, 최수철의 ‘소리에 대한 몽상’,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 등도 집을 매개체로 서울과 서울 언저리를 떠도는 서울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황지우의 시 ‘徐伐 셔, 셔발, 서울 SEOUL’이 제5공화국의 서울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허위성을 나타냈다면 1980년대 강남을 그린 박완서의 ‘꽃을 찾아서’에서는 의외의 장면과 마주친다. “가락동, 오금동, 방이동…다 싫어요. 혜화동, 안국동, 경운동하는 동네이름 좀 좋아요, 품위도 있고…” 그 시절 강남은 강북 콤플렉스를 가진 그렇고 그런 동네였다. 반면에 김원일의 ‘깨끗한 몸’, 이남희의 ‘플라스틱 섹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등 일련의 소설들은 1990~2000년대 강남을 무대로 펼쳐지는 퇴폐와 향략상을 담았다. 강남은 서울의 시원지였으나 이천년 가까이 잊혀졌다가 다시 새로운 서울의 원천으로 떠오른 땅이다. 인생역전이요 세상은 돌고 도는 것임을 소설은 가르쳐 준다. 저항의 군상을 대표하는 작품은 김지하의 ‘오적’(五賊)이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독재정권의 부도덕성과 오적의 소굴이라고 불렸던 동빙고동, 성북동, 수유동, 장충동, 약수동에 사는 재벌, 국회의원,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다섯 계층을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1960~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은 왜곡된 노동구조와 비인간성이 판치는 자본주의의 하수구였다. ‘전태일평전’을 쓴 조영래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윤정모의 ‘신발’, 강석경의 ‘숲속의 방’, 이균영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어쩌면 당대를 산 문인들의 참회록이다. 이균영은 “서울은 원주민이 없는 낯선 도시”라고 선언했다. 우리 문학사에서는 ‘소설가 구보씨’가 세 번 등장한다. 1930년대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 식민도시 경성의 거리를 거닐던 지식인의 상실과 자조를 보여 주었다면 1970년대에는 최인훈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서울을 관찰했고 1990년대에는 주인석이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라는 거의 동명의 작품을 통해 서울의 하루를 정밀스케치했다. 2003년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김종은의 ‘서울특별시’와 이혜경 등 여성 작가 9명의 서울에 관한 단편을 모은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도 소설가의 눈에 포착된 서울의 일상이자 기록으로 남았다. 소설과 시는 어쩌면 역사보다 위대하다. 선임 기자 joo@seoul.co.kr 서울의 생성과 소멸의 궤적을 추적한 ‘노주석의 서울택리지’는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2012년 6월 연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41회에 걸쳐 연재되었습니다. ‘서울택리지’ 1권이 지난해 10월 책으로 출간됐고, 2권이 올 봄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 흑삼진액으로 건강 챙기세요

    흑삼진액으로 건강 챙기세요

    29일 서울 중구 봉래동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조선시대 왕과 의녀 복장을 한 남녀 모델들이 CJ제일제당 구증구포 한뿌리 흑삼진액 선물세트를 홍보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서울시장 위상, 대통령 다음으로 높아져”

    “서울시장 위상, 대통령 다음으로 높아져”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을 다룬 ‘서울정치학’ 분야 1호 박사가 탄생한다. 노주석(55) 서울신문 선임기자는 ‘서울정치학과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에 관한 연구’로 다음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변화한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 문제를 실증적 방법으로 본격 연구한 것은 노 기자가 처음이다. 논문에는 조선시대 한성판윤부터 관선·민선 서울시장의 위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 관련 법·제도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 국제도시 간 비교 연구 등 다양한 방법론이 동원됐다. 특히 노 기자는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을 입증하기 위해 국회의원과 서울시의원, 공무원, 기자 등 총 30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분석까지 수행했다. 조사 결과 서울시장의 위상이 대통령에 이어 선출직 ‘빅2’로 꼽을 만하다는 응답은 82.7%, 국무총리를 능가한다는 답은 72.5%로 나왔다. 차기 또는 차차기 대선후보로 거론할 만하다는 응답은 84.7%로 압도적이었다. 논문에서는 박원순 시장 등 역대 시장들의 리더십 특성도 분석했다. 더불어 “서울시장 공천 및 선출을 축으로 한 미래 대통령 육성 방안이 마련되면 훈련된 대통령 후보의 등장이 가능해져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도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다”며 정치 개혁 방안도 제시했다. 노 기자는 29일 “기존 정치학은 너무나 중앙지향적이기 때문에 서울 정치를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앞으로 꾸준히 연구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노 기자는 올 3월부터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서울정치학을 강의한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뽀얀 속살에 숨이 멎는다

    뽀얀 속살에 숨이 멎는다

    도회지 직장인들이 자연의 시계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한라산 눈꽃 산행이 그렇다. 한라산에 눈이 내릴 때면 일상이 몸을 붙잡고, 모처럼 시간을 내 찾아가면 눈이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눈이 올 거라는 예보만 듣고 갔다가 폭설로 입산이 통제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다행히 한 번 쌓인 눈은 쉬 녹지 않는다. 이 덕에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마력(魔力)적인 풍경이 겨우내 펼쳐진다. 그 모진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한라산을 찾는 건 이 때문이다. 한라산 등산 코스는 크게 다섯 가지다. 성판악 코스(9.6㎞)와 관음사 코스는(8.7㎞)는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는 코스다. 등산 수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두 코스 모두 편도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 정상을 밟지는 못하지만 어리목 코스(어리목~윗세오름, 이하 편도 4.7㎞), 영실 코스(영실~윗세오름, 3.7㎞), 돈내코 코스(돈내코~남벽, 7㎞) 등도 한라산 설경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코스로 꼽힌다. 가까운 거리에서 한라산 전경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는 코스도 있다. 어승생악 코스다. 거리는 왕복 두 시간 안팎이면 충분할 정도로 짧지만 눈을 밟으며 걷기 적당하다. 여건이 맞지 않는다면 꼭 한라산 정상을 밟을 필요는 없다. 정상 초입의 윗세오름(1700m)까지만 가도 충분하다. 특히 겨울철엔 윗세오름 주변 풍경이 정상보다 훨씬 더 눈부시다. 게다가 성판악이나 관음사 쪽에서 출발하면 한나절 동안 20㎞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 이는 산행 초보자에겐 부담이 되는 거리다. 윗세오름을 돌아보는 데 가장 적합한 코스는 어리목~영실 코스다. 가족 단위로 여유 있게 다녀오기에도 적당하다. 어리목이나 영실에서 출발해 원점 회귀를 할 수도 있지만, 왔던 곳을 다시 되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재미가 덜하다. 두 코스를 연결한 거리는 9㎞쯤 된다. 어리목~영실 코스는 들머리를 어디로 정하느냐가 중요하다. 영실을 들머리 삼을 경우 영실휴게소에서 구상나무 군락지까지 계속해서 된비알이 이어진다. 등반 시작부터 힘을 빼는 셈이다. 게다가 도로에 눈이 쌓이면 영실주차장부터 탐방로 시작 지점까지 2.5㎞의 아스팔트 길을 40여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여기에 겨울철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주차장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반면 어리목 코스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편이다. 무수내 계곡에서 사제비동산까지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영실 쪽보다는 쉽다. 찾는 이들도 영실에 견줘 한결 적은 편이다. 어리목광장에서 ‘한라산’ 표지석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광장을 출발해 10분 남짓 걸으면 어리목계곡이다. 외도천(무수내) 상류로, 물이 흐를 때면 등산객들에게 맑고 시원한 물을 제공해 주는 곳이다. 계곡 너머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10분 남짓 숲속 계단길이 이어진다. 숲은 깊다. 굵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서리꽃 뒤집어쓴 나무들이 촘촘하게 늘어선 모습이 꼭 영화 ‘겨울왕국’의 세트장처럼 보인다. 밭은 숨결 내쉬며 1시간가량 오르면 해발 1300m 표지석이 나오고, 이어 시야가 툭 터지며 사제비동산에 이른다. 사제비동산 주변은 사방이 눈 천지다. 바람도 드세다. 눈이라도 내리면 얼음송곳으로 얼굴을 찌르는 듯하다.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서귀포 쪽은 맑은데, 사제비동산엔 구름과 안개가 휘몰아치는 경우가 흔하다. 완만한 돌길을 따라 만세동산을 향해 오르다 보면 거대하게 솟아오른 한라산이 막아선다. 정상 왼쪽은 장구목, 오른쪽은 윗세오름이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정상 서쪽에 나란히 솟은 세 오름을 일컫는 이름이다. 붉은오름(큰오름), 누운오름(샛오름), 새끼오름(족은오름)으로 이뤄졌다. 능선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어느덧 1700m 윗세오름 대피소다. 여기서 정상이 코앞이지만 입산 통제 구역이어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영실로 가는 길은 구상나무 군락지까지 거의 평탄한 길이고 나머지는 내리막이다. 남벽을 거쳐 돈내코로 내려설 수도 있지만, 대개의 등산객들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영실 쪽을 택한다. 한라산 부악을 등지고 영실 방향으로 내려서면 곧 구상나무 군락지다. 세찬 바람에 눈이불을 뒤집어쓴 구상나무들의 자태가 인상적이다. 병풍바윗길로 내려가는 길도 오백나한상이 늘어서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맑은 날 영실 전망대에 서면 북쪽으로 비양도, 서쪽으로 산방산, 남쪽으로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던데 이번엔 그런 행운은 없었다. 긴 산행이 아니더라도 눈꽃 만발한 한라산과 마주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어승생악 탐방로다. 어승생악은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한 분석이 화구 주변에 원추 형태로 쌓인 소화산체다. ‘어승생’(御乘生)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이 부근에 있던 말목장에서 난 명마를 임금에게 바쳤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승생악의 높이는 1169m다. 출발지인 어리목광장이 970m쯤인 데다 탐방로 길이가 왕복 2.6㎞로 짧고, 완만한 오르막이라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산행 시간은 쉬엄쉬엄 걸어도 두 시간이면 족하다. 탐방로 주변 나무들마다 서리꽃을 두르고 있다. 줄기와 가지마다 무수한 얼음가시가 뾰족하게 솟았다. 매서운 바람이 만든 풍경이다. 정상에서 맞는 전망이 장쾌하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동굴진지를 딛고 서면 제주 시내와 촘촘하게 간격을 좁힌 오름들이 두 눈에 가득 찬다. 구름이 벗겨질 때마다 한라산도 제 몸 일부를 슬며시 드러낸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 한라산 눈꽃 산행은 날씨가 관건이다. 눈이 많이 내리면 입산이 통제된다. 등산 전 입산·하산 시간도 알아 둬야 한다. 한라산 국립공원홈페이지(hallasan.go.kr) 참조. (064)713-9950. 한라산 등산을 위해선 아이젠과 등산 스틱이 필수다. 바람이 거세 안면보호대도 필요하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컵라면(1500원), 커피(500원) 등을 판다. 다만 주말에는 등산객들이 장사진을 이뤄 컵라면 사기도 쉽지 않다. 어리목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경우 영실에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2만원. 어리목광장에 아담한 눈썰매장과 탐방안내소 전시관 등이 조성돼 있다. 탐방안내소에는 숲해설사가 대기한다.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숲 해설을 해 준다. (064)713-9953. →잘 곳 : 중문 단지 쪽에 켄싱턴제주호텔(www.kensingtonjeju.com)이 얼마 전 새로 들어섰다. 요즘 제주에서 가장 ‘핫’한 숙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켄싱턴 제주의 자랑은 지난해 말 조성한 루프 톱 야외 수영장 ‘스카이피니티’다. 호텔에서 가장 높은 옥상(루프 톱)에 조성된 수영장이다. 따뜻한 수영장에 몸을 담그면 앞으로는 제주의 푸른 바다, 뒤로는 불끈 솟은 한라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물녘 풍경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수영장 앞바다 너머로 붉은 해가 지는데, 연인과 함께 이 모습을 본다면 없던 애정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는데 투숙객 중 어른만 이용할 수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야자수로 분위기를 낸 ‘커넥팅 가든 풀’이나 실내 수영장을 이용하면 된다. 켄싱턴제주호텔은 올인클루시브 ‘윈터 스토리’ 패키지를 2월 말까지 판매한다. 호텔 내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뷔페는 물론 한식, 이탈리안 등 정통 다이닝까지 즐길 수 있다. 아울러 놀이 도우미 ‘케니’와 함께하는 감귤 따기 체험, 커피 체험, 한라산 사라오름 오르기 등 다양한 액티비티와 파티까지 모두 한번에 즐길 수 있다. 말 그대로 ‘올 인클루시브’다. 51만원부터. 설 연휴에 특별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홀리데이 인 켄싱턴 패키지’는 2월 17~22일 선보인다. 홈페이지(www.kensingtonjeju.com) 참조. 1855-0202.
  • 새달 14일 1차 순경 필기시험 과목별 필승 전략

    새달 14일 1차 순경 필기시험 과목별 필승 전략

    지난해까지 상·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던 순경 공채가 올해부터 세 차례로 늘어났다. 치안 수요 증가와 경찰 인력 보강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선발 예정 인원도 1만여명으로, 지난해(6542명) 대비 53%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1차 순경 필기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수험생들의 마음은 다급해지고 있다. 서울신문은 다음달 14일 치르는 올해 첫 순경 필기시험을 앞두고 박문각 남부경찰학원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과목별 마무리 대비법을 짚어 봤다. 우선 필수 과목인 한국사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치른 시험이 대부분 기존 공무원시험에 출제된 기출문제 위주로 구성됐다는 점을 고려해 마무리 학습에 들어가야 한다. 박문각 남부경찰학원의 이운우 강사는 “기존에 강조된 내용을 중심으로 반복 학습하는 것이 효과적인 마무리 전략”이라고 조언했다. 다만 “지난해부터는 그동안 순경시험에 출제되지 않았던 사진과 그림 문제가 등장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며 “시험에 출제되는 사진과 그림은 모두 기본서에 수록돼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사는 대부분의 시험에서 선사~고려시대, 조선시대, 근현대사 세 부분으로 나뉜다. 순경시험에서는 전체 문항의 50~60%가 선사~고려시대에서 출제되고 있다. 이 강사는 “특히 삼국~남북국시대의 출제 비중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고대사는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근현대사의 경우 막대한 분량을 효율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주요 사건의 연표와 사건이 발생한 원인 및 결과 등을 중심으로 학습해야 한다. 이 강사는 “지금 시점에서는 기본서를 회독하기보다는 이미 학습해 놓은 서브노트나 요약서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정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면서 “최근에는 정치사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화사나 경제사, 사회사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 과목의 경우 지난해 시험이 쉬웠던 데다 합격 커트라인도 높아지면서 이에 대비한 마무리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학원의 장현숙 강사는 “어휘, 생활영어, 문법, 독해로 구성되는 기본 형식에는 변화가 없지만 파트별 변화를 짚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강사는 “마지막 총정리 기간에는 warrant(영장), custody(구금) 등 경찰 전문용어를 다시 한번 정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생활영어의 출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점과 문법 파트의 난도가 낮아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생활영어의 경우 대화 스크립트를 이용한 생활영어 내용을 숙지하고, 지엽적인 문법보다는 기출문제 위주의 문법을 반복 학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독해 파트와 관련해 장 강사는 “지금 시점에서는 새로운 지문을 무리해서 학습하기보다는 기출문제나 모의고사 위주로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문제를 푸는 것을 권장한다”고 조언했다. 선택 과목인 형법·형사소송법은 기출문제 풀이와 최신 판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순경시험 형법은 판례 중심으로 출제된다는 특징이 있다. 김현 강사는 “이론이나 학설보다는 기출 판례와 최신 판례 정리에 전념해야 한다”며 “특히 2014년 판례와 과실범 처벌규정, 미수·예비·음모 처벌규정, 상습범 처벌규정, 임의적 감면, 필요적 감경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사소송법의 경우 지난해 시험은 서론, 수사, 공소, 공판, 증거 등 전체 파트에서 골고루 출제됐고 자주 출제되는 중요 파트가 반복적으로 출제됐다. 김승봉 강사는 “기본 학원 수업을 듣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기출문제를 반복 학습하고 그동안 정리한 서브노트를 통해 가볍게 암기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형소법은 생소한 개념이 많기 때문에 ‘학원 강의 또는 온라인 강의→기본서 회독→기출문제 풀이→서브노트 작성→기출문제 풀이→서브노트 암기’ 순으로 학습을 이어 가야 한다. 이와 함께 지난해 실시된 검찰(7급, 9급)·교정·법원 공채시험과 순경시험, 12월 치러진 경찰간부시험, 최근 실시된 경찰승진시험 문제는 꼭 한번씩 풀어 봐야 한다. 경찰학개론은 기출문제 지문을 조합하거나 주요 경찰 법규 등에 대한 법조문을 지문으로 활용한 문제가 주로 출제된다. 지난해 두 차례 시험 모두 총론에서 8문제, 생활안전론·경비·교통 등 각론에서 12문제가 출제됐다. 특히 지난해 1차 시험에서는 13문제, 2차 시험에서는 17문제가 법령 분야에서 출제됐기 때문에 마무리 전략도 법령 점검에 맞춰야 한다. 공병인 강사는 “80% 이상이 기출문제를 그대로 내거나 변형해서 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시험 전 실전 감각 유지 등을 위해 기출문제 풀이 위주의 학습을 이어 가는 것을 권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험 전날이나 시험 당일에는 임기나 의결정족수 등의 숫자와 관련된 사안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부터 순경 필기시험에 편입된 국어는 방대한 학습량을 요구하기 때문에 수험생들이 꺼리는 과목이다. 그러나 꾸준히 국어 과목을 학습한 수험생이라면 문법, 어휘, 독해 세 분야에 대한 기본 정리를 끝내고 기출문제와 모의고사를 통해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시기다. 정채영 강사는 “전체의 40%가 문법에서 출제되기 때문에 어문규정, 예문, 문장부호, 추가된 표준어 어휘 등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면서 “9급 공무원시험 기출문제 풀이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사회 과목은 다른 공무원시험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마무리 학습을 해야 한다. 법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 파트 가운데 어느 한 파트에 편중돼 출제되지 않기 때문에 특정 분야만 집중 학습해서는 안 된다. 장혁 강사는 “모르는 것을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실하게 다져야 하는 시기”라면서 “사회계약설에서 학자들의 견해(법과 정치), 자본주의 변천 과정(경제),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사회문화) 등 주요 개념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면서 마무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학 과목은 사고력을 요구하거나 여러 개념이 혼합된 문제는 거의 출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박문각 남부경찰학원에서 수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박한일 강사는 “어려운 문제는 출제되지 않는 편이지만 1분에 1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빠르게 한 세트를 푸는 연습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지금은 새로운 문제보다 이전에 공부했던 문제를 복습하면서 취약한 문제 유형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빠르게 풀 수 있는 문제를 먼저 선별해 해결하는 판단력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행정학과 특채시험 과목인 수사와 행정법은 비교적 쉽게 출제돼 왔다. 수사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안태영 강사는 “수사총론은 14문제, 각론은 6문제 정도 출제되는데 난도는 평이한 편”이라면서 “다른 과목에 비해 법령, 규칙의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개정된 법령과 규칙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행정법을 가르치는 김진영 강사는 “지엽적이고 상세한 학습보다는 빈번하게 출제되는 개념과 판례를 위주로 반복 학습이 필요한 과목”이라면서 “수험생이 까다로워하는 행정쟁송 부분은 원고적격, 처분성 여부, 제소 기간 등 항상 출제되는 부분에서만 출제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본 개념 학습 이후에는 기출문제를 분석하고 대표적으로 출제되는 분야를 집중 학습해 순경시험 행정법 과목 문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씨줄날줄] 혜음령/서동철 논설위원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의 일부였다. 혜음령은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벽제에서 의정부 쪽으로 길을 갈아탄 뒤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만날 수 있다. 고개를 넘으면 서울시립 용미리공원묘원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 걸어서 탐방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개성에서 개창해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혜음령은 ‘두 서울을 잇는 고개’였다. 고려 왕조도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을 새로운 수도로 삼을 것을 고민했다. 고려가 혜음령 일대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용미4리의 혜음원(惠陰院) 터에서도 드러난다. 혜음원은 개성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1122년(고려 예종 17) 세운 국립 숙박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27개에 이르는 건물터, 연못터, 배수로 등 대규모 유구가 확인됐다. 고려시대 혜음원과 이웃한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용미리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거대한 석불은 의주대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위세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먼 길에 나선 사람들도 두 분 부처의 자비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혜음령은 중요한 간선도로였지만 도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세기가 목전이었던 1891년(고종 28)에도 ‘도적의 무리가 자주 출몰해 백성이 안심하고 터 잡을 수 없으니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는 장계(狀啓)가 경기감사로부터 올라오기도 했다. 값나가는 물건이 아무래도 많았을 여행자는 더욱 도적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과 의주를 잇는 길은 일제강점기 벽제에서 금촌과 문산을 거치도록 바뀌었다. 이후 이 길을 넓힌 것이 통일로, 조선시대에는 완전치 않았을 한강과 임진강의 강둑을 이은 길이 자유로다. 과거 혜음령처럼 높은 고개를 지나는 길을 이용한 것은 하천 때문이다. 광탄(廣灘)이라는 땅 이름부터가 ‘넓은 여울’이라는 뜻이다. 양주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물길이 합류해 넒어진 문산천은 난코스였다. 의주대로가 임진나루로 이어지는 것도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산과 하천은 이제 터널과 교량으로 극복한다. 통일로와 자유로도 수많은 다리로 이어졌다. 혜음령에서도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745m짜리 터널이 올해 완공되면 희미해진 옛 의주대로의 존재도 다시 부각될 것이다. 주변에 ‘혜음원 박물관’이나 ‘의주대로 박물관’이라도 세운다면 그 효과는 더욱 뚜렷해질 수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조선시대 종로 ‘사직단’ 2027년까지 복원

    조선 시대 왕실 사당인 종묘(宗廟)와 함께 국가 최고 의례시설이었던 사직단(社稷壇)이 2027년까지 복원된다. 사직단은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27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사직단은 올해 제례 공간인 전사청 권역 등 핵심 영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주요 전각(13동 복원, 3동 보수)과 지형 등이 복원된다. 총사업비는 164억 8000만원이 들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사직단을 중요도에 따라 제례 공간, 후원 공간, 진입 공간 3개 권역으로 나눠 복업 사업을 추진한다. 지역 주민과 마찰을 빚은 사직단 권역 내 사직동주민센터, 어린이도서관, 종로도서관에 대해서는 지역 주민, 관계 기관, 전문가, 문화재청 등으로 구성될 협의체를 통해 의견 수렴과 공론화 과정을 거쳐 철거 여부를 결정한다.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에 사직대제(社稷大祭) 폐지, 공원 조성 등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게 훼손됐다. 광복 이후에도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부지가 축소되고 각종 근대 시설물이 난립하는 등 본연의 모습을 잃었다. 본래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종묘와는 대조적이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각각 1985년과 2008년 복원을 추진했지만 담장 설치 등 일부에 그쳤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2년 1월 종로구로부터 사직단 관리 권한을 인계받아 복원 정비 연구용역을 새롭게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국회의 사직단 복원 촉구 결의, 관계 전문가 자문, 공청회 등 의견 수렴을 통해 복원 정비 계획을 마련했다. 문화재청은 “사직단이 복원되면 서울의 4대 궁과 종묘처럼 전 국민의 역사 교육 공간이자 관광 자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제주섬 굽이굽이 길에 서린 진한 삶의 향기를 느끼다

    [명인·명물을 찾아서] 제주섬 굽이굽이 길에 서린 진한 삶의 향기를 느끼다

    제주 올레길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속살을 보여 준다면 제주 유배길은 유배 문화에 빠져 볼 수 있는 역사의 길이다. 조선시대 제주 섬은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500년 동안 200여명이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절망의 제주 유배길, 치열한 당파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패배 역사가 유배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유배된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걸작 세한도를 남겼다. 추사에게 제주 유배는 패배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유배 흔적을 찾아가는 제주 유배길은 제주 올레길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 유배길은 추사 유배길과 제주성안 유배길, 면암 유배길 등 세 곳이 있다.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는 추사 유배길은 제주의 대표 유배길이다.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 9월 당시 정치권력이었던 안동 김씨의 음모에 의해 제주에 유배된다. 군신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능지처참을 당한 윤상도와 그 아들의 상소문을 추사가 작성했다고 안동 김씨 세력이 주장하면서 유배돼 헌종 14년(1848) 12월까지 8년 3개월 동안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추사 김정희는 70 평생 벼루 10개를 갈아 닳게 했고 1000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고 한다. 추사 유배길은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길이다. 추사 유배 1길은 제주 대정읍 인성리 추사 유배지를 중심으로 추사기념관, 정난주 마리아 묘, 대정향교를 거쳐 다시 추사 유배지로 돌아오는 8㎞의 순환코스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추사관은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그의 걸작 세한도를 본떠 지어졌다. 제주 유배 생활에서 추사가 쓴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돼 있어 추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제주에 와 추사가 머물렀던 추사 유배집 강도순의 제주 초가집은 복원돼 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 한 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가 매일 바라봤던 박쥐가 날개를 편 모습인 바굼지 오름(단산)도 볼거리다. 추사 2길에선 추사의 한시, 편지, 차 등을 통해 추사의 인연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추사 유배지에서 시작해 오설록 녹차밭까지 이어지는 8㎞의 코스로 3시간이 소요된다. 제주 전통 옹기를 만들었던 도요지가 있어 제주의 옹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추사 3길인 사색의 길에선 산방산과 안덕계곡을 따라 제주의 바다, 오름, 계곡의 풍광을 느낄 수 있다. 대정향교에서 시작, 산방산을 거쳐 안덕계곡까지 이어지는 10㎞에 4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시내 구도심에는 제주성안 유배길이 있다. 옛 제주성을 중심으로 유배인들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안 유배길은 제주목 관아에서 시작해 유배지를 거쳐 다시 제주목 관아로 돌아오는 3㎞ 순환코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목 관아는 탐라국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배인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제주목 관아였다. 광해군, 우암 송시열, 추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도 이곳에 들러 일개 제주목사에게 자신의 당도를 아뢰어야만 했다. 당장은 유배인이지만 정치범인 이들은 다시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가능성이 있어 제주목사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반면 제주목사와의 잘못된 인연은 유배의 고통을 더했다. 정조 때 유배인 조정철은 원수 집안 사람인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내려오면서 험난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를 돌봐 주었던 제주 여인 홍윤애는 목숨을 잃었고 훗날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부임해 그녀의 묘를 돌보며 안타까워했다. 성안 유배길에서는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제주에 유배돼 5년을 지낸 간옹 이익(?~?),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했다가 탄핵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유배 흔적도 만날 수 있다. 왕세자 책봉을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1689년(숙종 15년) 83세 고령의 나이로 제주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1607~1689), 제주 유배인 가운데 유일하게 왕이었던 광해군(1575~1641)은 5년의 유배살이 끝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인 3·1만세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의 제주 유배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 면암 최익현이 걸었던 면암 유배길은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서 조설대~정실마을을 거쳐 방선문에 이르는 5.5㎞의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1873년 11월 제주 유배길에 오른 면암 최익현은 제주목 관아 부근에 있던 아전 윤규환의 집에서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면암 최익현은 1875년 3월 제주에 온 지 1년 3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지만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한라산에 오른다. 제주성 남문에서 출발해 방선문을 거쳐 지금의 관음사 코스인 탐라계곡~개미목~삼각봉~용진각으로 백록담에 올랐다. 그는 한라산에 오르면서 들른 방선문 계곡과 백록담, 영실, 오백 장군 등을 구경한 소감을 ‘유한라산기’에 기록해 놓았다. 영주 십경의 하나인 방선문 마애명에는 면암 최익현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가 유배 당시 이곳에 왔음을 보여 준다. 제주 유배길을 개설하고 이야기를 더한 스토리텔링연구센터 소장 양진건 제주대 교수는 “유배라는 고난의 시기에도 자신을 다스리며 삶의 큰 발자취를 남긴 유배인에게 유배는 자신의 신념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라며 “제주 유배길에서는 그들의 진한 삶의 향기를 느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서울광장] 현대판 음서라는 로스쿨 제도/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현대판 음서라는 로스쿨 제도/오일만 논설위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폐지 여론이 거세다. 다양한 인재 충원과 전문성 확보를 기치로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시행 6년을 맞으면서 초기부터 불거진 회의론이 최근엔 무용론으로 번지고 있다. 대신 2017년 폐지가 확정된 사법시험을 존치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로스쿨 입학과 졸업 후 대형 로펌의 취업 과정에서 집안 배경이나 부모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 요지다. 로스쿨 제도는 현실적으로 대학 졸업 후 3년간의 시간과 억대의 학비를 기회 비용으로 지불할 수 있는 계층에 유리하다. 그래서 ‘로스쿨은 상속이 부를 넘어 사회적 지위의 원천이 되게 만드는 제도’로 변질됐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로스쿨 폐지를 주장한 신호영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의 ‘로스쿨 계속 갈 것인가’<서울신문 1월 19일자> 칼럼은 현직 교수의 정확한 현실 진단이란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인터넷과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상에서 댓글을 통해 격한 동감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틀을 만들고 사고와 행동의 방향까지 규정짓는 법조계를 일부 계층이 독점해 가는 현실은 사회 안정성과 계층 간 유동성 측면에서 아주 불길한 징조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된 사회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나 가능했던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21세기에 재현됐다는 의미에서 로스쿨을 현대판 음서제(蔭敍制)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가난하지만 미래의 법조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힘겹게 대학을 다니는 서민의 자식들에게도 최소한의 문호는 개방돼야 한다. 지난해 사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현직 경찰 김신호 경위의 분투기는 눈물겹다. 3년 4개월 동안 매일 오전 5시에 경찰서에 출근해 업무 시작 전까지, 업무가 끝난 뒤 다음날 오전 1시까지 하루 평균 9시간씩 책과 씨름했다고 한다. 2004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막노동꾼 출신의 장승수씨도 세 차례 도전 끝에 사시에 합격했다.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차디찬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인생 역전의 꿈을 키우는 청년들에게 시작도 하기 전에 꿈을 접으라고 하는 것이 바로 현행 로스쿨 제도다. 가장 공정한 시험 시스템은 합격자가 만족하는 제도가 아니라 불합격자가 승복할 수 있는 제도다. 주위에서는 벌써부터 실력보다 배경을 통해 로스쿨에 입학하고 변호사나 검사가 됐다는 ‘카더라 통신’들이 난무한다. ‘순경시험에 7번 떨어진 친구가 연줄로 지방대 로스쿨에 갔다거나 전직 아무개 검찰총장 손녀딸이, 아무개 시장 아들이 검사로 특채됐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변호사 시험에서 성적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이라 실력 이외의 것들이 작용할 개연성도 있다. 수익 우선주의인 대형 로펌 입장에서 실력이 비슷하면 네트워크가 탄탄하고 집안이 좋은 응시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로스쿨을 운영 중인 나라는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등 3국이다. 독일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기존 사시 출신에 비해 법 지식과 실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시행 13년 만인 1984년에 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우리보다 5년 먼저 로스쿨을 도입한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문제점 탓에 회의론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로스쿨의 본고장 미국도 시끄럽다. 세계적인 법학자인 브라이언 타마나하(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가 2013년 ‘로스쿨은 끝났다’(Failing Law schools)는 책을 통해 로스쿨과 법조계의 추잡한 이면을 폭로해 경종을 울렸다. 이렇듯 국제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로스쿨 제도는 2007년 7월 법안 통과 당시에도 여야가 사학법 재개정안과 빅딜하면서 졸속 처리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현재 변호사시험법 개정안 4건이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그동안 논의 과정을 보면 사시와 로스쿨 병존이라는 투 트랙으로 방향을 잡아 가고 있는 듯하지만 13년 만에 로스쿨 제도를 폐지한 독일의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백년대계의 국가 초석을 놓는 마당에 6년이란 시간과 국가적 비용이 아깝다고 눈을 감는 것은 그야말로 국회의 직무유기다. 로스쿨 폐지야말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국정 목표에 정확하게 부합된다. oilman@seoul.co.kr
  • 국가기록원 ‘기록문화 체험교실’ 개최

    국가기록원은 초등학생과 부모가 함께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겨울 기록문화 체험교실’을 21∼24일 경기 성남에 있는 대통령기록관과 서울기록관에서 진행한다. 국가기록원은 매년 동·하계 방학기간 중 부모와 자녀가 함께 우리의 우수한 기록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초등학교 4∼6학년생 약 100가족이 참석한다. 체험교실은 왕세자 교육 관련 기록을 활용한 조선시대 왕실교육 특강, 한지의 우수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LED 한지 민화 전등 만들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역대 대통령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서고와 훼손된 종이기록물을 되살리는 복원실 등을 둘러보는 기록관리 현장 견학과 시대별 주요 기록물 및 대통령기록물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 관람도 진행된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충주서 국내 최대 규모 청동유물 출토

    충주서 국내 최대 규모 청동유물 출토

    충북 충주에서 기원전 2~1세기 초기 철기시대의 청동 유물이 대량 출토됐다. 수량과 종류 등 규모 면에서 국내 최대 수준이다.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8월부터 충주시가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을 추진 중인 호암동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구석기 유물 포함층을 비롯해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3세기~서력기원 전후) 무덤 3기와 통일신라∼조선시대 각종 무덤, 숯가마 등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가는줄무늬청동거울 1점·청동투겁창 3점 등 쏟아져 초기 철기시대 무덤 3기는 땅을 파고 묘광(墓壙)을 만들어 목관을 안치했다. 하나는 통나무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변으로 강돌을 덮은 돌무지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이고 나머지 2기는 강돌은 쓰지 않고 목관만 쓴 나무널무덤(木棺墓)이다. 돌무지나무널무덤에서는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 하나인 한국식동검(좁은놋단검)인 세형동검 7점,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라고 해서 가는줄무늬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뒷면에 넣은 가는줄무늬청동거울 1점, 나무 자리를 끼우는 청동 창인 청동투겁창 3점, 나무 자루를 묶어서 연결한 청동 창인 청동꺾창(銅戈) 1점, 청동도끼(銅斧) 1점, 끌의 일종인 청동새기개 4점, 청동 끌(銅鑿) 2점 등이 쏟아졌다. 조사단은 “무덤들은 기원전 2∼1세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며 “당시 충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세력의 수장 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고분 구조·유구 잔존 상태 매우 양호해 가치 높아” 돌무지나무널무덤은 주로 전남이나 충남 지역에서 확인됐다. 조사단은 “그동안 청동유물이 다량 출토된 무덤들은 대부분 발견 신고된 것들이어서 고분 구조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며 “이번에 발굴된 돌무지나무널무덤은 충북에서 확인된 드문 사례이고 유구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무덤의 축조 방식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앞서 1971년 전남 화순군 대곡리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잔줄무늬거울, 청동새기개, 청동 방울 등은 1972년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됐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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