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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정 포커스] “아파트 비리 파헤쳐 조례 제·개정 앞장”

    [의정 포커스] “아파트 비리 파헤쳐 조례 제·개정 앞장”

    “아파트 공동체 문제에 눈을 뜨면서 의정 활동에 뛰어들어 조례 제·개정에 누구보다 부지런히 힘썼습니다.”김기래 서울 중구의장은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의장은 2006년 5대에 이어 2014년 7대 중구의회 구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지난해 7월 의장으로 선출됐다. 16년간 전국항만노동조합연맹 등에 근무한 그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2000년 온라인에서 ‘주민연대’라는 닉네임으로 남산타운 아파트 비리를 파헤치는 활동에 참여하면서다. 김 구의장은 “당시 모였던 300여명의 주민들로부터 출마 권유를 받다가 지역구 의원에게 직접 찾아갔다”면서 “노동 분야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주민 권익 향상을 위해 13개 조례를 제정했다”고 말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독거노인, 장애인 관련이라고 했다. 그는 “경로당을 돌며 다 함께 점심을 먹은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 어르신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구의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지방분권 개헌을 통한 지방 자치 논의가 무르익고 있다며 기대감도 드러냈다. 그는 “권한이 분산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고 전했다. 아울러 구가 2014년부터 진행해 온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 사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구는 조선시대 처형장으로 사용돼 천주교 신자, 실학자 등이 핍박받던 이곳을 천주교 순교자 추모·기념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다. 김 구의장은 “건립 후 해마다 30억원이 넘는 운영비를 어떻게 감당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한반도 지각 전체 약화…서울도 6.0 강진 일어날 수 있다

    한반도 지각 전체 약화…서울도 6.0 강진 일어날 수 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지각 동쪽 이동 포항 지진서 배출된 에너지 누적 경주와 포항 사이 또 강진 가능성 “조선시대 규모 7.0 지진도 발생”지난해 9월 11일 밤 경북 경주에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다. 지난 15일에는 경주 인근인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일어나 16일 오전 기준 이재민 1536명, 부상자 62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1년 사이에 두 차례나 강진이 발생하면서 한반도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말이 사실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포항 지진은 2011년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지난해 발생한 경주 지진의 연속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일본 본토 지각은 동쪽으로 2.4m 이동했고, 한반도 역시 1~5㎝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동아시아 지역의 지각 전체가 변함으로써 한반도 지각도 약화돼 지진을 유발시키는 힘인 응력이 분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홍태경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한반도에서 지진 발생 빈도가 급증하는 가운데 터져 나온 것이 경주 지진”이라며 “경주 지진이 발생한 지점으로부터 북동, 남서 방향으로 경주 지진에 의해 배출된 에너지가 누적됐다가 이번에 포항 지진을 유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포항 지진에서 배출된 에너지가 다시 북동, 남서 방향으로 누적되고 있기 때문에 경주와 포항 지역 사이에서 또 다른 강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망했다. 현재는 경주나 포항 등 한반도 동남쪽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고 있지만 한반도 지각 전체가 약화돼 있는 상태이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서울, 경기 지역과 충청도 지역도 안심할 수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선창국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국토지질연구본부장은 “2014년 충남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강진이 발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충청권이나 수도권 일대에서도 포항 지진과 비슷하거나 규모 6.0에 가까운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려되는 점은 이번 포항 지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구가 집중돼 있고 내진설계가 돼 있지 않은 건물들이 여전히 많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규모 5.0 이상의 지진이 지하 5㎞의 얕은 지점에서 발생할 경우 피해를 예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강태섭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조선 초인 1400년대부터 조선 후기인 1800년대까지 1900여회의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했으며 규모 7.0에 가까운 지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20세기 들어서서 한반도에 지진이 잦아지면서 지진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있어 왔는데 그동안 꾸준히 누적된 응력이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규모 7.0 이상 지진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서는 규모 6.0~6.5 정도의 강진은 가능하겠지만 규모 7.0 이상의 지진 발생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文대통령 “베트남에 마음의 빚… 이젠 친구”

    호찌민-경주엑스포 영상 축전서 베트남전 참전때 학살 사과의 뜻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 개막식에 영상 축전을 보내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과거 베트남전 파병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우회적으로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영상 축전에서 이렇게 말한 뒤 “그렇지만 이제 베트남과 한국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자, 친구가 됐다”고 강조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15일 “대통령도 평소 베트남에 대해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고, 영상 축전을 보내는 김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한 것”이라면서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앞서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말했고, 이에 베트남 정부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고 공식 항의했었다. 이를 보고받고 문 대통령은 베트남 국민의 마음을 깊게 배려하지 못한 점을 두고두고 미안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영상 축전에서 또 한국과 베트남의 오랜 인연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고대부터 우리 선조들은 먼 바닷길을 오가며 교류를 시작했다. 안남국의 왕자 리롱떵(李龍祥)은 고려에 귀화해 한국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면서 “베트남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가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나부터 바로 서서 그에게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나부터 바로 서서 그에게

    유배인들이 유배지에서 했던 일들은 많다. 한시를 짓고 가사를 씀으로써 소위 유배문학이라는 전통을 만든 것도 그들이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한시를 짓는 능력이 교양으로 매우 중시됐다. 특히 과거시험을 위해 어려서부터 한시 짓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문학을 도덕과 교훈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한시를 짓는 일이 원칙적으로 남성들의 일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유배지에서도 많은 유배인들이 한시를 남겼다. 그런가 하면 한시 외에 편지를 쓴 유배인도 많다. 소학에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 글씨를 익히고 편지를 쓰는 일’이라고 했듯이 편지는 조선 지식인들이 사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유배인들은 외부와의 유일한 의사전달 방법이 편지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둘째형, 그리고 제자들에게 수백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모두 유배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배지의 현지 주민들을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중국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해남도(海南島)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소동파를 두고 “동파는 불행했지만 해남은 행복했다”고 하는 이유가 그가 시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유배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어울림 가운데 으뜸은 바로 교육 활동이다. 1545년 을사사화로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이문건 역시 유배지 주민들과 잘 어울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현지 주민들에게서 전세 공물 및 잡역 등 부세를 받아서 대신 관에 납부하고 중간에서 차액을 남기는 방납에 관여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경제활동을 했을 뿐이었다. 유배인 신분에도 재산을 증식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배지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현지의 젊은이들을 잘 가르쳐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4년 뒤 사면을 받았던 강백 같은 유배인도 있었다. 그는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철산에 유배됐는데 교육 활동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만남으로써 그 결과 “강백은 불행했지만 철산은 행복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선비들이 유배를 당하면 정치인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학자적 기능은 여전히 가능했기 때문에 유배생활을 서재생활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한시도 쓰고, 편지도 썼지만 어떤 유배인은 이 시간에 현지 주민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사실 김정희가 위대한 것은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주도 주민들과 기꺼이 만나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인들의 교육 활동이 왜 이렇듯 중요한가 하면 당시 계급으로 차별을 구조화한 조선시대의 위계질서를 넘어선 이타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만남, 이런 교육 활동이다. 자본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한 ‘함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려면 무지몽매한 유배지 주민들에게 헌신했던 유배인들처럼 정부와 기업, 기득권자, 그리고 우리 개개인들이 나서서 가난과 질병, 냉대와 무관심, 스트레스로 소외받고 있는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지속적으로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연말연시, 그 바람이 더욱 커진다.
  • [씨줄날줄] ‘광화문 육의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 육의전’/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의 도성(都城) 한양은 정치의 거리와 경제의 거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도성 북쪽의 북악산에서는 두 개의 하천이 남쪽으로 흐른다. 서쪽으로는 백운동천이 자하문로를 따라, 동쪽으로는 삼청동천이 삼청로를 따라 이어진다. 두 물길이 합류해 만들어진 것이 청계천이다.백운동천은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이르러 광화문 사거리 방향으로 크게 곡선을 그린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 사이 삼각형 모양의 땅이 곧 정치의 거리였다. 북쪽에는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자리잡았고, 그 남쪽으로는 관청가인 육조(六曹)거리가 들어섰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을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자연 해자(垓子)로 활용한 것이다. 이 자연 해자 내부 지역은 사실상의 정치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은 삼청동천 바깥 운종가(雲從街), 곧 오늘날의 종로를 경제의 거리로 만들었다. 개경의 시전을 본떠 이곳에서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양옆에 국가 소유로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점포인 공랑(公廊)을 지어 재정에 충당한 것이다. 광화문 교보빌딩과 광화문 D타워 사이 삼청동천이 흘러나가는 복개도로가 경계선이었다. 정치의 거리는 특권 계급의 공간이었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과 백운동천 사이에 주거지가 일부 있었지만, 영조가 세자 시절 머물던 창의궁 터의 존재처럼 백성들의 공간은 아니었다. 반면 운종가는 ’높다란 종각 아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네’라고 노래한 조선 후기 문인 강이천의 시처럼 활력이 넘치는 서민들의 공간이었다. 실학자 이덕무는 ‘거리 좌우에 늘어선 천 칸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으니 종로의 육의전(六矣廛)거리를 가리킨다. ‘천 칸’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 육조거리와 육의전거리는 모두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존 양상은 조금 다르다. 육조거리는 다양한 이유로 과거 모습을 다시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육의전거리는 초입인 청진동부터 훼손되고 있지만 위태로운 가운데 적지 않은 지하 유구는 살아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엊그제 “광화문광장에 조선시대 육의전을 재현하겠다”고 밝혔다. ‘광화문 육의전’을 활성화하고자 광장 양옆에 2층 한옥을 짓겠다는 구상도 덧붙였다. 하지만 육의전은 육조거리 터가 아닌 육의전 터에 복원하는 것이 역사를 보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광화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방법은 ‘육의전 재현’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육의전 유구는 지금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 [기고] 최부잣집과 대산공단/이완섭 충남 서산시장

    [기고] 최부잣집과 대산공단/이완섭 충남 서산시장

    조선시대 최대 거부인 ‘경주 최부잣집’은 기부왕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현종 때 최국선은 보릿고개를 맞으면 쌀 100석을 이웃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흉년으로 쌀을 빌려 간 농민들이 이를 갚지 못하면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담보 문서를 불살랐다. 최국선의 할아버지는 최진립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공으로 나라에서 많은 땅과 재물을 받았고, 국선의 아버지 최동량은 이를 토대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서민의 고혈을 짜내 돈을 벌지 않았다. 소작료도 수확한 양의 반만 받았다. 중간에서 빼돌리는 마름도 두지 않았고, 딱한 사정이 있는 농민의 소작료는 깎아 주었다. 최국선은 어릴 적부터 부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뼈에 새긴 것이다. 이처럼 후한 인심 덕에 최부잣집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이 인적 네트워크와 정보는 더 큰 부의 원천이 됐다. 그런데 이 집안에는 ‘육훈’(六訓)이라는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 첫째,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둘째,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고 그 이상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마라. 다섯째,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부자의 도덕·사회적 책임이 절절히 느껴진다. 서산시에는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의 하나인 대산공단이 있다. 이곳에는 ‘대산5사’로 불리는 현대오일뱅크, 한화토탈, LG화학, 롯데케미칼, KCC를 비롯해 70여개 기업에서 1만 5000여명이 일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연간 40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5조원에 이르는 국세를 납부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세 납부액은 국세의 1% 정도인 543억원에 불과하다. 지역사회 공헌도 극히 미미하다. 오히려 1988년 조성 이후 환경오염과 교통사고, 생활불편만 갈수록 가중시키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곳은 개별산업단지로 조성돼 울산이나 전남 여수석유화학단지처럼 국가산업단지로서 받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는 그동안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정부·기관과 관련 연구원 등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회간접자본 확충 및 주민 생활불편 해소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지난 8월 30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대산공단 입주 기업의 지역사회 공헌을 촉구하는가 하면 이후로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국회의원 및 지역 정치인, 대산공단 대표 등과 대화를 지속하면서 동반 성장의 목소리를 높여 나가고 있다. 지금은 기업과 지역사회가 동반 성장하는 시대다. 울산 SK이노베이션은 1000억원을 투자해 울산대공원을 조성한 뒤 시민의 품에 안겼다. 여수의 GS칼텍스도 1000억원을 들여 종합공연장을 희사했지만 대산공단 기업에서는 이러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리 고장에서 날로 발전하는 대산공단 기업에 다시 묻고 싶다. 무려 300여년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부를 유지한 최부잣집처럼 오랫동안 지역사회와 함께 더 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생각이 없는지 말이다.
  • 조선시대와 현대의 청렴<서울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김성민>

    조선시대와 현대의 청렴<서울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김성민>

    조선 왕조는 청렴결백을 숭상했다. 당시의 식자들은 청렴결백을 선비정신의 근간으로 파악했다. 조선 왕조 초기의 법률을 규정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뇌물을 받은 관리는 명단을 작성하여 이조 등 관서에 보관하여 벼슬길을 막았다. 연좌제이기는 하나 뇌물을 받은 자의 자손은 의정부 등 주요 관직과 지방의 수령직을 맡을 수 없도록 명시하였다. 관리가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는 것은 국가 기본 질서를 흔드는 중대한 범죄로 다루었다. 뇌물을 받고 위법행위까지 한 경우에는 관직 박탈은 물론 최고 사형까지 가능했다. 왕이 수시로 시행하는 사면에서도 이런 범죄자는 원칙적으로 제외되었다. 뇌물을 준 자도 처벌하게 되었고, 심지어 뇌물 수수자를 천거한 사람도 벌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규정이 규정에 머물고 실제로 적용되지 못해, 조선후기에는 매관매직 등 부패가 만연하였다. 좋은 법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때문에 조선시대의 경세가들은 강제력에 바탕한 법 규정보다 개인의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은 청렴을 사회규율의 원리일 뿐 아니라 개인처세의 주요한 지침으로 보았다. 김민재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정약용은 ‘목민심서’ 율기편에서 개인의 도덕영역을 자기단속, 집안단속, 청탁거절, 근검ㆍ절약, 베풂의 5개 부문으로 나누고 이 모든 것을 청심(淸心) 곧 청렴으로 귀결시켰다. 모든 사회활동이 개인적인 몸가짐과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청렴은 좁은 의미로는 부패의 반대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공직자들이 임무를 정직하게 수행하고 동료와 시민들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조직자원을 책임감있게 사용하는 등의 행정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청렴도는 보통 공직자가 기관 내외부 업무 및 정책을 부패행위 없이 객관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처리한 정도를 말한다. 즉 반부패 외에 투명성과 책무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현대적 개념의 청렴도 결국 정약용이 말한 개인적인 자세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공적임무를 수행하는 공직자의 경우, 너나없이 청심의 마음자세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주이집트 한국문화원(원장 박재양)은 11월 5일부터 10일까지 북부아프리카 이집트 수도 카이로시 사키아문화센터에서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을 열었다. 카이로 시민들 대상으로 한 이번 행사는 조선시대 방패연 원형기법 보유자 리기태 (한국연협회·리기태연보존회 회장) 민속연 명장과 전통연 작가 최상숙 장인등 을 초빙하여 한국전통 민속연인 방패연 및 한국전통 가오리연 만들기와 연날리기 체험으로 성황을 이뤘다. 이집트 한국문화원은 중동아랍권에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확산시키 위한 프로그램으로 방패연 만들기를 비롯하여 전통음식, 전통한복 체험 및 K-Pop 월드 페스티벌 등을 운영하며 한국문화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주이집트 한국문화원(원장 박재양)은 11월 5일부터 10일까지 북부아프리카 이집트 수도 카이로시 사키아문화센터에서 ‘나일강 위에 띄운 방패연 워크숍’을 열었다. 카이로 시민들 대상으로 한 이번 행사는 조선시대 방패연 원형기법 보유자 리기태 (한국연협회·리기태연보존회 회장) 민속연 명장과 전통연 작가 최상숙 장인등 을 초빙하여 한국전통 민속연인 방패연 및 한국전통 가오리연 만들기와 연날리기 체험으로 성황을 이뤘다. 이집트 한국문화원은 중동아랍권에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확산시키 위한 프로그램으로 방패연 만들기를 비롯하여 전통음식, 전통한복 체험 및 K-Pop 월드 페스티벌 등을 운영하며 한국문화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 조선시대 동성애까지 담은 ‘진짜’ 열하일기

    조선시대 동성애까지 담은 ‘진짜’ 열하일기

    열하일기 1~3/박지원 지음/김혈조 옮김/돌베개/1권 560쪽, 2권 544쪽, 3권 584쪽/각권 3만원‘…창대가 말하기를, 어제 아침에 우연히 명륜당 오른쪽 문 가리개 아래에 있었는데, 기려천과 왕삼빈이 팔짱을 끼고 목을 나란히 하여 홰나무 뒤에 서 있더니 한참 뒤에 입을 맞추고 혀를 빨더군요. 마치 전각 위의 얼룩무늬 목을 한 비둘기처럼 하였는데, 사람이 가리개 사이에 있으면서 훔쳐보는 줄도 모릅디다…’ 요즘 소설이 아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청나라를 다녀와 쓴 기행문이다. 재기발랄한 글쓰기에 거침이 없었던 연암조차 동성애가 당시 습속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점을 의식한 듯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전해 들은 형식으로 서술한다. 그런데 그간 일반 독자들은 이 대목을 접하지 못했다. 한문으로 쓰인 ‘열하일기’를 한글로 옮긴 번역본은 지금까지 10여종이 나왔는데 연암 연구가 김혈조 영남대 교수가 최초의 완역본을 표방하며 2009년 돌베개를 통해 선보인 번역본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열하일기’는 시대착오적인 반청 사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조선이 낙후한 책임을 물어 양반 사대부를 비판한 탓에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다. 그래서 당대에는 제대로 출간된 적이 없고, 후손들과 후학들에 의해 사회적 통념에 배치되는 일부 내용들이 수정되고 삭제된 이본들이 여러 가지 나왔다. 김 교수의 번역은 1932년 박영철본을 바탕으로 삼았는데 이조차 여러 차례 윤색을 거친 것이었다. 그런데 2012년 연암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원 선생 소장의 초고본과 이를 필사한 초고본 계열이 영인본으로 세상에 공개되며 온전한 ‘열하일기’에 한발 더 다가서는 전기가 마련됐다. 김 교수는 초고본 등을 일일이 비교하며 누락되고 변형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또 초고본의 글투에 맞게 다시 정리했다. 2009년 출간본의 개정판인 셈인데 따로 책 한 권을 족히 만들 정도인 164쪽이 늘어났다. 연암이 중국의 희귀 성씨를 언급한 부분에서 성적인 내용을 연상케 하는 일부 대목이 후기 필사본에서 없어졌는데 되살렸다. 천주학(천주교)에 대한 서술도 천주학 자체가 아니라 모임이 열렸던 건물이나 그 건물 안에 있던 그림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바뀐 게 바로잡혔다. 아예 통으로 빠졌던 ‘양매시화’(楊梅詩話), ‘천애결린집’(天涯結隣集)의 글들은 새로 수록됐다. 도판 사진도 새롭게 실렸다. 완전체에 가까운 ‘열하일기’ 번역본이 나온 셈이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변풍경’ 속 빨래하던 아낙 모습 절로 떠올린 청계천…뜨끈한 국물·역사 얘기에 몸·마음 채운 용금옥·부민옥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변풍경’ 속 빨래하던 아낙 모습 절로 떠올린 청계천…뜨끈한 국물·역사 얘기에 몸·마음 채운 용금옥·부민옥

    11월의 첫 주말인 지난 4일 집결지인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주변은 바람이 찼다. 청계천을 무대로 쓴 박태원 ‘천변풍경’의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일상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들기고 비벼 빨았을 아낙들은 이 정도의 바람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리라.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석조건물은 태종 때 만들어진 광통교인데, 중구 정릉에 남아 있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서 가져왔다는 해설은 듣는 이의 귀를 잡아 두기에 충분했다. 따끈한 국물 생각이 절실했던 차에 1932년부터 시작된 용금옥 추탕의 역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점심 메뉴를 정할 수 있었다. 넉넉하고 푸짐한 인심으로 근방의 정치, 언론인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었고, 부민옥도 대파를 넉넉히 넣은 매콤한 육개장 국물이 대표 메뉴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을 눈으로 직접 보는 진귀한 경험도 했다. 베를린시로부터 기증받은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 곰과 함께 설치돼 있었다. 다들 장벽의 폭과 길이를 재어 보고, 둘레를 돌면서 손으로 밀어 보고 쓰다듬기도 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국민이 불과 얼마 전까지 서독과 동독을 가로지르던 콘크리트 장벽을 마주한 소감은 어땠을까.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는 인사동 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다. 숱한 관광객을 제치고 쌈지길 계단에 모여 천재 시인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들었다.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난해한 암호 같다. 두 명의 해설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역을 나눠 설명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답사 시간 3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리 준비해 온 사진과 지도 자료가 톡톡히 한몫을 해냈으며, 탐방 코스에 문학이 함께 어우러지니 해설이 더욱 풍성하고 낭만이 흘렀다. 인사동 골목 어귀에 있던 ‘귀천’이라는 작은 찻집 옆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었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가는 곳곳마다 소설과 시가 함께 있어 더욱 특별했다. 이지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美대통령 25년 만의 국빈 방문] 전통 의장대가 호위… 캐딜락 원 ‘왕의 행렬’ 방불

    [美대통령 25년 만의 국빈 방문] 전통 의장대가 호위… 캐딜락 원 ‘왕의 행렬’ 방불

    트럼프 “환영식 아름다워… 마음에 깊이 담을 것” 청와대로 향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한 것은 한복을 입은 전통 의장대였다. 오후 3시쯤 전용헬기를 타고 서울 용산기지에 도착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 미리 공수된 전용방탄차량 ‘캐딜락 원’으로 갈아타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文 “이번 방문이 북핵 해결 계기 되길” 트럼프 대통령은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부터 청와대 본관까지 전통 의장대의 호위를 받았다. 천천히 달리는 캐딜락 원과 경호차량을 전통 의장대와 취타대가 아리랑 등을 연주하며 둘러싸고 걸어 마치 왕의 행렬을 연상케 했다. 취타대는 조선시대 왕이 행차할 때 앞장서 악기를 연주해 ‘왕의 위엄’을 세우던 악대다. 청와대 중앙현관 앞, 차에서 내린 트럼프 대통령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문재인 대통령 내외에게 인사했다. 현관에서는 서울 용산 남정초등학교 학생 32명과 미8군·주한미국 대사관 가족 어린이 20명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며 환호했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악수와 함께 서로의 팔에 손을 얹으면서 친근한 모습을 보였다.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도 반갑게 악수했다. 미국 대통령 공식 입·퇴장곡인 ‘헤일 투 더 치프’(Hail to the Chief)로 시작된 환영식은 10여분간 진행됐다. 미국 국가에 이어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양국 정상은 수행원들과 인사한 뒤 청와대 안으로 들어갔다. 퇴장할 때는 문 대통령의 전용곡인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가 연주됐다. 이어진 단독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1주년을 축하한다”며 “이번 대통령 방한이 북핵 해결에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환영식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주 아름다운 환영식을 깊이 마음에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트럼프 내외에 “함께 가자” 놋수저 선물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두 영부인은 청와대 1층 영부인 접견실에서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지난 6월 문 대통령의 미국 워싱턴 방문과 7월 베를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났다. 차담회에서 김 여사는 “8살, 4살 손자에게 밝은 미래를 안겨 줘야 하는데 북핵 문제를 직면해 걱정”이라고 말했고 멜라니아는 “모든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평창올림픽을 알리기 위해 제작된 차 ‘평창의 고요한 아침’을 마시고 김 여사가 직접 청와대의 감나무에서 따 말린 곶감으로 만든 다과를 먹었다. 두 영부인은 청와대 안 정원인 녹지원으로 자리를 옮겨 공식 환영식에 참가한 어린이 환영단을 만나 한국과 미국 국기의 색깔이 들어간 목도리를 선물했다. 청와대는 트럼프 대통령 부부를 위해 만찬 선물로 한국 대표 공예품인 놋수저와 돌그릇을 준비했다. 방한 일자와 함께 ‘함께 갑시다’를 뜻하는 영어 ‘We go together’를 새겨 끈끈한 한·미 동맹을 표현했다. 밤늦게 공식 일정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서울 남산에 있는 그랜드하얏트 서울 호텔에 머물렀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역사도시 1번지 종로 ‘자문밖문화포럼’…세계 예술도시로”

    “역사도시 1번지 종로 ‘자문밖문화포럼’…세계 예술도시로”

    광화문광장 구조재편,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 등 도시의 틀을 바꾸는 대형 계획이 속속 나오면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의 조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면서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나아가 그 역사와 문화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활동을 창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강남 같은 강북 개발’을 내세워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 역사·문화 콘텐츠 보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도시 철학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서울신문은 ‘역사 도시 1번지’인 종로의 관리자이자 건축가 출신인 김영종 서울 종로구청장과 김수근·김중업 시대 이후 한국 건축계의 큰 산으로 불리는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의 대담을 통해 우리 역사도시의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 방향에 대한 비전을 들어봤다. 대담은 지난달 30일 서울신문 사회2부 주현진 차장의 진행으로 종로구 부암동의 전통문화시설인 ‘무계원’에서 두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역사·문화 도시의 공간으로 무계원을 추천했는데. -김영종 구청장:서울의 얼굴인 종로는 조선 왕조의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정체성으로 삼으면서도 현대화된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 사업 중 하나가 무계원이다. 민선 5기 출범 직후인 2010년 10월 종로 익선동에 1910년대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출발해 1970~80년대 3대 요정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린 오진암이 호텔 건립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안평대군의 숨결이 깃든 무계정사지 인근에 부지를 확보하고 철거 자재가 팔린 강원도 인재 등으로 찾아가 자재를 되찾아왔다. 숭례문 복원에 참여했던 건축기술자들이 기와, 서까래, 기둥 등 큰 자재는 물론 창호와 같은 부수 자재까지 옮겨와 오진암을 복원해 2014년 3월 무계원을 개관했다. 무계정사의 분위기를 옮겨 온 정원이란 의미로 무계원으로 명명했다. -김원 대표:무계원, 상촌재 등이 있는 서촌에는 조선조 때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글씨도 많다. 추사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라는 바위 글씨를 비롯해 백사 이항복의 글씨가 남아 있는 ‘필운대’ 등이 있다. 바위글씨는 글씨체도 좋지만 역사적으로 어떤 곳이었는지 증명해 주는 기록물이다. 도시는 이 같은 유적을 소중한 문화재로 보존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이를 알도록 해야 한다. →역사 도시로서 종로를 평가한다면. -김 구청장:2012년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 계곡을 겸재 정선의 그림(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회화)처럼 복원했는데 석축을 쌓을 때도 시멘트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등 풀 한 포기 심는 것도 전통 방식을 고집했다. 시멘트를 걷어내면서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인 기린교도 발견해 보존했다. 종로는 서촌(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이 역사 인물들의 생가터가 모여 있는 것은 물론 국내 문학과 예술의 거장들이 창작 활동의 무대로 삼아 온 근현대 유적이 풍부한 곳이란 점에 착안해 한옥 보존뿐 아니라 문화·역사 콘텐츠 보존을 중심으로 재정비 사업을 폈다. 버려진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활용한 윤동주문학관, 구립 박노수미술관, 상촌재 등이 대표적이다. 지역의 역사 문화 콘텐츠를 최대한 활용해 지속가능한 자원으로 만든 결과 서촌은 명승지로 거듭났다. -김 대표:모두 김 구청장이 건축을 공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철거된 옥인동 아파트는 김현옥 당시 시장 때 지은 것인데 그분이 기초 공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기린교는 없어졌을 것이다(웃음). 종로의 복원 노력으로 지금은 서울의 명소가 됐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다. 서촌은 조선시대 역관 등 중인 계급이 모여 살던 곳이다. 당시 중국을 오가면서 선진 문물을 접해 식견이 있고 대를 이어 잘살 만큼 부를 쌓은 데다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들의 모임에 이인문, 김홍도, 김정희 등 당대 화가들도 대거 참여했다. 중인 계급들의 문화 성취는 영·정조 시대 조선 왕조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룩한 원동력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런 배경이 있기에 이상, 윤동주 등 근대 작가들이 이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많은 예술인들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종로는 이 같은 역사 문화 콘텐츠를 더 발굴하고 발양해서 종로구민은 물론 국민 모두의 문화 자부심을 키워야 한다.→종로는 대를 이은 역사·문화의 중심지란 말인데. -김 구청장:세계적인 예술도시로 만들기 위해 평창동·부암동 일대에 ‘자문밖 창의예술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미술관이 밀집해 있고 수려한 자연경관까지 갖춘 그곳에 작가 이어령 선생 등 문화·예술인만 100명이 넘게 산다. 이분들을 중심으로 ‘자문밖 문화 포럼’을 꾸려 일대를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문화·예술 마을로 만들려는 것이다. 앞서 구가 직전 시장 재임 때 평창동에 가스 충전소를 만들려던 것을 설득해 내년 착공하는 문화시설인 자문밖 문화 충전소로 짓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그분들과 잘만 협력하면 종로구에 미술관, 문학관 등을 150개도 넘게 지을 수 있다. 다른 지자체에서 미술관을 지어 준다며 돈 들여 예술가를 영입하는 작업을 많이 하는데 작품 활동을 한 지역에 기념관이 들어서는 게 의미가 있다. 미당 서정주 기념관을 설계하다가 보니 예술가 가옥 보존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종로는 월대 등 역사 복원이 논의되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 구역이기도 한데. -김 대표:경복궁 앞 월대를 복원하고 현재 세종대로 왕복 6차로를 모두 없애 차 없는 광장으로 만드는 게 최적의 방안이다. 차량 흐름은 최근 확정된 강남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 설계처럼 햇빛이 드는 지하도시 조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선진국 지하도시에는 이번에 영동대로 지하공간이 추구하는 것처럼 기차나 지하철을 위한 역사는 물론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 공공시설도 들어 있다. 파이낸스빌딩 건물주인 싱가포르투자청이 자기네가 돈을 낼 테니 서울시부터 파이낸스빌딩, 서울신문 등을 거쳐 청계천변까지 연결되는 지하 길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지하도시는 메리트가 있다. -김 구청장: 광화문광장 밑으로 지하도시를 만든다면 종로구청까지 연결되면 좋겠다. 종로구는 앞서 지난해 건물주들을 설득해 공적 비용 없이 민간 빌딩 간 지하 네트워크인 청진지하도 조성사업을 완성한 경험이 있는데 광화문광장 밑으로 대형 지하도시를 조성하게 된다면 종로는 그야말로 현대 도시의 대표 공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다만 광장이 있는 종로 구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고 구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등 구민이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건축가 출신 김영종 구청장 2010년 민선 5기에 이어 6기 4년차를 맞고 있다. 서울시 건축과 공무원 출신으로 1983년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26년 4개월간 백화점, 종합병원 등을 설계하며 건축가로 일했다.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올해의 건축문화인상을 받았다. 조선대 병설공업고등전문학교 건축과(5년제), 서울산업대 건축공학과 등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서촌 마을 조성은 물론, 청진동 일대 빌딩과 지하철역 등을 지하보도로 잇는 ‘청진구역 지하보도 조성사업’을 하면서 발굴된 각종 문화재들을 보존·전시하는 등 역사를 지키면서도 편리한 도시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도심 역사보존 전문가 김원 대표 독립기념관 마스터플랜(설계 전 계획), 국립국악당, 주한 러시아대사관, 코엑스,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박완서 문학관 등 종교, 문화 작품을 주로 설계했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6년간 일한 뒤 네덜란드 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1976년 건축환경연구소 광장과 도서출판 광장을 설립해 건축과 출판 작업을 병행했다. 도심 속 역사 문화 보존을 위한 종로구 도시공간예술위원회 위원장, 광화문광장 구조개선 사업을 위한 서울시의 광화문포럼 위원장을 맡고 있다.
  • 선비에 가려진 조선시대 ‘자식 바보’

    선비에 가려진 조선시대 ‘자식 바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박동욱 지음/휴머니스트/308쪽/1만 5000원20대엔 30대가 어른처럼 보인다. 30대가 되면 40대가 또 그렇다. 그렇게 40대가 돼 되돌아본들 스스로 어른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지 싶다. 내가 저 나이가 되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나이가 돼도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야 나도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영웅이자 ‘꼰대’인 복잡다단한 존재,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선비라는 이름 뒤에 숨겨야 했던 조선의 ‘자식 바보’ 아버지들의 모습이 담겼다. 책은 조선시대 아버지 13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개는 자식을 앞세우거나, 유배지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지낼 때의 소회 등 상실의 체험들이다. 조선시대 평균 연령은 30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 환갑에 가까워질수록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을 터다. 다산 정약용은 6남 3녀를 낳아 그중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었다. 출생 후 4일부터 길게는 4년까지 살다 갔다. 그렇게 죽은 자식이 여섯이나 되니 그 아픔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슬픈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하늘에 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을까. 그는 당시의 고통을 ‘마과회통’이란 책에 여실히 남아 냈다. 문장가 김창협의 사연도 절절하다. 그는 ‘어린 자식 청상의 광지’라는 글을 통해 “피붙이가 이따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운명일 뿐”이라면서도 “뒷사람들은 이곳에 쟁기를 대어 파헤치지 말기를 바란다”며 통곡했다. 잔소리 많은 ‘꼰대’의 모습이 빠질 리 없다. 실학자 안정복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에서는 중처럼 지내고 마을에선 아낙처럼 처신하라”며 근신을 다그친다. “중은 가난을 마다하지 않고 아낙은 늘 남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며 아들이 듣기 싫을 법한 해설까지 곁들였다. 채팽윤은 피붙이인 친자보다 양자로 들인 아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고, 윤기는 ‘흙수저’만 안겨줄 수밖에 없던 아버지로서의 버거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지배층에 부림당한 조선백성의 ‘살아남기’

    지배층에 부림당한 조선백성의 ‘살아남기’

    모멸의 조선사/조윤민 지음/글항아리/440쪽/1만 8000원조선시대 양반집 아이들 놀이에 ‘벼슬 겨루기’인 종정도(從政圖)가 있다. 종이판에 여러 관직명을 써놓고 나무막대를 굴려 나온 수대로 말을 이동시키는 형식이다. 누가 먼저 최고 관직에 오를지를 겨루는 오락 도중 특정 관직에 오르면 그 관직의 실제 권한과 유사한 힘을 행사한다. 관직에 따른 권능 차이와 권력서열을 체득하면서 신분제를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사회를 틀 짓는 관료체계를 아이들 놀이판에 그대로 옮겨 놓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 관료기구와 통치방식에 백성들은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 냈을까. 조선시대 사회상을 다룬 책들은 지배층 관료체제·통치시스템과 백성들의 삶을 구분해 접근해 왔다. 오랫동안 역사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한 저자는 양쪽을 연결시켜 조선시대를 살펴 신선하다.백성을 직업과 역할에 따라 농부·어부·장인·광부·상인·도시노동자·광대·기생·백정·노비 등 열 부류로 나눠 각 부류의 반응을 3개 키워드로 분석한 점이 도드라진다. 바로 순종과 적응, 선망과 상승, 기피와 저항이다. 통치정책과 제도, 피지배층의 일과 생산이라는 양자관계에 따라 국가의 현실과 미래가 결정됨을 보여 줘 흥미롭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통치·정책 실행에 따른 백성의 다양한 세상살이와 생존법이다. 농부·어부 편을 보면 농본정책과 민본정책의 실상을 노동력과 재정 확보에 연결하고 있다. 장인·광부 장에선 수공업·광업을 생계로 삼고 이를 자신들 삶의 양식으로 형성해 나간 추이를 훑었다. 농민에서 도시빈민층으로, 다시 고용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한 부분도 들어 있다. 부류마다 대표 일화를 이야기나 소설 양식으로 기술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일화와 사료에 얹어 풀어내는 백성들의 삶이 적나라하다. 광대 편에 소개된 ‘세조실록 34권’의 한 대목을 보자.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나례를 구경했다. 술자리가 마련되고 집회가 시작됐다. 역귀를 쫓는 배우(광대)들이 잡희(우희)를 펼쳤다. 서로 문답하면서 관리의 탐오하고 청렴한 언행과 여염의 더럽고 소소한 일까지 들춰냈다.” 궁중연희에서 하층 광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드러낸다. ‘태종실록 22권’ 속 광부들의 실상도 눈에 띈다. “임금이 말했다. 사대하는 나라에 금, 은이 없을 수 없다. 서북면 태주, 경기 금주, 경상도 김해, 안동에 백은이 난다니 찾아 캐도록 하라. 백성을 동원해 힘들게 하는 것이 하찮은 일은 아니지만 금, 은 확보는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니 하늘인들 싫어하겠는가.” 사대주의의 틈새에서 동원되고 희생된 노동자들을 살필 수 있다. 말미의 대목은 조선시대의 압축인 듯 보인다. “조선 지배층이 행사한 지배전략의 핵심은 백성 다수를 기존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 얽매인 채 부림을 당하며 사는 항민(恒民)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최소한 수탈당하고 살면서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할 뿐인 원민(怨民) 부류에 묶어두려 했다. 지배층의 욕망이 더욱 과해지고 팽배한 이익 추구가 백성의 생존까지 빼앗으려 할 때 세상에 불만을 품고 뒤엎으려는 호민(豪民)이 되고자 하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 이미지는 이렇게 매듭지어진다. “오늘 이 시대의 물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배는 어디에 있는가. 배는 물과 함께 가고 있는가.”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나라 조선, 왕릉 옆엔 왜 사찰이 있을까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나라 조선, 왕릉 옆엔 왜 사찰이 있을까

    유교적 전통으로 조성된 조선 왕릉 무덤 지키는 ‘수호 사찰’과 짝 이뤄 능침사찰·능사·조포사 등으로 불려조선의 왕릉은 모두 42기다. 이 가운데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일괄 등재됐다. 개성에 있는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제릉(齊陵)과 두 사람의 둘째 아들로 제2대 왕에 오른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만 제외됐다. 조선왕조 27명의 왕과 왕비, 추존(追尊)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망라한 것이다. 한 왕조의 무덤이 이렇듯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왕릉 역시 유교적 장례 전통에 입각해 조성했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터를 잡고, 곽(槨)을 앉혔으니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조선 왕릉은 능침(寢)과 능침을 둘러싼 무덤 영역이 전부가 아니다. 조선 왕릉은 안장된 인물의 명복을 빌면서 무덤을 돌보는 역할도 하는 사찰과 짝을 이룬다. 유교적 이념에 맞게 국가적 공력을 들여 무덤을 조성했다면, 불교신앙을 이어 가고 있던 왕실이 종교적 추모시설을 더한 것이다. 그러니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원찰(願刹)을 제외시킨 것은 개인적으로 유감스럽다. 왕실 무덤의 수호사찰을 원찰이라 하는데 능침사찰이나 능사, 조포사(造泡寺)로도 부른다. 조포사란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두부’란 상징적인 표현일 뿐 제향에 필요한 대부분의 음식을 제공했다. 대신 원찰은 왕실이 제공한 토지로 사원경제를 유지했다. 원찰의 역사는 1397년(태조 6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오늘날의 덕수궁 주변에 조성하면서 수호사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함께 세운 것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덕수궁 뒤편의 마을 이름이 정동(貞洞)인 것은 바로 정릉이 있던 터이기 때문이다. 이후 정릉과 흥천사는 모두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 땅인 미아리고개 너머로 옮겨졌다, 잘 알려진 왕릉과 원찰로는 호불대왕(好佛大王)이라 불릴 만큼 친불교적이었던 세조의 남양주 광릉(光陵)과 봉선사(奉先寺),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英陵)과 신륵사(神勒寺),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화성 융릉(隆陵)과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그런데 원찰이 왕릉의 전유물은 아니어서, 영조는 파주 보광사(普光寺)를 친어머니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園)의 수호사찰로 삼았다.오늘 찾아가는 서울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그리고 봉은사(奉恩寺) 역시 조선시대 왕릉과 원찰의 관계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선릉은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은 제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지금은 서울 강남구에 속한 일대는 과거 경기도 광주 땅이었다가 1963년 서울 성동구에 편입됐다. 한양 도성에서 한강을 건너야 하는 흔치 않은 왕릉이었다. 성종은 재위 26년에 이른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나이 38세였다. 장례는 이듬해인 연산군 1년 4월 6일 선릉에서 치러졌다. 당시 지명은 광주 학당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1530년(중종 25년) 10월 29일 정현왕후가 선릉의 동북쪽 언덕에 묻혔다. 선릉은 이른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제각을 비롯한 능침 시설은 하나지만 각각 다른 봉우리에 쓴 두 기의 무덤을 이렇게 부른다. 한마디로 합장묘가 아니라는 뜻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제례가 이루어지는 정자각이 보이고 그 양쪽으로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제사 용구를 준비하는 수복방이 있다. 그 왼쪽 언덕에 동남향의 성종대왕릉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오른쪽 언덕에 서남향의 정현왕후릉이 있다. 무덤을 이렇게 쓴 것은 정현왕후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였다. 성종 즉위 5년 만에 세상을 떠난 공혜왕후는 파주 순릉(順陵)에 묻혔다. 계비는 숙의 윤씨였는데, 성종보다 12세 많았던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다. 세 번째 왕비가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다. 중종은 재위 39년 만인 1544년 11월 15일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인종 1년 2월 3일 당시에는 고양 땅이었던 파주의 장경왕후 희릉(禧陵) 옆에 묻혔다.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反正) 세력은 쫓겨난 임금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 자리에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새로 들인 왕비가 장경왕후 윤씨다. 장경왕후는 9년 만인 1515년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무덤은 18년이 지난 1562년(명종 1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선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 수호사찰은 견성사(見性寺)였다. 통일신라 시대인 794년(원성왕 10년) 연회국사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이다. 봉은사도 절의 역사가 견성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본성에 곧바로 다가가 부처에 이르는 것’(見性成佛)은 선불교의 종지(宗旨)다. 연산군이 선종사찰을 선릉의 수호사찰로 삼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연산군은 작고 낡았을 견성사를 중창하고자 했다. 신료들은 유교국가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창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절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보인다. 1495년(연산군 1년) 12월 7일 기사다. ‘지금 견성사가 능 곁에 가까이 있어 중들이 불경 외는 소리와 새벽 종소리 저녁 북소리가 능침을 소란하게 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성종대왕의 영이 어찌 심한 우뇌(憂惱)가 없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사찰은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철거하지 않고 재(齋) 역시 고례(古例)라 하여 굳이 지내십니까. 바라옵건대,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유신(儒臣)들은 선릉 영역 내부에 있었던 견성사를 멀리 옮겨 지으라고 압박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1498년 실제로 견성사를 옮겨 짓는 공사를 시작했던 것 같다. 이해 5월 23일 예조판서 박안성은 ‘신은 견성사가 능실과 너무도 가까워 만약 철거를 못 하겠으면 먼 곳으로 옮겨 지어야 한다고 했던 것인데 ‘대신이 주상의 뜻에 영합해서 그렇게 만든다’는 상소가 있었으니 곧 신을 이르는 것’이라면서 사직을 청한다. 신하들의 반대를 연산군은 새로운 절을 짓는 명분으로 역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절이 봉은사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파헤쳐지는 참변을 겪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관은 왜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중종의 시신 또한 찾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에 두 능을 파헤친 자를 잡아 보내라고 가장 먼저 요구했다. 일본은 마고사구(麻古沙九)라는 대마도인을 범인이라며 붙잡아 송환했지만 당사자는 부인했다. 마고사구는 ‘도주 군관의 노비로 나와 부산 선소(船所)에 머물렀을 뿐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으니 능침을 범한 연유를 전연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 또한 웃지 못할 일이었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현장 행정] “지방분권 개헌, 주인의식 갖고 참여해야”

    [현장 행정] “지방분권 개헌, 주인의식 갖고 참여해야”

    “지방자치는 기본이다. 조선시대에도 했다. 마을에서 공동체가 할 일을 정하는 등 다했다. 5·16 이후 그런 싹을 다 잘랐다. 의사결정을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정상적으로 가는 사회를 막았다. 지난 50년간 잘못된 삶을 살았다. 말만 지방자치지, 지방자치 아닌 게 너무 많다.”2일 오후 3시 서울 광진구청 종합상황실에 김기동 광진구청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 구청장이 ‘주민자치아카데미’ 연사로 나서, 주민자치위원 60여명을 대상으로 ‘지방분권 시대, 주민자치위원회 역할’에 대해 강연했다. 김 구청장은 “지방자치 최대 장점은 상향 평준화”라며 “광진구가 잘하면 다른 자치구에서 다 따라온다. 우리 구에서 공중화장실에 냉난방시설을 처음 설치했는데, 그 이후 다른 자치구에서 다 도입했다”고 했다. 지난 6월 아동친화도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았던 스위스를 예로 들기도 했다. 김 구청장은 “스위스는 복지를 중앙에서 통제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총리도 없다”며 “직접민주주의로 세금 부담과 복지 수준을 주민이 결정한다. 복지 정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스위스와 선진국들은 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지방분권으로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구청장은 “구민과 더 가까이에 있는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보다 구민 목소리를 더 잘 듣고,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도 더 빠르다”며 “획일적인 중앙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주민이 요구하는 정책과 행정 환경을 만들어 주민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진구가 지방분권에 대한 주민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주민자치아카데미’를 마련했다. 지방분권 공감대를 확산하고, 지방분권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광역단체와 기초단체 간 문제가 아니라 주민 삶과 직결된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게 목적이다. 지방분권은 문재인 정부의 최대 현안 중 하나다. 김 구청장은 “대통령이 지난 대선 기간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를 하겠다고 공약했다”며 “내년 개헌 때 지방자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국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민자치아카데미는 다음달 7일까지 매주 목요일 열린다. 홍석기 감성경영연구소 리케움 대표, 김필두 한국자치학회 운영이사, 오동섭 태평양아카데미센터 수석 등이 연사로 나선다. 구는 오는 16~17일엔 경기 가평군 청평면의 한 리조트에서 동(洞) 관리자들의 자치 역량 강화를 위해 워크숍을 연다. 김 구청장은 이 자리에서도 자치분권에 대해 특강한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이혜경 서울시의원, 복식고증 통한 서울시 전통문화행사 재연방안 논의

    이혜경 서울시의원, 복식고증 통한 서울시 전통문화행사 재연방안 논의

    우리 고유의 의복으로 뛰어난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한복. 그러나 한복은 활동하기 불편하고 특별한 날에 차려입는 옷이라는 인식 때문에 한복수요가 급감하면서 국내 한복 산업은 점차 쇠퇴일로에 있다. 여기에 민‧관 주도의 각종 전통문화행사에서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한복까지 등장하면서 전통한복의 보존과 발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서울시는 정조대왕능행차(서울시)를 비롯해 고종·명성황후 가례재현(종로구), 관악 강감찬 축제(관악구), 한성백제문화제(송파구) 등 다양한 전통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적지않은 행사비, 시민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사에 대한 고증이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아 자칫 시민들에게 역사적 오해와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행사 중 화려한 볼거리를 담당하는 복식은 시민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고증에 대한 자문은 커녕 전문성 없는 의상감독이 전통문화행사에 선임되거나 심지어 의상감독 조차 없는 경우도 있어 전통복식에 대한 시민들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실례로 서울시의 정조대왕능행차 행사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붉은 의례복을 입었는데,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혜경궁 홍씨의 경우 왕비의 색인 붉은 계열의 복식을 갖출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타 전통문화행사에서는 조선시대 재현행사가 아님에도 조선시대의 복식을 갖추어 진행되는 등 역사적 고증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일부 전통문화행사가 지나치게 대행업체의 수익에만 의존하는 현행 사업방식과 함께 고증과 재현을 통한 전통문화의 가치 제고보다는 축제성 이벤트 개최에만 집중하는 성과주의적 접근이 문제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에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우리 한복의 가치와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국내 한복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기반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혜경 의원(자유한국당, 중구2)의 주최로 현재 ‘복식 고증을 통한 전통문화행사 재연방안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연구는 올 12월 초에 완료되며, 서경대학교 박은정 교수, 임성은 교수, 김국희 교수가 맡아 서울시 외에도 다양한 지역 축제 및 행사를 토대로 복식 고증에 대한 전문성 강화를 위해 다각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10월 27일에 열린 중간보고회에서는 박현주 한복기술진흥원장, 장재환 서울문화재단 축제팀장, 류재숙 경희대학교 관광학교수가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박현주 원장은 “한복 업계에 역사적 연구를 통해 고증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면서, “서울시부터 전통문화행사에 철저한 복식 고증을 실현해 시민들에게 올바른 전통을 알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인지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장재환 팀장은 “서울시의 전통문화행사가 상업구조에 휩쓸려 ‘전통문화’ 가치가 아닌 ‘행사’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성하고 있다”면서 “향후에는 복식부터 세세한 예절까지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오류가 없도록 기초가 단단한 행사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류재숙 교수는 “서울시 전통문화행사는 관광학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운을 띄우며, “최근 많은 외국인들이 일부러 이러한 행사를 찾아다니며 보고 있는데, 정확한 역사를 녹여내어 진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용역의 주최자인 이혜경 의원은 “최근 서울시내 고궁 주변과 전주 한옥마을 등의 길거리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복을 입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한복을 입는 문화가 발전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반갑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복의 퓨전과 현대화가 한복 확산이라는 순기능도 있지만, 전통을 지키는 측면에서는 부작용도 있는 만큼, 전통적이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한복을 지켜나가고 입는 문화도 함께 발전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피력했다. 한복의 중흥을 위해 관심과 소신을 지켜 이번 연구를 주최한 이혜경 의원은 “이 연구는 한복 산업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추진했던 것”이라고 밝히며, “오늘 참석해주신 전문가들의 고견을 잘 받아들여, 향후 서울시의회에서 조례 제·개정, 예산 편성 등 필요한 일들을 해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중간보고회를 마무리했다. 한편, 한복 사랑은 정평이 나 있는 이혜경 의원은 2016년 4월 「서울시 한복착용 장려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1인 발의하여 상정·통과한 바 있으며, 현재 이 조례는 서울시 문화본부에서 맡아 시행 중에 있다. 또한, 문화재청의 디지털 귀향전을 비롯하여 서울시 정조대왕능행차, 중구 정동야행 등 주요 행사마다 한복 착용을 하는 것은 물론,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 전시회에도 한복을 입고 참석해 해외 인사들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멋을 알리는 등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화학당부터 김연아까지 한눈에 보는 ‘여성체육史’

    이화학당부터 김연아까지 한눈에 보는 ‘여성체육史’

    김연아와 장미란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제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여성들은 활동하기 불편한 장옷을 입은 채 정숙함을 요구받았으며 운동이라고 해봐야 널뛰기나 그네뛰기, 강강술래 정도였다. 구한말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이후 1890년이 돼서야 이화학당에 여성 체육 교과목으로 체조가 도입됐다.근대 이후 ‘여성체육사’의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가 30일부터 1년간 경기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열린다. ‘여성, 체육의 지평을 열다’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회는 여성 체육의 발자취가 담긴 신문기사와 사진자료, 각종 유물과 여성 스포츠 스타 23명이 기증한 100여점의 소장품이 전시된다. 김연아(스케이트화), 장미란(역도 벨트), 이상화(쇼트트랙 유니폼), 기보배(활) 등이 자신의 소장품을 내놓았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전시회 개막식에서 “이번 전시가 국내 열악한 여성 체육 환경에서도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한계를 극복해 온 여성 체육인들을 격려하며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에 기여하는 한편 여성체육사 정립의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 여성이 세계 무대에 처음 발을 디딘 건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때다. 당시 선수명부엔 선수단 67명 중 원반던지기 종목에 출전한 박봉식이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돼 있다. 1973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32회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대표팀이 우승하면서 여성체육사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우승한 여성 체육인을 위한 카퍼레이드가 펼쳐졌으며 이들의 모습이 담긴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수영)를 필두로 이후 기보배(양궁), 지소연(축구), 김연경(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여성 스포츠 스타가 탄생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달콤한 사이언스] 젓갈 넣어 담근 김치는 언제부터?

    [달콤한 사이언스] 젓갈 넣어 담근 김치는 언제부터?

    지금처럼 젓갈 넣어 담근 김치는 언제 나왔을까? “김치 없이 못 살아 정말 못살아.” 최근 들어 김치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김치가 없는 한국인의 식단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그런데 지금처럼 젓갈을 넣고 양념을 버무려 먹는 김치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던 것일까. 지금까지는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젓갈 김치가 처음 나왔다고 알려졌지만 이보다 200년이 앞선 16세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식품연구원 부설 세계김치연구소 문화융합연구단 박채린 박사와 경북대 백두현 교수 공동연구팀은 16세기 이전 조리서로 추정되는 ‘주초침저방’에서 감동젓갈로 만든 ‘감동저’와 새우젓김치인 ‘동과백하해교침저’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10월호에 실렸다. 세계 각국은 독특한 절임채소를 갖고 있는데 대부분이 소금이나 장, 식초 같은 것에 담근 장아찌 형태다. 그렇지만 김치는 생채소에 각종 향신채소와 양념을 넣어 버무려 발효시킨 것으로 중국의 파오차이나 일본의 쯔케모노 등 절임채소와도 차별화돼 독특한 음식문화를 형성하고 있다.특히 김치 양념소에 들어가는 젓갈은 동물성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젓갈을 사용함으로써 김치는 동물성 및 식물성 영양물질과 유산균이 고루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젓갈김치 제조시점은 한국의 음식문화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정확한 시점이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전북 고창에서 전통술을 연구하는 이상훈씨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 전기의 조리서인 ‘주초침저방’을 분석한 결과 젓갈김치 2종의 조리법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젓갈 김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나온 ‘증보산림경제’(1766년)에 있는 새우젓오이김치와 1700년대에 나온 ‘소문사설’에 실린 무김치였다. 감동젓갈은 작고 가느다란 새우로 만든 것으로 보라색을 띄고 있기 때문에 자하, 곤쟁이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진상품으로 올리던 고급 젓갈이었다. 감동저는 이 감동젓갈로 만든 김치이고 동과백하해교침저는 박과에 속하는 일년초인 동아와 새우젓을 버무려 만든 김치다. 이번 연구로 이 두 김치는 현존하는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젓갈김치가 됐다.박채린 박사는 “이번 연구로 고춧가루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인 조선 전기에도 젓갈을 이용함 버무림 형태의 김치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설명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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