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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천시, 효문화 보존위한 ‘입지 효문화예술축제’ 오는 26일 개최

    과천시, 효문화 보존위한 ‘입지 효문화예술축제’ 오는 26일 개최

    경기 과천시는 오는 26일 효문화 보존과 발전을 위해 ‘제10회 입지 효문화예술축제’를 개최한다고 23일 밝혔다. ‘사랑과 효’를 주제로 중앙공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과천시와 한국효문화센터가 주최한다. 다양한 효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효’ 관련 국내 최대 규모 행사이다. 축제 명칭 ‘입지’(立之)는 조선시대 효자로 널리 알려진 과천 막계동 출신 최사립선생의 호다.이 행사는 효를 주제로 매년 전국의 초·중·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그림 공모전과 무용대회를 개최한다. 행사 당일에는 지난 4월 열린 무용대회와 공모전 우수자를 시상하고, 수상자의 축하공연과 글·그림 공모전 입선작 전시회가 개최된다. 효무용대회는 사랑과 효에 관한 아름다운 몸짓을 표현하는 무용실력을 뽐내는 대회다. 이와 함께 효문화예술체험, 다문화가족전통혼례, 장수잔치 등의 행사가 다채롭게 열린다.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효문화체험부스도 함께 마련된다. 효문화체험부스는 사랑의 카네이션 만들기, 사랑매듭 만들기, 캘리그라피, 3차원(3D)펜 체험 등 효관련 프로그램이 무료로 운영된다. 조선 중기 문인인 입지 최사립 선생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 79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다. 중종은 ‘최사립의 효행을 널리 알려 야박한 풍속을 돈독게 하라’며 정려(효자를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정하는 일)를 하사했다. 시는 문원로에 있는 ‘최사립 효자정문’을 시 향토사료 제3호로 지정해 전통문화 효의 의미를 되새기고 과천이 효행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왜장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논개 기리는 진주논개제 25~27일 개최

    왜장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논개 기리는 진주논개제 25~27일 개최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의기(義妓) 논개와 7만 민·관·군의 충절을 기리는 진주논개제가 오는 25~27일 진주성과 남강 일원에서 열린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 아래 바위(의암)로 유인한 뒤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경남 진주시는 21일 ‘제17회 진주논개제’를 비롯한 진주지역 여러 봄축제가 25~27일 3일간 진주성과 남강, 진주시가지 등에서 다채롭게 열린다고 밝혔다. 진주논개제는 진주시와 (재)진주문화예술재단,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가 주최하고 진주논개제 제전위원회가 주관한다. 본행사와 체험·부대행사, 동반행사 등으로 나누어 모두 47개 행사가 열린다. 첫날 논개 신위를 모시는 ‘신위순행’ 행사는 취타대와 기생, 선비, 탈출 길놀이팀 등 모두 450여명이 참여해 시가지 퍼레이드를 펼치며 축제 시작을 알린다. 이어 진주성 김시민 장군 동상앞에서 여성이 제관으로 참여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독특한 여성 제례의식인 의암별제가 진행된다.축제기간에 매일 오후 8시 의암주변 수상무대에서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뮤지컬 ‘논개순국 재현극’이 공연되고 야외공연장에서도 줄타기, 솟대쟁이 놀이 등 매일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행사장 주변에 마련된 역사문화 체험 공간에서는 의암별제 체험, 교방문화체험, 조선시대 진주목사 집무 체험, 진주검무 만들기 체험 등 역사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여러 체험 행사가 마련된다. 논개제 기간에 해외민속예술 초청공연, 진주남강물축제, 진주탈춤한마당, 2018 진주 스트릿 댄스 페스티벌, 진주국악제, 진주덧배기춤 한마당, 진주남가람 수학축제, 진주시 밴드 음악축제 등 13개 동반축제·행사가 이어진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씨줄날줄] ‘대가람의 뒷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대가람의 뒷간’/서동철 논설위원

    경기 양주시 회암사는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인도 선승 지공(指空) 화상이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서 창건했다는 262칸의 대형 사찰이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준 뒤 이 절에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승려가 300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한다.회암사터는 1997년부터 단계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전성기 때 모습이 드러났다. 지금 천보산 아래 회암사터를 찾으면 전각은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남아 있는 석축의 기하학적 아름다움만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광활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절터는 깨끗하게 정비됐고, 그 아래 절의 역사를 보여 주는 회암사지박물관이 세워졌다. 최근에는 절터와 박물관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적공원이 완성됐다. 회암사터는 새로 조성되고 있는 양주옥정신도시의 끝자락이다. 양주시민들은 역사와 문화, 휴식이 함께하는 멋진 유적공원을 가진 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지금 회암사터박물관에서는 ‘대가람의 뒷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회암사터박물관이 공동기획한 전시회다. 수천 명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면 배설물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회암사 조사단은 2005년 절터 동쪽에서 남북 12.8m, 동서 2.2m, 깊이 3.6m의 대형 석실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용도를 알 수 없었지만, 서울대 의대 연구팀이 바닥 토양의 성분을 분석하면서 주로 배설물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생충의 알을 확인했다. 뒷간이라는 증거였다. 주변에서는 정료대(庭燎臺)도 나왔다. 밤에도 불편하지 않도록 불을 밝힌 것이다. 전시회는 회암사 뒷간의 발굴 과정을 소개하고, 조사 연구를 거쳐 재현한 뒷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더불어 회암사터에서 발굴된 청동발과 백자장군을 비롯한 식생활 및 뒷간 유물, 소매통과 동이, 똥바가지 등 전통시대 뒷간 문화를 보여 주는 유물 등 128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의 뒷간 문화가 속세의 그것과 다른 것은 물리적인 배설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뒷간에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을 담은 전시실의 입측오주(入厠五呪)가 눈길을 끄는 이유일 것이다. 뒷간에 드나들 때 외우는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뒷간에 들어가면서 입측(入厠), 뒷물을 하면서 세정(洗淨), 손을 씻으면서 세수(洗手), 더러움을 씻어 버리며 거예(去穢), 몸을 깨끗이 하는 정신(淨身) 진언이 그것이다. 문경 김룡사 것이라지만, 다른 사찰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 [그때의 사회면] 공중전화 수난

    [그때의 사회면] 공중전화 수난

    지금은 이용자가 거의 없는 공중전화는 1889년 미국 발명가 윌리엄 그레이가 고안한 동전으로 작동하는 공중전화가 최초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전화국 안에 공중전화가 있었다고는 하나 동전을 넣는 사실상 최초의 공중전화는 1962년에 생겼다. 종전의 공중전화와 다른 점은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감시원이 없는 무인전화라는 것이었다. 빨간 네모 상자 모양의 본체 앞에 동그란 다이얼식 번호판이 붙어 있는 ‘벽괘형 공중전화’다. 그해 9월 20일 서울시청 앞, 서울역 앞, 서울 중앙우체국 앞과 남대문 로터리 등 서울시내 10곳에 처음 설치됐다.무인 공중전화는 처음부터 수난을 당했다. 보름 만에 절반인 다섯 대를 도둑이 통째로 훔쳐 간 것이다. 그나마 50환 동전만 쓸 수 있어 이용자가 적었던 바람에 잃어버린 돈은 많지 않았다. 송수화기를 절단해 가져가거나 전화번호부를 훔치는 도둑들도 있어 경찰이 골머리를 앓았다. 통째로 훔치지 않고 동전만 빼가는 절도범들도 잇따라 붙잡혔다. 못으로 자물쇠를 열어 공중전화 안에 있던 255원을 턴 20대도 있었고 시내 전역을 돌며 공중전화 동전을 훔친 이도 있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돈 먹는 공중전화’였다. 전화기 품질이 떨어져 거의 모든 공중전화가 고장이 잦았다. 다급한 사람은 혹시나 해서 서너번 동전을 넣었다가 15~20원을 손해 봤다며 신문에 독자투고로 고발하기도 했다. 급한 일로 공중전화를 걸었다가 전화가 돈만 삼키고 걸리지 않자 법원에 5원 반환소송을 낸 시민도 있었다(경향신문 1969년 7월 11일자). 법원은 당연히 승소판결을 내려주었다. 소송은 더 있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한 시민도 있었다. 1964년 4월 서울 공중전화는 99대였는데 고장건수는 한 달에 260건이었다. 전화 한 대가 한 달에 세 번 고장난 셈이다. 고장이 잦았던 이유 중 하나는 정해진 동전이 아닌 쇠붙이 따위를 넣고 전화를 걸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규격에 맞지 않는 조선시대 엽전이나 일본 동전 구화도 심심찮게 발견됐다(경향신문 1964년 5월 21일자). ‘이동공중전화차’라는 게 있었다. 공중전화 다섯 대를 설치한 차량을 시내 번화가를 돌면서 시민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매일경제 1969년 6월 16일자). 공중전화는 처음에 시간 제한이 없었다. 통화 시간이 늘어나 불편을 주자 3분으로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이었다. 시외 자동 공중전화기는 1977년에 처음 설치됐는데 일본 제조 회사의 이름을 따 ‘다무라 전화기’로도 불렸다. 최초의 공중전화 요금 5원은 당시의 물가 수준에 비해서는 싸지 않았다. 그래서 10여년간 올리지 않았다. 현재의 공중전화 요금은? 3분에 70원이다. 사진은 1962년 서울에 설치된 최초의 공중전화 부스 모습.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왕이 걷던 돈화문로서 우리 소리에 빠져볼까

    왕이 걷던 돈화문로서 우리 소리에 빠져볼까

    봄 기운이 완연한 5월 조선시대 왕이 걸었던 어로(御路)인 돈화문로에서 시조, 판소리, 가야금 등 우리 소리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서울시는 오는 25일까지 종로구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국악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인 ‘돈화문나들이’와 야외콘서트 ‘케렌시아’(안식처)를 선보인다고 17일 밝혔다. 창덕궁 일대 명소 투어와 국악 공연이 결합된 ‘돈화문나들이’는 1930년대 인력거꾼으로 변신한 소리꾼이 해설을 맡는다. 돈화문, 옛 국립국악원 터, 조선성악연구회 터, 운당여관 터, 종묘 돌담길 등에 얽힌 국악 이야기와 이동백, 박귀희 명창 등 국악인에 대한 일화를 전한다. 투어를 마치면 돈화문국악당 공연장에서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등 공연이 이어진다. 시 관계자는 “돈화문로는 과거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장소로 궁중 물류와 문화과 전해져 갖가지 문화예술이 꽃피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돈화문나들이는 단체 모집을 받아 운영해 일정과 시간이 유동적이다. 서울돈화문국악당(http://sdtt.or.kr/user/) 홈페이지에서 확인, 신청할 수 있다. 같은 기간 돈화문국악당 야외잔디마당에서 야외콘서트 ‘케렌시아’가 열린다. 전통 판소리부터 퓨전국악을 하는 팀이 공연한다. 평일 점심시간인 12시 20분부터 약 30분동안 진행된다. 석가탄신일(22일)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해 공연 시간을 오후 3시로 조정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말 대신 비 피한 피맛골… 땅속엔 옛 서울사람 모습 켜켜이

    [흥미진진 견문기] 말 대신 비 피한 피맛골… 땅속엔 옛 서울사람 모습 켜켜이

    2018년 1차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는 새해맞이 타종행사가 열리는 보신각에서 시작했다. 다르다면 종소리 대신 부슬부슬 봄비 소리가 종로에 가득했다고 할까. 지난해 투어에서 봤던 익숙한 얼굴들과 새로운 사람들로 새해처럼 붐볐고, 마음도 새해처럼 설렜다. 이어폰으로 들리는 해설사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했다.조선시대 감옥이 있었던 종로구 서린동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을 만났는데, 자세가 범상치 않았다. 일제의 고문으로 들것에 실려 압송되던 모습을 담았다고 하는데, 앉아 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힘을 전해주는 듯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인 청진동 피맛(避馬)골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도시문화복원소에 들렀다. 조선시대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이곳에는 지하 4~6m 깊이에서 발굴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600년 동안 서울사람들이 살아 온 모습이 문화층별로 켜켜이 나왔다고 한다. 시간에 따라 사람에게 새겨지는 주름처럼 그렇게 하나의 공간에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비에 신발과 가방이 젖었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힘차고 관심과 열기는 높아 갔다. 서울과 전국 도시 간의 도로상 거리를 표시해 놓은 도로원표에서 사람들은 가고 싶은 곳을 찾아 거리를 확인하고는 마음으로 날아갔다. 세종로 공원에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있었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노래의 끝 소절처럼 익숙한 서울이라고 스치듯 멀리했던 것들에 오늘은 천천히 머물러 마음을 주고 품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 황토마루 정원에서 본 물안개 속의 광화문광장이 다시금 펼쳐지며 시간을 관통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꿈을 꾸는 이유는 꿈이 이뤄졌을 때를 상상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 훗날에도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세종로를 걷고 있는 서울사람들을 꿈꾼다.
  • 세종대왕 행차요!… 행궁밥상·약수칵테일 대령이요~

    세종대왕 행차요!… 행궁밥상·약수칵테일 대령이요~

    전직 대통령들의 탄핵과 구속 등으로 우울한 요즘 위로를 받고 싶다면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를 추천한다. 충북 청주시가 오는 25일부터 3일간 청원구 내수읍 초정문화공원 일원에서 개최하는 이 축제는 자신보다 먼저 백성을 생각해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다. 우리도 자랑할 만한 국가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가슴이 뿌듯하지 않을까. 더불어 세계 3대 광천수로 인정받고 있는 초정약수를 마음껏 즐겨 볼 수 있으니 요즘 말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 최고의 축제다.●세종 2회 123일간 머물며 눈병 치료 15일 청주시에 따르면 세종대왕과 초정약수가 축제를 통해 ‘한몸’이 된 것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400년대로 가보자. 세종대왕은 1432년부터 눈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다음 해부터 당뇨까지 겹쳐 합병증까지 찾아왔다. 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위해 충남 온양온천 등에서 요양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낙심한 세종대왕은 다시는 온천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1444년 반전이 있었다. 청주에 후추 맛 같은 ‘초수’라는 물이 있는데 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세종대왕은 청주행을 결심하고 4~5일이나 걸려 청주를 찾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내수읍 초정리에 행궁(行宮)을 짓고 1444년 3월과 9월 두 차례로 나눠 총 123일간 머물며 눈병을 치료했다. 행궁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가 머무는 임시 궁궐을 말한다. 세종대왕은 초정에서 한글 창제의 마무리 작업도 진행했다. 또한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지역민들의 여론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는 등 민본정치를 실현하기도 했다. 축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시작돼 올해 12회를 맞는다. 축제의 백미는 세종대왕이 한양을 떠나 초정리로 오는 모습을 재현하는 어가행렬이다. 그동안 시는 어가행렬을 선보이면서 고종황제의 증손자를 세종대왕으로 분장시켜 참여시키고 수백명을 투입했다. 지난해 축제 때는 청주대 학생들과 군 장병 등 200여명이 왕비, 호위 무사, 신하, 궁녀, 장군, 선비 등의 의상을 입고 충북소주 공장에서 초정문화공원까지 2㎞ 구간에서 어가행차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모를 축소하는 등 변화를 주기로 했다. 축제 둘째 날인 26일 오후 초정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어가행렬에는 대학생 등 100여명이 참여한다. 또한 사물놀이패 등 시민공연팀이 어가행렬에 참여해 분위기를 띄운다. 어가행렬의 주인공인 세종과 소헌왕후는 전국 공모를 통해 선발한다. 나이 등 자격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남녀가 동반 신청만 하면 된다. 뽑히면 각각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식욕 증진·소화 촉진·구토 진정에 효과 어가행렬 규모를 줄인 것은 실제 초정으로 오던 세종대왕의 어가행렬이 소박했기 때문이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수와 수라상을 올릴 몇몇 사람, 집현전 학자, 각종 행사를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도화서 화공 등만이 함께 했을 뿐 취타대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이동암 청주시 축제담당은 “그동안 어가행렬이 보여주기였다면 이번에는 모두가 참여하는 어가행렬이 될 것”이라며 “축제의 재미가 배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축제 기간 동안 행사장에서는 세종대왕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조선시대를 느낄 수 있는 한옥 형태의 가건물을 만들어 한글 이름 도장 만들기와 휘호 쓰기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먹었던 음식을 직접 맛보는 행궁 밥상 체험 부스가 운영되고 조선시대 저잣거리가 조성돼 눈과 입이 심심할 틈이 없다. 집현전과 내의원, 수라간도 꾸며진다. 행사장 한쪽에는 별빛정원이 조성돼 아름다운 야경도 볼 수 있다.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펼쳐진다. 초정에 머물며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고 옷감을 하사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이번 축제의 한 축인 초정약수는 600여년 전에 발견됐다. 행사장을 방문하면 약수로 족욕을 하고, 약수로 만든 칵테일을 마셔 볼 수 있다. 행사장 방문객들이 약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시음대도 마련된다.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폴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인정받고 있는 초정약수는 유리탄산, 칼슘, 나트륨, 중탄산, 칼륨, 마그네슘, 이온이 많이 들어 있어 피부 미용에 좋다. 자체 탄산가스가 살균 작용을 해 위생적이다. 지하 50~100m에서 석영 암반을 뚫고 솟아나 허드렛물이 끼어들 틈도 없다. 한 모금 마시면 쌉싸래하며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감미료 등을 첨가하지 않은 싱거운 사이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조성렬 충북보건환경연구원 먹는물검사과장은 “탄산가스를 함유한 물이 피부에 닿으면 항균 작용을 하고 혈관을 확장시켜 준다”며 “이 때문에 초정약수탕에 들어가 앉으면 사타구니 등 예민한 곳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물을 마시면 식욕 증진, 소화 촉진, 구토 진정 등의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초정리 물이 좋다 보니 주변에 탄산수 등을 생산하는 일화, 충북소주, 롯데주류 등의 공장이 가동 중에 있다. 초정약수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 수 있는 목욕탕도 2곳이 있다. 김인석 내수읍장은 “주말이면 약수를 즐기기 위해 관광버스를 타고 초정을 찾는 외지인들이 많다”며 “임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이 요양을 위해 찾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주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시는 관람객 편의를 위해 축제 기간 중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청주 시내와 초정약수를 잇는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세종대왕 ‘초정 행궁’ 축구장 5배로 복원 추진

    세종대왕 ‘초정 행궁’ 축구장 5배로 복원 추진

    충북 청주시가 내년 9월 완공을 목표로 초정문화공원 일원에 세종대왕 행궁(조감도)을 조성하고 있다.15일 청주시에 따르면 이 사업에는 국비와 도비, 시비 등 총 155억원이 투입된다. 초정 행궁은 현재 남아 있는 충남 온양 행궁 등 조선시대의 다른 행궁이나 행궁도 등을 참고해 건립된다. 똑같이 복원을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초정 행궁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없다. 터에 남은 흔적조차 없다. 세종대왕이 초정을 떠난 뒤 수년 후 방화범이 불을 질러 사라졌다는 내용만 전해질 뿐이다. 건립 예정지는 초정문화공원 일대의 10여 필지가 왕실 소유로 기록돼 있는 일제 강점기의 토지대장을 근거로 결정됐다. 초정 행궁의 부지 전체 면적은 축구장 5배 정도 크기(3만 8006㎡)다. 중심부에는 세종대왕이 평소 업무를 보는 공간인 ‘편전’과 잠을 잤던 ‘침전’, 세자가 사용했던 ‘왕자방’이 자리잡는다. 주변에는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과 세종대왕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던 ‘수라간’이 위치한다. 집현전 옆에는 ‘독서당’이 꾸며진다. 세종대왕은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를 시행했는데, 독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전용공간이 독서당이다. 세종대왕과 초정약수의 연결고리였던 목욕시설 ‘탕실’과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초수문’도 재현된다. 행궁 어가가 전시될 ‘사복청’, 행궁 호위병들이 머물렀던 ‘사장청’도 배치될 예정이다. 방문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마련된다.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 한옥 6동 12실, 산책로, 연못, 야외 족욕 체험이 가능한 원탕 행각, 전통찻집도 꾸며진다. 서흥원 관광과장은 “행궁이 조성되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초정 일대를 세종대왕 테마관광지로 만들 계획”이라며 “관광객들이 몰리면 초정약수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명희, 대한항공 지점 통해 세계 곳곳 농산물 무단반입

    이명희, 대한항공 지점 통해 세계 곳곳 농산물 무단반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가 해외 지점의 직원들을 동원해 사시사철 해외 농산물을 들여온 것으로 드러났다.14일 MBC는 대한항공 중국 베이징지점에서 이명희씨를 위해 보고용으로 찍어 본사에 보낸 사진들을 공개했다. 사진을 보면 가로 약 20~30㎝, 세로 10㎝ 상자 12개에 작은 사과만큼 씨알이 굵은 대추가 빼곡히 들어 있다. 이명희씨가 회장 비서실을 통해 지점으로 하달한 명령은 마치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품을 올리던 광경을 연상케 했다. “사모님께서 아래와 같이 대추 관련 지침 주셨습니다. ‘보낸 것 먹어 봤는데, 작년 것보다 질기니, 시장에 가서 먹어보고 좋은 것으로 골라 보내라’.”(비서실) “지금까지 대추 살 때마다 일일이 먹어보고 가장 맛있는 것을 골라 사고 있습니다. 10여개 상점을 돌아다니며 맛을 본 후 좋은 것을 일일이 선별해 담았습니다.”(베이징) “사모님께서 대추 15상자를 3일 뒤 전량 도착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비서실) “아침부터 난리 쳐서 가까스로 15상자 만들어서 포장해 보냈습니다. 빨리 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 바랍니다.”(베이징) “사모님께서 잘 받아보셨고,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 있으셨습니다. ‘대추 상자가 너무 조악하니 내년엔 좀 더 크고 깨끗한 상자를 찾도록 하라. 알이 너무 작으니 다시 보낼 것. 청도 지점장에게 3시간 떨어진 산지에 가서 샘플 사서 보내라고 할 것’.”(비서실)보도에 따르면 전세계 대한항공 지점에서 이명희씨에게 봄부터 가을까지 세계 곳곳의 특산품이 전달됐다. 4월에는 중국 비파, 7월에는 터키 살구, 9월에는 중국 대추 등이 이명희씨 식탁에 올랐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한항공 직원들을 직책도 없는 이명희씨가 수족 부리듯 한 데 그치지 않았다. 이 모든 식품들이 검역 신고 대상이지만, 이명희씨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고가 이뤄진 것은 전혀 없었다. 취재진이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문의한 결과 이스탄불산 살구, 광저우산 비파, 베이징산 대추 등 검역 신고가 된 품목은 하나도 없었다. 농수산물을 검역 없이 들여오면 최고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역사 속 행정] 소장파 청요직의 기득권 견제책

    [역사 속 행정] 소장파 청요직의 기득권 견제책

    정당성 강변 위해 일시 사직 ‘피혐’ 5품 이하 신원·도덕성 검증 ‘서경’ 비리 소문만으로 처벌 ‘풍문 탄핵’조선시대 청요직이란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예문관 등 주요 부처의 당하관(중하위직) 관직이었다. 당상관(임금이 회의를 열 때 당상에 오를 수 있는 고위직)에 오르기 전 실무를 책임지는 소장파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국왕과 공신 등 기득권 세력이 국정 운영에서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강한 연대를 구축하고 공정성을 명분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특히 청요직들은 다양한 형태로 언론(국왕에게 직언하는 것)개혁을 추진했다. 언론관행은 법전에 규정된 고유 권한은 아니지만 대간 활동과정에서 그 필요성이 인정돼 사실상 대간의 권한으로 자리잡았다. 대간이란 언론기관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감찰관 계열의 대관과 간쟁관 계열의 간관(국왕의 과오를 지적하는 일을 하는 관리)을 합친 용어다. 성종 때 정착된 대표적 언론관행으로는 피혐과 서경, 풍문 탄핵을 들 수 있다. 피혐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피하고자 일시적으로 사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대간만이 피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간에서 피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왕권 견제에 나섰다. 실제로 대간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집단적으로 피혐을 요청해 정당성을 강변했다. 동료가 어떤 사안을 주장하다가 국왕의 노여움을 사 처벌받으면 대간 전체가 피혐을 청해 연대 책임을 졌다. 대간 내부 회의 모임인 ‘원의’ 석상에서 동료들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소수 의견을 가진 이가 피혐을 통해 자진 사퇴했다. 이를 통해 형식적이나마 대간의 주장이 만장일치 공론으로서 위상을 갖게 됐다. ‘처치’는 대간의 피혐에 대해 그 적절성을 따져 사직(벼슬에서 물러남)이나 체직(벼슬을 바꿈)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를 말한다. 처음에는 국왕이 처치의 주체였지만 16세기를 넘어서면 홍문관(왕실 문헌 관리기구)이 맡게 된다. 처치의 주체가 왕에서 언관으로 바뀌면서 피혐에 따른 대간의 교체가 그만큼 잦아져 조선 후기에는 폐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 이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해 그 적절성을 가리는 일을 뜻한다. 성종대에 이르러 청요직들은 서경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간쟁에 소극적이거나 국왕과 대신에 아부를 일삼는 이들의 관직 임명 시 대간에서는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해 결국 임명이 취소되게 했다. 또 일상생활에서의 청렴도와 도덕적 흠결 여부도 서경의 통과 요건에 포함시켜 도덕적 권위가 갖는 위상을 높였다. 청요직 당하관들은 서경에 통과하고자 언론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의 도덕성도 갖춰야 했다. 풍문 탄핵은 말 그대로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소문만으로 관리를 탄핵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의 입장에서는 대신에게 일부 비리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면 이를 눈감아 줘야 해 풍문 탄핵이 어려웠다. 하지만 성종 때부터 언론이 활성화되면서 풍문에 입각한 탄핵활동이 크게 늘었다.결국 대간의 대표적인 언론관행인 피혐과 서경, 풍문 탄핵 등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언로를 넓혔고 언론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이들의 노력이 왕권을 도덕적 권위와 대비시켜 상대화함으로써 공적 정치 운영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청요직들은 공론으로 표방되는 언론을 매개로 ‘도덕적 권위’를 강조하며 국정 현안에 대해 시비 분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왕권은 도덕적 권위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될 때 그 정당성이 용인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한국행정연구원 ‘역사 속 행정이야기’ 요약 송웅섭 연구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 등대가 밝혀 온 길

    등대가 밝혀 온 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는 1903년 6월 인천 팔미도 꼭대기(해발 71m)에 세워진 팔미도 등대이다. 1901년 일본과 맺은 일명 강화도조약인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 따라 설치됐다. 일제 침탈의 방편으로 건설된 이 등대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수백 척의 함정이 이 등대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 함포사격과 동시에 상륙작전에 돌입했다. 이후 팔미도 등대는 군사작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오다가 2009년 ‘인천 방문의 해’를 계기로 일반에 공개되어 현재까지 매년 수만 명이 찾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근대식 등대가 도입되기 전 제주 지역에는 아녀자들이 뱃일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밝힌 ‘도대불’(등명대·燈明臺)이 존재했다. 도대불은 포구에 세웠던 민간 등대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피워 뱃길을 인도했다. 나무로 된 표지를 세워 두는 경우도 있었다. 불을 밝히는 등명기(燈明機)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진화를 거듭했다. 등명기는 렌즈로 빛을 증폭시켜 방사하는 등대의 핵심 장비이다. 등대가 만들어진 초기부터 1950년대까지는 석유등이나 아세틸렌가스등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후에는 전기등으로 대부분 교체됐다. 지금은 등명기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양규 국립등대박물관장은 “LED 조명의 경우 먼거리에서도 식별이 쉬운 시인성이 뛰어나고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충남 공예공방 ‘연 칠보’ 전통공예-현대미 더해 품격 높여

    충남 공예공방 ‘연 칠보’ 전통공예-현대미 더해 품격 높여

    조선시대부터 귀한 장신구를 만드는데 사용돼 온 공예기법인 칠보공예는 마치 일곱 가지 보물과 같은 색상이 난다하여 ‘칠보(七寶)’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근에는 저가의 칠보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실상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든 칠보공예품은 뛰어난 품격과 고고한 자태로 저가 제품과는 비교가 불가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충남공예 전문 공방인 충남 논산의 ‘연 칠보’는 이처럼 뛰어난 전통 공예인 칠보공예의 가치를 되살려 주얼리 상품으로 대중화하는 한편, 공예 체험 등을 통해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특히 연 칠보는 중소기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고 건양대학교 산학합력단이 주관하는 ‘풀뿌리기업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백제문화 기반 공예상품의 글로컬 산업화 및 명품화 지원 사업’ 대상 기업으로 성정돼 신제품 개발 및 체험 프로그램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 칠보 정정희 대표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칠보제품은 공장형 제품으로, 품질면에서 조잡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 공방에서는 품격을 높인 칠보 제품으로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한편 정은 9.25%, 순은 98%의 고급 칠보 공예품 제작으로 칠보공예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칠보 공예품의 대중화를 위해 연 칠보는 일상에서 여성들이 선호하는 품목을 중심으로 시장경쟁력을 갖춘 제품 다양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주얼리 제품에 칠보공예를 접목해 전통미를 강조한 실용적인 목걸이, 반지 등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전통공예의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미의 조화는 물론 은과 칠보 이중의 결합을 통해 독창적인 퀄리티로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백제 문화 홍보 및 활성화를 기반으로 체험관광과 칠보공예를 접목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에 위치한 연 칠보 공방을 방문하면 아름다운 칠보 공예품을 직접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원하는 경우 칠보 공예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전통공예 체험 프로그램 참가도 가능하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번민을 덜어내니, 차오르는 고요

    번민을 덜어내니, 차오르는 고요

    부처님오신날이 멀지 않았다. 불자든 아니든 절집을 찾을 때다. 수많은 절집 가운데 어디를 찾아야 할까.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도전하고 있는 절집을 고려하는 건 어떨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에 도전한 사찰은 경북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경남 양산 통도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순천 선암사, 충남 공주 마곡사 등이다. 이름만 들어도 자부심이 충만해지는 절집들이다.일곱 산사 가운데 부석사, 법주사, 통도사, 대흥사 등 4개 사찰은 등재가 확실시된다. 반면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은 등재 권고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이다. 결과는 올 7월 초 바레인에서 나올 터. 아무렴 어떠랴. 세계유산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우리에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보물 사찰’이다.역사가 오래되고 명성이 자자한 만큼 일곱 산사가 품은 문화재도 다양하다. 국보가 가장 많은 절집은 부석사다. 한국 목조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무량수전(18호)을 비롯해 무량수전 앞 석등(17호), 조사당(19호), 소조여래좌상(45호), 조사당 벽화(46호) 등 모두 5개의 국보가 있다.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처음 지어졌다.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고려 우왕 2년(1376)에 재건됐다. 이어 1916년 대대적인 해체·수리 공사가 이뤄졌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빼어난 비례미가 일품이다. 소조여래좌상은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조사당은 우왕 3년(1377)에 세워졌다. 개창 조사인 의상 대사의 초상화가 있다. 조사당 벽화는 불법의 수호신인 법천과 제석천, 사천왕을 그린 그림이다.법주사도 ‘보물 사찰’로 불린다. 부석사 다음으로 많은 3개의 국보가 있다. 목탑 형태의 팔상전(55호)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덧대 짜맞췄다. 그 기술이 워낙 뛰어나 한 부분이 소실돼도 나머지는 끄떡없다고 한다. 팔상전 뒤엔 쌍사자석등(5호)이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받치고 선 모양새다. 연꽃 모양의 석연지(64호), 옛날 3000여명의 승려들이 먹을 밥을 지었다는 철확, 독특한 모양의 희견보살상, 바위에 새긴 마애여래의상 등 경내에 독특한 볼거리가 많다. 마당에는 높이 33m의 거대한 미륵대불이 세워져 있다. 한때 개금불사(불상에 금칠을 다시 할 때 행하는 의식)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지만, 관람객을 굽어보는 시선은 여전히 고요하다. 봉정사는 국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15호)을 품은 절집이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확인됐다.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과 배흘림기둥,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이라는 극락전 앞마당의 삼층석탑 등 익히 알려진 볼거리들이 많다. 조선시대 전기에 지어진 대웅전(311호)은 내부에 단청이 잘 남아 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저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봉정사 극락전의 이 간결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은 내부에서 더 잘 보여 준다. 곱게 다듬은 기둥들이 모두 유려한 곡선의 배흘림을 하고 있는데 낱낱 부재와 연등천장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면서 뻗고 걸치고 얽힌 결구들이 이 집의 견고성을 과시하듯 단단히 엮여 있다”고 적었다. 그러니 겉만 대충 훑을 게 아니라 목을 빼고 극락전 내부를 살필 일이다.대흥사는 고려시대 마애불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308호)이 국보다. 다만 대웅전 뒤 급한 산길을 1㎞ 가까이 걸어 올라야 한다. 두륜산 입구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은 장춘(長春)숲길이다. ‘명품’이라 부를 만한 숲이 4㎞ 정도 이어진다. 요즘엔 문재인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했던 요사채가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스님들의 수행 공간 안에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됐었으나 방문 요청이 쇄도하면서 안거 기간을 제외하고 개방하고 있다. 주말이면 ‘대통령 특별한 기운’을 받으려는 발걸음으로 북적댄다고 한다. 서산대사 등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도 인상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절집 초입에 있다.통도사는 대웅전과 대웅전 뒤편의 금강계단(290호)이 국보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사찰로도 불린다. 은입사동제향로(보물 334호), 봉발탑(보물 471호) 등도 볼 만하다.선암사와 마곡사에는 국보가 없다. 그렇다고 볼 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선암사 진입로에 있는 승선교(보물 제400호)는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돌다리다. 건축 기법이 매우 정미하다. 각황전, 무우전 등 오래된 전각과 돌담 등의 운치도 빼어나다. 선암사엔 모두 14개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다.‘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 했다. 마곡사의 신록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다. 마곡사는 주차장 입구에서 경내까지 1㎞ 정도 이어진 진입로가 아름답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를 찬찬히 엿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오층석탑, 백범 김구 선생이 기거했던 백범당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특히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등 절집의 중심 건물이 두 곳인 점이 이채롭다. 절집 주변으로 백범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마곡사엔 모두 5개의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문채원, ‘계룡선녀전’ 여주인공 확정..날개옷 잃어버려 바리스타로 정착

    문채원, ‘계룡선녀전’ 여주인공 확정..날개옷 잃어버려 바리스타로 정착

    배우 문채원이 ‘계룡선녀전’을 통해 아름답고 신비한 설화 속 선녀로 돌아온다.네이버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한 사전 제작 드라마 ‘계룡선녀전’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바리스타가 된 699세 계룡산 선녀 선옥남이 현실을 살고 있는 두 명의 남편 후보 정이현과 김금을 만나면서 비밀을 밝혀내는 코믹판타지 드라마다. 극 중 문채원은 선녀폭포에서 날개옷을 잃어버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채 699년 동안 남편이 환생할 날만을 기다리는 계룡산 ‘선녀다방’의 바리스타 선녀 선옥남 역으로 분한다. 그녀가 맡은 선옥남은 느긋하고 따스한 성품과 엉뚱한 성격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사랑 받는 인물. 또한 수 백 년의 시간동안 오매불망 남편만을 기다리며 계룡산 산자락에서 커피를 내리던 그녀 앞에 남편으로 짐작되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처음으로 산을 떠나게 된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문명사회에 진입한 선옥남의 좌충우돌 서울살이 적응기가 파란만장하게 전개되며 시청자들의 웃음 코드를 저격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선옥남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푸근한 외모의 할머니이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선녀 선옥남의 비밀은 극에 신선한 재미를 배가하며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에 문채원이 그려낼 선녀 선옥남에 대한 궁금증이 고조되고 있다. 그간 드라마 ‘바람의 화원’, ‘공주의 남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굿 닥터’ 영화 ‘최종병기 활’, ‘오늘의 연애’, ‘그날의 분위기’ 등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캐릭터를 보여줬던 그녀이기에 선옥남에게 어떤 색깔을 덧입혀낼지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 특히 정통 사극에서부터 현대극 등 장르를 불문, 탁월한 작품 소화력을 보여줬던 문채원은 이번 작품에서도 선옥남과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안방극장에 ‘선옥남’ 홀릭을 예고하고 있다. 더불어 선옥남이 환생한 남편이라고 믿고 있는 남편 후보 정이현 역을 맡은 윤현민과 빚어낼 알콩달콩한 케미 역시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처럼 아리따운 선녀의 모습 뒤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물론 인간적인 매력까지 갖춘 캐릭터 선옥남은 벌써부터 문채원과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작품의 기대치를 한층 더 상승 시키고 있다. 한편 ‘계룡선녀전’은 제작에 박차를 가하며 시청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군포시평생학습원,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 4회 개최

    군포시평생학습원,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 4회 개최

    한국 그림책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기위한 행사가 경기 군포시에서 2달간에 걸쳐 열린다. (재)군포문화재단 평생학습원은 오는 12일부터 그림책 콘텐츠 개발을 위한 네트워크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를 4회 개최한다고 8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조만간 조성될 ‘그림책박물관공원’에서 깊이 있는 사업이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림책박물관공원은 시가 폐쇄된 배수지를 재활용해 그림책을 주제로 전시·체험·교육 등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는 창작과 생산의 종합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내년 공사를 시작해 2020년 9월 개장할 예정이다.포럼에는 경기도미술관 김종길 미술평론가, 계명대 사카베 히토미 교수, 권윤덕 그림책작가, 박종진 아동문학연구자, 홍선웅 판화가 등 각계의 전문가가 참여해 그림책 뿌리 찾기에 나선다. 오는 12일에 열리는 첫 포럼은 이미지 미술사와 그림책을 통해 미학적·매체적 측면에서 그림책과의 연관성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 그림책 원류를 찾기 위한 열린 시야를 갖고 연구 방향을 조망한다. 오는 29일에는 그림책 대량 생산의 한 방법인 판각과 그림책의 관련성을 탐구한다. 3회차인 다음 달 9일에는 기행화첩, 풍속화첩 등을 통해 그림으로 서사를 연결, 전달하는 방식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마지막 4회차 포럼은 다음달 23일에 열리며, 조선시대 의궤, 무예도보통지, 능행차도 등의 기록화를 통해 서사와 이미지의 관계를 살펴볼 예정이다. 재단 관계자는 “최근 그림책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예술매체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라며 “이번 포럼의 결과물은 그림책박물관공원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군포시평생학습원,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 4회 개최

    군포시평생학습원,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 4회 개최

    한국 그림책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기위한 행사가 경기 군포시에서 2달간에 걸쳐 열린다. (재)군포문화재단 평생학습원은 오는 12일부터 그림책 콘텐츠 개발을 위한 네트워크 포럼 ‘한국 그림책의 뿌리를 찾아서’를 4회 개최한다고 8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조만간 조성될 ‘그림책박물관공원’에서 깊이 있는 사업이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림책박물관공원은 시가 폐쇄된 배수지를 재활용해 그림책을 주제로 전시·체험·교육 등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는 창작과 생산의 종합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내년 공사를 시작해 2020년 9월 개장할 예정이다.포럼에는 경기도미술관 김종길 미술평론가, 계명대 사카베 히토미 교수, 권윤덕 그림책작가, 박종진 아동문학연구자, 홍선웅 판화가 등 각계의 전문가가 참여해 그림책 뿌리 찾기에 나선다. 오는 12일에 열리는 첫 포럼은 이미지 미술사와 그림책을 통해 미학적·매체적 측면에서 그림책과의 연관성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 그림책 원류를 찾기 위한 열린 시야를 갖고 연구 방향을 조망한다. 오는 29일에는 그림책 대량 생산의 한 방법인 판각과 그림책의 관련성을 탐구한다. 3회차인 다음 달 9일에는 기행화첩, 풍속화첩 등을 통해 그림으로 서사를 연결, 전달하는 방식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마지막 4회차 포럼은 다음달 23일에 열리며, 조선시대 의궤, 무예도보통지, 능행차도 등의 기록화를 통해 서사와 이미지의 관계를 살펴볼 예정이다. 재단 관계자는 “최근 그림책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예술매체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라며 “이번 포럼의 결과물은 그림책박물관공원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이 걷기 좋은 봄날, 당진으로 성지 순례 가볼까

    이 걷기 좋은 봄날, 당진으로 성지 순례 가볼까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에서 신리성지까지 이어지는 ‘버그내 순례길’이 봄날 걷기 좋은 길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장승률 당진시 주무관은 8일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를 방문한 뒤 5만여명에 그치던 이 길을 찾는 천주교 신자와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 연간 20만명에 이른다”며 “한국관광공사도 최근 5월의 추천 길로 선정했다”고 했다.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버그내’에서 유래한 이 길은 우강면 송산리 솔뫼성지에서 출발해 합덕제~합덕성당~원시장·원시보 우물터~무명 순교자의 묘를 거쳐 합덕읍 신리성지까지 가는 13.3㎞ 코스다. 2013년 말 당초 비포장 길을 일부 포장하고 안내판과 쉼터 등을 설치하는 등 정비를 했다. 합덕제는 신라 말 견훤이 만들었다는 저수지로 지난해 국제관개배수위원회의 ‘세계 관개(灌漑)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여름철 연꽃이 장관이다.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 사제인 김대건(1821~1846) 신부의 탄생지이고, 합덕성당은 1929년 건립돼 고풍스럽다. 이 일대는 한국 초기 천주교에서 가장 많은 신자와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과 힐링의 명소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사도’로 불린 순교자 이존창이 살았던 예산군 여사울과 인접해 이 주변에 천주교가 번창했다. 천주교 순교와 박해의 역사가 서린 순례길이지만 좌우로 논밭과 사과 농장 등 전통 농촌 풍경이 펼쳐져 마음의 여유를 제공한다. 장 주무관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년이 되는 2021년에는 버그내 순례길 주변의 공소(신자들이 예배 보던 작은 성당)를 복원하고 스탬프 투어 등 새 프로그램을 많이 도입할 계획”이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방문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고성 건봉사는 민통선을 지나지 않고 남쪽에서 접근하면 편안하다. 지난해 완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해 바다에 닿을 때쯤 삼척에서 속초를 잇는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렇게 북쪽으로 달리다 고속도로 끝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에 진입해 조금만 올라가면 고성 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전하면서 딴생각을 하다 간성읍에서 진부령으로 가는 46번 국도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을 잊고 화진포해수욕장까지 내쳐 달렸다. 차를 돌려 조금 내려오니 반갑게도 건봉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진읍에서 절에 접근하는 길이다.산길로 접어든다 싶더니 바리케이드 너머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 주고 나서 통과할 수 있었는데 검문소는 하나가 더 있었고 절차도 반복됐다. 건봉사가 민간인 출입 통제에서 풀린 것은 1988년이다.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였고, 절 주변에서 특히 전투가 치열했다고 한다.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분계선(DMZ)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건봉사 가는 길’도 그 혜택을 누렸으면 좋겠다.건봉사는 전쟁 이전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사성전, 보제루, 어실각, 수침실 등 642칸의 당우가 있는 강원 최대 절집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시절 위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수침실(水砧室)은 물레방앗간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모두 불탔다. 건봉사는 앞서 1878년(고종 15)에도 산불로 3183칸의 전각이 타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라진 전각은 1879년 개운사·중흥사·봉은사·봉선사·용주사 등이 힘을 합쳐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 건봉사의 전각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강당인 봉서루에는 ‘금강산 건봉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기는 했지만 금강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금강산 유람에 나선 옛 사람들은 간성을 지나 건봉사에 이르면 누구나 금강산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은 1603년(선조 36) 궁궐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는 벼슬에서 파직되자 금강산 유람길에 오른다. 이때 건봉사 스님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긴 한시를 남겼는데 여기에도 ‘건봉사가 어드메냐 /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스라하다’는 대목이 보인다.건봉사의 정사(正史)는 ‘건봉사와 그 말사의 사적(事蹟)’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시대 대화재로 각종 자료가 대거 사라짐에 따라 새로 수집한 역사를 바탕으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대표 집필해 1928년 발간한 것이다. 편년체로 절의 연혁을 정리하고 부속 암자, 재산, 유물, 진영, 명소 등의 순으로 기술했다. 만해는 당시 건봉사의 승려였다. 건봉사 사적은 절의 역사가 신라 법흥왕 7년(52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적었다. 아도(阿道)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것이다. 법흥왕 7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8년 전이고, 아도는 그 훨씬 이전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인물이니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역사 끌어올리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절들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을 창건주로 내세워 역사를 윤색하는 것이 사실이다. 건봉사의 경우도 지리적 위치를 보면 삼국시대 당시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도는 특정시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아미타(阿彌陀)신앙, 곧 정토신앙을 전파하는 승려라면 누구나 아도이고 아도화상이다. 역사책에서 아도나 아도화상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시대에 등장하는 이유다. 신라가 함경도 일부까지 점령하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운 것은 진흥왕 시대다. 법흥왕 시대 건봉사 일대는 신라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 컸을 수도 있다. 신라 중심으로 보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법흥왕 시대 건봉사의 창건은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창건을 ‘신라 법흥왕 7년’이 아니라 같은 해인 ‘고구려 안장왕 2년’이라고 보면 논리적 모순은 없다. 건봉사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시작된 절이다.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하는 염불만일회는 1만일 동안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마음을 다해 부르는 모임이다. 758년(신라 경덕왕 17) 발징이 절을 중건하면서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봉사에서는 19~20세기에도 세 차례 염불만일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해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척불(斥佛)시대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인과 관료들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건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어 갔던 것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이끄는 6000명 남짓한 의승군이 건봉사를 훈련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건봉사는 만해의 존재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매우 활발했다.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절을 찾는 당대 문인·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대 변화에 눈뜰 수 있었고, 더불어 종교의 역할도 깊이 있게 고민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1909년 당시 건봉사의 말사였던 백담사에서 탈고해 1913년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물론 만해 개인의 저서지만, 진취적인 건봉사의 분위기가 응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가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본연의 자세로 복귀해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무엇보다 염불당을 폐지하고 염불을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론’의 한 대목은 건봉사에 몸담고 있는 승려의 주장으로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1908년 회향한 염불만일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만해는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굳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도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라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만인회를 정조준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라고 적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절을 둘러보면 삼국시대 고찰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아도 최근의 석물(石物)도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 왼쪽에 보이는 ‘만해당 대선사시비’도 그렇다. 그 옆 ‘사명대사기적비’도 지난해 복원한 것인데, 파손된 옛 비석 조각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명대사가 왜적에게서 되찾아온 양산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건봉사의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결국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이문은 6·25 와중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근대 명필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썼다. 불이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냇물을 건너면 대웅전이고, 곧바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다. 대웅전 가는 길에 놓인 다리가 능파교다. 조선 숙종 시대 지은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2002년 보물로 지정됐다. 절 진입로의 홍예다리도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과거의 흔적이다.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과 그 무덤에 배례할 수 있도록 지은 전각이다. 사명대사기적비에 언급된 진신사리를 모시고자 조성했을 것이다. 지금 불이문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왼쪽의 넓은 터전에는 아직 복구하지 못한 옛 전각의 주춧돌만 가득하다. 이 또한 건봉사의 역사를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경찰, 드루킹이 총영사로 추천한 변호사 조사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의 주범인 ‘드루킹’(49·본명 김동원)이 정권 실세인 김경수 민주당 의원에게 인사를 청탁한 대상인 변호사 2명이 3일 경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4일 김 의원을 소환 조사하기에 앞서 드루킹의 인사 청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 배경을 파악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이날 도모(61)·윤모(46) 변호사를 동시에 소환해 조사했다. 앞서 드루킹은 지난해 대선 이후 윤 변호사를 청와대 행정관에, 도 변호사를 일본 대사에 이어 오사카 총영사에 앉혀 달라고 김 의원에게 청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드루킹이 운영한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회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법률 스태프’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드루킹이 평소 친분이 깊은 사람을 인사청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두 사람을 상대로 드루킹의 청탁 배경과 사전 인지 여부, 청와대 측과의 접촉 배경 등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아울러 경공모 회원의 아이디가 댓글 조작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된 만큼 경공모 운영 방식과 댓글 조작 가담 여부 등을 파악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앞서 드루킹은 오사카 총영사직에 도 변호사를 추천한 것이 무산되자 김 의원에게 2차례 협박성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윤 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드루킹의 변호를 맡았다가 그가 기소된 이후인 지난달 19일 사임했다. 경찰 관계자는 “윤 변호사는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회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면서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진 않고 있다”고 전했다. 도 변호사는 “드루킹 블로그를 우연히 알게 됐고, ‘자미두수’(중국 점성술), ‘송화비결’(조선시대 예언서)을 다룬 글에 관심이 생겨 경공모 카페에 가입했고 드루킹 강의도 들었다”면서 “경공모에서 법률 자문 등을 담당하는 스태프였고 ‘우주등급 이상 회원이 사는 마을 조성’ 등과 같은 드루킹의 목표와 이상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 서산 해미읍성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 서산 해미읍성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혹자(或者)는 천 명이라 하고, 또 다른 혹자(或者)는 삼천 명을 말한다. 천주교를 믿는 그들은 해미읍성 옥사(獄舍) 앞 호야나무에 목을 매어 달려 죽었고, 작두에 목이 잘려 죽었으며, 어린 군관이 휘두른 홍두깨 방망이에 맞아 죽었고, 물 묻은 창호지를 얼굴에 붙어 죽었고, 볏단을 두 손으로 잡고 바닥으로 내리치듯 머리가 자리개 돌에 터져 죽었으며, 아녀자들은 결박당한 채로 개울 둠벙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돌무더기에 산 채로 묻혀 죽었다. 죽어가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외치는 그들의 소리가 읍성 밖 여염집 사람들 귀에는 흡사 ‘여수 머리’라고 들리어 지금도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밖에는 여숫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조선 유일의 생매장 순교가 행해진 시간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으로 가 보자.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현재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도심 읍성으로, 1963년 1월 21일에 일찌감치 대한민국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성곽이다. 원래 이곳은 1417년(태종 17년)에 성을 짓기 시작하여 1421년(세종 3년)에 축성이 완료된 곳으로 왜구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의 성채였다. 그러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옮겨가면서 이때부터 해미읍성은 호서 지방 및 내포 지방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읍성이 폐지되었다가 1970년대부터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조선 시대 도심 내에 축조된 읍성으로는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손꼽히는 해미읍성은 총 길이가 1,8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5m에 이른다. 또한 성 바깥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깊이 2m의 해자도 축조한 타원형의 안정된 성곽으로 지금도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해미읍성에는 천주교 박해에 관한 핏빛 가득한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1801년에 행해진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이전부터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시기까지 이 곳 해미읍성을 거쳐 간 천주교 순교자는 무려 3000여명에 이른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이후 내포 지방에서 잡혀온 여염집 신자들의 경우 제대로 된 판결도 없이 생매장을 하였는데 그 숫자가 어림잡아도 1000명을 훌쩍 넘는다고 전해진다. 당시 군관들은 그들로부터 뺏은 십자가와 묵주를 읍성 서문 난간 문턱에 올려놓고 이를 밟으면 살려 준다는 조롱 섞인 배교(背敎)를 강요했지만, 끝끝내 수천 명에 이르는 신자들은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이곳에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체스코가 해미 순교터를 방문한 이후 해미읍성 주변지역은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삶과 죽음의 의미, 종교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도 뜻깊은 공간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해미읍성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한국 로마 카톨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교터 중의 하나다.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의미를 전해주는 공간.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나들이, 천주교 신자라면 더더욱 3. 가는 방법은? - 충남 서산시 부춘공원2로 11(읍내동) 4. 감탄하는 점은? -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성곽의 돌무더기,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시절의 회화나무.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 한산한 편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순교의 흔적이 남은 회화나무, 옥사, 진남문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산수파김치장어’, ‘원조장어마을’, 백반집 ‘진국집’,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haemifest.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추사고택, 한용운 생가터, 장영실 과학관, 수덕사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한국 유일의 생매장 순교터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1800년대 조선 후기 선조들의 고뇌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곳이다. 갈 곳 잃은 조선의 운명에서 살고자 몸부림쳤던 조상들의 피울음이 울려 퍼지는 곳.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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