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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교포의 모국애/강수웅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10억엔 이라면 한국돈으로 55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 많은 돈을 삼천포출신의 재일교포가 쾌척,「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일본에 있어서 최초이며 유일한 한국의 문화관계 재단법인이다. 지난 88년 7월부터 설립이 추진되어 온 이 법인은 지난해 12월19일자로 일본 문부성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 문화재단의 설립기념파티는 22일 하오6시부터 2시간 동안 도쿄(동경)시내 이치가야에 있는 사학회관에서 2백여명의 한일문화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한국측에서는 이진희·이건·이승목·김달수·강재언·김경득씨 등 재일동포사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김철수 서울법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일본측에서는 우장춘박사의 일대기 「나의 조국」과 「민비암살」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각전방자)여사를 비롯,조선사학자 아리이도 모노리(유정지덕),명치대 학장 기무라 모토이(목촌초),「왜왕의 말예」 등 고대역사 소설로 유명한 토요다 아리츠네(풍전유항)씨 등이 참석,성황을 이루었다. 도쿄방송 미모의 아나운서이며 「이별의 45년­전쟁과 사할린의 조선인」의 저자이기도 한 우노 요시코(우야숙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파티에서 기금의 출연자인 한창우이사장(60)은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와 일본의 일의대수의 가깝고도 가까운 인국으로서 역사적으로도,경제·문화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지 26년. 졍치적으로는 「우호·동반의 신시대」라고 불리게끔 됐으나 국민레벨에서는 아직도 응어리와 감정의 꺼림칙함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상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해를 깊게하지 않으면 안된다』 15살때인 45년 12월20일 학교에 다니기 위해 형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온 한이사장이 법정대학을 나오고 28세때 클래식 전문다방의 경영으로 사업을 시작해 오늘날 연간 1천2백억엔의 매상을 올리는 레저산업체 「마루한 코퍼레이션」을 이룩하기까지 겪었던 신산고초는 듣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 그는 한일양쪽에 이렇게 주문한다. 『일본과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무지·무관심을 타개해야 한다.한국도 과거를 잊을 수는 없으나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서로 손잡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도 많은 재일 동포처럼 빠찡코로 일어선 사람이다. 이날의 모임을 위해 이원경 주일대사가 직접나와 『한일간의 숙명적관계는 과거의 불행한 한때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축사했으며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총리는 축전을 보내왔다.
  • 외언내언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후석 천관우씨가 영면했다. 오랜 투병생활 끝의 타계이지만 67세면 아직도 아까운 나이. 기개를 실은 해박한 명문과 거구의 호방한 웃음을 남기고 그는 갔다. ◆후배들에게 따스한 체온을 전달했다 선배. 그의 두주불사는 풍요로운 인간미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후배에게만 다정한 것이아니라 선배에의 예우도 깍듯했던 인품. 그래서 선배의 사랑은 그의 탁마된 재지·통찰력과 명문·인간미로 하여 더욱 각별했다. 「주선」들이 모였던 초창기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실. 논설회의를 마친 주필(석천 오종식)은 나가다가 현관에서 논설위원실로 전화를 한다. 『후석,20분이면 쓰겠지. 쓰고 ××로와』. ××는 가난했던 50년대의 조촐한 술집이다. ◆악필의 달필로 휘갈겨 썼던 사설. 특히 1면에 쓰는 칼럼은 이미 작고한 홍승면의 유려한 필치와 함께 초기 한국일보의 성가를 높인다. 하지만 그는 한편 「겸연쩍은 역사학도」라는 겸손한 자평과는 다른 「사학계의 기린아」(고 홍이섭 교수의 말). 「일본서기」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깨뜨리고 고대국가 형성시기를 끌어 올리면서 마한의 위치를 수정하고 목지국의 정체를 밝힌다. 소홀히 되어온 가야에의 애정도 남달랐다. ◆『… 오늘이 위령제의 날. 오직 의를 위해,오직 이 겨레를 위해,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그 젊은이들이 이제는 눈을 감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옳은 세상,옳은 것이 옳게 되는 세상,그것 뿐일 것이다. 오늘 모두 경건히 고개숙이는 날,우리 모든 백성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하여 잘못일까』. 4·19사자들의 위령제가 거행된 60년 4월24일자에 쓴 칼럼의 결구. 그는 반독재에 앞장선 자유인이었다. ◆지난해 「기자고」 등의 논문을 묶어낸 「길조선사 삼한사연구」가 그의 마지막 저서로 되어 있다. 「가야사」에의 아쉬움을 남긴채. 우리시대 화성의한사람이 간다. 먼저 간 아껴주던 선배 호형호제하던 지기들의 나라로서. 사람이면 누구나 가는 곳. 명복을 빈다.
  • 원로언론인 천관우씨 별세

    원로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천관우씨가 15일 하오3시30분쯤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충북 제천출신인 천씨는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51년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민국일보 등 주요 일간지의 편집국장ㆍ논설위원ㆍ주필 등을 역임했으며 동아일보주필 재직중 69년 신동아 필화사건 등으로 물러났다가 81년 한국일보 상임고문으로 언론계에 복귀했었다. 국사편찬위원 및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천씨는 사학분야중 실학사에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한국의 재발견」 「한국상고사의 쟁점」 「근세조선사연구」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최정옥여사(64)와 출가한 1녀가 있다. 발인은 17일 상오10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가지며 장지는 천안공원묘원. 연락처 병원 744­3899. 자택 355­8861
  • 천관우선생 영전에

    밤중에 갑자기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애통한 마음을 금할길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1949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말년까지 현역 언론인으로 활동해오면서 한국 역사학계에 공헌하신바 참으로 크십니다. 스스로는 『비아카데미 사학도』니 『겸연쩍은 역사학도』니 하면서 겸손해 하셨지만 대학 연구실을 지키는 사람 이상의 학문적 정열로 한국사 연구에 크나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1952년 「역사학보」에 발표하셨던 논문 「반계 유형원연구」는 비록 대학 졸업의 학사논문이지만 실학연구의 효시로 오늘날의 탄탄한 실학연구의 기초를 닦은 것이었습니다. 실학연구와 함께 조선사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여 군제사를 중심으로한 조선의 정치 및 사회·경제 제도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올리고 「한국사 근세 조선전기편」(진단학회편)의 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말년에는 고대사에도 눈을 돌려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 「고조선사·삼한사연구」 등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만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셨던 근세사 연구도 병행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선생께서는 평소 『역사학 논문을 쓰려면 개설서를 한 줄이라도 고칠 수 있는 논문을 써야 한다. 대담한 가설을 세우되 고증은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바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실학연구가 그 가장 좋은 표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후배들에게 항상 따뜻한 인정으로 대하셨습니다. 아무리 신문사일이 바쁘더라도 찾아간 후배들을 항상 따뜻이 맞아 주셨고 선생이 계시는 직장이나 집동네를 지나치면서 선생을 찾지 않을 경우엔 매우 섭섭해 하셨습니다. 또한 일단 찾아온 손님은 무엇이든 대접해 보내야 마음편히 여기는 선비의 체질을 끝까지 간직하셨습니다. 결국 오늘의 불행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두주불사의 애주도 이같은 맥락에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선생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에 대해 평가할 입장은 아니고 또 잘 모르지만 민족자주와 민주개혁이란 굳은 신념의 발로이었을뿐 항간의 일부 오해처럼 추호도 사욕이 개재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정녕 드문 천부적 재질과 뛰어난 풍모와 건강을 지니셨던 분이 이토록 빨리 가시다니 비단 한국역사학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사회의 큰 손실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허선도 국민대교수
  • 선박 4척 건조자금 2억9천만불 지원/4개은,한진해운에

    산은·외환은·한일은 등 국내은행들이 주축이돼 국제차관단 형식으로 자금을 조달,한진해운에 선박건조자금 2억9천5백만달러를 제공한다. 24일 금융계에 따르면 이들 3개국내은행과 일본의 스미모토은행등 4개은행은 한진해운이 미국·호주 항로에 투입할 대형 컨테이너선박 3척과 석탄수송선 1척 등 4척의 건조자금을 국제은행단 차관형식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이번 금융지원은 은행단이 해외에 명목상의 회사를 설립,이 회사가 대금을 받아 선박건조를 국내조선사에 발주하여 한진해운에 임대하는 형식의 리스금융으로 선박건조금융지원으로는 최대규모이다. 한진해운은 선박인도후 12년동안 용선형식으로 이 선박들을 빌려쓰다 넘겨받게 되는데 이같은 리스금융방식을 취하는 것은 차관으로 직접 도입할 경우 국제수지불안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산은·외환은·한일은·스미모토은행이 공동주간사로 5천만달러씩,조흥·제일은 등 5개은행이 나머지를 지원하며 금리는 리보금리+0.7%이다.
  • “재판 한번 없이 7년간 옥살이”/후지산호 선장 일 귀환 회견

    ◎「부친사망」 한달 지나서야 알아/「석방요구 단식」 “정치문제라 소용없다” 7년간의 억류 끝에 풀려난 제18후지산(부사산)호의 베니코 이사무(홍분용ㆍ60) 선장은 13일 고향인 고베(신호)에 돌아와 시청에서 약50분 동안의 기자회견을 갖고 나포 당시의 상황과 북한 억류생활에 대해 소상히 증언했다. 베니코 선장은 정규재판을 한번도 받지 않았으며,형무소에서 석방을 요구하며 몇 차례나 항의단식을 했고,집에서 보내온 책은 성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각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억류중 어떻게 생활했는가. 어느 형무소에 언제까지 있었는가. ▲형무소에는 88년 4월26일부터 90년 9월18일까지 있었다. 어디있는 형무소인지는 모르겠으나 입항했던 남포와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평양 어디였다. 나는 3명과 함께 있었다. 그 가운데 일본어를 잘하는 조선사람이 있었다. 무슨 죄로 들어 왔는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간수의 지시 등을 통역했다. 형무소에서 강제노동을 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책은 성서밖에 없었으며 그밖에 들여보내준 책은 전부 소각명령을 받았다. 차중에서 거리를 본 일은 있으나 밖을 걸어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재판은 어떤 것이었나. ▲재판은 없었다. 단지 2층 건물에서 조선말로 고지되어 통역이 일본말로 설명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있으려니 했는데 실제로는 형무소에 들어갔다. 구리우라(율포) 기관장과는 체포되어 5백52일째부터 함께 있었다. 꽤 항의하고 단식하며 『보내달라』고 말했다. 단식은 하루 반나절 또는 이틀씩 했다. 그때마다 취조담당 대장이 『그러지 말아달라. 당신들에게 죄는 없다. 일본정부와 조선정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족으로부터 편지는 몇 통 받았는가.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에 22통 왔다. 형무소에서 받은 것까지 치면 37∼38통 된다. 빠른 것은 1개월 만에 받은 것도 있으나 늦을 때는 7개월 걸린 것도 있다. 부친 사망소식도 처로부터 편지로 알았다. ­북한의 겨울은 어땠는가. ▲밖은 영하 30도나 되는데도 방에는 히터가 없었다. 양말 2켤레,장갑 2켤레를 겹쳐 끼고 면 내의를 입었다. 수건으로 볼을꽉 싸고 생활했다. 『고문이다』라고 말했더니 히터를 넣어 주었다. ­식사는 어땠는가. ▲형무소를 나와서는 좋아졌으나 그때까지는 콩밥,엄지손가락만한 고기,닭고기,계란 등 4∼5가지였다. ­1987년 11월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알고 있었는가. ▲일본의 뉴스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으나 KAL기 사건은 알고 있었다. 『조선이 한 것도 아닌데 일본정부는 우리가 했다고 한다』라는 것과 같은 말을 감시인이 영어로 말했다. ­스파이 혐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자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신이 알고 있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가르쳐 줄 것이다. ­북한으로부터 어떤 지시가 있었는가. ▲그것은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베니코 선장에게 있어 북한억류 7년은 무엇이었는가. ▲좋은 시련이었으며 전보다 인내력이 길러졌다고 느끼고 있다.
  • “소는 실익 앞세워「동맹국」도 배신”/북한로동신문,한ㆍ소수교 비난

    ◎“「두개 조선」 고착화… 통일역행 처사/미와 손잡고 사회주의 와해 시도” 북한은 5일자 로동신문 논평을 통해 한소국교수립은 소련의 배신행위이며 한반도 통일에 역행하는 분열주의 책동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다음은 로동신문논평 내용이다. 역사의 전진 협정에는 나라와 민족들의 흥망성쇠와 이합집산 과정이 항상 동반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영광과 영예로 빛나는 때도 있고 또한 추문과 오점으로 얼룩진 사건들도 적지 않다. 이번에 소련이 자기입장을 1백80도 전환하여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기로 한것은 이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외신들이 전하는데 의하면 지난 9월30일 미국 뉴욕에서는 소련과 남조선사이에 외교관계를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유포되어온 여론이 현실적으로 나타났을 따름이고 별로 신기할 것은 없다. 냉정하게 관찰하면 도리어 물이 재골수로 흐르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련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하는 이 외교관계 설정은 소련이 개편바람의 자국과 혼란에 빠져 쇠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때에 산생된 현상이란 것이다. 지난 9월초 평양에서 있은 조소외교부장 회담때 소련측은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키로 결정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지금의 소련은 그 전날의 소련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로 되었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였다. 그후 소련측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소련의 이익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자주국가인 소련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그 누구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말들을 종합하여 보면 지금의 소련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견지하던 그 전날의 소련이 아니고 그 어떤 다른 성격의 국가로 변질된 것 만큼 그에 상응하게 새로운 벗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나라 다른민족 심지어는 동맹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도 주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 소련이 이 엄연한 공약들을 다 휴지통에 집어던지고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배신이란 말 이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소련으로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함께 조선을 38선으로 분열시킨데 책임이 있는 나라이며 동시에 조선을 맨 선참으로 조선민족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로 인정한 나라이다. 소련이 이제와서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현실인정의 구실을 붙이건 말건 결국은 조선에 두개 조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자기들의 공약을 완전히 뒤집어 엎고 조선의 통일에 역행하는 분열주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된다. 하기야 오늘 소련에서는 10월혁명 후 소련인민이 걸어온 간고분투의 영광스러운 역사자체를 하나의 암흑시대로 규정하면서 투정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들에게 있어서 그 전날에 우리와 한 언약들을 집어던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한 것을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주관적 의도야 어떻든간에 결과적으로는 두개조선으로 분열을 고착시키고 우리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소위 개방에로 유도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제도를뒤집어 엎으려는 미국의 기본 전략에 공공연히 가담하는 것으로 밖에 달리 될 수 없다. 이것은 조선을 둘러싼 미국 소련 남조선의 3각 결탁관계의 형성을 의미하게 되며 평화적 이행 조약에 따라 아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와해하기 위한 포위망 형성의 일환으로 되게 될 것이다. 오늘 분열된 나라들이 통일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다. 조선에서도 통일에 대한 북남 전체인민들의 열망은 어느때 보다도 높아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소련이 시대적 추세에 역행하여 남조선을 국가로 인정하고 조선의 두개 국가가 존재한다면서 통일을 방해하고 분열을 고취하는데로 방향전환한 것은 오직 미국과의 보조 일치를 위해서라고 밖에 달리 해석될 수 없다. 소련측이 평양에 와서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도 한가지 불가피한 사정에 대하여 설명한데 의하면 지금 소련 경제가 다 파괴되는 위기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을 듣고 보면 물에 빠진자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세상에는 실지로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허무감마저 없지 않다. 보도에 의하면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기로 하였다는 소식과 때를 같이 하여 남조선이 소련에 경제협력자금으로 23억달러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동맹국의 이익과 신의를 23억달러에 팔아먹은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체계를 시장경제체계로 넘긴다고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운영 방법에 기초지식을 습득하는데 애쓰고 있는 소련의 학자들로서는 외교관계설정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팔아먹은 것이 아주 수지가 맞는 자본주의적 상거래 행위라는 것을 배우게 되어 흡족해 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의 남조선의 형편에서는 그 막대한 돈을 낼 원천도 없거니와 아마도 그것은 사회주의를 와해시키기 위한 미제의 특별기금에서 나올 것이 뻔하다. 우리는 아무리 우여곡절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부닥치는 암초를 외도리면서 자기가 갈길을 끝까지 갈 것이다. 역사는 배신과 변절,부정과 전횡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다.
  • 「이념의벽」도 초월하는 한핏줄/김대환이대교수·사회사상사(서울시론)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를 다녀와서 실로 40여년 만에 남북한 학자가 4박5일동안 한자리에 회동한 역사적인 학술모임이었다. 이번 토론회는 그동안 단절을 깨고 서로 만났다는 데에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 물어가고 있는 화합과 통일을 위해 학문적인 기여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가능성의 타진과 그 실천의 방책을 모색하는 전향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었다. 재미·캐나다 교포 학자를 비롯하여 일본 영국 소련 중국 동독 등 15개국에서 온 전문학자와 함께 한국측에서는 1백53명의 교수와 그외의 전문가등 2백여명이,11명의 북한대표 그리고 3백여명의 재일민단·조총련계학자 등 1천2백여명이 대판국제교류센터에 모여 성대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치른 지난 3일날의 개회식은 세계인과 더불어 당사국인 남북한 모두의 통일에의 열망과 열기가 충만한 그대로이었다. ○학문적 기여방법 모색 오정달실행위원장의 『남북의 학자가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한 데 큰 기쁨을 갖는다』는 개회사와 함께 김철명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은 『종교·사상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솔직하게 토론하고 대화합시다』라는 인사말이 있었다. 그에 이어 한국측을 대표하여 본인은 『민족·이데올로기의 갈등문제를 극복하고 남북의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하고 그러기 위해 『서울에 오십시오. 우리도 평양에 가겠습니다』라고 인사말을 맺으면서 북한측의 김단장앞으로 걸어가 악수를 청했을 때 장내에는 그야말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가득 찼다. 그렇듯 남북한의 화합과 통일은 우리들 당사자 뿐 아니라 세계인 모두의 공동의 관심사의 한 초점이 되고 있음이 현실이다. 우리들 한국측의 학자들은 문자그대로 자유주의·개인주의사회에서 생활해 온 그대로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학술토론회에 임하는 행동거지로 일관하였다. 이는 동대회에 참가하는 11개 분과위원회의 간사교수들의 합의사항이었지만 북한측의 대표들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가 굳었던 장벽도 무너지듯 웃음 띤 얼굴로 이야기가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민족의 동질성」을 체감케 하는 듯했다. 학문의 순수성·중립성을 표방하면서 이번 학술회의를 탈정치화해야 한다고 우리측은 표방하고 나섰지만 이에대해 마치 남북한 학자들이 모두가 묵시적인 사전 합의라도 하고 나선 듯 뜻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본대회는 남의 땅 일본에서의 개최였다. 남의 나라인지라 남북한 대표들이 각자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자기 체제옹호에 급급하거나 감정에 치받쳐 싸움판이라도 벌인다면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게 되리라는 염려에서도 비롯됐겠지만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그 점은 이번에 참가한 남북한의 학자들을 비롯하여 1천2백명의 전문가들의 큰 학문적인 책임성의 발로이었다 할 수 잇다. 초점은 역시 남북한의 체제에 관한 학술토론이었지만 그것을 다루는 정치경제학 분과뿐 아니라 법학·종교·언어·사회·교육 그리고 심지어는 의학·과학분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발표되었으며 각 분과마다 자리가 메워지는 성황이었다. ○탈정치화 묵시적 합의 그러나 약간 욕심같은 말이 될지 모르지만 수준은 조금 미급한 듯했고,발표자의 논문준비도 충분치 못한 면이 있어 한국학의 학술토론회라기 보다는 학술올림피아와 같은 인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어디까지나 시발이고 과정이지 종착은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발전을 기약함이 마땅타 생각되어졌다. 토론에서 시작하여 토론으로 끝을 맺자는 우리측의 주장에 북한측도 동의한 듯 「조선학」국제학회결성 문제는 후일의 과제로 미룬 속에 해외학자들만이 모인 고려학회 창설로 끝을 맺었다. 그리하여 그 회장으로 북경대학·조선학연구소의 최응구소장(조선족)이 피선되었다. 남북한이 다같이 불참속에 회결성및 회장 선출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미국·캐나다·소련쪽에서 온 학자들이 회의진행과 표대결에서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는 역시 학자다움을 보여주어 뒷맛이 개운했었다. 끝으로 다음 두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비록 우리가 40여년의 단절과 외면속에서 사는동안 각기 틀리는 체제·이념·사고·생활을 해왔었지만 함께 만나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술잔을 나누다보니 그것이 공식적인 행사이긴 했지만 우리 민족의 본질에 있어서는 크게 변한 것이 없고 뿌리와 바탕은 같구나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는 이데올로기보다 진하다고나 할까? 둘째는 우리는 곧잘 개성과 권리와 다양성을 들어 우리 사회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결정에 대한 자발적인 협력과 자기책임을 다하는 도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주의·개인주의는 곧 무정부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참가한 교수들의 언행은 훌륭한 시범을 보여주게 되었다. ○남북체제 토론이 중심 어쨌든 많은 것을 발견하고 배우고 느끼고 온 학술토론회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사상과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이 북한측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면에서 성실과 진지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우리체제 우리들 자신에게 소중한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 폐막식은 민족의 감정이 폭발한 그것이었다. 모두가 거나하게 술에 취한 듯 흘러나오는 꽹과리·북·장구소리에 맞추어 남북의 노래,통일의 노래가 울려퍼졌고 북한대표들도 그동안 약간은 굳었던 얼굴들이 활짝 편 듯했다. 특히 마지막 그 누가 부른 「두만강」의 노래는 한 순간 장내를 숙연하게까지 하면서 꿈과 가능성을 간직한 대회의 막은 내렸다.
  • 「이질의 남북」접근 가능성 확인/막내린 오사카「조선학토론회」 결산

    ◎서로 다른 견해속 대결보다 설득에 노력/“양측주장 예상밖 공통점”… 외국학자 놀라 오사카(대판)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는 기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측 학자들의 대거참가로 북한 대표단은 정치선전공세를 움츠려야 했으며,세계학회는 결성됐다. 북한 학자들은 학문적 중립성을 그 나름대로 외칠 수 있었고,무명의 대학은 돈을 써 이름을 높였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도 많았다. 남북이 대치하면 싸울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조선학」에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한반도에 그처럼 관심이 쏠리리라는 것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대목은 역시 「대화」였다.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가장 관심이 모아졌던 부문은 정치법률부회의 공통논제 심포지엄 「냉전구조의 해체와 아시아ㆍ태평양­조선반도 통일론의 수렴을 중심으로」였다. 동서독이 통일되고 남북예멘이 합쳐진 현 시점에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에 관심이 쏠리고,그 귀추가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국제교류센터의 2층작은홀은 언제나 2백여명의 청중으로 넘쳤다. 냉방시설이 작동되지 않아 모두 땀을 흘리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했다. 사회는 한국측 이호재(고려대),북한측 박창곤(주체과학원 부원장),일본 불교대학 다카야 데이구니(고옥정국) 등 세 교수가 맡았다. 이 심포지엄에서 한국측 이세기 전통일원장관(한국 북방정책연구소장)은 「남북통일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을 발표했고,북한측에서는 대표단 단장 김철명(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과 이형철(군축ㆍ평화연구소 실장)이 「90년대 조선통일의 전망과 우리 민족의 과제」를 발표했다. 양측이 주장하는 바는 물론 달랐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들고 나온 북측과 국가연합­체제연합­통일국가의 3단계 통일론을 내놓은 남측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었다. 강평을 맡은 시즈오카(정강)대학 이즈미 겐(이두견원)교수는 『양측의 견해에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토로했다. 사회자 이호재교수도 『감명 깊었다. 특히 북한의 김단장이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여유있게 설득하려는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학자들을 모아 놓고 토론을 시키니까 판문점회담 같지 않게 상당한 의견접근이 이뤄졌다. 통일전망이 매우 밝다는 확신을 가졌으며,이것은 한반도가 분단된 채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변세력들에게 교훈이 됐을 것이다.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났더라면 더욱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측 사회자 박창곤도 에피소드를 들어가며 소감을 밝혔다. 『내 경우 8번째 방일인데 이번처럼 긴장한 때는 없었다. 몇년전 하와이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한국여성이 내게 「북한의 선생님들도 사람이군요」라고 말을 건네 눈물을 흘리게 한 일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가 이처럼 대결상태에 있다. 그러나 오는 이 자리에서는 「많이 변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더 자주 만나고 교류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하면 통일은 이룩될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 서로가 상호 차이점을 극복하고 공통점을 살려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측 김철명단장도 한국측 이세기 전장관의 통일론을 어떻게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평가하고 싸우러 나온 것이 아니다. 대결은 이제 피해야 한다고 개막연설때도 강조했다』고 대답했다. 이보다 앞서 있은 북한측 대표 박문회(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원)와의 질의응답도 흥미를 끌었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빨갱이들이 쳐들어올까봐 두려움을 안고 있다. 북한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란 이유를 밝히라』고 월간 「해외동포」 이구홍 발행인으로부터 직접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는 싱긋이 웃어가며 대답했다. 『지금 남북 양쪽은 모두 침범당하지 않을까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싸움을 하면 모두 다 파괴된다. 더구나 핵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먼저 침공하든 망가지는 것은 조선사람의 생명과 재산이다. 북한이 쳐들어 가지 못한다는 이유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전쟁을 일으켜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이처럼 다른 나라가 아닌 조선사람이 파괴되는데 얻을 게 없지 않은가. 목적이 없는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는 북한에 힘이 없다. 공격은 방어보다 3배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병력 10만명정도 많다는 역량으로는 공격을 할 수가 없다. 인구로 보나,전략적 물자ㆍ잠재적 자원으로 보아도 남침은 불가능하다. 남침위협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이같은 그의 발언은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훈련된 공산당원의 거짓말이라기 보다 차라리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졌다. 그의 말에 청중들은 속고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속아도 좋으니 자주 만나 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질 남북이 의외로 빨리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그 자리의 모든 참석자들은 확신하는 듯 했다.〈오사카=강수웅특파원〉
  • “동구사태 북한에 영향 못미쳐”/북한대표단 일문일답

    ◎독일통일방식 한반도에 적용 못해/북한서 반체제란 생각할 수도 없어 【오사카=강수웅특파원】 제3차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에 참석중인 북한측 대표단은 4일 하오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주민들도 동유럽의 사태와 동서독 통일 등을 잘 알고 있으나 이같은 사태는 북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북한의 사회주의는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람중심의 사회주의로서,견고하고 생활력이 강한 주의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독일식 통일방식은 조선에는 통할 수 없고 조선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대표단은 또 『한소 정상회담도 잘 알고 있으며 내정에 관한 문제여서 간섭할 생각은 없으나 조선문제를 놓고 큰 나라를 찾아 다니거나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고 『사대주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조선문제는 조선인들끼리 만나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대표단은 『북한에는 반체제인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못박고 『북한은 자주권을 존중해 주고 조국통일위업에 반대하지 않는국가라면 어떤 나라와도 친선을 맺는다는 기본입장을 세워 놓고 있으므로 미국ㆍ일본과도 관계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북한 대표단 회견에는 참가자 11명중 석창식(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 부위원장) 김철식(사회과학원 부원장) 김석형(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 박승덕(사회과학원 주체사상 연구소 실장) 이형철(군축 및 평화연구소 실장) 등 5명만이 나와 1시간여에 걸쳐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당초 1백50명의 대표단을 파견한다더니 왜 11명밖에 오지 않았나. 따라서 이산가족 상봉도 한가족밖에 못하지 않았는가. ▲석창식=대표단 규모는 회의 목적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남한에서도 처음에는 3백명이 온다고 했다가 30명,1백명으로 규모가 바뀌지 않았는가. 왜 남쪽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가. 북한에서는 지금 다른 학회도 많이 열리고 있고 범민족대회등 준비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느라 그렇게 됐다. 이산가족문제는 예상하지 않았다. 학술대회에서 가족상봉은 복잡하지 않은가. 그러나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석형선생은 가족들과 매일 만나고 있다. ­이번 남북한 학자들의 대화와 접촉에서 어떤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김철식=이번 대회의 수확에 대해 추가한다면 과거의 오해와 불신이 많이 풀리고 서로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열렸던 한국ㆍ북한ㆍ미국의 군축세미나에서 나온 한국측 군축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형철=역사적인 3자간 군축회의 였다. 한국측 제안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나 만나서 토론한 것 자체가 성과였다. ­북은 주체사상 방법론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남한에도 자유로운 여러 방법론이 있다. 남북한 공동의 조선학연구가 가능하겠는가. ▲김철식=주체사상 방법론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남의 방법론도 받아들일 것이다. 방법론은 많아도 진리는 하나이므로 낙관하고 있다. (회견을 마칠때쯤 되자 김석형이 마이크를 들더니 철근콘크리트 장벽을 제거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며 임수경ㆍ문익환을 석방하라고 큰소리를 지르고 회견장을 일어섰다)
  • 조선학 학술토론회 개막/일 대판서/남북한학자,정치색 배제 합의

    【오사카=강수웅특파원】 일본 오사카(대판)에서 개막된 제3차 조선학 학술토론회에서 남북한 대표들은 『상호간의 차이점을 뒤로 미루고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허심탄회하게 접근하자』는 데 인식의 일치를 보았다.〈관련기사5면〉 3일 상오 10시 오사카 국제교류센터 대회의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북한측 대표단장 김철명(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체제와 이념의 차이점은 일단 뒤로 미루고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허심탄회하게 접근하자』고 말하고 『학술적 견해에서는 서로 차이가 난다해도 대결을 조장해서는 안되며 불신과 대결을 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종래의 북한측 입장인 정치적 색채를 배제한 발언을 행해 주목을 끌었다. 이에대해 한국측 대표인 이화여대 김대환교수(사회학)도 인사말에서 『개인적으로 북한측 김단장의 말에 전적으로 찬동한다』고 전제하고 『40여년 장벽을 뚫고 남북한 학자의 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이 순간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 해양오염의 심각성(사설)

    우리의 바다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신음소리·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하수구화한 강을 타고는 육지의 무지가 흘린 온갖 성질의 폐수가 흘러든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견디기가 어려운 바다다. 그런데 그 위에 항구와 바다위를 떠다니는 배까지 각종 기름을 쏟아 넣는다. 그래서 더욱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지난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같은 회사 유조선끼리 충돌한 사고가 발생했다. 여기서 흘러나온 벙커C유는 온 서해를 오염시켜 나갔다. 그 기름띠가 지금도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25일에는 충남 태안 원북면 앞바다에서 불이 난 유조선이 침몰하면서 벙커C유를 토해내고 있고 27일에는 경남 통영군 한산면 앞바다에서 어선과 충돌한 유조선이 벙커C유를 내뿜고 있다. 서해와 남해가 기름오염 경쟁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하다. 10여일사이의 이번 사고에서 보듯이 어쩌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지나간 사건은 접어두더라도 올해 상반기만 「기름및 폐기물에 의한 오염사고」는 1백42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기름 유출사고와 함께 선박 폐유사건을 합친 것이기는 하지만 이같은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바다를 지금 서서히 죽여가고 있다. 아우성치는 양식장 어민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그 피해는 피해액이 엄청나다는 돈 액수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국민 모두의 공유재산을 망쳐 직접간접의 피해를 줌으로 해서 국민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셈이다. 27일의 통영 앞바다 유조선사고의 피해만 해도 오염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한려 해상공원의 이미지 손상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우려는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유처리제 남용에도 쏠린다. 벙커C유의 제거에는 별 효과도 못보이는 그 유처리제는 독성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이고 보면 기름오염에 의한 피해 못지않은 다른 피해를 예견케 한다는 점에서이다. 바다가 아무리 넓다고는 해도 유출사고때마다 무분별하게 뿌려댈 때 그 또한 바다의 죽음에 촉매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우리 모두의 관심은 기울여져야겠다. 설사 부작용없이 1백% 방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난 다음의 대책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 될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그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돼야 한다. 그렇건만 어째서 빈발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 점을 묻고자 한다. 유조선이란 이름의 배는 충돌선인가,화재선인가,침몰선인가,아니면 해양오염 목적선인가. 어째서 똑같은 유형의 사고를 되풀이해 오는 것인지 그 대목을 당로자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다. 5개 기관으로 분산되어 있는 해양 행정의 일원화로써 감독·지도를 효율적으로 수행해 나가자는 지적도 있고 오염방제 업무를 전담케 하는 민간기구를 육성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비단 해양오염뿐 아니라 육지를 포함하여 모든 오염원에 대해서는 국운을 거는 획기적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본다. 오염환경은 경제발전도 문화향상도 무위로 돌리는 문명화 사회의 괴물이다. 곧바로 우리의 목줄을 죄면서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북 대표단 11명 확정

    【도쿄=강수웅특파원】 북한이 오는 8월3일부터 오사카에서 열릴 예정인 조선학 국제학술회의에 보낼 대표단 명단이 30일 밝혀졌다. 당초 1백50명에서 11명으로 크게 줄어든 대표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철식(사회과학원 부원장) ▲김석형(〃역사연구소 고문) ▲박승덕(〃주체사상연구소 실장) ▲김철명(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 ▲석창식(〃중앙위 부위원장) ▲박문회(〃중앙위 위원) ▲박창곤(주체과학원 부원장) ▲김광전(〃연구사) ▲한수길(〃부원장) ▲김남선(〃연구사) ▲이형철(군축및 평화연구소 실장)
  • 미 US라인사 파산으로 떼인돈 보상

    ◎수은,대우에 1천4백억 지급 확정/수출보험사상 최고액… 6년간 나눠 지급 ㈜대우로부터 컨테이너선박 12척을 구입한 미국해운회사 유에스라인사가 파산함에 따라 그동안 논란을 벌여왔던 수출입은행의 대우에 대한 보험금 지급방법이 최종 확정됐다. 28일 수출입은행은 수출보험금 잔액 1천7백58억원중 환차익 등을 제외한 1천4백23억원의 보험금을 다음달부터 오는 95년까지 대우에 6년간에 걸쳐 연차적으로 지급키로 했다. 이같은 보험금 지급액은 지난 69년 우리나라에 수출보험이 도입된 이래 최대의 규모이다. 수출입은행의 수출보험보상심의위원회가 상공부와의 협의를 거쳐 확정한 보험금지급계획에 따르면 1차연도인 올해는 정부예산을 통한 보전금 2백억원과 수출보험기금 4백58억원으로 모두 6백58억원을 마련,오는 8월에 6백억원,그리고 9∼10월에 58억원이 지급된다. 또 91년부터는 정부예산 및 수출보험기금의 순이익금으로 재원을 마련키로 했으며 이중 정부예산 및 수출보험기금지원분은 91년에 2백20억원,92년 1백76억원,93년 1백59억원,94년 1백42억원,95년 65억원 등이다. ◎대우 수출보험처리의 문제점/보험금 정부서 지원… 국민이 떠맡는셈/「파산」예견속 안이한 수주 초대형 수출보험사고로 재벌기업이 입은 손해를 사실상 국민들이 떠맡게 됐다. ㈜대우의 수출보험사고에 대한 수출입은행의 보험금지급액수가 28일 모두 1천4백23억원으로 최종 확정됨으로써 대우의 무리한 선박수출과 이에 따른 수출보험가입과정에서의 특혜성여부가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보험금은 국내보험사상 최대규모로 대우가 선박을 수출하면서 수출입은행에 낸 보험료 73억원의 무려 19배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수출보험은 보험사고가 날 경우 수출보험료를 적립한 수출보험기금에서 지급하고 이로서 충당되지 않을 경우 정부재정에서 지급하도록 한 수출촉진대책의 하나이다. 대우는 지난 82년 6월 미해운사인 유에스라인사로부터 컨테이너선 12척을 척당 4천7백50만달러씩 모두 6억5천5백54만달러에 수주하면서 이가운데 4천9백69억원을 수출보험에 들었다. 그런데 미국의 4대 해운사가운데 하나인 유에스라인사가 86년 국제석유가격이 하락하면서 대형저속,연료절약형인 이들 컨테이너가 인기를 잃어 경영난에 봉착했고 대우에서 인수한 선박을 87년에 공매처분했으나 그값은 1척값도 안되는 총 4천7백만달러에 불과했다. 이번 보험사고는 법정관리를 신청한 유에스라인사가 89년 5월 대우를 포함한 채권자들의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게 되자 대우가 수출입은행에 보험금지급을 공식신청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보험의 성격상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우에 지급되는 보험금 가운데 상당액이 국민의 세금인 정부예산(재정)에서 나간다는 점이다. 수출입은행이 갖고 있는 총보유계약(보험금계약)이 2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보험금지급재원인 수출보험기금은 1천3백억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보험금을 한꺼번에 지급할 여력이 없는 수출입은행은 올해중 수출보험기금에서 4백58억원과 정부예산보조금 2백억원 등 모두 6백58억원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95년까지 연차적으로 지급할 예정이다. 기금부족문제가심각해져 공신력마저 흔들리게 됐다. 더욱이 석연치 않은 것은 이 보험사고가 「예견」된 것이 아니었냐는 일부의 의구심이다. 당초 외국과 국내의 많은 조선사들은 유에스라인의 파산가능성을 경계했었고 수출입은행의 실무진들은 수출보험기금의 자본금이 2백66억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대우가 요청한 4천9백69억원이라는 막대한 보험가입액수에 난색을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대우측이 당시 옥포조선소의 일감이 없어 고민하던 터에 다른 조선소들이 「먹으려다 버린 음식」을 알면서도 수주하면서 수출보험에 가입,유에스라인사의 파산후에 대비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들이 업계에는 적지 않는 실정이다. 수출보험의 성격상 예기치 못한 보험사고를 정부가 보전해 주는 것은 수출업계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상공부ㆍ수출입은행 등 관계당국의 철저한 수출보험제도운영과 감독이 절실하다.
  • 자유인 김현희 서울신문과 첫 단독인터뷰

    ◎“시장서 쇼핑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 없어요”/김일성 기만 깨닫고 증오감 느껴 자백/남해안 바닷가ㆍ제주도 가보는 게 소원/성경ㆍ이야기국사 등 읽으며 사회적응 노력/통일 앞당겨져 부모ㆍ형제 빨리 만나봤으면… 김현희는 역시 예뻤다. 그녀에 대해서는 두가지 측면에서의 관찰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의 선발된 특수공작원으로서 1백여명이 넘는 무고한 KAL기 승객과 승무원을 무참하게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점. 또 하나는 만일 그녀가 이같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던들 그녀 또한 양가의 맏며느리로서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아내이며 주부로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한 여인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유족들에 용서빌어 따라서 「테러리스트」와 「미녀」를 동시에 만나 『당신은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무차별 질문공세를 펴야만 하는 기자의 심정은 착잡했다. 『저는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고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을 살려준 것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대한민국과 인민들이 살려주신 의미를 바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김현희는 지금 용서를 빌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구하며 유족들의 용서를 바란다. 그러나 그 용서는 힘든 것임을 그녀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성서를 읽지 않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왜 나만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기구한 운명을 비관하고 생의 의욕을 잃고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와서 하나님을 알고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이런 시련속에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다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흰 칼라를 받친 보라색 투피스에 머리를 묶은 김현희는 화장기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분만 가볍게 바른 얼굴이었다. 특별회견이 진행되는 2시간30분 동안 그녀는 때로는 입술을 깨물며,때로는 미소짓는 여유를 보이며 최근의 일과 신앙생활,앞으로의 생활계획과 소망,자신의 의식변화,북한에서의 공작원선발과정 및 훈련내용,김일성체제에 관한 인식,북한의 체제변화예상 등에 관해 또박또박 답변했다. 회견도중 어느 대목에서는 긴장이 되는 듯 심호흡을 하기도 했으며 대담하는 기자를 바라보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눈을 약간 아래로 깔고 깜박거렸다. 현재 김현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에의 적응문제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사면은 됐으나 저지른 죄는 가셔지지 않았으며 유가족의 슬픔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직업선택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또 그럴 상황도 아니다. 『지금 생활면에서 불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북에서 성장했으며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인민들이 어떻게 받아주실지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면에서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는 역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어휘의 문제이다. 김현희의 말씨가 이북 사투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기 위해 새벽에 남대문ㆍ동대문시장에 가 본 일이 있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는 창발성을 발휘하는 사회』,또는 『저도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된장국ㆍ김치를 좋아한다』라는 등 때때로 튀어나오는 생경하거나 북한전용의 어휘는 얼마간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날 김현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5번,「조선」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썼다. ○수영장 아직 못가봐 김현희는 아직 지방까지는 돌아보지 못했으나 서울근교는 거의 다 구경했다. 민족역사에 관심이 많아 덕수궁ㆍ창경궁ㆍ비원은 물론,독립기념관ㆍ현충사도 둘러보았다. 그녀가 시장ㆍ백화점 등에 외출할 때 처음에는 『아,김현희가 아닌가』라고 알아볼까봐 겁이 났었으나 특별히 변장은 하지 않았다. 『여기는 남에게 신경쓰는 일이 없는지 물건파는 사람이 한번도 알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김현희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남해안 바닷가와 제주도이다. 『북한사람의 소망은 거의 그렇지만 저 역시 남해안과 제주도에 가보는 것이 꿈입니다. 제주도에 가는 것은 「언니들」과 의논해 본 일이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했으며,남해안에서는 수영을 하기보다 그곳 경치를 보고싶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수영실력은 공작원훈련을 통해 2㎞까지 헤엄칠 수 있는 정도지만 남한에서는 아직 수영해 본 일이 없다. 김현희의 사회적응에 있어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의식의 순화이다. 그녀는 아직도 명곡보다는 행진곡을 더 좋아한다. 이날 회견에 앞서 서울신문사의 협조에 의해 동석하게 된 일본도쿄(동경)신문과 아사히(조일)신문 기자들이 강아지 인형들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감사합니다』라며 기쁜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28살이라는 그녀의 나이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통일을 저해하는 88올림픽을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습니다. 그것은 전투임무였으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중앙당을 위해,통일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테러의식이 순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침상의 베갯머리가 썩도록 눈물을 흘리고 참회해야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엄청난 결과를 빚은 KAL기 격추범행에 대해 비록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장을 목격했다거나 시체의 참상을 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었다. 『제가 실제로 격추현장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고한 동족을 죽이는 잔인한 행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형제가 잘못될까봐 두려워 자백도 안했으나 진상이라도 바로 알려드려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다시는 지구상에 이같은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백하게 되었습니다』­그녀는 바레인에서 검거된 후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또 법정에서 유족들에게 매도당했을 때도 『왜 그때 바레인에서 죽지 못했는가』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레인에서의 자살생각은 검거에 따른 「공작실패」가 그 원인이었으며 사실상 기회가 없어 실행을 못했던 것 뿐이었고 법정에서의 괴로움은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판정해 주신다』고 목사님이 많이 위로해 주어 견딜 수 있었다. 김현희의 하루 일과는 대개 아침 6시30분 기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면 성경을 공부하고 청소ㆍ식사준비를 한다. 체조도 거르지 않는다. 8시부터는 식사,9시부터의 오전시간에는 수사기관 또는 다른 곳에서 의뢰하는 북한실태에 관한 원고를 쓴다. 오후에는 사회적응을 위해 역사소설ㆍ간증소설ㆍ교과서 등을 읽는다. 요즘 읽고있는 책은 간증소설과 김동길교수의 「너와나의 사랑을 위하여」이며,시리즈로 된 「이야기 국사」도 본다. 오후에는 지난날을 반성하는 수기를 쓰고 있으며 TV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 가끔 외출도 하지만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오늘(6일)아침 읽은 성경구절은 잠언 3장 5ㆍ6절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녀가 매일 읽고 있는 성경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야고보서 제1장 2절로부터 4절까지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려 함이라』 ○부모생존 위해 기도 김현희의 신앙생활은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되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수사관들이 성경과 불교서적 등을 갖다주며 읽어보도록 권고했다. 성명말씀은 처음 대해본 것이었는데,잠언중에 좋은 구절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모르는 단어가 많던 차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목사님을 소개받게 되고 지정된 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날 회견에서 잠시 입술을 깨물다 대답한 대목은 이런 질문 때문이었다. ­혹시 꿈에 부모형제나 고향산천을 보는 일은 없습니까. 『그거야 뭐,누구나 다 부모형제 그리워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꿈속에서 자주 봅니다. 범행을 자백하기 전에는 부모형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지금은 수용소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만 기도로써 남북통일이 되어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때까지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바입니다』 김일성에 대한 김현희의 인식은 「위대한 수령」으로부터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그에 대한 인식은 검거 후 8일만에 자백할 때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자백하게 된 동기는 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미국의 식민지」이며 「군사파쇼정권」이라고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아니며 김일성이지금까지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자백을 하고 나서는 한때 김정일의 지시를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혹은 한국의 일면만 보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도 했었으나 날이 가면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또 「미제」는 조선전쟁을 일으켰고 남한을 강점했으며 통일을 방해하는 철천지 원수라고 교육받았고,「일제」도 36년간 조선을 강점하고 학살ㆍ강탈을 일삼은 원수라고 해서 적대감정을 가졌으나 여기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고 서로 하나가 되어 도와가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8살 때 공작원으로 18살 때 공작원으로 선발됐던 김현희는 「통일을 위해 중앙당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라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 각오했다.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많은 단련을 받았다. 그녀를 감상적으로 「미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산이다. 위장된 일본공작원화 훈련을 위해 81년과 82년 1년6개월에 걸쳐 일본인화교육을 받았으며,중국인화 교육도 받은 전문테러리스트였다. 그녀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선생과 생활하면서 언어 뿐만 아니라 일본생활ㆍ풍습ㆍ지리ㆍ역사를 익혔다. 태이프를 통해 야마구치 모모에,가토 도키코,시마쿠라지요코의 노래를 배웠으며 지도를 놓고 신주쿠(신숙)의 이세탄(이세단)백화점은 어떻고,유락조(유락정)는 젊은이들의 영화관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따라서 선생 「이은혜」로부터는 거의 일본인처럼 되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신문과 「문예춘추」같은 잡지도 술술 읽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은혜」를 일본에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으로 생각하는데에는 근거가 있다. 은혜 자신이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했고,조총련계 학생들이 까만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은 것을 보고 부러워 어릴 때 그것을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더니 『그것은 조선사람만이 입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은혜는 「조선사람」의 흉을 많이 보았다. 『조선사람은 밥먹고 물로 울럭울럭하며 입가심을 하지않나,국에 밥을 말아 훌훌 먹는다. 또 크기를 표시하는데도 일본사람들은 동그렇게 표시하는데도 조선사람들은 팔뚝을 내밀고 길이로 나타낸다』고 흉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일본여인이라고 단정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엄격한 통제로 인해,그뒤 공작원이 되어서부터는 사회와 동떨어진 생활을 해와 이성교제의 기회가 없었다는 김현희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와 악수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으나 감춰진 힘이 느껴졌다. 역시 그녀는 웃어서는 안되는 테러집단의 예쁜 인형의 그림자였다.
  • 회사대표­농성자 골리앗서 협상/현대중

    ◎어제 저녁 일단 결렬…오늘 다시 만나기로 【울산=이용호기자】 골리앗크레인 점거노조원들의 단식 농성 돌입선언으로 분규타결 전망이 흐렸던 현대중공업사태는 6일 하오­노사양측이 골리앗크레인에서 만나 협상을 벌이는데 성공해 사태해결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대중공업 장명우전무이사(조선사업부)와 신익현관리담당상무등 임원 4명과 서문화노무담당부장등 5명은 이날 하오5시45분쯤 비밀리에 골리앗크레인으로 올라가 1시간30분동안 이갑용비대위의장등 농성노조원들과 사태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이날 협상에서 장전무등 임원대표들은 노조측의 요구사항에 대해 법테두리에서 지원과 협조를 약속하고 요구사항을 명확히 해줄 것과 정상조업을 위해 조속한 농성해산을 촉구했다. 이에 농성노조간부들은 고소ㆍ고발 취하문제가 회사측의 시각과는 달리 구속자 석방투쟁과 연계된 것이 아니며 특히 현재의 투쟁이 전노협등 외부세력에 의해 조성되고 있지 않다고 강조하고 우선 회사측의 고소 고발 취하와 경찰병력 철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측은 또 『사법적 책임은 지더라도 노조원들에게 경위를 설명하고 새집행부를 구성할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임원들은 노조측과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나 7일 상오10시 골리앗크레인에서 이들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하오7시40분쯤 내려왔다. 이날 노조측의 요구에 따라 한차례 정회를 거치면서 진행됐으나 양측이 서로 웃으며 악수를 나누는등 화기있는 분위기속에서 진행돼 7일 상오 재협상은 재협상에서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 “한인 최초 소 이주 1863년 9월21일”/재소 한인작가 밝혀

    【내외】 한인들이 소련땅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백27년전인 1863년 9월21일이라고 모스크바방송이 한 재소 한인작가의 글을 인용,보도했다. 현재 소련에서 기자겸 작가로 활동중인 한인3세 김부르트는 최근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 부록으로 발행되는 「소유즈」에 기고한 「소련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역사와 현황」이란 글에서 1863년 9월21일에 첫 한인이주민들이 소련국경을 통과했다는 기록문서가 있으며 이후 8년만인 1871년에는 술탄강가에 인구 1천6백16명을 헤아리는 한인농촌 7개가 형성되었다고 밝히고 이주원인에 대해 『조선에서의 지나친 봉건적 압박과 농민들의 토지수탈,그리고 빈곤』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모스크바방송은 전했다.
  • 30∼40년대 스탈린 통치기간 재소 한인 2천명 희생

    ◎모스크바방송 보도 【내외】 지난 30∼40년대초 스탈린의 탄압과정에서 재소한인들 가운데 2천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모스크바 방송이 지난달 29일 보도했다. 소련의 이 방송은 이날 『30년대말과 40년대초 소련내 조선사람들의 생활은 비극적 시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 탄압과정에서 조선사람들은 자기들의 우수한 아들들인 경제일꾼ㆍ군인ㆍ교원ㆍ작가 등 약 2천명을 잃었다』고 폭로했다.
  • 북한축구팀 초청등 대북접촉 2건 승인

    정부는 9일 신동호 스포츠조선사장이 창간기념사업으로 북한축구팀을 초청하기 위해 신청한 북한주민접촉을 승인했다. 정부는 또 조대웅 월간 우먼센스 편집주간등이 북한주부들의 의식주 및 자녀교육 실태조사를 위해 신청한 북한주민접촉을 승인했다.
  • “소 신문등 읽고 「북한모순」깨달아”/유학생귀순 잇달자 감시원보내

    ◎망명 두북한학생 회견 2일하오 대한항공902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북한의 소련유학생 남명철ㆍ박철진씨는 도착직후 공항귀빈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얼떨떨해 소감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수명의 남조선사람을 통해 자유가 있다는 확신이 섰다』고 귀순소감과 동기를 밝혔다. ­두 사람의 인적사항을 자세하게 얘기해 달라. ▲(박철진)65년 평양에서 태어났는데 유성고등중학교를 거쳐 김책공과대학 전자계산학과를 다녔다. 남군과는 같은 중학교와 같은 대학 동창이다. (남명철)85년3월 김책공과대학 재학때 소련 레닌그라드대에 유학했다. 이전에는 대학교에서 유학생을 위한 노어강습을 받았다. ­탈출경로와 망명동기는. ▲지난 3월25일 소련에서 동독으로 가 서독을 거쳐 프랑스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여행증명서를 주소북조선대사관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어 국경을 넘을 당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불법적으로 넘어야 했다. 그분의 신변보호를 위해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어느 한 순간의생각으로 이러한 모험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보도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련의 여러 출판물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새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학기간동안 소련의 신문들을 통해 남조선의 정치ㆍ경제등의 객관적사실을 알게됐다. 정치의 자유와 물질의 부유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망명동기는. ▲이러한 모든 북조선에 대한 객관적 사실인식을 토대로 우리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조국으로서 남조선을 택했다. 이 조국의 민주와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됐다. ­현재 많은 북한의 유학생들이 소환되고 지난 89년에만도 3차례나 동유럽유학생이 우리나라에 망명했는데 소련유학생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해달라. ▲서방세계의 라디오등을 통해 유학생 소식을 듣고 있으나 공개적이고 본격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89년5월부터는 당원들을 파견해 학생생활을 감시하고 있다. 지난해말부터는 여행증명서(비자)를 모스크바의 북조선 대사관에서 한꺼번에 모아놓고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동유럽에는 8천7백여명의 모든 유학생이 철수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물론 외교일꾼은 예외다. 소련에는 5백여명의 유학생과 연구생ㆍ실습생등 1천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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