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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코-조선업계 후판값 ‘진실게임’

    포스코-조선업계 후판값 ‘진실게임’

    조선업계와 포스코가 후판(厚板)가격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지난 24일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조선협회장) 등 조선업계 사장들이 모여 골프 치며 환담을 나눌 때만 해도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이었지만 상황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조선업계는 수주는 넘쳐나지만 후판가가 2002년 말 t당 37만원에서 65만원까지 오르는 바람에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업계 “가격 3년새 2배 인상… 적자탈출 못해 ” 또 포스코가 국내 조선업계에 제공하는 후판가보다 일본철강업체가 자국 조선업체에 제공하는 후판가가 훨씬 싸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포스코가 국내 조선업체에 공급하는 후판가는 t당 64만 5000원으로 경쟁업체인 동국제강(68만 5000원)이나 일본산 제품(68만원)보다 싸다. 게다가 포스코는 3·4분기까지는 조선업계를 돕기 위해 62만 5000원이라는 특별 할인가격을 적용하기도 했다. 포스코는 또 지난해 후판 생산량 344만 2000t의 대부분을 국내에 공급하고 수익성이 좋은 수출에는 29만 6000t만 할당할 정도로 성의를 보여왔다고 밝혔다. 올해도 368만t의 후판을 생산할 계획이지만 수출은 25만t에 불과할 전망이다. 현재 포스코의 후판 수출가는 중국행이 690달러, 일본행이 6만 6700엔으로 내수가보다 높다. ●포스코 “우리제품이 가장 저렴한데 또 내리라니…” 포스코 관계자는 “일본 철강사가 자국내 조선사에 저가로 후판을 공급하는 것은 최근 수년간 일본 조선사가 철강시황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국제가격보다 고가인 자국내 후판을 안정적으로 구매해 준 데 대한 보상차원”이라고 말했다. 삼성증권 김경중 연구위원은 “조선업계의 수익성 악화는 후판가격이 높은 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난 2001년과 2002년의 경쟁적인 저가수주 때문”이라면서 “포스코 후판 비중이 30%에 불과한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은 하반기에도 적자가 지속될 전망이지만 포스코 의존도가 60%에 달하는 대우조선해양은 이미 흑자로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우리투자증권 송재학 애널리스트는 현대중공업이 후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중국 안산철강에 지분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에 대해 “후판 가격을 내리지 않는 일본 철강업체들과 포스코에 대한 압력 행사 목적도 있다고 판단된다.”면서 “지금은 중국산 후판의 품질이 떨어지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국내 철강업계도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울산대 조선학과 세계 최고로 육성”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 울산대학교 조선해양공학부가 세계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과 손잡고 5년안에 세계 최고 학부로 발돋움한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울산대학교와 현대중공업은 6일 울산대에서 ‘울산대학교 조선해양공학부 세계 일류화 공동추진 협약체결식’을 갖고 울산대 조선해양공학부를 세계최고 명문으로 육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이날 협약에서 오는 2010년까지 모두 100억원을 투입해 울산대 조선해양공학부를 세계 1위 학부로 성장시키기로 했다. 현재 90명인 조선해양공학부 정원을 2009년까지 60명으로 줄여 소수 정예화한다. 또 교수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석학을 초빙, 지금보다 10명 이상 늘리고 모든 강의를 영어로 한다. 교수 1인당 학생수를 10명 아래로 낮추고 조선해양 관련 세계 최첨단 실험시설을 갖춘 단독건물을 마련하는 한편 졸업후 취업도 보장한다. 울산대는 2008년 국내 1위에 오른 뒤 2010년에는 조선분야 세계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미시간 대학교를 앞지른다는 복안이다. 당장 내년부터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비롯한 생활비 전액을 지급하는 성적우수 장학 혜택을 넓히고 인터사원제를 통해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삼호중공업에 취업을 보장하기로 했다. 울산대는 현재 서울대·부산대·인하대와 더불어 조선해양공학부 4대 명문으로 꼽힌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6)초의·추사 그리고 정약용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6)초의·추사 그리고 정약용

    이맘때면 생각나는 차가 있다. 바로 ‘눈물차’다.‘눈물차’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1996년의 일이다. 별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 둥둥 떠내려오고 달빛은 풀벌레들의 합창에 일그러지던 날이었다.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했듯이 깊은 밤 대자연의 품속에 빨려드는 풍광을 벗삼아 한잔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스님 계십니까” 밤중에 절을 찾는 나그네는 드물다. 아주 친한 도반이나 절 식구만이 늦은 밤 사찰을 찾을 수 있는 법인데 연락도 없이 찾아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해남의 신문사, 농민회 등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활동가들이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10여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였다. ●새로운 茶문화 생산공동체 구성 자우홍련사 툇마루는 때아닌 손님들로 꽉찼다. 한잔의 차를 돌리고 대뜸 찾아온 연유부터 물었다.“스님 저희들이 차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뜻은 간단했다. 향후 환경과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농촌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차문화 생산공동체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당돌한 제안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연결된 차문화공동체 구성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제안에 망설여졌다. 생각해보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후로 대여섯차례 방문하며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결국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작명을 했다. 남쪽에서 늦게 차를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남천다회’라고 명명했다. 어떤 농사든 어떤 계획이든 서둘러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시작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달에 두 번씩 공부를 하기로 했다.‘동다송´‘다신전´, 그리고 행다와 차에 대한 것들도 공부를 했다. 젊은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다.1997년부터 놀고 있던 땅 8000평에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우리가 택한 농법은 철저하게 친환경농법이었다. 화학비료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만 차밭을 조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10년까지는 수확을 바라지 않을 작정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부엽토만 퇴비로 사용했다. 조금 느리지만 인간과 호흡하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을 그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낮에는 차밭을 가꾸고 밤에는 차 공부를 늦게까지 하느라 모두들 열심이었다. 차밭은 4000평,5000평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차 생산지와 다창들 그리고 국내외 유명 다원들을 둘러본 그들의 안목은 점차 넓어지고 깊어졌다.7년째 되던 해인 2002년 4만여평의 차밭에서 생엽 200㎏을 채취했다. 그리고 제다한 가공량은 40㎏.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양이었다. 차브랜드는 ‘손덖음 첫물차’로 했다. 기계적인 영농이 아닌 손으로 덖는 첫물차만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차를 제다해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에게 제사를 지낸 후 모두 모여 차를 마시며 기뻐했다.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사연은 3000평의 차밭을 가꾼 남천다회 부부 이야기다. 차농사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젊은 부부는 고작 4통의 차를 손수 만들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차들을 이불속에 넣고 눈물을 훔치며 밤을 꼬박 샜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나는 눈물차 이야기인 것이다. 이같은 사연이 담긴 첫물차 이름을 남천다회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눈물차’로 명명한 것이다. 그날도 바로 오늘같은 밤이었다. 그때의 기쁨은 차인으로서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아 있다. 이렇듯 ‘인연’은 모든 것을 바꾼다.18세기 최고의 개혁적인 지식인들이었던 초의스님,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당대 조선사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시대까지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산에 유서와 시학 배워 초의스님은 24세 때인 1809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을 아암 혜장스님을 통해 먼저 만났다. 아암 혜장과 정약용은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년 동안 교류했다. 정약용이 아암 혜장에 보낸, 차를 청하는 편지인 ‘걸명소(乞茗疏)’는 지금까지도 차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걸명소´에는 “을축년(1805년)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약으로도 마십니다. 글 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 양 노동의 칠완다를 들이킨다오” ‘소’의 형식을 빌린 다산의 ‘걸명소´는 노동의 시와 육우의 다경 등에서 보여지듯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다도에도 깊은 경지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암 혜장이 세상을 떠난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 초의스님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초의스님은 1813년 다산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때 마침 내린 비로 인해 장삼자락이 젖어 다산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에게 가지 못한 초의는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슬프도다. 이 적은 몸 하나 나에게 선인의 경거술이라도 지었더라면 빗속으로 산넘어 날아갔을 텐데.” 초의스님이 정약용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탁옹(정약용의 별호)선생에게 드림’이란 시다.“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게 없습니다.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의 책상앞에서 말씀드리리라. 하늘이 맹자 어머니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 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라며 감사하고 있다. 훗날 초의가 조선의 신진사대부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정약용에게 받은 것이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많은 교류를 했다.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정약용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초의스님은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말미에 시를 지어 붙였다.1823년 대둔사지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초의스님은 수룡스님과 함께 편집을 담당했고, 호의와 기어스님이 교정을 보았고, 완호와 아암스님이 감정했으며 정약용이 필사를 했다. 정약용이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는 지속되었다. 초의스님은 한양을 방문할 때면 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수종사 인근 마현마을에는 그의 평생 스승 정약용과 정학연이 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관계 떠나 수행자로 다산과 그의 아들은 수종사의 샘물로 늘 차를 달여마셨다. 한양에 온 초의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평생 초의스님의 스승 노릇을 하며 그의 안목을 더욱 깊고 넓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차인으로 차를 직접 제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유·불·선에 대한 폭넓은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차에 대한 제배 및 제다 그리고 행다 등 다양한 논의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스님에 대해 다산은 스승과 제자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초의스님이 평생의 도반(道伴)인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0세인 1815년이다. 초의스님은 그때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2년 동안 머물렀다. 정약용의 주선으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측되는 초의스님은 서울 두릉(杜陵)에 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자하 신위, 해거 홍현주 등과 교류했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와도 사귀었다.1786년 같은해에 태어난 초의와 추사는 한눈에 서로 뜻이 통했다.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고 청의 금석학 시문 전각등을 깊이 연구해온 젊고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추사는 청의 상류사회에서 중국의 고급 차문화를 배워 차에 대해서도 해박했던 것이다. 추사가 가끔씩 초의스님에게 자신이 구한 중국의 고급차를 보낼때 초의스님이 중국차에 대해서 어떤 것은 참으로 진미가 있고 어떤 것은 가짜 느낌이 난다고 했던 것은 그같은 교류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차에 대해 ‘광적’이었을 정도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승설(勝雪), 고다노인(苦茶老人),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 등 차에 관한 수많은 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초의스님에게 차를 선물받고 써준 저 유명한 명선(茗禪)을 비롯, 죽로지실(竹爐之室),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 다산초당(茶山艸堂) 등 차에 관한 수많은 글도 남기고 있다. 일지암을 맨처음 방문한 사람은 추사도 그의 동생들도 아닌 아버지 김노경이었다. 완도 고금도에서 4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 김노경은 그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을 알고 싶어 일지암을 찾은 것이다.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노경은 시·서·화등 다방면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초의스님에게 첫눈에 반했다. 초의스님은 김노경에게 일지암의 유천에 대해 시로 답한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시방에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와 물을 떠가라. 갈때는 달빛 하나씩을 건져가라.” 초의스님의 시에 김노경은 유천의 물맛이 소락의 물맛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한다.“1840년 9월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며 초의스님을 찾아 일지암을 방문한다. 오롯한 가을의 풍광에 휩싸인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을 만나 추사는 애틋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동지부사의 고위직에서 하룻밤 사이에 유배를 떠나는 추사에 대해 초의스님의 위로는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초의스님은 자신의 제자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허유를 통해 제주도로 차와 서신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의스님의 차와 서신을 받아본 추사는 그 고마움에 ‘일로향실’이란 글을 써서 허유편에 보냈다.‘일로향실’은 지금도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초의스님은 1843년 봄 제주도로 건너간다.1년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초의와 추사는 차에 대한 즐거움과 학문적 교류의 폭을 넓혀간다. 추사는 이때 초의스님을 통해 선불교에 대한 혜안을 넓힌다. 초의가 다녀간 다음 해에 추사는 세속의 각박한 인심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속에서도 그를 따르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세상에 선보인다. 소나무와 잦나무 지조는 눈이 내린 후에야 그 절개를 알수 있다는 화제(畵題)를 지닌 ‘세한도’는 세속을 완벽하게 품어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질곡에 대해 울분을 터트려야할 추사로부터 이같은 작품이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것은 초의스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세한도 등 명작들 초의 영향 커 초의스님은 제주도에서 차의 재배를 시도한다.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를 위해 차의 재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인연이어서일까. 지금 제주도에는 국내 굴지의 회사가 운영하는 광대한 차밭이 존재한다. 초의스님은 1851년 추사가 보내온 서간문을 모은 ‘영해타운´(瀛海朶雲)을 책으로 묶어낸다.‘영해타운´은 1840년부터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추사가 보낸 서신을 차곡 차곡 모았다가 책자로 편서한 것이다. 초의스님이 추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절절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사는 북청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 머물며 초의스님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소동파의 생일날 과천 사람이’란 편지는 그러한 추사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큰눈이 내리고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 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함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요즘 송나라때 만든 소룡단(小龍團)이라는 차 한 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 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초의스님은 추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차를 보내달라는 추사의 청도 제때 지키지 않았다. 추사는 제때 차를 부쳐주지 않는 초의스님에게 익살섞인 ‘최후의 통첩‘도 보낸다.“지금 지체없이 보내지 않으면 덕산의 방과 임제의 할로 경책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초의스님이 차를 보내오면 “과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시음하니 과연 천하의 제일가는 차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스님과 그의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던 추사가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초의스님은 깊이 슬퍼했다. 슬픔에 못이긴 초의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3년후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쓴다.“오호라 그대와 나의 42년 동안의 아름답던 우정이여. 그 우정일랑 다음에 저 세상에서도 오래 오래 이어나가십시다. 나는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마치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그대와 만났을 때는 진정 허물이 없었습니다. 그대와 나는 손수 뇌협과 설유를 달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다 슬픈 소문이 귀에 닿으면 적삼 옷이 함께 젖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그대를 먼저 떠나보내는 나의 애끓는 심사여. 황국이 다시들고 흰눈이 내리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늦게 그대의 영전에 당도했을꼬. 원망일세 원망이로세. 하늘과 땅 사람이 모두 알지 못해도 오직 그대는 나의 심사를 알것입니다.”라고 애절하고 통절한 마음을 적고 있다. 추사를 보낸 초의스님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떠나버린 그를 잊지 못했다. 초의, 추사, 다산은 이렇게 거대한 변화의 담론이 진행됐던 18세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이 엮어낸 인연의 바다는 새로운 세기에 목말랐던 많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눈물차를 만들어낸 남천다회도 마찬가지다. 20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일지암과 초의스님의 선차(禪茶)의 인연이 오늘 이시대에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가 결합된 진정한 차의 세계를 열려는 움직임을 싹틔우고 있는 것이다.‘눈물차’를 만들며 차문화생산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남천다회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차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지암 암주)
  • [책꽂이]

    ●82들의 혁명놀음(우태영 지음, 선 펴냄) 80년대 중반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강철시리즈를 제작해 대학가와 재야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전파했던 김영환 등 서울대 지하운동권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체사상은 현재까지도 사회 변혁운동 그룹의 주요한 지도이념의 하나로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9500원.●엽서의 그림 속을 여행하다(이형준 지음, 시공사 펴냄) 여행 사진작가인 저자가 20여년간 119개국을 누비며 취재한 여행지중 25곳을 골라 담았다. 그림엽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스위스 융프라우부터 에게해의 진주 미코노스, 일본의 눈덮인 온천 등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행지들을 120여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1만 5000원.●교양한국사1,2,3(이덕일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지난 2003년 저자가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 복원’이란 숙제를 품고 펴냈던 ‘살아있는 한국사’의 개정판. 그 중요성이 점차 더해가고 있는 고조선사와 백제사를 크게 보강했다. 각권 1만6000∼2만원.●끝나지 않는 신드롬(천정환 지음, 푸른역사 펴냄) 순종 인산,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등 식민지 시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대중적 신드롬을 통해 조선인들이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됐는지 살펴본다.1만 5000원.●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지음, 정유진 옮김, 개마고원 펴냄) 회화·조각 등 서양미술사에서 다루어진 남성 누드를 통해 미술사적 의미를 짚어보고, 사회적·정치적·성적 맥락을 훑어내려가면서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본다.1만 8000원.●우리에게 일본의 의미는?(김필동 등 지음, 살림 펴냄)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본이 걸어온 길과 오늘의 일본을 만든 정신을 살펴보기 위해 펴낸 살림지식총서 10권(186~195호). 각각 일본의 정체성과 서양문화 수용사, 전쟁국가 일본, 일본 누드 문화사, 주신구라,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의 내용을 담았다. 각권 3300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GS 방계계열사 분리 안막아”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공정거래법상 계열사로 묶인 회사를 운영중인 허씨 친인척 가운데 계열분리를 원하는 친인척들은 언제든지 분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허 회장은 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GS브랜드를 사용하지 않는 계열사들은 사실 GS그룹으로 편입되고 싶지 않았는데 공정법 때문에 무조건 편입됐다.”면서 “GS는 이들 계열사에 일체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분리여부는 전적으로 친인척들의 판단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허 회장은 또 “LG나 LS그룹과는 ‘신사협정’에 따라 사업영역이 중복되지 않도록 하고 신규영역 진출이 필요할 경우에는 양해를 구하겠다.”면서 “장기적으로는 겹칠 수도 있겠지만 LG가 진출하지 않는 다른 사업분야도 많은데 굳이 LG의 영역에 들어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자신했다. 2010년까지 신규사업 비중을 20%로 늘리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제조업 진출을 포함해 M&A 등을 통해 정유, 유통, 건설 등 기존 사업과 연관된 신규 분야에 진출할 계획”이라면서 “이미 중국에 진출한 홈쇼핑과 석유화학, 베트남 대규모 신도시 건설, 해외유전탐사 등 해외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등 매물로 나올 예정인 대우 계열사들의 인수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우건설은 GS건설과 중복되기 때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조선사업은 우리의 실력이 어느정도 되는지 먼저 점검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GS그룹은 지난 3월 브랜드 출범이후 단기간에 인지도는 물론 그룹이미지를 기대이상으로 끌어 올렸고 어려운 경영여건속에서도 상반기 경영실적이 목표를 무난히 달성하는 등 ‘순항’하고 있다는 평이다.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민노당 지도부 26일 방북 추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등 지도부는 오는 26∼30일 북한을 방문, 조선사회민주당 지도부와 평양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다. 민노당은 4일 여의도당사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이같이 결정하고, 조선사민당의 동의를 얻는 대로 구체적인 방북 프로그램을 준비키로 했다. 방북단 규모는 김 대표와 이정미 자주평화통일위원장 등 최고위원 4명과 천영세 의원단대표, 권영길 의원 등 국회의원 3명, 홍승하 대변인을 비롯한 당직자 6명 등 모두 15명이다. 당 관계자는 “조선사민당측이 우리가 제시한 방북 일정과 방북단 규모에 대해 굳이 변동을 요구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민노당은 육로 대신 중국 베이징과 백두산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노당은 이번 방문에서 민화협 북측대표인 조선사민당 김영대 위원장 등과 회담을 갖고 양당간 교류와 남북한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의 합의문 채택을 추진할 방침이다. 또 6·15 공동선언의 실천 방안을 논의하는 틀로서 공동토론회를 열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민족공조 과제, 남북정당 교류를 위한 양당의 역할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민노당은 지난달 중순 6·15선언 5돌 평양 통일대축전 기간에 조선사민당과 협의를 통해 이달 중 양당 지도부 회담을 평양에서 갖기로 합의한 바 있다.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평양 6·15축전 개막

    6ㆍ15공동선언 5주년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이 14일 저녁 평양의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남북 당국 대표단 단장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기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의 백낙청 남측 위원장과 안경호 북측 위원장, 곽동의ㆍ문동환 해외측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공동행사 북측 준비위원회 명예위원장인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과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유미영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도 참가했다. 백낙청 남측 위원장은 개막식 연설에서 “이 땅에서 전쟁위협과 군사적 대결을 걷어내고 올해를 평화와 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여는 해로 만들자.”고 말했다. 양형섭 북측 명예위원장은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민족끼리 힘을 합쳐 역사의 활로를 훌륭히 찾아내자.”고 강조했다. 남측 대표단은 밤 11시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박봉주 내각총리가 주최하는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앞서 남측 민간대표단은 북측과 함께 천리마동상∼김일성경기장 구간에서 민족통일대행진을 벌였으며, 빗속에서도 6만여 평양시민들이 환호했다. 평양공동취재단·서울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의회]‘아리수’ 역사성 누가 맞나

    [의회]‘아리수’ 역사성 누가 맞나

    서울시의 페트병 수돗물 브랜드인 ‘아리수’의 역사성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간의 논쟁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서울시의회(의장 임동규)는 25일 본관 3층 회의실에서 ‘광개토대왕 비문 역사왜곡 규명 포럼’을 개최했다. 여운건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포럼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울시의 페트병 수돗물 ‘아리수’와 관련된 역사성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김성구의원이 문제 제기 이번 포럼은 지난해 9월 서울시의회 김성구(한나라당 은평3)의원이 “아리수는 속임수라는 뜻의 순 우리말인데다 날조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 도용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브랜드 철회를 요구한 이후 두번째다. 말하자면 페트병 수돗물 아리수에 대한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간의 2라운드 공방인 셈이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김 의원은 “이번 포럼을 통해 ‘아리수’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고 위기에 있는 고구려사를 시민들에게 올바로 전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포럼에는 정병인 서울시의회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이도상 역사학박사, 정윤훈 국어고전 연구원 학술위원장, 염범식 한국우리민족사 연구위원, 오재성 우리민족사 연구회 대표 등 10여명의 전문가들이 주제발표에 나섰다. 특히 강동민 한국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김정권 한민족정통사상사 연구소장, 마만주 한국계보학회장 등 사학계의 원로들도 토론자로 대거 참여한 데다 방청객도 100여명에 달해 ‘아리수의 역사논쟁’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보였다. ●‘아리수’의 의미는?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는 수돗물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 홍보용으로 페트병 수돗물에 ‘아리수’라는 상표를 개발했다.‘아리수’ 상표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것이다. 지난해부터 서울시의 모든 행사 때나 수재민 구호 등에 무상 공급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시는 물병에다 ‘아리수는 고구려시대 한강을 일컫는 말로 수돗물의 새 이름입니다.’라고 표기했다. 시의 이같은 조치에 대해 처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서울시의회 김성구 의원이다. 김 의원은 지난해 9월 제151회 임시회 본회의 시정 질문을 통해 “아리수라는 상표는 역사왜곡의 우려가 있고 속임수라는 나쁜 뜻도 포함돼 상표로 부적절하다.”며 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서울시는 개명 요구에 대해 여러차례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등 상표 수호(?)에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아리’는 순수 우리말로 ‘물’이란 뜻이고, 옛 고구려 시대 한강의 이름으로 광개토대왕비문에도 기록돼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학계는 신중한 접근 요구 이날 포럼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정윤훈 국어고전연구원학술위원장은 “이 논쟁은 단순한 상표 이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역사적 문제, 민족자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아리수 페트병의 광고문구와 로고 선택은 재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아리수에 대한 이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어에 ‘아리’라는 말은 어떤 형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됐으니 수명(水名)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염범식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연구원은 “1920년 조선어대사전에서는 ‘아리수’가 ‘한때 속이는 수단’으로 적고 있고 1947년의 ‘표준한글사전’은 ‘속임수’,1992년 ‘우리말 큰 사전’ 등에는 ‘옛 한강이름’으로 추가 표기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사연구초’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등 여러 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됐다.”며 “아리수는 특정한 강이 아니고 여러 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고대 총학 ‘親日’ 10명 발표…연세대는 “반대”

    고대 총학 ‘親日’ 10명 발표…연세대는 “반대”

    고려대 총학생회가 28일 ‘친일 행적 전·현직 교수’ 1차 명단을 발표했다.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2∼4대 총장 유진오, 문학평론가 최재서, 사학자 이병도 등 10명이다. 그러나 고려대 안팎에서는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2주일의 짧은 검증 기간을 거쳐 명단을 발표한 데 따른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김성수·유진오·최재서·이병도 포함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날 “김성수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10,12대 교장을 지내며 일제의 전쟁 동원을 지지하고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썼다.”고 친일 인사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제2∼4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는 1943년 ‘매일신보’에 ‘병역은 큰 힘이다’를 쓰는 등 ‘문학을 통한 친일행적’을 선정이유로 들었다. 총학생회는 1953년부터 21년 동안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조용만은 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친일문학을 했으며, 장덕수는 ‘매일신보’에 학병지원을 촉구하는 ‘대용단을 내라’는 시론을 썼다고 밝혔다. 보성전문 출신으로 1955∼1956년 교우회장을 지낸 이병도는 식민사관총서인 ‘조선사’ 간행에 참여했고, 신석호는 ‘조선사 편수회’ 수사관으로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보성전문 6대 교장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고원훈,‘황국신민의 서사’를 집필한 이각종, 대동동지회 회장을 지낸 선우순,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주간으로 활동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최재서 등이 명단에 포함됐다. 총학생회는 “명단은 총학생회 및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간부 등 10명으로 구성된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조사하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전·현직 교수 3명의 자문을 받아 확정했다.”고 밝혔다. 총학생회는 다음 달 7일 비상총학생회를 열어 교내에 있는 김성수 동상의 철거 및 백서 발간 등 본격적인 활동 방향을 정할 계획이다. ●다른 목소리 낸 연세대 총학생회 그러나 연세대 총학생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이 학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백낙준 초대 총장의 동상 철거’요구에 “막연한 반일 감정을 토대로 한 여론몰이에 불과하다.”면서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탈정치’를 표방하는 비운동권인 연세대 총학생회는 “반일감정이라는 막연한 논리보다 체계적·학문적·교육적인 해결책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법”이라면서 “동상 철거보다 공적과 과오를 명시한 게시판을 설치하고 판단은 학우 개인에게 맡기자.”고 제안했다. 한편 당초 이달 말 친일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던 연세대 민노당 학생위는 명단 발표를 새달 초로 미뤘다. ●“섣부른 낙인찍기는 경계” 고려대 교수들은 총학생회의 발표에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외과의 한 교수는 “식민지라는 특수상황에서 한 사람의 행적을 학생들이 몇 주일 만에 재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섣부른 낙인찍기에 우려를 표시했다. 경제학과의 한 교수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뭔가 해보겠다는 학생들의 모습이 마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반면 고려대 잔재청산위 유지훈 집행위원장은 “친일행적이 명확하고 누구나 인정할 근거가 있는 사람만 선정했다.”면서 “앞으로 광복 이후 식민사관을 공고히 하는 데 동참했던 사람을 중심으로 신중하게 2,3차 명단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효용 박지윤기자 utility@seoul.co.kr
  •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본지가 입수, 소개한다.20세기 초 20여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선교사 안드레 에카르트가 독일 귀국후인 1923년에 발간한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이하 문전). 건국대 명예교수인 류태영(69) 박사가 이스라엘에서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원래는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가 쓸 수 있는 어학교재용으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 눈에 비친 조선의 이런저런 민담과 풍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관심을 끈다. 문전은 책 구성에서부터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를 위한 어학교재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양 부분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씌어져 있다. 한국어 부분 역시 물론 에카르트가 직접 쓴 것이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됴션언문(朝鮮諺文)’에서는 한글자모의 발음을 로마자(羅馬字)로 설명하는 등 문자체계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리고 45개의 조선어로 된 이야기들로 본문을 구성했다. 부록으로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의 일부가 실려 있고 독일어 번역을 위한 짧은 연습문 45개도 있다. 책 마지막에 저자 이름으로 ‘옥락안(玉樂安)’이라는 에카르트의 한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정가금오원’과 ‘불허복제’라는 가격과 저작권 보호 표시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본문 내용이다. 에카르트는 서언(緖言)에서 본문의 45가지 ‘니야기’(이야기)는 “조선 13도를 통하야 방방곡곡을 천답(踐踏)하며 연구에 연구를 가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에카르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교재를 읽다보면 어떤 이야기들이 1920년대 당시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지 엿볼 수 있다. ●만담과 해학 산을 넘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도적을 만나 주인양반의 돈을 다 빼앗긴 하인이 “오늘 길에서 도적을 만났다하면 그 양반이 내 말을 곧이 아니 듣고 나를 의심하겠으니 당신 가진 육혈포로 내 옷에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보람으로 주인 양반에게 빙거(憑據·증거를 대다)하겠다.”고 도적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미련한 도적은 그만 “철환(총알)이 없다.”고 대답해버렸다.‘헛총만 가진 것’을 안 하인은 빼앗긴 돈을 되찾고 도적을 흠뻑 두드려주고 간다.(세번째 이야기 ‘도적을 속인 진담’) 이처럼 문전에는 만담류의 우스갯소리가 20여개로 가장 많다. 그냥 만담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판소리풍의 걸죽한 입담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땡볕에 김매는 팔자에 울상짓던 아내한테 괄시받은 한 농부는 벼슬하겠다며 서울로 훌쩍 올라간다. 이 농부 어찌어찌 벼슬얻어 풍악을 울리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데 이 풍악소리를 듣고 내뱉는 아내의 말이 감칠맛이다.“우리 양반인지 닷돈 세뭉치인지, 벼슬인지 닭의 벼슬인지, 군수인지 국수인지, 감사인지 곳감인지 한다고 시골인지 서울인지 가더니 아니오니 이 노릇을 장차 어찌하잔 말이냐.” ●조선의 풍습 조선의 풍습에 대한 글도 찾아볼 수 있다. 풍습에 대해서는 에카르트의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잘 드러난다.‘조선에서 혼인하는 법’에서는 에카르트가 마치 결혼식을 옆에서 지켜본 듯 신랑·신부의 행색부터 결혼식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 조선의 풍습을 잘 모르는 외지인과 조선사람간의 대화체로 꾸며진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에서는 성주·터주 등 전통신앙에서부터 종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제사 풍습에 대해 순차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 어학교재인데다 각 지방의 얘기들을 채록하는 형식이다보니 정치나 사회문제 같은 민감한 소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서울구경’편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김 생원이라는 사람의 서울 유람기가 담겨져 있다. 하루는 김생원이 임금 사는 곳을 보겠다며 경운궁으로 가는데 당시 경운궁에 유폐돼 있던 태황제(고종)를 두고 한 경인(京人)과 나눈 대화가 이렇다.“그러면 국사를 시방 누가 상관하오.”라고 김 생원이 묻자 “예 일본 통감부에서 모든 정사를 다 상관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그전보다 국민간에 모든 정사가 밝게 됩니까.”라고 묻자 “예 그 전보다 백성들이 참 평안히 살고 국사가 개명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한다.‘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된 한 촌부의 질문이 묘한 느낌을 준다. 또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가 겪는 고초도 ‘임금이 피란함’편에 상세히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카르트 신부는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선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조선어를 익힌 뒤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1928년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20여년에 이르는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뮌헨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언어, 미술, 음악, 무용,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글을 남겼다. 한국인 제자도 많이 길러냈는데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전혜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929년 쓴 ‘조선미술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조선 미술에 대한 최초의 통사 형식 서술이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거대하지만 실속은 없는 중국미술, 오밀조밀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일본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은 단아하고 소박한 자연미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다 개개의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의 미를 추출해내는 접근법을 쓰고 있어 책에 실린 500여점 도판은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카르트는 그다지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사가 2003년에서야 열화당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스라엘 유학중 ‘…文典’ 입수한 류태영박사 국내에서 이스라엘 전문가로 손 꼽히는 류태영 박사는 이 문전을 1973년 이스라엘 유학시절 히브리대 중앙도서관 서고에서 처음 접했다. 히브리대 중앙도서관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에카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단다. 류 박사는 “독일 선교사인데도 또록또록한 한글로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잘 풀어내서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읽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골치가 아프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책을 자주 읽다가 아예 복사본까지 마련해뒀다. 귀국한 뒤 이 내용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해줬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 최근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유 박사는 “출판사에 물어보니 펴낸 지 80년이 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문으로 풀어내 출간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히브리 도서관에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세계 각지에 흩어 살던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도 엄청난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요즘은 ‘우담발라’가 꽤 자주 피는 것 같다. 연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도 충북 단양군청과 충남 논산 성불사에 우담발라가 피었다고 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법화경’에 보면 우담발라는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성인이 출현할 때만 핀다고 한다.3000년에 겨우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실상 풀잠자리알 또는 곰팡이에 불과하단다. 어쨌든 우담발라가 피어 있는 성불사의 금륜 스님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을유년에는 평화와 번영,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담발라. 작디 작은 몇십 송이 꽃인가, 곰팡이에 스님은 참 크고 묵직한 기원을 매달았다. 그런데 나는 우담발라가 피면 등장한다는 전륜성왕과 ‘정감록’의 진인왕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세속적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경을 결집한 아소카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심이 깊고 태평성대를 실현할 왕이 바로 전륜성왕인데 민중은 진인왕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기대했다. 정감록의 진인은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을 헤쳐 간 민중의 꿈을 형상화시킬 의무를 졌다. 진인왕은 조선왕조의 기득권층인 양반을 벌주고 신분구조를 뒤엎으며, 서구열강과 그들의 종교를 물리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민중의 구세주였다. ●진인은 못된 양반을 생지옥으로 1785년 정조 9년 또 한 차례 정감록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나라가 셋으로 쪼개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유씨, 장씨, 김씨가 삼국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 뒤 나라를 통일할 진인(眞人)은 제주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 숨어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그 진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이미 서씨와 정씨 두 사람이 진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의 허물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선악적(善惡籍)’을 작성중이라고 했다. 18세기말 민중이 진인의 출현에 걸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게 그 ‘선악적’이란 장부다. 딱히 양반의 허물만 기록한다고 명기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민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들 여겼을 것이다. 진인은 민중의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뀌어도 무식한 아랫사람들로서야 당장 무슨 벼슬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저 양반놈들 망하는 꼴 좀 보자.’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였다. 여러 지방에서 양반들은 동약(洞約)이나 향약을 실시해 장부를 비치해두고 말 안 듣는 하층민들을 기록해 뒀다가 벌을 줬다. 윗사람을 몰라본다, 불효한다,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등의 죄명이 양반들의 ‘선악적’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인이 민중의 편에서 선악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진인의 인기를 더욱 높였을 법하다. 통상적으론 양반 편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양반을 벌줄 수 있는 선악적이라니 얼마나 통쾌하랴. 진인의 상벌은 현세에서 시행된다는 점도 민중으로선 무척 달가운 일이었다. 자기들은 별다른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약자들을 괴롭히며 놀고먹는 양반, 놀부 같은 그들이 밉고 싫었을 것이다. 민중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런 못된 양반들이 생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지옥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옥(범어 나라카·Naraka)은 사후세계란 뜻인데 그 참혹한 광경은 ‘목련경’에 자세하다. 석가모니의 큰 제자 목련존자의 지옥방문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맹인 사람들도 지옥도란 종교화를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불교의 지옥은 종류도 많아서 각기 8대 열지옥(뜨거운 지옥)과 한지옥(추운 지옥)이 있고, 그 아래 또 32개 소지옥이 있다고 한다. 진인은 선악 장부에 기록된 악인을 문자 그대로 생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푸른 옷(靑衣)은 천주교 신부요, 서구열강이다 진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어찌 보면 좀 뜬금없는 소리 같기도 한데, 진인은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퇴치해야만 했고 서구열강도 물리쳐야 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일행이 거기 와 있던 예수회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였으나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어 본격적인 신앙운동이 벌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조정은 잔뜩 긴장하여 천주교를 엄금하였지만 그 세력은 제법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층민들의 일부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정의 ‘계몽’도 한몫했지만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게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두려움은 정감록에도 감지된다.1923년판 정감록의 일부인 ‘무학비결(無學秘訣)’에서 푸른 옷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데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여태 한반도엔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성직자 즉, 신부들이 침략자란 것이다.‘푸른 옷’은 본래 좀더 먼저 쓰인 ‘도선비결(道詵秘訣)’에서만 하더라도 미지의 외부인으로 해석될 뿐이었다.‘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고 했다. 하필 왜 푸른 옷인지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가 천주교의 국내 활동이 심각성을 띠게 되자 푸른 옷은 어느덧 서양신부로 비화됐다. 19세기 초에는 서양 함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여론이 비등했다. 연달아 천주교박해사건이 터졌으며 국내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도 처형되었다.19세기 중반에는 그 여파로 프랑스 함대가 공격했고 설상가상 통상문제로 미국함대도 쳐들어 왔다. 그러자 이제는 서구열강 자체가 침략의 장본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다.‘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역사란 아이러니요, 거기서 나는 또 정감록이 갖는 현실 적응력을 본다. 서양선박의 출몰을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해도진인설이 등장했었는데(연재3호 참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엔 거꾸로 해도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서양함대요, 서양신부였으니 말이다. ●동학의 최제우 새 세상 구현할 진인으로 1859년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란 이름의 새 종교를 만들었다. 그 뒤 1894년 동학은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탐관오리를 내쫓아 백성을 구하겠다며 갑오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한 마디로 동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외세란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바탕 위에 동학은 새 세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다. 최제우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에게서 진인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최제우란 존재는 새 세상을 구현할 초인이었다. 진인은 서양세력의 위협에서 민중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가져다줄 구세주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진인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씨, 두씨 및 곽씨 성을 가진 3장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각각의 성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이 ‘토정가장결’에 나와 있다. “곽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과 서남 오랑캐를 무찌른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돕고 이씨를 공격한다. 그러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나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인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다 두어 줄밖에 안 되지만 숨가쁜 격변, 그것도 국제적인 변화를 예언한다. 하층민중이 국제정세에 민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과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조선의 이씨왕조를 무너뜨린다고 한 점이다. 먼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를 극복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내부문제에 착수한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다 아는 대로 일·청 두 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한국을 괴롭힌 장본인으로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19세기말 한국에 진출, 내정을 간섭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그들 두 나라도 없애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멸망에 대한 기대가 커, 일본 정벌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정감록의 한 파트인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엔 호랑이해부터 뱀해 사이 진인이 일본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고 했다. 호랑이는 섬나라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이며 뱀은 용과 더불어 성인, 또는 왕을 상징한다.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를 호랑이로 인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포항과 장기 앞바다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곳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등대가 세워지면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죽이려는 계략이라며 등대를 당장 허물라고 했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막강한 일본을 이기려면 그런 주술에라도 호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언서에 언급된 일본정복설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산 미곡을 수입했고, 값싼 면직물을 한국으로 대량 수출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민중은 전례 없는 쌀 부족에 시달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산 면직물을 당해낼 길 없어 일반 농가의 면포(綿布) 생산은 위축돼 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뒤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예언서에는 그런 역사적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던 민중의 열망이 표현돼 있다. ●진인왕과 보양법, 밀교 그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을 이룰 진인왕에 관해 정감록의 일부인 ‘동차결’은 이렇게 점치고 있다.‘태조의 성은 정(鄭), 이름은 홍도(紅桃), 자는 정문(正文), 무오생이다. 섬 가운데 평실에서 나와 계룡산에 건국한다.’ 정진인의 이름 ‘홍도’(붉은 복숭아)는 도교적이다. 복숭아는 수명과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그 빛이 붉다면 복숭아 중에서도 일품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름은 ‘정문’, 문(文)을 바로잡는다고 돼 있다. 통치 질서와 윤리도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진인은 유교적 덕성을 겸비한 존재다. 무오생이라 함도 의미가 있다.10간의 5번째인 ‘무(戊)’와 12지의 7번째인 ‘오(午)’는 각기 중간의 홀수, 즉 중양(重陽)이다. 진시황의 생일도 단오 또는 중양이었다. 이런 남성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다. 진인왕은 도교적 성격이 강한 만큼 도교서적에 나오는 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도교에선 양기, 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면 절로 진인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양생법이다. 불교의 분파인 밀교에도 거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이 지은 ‘방중보익(房中補益)’을 보면, 정액을 잃지 않고 93명의 여성과 성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몸에 내재한 이성성(二性性)을 살리게 돼 진인이 된다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밀교는 물론 힌두교에서도 다 그렇게 봤다. 정액을 몸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변화시켜 뇌로 보낼 수만 있다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사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를 빙자해 간음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들로서는 진인 될 수행을 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1937년엔 백백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주 전해룡은 간음과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무려 350명의 남녀신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의 특징을 ‘동차결’은 이렇게 적어놓았다.‘여러 대를 두고 내려오던 양반은 상사람이 되며, 상사람은 오히려 양반이 된다.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재를 뽑아 쓴다.’ 짧은 내용이지만 정감록을 믿던 민중에겐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진인왕이 평등사회를 실현한다고 볼 순 없지만,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뒤엎고자 한 민중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상사람이 양반되고 양반이 상사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인왕은 유불선 삼교합일의 바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불교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재를 불교에서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나는 조선후기 민중이 성리학적 지배 이념에 반발해 불교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음을 본다. 조선말의 혁명가 김옥균도 불교신자였으며, 이동인과 같은 개화승려도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융성시킬 진인왕은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은 모두 4명이다. 공교롭게도 예언서에서 진인왕에게 왕업을 도울 세 아들이 있다고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신라의 진평왕도 아들의 이름을 동륜, 금륜 등으로 불렀다. 그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봤다는 증거다. 전륜성왕 가운데 첫 왕은 철륜왕인데 진인왕이 그에 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이 차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신자로서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진인왕의 협력자인 세 아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우담발라가 핀다고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미 우담바라는 피었다. 과연 전륜성왕은 오는 것일까. 전륜성왕이 가진 7개의 보물 중 하나인 거사보(居士寶)는 고아, 노인, 병자 등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더러 전륜성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예언서 속의 진인왕은 서양열강, 중국, 일본을 평정하고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감록은 당대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었다. 그 예언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안이란 점에서 정감록은 예언서로서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소설과 시기(詩妓)의 것에는 감정을 거짓한 흔적이 없습니다. 만일 공자의 사무사(詩無邪)라는 시에 대한 평이 옳은 말씀이라면 이 점에서 아낙네들의 노래는 낙제이고 기생의 시는 급제외다.” 시인 김억의 말대로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조선사회에서도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시어로 노래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기생이다.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서 해어화(解語花).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슬픈 시였다. 널리 알려진 황진이나 그와 쌍벽을 이뤘던 매창, 강릉기생 홍장, 경성기생 홍랑, 평안도 성천 기생 부용 등 옛 기생들은 문학을 비롯해 음악, 춤 등 못하는 게 없었던 당당한 예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당대의 전문직 여성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기생조합을 거치면서 이들의 삶은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만 왜곡·폄하돼,‘기생’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센터 전시장에 마련된 ‘기생’전은 시·서·화의 재능과 지조를 갖춘 교양인으로서의 기생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색다른 전시다. 기생과 관련된 문학이나 인물 중심의 에피소드는 많지만 시각예술 차원에서의 해석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게 현실.(주)서울옥션이 주최한 이번 기획전은 기생이라는 단일 주제로 열리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전시작품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제작된 엽서와 원판사진 500여 장과 평양 명기 소교(小橋)의 ‘묵죽도’와 죽향이 그린 ‘묵란도’, 초상화가 동강 권오창이 그린 기생 초상, 성행위를 묘사한 동경과 향갑노리개, 비녀, 뒤꽂이 등 장신구와 화장구들로 이뤄졌다. 엽서와 사진들 속에는 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는 기녀의 모습이나 수업을 받는 모습 등이 담겨 있어 당대 풍속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기생의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도 눈길을 끈다. 기생방에서 촬영한 알몸의 여성의 사진 위에 한복연구가 김혜순의 기생한복 이미지를 입힌 사진작가 배준성의 ‘화가의 옷-기생Ⅰ’이 대표적인 작품. 논개의 충혼을 달래주는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12호)와 관련된 영상, 운보 김기창이 신윤복의 그림을 패러디한 ‘청록산수’, 윤석남의 설치조각 등도 나와 있다.2월 13일까지.(02)395-0331.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한국 노동운동에서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양동생(52)’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부의 폭압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987년 대우조선 초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돼 3년간 강성 노조를 이끌었다. 연이은 분신 등 투쟁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대우조선사태를 보려고 9시뉴스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을 정도다. 대우조선 투쟁을 보도하기 위해 국내 취재진은 물론 외신기자들까지 거제 바닷가에 다 몰렸다. 노동계의 동투(冬鬪)가 급피치를 올릴 무렵 많은 이들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투쟁강도가 세면 셀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접고 개척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의 소재지를 알아냈다. 통화가 되기 무섭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대로 서울 양천구 신월2동 한양중앙교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이 교회 담임목사였다. ●운명과도 같았던 노동운동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강성 노조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첫인상이 그처럼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양 목사는 그저 옛날 일이라며 이내 인터뷰에 응했다.“아마 그때가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시기일 겁니다. 경제 중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특혜를 줘서라도 기업인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상대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거셌습니다.” 양 목사는 당시 시대상황을 기업인에게는 특혜, 노동자에게는 탄압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했다. 그는 노동법을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지만 탄압국면을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고 했다. 임시 노조위원장에 이어 87년 8월 대우조선 초대 직선 노조위원장에 선출된 그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노조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두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싸웠습니다. 결국 거제군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신고필증을 받아냈지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로 대우조선 노조가 설립된 것입니다.”이를 계기로 현대 등 대기업 중심의 노조설립 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투쟁원칙에 충실했다. 노조 설립은 회사를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양 목사는 “졸다가 걸리면 바로 징계를 받고 뼈 빠지게 일해도 분배가 안되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할 투쟁대상이었다.”며 인권보호와 작업환경 개선, 임금 인상 등을 주요 교섭안건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가가 있어야 회사가 있고 회사가 있어야 조합이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우조선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대정부 투쟁으로 투쟁의 본질이 급격히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이를 주사파의 개입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자신의 원칙이 대중에 의해 휘둘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감옥에서 쉬고 싶을 정도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과의 일화도 공개했다.“88년 봄으로 기억합니다만 김 회장이 ‘게스트하우스’(영빈관)에서 독대를 요구했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대우조선 때문에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대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서 정부가 시범 케이스로 대우조선을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합디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요.” 양 목사는 이런 김 회장을 새벽 4시까지 설득했다고 말했다.“당신이 좌절하면 안된다. 존경받는 기업가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이후 그는 3만여 조합원을 모아놓고 건전한 노조, 합리적인 노조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 75%의 조합원으로부터 찬성 서명을 받아냈다. 이어 DJ(김대중)·YS(김영삼)·JP(김종필) 등 야당지도자를 차례로 만나 건전한 노조로의 탈바꿈을 약속하고 회사를 없애려는 기도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도 다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임기1년 남기고 목회자의 길로 89년 12월 양 목사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집사였던 양 목사는 노조위원장 임기가 1년여 남았지만 떠날 것을 결심한다. 노동운동이 어느정도 정착된 만큼 목회자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양 목사는 당시 ‘서울로 올라가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고 밝혔다. 이 때부터는 노동운동과도 절연했다.TV도 없애버리는 등 세상일과 등을 졌다. 언론과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물리쳤다. 본지와의 인터뷰가 노조위원장을 그만둔 뒤 처음이라고 밝혔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연세중앙교회에 둥지를 틀었다.10년간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안수집사, 전도사, 목사고시를 거쳐 99년 11월 양천구 신월2동에 한양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에서 태어난 그는 YS와 같은 고향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를 못갔다. 나중에 방송통신고를 졸업했다.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시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군에 다녀온 뒤 77년 대우조선의 전신인 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나 한국의 노동판을 완전히 뒤바꾸는 중심 인물이 된다. 양 목사는 노동운동은 ‘공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독불장군식으로 해서는 다 깨진다는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조차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고 비판한 대목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노동계에 충고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seoul.co.kr
  • [책꽂이]

    |일반| ●가치혁명과 사회시스템 개조론(사카이야 다이치 지음, 이윤정 옮김, 아이필드 펴냄) 20세기가 노력과 조직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개성과 브랜드의 시대로 정의하고, 새시대에 걸맞은 가치관을 모색한다.1만 5000원. ●타키투스의 연대기(타키투스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 펴냄)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로마 역사서.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네로 황제까지 55년간의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를 담고 있다.2만 8000원. ●어머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신현림 등 지음, 월간조선사 펴냄) 신현림, 장상, 신달자, 강부자, 윤무부, 이계진, 하일성, 복거일 등 각계각층의 명사 43명이 전하는 ‘나의 어머니’ 이야기.9500원.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신광영 지음, 을유문화사 지음) 장기화된 불황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의 전환 속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계급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했다.1만 2000원. |실용| ●10가지 생존의 기술(조길선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가 밑바닥 시절부터 세계 최대 솔루션기업 오라클의 상임이사까지, 한 한국 여성의 생생한 성공담과 생존 전략.9500원. ●성공한 커리어의 5가지 패턴(제임스 시트린·리처드 스미스 지음, 신시란·서은경 옮김, 물푸레 펴냄)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라’‘관대한 리더십을 보여라’‘승인 패러독스를 극복하라’등 성공한 경력의 5가지 패턴.1만 2500원. |유아·아동| ●꾸러기, 학교에 가다!(조나단 런던 지음, 송민영 옮김, 애플트리태일즈 펴냄) 영어CD가 들어있는 그림동화. 개구리가 주인공인 구연동화를 우리말과 영어로 섞어 들으며 언어감각 익히기.3세 이상.9000원. ●색깔을 훔치는 마녀(이문영 지음, 비룡소 펴냄) 색의 혼합원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창작그림책. 하얀색에 질린 꼬마마녀가 마술봉으로 숲의 색깔을 모두 빼앗는데….4세 이상.9000원. |어린이·청소년| ●꿀벌의 일생과 역사(찰스 미쿠치 지음, 연진희 옮김, 주니어김영사 펴냄) 꿀벌의 생태와 역사, 쓰임새 등을 두루 파악할 수 있는 정보그림책 시리즈.‘개미의 일생과 역사’‘땅콩의 일생과 역사’가 함께 나왔다. 초등저학년.8500원. ●행복한 일기쓰기 365(조혜원 지음, 삼성당i 펴냄) 아이들에게 일기쓰기 습관을 다져주는 실용서. 작가가 어린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날짜에 맞춘 적절한 글감을 귀띔해준다. 초등생.1만 2000원.
  • 그림공부 하고 역사도 배우고

    보림출판사가 펴낸 ‘사계절의 생활 풍속’은 옛 풍속화를 통해 엿보는 조선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은이는 민속화 연구 전문가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 조선 풍속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대표적 풍속화가의 작품 50여점이 천연색 도판으로 실렸다. 예컨대 김홍도의 ‘경작도’(호암미술관 소장)를 펼쳐보인 뒤 조선시대의 농부 이야기까지 풀어내는 식이다. ‘재미없는 줄 알았던 옛 그림을 이렇게도 감상할 수 있구나!’ 무릎을 치게 될 사려깊은 풍속화집이다. 초등3년 이상.1만 8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호열자,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질병은 저마다 표상을 가지고 있다. 결핵은 아름다운 슬픔의 병, 두창은 두신(痘神)의 왕림, 페스트는 돌연한 습격, 에이즈는 동성애의 질병…. 그렇다면 콜레라는 무엇으로 표상될까. 공포 그 자체다.“살아서 앓지 않으면 죽어 무덤 속에서라도 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병이 콜레라다. 질병사가들은 이 콜레라의 공포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질병으로 페스트를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콜레라를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의미에서 호역(虎疫) 또는 호열자(虎列刺)로 옮긴 데서도 콜레라의 무서움을 읽을 수 있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호열자라는 공포의 대명사를 내세워 과거 전통시대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의료생활과 의학사를 다룬다. 동아시아 의학사를 전공한 저자(44·한국과학기술원 연구교수)는 감로탱에 나타난 전근대 사람들의 생로병사와 의료와 관련된 일상생활 모습을 찾아내고, 일제시대 보건 관련 자료 등 각종 정보를 동원해 ‘몸과 의학의 한국사’를 써냈다. 옛 조선사람들은 괴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했을까.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괴질은 하늘이 노해 인간에게 벌을 내린 것으로 간주됐다. 전한시대 경학자 동중서가 ‘춘추번로’라는 참위서에서 제창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조선 순조 때 창궐한 괴질 호열자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임금은 괴질을 천견(天譴) 즉 하늘의 꾸짖음으로 보고, 하늘을 달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죄수를 풀어줬으며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또 민간에서는 귀신이 무서워한다는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가 하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영력이 있는 복숭아 가지를 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전근대 우리 의료생활사의 한 풍경이다. 책은 지석영의 ‘우두법’과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실제보다 과대 포장돼 신화화한 과정도 살펴 관심을 모은다.1만 78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고구려사 국제학술회의 개최

    고구려사 국제학술회의 개최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영토의 3분의2와 인구의 4분의3이 중국에 흡수됐다.이렇게 흡수된 70만∼80만 고구려인은 중국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해 한족(漢族)문화에 흡수됐고,고구려 산성터 등 문화유적도 대부분 중국의 영토에 있으므로 고구려 문화 역시 중국이 계승했다.”(쑨진지) “맥이계(貊夷系)인 고구려는 한계(韓系)인 백제·신라와 다른 종족이다.4세기 이후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에 진출한 것은 중국의 일개 민족이 한반도에 침입해 중국의 식민정권을 건립한 것에 불과하다.”(쑨훙) 중국 동북공정의 최대 이론가로 꼽히는 쑨진지(孫進己·73) 중국 선양(瀋陽) 동아연구중심 주임과 그의 딸인 쑨훙(孫泓) 연구원은 16일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이 서울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하며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임을 거듭 강조했다. 쑨 주임은 1980년대 초반부터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제창하며 일관되게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해온 인물.이날 학술회의에서의 주장은 기존의 논지를 재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역사계승의 문제는 토지와 인구,문화를 얼마나 계승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쑨진지의 주장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역사관이란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이날 회의에서는 비판적인 견해가 쏟아졌다.토론자로 나선 임기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장은 “‘고구려의 역사적 귀속은 고구려가 당시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예속되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쑨진지의 주장은 영토중심주의적 사고일 뿐”이라며 “역사의 계승이란 역사적 맥락의 계승이며,과거 역사의 계승과 영토적 주권은 분명하게 구분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임 실장은 또 “역사의 계승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역사서의 편찬”이라고 전제,“중국의 사서에선 고구려가 동이전에 수록돼 있으며 고구려 멸망 후 그것의 계승을 표방하는 사서 편찬이 없었지만,한국의 경우 ‘삼국사기’ 이래의 고구려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사서의 편찬이 통일신라와 고려,조선,근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학자들의 ‘패권주의적’ 논리는 북한 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북한 학자들은 학술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논문을 보내 중국측의 논리를 비판했다.북한의 조희승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구려사 연구실장은 돌로 산성을 쌓고 싸우는 고구려의 전투방식은 동방에서는 한반도에만 있다는 사실 외에 고구려인의 온돌과 발방아 사용,오곡 중심의 식생활 등은 한민족의 고유한 풍습이란 점을 들어 고구려가 한민족의 국가임을 강조했다.또 강세권 역사연구소 연구원은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예맥계와 백제,신라 등 한계의 구분은 거주 영역에 따라 편의상 구분한 것일 뿐 그들은 어디까지나 고조선의 후예라고 밝혔다.김유철 김일성종합대 교수는 한사군,특히 그 중심을 이룬 낙랑군이 요동지방에 있었음을 강조하며 중국의 낙랑군 평양설을 비판했다.이들 북한 학자들의 주장은 남북한 학자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공동 대응,학술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호주 시드니대의 판카지 모한 교수는 “광개토왕비가 그동안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외피에 둘러싸여 1세기 동안이나 얼어붙은 채 묻혀 있었다.”며 광개토왕비를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했다.광개토왕비는 왕권의식과 중국·인도의 금석학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사 속의 고구려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한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파문 이후 처음 열리는 고구려사 국제학술대회로,한국·중국·일본·미국·러시아·몽골·호주 등 7개국이 참여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유시민의원 “부친 일제때 만주 소학교 근무”

    유시민의원 “부친 일제때 만주 소학교 근무”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였다.여야간 친일진상규명 논란이 불거진 뒤로 신기남 전 의장,이미경 의원에 이어 여권 인사로는 세번째다.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는 지난 4일 “유 의원의 선친 유태우씨가 일제 치하에서 교사를 지냈고,백부 유석우씨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 면장을 지냈다.”고 보도했다. 이에 유 의원은 8일 오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백부가 면장을 한 것은 맞지만 선친은 일제 때 교사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는 “처음 듣는 얘기라 집안 어르신들께 확인해본 결과 선친은 해방 직후 미 군정이 교사요원을 공채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 후 경주여중에 부임했다.”며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1943년경 만주 소학교에서 잠시 근무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소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부에 대해서는 “내남면 또는 인근 산내면 면장을 1년 정도 하셨다.”고 밝히고 “백부는 평생 한학과 조선사를 연구하신 개명한 유학자”라고 덧붙였다. 유 의원이 반박글을 올리자 이날 브레이크뉴스측은 다시 글을 올려 “유 의원의 선친은 1943년 ‘만주국민의급학교(소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고,당시 나이 23세였다.”면서 “소학교에서 일한 것은 알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는 유 의원 주장은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경북교육청에 유 의원 선친의 인사기록이 보관돼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익명을 요구한 교육청 관계자는 ‘유태우라는 동명이인 4명 중 한 명이 만주 소학교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고,그 직책은 훈도로 적혀 있다.’고 시인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북교육청 측은 본지의 확인 요청에 “유태우씨의 기록은 전혀 없으며,브레이크뉴스측이 취재한 사실도 없다.”고 부인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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