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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요즘은 ‘우담발라’가 꽤 자주 피는 것 같다. 연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도 충북 단양군청과 충남 논산 성불사에 우담발라가 피었다고 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법화경’에 보면 우담발라는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성인이 출현할 때만 핀다고 한다.3000년에 겨우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실상 풀잠자리알 또는 곰팡이에 불과하단다. 어쨌든 우담발라가 피어 있는 성불사의 금륜 스님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을유년에는 평화와 번영,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담발라. 작디 작은 몇십 송이 꽃인가, 곰팡이에 스님은 참 크고 묵직한 기원을 매달았다. 그런데 나는 우담발라가 피면 등장한다는 전륜성왕과 ‘정감록’의 진인왕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세속적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경을 결집한 아소카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심이 깊고 태평성대를 실현할 왕이 바로 전륜성왕인데 민중은 진인왕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기대했다. 정감록의 진인은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을 헤쳐 간 민중의 꿈을 형상화시킬 의무를 졌다. 진인왕은 조선왕조의 기득권층인 양반을 벌주고 신분구조를 뒤엎으며, 서구열강과 그들의 종교를 물리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민중의 구세주였다. ●진인은 못된 양반을 생지옥으로 1785년 정조 9년 또 한 차례 정감록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나라가 셋으로 쪼개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유씨, 장씨, 김씨가 삼국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 뒤 나라를 통일할 진인(眞人)은 제주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 숨어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그 진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이미 서씨와 정씨 두 사람이 진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의 허물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선악적(善惡籍)’을 작성중이라고 했다. 18세기말 민중이 진인의 출현에 걸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게 그 ‘선악적’이란 장부다. 딱히 양반의 허물만 기록한다고 명기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민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들 여겼을 것이다. 진인은 민중의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뀌어도 무식한 아랫사람들로서야 당장 무슨 벼슬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저 양반놈들 망하는 꼴 좀 보자.’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였다. 여러 지방에서 양반들은 동약(洞約)이나 향약을 실시해 장부를 비치해두고 말 안 듣는 하층민들을 기록해 뒀다가 벌을 줬다. 윗사람을 몰라본다, 불효한다,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등의 죄명이 양반들의 ‘선악적’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인이 민중의 편에서 선악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진인의 인기를 더욱 높였을 법하다. 통상적으론 양반 편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양반을 벌줄 수 있는 선악적이라니 얼마나 통쾌하랴. 진인의 상벌은 현세에서 시행된다는 점도 민중으로선 무척 달가운 일이었다. 자기들은 별다른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약자들을 괴롭히며 놀고먹는 양반, 놀부 같은 그들이 밉고 싫었을 것이다. 민중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런 못된 양반들이 생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지옥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옥(범어 나라카·Naraka)은 사후세계란 뜻인데 그 참혹한 광경은 ‘목련경’에 자세하다. 석가모니의 큰 제자 목련존자의 지옥방문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맹인 사람들도 지옥도란 종교화를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불교의 지옥은 종류도 많아서 각기 8대 열지옥(뜨거운 지옥)과 한지옥(추운 지옥)이 있고, 그 아래 또 32개 소지옥이 있다고 한다. 진인은 선악 장부에 기록된 악인을 문자 그대로 생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푸른 옷(靑衣)은 천주교 신부요, 서구열강이다 진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어찌 보면 좀 뜬금없는 소리 같기도 한데, 진인은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퇴치해야만 했고 서구열강도 물리쳐야 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일행이 거기 와 있던 예수회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였으나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어 본격적인 신앙운동이 벌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조정은 잔뜩 긴장하여 천주교를 엄금하였지만 그 세력은 제법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층민들의 일부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정의 ‘계몽’도 한몫했지만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게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두려움은 정감록에도 감지된다.1923년판 정감록의 일부인 ‘무학비결(無學秘訣)’에서 푸른 옷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데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여태 한반도엔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성직자 즉, 신부들이 침략자란 것이다.‘푸른 옷’은 본래 좀더 먼저 쓰인 ‘도선비결(道詵秘訣)’에서만 하더라도 미지의 외부인으로 해석될 뿐이었다.‘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고 했다. 하필 왜 푸른 옷인지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가 천주교의 국내 활동이 심각성을 띠게 되자 푸른 옷은 어느덧 서양신부로 비화됐다. 19세기 초에는 서양 함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여론이 비등했다. 연달아 천주교박해사건이 터졌으며 국내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도 처형되었다.19세기 중반에는 그 여파로 프랑스 함대가 공격했고 설상가상 통상문제로 미국함대도 쳐들어 왔다. 그러자 이제는 서구열강 자체가 침략의 장본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다.‘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역사란 아이러니요, 거기서 나는 또 정감록이 갖는 현실 적응력을 본다. 서양선박의 출몰을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해도진인설이 등장했었는데(연재3호 참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엔 거꾸로 해도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서양함대요, 서양신부였으니 말이다. ●동학의 최제우 새 세상 구현할 진인으로 1859년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란 이름의 새 종교를 만들었다. 그 뒤 1894년 동학은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탐관오리를 내쫓아 백성을 구하겠다며 갑오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한 마디로 동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외세란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바탕 위에 동학은 새 세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다. 최제우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에게서 진인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최제우란 존재는 새 세상을 구현할 초인이었다. 진인은 서양세력의 위협에서 민중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가져다줄 구세주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진인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씨, 두씨 및 곽씨 성을 가진 3장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각각의 성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이 ‘토정가장결’에 나와 있다. “곽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과 서남 오랑캐를 무찌른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돕고 이씨를 공격한다. 그러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나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인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다 두어 줄밖에 안 되지만 숨가쁜 격변, 그것도 국제적인 변화를 예언한다. 하층민중이 국제정세에 민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과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조선의 이씨왕조를 무너뜨린다고 한 점이다. 먼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를 극복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내부문제에 착수한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다 아는 대로 일·청 두 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한국을 괴롭힌 장본인으로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19세기말 한국에 진출, 내정을 간섭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그들 두 나라도 없애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멸망에 대한 기대가 커, 일본 정벌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정감록의 한 파트인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엔 호랑이해부터 뱀해 사이 진인이 일본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고 했다. 호랑이는 섬나라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이며 뱀은 용과 더불어 성인, 또는 왕을 상징한다.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를 호랑이로 인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포항과 장기 앞바다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곳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등대가 세워지면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죽이려는 계략이라며 등대를 당장 허물라고 했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막강한 일본을 이기려면 그런 주술에라도 호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언서에 언급된 일본정복설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산 미곡을 수입했고, 값싼 면직물을 한국으로 대량 수출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민중은 전례 없는 쌀 부족에 시달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산 면직물을 당해낼 길 없어 일반 농가의 면포(綿布) 생산은 위축돼 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뒤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예언서에는 그런 역사적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던 민중의 열망이 표현돼 있다. ●진인왕과 보양법, 밀교 그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을 이룰 진인왕에 관해 정감록의 일부인 ‘동차결’은 이렇게 점치고 있다.‘태조의 성은 정(鄭), 이름은 홍도(紅桃), 자는 정문(正文), 무오생이다. 섬 가운데 평실에서 나와 계룡산에 건국한다.’ 정진인의 이름 ‘홍도’(붉은 복숭아)는 도교적이다. 복숭아는 수명과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그 빛이 붉다면 복숭아 중에서도 일품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름은 ‘정문’, 문(文)을 바로잡는다고 돼 있다. 통치 질서와 윤리도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진인은 유교적 덕성을 겸비한 존재다. 무오생이라 함도 의미가 있다.10간의 5번째인 ‘무(戊)’와 12지의 7번째인 ‘오(午)’는 각기 중간의 홀수, 즉 중양(重陽)이다. 진시황의 생일도 단오 또는 중양이었다. 이런 남성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다. 진인왕은 도교적 성격이 강한 만큼 도교서적에 나오는 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도교에선 양기, 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면 절로 진인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양생법이다. 불교의 분파인 밀교에도 거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이 지은 ‘방중보익(房中補益)’을 보면, 정액을 잃지 않고 93명의 여성과 성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몸에 내재한 이성성(二性性)을 살리게 돼 진인이 된다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밀교는 물론 힌두교에서도 다 그렇게 봤다. 정액을 몸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변화시켜 뇌로 보낼 수만 있다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사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를 빙자해 간음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들로서는 진인 될 수행을 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1937년엔 백백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주 전해룡은 간음과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무려 350명의 남녀신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의 특징을 ‘동차결’은 이렇게 적어놓았다.‘여러 대를 두고 내려오던 양반은 상사람이 되며, 상사람은 오히려 양반이 된다.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재를 뽑아 쓴다.’ 짧은 내용이지만 정감록을 믿던 민중에겐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진인왕이 평등사회를 실현한다고 볼 순 없지만,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뒤엎고자 한 민중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상사람이 양반되고 양반이 상사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인왕은 유불선 삼교합일의 바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불교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재를 불교에서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나는 조선후기 민중이 성리학적 지배 이념에 반발해 불교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음을 본다. 조선말의 혁명가 김옥균도 불교신자였으며, 이동인과 같은 개화승려도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융성시킬 진인왕은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은 모두 4명이다. 공교롭게도 예언서에서 진인왕에게 왕업을 도울 세 아들이 있다고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신라의 진평왕도 아들의 이름을 동륜, 금륜 등으로 불렀다. 그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봤다는 증거다. 전륜성왕 가운데 첫 왕은 철륜왕인데 진인왕이 그에 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이 차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신자로서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진인왕의 협력자인 세 아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우담발라가 핀다고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미 우담바라는 피었다. 과연 전륜성왕은 오는 것일까. 전륜성왕이 가진 7개의 보물 중 하나인 거사보(居士寶)는 고아, 노인, 병자 등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더러 전륜성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예언서 속의 진인왕은 서양열강, 중국, 일본을 평정하고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감록은 당대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었다. 그 예언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안이란 점에서 정감록은 예언서로서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소설과 시기(詩妓)의 것에는 감정을 거짓한 흔적이 없습니다. 만일 공자의 사무사(詩無邪)라는 시에 대한 평이 옳은 말씀이라면 이 점에서 아낙네들의 노래는 낙제이고 기생의 시는 급제외다.” 시인 김억의 말대로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조선사회에서도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시어로 노래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기생이다.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서 해어화(解語花).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슬픈 시였다. 널리 알려진 황진이나 그와 쌍벽을 이뤘던 매창, 강릉기생 홍장, 경성기생 홍랑, 평안도 성천 기생 부용 등 옛 기생들은 문학을 비롯해 음악, 춤 등 못하는 게 없었던 당당한 예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당대의 전문직 여성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기생조합을 거치면서 이들의 삶은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만 왜곡·폄하돼,‘기생’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센터 전시장에 마련된 ‘기생’전은 시·서·화의 재능과 지조를 갖춘 교양인으로서의 기생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색다른 전시다. 기생과 관련된 문학이나 인물 중심의 에피소드는 많지만 시각예술 차원에서의 해석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게 현실.(주)서울옥션이 주최한 이번 기획전은 기생이라는 단일 주제로 열리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전시작품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제작된 엽서와 원판사진 500여 장과 평양 명기 소교(小橋)의 ‘묵죽도’와 죽향이 그린 ‘묵란도’, 초상화가 동강 권오창이 그린 기생 초상, 성행위를 묘사한 동경과 향갑노리개, 비녀, 뒤꽂이 등 장신구와 화장구들로 이뤄졌다. 엽서와 사진들 속에는 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는 기녀의 모습이나 수업을 받는 모습 등이 담겨 있어 당대 풍속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기생의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도 눈길을 끈다. 기생방에서 촬영한 알몸의 여성의 사진 위에 한복연구가 김혜순의 기생한복 이미지를 입힌 사진작가 배준성의 ‘화가의 옷-기생Ⅰ’이 대표적인 작품. 논개의 충혼을 달래주는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12호)와 관련된 영상, 운보 김기창이 신윤복의 그림을 패러디한 ‘청록산수’, 윤석남의 설치조각 등도 나와 있다.2월 13일까지.(02)395-0331.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한국 노동운동에서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양동생(52)’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부의 폭압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987년 대우조선 초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돼 3년간 강성 노조를 이끌었다. 연이은 분신 등 투쟁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대우조선사태를 보려고 9시뉴스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을 정도다. 대우조선 투쟁을 보도하기 위해 국내 취재진은 물론 외신기자들까지 거제 바닷가에 다 몰렸다. 노동계의 동투(冬鬪)가 급피치를 올릴 무렵 많은 이들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투쟁강도가 세면 셀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접고 개척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의 소재지를 알아냈다. 통화가 되기 무섭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대로 서울 양천구 신월2동 한양중앙교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이 교회 담임목사였다. ●운명과도 같았던 노동운동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강성 노조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첫인상이 그처럼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양 목사는 그저 옛날 일이라며 이내 인터뷰에 응했다.“아마 그때가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시기일 겁니다. 경제 중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특혜를 줘서라도 기업인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상대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거셌습니다.” 양 목사는 당시 시대상황을 기업인에게는 특혜, 노동자에게는 탄압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했다. 그는 노동법을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지만 탄압국면을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고 했다. 임시 노조위원장에 이어 87년 8월 대우조선 초대 직선 노조위원장에 선출된 그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노조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두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싸웠습니다. 결국 거제군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신고필증을 받아냈지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로 대우조선 노조가 설립된 것입니다.”이를 계기로 현대 등 대기업 중심의 노조설립 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투쟁원칙에 충실했다. 노조 설립은 회사를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양 목사는 “졸다가 걸리면 바로 징계를 받고 뼈 빠지게 일해도 분배가 안되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할 투쟁대상이었다.”며 인권보호와 작업환경 개선, 임금 인상 등을 주요 교섭안건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가가 있어야 회사가 있고 회사가 있어야 조합이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우조선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대정부 투쟁으로 투쟁의 본질이 급격히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이를 주사파의 개입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자신의 원칙이 대중에 의해 휘둘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감옥에서 쉬고 싶을 정도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과의 일화도 공개했다.“88년 봄으로 기억합니다만 김 회장이 ‘게스트하우스’(영빈관)에서 독대를 요구했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대우조선 때문에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대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서 정부가 시범 케이스로 대우조선을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합디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요.” 양 목사는 이런 김 회장을 새벽 4시까지 설득했다고 말했다.“당신이 좌절하면 안된다. 존경받는 기업가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이후 그는 3만여 조합원을 모아놓고 건전한 노조, 합리적인 노조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 75%의 조합원으로부터 찬성 서명을 받아냈다. 이어 DJ(김대중)·YS(김영삼)·JP(김종필) 등 야당지도자를 차례로 만나 건전한 노조로의 탈바꿈을 약속하고 회사를 없애려는 기도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도 다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임기1년 남기고 목회자의 길로 89년 12월 양 목사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집사였던 양 목사는 노조위원장 임기가 1년여 남았지만 떠날 것을 결심한다. 노동운동이 어느정도 정착된 만큼 목회자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양 목사는 당시 ‘서울로 올라가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고 밝혔다. 이 때부터는 노동운동과도 절연했다.TV도 없애버리는 등 세상일과 등을 졌다. 언론과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물리쳤다. 본지와의 인터뷰가 노조위원장을 그만둔 뒤 처음이라고 밝혔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연세중앙교회에 둥지를 틀었다.10년간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안수집사, 전도사, 목사고시를 거쳐 99년 11월 양천구 신월2동에 한양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에서 태어난 그는 YS와 같은 고향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를 못갔다. 나중에 방송통신고를 졸업했다.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시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군에 다녀온 뒤 77년 대우조선의 전신인 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나 한국의 노동판을 완전히 뒤바꾸는 중심 인물이 된다. 양 목사는 노동운동은 ‘공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독불장군식으로 해서는 다 깨진다는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조차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고 비판한 대목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노동계에 충고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seoul.co.kr
  • [책꽂이]

    |일반| ●가치혁명과 사회시스템 개조론(사카이야 다이치 지음, 이윤정 옮김, 아이필드 펴냄) 20세기가 노력과 조직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개성과 브랜드의 시대로 정의하고, 새시대에 걸맞은 가치관을 모색한다.1만 5000원. ●타키투스의 연대기(타키투스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 펴냄)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로마 역사서.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네로 황제까지 55년간의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를 담고 있다.2만 8000원. ●어머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신현림 등 지음, 월간조선사 펴냄) 신현림, 장상, 신달자, 강부자, 윤무부, 이계진, 하일성, 복거일 등 각계각층의 명사 43명이 전하는 ‘나의 어머니’ 이야기.9500원.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신광영 지음, 을유문화사 지음) 장기화된 불황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의 전환 속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계급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했다.1만 2000원. |실용| ●10가지 생존의 기술(조길선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가 밑바닥 시절부터 세계 최대 솔루션기업 오라클의 상임이사까지, 한 한국 여성의 생생한 성공담과 생존 전략.9500원. ●성공한 커리어의 5가지 패턴(제임스 시트린·리처드 스미스 지음, 신시란·서은경 옮김, 물푸레 펴냄)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라’‘관대한 리더십을 보여라’‘승인 패러독스를 극복하라’등 성공한 경력의 5가지 패턴.1만 2500원. |유아·아동| ●꾸러기, 학교에 가다!(조나단 런던 지음, 송민영 옮김, 애플트리태일즈 펴냄) 영어CD가 들어있는 그림동화. 개구리가 주인공인 구연동화를 우리말과 영어로 섞어 들으며 언어감각 익히기.3세 이상.9000원. ●색깔을 훔치는 마녀(이문영 지음, 비룡소 펴냄) 색의 혼합원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창작그림책. 하얀색에 질린 꼬마마녀가 마술봉으로 숲의 색깔을 모두 빼앗는데….4세 이상.9000원. |어린이·청소년| ●꿀벌의 일생과 역사(찰스 미쿠치 지음, 연진희 옮김, 주니어김영사 펴냄) 꿀벌의 생태와 역사, 쓰임새 등을 두루 파악할 수 있는 정보그림책 시리즈.‘개미의 일생과 역사’‘땅콩의 일생과 역사’가 함께 나왔다. 초등저학년.8500원. ●행복한 일기쓰기 365(조혜원 지음, 삼성당i 펴냄) 아이들에게 일기쓰기 습관을 다져주는 실용서. 작가가 어린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날짜에 맞춘 적절한 글감을 귀띔해준다. 초등생.1만 2000원.
  • 그림공부 하고 역사도 배우고

    보림출판사가 펴낸 ‘사계절의 생활 풍속’은 옛 풍속화를 통해 엿보는 조선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은이는 민속화 연구 전문가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 조선 풍속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대표적 풍속화가의 작품 50여점이 천연색 도판으로 실렸다. 예컨대 김홍도의 ‘경작도’(호암미술관 소장)를 펼쳐보인 뒤 조선시대의 농부 이야기까지 풀어내는 식이다. ‘재미없는 줄 알았던 옛 그림을 이렇게도 감상할 수 있구나!’ 무릎을 치게 될 사려깊은 풍속화집이다. 초등3년 이상.1만 8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호열자,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질병은 저마다 표상을 가지고 있다. 결핵은 아름다운 슬픔의 병, 두창은 두신(痘神)의 왕림, 페스트는 돌연한 습격, 에이즈는 동성애의 질병…. 그렇다면 콜레라는 무엇으로 표상될까. 공포 그 자체다.“살아서 앓지 않으면 죽어 무덤 속에서라도 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병이 콜레라다. 질병사가들은 이 콜레라의 공포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질병으로 페스트를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콜레라를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의미에서 호역(虎疫) 또는 호열자(虎列刺)로 옮긴 데서도 콜레라의 무서움을 읽을 수 있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호열자라는 공포의 대명사를 내세워 과거 전통시대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의료생활과 의학사를 다룬다. 동아시아 의학사를 전공한 저자(44·한국과학기술원 연구교수)는 감로탱에 나타난 전근대 사람들의 생로병사와 의료와 관련된 일상생활 모습을 찾아내고, 일제시대 보건 관련 자료 등 각종 정보를 동원해 ‘몸과 의학의 한국사’를 써냈다. 옛 조선사람들은 괴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했을까.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괴질은 하늘이 노해 인간에게 벌을 내린 것으로 간주됐다. 전한시대 경학자 동중서가 ‘춘추번로’라는 참위서에서 제창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조선 순조 때 창궐한 괴질 호열자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임금은 괴질을 천견(天譴) 즉 하늘의 꾸짖음으로 보고, 하늘을 달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죄수를 풀어줬으며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또 민간에서는 귀신이 무서워한다는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가 하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영력이 있는 복숭아 가지를 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전근대 우리 의료생활사의 한 풍경이다. 책은 지석영의 ‘우두법’과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실제보다 과대 포장돼 신화화한 과정도 살펴 관심을 모은다.1만 78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고구려사 국제학술회의 개최

    고구려사 국제학술회의 개최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영토의 3분의2와 인구의 4분의3이 중국에 흡수됐다.이렇게 흡수된 70만∼80만 고구려인은 중국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해 한족(漢族)문화에 흡수됐고,고구려 산성터 등 문화유적도 대부분 중국의 영토에 있으므로 고구려 문화 역시 중국이 계승했다.”(쑨진지) “맥이계(貊夷系)인 고구려는 한계(韓系)인 백제·신라와 다른 종족이다.4세기 이후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에 진출한 것은 중국의 일개 민족이 한반도에 침입해 중국의 식민정권을 건립한 것에 불과하다.”(쑨훙) 중국 동북공정의 최대 이론가로 꼽히는 쑨진지(孫進己·73) 중국 선양(瀋陽) 동아연구중심 주임과 그의 딸인 쑨훙(孫泓) 연구원은 16일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이 서울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하며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임을 거듭 강조했다. 쑨 주임은 1980년대 초반부터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제창하며 일관되게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해온 인물.이날 학술회의에서의 주장은 기존의 논지를 재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역사계승의 문제는 토지와 인구,문화를 얼마나 계승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쑨진지의 주장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역사관이란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이날 회의에서는 비판적인 견해가 쏟아졌다.토론자로 나선 임기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장은 “‘고구려의 역사적 귀속은 고구려가 당시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예속되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쑨진지의 주장은 영토중심주의적 사고일 뿐”이라며 “역사의 계승이란 역사적 맥락의 계승이며,과거 역사의 계승과 영토적 주권은 분명하게 구분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임 실장은 또 “역사의 계승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역사서의 편찬”이라고 전제,“중국의 사서에선 고구려가 동이전에 수록돼 있으며 고구려 멸망 후 그것의 계승을 표방하는 사서 편찬이 없었지만,한국의 경우 ‘삼국사기’ 이래의 고구려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사서의 편찬이 통일신라와 고려,조선,근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학자들의 ‘패권주의적’ 논리는 북한 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북한 학자들은 학술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논문을 보내 중국측의 논리를 비판했다.북한의 조희승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구려사 연구실장은 돌로 산성을 쌓고 싸우는 고구려의 전투방식은 동방에서는 한반도에만 있다는 사실 외에 고구려인의 온돌과 발방아 사용,오곡 중심의 식생활 등은 한민족의 고유한 풍습이란 점을 들어 고구려가 한민족의 국가임을 강조했다.또 강세권 역사연구소 연구원은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예맥계와 백제,신라 등 한계의 구분은 거주 영역에 따라 편의상 구분한 것일 뿐 그들은 어디까지나 고조선의 후예라고 밝혔다.김유철 김일성종합대 교수는 한사군,특히 그 중심을 이룬 낙랑군이 요동지방에 있었음을 강조하며 중국의 낙랑군 평양설을 비판했다.이들 북한 학자들의 주장은 남북한 학자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공동 대응,학술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호주 시드니대의 판카지 모한 교수는 “광개토왕비가 그동안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외피에 둘러싸여 1세기 동안이나 얼어붙은 채 묻혀 있었다.”며 광개토왕비를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했다.광개토왕비는 왕권의식과 중국·인도의 금석학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사 속의 고구려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한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파문 이후 처음 열리는 고구려사 국제학술대회로,한국·중국·일본·미국·러시아·몽골·호주 등 7개국이 참여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유시민의원 “부친 일제때 만주 소학교 근무”

    유시민의원 “부친 일제때 만주 소학교 근무”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였다.여야간 친일진상규명 논란이 불거진 뒤로 신기남 전 의장,이미경 의원에 이어 여권 인사로는 세번째다.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는 지난 4일 “유 의원의 선친 유태우씨가 일제 치하에서 교사를 지냈고,백부 유석우씨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 면장을 지냈다.”고 보도했다. 이에 유 의원은 8일 오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백부가 면장을 한 것은 맞지만 선친은 일제 때 교사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는 “처음 듣는 얘기라 집안 어르신들께 확인해본 결과 선친은 해방 직후 미 군정이 교사요원을 공채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 후 경주여중에 부임했다.”며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1943년경 만주 소학교에서 잠시 근무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소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부에 대해서는 “내남면 또는 인근 산내면 면장을 1년 정도 하셨다.”고 밝히고 “백부는 평생 한학과 조선사를 연구하신 개명한 유학자”라고 덧붙였다. 유 의원이 반박글을 올리자 이날 브레이크뉴스측은 다시 글을 올려 “유 의원의 선친은 1943년 ‘만주국민의급학교(소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고,당시 나이 23세였다.”면서 “소학교에서 일한 것은 알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는 유 의원 주장은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경북교육청에 유 의원 선친의 인사기록이 보관돼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익명을 요구한 교육청 관계자는 ‘유태우라는 동명이인 4명 중 한 명이 만주 소학교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고,그 직책은 훈도로 적혀 있다.’고 시인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북교육청 측은 본지의 확인 요청에 “유태우씨의 기록은 전혀 없으며,브레이크뉴스측이 취재한 사실도 없다.”고 부인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정기국회 언론개혁·국보법 여야대치 예고

    정기국회 언론개혁·국보법 여야대치 예고

    “날치기는 없다.”(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실력저지 않겠다.”(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여야의 두 대표는 넉달 전 ‘새 국회’를 다짐했다.정 의장은 ‘상생국회’를 천명했다.4·15 총선 다음날인 기자회견에서다.박 대표는 ‘표결주의’를 선언했다.그 일주일 뒤인 4월23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다. 두 대표의 약속은 그 다음달 3일 양당 대표회담에서 공식화됐다.‘3대 원칙 5대 과제’라는 협약으로 국민 앞에 제시됐다. 하지만 이는 불과 넉달만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처지에 놓였다.17대 첫 정기국회가 1일 개회되자 두 진영이 벌이는 기싸움에서 읽혀진다.‘네탓’ 공방만 벌이는 구태정치가 재현될 조짐이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지난달 31일 “끝까지 합의가 안 되면 표결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이에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강력 저지하겠다.”고 날을 세웠다. 1일에는 양당의 대결 전략이 더욱 구체화됐다.열린우리당 임종석 대변인은 “개혁과제 추진에서는 ‘비타협 원칙’을 견지하겠다.”고 못박았다.반면 한나라당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는 “여당이 과반의 힘을 앞세워 단독 표결을 시도할 경우 물리력을 동원,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맞받아쳤다. ●넉달전 ‘상생’ 다짐 뒤집어질 위기 이제 초점은 하나로 모아진다.여야가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의 문제다.무엇보다 17대 첫 정기국회는 쟁점 법안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무엇보다 여당이 ‘개혁입법 처리’를 천명하면서 야당과의 대치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가늠할 최대 변수는 소속 의원들이 어느 정도로 당론을 따라주느냐에 있다.그 결속도에 따라 표결처리할 수도,중도 포기할 수도,‘최후 선택’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문법등 현안 역대 최다 수준 쟁점 법안들을 3대 유형별로 분석해보면 결속도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먼저,여야가 정면으로 맞서는 ‘대립형’이 있다.열린우리당은 신문,한나라당은 방송에 집중하는 언론개혁 관련법 등이 이 범주에 든다.소속 의원들의 결속도는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둘째,여야 내부에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는 ‘찬반 혼재형’이 있다.국가보안법이 대표적인 법안이다.셋째,여야가 기본적인 입장에선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사항에서 엇갈리는 ‘원론 찬성,각론 반대형’이 있다.결속도는 가장 낮은 편이다. 이번 국회에서는 전체 의원 299명 중 187명,즉 62.5%에 이르는 초선 의원들이 포진해 있다.이들이 ‘거수기’라는 구태 정치를 반복할지,새로운 실험에 가세할지 주목된다. 박대출기자 dcpark@seoul.co.kr ■ 친일규명법·분양가 공개법안 등 가장 첨예한 대립 ●여야 대립형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안으론 언론관계법이 대표적으로 꼽힌다.열린우리당은 신문개혁에 비중을 두고 언론개혁국민행동과 함께 마련한 언론개혁법안을 이달 말께 제출할 계획이다.핵심 내용은 편집권독립 보장을 위해 신문사 사주의 소유지분 제한,특정 신문사의 독과점 폐해를 없애기 위해 1개 신문사의 시장 점유율을 20∼25%로,3개 신문사의 시장점유율을 65∼70%로 각각 제한하는 것이다.반면 한나라당은 시장경제에 위반되고 ‘언론 길들이기’라며 강력 반대하고 있어 접점찾기가 어려울 전망이다.또 한나라당은 방송법 개정안에 집중하면서 지상파 방송의 공영성 강화를 위해 MBC 민영화 등을 주장하지만 열린우리당은 반대하고 있다. 경제 관련 법안에서도 여야가 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연기금의 막대한 적립금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금융시장 안정과 투자 선순환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기금관리기본법을 개정하자는 입장이다.그러나 한나라당은 이에 반대하면서 국회 심의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독자적인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친일조사규명법 개정안을 놓고도 이견이 팽팽하다.열린우리당은 친일진상규명법에 적시한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을 중좌(중령)에서 소위 이상,창씨개명 권유자,조선사편수회에서 역사왜곡에 앞장 선 사람,언론을 통해 일제침략전쟁에 협력한 사람 등으로 넓히자는 입장이다.반면 한나라당은 현행법을 시행한 뒤 개정 여부를 검토할 문제라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문제 역시 만만치 않다.열린우리당은 부동산 안정화를 위해 공공택지 내 25.7평(국민주택규모) 이하의 공영·민영아파트에 원가연동제(분양원가 상한제)를 실시하되 분양 원가의 주요 항목을 공개한다는 방침이다.한나라당은 공영아파트만 분양 원가를 공개하고 민영아파트는 시장 자율에 맡기자는 입장이다.지난 2월 말 효력을 상실한 금융거래정보요구권(계좌추적권)도 핫이슈다.여당측이 대기업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재도입을 추진하면서 한나라당과 맞서고 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국회법·호주제폐지법안 등 黨內 찬반론 팽팽 ●여야 찬반 혼재형 여야 내부의 찬반 논란으로 당론 확정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법안들도 있다.국가보안법 개폐 여부,호주제 폐지 등 민법 개정안,체포동의안 기명투표 전환 등 국회법 개정안,국민연금 수수료 재조정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이다. 국가보안법의 경우,열린우리당에서는 86명의 의원이 폐지 서명에 동참한 가운데 36명의 의원이 개정론을 펼치고 있다.한나라당에서도 소속의원의 90% 이상이 부분 개정 입장이지만 극소수는 폐지 또는 현행 유지쪽이다. 열린우리당은 폐지를,한나라당은 개정을 각각 당론으로 정할 것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양당 모두 당론 확정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당론 없이 표결로 갈 경우,현재로서는 폐지론자보다는 개정론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호주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법 개정안 역시 각 당이 당론을 결정하는데 적잖은 부담이 따를 것 같다.호주제 폐지가 시대 흐름이기는 하지만 유림은 물론이고 일부 종친회 등의 반대 논리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폐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유지론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한나라당에서는 아직 유지론이 폐지론보다 우세하다.일각에서는 현행 ‘1인 호주제’ 대신 가족 가운데 한사람이 호주 자격을 승계할 수 있는 ‘가족호주제’를 대안으로 내놓기도 한다.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기명투표 등 국회법 개정안은 열린우리당이 당내 논란을 거친 끝에 사실상 당론으로 정한 가운데 한나라당 역시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 국민연금 수수료 재조정 등 국민연금법 개정안도 여야 모두 아직 명확한 입장을 못 정하고 있다. 반면 논란이 분분하던 간접자산투자운용업법(사모펀드) 개정안은 가장 먼저 접점을 찾았다.연기금의 사모펀드 투자허용 조항을 삭제하고,산업은행과 중소기업은행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절충안이 정기국회 첫날인 1일 재정경제위에서 의결된 것이다.경제법안이라는 점에서 다른 법안들의 처리에도 방향타로 작용할 전망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과거사법·고비처법안 등 각론 조정 맞대결 ●원론 찬성·각론 반대형 열린우리당이 1일 확정 발표한 100대 입법안 가운데 일부 법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도 입법 취지에 원론적으로 찬성하고 있다.다만 방법,내용 등에서 각론적으로 반대하는 법안이 적지 않다.여야간의 협의 통과가 가능하지만 치열한 대립도 벌어질 수 있는 법안들로 분석된다. 우선 열린우리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과거사정리기본법은 ‘여공야수(與攻野守)’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한 당론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공식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되 박근혜 대표 등 지도부가 조사 범위 및 기간·주체,기구의 위상 등에 대해 개인 의견을 밝히고 있는 정도다. 또한 사립학교법 개정 및 남북관계발전기본법 제정의 필요성,공직자윤리법 개정,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고비처) 신설,재래시장육성특별법의 필요성에는 여야가 큰 틀에서 공감하고 있다.이 때문에 여야간에 논란을 벌이다가 처리될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법안으로 꼽힌다. 아울러 여야간의 대립이 장기화되면서 정기국회 초반 또는 중반보다는 후반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점쳐진다. 다만 고비처의 경우 한나라당은 부패방지위 산하에 둔다는 열린우리당 방침과는 달리 특검형 고비처를 독립적으로 신설하는 법안을 추진하기로 해 치열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의 경우 고위 공직자 백지신탁제 도입에 대해서는 여야가 필요성을 함께 하고 있지만 신탁의 대상 및 범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또한 사립학교법은 열린우리당이 이사장의 친족 관계자가 해당법인 학교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반면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를 재정 자립도와 교육여건 등을 감안해 ▲독립형 ▲의존형 ▲공영형 ▲공립전환 대상 등 4개 유형으로 분류,차별 운영하는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남북관계발전기본법 제정에도 여야가 공감하고 있지만,한나라당은 남북간 합의서를 체결할 때 국회의 비준 동의를 의무화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北학자에 첫 연구용역 위촉

    북한 학자가 남한 연구기관으로부터 처음으로 연구용역을 위촉받는다. 통일부는 6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남북한 교육통합에 대비한 북한 교육정책 연구사업 활성화 연구과제 용역위촉’을 위해 신청한 남북사회문화 협력사업자 및 협력사업을 동시에 승인했다. 이에 따라 교육개발원은 북한의 김덕유(64) 조선사회과학자협회 교육이론연구실 상급연구사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과학 수재 양성 경험과 그 전망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용역을 위촉할 수 있게 됐다.용역기간은 2005년 6월 30일까지이며,용역비는 미화 3만달러이다. 김덕유 상급연구사는 김형직사범대학에서 교육심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교육에서의 주체확립’,‘주체교육학의 원리’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개발원측은 중국 옌볜대를 통해 김 연구사의 약력과 연구실적,연구계획서 등이 담긴 제안서를 받아 용역위촉을 결정했다. 이번 협력사업은 세계은행 산하 세계개발네트워크가 교육개발원에 위탁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교육연구 지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는 것으로 개발원측은 9개의 연구과제 중 하나를 북측 연구자에게 용역 위촉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한 학술교류에 있어서 개인용역 위촉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협력사업을 연 것”이라며 “이번 사업승인이 남북한 학술교류 활성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인철기자 ickim@seoul.co.kr
  • 고구려사 왜곡 ‘공개대응’키로

    정부가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그동안 고수해온 ‘조용한 외교’ 방식을 해제하는 방안을 포함하는 3단계 조치를 금명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실무대책협의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이수혁 차관보가 해외 출장에서 귀국하는 5일 이후 즉각 외교·교육·통일부·국정홍보처·국가안전보장회의(NSC)·국무조정실 등 협의회 관계자들과 회의를 갖고 3단계 대응 수위를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문제가 처음 불거진 뒤 1단계 조치로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 정부에 강력 항의했으며,2단계로 고구려 기술 부분에 대한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정부는 아울러 중국에 의한 한국사 역사 왜곡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일단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집중해 대응키로 잠정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정부 당국자는 4일 “고조선사든,발해사든 앞으로도 역사왜곡이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겠지만 지금까지 중국 중앙정부에 의해 왜곡된 부분은 고구려사이므로 정부는 이 문제에 역량을 모아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역사 왜곡에 중국 중앙 및 지방정부와 공산당,학계,언론계 등 여러 주체가 나서는 데 대해 이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고구려사 왜곡을 집중적으로 따진 뒤 이에 대한 시정조치를 얻어내는 것이 효율적이고,또한 명분에 맞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중국이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가 대단히 미약하다고 보고,학계·정치권 등과 연계한 비정부 차원의 장기적인 종합 대책도 병행할 방침이다. 중국은 사건 초기에는 실무선을 제외한 관련 대화통로를 단절해놓다가 최근 우리측의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자,검토 시간을 달라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中國에 고구려사 복원 요구

    정부가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www.fmprc.gov.cn)에 고구려 부분을 삭제한 것과 관련해 이전 상황으로 복원시킬 것을 중국측에 정식으로 요구했으며,향후 정치권 등과도 공동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2일 이같이 밝히고 “중국 정부는 현재 ‘한국의 입장은 잘 알겠다.좀 더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만 하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장기전에 대비한 종합적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박준우 아태국장은 이날 제3차 북핵 실무그룹회의 논의차 방한한 중국 외교부 닝푸쿠이 한반도문제 담당 대사와의 오찬에서도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박 국장은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며 “따라서 (중국 당국이 하루 속히) 외교부 홈페이지를 원상 회복하고 (관영매체 등을 통한) 왜곡 조치를 시정하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공산당과 정부 주도 아래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징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19일 외교통상부 이수혁 차관보를 위원장으로 외교·교육·통일부,국정홍보처·국가안전보장회의(NSC)·국무조정실 국장급이 참석하는 고구려사 관련 제1차 실무대책협의회를 연 데 이어 조만간 2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정부는 향후 중국 당국의 반응 정도에 따라 취할 수 있는 대책을 다각적으로 마련하는 한편,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한·중 외교 문제를 다뤄 나간다는 방침이다.아울러 정부의 고구려사 관련 실무대책협의회는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고조선사에 대한 왜곡문제에 대한 대응방안도 논의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열린우리당 ‘바른정치실천연구회’ 소속 의원 10여명도 오는 16일 중국의 고구려 유적지 등을 둘러보며 실태 조사를 벌인 뒤 국회 차원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한편 향후 당·정 협조체제도 구축할 계획이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한국노총, 민노당 깃발 아래로”

    민주노동당 중심의 양대 노총 통합이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25일 민주노동당 4기 1차 당대회에 참석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연대사를 통해 “그간 한국노총이 정치활동에 있어 독자적 활동을 해온 것은 현장 조합원들의 의사가 아니라 지도부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면서 “현장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는 민주노동당과 함께하는 것이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날 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870여명은 기대하지 않았던 이 위원장의 발언에 환호성과 박수로 화답하며 ‘50여년의 숙원’인 노동계 통합의 꿈을 부풀렸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대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민주노동당 중심의 정치활동’ 의사를 비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있었으나 대중 앞에 공개 천명한 것은 처음이다. 이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총의를 물어 민주노동당과 함께하겠다.”고 말해 조만간 한국노총이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가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한국노총은 녹색사민당을 결성,지난 17대 총선에 임했으나 전원 낙선하고 정당 득표율도 0.5%에 그치는 등 참패,이에 대한 책임으로 이남순 위원장 등 당시 지도부가 전원 사퇴하고 녹색사민당을 해체했었다. 한편 이날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은 팩스로 ‘귀 전당대회가 6·15공동선언을 이행하여 평화와 자주통일을 앞당겨 나가는 뜻깊은 전환의 계기로 되리라 믿는다.’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양기탁(梁起鐸·1871∼1938)

    |리양 노주석·박지윤특파원|중국 장쑤(江蘇)성 리양(栗陽)현 대부진 남문두 고당암.우강 양기탁 선생이 68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친 임종지이다. 선생이 말년(1937∼1938)을 보낸 리양은 상하이와 난징의 중간쯤에 위치한 중국 남부의 작은 마을.취재팀은 상하이∼난징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태호의 절경을 뒤로하면서 104번 국도를 타는 행로를 택했다.이싱(宜興)시에서 리양현 대부진까지 이르는 18㎞는 먼지를 뒤집어 쓰는 자갈길이었다.길이 더 나쁘던 시절에는 편도로 족히 7시간이 걸린 오지였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들어오게 됐을까.무엇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을까.’라는 취재진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트막한 언덕과 논밭 풍경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실제 우강은 당시 독립운동의 한계성에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1934년 김규식·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주석으로도 선출됐지만,노선문제로 갈등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풍광과 비슷한 이곳에 칩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취재팀은 남문두의 주욱화(56) 촌장을 길잡이 삼아 고당암을 찾았다.마을은 1994년 6월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올 당시와 완전히 달랐다.16년째 촌장을 맡고 있는 주씨의 도움없이 고당암 자리를 찾기란 불가능했다.자전거를 타고 취재팀을 인도한 주 촌장은 “어린시절 고당암에 놀러가면 선생은 자신을 조선사람이라고 밝혔으며 왜놈과 싸우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한 사실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뽕나무밭이 그늘을 제공하던 고당암은 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려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우강은 이곳에서 주로 참선을 하며 선도를 수행했다.마을 사람들은 선생에 관해 잘 몰랐던 것 같다.다만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고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은 습성이 중국인과 달라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부모들에게서 전해들었다고 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교류했기에 선생이 마을에 정착한 사연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한다. 의사 임쌍화(57)씨는 7년 전에 돌아가신 선친(임도선)으로부터 고당암에 기거하는 ‘수염이 긴 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선생이 돌아가신 뒤 시신을 부친이 직접 염습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사인은 몸이 붓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는 일종의 홧병이었다. 구천을 떠돌던 우강의 유해는,1994년 6월 김구 선생이 직접 그린 지도 한장때문에 발견됐다.이곳을 들락거린 중국인 임한정이 김구 선생에게 죽음을 알리는 엽서를 보낸 것이 단서였다. 대부진 인민정부의 채금룡 당서기는 “중국의 루쉰(1881∼1936) 선생에 견줄 만한 위대한 한국 분이 이곳에서 한때 살았고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면서 “마을의 자랑으로 후세에 알릴 수 있도록 유허비를 세우는 등의 방안을 한국정부나 서울신문사와 논의했으면 한다.”고 적극성을 보였다. joo@seoul.co.kr˝
  • 親日조사대상 박정희 포함

    親日조사대상 박정희 포함

    친일 반민족 행위자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와 여권에 비판적인 2개 신문사를 겨냥한 정략적 의도를 지녔다며 강력 반발,법안 처리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조사대상과 관련,일본군은 소위 이상으로 정해 중위를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 등 모든 장교를 포함시켰으나 경찰은 경시(총경급),문관은 군수 이상이어서 형평성 시비가 일 것으로 전망된다.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 등 민족정기의원 모임은 14일 특별법 개정안을 제출키로 했다.법안 발의에는 김 의원과 여야 의원 132명이 서명했다.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13일 정책의총 등을 통해 당론으로 지지키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친일 반민족 행위자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지난 3월 초 특별법 통과시 삭제된 창씨개명 주창 권유자,조선사 편수회에서 역사 왜곡에 앞장섰던 사람,일제로부터 포상이나 훈공을 받은 자,토지조사사업 등 경제수탈 종사자 등이 포함됐다.당초 일본군 계급 중좌(중령) 이상이던 조사대상도 소위 이상으로 확대했다. 또 ▲독립운동과 항일운동 탄압행위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반인도적 범죄행위 ▲문화,예술,언론,학술,교육,종교 분야에서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민족문화 파괴 및 우리말과 문화유산 훼손 및 반출 행위도 친일대상에 포함시켰다.이에 따라 조선·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일제와 일왕을 찬양했는지 여부와 징병,징용,일본군 성피해여성 차출 등을 독려했는지도 조사대상이 된다.이 경우 두 언론사 창업주의 행적도 조사대상이 될 전망이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조사대상은 현행법에서는 군인 10여명 등 소수에 불과했으나 3000명선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개정안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선정 의결 정족수를 위원회 재적위원 과반수에서 3분의2 이상으로 강화했다.친일전력이 있더라도 반일(反日)전력이 뚜렷한 사람은 위원회 전원 의결을 거쳐 구제토록 했다. 위원회 소환에 불응하는 조사 대상에게는 위원장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했으며,관련기관의 자료협조 의무를 명시하는 한편 관계부처와 해외공관의 협력 규정 신설 및 위반시 처벌을 강화토록 했다.위원회 구성과 관련,국회 추천 조항을 삭제하고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토록 한 것도 논란 소지를 안고 있다.위원회의 활동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이와 함께 신문,잡지,방송,인터넷 등을 통해 위원회의 조사내용을 공개할 수 없도록 한 현행법의 조항을 삭제했다. 한나라당 박 전 대표는 이에 대해 “친일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얼마 안됐는데 또 개정안을 내서 상정한다고 할 때는 분명히 목적이 있는 것”이라며 “이는 야당과 언론 탄압으로 정치보복의 시작”이라고 반발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親日조사대상 박정희 포함

    친일 반민족 행위자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와 여권에 비판적인 2개 신문사를 겨냥한 정략적 의도를 지녔다며 강력 반발,법안 처리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조사대상과 관련,일본군은 소위 이상으로 정해 중위를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 등 모든 장교를 포함시켰으나 경찰은 경시(총경급),문관은 군수 이상이어서 형평성 시비가 일 것으로 전망된다.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 등 민족정기의원 모임은 14일 특별법 개정안을 제출키로 했다.법안 발의에는 김 의원과 여야 의원 132명이 서명했다.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13일 정책의총 등을 통해 당론으로 지지키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친일 반민족 행위자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지난 3월 초 특별법 통과시 삭제된 창씨개명 주창 권유자,조선사 편수회에서 역사 왜곡에 앞장섰던 사람,일제로부터 포상이나 훈공을 받은 자,토지조사사업 등 경제수탈 종사자 등이 포함됐다.당초 일본군 계급 중좌(중령) 이상이던 조사대상도 소위 이상으로 확대했다. 또 ▲독립운동과 항일운동 탄압행위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반인도적 범죄행위 ▲문화,예술,언론,학술,교육,종교 분야에서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민족문화 파괴 및 우리말과 문화유산 훼손 및 반출 행위도 친일대상에 포함시켰다.이에 따라 조선·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일제와 일왕을 찬양했는지 여부와 징병,징용,일본군 성피해여성 차출 등을 독려했는지도 조사대상이 된다.이 경우 두 언론사 창업주의 행적도 조사대상이 될 전망이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조사대상은 현행법에서는 군인 10여명 등 소수에 불과했으나 3000명선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개정안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선정 의결 정족수를 위원회 재적위원 과반수에서 3분의2 이상으로 강화했다.친일전력이 있더라도 반일(反日)전력이 뚜렷한 사람은 위원회 전원 의결을 거쳐 구제토록 했다. 위원회 소환에 불응하는 조사 대상에게는 위원장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했으며,관련기관의 자료협조 의무를 명시하는 한편 관계부처와 해외공관의 협력 규정 신설 및 위반시 처벌을 강화토록 했다.위원회 구성과 관련,국회 추천 조항을 삭제하고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토록 한 것도 논란 소지를 안고 있다.위원회의 활동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이와 함께 신문,잡지,방송,인터넷 등을 통해 위원회의 조사내용을 공개할 수 없도록 한 현행법의 조항을 삭제했다. 한나라당 박 전 대표는 이에 대해 “친일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얼마 안됐는데 또 개정안을 내서 상정한다고 할 때는 분명히 목적이 있는 것”이라며 “이는 야당과 언론 탄압으로 정치보복의 시작”이라고 반발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 海士 요트원정대 현해탄 횡단

    “넓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바다이기에 항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앞섭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요트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 횡단에 나선다. 이들은 해사 교내 요트 동아리 3,4학년 생도 25명과 인솔 장교 등 총 32명.특히 5명은 여생도이다. 이들은 크루저 탐험대를 구성해 오는 12∼14일까지 부산∼일본 대마도∼진해를 잇는 총연장 146마일(253㎞)의 해역에서 요트를 타고 거친 파도를 가르며 항해할 계획이다. 3척의 대형 요트(크루저)에 나눠 타고 12일 오전 1시 부산 수영만을 출발할 이들은 체력과 담력을 키우기 위해 부산∼진해를 오가는 혹독한 요트 항해훈련을 해왔다.‘훈련에는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방침에 따라 여 생도들 역시 남 생도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3개월간의 거친 훈련을 꼬박 받았다. 이들은 항해 시작 후 9시간 만인 12일 오전 10시 대마도 히타카쓰항에 도착,조선사절단 숙소와 2차 세계대전 유적지 등을 답사하게 된다.이어 13일 오후 8시 대마도를 출발,다음날 오전 11시쯤 진해 해군사관학교 부두로 돌아올 예정이다. 항해하는 동안 한국 영해와 공해상에서는 해군 3함대 구조함이,일본 영해에서는 대마도 해상청 경비함이 각각 초계활동을 펼치게 된다. 항해에 참가하는 최은영(22·3학년) 생도는 “바다를 직접 체험하는 게 매력적이어서 도전하게 됐다.”고 참가 배경을 밝힌 뒤 “어떤 험난한 파도라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중국의 동북공정 대응논리 찾아라

    중국 쑤저우(蘇州)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회의에서 북한과 중국이 각각 신청한 고구려 유적에 대한 개별 등재가 확정된 가운데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이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관련한 첫사업을 시작해 주목된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중국 정부·학계의 총체적인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에 맞서 대응논리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 예산으로 설립됐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었다.그러다가 최근 2004년도 공동기획연구 및 자유연구과제를 선정,이를 위한 공모 공고를 낸 것이다. 연구재단이 내건 총31개의 공모 과제는 재단에서 지정한 과제를 연구자 5인 이상이 수행하는 공동기획연구(6과제)와 개인,또는 복수의 연구자가 재단 설립 취지에 맞춰 자유롭게 수행하는 자유연구(25과제)의 두 가지로 구성된다. 이가운데 공동기획연구에 포함된 6개 과제는 ▲고조선과 부여의 주민구성 및 국가형성▲고구려의 국가형성▲고구려의 고분벽화 연구▲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연구▲한·중 외교 관계에 대한 연구▲근대 한·중·일·러의 국경 획정과정 연구이다.지원금은 과제당 5000만원.한편 자유연구는 연구자 4인 이상이 참여하고 4개 이상의 세부주제로 구성되는 5개 ‘공동연구’(지원금 과제당 4000만원)와 한 사람이 하나의 과제를 정하는 20개 ‘단독연구’(지원금 과제당 1000만원)로 구성된다. 자유연구의 범주는 ▲한민족의 형성▲동북아 고고학▲고조선사▲부여사▲고구려역사▲고구려 문화▲발해사▲고대 한·중 관계사▲고려-근대 한·중 관계사▲고려-근대 한·일관계사▲고려-근대 영역문제▲근대 민족 문제▲북방민족사▲한·중·일 역사인식 등이다. 관련 서류 접수는 10일 낮12시까지 마감하며,선정 결과는 이달중 통보한다.(02)2118-1700.˝
  • 러·日·몽골 “중국 고구려사 편입 난센스”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가 28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개막됐다.새달 7일까지 계속될 이 총회에서는 북한과 중국이 함께 심의를 요청한 ‘고구려 유적’이 동시에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될 것이 확실시된다.세계유산위 총회 개막일에 맞춰 한국JC(중앙회장 박상용)와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서경대교수)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고구려의 정체성’이란 주제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몽골 터키의 학자 81명이 참가해 30일까지 진행하는 이 학술회의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의 허구성을 비판하고,고구려뿐 아니라 중국 인접 민족과 국가의 학자들의 발제문과 토론을 통해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리여서 각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중국과 제3국 학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요약한다. ■ 중국의 입장과 반론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당초 3명의 중국 학자가 참가해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중국 정부가 세계유산회의 기간 중 학자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불발에 그쳤다.대신 중국학자들은 논문을 보내와 ‘고구려는 동북지역의 고대민족이며,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일제히 반발하며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우선 쑨진지(孫進己) 중국 선양동아연구중심 주임은 “고구려를 고려,오늘의 조선인으로 보는 선입견을 배제해야 하며 역사귀속과 현실의 계승을 분명히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와 중·한의 관계 및 귀속’이란 발제문을 통해 “왕씨 고려가 고구려의 3분의1의 토지와 4분의1의 인민을 계승했기 때문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지만 고구려의 다른 3분의2의 토지와 4분의3의 인민은 중국이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단지 조선(한국)인의 선인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특히 “고구려가 건립 초기 한(漢) 현토군 관할하의 한개의 후국이었고 후에 왕국으로 승진했으므로 고구려의 전기에는 조선(한국)역사상의 정권의 관할에 속할 수 없었고 후기에 고구려가 비록 중국의 중원의 전란을 틈타 중국의 많은 군현을 점령하였지만 고구려는 시종 중국의 역대 정부가 책봉한 고구려왕의 직을 접수하고 조공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에 고구려가 고조선 부여 신라 백제 등과 함께 기재되어 있고 조선시대 편찬된 동사강목,동국통감 등에도 고구려가 기재되어 있음을 들어 그것은 선입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박했다.최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을 문제삼아 두나라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공책봉관계는 남북조시대 중원왕조와 주변 제국의 군장들 사이에 책봉을 통한 외교적 관계에 불과하다.”며 “역사적 계승관계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후대에 누가 계승의식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응대했다. 장잉(張英) 지린성 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장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중국학자의 관점’에서 “중국학자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점은 일관되게 ‘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이란 점이며 일부 ‘일사양용론’(一史兩容論),혹은 고구려가 고대조선(한국)의 국가임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최근 모두 고구려사의 중국사임를 강조하고 있다.”며 그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 영토에 건립됐고 줄곧 중원왕조의 신복으로 책봉받았음을 들었다. 이에 대해 장보영 경북대 교수는 “고구려가 동북지역에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동북지역이 항상 중국민족의 영역인가.”라고 묻고 “중국역사상 여진의 금,거란의 요,만주의 청 등은 비중국민족으로 동북지역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했지만 중국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문화와 통치방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들이 후에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해서 이들을 중국인이라 부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제3국 학자들 입장 ●1세기에서 7세기에 걸친 왜(倭)와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의 성격에 대해(후루하타 도루·일본 金澤大學) 고구려가 존재한 시대의 왜(倭)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 관계를 검토하면 일본은 ‘외(外)’,즉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의 밖의 존재로서 자리매김됐다.고구려·백제·신라에서는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와 ‘외’의 이중성이 나타난다.이것은 한(漢)무제(武帝)가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해 ‘내’에 편재한 것과 관계돼 있다.중국왕조로서는 직접 통치할 수 없어도 그 땅까지 황제의 지배가 미친다고 이해한 것이다.그렇더라도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분리,취급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당대 사료에 보이는 ‘해동삼국(海東三國)’용어는 삼국을 일체의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현재의 중국이 고구려만을 분리해서 ‘고구려는 중국사(史)상의 변경지역민족정권’으로 주장함이 얼마나 비역사적인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몽골과 한국의 관계에 대하여(A 오치르·몽골국립역사박물관장) 고구려의 대부분 영토는 오늘날 한국인이 사는 지방 이외의 땅으로 분리되어 나갔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만들고 국가정책을 세우고 정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은 한국인이다.어떤 지역사회의 역사는 국가역사의 한 부분이다.그 국가를 최초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해 정책을 만들어 통치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 어느 민족의 정권임이 명확히 드러난다.고구려를 만든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며 고구려 역사도 한국의 역사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고대 한국인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아바예프 N 비아체스라보비치·러시아 투바대학) 원(原) 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 등과 맞물려 중요한 주제다.사얀-알타이 지역의 지명·인명이나 한국 고대문화의 주몽신화와 단군신화도 사얀-알타이민족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사에서의 유사성을 보여준다.그러나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특히 중원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았다.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쌍비,고대 투르크,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이 인종적·민족적 원류를 갖추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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