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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도 인정 감격”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로 그동안 차별만 받았는데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됐습니다.” 15일 제 61주년 광복절에 정부로부터 뒤늦게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이효정(93) 여사는 생존한 여성 독립운동가 중 최고령이다. 이 여사는 14일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아이들까지도 사람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서운함을 내비치면서도 “뒤늦게라도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아 이제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된 느낌”이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사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노동운동가로 이번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이재유(1905∼1944) 선생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인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재유 선생 등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으로 혹독한 고초를 겪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이 여사는 1920년대 후반 고교시절인 동덕여고보 입학 때부터 동맹휴학 및 독서회 참여 등으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던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 등과 만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종조부 등의 영향이 컸다. 이 여사는 “당시에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항일운동을 하려 할 때”라며 “어린 마음에도 일본 아이들을 보면 미운 마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33년 종고모가 서울 종연방직 제사공장에 다니던 것을 계기로 공장 노동자들의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데 동참했다.1935년에는 자신의 모교인 동덕여고보에 몰래 들어가 후배들의 책상 서랍에 항일격문을 넣고 나오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 수차례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적색노조’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여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서울신문 102년-서울신문의 어제] 겨레와 동고동락 서울신문의 102년

    [‘서울신문 102년-서울신문의 어제] 겨레와 동고동락 서울신문의 102년

    서울신문이 겪은 정치적 격랑은 100년 역사의 신문이 쌓아온 문화적 의미마저 짓눌러왔다.‘총독부 기관지’‘군사정권 선전도구’라는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 가려 서울신문이 한 세기 역사속에 남긴 문화사적 족적마저 축소되고 폄하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창간 초 대한매일신보 시절은 물론 일제 강점기 매일신보, 광복 후 서울신문으로 신문의 맥을 이어오면서 한국 근현대문화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춘문예 효시가 된 소설 현상공모를 처음 도입했는가 하면 춘원 이광수의 ‘무정’, 정비석의 ‘자유부인’, 김주영의 ‘객주’ 등 연재소설들은 한국문학사의 자양분이 되었다. 또 한글판 서울신문 발간과 한글전용 단행, 최초의 시사종합 월간지인 ‘신천지’와 시사주간지 ‘주간 서울’ 등을 창간하며 한국 언론역사에 다양성을 부여했다.1904년 창간 이후 격동의 한 세기를 넘기며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서울신문이 우리 근현대 문화사에 남긴 족적과 의미를 살펴본다. 매일신보는 광복과 함께 총독부 기관지란 굴레를 벗고 민족의 공기(公器) 서울신문으로 거듭태어나게 된다. 한국 전쟁 발발전까지 특히 눈에 띄는 행보는 ‘신천지’와 ‘주간서울’ 창간이다. 훗날 한국 잡지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로 남게 되는 신천지는 서울신문과 짝을 이루는 월간 종합시사지로 1946년 2월 창간됐다. 신천지는 창간이래 좌우익 논쟁과 정부수립을 전후한 혼란기에서 6·25 및 휴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만 9년동안 통권 68호를 기록했다. 광복 후 6개월동안 100여종의 잡지가 쏟아져나왔으나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거나 기껏해야 5호를 넘기기 어려웠던 당시에 신천지는 ‘잡지 전장(戰場)의 유일한 생존자’로 불렸다. 신천지가 선택한 국판 크기는 뒷날 우리나라 월간지의 대표적 판형이 되며,200여쪽에 이르는 분량도 100쪽 안팎의 다른 잡지를 압도했다. 1948년 10월엔 국내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 서울’을 창간했다. 빈약한 타블로이드 판형의 지면에 정치 기사 일변도였던 일간지들이 일반 독자의 수요를 고루 충족시켜주지 못하던 상황에서 다양한 분야의 관심거리를 다루었던 주간서울은 창간 즉시 큰 인기를 모았다. 악화일로를 걷던 식량사정을 파헤친 ‘국민의 식생활은 안도되는가’, 반민특위 재판으로 서리를 맞은 육당과 춘원의 저서 회수 소동, 국내 음악계 동향과 각종 취미오락 등 각계 각층의 독자 취향을 염두에 두었다. 서울신문은 이후에도 연예주간지 시대를 연 ‘선데이서울’ 창간, 고급 지성지 ‘서울평론 창간’, 최초의 TV연예주간지 ‘TV가이드’, 계간 예술비평 전문지 ‘예술과 비평’ 등 대중과 고급을 아우르며 잡지 트렌드 메이커로서 역할을 해냈다. 잡지 발간과 함께 단행본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광복과 전쟁의 혼란기 전단지 수준의 정치선전물이 주류를 이루었던 상황에서 서울신문 출판물은 단연 돋보였다. 신채호의 ‘단재저작집’과 ‘조선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상하)와 ‘오천년간 조선의 얼’, 홍기문의 ‘훈민정음 발달사’와 ‘조선문법연구’ 등이 대표적이며, 박은식의 역사서도 여러권 출판했다. 연재소설의 맥은 서울신문에서도 꾸준히 이어졌다.1940년대의 암울한 생활고를 그린 주요섭의 ‘대학교수와 모리배’, 무능한 지식인 남편과 자유분방한 아내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그린 최상덕의 ‘새벽’ 등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54년 1월1일부터 8월6일까지 연재됐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전무후무한 화제와 논란을 불렀다. 완고한 학자 남편과 가정에 권태를 느껴 뭇남성들과 다방, 댄스홀을 드나드는 여주인공의 대담한 행태는 장안의 화제로 번져갔고, 자유부인이란 단어는 곧 바람난 주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회적 파장도 컸다. 특히 교수사회가 발끈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는 대학신문에 ‘작가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비판의 날을 세우자 작가는 서울신문을 통해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고, 황 교수 또한 서울신문 기고를 통해 재반박했다. 서울신문은 논쟁의 당사자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다는 차원에서 황 교수의 재반박 기고를 실어 독자들과 문화계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홍순엽 변호사의 ‘자유부인 작가를 변호함’이란 글, 문학평론가 백철의 ‘문학과 사회와의 관계-자유부인 논의와 관련하여’란 평론이 나오는 등 ‘자유부인’발 문화적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1979년 6월부터 1984년 2월까지 연재한 김주영의 ‘객주’는 서울신문 최장기 연재소설로 ‘자유부인’이래 가장 많은 독자를 모았다. 이 소설은 신문소설사뿐 아니라 한국 문단에 있어서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후기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보부상을 비롯한 백정·기생·천민의 사랑과 애환이 장강처럼 굽이쳐 흐르는 소설이다. 문학 분야와 함께 서울신문이 특히 높은 비중을 두었던 게 한글문화 보급이었다.1956년 10월18일 나온 ‘한글판 서울신문’은 언론사 및 국어사에 일대 사건이었다. 기존의 서울신문과 병행, 석간으로 선보인 한글 전용 지면은 외솔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 한글학계는 물론 독자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한글신문 탄생의 기쁨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글판 신문을 별도로 발행했던 서울신문은 1968년 11월22일 전지면의 한글 전용을 단행했다. 국내 일간지로는 유일한 한글 전용이었다. 이후 1970년 1월1일 ‘온국민이 모든 분야에서 한글만 쓰도록 하라’는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었고, 국한문 혼용체와 문어체를 고수하던 각 신문사도 한글 전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신문협회도 한글 전용을 위한 연구기구를 설치,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신문은 신문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한글문화 보급과 정착에 촉매 역할을 한 셈이 됐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유관홍 전 현대重 사장 성동조선 회장으로

    유관홍 전 현대중공업 사장이 신생 조선사에서 못다 이룬 꿈을 키우게 됐다. 경남 통영의 신생 조선소인 성동조선해양은 2일 신임 대표이사 겸 회장에 유 전 사장을 선임했다. 성동조선은 유 전 사장이 지난 2002년 현대미포조선 사장으로 임명돼 흑자회사로 변모시키는 등 세계적인 조선산업 전문가로 명성을 날려 영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성동조선은 군인공제회가 500억원을 투자해 지분 33.33%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업체로 현재 확보한 수주잔량은 총 58척(138만 CGT),30억달러에 이른다.STX조선, 한진중공업에 이어 국내 8위 규모다.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유아독존에 대한 두 줄기 눈물/원철 대한불교조계종 신도국장

    산호침자상(珊瑚枕子上)의 이행루(二行淚)여(산호베개 위를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이여!) 반시사군(半是思君)이요 반한(半恨)이라(한 줄기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이요, 한 줄기는 그대를 원망하는 것이라.) 수절하는 과수댁의 마음을 읊은 것 같기도 하고, 실연당한 남정네의 연시 같기도 하다. 사랑과 미움이란 동시교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애(愛)와 증(憎)은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 아니라고 했다. 흔히들 가장 비참한 사람은 미움받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경우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고전적인 미움은 언젠간 돌아오리라는 희망의 여지를 담고 있는 미움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에 잊혀짐이란 완전히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거기에서는 밉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계산빠른 요즘 세대들은 미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잊혀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훨씬 선적(禪的)이다. 그런데 이 선시는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 줄기씩 나누어서 자기감정을 이입(移入)한 표현도 멋있거니와 동시에 미움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을 동시에 간파하고 있는 탁월한 중도(中道)법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연시의 대상은 부처님이다. 작가는 송나라 때 만암치유(萬庵致柔)선사이다. 부처님 오신날 거룩한 말씀을 마치고서 마지막 마무리로 내린 게송(偈頌)이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당신의 솔직한 애증의 마음을 동시에 드러낸 그래서 어찌보면 참으로 제대로 된 찬탄이라고 하겠다. 일방적인 칭송은 찬탄이 아니라 아부에 가깝게 되어버리는 것이 세상언어이기 때문이다. 깨친 성인을 임으로 여기며 혼자 사는 수행자들에게 불조(佛祖)는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잠시나마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도생활이 만족스러울 때야 ‘부처님 따따봉’이지만,365일 늘 그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애초에 제 생긴 대로 살도록 내버려둘 일이지 괜히 세상에 출현하시어 ‘너도 부처인데 왜 중생놀음을 하고 있느냐.’는 그 한마디에 속아 ‘나도 부처되리라.’라고 다짐하며 부지기 숫자의 인물들이 집을 나왔다. 재가자의 신분으로 머리카락을 가진 채 도인의 위치까지 올랐고 나중에는 모든 가족까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 방온(龐蘊·?∼808)거사도 처음에는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장으로 가다가 마조선사의 선불장(選佛場:부처뽑는 집)으로 발길을 돌린 일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뒷날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선사라고 불리는 수재 거사는 그 길로 출가를 해버렸다. 장안(長安)으로 가던 도중 주막에서 만난 한 선승으로부터 관리가 되기 위한 과거보다는 부처가 되기 위한 과거가 더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 한마디가 괜히 잔잔한 호수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격이라고 하겠다. 이런 상황을 보고서 후일까지 입을 닫고 있을 선사들이 아니다. 엄숙한 부처님 오신날 모두가 연등을 올리면서 진리의 길을 밝혀주신 그 공덕을 찬탄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송대 절조 감(絶照 鑑)선사는 “갓 태어난 부처님으로 인하여 천지에 가득 번뇌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하여 간덩이가 배 밖에 나온 소리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표현에 있어서 감각의 차이는 있지만 수행길이 만만찮은 일이 아님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미 닦여져 있는 그 길마저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원망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역으로 당신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각각 성분이 다른 두 줄기의 눈물로써 초파일에 참회와 동시에 우러러 추앙했던 것이다. 원철 대한불교조계종 신도국장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지음

    일본의 조선지배는 군인과 경찰, 관료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지배구조는 오히려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조선에 이식된 수많은 ‘풀뿌리 식민자’들을 통해 유지됐다고 할 수 있다. 개항 당시 54명에 불과했던 조선 내 일본인은 식민 지배 말기인 1942년에는 75만명을 넘어섰다. 이 숫자는 일본의 작은 부현(府縣)의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요컨대 식민지는 일본 자본주의 모순의 분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은 군인에서 상인, 게이샤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일제 ‘풀뿌리 식민지배’의 실상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일본 쓰다주쿠대 국제관계학 교수.1876년 조선 개항부터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일본 식민지배의 양상을 실증적으로 밝힌다. 개항 직후 조선으로 거류민을 가장 많이 보낸 지역은 전통적으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나가사키였다. 강점 이후에는 지역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야마구치나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와 주고쿠 지방이 주를 이뤘다. 식민 후기로 갈수록 관리와 경찰이 늘어나면서 도쿄 등 대도시 출신자들과 홋카이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방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주 초기에 건너온 일본인 중에는 조선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대륙낭인들이 많았다.1894년 7월 대원군 추대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도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중심으로 한 대륙낭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면화 재배나 철도 건설, 식림사업 같은 일들은 자신들이 베푼 시혜로 여겼다. 그런 만큼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편견은 극심했다. 한 예로 한국의 온돌에 대한 편견은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8년 조선 주둔 일본군으로 복무한 나가이 요시는 “온돌제 군인들 머리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온돌방에서 잠을 자면 모두 바보가 된다고들 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조선의 민예를 연구한 야나기 무네요시나 아사카와 다쿠미처럼 조선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사랑한 일본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책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눈길을 끈다. 첫째는 자신들의 행동이 훌륭했다고 강변하는 부류다.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 사장으로 수풍댐을 건설한 구보타 유타카, 경성제국대 교수로 대륙병참기지론을 편 스즈키 다케오, 전남 지사를 지낸 경찰 출신의 야기 노부오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 전후 대장성 재외재산조사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스즈키 다케오는 “…비참한 상태에 있던 조선경제가 병합 이후 불과 30여년 사이 오늘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룩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고 단언, 일본 정부가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두번째 유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경성회·인천회·벌교회 같은 동향회를 만들만큼 식민지 조선을 그리워하던 부류. 그리고 세번째 유형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비판을 가하는 부류다.‘조선식민자’의 저자 무라마쓰 다케시,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 조선사연구회 회장을 지낸 하타다 다카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자아비판파’다. 저자는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는 말로 책의 집필의도를 밝힌다. 그동안 식민정책사는 한국사의 영역으로 간주해 중요하게 다뤄왔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마치 일본사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져온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 내 일본인에 관한 국내 학계의 연구를 자극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소농사회론은 근대 바로보는 틀”

    “소농사회론은 근대 바로보는 틀”

    “소농사회론을 경제사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잘했다, 성공했다는 결론밖에 안 나옵니다. 정치·사회구조와 함께 봐야 지금의 문제점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농(小農)사회론’. 일본학계가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설명하기 위해 내세운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식민지·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을 높게 평가하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을 통해 소개되다 보니 껄끄럽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 소농사회론자, 미야지마 히로시(58)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소농사회, 국가에 대한 반성이 없다 소농사회론은 소규모 자급자족농(小農)들이 밀집해 살고 있던 동아시아는 대규모 부농(富農) 중심의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였다. 그래서 근대화의 길도 달랐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동아시아가 성장하면서 나온 이론이라 왠지 합리화의 냄새가 짙다. 미야지마 교수는 그러나 결과로 합리화하는 이론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소농사회론은 한마디로 유럽과 비교해 동아시아에는 봉건지주, 즉 국가권력에 저항할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근대화의 출발인 토지개혁은 빠른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완수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항받지 않은 왕권이나 국가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다는 문제를 낳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와 ‘시민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는 것. 동아시아의 민주주의가 부진한 이유다.“‘민원’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세금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서비스라 생각하지만, 동아시아 사람들은 마치 국가가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여깁니다.” 미야지마 교수는 60년대말, 신좌익 열풍이 휩쓸 때 교토대학을 다녔다.‘일본의 386’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는다. 다이내믹한 한국이 부럽다는 말도 했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와 우경화 문제와 함께 생각하면,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소농사회론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럽식 기준에서 벗어나자 소농사회론은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구분도 무너뜨린다.“그 3분법은 르네상스 때 서구인들이 만든 겁니다. 중세는 암흑기였고, 자신들은 옛날옛적 고대 그리스의 이상향을 되살리는 사람들이라 설정한 겁니다. 철저히 서구의 기준이죠.” 그런데 동아시아는 아무 고민 없이 고스란히 베껴왔다.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동아시아에서 의미있는 시대는 ‘16세기’(조선중기)부터다. 그때의 전통이 지금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어서다. 근대사 연구가 19세기 개항 때부터가 아니라 16세기 조선사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자학’도 긍정적이다.“사회의 토대인 ‘소농’을 어떻게 통치할까 생각해보면, 주자학은 정말 기가 막힌 이론 체계예요.” 세계사적으로 비교해봐도 토지의 사적소유, 과거제와 관료제, 미약한 신분제 등을 담은 주자학은 가장 선진적인 이론체계였다. 인권·민주주의 개념은 없었다지만 가장 근대적이기도 했다. 이것을 중국은 송나라 때, 한국은 세종대왕 때 이미 성취했다. 이렇게 보면 전통은 ‘낡아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극복되지 못해서’ 문제다. ●“식민지근대화론? 그런 건 없다” 도쿄대 교수로 일본에서도 속된 말로 ‘잘나가는’ 학자였던 그를 2002년 성균관대가 불렀을 때,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유명학자 초빙은 좋은데, 왜 하필 저 사람이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의 주장을 차분히 듣다 보면 그에게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꼬리표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이야 “그래도 (오해가) 많이 풀렸죠.”라며 선선히 웃을 정도는 됐다. 그래도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여전하다.“그 말 자체에 부정적인 선입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식민지근대화론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경제사 연구자로 대표적 식민지근대화론자로 꼽히는 안병직·이영훈 서울대 교수와도 친분이 깊다. 지난주에는 안 명예교수의 병문안도 다녀왔고, 이영훈 교수와도 자주 교류한다. 그래선지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에 이르기까지, 이 교수의 최근 활발한 대외활동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기본적으로는, 훌륭한 연구자예요. 그런데…. 지난해에 소주 한잔 하면서 정치적인 그런 거 말고 연구자로서 가자, 그러니 알았다고 하긴 했는데….” 미야지마 교수는 소농사회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집대성한 저작을 준비 중이다. 벌써 10여년째 씨름 중인데 80%쯤 완성됐다고 한다. 빨리 내달라고 재촉 아닌 재촉을 하면서도 빨리 나올 수 있을까 걱정된다. 인터뷰할 자리조차 잡기 어려울 정도로 책으로 뒤덮인 연구실은, 그가 ‘아직도 욕심 많은’ 연구자임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선시대 삶의 파노라마

    18세기 조선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자기 앞에 넓은 소매의 도포에 술띠를 두루고 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면 대번 양반인 줄 알았다. 연암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상민 신분의 비애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듯, 그들은 양반에게 “몸을 꾸부려 어찌할 줄 모르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조선사회는 한마디로 신분사회였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의식주에 따라 신분이 드러났고 국가의 정체성과 개인의 삶이 유지됐다.‘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한국고문서학회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은 의식주를 통해 조선시대 생활사 전반을 살핀 흥미로운 책이다. 조선 후기 풍속화와 고문서를 매개로 당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한다. 풍속화는 신분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양감사향연도’ 가운데 한폭인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를 보면 당시의 복식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책은 그림 속 등장인물들에 일련번호를 매겨 양반·중인·상민·천민의 남성의복 등을 분석하며 18세기 신분제와 관련된 다양한 문화적 양상들을 짚어나간다. 도포는 양반 신분의 상징이다. 고려시대의 깃이 곧은 직령(直領)에서 유래한 도포는 사대부가 예를 차리기 위해 입는 것으로, 그들의 평상복이자 출입복이었다. 도포의 색깔은 여러 가지였다. 평상시에는 백색 도포를 입었고, 길복(吉服)으로는 옥색이나 연갈색을 입었다. 청색의 청포도 있었다. 도포 외에 반(班)과 상(常)을 가르는 신분의 상징을 하나 더 든다면 술띠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풍속화를 보면 양반의 가슴에는 반드시 술띠가 둘러져 있다. 하지만 상민은 조선시대 금제(禁制)에 따라 술띠를 착용할 수 없었다. 술띠야말로 양반의 도포를 진정 도포답게 만드는 중요한 장식이었다. 우리 민족의 식문화의 중심은 단연 밥이다. 삼국시대까지 밥은 곡물을 시루에 넣고 찌는 증숙반(蒸熟飯)이었다. 시루에 찐 밥은 술밥같이 꼬들꼬들해 가마솥에서 지은 찰기 흐르는 밥과는 큰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솥을 이용해 밥을 짓는 자숙반(煮熟飯)이나 취반(炊飯)이 일반화됐다. 이 책에서는 ‘미암일기’‘묵재일기’등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다양한 일기 자료를 활용해 당시 식생활 문화의 실상에 다가간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쌀밥에 고깃국’을 최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환곡을 받아 생활하던 하층민에게는 그림의 떡. 상당수의 하층민들은 보리를 수확하는 5월부터 가을걷이를 하는 9월까지 쌀이나 조 대신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다. 보리가 생산되는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까지의 ‘맥절(麥節)’에는 보리를 더 싸게 사들이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의 대식(大食)습관을 다룬 대목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조선 전기 훈구파의 거목 이극돈은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먹을 것을 아끼지 않아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 치운다고 개탄했다. 조포석기(朝飽夕飢)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아침에 양식을 다 먹어치워 저녁에는 굶는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주거생활은 어땠을까. 책은 호구단자와 준호구, 가옥문기, 가좌책 등을 면밀히 분석해 그들의 주거 양태를 밝힌다. 책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셋집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주거생활에서 온돌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대목. 온돌방은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공법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점차 보급됐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도 관청이나 부잣집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이었으며, 그것도 주로 병자나 노인의 방에만 설치됐다. 온돌이 민간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대략 16세기경으로, 그전까지는 입식생활이 주를 이뤘다. 의식주의 역사는 그동안 복식사나 음식사, 건축사 등 각각의 영역에서 통사적으로 혹은 양식적으로 다뤄져 왔다. 이 책은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보다 대중적인 시각에서 의식주의 생활사를 한데 아우른다. 조선 풍속화와 고문서를 고리로 학제간 연구의 폭을 한층 넓혔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1만 7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조선 최고의 명저들/신병주 지음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 최근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물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도쿄대로 반출된 오대산 사고본에 대한 환수가 추진되고 있고, 의궤는 실록에 이어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된 상태다. 조선사가인 서울대 규장각 신병주 학예연구사가 쓴 ‘조선 최고의 명저들’(휴머니스트 펴냄)은 이들 실록과 의궤를 비롯, 조선의 시대상과 그 시대 사람들의 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물과 서책 14권을 엄선, 역사학자의 눈으로 쉽게 풀어헤쳤다. 기행문에서 일기, 보고서, 문집, 관찬기록 등 국보급 기록물에서 당대 베스트셀러까지 명저들의 특징과 함께 관점과 맥락, 인물과 사건, 현재적 의미까지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평소 고전을 어렵게 느낀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선이 기록과 서책의 문화역량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조선왕조 500년간 이어진 방대한 편찬사업의 산물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문치주의 확산의 촉매제였다. 학자 등 개인들도 문집이나 일기를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기록, 책으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건국의 주역 정도전과 의녀 장금도 등장한다. 실록 뿐 아니라 승정원일기에 담긴 국왕 비서들의 기록에서는 세종은 육식주의자, 영조는 채식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체계화한 성문헌법인 ‘경국대전’에는 당대 사람들의 합리성이 담겨 있다. 조선왕실의 행사기록을 생생하게 담은 ‘의궤’는 당시의 높은 그림 수준을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시대에도 삶의 모습을 후손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과제로 던져준다. 국가적인 토목공사의 추진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한 ‘준천사실’에서는 왕들의 국가경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나 최부의 ‘표해록’은 축적된 지적 역량과 해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보여준다.‘난중일기’에는 장군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으며, 허균의 ‘홍길동전’은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지식인의 궤적을 보여준다. 백과사전인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을 통해서는 조선시대에 대한 지식을 폭을 넓힐 수 있다.18세기 우리 국토를 답사하면서 산천·풍수·인심을 논한 ‘택리지’는 당대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책을 손에 들고 국토를 유람하는 붐을 낳았던 베스트셀러였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궁중생활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며, 박지원의 진취적인 세계주의 사상이 담긴 ‘열하일기’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에 필요한 새로운 지혜를 던져준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기록유산들 속에는 삶의 가치와 역사,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대를 이끌어간 고민과 사상의 깊이를 책 한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다.1만 5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19) 궁(宮)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19) 궁(宮)

    삼국시대 이래 조선조까지 우리의 역사는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왕조체제였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5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사회에서 정치·행정의 중심지였던 궁궐은 그 시대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의 공간이며 생활 공간이다. 궁궐은 신전이나 종교건축과 더불어 규범과 격식을 갖춘 당대 최상의 건축물이다. 건물들은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으며 저마다 쓰임새가 달랐다. 기능에 따라 정사를 위한 정무 공간,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공간,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공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무공간이 앞에 오고, 생활 건축물은 뒤편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궁궐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다. 당시 전체주의적 의식구조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우선 자연을 생각하고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규모와 비례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은 명실공히 조선의 정궁(正宮)으로서 건국의 의지와 왕도(王都)에 따르는 명당 풍수설, 유교 사상 등이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종묘는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음악과 함께 연주 장소로서 독특한 건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위패를 모신 각각의 신실(神室)도 눈길을 끈다. 신실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나 건물 칸마다 한 왕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되어 있다. 월대의 한없이 넓게 펼쳐지는 돌바닥도 정전 앞 공간의 엄숙함과 고요함을 더해 준다. 조선의 궁궐은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현대식 콘크리트 숲속에서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과거의 건물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600년 전과 다름없는 종묘의 제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문화적 경이라고 하겠다. 전제군주 국가에서 왕실의 권력을 표현하는 복식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조선의 궁중의상은 종류와 재료는 물론 색상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 주고, 왕비의 기품과 우아함을 느끼게 해 준다. 흔히 왕이 집무시에 착용한 예복으로 알려진 곤룡포(袞龍袍)에는 왕을 상징하는 문양인 용을 금실로 수놓아 만든 원보(圓補)가 가슴과 양어깨를 장식하고 있다. 어느 옷보다도 화려하면서도 왕의 위엄을 더해 주는듯하다. 왕과 왕실의 건강과 가장 밀접한 식생활 문화인 궁중음식은 전통적인 한국음식을 대표한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최고의 재료가 조리기술이 뛰어난 주방상궁과 대령숙수(待令熟手)들의 손에 의해 가장 잘 다듬어져서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생활양식과 문화가 상호 교류되었던 서울 양반가의 음식이 흡사하지만 궁중음식과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관료라도 임금님께만 차리는 12첩 반상은 들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궁중문화는 500년 조선시대 문화 예술사의 실천 주역 중의 하나이다. 또 왕실의 문화는 귀족과 평민문화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교류를 통하여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에도 앞장섰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왕실문화는 바로 조선 왕실의 문화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성취한 고급문화의 정수(精髓) 자체인 것이다. 글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조선 최대 갑부 역관/이덕일 지음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거지 행색의 허생에게 선뜻 만 냥을 꾸어준 변 부자. 그의 직업은 역관(譯官)이었다. 조선 숙종연간 역시 역관 출신으로 도성 제일의 부자가 된 변승업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다. 역관이 이처럼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불우비은(不虞備銀), 즉 관아의 예비은을 사용할 있었기 때문이다. 역관은 각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 물품이 있으면 대금을 미리 받아 구입해 관아에 넘겨주고 몇배의 이익을 남겼다. 나아가 자신의 신분을 빌미로 관아의 은을 빌려 무역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엄청난 특혜였던 셈이다. 역관은 요즘으로 치면 ‘투잡스족’으로 실무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받지 못한 불운한 천재나 역사 속에서 잊혀져간 인물들을 복원해온 역사학자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씨가 이번엔 역관들의 세계를 다룬 ‘조선 최대 갑부 역관’(김영사 펴냄)을 내놓았다. 저자는 “역관은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남아 있는 사료 또한 충분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그 위상과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외교관, 국제무역상, 무기수입상, 첩보원, 개화사상가, 독립운동가…. 조선의 역관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어에 능통했던 만큼 역관은 무엇보다 외교 전선에서 빛을 발했다. 조선 초기 역관은 통역과 실무만 맡은 게 아니라 공식 외교관인 사은사(謝恩使)의 자격으로 중국에 가 외교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예종 이후 사대부들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점점 본연의 업무인 통역만 담당하게 됐지만, 역관들은 종종 명분만을 중시하던 무능한 사대부들을 대신해 중국과 외교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 땅이 될 뻔한 우리 영토를 지켜낸 김지남·김경문 부자가 그 대표적인 예다. 김지남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청나라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과 다퉈가며 조선의 입장을 관철해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역관은 조선 실물경제의 큰 손이었다. 역관들은 조선의 귀한 약재였던 인삼을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 거액의 돈을 벌었다. 또 중국과 ‘여마(餘馬)무역’을 벌이기도 했다. 여마란 사행(使行) 도중에 말이 죽거나 병이 들까봐 예비로 데리고 다니는 말. 역관들은 이 여마에 추가로 물품을 싣고 가 물건을 사고 팔았다. 이들의 중개무역은 청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중국이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중개무역을 통해 역관 자신이 누구보다 부자가 됐지만, 그들의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말미암아 조선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당시 농업을 우대하고 상업을 천시한 농본상말(農本商末)사상에 젖어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역관을 ‘역상(譯商)’이라며 멸시했다. 역관 가문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장희빈이다. 대대로 유명한 역관을 배출한 집안의 서녀(庶女)인 장희빈은 숙종 15년(1689년)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기사환국의 주역이었다. 그 뒷배를 봐준 것은 물론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 ‘역관 명가’ 인동 장씨 가문이었다. 숙종은 결국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 저자는 역관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명나라 홍등가에서 기녀를 구출해 준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상도’의 임상옥이 아니라 역관 홍순언이라는 사실, 세계 최고(最古)의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를 쓴 사람은 조선의 역관이라는 이야기, 병인양요 때 뛰어난 첩보활동으로 프랑스의 막강 함대에 맞서 조선을 승리로 이끈 역관 오경석의 일화 등을 들려 준다. 또 역관들이 천주교 서적과 서양의 선진문물을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개화사상의 주역이 됐고, 이어 한말 애국운동의 한 갈래를 이뤘다는 점도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김영사가 ‘새로운 감각의 역사서 시리즈’를 표방하며 내놓은 ‘표정있는 역사’ 시리즈의 첫 권이다. 일방적인 ‘역관 예찬론’의 혐의가 없진 않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역관 집단의 다양한 역할과 의의를 입체적으로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9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마이너리티 리포트] (5) 북한이탈 청소년

    [마이너리티 리포트] (5) 북한이탈 청소년

    친구들은 ‘한국사람’이라고 부르고 자기는 ‘조선사람’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다. 학부모 상담일이 돼도 부모에게 절대로 학교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아이들, 북한 이탈 청소년들이다. 소수자인 북한 이탈주민 중에서도 소수자에 속하는 이들은 탈북 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생긴 학습 공백이나 주변의 지나친 선심성 관심으로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다 같은 나라였잖아요. 왜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거예요?” 박지성 같은 축구선수를 꿈꾸고 만화가·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이 평범한 아이들은 왜 자기들을 남한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주지 않는지 궁금할 뿐이다.2003년 문을 연 북한이탈 청소년 방과후 배움터인 ‘한누리학교’의 꿈 많은 철부지들이 서울신문 지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기들의 생각과 바람을 전했다.(어린이들의 이름은 가명) # 북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무시하지 않게 해주세요 아이들이 처음에는 저를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북한 사람인 걸 알고 저를 따돌려서 마음에 슬픔만 가득했어요. 다시 시작하려고 다른 고장에 가서 두 달 동안 한국말을 배웠어요. 저는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5학년 때는 성취도 평균점수가 35점이었지만,6학년 때는 66.1점이었습니다. 한국 애들에 비하면 낮은 점수지만, 내 실력에는 더없이 높은 점수였습니다. 노무현 아저씨,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북한 사람이라고 무시하더라도 마음이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북한 사람 중에 한국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도 있다고요.-김지은(16·여·중1년) 올림 # 한국에서는 자기밖에 몰라요. 통일하면 망할 거래요 저는 2003년 9월에 북한을 떠나 2004년 7월에 한국에 왔습니다. 나는 한국이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못사는 나라에서 왔구나.’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한 마을에 살면 이집저집 놀러 다니고 그랬는데 한국에서는 자기들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한 고향 사람들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한국에서는 북한이 못살아서 계속 도와줘야 되기 때문에 통일이 되고 나면 한국이 망할 거란 말도 해요. 북한이 못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기도 좋고 사람들이 정도 많아요. 인식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남한 애들은 고향, 친척들이 그리운 줄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고향 생각에 밤을 눈물로 보내고 있어요. 북한에서 온 게 무슨 죄라도 되나요? 마음에 상처가 많은 우리들에게 더 아픈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이미연(16·여·중1년) 올림 # 북한에서 왔다고 빨갱이래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친구들이 굉장히 잘해 줬지만 북한에서 왔다고 동물 취급하는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북한 애들이 한국에 오면 대부분 몇 살 아래 학년에 다니는데 조금 못된 애들은 그걸 갖고 놀리고, 우리 앞에서 일부러 북한에 대해 욕을 해요. 싸우다 할 말 없으면 빨갱이라고 하는데 정말 미웠어요.-이선희(16·여·중2년) 드림 # 북한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제가 (살기)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중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을 많이 괴롭혀요.(그러지 않도록) 부탁드려요.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죽이지 마세요. 아셨죠?-한지희(12·여·초교4년) 드림 # 남한에는 왕따가 왜 있어요? 전 2002년에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1년을 지내다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북한에서 온) 어른들이 (남한에서) 힘들게 사는 것이 불쌍해요. 북한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여기 와선 쓸모가 없고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안타까워요. 그런데 왕따가 왜 있어요? 왕따 당하는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고, 다만 뭐가 좀 부족해서 그런 건가요? 전 왕따시키는 애들이 이해가 안 돼요.-박정은(15·여·중1년) 올림 # 북한에서 온 친구들도 꿈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 저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예요. 대통령 할아버지, 지금이라도 제가 축구를 하게 된다면 박지성 같은 훌륭한 선수가 되도록 열심히 연습할 것입니다. 저같이 북한에서 온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서민준(14) 드림 # 통일하면 서로 사랑하고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북한 아이들에 대해서 아주 나쁘게 인식하고 있어요. 통일이 되면 자기네 나라가 망한다고, 북한 아이들이 한국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네요. 저는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똑같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같은 나라였잖아요. 북한은 한국보다 환경이 더 좋으니까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면 환경오염이 좀 사라지고, 서로 더 사랑하고,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통령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빠라고 불러드릴까요?ㅋㅋ-한민영(15·여·초등6년) 올림 정리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기초학력 모자라 학교부적응 심각”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초학력 부진에 따른 학교 부적응과 서울과 지방의 지원 양극화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빠져나온 주민들은 대부분 중국에 머물면서 남한에 들어올 기회를 찾는다. 그러다 보니 한창 기초지식을 배워야 할 청소년들의 학습이 이 기간 동안 전면 중단되고 만다. 현재 국내 북한 이탈 청소년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실제 학력수준에 맞춰 정규학교에 들어갔지만 나이가 어린 친구들과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학교를 그만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북문화통합교육원 사무국 김영진 현장담당은 “이탈 주민의 수가 급증했던 1997∼98년의 경우 입국이 힘들어 중국에 10년 이상 머문 아이도 있다.”면서 “대안학교의 경우 학력이 인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낸 기억은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심리적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실제로 한누리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고 있다. 상담 때에도 조사를 받는 데 대한 두려움이 앞서 상담자가 기록을 하려 들면 자지러지게 놀라는 아이들도 많다. 그나마 서울에 있는 청소년들은 지원받을 기회가 많은 편이다. 하나원 교육을 마친 뒤 60∼70%의 북한 이탈 주민이 서울에 배치되다 보니 지원 단체도 대부분 서울에만 몰려 있다. 지방에 있는 청소년의 경우 어떠한 지원 시설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로 전국의 북한 이탈 청소년 지원단체 15곳 중 11곳이 서울에 있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관심이나 선심성 배려도 북한 이탈 청소년의 적응을 힘들게 한다. 때마다 이벤트성 지원이 몰려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계획을 짜고 실천하기 힘든 경우까지 생겨나곤 한다. 한누리학교 교사 안진희씨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배려해 준다며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왕따를 당할 수 있으니 그냥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라.’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이 될 수 있다.”면서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지원과 그저 또래 아이들을 보는 것과 같은 평범한 시선”이라고 설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정부 지원현황 북한 이탈 청소년들이 갈수록 증가하면서 정부는 지원 규모를 늘리고 학력인정 대안학교를 시범 운영하는 등의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북한 이탈 주민 지원은 원래 통일부에서 전담했으나 교육 수요자인 청소년이 늘면서 지난해부터 교육부에서도 지원사업을 펴고 있다. 통일부에서는 현재 고교생까지 수업료와 육성회비 등 학비 일체를 면제해 주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면 국·공립학교의 경우에는 학자금 전액을 면제해 주고,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와 절반씩 부담한다. 지난해에는 ‘북한이탈주민 후원회’를 통해 민간단체에 17억원을 지원했다. 교육부에서도 지난해 북한 이탈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공모해 단체 8곳에 1억 7000만원을 지원했다. 올해는 아직 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지원 규모는 지난해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정규학교 교사와 민간단체 교사 300여명을 대상으로 북한 이탈 청소년 교육에 관한 워크숍을 실시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한 멘토링 제도도 도입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05년 9월 현재 북한 이탈 청소년 432명이 전국 192개 정규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안학교나 방과후 배움터, 보호시설 등에 있는 청소년은 2005년 12월 현재 264명이지만 이 가운데 교육을 받는 경우는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경기도 안성에 ‘한겨레학교’라는 학력인정 대안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현재 2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시범 운영되고 있으며 2007년 140여명을 정원으로 정식 개교한다. 이 학교는 학력 인정은 물론 북한 이탈 청소년들이 다시 정규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적응력을 키워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통일부 사회문화교류국 정착지원팀 관계자는 “외국 학생들의 학업 중도탈락률이 2∼3%선인데 비해 북한 이탈 청소년은 이보다 서너 배는 많은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올해 안에 북한 이탈 청소년의 학업과 생활 전반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한 뒤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사설] 해방전후사 건전한 토론 기대한다

    1979년에 첫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반공·보수 일변도였던 한국에서 학문·저술의 자유를 여는 상징적인 책자였다. 이번에는 ‘해전사’가 좌파 시각에서 쓰였다면서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출간되었다. 다양한 학문적 견해가 보장되는 곳이 선진사회이다.‘해전사’와 ‘해전사 재인식’ 논란이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건전한 역사토론의 장에 오르길 기대한다. 건전한 토론에는 지켜야 할 금도가 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정치목적이 깔린 역사해석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해전사’의 분석이 모두 옳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해전사 재인식’이 ‘해전사’ 뒤집기에 너무 골몰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제 식민시기의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논리는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된다. 일본인 학자의 논문 형식을 빌리긴 했으나 종군위안부 피해책임을 조선사회의 모순에서도 찾으려는 시도는 위험한 시각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아직 과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일본 지도자들에게 자칫 면죄부를 줄 우려가 있다. ‘해전사 재인식’이 탈민족주의에 주목한 점은 기존 보수와 다른 관점으로 주목된다. 앞으로 학계 논의와 후속연구를 통해 국가장래에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반면 분단책임, 한국전쟁과 이승만·김일성 평가 분석에서 보수·진보라는 이념적 이분법에 매달린 부분은 아쉽다.‘해전사’를 반박만 할 게 아니라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는 문제의식을 갖는 편이 나았다.‘해전사 재인식’ 발간은 뉴라이트 네트워크 소속 학자들이 앞장섰다. 정치권과 거리를 두어야 순수성이 유지된다. 동국대 이사회의 강정구 교수 직위해제 결정은 ‘해전사’ 논란과 맥이 통한다.‘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강 교수 발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유죄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징계를 서두른 것은 유감스럽다. 미국 등의 한국학 교수들이 우리 학문의 획일화를 우려하는 서한을 보낸 사실을 새겨야 한다.
  • [토요일 아침에] 소태산에게서 배우자/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장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 마디로 고난의 시대 그 자체였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안으로는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의 민중들을 더욱 위기로 몰아간 것은 서세, 즉 서구적 가치의 만연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서학의 만연은 조선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가공할 만한 사태였다. 이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이 등장하여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불을 댕겼다는 것은 우리들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소태산의 청소년기 일화를 담고 있는 ‘원불교교사’는 그가 7세부터 벌써 깊은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우주자연 현상 등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소태산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의 열렬한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산신과 도사 등 초인적 능력을 가진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원불교교사’에 의하면, 이같은 그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하여 소태산은 결국 사색과 명상, 기도생활 등 자신의 내면적 세계로 침잠하는 커다란 방향전환을 통해 1916년 4월28일에 ‘큰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소태산의 ‘큰 깨달음’은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큰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소태산의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개인적 고난 해소에 필요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큰 깨달음’ 이후의 소태산의 삶은 개인적 고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시대적 고난 해소를 위한 새로운 정신운동의 실천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큰 깨달음’ 직후 소태산이 전개했던 정신운동으로는 저축조합운동(1917), 간척지개척운동(1918∼1919), 기도결사운동(1919)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운동은 모두 전라남도 영광이라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운동이었다는 점, 조직적 기반이 전혀 없이 전개된 운동이라는 점, 무단통치로 대변되는 식민지시대에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점 등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소태산은 마침내 1919년 가을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로 입산,1924년 봄까지 약 5년에 걸쳐 그간의 운동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종교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가 바로 1924년의 불법연구회(현 원불교의 전신)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의 창설이다. 전라북도 익산을 무대로 창설된 불법연구회는 9년 전 ‘큰 깨달음’을 계기로 치열한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해왔던 소태산이 그동안 전개했던 여러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총괄하는 가운데, 기왕의 운동을 넘어서는 새 차원의 종교운동을 열어가기 위한 결사체, 즉 새로운 종교공동체 조직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불법연구회 창설에 따른 소태산의 기쁨이 어떠했으며, 불법연구회에 거는 기대가 어떠했을까를 한번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불법연구회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새롭게 전개하고자 했던 사회변혁운동의 구체적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정신개벽운동’이었다. 소태산은 1943년 6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평생토록 파란고해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정신개벽’을 통한 낙원 건설에 모든 것을 바쳤다. 태극기와 애국가를 마음껏 보고 부를 수 있었던 날이 단 하루도 없던 암울한 식민지시대에 물질개벽을 선도할 수 있는 정신개벽운동을 통해 민중들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로서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21세기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헤쳐가야 할 숙제가 참으로 많다. 그 숙제를 푸는 지혜를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되지는 않을까. 소태산의 꿈과 실천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솜리 땅에서 소망해 본다.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장
  • [2005년 빛낸 made in KOREA] (6)세계제패 조선업

    [2005년 빛낸 made in KOREA] (6)세계제패 조선업

    3년 연속 수주량 세계 1위, 세계 톱10 조선사에 7개사 등극, 세계최대 1만TEU급 컨테이너선, 세계 최초 LNG-RV(액화천연가스 재기화 선박), 세계 최초 전후진 쇄빙 유조선, 올해의 최우수선박 싹쓸이…. 올 한해 국내 조선업계에 쏟아진 찬사들이다. 이미 세계 조선업계는 국내사들의 각축장으로 무대가 좁아졌다. 국가대표 선발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다는 한국 양궁처럼 한국 조선업도 국내 1위가 곧바로 세계 1위로 연결되는 구도다. 현대중공업 85억달러, 삼성중공업 77억달러, 대우조선해양 68억달러 등 조선 빅3의 올해 수주액은 230억달러로 지난해 210억달러보다 20억달러나 증가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달 1983년부터 23년 연속 ‘세계 최우수 선박’ 건조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현대중공업이 올해 건조한 국내 첫 선박펀드 유조선 ‘유니버셜퀸호’와 내빙설계 유조선 ‘빅토르 티토브호’,86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콜롬보 익스프레스호’가 미국의 2대 선박전문지인 ‘마리타임 리포터’,‘마린 로그’, 영국의 조선·해운전문지 ‘네이벌 아키텍트’로부터 ‘2005년 최우수 선박’에 선정된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올 초 중국에서 1만TEU급 컨테이너선을 세계 최초로 수주하는 등 8000TEU급 이상 초대형 컨테이너선 수주 잔량이 전 세계 시장의 60%인 56척에 달한다. 초대형 LPG선(8만㎥급 이상)은 수주잔량 21척(점유율 34%)으로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고 선박용 대형 엔진과 프로펠러도 35%의 점유율로 1위를 지키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LNG-RV는 지난 22일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에 선정됐다. 별도의 LNG터미널과 육상저장기지를 거치지 않고 LNG선에서 곧바로 LNG를 기화해 해상터미널에 공급할 수 있는 LNG-RV는 지난 9월 미국 뉴올리언스에 불어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도 정상 가동되는 뛰어난 성능을 발휘, 선주사로부터 감사편지를 받기도 했다. 대우조선은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72척의 LNG선 중 가장 많은 20척을 수주했고 올 들어서도 엑손모빌의 카타르 LNG 프로젝트(라스가스Ⅲ)에서 12척 중 5척(삼성중 4척, 현대중 3척)을 수주하는 등 LNG선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또 올해 건조한 5척이 세계 최우수 선박으로 선정됐다. 삼성중공업은 9200TEU급 컨테이너선, 대형 여객선, 아이스클래스 유조선 등 3척의 선박이 최우수 선박에 선정되면서 1984년 이후 2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삼성중공업은 초대형 컨테이너선(9000TEU급 이상 시장점유율 50%), 드릴십(54%), 셔틀탱커(41%),FPSO(원유시추선·52%), 내빙탱커(65%) 등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또 전후진 양방향 쇄빙유조선을 앞세워 지난달 러시아 최대 국영해운사인 소브콤플로트로부터 4억 3000만달러어치를 수주하는 등 ‘블루오션’을 창출하고 있다. 이밖에 한진중공업도 8100TEU 컨테이너선 ‘MSC 마에바호’와 3400TEU급 컨테이너선 ‘CMA CGM 엑셀런스호’가 올해의 최우수 선박에 선정되며 14년 연속 수상기록을 이어갔고,STX조선은 핸디막스·파나막스급 석유제품운반선(4만∼8만DWT급) 시장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한국 조선사들의 힘 세계 톱10에 7개사

    한국 조선사들의 힘 세계 톱10에 7개사

    수주 잔량 기준으로 ‘세계 톱10’에 7개 한국 업체가 이름을 올려 세계 최강의 위용을 뽐냈다. 일본을 제치고 3년 연속 수주량 세계 1위를 달성한 데 이어 겹경사를 맞았다. 22일 조선·해운 시황 전문분석 기관인 영국의 클락슨에 따르면 올 11월 말까지 수주 잔량은 현대중공업이 1073만CGT(표준화물선 환산 톤수)로 부동의 1위를 유지했다. 삼성중공업(762만CGT)과 대우조선해양(745만CGT)이 각각 2,3위를 기록했고 현대미포조선(379만CGT)과 현대삼호중공업(338만CGT)이 그 뒤를 이으며 1위부터 5위까지를 한국 업체가 독식했다.7위와 8위마저 한진중공업(220만CGT)과 STX(216만CGT)가 차지했다. 지난해 미쓰비시중공업과 오시마,IHI 등 3개 업체가 10권에 들었던 일본은 6위에 미쓰비시(226만CGT),9위에 쓰네이시선박(186만CGT)이 올라 체면치레만 했다. 10위는 중국의 다롄조선(166만CGT)이 차지했다. 다롄조선은 지난해 12위에서 올해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했다. 이로써 조선공업협회 9개 회원사 가운데 대선조선과 신아조선을 제외한 무려 7개사가 수주 잔량 기준으로 세계 톱10에 들었다.7개사의 비중은 올해 세계 총수주 잔량 1억 418만CGT의 30%를 넘는다. 특히 대형 선박뿐 아니라 중형 선박 건조 부문까지 독식했다. 한국은 빅3인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이 대형 컨테이너선과 초대형 유조선,LNG선 등을 만들며 대형 선박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현대미포조선은 중형선을 특화해 ‘미포 탱커’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이며 STX 또한 중형선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조선공업협회 관계자는 “건조되고 남은 일감을 나타내는 수주 잔량은 세계 조선업체의 수준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잣대”라면서 “중국의 추격세가 눈에 띄지만 현재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유지한다면 한국의 향후 독주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씨줄날줄] 최태영과 이병도/ 이용원 논설위원

    지난달 30일 105세로 타계한 최태영 박사는 한국 법학계의 선구자였다. 서울법대 초대 학장을 지낸 그는 이승만 정권때 법무부장관·대법관 자리를 여러 차례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학문과 교육에 일생을 바친 참 지성인이었다. 제헌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훗날 고려대 총장과 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1906∼87)가 그보다 6살 연하이자 학계 후배이니 어느정도 원로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가 77세 되던 해 법학을 버리고 한국상고사를 연구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최 박사가 뒤늦게 상고사 연구에 뛰어든 까닭은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의 세대까지만 해도 단군과 고조선을 의심한 일은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한국인이고 최씨인 것처럼 단군이란 존재는 그에게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원형질 자체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의 상고사 연구 선언은 수십년 지기(知己)인 두계 이병도(1896∼1989)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광복후 서울대에서 교수로 함께 있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법대 학장과 사학과 교수로 선 자리는 달랐지만 존경과 우정을 나누었다. 최 박사가 법학자로서 마지막 남긴 역저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1977년간)의 서문을 두계가 써줄 정도였다. 하지만 상고사에 관한 한 최 박사의 두계 비판은 매서웠다.102세에 출간한 저서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에서 최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를 이끈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를 “학문은 보잘것없는 자가 편찬자가 된 것을 기화로 천하 대담한 짓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병도는 그런 이마니시와 배짱이 맞아 조선인 정신 빼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천추에 욕먹을 짓을 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치 않았고 이를 토대로 최 박사는 말년의 두계에게 단군과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케 했다. 그 성과는, 둘이 1989년 ‘한국 상고사 입문’을 함께 써 발표하는 것으로 가시화했다. 최 박사는, 두계도 결국 단군을 인정했는데 후학들은 아직도 실증주의에 매달려 단군을 알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제 최 박사마저 떠났으니 어찌 해야 단군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인사]

    ■ 환경관리공단 ◇처장급 전보 △혁신기획처장 李豪均△사무〃 高在潤△측정관리〃 李斗源△상하수도지원〃 金麟燮■ 서울보증보험 △상무 玄仁均 金鍾爀△경인지역본부장 金大漢△강남〃 金煜起△영남〃 裵東和△강북〃 金基煥△신용보험담당이사 金聖鎬△감사실장 柳成悅■ 푸르덴셜투자증권 (부사장)△경영지원본부장 白基彦■ LG애드 ◇상무△프로모션본부 崔光煥△글로벌본부 李東遠 ◇본부장△미디어원 崔島榮△OOH 廉炳潤 ◇전보㈜GⅡR이사 崔熺用■ 국민일보 (광고마케팅국) △영업1팀장(부장) 김태순△영업2〃(〃) 류청하△영업3〃(〃) 유효근△영업4〃(〃) 이명하△영업4팀(부장대우) 최병희(독자서비스국)△수도권팀(부장) 임연순△지방팀장(〃) 박문종(경영전략실)△실장(국장대우) 최삼규△경영전략실 총무팀장 겸 인사팀장(부장대우) 이재만△사업팀장(국장) 김윤응■ 세계일보 △전산제작단장 겸 제작단장 洪光杓■ 매일경제 ◇승진 (부국장대우)△산업부장 조현재△윤전1〃 원태희(부장대우)△편집부 윤권찬△산업부 장경덕△교열부 김용수■ 대한체육회 ◇승진 △총무부장 천문영◇직무대리△감사평가실장 박동희△스포츠의과학부장 윤종구△ANOC총회 준비기획단장 김성철◇임용△스포츠사업부장 박현종◇해외연수△총무부 정기영(3급) 임석천(4급)■ 현대중공업그룹 ◇부사장 승진△현대삼호중공업 조선사업본부장 이석철△〃 경영지원본부장 박철재◇본부장 임명△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장 오병욱△〃 건설장비사업본부장 박규현△〃 엔진기계사업본부장 최원길■ 하나금융지주 (팀장)△재무기획 李承泰△전략기획 裵顯起△경영지원 李昌宰△리스크관리 閔基植△홍보 姜龍寬△공보 安永根△감사 柳炅兌△시너지통합 洪銀基△업무지원 李康休△IR 李正鎬△IT통합 許允碩
  • [책꽂이]

    |실용경제|●이제야 삶이 보이네(조 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밝은 세상 펴냄)달라이 라마, 넬슨 만델라 등 사랑과 존경을 받는 38명으로부터 배우는 마음의 지혜.9800원.●바보철학에서 배우는 거상의 도(정판교 지음, 스성 편저, 강경이 옮김, 파라북스 펴냄)손해 보는 것과 부드러운 것이 복이라는 등 ‘바보경영’의 지혜가 담긴 경영서.1만 3500원.●BRICS(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 지음, 월간조선사 펴냄)신흥경제대국 브릭스에 대한 전략 연구 보고서.1만 3000원.●미래를 경영하는 리더십(에가와 도시오 지음, 한유키코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글로벌시대에 적합한 리더가 되는 방법 제시.1만원.●여자가 알아야 할 20대의 모든 것(크리스틴 해슬러 지음, 김경숙 옮김, 해냄 펴냄)인생의 황금기 20대 여성 인생의 방향과 균형을 잡아주는 멘토북.9000원.●월요일의 기적(제프 켈러 지음, 김원옥 옮김, 거름 펴냄)평범한 청년과 성공한 기업가가 나눈 삶과 행복에 대한 대화.9000원.|유아·아동|●우아!크리스마스다(전3권)(정인철 외 글, 와이 외 그림, 베틀북 펴냄)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딱’인 그림동화 세트. 산타할아버지께 거꾸로 선물을 드리는 따뜻한 마음이 돋보이는 `산타할아버지께 선물을 드려요´, 할머니에서 소녀까지 대를 잇는 가족사랑 이야기 `빨간 스웨터´, 마음을 비추는 빛을 찾는 소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가장 빛나는 것은?´ 등 3권이 박스세트로 묶였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있다.4세 이상. 각권 8500원.●주인공이 되고 싶어(토미 드 파올라 글·그림, 최지현 옮김, 보물창고 펴냄) 연극의 주연을 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을 통해 주인공을 꿈꾸는 아이들의 심리를 재미있고 따뜻하게 그린 그림동화. 세상엔 주인공보다 더 많은 조연이 있어야 하며, 그들이 있어 주인공이 빛난다는 진실을 말해준다.5세 이상.8500원.|초등·청소년|●앤서니 브라운의 킹콩(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고정아 옮김, 넥서스주니어 펴냄) 피터 잭슨 감독이 또다시 영화화해 화제를 낳고 있는 ‘킹콩’을 세계적인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도 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브라운은 소통부재의 가족문제를 그림책에 담아온 작가. 뉴욕사람들이나 미녀와 교감하지 못하는 괴수의 애절한 상황을 통해 또 한번 그 메시지를 에둘러 전한다. 초등생.1만 5000원.●우등버스와 강아지(이가을 글, 이상권 그림, 달리 펴냄) 크리스천 신인문학상으로 늦깎이 등단한 이가을의 창작동화집. 고향을 잊지 못해 끝내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감나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평생 자부심을 갖고 성실히 살아온 또 다른 아버지의 이야기 ‘장 영감의 훈장’ 등 가슴 따뜻해지는 동화가 9편이나 묶였다. 초등3년 이상.8000원.
  • [경제플러스] 조선 기자재 물류센터 운영 협약

    한국조선공업협회는 29일 부산 남태평양호텔에서 부산조선기자재공업협동조합, 현대중공업 등 7개 조선사 및 협력사 회장단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기자재 공동물류센터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협력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내년 5월 가동될 조선기자재 공동물류센터는 부산시 녹산산업단지내 5000평 부지에 건립되며 산업자원부 40억원, 부산광역시 30억원, 조선업계 10억원, 조선기자재업계 10억원, 융자 27억원 등 총 117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 [우리는 맞수 CEO] 새 선박 개발 앞장 VS 유전등 신사업 진출

    [우리는 맞수 CEO] 새 선박 개발 앞장 VS 유전등 신사업 진출

    김징완(59) 삼성중공업 사장은 2001년 취임 직후 ‘2006년 세계 1등 조선사’를 외쳤고, 정성립(55)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올초 ‘2015년 매출 20조원 달성’이라는 어마어마한 목표를 내걸었다. 삼성중공업은 연 50척 건조체제, 고부가선 비중 70% 이상 등 1등의 조건을 갖추는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세계 1등인 현대중공업을 추월하지 못했다. 신사업 진출과 글로벌 생산체제 구축 등으로 매출 20조원을 달성한다는 대우조선의 목표 달성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두 CEO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면 이들의 목표가 ‘꿈’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재무통에서 현장 경영자로 김징완 사장은 1년 중 130여일을 해외 출장으로 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거제조선소에서 보낸다. 모든 문제와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지론으로 직원들과 즉석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즐긴다고 한다. 김 사장은 조선업계 출신이 아니다. 경북 달성의 현풍고를 졸업한 김 사장은 고려대 사학과 4학년이던 19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 김인주 구조본 사장,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CFO) 등 쟁쟁한 재무통을 배출한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이다. 회장 비서실 재무팀, 운영팀장, 삼성물산 금융팀장 등 그의 화려한 이력은 대부분 재무계통이었다. 하지만 93년 삼성중공업 기획관리담당 임원으로 재직할 때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가장 큰 640m짜리 제3도크 건설을 마무리지어 삼성중공업의 경쟁력을 다져놓는 등 조선과의 인연도 만만찮다. 또 재무통답게 환율관리에 초점을 맞춰 환 리스크를 100% 헤지하는데 성공했다. 김 사장은 “제조업이 환율등락에 따라 희비를 겪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선박 수주 시점부터 환헤지를 통해 이익률을 확정짓고 제조업답게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 등 본질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사장은 디지털 시대에서는 기존의 사고방식, 일하는 방법, 시스템 등을 180도 바꾸고 임직원들의 의식도 최첨단으로 무장돼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며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한다. 실제 삼성중공업은 신 선형 개발 등에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뢰, 열정, 감성의 정통 조선맨 정성립 사장은 “CEO는 회사 일에 일일이 간섭할 게 아니라 비전을 만들고, 혁신을 주도하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정 사장은 루마니아 망갈리아조선소, 오만 수리조선소, 중국 옌타이 선박용 블록 공장 등 글로벌 체제를 기반으로 2015년 매출 20조원으로 세계 조선시장의 20%를 점유한다는 웅대한 비전을 발표했다. 조선업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 유전개발에 참여했고 JR건설을 인수, 토건사업에도 뛰어드는 등 신사업 진출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 있다. 해양연구 장비·시스템 업체인 씨스캔을 계열로 편입하는 등 해저광물 탐사에도 적극적이다. 정 사장 역시 현장경영으로 유명한데 11월 말 현재 해외출장이 100일을 넘겼고 1년중 5개월은 옥포조선소에서 보낸다. 협력업체를 포함한 전 직원과 가족들에게 회사의 경영환경과 비전을 설명하는 편지를 13차례나 보낼 정도로 ‘소통’도 중시한다. 정 사장은 취임 당시 “조직내에서 권위주의를 없애자.”는 다소 ‘엉뚱한’ 목표를 내걸었다. 직원들간 벽이 없어져야 성장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정 사장의 혁신은 직급 관련 호칭(부장, 과장 등) 폐지, 조선업계 최초의 임금피크제 도입, 즐거운 직장을 만들어 주는 ‘펀 리더(Fun Leader)’ 도입 등으로 이어졌다. 금요일 무조건 일찍 퇴근하기, 호프데이, 월 1회 영화·연극 관람, 책 선물 등 대우조선의 ‘펀 경영’은 단순히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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