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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동맹의 지능적 반국가 활동상

    ◎“간첩단 사건은 조작” 언론에 투고까지/안보법 위반 구속자 공개지원/재소자 상대 주체사상 교육도 경찰이 4일 적발한 「5·1동맹」은 한때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전위조직으로서 아직도 사회 곳곳에 반국가단체가 뿌리를 뻗어나가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특히 이제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이 지능화되고 갈수록 대담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경찰 수사결과 5·1동맹은 일부 언론 매체에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고 보안법 위반 구속자나 수배자를 공식 지원하는 공개적인 활동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과거와 달리 암약의 방식에서 벗어나 느슨해진 사회 각 조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조직원들이 노동현장에서 이적표현물을 제작,배포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곧바로 분규를 유도하는 구체적인 행동강령등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심지어 경찰이 압수한 조직원들의 행동지침서인 「나의 투쟁」에는 검거이후의 투쟁방법까지 기술해 놓고 있다.검찰·경찰등 수사기관별로 그 특성을 면밀히 파악해 검거이후의 행동지침은 물론 재판과정의 진술및 재판거부 방법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옥중투쟁과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의식화운동을 벌이기 위한 세부적인 부분까지 언급해 놓아 반국가단체의 투쟁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직의 구성원은 총책과 비서팀,무장활동을 위한 돌격소조,현장노동자 지도소조등 20여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건설 투쟁 전개」를 목표로 조직강령과 규약은 거의 맹목에 가깝다.한민전의 노선을 절대적인 지침으로 삼아 무조건 따르고 「김일성을 인류해방의 붉은 태양으로 높이 모시기 위한 순교자적 투쟁」등은 이 조직이 단순한,또는 자생적인 반국가단체의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현재복역중인 간첩을 통해 김일성부자에 대한 충성의 편지를 북한에 전달하고 북한의 지령방송을 청취,이에 따라 행동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번 5·1동맹조직의 검거는 최근 쌀원조 등에서 북한이 보여준 터무니없는 행동의 근거가 우리사회 내부에도 자리하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 “최고 지도자직 김정일 곧 취임”/북 외교관

    【워싱턴 교도 연합】 북한의 사실상 지도자인 김정일은 『빠른 시일 안에』 최고지도자 직에 공식취임할 것이라고 한 북한 외교관이 지난달 31일 밝혔다. 뉴욕에 있는 유엔 북한대표부의 이 외교관은 이날 교도통신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빠르면 이달초 최고지도자 자리를 공식 계승할 것이라는 최근 보도를 확인하면서 그가 빠른 시일 내에 공식 취임식을 갖고 가장 강력한 지위인 국가주석과 조선노동당 총비서직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총선서 재기… 명예회복” 모색/복권정치인의 움직임

    ◎박철언·오용운·이태섭·김동주씨 출마 확실/박태준씨 태도 유보… 정주영씨 “절대 안해” 「8·11 대사면」으로 피선거권을 되찾은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가 내년 15대 총선을 통해 「명예회복」과 재기를 모색하겠다는 생각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신병치료차 미국에 머물고 있는 박태준 전민자당최고위원은 『건강회복에 우선 주력할 것』이라며 명확한 태도를 유보했다고 조용경보좌관이 12일 전했다.정주영 전국민당총재는 『또 무슨 정치냐』며 전혀 생각이 없다는 입장. 박철언 자민련 부총재는 『지금까지는 혼자 백의종군했고 2단계는 자민련에서 역할을 찾겠지만 이도 저도 안될 때는 새로운 결단을 하겠다』고 밝혀 「TK(대구·경북)」 독자세력화를 도모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내년 총선에서는 부인 현경자의원이 맡고 있는 대구 수성갑에서 출마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수서사건에 연루됐던 공화계의 오용운 전국회건설위원장은 청주을에서,이대섭 전의원은 서울 강남을 출마를 겨냥,각각 자민련의 조직책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알려졌다. 김동주 전의원은 오래전 경남 양산에 사무실을 개설,15대 총선 도전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민자당 조직책설도 돌고 있다. 이원배 전의원은 가칭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서울 강서갑에 출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 ○…새정부 들어 학원비리와 관련,구속됐던 김문기 전의원은 강원 지역에서 자민련 후보로 출마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전문이다. 동화은행 비자금사건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아직 구체적 활동영역을 찾지 못했다』고 당분간 관망할 뜻을 밝혔다. 이상훈·이종구 전국방장관과 이진삼 전체육부장관도 정치활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건개 전 대전고검장은 거취표명을 유보하고 있으나 엄삼탁 전 병무청장은 새정부 출범전부터 고향인 경북 달성 향우회를 이끌며 지역을 다져왔다. ○…새정치 국민회의의 김근태 지도위원은 서울 도봉갑 출마를 희망하고 있으나 신당측은 부천 원미구를 권유하고 있다. 조선노동당사건으로 구속됐던 장기표 전 민중당 정책위원장은 14대 때 출마했던 서울 동작갑 출마설도 있으나 최근 「정치개혁 시민연합」을 탈퇴하고 을지로에 사무실을 개설하는 등 「독자적 대중정당」에 미련을 표시하고 있다. 민주당의 김부겸 당무기획부실장은 서울 동작갑이나 마포 또는 출신지인 대구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 김형래 전의원과 한준수 전연기군수는 곧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 「김일성 회고록」 출판 유포/김정환씨 간첩협의 구속

    ◎북 공작금 받고 노동당 입당/출판사대표·편집장 보안법위반 구속 경찰청은 28일 일본에 있는 대남공작원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김일성 회고록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출판사에 제작을 의뢰,유포한 김정환(37·무직·서울강동구 고덕동)씨를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김씨로부터 넘겨받은 북한원전을 제작해 대학가 서점등에 판매한 「기획출판 한」 대표 유덕렬(30·경기 고양시 탄현동 607)씨와 편집부장 김천희(29·인천시 계양구 작전2동 786)씨등 2명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89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대남공작원 최동옥(74)을 소개받아 주체사상 교육을 받은뒤 92년 7월에는 『조선혁명 완수를 위한 동지가 되겠다』며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혐의를 받고있다.
  • 스탈린은 속전의 속셈(모스크바 새 증언:25)

    ◎스탈린,서방 분열 노려 한국전 지속 고집/미·중 접근을 우려… 휴전회담 결렬 모색/모에 “협상 서두르지말라”… 압력 넣기도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에도 줄곧 스탈린은 사실상 전쟁을 계속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그의 입장에서 볼때 한국전쟁은 미국의 두손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외에 서방 동맹국들 사이에 그리고 미국내 여론에도 분열을 조장하는 2중의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스탈린은 이 전쟁이 중국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고 판단했다.1930년대 모택동이 미국과 회담한 이래 스탈린은 줄곧 미·중 두나라의 접근을 우려해왔다.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스탈린은 북한과 중국 내부의 휴전지지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해 무척 애썼음이 다양한 문서들을 통해 입증된다. ○다양한 문서통해 입증 휴전회담시작전인 전쟁초기 소련의 입장을 참고로 살펴보자.50년 12월 7일 소련공산당(당시 이름은 전연방 볼셰비키공산당)은 유엔대표부 앞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평화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정치국회의록 N79.제189항) 『현재 한국전 상황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건의한 귀하의 입장은 잘못됐음.현재 미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고 완전패배를 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제의를 계속 내놓고 있음.따라서 다음 2가지 사항을 제의할 것. (1)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2)한국문제는 한국민의 손에 맡길 것.』 이와는 달리 중국·북한측은 당시 유엔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매달리고 있었다.다시 회담진행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51년 8월13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휴전회담과 관련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대통령문서소.소련군 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 N22834) 『적대표들은 38도선 획정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함.적은 현상황과 현전선에서 휴전에 들어가고 완충지대 설치를 주장함.…중략…회담진행 상황과 회담장 밖의 상황을 종합고려할 때 적이 우리의 38도선 휴전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같음.적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양보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회담을 결렬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적이 휴전개시 시점에 대한 입장을 양보할 것 같지는 않음.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음.38도선을 따라 휴전을 성사시키고 그외 부차적인 양보만 할수 있다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라면 회담결렬에 대비해야 함.본인을 비롯 우리 동지들은 적대관계 지속에 반대함.제한된 물자보급,일반적인 국제정세,우리 나라의 입장,그리고 현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38도선을 고수하려다가 회담결렬을 맞기보다는 현전선에서 휴전을 성사시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함. 그런 다음 3∼5년 동안 힘을 다시 모을수 있을 것임』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38도선 휴전 입장을 고수하기보다는 미국측 주장대로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분명하게 건의한 것이다.물론 3∼5년 동안 힘을 모아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는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탈린은 줄곧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다.51년 11월 19일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6849) 『휴전협상관련 동지의 평가에 동의함.그러나 미국이 비록 협상을 지연시키고는 있으나 조기 휴전을 보다 필요로하는 쪽은 미국임.이는 현국제정세를 봐도 마찬가지임.만약 중·조선 동지들은 협상에서 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싶다 하더라도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기 휴전을 바란다는 의중을 절대 내보이지 말기 바람』 북한측도 휴전을 바라기는 중국과 마찬가지였다.이를 입증하는 전문이 있다.이듬해인 52년 1월16일 당시 외상이던 박헌영은 중국군총사령관 팽덕회를 찾아갔다.팽덕회는 이 회담내용을 모택동에게 즉각 보고했다. 『박헌영은 조선국민 모두가 평화를 원하며 전쟁 계속에 반대한다고 강조했음.하지만 소련과 중국동지들이 전쟁을 계속하는 게 유익하다고 믿는다면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는 어떤 난관도 이기고 현재 입장을 고수하겠다고 했음. ○비타협적 입장 고수 이에 대해 본인은 현재 상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고 미군에게 불리하다고 설명하고 그런 이유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음.회담 말미에 박헌영은 자기가 말한 내용은 자신의 사견이며 노동당 중앙위와 북조선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강조했음』 한편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휴전성사를 위해 기자회견을 갖고 모종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려했다가 소련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다음은 이와 관련,52년 3월5일 소련외무부가 소련당 정치국 앞으로 보낸 전문.(문서번호 N36/35)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주바예프동지가 김일성에게 판문점 회담과 관련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다고 보고했음.라주바예프동지는 김일성에게 다음 3가지 문제에 관해 인터뷰할 것을 제의했음.첫째,미국측의 회담지연 문제.둘째,휴전조건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중립국감시위에 소련대표 참여.셋째,미국의 협상지연에 대한 북한의 입장개진. 외무부 입장에서 볼때 라주바예프동지의 견해는 절대 받아들일수 없음.그런 인터뷰가 발표되는 것은 조선·중국측이 입장이 초조해하고 안달해하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음』 소련당정치국도 3월7일 답전을 보내 (문서번호N.P86/33)『우리는 협상을 서두르지 않음.그것은 본국의 이익에 배치됨.라주바예프동지의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음』이라고 밝혔다.이렇게 해 김이 라주바예프의 이름을 빌려 시도했던 것이 분명한 인터뷰기도는 무산됐다. ○스탈린이 직접 보내 이런 가운데 김일성은 7월17일 직접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5025/sh)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요노비치동지께.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결과 우리는 휴전협상이 무한정 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지난 1년간 우리는 사실상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수비전략에 치중했음.그런 결과 적은 거의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고 반면 우리는 인적·물질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 따라서 적은 최근 조선내 여러 발전소를 파괴했으며 이를 수리할 시간여유 조차 우리한테 주지 않고 있음.52년 7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평양에 대한 단 한차례 공습으로 평화스런 주민 6천명이 사망,부상을 당했음.적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들을 내걸고 있음. 중국동지들은 이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음.우리도 물론 모택동동지의 이런 입장에 동의함.하지만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정부와 국민이 더 이상의 부당한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요한 시설을 방어하고 적극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음.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는 바임. 1,방공망 강화.10개 대공여단에 대한 추가 무기지원이 필요함.50%는 중국이 나머지 50%는 소련이 제공해주기 바람. 2,전투기의 야간작전 강화. 3,적의 관심을 우리 후방에서 돌리고 회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대규모 지상군 작전을 펼칠 필요가 있음.우리의 전투력강화를 위해 빠른 시일내에 기술 및 물자지원을 해주기 바람. 4,동시에 우리는 휴전회담의 조속타결과 전투중지 및 제네바협약에 의거한 포로교환을 강력히 요구해야 함.이런 요구는 모든 평화애호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고 한국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것임』 김일성은 이 전문 말미에 『같은 내용의 전문을 모택동동지에게도 보냈음』이라고 덧붙였다. 전쟁계속을 위한 추가 무기지원을 해주든지 아니면 휴전협상을 서두르자는 두가지 요청을 담았지만 무게는 후자에 두고 있었다.그리고 김일성은 위기에 몰리자 전형적인 수법,즉 모·스탈린 양자관계를 묘하게 이용하려했음을 이 전문은 다시 한번 보여준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휴전의사 무시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비로소 스탈린이 전쟁을 결정할 때와 중국군 참전결정을 할 때 왜 그렇게 교묘하고도 집요하게 빠지려 하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이번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휴전보다는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그는 자국의 유엔대표부 앞으로 직접 비밀전문을 보내 한국전쟁에 대해 유엔에서 평화적 태도를 취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모택동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이 아니라 자국의 유엔대표에게 직접 보내는 이 비밀전문은 그가 모택동과 김일성의 휴전의사를 무시하고 전쟁의 계속을 주장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것은 중국과 북한을 담보로 하여 미국을 계속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그는 중국·북한을 내세워 미국과 대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모택동과 현지 중국 군지휘관과 협상대표들,그리고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전쟁의 지속을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모택동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엔측의 현전선에서의 휴전의견을 받아들여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물론 이는 처음 밝혀지는 사실이다.그러나 스탈린은 『조기 휴전을 더 바라는 쪽은 미국』이라면서 『조기휴전의사를 절대로 내보이지 말라』고 모택동의 의사를 무시하였다.박헌영과 김일성의 의견도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실제로 모택동과 김일성·박헌영이 적극적으로 종전의사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정책을 추구하였는지는 더 많은 방증자료를 기다려야겠지만 우리는 이번 자료를 통해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 북한 공산정권 수립(새로쓰는 한국 현대사:26)

    ◎대의원 선거 흑백함 놓고 전형적 공개 투표/북노당 출신 당권장악 하자 남노당측 불만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38이북의 공산주의자들도 자체 정권 수립을 서두른다.단독정부 반대,통일정부 수립이란 명분을 내세워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북과 5·10총선거를 거부했던 그들로서는 자체 정부 수립을 더이상 늦출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정권수립을 일찍부터 준비해온 만큼 막상 그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월달 초에 이미 결정 1948년 8월25일 북한 전역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이 날짜는 7월9·10일 열린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이미 결정난 것이었다.8·25선거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먼저 「친일분자 제외」라는 명목아래 반대세력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빼앗아버렸다.또 인구 5만명에 하나꼴인 2백12개 선거구의 출마자를 미리 지정하고 이에 대해 찬반을 묻는 흑백함선거를 실시했다.흑백함선거란 투표장에 흑백 2개의 투표함을 설치해 찬성자는 흰 함에,반대는 검은 함에용지를 넣는 전형적인 공개투표 방식이다.더욱이 주민들을 직장·마을별로 집단 동원한데다 병자·노약자에게는 투표함을 들고 찾아가 투표를 시켰다.말하자면 투표를 하지 않을 자유마저도 박탈한 비민주적인 선거였다.따라서 유권자 4백52만6천65명 가운데 99.97%인 4백52만4천9백42명이 참가해,98.49%가 찬성표를 던진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왔다. 어쨌든 2백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됐고 여기에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미리 뽑은 남쪽의 대의원 3백60명을 합쳐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됐다.「해주회의」는 북한정권이 남한 주민의 의사까지 모두 수렴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48년 7월 남한 각지에서는 인민 대표를 뽑는다는 지하선거가 남로당 주도로 실시됐다.여기서 선정된 대표들은 해주에서 8월21일 대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 남쪽 대의원을 선출했던 것이다. 9월2일 최고인민회의가 개막돼 의장에 허헌 남로당 위원장,부의장에 김달현(천도교청우당 위원장)과 이영(근로인민당 부위원장)을 각각 선출했다.둘째날에는 대의원 5백72명에 대한 자격심사 결과를 발표했다.대의원 가운데 여자는 69명으로 12.1%이고,연령은 30∼40대가 2백32명으로 가장 많았다.성분별로는 농민(34%),사무원(26.7%),노동자(20.9%)순이었으며 특이하게도 전지주가 1명 있었다. ○각본대로 선거 연출 한편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와 8.25선거를 각본대로 연출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북한정권 수립 작업은 그러나 곧 암초에 부딪힌다.내각 구성을 놓고 북로당과 남로당 사이에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남쪽에서도 내각이 구성된 뒤 불만을 품은 한민당이 야당으로 돌아선 일이 있지만 북쪽 사정은 훨씬 심각했다.내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바로 정권장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연일 회의를 열어 내각 구성을 논의했다.먼저 각 성의 상(장관)을 어떤 비율로 나누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남로당은 대의원 숫자를 감안,남북이 6대 4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결국 남북이 절반인 10명씩 맡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실제 남로당과 북로당이 차지한 자릿수는 크게 차이가 났다.북쪽을 완전 장악한 북로당은 지분 가운데 9석을 가졌지만 남로당은 남쪽지분 중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나머지 5석은 기타 정당들이 나눠가졌다.내각 구성에서 북로당은 남로당을 압도한 셈이다. 비율이 정해진 뒤 구체적인 인선에 들어가자 갈등은 증폭됐다.내각 수상은 소련에서 점지한 김일성으로 이미 정해졌고 부수상 3명도 남의 박헌영과 홍명희,북의 김책 등으로 쉽게 결정됐다. 정작 문제가 된 자리는 사법상이었다.남로당은 최용달을 사법상으로 추천했다 북로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이승엽을 내세웠다.이에 대해 북로당은 『이승엽이 남쪽에서 할 일이 많으므로 무임소상이 알맞다』고 주장했고 남로당은 『그가 남로당 현지 지도부를 맡았던 지도자이므로 권위있는 자리를 줘야 한다』고 맞섰다. 외무상 자리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북로당은 주영하를,남로당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낸 남한출신 이강국을 각각 추천했다.양쪽은 외무상이 남쪽 지분임을 인정,부수상 박헌영이 겸직한다는 선에서 타협했다.주영하는 교통상으로 자리를 바꿨고 신진당 출신 이용이 도시경영상으로 결정됐다.내각 구성 논의는 「인민공화국」선포 하루전까지 계속됐고 몇몇 자리는 김일성에게 인선을 위임했다.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두봉이 내정됐다. ○주로 연안파가 득세 북한 공산정권의 첫 내각과 주요 직책 명단은 다음과 같다.(★표는 남쪽 출신)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민족보위상 최용건▲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외무상 박헌영(★) ▲산업상 김책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문화선전상 허정숙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도시경영상 이용(★) ▲무임소상 이극로(★) ▲최고재판소장 김익선 ▲최고검찰소장 장해우 ▲법제위원회 위원장 허헌(★). 내각이 구성되자 남로당은 큰 불만을 품게 된다.숫적으로도 열세인데다 비교적 힘있는 자리들을 대부분 빼앗겼기 때문이다.특히 연안파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내무·재정·문화선전상 등을 거머쥔 것에도 못미친다고 판단했다.이같은 불만은 정권 수립후 여러 형태로 노출됐고 드디어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돼 남로당파의 몰락을 불러오게 된다. 9월8일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는 「인민공화국」헌법을 승인하고 즉시 「전조선 지역에서 인공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표했다.이어 ▲그동안 북한을 통치해온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권이양 선언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이끌 상임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 선출 ▲새 수상에 김일성 선출 및 조각 위임등 각종 요식절차를 끝냈다. 1948년 9월9일 상오 10시.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최고인민회의 6일째 회의가 열렸다.김일성이 등단해 조각 결과를 발표하자 대의원들은 박수로 승인했다.김일성은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을 정식 선포했으며 그 자리에 모인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열렬히 환호했다.일제로부터 벗어난지 3년,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출범한지 25일만에 북쪽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별도의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노동당중앙위 출당 결정서/반대세력은 현 일·반동지주로 몰아 숙청/당 추천 국비생 부친 경력까지 면밀 분석/「반공」 혐의 드러나면 “파렴치범” 추가시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과 함께 38이북 지역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친일분자니 반동지주니 갖은 구실을 붙여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따라서 1948년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할 당시 이렇다 할 반대파는 북한에 존재할 수 없었다.설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아낸 한장의 출당 결정서는 당시 실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19 47년 10월29일 북조선노동당 중앙검열위원회 상무위원회」명의로 작성되고 「절대비밀」 도장이 찍힌 이 결정서는 한재련(당시 25세)이라는 청년당원을 쫓아내는 이유를 밝혔다. 한재련은 당시 25세로 김일성대학 역사문학부 철학과 1학년이었다.당의 추천을 받은 국비생이었고 민청 중앙위원,당세포책임자를 맡은 촉망받는 공산주의자였다.그런 그가 쫓겨난 이유는 간단하다.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결정서는 먼저 한경련이 ▲해방후 한달동안 신민당에 몸담은 적이 있으며 ▲부친이 일제 때 10년동안 형사로 활동했음을 지적했다.결국 공산주의에 반대한 신민당 입당 경력이나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성분을 뒤늦게 알게 돼 쫓아낸다는 뜻이다. 결정서는 이와 함께 「학습에 태만하고 음주 방탕하였으며」,「학교 공금 1천5백원을 횡령했다」는 등의 이유도 덧붙였지만 이는 한경련을 파렴치범으로 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국비생에 당의 중책까지 맡은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경련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어서 출당후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길은 없다.다만 해방이후 6·25전쟁 때까지 수백만의 북한 동포가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듯이 그도 어느땐가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 땅에 정착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6·25 45돌/진상 규명 서적출간 활발/주목받는 국내외 3개역저

    ◎일 공산주의자가 본 북침설의 허구­한국전쟁/미 육군 작전상황 기록한 공식전사­밀물과…/미 정책결전과정 분석한 「한국전쟁과 미국」도 나와 광복 5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룬 서적들이 많이 나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한다.이런 흐름의 하나로 6월 들어 「6·25」를 분석한 국내외 역저 몇권이 선보였다.이 가운데 대표적인 책들이 국내 학자가 쓴 「한국전쟁과 미국」,미 육군성에서 낸 「밀물과 썰물」,그리고 일본 저널리스트의 저서 「한국전쟁」등이다. 「한국전쟁」(한국논단 펴냄)은 「6·25가 미군과 한국군이 일으킨 북침」이라는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의 주장이 허구로 가득 찬 것임을 그들의 문서를 통해 입증했다.지은이 하기와라 료(추원료)는 이를 위해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공문서보관서에 소장된 「북한문서」1백60만쪽을 2년 반에 걸쳐 열람했다.이와 함께 「6·25」 당시 조선인민군 중장이었던 유성철,옛소련 공산당 간부 허진등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했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은 49년 초 중국공산당에게 조선계 군인 3만여명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해 받아들인다.50년 6월23∼24일에는 인민군 전체 7개 사단중 5개 사단이 38선에서 수㎞이내에 집결한다. 지은이는 인민군 2사단,3사단,6사단등에서 낸 작전명령,병력배치도,작전일지등 각종 자료를 이용해 남침 상황을 생생히 그려냈다.예컨대 6사단 문화부(정치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보낸 극비문서 「전시 정치 문화사업」에는 38선 인근에 집결해서부터 남진명령의 접수,진공,점령지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행동지침이 5단계로 분류돼 자세히 지시돼 있다.지은이는 이밖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사실과 북한 주둔 소련군의 쌀 수탈등 만행도 공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의 지은이는 공산주의자.하기와라는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평양특파원을 지낸 기자 출신으로 지금도 일본 공산당에 몸담고 있다.그는 책을 쓴 이유를 『한국전쟁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진로에도 중대한 연관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과 미국」(평민사 펴냄)은 국방대학원 교수이자 한국전쟁연구회 회장인 김철범박사가 저술했다.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19 45년부터 53년 「6·25」종전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서이다.지은이는 당시 미국의 정책은 장기적인 점령아래 적극적인 경제원조를 하자는 국무부측과,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해 조속한 철군을 주장한 군부가 대립했던 것으로 보았다.새롭게 「관료정치적 모델」을 분석틀로 삼은 점이 돋보인다. 이에 견줘 「밀물과 썰물」(대륙연구소 출판부 펴냄,모스맨 지음)은 「6·25」과정 중에서 50년11월∼51년7월 부분을 다루었다.미군의 대규모 작전은 물론 대대 단위의 부분적 전투도 상세하게 소개·분석했다.미 육군의 공식 전사로서 객관적인 사실 기록에 치중했다.재무부장관을 지낸 백선진 예비역 육군소장이 우리말로 옮겼다.
  • 북 「38선 퇴각」 전후(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1)

    ◎김일성,전황 불리해지자 “소군 파병” 급전/“연합군 북진 저지할 공군력 지원 절실” 호소/소 국방,“서울이남 모든 병력 신속 철수” 명령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슈티코프 대사는 9월 30일 모스크바 본부에 대사관인원의 철수요청을 하기에 이른다.(N182sh.그로미코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미군기의 공습으로 북조선내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됐음.이런 상황하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소련 군사고문단과 대사관 직원 거의 전부를 본국귀환토록 허락해주기 바람』 이에 대해 그로미코외상은 『평양에 불안감을 배가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철수는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지도부는 마침내 소련의 직접개입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준비했다.이 서한은 9월 29일자로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돼 이튿 날인 9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달됐으며 슈티코프대사는 이를 같은 날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19 50년 9월 30일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슈티코프의 전문.전문번호 N60 03 08sh) ○박헌영과 공동명의 『스탈린 동지께. 조선노동당을 대신해 우리는 조선해방자이시고 전세계 노동자의 최고지도자이신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신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들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원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서한을 통해 우리는 조선민족이 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전선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인천(제물포)지역에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진격하는 적부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합니다.적의 공군은 약 1천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를 갖추고서 공중을 완전장악해 우리의 저항을 용납치 않습니다.전선에서는 적의 기갑부대들이 전투기 수백대의 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작전을 펴 우리 병사와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있습니다.동시에 적의 폭격기들은 철도,도로,전화·전신망,수송수단등 모든 시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아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안되고 제때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어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적이 서울을 완전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이 때문에 남조선 남부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은 북쪽에 있는 적에게 봉쇄당했습니다.남쪽전선에 있는 병력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탄약,무기,식량을 공급받지 못합니다.어떤 부대들은 부대간 통신도 안되고 적에게 포위됐습니다. ○보급로 끊겨 전선 마비 적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것이 분명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리한 상황이 계속돼 미군침략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습니다.병력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공군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훈련된 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우리에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한 작전으로 북조선으로 진격해온다면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적을 막을수 없습니다.따라서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지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시말해 적이 38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소련의 직접 무력원조가 정말 필요합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국가의 군대내에 국제의용군 부대창설을 지원해 주십시요.그리하여 우리의 투쟁에 무력지원을 해주도록 하십시요.위의 요청에 대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존경을 표하며.조선노동당중앙위. 김일성·박헌영』 이 서한이 보여주듯이 김일성은 애당초 소련군 파병을 요청했다.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여러 구실을 달아 소련군파병을 거부하고 대신 중공군을 보내라고 모택동을 설득한 것이다. ○“6개사단 창설 지시” 한편 소련당국은 9월 27∼30일자로 마트베트 장군이 연이어 보낸 전문에 대한 답신을 9월 30일 평양으로 보냈다.마트베트 장군의 전문은 김일성이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상직은 겸직하고 남조선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니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의 보고서였다.소련당국은 이 답신에서 김일성의 군직접통제를 위한 겸직과 남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소련공산당정치국 결정.전문번호 NP78­118).아울러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기타장비는 10월 5∼20일 사이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이 전문은 중국 운전병을 파견해주도록 소련이 중국에 말해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그런 부탁을 중국동지들에게 직접 하는 것은 무방하되 소련을 핑계로 되지는 못하게 하라』고 못박았다. 한편 이 시기에 소련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짐에 따라 한반도 전략에 있어 몇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검토하기 시작했다.이 시나리오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북조선에 전술적인 충고와 지원을 계속하는 것 ②북조선의 소련대표부 철수 ③북조선공산정권과 북조선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방안 ⑤철수후 반격을 위해 북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방법 ⑥중국이 전쟁에 개입토록 압력을 가하는 것.결국 마지막 ⑦의 방안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당시 모스크바와 평양간 오간 전문들은 나머지 네가지 방안 모두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문서들을 근거로 이 방안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해본다. ⑧전술적 충고. 9월 28일 서울수복과 함께 소련은 서울 이남에 남아있던 인민군을 북으로 철수시키는 문제가 첫째 과제로 떠올랐다.이 전술적 충고에서 소련당정치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가능한한 신속하게 병력을 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50년 10월 2일 불가닌 국방장관은 평양의 마트베트 소련군사고문단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포위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귀하에게 강조했음.남쪽에 포위된 인민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간주할 것.남쪽에 남아있는 병력들,특히 지휘관들에게 그룹이든 개별적으로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북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할 것.전선이 따로 없음.그들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것임.인민들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음.중화기들도 미련없이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신속히 북으로 철수할 것.야음을 이용하고 적이 아직 점령치 않은 지역을 이용해 철수할 것.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 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만은 빼내올 것.이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 ○소 개입사실 탄로 우려 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10월 5일 상황이 긴박하니 대사관직원 및 그 가족,군사고문단등 소련에서 파견된 인원 모두를 본국으로 철수시키자는 긴급전문을 본부에 타전했다.이에 대해 당정치국은 같은 날 답신전문을 채택 이튿 날 이를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냈다.소련대표부를 철수시키라는 내용이었다.(당정치국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N14 05sh) 『①소련 대표부 파견 인원과 고문단들을 귀국시키는 결정은 10월 5일자로 보낸 전문 N18 909에 의해 이미 지시한대로임.②재소한인들의 가족을 귀국시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사가 결정할 것.③공군기술자 가족과 군사고문단 가족은 조선영토에서 반드시 철수시킬것.④필요한 경우 재소한인을 포함,모든 소련시민은 소련과 중국영토로 철수시킨다는 대사의 제안에 동의함』소련군의 개입사실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소,국군38선 넘기전 「평양공관 철수」 거론/중국군 개입등 다섯가지 시나리오 검토 먼저 50년 9월30일 슈티코프가 모스크바 본부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인원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10월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그러나 평양의 불안감을 이유로 그로미코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면서 소련이 다섯가지의 한반도전략 시나리오를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많은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일 것이다.즉 여기에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지원의 계속,소련대표부의 철수,북한정권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반격을 위한 북한군 훈련,중국의 개입압력 등의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이는 앞으로 전체 내용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번 자료에서 우선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얻은 셈이다.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 국방상 불가닌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가능한한 빨리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처음 밝혀졌다.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을 데려오기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넘자 소련은 자국 소련대사관 인원과 군사고문단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에는 소련 공산당이 최고위 수준에서 직접 개입하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회의 연재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소련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 이상 군사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박명림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50년 「만찬장 사건」(모스크바 새 증언:3)

    ◎김일성 “개전 수일내 서울점령” 호언/“옹진반도 공략을” 소대사에 간청/“스탈린 다시 만나게 해달라” 졸라/「남침승인」 늦어지자 모택동 들먹이기도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50년 1월 17일 저녁 박헌영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다.김일성,박헌영,김두봉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인사들과 소련대사,공사,중국대사,무역대표부 인사들이 대거 초대됐다.슈티코프대사는 1월 19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이날 만찬장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식사가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의 이그나테프와 펠리센코 두 참사관에게 다가갔다.그리고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중국해방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은 남조선동포들을 해방할 차례라고 떠들었다.그리고는 남조선 인민들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북조선의 군사원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빨치산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 없다.북조선에는 훌륭한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이렇게 떠들어대던 김일성은 『요즈음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못잔다.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과업을 더 늦추면 나는 조선인민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통일 늦출 수 없다 그런 뒤 김은 자신의 모스크바방문 때 스탈린이 남침을 먼저 시작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언급하며 『하지만 이승만이 북침공세를 시작하지 않고 따라서 남조선해방통일과업이 자꾸 미뤄지고 있으니 내가 스탈린 동지를 다시 찾아가 남침개시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말했다.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여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느니,스탈린 동지의 명령이 자기한테는 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했다고 슈티코프 대사는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는 또 만약 스탈린동지를 만날수가 없다면 모택동동지가 모스크바방문을 마치는 대로 그를 찾아가 만나겠다고 말했다.그는 모택동이 중국내전만 끝나면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모택동을 들먹이며 협박조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소련대사관의 두 참사관은 그의말을 가로막고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그 다음 상황을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같이 적고있다.『그러자 김일성은 내게 다가왔다.그리고는 이승만 군대에 대한 공격개시문제를 비롯,한반도상황을 논의하도록 스탈린 동지를 만날수 없겠느냐고 물었다.만약 스탈린을 못 만나면 모택동 동지를 만나겠다고 했다.그리고는 왜 옹진반도 공격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내게 따져물었다.인민군은 3일이면 옹진반도점령을 끝내고 수일내 서울까지 밀고갈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본인은 그에게 스탈린동지를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답했음.그러나 옹진반도 공격은 안된다고 잘라 말하고는 그를 피해 만찬장을 떠났음』 이날 김일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는 『스탈린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나는 자나께나 남조선해방만 생각하고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슈티코프 대사는 보고서 끝머리를 이렇게 마쳤다.『만찬이 끝날 즈음 김일성은 취한 상태였음.그의 모든 대화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본인은 그의 이날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우리의 입장을 타진해보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함』 이 보고서 한통을 통해 우리는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남침의욕에 가득차 있었는지,그리고 당시 소련지도부의 눈에 비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짐작할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49년 여름으로 잠시 거슬러올라가 보자.김일성이 스탈린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기남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슈티코프대사를 8월 12일,14일 연이어 만났다.남침 불가피론을 설득키 위한 목적에서였다.다음은 슈티코프대사가 1차면담 뒤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대통령문서소.슈티코프대사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록) 『두사람은 남조선이 조국통일민주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부했으므로 무력남침 외에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자기가 지금 남침을 개시하지 않으면 조국통일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고 말했음』 그해 6월 25일을 기해 김일성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몇차례에 걸쳐 대남 평화공세를 펼쳤다.6월 30일에는 평양에서 남북노동당 연합회의를 열어 남북노동당을 합당,조선노동당으로 발족시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박헌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한 바 있다. ○선제공격 필요성 강조 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요청에 대해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뚜렷한 무력우위를 확보치 못했다며 스탈린이 거부했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켰다.김일성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 주둔 미군이 물러난 마당에 38도선 분할규정을 지킬 아무 의미가 없다.스탈린동지가 남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해올 경우에만 대응공격을 하라고 했지만 남조선은 이제 북침계획을 연기시킨 것 같다.남조선은 2차대전 전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고수하려했던 것처럼 38도선 고수에 총력을 쏟고있다.따라서 스탈린동지가 권유하신 대응공격 기회는 없어졌다』며 선제공격 필요성을 되풀이했다.김일성은 이와함께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무력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슈티코프도 지지않고 두사람의 현실파악이 너무 낙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한발 물러나 강원도 삼척지구에 해방지구 건설전략을 제의했고 슈티코프는 『그것까지 막을수는 없지만 신중한 분석과 준비를 거친 뒤 실행에 옮길 것』을 권고했다.하지만 해방지구건설은 애당초 김의 목표가 아니었다.8월 14일 김은 슈티코프를 만나 다시 무력남침 필요성을 역설했고 슈티코프는 계속 불가입장을 되풀이했다.그러자 김이 들고나온 전략이 바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사람은 두가지 사항에 합의했다.『첫째,북조선에 소련제 무기를 긴급히 추가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김일성은 전군에 지급할 2∼3벌의 탄약풀세트 지원을 요청.둘째,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을 목표로한 국지전개시를 제의.옹진반도 점령시 38도선 방어선을 1백20㎞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추가 공세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수 있다고 김은 강조』 슈티코프는 『모든 작전은 북조선군의 작전능력과 전반적인 정세파악을 확실히 한후에만 실행에 옮길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슈티코프대사는 8월27일 이 대화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보고문에 남침계획이 매우 무모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그는 『첫째,현재 한반도에 실제로 2국가가 존재하며 남한은 미국등 여러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따라서 남침시 미국이 무기·탄약뿐아니라 병력을 직접 파병할 것임.둘째,미국이 소련에 대한 악선전의 기회로 활용할 것임.셋째,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군사우위 미확보.넷째,남조선은 강한 군·경찰군을 창설했음』등을 남침불가의 이유로 들었다.슈티코프대사는 대안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옹진반도 점령은 권할만함.그러나 남조선군의 반격능력이 강할지 모르고 그 경우 장기전이 될수있음』이라고 덧붙였다. ○소대사 “계획 무모하다” 슈티코프 대사가 본국휴가를 떠난 뒤 김일성은 대사대리인 툰킨공사를 만나 옹진반도 작전계획을 재차 설명한 것이다.툰킨 공사가 김의 이 요청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이 소련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전면남침은 물론 옹진반도 작전까지 금지시킨 것은 전편에서 이미 기술한 바있다. 당시 소련 당정치국의 남침불가 결정은 소련외무부,국방부가 북한군전력을 종합적으로 평가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대통령문서소에는 9월23일자로 그로미코 외무장관,불가닌 국방장관이 스탈린에게 제출한 이 정치국결정의 초안이 보관돼있다.정치국결정의 내용은 거의 이 초안과 일치한다.다만 스탈린이 결재과정에서 몇군데 흥미있는 손질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스탈린은 초안말미에 『…북조선은 남측의 무력공격개시시 이를 격퇴하고 북조선정부의 영도아래 조선통일을 이루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한다…』라고 쓴 부분을 만년필로 긋고 『남측이 도발할 경우 북조선은 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고쳐썼다.「무력통일」운운한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그외에 북한의 무력증강 필요성이 언급된 부분들도 스탈린은 모두 그 표현을 완화하거나 삭제하는 등 끝까지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려했다.그러던 차에 앞서 기술한 김일성의 「만찬장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 남침야욕 노골화(6·25 내막/모스크바 새증언:2)

    ◎김일성,“개막 두달내 남한점령” 장담/49년9월 소 공사에 남침구상 처음 표명/“전쟁 허락해 달라” 집요하게 스탈린 설득/“국지전·전면전” 선택권은 크렘린에 맡겨/평양,빨치산 지휘자 8백명 남파… 게릴라전 지도 김일성의 구체적인 남침구상이 최초로 문서로 드러난 것은 1949년 9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툰킨공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극비보고전문이다.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대통령문서보관소) ○스탈린 관심 표명 김일성이 밝힌 이 최초의 구체적 남침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일단 관심을 표명했다.그리고는 9월 11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한반도정세에 관해 다음의 항목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⑴남조선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규모·무기·전투능력등. ⑵남조선내 빨치산운동상황.개전시 그들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지. ⑶)북조선이 전쟁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인민들이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⑷남침시 미군이 취할 입장 ⑸북조선의 군사력·무기·전투능력.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툰킨공사는 곧바로 12∼13일 양일간 김일성·박헌영을 면담했다.재미있는 것은 툰킨공사와의 면담에서김일성의 태도는 이전의 남조선의 군사적 위협에서 대남 무력침공이 성공할 수 있다는 쪽으로 급변했다는 것이다.다음은 9월14일 툰킨공사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김과의 면담내용. 『⑴남조선군은 장교들의 훈련수준이 아주 낮다고 함.김일성은 38도선에서 벌어진 몇차례 교전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평가했음.김은 현재 남조선군 거의 모든 부대에 북한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했음.그러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실제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음. ⑵김일성·박헌영은 현재 남조선에 1천5백∼2천명의 빨치산이 활동중이라고 했음.김은 그러나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했음.남한출신인 박헌영은 김과 다소 다른 견해를 밝혔음.그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음. ⑶북한이 선제공격을 시작할 경우 남한국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말했음.김은 금년 봄 모택동이 북조선대표 김일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지금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중국내전이 고비를 넘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음』 그러나 바로 이튿날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전날과 달리 북조선이 군사작전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국민들도 이를 환영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불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를 통역으로 나온 허가이(편집자주:재소한인으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비서)의 영향탓이라고 분석했다.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김일성은 다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따라서 전면전 대신 옹진반도와 반도동쪽의 개성까지 남한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작전이 좋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일성은 북조선군이 남조선군과 비교해 강점으로는 탱크·박격포·비행기등 기술적인 면과 훈련·사기등에서 앞서고 약점으로는 조종사의 숫자 및 훈련부족·군함부족·탄약부족·대구경총의 전투태세 미흡등을 들었다.김일성은 먼저 옹진반도를 공격,그곳에 주둔중인 남한군 2개연대를 궤멸시키고 반도를 점령한 뒤 동쪽의 남조선영토 일부를 점령하면 일단 공격을 중단하고 상황을 살피겠다고 했다.남한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계속 남진하되 그렇지 않으면 옹진반도를 확고히 해 방어선을 3분의1 정도 줄이겠다는 계산이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밝히면서도 스탈린의 의중을 알기 위해 끝까지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았다.물론 남침의사를 내비친 것은 스탈린이 원칙적으로 이에 동의할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남한 군사력에 대한 평가,국지전을 할지 전면전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입장이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스탈린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툰킨공사는 이 보고전문 말미에 김일성·박헌영과는 다른 견해를 덧붙이며 전쟁개시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력통일밖에 없다 『김일성이 제의하는 국지전은 필히 남북한간 내전으로 발전될 것임.현재 남북한 지도부내 내전 지지자는 극소수임.현단계에서 북조선이 내전을 시작하는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야 함.본인은 현명치 못한 판단으로 생각함.북조선군은 남쪽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신속한 작전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못함.빨치산과 남조선인민들의 도움을 가정하더라도 신속한 성공을 기대하기 힘듦.내전으로 확대되면 정치·군사 양면에서 북조선에 불리함.첫째로 전쟁확대는 미국에 이승만정부를 지원할 명분을 줌.미국은 중국에서 패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남조선문제에 개입하려 함.또한 전쟁피해가 커지면서 남조선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 측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것임』 그는 이 전문과 함께 남북한의 정치경제·군사 관련장문의 보고서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진 당시상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용치 않기로 한다.다만 한가지 툰킨공사가 이 별도보고서에서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갖고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그는 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 가능성은 없어졌고 무력에 의한 통일의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도 툰킨공사는 남침시 미군개입과 반소선전에 악용될 가능성등을 들어 전쟁개시에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그는 전쟁보다 남조선내 빨치산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는게 보다 현명하다는 견해를덧붙였다. 이같은 보고를 접한 크렘린은 9월24일 당중앙위 정치국 이름으로 북조선의 남침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북한지도부에 전달케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정치국결정.회의록 N191).이 결정에서 크렘린은 군사적으로 인민군이 장기적인 작전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어 지금 작전을 시작하면 적을 패배시킬 수도 없을 뿐아니라 북조선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고 못박았다.이 결정은 「조선인민들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의 견해에는 동의한다.그러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무엇보다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을 강화하고 대규모 반정부 기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옹진반도 점령작전에 대해서도 소련지도부는 『이는 남조선과의 전면전 초기단계로서 시작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빨치산운동 강화를 1차 면담에 이어 두번째로 김일성의 개전허가요구를 거절한 것이지만 스탈린의 이 결정은 좀더 확실한 승리를 위한 작전지시문 같은 느낌을 준다.아울러 김일성과 스탈린 두사람간 전쟁개시에대한 공감대는 이 무렵을 전후해 확고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0월4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들고 김일성·박헌영을 다시 만났다.그리고는 바로 그날 저녁 스탈린앞으로 다음과같이 이 면담결과를 보고했다.『김일성과 박헌영은 우리의 통보를 냉담하게 받아들였음.김일성은 「좋다」는 한마디만 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논리가 옳다고 수긍한 뒤 남조선에서 빨치산운동이 확산되기를 기다리는게 좋다고 동의했음.현재 남조선에서는 북조선에서 파견한 8백명이 빨치산운동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음』 소련의 이같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굽히지 않았다.이듬해인 50년 1월17일 평양에서는 박헌영외상이 주최한 한 만찬이 열렸다.1월10일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한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이 만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취한 김일성은 소련·중국 대표들을 붙들고 자신의 남침의지를 다시한번 강하게 나타냈다.이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을 한 것이다.
  • 박창희 교수는 북 노동당원/간첩혐의 추가

    ◎지난2월 북경서 입당… 공작금 수령 국가안전기획부와 서울 경찰청은 15일 한국외국어대 박창희(63·사학과)교수를 간첩혐의로 검찰에 구속송치했다. 박 교수는 지난 2월에는 중국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북한공작지도부 김모 부부장 등을 통해 조선노동당 입당식을 갖고 공작비로 일화 50만엔(약4백만원)을 받았으며 『당원증이 북한에 있으니 공화국에 한번 오라』는 김 부부장의 지시에 따라 오는 6월쯤 입북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지도원 서씨등과 30여차례 접선하면서 국회의원 등 정계 인사등과의 접촉등을 통해 정치권 동향 수집,친북 성향 교수 근황파악및 포섭,식민지 잔재 청산과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명분으로 한 운동단체 결성,개발중인 「슈퍼 볍씨」 입수 등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 미·소공동위 결렬 이후(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16)

    ◎미,한반도문제 유엔총회 상정/유엔 남북총선·한국임시위 설치 결의/소 「한국대표 불참」 이유 임시위 보이콧/남로당,북과 공조 유엔토의 반대 선동 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정돈상태에 들어간 1947년 여름부터 회담자체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그래서 팽창하는 공산주의 압력을 저지하기 위한 서구와의 협력문제,한국의 독립이 친미적 반공이념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등을 고려하게 되었다.특히 양극화 현상을 치닫는 동·서냉전의 구도속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유엔에 맡기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당시 남한에 주둔한 2개사단을 철수시킬 수 있다는 군사전략도 맞물려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대표는 한국독립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의 의사일정에 포함시킬 것을 전격적으로 요청했다.이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은 총회의 연설에서 미국정부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섰다.마셜의 연설요지는 미 소협상에 의한 한반도 문제해결은 전혀 전망이 없기 때문에 유엔에 상정한것이며 비록 미국이 의안을 제출했을 지라도 회원들의 공정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미 소의 무능으로 한국인이 열망하는 한국의 독립을 더이상 연기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덧붙였다(미국무성보·1947년). 소련 외상 그로미코는 한반도 문제의 총회 상정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이 문제는 전쟁과 연결된 사안으로 강대국들이 특별한 방법,다시 말하면 모스크바협정(3상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운영위원회는 미국의 의안을 12대 2로 가결한데 이어 총회도 이를 동의했다.총회의 제1위원회가 10월 28일 한반도문제 토의를 시작하기전 소련대표는 다른 안건을 내놓았다.그것은 한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정부를 선택할 기회를 주도록 1948년초까지 미·소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이같은 안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이무렵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자신들의 대리기구인 정부형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또 7월 제2차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내놓았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정당 및 단체협의체 구성안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소련은 제2차 미소공위에서 남한의 27개 정당을 우익계 및 중간계라는 이유로 배제시킨 극좌 우세의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적이 있다(한국에서의 미군정 활동요약·1947년).소련의 이 제안은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어떻든 미국대표는 10월 17일 미국의 제안을 구체화한 결의안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미국의 안은 되도록 빠른시기에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하고 점령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다시 말하면 점령국은 1948년 3월 31일까지 남북한 전지역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국회나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 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유엔위원단은 국회 및 정부조직,점령군 철수에 관한 협정체결에도 협의할 수 있다는 위원단의 역할도 제시했다. ○소 별도 결의안 제출 소련은 역시 미국안에 맞서는 2개의 결의안을 별도로 유엔에 내놓았다.그 하나는 남북한에서 선출된대표들을 초청,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주장한 한국정부 수립은 한국민에게 맡기자는 요지였다.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한국민의 대표로 하느냐는 벽에 부딪혔다.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한국대표 참가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자는 미국의 수정안에 밀려나고 말았다.총회의 제1위원회는 11월 14일 35대 6으로 미국의 수정안을 최종 채택했다. 소련이 내놓은 안건은 미국에 의해 모두 봉쇄된 셈이었다.그로미코는 「총회가 한국민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고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한다면 소련은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이는 뒷날 소련과 소련이 전적으로 조정한 북한에 의해 실현되었다.유엔총회는 11월 14일 미국의 제안을 몇가지만 부분수정하고 최종적으로 채택했다.소련의 제안이 만약 수락되었을 경우 이미 기반을 닦은 북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남조선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을지도 모른다.이는 미국이 우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채택한 결의안에 따라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발의하였는데 대부분 미국이 주장한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다.총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한국임시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로 구성되었다.우크라이나는 대표파견을 거부,7개국이 참여했다.한국임시위원단에게는 선거감시의 임무가 부여되었다.선거는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성년자 투표 및 비밀투표를 실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11월 14일 미국측 제안이 유엔총회에 최종 채택되는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좌우파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자신에게 눈을 돌릴 것이라고 예측했다.남로당도 이른바 야산대라는 게릴라를 조직하고 경찰관서를 포함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과격성을 띠었다.그리고 유엔에서 한국문제 토의를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는 선전선동을 강화했는데 이는 12월 중순부터 본격화되었다(극동사령부 정보철·1948년 2월). 남로당은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광범위한 세력과 공동전선을 펴는 지령을 받는다.서울신문이 입수한 한 자료에 따르면 남로당 요원의 북한파견은 아주 일찍부터 고정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별도기사).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들을 종합하면 1947년말 당시 남한에 있었던 중도좌파 인물 홍명희는 평양의 북로당위원장 김두봉과 수시 연락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홍명희는 1948년 2월초까지 실제 비밀리에 평양에 몇차례 다녀왔다. 그리하여 19 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서울에 첫발을 밟은데 이어 1월 12일 첫 회의를 열었다.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한국에서 활동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로당 북한과 수시접촉 했었다/당수 허헌,북에 밀령 전달/요원 4명 배로 평양 밀파/원산서장에 “동행을” 사신 해방정국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킨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수시로 접촉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워싱턴에서 발굴됐다.1950년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이른바 북한노획문서의 하나인 이 자료는 허헌이 함경남도 원산인민보안서장에게 보낸 소개장으로 4인의 공산당 요원을원산을 통해 평양에 밀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개장은 1946년 당시 남로당위원장 직책을 맡고있던 허헌이 그해 12월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그는 소개장에 허인(당시 31세)등 4명의 이름을 적고 허인이 자신의 조카임을 밝혔다.소개한 4명의 인물은 모두가 희생적으로 투쟁하는 간부들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들이 평양까지 무사히 가도록 동행등 모든 편의를 보아주도록 당부한 내용을 담았다.그리고 동선했다는 대목이 보여 이들은 동해안에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한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까지 가는 목적은 「모 용무」라고만 적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한 임무를 띠고 밀파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왜냐하면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서장의 동행을 요청했다는 점이 그것이다.특히 이무렵 남한의 공산당은 10월폭동과 같은 과격한 투쟁을 벌이다 지하로 숨어든 시기여서 다급한 밀령을 가지고 입북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헌은 1885년 함북 북청출신의 변호사로 일찍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1946년 11월 해방정국에서 개편한 공산당인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을 맡았다가 월북,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비롯,김일성대학 총장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장 등을 지냈다.1951년 8월 병사했는데 허정숙은 그의 딸이다. 이 자료를 검토한 북한문제연구소 김창순 소장은 『개성과 서해안,철원등을 통한 월북루트는 널리 알려졌지만 동해를 통한 해상루트가 밝혀진 것은 처음』이라면서 「허헌 친필의 소개장 자체도 공산주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 기자) ▲김성호 ( 〃 〃 ) ▲김경운 (조사부 〃 )
  • 46년 남한의 공산당 활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3)

    ◎미소공위 깨지자 9월 파업·10월 폭동 주도/「전평」앞세워 산업마비·사회혼란 획책/정 판사 사건 계기 미군정 좌익소탕 반격/“무모한 좌경 모험주의”북 질책에 박헌영 남노당 결성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1946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불확실한 한반도에 아무런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특히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깔아놓았다.그해 5월6일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남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북한이 소련의 의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것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찬·반탁의 좌우익 대결구도 속에서 맞은 미소공위의 결렬은 좌익쪽에 더 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다.찬탁을 주장했던 좌익은 미소공위를 통한 정권장악이 수포로 돌아가자 새로운 전술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를 위한 역공세라는 구호를 들고 이른바 신전술을 펴기 시작했다.폭력에 호소한 이 전술은 실제 9월총파업과 10월 폭동 등으로 나타났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을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1946년 7월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한다.현재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박헌영의 친딸 리비안나 박도 최근 한국 언론에 이를 시인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짙다.그해 7월 하순께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가 신전술을 발표한 것도 그의 모스크바 방문과 일치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미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표면적 탄압은 이보다 일찍 시작되었다.5월16일 공산당 본부 급습과 함께 이루어진 공산주의 비밀문서 압수가 그것이다.특히 19 46년 5월25일에 일어난 조선정 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남한 전역의 좌익본부를 모조리 조사했다.하지장군은 공산당에 대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착수가 끝나자 「공산당과 그들의 활동을 제재할 때가 되었다」면서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본인이 기꺼이 수락하겠다」는 보고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주한미군사령관이 미 태평양사령부에 보낸 전문·1946). 하지의이같은 보고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주한미군인 24군단 정보처(G­2)와 방첩대(CIC),경찰조직을 통해 남한의 공산당과 소련의 연결고리를 확인한 미군정은 간첩활동 증거도 찾아냈다.여기에는 남한의 경찰과 경비대 침투,식량배급 방해,납세거부,군중선동,각종 사회단체 장악등의 지령이 포함되었다.조선공산당 본부와 원주지부,인민당 정치국장 김세용 집에서 찾아낸 문서들은 간첩활동을 입증한 대표적 케이스로 기록된다. 조선공산당이 7월6일 발표한 신전술의 슬로건을 보면 미군정에 대한 전면투쟁 양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테러는 테러로,피는 피로 갚자」는 기치를 선명하게 든 공산당은 같은 계열의 연합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전면에 나서는 대중적인 파업투쟁을 계획한다.전평을 조선공산당 세력구축의 발판으로 삼았던 박헌영은 당초 이 파업투쟁을 10월중에 강행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공산당 지도부는 갑자기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기로 수정하고 이를 긴급 지령했다. ○경찰발포로사태 악화 그 이유는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또 9월6일 좌익계 신문인 「중앙신문」등 3개 신문이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정간되는 것과 함께 조선공산당 지도부원인 이주하가 체포되고 박헌영의 체포령이 내려진데도 그 원인이 있다.그해 10월 박헌영이 해주로 피신했는데도 남한 열성당원들은 그의 지령이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전국의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상황에서 9월15일 철도 노동자들은 생활개선을 위한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일주일간의 시한부 총파업을 미군정 철도당국에 통고한다.미군정의 성의있는 응답이 없자 23일 7천명의 부산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을 시발로 24일에는 남한 각지에서 4만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벌였다.조선공산당의 전평을 주축으로 한 남조선총파업투쟁위 구성과 파업선동은 철도뿐 아니라 전기 체신 출판산업을 마비상태에 빠뜨렸다.이에대한 동정파업은 은행 회사 병원 미군정청까지 파급되었다.미군정은 이에맞서 9월30일 경무총감 장택상의 지휘로 파업 농성중인 경성공장 기관구 통신구에 진입,1천7백명의 철도종사원을 검거함으로써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10월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여파는 또다른 양상을 띠고 10월1일 대구폭동으로 이어졌다.부녀자들을 앞세워 쌀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악화되어 경북 일원과 경남 전남등 전국 73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그러나 대중파업 지도의 경험이 없었던 전평은 간부들이 거의 검거되는 바람에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그렇다고 노동자 농민에게 어떤 정치·경제적 혜택을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 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9월 총파업은 군정을 정치·경제적으로 악화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파업과 태업이 운수와 전기산업을 주 대상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그는 9월 총파업은 결국 악화된 남한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는 이 저서에서 파업과 폭동등의 일련의 사태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이 박헌영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개당 6개파벌로 분열 조선공산당은 9월 총파업을 전후로 여운형의 인민당,백남운의 신민당과 합당을 논의한다.좌익 3당의 합당은 9월파업과 무관치 않다는 설도 있다.다시 말하면 박헌영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은 뒤에 합당추진의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업을 조기 결행했다는 것이다.3당 합당은 좌익세력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기 때문인데,동상이몽(의 합당은 내부분열을 일으켰다. 북한 지도부는 또 나름대로 남쪽의 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인민 구국항쟁의 토대」로 삼아줄 것을 채근해왔다.그래서 박헌영은 10월6일 입북한다.당시 북로당은 박헌영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10월 인민항쟁이 무모한 좌경모험주의적 편향」이라고 몰아붙이고 북에서처럼 3당합동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그러나 남한의 좌익은 조선공산당내 대회파와 인민당내 31인파,신민당내 반간부파 등 반박헌영세력과 조선공산당내 박헌영파,인민당내 47인파,신민당내 중앙파 등 어지럽게 갈려 있을 시기였다.박헌영은 북에 있었지만 결국 그 지지파를 중심으로 11월23·24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북조선노동당을 표방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6개월후 여운형과 백남운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었다.당초 좌익진영의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3당합동은 2개당과 6개의 파벌로 분열된 셈이었다.좌익세력의 판도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의 창당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좌익역량 총결집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중요기관에 친화세력…국론분열행위”/박홍 서강대총장「한국논단」강연

    ◎대남공작·국내 보혁갈등이 체제안정 저해/시민·대학생 대상 민주정치교육 강화해야 29일 상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는 한국논단(발행인 이도형) 주최로 광복 50주념 기념 범민족대토론회가 열렸다.토론회에 참석한 박홍 서강대총장의 「체제안정의 저해요소와 그 제거방안」을 요약,소개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논의는 일반론적 접근 외에도 한국적 특수성에 초점을 두고 전개돼야 하며 일반론적 접근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누구에게나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기본적으로 출발해야 한다. 자유민주체제는 국제적인 평화와 국내적인 안정,그리고 시민의 견고한 민주적 태도를 요구하며 그것은 높은 국민의 지식수준과 도덕적 성숙성에 의해 밑받침돼야 한다. 이같은 전제하에서 한국적 특성을 말하자면 첫째,남한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북한체제의 대남공작이며 둘째는 남한의 개혁정치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보수·혁신간의 대립이 한국체제의 안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문민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도 안정의 토대 위에서 추진돼야 한다는 점도 이같은 맥락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남북한의 정치체제가 접촉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체제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체제는 안정을 유지하는 체제에게 흡수·통합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체제는 전국민이 김일성주체사상으로 무장돼 있으며 지금도 김정일체제 아래 통일과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남한체제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에도 불구하고 체제불안정의 조짐과 증세가 수시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민주체제하에서 체제불안요인을 제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만한 정치지식과 훈련,그리고 시민정신이 갖추어져야 한다.이것이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이다. 물론 그동안 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정치영역에서는 정치세력간의 공정하지 못한 비방과 공격이나 허위선전,무책임한 선동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민주정치교육의 방법과 형태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우선 학교에서는 외국 민주정치의 이론과 실제를 강의식·주입식으로 배우고 암기하던 방법을 버려야 한다. 민주정치교육은 정당과 이익단체에서도 보다 진지하게,그리고 공정하게 실시돼야 하며 대중매체의 보도 또는 논평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와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민주정치교육은 독립적인 학술문화단체나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이다.물론 이런 것들이 일조일석에 그 성과를 거둬들이기는 불가능하다.그러나 관련단체들이 체제안정과 통일을 대비하는 장·중·단기대책을 연구·토론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반도적화통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조에 명시된 국가목표이며 조선노동당 강령이 제시한 당활동의 기본목표다.그들이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연공통일노선에 동조하는 친북동조세력이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들의 숫자는 그리 많다고 볼 수는 없으나 우리사회의 여러 중요기관속에 잠입해 들어가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와 국민대중을 이간시키려고 노력해왔다.특히 친북동조세력은 민주화와 개혁조치,남북대화와 통일논의과정에서 국민여론에 혼선을 일으켜 국론을 분열시키며 북한의 대남정책에 동조·지지하는 행위를 계속해왔다. 우리가 지난 50년동안 국가안전보장과 산업화,그리고 민주화에 상당한 성과를 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안정이라는 면에서는 미흡해 민심의 동요와 불안정의 조짐이 보인 것은 바로 이들세력의 공작과 활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친북동조세력이 생겨나는 이유중의 하나는 북측이 대남 와해·파괴를 추구하면서 표면상으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평화애호적인 대남통일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북측이 93년4월7일부터 남한의 국민대중에게 제창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전민족단결 10대강령」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북측의 대남공작과 책동을 저지하려면 우리는 통일대비교육을 각급학교에서,특히 대학에서 강화돼야 한다.추상적·관념적·감상적인 방식이 아닌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노력을 비교해가며 모든 제안 속에 압축된 저의와 흉계를찾아내고 자유토론에 부쳐 각자가 결론을 자유롭게 찾아서 가도록 개혁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국가체제의 안정을 저해하는 보·혁간의 대립을 해소해야 한다.현실적으로 보수세력은 개혁세력이란 과거를 부정해 나라의 안정기반을 무너뜨리고 연공통일의 길로 접근시키려는 세력으로 보고 불신하고 있다. 반면 혁신세력은 보수세력이 과거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비리로 더럽혀진 수구반동세력으로 보고 공직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세력의 불신과 대립감정을 해소하는 조치가 강구돼야 할 것이다.
  • 일 대표단 방북 무산 위기/“전후보상 북입장 불변”

    ◎사회당 불참 결정/북선“자민단독방문 곤란”표명 【도쿄 연합】 북한과 국교정상화회담 재개를 위해 일본 자민당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연립여당 방북 대표단 파견이 또 백지화될 가능성이 큰것으로 전해졌다. 사회당은 16일 상오 중앙집행위에 이어 당3역 회담과 일­북한 의원연맹 및 일­한 의원연맹 가입의원 회의를 잇따라 열어 연립여당 방북단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향후 구체적인 대응책은 구보 와타루(구보선) 서기장에 일임했다. 사회당이 방북단에 참가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앞서 15일 구보 서기장이 조총련의 허종만책임부의장과 접촉한 결과 「전후 45년간 보상」을 규정한 지난 90년9월의 자민­사회­조선노동당 3당 공동선언에 대해 북한측이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보 서기장은 이날 회의에서 『단순한 절차상 문제가 아니라 (사회당이 참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면서 자민당이 방북단 단장으로 내정한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외상이 3당 공동선언을 백지화할 것을 주장하는 이상 사회당의 방북단 참가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한편 북한 소식통은 이날 사회당이 방북단 참가를 거부한데 대해 『예상하지 않은 사태』라며 『자민당 만으로 구성된 대표단의 수용 여부는 다시 검토해야 하나 사회당과 오랜 우호관계를 감안하면 자민당 단독 방북단의 수용은 곤란하다』고 밝힌 것으로 교도통신은 전했다.
  • “「오진우사망」북군부 대변화 신호탄”/「김정일버팀목」붕괴이후 분석

    ◎「차기 총참모장 성향」 북향방 좌우할것/러 유학 신세대장교 개혁주도 가능성/최평길 연세대교수 함북 북청의 물장수아들,국민학교 중퇴의 북한혁명 1세대 군최고지도자인 78세의 오진우가 김일성의 뒤를 이어 사라져 갔다. 김일성이 모택동군 휘하 동북항일연군 게릴라부대를 이끌 때부터 참가한 오진우는 1937년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밀려 50명 안팎의 김일성 게릴라 부대가 러시아땅 하바로프스크에 밀려갈 때도 충실한 김의 전사로 행동을 같이한다. 장차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 전위무력부대로 사용할 수 있겠다하여 당시 소련극동군사령부는 아무르강 언덕에 88독립저격여단을 만들어 중국게릴라 지도자 주보중을 정점으로 한인 김일성을 1대대장으로 한 정보정탐 훈련팀을 키우고 있었다. 1대대장 김일성 대위밑에는 3개 중대와 1개 경비소대가 있고,1중대에는 3개소대가 있었는데 1중대장은 후일 인민군 3군단장과 부총리를 역임한 최용진,1중대 1소대장은 6·25당시 탱크사단장을 지내고 전사한 유경수,부소대장이 바로 오진우였다. 북한인민무력부는 행정부의 국방부같이 정상적 정부기관에 소속되지 않고 북한최고 정부지도 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직속 별동대로 존재하고 있다. 1백52개 여단과 사단으로 구성된 지상군 65%가 휴전선에 전진배치되어 있다.해·공군사령관,전차·기계화군단사령부,평양방위사령부,해·공군사령부를 직접 관장하는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휘하는 인민무력부장은 김일성이 죽은 권력공백기간에 가장 위협적이며 권력승계자인 김정일로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서서히 수면위로 부상하는 개혁파·우파,또는 반김정일파 등 어느 정파도 인민군을 끼지 않고는 북한정권을 장악할 수가 없다.북한군은 어떤 의미에서 김일성 이후 시대의 「사회안정자」또는 북한정권 정파에 대한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정치의 키를 쥐고 주변 국가에 위협적으로 등장하는 북한이 내놓을수 있는 유일한 세계화의 상품인 군사력의 실질 관리자가 사라진 이 시점에 차기 인민무력부장,인민군총참모장,그에 따른 군수뇌부 이동과 권력승계,정치향방,핵무기 개발 여부등은남북관계 변화에 매우 큰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아마도 같은 혁명1세대인 현 총참모장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이 되고,총참모장으로는 같은 혁명1세대인 이을설·김봉율 아니면 2세대에 해당하는 김광진이 기용될 수도 있다.이 경우는 현재 인민군 지휘체계의 골간을 크게 바꾸지 않고 김정일의 정권장악을 위해 김일성이 미리 마련해놓은 군지휘부가 유지되는 것이며 현체제가 안정돼 있다는 지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하나의 가능성은 설사 최광·김광진 등이 인민무력부장이 되더라도 인민군 총참모장이 혁명 2∼3세대에서 나오는 경우,그리고 그들 성향이 개혁지향일 경우 북한 정국의 향방이 크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진우의 사망은 김일성 시대의 사병화된 김일성군의 개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전문직업군,변화의 촉진제가 될 효율화된 군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줄잡아 1만5천명 정도의 북한장교는 러시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고,3백명의 젊은 대위·소령급장교(나이는 28∼30살)들이김일성에의 맹목적 충성심과 탁월한 부대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엄선되어 모스크바 고급군관학교에 5년장기 유학훈련을 받은 바 있다. 최근에 보내진 장기유학장교단은 1년은 러시아어를 배운후 4년간 소속병과훈련을 받았다.그런데 이 시기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또 옐친이 직선제 러시아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동구의 김일성인 루마니아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체코의 무명 지하극작가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때였다.공산체제 붕괴와 자유시장체제로의 전환을 현장에서 경험하고,한국무역진흥공사의 전시장과 한국기업들의 러시아 진출을 직접 체험한 이들은 훈련이 끝날 무렵인 1991년경에는 크나큰 심경의 동요를 겪었다. 그들은 주석직은 직선제로,조선노동당이 유일합법당이라면 국민투표로 인민들의 신임에 맡기자는 논의를 한 끝에 훈련종료 직전에 모두 평양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지금 북한군을 실병지휘하는 대대장·연대장으로 있으며 만만찮은 개혁세력으로 잠재해 있다.이들 유학장교단은 혁명1세대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든,2∼3세대가 계승하든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게 마련이이여서 김정일 권력승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앞으로 이들은 식량난 가중으로 주민봉기가 일어날 경우 정보사찰안전조직의 장악,개혁파 지도계층과의 연계 등으로 개혁의 핵심역할을 할 것이며 그들의 운신폭은 계속 넓어질 것이다. 오진우의 죽음은 이같은 북한 인민군의 군사·정치적 변화의 중요한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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