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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정치지도원/말단부대까지 침투 군감시·통제

    ◎당서 군장악 위해 이원조직 운영/뇌물수수·횡포잦아 장병들 불만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이철수 대위(30)는 군수사당국의 조사때 귀순동기 가운데 하나를 『정치지도원이 승진 누락 등을 이유로 계속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전투기 조종사를 탈북과 귀순으로 몰아넣을 만큼 북한 군부내에서 정치지도원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군수사당국에 따르면 이대위는 후배가 뇌물을 써 자신보다 먼저 중대장(편대장) 보직을 차지한 데다 정치지도원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심지어 『당신은 더 이상 승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치지도원과의 불화는 깊었다. 북한군부에서 정치지도원은 군인 신분이지만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일반 야전군인보다 우위에 서서 이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이같은 체제가 가능한 것은 북한사회가 조선노동당의 1당독재사회이며 군은 당에 종속되는 당 우위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헌법과노동당 규약에 따라 「당의 군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아울러 당 조직이 군 내부의 말단 부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침투해 있어 당과 군의 이원화된 계선 조직을 갖고 있다. 인민무력부­총참모장­지상군·해군·공군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 체계와 함께 노동당 중앙위원회­인민군 당위원회­인민군 총정치국­각 군부대로 연결되는 이원화된 조직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다. 북한은 특히 군 내부의 김일성 주체 유일사상 확립을 위해 지난 69년 군내 정치조직을 대폭 강화했다.대대와 중대 정치지도원의 계급을 군 지휘관과 비슷하게 올렸다.그리고 연대급 이상 군부대에도 정치위원 제도를 만들어 군 지휘관의 명령도 정치위원들의 공동서명 없이는 효력을 발생할 수 없도록 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같은 북한군의 이원 조직은 상대적으로 군 지휘관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치 군관들의 권한을 강하게했다.이에 따라 야전 군 지휘관들의 불만은 증폭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극렬이 총참모장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군관들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이원화된 군조직을 개혁하려 했으나 정치군관들의 반격을 받아 지난 88년 노동당 민방위부장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이대위의 귀순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체제에서 북한 군부의 위상이 더욱 강화돼 가고 있음에도 당의 통제를 받는 정치군관의 입김은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순수 군 지휘관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황성기 기자〉
  • 양당 선대위대변인 논평 공방

    ◎신한국­“DJ 안보논의 자격없다”/국민회의­“북,김 총재 겁내 긴장 조성”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최근 북한사태에 대한 발언과 관련,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간에 「논평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신한국당 김철 선대위대변인은 8일 논평을 내고 『김총재가 거듭 남북긴장의 원인을 현정부에 돌리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중자애를 당부했다. 김대변인은 『김총재는 해방후 사상전력에서부터 70년대 망명때 해외친북단체와의 국제 커넥션 이래 서경원 문익환밀입북,남조선노동당사건,김일성 조문론을 비롯,수많은 대북협조적 행적을 갖고 있다』며 사상전력을 언급한뒤 『마지막으로 국가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안보태세와 안보의식을 가다듬을 때 조용하게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김한길 선대위대변인은 즉각 논평을 내고 『패색이 짙어진 여당이 무기고 제일 구석에 남아있는 「녹슨 검」까지 빼든 꼴』이라며 『북한의 권력층이 「제2의 중국화」를 주장하는 김총재를 가장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최근 선거를 목전에 두고 긴장을 조성하는 북한의 작태가 잘 증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신한국당 김대변인은 반박논평을 통해 『김총재가 두려워 북한이 긴장을 조성했다는 해석은 기상천외한 것으로 세계의 어떤 안보전문가도 하지 못했던 독특한 분석』이라고 꼬집었다.이어 『김총재의 전력은 「녹슨 칼」이 아니라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미제사건』이라고 규정했다.〈박찬구 기자〉
  • 「남로당」재건 기도 7명 긴급 구속

    【춘천=조한종기자】 강원도 경찰청은 지난 92년 10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황인오(당시 36세)씨의 조직을 재건하려던 김모씨(27) 등 7명을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남한조선노동당은 당시 안기부에 적발돼 조직이 와해됐으나 경찰은 최근 이들이 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포착,이날 상오 강원도 강릉과 양양·서울 등지에서 붙잡았다.
  • 「통일대비 법적대응방안」 법제연구원 세미나

    ◎“「통일 헌법」에 혼합경제체제 도입 바림직” 「남북통일에 대비한 법적 대응방안」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14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한국법제연구원이 마련한 이날 세미나에서는 헌법과 민사법·형사법·경제법·사법제도로 나뉘어 각 분야에서의 통일 대응방안이 논의됐다.이 가운데 장명봉 국민대교수의 헌법분야,김상균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의 사법제도분야 주제발표를 요약한다. ◎자유민주주의 바탕 정치 다원주의 취해야/장명준 국민대교수 남북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기초한 헌법질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헌법의 합의점을 도출하기란 어렵다.그럼에도 통일국가의 미래상을 자유와 평등이 조화되는 민주복지국가로 설정하면 다음과 같은 기본질서를 세워볼 수 있다. 먼저 정치적 통합을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되,형식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직적인 평등과 복지의 실현을 도모해야 한다.그것은 정치적 다원주의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그러나 이는 북한의 조선노동당 1당 지배체제와 수령의 1인 지배체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이점에서 공산당 1당독재에서 탈피,복수정당제에 입각한 의회민주주의를 택한 사회주의국가들의 변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 통합을 위해서는 시장경제질서를 기초로 하고 사회주의경제체제의 장점을 가미한 혼합경제체제를 취하여야 한다.오늘날 자본주의경제체제는 계획경제의 원리를 도입하여 활용하고,사회주의경제체제는 시장원리를 수용함으로써 양체제간의 수렴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이와 관련해 북한이 최근 경제부문에서 개방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남북의 경제통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런 면에서 통일헌법상 경제적 기본질서는 시장과 계획이 조화되는,즉 소유의 측면에서 국가소유·공동소유·사적소유등이 공존하는 일종의 혼합경제체제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문화적 통합을 위해서는 서로는 통일국가가 남북의 이질적 체제의 결합임을 고려하여 전체주의를 배격하고,다원적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다양성이 보장되는 가운데 선의의 경쟁을 통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아울러통일헌법은 남북주민이 통일국가의 가치체계와 문화체계,생활양식에 있어서 이질성을 극복하여 일체감을 이루도록 해야한다. ◎김상균 법원행정치 심의관 통일의 형태가 어떠하든지간에 통일후 사법제도의 모습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과 이에 대한 사법적 보장,권력분립의 확립,위헌법률심사제,포괄적 위임입법의 금지,행정의 합법률성과 사법적 통제 등의 원칙은 통일사법제도를 구축함에 있어 양보할 수 없는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그 연장선상에서 법관의 신분보장,심급제도와 영장주의의 확립,검사권한의 합리적 축소,국가로 부터 독립되고 경제적으로 존속가능한 변호사제도의 확립,비정규적 사법조직의 철폐,법조인력의 통일선발·통일양성제도의 확립,부동산등기제도의 구축 등 여러가지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독일통일과 사법통합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사법제도 역시 완벽한 제도는 아니므로 북한의 사법제도 중에서도 인민참심원제도,재판절차에의 국민참여,형 집행절차에의 법원관여,변호사업무의 공익성 강조 등 통일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기반여하에 따라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본원리 아래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에 대한 심도있는 실증적 연구와 교류의 확대와 법제의 정비,우리 사법제도의 개혁이 필수적이다. 이제 예상가능한 모든 통일상황과 사법통합과정을 염두에 두고 북한의 법률과 사법제도,통일전후의 사법조직체계와 그 운영에 대한 조사·연구,실천적 방안의 모색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과의 교역·투자 등의 협력사업이 활발해지면 그와 관련한 제반분쟁이 증가할 것이므로 사법제도적 측면에서 그러한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그와 아울러 우리의 법률과 사법제도의 모습을 뒤돌아 보고 국민을 위한 것으로 개혁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 “90년 고첩 이선실 대동 월북”/부여간첩 김동식 회견

    ◎허인회씨 등 운동권 7명 포섭 공작/대남 핵심공작원으로 15년 활동/이선실과 서울아지트서 5개월 암약 부여에서 생포된 무장간첩 김동식(33·본명 이승철)은 지난 90년에도 남파돼 거물간첩인 이선실(79·북한권력서열 19위)등을 월북시켰으며,이선실은 월북때까지 10년동안 국내의 정계·학계·문화예술계·재야등 각계 인사 30여명과 폭넓게 접촉,포섭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8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부여침투 무장간첩사건 전모」를 발표,김동식이 90년5월에 이어 두번째로 남파돼 국내에서 허인회(31·국민회의 당무위원)씨 등 운동권출신 7명을 포섭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안기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은 75년 당시 노동당 대남비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8세때인 80년7월 이른바 「새세대공작원」으로 선발돼 15년간 사회문화부소속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한 지도핵심 공작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은 90년5월 제주도 보목동 해안을 통해 1차침투,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암약하고 있던 이선실과 접선,서울의 신대방동 아지트에서 친척간으로 위장해 생활하면서 5개월간 활동했다. 이어 90년 10월 17일 이선실과 고정간첩 황인오(39·복역중)를 대동해 강화도해안을 통해 월북했으며 그 공로로 국기훈장및 영웅증서를 수여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다. 월북한 이선실은 지하당 구축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김일성 별장에 초대돼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훈장과 금시계 등을 받았으며,김정일로부터는 벤츠승용차를 선물받았다는 것이다.
  • 서울신문 발굴 「55년 당 중앙위 결정서」를 보고(전문가 진단)

    ◎북 권력층 비리 입증 첫 자료/전쟁중 후방의 기강 해이도 확인 북한정권의 수립과정과 그 지도층을 평가한 연구는 주요한 연구주제이기 때문에 이미 국내외에서 적지않은 양의 성과가 출판되었다.그러나 북한과 관련한 주제는 사실의 확인을 포함한 기초작업이 아직도 상당히 필요하다.특히 1차사료의 발굴과 정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북한의 공식간행물 이외의 1차사료는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입수한 이른바 「노획문서」가 거의 전부였다.「노획문서」는 현재 RG242로 분류되어 위싱턴 근교의 수트랜드에 보관되어 있다.연구자들은 이 자료들을 이용하여 북한정권 형성기의 많은 문제들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쟁이후 시기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여 이 방면 연구자들이 겪는 공통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는 없을까.북한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위해 의무적이기도 한 이 물음에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이번에 그 실마리를 제공했다. 「노획문서」를 제외한 북한관련 1차사료는 구소련과 동구권에서 찾을 수있다는 것이다.북한과 이 지역은 오래동안 우호적이었고,외교관과 연구자를 포함한 다양한 왕래가 있었다.또 북한정권의 형성에 참가했다가 뒷날 망명한 사람들도 이 지역에서 살았다.따라서 그들에 의한 계통적인 자료수집도 가능했다. 이번에 발굴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 결정서」는 우리가 갖고 있던 기왕의 인식과 이해를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북한 노동당은 창당이후 공고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왔다.그것은 유일지도체제의 수립과정이기도 했다.북한의 공산주의자만큼 자기 당의 조직·사상적 기초와 단결을 강조한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북한에서 대부분의 당내투쟁은 「반종파주의」를 원칙으로 제기되고,해결되었다.대표적인 사례로 1955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에서 박일우가 「종파주의자」로 낙인찍혀 축출되었다.이것은 1956년 3월로 예정된 노동당 제3차 대회를 앞두고 김일성 1인중심 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황해도당 위원장이었던 김열에 대한 자료들은 당시 북한 정치의 특성이나 요인및 그들의 부패한 생활상까지를 처음으로 소상하게 설명해 주는 귀중한 1차사료라고 할 수 있다.1인 절대권력자의 지배하에 있는 북한 내부의 정치부패와 인권유린의 단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본래 정치권력과 관련된 부패는 그 증거를 포착하기가 대단히 어렵다.자료에 의하면 북한당국은 김열의 행동을 개인의 가치,신념,생활태도등 과 관련한 사회적 일탈행위로만 단죄한다.그러나 한 사회의 권력형 비리는 대부분 제도적 취약성을 이용하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탐욕을 채우는 행위인 것이다.우리는 김열을 통해 당시 북한사회 내부의 기강해이,당의 경제활동 독점으로 인한 부패 소지및 관리능력의 부재등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일성 1인체제 구축(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4)

    ◎전후 복구­외교정책 싸고 소련파­연안파 대립/56년 「8월 종파사건」 계기 본격 숙청… 59년 완료 북한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노동당 내 경쟁 파벌들을 차례대로 숙청,50년대 말쯤에는 일인 집권체제를 구축했다.주체이론으로 무장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는 북한을 세계에서 유례없는 공산독재 국가로 만들었다.이는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도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계승돼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북한 노동당에는 원래 김일성이 이끄는 빨치산파를 비롯,국내파(남로당계)·소련파·연안파 등 주요 파벌이 넷 있었다.이 가운데 박헌영·이승엽 등으로 구성된 국내파는 한국전쟁 말기 이미 숙청돼 휴전 직후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따라서 전후 김일성이 권력강화를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는 소련파와 연안파가 남았다. 노동당내 권력투쟁은 1955년에 접어들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여기에는 김일성의 권력욕이 물론 주요 동기였지만 전후 경제복구와 외교정책을 둘러싼 파벌간 노선 갈등도 적잖게 작용했다.김일성은 한국전이 끝나자 먼저 경제건설에 주력했다.김일성은 휴전협정 조인 다음날인 1953년 7월28일 라디오방송에서 『전쟁은 조선인민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한 다음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들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의 「3개년 경제 계획」과 농업 집단화 등 경제개발에 한동안 힘을 쏟았다.또 소련·중국·몽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 형제국」들을 순방하며 경제원조를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그러나 연안파와 소련파는 중공업 우선,농업집단화를 앞세운 경제복구가 북한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소련은 또 농업집단화가 중국의 인민공사제도를 흉내낸 잘못된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 무렵 스탈린 사망­흐루시초프 등장에 따라 기존의 국제관계에 변화가 일어난 점도 파벌 대립을 재촉했다.중국에 등을 대고 있는 연안파는 연안파대로,소련과 밀접한 소련파는 소련파대로 변화를 자기 파벌에 유리하게 작용시키려고 애썼다. 당연히 김일성과 반대파 사이에는 어느쪽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제대로 따르는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김일성은 이즈음 방어논리로 주체이론을 새로 내놓는다.1955년 4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구체적 상황에 연결해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을 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이에 대해 정치학자인 단국대 김학준 이사장은 『주체이론의 싹을 1940년대 말에 찾을 수도 있지만 늦어도 이 때 김일성 연설에서는 충분히 발견된다』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다. ○스탈린 사후 위기몰려 김일성은 이같은 이론을 무기로 먼저 연안파인 박일우(초대 내무상이자 당시 체신상)와 방호산(한국전 때 군단장)을 숙청했다.그해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겸 조직위원인 소련파 김열의 죄상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는 한편 같은 파 지도자인 박창옥(부수상겸 국가계획 위원장)에게도 칼날을 겨누었다.김열은 비록 황해도당위원장 재직시 비리가 문제됐지만 결국은 개인비리를 숙청무기로 사용한 것이었다. 19 56년 김일성은 중대한 도전을 받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오히려 권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2월 14∼2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격하운동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했다.더불어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나섰다.이는 일인독재를 추구하면서 그 바탕을 「반미」에 두고 있는 김일성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흐름이었다. 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가 열렸다.이 자리에 소련에서는 정치국 정위원이자 서기국 서기인 브레즈네프가 참석,흐루시초프가 제시한 새 노선을 북한이 충실하게 따를 것을 촉구했다.김일성은 이를 받아들이지도,그렇다고 소련의 비위를 거슬리지도 않은 어중간한 연설을 했다. 그해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는 힘을 합쳐 김일성에게 도전했다.연안파 최창익(부수상겸 재무상)이 중공업우선 정책은 주민에게 고통만을 준다며 먼저 비판의 포문을 연데 이어 상업상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난했다.박창옥 등 소련파들도 나서 김일성 1인독재를 비판하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김두봉 57년 직위박탈 그러나 북한 노동당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부르는 이 사태는 김일성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김일성이 노동당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대부분을 이미 친위세력으로 바꾼 상황에서 윤공흠 등 연안파는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체포됐다.사건은 곧 국제문제로 비화한다.윤공흠 등이 감시소홀을 틈타 중국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중국과 소련은 즉각 개입해 김일성에게 압력을 가했다.김일성은 죄지은 연안파·소련파 지도자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일단 굽히고 들어가 원래 직책에 복귀시켰다.그러나 김일성은 이들을 끝내 숙청하고 말았다. 「8월 종파사건」은 아직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일부 연구자들은 연안파가 김일성제거 계획을 조직적으로 세웠다고 주장한다.무혈쿠데타를 노렸다는 것이다.윤공흠 등이 김일성을 전원회의에서 비판한 뒤 그 죄과를 들어 기소하기로 했지만 김일성측에게 이 정보가 새나가 오히려 역습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힘을 잃은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일은 절차만 남았을 뿐이었다.연안파의 우두머리 김두봉은 북한의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를 19 57년 9월 박탈당했다. 이들의 운명은 그뒤 어떻게 됐을까.김두봉은 쫓겨날 때 68세였다.1년가량 사상개조 교육을 받았지만 「개전의 정이 없어」다시 산골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그는 1960년 또는 61년에 숨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인은 병사와 피살설이 있다. 김일성은 이어 공산당원 한집이 네집을 감시하는 이른바 「5호담당제」를 1958년 7월부터 실시했다.곧이어 12월부터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또 김일성의 빨치산운동을 항일독립운동에서 유일한 정통으로 내세운 역사조작에 손댄 것은 1959년의 일이다.이로써 30년 넘게 계속돼온 김일성독재체제가 완결된 것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발굴­노동당 중앙위회의 결정서/소련파 거물 김열 부패로 몰아 숙청/김일성의 정적 제거하는과정 보여줘/북 노동당 간부… 6·25때 대민착취 극심 북한 김일성이 한국전쟁후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정적을 숙청한 과정을 보여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 결정서」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모스크바에서 입수했다.1955년 12월에 열린 이 회의 결정서는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 문서는 12월 2∼3일 진행된 전원회의에서 위원장 임해의 보고와 이에 따른 토론에서 내린 결정을 당 중앙위원회가 「절대비밀」로 분류,그달 25일 고위직 인사들에게 한정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내용은 황해도당위원장을 지낸 당 중앙위원겸 조직위원 김열의 부패한 생활상을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김열은 김일성에 맞선 소련파의 유력한 인물이다.그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당위원장을 지내면서 직위를 이용,방탕과 사치가 극에 이를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그는 강제·억압·기만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성 30여명의 정조를 유린한 것으로 기록됐다.그 가운데는 여중생까지 포함됐다. 이와 함께 갖은 명목으로 크고작은 잔치를 벌였던 김열은 당의 시설물들을 향락에 이용했다는 사실도 폭로됐다.이를 위해 횡령도 서슴지 않았다고 이 문서는 덧붙였다.그는 후방에서 거둬 전선으로 보내는 성금 2백53만여원을 비롯 1천여만원을 불법 조성해 모두 탕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김열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를 비판하는 당 간부들에게 구실을 붙여 강등시키거나 쫓아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만을 중용했다고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비판했다. 김열에 대한 노동당의 단죄에 정적 숙청의 의미가 없지 않더라도 자료에서 드러난 노동당 간부의 부패상은 북한 사회의 또다른 면을 보여줬다.한국전 당시 남한에서도 후방의 퇴폐 분위기가 문제된 것처럼 북한의 권력층도 전쟁을 틈타 백성에게 갖은 횡포를 부렸음이 밝혀진 것이다.북한이 남한보다 더욱 획일적인 사회임을 감안하면 그 정도 역시 훨씬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삶의 최고목표는 노동당원”/노동신문 최근호(북한 이모저모)

    ◎직위·인격·이상 대변… 당원 예찬론 역설 ○…북한은 사람에게 있어 그의 인격과 직위,직분,이상과 지향을 대변해주는 여러가지 칭호가 있지만 「조선노동당원」이라는 부름보다 값높은 칭호는 없다며 새삼 당원 예찬론을 들고나와 눈길. 북한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최근호에 게재한 글에서 『혁명가가 오를 수 있는 삶의 절정도 조선노동당원의 영예를 지니는 것이고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삶 목표도 조선노동당원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당원이 되는 것이 삶의 최고가치임을 역설. ◎「북청 사과」가 제일 ○…북한에서는 함경남도 북청지방에서 나는 「북청사과」를 제일로 친다고. 평양에서 발간되는 잡지 천리마 최근호에 따르면 원명이 「국광」인 이 사과는 주로 북청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면서 그같은 이름이 붙여지게 됐는데 현재 북한에서 나는 황주 송화 덕성 허천 구월 단풍 금강 노을 팔월 등의 각종 사과들 가운데서도 북청사과를 제일로 알아주고 있다고.
  • 빨치산의 최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1)

    ◎지리산 본거지로 군사시설 파괴·후방 교란/휴전협정뒤 숙청·토벌로 조직 “지리멸렬”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일단 마무리 됐다.그러나 남한 곳곳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흔히 빨치산 또는 유격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는 「공비」라 부른 공산주의자 무장집단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 「전선없는 전쟁」은 1956년까지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부터 활동 했다.처음에는 남로당 출신이 주축을 이뤘지만 1949년 3월 북한이 간부들을 파견,빨치산부대를 직접 지휘케 하면서 빨치산은 정규군에 버금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이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내 공산당 조직을 재가동,전쟁 때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한 민중봉기」 염두 이어 전쟁 직전인 50년 6월 북한은 남한 각 도에 「정치공작대」5∼6명씩과 일부 무장병력을 다시 침투시켰다.6월10일 김달삼이 이끄는 유격대 2백50여명이 경북 청도 운문산에 유격구를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남하했다.24일에는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766군부대(7백66명으로 구성)가 해군 함정을 이용,포항 쪽으로 상륙했다.같은 날 또 다른 유격대 2백50여명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이 부대들은 뒷날 북한 정규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다음날인 6월26일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승리를 위해 남한 주민들은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특히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는 더욱 강력한 주문을 했다.곧 『해방구를 확대·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구체적으로는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과 전신·전화선등을 절단,파괴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염두에 둔 김일성의 이같은 요구는 당시 남한실정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김일성의 기대에 찬 독촉이 쉴새없이 방송됐지만 어느 곳에서도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지하당원들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무산됐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벌어졌다.가장 널리 알려진 빨치산부대인 지리산 이현상부대는 8월10일 대구 주변인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미군통신부대를 기습,미군 20여명을 살상하고 무전기 14대,소총 20정을 빼앗아갔다.이들은 8월25일에는 경남 거창 미군사령부를 습격,1백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탱크 3대,화물차 30여대를 부쉈다.9월6일에는 경북 청도에서 북한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 경남 백운산유격대,경북의 배철이 지휘한 유격대,전남 빨치산,남해안유격대들이 미 공군기지를 점령하거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고 마을 청년들을 끌고가 빨치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또 북한군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적극 나서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이같은 활동은 전쟁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박헌영·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빨치산은 민중과 괴리돼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게다가 전쟁전 한국정부가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여 기본조직을무너뜨린 것이 빨치산 세력약화에 결정적 요소가 됐다. 빨치산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밀리면서 뿌리잘린 풀잎처럼 역사의 틈바구니를 떠돈다.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쫓겨간 10월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군사위원회는 남한 각 지방당 조직에 『(북한군의)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각 도당이 책임지고 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김일성도 이틀 뒤 방송에서 전세가 불리해 「전략적으로」후퇴하니 빨치산은 뒤에서 유엔군의 발목을 잡아 북진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이 이용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입산경험자와 입산이 가능한 자는 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강원도로 후퇴할 것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빨치산은 지역별로 유격대를 재편성,산악지대에 들어갔다.이들은 나중에 완전 소탕될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한」처절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당시 입산자들은 민청원·자위대원등 남로당 계열과 북에서 파견한 내무서원·정치보위부원·정치공작대원이 대부분이고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도 적잖게 끼어 있었다. ○이승엽 당정 총 지휘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 이현상 부대는 잠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달아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는 이현상부대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도망해온 빨치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이곳에는 당시 남한내 당·정을 총지휘한 이승엽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승엽은 이곳에 모인 빨치산으로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이현상을 부대장으로,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삼았다.이때 새로 편성된 이현상부대는 직속부대원 1백50여명 말고도 승리사단 4백여명,혁명지대 1백여명,인민여단 1백50여명등으로 구성됐다.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을 본거지로 정하고 남하했다.먼저 태백산맥을 타고 1950년 12월 말쯤 충북 단양에 이르러 문경경찰서를 기습하는등 유격전을 벌였다.다시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러서는 남한내 6개 도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이 자리에서 빨치산은남부군을 결성,통일된 지휘체제를 구성했다.이현상이 총사령관을,이영회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빨치산은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남부군을 해체하고 6개 유격지대 체제로 바꾸는등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했다.또 북한에서 지도부와 북한군을 남파하는등 안간힘을 썼고 가끔 경찰서·열차를 습격하지만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11월 말 한국 정부는 토벌전투사령부를 전북 남원에 설치,빨치산 소탕에 적극 나서 영호남 일대 빨치산은 치명타를 입고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이후 거듭되는 토벌작전에 몰린 빨치산은 「보급투쟁」이란 명목으로 산간마을에서 생필품을 약탈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지도자 대부분 피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남한내 빨치산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박헌영·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에서 버림받게 된다.휴전협정에서도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어 이들에게는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1953년 4월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계 숙청계획에 따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8월에는 이현상이 지리산 빗장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됐다.54년 초 김지회·이영회부대가 각각 전멸당하고 빨치산의 마지막 지도자 남도부가 대구에서 체포돼 남한 빨치산은 사실상 소멸됐다.한국정부의 기록에는 1954∼5년에도 「공비 출현,소탕」사실이 가끔 등장한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공비 1명 사살,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기록에서 사라졌다. 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전략 계획에 따라 조직돼 활동한 집단이었다.이들의 투쟁은 민족사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결국 빨치산은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긴 역사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빨치산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로 잠복해 남아 있다. ◎「빨치산 신문」 한국전중 10여종 발행/남부군 「승리의 길」 등 타블로이드판 지면 대부분 전투원 선동­선무 할애 우리 학계의 빨치산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그동안 「빨치산」이란 말조차 금기처럼 여겨온 사회 분위기에 비추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관련자료는 이우태씨(필명 이태)의 「남부군」을 비롯한 수기 3∼4종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실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빨치산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간행한 신문 10여종을 찾아냈다.국내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빨치산신문들은 그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따라서 학계는 이 신문들이 빨치산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1951년 5월5일자로 발행한 「승리의 길」10호는 타블로이드판 한장에 양면으로 기사를 실었다.앞면 머리기사는 「총사령관 로명선」이 쓴 「5·1절을 맞으면서」란 논설.『5월1일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력량과 국제적 단결을 시위하는 날』이란 의미 부여와 함께 그 내력을 소개하고 『남부군 전체 군무자 동무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또 신문 사고의 형태로 『남부군 산하 각부대들이 3월21일부터 4월14일까지 수안보·칠성·청천·봉화·립석을 공격하여 이를 해방시켰다』고 전했다.아울러 「적 사살 1백25명,부상 30명,포로 48명,각종 무기 37정,탄약 2천2백37발」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1951년 11월23일자 「승리의 길」27호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의 보고를 실었다. 이밖에 빨치산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전투원 선동에 할애 했다.즉 『용감하고 귀중한 빨치산들이여,적들의 지휘처와 참모부를 기습 소탕하며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하라』『리승만의 반동적 지방의회선거를 철저히 파탄 분쇄하자』는 등으로 채웠다.이따금 이명제의 서사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29호)따위 문학작품이나 감상문,외신,전투실기,정찰기,여순병란 회고기등도 실었다.
  • 「빨치산 신문」을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전문가 진단)

    ◎「남부군 총사령관 로명선」 처음 밝혀/김일성 동정 실려… 「북과 계속 연락」 입증/“빨치산의 투쟁양상 밝힐 실증자료” 평가 이번에 서울신문이 발굴한 유격대 발행 신문을 통해 유격투쟁의 구성원,전개양상및 실패 원인을 새롭게 실증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예를 들면 남부군이 발행한 「승리의 길」27호(19 51년 11월23일자)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지금까지 통설은 빨치산들이 북한과 직접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고립되어 싸웠던 것으로 이해해왔다.그러나 유격대 신문의 보도 내용들은 그것을 전면 수정하게끔 한다. 또 「승리의 길」10호(1951년 5월5일자)를 보면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을 「로명선」으로 기재한 것이 눈길을 끈다.당시 총사령관은 남도부로 알려져 있었다.「로명선」은 새롭게 밝혀진 인물이다. 이밖에 1952년 1월26일 이후 남부군이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로 개편하였다는 사실을 자료로써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유격대가 발행한 신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의 기관지인 「승리의 길」이다.남부군 기관지부에서 1950년 말부터 순간으로 매월 10·20·30일에 간행했다.이것이 모체가 되어 회문산에서 「회문산 승리의 길」을 발행하였고,덕유산에 있는 남부군 22사단이 기관지로서 「덕유산 승리의 길」을 냈다.또 대구시 서문로 승리일보사에서 1951년 12월27일부터 1952년 1월31일께까지 등사판으로도 「승리의 길」을 계속 간행하였다. 이밖에 각 지역 유격대가 독자적으로 발행한 「산신문」으로는 부산 조국일보사에서 1951년 12월2일 창간호를 낸 「조국을 위하여」,광주에서 간행했다고 하는 「전남 빨치산」,동해남부지구당의 「앞으로」,제7군단보인 「붉은 별」,전남인민보사의 「전남인민보」등과 「별」,「무등산 빨치산」,「불갑 빨치산」,「경남 빨치산」,「유치 빨치산」,「경남 노동신문」등이 있었다. 특정주제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는 1951년 중반 조선 빨치산 독립제6지대 정치부가 간행한 「전투문학」이 있으며 여성을 주선전대상으로 삼은 전북민주여성사 명의의 「민주여성」은 전주에서 1951년 9월20일 창간되었다.
  • “노사분규 부추긴 일 없다”/5·1동맹 구속자 주장

    서울경찰청이 지난달 4일 노사분규를 유도하고 반국가단체를 구성,남한조선노동당 전위활동을 해왔다고 발표한 「5·1동맹사건」(본보 9월5일자 22·23면 보도)으로 구속된 국승룡씨(26)등은 13일 『노사분규를 부추기거나 고의로 위장취업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국씨등은 이날 변호인을 통해 ▲5·1동맹은 남한조선노동당의 전위조직이 아니며 ▲모금활동은 구속자들에게 영치금을 보내고 형편이 어려운 구속자가족을 돕기 위한 활동이었고 ▲신문에 독자투고를 한 것은 당시 사건의 의문을 풀기 위한 활동이었으며 ▲재소자를 상대로 주체사상을 교육한 사실이 없고 ▲92년 남한조선노동당사건 당시 수사기관으로부터 수배되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 북한역사 시대순으로 정리한 통사/김학준 저 「북한 50년사」출간

    ◎1948년 정권출범서 현재까지 다뤄/복잡한 노동당 내력도 명쾌하게 설명 분단 반세기를 맞은 올해에야 북한 역사를 총정리한 통사가 비로소 나왔다.중진 정치학자인 김학준 단국대이사장이 최근 펴낸 「북한 50년사」(동아출판사)가 그것. 그동안 북한 공산체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거나,군사·정치·경제·사회·문화등을 분야별로 개괄한 연구서는 많이 발표됐지만 북한사를 시대순에 따라 체계화한 통사는 없었다.그만큼 시대상황이 경색됐고,전문 연구인력이 부족했기 때문.따라서 권위있는 학자가 저술한 「북한 50년사」는 북한사 최초의 개설서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범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다루었다.곁들여 북한 전사로 항일독립투쟁의 한 줄기인 공산주의 운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지은이는 북한사의 뿌리를 1850∼60년대 함경도 농민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데서 찾았다.굶주림을 못견딘 농민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합병이 있자 항일운동 세력이 이에 합세했다.1920년 무렵 이미 20만 가까운 한민족이 연해주에 모였다.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이들은 「일제 타도」의 한 방편으로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이처럼 탄생한 한인 공산주의 운동이 러시아와 중국,한반도에서 맥을 이어 북한정권 수립의 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광복후 북한사는 김일성의 권력강화,끊임없는 적화통일 기도,김정일 권력계승의 흐름을 보인다.광복과 함께 38도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대위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정권을 세운다.김일성은 갖은 명목으로 반대파를 숙청,56년 말쯤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경제개발에 주력한 북한은 60년대에 남쪽보다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4대 군사노선 수립」「공비 남침」등 적극적인 대남 무력공세를 벌인다.그러나 70년대 초 한때 「7·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는등 군사긴장 국면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인다. 김정일 후계체제는 1973년 등장한다.김정일은 그해 9월 비공개로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떠오른 다음 80년 조선노동당 6차 대회 때 비서국 서열 2위가 된다. 김학준 이사장은 이때부터 「김일성·김정일 공동통치」가 계속되다 84년 초 실질적인 김정일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앞날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적어도 20년 넘게 후계자 노릇을 해왔고 ▲체제의 혜택을 받는 「붉은 귀족」이 1백50만명 가량인데다 ▲김정일의 통치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따라서 경제침체·개방압력에 시달리는 김정일체제의 운명은 통치집단의 내부 응집력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다만 김정일체제가 붕괴하면 강경파가 게릴라활동에 뛰어들어 한국에 큰 손실을 입힐 수도 있다고 지은이는 우려했다. 「북한 바로 알기」에 새 지평을 연 이 책은 실타래같이 얽힌 북한 공산당의 내력을 명쾌하게 풀어헤치는등 북한사를 일반인이 읽기 쉽게 정리한 점도 큰 공로로 꼽힌다.
  • 북한 노동당 50년(박화진 칼럼)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났냐』는 말이 있다.돈은 인생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란 뜻이다.이데올로기라든가 체제 혹은 정당같은 것의 경우에도 같은 말이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이념 체제 정당등은 제도요 방편이지 그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따라서 그것을 만들고 채택 또는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면 얼마든지 바꾸고 개선할수 있고 해야하는 것이 순리요 도리며 상식일 것이다.그렇지않거나 못할경우 붕괴와 멸망이 뒤따를수 밖에 없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공산주의이데올로기의 제도화 및 실천의 종주국인 옛소련 및 동구공산권의 공산당붕괴와 중국 베트남등 아시아공산권의 개혁개방 성공은 좋은 예요 교훈이 아닐수없다.공산주의와 일당독재로는 서방의 자유자본주의 체제와 경쟁하며 살아남을수 없다는 결론에 입각한 과감한 변화와 개혁의 도전에 나선 것이다. 체제와 정당을 완전히 버린 옛소련과 동구가 아직까지는 가장 성공적이라는 서방자유자본주의제도실천에 나서고있는 경우라면 중국과 베트남은 공산당을 버리지않고 서방제도를 도입하고 접목시키는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붉은 자본주의의 과감한 변화와 개혁시도로 일단 성공을 거두고있는 경우라 할수 있다 10일은 북한노동당결성 50주년이었다.김정일이 당총비서직을 승계하느냐도 관심사였지만 북한노동당도 이번 기회에 뭔가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었으나 결론은 한마디로 「역시나」의 실망이었다.김정일의 노동당 총비서직 승계가 늦어진것은 말할것도 없고 털끝만한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않고있음만 확인하는 기회가 되고말았다.변화의 거부,우리식사회주의 고수,공산당독재 강화등만 요란했던 것이다.유감천만이요 걱정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북한노동당은 어떤 정당인가.45년10월 옛소련군이 박헌영등 당시의 국내 공산주의 활동가들을 제치고 하바로프스크로부터 데리고 들어온 소련군 대위 김일성중심의 조선노동당 「북한분국」으로 출범시킨 것이다.그리고 지난 50년간 북한주민들 뿐아니라 우리민족 전체에 대해 온갖 오욕과 수치만을 남겼다. 김일성과 노동당이 50년대부터 약속한 「고기국과 이밥,비단옷과 기와집」의 지상낙원은 물거품이 된지 오래다.하루 세끼의 강냉이밥도 먹이지 못해 우리와 세계에 식량구걸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것이 오늘의 북한현실 아닌가.노동당통치 50년에 남은 것이란 처절한 빈곤과 굶주림 그리고 좌절과 비탄뿐임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는것이다. 이러고도 공포와 폐쇄로 2천만동포의 눈과 귀를 막은채 수령님은혜를 칭송하며 우리식사회주의 고수를 소리높여 외치고 있으니 해도 너무하는 후안무치가 아닌가.북한노동당은 현실에 승복해야한다.하기쉬운 말로 공산당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사람나고 공산당 났지 공산당 나고 사람 난것』은 아닐 것이다.온세계가 모두 버린 허깨비 공산주의 지키겠다고 더이상 헛고생 하지도 시키지도 말고 하루빨리 개방과 개혁의 살길로 나서야 할 것이다. 북한노동당이 지금 할수있고 해야할 마지막 역사적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2천만 북한동포들을 위한 개방과 개혁의 결단일 것이다.그리고 7천만 한민족의 21세기 세계웅비를 위한 민주평화통일에의 역사적인 합류결단일 것이라 믿는다.북한에는 고르바초프도 등소평도 없단 말인가.
  • 함북 회령­학송 전철공사 완공(북녘 뉴스라인)

    【내외】 북한은 최근 당창건 50주를 맞아 회령∼학송간 전기철도공사를 완공한 것으로 비롯해 경제대상들을 대거 완공,조업식을 가졌다. 북한은 지난 5일 함북 은성역에서 당비서 한성용,교통위원장 이용무,함북도당책겸 인민위원장 이한모,사로청위원장 최용해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령∼학송간 전철공사 개통식을 가졌다고 중앙방송이 6일 보도했다. 이날 개통식에서는 전철공사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를 공급한 공장·기업소에 김정일의 「감사」를 보냈으며 전철공사에 투입됐던 청년돌격대 및 건설자들에게 당중앙위 명의의 축하문을 전달했다. 이 방송은 회령∼학송간 전철공사는 회령에서 중국과의 국경선을 따라 온성을 거쳐 은덕군의 학송리까지 연결되는 구간으로서 지난해 6월 착공이후 올해 2월 1단계 공사로 회령∼남양구간(약80㎞)개통식을 가진 바 있다. ◎김정일,간부층 부정부패 잇단 경고 【내외】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사후 자신의 명의로 발표한 세편의 논문에서 잇따라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문제를 거론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강조한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내외통신 분석에 따르면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지의 이같은 김정일의 관심은 지난해 11월과 올 6월에 발표된 두편의 논문에 이어 5일 발표된 「노작」에서도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김정일 체제」등장에 따라 앞으로 가시화될 관련조치들이 주목되고 있다. 김정일은 5일 발표된 노작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에서 『일꾼(관료)들 속에서 세도와 관료주의,부정부패를 철저히 배격하고 겸손하고 소탈한 품성을 가진 청렴결백한 생활기풍을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각국 공관원들 가을걷이에 동원 【내외】 당창건 50주를 맞아 10월10일 전 추수를 끝낼것을 강조하고 있는 북한은 최근 평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원들을 협동농장의 가을추수에 참여시키며 주민들과의 유대강화 및 노동력 확보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한데 따르면 주북 중국대사 교종회와 공관원들은 지난달 25일 평양시의 「북·주 친선 택암협동농장」에 나가 농장원들과가을걷이를 했으며 이곳 농장원들과 두나라의 노래도 부르고 친선을 다졌다는 것이다. 또 29일에는 인도대사 아난드 자와 대사관원들이 「북­인도 친선 갈천협동농장」에,같은날 이란대사 세이드 모르테자 미르헤이다리는 「북­이란 친선 새날협동농장」에 각각 나가 협동농장 근로자들과 농사일을 하면서 친선의 정을 두터이 했다고 전했다. ◎당 창건 사적관 참관사업 진행 【내외】 북한은 당창건 50주를 맞아 각계각층의 주민들을 동원,당창건사적관 참관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당창건사적관의 전시실을 개편하고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창건과 관련한 각종 자료들을 추가 전시한 이래 매일 1천여명 이상의 각계각층 주민들이 사적관을 참관하고 있다고 중앙방송이 5일 보도했다. 주민들은 당창건사적관 참관을 통해 『당창건 위업을 실현한 수령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다함없는 경모의 정을 새기고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 “김정일 카리스마 보완” 시간벌기/권력승계 왜 자꾸 늦어지나

    ◎지난달 전방 시찰… 건강이상설 일축/이미 당정군 장악,충성운동 추진중 북한 김정일이 오는 10월10일 당창건 50주년 기념식에서도 권력승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최근 북한 관련당국의 판단은 북한 내부사정을 모두 종합검토한 끝에 내려진 것이다. 1일 당국에 따르면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취임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김일성 이후 북한을 이끌어가기 위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당대회를 개최,북한 권력핵심인 당중앙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당규약 21조에서 당대회를 열기 직전 3개월 전에 대회개최공고를 내도록 돼 있다.김일성을 다시 국가주석으로 선출하기 위해 지난 80년10월10일 열린 제6차당대회의 경우 대회개최에 적어도 6개월이상 시일이 소요됐다.김정일을 국가주석에 선출하는 7차당대회도 같은 기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올 10월10일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등극」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7월이전부터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점은 북한 내부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다는 해석이다. 또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북한으로서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별로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분석에서 비롯된다. 김정일은 이미 당·정·군의 모든 권력을 장악,실질적인 통치를 수행하고 있다.김정일은 북한권력의 중추인 조선노동당 서열 1위이자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의 유일한 상무위원이며 정책입안을 담당하는 비서국 서열 1위이며 군통수기관인 당중앙군사위원회 서열 1위및 국방위원회위원장으로 국가안전보위부를 직접 관장,최광이 대리근무하고 있는 인민무력부를 장악하고 있다.김정일이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모두 김일성이 갖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당국은 김정일은 자신이 전면에 등장했을 때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보는 중요한 이유는 김정일의 건강악화 내지는 공중기피증등이 근거가 없고 최근에 이를 일축하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 9월13일 장시간 지프를 타고 조선인민군 31사단 전방초소를 시찰,아군 초소를 살펴보는등 건강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30∼40여명으로 구성된 서기부라는 조직을 신설,당·정·군의 충성서약운동등 김정일 카리스마강화작업을 추진중이라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북한의 경제난이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분석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게 관련당국의 생각이다. 즉 북한의 현 1인당 국민소득이 9백32달러지만 세계에는 이보다 훨씬 낮은 국민소득을 보이는 국가가 많다는 점에서 경제력으로 김정일의 위치 이상여부를 점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국가주석 취임여부는 북한 내부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며 권력승계가 늦어지는 것은 김정일의 카리스마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당국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 이사민·현 앨리스 사건(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8)

    ◎재미교포 부부… 49년 입북후 고위직 올라/북,「미 간첩」 혐의로 체포… 남로당 숙청 이용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남북한 집권세력은 내부투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남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9 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재집권한데 이어 북쪽에서는 그해가 끝날 무렵 남로당계 숙청을 서둘렀다. 김일성은 52년 12월15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종파주의 잔재들이 당과 정부기관에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이들을 남겨두면 적의 「탐정배」(간첩)로 변하고 만다고 강조했다.남로당계를 겨냥한 이 발언을 뒷받침해 19 53년 1월 「문헌토의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남로당계 검거선풍이 일었다. ○53년 남로당 숙청 시작 3월 들어 박헌영을 비롯,이승엽·이강국 등 주요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됐으며 이 가운데 이승엽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휴전직후에,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55년에 각각 열렸다.이들에게 걸린 죄목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와 「국가전복 음모」,「남반부 민주역량 파괴」등이다.따라서 이 사건을 흔히 「박헌영사건」또는 「박헌영 미제간첩 사건」이라고 부른다.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대표적인 의혹사건의 하나로 꼽힌다.이는 사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박헌영사건의 성격을 가늠해 주는 또 다른 간첩사건인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재미동포인 이사민·현앨리스 부부가 북한 정권 수립 후에 입북,고위관리로 일하다 한국전쟁 발발후 소련을 통해 탈출을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남로당 숙청에 앞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이승엽등의 재판과 박헌영재판에서 그들의 「미제 간첩」행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서울신문이 이사민부부에 관한 자료와 당시 그 사건을 취급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발굴해 사건 내막을 상당한 부분까지 밝혀냈다. 이사민은 본명이 이경선(미국명 이윌리엄)으로 출신지·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나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일하는등 항일독립운동에 관계 했다.부인 현앨리스는 재미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물로 꼽히는 현모씨의 딸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부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1947년 초 이미 재미 친북파의 대표로서 자리를 잡았다.이사민은 그해 4월부터 정기적으로 북한에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보고서는 주로 체코 수도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한오수를 통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됐다. 이들의 미국내 활동은 매우 적극적인 편이었다.미국 공산당에 가입해 한인조직을 결성,한달에 한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그러면서도 평소 이사민은 워싱턴에,현앨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떨어져 살며 각각 활동한 것을 보면 상당한 골수분자들처럼 보인다. 이와 함께 외부조직으로 민주인민전선연맹과 진보당후원회를 결성해 재미 한국인 단체,미국 좌파단체들과 고리를 맺었다.이들은 민주인민전선연맹을 통해서는 한인 최대 조직인 국민회에 북한에 설립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또 「독립」이라는 주간신문을 2천여부 발행하여 국외및 각급단체에 배포했는데 당시 현지에서 발행된 한글 주간신문 4종 가운데 북한 소식을 보도한 것은 「독립」하나 뿐이었다. 이처럼 활발히 움직이던 이사민부부가 갑자기 북한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뜻을 밝힌 때가 1948년 12월이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별도기사 참고)에서 이사민은 김일성·박헌영에게 동구권 국가를 통해 입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실제로 이 부부는 1949년 1월 체코 프라하로 가 체코정부에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청했다. ○박헌영이 적극 도와 그러나 북한행이 생각대로 쉽지는 않았다.이들의 망명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3∼4개월이 걸렸다.체코정부가 이들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체코 안전기관은 먼저 분명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으며,게다가 이들은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인 것으로 판명됐다.정체를 의심한 체코 안전기관은 이를 북한 내무성 안전국에 알렸으며 북한당국도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때부터이사민·현앨리스와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당시 외무상인 박헌영은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부부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아울러 이들이 북한에 도착하자 외무성을 동원해 환영행사를 해주기까지 했다.그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부장으로,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북한에 들어와 5∼6개월 동안 아주 성실하게 일해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그러나 입국을 거부했던 내무성 안전국은 여전히 부부를 주시하고 있었다.이들은 직위를 이용,유럽에 편지를 자주 했는데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따라서 답장은 한차례도 받을 수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이사민부부는 황급히 북한당국에 유럽여행을 요청했다.내무성은 「불가」통보를 했지만,이번에도 외무성이 출국사증을 내주었다.북한을 떠난 이들이 소련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하자 북한 안전국 요원들은 짐을 수색했다.의심했던대로 그동안 수집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 가운데는 군대관계 비밀자료도 여럿 들어있었다. 그길로 북한으로 강제귀환된 부부는 안전국의 추궁 끝에 미 정보기관으로 부터 정보수집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고 자백했다.마치 한국 땅을 밟았다 사이공으로 탈출했던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을 보는 듯이 북한의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북한판 「이수근 사건」 이 사건의 불똥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에게로 튀었다.이사민부부의 북한 입·출국을 방조한 박헌영이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3년 7월30일 열린 이승엽등의 재판에서 이강국은 『50년 7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한 간첩분자 이윌리엄(이사민)과 현앨리스를 평양에 있는 집에서 두차례 만나 공화국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제공하는데 대한 토의를 했다』고 고발됐다. 또 55년 12월 재판받은 박헌영도 같은 혐의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다.곧 박헌영은 48년 6월 하지로부터 『이사민등미국 정보원들을 유럽을 통해 북한에 보내겠으니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해 주라』는 지령을 받았다.이에 따라 이사민등이 입북할 때 입국사증을 내주었으며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외무성에,이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과연 미국의 간첩이었을까,아니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지는 바람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까.그 진실을 알려줄 것으로 기대되는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이 이제 막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사민의 대북 보고서/“미 교포 공산당원 26명” 김일성에 보고/47년부터 미 정세 등 탐지… 편지 보내/“곧 동구 경유 입북” 박헌영에도 알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박헌영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 관계 자료를 이번에 발굴했다.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이사민이 미국에 있던 19 48년 12월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직접 보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 워싱턴주재동지대표」이사민은 ▲당 동지들의 활동 ▲조선인 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의 정세들을 자세히 전했다.당 동지들의 활동에 대해 『현재 당원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 13인,샌프란시스코에 1인,뉴욕에 4인,워싱턴에 2인,기타 지역에 6인을 합하여 26인』이 있으며 이들은 『미국 당부(미국 공산당)의 허락으로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밝혔다.또 현지의 당원 대표는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김강·현앨리스,워싱턴의 이사민·선우학원,뉴욕의 신두식·곽지순』등 7명이라고 소개했다. 이사민은 이와 함께 동지들 중 일부가 동유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그후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체코 프라하를 경유해 북한에 들어갔다.이 대목이 이사민과 박헌영의 연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 수신자중 한명이 박헌영이었으므로 그가 이사민의 입북계획을 미리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박헌영은 이사민의 입북이 어려워지자 적극 도왔으며,북한에 있을 때나 뒷날 출국할 때도 이사민을 옹호했다.박헌영의 이른바 「미제간첩 사건」과 이사민을 직접 연결시킬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심받을 만한 정황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에서 이사민은 47년 4월이후 동구권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 루트가 이제 불가능한 듯 하다고 밝혔다.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에게 직접 연락달라며 미국 주소를 제시했다. 이사민이 보고서를 작성할 무렵은 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한 뒤 동서냉전이 더욱 격화된 시기라는 점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이 시기에 동구권을 통한 북한과의 서신교류나,미국 주소로 연락을 받겠다고 제의한 사실들은 미 정보기관의 양해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박헌영사건」관련인물로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은 이 자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 서울신문 발굴 「이사민 보고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박헌영 숙청」 본질 파악 단서 제공/「이사민 부부와 연계」 일부 밝혀/해방후 미 교포사회 친북인사 활동 처음 알려져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쟁점중의 하나다.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이나 연구는 선입견이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오늘날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믿음만이 존재한다.반면에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이 6·25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으며,이로써 김일성 정권은 더욱 공고화됐다고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 서울신문이 이번에 공개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박헌영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한다.정치적 성격이 강한 역사적 사건일수록 무엇보다 먼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박헌영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사건의 기원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조선노동당은 1953년1월부터 「문헌토의사업」이라는 것을 전개했다.토의는 문헌에 기초해 당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그런데 두 차례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과 그 주변인물의 과거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이 과정에서 전쟁전에 미국의 정보공작선이 여럿 침투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추어냈다. 여기서 무엇보다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이미 간첩혐의로 체포된 이사민·현 앨리스와 이들이 맺은 관계였다.북한당국의 공판기록에는 『박헌영이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해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이번에 공개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공판과정에서 쟁점이 된 사안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이사민과 현앨리스가 체코 프라하로 가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구한 사실이 「이사민의 보고서」에는 예고돼 있다. 최근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미국 CIA가 박헌영사건으로 체포당한 설정식을 통해 북한의 여러가지 정보를 입수했음을 자료를 통해 새롭게 입증한 바 있다.설정식은 함남 단천 출신으로 미국 마운트유니언대학을 나왔으며 해방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을 지낸 인물이다.46년9월 공산당에 입당해 51년7월 개성휴전회담에서는 인민군대표단 통역을 맡았다.그는 53년8월 이승엽등과 함께 「미제간첩」혐의로 재판받아 사형을 당했다. 이사민·현앨리스의 경우도 이와 같은 부류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아울러 「이사민의 보고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해방후 미국에서 전개된 친북인사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충격적이다.
  • 대북경각심 늦추지 말아야(사설)

    우리사회에 아직도 북한 간첩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심각히 생각해야 한다.서울경찰청이 4일 적발한 「5·1동맹」이 우리의 경각심을 요구하는 한가지 사례라 하겠다.「5·1동맹」은 92년 검거된 「남한조선노동당」의 전위조직으로 노사분규를 배후조종하고 동조세력을 포섭해왔으며 보안법위반 구속자와 수배자들을 공공연하게 지원해 왔다.일부 언론매체에 간첩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또 일일주점을 열거나 통일음악제 비디오테이프를 판매해 그 수익금으로 활동해온 사실도 밝혀졌다. 「5·1동맹」은 불법적 지하당건설을 꾀해온 과거의 수법에서 탈피,합법을 가장한 공개적인 활동으로 북한의 지령을 수행해온 새로운 형태의 간첩조직이다.민주화과정에서 다소 느슨해진 우리사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독버섯처럼 기생해온 것이다.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이번사건은 우리사회의 민주화여부와는 관계없이 적화혁명을 기도하는 친북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은 대남공작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5·1동맹」은 합법적인 활동을 가장한채 북한의 대남선전선동기구인 한민전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해왔고 여자조직원을 밀입북시켜 김일성부자에 대한 「충성의 편지」18통과 3천8백만원의 정성금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간첩조직이 「5·1동맹」뿐이라고 단정할수 있겠는가.우리는 학원민주화 또는 노동자권익보호등을 명분으로 합법을 가장한 친북세력들이 우리사회 곳곳에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이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정도로 우리사회가 허술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우리사회의 혼란을 획책하려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은 뿌리뽑아야 한다.이번 사례를 보면서 국민들은 대북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북한을 평화공존의 상대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굳건한 안보의식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 「5·1」 동맹의 지능적 반국가 활동상

    ◎“간첩단 사건은 조작” 언론에 투고까지/안보법 위반 구속자 공개지원/재소자 상대 주체사상 교육도 경찰이 4일 적발한 「5·1동맹」은 한때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전위조직으로서 아직도 사회 곳곳에 반국가단체가 뿌리를 뻗어나가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특히 이제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이 지능화되고 갈수록 대담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경찰 수사결과 5·1동맹은 일부 언론 매체에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고 보안법 위반 구속자나 수배자를 공식 지원하는 공개적인 활동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과거와 달리 암약의 방식에서 벗어나 느슨해진 사회 각 조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조직원들이 노동현장에서 이적표현물을 제작,배포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곧바로 분규를 유도하는 구체적인 행동강령등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심지어 경찰이 압수한 조직원들의 행동지침서인 「나의 투쟁」에는 검거이후의 투쟁방법까지 기술해 놓고 있다.검찰·경찰등 수사기관별로 그 특성을 면밀히 파악해 검거이후의 행동지침은 물론 재판과정의 진술및 재판거부 방법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옥중투쟁과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의식화운동을 벌이기 위한 세부적인 부분까지 언급해 놓아 반국가단체의 투쟁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직의 구성원은 총책과 비서팀,무장활동을 위한 돌격소조,현장노동자 지도소조등 20여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건설 투쟁 전개」를 목표로 조직강령과 규약은 거의 맹목에 가깝다.한민전의 노선을 절대적인 지침으로 삼아 무조건 따르고 「김일성을 인류해방의 붉은 태양으로 높이 모시기 위한 순교자적 투쟁」등은 이 조직이 단순한,또는 자생적인 반국가단체의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현재복역중인 간첩을 통해 김일성부자에 대한 충성의 편지를 북한에 전달하고 북한의 지령방송을 청취,이에 따라 행동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번 5·1동맹조직의 검거는 최근 쌀원조 등에서 북한이 보여준 터무니없는 행동의 근거가 우리사회 내부에도 자리하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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