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상호
    2026-06-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98
  • 자서전 ‘언론 의병장의 꿈’ 펴낸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자서전 ‘언론 의병장의 꿈’ 펴낸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출판단지로 접어들자 희뿌연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다녔다. 서울은 물론 자유로를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비가 흩뿌리는 구름들 사이로 언뜻언뜻 부신 햇살이 들락거렸건만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햇살도, 구름도 없이 오로지 안개다. 국내 내로라하는 130여개의 출판사가 모여있는 곳. 서울에서 불과 30~40분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듯 외딴섬에 들어선 느낌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라서겠지만, 책과 사람들 사이에 놓인 간극의 세태만큼 아득히 느껴진다. 25일 오후 물 입자 가득한 파주의 침잠된 분위기는 건물 한쪽 벽에 커다랗게 소설가 고(故) 박경리의 얼굴을 그려넣은 나남출판사에 이르며 조금씩 걷혀갔다. 벽을 덮고 있는 담쟁이가 안개를 빨아들임에 틀림없다. 조상호(59) 나남출판사 대표가 호탕한 웃음으로 맞는다.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 ‘언론 의병장의 꿈’을 내놓은 뒤 쏟아지는 주위 반응에 짐짓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껏 들떠 있다. ●기자하고 싶었지만 신분조회에서 탈락 “사람들 앞에 ‘깨벗고(벌거벗고)’ 서 있는 심정이네. 아무튼 출판 30년, 인생 60년을 정리하는 기회가 된 것 같아 요즘 기분이 좋아요.” 초면의 인터뷰어에게 대뜸 반말이 섞인다. 한데 묘하다. 불쾌하지 않다.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조 대표의 이런 화법을 두고 “눅진눅진 또는 건들건들하는 남도 판소리의 ‘아니리’를 닮은 말솜씨”라 평하기도 했다. 나남출판사 하면 신문방송학과 사회과학 등에 관심있던 사람이라면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이 들춰봐야 하는 책들을 오랜 시간 펴내온 곳이다. 이후 문학·창작 분야까지 영역을 넓혀 이제껏 3000여권의 책을 발간했다. 특히 조 대표는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중역(重譯), 발췌역이 아닌 원문 완역으로 국내에 소개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왜 자신을 ‘언론 의병장’이라고 칭했을까. “기자를 하고 싶었지만 한 신문사 신분조회에서 떨어졌어. 나는 시대의 산물이었지. 개인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존을 지키기 위해 택한 일이 출판이었고, 출판으로 언론 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펴왔어요. 차선이었어.” 나남의 책들이 언론학·사회학으로 시작되고, 또 집중된 배경이었다.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무기였고, ‘내일의 이곳’을 만들기 위한 차근차근한 준비였다. 3년 전부터는 국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옛 한국학술진흥재단)과 함께 100권의 시리즈를 목표로 명저번역사업을 진행하며 80권의 책을 내고 있다. 출판비도 60%를 나남이 부담하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관군을 돕는’ 의병장이 된 셈이다. 박경리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며 숨통을 틔워준 것도 한몫 했다. ●박경리 ‘토지’ 세 차례 완독 후 출간 하지만 이것이 그저 출판 마케팅의 결과물은 아니다. 30년간 굳게 뿌리박은 심지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를 읽는 두 개의 키워드는 ‘진심’과 ‘뚝심’이다. 조 대표는 시인 조지훈을 고등학교 때 먼 발치에서 본 뒤 사숙(私淑·간접적으로 배움)했다. 조지훈 선집을 펴내고, ‘지훈상’을 10년째 운영했다. 또 박경리는 조 대표가 사사(師事·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한 이다. 자신이 발행인이자, 주간, 편집인, 디자이너로 혼을 쏟아부어 ‘토지’를 세 차례나 완독한 뒤 품격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돈을 생각하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끄트머리에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대의명분 하나만 붙들고 있는 형형한 눈빛의 의병장 느낌도 있지만, 민초들에게 가없는 애정을 품고 우직함과 호방함을 갖춘 임꺽정의 느낌도 풍긴다. 하기야 의병장이나 의적 우두머리나 ‘의’(義) 하나로 충분히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안개는 걷혔다. 낯설었던 파주 출판도시가 녹두벌 또는 양산박처럼 호젓하고 아늑해졌다. 글ㆍ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태안 굴포운하 548년만에 다시 뚫나

    태안 굴포운하 548년만에 다시 뚫나

    320여년간 공사가 진행되다 중단된 충남 태안 ‘굴포운하(掘浦運河)’가 548년 만에 뚫릴지 관심을 모은다. 충남도는 굴포운하 건설사업 타당성 검토를 통해 경제성이 있으면 정부에 국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사업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전날 도의회 임시회에서 차성남 의원은 “굴포운하 건설사업을 재추진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의했고, 이완구 지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일단 추진하겠다.”고 답변했다. 태안군이 의뢰, 충남발전연구원이 2007년 말 내놓은 용역에서는 수심 6m에 폭 14~63m의 운하를 재건설하는 데는 모두 2500억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굴포운하는 고려 인종12년(1134년)부터 조선 세조7년(1461년)까지 327년간 공사가 이뤄지다 중단됐다. 이 운하는 태안읍 도내리 가로림만과 태안군 인평리 천수만(부남호)을 잇는 15㎞의 내륙 뱃길로 폭 14m이다. 이 가운데 인평저수지~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6.8㎞ 구간은 미개통 상태다. 올해 착공이 이뤄지면 548년 만에 공사가 재개되는 것이다. 이 운하는 호남에서 서울로 물자를 옮기는 선박(조운선·漕運船)이 태안 안흥 앞바다의 거센 풍랑을 피해 내륙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려고 뚫기 시작했다. 고려 인종 때는 부분 개통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공사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 등 고려 때 두 차례에 이어 조선 세조7년(1461년) 때도 3년간 굴착공사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굴포운하는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와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보다 400~500년 앞서 추진된 운하다. 조상호 태안군 문화예술계장은 “굴포운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라면서 “운하가 뚫리면 부남호 인근에 조성되는 기업도시와 연계돼 지역경제 최고 효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태안 굴포운하 548년만에 다시 뚫나

    태안 굴포운하 548년만에 다시 뚫나

    320여년간 공사가 진행되다 중단된 충남 태안 ‘굴포운하(掘浦運河)’가 548년 만에 뚫릴지 관심을 모은다. 충남도는 굴포운하 건설사업 타당성 검토를 통해 경제성이 있으면 정부에 국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사업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전날 도의회 임시회에서 차성남 의원은 “굴포운하 건설사업을 재추진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의했고, 이완구 지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일단 추진하겠다.”고 답변했다. 태안군이 의뢰, 충남발전연구원이 2007년 말 내놓은 용역에서는 수심 6m에 폭 14~63m의 운하를 재건설하는 데는 모두 2500억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굴포운하는 고려 인종12년(1134년)부터 조선 세조7년(1461년)까지 327년간 공사가 이뤄지다 중단됐다. 이 운하는 태안읍 도내리 가로림만과 태안군 인평리 천수만(부남호)을 잇는 15㎞의 내륙 뱃길로 폭 14m이다. 이 가운데 인평저수지~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6.8㎞ 구간은 미개통 상태다. 올해 착공이 이뤄지면 548년 만에 공사가 재개되는 것이다. 이 운하는 호남에서 서울로 물자를 옮기는 선박(조운선·漕運船)이 태안 안흥 앞바다의 거센 풍랑을 피해 내륙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려고 뚫기 시작했다. 고려 인종 때는 부분 개통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공사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 등 고려 때 두 차례에 이어 조선 세조7년(1461년) 때도 3년간 굴착공사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굴포운하는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와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보다 400~500년 앞서 추진된 운하다. 조상호 태안군 문화예술계장은 “굴포운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라면서 “운하가 뚫리면 부남호 인근에 조성되는 기업도시와 연계돼 지역경제 최고 효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인사]

    행정안전부 ◇파견 △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요원 전충렬 교육과학기술부 △학교정책국장 심은석△교육과정기획과장 김동원△교육과학기술연수원 연수운영〃 신인철△서울시교육청 장학관 김홍섭 문중근 전우성△〃 교장 신원재 김라경△부산기계공고 〃 배현기△인천해사고 〃 이강복△전북기계공고 〃 이동근△전북교육청 〃 한송호△전통예술고 〃 이영우△학교정책국 장학관 박정희 박건호△교육복지지원국 〃 김은주△학교정책국 〃 한상윤△경기도교육청 교감 오재덕△서울시교육청 〃 우종선△경기도교육청 〃 송달용 박미현 김영순 신현철 김현진△경남교육청 장학사 배정철△전통예술고 교감 우원재△인천해사고 〃 윤현상△전북기계공고 〃 이형욱△한국경진학교 〃 이숙자△서울맹학교 〃 강현진△한국선진학교 〃 박규은△서울농학교 〃 박건실△교육과학기술연수원 임용우△평생직업교육국 김대인△대변인실 김연석△학교정책국 권기원△인재정책실 윤일성△학교정책국 김선관△교육과학기술연수원 김한주△감사관실 신주식△학교정책국 정용호△교육과학기술연수원 노현정△학교정책국(동북아역사대책팀) 김헌수 박덕호△평생학습정책국 유삼목△학교정책국(동북아역사대책팀) 김율리△교육과학기술연수원 남정란△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단 하은경△학교정책국(동북아역사대책팀) 권종원△학교정책국(교과서선진화팀) 김윤기△국사편찬위원회 신선호△학교정책국(교육과정기획과) 이정우△홍보담당관실 김형철△국사편찬위원회 이원환△교육과학기술연수원 조성연△기획조정실 장인영△교육복지지원국 오경자△교육과학기술부 김계순(연대 한국학교) 고영규 문진철(모스크바 한국학교) 장미숙(성균관대) 법제처 ◇전보 △행정법제국장 조정찬△법령해석정보〃 장호익△경제법제국 법제심의관 신상환△행정법제국 〃 이익현 교통안전공단 ◇전보 △경기지사장 劉玟植△경영지원본부장 權淳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 곽남신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재경 건국대 (학교법인) △이사장 비서실장 柳旺辰 수출입은행 ◇승진 (1급) △경협기획실장 장정수△인사부 소속 부장 이경환 김해현 (2급)△경협사업2실 중남미ㆍ중동팀장 최주환△기획부 대외업무〃 이기호△국제금융부 외화조달1〃 조위택△인사부 노사협력〃 오은상 ◇전보 (부서장)△신성장산업금융실장 심섭△경협사업2〃 최홍진△경협개발〃 안응호△남북협력2〃 우길상△산업투자조사〃 정재근△국제협력〃 서귀원△기술심의〃 강신학△관리지원〃 이광재△선박금융부장 이재민△리스크관리〃 설영환△국제금융〃 최성환△여신총괄〃 남기섭△인사〃 박일동△인천지점장 정계룡△대전〃 이창우△울산〃 정동식△워싱턴사무소장 문준식△파리사무〃 강준수 (팀장)△프로젝트금융부 PF2팀장 조규열△해외투자금융부 투자사업금융1〃 강성철△자원개발금융실 자원개발기획〃 하윤철△기업금융부 기업금융2〃 이진권△경협기획실 경협평가〃 현남해△경협사업2실 아프리카ㆍCIS〃 이웅기△남북협력1실 인도지원〃 임상현△남북협력1실 협력기반〃 조영조△남북협력2실 남북금융〃 이창종△리스크관리부 회계〃 임경종△자금부 자금운용〃 김종호△국제금융부 외화조달기획〃 김영수△국제금융부 외화조달2〃 윤희성△국제금융부 외화운용〃 윤석만△여신총괄부 고객지원〃 박명하 SPC그룹 ◇대표이사 △샤니 조상호△파리크라상 최석원◇부사장△파리크라상 이명구△비알코리아 서병배△삼립식품 서남석◇전무△파리크라상 정효환◇상무(갑)△파리크라상 조봉민△비알코리아 강신달△샤니 도세호 최동수◇상무(을)△파리크라상 강봉희 김동균 박종인 정명종 황희철△비알코리아 김제각△샤니 박원호 윤영선 이재강△삼립식품 박범진 박해만◇상무보△파리크라상 신우진 안종섭 조용찬△비알코리아 정호영△샤니 이원희△삼립식품 송군호 표승원△에스피씨 최경업△SPC캐피탈 최통주 한양주택 △회장 이우식△사장 전기룡 아주그룹 △해외사업본부 부사장 유기주 ING생명 △인사총괄 상무 앤 쿠퍼△법무부총괄 〃 소혜정△준법감시인 겸 준법감시부총괄 〃 신화영
  • 신대철·강명관 교수 지훈상 수상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기리기 위해 나남출판(대표 조상호)과 지훈상 운영위원회(위원장 김인환)가 공동 주관하는 지훈상 제8회 수상자로 문학 부문에 신대철 국민대 교수, 국학 부문에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23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신 교수의 시집 ‘바이칼 키스’(문학과지성사)와 강 교수의 ‘공안파와 조선 후기 한문학’(소명출판). 상금은 500만원씩이며 시상식은 조지훈의 40주기인 5월19일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다.
  • [인사]

    ■ 문화관광부 ◇팀장급 전보 △행정지원팀장 金甲植△국립중앙도서관 총무과장 崔勳昌△세종연구소 파견 楊載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경영지원부장 함택용△기획예산팀장 민경우△총무〃 서성석△자재〃 양천석△시설안전〃 차덕성■ 코트라 ◇지역본부장 △아시아대양주 이한철△일본 한정현△중남미 박동형 ◇무역관장△상파울루 김건영△다롄 이송△프라하 소병택△시드니 김성수△달라스 박상협△양곤 노인호△바르샤바 이태식△오클랜드 김은성△요하네스버그 강영수△타이베이 이민호△알제 이규선△후쿠오카 김현태△카라치 정영화△리마 박종근△나이로비 나창엽△자그레브 정봉기■ 건설공제조합 ◇승진 (이사대우)△총무부장 김연호△종로지점장 김윤배(1급)△진주지점장 김종서(2급)△전략사업2팀장 서경민△대전지점 차장 이일광△연수사업부 〃 황희순◇전보 (이사대우)△전략사업부장 박창진(1급)△영업지원부장 정태현△공제사업〃 박도식△연수사업〃 조성태△여의도지점장 홍성조△삼성〃 신정식△수원〃 정창섭△서울보상센터장 양광택△청주지점장 김진수△광주동〃 박경식(2급)△기획조정팀장 배길원△리스크관리〃 이정관△전략사업1〃 김선완△전략사업3〃 윤창석△시설관리〃 신덕상△공제기획〃 박성득△공제영업〃 박헌준△특수영업〃 정용원△심사〃 라도현△채권관리〃 송창진△IT기획〃 최창순△감사실 감사역 김인환△춘천지점장 박현규△삼척〃 조성창△순천〃 전상석△목포〃 박영순△대구중부〃 김대규△포항〃 권혁△종로지점 차장 김형기△중앙지점 〃 하태원△서초지점 〃 박선홍△삼성지점 〃 조상호△안양지점 〃 송성영△서울보상센터 〃 조태봉■ 헤럴드동아TV △광고마케팅국장 박운석■ CTS 기독교TV ◇신입 △부사장 류제국△광고사업국 이사 이민상◇승진△경영기획실 이사 강명준■ 경인방송 SUNNY-FM △영업본부장 민병우■ 우리투자증권 ◇상무△준법감시인 羅允澤
  • 2007년 사라진 ‘별’

    올해도 친숙하던 많은 동시대인들이 생을 접고 저 세상으로 갔다. 세밑을 맞아 우리들 곁을 떠난 ‘진별’들의 생을 반추해 본다.●정·관계 5공 시절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원경(85·8월4일)씨가 별세했다. 제1회 외교관 공채시험에 합격한 고인은 외무부 의전국장·차관 등을 거쳐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12·13대 국회의원이었던 지연태(79·12월21일)씨도 유명을 달리했다. 황정일(52·7월29일) 주중 정무공사는 베이징에서 식중독 치료를 받다 숨져 의료사고 여부를 놓고 외교마찰이 일기도 했다. 해병대 초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92·10월15일) 예비역 중장은 미국에서 별세했다. ‘통영 대꼬챙이’로 불린 이일규(87·12월2일) 전 대법원장은 1975년 대법원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때 유일하게 반대했다. 민복기(94·7월13일) 전 대법원장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쳐 10년간 재임한 최장수 대법원장이었다. 이종원(83·8월27일) 전 법무장관과 이범준(79·11월30일) 전 교통장관도 해를 넘기지 못했다.●사회·학계 5·18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59·6월27일) 민족미래연구소 소장이 지병인 폐기종으로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잠들었다. 독도 의용수비대 김경호(79·6월16일) 선생도 별세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추적해온 권중희(71·11월16일)씨도 세상을 떠났다. 평생 고아들의 무료 진료와 사회사업을 위해 헌신한 김종원(93·3월26일) 선린병원 설립자도 타계했다. 군 복무 중이던 장병들의 안타까운 죽음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서 근무 중이던 윤장호(27·2월27일) 하사는 자살폭탄 테러로 숨졌다. 해병대 박영철(20·11월6일) 상병은 총기탈취사고의 희생자였다. 국제법 권위자로 프랑스 문화재 반환과 독도 영유권 분쟁 해결에 앞장서 온 백충현(68·4월11일)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1990년 국내 최초의 의학대사전을 발간한 이우주(89·4월25일) 전 연세대 총장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약리학자였다.KAIST 초대 원장을 역임하며 국내 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이주천(77·9월27일) 교수도 생을 달리했다. 1993년 3월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1호 이인모(89·6월16일)씨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기독교계의 대표적 진보인사로 도시 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종교운동에 힘썼던 김동완(65·9월12일) 목사도 소천했다.●문화·체육계 연예가는 벽두부터 잇따른 자살로 패닉에 빠졌다.1월 탤런트 겸 가수인 유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20여일 만에 영화배우 정다빈의 자살 사건이 겹쳤다. 개그우먼 김형은은 교통사고로 2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고,‘큰손’ 장영자씨의 사위였던 인기 탤런트 김주승과 원로 연기자 최길호는 암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당뇨합병증과 싸워 오던 중견 탤런트 홍성민의 사망소식도 팬들을 가슴아프게 했다. 문단에선 2월에 ‘분명한 사건’‘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등을 남긴 오규원 시인,5월엔 ‘국민 수필가’ 피천득과 ‘강아지똥’의 아동문학가 권정생,11월엔 ‘수난이대’의 소설가 하근찬이 세상을 떠났다. 시인·화가·무용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팔방미인 예술인 김영태, 원로출판인 홍석우 탐구당 대표, 한국 서예계의 거목 여초 김응현도 치열하게 생을 살다간 문화인으로 남았다. 원로 가수들의 부음도 전해졌다.2월 ‘키다리 미스터 김’의 주인공 이금희에 이어 5월엔 ‘이별의 인천항’ 등을 히트시킨 원로가수 박경원이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도 우리 곁을 떠났다. 대표적인 창작국악 작곡가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인 이강덕을 비롯해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박병천,‘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대동굿’ 명예보유자 최음전,‘영해별신굿놀이’ 보유자 김미향,‘북청사자놀음’ 보유자인 여재성 등이 역사 속 인물이 됐다. 원로무용가 송범, 한국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았던 원로성악가 바리톤 윤치호, 가요 ‘잊혀진 계절’ 등을 쓴 작사가 박건호, 정명조 천주교 부산교구장 등도 역사의 뒤안으로 돌아섰다.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투수였던 박동희(39)씨가 3월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한국 체육계의 큰 별인 조상호(81) 전 체육부 장관은 8월25일 뇌출혈로 별세했다. 최은택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은 2월 66세로 유명을 달리했으며 국내 최초로 프로복싱 동양챔피언에 올랐던 강세철(81·5월)씨, 김성은(64·8월)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회장도 세상을 떴다.●경제계 ‘마지막 개성상인’이자 40여년 화학산업의 외길을 걸은 송암 이회림(90·7월)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이 세상을 떴다. 박경복(85·7월) 하이트·진로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93년 OB맥주의 아성을 무너뜨려 ‘하이트 신화’를 세웠다. 경제기획원 전신인 부흥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신현확(87·4월) 전 총리도 올해 진 큰 별이다.5·6 공화국 시절 ‘금융계의 황제’ 이원조(74·3월) 전 은행감독원장도 유명을 달리했다. 강권석(57) 기업은행장은 편도종양 치료를 받다 12월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86)씨도 8월 남편 곁으로 갔다.●해외 일본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가 지난 9월 미얀마 양곤에서 반정부 시위를 취재하다 진압군 병사의 총격을 받고 50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비디오카메라를 놓지 않아 감동을 주었다.`컵라면´ 등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만든 일본 닛신(日淸)식품의 안도 모모후쿠(96) 회장이 1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미국의 자선 사업가 브룩 애스터는 지난 8월 폐렴으로 105세로 생을 마감했다. 초대 러시아 대통령에 오른 보리스 옐친은 4월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지난 9월 세계적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타계, 팬들의 애도가 지구촌 곳곳으로 이어졌다.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러시아가 배출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티콘 흐레니코프 등의 거장들도 떠났다. 소피아 로렌의 남편이자 `길’`닥터 지바고´ 등의 대작을 남긴 영화제작자 카를로 폰티, 네번이나 아카데미상을 차지했던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왕과 나´‘지상에서 영원으로´의 할리우드 명배우 데보라 카도 `진 별’이 됐다.각부종합
  • [주말탐방]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의 세상

    [주말탐방]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의 세상

    지난 9월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후 언론 설명회.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회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두차례나 요청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부시 대통령이 언급한 ‘새로운 한반도 안보체제’나 ‘한국전 종결을 위한 평화조약 서명’에 대해 미국측 통역이 한국어로 번역,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옮기지 않고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등 추상적 표현으로 축약하는 바람에 오해를 산 것이다. 이는 정상회담이나 장관회담 등 주요 외교행사에서 통역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를 누비며 외교활동을 벌이는 대통령과 외교통상부 장관 옆에는 그들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통역, 전달하고자 구슬땀을 흘리는 외교관들이 있다. 바로 외교부 통역전문가다. 통역외교관들을 통해 외교가에서 벌어지는 통역의 보람과 애환 등을 들어봤다. ●언어별 2∼3명씩 국내외 포진 현재 대통령 통역을 맡는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은 10여명 정도다. 일반적으로 언어별 본부에 2명, 재외공관에 1명 등 3명씩 두는데, 이들 중 본부 베테랑 1명이 대통령 통역을 담당한다. 1990년대까지는 언어·국제관계 특채 외무관들이 주로 통역을 맡았으나 2000년대 들어 통역의 전문·분업화에 맞춰 언어별로 통역 전문 계약직을 뽑고 있다. 이들은 3년쯤 후 외무공무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외대 등 통번역전문대학원이나 해외 석·박사 출신으로, 대통령 및 외교장관 통역뿐 아니라 대통령부인·국무총리 등 고위인사 통역과 북핵 6자회담 등 주요 회담·협상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 대통령 통역의 최고참은 추원훈(43·스페인어) 정책총괄과 1등 서기관. 한국외대 서반어과, 마드리드국립대 박사 출신으로 1998년1월 국제관계전문 특채로 입부했다. 지난 2월 중남미국에서 정책기획국으로 옮겼지만 대통령 통역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대통령 통역은 물론,6자회담 통역을 담당하는 서명진(36·일본어) 일본과 2등 서기관과 신희경(36·중국어) 중국몽골과 2등 서기관은 2003년 입부한 동갑내기 베테랑.2004년 2월 2차 6자회담때부터 최근까지 6자회담만 10여차례 참여, 북핵 전문가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러시아어는 정수영(31) 러시아·CIS과 3등 서기관과 배선경(30) 3등 서기관이 책임지고 있다. 이들과 함께 6자회담에서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김종민(30) 북핵협상과 2등 서기관은 해외파 통역장교 출신으로,6자회담 통역 중 ‘청일점’이다. 외교부 인사기획관실 관계자는 “영어는 기본이기 때문에 따로 통역을 두지 않고 담당 과에서 통역 수준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정연(28) 서유럽과 3등 서기관이 불어 통역을, 한수진(32) 중유럽과 3등 서기관이 독일어 통역을 맡고 있다. 아랍어 통역은 정선미(31) 걸프지역과 3등 서기관이, 스페인어 통역은 임재금(27) 중미과 3등 서기관이 각각 담당하고 있다. ●“매순간 긴장 늦출 수 없어” 이들은 외교 관련 통역이 일반 통역과 달리 민감한 내용이 많아 “정확성과 함께 보안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끄러운 통역으로 일본측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서명진 서기관은 “한·일 관계는 사연이 많고 감정적 현안도 많아 항상 조심스럽다.”며 “통역은 일반 직원들보다 회담 등 관련 내용에 대해 더 조심해야 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과의 양자협의 통역 등으로 가장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신희경 서기관은 “대외 보안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대통령·장관 등 고위 인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옮길 때마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신 서기관은 6자회담 ‘2·13합의’때 합의문 작성 과정이 새벽까지 이어져 이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귀뜀했다. 정수영 서기관은 “일반 통역과 달리 의전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며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대통령의 우회적 표현도 제대로 파악,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중요하다.”고 말했다. 6자회담 통역은 정확한 단어 선택과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 서기관은 “회담 성격상 단어 하나에 모두 민감해 정확한 단어 선택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전문 용어도 많아 공부를 하며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6자회담 통역들은 전문 용어의 혼동을 막기 위해 사전에 상의하고 외국어에 없는 것을 어떻게 표현, 일관성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한다고 한다. 회담이 성공한 뒤 오는 보람과 기쁨도 크지만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통역의 운명이다. 한 서기관은 “통역은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호된 질책을 받게 돼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그러나 통역이 외교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후배들을 맞았다. 지난달 특채된 실무인력 90여명 중 5명이 통역 전문으로 뽑혔다. 외교부 이원익 인사운용팀장은 “해마다 본부 및 재외공관 수요에 따라 언어별 통역을 충원한다.”며 “최근 일본어 1명, 러시아어 2명, 독일어 1명, 스페인어 1명 등 총 5명을 뽑았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젊어진 청와대 영어통역 대통령의 영어 통역은 다른 언어와 달리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담당한다. 영어는 그만큼 쓸 일이 많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는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영어 통역을 살펴보면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시절에는 지난 8월 별세한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이 의전수석을 맡아 10여년간 영어 통역을 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고(故) 김병훈 의전수석이 영어 통역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차관급인 의전수석이 영어 통역과 의전을 같이 하던 시절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는 외교부 출신들이 청와대 비서관실로 옮기거나 파견을 나가 영어 통역을 담당했다. 노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았던 노창희 당시 의전수석은 주영국대사, 외무부 차관 등을 지낸 뒤 청와대로 옮겼다. 노 수석과 함께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도 노 전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으로 영어 통역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외시 11회인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외교부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맡아 영어 통역을 했다. 박 의원은 하루종일 통역을 한 뒤 지쳤을 때 김 전 대통령이 “밥 먹었느냐.”며 챙겨줬을 때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김 전 대통령 후반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초반까지는 최종현(51·외시 19회) 외교부 정책기획협력관이 의전비서실로 파견, 영어 통역을 했다. 이어 당시 외교장관 보좌관이던 강경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부판무관이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의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30대 젊은 서기관들을 영어 통역으로 받아들였다. 김일범(34·외시 33회) 정책개발과 서기관을 시작으로 이여진(33·외시 31회) 서기관, 이태식 주미대사 아들인 이성환(31·외시 33회) 서기관에 이어 정의혜(32·외시 31회) 서기관이 바통을 이어받아 실무형 영어 통역과 의전을 함께 하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여소영 주중국대사관 서기관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어 통역의 가장 큰 적은, 방언(方言)과 고어(古語)’. 대통령 중국어 통역 출신인 주중 대사관 여소영 서기관이 겪은 일.2003년 중국 지방 고위인사들이 단체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다. 갑자기 한 인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시를 한 수 읊겠다며 예정에 없는 발언을 했다. 문제는 ‘고어투’로 된 ‘자작시’인데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방의 ‘사투리’. 중국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옛 표현들이 쏟아졌다. 앞뒤 문맥과 분위기에 맞춰 무리없이 통역을 마쳤지만, 아찔했던 순간. 특히 중국 사투리는 다른 지방 중국인들에게도 ‘외국어’인지라, 중국인들도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이라 할 만 했다. 여 서기관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외교부의 외국어 능력 시험 1급 획득자다. 영어·일어 등 모든 외국어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초·중·고교를 한국에서 화교학교를 다니고 국립타이완대학교에서 학사·석사를 마친 것이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라디오를 들으며 아나운서의 발음대로 따라해보고 한시(漢詩)를 외우며, 들어보지 못한 사투리를 접하려 노력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한 주요 인사가 서예 작품을 선물하면서 띄엄띄엄 광둥(廣東)어를 섞기 시작했다. 중국측 통역이 쩔쩔 매며 당황할 때 그의 통역을 도와줬던 적도 있다. 과거 유학 시절에 광둥 친구를 룸메이트로 만나 광둥말을 익힌 덕분이다. 그가 꼽는 중국어만의 공부 포인트.“중국어는 대화 가운데 고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외우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고전을 다 외울 수는 없잖아요. 외운 것도 또 잊게 돼있기 때문에 계속 반복하는 수 밖에 없지요.” 과거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부인이 방한했을 때, 중국 대사관 직원인 줄 알고 이것저것 부탁하다가 한국 외교관임을 알고 뒤늦게 그에게 사과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jj@seoul.co.kr
  • [부고] 조상호 전 대한체육회장 별세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헌하는 등 한국스포츠의 산증인이었던 조상호 전 대한체육회장이 25일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지난 19일 새벽, 평소처럼 산책을 하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진 조 전 회장은 뇌골절과 뇌출혈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조 전 회장은 1958년 조선대를 졸업한 뒤 61년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보좌하기 시작,63년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으로 일하는 등 박 전 대통령을 14년이나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과묵한 성격에 매사 신중한 처신으로 유명했고 영어는 물론 일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 두루 능통해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각국 사절 면담에 통역을 도맡았고 정식 외교관들을 제치고 외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74년 주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79년 3월부터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을 맡다가 이듬해 제26대 체육회장으로 선출됐다. 1981년 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으로 각국 IOC위원들을 활발히 접촉, 서울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87년에는 체육부장관을 지냈고 96년에는 한·일월드컵축구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으로 일해왔다. 고인은 이같은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훈장 등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고 장례는 29일 오전 8시 대한체육회장장으로 치러진다.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순임씨와 사이에 1남4녀. 맏사위가 신승남 전 검찰총장(신원CC 회장)이다.(02)3010-2631.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007년 창조장학금 수여식

    창조장학회(이사장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는 5일 오후 2시 창녕조씨 중앙 화수회 사무실 소강당에서 2007년도 장학금 수여식을 갖는다.
  • 서울올림픽 재일한국인 후원자 명단비 제막식

    박재호 국민체육공단 이사장(왼쪽에서 세번째)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들이 17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88서울올림픽 재일한국인 후원금 기부자 명단비’ 제막식을 갖고 박수를 치며 축하하고 있다. 이 행사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522억원을 보내온 재일 교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왼쪽부터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안민석 열린우리당 의원, 박 이사장, 조상호 전 체육부장관, 박세직 88올림픽 조직위원장, 김재철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사진제공 국민체육공단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문화훈장 25명등 발표

    문화관광부는 영화배우 안성기, 가수 남진 등 문화예술발전 유공자에 대한 ‘문화훈장´ 서훈자와 ‘제37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및 ‘2005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를 13일 발표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자에게는 대통령 상장과 상금 1000만원,‘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에게는 문화관광부 장관상과 상금 500만원을 준다. 시상식은 15일 오후 3시 전주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문화의 날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부문별 서훈자와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문화훈장(25명)▲은관문화훈장=김성구(승려·법명 월운), 전숙희(수필가), 김백봉(무용인·본명 김충실), 고우영(만화가, 작고)▲보관문화훈장=이중한(언론인), 김병모(한양대 교수), 이봉순(전 이화여대도서관장), 이복형(중남미박물관장), 임종국(문학평론가, 작고), 황용엽(화가), 윤용하(작곡가, 작고), 안성기(영화배우), 남진(가수·본명 김남진), 님 웨일스(‘아리랑´저자, 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 작고)▲옥관문화훈장=조남식(전국문화원연합회 전남지회장), 김태원(전 영천문화원장), 오윤(판화가, 작고), 권창륜(서예가), 김성일(무용인·본명 김규원)▲화관문화훈장=남선우(성남문화원장), 조규돈(강릉문화원 사무국장), 정범태(사진가), 신영희(국악인), 홍성덕(국악인), 정광태(가수)◇대한민국문화예술상(6명)▲문화=조상호(나남출판 대표)▲문학=천양희(시인)▲미술=최의순(서울대 명예교수)▲음악=서울모데트합창단(지휘 박치용)▲연극·무용=국립발레단(예술감독 박인자)▲대중예술=이현세(한국만화가협회 이사장)◇오늘의 젊은 예술가상(8명)▲문학=김연수(소설가·본명 김영수)▲미술=조습(화가·본명 조병철)▲음악=한명원(성악가)▲전통예술=이용탁(국악인)▲연극=이해제(연출가·본명 이영호)▲무용=황재원(발레리노)▲영화=배용준(영화배우)▲대중예술=나윤선(가수)
  • 2005 한국 마케팅대상 수상

    한국마케팅연구원(이사장 조병두)은 4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2005 한국마케팅대상’ 시상식을 가졌다. 한해 동안 마케팅 활동을 가장 활발히 벌여 성과를 얻은 기업에 주는 이 상은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마케팅대상은 제조, 서비스마케팅, 브랜드마케팅, 환경마케팅 등 4개 부문으로 나눠 수여됐다. 제조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제일모직(사장 제진훈)은 해외브랜드가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1989년 철저한 시장조사와 차별화된 기획을 통해 ‘빈폴’을 내세워 캐주얼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96년까지 평균 30% 이상의 매출 신장률을 보이는 등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서비스마케팅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현대오일뱅크(사장 서영태)는 지난 2003년 ‘웰컴’ 이라는 서비스 개선 캠페인을 지금까지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전국의 주유소와 충전소에 서비스 매뉴얼을 제작·배포하고 모든 서비스 비품을 표준화하는 등 고객들에게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브랜드마케팅부문의 대상 수상업체인 파리크라상(부사장 조상호)은 1988년 파리바게뜨 1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고품질·혁신적인 마케팅·고객만족 중심의 차별화 전략을 통해 업계 최초로 패밀리카드를 도입하고 감성적인 인테리어 공간을 연출, 평균 40% 이상의 매출 신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동원F&B(사장 박인구)는 1969년 창립 이후 바다사랑, 지구사랑 캠페인 등 환경보호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결식 아동 및 무의탁 노인에게 식료품을 공급하는 푸드뱅크사업을 적극 지원하는 등의 활동이 두드러져 환경마케팅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서울신문 채수삼 사장을 비롯해 물류협회 안태호 명예회장, 나라기획 조해형 회장, 성균관대 김정남 교수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파주에 헌책방 ‘보물섬’ 열어

    아름다운가게(공동대표 박성준 손숙 윤팔병)가 14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서 개소식을 갖고 헌책방 ‘보물섬’을 열었다. ‘보물섬’은 기존의 아름다운가게 매장과는 달리 헌책만을 기증받아 파는 헌책전문 가게로, 출판과 관련된 나눔캠페인을 벌여나갈 예정이다. 수익금은 독서·출판 관련 공익사업에 사용된다.‘보물섬’에서는 명사들이 기증, 추천한 책을 모은 ‘지혜의 등대’, 장르와 주제별 정보를 모은 ‘테마창고’, 초판본·절판본·희귀본을 모은 ‘보물창고’등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테마룸’과 야외 책공원 ‘책이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가게 손숙 공동대표의 인사말로 시작돼 이금희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개소식에는 파주북시티 이기웅 이사장, 열린책들 홍지웅 사장, 나남출판 조상호 사장, 교보문고 권경현 사장, 소설가 조세희, 화가 임옥상씨 등이 참석했다. 운영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1시∼오후 6시(월요일 휴무).(031)955-0077.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CSA 구로캠퍼스서 장학금 수여식

    조상호(曺相鎬·전 체육부장관) 창조장학회 이사장은 21일 오후 2시 서울 CSA목동학원 구로캠퍼스에서 장학금 수여식을 갖는다.
  • “마라톤 큰별 졌다” 조문 줄이어, 故손기정옹 내일 영결식

    15일 타계한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孫基禎·90)옹의 영결식이 17일 오전 9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에서는 황영조(마라톤) 전기영(유도) 김영호(펜싱) 안재형(탁구) 김경훈(태권도)씨 등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운구를 맡고,올림픽회관에서 30분간 노제를 올린다.이어 잠실 올림픽주경기장과 고인의 모교인 양정고의 옛터이자 ‘손기정 기념공원'이 위치한 만리동을 거쳐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향할 예정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해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손 옹은 폐렴 증세가 악화돼 지난 13일 삼성서울병원에 여덟번째 입원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5일 0시40분 별세했다.유족으로는 재일민단 요코하마지부 사무부장으로 있는 아들 정인씨와 딸 문영(59)씨가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이날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과 조영달(曺永達) 교문수석을 빈소에 보내 조문했으며,정부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했다. ◆손 옹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에는 이른 아침부터문상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이대원(李大遠) 대한육상연맹 회장과 손 옹의 제자인 함기용 육상연맹 부회장,‘몬주익 영웅’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등이 차례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KOC는 이날 이연택 회장이 장의위원장을 맡고 김집 김성집 김상겸 김운용 김영재 김정행 김종하 박상하 박용성 신도환 엄삼탁 윤덕주 이건희 이철승 장수영 장충식 조상호 최만립씨 등 KOC 및 체육회 고문들을 장의고문으로 추대하는 등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원로 육상인들은 한결같이 “한국 마라톤 발전을 위해 고생을 많이 하신분”이라면서 “후배들은 고인의 뜻을 기려 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에 올려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영조 감독은 “내가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좋아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이봉주 선수도 “어릴 때 TV에서 선생님에 대한 프로를 보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며 “선생님은 나의 정신적 지주”라고 말했다. 함기용 부회장은 “그 옛날 선생님은 돈암동 자택에서 사재를 털어 우리 같은 어린 선수들을 먹이며 합숙훈련을 시키셨고,돈이 떨어지면 손수 찬조금을 구하러 돌아다니셨다.”며 손 옹의 은혜에 고마워했다. ◆이날 100여개의 조화가 밀려들었지만 장소가 좁아 전·현직 대통령과 대선 후보의 조화만이 빈소에 놓여졌다.좌우로 김대중 대통령,김영삼(金泳三)·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그리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조화가 진열됐다.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의 조화는 빈소 밖에 놓여졌다.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15일 일제 치하 때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만 했던 손 옹의 타계 소식을 비중 있게 전하며,고인을 애도했다. 아사히 신문은 “손 옹은 조국이 일본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내키지도 않는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비극의 영웅이었다.”고 전했다. 박준석 윤창수기자 pjs@
  • “이산의 恨 응원으로 달랜다”

    “늙은 몸으로 응원하는 실향민들이 있음을 북녘 동포들도 알아줬으면 합니다.” 북한 대표팀 2진이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한 27일 오후 실향민 조상호(80),이상만(67) 할아버지와 이봉남(69) 할머니는 북한팀 서포터스인 ‘갈매기 응원단’의 일원으로 공항을 찾았다.이들은 “고향땅인 북한 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에 용기를 내 응원단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인 조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3개월만 남쪽에 피해 있으면 다시 고향에 올 수 있다.”는 군인들의 말만 믿고 부모와 동생 7명을 남겨둔 채 홀로 해군 상륙정(LST)에 몸을 실었다.지난 99년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에 참가신청을 했으나 아직까지 ‘대기자’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그는 “고향방문단에서 탈락한 아쉬움을 북한팀 응원으로 달래려 한다.”고 말했다. 이봉남 할머니의 고향도 조 할아버지와 같은 흥남이다.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이 할머니는 어머니와 세 여동생을 데리고 50년 12월 월남했다.전쟁통에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마저 다리에 파편을 맞아 불구가 되는 바람에 17살의 나이에 소녀가장이 됐다. 평안남도 중화군이 고향인 이상만 할아버지는 북한 농구선수 이명훈과 유도선수 계순희의 팬이다.50년 12월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는 소문에 40일을 걸어 경기도 안성에 도착했다는 이 할아버지는 “열심히 응원하면 북녘 동포들과 김정일 위원장도 마음을 열지 않겠느냐.”고 했다. 부산 이세영기자 sylee@
  • [기고] 유럽,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땅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마치고 12일 귀국한다.김 대통령의 이번 순방은 유럽 통합이 가시화되고,이에따라 범유럽 경제권 형성에 대한 우리의 종합적인 대응이필요한 시기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김 대통령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주제발표를 하고,아시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유럽의회에서 인권·민주주의·세계평화 등 인류보편의 가치를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한국의 이미지를국제사회에 널리 인식시키는 정치·외교적인 성과를 거뒀다. 특히 김 대통령의 유럽 순방은 우리의 대(對)유럽 전략을종합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한국은 지금까지 미·일 위주에서 다변화한 교역구조로 변화해야 할 입장에 있다.새 세기 유럽대륙과의 경제협력 증진이해답이 될 수 있다. 유럽 대륙은 유로화의 출범으로 경제통합을 심화하고 중동부 유럽을 유럽연합(EU)에 가입시키는 확대 과정을 거치면서 범유럽 경제권으로 발전·변모하고 있다. 유로화는 2002년 1월부터 통용된다.2개월 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3월이면 유로화만이 유일한 법적인 통화로인정받는다. 중동부 유럽 13개 국가를 새로 포괄하는 EU 확대가 완료될 경우 EU는 총 28개 회원국 5억5,000만의 인구를 포함하게 된다.국내총생산(GDP)이 9조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단일시장이다. 유럽 경제권의 형성은 우리에게 높은 소비 수준을 가진거대시장이라는 매력과 함께 기존 EU 통상장벽의 확대 적용이라는 위험요인을 동시에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김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을 계기로 범유럽 경제권이 주는 기회와 함께 위험 요인을 면밀히 분석,종합적인 대응전략을 도출해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 대통령이 중동구 국가중 가장 빨리 EU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헝가리를 방문,실질적인 경협을 도모하고 우리 기업의 발칸 재건사업 진출 등을 협의한 점은 우리의대 중동구지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 로마노 프로디 EU집행위원장과 회담을 가졌는데 이는내년초 정식으로 개시될 ‘도하 아젠더'로 불리는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에서 한·EU간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한국과 EU는 농업·경쟁·투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입장이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의제별 공동대응의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한국과 유럽은 자동차·화학 등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산업구조상 상호보완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한국은 가전·정보통신 등에서,유럽은 금융 및 내구소비재·항공산업·환경분야 등에서 비교우위가 높다.따라서 이번 순방을통해 상호 보완성이 높은 산업분야에서의 기업간 전략적제휴,조인트벤처 등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경태 대외경제정책硏 원장
  • 간행물윤리 대상에 김경희씨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윤양중)는 제12회 간행물윤리상 대상 수상자로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를 선정했다.또저작부문은 안휘준 서울대 교수,출판제작부문은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청소년부문은 한국청소년학회가 뽑혔고, 독서진흥부문상은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대표인허병두 숭문고교사에게 돌아갔다.시상식은 오는 26일 오후4시 한국언론재단 20층 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