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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두순 청송2교도소 독방에 갇혔다

    8세 여자 어린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해 대법원에서 징역 12년, 전자발찌 부착 7년, 신상정보공개 5년이 확정된 조두순(57)씨가 독방에 갇혔다.법무부는 7일 조씨를 국내 유일의 중(重)경비시설인 청송 제2교도소 독거실에 수용했다고 밝혔다. 조씨처럼 다른 교도소에서 규율을 위반하지 않았는데도 형 확정 후 청송 제2교도소에 곧바로 수용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조씨는 재판받는 동안 안양교도소에서 지내다 최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이날 오전 청송 제2교도소로 이감됐다. 법무부는 조씨의 죄질과 전과, 교정시설 경험, 성격, 생활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해 중경비시설 대상자인 S4 등급 판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조씨는 감시용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5.4㎡ 넓이의 독방에 수감됐고 교육·운동 등을 위해 이동할 때도 수갑을 차야 한다. 청송 제2교도소에는 S4 등급을 받은 수형자 가운데 일반 교도소에서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수형자 350여명이 각각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씨에게는 다른 수형자와 마찬가지로 TV 시청이 제한되며 이동할 때 2명 이상의 교도관이 동행한다. 실외운동도 약 18㎡ 넓이의 1인용 운동장에서 혼자 해야 한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나영이사건→조두순사건으로 표기

    본지는 8세 여아를 성폭행해 영구 장애를 입힌 ‘나영이(가명) 사건’을 ‘조두순 사건’으로 공식 표기합니다. ‘나영이’란 표현이 피해를 당한 여자 아이와 그 가족, 그리고 같은 이름을 쓰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피해가 크다는 지적을 고려했습니다. 반사회적 범죄의 경우 범인의 실명 공개가 타당하다는 법조계와 학계의 의견도 적극 수용한 데 따른 것입니다.
  • [아동성폭력과의 전쟁] (1)잘못된 수사관행 바꿔라

    [아동성폭력과의 전쟁] (1)잘못된 수사관행 바꿔라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아동성폭력을 제대로 근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가해자에게 형량을 높이는 등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아동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피해자를 위한 재활 시스템 등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아동성폭력에 대한 예방과 대책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짚어 본다. “검은 괴물이 내 배에 들어왔어. 내 거란 말이야. 여기 싫어” 지난 2003년 유치원에 다닌 지 사나흘이 된 A(당시 4)양이 잠에서 깨 울며 경기를 일으켰다. A양의 부모는 딸이 유치원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소했고 경찰이 캠코더로 A양의 피해 진술을 녹화했다. 그런데 경찰이 “사건 이관 과정에서 캠코더 조작 실수로 녹화 테이프가 삭제됐다.”고 통보했다. A양과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경찰의 수사상 잘못이 명백하고, A양이 불필요하게 반복된 조사녹화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원고 승소 판결하고 A양과 고소 대리인인 어머니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참고인으로 조사에 참여한 아버지에게도 1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동들이 범인을 잡기 위한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오히려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피해아동의 트라우마를 배려하지 않고 객관적 정황 확보에 집착하는 수사관행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 무서워 화장실에 숨었다 증언 6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수행한 법무부 용역보고서 ‘아동성폭력 재범방지 및 아동보호대책’에서 아동 성폭력 전담기관인 서울 해바라기아동센터에 접수된 아동성범죄 사건 54건을 분석한 결과 아동이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한 사건은 8건이었다. 심리는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안전하게 대기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 피고인쪽 관계자와 마주칠 것을 두려워한 아동이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증언대에 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피고인쪽 변호사가 피해아동의 학교 친구까지 증인으로 소환, 피해사실이 학교에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해바라기아동센터 관계자는 “수사기록이 성인용, 아동용으로 따로 분리되지 않아 일시, 장소 등 사건성립 요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성기 크기가 자로 쟀을 때 얼마나 되더냐.’는 식으로 극히 구체적 정보까지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체인형 모형 등을 주고 피해를 똑같이 재연해 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피해아동에게 2차 외상이 가해진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이 초기부터 전문가의 참여를 요청, 피해아동의 정확성을 높이고 재조사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동의 인지, 정서, 성폭력 후유증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법률적인 지식까지 고루 갖춘 전문가 풀을 양성하는 일도 시급하다. ●피해아동 진술능력 최대한 인정해야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지혜 상담가는 “아동은 공간과 시간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도 그 사실을 설득력 있게 진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지만 성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뿐이지 피해사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 등의 도움을 받아 아동의 기준에 맞게 진술을 받아 신빙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수사단계에서 증거보전 절차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법연수원 교수로 있는 김환수 부장판사는 “검찰이 아동의 진술 등에 대해 증거보전을 신청하면 법원이 심리를 하면서 신빙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공판 과정에서 아동을 다시 불러 증언하게 할 필요가 없다.”면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법관도 수사 초기부터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어린 아이들일수록 시간이 지나거나 유도질문을 하면 영향을 받아 진술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자녀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되면 부모가 먼저 다그치기보다는 곧바로 믿을 수 있는 성폭력 전문가나 수사기관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했다. 피해아동의 진술능력을 최대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가해자의 만취상태를 감경사유로 포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해아동의 어린 나이, 후유증 등을 참작해 진술능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유지혜 이재연기자 wisepen@seoul.co.kr
  • [만나고 싶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극작가 신봉승

    [만나고 싶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극작가 신봉승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나의 감시자였고, 나는 그 역사의 섭리 안에서 살아왔지요. 역사와 벗하며 살아온 지난 40년은 나의 존재이유인 사극을 쓰기 위한 지적 몸부림의 세월이었습니다.” 1980년대 만 8년 동안 MBC TV를 통해 방영된 대하사극 ‘조선왕조 500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신봉승이란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다. 1972년 ‘사모곡’을 시작으로 정통 사극에 천착해온 그는 ‘연화’ ‘인목대비’ ‘임금님의 첫사랑’ ‘왕조의 세월’ ‘한명회’ 등 숱한 히트작을 내며 역사드라마의 현장을 지켜온 한국의 대표 극작가.올해로 77세, 붓을 드는 데 지쳤을 법한 나이지만 1975년에 발표한 ‘임금님의 첫사랑’을 새롭게 고쳐 쓰며 10여년 만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년 초 SBS에서 방영될 이 작품은 벌써부터 사극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인사동 한국역사문학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사극 얘기뿐 아니라 최근 공개된 정조 어찰의 의미, 문단 데뷔시절 일화, 정치권과의 인연 등 다양한 화제를 예의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로 풀어놨다. 연구소에 들어서니 책꽂이 한 편에 가득 꽂힌 ‘조선왕조실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의 작가 신봉승을 만든 건 8할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은 모두 413권입니다. 하루 100페이지씩 읽어도 꼬박 4년이 걸려요. 웬만해선 진력이 나 그거 다 못 읽습니다. 나는 40년 세월을 그걸 붙들고 살았어요. 그러지 않고는 사극을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총 48권의 대하소설 ‘조선왕조실록 5백년’도 펴낸 역사마니아인 그는 요즘 사극작가들에게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사극을 잘쓰는 비결은 실록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자기 작품에서 다루는 시대만 골라 읽으면 안 돼요. 적어도 앞뒤 30년의 역사는 드라마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반드시 찾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물에 대한 온전한 해석이 가능하죠. 예컨대 양반집 첩의 소생으로만 알았던 조선 성종 때 권신 유자광이 경복궁 문지기인 갑사(甲士) 벼슬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죽고 30년 뒤에 나온 얘기입니다.” ●역사의식 심어주는 게 사극 임무 사극이든 역사소설이든 그는 철저한 독서와 고증을 통한 ‘정통’ 역사물을 고집한다. 그러면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임금님의 첫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강화도령 철종의 사랑을 다룬다. 하지만 철종은 더이상 땔나무나 하는 ‘바보’ 도령이 아니라 사뭇 똑똑한, 갈등하는 임금으로 등장한다.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암(心庵) 조두순이 쓴 철종 행장기에 나오는 ‘성군의 자질이 보였다.’라는 대목을 참고했다. “더벅머리 총각이 14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이 작품의 극적 재미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사극이든 역사소설이든 그가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중에게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가, 특히 역사작가의 몫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그가 주목하는 작가가 일본의 시바 료타로다. “일본이 시바 료타로 같은 역사소설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는 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확고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심어줬어요. ‘료마가 간다’라는 그의 소설 한 권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그가 소설을 통해 부각시킨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히지요. 우리에게도 그런 의식 있는 역사작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국과 일본에서 종종 ‘한국의 시바 료타로’로 불리는 게 싫지 않은 표정이다. 조선왕조사에 정통한 그에게 정조 어찰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기존의 ‘정조 독살설’은 이제 폐기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정조가 반대세력인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에게 수백통의 어찰을 내렸다고 해서 둘 사이가 가까웠고, 따라서 정조 독살설의 배후가 심환지일 수 없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이라며 “임금의 독살 문제는 속성상 언제나 설(說)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정조 어찰을 통해 개혁군주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알고 시대사 자료를 얻게 된 데서 의미를 찾아야지 독살설 논란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라는 얘기다. 작가 신봉승은 스스로 “문자로 하는 장르는 모두 섭렵했다.”고 말한다.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 극작가 등 가히 르네상스맨이라 할 만하다. 그는 1957년 청마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이슬’이란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로 출발해 역사드라마로 입신하기까지 그의 삶은 곧 우리 문학사의 축도다. “데뷔 당시 우리 문단엔 100명 정도의 문인밖에 없었어요. 청마 선생은 추천이 박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추천받을 만하지만 당신의 분발을 위해 추천하지 않는다.’는 식이었죠.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을 받은 사람은 100명이 넘었지만 청마의 추천을 받은 이는 10여명에 불과했어요.” 그 뒤 그가 평생 문학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편운(片雲) 조병화 시인이다. 조 시인이 중앙대에서 경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자 학생 신봉승 또한 잘 다니던 중앙대를 떠나 경희대 국문과로 편입, 사승(師承)관계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카고’ 영화화되길…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그이지만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다. 1970년 ‘해변의 정사’라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일이다. “윤정희·남성우 주연의 멜로영화였지요. 시나리오 창작 경험만 믿고 불쑥 남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참패했지요. 그러곤 미련 없이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꼭 영화로 만들었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 물론 감독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로서다. “마지막으로 쓴 ‘크리스마스 카고(cargo)’라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했는데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영화가 되지 못했어요. 1·4후퇴가 한창인 크리스마스 전날, 10만명의 민간인을 배에 태우고 흥남 부두를 떠나면서 벌어지는 극적인 상황을 다룬 작품입니다.” 재주 많은 사람에게 뛰어난 재주 없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하지만 작가 신봉승에게 그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그는 드라마와 소설, 시나리오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 모두 일가를 이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의미있는 것은 역사드라마다. 젊은 시절 연비의식을 치르고 법련거사(法蓮居士)라는 법명까지 받은 불교신자이지만 그는 “나의 종교는 역사다.”라고 강조한다. ●“남의 밭에서 노는 건 위험” 선 굵은 보스 기질과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늘 주위를 압도하는 그는 문화계 최고의 마당발이다. 문화 쪽뿐 아니라 정·관계, 재계, 종교계까지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역사를 알기에 절대로 발을 담그지 않은” 곳이 있다. 정치다. “나는 아마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회장의 ‘사업가 아닌 유일한’ 친구였을 겁니다. 정 회장이 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갈 때 선거캠프 대변인을 맡아달라고 그렇게 간청했는데, 나는 출마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으니…. 한운사 선생을 비롯해 당시 한 가락 하는 극작가들이 모두 국민당 발기인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요. 나는 그것도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내가 추천한 탤런트 K씨, C씨 등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됐지요.” “남의 밭에서 노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변함없는 소신이다. ●“친구여, 심려치 말게…” 희수(喜壽)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몸도 마음도 강건한 노()작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그는 지금도 한달에 10여차례 대중강연에 나서고, 추계예술대 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 나이에 내가 강의하면 나 때문에 강의를 맡지 못하는 젊은이가 하나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전에 대학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학교측에서 오히려 ‘석좌’라는 타이틀까지 주며 부탁해 아직 선생 노릇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날로 이악해져 가는 세상이기에 그 따뜻한 배려의 마음씨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작가는 인터뷰를 마친 기자에게 얼마 전에 쓴 것이라며 ‘요즘 형편’이란 시 한 구절을 들려줬다. “친구여, 심려치 말게/목조이듯 밀려드는/숨가쁜 약속은/미움을 받더라도 거절하기로 했네/설혹, 어쩌다가 가게 된/호화로운 연석이라도/사진 찍히는 헤드 테이블 근처에는/얼씬거리지 않기로 했다네” 김종면 편집위원 jmkim@seoul.co.kr ●극작가 신봉승 약력 ▲1933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릉사범·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대종상심사위원장,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한국방송대상,서울시문화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 ▲저서:‘조선왕조 5백년’‘한명회’‘왕건’‘이동인의 나라’등 소설과 ‘직언’‘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조선의 마음’등 역사에세이 외 다수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추계예술대 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한국역사문학연구소장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역사의 대하(大河)에 빠져 지내는 신봉승씨. 그는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삼청교육대경험 40대 전·노씨 찬양 60대 치사

    ○…경기도 안산경찰서는 21일 술자리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찬양하는 사람을 때려 숨지게 한 조두순(43·무직·안산시 원곡동)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긴급 구속. 조씨는 이 날 상오 3시 쯤 안산시 신길동 부랑자들의 임시 거처인 희망자립원에서 친구인 임춘식씨(41)와 술을 마시다 합석한 황지현씨(60)가 「노태우,전두환 만세」라고 외치자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숨지게 했다. 조씨는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황씨가 두 사람을 찬양해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 경복궁/소실 2백76년만에 중건/궁궐:2(서울 6백년 만상:39)

    ◎고종황제 아관파천후 “폐궁” 비극 맞아/일제 남쪽 전각헐고 총독부건물 신축 『영상대감,왕부의 존엄은 무엇으로 상징됩니까』대원군이 폐허로 방치된 경복궁을 함께 거닐던 영의정 조두순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궁궐이 장엄해야 합니다…』 대원군의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고종 2년(1865년) 4월 초사흘 창덕궁 희정당에 중신회의를 소집,경복궁 중건을 반대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열흘뒤에 곧바로 공사에 들어갔다.3년뒤인 고종4년 11월 「왕조의 상징」 경복궁은 중건됐다.크기나 규모에서 건물의 생김생김에 이르기까지 창건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임진왜란으로 정궁이 소실된뒤 정확하게 2백76년만에 열성조의 숙원이 이뤄지게된 셈이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동원된 인력만도 3만6천여명,경비는 7백40여만냥이 투입됐다.이렇게 해서 중건된 경복궁은 3백50여동의 건물에 전체 대지면적이 13만평으로 5보에 1루,10보에 1각이라 형용할 정도로 많은 건물이 들어서 명실상부한 정궁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 밝아온다.에 에헤이야 얼널널널거리고 방아로다』로 시작되는 「경복궁타령」은 이때 각지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공사를 하면서 부른노래로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경복궁의 창건은 축복속에,중건은 백성들의 원성속에 이뤄졌건만 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사건들은 다를게 없었다. 왕자들간의 골육상쟁을 재현이라도 하듯 천인공노할 비극이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또다시 벌어졌다. 고종 32년(1895년) 너무나 뜻밖에도 경복궁 중건의 기수 대원군을 부축하고 광화문을 통해 궁내로 들어온 일본인 폭도 60여명이 국모 민비를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이불에 말아 석유를 뿌려 불태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당시 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 기쿠지는 자신이 쓴 「조선잡기」에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상궁들이 참혹하게 칼에 맞아죽는데 살아있는 상궁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피투성이가 된채 벌벌떠는 상궁도 있었다.그 참혹한 광경은 눈뜨고 못볼 지경이었다』고 적고 있다.실제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참혹했으리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피비린내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4개월 뒤인 12월28일(태조가 경복궁에 입어하던 날) 정조가 왕자의 난으로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돌아갔듯이 비운의 황제 고종은 남몰래 황태자(순종)를 데리고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아라사공관(러시아공관·현 문화체육관 옆)으로 천도아닌 파천을 감행하는 비애를 맛봐야 했다.고종과 순종이 아관에서 나온뒤에도 경복궁에 들지 않고 덕수궁에 머물러 있었으니 엄청난 국고를 들여 중건한 경복궁은 30년만에 폐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경복궁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또 한번 시련을 겪어야했다.근정전을 제외한 궁내의 남쪽 전각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그자리에 조선총독부건물을 지었다.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0여채에 불과하다. 총독부건물은 해방후 중앙청으로 쓰이다 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으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8월 김영삼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총독부건물의 철거결정을 발표,경복궁은 새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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