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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영·김근태 회동공개 놓고 ‘신경전’

    정동영(사진 왼쪽)·김근태(오른쪽) 두 전직 열린우리당 의장이 지난 24일 단독 회동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당초 이날 만남은 양측이 공개하지 않기로 합의했으나, 정 전 의장측을 통해 회동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이날 조계사 법요식에 참석한 뒤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1시간쯤 범여권 통합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날 만남은 김 전 의장이 범여권 대선주자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한 23일 때마침 정 전 의장이 김 전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판기념회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양측은 당초 이날 만남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외부에는 알리지 않기로 했으나, 정 전 의장측을 통해 회동 사실이 새나가자 김 전 의장측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 측근은 “앞으로는 밀실정치라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개를 원칙으로 해야겠지만 세부 논의를 하는 과정까지 알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날 연석회의 추진에 대해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후보 확정 시기에는 이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정 전 의장은 “9월 말 추석 전에 후보를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 전 의장은 “그렇게 하려면 6월 초까지는 ‘룰’에 대해 합의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대선주자들 “부처님 앞으로”

    대선주자들 “부처님 앞으로”

    “자리를 바꿔 드릴까요?” 가운데 자리의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동안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양 옆에 앉은 한나라당의 양대(兩大) 대선주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 전 의장은 하릴없이 양쪽에서 쏘여오는 냉기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24일 조계사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날 맞이 봉축 법요식 행사장 내빈석은 이처럼 대선주자간 신경전으로 냉랭했다. 이 전 시장, 박 전 대표, 정 전 의장과 함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이 나란히 앉았지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는 등 서먹한 모습이었다.‘불심’(佛心)을 잡기 위해 행사장에 앞다퉈 온 이들은 정치적 언급을 자제했다. 이 전 시장은 “어려운 때이니 부처님의 자비가 온 국민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진리에서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는 2000명이 넘는 신도가 모인 이날 법요식에서 가장 큰 환영을 받았다. 정 전 의장이 “스타는 확실히 박근혜 대표더라.”고 기자들에게 말할 정도였다. 손 전 지사는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 화해상생의 뜻을 담아 융화동진(融和同進·모두 화합해 함께 전진함)의 뜻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이 함께하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정 전 의장은 “부처님의 자비가 온누리에 퍼져 모든 분들이 성불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민주당 추미애 전 의원은 “(범여권)통합도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 욕심을 버리고 자비심을 채우는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언급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서울 4色 탐험-박물관 천국] (7) 인사동 ‘목인박물관’

    [서울 4色 탐험-박물관 천국] (7) 인사동 ‘목인박물관’

    목인박물관은 서울 인사동 골목길에 숨어 있다. 숨은 그림을 찾듯 이정표를 따라 조계사 맞은편 청석골길을 따라가면 소담한 마당이 반긴다. 목인(木人)이란 나무 인형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종교나 주술,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사람이나 동물을 나무로 조각했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의 수호신, 장승이다. 목인박물관은 이런 목조각상 5000여점을 소장한 국내 유일의 목조각상 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다양한 볼거리를 층마다 품고 있다. 지하라운지에는 꽃이 가득했다. 상여의 난간을 장식하던 꽃판 조각상이다. 연꽃, 모란에서 무궁화까지 화려한 색채를 뽐낸다. 꽃과 함께 물고기와 새도 그려져 있다. 큐레이터 이진아씨는 “물고기는 다산을,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메신저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회화·영상·설치 등 다양한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목인갤러리(1층)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생활에 쓰였던 민속 목조각상 300여점이 펼쳐진다. ●근·현대 인물상 5000여점 상여 장식용 조각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상여는 시신을 운반하는 일종의 ‘가마’. 우리 선조는 상여를 장식할 때 나무 조각상을 많이 사용했다. 목인이 죽은 사람의 마지막 길동무 역할을 맡은 것이다. 특히 서민들이 다양한 목인을 활용, 상여를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죽어서라도 한번쯤은 양반으로 근사하게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다. 근·현대를 살아간 다양한 인물상들이 박물관에서 나무 조각으로 살아 간다. 갓을 쓰고 담배를 물고 있는 양반, 소를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 한복을 곱게 입고 나들이 나선 아낙네…. 시대의 변화도 그대로 묻어난다. 양복 입은 신사, 양산을 든 여성, 다정히 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책을 들고 학교 가는 학생, 총과 칼을 든 군인,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그렇다. 최고의 볼거리는 남사당패. 줄 타고, 대접 돌리고, 가면 쓰고, 물구나무 선 광대들의 모습을 순간 포착해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진아씨는 “알려지지 않은 장인과 목수가 만든 조각상이라 작품마다 개성과 재기가 넘친다.”고 말했다. ●돌 조각상이 있는 옥상카페 옥상으로 올라가면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물관이 제공하는 설록차와 커피,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파라솔 의자 주변에는 돌 조각상이 놓여 있다. 산들바람이 코끝을 간질이고 햇볕이 따사롭게 발을 덮는다. 작은 쉼터가 연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이발소 표시등이 걸려있는 지하라운지에도 이발소처럼 편안하게 쉬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세미나실이 자리잡고 있다. 목인박물관의 또 다른 특색은 소장품을 맘대로 만질 수 있다는 것. 또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물관이 권위적이고 엄숙할 필요가 없다는 김의광 관장의 철학이 오릇히 담겨 있다. 김 관장은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듯 목인을 만지며 옛것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3월 박물관을 세운 김 관장은 1975년 외국인 집에서 목인을 처음 만난 뒤 “외국 사람도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그후 30년간 목인을 수집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 소장품을 한꺼번에 전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정기적으로 전시품을 교체하고 있다. 방명록에 이메일 주소를 남기면 작품이 교체할 때마다 연락해 준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천년의 신비’ 석가탑 사리장엄구 특별전

    이번 주말 천년의 신비를 만나러 서울 종로구 조계사로 가보자. 무구정광대다라니경(무구정경) 등 석가탑 사리장엄구 일괄유물(국보 제126호)의 특별전이 24일까지 조계사 경내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유물은 1966년 수습 이후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오고 있으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1주일간 특별히 조계사 나들이를 하게 됐다.
  • 19일 종교계 나눔과 배려의 행사

    19일 종교계 나눔과 배려의 행사

    소외된 이들을 위한 종교계의 배려와 나눔의 행사가 동시에 펼쳐질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19일 낮 12시30분 불교 조계종이 조계사 대웅전에서 여는 ‘장애인 수계법회’와 같은 날 오후 4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천주교 라자로돕기회가 마련하는 자선음악회 ‘그대 있음에’.‘장애인 수계법회’가 조계종단사상 처음 마련한 장애인을 위한 수계의식이라면 ‘자선음악회’는 세상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한센병 환자 가족들을 위한 흐뭇한 나눔의 자리이다. ●장애인 수계의식 조계종단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어렵게 결정한 수계(授戒) 의식. 종단 사상 처음으로 장애인만을 위해 마련한 엄숙한 자리이다. 장애인들이 소규모의 모임에서 계사 스님을 모시고 계를받는 의식은 간간이 있었지만 이처럼 종단 차원에서 대규모로 장애인들에게 수계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계사와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공동 주관해 열리는 수계의식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직접 계사로 참여할 예정. 조계종 장애인 포교단체인 원심회에 소속된 시각·청각 장애인과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을 통해 수계를 신청한 장애인 등 300여명이 동시에 계를 받게 된다. 지관 스님은 “불가에서 불·법·승의 삼보중 하나인 스님은 신앙과 귀의의 대상인 만큼 외형상 결함이 있으면 신심을 떨어뜨린다는 차원에서 장애인들의 비구계 수계는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며 “그러나 인연을 중시하는 불교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보살행은 장애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종단의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한센병 환자와 함께할 천주교 나눔음악회 천주교 라자로돕기회가 주최하고 성라자로마을이 주관하는 25번째 자선음악회.1975년 12월 서울 정동문화체육관에서 고(故) 이경재 신부와 배우 김성옥씨가 뜻을 합쳐 나환자촌인 라자로마을 의왕정착촌 학생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은 음악회로 시작해 이후 2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어온 나눔의 현장이다. 음악회의 이름 ‘그대 있음에’는 김남조 시인의 노랫말에서 딴 것으로 국내에선 가장 오래된 자선음악회이기도 하다. 음악회의 수익금 전액을 성라자로마을을 비롯한 국내외 무의탁 한센병 병력자들의 치료나 사회복귀 프로그램에 쓰고 있다. 올해 음악회에는 1990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여주인공 크리스틴 역으로 출연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독일 성악가 안나 마리아 카우프만이 방한해 메조소프라노 김청자, 바리톤 김동규, 테너 김재형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25년째를 맞아 전세계인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에서 일을 벌였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부처님 같이, 세상을 향기롭게

    부처님 같이, 세상을 향기롭게

    ‘우리도 부처님 같이, 마음을 맑게 세상을 향기롭게’(올해 부처님 오신 날 봉축표어) 불기(佛紀) 2551년 부처님 오신 날(5월24일) 봉축행사가 다음달 9일 오후 7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의 장엄등 점등식을 시작으로 24일까지 연등행사와 제등행진, 각종 봉사 등 다채롭게 진행된다. 장엄등 점등식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한 각 불교종단의 주요인사와 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며, 점등식과 동시에 광화문∼경복궁 경회루 구간에 설치된 가로연등이 일제히 밝혀진다. 지난해부터 ‘국민축제의 장’으로 시작된 연등음악회는 다음달 20일 오후 9시30분 연등축제 회향한마당이 열리는 종각사거리에서 있을 예정이다. 봉축 법요식은 다음달 24일 오전 10시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각 사찰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올해 봉축기간 중에는 특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비의 행사가 이어질 전망이다. 파라미타청소년협회 수원지회는 다음달 5일까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와 함께 나누는 부처님의 마음’을 진행한다. 조계사는 5월10일까지 전국 군부대의 장병과 교도소 재소자, 독거노인들에게 자비의 선물 보내기 행사를 마련하며, 봉축위원회와 전국 17개 대형 병원의 법당은 다음달 24일까지 병실에 ‘병원 연꽃등’을 전달한다. 조계종 중앙신도회도 전국 주요 사찰을 대상으로 다음달 29일까지 ‘이웃을 위한 희망의 등 밝히기’ 행사를 추진한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은 다음달 5∼6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이웃을 위한 3000배 정진기도’를 열어 법회 보시금 전액을 불우한 이웃에 전달한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지관스님)는 부처님 오신 날에 앞서 오는 30일 오후 6시 서울 롯데호텔에서 20여개 종단의 스님과 신도들이 참여하는 ‘평화와 민족번영을 위한 국민화합 기원 대법회’를 봉행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이웃사랑 실천이 곧 구원이고 해탈”

    기독교와 불교의 요체는 구원과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은총에 의한 ‘타력 구원’(기독교)과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자력 해탈’(불교)은 두 종교의 가장 핵심이면서도 그 목적과 방법이 상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면서 구원·해탈의 인식과 방법도 점차 열린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 나를 넘어선 남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지난해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 “번뇌 속에 푸른 눈을 여는 이는 부처를 볼 것이요, 사랑 속에 구원을 깨닫는 이는 예수를 볼 것”이라는 법전 조계종 종정의 일갈은 그런 측면에서 빛이 났다. 지난해 5월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붓다와 예수’라는 주제로 공동 모임을 가져 주목받았던 한국불자교수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이번엔 ‘구원’과 ‘해탈’의 현재적 의미를 화두로 종교의 공동 본질 탐색에 나선다.27일 오후 1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 국제회의장에서 여는 ‘오늘 우리에게 구원과 해탈은 무엇인가’주제의 학술회의에서다. 고려시대 태고(太古)스님은 ‘만법이 돌아가는 하나의 진리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화두 참구 끝에 득도했다고 한다.‘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다도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맞닿아있다. 27일 학술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은 ‘천하에 진리는 둘이 아니고, 성인의 마음도 둘이 아니다’(天下無二道,聖人無兩心)라는 공동 인식아래 자비와 사랑을 토대로 한 구원과 해탈의 실천방안에 뜻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씨는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는 요즘, 구원도 근원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된다.”며 “상호 소통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측면을 구체화시킬 때 구원은 완성되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특히 “소외된 남을 남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보는 가운데 의식적으로 남에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내적 개인 구원의 징표이자 사회 구원의 시작이며,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데서 구원은 최고의 구체성을 띤다.”고 못박았다. 이민용(참여불교연대 공동대표)씨는 “무아·무상 등 무(無)를 강조하며 열반으로 이끄는 불교는 기독교의 서구인들에겐 허무주의에 다름아니었지만 점차 부정주의적 현실관을 극복하는 최대의 이상론으로 격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불교에서 현장을 떠난 이상 세계(천국)가 있을 수 없고 천국의 전제없이 현실은 발붙일 근거가 없다.”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성령이 너희 속에 계시다’는 기독교의 구원론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이명권(코리아 아쉬람 대표)씨는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하지만 불교의 해탈은 개인이 깨달음을 추구한 뒤 중생을 제도하는 상이한 구조를 띤다.”며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는 구원이나 해탈의 결과 깨달음을 사회 속에 실천하는 보시는 결국 사회적 구원이라는 연대적 해탈로 만난다.”고 주장했다. 즉 ‘십자가’의 자기부정으로 출발해 만인의 대동사회를 열어가는 ‘만다라’의 조우, 그것은 유토피아를 넘어 사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시키는 것이요, 극락을 이땅에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25) 인사동 승동교회

    [종교건축 이야기] (25) 인사동 승동교회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들어서면 초입 왼쪽 좁은 골목 끝의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교회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골동품 가게며 크고 작은 현대식 건물들이 어수선하게 엉킨 풍경에선 영 생뚱맞게 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뾰족집 승동교회(종로구 인사동 137·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다. 인사동을 찾는 이는 물론 주민들도 대부분 존재 자체를 잘 알지 못하는 이색 공간. 이처럼 생소하지만 1904년 이후 줄곧 지금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해온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교단의 대표적인 모교회다. 특히 일제 치하 3·1운동의 중심지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곳. 통합·합동으로 갈라진 대한예수교장로회 분열의 현장이란 아픔을 함께 담고 있는 개신교계의 또렷한 유산이다. 승동교회의 뿌리는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옛 곤당골의 작은 한옥에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새뮤얼 포먼 무어(1860∼1906·한국명 모삼열) 목사가 1893년 시작한 목회. 곤당골이란 청계천 변에 고운 담(곤담)이 둘러쳐져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당시 주변에는 백정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교도소 수감자와 빈·천민 대상 사목으로 널리 알려진 모삼열 목사가 이 곤당골에서 최하층 신분의 백정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시작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초창기 예배에 이 백정들을 중심으로 16명의 교인이 참여했는데 그 때문에 승동교회에는 지금도 ‘백정 교회’라는 이름이 별명처럼 따른다. 곤당골 교회가 인사동에 한옥을 사들여 이사한 것은 2대 당회장인 이눌서(W.D.Reynolds) 목사가 시무하던 1904년 10월. 이듬해부터 새 예배당 건립에 나서 1912년 지금의 본당 골격을 갖췄다. 원래 적벽돌을 쌓아 박공 지붕을 인 정방형의 벽돌조 로마네스크 건물이었는데 1959년 앞 출입문쪽 신자석 공간을 늘린 증축공사로 초기의 모습을 잃었다. 초창기엔 앞쪽에 두 개의 출입문을 따로 내 남녀 신자들의 출입과 예배 공간을 구분했지만, 지금은 증축된 공간 쪽으로 한 개의 통합문을 내어 당시와는 영 딴판이다. 그나마 독경대를 비롯한 중앙의 의식공간은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본당 주변에 흩어져 있던 옛 모습의 한옥들은 전도회 장소로 쓰이고 있다. 지하엔 기도실과 교역자실, 상담실, 유치원, 성가대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승동’이란 옛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승동의 원 명칭은 인근 절골(寺洞)로 이어지는 마을이란 뜻의 승동(承洞).1907년 이 교회에서 장로교 경기도연합부흥회가 열렸는데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던 길선주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웃 절골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이길 승(勝)자를 쓰기 시작, 그때부터 승동(勝洞)교회가 됐다고 한다. 교회 이름에 얽힌 사연은 썩 내키지 않지만 승동교회는 이후 여러 이유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중요한 신앙 터로 거듭 주목받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들이 자의반 타의반 동참했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반성에 앞장섰던 것도 그중 하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승동교회 총회에서 ‘당시의 신사참배는 잘못된 것’이라며 무효선언을 해 세상의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백정교회 이후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신앙철학을 지킨 역대 목회자들도 교회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주 요인이다. 특히 김익두(9대·1935∼1938년 담임) 목사와 뒤를 이은 오건용(10대)·이덕흥(11대) 목사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황해도 안악 태생인 김익두 목사는 원래 불량배 출신이었으나 부흥사가 돼 이 교회를 이끈 인물. 몸이 아픈 신자들을 치료하는 재능이 탁월했는데 그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구름처럼 몰려든 신자들을 두려워한 일제가 김 목사와 교회를 탄압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결국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맞섰던 김 목사는 강제로 물러난 뒤 6·25전쟁때 새벽기도회를 하던 중 퇴각하던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오건용·이덕흥 목사는 맹인들을 위한 신앙공간이 없던 무렵 맹인 선교에 치중해 대부분의 맹인 신자들이 이 교회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놓고 용공성 시비 끝에 의견이 나뉘어 장로교가 갈라진 것은 한국 개신교계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당시 WCC 가입에 반대하던 측은 승동교회에서, 찬성하던 측은 연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합동(승동교회측)과 통합(연동교회측)으로 교파가 나뉘었다. 갈라진 지 43년 만인 지난 2002년 6월 양측 교회가 극적으로 교환예배를 갖긴 했지만 교회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지금 이 교회에 적을 둔 신자는 3000명. 이 가운데 예배 출석 인원은 1500명 정도로 대를 이어 이 교회를 다닌 신자가 30%를 차지한다고 한다. 신자들이 사는 곳도 분당, 안산, 춘천 등 다양해 그야말로 전국적인 교회인 셈이다.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승동교회만의 특징은 노인 사목. 인근 탑골공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세례를 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승동교회를 찾아와 신도가 됐다고 한다. 10년 전부터는 탑골공원을 자주 찾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노인 위주의 장년 2부를 운영해 지금은 매주 300여명의 노인이 예배에 참석한다. 세례 받은 노인들은 사후 경기도 백석의 승동동산 묘역에 안치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찾아와 신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상훈(54) 담임목사는 “승동교회는 드물게 도심 복판에 남아 있는 전통적인 교회”라면서 “초기의 ‘백정교회’ 이후 사회 기여 차원에서 일관성 있게 목회와 신앙을 이어온 흔치 않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3·1운동 유적지’ 지정된 항일역사의 산실 승동교회는 비록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교회’가 됐지만 일제 강점기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자 3·1운동의 본산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1900년대 초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보면서 민족주의의 색채를 띠어간 승동교회는 청년운동의 주축인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를 태동시켰고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학생 대표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모의한 학생지도자회의가 열렸던 현장임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승동교회 청년모임인 청년면려회장이었던 김원벽은 연희전문대생으로 학생들의 큰 신망을 얻었던 인물. 김원벽을 주축으로 한 전국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지하실(지금의 기도실)에 모여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문을 나눠 갖고 3월1일 거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조계사 뒤쪽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문은 거사 전날인 2월28일 새벽부터 전국에 전달됐다. 이 가운데 1500여장이 승동교회에 모였던 학생대표와 신자들을 통해 서울 시내 각처로 배포됐다. 학생 대표들은 3·1운동 나흘 뒤인 5일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다시 일으켰는데, 현장에서 일경이 휘두른 칼에 찔려 체포된 김원벽은 3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3·1운동 직후 당시 승동교회 담임이었던 차상진 목사가 주도한 이른바 ‘십이인등의 장서(十二人等의 長書)’ 사건도 유명한 일화다. 차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12명이 연서해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장서를 종로 보신각 앞에서 발표한 뒤 총독부에 제출한 사건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같은 사연으로 인해 승동교회는 지난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됐으며 매년 3·1절 주일마다 3·1정신을 기리는 예배가 올려지고 있다.
  • [종교건축 이야기] (23) ‘유일한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東國寺)

    [종교건축 이야기] (23) ‘유일한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東國寺)

    서해안 대표 항도(港都) 군산의 동국사(전북 군산시 금광동 135의1, 등록문화재 제64호)는 일제강점기 이 땅에 있던 500여개의 일본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경술국치(한일합방)가 있던 바로 전해인 1909년 일본인 승려에 의해 개창된 뒤 1913년 철저하게 일본불교 전통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지금도 초창기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됐다가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 말사로 등록됐지만 군산 시민을 포함한 일반인은 물론 신도들에게조차 생경할 정도로 ‘소외된 사찰’. 하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책자에 꼭 소개될 만큼 일본엔 각별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로 우리에겐 일제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역사의 큰 흔적이다. 북·남부로 금강과 만경강이 흐르며 넓은 평야를 형성하는 군산은 예로부터 빼놓을 수 없는 호남의 주요 곡창.1899년 개항과 함께 개항장의 외국인 전용주거지역인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일본화되었던 도시다. 군산시지에 따르면 동국사가 창건될 당시 전체 인구 4900명 가운데 일본인이 절반에 가까운 2000여명이었으니 일제가 얼마만큼 군산에 눈독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열강들이 조선 개항에 종교를 앞세웠던 것처럼 일본도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1877년 부산 개항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강요에 따라 정토진종과 일연종 등 각종 불교 종파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 불교세력들이 각 지역에 자리잡는 데는 물론 넓은 토지를 확보한 일본인 유지들이 앞장섰다. 군산에도 여러 종파가 들어왔으며 동국사가 창건되기 전 이미 6개의 일본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동국사는 한일합방 전해인 1909년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 붓관(內田佛觀)이 금강선사(錦江禪寺)란 이름으로 개창했지만 사찰 자체는 4년 뒤인 1913년 세워졌다. 사찰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았으나 동국사 스님들이 지난 2005년 대웅전 남쪽의 범종 명문을 탁본해 밝혀낸 것이다.1919년 일본인 주지 현정이 쓴 명문에는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락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이 굳세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어 당시 이 사찰의 사격이 어땠는지를 짐작케 한다. 명문에 붙인 발기인들은 김제 등 호남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해 지금도 군산시 지적부에 이름이 남아 있는 일본인 유지들. 일본 게이오대를 졸업한 뒤 군산에 자리잡고 900만평을 경작했다는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며 도요사키 게타로(富岐佳太郞), 오사와 도주로(大澤藤十郞) 등 대지주 6명이 들어 있다. 사찰의 설계자와 건축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에도(江戶)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문화재청의 기록화 조사보고서대로 사찰 안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일본 분위기에 휩싸인다. 우선 정면 5칸, 측면 5칸에 팔작지붕을 인 정방형의 대웅전과 전형적인 일식 건축인 요사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다. 법당과 요사채가 떨어져 있는 한국의 사찰들과는 영 딴판이다. 대웅전을 들어가려면 요사채와 연결된 복도를 통해야 하며 요사채의 각 방에는 일본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납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국의 사찰과는 달리 장식이나 벽화를 일절 쓰지 않은 맨 벽의 대웅전 뒤편에는 원래 납골당이 붙어 있었지만 1960년대에 헐렸다. 납골당의 유골들을 모두 수습해 금강에 뿌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후손들이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절 마당의 흙을 담아갔다고 한다. 대웅전의 앞쪽과 양측면엔 모두 창호를 설치해 습기가 많은 섬나라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웅전 기둥이며 이 기둥들을 잇는 인방과 불단, 공포의 목재는 모두 직접 일본에서 날라온 쓰기목(일본 향나무종)을 썼다. 대웅전 출입 공간인 정면 앞 칸의 바닥이 시멘트로 마감된 것도 독특하다. 법당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리는 일본 불교 전통에 맞춘 것이다. 대웅전 바닥엔 원래 다다미가 깔렸으나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철거했고 대신 장마루가 깔려 있다. 건물 뒷벽에 조성된 불단에는 소조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가섭·아난 존자 등 삼존불을 모셨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해방 이후 이 사찰을 인수해 ‘동국사’란 이름으로 개명한 남곡(1983년 입적) 스님이 김제 금산사에서 이운해왔다. 남곡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재무·교무부장과 조계사·선운사 주지를 지낸 조계종의 이름난 스님. 절의 이름을 ‘해동대한민국’을 줄인 동국사로 바꾸고 불단의 석가모니불을 애써 금산사에서 옮겨온 것을 볼 때 일제의 흔적을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머리 위 천장에서 내리건 보산개는 치우지 않았다. 한국 사찰 대웅전의 닫집 격인 보산개는 일본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장엄물이지만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 아닐까. 범종각에 걸린 범종도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한국의 범종과는 달리 종각 지붕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어 특이하다. 범종각 앞에 늘어선 석불상에선 주술과 밀교성격이 강한 일본 불교가 그대로 읽혀진다. 우리 사찰에선 흔한 불탑 대신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33가지의 모습으로 현현한다는 33신과 여래·보살상 7기를 세웠는데 지금은 2기가 없어진채 38기만 남아 있다. 절에 들어온 일본인 신도들은 맨 먼저 12개의 띠별로 조성된 이 석불상에서 소원을 빌고 석불상 앞에 일종의 세숫대야로 만들어놓은 황등(黃燈)에서 손을 씻은 뒤 법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 사찰들은 다른 일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훼손되거나 사라져갔다. 동국사도 석불상과 사찰 입구 기둥에 새겨진 일본 글씨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망치로 뭉개졌고 조선총독부 건물로 쓰였던 옛 중앙청 건물이 헐린 1995년 무렵엔 군산시청이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웅전이며 요사채, 범종이 온전하게 남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남곡 스님의 법맥을 이은 동국사 회주 재훈(71) 스님의 대답은 이렇다.“아픈 역사도 엄연한 역사인데 지우려고만 든다고 지워지나요. 반면교사로 삼아 후대에 교훈으로 남겨야지요.” 스님 말마따나 총무 종걸 스님은 지난해부터 일본 조동종 본부와 창건주의 후손들을 만나며 동국사지를 정리하고 있다.1주일 평균 50여명씩 찾아드는 일본인 관광객이며 건축학도들도 살갑게 맞이한다. kimus@seoul.co.kr 사진 군산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고은시인이 한쪽청력 잃고 19세때 출가한 곳 동국사는 절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산 출신인 고은(74) 시인이 출가한 절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다. 고은 시인의 출가후 환속까지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동국사에 얽힌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만 작품에 동국사의 만리향을 언급한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이 만리향은 대웅전 앞의 것을 비롯해 5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4그루만 남아 있다. 동국사 스님들에 따르면 고은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동국사를 자주 찾곤 했다.6·25전쟁 직후 극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후유증으로 한쪽 귀의 고막을 심하게 다친 뒤 방황하다가 이곳에 머물던 객승 혜초 스님을 만나 참선을 배우며 불교에 빠져들었다. 군산북중 미술교사로 있던 19세 때인 1952년 마침내 혜초 스님에게 중장이란 법명을 받아 출가했다고 한다. 동국사 회주 재훈 스님에 따르면 기승(奇僧)으로 알려진 혜초 스님은 고은 시인과 전국을 떠돌았는데 “너는 나의 제자이지만 스승”이라며 고은 시인과 절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고은 시인이 은사인 혜초 스님에게 절을 받고 다음날은 혜초 스님이 고 시인에게 절을 받곤 하였던 것이다. 결국 혜초 스님은 고은 시인의 그릇을 알아본 때문인지 당시 통영 미래사에 주석하던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추천했으며 고은 시인은 효봉 스님을 찾아가 일초라는 법명을 새로 받았다고 한다. 27세 때 2개월간 해인사 주지 서리 소임을 맡기도 했던 고은 시인은 이후 조계종 총무원 간부와 불교신문 주필, 전등사 주지를 지낸 뒤 만행을 계속하다가 1962년 환속했으며 틈날 때마다 출가사찰인 동국사를 찾곤 했다.
  • 박종철 열사 49재 20주년 추모제

    6월 민주항쟁 20주년사업불교추진위원회(상임대표 명진·여익구)가 주최하는 박종철 열사 49재의 20주년 기념 추모제가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렸다. 행사는 천도재와 추모 문화제 순서로 진행됐다.6월 민주항쟁 기념 사진전도 함께 마련됐다. 추모사에서 청화 스님은 “박 열사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서 “우리가 1987년의 죽음 위에 쓰고 있는 민주주의를 중단 없이 완성해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는 “87년 독재정권을 타파하기 위해 전국에서 외쳤던 민중의 함성이 다시 한번 재현돼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행사에는 박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어머니 정차순씨, 손학규 전 경기지사,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의원, 민생정치준비모임 천정배 의원 등이 참석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종교플러스] 새달 3일 故 박종철씨 천도재·추모행사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씨의 대규모 천도재(遷度齋)와 추모행사가 불교계에 의해 다음달 3일 오후 1시 종로 조계사 앞 공평빌딩 사거리 일원에서 마련된다. 행사는 불교 천도의식, 각 종교계 지도자와 사회인사가 참여하는 추모제, 노래공연, 사진자료 전시회 등으로 진행될 예정. 불교계는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모여 지난달 말 출범한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불교추진위원회’(상임공동대표 명진스님·여익구)를 상설기구화하기로 했다.
  • 이치범 환경장관-지관 총무원장 17일 ‘관람료 회동’

    이치범 환경부 장관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국립공원 문화재 관람료 징수 장소 문제와 관련해 오는 17일 조계사에서 만난다. 12일 환경부에 따르면 이 장관은 국립공원 문화재 관람료 징수 장소를 사찰 입구 등으로 이전하는데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계종 내부에서도 문화재 관람료를 기존 매표소가 아닌 사찰 입구 등에서 징수토록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사찰들은 상당 기간 국립공원 입구 매표소를 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조계종측은 이날 전국 사찰 대표 18명이 모인 가운데 문화재 관람료 징수를 둘러싼 탐방객들과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 회의를 가졌다. 오는 16일에는 해당사찰 주지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환경부는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된 만큼 사찰측이 대승적 차원에서 기존 매표소가 아닌 사찰입구 등으로 징수 장소를 옮겨 문화재 관람객에게서만 관람료를 걷는 게 맞다.”고 밝혀왔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진보세력 “대선 개입” ‘단일후보’는 엇갈려

    진보세력 “대선 개입” ‘단일후보’는 엇갈려

    국내 진보·개혁 성향의 시민·사회운동가들이 ‘합리적 신진보운동’을 기치로 올 대통령선거에 적극 개입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단일후보 추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창조한국미래구상(가칭)’은 12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사회의 창조적 미래를 위한 시국 대토론회’를 열고 본격 행보에 나섰다. 발제에 나선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열망을 배반, 정책·현실적으로 대안이 아니다. 민주노동당도 대안정당으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문제제기 정당’으로 축소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면서 “기존 정치세력으로는 곤란하며, 대안은 ‘새로운 상상력의 정치운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정치운동은 단기적으로 대선 승리를 목표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범진보·개혁세력의 국민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정책을 먼저 제안하고 단일 국민후보를 선출하는 ‘선 정책 후 후보’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성급하게 진보·개혁세력의 승리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대선에서 실패하더라도 강력한 진보정당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면서 “단일후보를 내려면 어디까지 진보·개혁세력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 그것부터 의견일치를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우리의 역할은 올 대선에 가장 올바르고 전문성있고 역량있는 후보를 찾아내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라면서 “현재 거론되는 후보군 가운데서도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자로는 문국현 유한킴벌리사장, 임진택 연극연출가, 임동규 부산YMCA사무총장, 나간채 전남대 사회과학대학장, 권미혁 여성민우회 공동대표, 손석춘 원장, 나지현 전국여성노동조합위원장, 최현진 회사원, 이학영 YMCA사무총장 등 9명이 참석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서울문화재단 새 이사장 박범신씨

    “소외된 이들에게도 다양한 문화가 전달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할 겁니다.” 3일 서울문화재단의 새 이사장으로 임명된 소설가 박범신(61)씨는 조심스럽게 각오를 전했다. 지난 1973년 등단한 이후 올해로 문학인생 34년째를 맞은 그에게 재단 이사장 자리는 어찌 보면 앞서 있었던 정치적 행보보다도 부담이 되는 듯하다. 그는 “재단 업무와 관련해 더 공부를 해야 한다.”며 운을 뗐다. 이어 “시대적으로 문화가 중요한 때이지만 문화의 실핏줄이 잘 깔려 있지 않은 듯하다.”면서 “문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문화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골목 깊숙이 문화가 배달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젊고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평한 그는 “서울문화재단은 시장의 문화 정책을 뒷받침해 콘텐츠를 공평하게 실어나르는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문화재단 신임이사에는 노준의 사립미술관협회장, 신동엽 연세대 교수, 원담 조계사 주지, 이남기 SBS 기획본부장,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대표, 최태지 정동극장 극장장이 임명됐다.1기 이사 중 전택수 한국학정보센터소장, 이조안 여성신문사 이사장, 최경희 주부환경단체 푸른솔회 회장은 연임됐다. 이와 함께 서울문화재단은 오는 8일부터 16일까지 신임 대표이사를 공모해 이달 중에 선임할 예정이다. 초대 이사장은 소설가 정연희씨, 대표이사는 배우 유인촌씨가 각각 맡았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서울문화재단 새 이사장 박범신씨

    서울문화재단 새 이사장 박범신씨

    “소외된 이들에게도 다양한 문화가 전달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할 겁니다.” 3일 서울문화재단의 새 이사장으로 임명된 소설가 박범신(61)씨는 조심스럽게 각오를 전했다. 지난 1973년 등단한 이후 올해로 문학인생 34년째를 맞은 그에게 재단 이사장 자리는 어찌 보면 앞서 있었던 정치적 행보보다도 부담이 되는 듯하다. 그는 “재단 업무와 관련해 더 공부를 해야 한다.”며 운을 뗐다. 이어 “시대적으로 문화가 중요한 때이지만 문화의 실핏줄이 잘 깔려 있지 않은 듯하다.”면서 “문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문화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골목 깊숙이 문화가 배달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젊고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평한 그는 “서울문화재단은 시장의 문화 정책을 뒷받침해 콘텐츠를 공평하게 실어나르는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문화재단 신임이사에는 노준의 사립미술관협회장, 신동엽 연세대 교수, 원담 조계사 주지, 이남기 SBS 기획본부장,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대표, 최태지 정동극장 극장장이 임명됐다.1기 이사 중 전택수 한국학정보센터소장, 이조안 여성신문사 이사장, 최경희 주부환경단체 푸른솔회 회장은 연임됐다. 이와 함께 서울문화재단은 오는 8일부터 16일까지 신임 대표이사를 공모해 이달 중에 선임할 예정이다. 초대 이사장은 소설가 정연희씨, 대표이사는 배우 유인촌씨가 각각 맡았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409-1의 유별난 건물,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주변에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출적인 건물 외양이 색다르다.2002년 12월 들어선 뒤 대전의 명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이 민족종교 증산도의 핵심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정면에서 볼 때 왼편 시루(떡을 쪄서 익히는 질그릇) 형태의 태을궁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山´의 형상을 이룬 독특한 건물. 도조(道祖) 강증산(姜甑山·본명 一淳·1871~1909)의 이름자를 고스란히 건물로 형상화했다. 지금은 증산도 신도들의 교육장소로 쓰고 있지만 이른바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새 시대에 세상의 모든 일을 도모할 근본 터로 계획해 세운, 증산도의 중심이다. 세미나실과 교육장 6개, 사무동, 숙소동, 증산도 케이블방송국이 ‘山´자를 이루며 독특하게 포진해 있는 건물. 한꺼번에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증산도 교육센터이지만 건물 맨 오른쪽엔 서점과 북카페를 차려 일반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공간은 역시 시루 모양의 태을궁. 밖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원통형 시루 모양이 확연하다.1800석을 갖춘 실내의 조명과 음향, 영상 시스템은 국내 여느 대형 공연장 못지않은 수준. 무대 전면에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太母) 고수부, 태을천 상원군, 국조 단군왕검의 어진을 개사해 모신 신단이 눈길을 끈다. 도조 강증산은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시루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나 호를 시루 증(甑)자와 산(山)자를 써 증산이라 지었다고 한다. 증산이란 이름엔 출생지 시루산 말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다름 아닌 1200여년 전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세운 김제 금산사 미륵금상의 철수미좌 사연이다. 진표율사는 목숨을 건 망신참법의 수행을 통해 미륵불을 친견하고 미륵불의 계시에 따라 미륵금상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쇠로 된 밑 없는 시루(철수미좌)를 놓고 그 위에 미륵금상을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지금 미륵금상 아래의 철 시루는 시멘트로 봉쇄된 채 일반인들이 볼 수 없다). 증산도는 그로부터 1100여년 후 고부의 시루산 밑에서 탄생한 강증산이 진표율사와의 인연으로 금산사 미륵금상에 30여 년간 성령(聖靈)으로 있다가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여긴다.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道典)에 실려있는 탄생에 관한 내용이지만, 불교계에서 아직까지 미륵금상을 철수미좌에 받쳐 조성한 이유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김제 금산사 인근 모악산 기슭에는 지금도 증산 사상을 신앙으로 이어오고 있는 군소 종교단체가 40여개나 남아 있다. 강증산은 31세 때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간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통해 남북통일을 포함한 후천세상을 여는 프로그램(증산도에선 도수로 부름)을 짰다고 한다. 태을은 증산도에서 가장 중시하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에 등장하는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진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총본산의 주 공간에 가장 중요한 태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강증산이 태어난 시루산 아래 신송마을에는 입구에 ‘강증산성지’라 새겨진 나무 푯말만이 덩그맣게 섰을 뿐 생가를 비롯해 성지라 부를 만한 흔적이 별로 없다. 인근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은 도조 강증산의 맥을 이어받은 보천교 교단이 형성됐던 곳이다. 당시 이곳엔 본부 건물인 십일전을 비롯해 건물 30여동이 들어섰으며 신도 수가 수백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제시기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이곳 보천교를 통해 모금되었으며 그 때문에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원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선승 탄허 스님의 아버지인 김홍규도 보천교 핵심 간부였다. 보천교는 종교집단이었지만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일제는 집요한 와해공작을 벌여 1936년 마침내 보천교를 해체시켰으며 당시 보천교의 본당이었던 십일전 건물은 해체되어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옮겨졌다. 보천교 교단이 있던 대흥마을은 마을 전체가 보천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보천교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옛 건물 7채만 남아 있다. 보천교 와해 이후 지금의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강증산과 2대 도주 고수부의 종통을 이어 새롭게 이끈 것이 증산도. 증산도는 해방후 한때 신도가 70만명에 달했으나 6·25전쟁으로 교세가 주춤했다가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1970년대 다시 문을 열어 지금에 이른다.“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대전)에 꽂았느니라.”“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는 도조의 유언을 중시, 대전에 본부를 두었으며 태을궁은 그중에서도 핵심 공간인 셈이다. kimus@seoul.co.kr ■ 전국 250여 도장·신자100만명 둔 증산도는 강증산을 도조(道祖)로 모시며 상생(相生), 보은(報恩), 해원(解寃), 원시반본(原始返本),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핵심 종지(宗旨)로 삼는다. 전국에 250여개의 도장(道場)이 있으며 신자 수는 100여만명으로 추산. 도장은 수행, 교육, 포교 활동의 구심점으로 대전에 본부가 있다. 세계적으로 20개국 50여개 도시에 도장을 갖췄으며 최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7개 국어로 된 외국어 도전도 펴냈다. 신도들은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도장에서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 고수부, 천지신명에 정성을 드리는 정기 치성(致誠)을 봉행한다. 평상시에는 집에서 매일 아침·저녁 청수(淸水·정화수)를 올리고 태을주 수행을 한다. 기도는 하늘을 받들고 땅을 어루만지는 형상의 절법인 반천무지(攀天撫地)를 하는데, 인간이 천지의 은혜에 보은하는 것과 함께 인간이 우주의 주인임을 상징한다. 지금 시대는 우주에서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과도기이며 앞으로 올 가을기에 통합과 상생의 새 문명이 열린다는 미래관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단체에 비해 대학생 등 젊은 남자들이 신도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학교수, 의사, 한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적지 않다. 후천문명을 열 성직자 양성기관인 증산도대학교를 1984년부터 열고 있으며 전문 성직자를 기르는 성녀전사단 교육과정도 운영한다. 역사와 민족의 뿌리찾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군부대, 교도소, 마을문고, 학교도서관 등에 ‘상생의 책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대중을 진심으로 섬겨야”

    “불교에서는 공개된 합의절차와 합의된 의견을 최고의 법으로 존중하며 섬겨온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FTA와 남북문제 등 난관에 부닥쳐 기로에 서있는 지금 이 민주적인 대중공의의 전통을 온전히 되살려 사회화하는 것이 우리 불교가 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관(74) 조계종 총무원장이 취임 1주년(14일)을 앞두고 9일 서울 조계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 1년간의 소회를 밝혔다. 스님은 “출가승 전통과 선(禪)풍이 강한 조계종단에서 수행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안거(安居)에 치우친 수행보다는 출가승·재가신도 모두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늘상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민주적 공동체의 전통을 거듭 강조했다. “대중을 진심으로 섬기고 애호하는 사람만이 대중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지관 스님은 특히 “출가승이나 일반 신자 등 사부대중은 누구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대중을 지혜롭게 사랑하는 지도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크며 지도자들이 제 역할을 할 때 종풍 또한 진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조계종단에서 주지 인사며 금전 문제와 관련해 연이어 불거진 마찰과 비리에 대해선 “일부 스님과 사찰들이 사익을 챙기고 편한 것만 좇아 종단에 해악을 끼치고 있지만 종단 전체의 일로 걱정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면서도 스님들에게 자기반성과 회심을 다지는 법회를 상시화할 것을 주문했다. 스님은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한다는 부처님 법의 범주에서 볼 때 전투적이면서 강한 느낌의 ‘포교’라는 명칭보다는 ‘전법’의 용어로 수정했으면 한다.”고 개인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우주 기운 품은 300점 한자리

    우주 기운 품은 300점 한자리

    불교의 선(禪)과 묵화(墨畵).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40년간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른바 ‘선묵화’(선화)에 치중해온 스님이 있다. 속리산 달마선원장 범주(63) 스님. 단순히 백지나 천 위에 먹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수행이자 포교의 방편으로 삼아 매달려온 흔치 않은 스님이다. 선화일여(禪畵一如).40여년간 이 선화일여를 몸으로 보여온 범주 스님이 지난 30년간의 선묵 작업을 결산하는 회향 전시회를 갖는다. 다음달 13∼23일 조계사 총무원 전시장,13∼31일 서울 법련사,11월10∼20일 부산 국제신문사 화랑. 국내에서 선묵화, 즉 선화를 하는 스님과 일반인들은 적지 않지만 범주 스님처럼 수행의 범주로 일관되게 선묵화에 천착하는 이는 손꼽을 정도. 범주 스님은 특히 다양한 달마도를 세상에 선보였으며 지난해 11월 부산 APEC 정상회의 기간중 범어사에서 각국 퍼스트레이디들을 초청해 가로 5m, 세로 6m 크기의 대형 종이에 사람 키만한 대붓으로 달마도를 단숨에 그려보이는 퍼포먼스를 시도할 만큼 국내 최고의 달마도 달인으로 평가받는다. “한국불교의 요체이자 수행 핵심인 선은 마음을 비워 무념과 무아의 경지에 든다는 점에서 묵화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림에 나를 투영해 가면서 나를 잊는 과정에서 무념과 무아를 이룰 수 있지요. 그런데 요즘의 선이나 선화는 형식에만 매달린 채 근본 정신을 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홍익대 미술대에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전공한 어엿한 미술학도. 국내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양화가 함섭·박용인 등과 동문수학한 동기다. 출가의 원을 세워 홀연히 입산해 정진하던 중 예술과 수행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게 바로 선묵화다. 무념 무아의 상태에서 선묵화를 그리다 보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기운이 그림에 투영되면서 그림을 보는 이들도 함께 마음을 비우게 된다는 게 스님의 지론.“비워야만 그릴 수 있고 비워야만 볼 수 있다.”는 것.‘지니고 있으면 액을 쫓고 복을 가져온다.’는 미신을 따라 부적처럼 횡행하는 세상의 달마도에 불만이 많은 게 당연하다. 스님의 수행방편은 선묵화에 머물지 않고 다도와 선을 연결하는 선다화(禪茶畵)로 이어진다.“선다는 선묵처럼 선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수행법이고 예로부터 많은 선승들이 선다를 행했지만 요즘의 선다는 원뜻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2∼3년전부터는 선다화에 치중해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그 작품들을 선보인다. 선다화란 차인(茶人)들이 차실에 거는 그림을 말하는데 스님이 천연염색이며 천연나무, 옛 문짝들에 선묵을 가미해 세상에 처음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작품은 선묵화 100점, 선묵 도자기 50점, 선다화 50점, 선차다기 50점 등 모두 300점. 내년 상반기중 서울 조계사에 들어설 국제 선센터 건립에 힘을 보태기 위한 조계사 전시에선 스님 특유의 달마 퍼포먼스를 또 한차례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조계종과 소유권 법정공방 현등사 사리 삼성문화재단, 사찰측에 반환키로

    그동안 소유권을 놓고 조계종과 법정 공방까지 벌여온 현등사 사리 및 사리구를 현재 소유자인 삼성문화재단이 사찰측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조계종과 삼성문화재단은 25일 조계사에서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현등사 사리와 사리구가 원래 봉안되어 있던 운악산 현등사에 봉안되어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함에 따라 이같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삼성문화재단은 “도선국사가 염원한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의 발원대로 현등사 사리와 사리구가 불교 사부대중의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서 본래의 위치인 현등사에 영원히 봉안될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조계종은 “현등사 사리와 사리구를 원형대로 잘 보존해 준 점에 대해 삼성문화재단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삼성문화재단이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큰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조계종 간화선 입문프로그램 개설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간화선입문프로그램 ‘화두 참선으로의 초대’를 20일부터 11월25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견지동 조계사 극락전에서 운영한다. 참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기초부터 참선까지 쉽게 안내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과정은 입문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계종 포교원 스님들과 연구팀원이 직접 진행한다는 점이 특징이다.(02)735-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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