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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피플+] 6명 고아 키우며 평생을 바친 100살 독신 할아버지의 삶

    [월드피플+] 6명 고아 키우며 평생을 바친 100살 독신 할아버지의 삶

    6명의 고아를 키우며 한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100살 할아버지의 사연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하얼빈 TV는 지난 4일 100세 생일을 맞은 펑윈송(彭云松) 할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했다. 사연은 1954년 당시 35살의 펑 씨가 철길 위에서 굶주린 8살 남자아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금세 쓰러질 듯 굶주린 아이에게 만두를 건넨 펑 씨는 차마 아이를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나랑 함께 가자꾸나”라고 말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15년간 그는 5명의 남자아이와 1명의 여자아이를 집에 들였다. 모두 버림을 받거나 부모를 여읜 채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이었다. 이렇게 각기 성이 다른 6명의 아이는 한집에 살면서 가족이 되었다. 펑 씨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하얼빈의 공사장에서 막노동하거나, 폐지를 주우며 돈을 벌었다. 1954년 당시 한 달 월급은 30위안(한화 약 5000원)에 불과했지만, 귀갓길에는 늘 아이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들고 왔다. 또 누가 맛있는 걸 주면 잘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이들은 날마다 아빠가 돌아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어귀에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면 6명의 아이는 한꺼번에 달려가 아빠를 맞았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나눔의 기쁨은 컸다. 한번은 중추절에 펑 씨가 받은 월병이 하나뿐이었다. 펑 씨는 월병 하나를 6조각 내어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먹였다. 아이들은 평생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 시절 나누어 먹었던 작은 월병 조각을 꼽는다. 펑 씨에게는 한가지 신념이 있었다. 아이들을 비단 먹고, 입히는 것뿐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받도록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가난했고,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지만, 아이들을 돈벌이에 동원하지 않았다. 한번은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다가 펑 씨에게 들켰다. 그는 “또다시 폐지를 줍는다면 다시는 너희를 키우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돈을 벌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그릇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웃들은 펑 씨에게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어서 장가를 들라”며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여성은 펑 씨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6명의 고아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는 줄행랑을 쳤다. 아이들은 아빠가 결혼하면 버림받을까 두려워 “아빠,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펑 씨는 “누가 너희들을 버린다고 했느냐?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절대 그럴 리도 없다”고 말했다. 이후 누가 선을 보여준다고 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펑 씨의 보살핌에 아이들은 모두 바르게 자라나 성인이 되어 제각각 가정을 꾸렸다. 자식들은 서로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했지만, 펑 씨는 홀로 고향인 산동성의 누추한 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2013년 펑 씨가 94살 되던 해, 더는 참을 수 없던 자식들의 간곡한 설득에 비로소 하얼빈으로 돌아와 자식들과 살고 있다.한편 각기 성이 다른 6명의 자식의 평생소원은 성씨를 ‘펑’ 씨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펑 씨는 “너희들이 비록 고아일지라도 근본을 나타내는 성이 있는데 이를 바꿀 순 없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2013년 그의 자식들은 눈물을 쏟으며 “다음 생에 태어나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면서 ‘성’을 바꾸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펑 씨는 자식과 함께 한 지 60여 년 만에 아이들에게 ‘펑’ 씨 성을 허락했다. 한때 세상에 버림받아 홀로 남겨져 어둠 속에서 살아갔을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반듯하게 자라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다. 장성한 자식들은 펑 씨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기적’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갚고 있다. 다섯째 아들은 17년 전부터 노인을 위한 무료 서비스 여관을 운영 중이다. 지금까지 130명이 넘는 과부, 빈곤 노인을 위해 무료 숙박, 음식을 제공하는데 100만 위안(1억7000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인애(仁爱) 정신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100살이 된 펑 씨는 “내가 아이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우지는 못했을지라도 반듯하게는 키웠다”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손주들이 할아버지에게 수시로 연락을 하고 찾아온다.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가슴으로 품은 고아들은 아들, 딸이 되어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가져다주고 있다.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아인슈타인 이론의 사라진 조각 발견했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사라진 조각 발견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통일장 이론’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발견됐다. AFP통신 등은 6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이 아인슈타인의 자료 110여점을 일반에 새로 공개했다고 전했다. 이 자료들은 미국 시카고 크라운굿맨재단이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수집가로부터 구매해 히브리대에 기증한 것이다. 히브리대는 다음 주 아인슈타인 탄생 140주년을 앞두고 이 자료들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1930년 독일 베를린 프로이센과학아카데미에 제출한 통일장 이론에 관한 논문 부록 원본이다. 8쪽 분량의 이 부록은 그간 분실된 것으로 추청됐었다. 연구자들은 복사본만 갖고 있었다. 하녹 구트프로인드 히브리대 물리학 교수는 AFP에 “우리가 가진 복사본은 한 페이지가 빠져 있었고 이것이 수수께끼였다”며 “놀랍게도 그 페이지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통일장 이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의 힘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이 수십년간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의 친필 편지, 수학 계산 기록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슈타인은 1935년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독일 나치의 급부상을 우려하기도 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50여년 간 봉인돼 있다 세상에…1000년 전 마야동굴 발견

    50여년 간 봉인돼 있다 세상에…1000년 전 마야동굴 발견

    고대 마야 문명의 중심지 중 한 곳인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치첸이차에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마야족의 동굴이 발견됐다. 미국 뉴욕포스트,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해외 언론의 5일 보도에 따르면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INAH) 측은 최근 치첸이차에서 고대 마야족이 종교적 행사를 진행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동굴을 찾아냈다. 이 동굴이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1966년으로, 당시 현지의 한 고고학자가 인근에 살던 주민의 제보로 동굴의 존재를 처음 확인했다. 하지만 이 고고학자는 도굴과 훼손 등을 우려한 탓인지 도리어 동굴의 입구를 봉인했고, 이를 처음 제보한 주민에게도 해당 사실을 발설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마야 문명의 비밀을 품고 있던 동굴은 50년 넘게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채 보존되다가, 2018년,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속 탐험가와 그의 팀이 우연히 이를 발견하면서 그 내부를 세상에 드러내게 됐다. 이 동굴에서는 그릇과 뼛조각 등 각종 유물이 발견됐으며, 유물이 사용된 시기는 약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INAH 측은 밝혔다. 조각난 유물뿐만 아니라 마야족이 종교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계단식 제단도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등 100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INAH 측은 동굴에 대한 최초 보고서에서 “총 155개의 유물을 발견했으며 일부는 마야의 세계관을 강하게 표현한 것들이었다”면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의 수량이 유물이 가진 정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상 매우 많은 유물이 발견됐고, 이 유물들은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형태로 존재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사실이 많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이를 처음 발견한 고고학자가 이렇게 경이로운 발견을 봉쇄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라면서도 “하지만 이번 탐사와 발굴은 마야가 몰락하기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한 질무을 구할 수 있는 전례없는 두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고 전했다.  사진=AP·연합뉴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유세미의 인생수업] 봄

    [유세미의 인생수업] 봄

    명자씨의 친구들이 왜 5인방인고 하니 모두 ‘자’로 끝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회장격인 명자씨 외에 순자만 3명이다. 정순자, 주순자, 이순자에 이어 귀염성 있게 민정자가 합세한다. 이름하여 ‘자 시스터스’. 칠순을 바라보는 그녀들은 왠지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이름 때문에 평생 불만의 강과 원망의 골짜기를 건너왔으나 운명처럼 모인 ‘자 시스터스’ 덕분에 이름에 딱 한번 고마움을 느낄 만큼 돈독한 우정을 자랑한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면 그녀들의 봄 여행은 올해도 어김없다. 남편 시중에 여러 자식들 키우느라 관절염까지 생긴 판에 이제라도 시간아 멈춰라 싶은 마음으로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떠난다. 흐드러지게 매화가 피고 온 산천에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연초록 세상이다. 집에서는 사방 쑤셔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고, 햇병아리 같은 손주들만 보면 입이 함박만 해지는 할머니들이지만 5인방에 합류하면 다들 열여섯 소녀가 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산골 한동네에서 네댓 살부터 함께 자랐으니 그들에게는 서로가 청춘이고 꽃분홍 세월이다. 올해의 봄 여행을 위해 고속터미널에 제일 먼저 도착한 명자씨는 차표에다 회원들의 간식거리를 챙겼다. 연달아 도착하는 ‘자 시스터스’. 얼굴은 이미 여행의 설렘으로 터질 듯 흥겹다. “1박2일 여행에 다들 웬 보따리가 그리 커?” “사돈 남 말하네. 넌 누가 보면 집 나온 줄 알 겄다.” “마음이야 이미 그렇지.” 까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길가에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다는 사춘기 소녀들이 따로 없다. 버스를 타자마자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꺼낸다. 고구마, 콩떡, 삶은 달걀에 왕사탕이 등장한다. 하이라이트는 정자씨가 직접 집에서 만들었다는 팥 양갱. 이럴 때만 맛보는 귀한 간식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이 주순자씨는 왕사탕을 하나 얼른 입에 문다. “귀한 양갱 놔두고 왜 사탕부터 물어?” “널 보면 사탕이 먹고 싶어져.” 웃는 그녀의 마음을 명자씨는 어렴풋 안다. 순자씨의 집은 그녀들 중 유독 가난했다. 7남매의 맏이 그녀는 친구들이 마냥 뛰어다닐 때도 누군가를 업고 있어야 했다. 그저 맨몸으로 고무줄놀이 한번 하는 게 어린 순자의 소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힘이 된 이는 동네 어귀 점방 딸 명자. 그 시절 귀한 과자는 그 점방에서만 구경할 수 있었다. 순자는 늘 동생을 업은 채 명자와 놀러 다녔다. 맑은 잔물결이 흐르는 강가에 밝은 달이 뜨면 자갈밭이 백사장같이 보이는 고향 풍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럴 때마다 명자는 점방에서 가져온 왕사탕을 깨물어 아이 업은 순자의 입에 넣어 주고 나머지는 제 입에 넣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순자의 아이 업은 포대기에 단단히 끼워 넣었다. 그 왕사탕 하나에 왜 그렇게 부자가 된 것 같았는지. 집에 돌아오면 깨물어 동생들 입에 한 조각씩 넣어 주는 게 맏이 순자의 기쁨이었다. ‘자 시스터스’, 웃고 있지만 누군들 좋기만 할까. 사실 근심도 한 뭉치씩 가슴에 얹혀져 있다. 평생 해외여행 한번 못 가고 성실하게 살아 변두리에 아파트 한 채 달랑 있는데 그걸 밑천 삼아 사업하겠다는 아들, 위인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제 앞가림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기약 없이 공무원시험에만 매달리는 딸, 퇴직하자마자 뇌출혈로 쓰러져 몇 년째 누워 있는 남편, 사흘이 멀다 이혼하겠다고 부모 협박하는 아들, 며느리…. 숨은 사연도 구구절절이다. 아무튼 봄이다. 사노라면 좋은 일도 궂은일도 번갈아 오기 마련이다. 지금 눈앞이 캄캄하다고 봄인 줄 모르고 사는 건 억울하다. 고난을 넘어 꽃처럼 희망을 품고서야 인생의 진정한 새봄을 만끽할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선물이다. 그녀들의 봄 여행이 행복해야 할 이유다.
  • 전북 부안 마을 지키다 도난된 돌오리상, 16년만에 제자리로

    전북 부안 마을 지키다 도난된 돌오리상, 16년만에 제자리로

    전북 부안 마을을 지킨 당산(堂山) 돌기둥 위에 놓인 돌오리상이 도난 16년 만에 돌아왔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2003년 전북 분안군 동중리에서 사라진 국가민속문화재 제19호 ‘부안 동문안 당산’ 돌오리상 1점을 회수해 5일 반환했다고 밝혔다. 당산 위에 놓여있던 돌오리상은 가로 59㎝, 세로 20㎝ 크기로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조각했다. 부안 지역 민속신앙의 대상인 ‘부안 동문안 당산’은 3m가 넘는 당산과 그 위에 부안읍의 주산인 성황산을 바라보며 놓인 돌오리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장승 한 쌍으로 구성돼 있다. 절도범은 석물 취급업자나 장물 매매업자에게 돌오리상을 팔아넘기려 했으나,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에 거래가 여의치 않자 임의의 장소에 오랫동안 숨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진 사범단속반장은 “2015년 돌오리상 도난 신고 접수를 받은 이후 지속적으로 내사를 해오던 중 최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잣고개 중간 지점에 호돌이 조형물이 있는데 그 주변에 돌오리상이 있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석상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동문안 주민들은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이 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새끼를 꼬아 만든 동아줄로 줄다리기를 마친 뒤 그 줄을 돌기둥에 감는 ‘옷입히기’ 행사를 해왔다. 마을 전체의 복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지역 공동체적 의례다. 돌오리가 사라진 이후 새로운 오리상을 새로 제작해 당산 위에 설치했지만 돌오리상이 도난된 이후인 2005년부터 동문안 마을의 당산제는 중단됐다. 한 반장은 “돌오리상이 돌아온 것을 계기로 당산제가 다시 부활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세계 최대 마애관음상, 파괴돼…“中 공산당의 종교 탄압” (영상)

    세계 최대 마애관음상, 파괴돼…“中 공산당의 종교 탄압” (영상)

    중국 공산당이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벌이고 있다고 알려진 가운데 허베이성 당국이 폭발물을 사용해 세계에서 가장 큰 마애관음보살상을 파괴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뉴욕에서 발행하는 중화권 글로벌매체 에포크타임스가 4일 공개한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온라인 중국 종교·인권잡지 한동(비터윈터)의 2일자 보도와 사진·영상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2일 중국 북부 허베이성 스자좡시 관할 핑산현에서 정부 관료들이 절벽에 새겨진 높이 57.9m의 관음보살상을 폭발물로 파괴했다.이에 대해 한동은 “‘쇄수관음’으로 알려진 이 관음상은 마애상, 즉 절벽에 새겨진 관음상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였다”고 설명했다. 파괴된 관음상은 황안사가 있는 물물수생태풍경구(沕沕水生态风景区)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곳은 4A 등급의 국립경관지구이자 허베이성 당국이 관리하는 주요 역사문화지구이기도 하다. 한동은 또 “중국 공산당은 지난해부터 불교의 상업화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중국 전역에 걸쳐 실외에 설치된 종교 조각상과 종교적 장소들에 대해 극심한 단속을 벌여왔다”며 “각처에서 유명한 실외 조각상들이 가려지거나 철거됐다”고 전했다. 이어 “경관지구에 있는 거대한 종교 조각상들에 대한 단속이 가장 심하다”고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1월 30일 쇄수관음상을 철거하기 위해 성(省), 시(市), 현(縣)의 정부 지도자들, 현지 공안 경찰들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관리들이 현장을 지휘했다. 이들은 황안사 경관지구 전체를 출입금지 지역으로 설정할 것을 지시해 사람들의 출입과 사진 촬영을 금지한 뒤 “철거를 막는 사람은 누구라도 체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철거 작업에 참여한 한 노동자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폭파 전문가들을 고용해 철거 계획을 세우게 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여러 대의 굴착기를 동원해 관음상의 기반을 제거하게 했다. 다음으로 노동자들은 관음상 뒤쪽의 산에 20m 깊이의 구멍을 뚫었다. 폭파 작업을 준비하는 데에 이틀이 걸렸다. 2월 2일,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관음상의 상반신이 산산이 조각났다. 불과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폭발이 끝나자 높이가 거의 60m에 달했던 이 관음상은 잔해만을 남긴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며칠 뒤, 관음상이 재건축되거나 누군가가 남은 잔해라도 거두는 일을 막기 위해 정부 관리들은 철거팀에게 남은 하반신도 폭파해서 관음상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지시했다.한 소식통에 따르면, 폭발물을 이용해 관음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직접 내려온 것이다. 이 소식통은 한동에 “중국 전역에 걸쳐 불상에 절을 하거나 공물을 올리는 행위가 금지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동은 “파괴는 순식간에 이뤄졌지만 쇄수관음상을 완성하는 데는 거의 5년의 시간과 1700만 위안(약 28억6000만 원) 가량의 비용이 들었고, 이후 수많은 관광객과 참배객들을 끌어 모았었다”면서 “관음상은 겨우 2년 가량 유지되다 파괴됐으며 그로 인해 경관지구에 들어오던 엄청난 수입과 지역 경제도 함께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현지 주민에 따르면, 종교 축일이나 휴일이 되면 매일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하거나 불심을 다잡곤 했다. 주민은 “보통 사람들이 부처에게 절하고 찬불하기는 해도 중국 공산당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중국 공산당이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있겠느냐?”며 “사람들이 공산당을 믿지 않으니 공산당은 불상을 계속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한동, 유튜브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큰 도약의 계기가 된 외로운 외침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큰 도약의 계기가 된 외로운 외침

    역사 속에는 평범한 관찰이 큰 도약의 계기가 되는 일이 여럿 있었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이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만들어 무질서하게 보이던 우주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지구과학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독일 기상학자 알프레트 베게너는 1912년 집필한 저서를 통해 서로 떨어진 대륙의 해안선끼리 들어맞는 점, 빙하 이동의 흔적, 같은 종의 식물화석을 포함한 지층이 다른 대륙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점 등을 들어 대륙이동설을 제기했다. ‘판게아’라는 거대한 대륙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동, 현재와 같은 대륙 분포 모양을 띠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베게너의 주장은 당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베게너는 1929년 대륙이동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려고 그린란드 탐험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대륙이동설은 1960년대 해저산맥을 기준으로 대칭적으로 나타나는 고(古)지구자기장 역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해저확장설이 나오면서 설득력을 갖게 됐다. 이후 대륙이동설과 해저확장설이 결합돼 견고하고 완전한 설명이 가능한 판구조론으로 정립됐다. 판구조론은 지구 표면이 단단한 지판들로 쪼개져 있고 지판들은 지구 표면을 따라 일정하고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이론이다. 지판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서로 충돌해 소멸되기도 한다. 판구조론 등장 이후 50여년이 흐른 현재 지구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판구조론을 통해 고체 지구의 운동과 진화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인류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혀 왔던 지진과 화산이 지판 운동과 맨틀 대류의 결과임을 이해하게 됐다. 물론 아직까지 풀지 못한 숙제들도 많다. 판의 경계부에서 지구 내부로 침강하는 지판이 같은 물질로 구성된 맨틀을 가로질러 얼마나 깊게 다다를 수 있는지, 또 전 지구적 물질 순환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지역적으로 차이 나는 맨틀 대류의 원인도 불분명하다. 인도네시아 인근 인도양 하부에서는 맨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대류 운동으로 관측되는 데 반해 일본과 접한 태평양 하부에서는 두 개의 층으로 나뉜 맨틀 대류가 이뤄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지구 내부 물질 순환이 전 지구적으로 이뤄지는지, 맨틀 상부에 국한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런 지구 내부 물질 순환과 열 순환 현상은 행성 진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베게너의 과학적 발견이 이후 지구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베게너의 용기 있는 주장과 끊임없는 자료 수집은 보다 더 큰 진보를 이루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베게너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들은 다른 연구자들의 관측으로부터 나왔음도 주목해야 한다. 과학과 지식의 진보는 한두 명의 주장이 아닌 수많은 지식의 결합을 통해 다듬어지고 견고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확립된다. 이런 면에서 학문 범주를 넘나드는 접근은 과학적 오류를 줄이고 잘못된 판단을 피하는 지름길이다. 최근 다양하게 활용되는 다학제적 연구와 토의는 그래서 반갑다. 하지만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의 외침이 다수에게 배척됐듯이 당대 대다수 믿음이 항상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단정적 판단을 피하고 당연한 일에 의심을 품는 것은 과학의 시작이다.
  • “남편 앗아간 건 메르스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회피였다”

    “남편 앗아간 건 메르스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회피였다”

    “엄마, 아빠 이야기가 왜 책에 나왔어?” “아빠가 훌륭한 사람이라서 그래.” 지난해 11월 일곱 살 아들은 납골당에 잠들어 있는 아빠 곁에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가져다 놓았다. 아들은 네 살 때 떠나간 아빠가 ‘하늘나라’라는 곳으로 갔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왜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없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김석주’.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종식’과 동시에 세상에서 지워져버린 아빠는 새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호명됐다. 김탁환 작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소설 ‘살아야겠다’(북스피어)를 통해서다. 메르스라는 병마와, 정부의 무능과 싸우다 쓰러져 간 이들을 기리는 소설에서 ‘김석주’의 이야기는 감히 헤아리기조차 힘든 무게감으로 읽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172일 동안 격리된 채 사투를 벌이다 눈을 감은 마지막 사망자. ‘메르스 80번 환자’라 불렸던 그의 진짜 이름은 ‘김병훈’(사망 당시 35세)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의 감염자와 유족들은 다른 여느 재난 피해자와는 달리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어버렸다. 구멍 난 방역체계의 피해자임에도 ‘바이러스 덩어리’라는 낙인이 찍힌 탓이다. 김씨의 아내 배윤희(40)씨는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족이다. “망망대해에 돌멩이라도 던지는 심정으로”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 응했고, 메르스 피해자와 유족을 수소문하던 김탁환 작가의 손을 잡았다. 소설이 출간된 뒤 반향이랄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죽고 없어져도 이 이야기를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제 남편은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가해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파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을 찾았을 뿐인데….” 배씨는 메르스 감염자들이 ‘전파자’로 매도당했던 기억에 가슴을 쳤다. 김씨가 폐렴 증상으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던 2015년 5월 27일. 응급실에 머무르던 사흘 동안 ‘메르스 슈퍼 전파자’라 불렸던 ‘14번 환자’도 같은 곳에 있었다. 14번 환자는 국내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서 감염됐지만, ‘2m, 1시간’이라는 지침상의 밀접접촉자 기준에 해당하지 않아 격리되지 않았다. 배씨는 14번 환자를 탓하지 않았다. “‘슈퍼 전파자’라 손가락질을 받으셨어요. 그분이 받았을 상처가 어느 정도였을지….”김씨는 6월 7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배씨는 “폐렴 증상이 계속돼 병원에 메르스 검사를 요청했지만 1주일이 지나서야 검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김씨에게는 1년 전 완치됐던 림프종까지도 다시 찾아왔다. 삼성서울병원에 1인실에서 메르스 대증(對症)치료를 받다 7월 3일 서울대병원 음압병실로 옮겨진 뒤 림프종마저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면역력이 떨어져 메르스가 악화되고, 당장 메르스부터 잡으려니 항암 치료가 미뤄지는 상황이었다. 김씨의 투병 과정은 172일이라는 ‘세계 최장 투병기간’뿐 아니라 양성과 음성을 여러 차례 오갔다는 점에서 특수한 사례였다. 질병관리본부는 10월 1일 김씨가 PCR(환자의 침이나 가래 등에서 극소량의 유전자를 검출, 증폭시켜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방법) 검사에서 ‘24시간 간격으로 2회 연속 음성’이 나와 최종 음성으로 판정돼 퇴원했다고 밝혔다. 배씨는 “8월에 이미 2회 연속 음성이 나와 격리해제가 이뤄졌어야 했지만 정부와 병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양성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질본과 서울대병원으로부터 더이상 PCR 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9일 만에 고열로 걷기 힘든 상태가 돼 삼성서울병원을 다시 찾았고, 삼성서울병원의 PCR 검사에서 다시 양성이 나와 서울대병원 음압병실에 격리됐다. 김씨가 퇴원 뒤 다시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 질본은 “감염 또는 재발이 아닌, 환자 체내에 잠복해 있던 극소량의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된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감염력은 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림프종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사실상 죽은 바이러스 조각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김씨가 10월 초 퇴원해 집에 머무르는 동안 배씨와 아들을 포함해 김씨와 접촉했던 사람들 129명 어느 누구에게서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은 모호했다. ‘24시간 간격으로 2회 연속 음성’이라는 기준을 여러 차례 충족했는 데도 정부는 김씨에 대한 격리를 해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씨가 음압병실 안에서 메르스 치료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대해 질본은 11월 16일 해명자료를 통해 “10월 초 음성 판정을 받았을 때와 동일하게 감염력은 여전히 낮다”면서도 “양성과 음성을 반복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가 환자에 대한 감염관리 철저를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질본이 근거로 든 한국·WHO 간 메르스 상황점검회의(10월 26일 개최)에서 WHO는 김씨에 대해 “감염력이 현저히 낮다(extremely low)”고 해석하며 메르스의 “전파 가능성 해소(the end of transmission)”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질본 10월 29일 보도자료). 정부 스스로 앞뒤 안 맞는 해명을 내놓은 셈이다.배씨는 “남편은 음압병실에 있다는 이유로 림프종 치료를 제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질본은 당시 “받아야 할 항암치료를 못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배씨는 “검사실로 이동해 받아야 하는 MRI와 CT 검사,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한 유전자 검사, 백혈구 수혈을 위해 주사를 꽂는 일 등을 가족들이 항의하고 언론에 제보해서야 이뤄진 적이 많았다”면서 “병원은 환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에 하나 남아 있을지 모를 감염력이라도 차단하는 게 정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배씨는 믿었다. 다만 림프종 치료가 한시라도 급했기에 언제 격리가 해제될지에 대한 확답이 절실했다. 배씨는 정부에 “남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격리 기준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병원은 “결정권은 정부에 있다”고 했고, 질본은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배씨가 계속해서 항의 메시지를 보냈던 질본의 한 관계자는 배씨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했다. 골수이식에 희망을 걸었던 김씨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됐다. 급기야 병원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제안해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배씨가 격리 해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던 11월 25일 새벽 3시 6분 김씨는 결국 눈을 감았다. 사인은 메르스가 아닌 악성 림프종이었다. 김씨는 족쇄 같았던 소변줄과 콧줄을 치렁치렁 단 채로 관에 담겼다. 차가운 비닐팩이 김씨의 몸을 이중으로 감쌌다. 관에 탕탕 못을 박는 소리가 마치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내딛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처럼 배씨의 가슴에 박혔다. 관이 음압병실을 나와 화장터로 향하는 길에 노란 줄이 쳐졌다. “몇 미터 밖으로 떨어지라”며 밀치는 통에 배씨는 남편의 관을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못했다. “이게 남편과의 이별 방식이어야 했을까요. 병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나요.” 배씨가 서울대병원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절규하던 그날 아침, 포털사이트는 “메르스 제로” “메르스 종식” 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뒤덮였다. 배씨는 보건복지부와 질본으로부터 위로의 전화나 문자메시지 한 통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공중 보건과 환자 개인 사이에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겁니다.” 감염력이 사실상 0%였고 더이상 메르스 치료를 받지도 않는 김씨를 계속 음압병실에 가둬놓았던 건 정부와 병원의 책임 회피가 아니었냐고 배씨는 되묻고 있다. 배씨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도움으로 정부와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김씨의 생명을 앗아간 게 메르스가 아닌 정부와 병원의 무능과 무책임이 아니었는지를 따져 물으려 한다. 소송은 아직 1심도 열리지 않았다. 소송의 첫 단추인 의료감정을 해줄 기관을 찾는 데서부터 난관이었다.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남편의 죽음에 애도가 아닌 안도를 한 세상과도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배씨는 말했다.정부로부터 사과를 받는 게 끝이 아니다. 배씨는 ‘감염병 환자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낼 생각이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바깥 공기 한 번 쐬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남편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남편이 음압병실에 갇혀있는 동안 그리워한 건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소음,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싶어했어요.” 김씨는 음압병실에 갇혀 있는 동안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침대 위에 누운 채 용변을 해결해야 했다. 극심한 우울증이 김씨의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동안 어느 누구도 살펴보지 않았다고 배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소변줄과 콧줄을 빼내주지 못한 게 가슴에 사무친다”는 배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환자의 인권에 대한 고민을 박사논문으로 풀어낼 계획이다. 비행기를 타고, 로켓을 타고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던 아들은 이제 떨어진 속눈썹을 후 불며 소원을 빈다. “아빠를 돌려달라고 빌었는데 이뤄지지 않아… 엄마, 다음엔 우리 같이 소원 빌자.”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이 언젠가 장편소설 한 권을 읽을 나이가 될 때까지 배씨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남편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잊혀지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계속 목소리를 낼 겁니다. 이렇게라도 사랑했던 남편을 추모하려고 합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19년의 절규 그날의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 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을 모두 해임했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내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김신혜 19년의 절규, 진실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무기수 김신혜(42·여)씨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이 오는 6일 오후 4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대법원은 재심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위법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장기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 확정은 처음이다. 재판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는지, 억울한 옥살이인지 친아버지 살해범으로 복역해 온 김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초 지난해 10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김씨 측의 관할법원 이송 신청 등으로 연기됐다. 김씨는 현재 전남 장흥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2000년 용의자로 수사를 받을 때부터 줄곧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도소 수감 후 지금까지 모든 노역을 거부하고 있다. 노역을 하면 죄를 인정하는 셈이어서 무죄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서다. 다시 법정에서 가려질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7일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 외딴 버스정류장 앞 눈발이 내리는 도로에서 김재운(당시 53·완도읍 항동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더구나 3급 지체장애인이라 다리를 심하게 절 정도로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데도 자신의 집과 7㎞ 떨어진 지점이라 일부에선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사고 현장에는 부서진 승용차 라이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시신이 도로 위에서 발견돼 처음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치고는 외상의 흔적이나 출혈이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시신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303%와 함께 수면유도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13.02㎍/ml 검출됐다. 경찰은 누군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틀 뒤인 3월 9일 오전 12시 10분쯤 용의자로 당시 23세였던 큰딸 김신혜를 전격 체포했다. 경찰은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를 성추행이라고 봤다. 사건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신혜의 이복 여동생이 아버지 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신혜가 자신도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것을 떠올리고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도 큰 이유였다. 김신혜가 아버지 명의로 8개의 상해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신혜는 아버지 보험금을 노리고 이날 새벽 1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후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은 뒤 교통사고처럼 꾸며 현장을 떠났다. 김신혜 고모부가 경찰에 진술했던 “여동생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김신혜의 자백을 들었다”고 밝힌 내용도 주요 증거로 삼았다. 김신혜가 오래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보험금을 얻을 목적으로 저지른 존속 살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2001년 대법원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1심과 2심 선고 형량인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성추행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경찰 조사 당시 김신혜는 친척 어른인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야 정상참작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했다. 연극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살던 김신혜는 사건 발생 전날인 3월 6일 오후 6시쯤 렌터카를 타고 고향 완도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던 남동생(당시 19세)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세 용의자로 지목돼 폭행, 폭언 등 자백을 강요하는 강압수사를 받았고, 고모부에게 살인을 자백한 적도 없다고 했다. 3월 8일 밤 11시 20분쯤 고모부가 자신을 불러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남동생이 감옥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허위로 자백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보험도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였다. 범행 도구인 수면유도제와 양주 등의 물증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수면제를 갈 때 사용했다고 진술한 행주와 밥그릇에서도 수면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김신혜에 따르면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놓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잡아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라고 닦달할 때도 머리와 뺨 등을 때렸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직접 탄원서를 받으며 구명운동을 했던 김신혜 할아버지 김정길(당시 86)씨는 사건 이후 친척들 도움을 멀리한 채 손수 시장을 봐 음식을 차려 먹으며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 며 통곡을 하다 2017년 가을 결국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신혜를 예쁘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술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의처증이 있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곤 해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김신혜는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정성스럽게 챙기는 등 가장 노릇을 다했다고 얘기한다.최병정(70·완도읍 정도리) 전 이장은 “숨진 김씨와는 중학교 동창으로 아이들을 잘 안다”고 되뇌었다. 이어 “예쁘기도 하지만 아주 상냥하던 신혜가 범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재판을 다시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규병(70)씨는 “마을에선 이구동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순하기만 한 아이로 안다”고 설명했다. 또 “신혜가 배우 황신혜처럼 예뻐 연예계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복동생 둘을 모두 살뜰히 챙긴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던 김신혜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통하는 게 있잖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가짜로 우는가. 그런데 날 삼촌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하소연한 게 딱 직감이 오더라. 그럴 애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지.” 김신혜는 재심 결정 이후 변호인을 바꿨다. 원래 참여했던 박준영 변호사 등 기존 변호인들은 모두 해임됐다. 지난 1월 새로 선임된 대한변호사협회 김학자(52) 인권이사는 “석방 상태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달 초 불구속 재판을 권고 사항으로 내렸다. 적절한 방어권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새 재판부에 기대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조각 비주얼”...옹성우, 날렵한 턱선 자랑하는 근황

    “조각 비주얼”...옹성우, 날렵한 턱선 자랑하는 근황

    옹성우의 근황이 공개돼 화제다. 2일 옹성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GQ 4월호 #gqkorea”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매거진 지큐 코리아 화보 촬영 중인 옹성우의 모습이 담겼다. 옹성우는 날렵한 턱선과 콧날을 자랑하며 완벽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특히 앞머리를 올렸을 때와 내렸을 때 상반된 매력을 자랑하며 팬심을 사로잡았다. 한편, 지난 1월 워너원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워너원 활동을 마무리한 옹성우는 상반기 방송 예정인 JTBC 새 월화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에 출연한다. 사진=인스타그램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3800만원짜리 이동주택

    [그 책속 이미지] 3800만원짜리 이동주택

    지붕의 둥근 선이 멋스럽다. 나무 조각을 이어 붙인 옆면에 창문 여러 개가 보인다. 바닥엔 이동용 바퀴가 달렸다. 미국, 유럽 등에서 인기를 끄는 ‘타이니 하우스’ 중 하나다. 바퀴 달린 집이라는 점에서 얼핏 레저용 카라반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은 집´이라는 명칭 그대로 레저보다는 주거에 좀더 신경 썼다. 난방, 단열, 주방과 욕실 등을 제대로 갖췄다. 작은 책상을 두어 일터로도 손색이 없다. 가격은 3만 유로(약 3800만원) 수준이다. 신간 ‘타이니 하우스’는 프랑스 회사인 ‘타이니 하우스’에서 만든 여러 작은 집을 소개한다. 집의 외형과 설계도, 인테리어를 살펴보는 재미가 제법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좀더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아파트가 절반이 넘고, 주거보다 소유를 중시하는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더 그렇다. 여러 집을 둘러보노라면 작은 집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쪼록 책을 통해 집에 관한 시각을 조금 바꿔 보는 건 어떨는지.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활약상을 되새길 전국의 역사적 장소들이 후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짙게 배인 7개 지역을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우리 근대사가 기억하는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에 귀 기울여볼 때다.① 서울 독립문… 역사박물관·경희궁 등 일제강점기 흔적 서울에는 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시대별로 서울의 변화상을 전시한다.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도 열린다. 박물관 옆 경희궁은 아픈 역사가 서린 궁궐이다. 인현왕후와 혜경궁홍씨 등이 거주했던 궁은 일제가 집중적으로 파괴한 대상이었다. 경희궁을 나서면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이 금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심재생예술을 입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린 정동길 등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3·1운동 열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행촌동 딜쿠샤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 서울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위창 오세창 넋 기린 곳 망우리공원은 뜨거운 역사를 품은 야외박물관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보비를 읽다 보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해 9월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20년 전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약 83만 2800㎡(25만여평) 규모로 문 열어 1973년까지 운영됐다. 2만 85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장해 현재 7400여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는 나무를 심었고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곳에 5.2㎞ ‘사색의 길’도 조성됐다.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묘지도 있다.③ 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 1919년 1500명의 함성 생생히 독립운동가 홍범식은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택에 들어서면 홍명희가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사랑채를 만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9일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 안채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택을 둘러봤다면 진주성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 괴산호의 절경이 아름다운 연하협구름다리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④ 충남 천안 유관순 생가와 7개 전시관 있는 독립기념관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볼 수 있는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높이 51m ‘겨레의 탑’과 동양 최대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한 7개 전시관은 다양한 문헌자료와 체험시설로 방문객을 맞는다.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리니 미리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주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캠핑 공간에는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있어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돼 옥사할 당시 전소된 가옥과 헛간을 복원했다. 가까운 곳에 그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이 있다.⑤ 전남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본섬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소안도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 함경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릴 만큼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땅이다.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객선 이름부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가면 이곳이 어떻게 항일운동 성지가 됐는지 알 수 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과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을 알게 된다. 인구 6000여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성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몽돌해변 등도 소안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다.⑥ 경북 안동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지사의 투쟁사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사를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유림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고문시설인 벽관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흥미롭다. 기념관을 나서면 독립운동 성지로 알려진 내앞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등이 있다. 안동의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임청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가까운 월영교의 밤경치도 놓치면 아깝다.⑦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은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항일 독립운동 요람이다. 의열단은 식민지배자와 민족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지배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등 모든 투쟁의 배후에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지난해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영상과 자료들로 그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일대는 밀양의 만세운동으로부터 태극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이 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난 밀양 관아지와 보물 147호 밀양 영남루도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트럼프의 자랑 ‘국경장벽’ 시제품, 알고보니 불량품

    트럼프의 자랑 ‘국경장벽’ 시제품, 알고보니 불량품

    새 장벽으로 교체 위해 8개 모두 철거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설치한 시제품들이 27일(현지시간) 철거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설치된 국경장벽의 시제품 8개가 모두 철거됐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이 장벽 시제품들은 2017년 10월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와 멕시코 티후아나를 분리하는 기존의 장벽에서 한발짝 떨어진 곳에 설치됐다. 미 관세국경보호국(CBP)은 16개월 전 공개입찰 때 시제품의 제작 조건을 내걸었다. 조건은 ▲사람들이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충분한 높이여야 하고 ▲산악용 훅(걸이) 등 전문 등산장비를 동원해도 쉽게 오를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며 ▲지하로도 6피트(약 1.8m) 정도 파고 들어가 지반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하고 ▲대형 해머나 산소용접기를 동원해도 적어도 1시간 이상 부서지지 않아야 하며 ▲미국 쪽에서 바라봤을 때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입찰 조건에 따라 제작된 시제품의 높이는 8개 모두 30피트 이상이며 가격은 각각 30만∼50만 달러(약 3억 3600만∼5억 6000만원)다. 시제품 중 4개는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고 다른 4개는 강철판으로 제작됐다. 미학적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1개는 푸른색과 흰색으로 칠한 장식을 달았고 다른 제품들은 사막과 어울리는 회색, 황갈색, 갈색으로 칠했다. 시제품들은 그러나 성능 실험 결과 중대한 결함이 발견됐다. 특히 8개 중 6개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를 크게 변경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지난주 1억 100만 달러의 장벽 설치 계약을 따낸 텍사스주 갤버스턴에 기반을 둔 건설업체 SLSCO는 태평양 해안에서부터 국경을 따라 세워진 12마일(약 19㎞) 길이의 기존 장벽을 새 장벽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용도를 다한 시제품은 해체에 들어간 것이다. AP는 “작업을 시작한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시제품 7개가 부서졌다. 대형 유압식 파쇄기가 여러번 벽을 내리치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졌고 철제 기둥도 해체됐다”며 작업 현장 모습을 전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나뭇가지 대신 플라스틱 쓰레기로 둥지 만드는 새 포착

    나뭇가지 대신 플라스틱 쓰레기로 둥지 만드는 새 포착

    플라스틱 쓰레기에 서식지를 점령당한 동물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태국에서는 쓰레기로 둥지를 만드는 새의 모습이 포착돼 또 한 번 충격을 안겼다. 찰릿(33) 이라는 이름의 현지 사진작가가 공개한 사진은 참새목 태양조과의 태양새(sunbird) 한 마리가 한 주택의 뒤뜰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입으로 모아 둥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는 둥지를 만들 때 나뭇가지나 꽃, 풀 등을 이용하지만, 사진 속 태양새는 버려지고 찢어진 비닐봉지와 휴지 조각을 대체제로 활용했다. 태양새는 찢어진 비닐봉지를 입에 물어 새로 만드는 둥지의 안쪽으로 옮겼고, 얼마 뒤 낳을 알을 위한 소중한 보금자리가 완성됐다. 이를 포착한 찰리는 “집에서 뒤뜰을 바라봤을 때, 태양새가 부지런히 둥지를 짓는 모습을 봤다. 태양새가 이틀 내내 지은 둥지를 가까이 가서 봤을 때, 둥지 안에 나뭇가지나 풀이 아닌 휴지 조각과 비닐봉지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전했다. 이어 “상당히 많은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얼기설기 섞여 둥지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둥지를 만드는데 쓴 쓰레기는 인근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것 같다”며 “우리 사회가 이런 해프닝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조각 비주얼” 원빈, 봄 분위기 물씬 나는 화보 공개

    “조각 비주얼” 원빈, 봄 분위기 물씬 나는 화보 공개

    원빈이 봄 화보로 근황을 공개했다. 골프웨어 브랜드에서 원빈과 함께한 봄 화보를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원빈은 이번 화보에서 여전한 조각미모를 드세우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화보 속 원빈은 봄 부터 초여름 골프 라운딩에 꼭 필요한 구성으로 꽉 찬 봄 셋업을 선보이며 하이브리드 룩을 완벽 제안하고 있다.또 다른 화보에서는 봄 시즌 메가 트렌드 아이템인 트렌치코트를 무심하게 걸쳐주어 감각적인 룩을 선보였다. 여기에 그윽한 눈빛까지 더해져 봄 감성을 제대로 자극하는 스타일링이 완성됐다. 원빈은 다가오는 봄 필드에서의 전문 프로골퍼 룩 혹은 도심 속 포멀한 출근룩과 주말 라이프 웨어까지 어느 스타일에도 손색없는 봄 셋업을 선보이며 명품 비주얼을 과시했다. 한편, 원빈은 ‘장 미쉘 바스키아’의 모델로 활발한 활동 중이다. 사진=장 미쉘 바스키아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벚꽃/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벚꽃/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서해 바다를 지척에 두고 한강과 임진강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 파주 영어마을 근처로 이사한 게 5년 전이다. 큰아이는 파주역 뒤편 부대에서 포병으로 군 생활을 하던 동생을 보러 가자고 했다. 멀어서 싫다고 파주땅 이사에 어깃장을 놓던 엄마를 큰아이는 그렇게 꼬드겼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다 모른 척하고 들른 마을에는 사월의 벚꽃이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눈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온갖 꽃나무가 흐드러진 앞산 옆 귀퉁이, 조각배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살림을 옮긴 건 그로부터 딱 2개월 뒤다. 유난히 싱거운 겨울을 청산하고 고개를 내민 ‘벚꽃 캘린더’가 반갑다. 지난 20일 한 기상관측 업체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 벚꽃은 3월 22일 제주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하루 뒤인 23일 부산으로, 열흘 남짓 뒤인 4월 4일에는 서울로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이다. 약 한 달 뒤면 목멱산방 주위 서울 남산 구석구석은 물론 문산으로 이어지는 자유로 변까지 눈부신 벚꽃이 뒤덮을 것이다. 국화(國花)나 다름없이 벚꽃을 사랑하는 일본에서는 이미 지난 1월 중순 개화 시기를 점쳤다. 꽃망울을 터뜨릴 때부터 만개에 이어질 때까지를 지역별, 날짜별로 꼼꼼하게 예측했다. 4월이면 열도는 ‘하나미’(花見)로 들썩인다. 일본 사람들은 전국 수천 군데의 벚꽃 명소로 쏟아져 나와 가족, 연인 등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봄이 데리고 온 손님을 맞는다. 벚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필 때보다 질 때 더 확연하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라는 유명 가수의 노래도 있지 않은가. 매 소절 말미마다 고음으로 휙휙 치닫는 선율이 마치 바람에 몸을 맡겨 하늘로 떠오르는 벚꽃잎을 연상케 하는 노래다. 그런데 해마다 이맘때면 불거지던 벚꽃의 ‘원산지 논쟁’이 올해는 잠잠할까 궁금해진다. 1908년 프랑스인 신부 타케가 제주도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한 이후 100년 넘게 한국과 일본이 다퉈 온 논쟁이다. 한국은 제주의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일본이 아니라 한라산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를 근거로 ‘제주 원산지론’을 펼쳤다. 물론 일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9월 국내 두 대학 연구진이 국립수목원과 함께 제주 왕벚나무의 인접 종과 일본 도쿄대 부속 식물원에 있는 자국 최초의 왕벚나무의 표본을 확보해 유전체(게놈)를 해독한 결과 ‘두 나무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서로 다른 식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주 왕벚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벚나무가 됐다거나 그 반대라는 주장은 유전적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 셈이다. 벚꽃의 꽃말은 ‘순결·절세미인’이지만 우리에게는 한동안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줏대없는 정치인을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벚꽃잎에 비유해 ‘사쿠라’라고 불렀다. 일본의 상징임을 염두에 두고 벚꽃을 대놓고 노래하지 못하던 것도 불과 십 년 전 안팎이다. 하지만 “제주 왕벚나무는 제주 것이고 일본의 왕벚나무는 일본 것이다. 나무에 국적이 어디 있겠느냐”는 연구진 발표처럼 올봄에는 벚꽃과 관련된 모든 논쟁을 끝낼 일이다.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말이다. cbk91065@seoul.co.kr
  • ‘한끼줍쇼’ 남규리 “카페 알바하며 YG·SM에 프로필 돌렸다”

    ‘한끼줍쇼’ 남규리 “카페 알바하며 YG·SM에 프로필 돌렸다”

    ‘한끼줍쇼’ 남규리가 과거 가수가 되기 위해 남다른 전략을 펼쳤던 일화를 공개했다. 27일 방송되는 JTBC ‘한끼줍쇼’는 서울시 동작구 상도1동 편으로 꾸며진다. 밥동무로는 ‘조각미남미녀’ 오지호와 남규리가 함께한다. 이날 방송에서 남규리는 과거 가수의 꿈을 꾸며 캐스팅되기 위해 노력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대형 연예기획사 근처 카페를 수소문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회를 노렸던 남규리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마침 대형기획사 대표들이 카페에서 회의를 하고 계셨다”며, “그 중 YG, SM도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남규리는 “관심을 끌기 위해 아르바이트 비에서 제하고 커피를 서비스를 드리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급히 메모지에 조금이라도 잘 하는 특기를 전부 적어 프로필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가고 싶었던 YG와 SM 대표님에게 직접 쪽지를 전했다”라며 가수가 되기 위한 남다른 노력을 전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편, JTBC ‘한끼줍쇼’는 27일 오후 11시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美 선교사 집 창고에서 원주민 뼛조각 2000여 개 발견

    美 선교사 집 창고에서 원주민 뼛조각 2000여 개 발견

    미 연방수사국 FBI가 한 가정집에서 수천 개의 뼛조각을 발견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현지시간으로 26일 미국 CBS 방송사는 FBI가 지난 2014년 인디애나주 시골마을에 거주하던 선교사 돈 밀러 씨의 집에서 2000여 개의 뼛조각을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201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돈 밀러 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엔지니어로 일하다 아이티에서 포교 활동을 한 선교사다. FBI는 밀러가 수십년 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법적으로 수집한 4만2000여개의 유물을 집 안에 보관해왔다고 설명했다. CBS는 보도에서 밀러가 집 전체를 박물관처럼 만들고 지역주민은 물론 보이스카우트와 언론에까지 수집품을 자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집품 중 사람의 뼈가 섞여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FBI는 수사에 착수했고, 밀러의 집에서 2000여 개의 뼛조각을 압수했다. FBI 예술범죄단장 팀 카펜터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밀러의 집을 찾았을 때 그의 수집품 규모에 압도당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개인수집품 중 규모가 가장 컸다”고 밝혔다.밀러의 집에서 압수된 유골은 대략 500여 명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FBI의 설명이다. 선교사 출신 미국인의 주거지에서 다량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사실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고고학 교수 홀리 쿠삭 멕베이는 "밀러가 수집한 유골은 노스다코타를 중심으로 거주한 아리카라 인디언 등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수천 년 전 미국 원주민의 매장지는 고고학자들에게 매혹적인 연구 대상이었다면서, 수세기에 걸쳐 도굴의 표적이 된 무덤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홀리 교수는 “이것은 미국 사회에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를 방증한다. ‘하얀 무덤’ 즉 백인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일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FBI 카펜터 단장은 “이 유골은 우리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일 수도 있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유골이 개인 수집품으로 묻혀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지금 FBI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미국 원주민 조상들의 유골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카펜터는 “이 유골은 사람의 것이다. 우리 FBI는 이들을 품위 있게 대할 것이다. 인디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미래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뒤늦게 밝혀진 돈 밀러의 수집품에는 콜림비아아와 이탈리아의 골동품은 물론 기원전 500년의 중국 보석이라고 쓰여 있는 유물 등 4만2000여 점도 포함돼 있다. 보도에 따르면 밀러 씨는 사망 전 자신의 수집품 중 일부가 불법적으로 수집됐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5000여점의 유물에 대한 압수를 받아들였다. CBS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밀러의 수집품 중 일부가 캄보디아, 캐나다, 콜롬비아,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 반환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대표단 역시 이번 주 인디애나주를 방문해 유물을 회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FBI는 앞으로 몇 달 안에 인디언 부족을 찾아 대규모 유해 송환 작업을 벌일 방침이라고 전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콩밥 먹는다고 눈물겨워 마십시오”… 의연했던 열아홉살 심훈

    “콩밥 먹는다고 눈물겨워 마십시오”… 의연했던 열아홉살 심훈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 (중략)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 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소설 ‘상록수’의 저자로 잘 알려진 소설가 심훈(1901~1936)이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때 어머니께 쓴 편지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의 일부다. 좁은 감옥에서 목사, 시골 노인, 학생 등과 함께 지낸 것으로 알려진 심훈의 고단한 옥중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투옥 당시 19살이었던 심훈이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를 위안하는 모습에서는 의젓함과 의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박열, 박헌영, 윤극영 등과 동문 수학하던 심훈은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 일제의 수탈에 대한 분노와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울부짖은 그는 3월 5일 덕수궁 앞 해명여관 앞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해 11월까지 옥살이를 한 심훈은 감옥에서 보낸 시간을 토대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한 방에서 함께 지냈던 장기렴 천도교 서울대교구장의 옥사를 모티브로 1920년 집필한 단편소설 ‘찬미가(讚美歌)에 싸인 원혼’이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에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듯 칠십을 넘긴 노구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굳은 심지를 가졌던 한 영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35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았던 심훈은 출옥 후 작품 활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꾸준히 노래했다. 1932년 출판하려고 했지만 일제의 검열에 걸려 무산된 ‘심훈시가집’에 수록된 시 ‘그날이 오면’은 그 마음이 극적으로 표출된 작품이다.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와 같은 구절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한 청년의 단단한 의지를 대변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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