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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일의 역사의 창] 자살의 여러 유형

    [이덕일의 역사의 창] 자살의 여러 유형

    ‘삼국지’의 순욱(荀彧)은 조조(曹操)의 책사가 된 후 쫓기던 후한의 헌제(獻帝)를 조조에게 모시도록 건의했다. 그 결과 후한 조정에서 조조에게 국공(國公)의 작위와 구석(九錫)의 특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었다. 국공은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고, 구석은 큰 공을 세운 제후에게 천자가 거마(車馬)·궁시(弓矢) 등 아홉 가지 물품을 내려 주는 것을 뜻한다. 순욱은 조조에게 받으면 안 된다고 말렸고 둘 사이는 멀어졌다.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할 때 순욱은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지’의 ‘순욱 열전’은 이를 ‘우울해하다 죽었다’는 뜻의 ‘우훙’(憂薨)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후한서’의 ‘순욱 열전’은 수춘에 남아 있었던 순욱에게 조조가 음식 상자를 보냈는데, 빈 그릇임을 안 순욱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전혀 달리 썼다. 순욱의 죽음은 황제를 꿈꾸는 조조와 후한 황실을 높이려는 순욱의 정치관의 충돌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자결하면 따라서 죽는 것도 인(仁)이었다.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죽자 공자 소백(小白)과 동생인 규(糾)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관중(管仲)은 소홀(召忽)과 함께 동생 규를 지지한 반면 포숙아는 공자 소백 편에 섰다. 관중은 소백을 죽이기 위해서 활까지 쐈지만 소백은 살아남아 제 환공(桓公)이 됐다. 이에 공자 규가 자결하자 소홀은 뒤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거꾸로 포숙아의 천거로 환공의 재상이 됐다. 그래서 자로와 자공이 공자에게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은 어질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관중이 환공의 재상이 돼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 …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헤아림으로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 죽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논어’ 중 ‘헌문’)라고 관중을 옹호했다. 관중이 제 환공을 도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큰 평화를 가져왔으니 혼자 자결한 것보다 훨씬 큰 인(仁)을 이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 죽는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뜻의 자경구독(自經溝瀆)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 굴원(屈原)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직간하다가 좌천된 후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를 지은 후 상강(湘江)에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 ‘이소’는 초나라 문학을 뜻하는 초사(楚辭)의 대표로서 ‘시경’(詩經) 못지않은 평가를 받는다. 굴원의 ‘이소’ 등을 부(賦)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시는 많이 썼지만 부(賦)는 드물게 썼는데, 그중 하나가 ‘염우부’(鹽雨賦)다. 정조 사후 경상도 인동(仁同)의 장시경·현경 부자 등은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제거하겠다면서 인동 관아를 습격하고 서울까지 올라가려다 저지당하자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 그 일로 장현경의 부인은 두 딸, 막내아들과 함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는데, 큰딸이 그곳에서 군졸로부터 성희롱을 당해 투신자살했다. 어머니도 투신자살하면서 따라 죽으려는 막내딸에게 “너는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고 말렸다. 그러나 막내딸의 신고를 받은 강진 현감 이건식과 관찰사 이면응 등은 뇌물을 받고 없던 일로 덮어 버렸다. 그 후 모녀가 자살한 7월 28일이 되면 매년 큰 바람과 해일이 일었고, 정약용이 ‘염우부’를 지어 이 모녀의 한을 위로했다.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자살을 큰 불효로 쳤기 때문에 자살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강진의 모녀처럼 억울한 자살은 사실상 타살로서 하늘이 대신 벌해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근래 부정과 불법에 연루된 사람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풍속도다. 북송 때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박박주’(薄薄酒)라는 시에서 “필부는 보배를 가진 탓에 죽고, 백귀는 고명한 집을 엿본다”(匹夫懷璧死 百鬼瞰高明)는 시구를 남겼다. 필부가 권력에 취해 무리하면 화를 입고, 잘나가는 집안은 백귀가 노린다는 것이다. 지금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해 자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늘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 루터는 【 】다

    루터는 【 】다

    15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날. 이른바 기독교계가 ‘종교개혁’의 시발로 규정한 날이다. 면벌부와 관련해 독일 제국교회 수석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그 반박문은 부패와 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건 종교개혁의 태동이자 요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 출판가에 관련 책들이 쏟아진다. 루터의 재조명부터 종교개혁의 허실,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까지 다양하게 짚고 있다.●‘개혁가’ 루터,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출간된 책들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단연 루터의 재조명이다. ‘종교개혁 태두’의 재발견을 통해 개혁의 배경과 성과를 되짚어 신선하다.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21세기북스), ‘루터’(제3의공간), ‘루터의 두 얼굴’(평사리)…. 이 가운데 서울대 박흥식(서양사학) 교수가 쓴 ‘미완의 개혁가…’는 루터의 진면모를 따져 새삼스럽다. 저자에 따르자면 루터는 ‘헌신적 개혁가’였지만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낳은 분열이며 농민전쟁, 반(反)유대주의 같은 한계를 풀어낸 책에서, 루터는 그동안 대세였던 ‘신격화의 대상’에서 ‘보통사람’으로 격하한다. 귀족들의 농민착취에 눈감았는가 하면 권력자에게 기대 눈앞 이득을 찾으려 애썼다는 면면의 소개가 흥미롭다. 그 재평가는 한국 개신교로 이어진다. “한국 개신교회도 루터의 유산을 분별력 있게 계승해 이웃을 위한 종교로 거듭나자.”‘르네상스기 교황제’의 권위자인 폴커 라인하르트가 쓴 ‘루터’도 루터 재해석으로 흥미롭다. 종교개혁과 관련, ‘부패한 교황 대 깨끗한 루터’라는 구도를 보기 좋게 뒤집는다. 바티칸 문서고에서 건져낸 교황청 회의록, 칙서, 외교관 보고서를 통해서다. 그 전복 중 하나는 ‘미디어 전술 천재’로서의 루터이다. 기독교 문명의 변방인 독일의 이름 없는 수도사가 어떻게 교황 레오 10세를 상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출판의 힘이었다고 한다. 루터는 논쟁마다 기록하고 인쇄 배포해 민중과 소외된 지식인, 성직자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에 반해 교황청은 인쇄물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다가 뒤늦게 ‘말의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마저도 라틴어를 고집해 민중 대부분을 홀대하는 실수를 범했다. 루터의 비판이 득세한 건 가톨릭 주변부로 소외감을 느끼던 독일지역 제후들이 뒷받침했고, 샌님 같았던 루터가 인쇄술로 강렬한 문건을 전파하는 여론전에 능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루터 지지자 등 통한 사실적 추적 이에 비해 ‘1517 종교개혁’(21세기북스)과 도서출판 길의 루터 3부작(‘종교개혁의 역사’, ‘루터의 3대 논문집’, ‘루터와 종교개혁’),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을유문화사)은 개혁 인물과 사건, 그리고 현실문제를 사실적으로 추적해 주목된다. 이 가운데 ‘1517 종교개혁’은 슈피겔지 언론인들이 엮은 책. 독일의 사학자, 교회사학자, 신학자 26명의 주장을 비교해 실었다. 루터의 열혈 지지자였던 기사 지킹엔, 종교개혁기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루카스 크라나흐, 종교개혁 운동에 기여한 여성, 뉘른베르크시와 스웨덴 등 여러 곳에서 진행된 독특한 양상의 개혁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도서출판 길의 루터 3부작도 비슷한 구성의 역작. 특히 루터의 3대 논문집은 루터가 교회에 맞서 1519년 발표한 3대 논문의 번역본으로, 루터의 초기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라틴어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판본인 ‘바이마르 비판본’을 옮긴 점이 특징이다. ●개신교 치부 가감 없는 해부도 눈길 3부작 중 독일 교회사가 토마스 카우프만이 쓴 ‘종교개혁의 역사’와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루터와 종교개혁’에선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이 돋보인다. 가톨릭 타락상을 강조하고 루터의 영웅성에 초점을 맞춘 종교개혁의 기존 접근법 비판에 더해, 비판 대상이었던 가톨릭은 역(逆)종교개혁으로 살아남은 반면 개신교는 정치화되고 분열했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을유문화사)은 한국 교회를 가장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책. 라은성 총신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교수 등이 기독교의 역사부터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까지를 꼼꼼하게 훑었다. 친일 청산 좌절, 교회의 정치권력 유착, 성장만능주의 등 우리 개신교계의 치부를 가감 없이 해부한 점이 눈에 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7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母 조마리아 여사

    ‘7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母 조마리아 여사

    30일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7월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1862~1927) 여사. 황해 해주군에서 태어난 조 여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안 의사 등 3남 1녀를 낳았다. 조 여사는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으로서 후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정부는 2008년 조 여사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국가 핵심 기능 집결… 2000년 역사 헤쳐온 ‘한국의 얼굴’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국가 핵심 기능 집결… 2000년 역사 헤쳐온 ‘한국의 얼굴’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차 탐사가 지난 17일 광화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세종대로의 동쪽과 서쪽을 오가면서 진행됐다. 답사단은 세종문화회관 돌계단을 출발해 세종대왕·충무공 동상~대한민국역사박물관~종로구청~비전~서울역사박물관~경희궁 방공호까지 두 시간의 일정을 빠듯하게 소화했다. 해설을 맡은 이기훈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차분하고 진지하게 세종문화회관의 전신 시민회관 화재사건부터 요즘 방영되는 사극 ‘칠일의 왕비’의 주인공 단경왕후 신씨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역사의 씨줄과 날줄의 세계로 30여명의 답사단을 끌어들였다.“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맞는다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최대의 걸작이다. 그중 한국인이 세운 최고의 도시는 서울이다. 서울은 의심할 여지 없는 대한민국의 종주(宗主)도시이자 의사(擬似) 이상향이다. 2000년의 생성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도이며,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메갈로폴리스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토크빌이 “파리는 프랑스 그 자체”라고 표현한 것에 빗대 한때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드슨은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는 말을 남겼다.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이후 ‘서울’이라는 도시명은 ‘코리아’라는 국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빅 브랜드가 됐다. ●정치·행정·사법·문화예술의 원조 역할 수도 서울이 한국의 얼굴이라면 서울의 얼굴은 어디인가? 한국인 열에 여덞, 아홉은 주저 없이 광화문을 꼽을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포함, 국가의 중추기능이 총집결된 수도 서울의 1번지이다. 한국인과 서울사람의 삶과 꿈이 교차하는 역사무대이다. 역사는 발-글-발의 순서로 쓰여진다. 발로 쓴 글을 본 이가 다시 발로 현장을 밟았을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 움직인다. 답사단은 광화문 구석구석을 발로 밟으면서 ‘도시 중의 도시’라고 쓰여진 광화문의 역사를 재확인했다. 광화문은 정치, 행정, 사법, 교육, 언론출판 그리고 대중문화와 예술의 ‘원조’였다. 이 나라 모든 사회담론과 문화현상의 생산지이자 소비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본거지화하면서 왜곡된 배치와 구역 조정이 이뤄졌고 현재의 광화문이 이를 이어받은 것이 현실이다. 건국 이후 왕조와 식민시대의 잔재 일소 정책 때문에 국적 불명의 현대화가 진행됐다. 최소한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기로의 회복을 시도했어야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비록 행정과 공론이라는 최소한의 핵심 기능만 남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를 존재하도록 떠받치는 광화문 뒤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백악(북악)의 위엄은 여전하다. 광화문 동쪽 전면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대사관, KT빌딩, 교보빌딩이 청진동과 수송동, 종로길로 이어지고 서쪽 전면부 정부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이 도렴동, 당주동, 내수동을 거쳐 새문안과 정동, 서대문까지 펼쳐진다. 이곳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광화문의 주인이다. 서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과 추억의 많은 부분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장으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쳤고, 촛불을 높이 들어 암흑을 밝혔는지도 모른다. ●광화문광장, 삶의 새 방향 제시할 수도 광화문이 재조명되고 있다. 부활이 회자되고 있다. 왕조시대 절대왕권의 상징이었고,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시대 체제의 선전장이었던 곳.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2.2㎞ 구간에 횡단보도가 단 하나도 없던 그 시절, 광화문은 국가독점의 공간이었다. 30년 전 6·10항쟁 때도, 15년 전 미선·효순 추모집회 때도, 9년 전 광우병 파동 때도 광화문사거리는 금역이었다. 제2의 ‘명박산성’이 등장할 수 없는 연원이 있다. ‘민의의 분출지’라는 유전자가 내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선비와 유생들의 상소 시위지였고,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재우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면서 사흘 동안 곡을 한 장소였다. 광화문의 조선 개국 당시 지층은 무려 8m 아래에 있다. 1394년 한양천도 이래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과 사고가 8m 깊이로 쌓이고 쌓여 현재의 지표를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종로의 4m보다 갑절 깊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들어섰고, 덮거나 뜯고, 또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광화문의 땅켜는 증언한다. 육조거리는 너비 50m의 보기 드문 한마당이었다. 현재의 광화문광장 자리가 조선시대의 육조거리라고 보면 된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광화문 앞 광장을 제후국의 상징인 ‘칠궤(七軌)도로’가 아니라 황제의 수레 9개가 지나갈 수 있도록 ‘구궤(九軌)도로’로 만든 일이다. 박정희 정권이 1962년 50m 너비의 세종로를 현재의 100m로 넓힌 것도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답사단은 8m 깊이의 광화문에 또 하나의 지층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심정으로 서울역사박물관 방공호 앞에서 이날의 그랜드투어를 마무리했다. 어쩌면 면모를 일신한 광화문광장이 한국인과 서울사람의 삶을 바꿀 방향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잘 만든 도시가 다시 인간을 만드는 선순환의 원리 때문이다.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서울시의회 황준환의원, 강서구 개화마을 용도지역 상향 요구

    서울시의회 황준환의원, 강서구 개화마을 용도지역 상향 요구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황준환 의원(자유한국당, 강서3)은 6월 15일 제 274회 서울시의회 정례회 시정질문에서 강서구 개화마을 용도지역을 상향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날 지역구 주민 110여명이 방청하는 가운데 황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한 시정질문에서 그린벨트 해제후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강서구 개화동 집단 취락지역에 용도지역상향 등을 허용하는 도시관리계획 가이드라인 용역시 개화동 용도지역 상향이 주민숙원사업으로 강서구 개화동 556-59일대를 제1종전용주거지역에서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반드시 상향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개화동 집단취락지역은 상사, 부석, 신대, 내촌, 새말마을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1979년 취락구조개선 사업 이후 38년이 지나 주택, 상수도, 각종 설비가 노후화 되어 있고 주택 등이 너무 노후화되어 수리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50%의 건폐율과 100%의 용적률을 적용받고 2층 이하의 층수만 허용되는 곳이다. 황 의원은 “이 지역의 주거환경은 세대간 계층간 특히 젊은 층이 더불어 살기가 어렵다”고 밝히면서 “그린벨트 해제 전에는 여러 주민편의시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한 슈퍼나 마트 조차 없는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인천공항고속도로 마을관통, 지하철 차량기지, 버스공영차고지, 가스충전소 등 주민기피시설을 수용했음에도 보상은 커녕 1종전용주거지역으로 묶여 지역발전은 고사하고 퇴락하는 마을로 전락되고 있다”고 지금의 현실을 꼬집었다. 또한 김포공항, 아라뱃길, 10차선의 육상교통, 향후 김포공항역은 5개 노선의 지하철 환승 등 다양한 교통체계가 있어 국토의 효율적 이용측면에서 용도지역 상향이 절대 필요하다고 당위성을 설명했다. 답변에 나선 박원순 시장은 현재 진행중인 도시관리계획수립 라이드라인 용역 결과가 나오는대로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답변했다. 끝으로 황의원은 “개화동 주민들은 한이 서려 있다.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각종 개발이 규제를 받아왔고, 취락구조 개선도 자기 토지 20%를 기부채납하며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말하면서 “주민들의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을 헤아려 개화동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인 4층이하, 건폐율 60%, 용적률 150%, 근린시설허용을 포함한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 상향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박원순 시장과 관계 공무원이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데스크 시각] ‘광화문 시대’에 생각해 본 ‘9궤 도로’/문소영 사회2부장

    [데스크 시각] ‘광화문 시대’에 생각해 본 ‘9궤 도로’/문소영 사회2부장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한 세종대로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산물도 아닌데 왜 이리 넓을까? 서울 광화문광장의 가로폭이 이리 넓은 이유는 조선왕조의 시조 이성계 덕분이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1394년 경복궁을 지으면서 광화문 앞의 도로를 그리 넓게 조성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최근에 펴낸 ‘조선이 가지 않은 길’ 79쪽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이성계가 경복궁을 정궁으로 지을 때 광화문 앞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도시 구조를 의식해 9궤(軌) 도로를 만들었다. 9궤 도로란 천자가 타는 9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고려 수도 개경은 황제국의 수도로 건설된 황도(皇都)였기 때문이다.” 김 소장의 이 글을 읽으면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 아니었나? 황제국이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문은 그다음 문장에서 풀린다. “태종 이방원은 그가 머문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7궤 도로를 만들었다. 이는 제후가 타는 7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태평로와 돈화문로의 도로폭의 차이는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장군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는 수도를 조성할 때 아직 ‘고려 백성’인 조선의 백성에게 조선이 고려보다 못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9궤 도로로 보이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반면 다섯째 아들로 형제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 등을 거쳐 왕에 오른 이방원은 명나라가 ‘정도전을 내놓아라’라고 하자 주저 없이 내놓을 만큼 명의 눈치를 보았다. 또 7궤 도로를 닦아 ‘제후국 조선’을 확실하게 약속했다. 그 뒤의 전개는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황제의 나라가 아닌 제후국의 길을 갔고, 병자호란 등으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청나라 이후에는 나라의 위상이 형편없어졌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황제국을 칭한 나라는 고려 외에도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다. 황제국을 칭하던 시절에는 대체로 부국강병을 했다. 사실 고려의 9궤 도로는 고구려를 본뜬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 역시 9궤 도로를 놓았다. 9궤 도로이거나 7궤 도로이거나 도로는 도로일 뿐 뭐가 그리 중하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국의 건물과 도시는 강한 상징성을 부여한다. 중국 황제들은 제후국에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과시용 황궁을 지어 제후국 사신들의 기를 죽였다. 이런 상징성은 용의 발톱을 황제를 상징할 때는 5개, 제후를 상징할 때는 3개 하는 식에도 적용된다. 조선은 제후국인 만큼 ‘황제는 하늘이 점지한 신성한 피로 귀족이나 백성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치르는 제천행사도 하지 않았다. 고구려나 부여에서 제천행사는 당연했다. 고려는 ‘친명정책’을 펴던 1385년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천자(天子)만 한다며 제천의례를 폐지했다. 그 제천행사를 500여년 뒤에 고종이 복원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황제가 돼 원구단을 조성하고 제천행사를 했다. 그러나 황제 등극이나 제천행사가 무의미한 시절이었다. 그 원구단을 1913년 일제가 철도호텔을 지어 훼손했다. 사드 배치로 한국은 G2인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며 갈등을 대충 봉합하며 피해 갈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은 하면서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갈등을 조절해 나갈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시원하게 뚫린 세종대로를 보면서 ‘9궤 도로’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좋겠다. symu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강원도 삼척의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편안하지 않다. 두 무덤이 있는 미로면은 태백산맥 동쪽 경사면에 해당한다. 삼척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타고 오르다 보면 도계읍 못미처에 두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조금만 들어가도 화전민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산길을 다시 10분쯤 달려야 한다. 3월 초라고는 해도 태백산록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그런데 활기리에 접어들면 갑자기 훈훈한 기운이 느껴진다. 산골에 이런 데가 다 있을까 싶게 햇살이 거침없이 내리쬐는 개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남도에서나 있을 법한 대밭이 태백산맥 중턱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마을 뒤편의 해발 1353m 두타산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조상이 한때 자리잡았던 까닭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태조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의 무덤이다. 활기리의 준경묘와 하사전리의 영경묘는 4㎞ 남짓 떨어져 있다. 중간쯤에 두 무덤의 공동 재실(齋室)이 있다. 제사 용구를 보관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집이다. 제구는 2015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관동팔경 특별전-삼척 죽서루’에 출품되기도 했다. 자동차 길이 나기 전에는 어느 무덤으로든 가는 게 힘겨웠을 성싶다. 규모 있게 의례를 치르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준경묘는 활기리 주차장에서 두타산 등산로를 따라 다시 1.8㎞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고갯마루까지 800m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겨울에도 땀깨나 흘릴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가파르다. 하지만 나머지 1㎞는 기분 좋은 산길이다. 준경묘 일대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밀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적송(赤松)은 경복궁 복원에도 쓰였다고 한다. 줄곧 왕실의 성지(聖地)로 입에 오르내렸던 만큼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송금령(松禁令)이 철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준경묘 들머리에 접어들면 다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심심산골에 이렇듯 넓고 평탄한 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풍수지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죽은 사람의 안식처인 음택(陰宅)으로도 명당(明堂)이요, 산 사람의 보금자리인 양택(陽宅)으로도 길지(吉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왕릉보다는 조촐하게 꾸며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 호칭인 묘(墓) 자체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는 릉(陵), 그 아래 왕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무덤인 원(園)보다 위계가 낮다.●태조 4~1대조 무덤은 릉으로 격상 반면 태조의 4~1대조는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추존됐고 그 무덤도 릉으로 격상됐다.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덕릉·지릉·의릉·정릉이 그것이다. 그들의 부인인 효공왕후 이씨·정숙왕후 최씨·경순왕후 박씨·의혜왕후 최씨의 무덤 역시 안릉·숙릉·순릉·화릉으로 높여졌다. 5대조 무덤이 릉이 되지 못한 것은 성리학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이었던 만큼 왕이라도 4대 봉사를 규정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성계 집안은 본관인 전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런데 훗날 목조로 추존된 이안사가 20세 무렵 관기(官妓)와 얽힌 문제로 지방관과 다투면서 170가구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주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던 관리가 공교롭게 강원도 안찰사로 부임하자 일행은 다시 함길도 덕원으로 옮겨간다. 이성계가 함경도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다. 삼척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것은 이양무와 이안사의 부인이 모두 삼척 이씨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일대는 삼척 이씨의 세거지(世居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준경묘와 영경묘가 이양무와 삼척 이씨의 무덤으로 공인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일가가 삼척을 오래전에 떠난 만큼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전설일 뿐이었다. 태조는 한때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무덤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두 무덤은 이후 성종 12년(1481)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고 선조 13년(1580) 강원도 감사 정철이 지형도를 그려 정비를 청하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정철은 풍수적으로 이양무의 무덤은 ‘만대(萬代) 군왕의 땅’, 삼척 이씨의 묘는 ‘천자(天子)를 낳을 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조 18년(1640) 목조 부모의 무덤으로 삼척 대신 황지가 새로 떠오른다. 풍기에 사는 박지영이라는 사람이 꿈에서 무덤을 찾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지영은 ‘백두산 정맥이 태백산에 결집한 길지로, 그 기운으로 조선의 왕업이 시작되었는데 간악한 백성이 그곳을 다시 묏자리로 써서 선조의 신령이 안식을 잃었다’고 했다. 양란(兩亂)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일시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다시 삼척설(說)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대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미수 허목(1592~1682)은 삼척부사 시절 지역 문물을 엮은 ‘척주지’(陟州志)를 펴내면서 ‘미로리’(眉老里) 대목에서 두 무덤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정리해 싣고 목조 부모의 묘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미로면(未老面)이 당시는 미로리였음을 알 수 있다. 눈썹 미(眉)자가 아닐 미(未)자로 바뀐 것은 높여야 할 사람과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전주 이씨들은 삼척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폈다. 집안의 시조 이한을 모신 조경묘(肇慶墓)를 영조 47년(1771) 전주에 건립하는 데 성공한 이들의 다음 목표는 목조 부모의 무덤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당을 세우자는 주장은 물론 활기촌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우자는 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황제에 오른 고종이 대대적 정비 삼척의 무덤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자 위상이 달라졌다. 이듬해 “삼척 무덤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상소에 고종은 “먼 조상을 추모하고 장구하게 잘 모시려는 정성은 필부에게도 있는데 황제의 가(家)이겠는가” 하고는 대책을 명한다. 이때 준경과 영경이라는 묘호가 주어졌고, 제향을 위한 건물과 사적비가 세워졌다. 활기동에는 재실과 함께 고종의 친필로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地)라 새긴 비석도 세웠다. 5대조의 무덤으로 공인한 데는 정철과 허목의 명망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결국 준경묘와 영경묘의 정비는 대한제국 선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의 5대 봉사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천자는 6대조까지, 제후는 4대조까지 제사 지낼 수 있다는 ‘예기’(禮記)의 왕제(王制)를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고종 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 지낸 것도 천자국(天子國)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고종이 황제로 스스로를 격상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준경묘와 영경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삼척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글·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시대는 바뀌었는데

    [이덕일의 역사의 창] 시대는 바뀌었는데

    인간이 평등한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부모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나이 먹으면 늙고, 늙으면 죽는다는 법칙에서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불로초를 찾았던 진(秦) 시황(始皇)이나 신선을 찾아 헤맸던 한(漢) 무제(武帝)가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간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인류의 역사란 인간들이 자연과 지배 체제의 전제에 맞서 자유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었고, 그런 자유가 모두에게 확산되는 평등의 과정이었다. 이제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는 인류 사회의 보편적 개념이 됐다. 그만큼 시대가 변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의 뿌리는 권력으로 시대를 거스를 수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휘둘렀던 데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어느 세력이 집권하든지 유신시대 식의 전체주의 시스템으로는 끌고 나갈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다 좌초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시대착오적 집단이 집권하다 보니 선비들의 용어로 말하면 군자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소인배만 득실대는 정부가 됐다. 송(宋)나라 때 학자이자 정치가인 부필(富弼·1004~1083)이 “간사한 아첨꾼이 군주의 총애를 얻으면 정사에 간여하여 기강을 문란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지금의 현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왜 제후를 만나지 않느냐”고 묻자 맹자는 임금이 찾아오면 담을 넘어 피신한 전국시대 위(魏)나라 단간목(段干木)과 문을 꼭 닫아 걸고 임금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춘추시대 노()나라 설류(泄柳)를 예로 들면서 “이런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다. 임금이 만나 보려는 정성이 절실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이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중용해야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맹자가 아첨꾼들을 비루하게 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맹자는 증자(曾子)가 “어깨를 올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한여름에 밭일하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이다”라고 말한 것과 자로(子路)가 “마음은 다르면서도 그럴듯하게 말하는 자를 보면 얼굴빛이 빨개지므로 나는 이런 자를 상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해 아첨꾼들을 비판했다(맹자, ‘등문공하편’). 그러나 세상은 군자들보다는 소인들이 득세하는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군자를 십이율려(十二律呂)의 기본 음을 내는 황종(黃鐘), 소인을 질그릇 소리가 나는 와부(瓦釜)로 비유하기도 한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시구 중에 “황종과 와부가 구분 없이 훼손당했네”(俱毁黃鐘及瓦釜)라는 구절이 있는데, 군자와 소인이 구별되지 않고 함께 망한 현실을 읊은 것이다. 초나라 군주에게 직간하다가 쫓겨난 굴원(屈原)은 ‘복거’(卜居)에서 “웅장한 소리를 내는 황종은 버려지고, 질그릇 두드리는 소리만이 요란하구나”(黃鍾毁棄 瓦釜雷鳴)라고 읊었다. 굴원은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해서 죽었는데, 그나마 굴원은 국가 생존 전략을 두고 다툰 인물이다. 당시 초나라는 제(濟)나라, 진(秦)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굴원은 지금의 산둥반도에 있던 제나라와 세로(縱)로 연합해서 진나라에 맞서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했다. 진나라 장의(張儀)는 이에 맞서 진나라와 가로(橫)로 연합하는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했는데, 초 회왕이 여기에 넘어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와 동맹을 맺는 바람에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됐다. 예를 들어 사드 탓에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 변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과거에는 미국 일변도의 정책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주역’ 곤괘 단전(彖傳)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리라는 것을 안다”(履霜堅氷至)는 구절이 있다.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얼리라고 예견하고 정책을 펼쳐 나가야 하건만 이 정권은 거꾸로 봄이 오리라고 호도해 왔으니 사회 곳곳이 파탄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들을 권좌에서 끌어낼 정도로 성숙한 국민들이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이런 시대착오적 집단들이 다시는 권력의 중추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모두가 감시의 눈을 부라려야 할 때다.
  •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도깨비·인어·마법사… ‘현실 탈출’ 상상력 자극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도깨비·인어·마법사… ‘현실 탈출’ 상상력 자극

    예부터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상한 체험 따위를 소재로 하는 전설 혹은 이와 유사한 신화는 오랫동안 전 세계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로 사용돼 왔다. 아이들은 그들이 사는 나라와 지역에서 그들의 부모, 부모의 부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이 이야기는 다시 그들의 자녀에게로 이어진다. 선녀와 용, 도깨비와 저승사자, 마법사와 인어 등 개성이 강한 캐릭터부터 이승과 저승, 환생과 윤회처럼 종교적 색채가 짙은 사상까지, 장르를 정의 내리기 어려운 성격의 ‘무언가’들이 모여 전설과 신화가 된다. 이런 전설이 ‘몹시’ 고전적이고 ‘퍽’ 진부한 이야기라고만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이미 그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전설은 날이 갈수록 더욱 매력적이고 신선한 콘텐츠로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누군가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인정받았다. ●하나의 전설 그리고 다양한 해석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모든 나라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인기 전설 중 하나는 ‘인어’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인어를 해로운 존재로 여겼다. 독일 라인강에는 노래 제목으로도 유명한 ‘로렐라이’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린 뒤 물에 빠지게 한다는 존재가 인어 캐릭터의 ‘대부’ 격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로 선원을 유혹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동양은 서양과 달리 인어를 신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어고기를 먹으면 절세의 미모는 물론이고 불로불사를 얻는다는 ‘낭간설화’가 존재하고, 일본 전설에서도 인어 고기를 불로장생하는 묘약 중 하나로 꼽는다. 고대 중국에서는 인어를 인간의 조상 중 하나인 ‘해인’(海人)으로 여겼다.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인 ‘구미호’에도 다소 다른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오래 묵은 여우가 도술을 부려 사람으로 둔갑한 뒤 사람이나 동물의 간을 빼먹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된다. 반면 중국 민간에서는 이를 호선(狐仙·수련하여 신선 또는 사람으로 변한 여우)이라 부르며 재신(財神)의 하나로 숭배했다. 일본에서는 중국 상나라 주왕의 총비였던 ‘달기’의 정체가 구미호로 밝혀진 뒤, 이 달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제후를 유혹하려다 음양사에게 살해돼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로 존재한다. ●전설 속 주인공들 영화·게임까지 파고들어 인어와 구미호처럼 비교적 익숙한 전설이 아닌, 이전에 없었던 상상력의 결실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나 게임 속 캐릭터의 상당수는 사실 전설·신화에서 탄생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전면에는 마법과 요정, 난쟁이, 용 그리고 하늘을 나는 빗자루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럽의 전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표작이 된 영화 ‘어벤져스’의 캐릭터 ‘토르’는 본래 북유럽 신화 소속이다. 그 유명한 토르의 망치 ‘묠니르’는 본래 숙적인 거인족을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민간에서는 이 망치가 나쁜 거인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준다고 여겨 일종의 부적처럼 인기를 얻었다. 인도 영화계에서도 전설은 소위 ‘잘 먹히는’ 콘텐츠로 꼽힌다. 영화 ‘옴 샨티 옴’(2007)은 전생에 무명배우였던 주인공 ‘옴’이 환생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뮤지컬 영화로, 전생과 환생 등의 소재를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개봉 당시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호평을 받아 약 4500만 달러(약 542억원)의 극장 수입을 올렸다. 게임업계는 전설 또는 신화와 더욱 친밀한 관계에 있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 속 동물 ‘가루다’(인간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 날개, 다리 발톱을 가졌다)와 ‘사라스바티’(4개의 팔을 가졌으며, 한 쌍의 팔에는 염주와 성전, 다른 한 쌍의 팔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여신)는 다양한 온라인 게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됐다. 일본 닌텐도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고’에는 일본 민담 속 요괴가, 중국판 포켓몬고인 ‘산해경 고’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에 등장하는 기괴한 모습의 요괴가 등장하기도 한다. ●잠시 다른 세상 꿈꾸는 시간·여유 제공 서양에 ´해리포터´와 ´토르´가 있다면, 한국에는 ´도깨비´가 있다. 금과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와 기억을 잃은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한 판타지 드라마는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부와 인기를 안겨준 도깨비 방망이가 됐다. 탄탄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미 덕도 있겠지만,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한국의 도깨비와 북유럽의 토르, 포켓몬고의 요괴 그리고 빗자루 탄 마법사가 사랑받는 이유는 메마르고 각박한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판에 박히고 일반화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전설과 신화는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한다.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는 창의력과 창조력을 높이는 데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껏 없던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상상력과 창의력, 창조력을 중시하는 현대사회가 전설과 신화에 관심을 쏟는 이유다. huimin0217@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도깨비부터 인어까지…세계는 왜 전설에 빠졌나

    [송혜민의 월드why] 도깨비부터 인어까지…세계는 왜 전설에 빠졌나

    예부터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상한 체험 따위를 소재로 하는 전설 혹은 이와 유사한 신화는 오랫동안 전 세계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로 사용돼 왔다. 아이들은 그들이 사는 나라와 지역에서 그들의 부모, 부모의 부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이 이야기는 다시 그들의 자녀에게로 이어진다. 선녀와 용, 도깨비와 저승사자, 마법사와 인어 등 개성이 강한 캐릭터부터 이승과 저승, 환생과 윤회처럼 종교적 색채가 짙은 사상까지, 장르를 정의내리기 어려운 성격의 ‘무언가’들이 모여 전설과 신화가 된다. 이런 전설이 ‘몹시’ 고전적이고 ‘퍽’ 진부한 이야기라고만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이미 그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전설은 날이 갈수록 더욱 매력적이고 신선한 콘텐츠로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누군가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인정받았다. ◆하나의 전설, 다양한 해석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모든 나라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인기 전설 중 하나는 ‘인어’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인어를 해로운 존재로 여겼다. 독일 라인강에는 노래 제목으로도 유명한 ‘로렐라이’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린 뒤 물에 빠지게 한다는 여성 혹은 마녀가 인어 캐릭터의 ‘대부’ 격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로 선원을 유혹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동양은 서양과 달리 인어를 신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어고기를 먹으면 절세의 미모는 물론이고 불로불사를 얻는다는 ‘낭간설화’가 존재하고, 일본 전설에서도 인어 고기를 불로장생하는 묘약 중 하나로 꼽는다. 고대 중국에서는 인어를 인간의 조상 중 하나인 ‘해인’(海人)으로 여겼다.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인 ‘구미호’에도 다소 다른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오래 묵은 여우가 도술을 부려 사람으로 둔갑한 뒤 사람이나 동물의 간을 빼먹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된다. 반면 중국 민간에서는 이를 호선(狐仙·수련하여 신선 또는 사람으로 변한 여우)이라 부르며 재신(財神)의 하나로 숭배했다. 일본에서는 중국 상나라 주왕의 총비였던 ‘달기’의 정체가 구미호로 밝혀진 뒤, 이 달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제후를 유혹하려다가 음양사에게 살해돼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로 존재한다. ◆영화부터 게임까지 섭렵한 전설과 신화 속 주인공들 인어와 구미호처럼 비교적 익숙한 전설이 아닌, 이전에 없었던 상상력의 결실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나 게임 속 캐릭터의 상당수는 사실 전설·신화에서 탄생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전면에는 마법과 요정, 난장이, 용 그리고 하늘을 나는 빗자루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럽의 전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표작이 된 영화 ‘어벤져스’의 캐릭터 ‘토르’는 본래 북유럽 신화 소속이다. 그 유명한 토르의 망치 ‘묠니르’는 본래 숙적인 거인족을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민간에서는 이 망치가 나쁜 거인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준다고 여겨 일종의 부적처럼 인기를 얻었다. 인도 영화계에서도 전설은 소위 ‘잘 먹히는’ 콘텐츠로 꼽힌다. 영화 ‘옴 샨티 옴’(2007)은 전생에 무명배우였던 주인공 ‘옴’이 환생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뮤지컬 영화로, 전생과 환생 등의 소재를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개봉 당시 인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호평을 받아 약 4500만 달러의 극장 수입을 올렸다. 게임업계는 전설 또는 신화와 더욱 친밀한 관계에 있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 속 동물 ‘가루다’(인간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 날개, 다리 발톱을 가졌다)와 ‘사라스바티’(4개의 팔을 가졌으며, 한 쌍의 팔에는 염주와 성전, 다른 한 쌍의 팔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여신)는 다양한 온라인 게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됐다. 일본 닌텐도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에는 일본 민담 속 요괴가, 중국판 포켓몬 고인 ‘산해경 고’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에 등장하는 기괴한 모습의 요괴가 등장하기도 한다. ◆‘도깨비’부터 ‘인어’까지…전설과 신화에 빠진 이유 서양에 '해리포터'와 '토르'가 있다면, 한국에는 '도깨비'가 있다. 금과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와 기억을 잃은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한 판타지 드라마는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부와 인기를 안겨준 도깨비 방망이가 됐다. 탄탄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미 덕도 있겠지만,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한국의 도깨비와 북유럽의 토르, 포켓몬 고의 요괴 그리고 빗자루 탄 마법사가 사랑받는 이유는 메마르고 각박한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판에 박히고 일반화 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전설과 신화는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한다.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는 창의력과 창조력을 높이는데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껏 없던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상상력과 창의력, 창조력을 중시하는 현대사회가 전설과 신화에 관심을 쏟는 이유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GS칼텍스, 美본토 생산 원유 100만 배럴 수입

    GS칼텍스, 美본토 생산 원유 100만 배럴 수입

    GS칼텍스가 원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미국 셰일오일을 수입한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원유 금수 조치가 해제된 이후 국내 정유사가 미국 본토에서 채굴된 원유를 직접 들여오는 것은 처음이다. GS칼텍스는 미국산 이글퍼드 원유 100만 배럴을 실은 초대형 유조선 이즈키호가 전날 여수 제2원유 부두에 접안해 하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다음달에도 100만 배럴을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GS칼텍스 측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 약세, 글로벌 원유 수송운임 하락, 멕시코산 원유와 함께 운송함에 따른 부대비용 절감 등으로 경제성이 확보돼 미국산 원유를 도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도입한 이글퍼드 원유는 미국 텍사스주 이글퍼드 지역에서 생산되는 셰일오일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저유황 경질원유(API 45~56)로 분류된다. 관계자는 “이번 미국산 원유 도입은 미국산 원유가 아시아 국가로 수출되는 역외거래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실제로 GS칼텍스가 미국산 원유를 구매한 이후 중국 등 정유사들도 미국산 원유 구매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서울시의회 남창진의원 “정비구역 해제후 대안사업 이행 27%에 그쳐”

    서울시의회 남창진의원 “정비구역 해제후 대안사업 이행 27%에 그쳐”

    정비(예정)구역 해제 이후 대안사업 및 예산 집행에 있어 서울시의 정책적 변화를 촉진하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의회 남창진 의원(송파2, 새누리당)은 11일(금) 열린 제271회 정례회 도시재생본부 행정사무감사에서, “2012년 이후 정비(예정)구역 해제는 304개소에 이르지만 대안사업 진행은 26.9%에 그치는 등 서울시의 사후대책 마련은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대표적 대안사업인 주거환경정비사업의 경우, 공동이용시설 조성에만 집중된 나머지, 도로, 주차장, 공원 등의 기반시설 확충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곳이 많다”고 비판하고, “주택개량 융자 사업처럼 매년 예산 집행율이 저조한 사업들에 대한 예산배정 재검토를 통해 정비(예정)구역 해제에 따른 사후관리대책에 집중하는 변화를 고려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주택개량 관련 융자사업의 경우, 올해 43억에 달하는 예산 중 집행완료가 예상되는 예산은 32억원으로 25%에 달하는 집행잔액이 발생할 전망인데, 최근 3년간 이러한 집행잔액 발생이 계속되고 있어 예산 재조정이 필요한 실정이다. 남 의원은 “대안사업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만큼 불필요한 집행잔액을 줄여 정비(예정)구역의 지속적 환경개선을 위해 예산계획을 수립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서울시의 정책마련을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주의 어린이 책] ‘손톱 먹은 쥐’로 전하는 어른을 향한 일침

    [이주의 어린이 책] ‘손톱 먹은 쥐’로 전하는 어른을 향한 일침

    제후의 선택/김태호 지음/노인경 그림/문학동네/172쪽/1만 1500원 ‘제후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집에서는 이혼을 앞둔 부모를 피해 다니고 집 밖에서는 고양이들의 공세를 피해야 한다. 고양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아이의 가방에 박아 넣고 얼굴을 할퀴기 일쑤다. 왜 고양이들은 제후만 보면 달려드는 걸까. 엄마가 두 명의 제후를 발견한 순간 이유는 드러난다. 고양이가 할퀴자 몸은 사라지고 빈 옷에서 뛰쳐나오는 흰 쥐 한 마리. 엄마는 주저앉으며 묻는다. “우리 제후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쯤에서 익숙한 민담 하나가 불쑥 비어져 나온다.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되어 아들 행세를 한다는 ‘손톱 먹은 쥐’. 이혼을 앞두고 부모는 “같이 살자”는 말 대신 “네 결정”이라며 아이에게 생의 무게를 모두 지운다. 제후는 이들에게 손톱 먹인 쥐들로 복제한 ‘가짜 제후’들을 안기고 어둠 속으로 자유롭게 뛰어간다. 붉게 멍울져 부어오른 손톱을 감춘 채. 이제 절박함에 놓인 것은 제후가 아니라 엄마, 아빠다. 동화는 아이들을 겨냥하지만, 어른들이 더 뜨끔하고 서늘할 느낌표와 결 다른 서사를 품고 있다. 관성에 빠진 소재나 주제로 쉽게 유치해지거나 교훈을 설파하다 지루해져 버리는 동화들과 다른 차원에 서 있는 이야기는 가장 나약한 존재들에게 따스한 숨을 불어넣는다. 제17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책은 표제작 ‘제후의 선택’을 포함해 아홉 편이 함께 묶였다. 심사위원들은 “인식적 충격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 삶의 한 조각을 통해 총체적인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진실을 숙고하게 하는 힘에 있어서는 그간 응모된 단편들 가운데 최고”라고 평했다. 초등 고학년.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영조는 삼국지 애독자 정조는 잡서로 등한시

    영조는 삼국지 애독자 정조는 잡서로 등한시

    조선의 임금들은 당대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서진의 진수가 지은 정사인 ‘삼국지’가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세워 기술한 것에 비해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는 한(漢) 왕실의 후예인 유비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세워 그의 의형제 관우와 장비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조선 전기에 수입돼 임진왜란 이후 큰 인기를 누려 임금부터 일반 부녀자까지 애독자였다. 11일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낸 계간 ‘고전사계’에 따르면 조선 문헌에서 삼국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선조실록 2년(1569) 6월 20일 기사다. 당시 18세였던 선조가 신하들을 인견할 때 삼국지연의에 있는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는 말을 우연찮게 했다. 그러자 대유학자인 기대승이 선조에게 “삼국지는 전등신화나 태평광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잘못 인도하는 책이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조는 기대승의 간언에 묵묵부답이었다. 조선 왕 중에서 삼국지 애독자는 영조였다. 영조는 삼국지와 서유기, 수호지 등 중국의 3대 기서를 즐겨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삼국지를 가장 많이 읽었다. 승정원일기의 영조 12년 6월 23일 기사를 보면 영조는 조조를 강하게 비난한다. 경희궁 홍정당에서 있었던 영조와 신하들의 대화. 영조가 “조조의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 것에 있었다”고 말한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금 세상의 삼척동자도 모두 조조를 쏘아 죽이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삼국지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라고 아뢴다. 조선에서 조조는 시대의 영웅이 아니라 한나라를 찬탈한 간신이자 역적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훈계할 때도 삼국지를 언급하며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안다고 말한다. 영조와 달리 정조는 삼국지를 잡서로 여겨 좋아하지 않았다. 정조 스스로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정통 고문(古文)체를 중시하고 패관소품(稗官小品)체를 싫어한 그는 “한가할 때에 내가 읽는 책은 성인과 현인들의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승정원일기 정조 23년 5월 5일). 정조는 삼국지를 사람의 마음을 흐리는 잡서의 하나로 봤다. 조선 후기에는 신하가 왕에게 삼국지를 읽어 보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3월 25일 기사를 보면 경연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고종에게 김홍집의 부친이었던 김영작은 삼국지를 읽으라고 권한다. 이처럼 조선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삼국지는 임금마다 시대마다 큰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책이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1975년 무력통일 승인받으려던 김일성… 마오에 사전차단”

    “1975년 무력통일 승인받으려던 김일성… 마오에 사전차단”

    “북한과 중국 관계는 1992년 한·중 국교관계 수립 시기를 지나 이제 특수성은 사라졌다는 게 객관적 사실이지만 중국이 과거의 사고방식을 갖고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역사학자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는 1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특수 관계는 이제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합치하지 않지만 북한은 이런 이전 관계를 요구하고 있고, 중국은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불만 속에서도 혈맹이란 말로 얼버무리면서 신화화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혈맹’을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강한 불신을 느꼈다”면서 “(적대적) 대외환경 속에서 북·중 모순을 대외적으로 숨기면서, 양자는 강온을 오가는 밀고 당기기의 관계를 반복했다”고 지적했다. 선 교수는 오는 5일 일본에서 출간되는 저서 ‘최후의 천조(天朝), 마오쩌둥·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이와나미서점)에 이 같은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은 중국과 소련의 문서 및 증언 등 미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고 저자가 밝혔다. 천조는 제후들을 거느리는 천자가 다스리는 조정이라는 뜻이다. 선 교수는 마오쩌둥이 1975년 4월 18일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마지막 회담을 했을 당시 김일성에게 “나는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남한에 대한 무력공격을 허가받으려는 김일성의 ‘의중’을 미리 파악한 선수 치기였다고 해석했다. 이 마지막 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핵 개발을 진척시키는 등 독자노선을 걸은 것으로 선 교수는 풀이했다. 그는 마오와 김일성 두 지도자의 갈등을 사례로 들었다. 마오가 1956년 중국을 찾은 북한 고위 관료를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의 친중국적인 북한 연안파 숙청을 거론하며 “당신들 당 내부에 공포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언급했고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을 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 1956년 11월 30일 마오는 중국주재 소련대사에게 “김일성은 ‘너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너지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김일성은 성공할지 모른다”고 경계했다고 말했다. 너지는 1956년 헝가리 반(反)소혁명의 주역으로, 소련에 처형된 너지 임레 전 총리를 말한다. 뒤에 소련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김일성은 “중국의 지도자는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는 것과 뒤에서 하는 게 너무 다르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선 교수는 “마오의 대북 자세는 양보와 인내였으며 그는 ‘북한은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 했다”면서 “그런 태도는 중앙 왕조가 주변 종속국을 대하는 자세와 같은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열린세상] 광해군의 길, 인조의 길/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열린세상] 광해군의 길, 인조의 길/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인들이 시조 추모왕을 천제지자(天帝之子),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국을 천하의 중심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격렬하게 충돌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백제 역시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지석에 자국 임금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으로 표현했다. 이런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비단 이들 두 나라가 갖고 있던 광활한 대륙과 일본 열도라는 영토의 상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이 천하의 중심, 즉 주인이란 역사관까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이후 들어선 여러 나라, 특히 조선은 북벌을 준비하던 정도전을 제거한 이후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다. 내용상으로는 왕위 계승권이나 인사권, 군사권, 외교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독립국이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중국의 조공 체제에 들어가는 제후국이 된 것이다. 이는 중원의 통일제국과 직접 충돌을 막고 국체를 보존하려는 외교정책의 산물이었다. 중국과 조공 체제를 맺음으로써 밖으로는 국체를 보존하고 안으로는 왕권의 안정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문제는 중원의 주인이 교체되는 격변기였다. 북방 기마민족이 흥기할 경우 기존 제국과 신흥 강국 사이에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후금(청)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란 때의 동맹국 명(明)과 신흥 제국 청(淸)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했을까. 광해군이 선택한 것은 등거리 외교였다. 명나라가 이기면 기존 외교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청나라가 이기면 새로 형성되는 청나라 중심의 조공 체제에 들어가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 11년(1619) 명나라가 조선군 파병을 요구했다. 야당인 서인들은 물론 여당인 북인들까지 파병에 동의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광해군은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고 기각(?角·협격)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라고 주장했다. 군사를 압록강까지만 보내 파견하는 시늉을 하는 한편 혹시 모를 후금의 남하에도 대비하겠다는 양수겸장(兩手兼將)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이 여야 모두에 의해 거부되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강홍립은 무과(武科)가 아니라 문과(文科) 출신이었다. 게다가 어전통사(御前通事)를 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다. 광해군은 파병을 외교의 연장으로 보았던 것이다. 강홍립은 청나라 임금에게 조선의 현실을 설명했고, 청도 조선이 처한 현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상국 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지은 서인들이 인조반정이란 이름의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서인 쿠데타 정권은 광해군의 현실 위주 외교정책을 숭명반청(崇明反淸)이란 이념 문제로 변질시켰다. 광해군은 청나라에 쫓겨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1567~1629)을 해도(海島)에 거처하게 해서 청나라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반면 인조는 즉위 직후 모문룡의 차관 응시태(應時泰)를 명정전(明政殿)에서 접견하고 군마와 식량을 대주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조 5년(1627·정묘년) 청나라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데는 인조 정권이 모문룡을 후원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됐다. 이후에도 조선은 친명 일변도의 숭명반청이란 이념적 외교정책을 고수하다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정묘·병자호란은 외교 문제를 이념으로 변질시킨 서인 정권이 자초한 전란이자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불필요한 비극이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도 비슷하다. 미국이 명나라라면 중국은 청에 비유할 수도 있다. 미국이 명처럼 몰락하지는 않겠지만 과거 같은 팍스아메리카 체제는 더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조 정권이 외교 문제를 이념 문제로 변질시키는 바람에 발생했던 비극을 재연해서는 안 된다. 광해군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의 길을 걸을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국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1400년 전 한성백제 행렬의 주인공이 되세요

    1400년 전 한성백제 행렬의 주인공이 되세요

    ‘한성백제문화제에 참여하러 오세요.’ 서울 송파구가 오는 10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간 열리는 ‘2016 한성백제문화제’에 함께할 참가자를 모집한다. 송파구 거주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가 분야는 한성백제역사문화 거리행렬, 한성백제 체험마을 자원봉사, 청소년 예능 동아리 공연 및 프린지 공연 등이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한성백제문화제는 서울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역사문화 축제로 송파구는 물론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초창기 송파구 안 작은 행사로 열렸던 이 문화제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유망축제’로 선정되는 등 국내외 관광객들이 주목하는 역사문화 축제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게 송파구 측의 설명이다. 거리행렬 참가자는 백제 의상을 착용하고 분장을 한 뒤 맡은 배역에 따라 퍼레이드에 참여한다. 병사, 상인, 귀족 의복을 입고 14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성백제 체험마을에선 대장간, 주막, 싸전 등 장터 거리를 비롯해 점집, 약방, 백제병영에서 백제인 일상 체험을 하거나 관광객을 돕는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 특히 한성백제 전국창작동요제, 전국 청소년 예능 동아리 공연, 프린지 공연은 전국적으로 참가자를 모집해 공연의 질과 관객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유일하게 참가 자격을 제한하는 ‘한성백제후손’ 분야는 부여 서씨, 의령 여씨, 연씨, 진씨, 국씨가 지원할 수 있다. 백제 의상을 입고 혼불 채화식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 문의는 송파구 문화체육과(02-2147-2831).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씨줄날줄] 육조거리 복원/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육조거리 복원/서동철 논설위원

    1392년 개경에서 새로운 왕조 조선의 문을 연 태조 이성계는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한다. 곧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수도의 도시계획에 들어간다. 경복궁과 종묘를 건설하는 공사는 해를 넘기지 않고 착공했고, 이듬해에는 벌써 기본적인 골격이 완성된 듯하다. 1398년 태조는 새로운 도성의 여덟 개 아름다운 경치’(新都八景·신도팔경)를 담은 병풍을 대신들에게 나눠 주는데, 정도전은 시를 지어 화답한다. 그런데 ‘신도팔경’의 하나인 ‘열서성공’(列署星拱)은 곧 ‘첩첩이 들어선 관아 건물들을 별들이 호위하고 있다’는 뜻이니 이때는 육조거리도 이미 완성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육조거리란 경복궁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관청거리를 뜻한다. 광화문에서 광화문 사거리에 이르는 광화문광장과 그 양쪽 거리가 육조거리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육조(六曹), 즉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가 모두 이곳에 들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의 배치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신하들이 하례하는 자리인 품계석의 배치와 흡사했다. 근정전의 국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문관(文官), 오른쪽에는 무관(武官)이 섰다. 육조거리도 광화문에서 볼 때 왼쪽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를 필두로 예조·이조·호조와 한성부가, 오른쪽에는 국방을 총괄하는 삼군부와 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들어섰다. 예조는 오늘날의 세종문화회관 쪽에 있었지만 대원군이 삼군부를 부활시키면서 길 건너로 옮겨 갔다. 육조거리는 한양도성에서도 가장 넓은 길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내세운 나라인 만큼 중국의 ‘주례’(周禮)를 각종 제도의 근간으로 삼았다. 천자의 궁궐에 이르는 큰 길은 9궤, 제후의 궁궐에 이르는 큰 길은 7궤다. 궤(軌)는 수레 한 대의 폭으로 8자에 해당한다. 예종 원년(1469) 반포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은 제후국의 기준에 따라 육조거리의 폭을 56자, 즉 17.48m로 규정했다. 당시 건축에 쓰던 영조척(營造尺)은 한 자가 31.24㎝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육조거리의 실제 폭은 무려 58m에 이르렀다. ‘황제의 길’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서울시가 엊그제 육조거리를 복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육조거리 터에는 지금 정부중앙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같은 역사적 의미도 상당한 대형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육조거리를 100% 복원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했으니 현실 감각은 분명하다. 그럴수록 경복궁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육조거리가 오늘날 그야말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은 문제다. 서울시는 복원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옛 관청가(街)의 분위기라도 되살려 내면 성공일 것이다. 서울시의 실력에 기대를 걸어 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 @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살맛 나는 노후 누리세요… 어르신에 희망 건네는 ‘행복 도시’

    [자치단체장 25시] 살맛 나는 노후 누리세요… 어르신에 희망 건네는 ‘행복 도시’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난 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이 정치인이 된 것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재야 정치인들이 제5공화국 정권에 대항하고자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활동한 그는 29세에 강북구에 터를 잡았고, 2010년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강북구를 역사문화도시로 키웠다. 구는 현재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65세 이상 노령인구 비율이 15.7%로 가장 높다. 2033년에는 구의 노령인구 비율이 30.2%로 늘어난다고 서울시는 전망한다. 늙어가는 서울에서 가장 빨리 늙는, 서울의 목 주름과 같은 강북구를 ‘어르신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 박 구청장의 목표다. ●서울 자치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 가장 높아 지난달 15일 끝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박 구청장은 관심 있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 그의 아들이 중학교 학업을 1년 중단하고 프로 입단을 꿈꾸었던 탓이다. 프로기사를 목표로 매일 허장회 바둑도장에 가서 하루 12시간씩 바둑만 두던 아들은 어느 순간 스타크래프트란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 스타크래프트는 구글이 바둑에 이어 알파고가 인간과 대결할 종목으로 꼽은 인기 게임이다.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가출한 아들을 찾으러 동네와 이웃동네 PC방을 샅샅이 훑었던 그는 아버지로서도 답답한 세월을 겪었다. 사회민주화 운동가로 아스팔트를 뛰어다니는 중이라 애가 더 탔었다. 게임 실력 또한 바둑 못지않게 대단해서 그의 아들이 가출했을 때 강원도의 한 여대생이 ‘아드님이 대신 키워 주던 스타크래프트 아이템이 죽게 생겼다’며 찾아 나설 정도였다. 장래희망을 프로 바둑기사에서 프로게이머로 바꿨던 아들은 그러나 ‘프로게이머는 수명이 너무 짧다’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진학 공부를 시작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공부에 몰두한 아들은 서울대에 합격해 현재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박 구청장은 “바둑에는 복기가 있지 않은가. 경기가 끝나고서 바둑돌을 하나씩 다시 두며 복기를 하면 바둑판이 머릿속에 그대로 들어온다. 바둑을 두면 선생님의 칠판 글씨나 책 내용이 바둑판을 한 방에 기억하듯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는다”며 아들의 명문대 입학 비결을 설명했다. 프로 바둑기사와 프로게이머를 꿈꾸며 방황하다가 학업으로 방향을 튼 아들의 방황을 지켜본 박 구청장이 만든 것이 바로 ‘꿈나무키움장학재단’이다. 꿈나무키움장학재단은 음악, 미술, 공부, 무용 등 어떤 재능이든 꽃을 피울 때까지 지원한다. 꿈나무 장학생은 2013년 처음 선발해 올해 4기를 뽑았다. 1년간 300만원 내에서 학원수강료, 대회참가비, 물품 구입비 등을 지원하며 재심사를 받으면 계속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장학생들은 재능 분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합격해 강북의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로 컸다. ●‘중2병’ 사춘기 위해 엄홍길 산악대장과 등산 강북구만의 또 다른 교육사업으로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청소년 희망원정대’가 있다. ‘중2병’으로 불리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중학교 2학년 학생 60명과 함께 엄 대장이 한 달에 한 번씩 일 년간 산을 탄다. 여름과 겨울에는 캠프에 참여하고, 캠프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은 엄 대장과 히말라야에도 함께 간다. 박 구청장은 엄홍길 휴먼재단과 함께 지난 3월 초 세 번째로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그에게 엄 대장은 ‘정말 고마운 분’이다. 한 학부모로부터 우연히 엄 대장이 강북구민이란 이야기를 들은 그는 삼고초려 끝에 엄 대장을 강북구 홍보대사로 임명할 수 있었다. 서울시 25개 구의 구청장 가운데 최고의 ‘술 대장’으로 알려진 박 구청장은 소주잔을 밤새도록 기울인 끝에 엄 대장을 설득했다. 엄 대장은 이번 4월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박 구청장 얼굴이 아른거려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다. 이번 히말라야 등반길에 4000m 고지까지 오른 박 구청장은 의료봉사와 휴먼재단의 학교 건립에도 참여했다. 네팔의 포카라시와 강북구는 결연을 맺은 자매도시이기도 하다. “네팔에서는 한 번도 병원에 못 가 보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거기서 대자연의 웅대함을 맛보고 네팔의 교육 환경과 삶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자연스레 깨우치게 되지요.”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거름이 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군대에 있었다. 박 구청장의 많은 친구가 전남도청으로 달려가 시청을 계엄군으로부터 사수하려다가 사망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덕분에 매일 시국 토론을 하던 그의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넘어서 발전하려면 민주화가 필연적이란 생각에 그는 서울로 왔다. 최루탄 냄새가 매캐한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민추협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언제나 담당 경찰이 한 명씩 붙어 다녔다. 1987년 평화민주당 당직자로 정치에 입문한 그의 가장 큰 정치 스승은 다산 정약용이다. 국내 최고의 다산 연구로 인정받는 박석무 전 국회의원과 함께 학원비리 해결에 앞장서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의 사상에 젖어들었다. 올해는 다산 180주기다. 그는 구청장이 되자마자 강북구에 ‘다산 아카데미’를 만들어 매년 100여명의 시민들에게 다산 정신을 심고 있다. ‘다산 아카데미’는 벌써 6년째 운영 중으로 올해 11기 교육생을 배출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주민교육 프로그램이란 자부심이 대단하다. 다산이 공직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공렴(공정+청렴)이었다. 박 구청장은 지난 3월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최초로 시민도 익명으로 공직자 비리를 신고할 수 있는 ‘레드 휘슬’ 시스템을 도입했다. “공무원으로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데 둔감할 수 있어요. 깨끗한 공직사회에서 국민은 희망을 찾게 됩니다.” ●구 계약업체 대표와 직접 통화하는 ‘옴부즈맨’ 박 구청장은 구와 계약을 맺은 업체 대표와 직접 통화해서 계약 관계를 확인하는 ‘구청장 옴부즈맨’으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공무원들이 친절했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행정서비스는 잘 받았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등을 구청장이 나서서 전화통화로 일일이 조사한다. 구청의 일을 맡아 주어 감사하다는 표시를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선점을 찾아낼 생각이다. 대화 내용 말고도 목소리를 통해 느끼는 감도 중요하기 때문에 꼭 전화통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북한산 덕분에 강북구가 노인들의 천국이에요. 어르신들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고, 희망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 강북구입니다.” 쓰레기 분리 배출을 강조하는 청결강북운동에 앞장서서 봉사하는 이들도 노인들이다. 강북구 노인지회는 두부공장을 차려서 ‘어르신 두부’를 판매한다. 박 구청장은 전날 고주망태가 되어도 다음날 새벽에는 북한산 자락을 타면서 주민들과 인사한다. 구청장이 이동식 민원창구다. 인근의 도봉구와 성북구도 북한산과 이어지다 보니 도봉구청장과 성북구청장은 그의 덕을 자주 본다. ‘구청장입니다’라고 등산 인사를 건네면 도봉구나 성북구 주민들도 ‘우리(도봉·성북) 구청장이 정말 부지런하구나’라고 오해를 한다. 역사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다. 근현대사기념관 설립과 4·19혁명 국민문화제 개최로 이어졌다. 지난 3월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워크숍을 가진 구청장협의회에서 박 구청장은 ‘환구단 복원운동’을 제안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환구단은 제후가 아닌 황제만의 특권으로 중국과의 단절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만큼 살려야 한단다.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앞에 남아 있는 3층짜리 팔각 건물은 실은 환구단이 아니라 부속 건물인 황궁우로, 일제가 1913년 조선호텔을 지으면서 환구단을 허물었다. 환구단 복원은 자주독립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방자치란 꽃을 정성스레 키우면 대한민국은 243개(기초 226+광역 17)의 꽃이 만발한 국가가 되지 않겠습니까.” 박 구청장의 지방자치 철학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열린세상] 왕사, 정도전을 생각함/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열린세상] 왕사, 정도전을 생각함/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항우와 유방이 맞붙었던 초한대전(楚漢大戰)의 승자로 예견됐던 인물은 항우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것은 한고조 유방이었다.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유방은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면서 자신이 항우를 꺾고 승리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항우는 승리해도 이익을 남과 나누지 않은 반면 폐하는 이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대답했다. 유방은 ‘그대들은 한 가지만 아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진단을 내놓았다. 자신이 참모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책을 꾸미는 능력은 자신이 장자방(張子房:장량)만 못하고, 경제는 소하(蕭何)만 못하고, 군사작전 능력은 한신(韓信)만 못하다고 자인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을 등용할 수 있었기에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방은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제대로 등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내게 포로가 된 까닭이다”라고 말했다(‘사기’ 고조 본기). 그전에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은 유방을 홍문연(鴻門宴)에 끌어들여 죽이려 했다. 최근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사드 배치 문제를 둘러싸고 쓴 ‘항우의 부하 항장이 칼춤을 추는 것은 그 뜻이 패공(유방)에게 있다’는 뜻의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이란 고사성어는 바로 이 연회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 항우가 유방을 제거했으면 중원의 패권이 달라졌겠지만 유방의 책사 장량은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을 끌어들여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범증은 “항왕(項王: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沛公:유방)일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결국 초한대전은 참모를 다수 거느린 유방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중국사는 참모사다. 그러나 한국사는 예나 지금이나 군주 한 명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군주사다. 조선 건국의 설계사 정도전 정도가 그 예외적인 존재라고 할 것이다. 정도전은 취중에 종종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태조실록’은 전한다. 실제로 이성계는 정도전을 왕사(王師), 곧 스승의 예로 대했다. 이성계는 북벌 준비를 위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북방에 나가 있는 정도전에게 서신과 옷을 보내면서 ‘송헌거사’(松軒居士·‘태조실록’ 7년 2월)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했다. 정도전에게만은 군신관계로 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스승 사(師) 자가 붙은 참모들의 공통점을 보면 하나같이 천하 백성들의 근심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맹자(孟子)는 “들판의 백성(‘丘民’)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를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를 얻으면 대부(大夫)가 된다”(‘맹자’ 진심(盡心) 하)라고 말했다. 가장 힘이 없는 것 같은 들판의 백성을 얻을 수 있어야 천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들판의 백성을 얻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고려 말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토지 문제였다. 소수의 권귀(權貴)들이 나라 안의 토지를 다 차지한 결과 대다수 백성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들판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일하고서도 가족 하나 건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도전은 바로 이 문제를 새 나라를 개국할 수 있는 역성혁명의 첩경으로 여겼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 전의 집)에 계실 때 직접 그 폐단을 보시고는 개연히 사전(私田) 혁파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체험하고 토지개혁을 새 나라 개창의 명분으로 삼게 했다는 뜻이다. 지금 ‘헬조선’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과제도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정책적 대안과 그를 실현할 능력과 리더십을 누가 갖고 있는가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덧셈과 뺄셈이라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정도전 같은 역사적 시각을 누가 갖고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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