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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을 수 없으면 운전 못 하나요”

    “들을 수 없으면 운전 못 하나요”

    청각장애 이유로 차량 대여 거부당해 헬스장 등록 거절·놀이공원서도 편견인권위 “차별 태도 해당”… 감독 강화 수어통역사 부족… 소통 어려움 호소“국가인권위원회가 제가 겪은 일을 차별로 봤다는 얘기를 듣고 오히려 슬펐어요. 말해야만 바뀌는 세상이 너무 고달파요.”강진영(27·여)씨는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복잡한 심정을 전했다. 그는 지난해 6월 청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렌터카 업체로부터 차 대여를 거절당했다. 인권위는 10일 “정당한 사유 없이 차량 대여를 거부한 건 차별”이라면서 국토교통부 장관과 전국 시·도지사에게 교통약자가 향후 비슷한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지도·감독을 강화하라고 권고했다. 강씨가 인권위 문을 두드린 건 지난해 6월 겪은 일 때문이다. 친구들과 여행 가기 위해 충남 지역의 한 렌터카 업체에 대여를 문의했다. “(승합차인) 카니발이 있느냐”는 강씨의 질문에 업체 직원은 다짜고짜 “청각장애인은 안 된다”고 답했다. “이 자체가 차별”이라는 강씨의 항의에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몇 년 전 청각장애인에게 차량을 대여했다가 경고음을 듣지 못해 사이드브레이크를 해제하지 않아 차량 손실이 있었다”, “청각장애 정도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선 대여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강씨는 “비장애인들도 렌터카를 타다가 사고를 낸다”며 “그렇다고 비장애인들에게 렌터카 이용을 제한하지는 않지 않느냐”고 말했다. 인권위는 렌터카 업체의 태도를 차별로 판단했다. 팔·다리 등이 불편한 신체장애인이 운전하려면 특수제작한 자동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은 시야를 넓혀 주는 볼록거울만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부착하면 무리 없이 운전할 수 있는데 렌터카 업체가 “별도 차량이 없다”는 이유로 빌려주지 않은 건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씨가 인권위를 찾은 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헬스장이 등록을 거절하자 인권위에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헬스장에 단순 경고를 하는 정도로 마무리됐다. 강씨는 “이번에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렌터카 업체에 대한 진정을 넣었다”며 “이렇게라도 해야 업체가 자신들의 행동이 차별임을 깨달을 것 같았다”고 했다. 강씨와 같은 농인들은 여전히 일상 속에서 부당한 거절을 겪는다. 심지어 놀이공원에서도 강씨는 “보호자와 동승하지 않으면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만 받지 못할 뿐 워드나 엑셀 같은 사무 업무는 별 어려움 없이 보는데도 일자리를 구할 때도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강씨는 “많은 농인들이 조립·제작처럼 단순 업무를 하는 공장에서 주로 일하는 것도 이런 편견 탓”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지원도 부족하다. 강씨는 “기차에 안내 모니터가 설치되는 등 농인을 위한 시각적 지원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며 “수어통역사도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기 어려운 상황도 많다”도 토로했다. 강씨는 “누구나 살면서 갑자기 장애를 얻을 수 있다”며 “만약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지 입장을 바꿔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청각장애인에 차 빌려주면 고장낸다구요?”…시정 이끈 농인

    “청각장애인에 차 빌려주면 고장낸다구요?”…시정 이끈 농인

    강진영씨, 차 대여 거부한 렌터카 업체 진정국가인권위, “차별적 태도 판단…지도·감독 강화”“헬스장 등록 거부, 놀이시설 이용 제한당하기도”“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이라고 결론내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슬펐어요. 말해야만 바뀌는 세상이 너무 고달파요.” 농인 강진영(27·여)씨는 인권위 진정서를 받아 든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강씨는 지난해 6월 청각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렌터카업체로부터 차 대여를 거절당했다. 인권위는 10일 “해당 업체의 태도를 차별로 판단하고 국토교통부 장관과 전국 시·도지사에게 청각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비슷한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지도·감독을 강화하라고 권고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9일 서울신문과 인터뷰한 강씨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렌터카 사건을 겪고 아직 멀었구나 싶어 속상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어릴 때부터 듣지 못했지만 입모양을 보고 상대방의 말뜻을 이해하고, 목소리 내는 구화(口話)를 배웠다. 강씨는 지난해 6월 친구들과 여행가기 위해 충남 당진의 렌터카 업체에 대여를 문의했다. “(승합차인) 카니발이 있느냐”는 강씨의 질문에 업체 직원은 다짜고짜 “청각장애인은 안 된다”고 답했다. “이 자체가 차별”이라는 강씨의 항의에도 렌터카는 빌려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업체 측이 나중에 밝힌 이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년 전 청각장애인에게 차량을 대여했다가 경고음을 듣지 못해 사이드브레이크를 해제하지 않아 차량 손실이 있었다”, “청각장애 정도를 제대로 확인을 못한 상황에서 대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씨는 “비장애인들도 렌터카를 타다가 사고를 낸다”며 “그렇다고 비장애인들에게 렌터카 이용을 제한하지 않지 않느냐”고 말했다.강씨가 인권위를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2012년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헬스장이 등록을 거절하자 인권위에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헬스장에 단순 경고를 하는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강씨는 “당시 기억이 있어 계란으로 바위치는 심정으로 렌터카 업체에 대한 진정을 넣었다”며 “이렇게라도 해야 업체가 자신들의 행동이 차별임을 깨달을 것 같았다”고 했다. 강씨는 수어나 구화가 가능한 자신에 비해 소통 기법을 배우지 못한 농인들은 더 큰 차별을 겪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장애를 이유로 차 대여를 거절하는 건 명백한 차별이라는 점을 농인들에게 알리고 깨닫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강씨와 같은 농인들은 여전히 일상 속에서 부당한 거절을 겪는다. 심지어 놀이공원에서도 강씨는 “보호자와 동승하지 않으면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만 받지 못할 뿐 워드나 엑셀 같은 사무 업무는 별 어려움없이 보는데도 일자리를 구할 때도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강씨는 “많은 농인들이 조립·제작처럼 단순 업무를 하는 공장에서 주로 일하는 것도 이런 편견 탓”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지원도 아직 부족하다. 강씨는 “기차에 안내 모니터가 설치되는 등 농인을 위한 시각적 지원이 점차 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며 “수어통역사도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기 어려운 상황도 많다”도 토로했다. 강씨는 “누구나 살면서 갑자기 장애를 얻을 수 있다”며 “비장애인들도 만약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세상이 조용하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지 입장을 바꿔서 단 한 번이라도 농인들의 입장을 생각해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잊지 말아야 할 15인의 여성 2] 첫 택시 기사·조종사·형사·소프트웨어 개발자

    [잊지 말아야 할 15인의 여성 2] 첫 택시 기사·조종사·형사·소프트웨어 개발자

    최초의 택시 기사 게트루드 자넷 뉴욕의 첫 여성 기사로 첫 출근해 의도적으로 사고를 냈다. 왈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다른 택시가 앞에 쏙 끼어들어 손님을 가로채려 했다. 그는 “그 시절(1940년대)이라면 흑인 기사가 도심에서 어슬렁 거리기도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많은 기사들이 모여들어 삿대질을 해도 그는 조용히 택시 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또다른 택시가 끼어들자 일부러 범퍼로 상대 차 꽁무니를 박았는데 그 차의 남자 기사는 그를 보고 “여자 운전사닷! 여자 운전사닷!”이라고 다급하게 외쳐댔다. 첫 비행 면허증 딴 베시 콜먼 비행을 원했지만 미국 항공학교에서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부터 배운 뒤 프랑스로 건너가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1921년에 조종사 면허를 땄다. 노예였다가 주인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계약재배했던 셰어크라퍼(sharecropper)의 딸로 태어난 그는 라이트 형제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얘기에 매료됐다.뉴욕의 첫 여형사 이사벨라 굿윈 뉴욕 최초의 흑인 여자 형사로 1912년 잠복 근무 끝에 은행 강도 에디 붑 킨스먼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 일 때문에 미국 최고의 민완 여형사란 명성을 얻었다. 1920년대에는 성매매 여성이나 가출 청소년,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전담하는 여성청소년과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뉴욕의 경찰 인력 3만 6500명 가운데 2%가 여형사들이다.검색 엔진 개척자 카렌 스파크 존스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의 기초를 만든 컴퓨터 공학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한때 “컴퓨팅은 워낙 중요해 남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고 갈파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다수 과학자들이 컴퓨터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코드를 개발하려고 애쓴 반면, 그는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려 했다. 초기 프로그래머 매리 앨런 윌크스 1960년대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LINC로 알려진)의 소프트웨어를 제작했던 초기 프로그래머 가운데 한 명이다. 컴퓨터 코딩 초기에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 넷 중 하나는 여성들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윌크스가 최고였다. 당시는 키보드나 스크린이 없어 직접 손으로 적어야 했기 때문에 코드 작업에 몇년이 걸리곤 했다.양성 평등 운동가 클로뎃 콜빈 1955년 학교 공부를 마친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백인 승객들이 타는 버스에 올라 자리를 비워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친구들은 양보했으나 열다섯인 그는 거부해 경찰관들에게 끌려갔다. 몽고메리의 버스 좌석 분리 법안을 어겨 경찰에 체포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저유명한 로자 파크스가 앨라배마주에서 비슷한 일을 당하기 아홉 달 이전이었는데 오히려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파크스보다 콜빈이 먼저 행동한 사실을 달갑지 않아했다. 그가 일으킨 버스 보이콧은 일년 넘게 이어졌고 앨라배마주의 버스 좌석 분리 법안이 헌법 위반이란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다.양성 평등 운동가 엘리자베스 페라트로비치 미국에서 차별 반대 법안이 1940년대 처음 통과된 것에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운 그가 끼친 공로가 적지 않다. 알래스카에서 격리된 틀링깃 원주민이었던 부부는 인종에 기반한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주정부와 함께 작업해 성안했다. 1945년 법안이 통과돼 모든 알래스카인들은 공공기관에 “완전 평등하게 채용될” 자격을 얻게 됐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내 손은 최첨단 의학 기구‘”…JMS 정명석 신도 성추행

    “내 손은 최첨단 의학 기구‘”…JMS 정명석 신도 성추행

    MBC ‘실화탐사대’가 여신도 성폭행 혐의로 10년간 복역한 뒤 지난해 2월 출소한 기독교복음선교회(JMS) 교주 정명석을 추적했다. 앞서 기독교복음선교회 측은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다며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법원이 이를 기각하면서 관련 방송은 3월 27일 전파를 탔다. 방송은 정명석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정명석은 오랜 시간 설교를 통해 “나는 기구도 없다. 이 손이 다 내 생각에 최첨단 의학 기구다”라며 ‘건강검진’이라는 이름의 성추행을 했다. 피해를 당한 신도는 “선배 신도들은 ‘(정명석이) 만지거나 그래도 놀라지 말아라, 너 건강 체크하는 거다”라며 그의 성추행 사실을 은폐했다고 말했다. 한 여성은 피해를 당할 당시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이 여성은 정명석에 의해 이불 위에서 속옷이 벗겨졌다고 주장했다. 이 여성은 “정명석이 ‘나니까 너를 만져준다’고 했다”며 20년이 지나도록 피해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괴롭다고 했다. 정명석은 출소 후에도 “손을 대면 병이 낫는다. 40년 경력이 있다. 6개월간 전 세계적인 치유를 제외하고 월명동(JMS 본거지) 안에서만 1800명을 고쳤다”고 주장했다. JMS 탈퇴자들은 정명석이 신체 부위마다 ‘진선미’를 정해주면서 뇌가 ‘진’이고 여성의 생식기가 ‘선’이고 가슴이 ‘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한 신도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정명석이) ‘하나님 외에 누구도 사랑해선 안된다면서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하체까지 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기독교복음선교회는 정명석의 무죄를 주장해 왔다. 징역 10년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도 계획 중이다. JMS 탈퇴자는 “정명석의 수감 번호가 1178인데, 그것을 기도 시간이라고 해석했다. 새벽 1시, 오후 1시, 저녁 7시 하루 세 번 기도하면 팔자가 펴진다면서 기도했다”고 했다. 방송은 기독교복음선교회에 빠진 자녀들을 찾는 A씨의 사연도 소개했다. 지난 2년간 아들과 딸을 만나지 못한 A씨는 정씨의 생일 수천 명의 신자가 온다는 충남 금산군 월명동을 찾았지만 자녀들을 만날 수 없었다. 자녀들은 제작진에 종교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다며 만남을 끝내 거부했다. 기독교복음선교회 측은 가정불화는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엔테베 작전 때 인질들과 끝까지 남았던 ‘영웅’ 바코 기장 별세

    엔테베 작전 때 인질들과 끝까지 남았던 ‘영웅’ 바코 기장 별세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엿새 동안 인질극을 벌인 테러범들이 이스라엘 핏줄이 아닌 승객들을 풀어줄 때 이를 마다하고 인질로 붙잡힌 승객들과 끝까지 함께 했던 프랑스인 기장 미셸 바코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받았던 바코 전 기장은 프랑스 니스에서 숨을 거뒀는데 크리스티안 에스트로시 니스 시장은 “고인은 영웅이었다. 반유대주의와 야만에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프랑스에도 영예를 안겨줬던 인물”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영국 BBC가 27일(현지시간) 전했다. 엔테베 구출 작전은 20세기 가장 극적인 여객기 공중납치 드라마 가운데 하나였다. 고인이 몰던 에어프랑스 AF-139 편은 1976년 6월 27일 승무원 12명과 26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리스 아테네를 경유했는데 이 때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조직원 둘과 연인 사이인 독일인 둘이 탑승해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다. 인질범들은 바코 기장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기수를 돌릴 것을 요구해 리비아 벵가지에 착륙했다. 그곳에서 연료를 주입한 뒤 다시 이륙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적어도 세 명의 팔레스타인 무장 전사와 우간다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간다 통치자 이디 아민이 기체 바로 앞까지 마중 나와 환대한 일은 세계인의 공분을 샀다. 인질범들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54명의 수감된 무장조직원 석방과 5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인질범들은 열악한 터미널 안에서 인질들을 지내게 했고, 화장실이나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핏줄이 아닌 사람들은 먼저 풀어줘 파리로 떠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바코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풀려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 12명은 94명의 이스라엘 승객과 끝까지 남았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7월 3일 공항 터미널을 습격해 인질범 둘을 사살하며 납치극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바코 기장은 인질범 중 한 명이 다른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발사해 세 번째 인질범이 숨졌다고 밝혔다. 고인은 2016년 BBC 인터뷰를 통해 기장으로서 “승객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며 “팀원들에게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우리는 풀려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모든 팀원들이 예외없이 따라줬다”고 돌아봤다. 당시 생존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베니 데이비슨은 바코 기장이 롤모델로서 전체 인질들을 대표해 인질범들이나 우간다 당국자들과 얘기하며 이끌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바코가 최후 통첩을 하듯 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며 “우리와 남겠다고 용감히 얘기하고는 승무원들에게 ‘난 결정을 내렸으니 여러분은 각자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하더라. 그러자 모두가 그와 함께 끝까지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일간 ‘Yedioth Ahronoth’ 인터뷰를 통해선 “프랑스가 우리를 구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보다 더 가까운 아프리카에 프랑스 군대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누군가 우리를 구하려고 달려와줄 것이란 건 알았다”고 말했다. 또 바코 기장의 용감한 태도는 인질로 붙잡힌 모든 어린이들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어 지옥의 모든 문이 열리더라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본보기로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이 얘기는 ‘로보캅’을 연출한 호세 파딜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영화 ‘엔테베 작전’으로 제작돼 지난해 6월 국내 개봉했는데 갖가지 혹평 속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열한달 걸려 매일 오름 오르고 싶게 만드는 ‘김종철 오름나그네’

    열한달 걸려 매일 오름 오르고 싶게 만드는 ‘김종철 오름나그네’

    책 기사를 쓸 때는 다 읽어보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절반 이상은 읽고 난 뒤 쓰자고 되뇌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러지 못한다. 이 책의 깊이와 넓이는 속독도 정독도 거부한다. 이 책을 배낭에 넣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주의 오름을 올라 11개월 동안 읽고 또 읽어야 할테니 말이다. 기자는 아예 작정하고 보도자료를 잘 갈무리하기로 했다. 1995년 김종철 선생이 제민일보 183회 연재를 마친 뒤 늑골암 말기 판정을 받고 연명 치료를 거부한 채 원고를 다듬어 출간하고, 정확히 스무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성식 다빈치 대표가 몇년 전부터 제주를 드나들더니 김순이 여사에게 허락을 받아 24년 만에 재출간했다. 1464쪽에 컬러 도판 250컷, 흑백 도판 370컷을 담았다. 세 권을 세울 수 있게 거치대까지 함께 보내줬다. 1000 세트 한정판이다. 오름을 사랑하는 이라면 빨리 펀딩에 참여하겠다고 박 대표에게 전화 넣을 일이다. 운명처럼 지도에도 올라있지 않고 진입로도 없던 시절 330여 오름을 찾아 다녔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도와 조선총독부, 미군이 제작한 지도를 살폈고, 지명 관련 문헌, 마을에 관한 보고서, 신화나 전설, 여러 성씨의 족보까지 뒤졌다. 비문에 새겨진 글을 기록하고 식물을 채취하고 마을의 어르신들을 만나 한자 이름 뒤에 가려진 우리말 이름을 살려냈다. 유홍준 선생은 이 책을 “제주의 신이 그에게 내린 숙명적 과제”라고 표현했고 역사공부 하는 농민 김종민은 “‘오름나그네’를 표절하지 않으면 결코 오름을 묘사할 수 없다”고 갈파했다. 지금 우리가 찾고, 배우고, 새로이 발견하는 오름은 모두 그의 발자취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제주신화’를 집필한 김순이 여사는 이 책의 재출간에 부친 글을 통해 ‘그가 저 외진 들녘 멀찍이 있던 오름의 손을 잡아 우리 앞에 이끌어 온 까닭은 오름이 이토록 아름다우니, 이토록 소중하니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아껴 달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오름나그네’의 행간에는 간곡한 그의 육성이 올올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그런 오름사랑에 부디 동참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자는 마지막 생의 순간, 오자가 눈에 띄면 몹시도 힘들어했고 김 여사가 바로잡을테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 24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저자가 정밀한 제주 지도를 생일선물로 받고 뛸듯이 좋아했다는 일화, 선생이 사랑했고 영원히 잠든 선작지왓 탑궤를 찾아 재출간 양장본을 보여주겠다는 대목에 이르면 오름을 사랑하는 누구라도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세 권 말미마다 김종철 선생에 대한 글들을 읽는 재미도 적지 않다. 24년 전 책의 사진은 서재철 작가 것이었는데 재출간본에는 연재되기 전부터 함께 오름을 올랐고 지금도 오르고 있는 고길홍 (76) 작가의 작품들이 실렸다. 박성식 대표의 뚝심이 없었다면 완전개정판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1권만 펼쳐도 박 대표의 뚝심이 대단함을 느낄 것이다. “옛날 얼굴도 보지 못한 저자도 상상하기 힘든 고생을 하며 원고를 완성했지만, 저도 필사적으로 이 책을 냈어요. 어제 완성된 책을 보며 ‘이런 게 출판이지’하는 소회를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마치 울트라(마라톤)를 마친 기분입니다.ㅎ” 잔자누룩한, 인후한, 소슬히, 너븐드르 같은 우리말, 제주의 입말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젊은날 한라산에 꽂혔던 기자는 마흔 중반을 넘어서면서 오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은퇴하면 제주살이를 하며 가보지 않은 오름부터 몇 번 가본 오름까지 이 책 배낭에 넣고 올라볼 생각이다. 거슨세미오름과 절오름, 돔박이오름, 마복이 등등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오름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 설렌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승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 “연예부 기자가 출세 위해 사실 확인 없이 보도”

    승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 “연예부 기자가 출세 위해 사실 확인 없이 보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클럽 ‘버닝썬’을 둘러싼 의혹을 다룬 가운데, 핵심 인물인 빅뱅 멤버 승리(29·본명 이승현)가 제작진에 보낸 해명 문자 메시지가 눈길을 끌고 있다. 23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버닝썬 게이트 그 본질을 묻다’ 편에서 클럽 ‘버닝썬’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파헤쳤다. 제작진은 이러한 의혹의 진위 여부 또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듣기 위해 버닝썬의 유리홀딩스나 승리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관계자들과 만날 수 없거나 번번히 취재를 거부당했다. 그러다가 승리가 제작진이 보낸 문자 메시지에 “누구세요?”라고 답장을 보냈고,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임을 확인하자 “이번 일은 범죄로 점화된 범죄라 생각한다”면서 입장을 밝혔다. 승리는 “개인 휴대전화 정보를 무단으로 유출해 그걸 공익 제보라고 포장했다. 이 내용으로 여론이 동조했고, 무명 변호사가 본인이 권익위(국민권익위원회)에 제보했다더니 제보자가 직접 나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특히 “연예부 기자는 SBS 메인 뉴스에 출연해 출세를 위해 사실 확인도 없이 내용을 보도했다”면서 억울함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저희들은 회사에 소속돼 있기에 자유롭게 반론하거나 언론 대응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를 어느 정도 악용했다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유재명X이준호 ‘자백’, 단 1회로 증명한 ‘김철규표 장르물’

    유재명X이준호 ‘자백’, 단 1회로 증명한 ‘김철규표 장르물’

    진짜가 나타났다. 김철규표 장르물로 관심을 모은 tvN 토일드라마 ‘자백’이 첫 방송부터 빈틈없는 완성도를 뽐내며 장르물 팬들의 기대를 환호로 바꿨다. 이를 증명하듯 ‘자백’의 1회 시청률은 케이블, IPTV, 위성을 통합한 유료플랫폼 가구 평균 4.6%, 최고 5.7%를 기록하며 뜨거운 호평 속에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유료플랫폼 전국 기준/ 닐슨코리아 제공) 지난 23일 첫 방송된 tvN 토일드라마 ‘자백’(연출 김철규 윤현기, 극본 임희철, 제작 스튜디오드래곤, 에이스팩토리) 1회에서는 5년의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두 개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은 최도현(이준호 분)과 사건의 진범을 쫓는 집념의 형사 기춘호(유재명 분)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거대한 미스터리의 서막을 열었다. 5년전 은서구의 주택 공사장에서 살인사건(이하 ‘양애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둔기로 머리에 치명상을 가한 뒤 깨진 병으로 사체를 훼손하고, 피해자의 옷가지 등을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는 잔인한 범행수법 탓에 해당 사건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당시 강력팀 형사반장이었던 기춘호(유재명 분)는 한종구(류경수 분)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윽고 한종구는 살인죄로 기소됐고 당시 로펌 시보였던 변호사 최도현(이준호 분)이 사건을 수임했다. ‘양애란 살인사건’의 최종 공판 날 춘호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한종구를 진범이라고 확신한 춘호는 자신이 수사한 사실을 가감없이 증언했고 재판의 분위기는 도현과 한종구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도현의 반대 심문과 함께 분위기가 일순간에 전복됐다. 춘호의 증언을 조목조목 반박한데 이어 검사 측이 제시한 정황증거들을 모조리 무력화 시킨 것. 결국 한종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고, 춘호는 범인 검거에 급급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했다는 여론의 비난 속에서 경찰복을 벗었다. 그러나 5년 후 ‘양애란 살인사건’과 똑같은 범행 수법을 사용한 ‘김선희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김선희 살인사건’의 증거들이 모두 한종구를 범인으로 가리키며 수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종구는 즉각 구속됐고 도현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하지만 5년 전과 달리 도현은 시작부터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한종구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무죄를 주장하기에는 사건의 정황이 너무나도 수상했고, 검찰의 비협조적인 태도 속에서 온전한 조서(사건에 대해 조사한 사실을 적은 문서) 조차 손에 넣지 못했다. 더욱이 극 말미에는 도현이 조서에서 누락된 내용들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사건 현장에 갔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충격을 안겼다. 이에 두 살인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도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증이 고조된다. 뿐만 아니라 도현의 면회를 거부하는 사형수 아버지 최필수(최광일 분), 도현의 변호사 사무실에 사무보조로 입사한 정체불명의 진여사(남기애 분), 도현의 뒤를 쫓는 춘호 등 드라마 곳곳에 심어져 있는 미스터리들도 궁금증을 자극하는 요소. 이에 강렬한 사건들과 꼬리의 꼬리를 무는 의문들 속에서 서막을 연 ‘자백’이 향후 어떤 전개를 펼쳐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처럼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함께 완성도 높은 ‘자백’의 만듦새 역시 눈길을 끌었다. 특히 살인사건을 묘사하는 연출 방식은 ‘김철규표 장르물’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김철규 감독은 범인의 살인 행위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분위기와 간접 묘사만으로 공포감과 긴박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특히 으슥한 골목길을 걷는 피해자를 부감샷으로 쫓아가는 앵글은 마치 피해자를 미로에 가둬버린 듯한 느낌을 주며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일품이었다. 이준호는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와 발성, 예리한 눈빛으로 변호사 최도현을 완성했고 유재명은 지금껏 본적 없는 와일드한 모습과 묵직한 존재감을 뽐냈다. 무엇보다 극중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강렬한 앙상블이 빚어졌다. 또 털털하고 귀여운 매력의 신현빈(하유리 역)과 남기애는 이준호와 유쾌한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냈고, 살해 용의자로 분한 류경수는 강렬한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한편 ‘자백’의 첫 방송에 장르물 팬심이 요동쳤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및 SNS에서는 “와 드라마가 영화 느낌나네”, “완전 꿀잼! 보는 내내 안 끝나길 바랐다 내일 기대된다”, “진짜 몰입해서 봤어요! 다음 편 너무 궁금해”, “찐장르물의 향기!”, “이준호 유재명 배우 연기 너무 좋아요!”, “이건 찐이다! 오랜만이네 볼만한 장르물”, “넘나 재밌었음! 영상미도 쩔고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 같았음!”, “비숲 이후에 믿고 보는 작감배 탄생”, “대박 조짐이 보인다”, “연출 스토리 배우들의 연기 다 좋네요. 긴장감 몰입감 임팩트 대박입니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tvN 토일드라마 ‘자백’은 한번 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다시 다룰 수 없는 일사부재리의 원칙, 그 법의 테두리에 가려진 진실을 쫓는 자들을 그린 법정수사물로 오늘(24일) 밤 9시에 2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추락 라이언에어 조종사 사고 직전 비행 메뉴얼 찾다 결국 “알라후 아크바르”

    추락 라이언에어 조종사 사고 직전 비행 메뉴얼 찾다 결국 “알라후 아크바르”

    조종사 의지 관계없이 컴퓨터가 ‘하강’비행 메뉴얼에서 체크 리스트 찾았지만..부기장 추락 직전 “알라후 아크바르”지난해 10월 추락해 189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라이언에어 B737맥스 조종사들이 사고 직전 비행 메뉴얼을 찾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종사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행기가 계속해서 아래로 향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로이터통신은 19일(현지시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사고 당시 조종사들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에서 추락 직전 기장이 부기장에게 비행 메뉴얼을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비행 기록에 따르면 부기장은 자카르타에서 이륙한 지 2분만에 관제실에 “플라이트 컨트롤 프로블럼”이라며 조종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비행기의 자동조종장치는 조종사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비행기의 기수(머리)를 아래로 향하게끔 했다. 이는 B737맥스 시리즈에 장착된 새로운 소프트웨어인 조종특성향상시스템(MCAS)이 일으킨 오작동으로 추정되는 현상으로 최근 발생한 에티오피아 사고의 원인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조종사들은 사고 직전 비행기의 속도와 고도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면서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추락 직전 31세의 인도 태생 기장은 침묵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네시아인인 41세의 부기장은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말을 남겼다. 아랍어로 “신은 위대하다”는 의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추락했고 탑승자는 전원 사망했다. 녹음 파일은 비공개 상태이며 현재 모든 정보와 데이터는 조사단으로 넘어갔다. 라이언에어 추락에 대한 최종보고서는 오는 7월까진 발표된 예정이다. 라이언에어측은 조종사들의 대화에 대해 답변하길 거부했다. 지난 10일 추락한 에티오피아항공의 블랙박스에 녹음된 내용도 아직 공식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현재 파리 프랑스 항공사고 조사관들이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조종사가 이륙 직후 불규칙하게 상승했다가 추락한 것은 라이언에어 사고기와 유사해 항공기 소프트웨어의 결함이 사고 원인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재 300대 이상의 B737맥스 항공기가 운항을 중단했으며, 주문 중지에 따라 이미 제작된 5000여대의 발송도 무기한 연기됐다. 보잉사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이번달 내로 장착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연방검찰과 규제당국은 미 연방항공청과 보잉사가 문제가 된 B737맥스 시리즈를 어떻게 인증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라이던에어 조종사들이 사전에 훈련을 어떻게 받았는지도 조사할 방침이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정춘수(1873~1953)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일본인 검사의 취조에 이렇게 말했다.“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910년 합병 당시 기대했던 ‘내선 융화’(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정책)가 잘되지 않았던 것이 유감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두 달 뒤 열린 재판에서도 “자치권을 달라고 청원하는 것에 찬성한 것이지 (일본에 대한) 독립 선언은 내 의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정춘수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1921년 5월 출옥했다. 이후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며 갖가지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했다. 지금도 정춘수는 우리 역사에서 ‘변절한 민족대표’로 거론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난무한다. 바로 정춘수 같은 이들 때문일 것이다.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33인은 3·1운동 시위에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가 아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유명 역사강사 설민석씨가 “민족대표들이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발언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과연 사실일까. ●33인은 왜 모두 종교인 뿐일까?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이 물음에 국민 대다수는 유관순을 꼽는다. 일부는 김구나 이승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을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당시 이들의 인지도를 감안할 때 33인을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로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종교인이었고, 자신의 종교 밖에서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계는 “당시 우리 사회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일제의 강압통치가 심해지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모여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분야는 종교계가 거의 유일했다는 설명이다. 한국사학자인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20일 “3·1운동 준비 당시에는 고관대작을 지낸 유명인사를 민족대표로 섭외하려고 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으로 명성이 높았던 박영효(1861~1939)와 구한말 대신 출신 한규설(1856~1930), 당대 최고의 개화지식인 윤치호(1865~1945) 등이었다”며 “하지만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민족대표 자리를 수락한 이가 없었다. 결국 종교인들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직접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당시 이들은 지체가 높지도 않았고 특별한 명성도 없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평민 출신이었다”고 강조했다. 기득권 계층이 자신의 안녕을 챙기느라 민족대표 맡기를 거부하자 보통 사람들이 조선 독립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이는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3·1운동의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민족대표 33인은 진짜로 친일파가 됐나? 민족대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은 최린(1878~1958)과 박희도(1889~1952), 정춘수 등 세 사람이다. 김창준(1890~1959)은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이는 해방 뒤 월북한 탓이지 친일 행각 때문은 아니다.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세간의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민석 강사와 민족대표33인유족회 간 소송을 담당한 재판부도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대표들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적어도 친일 반민족 행위로 평가받을 일은 하지 않고 지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민족대표들이 친일행각에 나섰다는 인식이 퍼진 데에는 훗날 친일파가 된 최남선(1890~1957)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는 33인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3·1 독립선언서를 직접 썼기에 존재감이 남달랐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최남선이 ‘나는 평생 학자로 살고 싶다’며 독립선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천도교 측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윤 전 총장은 “33인 가운데 훗날 두세 명 정도가 변절했다. 이것만으로 민족대표 전체를 싸잡아 폄하·매도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3·1정신을 흐리게 하는 자해행위”라고 지적했다. ●태화관은 정말로 ‘룸살롱’이었나? 3월 1일 독립선언식은 서울 종로의 음식점인 태화관에서 열렸다. 하필 기생이 나오는 요릿집에 모인 걸까.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사의 시계를 3·1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애초 독립선언 장소는 종로의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민족대표들은 선언식 장소를 돌연 태화관으로 바꿨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이 연행될 경우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일본 경찰을 제지하려다가 유혈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민족대표 33인의 비폭력 투쟁 노선이 거사 장소 선택에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2월 28일 사전 제작돼 3월 1일 뿌려진 ‘조선독립신문’ 1호에는 “오후 2시 경성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고 적혀 있다. 이미 거사 전날부터 민족대표들이 폭력 시위를 피하고자 자수할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탑골공원 인근에서 30명이 넘는 인원이 비밀리에 모일 수 있는 곳을 급히 찾다 보니 자연스레 태화관으로 정해진 것”이라며 “태화관은 요즘으로 치면 호텔과 같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도 “무사히 선언식을 마치려면 실내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따른 것일 뿐 (기생집을 선언 장소로 택한 것에 대해)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였다. ●만세 운동 주도 못한 이들이 진짜 민족대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이들은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민족대표 가운데 일부는 조선의 독립보다는 자치권 확대와 총독부의 지배방식 개선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면서 “이처럼 일제와 타협하려는 듯한 어설픈 리더십으로는 당시 조선인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33인의 재판 내용을 살펴보면 “소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독립선언과 폭동은 관계가 없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즘 말로 ‘유체이탈 화법’에 해당하는 실망스러운 태도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3·1운동 대표로 나서면 곧바로 체포돼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고,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는 데 이들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설명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일본의 엄혹한 통치가 이뤄지던 때 33인은 3·1운동의 기획자이자 기폭제로서 큰 역할을 했다”면서 “3·1운동 첫날 서른 곳 가까운 도시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이것만 봐도 민족대표들은 시위의 전국 확산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민족대표는 3·1운동의 리더로서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윤지오에 ‘장자연 리스트’ 실명 요구했던 왕종명 사과…“배려 없는 질문”

    윤지오에 ‘장자연 리스트’ 실명 요구했던 왕종명 사과…“배려 없는 질문”

    뉴스데스크 “당사자와 시청자께 사과”…윤지오 수용MBC TV ‘뉴스데스크’가 18일 방송에서 고(故) 장자연의 동료배우이자 ‘장자연 문건’ 목격자인 윤지오 씨에게 문건 속 실명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다음날 공개 사과했다. 왕종명 앵커는 전날 스튜디오에 나온 윤 씨에게 “장자연 문건에 방씨 성을 가진 3명, 이름이 특이한 정치인이 있다고 했는데 공개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윤씨는 “지난 10년간 미행에도 시달리고,수차례 이사도 하고 해외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면 전 증언자·목격자 신분이 아니라 피의자가 돼 명예훼손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왕 앵커는 재차 “검찰 진상조사단에 (이름을) 말하는 것과 생방송 뉴스에서 공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고, 생방송 뉴스 시간에 이름을 밝히는 것이 진실을 밝히는 데 더 빠른 걸음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가”라고 물었다. 윤씨는 이러한 질문에 다시금 “책임져 줄 수 있냐, 살아가야 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며 끝내 공개를 거부했다.방송 후 시청자들은 ‘뉴스데스크’ 게시판 등을 통해 제작진이 10년 만에 어렵게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윤씨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했다고 크게 비판했다. 익명의 한 누리꾼은 “신변의 위협이 따른다고 하는데도 이름을 왜 못 밝히냐고 종용하는 게 소양도 인성도 부족해보인다”고 비판했고 ,닉네임 ‘clu****’도 “제보자 보호는 못 할망정 누굴 고통 속에 죽게 하려고 하냐.기자 맞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가 지나도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자 ‘뉴스데스크’ 제작진은 19일 입장을 내고 “왕종명 앵커와 뉴스 제작진은 시청자의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라며 “당사자인 윤지오 씨에게 직접 사과했고, 오늘 방송을 통해 시청자께도 사과드리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시청자 여러분의 비판에 늘 귀 기울이며 더욱 신뢰받는 뉴스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윤씨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왕 앵커는 이날 ‘뉴스데스크’가 본격 시작되기 전 스튜디오에서 사과를 했다. 그는 “전날 윤씨 인터뷰를 진행했다.질문 가운데 문건에 등장하는 유력 인사의 실명 공개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출연자 배려 없이 무례하고 부적절하게 질문했다는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었다”며 “이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시청자와 윤씨에게 사과드린다”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윤 씨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뉴스 진행자로서는 당연히 국민들께서 알고자하는 질문들을 하기 위해 애써주셨을 테고 현재 제 상황을 제대로 모르셨을 테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직접 사과도 받았다”라고 수용했다. 이어 “앞으로 모든 인터뷰가 목격자와 증언자의 입장을 먼저 헤어리고 이뤄질 수 있었으면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뉴스데스크’는 전날 개편 후 첫 방송이었다. MBC TV는 전날부터 오후 7시 30분에 ‘뉴스데스크’를 시작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진심이 닿다’ 이동욱, 유인나 사로잡은 듬직함 “내 여자 손대지 마”

    ‘진심이 닿다’ 이동욱, 유인나 사로잡은 듬직함 “내 여자 손대지 마”

    ‘진심이 닿다’ 이동욱이 역대급 듬직함으로 유인나와 시청자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스토커 김견우를 단번에 제압하는 등 매 순간 유인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이동욱의 믿음직한 남친 포스가 보는 이들의 숨멎을 유발했다. 지난 13일 방송된 tvN 수목드라마 ‘진심이 닿다’(극본 이명숙, 최보림/ 연출 박준화/ 제작 스튜디오드래곤) 11화에서는 스토커 이강준(김견우 분)으로부터 오진심(예명 오윤서, 유인나 분)을 지키는 권정록(이동욱 분)의 모습이 그려져 관심을 집중시켰다. 권정록은 이강준으로 인해 불안감에 떠는 오진심의 곁을 지켰다.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강준은 ‘혼자서만 행복한 거 보니 배신감 들어서 말입니다. 그럼 또 봅시다’라는 경고성 문자와 함께 돌아섰다. 이에 오진심은 이강준과 엮였던 과거 마약스캔들의 진실을 털어놓으며 눈물 지었고, 권정록은 “내가 (오진심씨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 겁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이겨내 보죠, 같이”라며 그를 다독였다. 특히 권정록은 쪽잠을 자며 오진심의 곁을 지키는가 하면, 놀이동산 데이트부터 불꽃놀이까지 제안하는 등 그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후 오진심은 권정록의 노력이 마음에 닿은 듯 “저 이겨낼 거에요. 변호사님이랑 같이”, “변호사님과 함께 라면 그 어떤 일도 이겨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라며 한층 단단해진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같이 출근을 하던 중 검은 차량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챈 권정록은 오진심을 로펌으로 올려 보낸 뒤, 오진심을 몰래 찍고 있는 차량 운전자와 대치했다. 이때 다시 돌아온 오진심은 단번에 이강준의 수행원임을 알아채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사람을 붙이면 볼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법정에서”라며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이로 인해 분노한 이강준은 다른 방식으로 오진심을 압박했다. 오진심은 드라마 투자자의 거부로 인해 자신이 로펌 위장취업까지 하면서 출연하고 싶어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이에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 동행한 오진심과 연준석(이준혁 분)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이강준이었다. 그와 마주한 오진심은 “이 드라마 안 해도 돼. 당신 말 대로 나, 충분히 행복하거든”이라며 단호하게 돌아섰지만, 이내 홀로 펑펑 우는 오진심의 가냘픈 뒷모습이 그려져 시청자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다음 날, 오진심은 고심 끝에 의뢰인 신분으로 권정록을 찾았다. 오진심은 이강준이 보냈던 각종 협박 문자와 사진들을 권정록에게 건넸고,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강준의 섬뜩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권정록의 배웅을 받고 집에 들어온 오진심은 집에 침입한 이강준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오진심에게 다가선 이강준은 “이제 솔직히 말해! 날 사랑한다고! 나 밖에 없다! 배신하지 않겠다 얘기해!”라며 그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그 순간 이강준의 수행원을 보고 돌아온 권정록은 주먹을 날려 이강준을 제압한 뒤, “내 여자한테 손 대지 마”라며 오진심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심멎을 유발했다. 무엇보다 이강준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싸늘한 눈빛이 서늘한 긴장감을 형성, 다음 행동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권정록의 든든한 울타리 속에 더욱 깊은 믿음과 애정을 키워 나가고 있는 권정록-오진심의 로맨스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가운데 이강준이 수 억원 대의 원정도박 혐의를 받고 있는 정지호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드러나 관심이 모아진다. 권정록은 자신의 의뢰인으로부터 정지호가 원래 도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을 전해들은 뒤, 정지호 사건의 담당 검사인 김세원(이상우 분)을 찾아갔다. 이때 정지호가 잡힌 마카오 호텔 CCTV를 보게 된 권정록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의 손목을 보고 오진심을 미행하던 이강준의 수행원임을 알아챘다. 더욱이 2년전 이강준 마약 사건과 정지호 사건의 변호사가 같다는 것이 밝혀져, 앞으로의 전개에 호기심이 고조되고 있다. ‘진심이 닿다’ 11화 방송 후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권정록 같은 듬직한 남자 어디 없나요?”, “오늘 이동욱 귀엽고 멋있고 다 했다”, “스토커 진짜 소름 돋았다. 김견우 진짜 연기 잘하네”, “재밌고 달달하고 힐링 되는 드라마! 요즘 이거 보고 나면 달달해서 잠 못 잠”, “달달하다가 소름 돋다가.. 오늘 몰입도 대박”, “권정록 마지막 대사에 심장 터지는 줄. 너무 멋있었어요”, “’연고커플’ 그냥 사랑하도록 두시면 안되나요? 헤어지지 마”, “’진심이 닿다’ 너무너무 좋아요.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등 뜨거운 관심이 이어졌다. 한편, tvN ‘진심이 닿다’ 12화는 오늘(14일) 밤 9시 30분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1920년대 전반, 드디어 조선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올렸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조선 영화의 첫발을 뗀 1919년부터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 이전의 시기, 조선 영화계는 어떤 영화들을 만들면서 무성영화 시대를 개척해 갔을까. 주목할 부분은 식민지와 제국 구도에서 조선인들만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 아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국의 정책뿐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조선의 이야기를 다루는 조선인 감독의 연출과 조선 사람을 연기하는 조선인 배우들의 연기였다. 이 지점이 조선의 무성영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던 셈이다.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 일본인 흥행사가 제작한 최초의 상업영화 ‘춘향전’(1923),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제작된 ‘장화홍련전’(1924)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무성영화 제작 현장을 살펴보도록 한다.●조선인이 감독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1923년에 공개된 ‘월하의 맹서’는 온전한 극영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외의 활극 장면만 영화로 표현했던 이전의 연쇄극과 달리,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모두 필름 촬영으로 소화한 극영화라는 점 그리고 각본, 감독, 출연 모두 조선인의 손으로 이뤄낸 점이다. 당시 언론인이자 연극인으로 활동했던 윤백남(1888~1954)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그가 이끌어 온 민중극단의 단원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다. 신파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월화(1904~1933)는 이 영화를 통해 조선 영화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 등극한다. 한편 영화 매체를 성립시키는 기술 파트까지 조선인이 해결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오타 히토시가 맡았다. 사실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개봉한 극영화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였다. 다시 말해 영화관용 상업영화가 아니라 당국의 선전영화였다.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처음 상영했고, 이후 순회영사로 각 지역에서 공개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는 ‘월하의 맹서’의 분량을 ‘전 2권’, ‘2천척의 긴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이를 상영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33분 정도에 해당한다. 중편 길이의 영화였던 것이다. ‘월하의 맹서’ 제작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무성영화는 자본과 기술의 제공, 연출과 배우의 역할이 분리되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은 무엇보다 큰 자본이 필요한 작업이고 촬영, 현상 등의 근본적인 기술이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본, 연출 그리고 출연 영역에서 조선 영화인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렇게 조선 무성영화는 첫발을 뗐다.‘월하의 맹서’ 공개 이전에도, 일본인 영화제작사가 만든 ‘국경’(1923)이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 등 재조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극동영화구락부가 제작한 영화로, 촬영은 일본에서 온 나리키요 에이가 담당했다. 물론 출연은 박순일 등 조선인 배우들이 맡았다. 이 영화는 중국 국경 지대의 마적을 토벌하는 일본국경수비대의 활약을 묘사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다시 상영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조선공론’의 문예담당 기자 마쓰모토 데루카가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직접적인 야유를 보내 중지시키는 것은 심히 좋지 않은 일이다”고 기록한 것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과격한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학생들 야유로 하루 만에 상영 중단된 ‘국경’ 이 영화의 상영이 하루 만에 중단된 사정을 현재로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진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조선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마적들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장독립군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관객과 만나지 못한 ‘국경’은 상업영화로서 실패했지만, 조선인 관객들이 영화를 거부한 사건으로 영화사 기록에 남게 되었다. 조선 영화계가 본격적인 상업영화의 시대를 연 것은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설립한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1923) 그리고 조선인 영화관 단성사가 영화제작을 위해 설립한 촬영부의 ‘장화홍련전’(1924)이 등장하면서이다. 하야카와는 1913년 경성의 일본인 거리에 고가네칸을 설립하며 조선 흥행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조선부업공진회 개최에 맞춰 고전 소설 ‘춘향전’의 영화화를 추진하며, 하야카와 고슈라는 이름으로 직접 연출까지 나섰다. 영화는 전북 남원 현지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해 당대 최고의 인기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으로, 기생 한명옥이 춘향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였던 김조성이 배우의 역할로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자본주가 감독에 나선 작품이지만, 조선 고전의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던 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춘향전’은 조선부업공진회가 개최된 1923년 10월 5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해 조선인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18일부터 전북 군산의 군산좌에서, 21일부터 공진회 내의 활동사진관에서 연이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최초의 상업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하야카와는 ‘춘향전’의 성공을 기반으로 1924년 7월 인사동의 조선인 상설관 조선극장을 인수해 단성사의 라이벌로 나섰다.●‘장화홍련전’ 흥행에 日 ‘춘향전’ 재개봉 응수 당시 ‘춘향전’은 “이건 한 개의 슬라이드지, 영화에 대한 몽타주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흥행에 성공하자, 조선 영화계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는 조선 흥행계의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고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으로 응수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이 추동된 점이다. 바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조선인 주도의 영화 제작은 바로 이듬해에 이어졌다. 하야카와의 행보에 자극 받은 단성사의 박승필이 1924년 7월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설치하고, 역시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을 극영화로 제작했다. 배우는 장화와 홍련 역에 기생 김옥희와 김운자, 원님 역에 인기 변사 우정식을 출연시켰다. 앞선 ‘춘향전’의 성공 요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연출 인력이 보강되었다. 각색은 단성사의 변사로 유명한 김영환이, 감독은 우미관 출신의 영사기사로 단성사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었던 박정현이 나섰다. 훗날 감독이 되는 이구영도 당시 단성사 직원으로 각본과 연출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무성영화 현장은 지금의 프로듀서와 감독처럼 그 역할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촬영 역시 조선인이 맡았다는 점이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로 기록되는 이필우(1897~1978)가 이 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장화홍련전’의 영화사적 의미는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초창기 영화매체의 가장 중요한 성립 조건인 기술에서도 전부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경성 천지의 키네마 팬이 한결같이 손꼽아 기다리던” ‘장화홍련전’이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조선에 영화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맞는 대성황을 이뤘고, 이에 하야카와의 조선극장은 ‘춘향전’의 재개봉으로 응수한다. 이후 동아문화협회는 하야카와가 다시 감독으로 나선 ‘비련의 곡’(1924), 김조성이 감독으로 나선 ‘흥부놀부전’(1925)을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후, 경영난으로 해산했다. ●무성영화 개척해 간 조선영화인들 초창기 조선 영화계에서 극장의 산하가 아닌, 영화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다. 1924년 7월 11일 일본인 사업가들에 의해 부산에서 설립됐다. 촬영소는 복병산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했고, 회사의 중심인물은 부산 묘각사 주지였던 승려 다카사 간초였다. 그는 왕필렬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회사 창립작 ‘해의 비곡’(1924)과 원제가 ‘암광’이었던 ‘신의 장’(1925), ‘동네의 호걸’(1925)을 직접 연출했다. 촬영기사는 작품마다 일본에서 불러왔다. 동아문화협회에서 김조성의 역할처럼,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도 조선 영화인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무성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경손, 안종화 등 당시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해의 비곡’의 경우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등 조선인 배우들이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실질적인 감독 역할이었다. 규모를 키운 2회작 ‘운영전’에서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이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조선키네마 역시 조선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가담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한편 무성영화의 스타 나운규가 조선키네마의 연구생이던 당시 ‘운영전’에서 처음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923년부터 1925년까지의 무성영화 전기에 모두 12편의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다. 1923년 2편, 1924년 3편, 1925년 7편이다. 이 작품들 중 다수는 일본인 제작자가 만들고 연출도 겸했다. 그리고 그 제작 현장에서 조선인 감독과 기술 스태프들이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처럼 연출과 출연은 물론이고, 조선인 촬영기사가 전면에 나선 작품도 있었다. 이처럼 무성영화 시기, 제작, 연출 그리고 촬영 등의 기술 파트에서 일본인과 조선 영화인이 만들어내는 도제, 경합, 협업 등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셰이딩, 핑크 틴트, 레드브라운 아이섀도…누나, 화장 가르쳐 드려요?

    셰이딩, 핑크 틴트, 레드브라운 아이섀도…누나, 화장 가르쳐 드려요?

    프라이머, 컨실러, 파운데이션, 눈썹, 림밥, 셰이딩…. 오전 6시, 늦잠을 포기한 한 고등학교 3학년생이 자신의 화장대 앞에 앉았다. 프라이머로 피부 결을 정돈하고 컨실러로 잡티를 가린 후 파운데이션을 얹고 셰이딩으로 콧대를 세우면 등교 준비 끝. 외모에 민감한 여학생의 화장법이라고 해도 대단해 보이는데 이 화장대의 주인은 남학생인 김슬기찬(18)군이다. 그는 주중 5일 중 3일은 화장을 하고 시험기간에는 피부 보호를 위해 기초제품만 쓴다. 늦잠을 자는 날에는 파우치를 꼭 챙긴다. 1교시 종료 10분 전 스킨·로션을 바르기 시작해 2교시 수업 시작 전에 셰이딩까지 마무리 짓는다. 하교 후 놀러 가는 날이면 점심시간을 활용해 색조까지 한다. 김군은 “생기를 주려고 핑크나 오렌지 립틴트를 바르고 볼 터치를 한다”며 “레드브라운 아이섀도로 눈에 음영감을 준 뒤 반짝이는 펄을 바른다”고 설명했다. 체육수업 전에는 화장이 덜 지워지도록 파우더를 하고 수정 화장도 필수다.김군은 지난해부터 뷰티 유튜브 채널을 찾아보면서 화장을 시작했다. 외모를 가꾸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얼굴에 그림자를 넣는 셰이딩에서 두 달 만에 색조도 시작했다. 그는 “화장한 티가 확 나는 색조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확연히 달라진다”며 “색조는 피부관리와 달리 부모님 반대가 심하다”고 했다. 처음에 김군을 부담스러워하던 친구들도 1년 정도 지나니 익숙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증명사진을 찍기 전에 김군에게 간단한 화장을 부탁하는 남학생들도 있고, 화장에 대해 묻는 여학생들이 많다. 그는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불편해하는 시선도 이길 수 있게 됐다”면서 “SNS에서는 특정 메이크업 요청을 하는 팬들도 있다”고 웃었다. 이어 “2주에 7건 정도는 요청받은 메이크업을 해서 SNS에 올린다”며 “여성들은 이목구비를 살리는 색조화장, 남성분들은 데일리하게 할 수 있는 화장 위주로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김군은 외모에 대한 또래 남자들의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남녀공학 특성화고에 다니는 김군은 “같은 학년 남학생 약 180명 중 절반은 눈썹과 BB크림을 바른다”고 말했다. 물론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다. 인문계 남고의 한 교사는 “화장한 남학생을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했다.●“남자도 화장한다” 외친 남고 졸업식 올해 남고를 졸업한 구상혁(19)씨는 졸업식날만을 기다려 왔다. 이날 구씨는 화장을 하고, 맞춤 제작한 귀걸이를 찬 상태로 졸업장을 받았다. 구씨는 “화장을 하고 학교를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서 “전교생과 학부모님들이 모일 때 남자도 화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비록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몇몇 여선생님들은 “꿈이 뭐니.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해 줬다고 한다. 구씨는 90㎏까지 체중이 나갔던 고2 때 처음 화장을 하고 학교에 갔다. 친구들은 “돈가스 밀가루 반죽했냐”고 놀렸다. 충격을 받은 구씨는 64㎏까지 감량했지만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쉽게 찾지 못했고 다시 화장품을 구매해 발랐다. 아이라인으로 눈매를 만들고 틴트를 바르니 훨씬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색했던 화장도 매일 집에서 연습한 결과 두 달 만에 자신감이 붙었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올라갔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3학년에 올라가던 날 눈화장까지 하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과 친구들은 기겁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게이냐?”라고 몰아붙였다. 구씨는 “사실상 아웃팅을 당했다”면서 “그래, 나 게이니까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말해버렸다”고 했다.아웃팅을 당한 구씨의 옆을 지켜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네가 화장을 한다고, 성소수자라고 배척할 이유는 없다”며 “너도 똑같은 남자다”라고 말해줬다. 구씨는 “25명 중에 내게 용기를 준 친구들은 3분의1도 안 됐지만 화장을 통해 진짜 친구들도 얻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화장에 대한 구씨의 시선도 넓어졌다. 그는 진한 화장을 좋아했지만 친구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어서 연한 화장도 하게 됐다. 구씨의 꿈은 드래그(Drag) 아티스트다. 드래그는 사회적으로 고정된 자신의 성 역할과는 다른 성에 맞춰 겉모습과 행동거지 등을 꾸미는 행위다. 흔히 드래그퀸은 여장 남성을, 드래그킹은 남장 여성을 의미한다. 그는 “아름다운 색, 선, 옷과 화장의 조화를 드래그 메이크업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군대에서 화장에 눈떴지 말입니다 군대에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화장을 시작하는 남성들도 있다. 훈련할 때 자외선에 많이 노출되고, 군용품이 위생적이지 않아서 피부 트러블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생활관마다 걸린 거울은 안 좋아진 피부를 자꾸 비춘다. 휴가 나갔다 복귀한 동기들이 화장품을 사오면 제품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한다. 대학생 이동준(22)씨도 군대에서 처음 피부관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씨는 “군대에서 머리를 밀고 얼굴을 봤는데 충격을 받았다”며 “군대에서 피부관리를 시작해 제대 후 색조까지 배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군대 내 PC방에서 화장품 정보를 찾아 노트에 적은 다음, 휴가를 나와 직접 구입해 연습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제대 후에는 복학할 때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아이라인, 볼 터치, 펄도 시도했다.여학생들과도 화장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만큼 남성 화장에 대한 거부감도 줄었다. 이씨는 “대학에서도 남자들이 피부 커버를 하고 자연스러운 립을 바르는 것까지는 괜찮은 분위기”라며 “주변 남자들을 보면 5명 중 1명은 기본적인 화장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자신의 메이크업 노하우 등을 올리고 있다. 화장이 흔한 일이 되면서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용을 배우는 남학생도 늘었다. 서경대 미용예술과의 경우 남학생수가 10년 전 3% 수준에서 올해 15%까지 증가했다. 신세영 서경대 미용예술학과 교수는 “화장 등 뷰티에 대한 성별 편견이 많이 없어지면서 직업으로 선택하려는 남학생들이 계속 늘고 있다”면서 “남성 디자이너들이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고 감각에서 차별적인 부분이 있어 직업적으로도 유망한 편”이라고 말했다. 남성 화장품 시장도 해마다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7년 국내 남성 화장품 시장은 1조 2808억원 규모로 전년보다 4.1% 성장했다. 2020년에는 1조 4000억원으로 커질 전망이다. 특히 스킨 로션만 바르던 남성들이 색에 눈뜨면서 남성 색조 시장이 최근 급성장했다. 올리브영에 따르면 2018년 남성 색조 화장품 매출은 전년 대비 30% 늘었다. 쿠션·BB크림은 30%, 컬러 림밥 등 립케어는 무려 16배 상승했다. 올리브영 관계자는 “화장이 남성미와 자신감의 도구가 되면서 색조 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색이 들어간 컬러 립밤 제품이 눈에 띄게 성장 중이고 눈썹 제품도 인기”라고 귀띔했다.●편견 지우는 아이돌과 뷰티 크리에이터 김군과 구씨, 이씨는 유튜브와 SNS로 화장을 배우고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처럼 유튜브와 SNS는 남성 화장 저변을 넓히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남성 뷰티 크리에이터들이 등장하면서 남성도 언제든 자신에게 맞는 화장을 배울 수 있게 됐고, SNS로 제품도 쉽게 접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운 화장을 직접 해보고 공유하며 남성들은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신감을 찾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 및 뷰티 콘텐츠를 올리며 32만여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크리에이터 준콩(20)씨는 “남성이 꾸민다는 게 부끄럽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에 10~20대 남성의 화장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남성 아이돌은 남녀 모두의 편견을 지워냈다. 이씨는 “화장에 관심이 없는 친구도 강다니엘 화장을 알 만큼 아이돌 메이크업의 영향이 확실히 크다”고 했다. 신 교수도 “전에는 남성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면 ‘게이’냐며 오해하기도 했지만 이런 편견은 확실히 줄었다”며 “남성 아이돌의 화장이 진해지면서 남성 화장에 대한 수용도도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이순녀의 시시콜콜]바비 인형과 캡틴 마블

    [이순녀의 시시콜콜]바비 인형과 캡틴 마블

    1959년 3월 9일, 미국 뉴욕 세계장난감박람회에 등장한 마텔사의 신제품 인형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록한 허리와 긴 팔다리 등 비현실적으로 굴곡이 과한 몸매에 흑백 줄무늬 수용복을 입은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이 인형은 단숨에 전세계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첫 해에만 30만개가 팔렸다. 수십 년간 ‘미의 기준’으로 여겨져온 바비 인형이다. 올해 환갑을 맞은 바비 인형은 마텔사 공동창업자인 루스 핸들러가 독일의 성인 남성용 인형 캐릭터를 본따 아동용으로 만든 것이다. 파격적인 아이디어의 배경에는 자녀애가 있다. 어린 딸이 아기 인형으로 엄마 놀이만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성인 여성 모습의 아동용 인형을 처음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바비’란 이름도 딸 ‘바바라’에서 따왔다. 출시 당시 부모들은 성적 매력을 과하게 부각시킨 외양때문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소녀들은 핸들러가 의도했던 대로 미래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바비 인형에 열광했다. 바비 인형이 걸어온 길에는 빛과 그늘이 모두 드리워져 있다. 오랫동안 패션과 대중문화에서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누리며 전세계에서 10억개가 팔리는 영예를 누렸지만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대한 논란과 비판도 거셌다.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바비 인형의 변신을 이끌어 냈다. 1968년 크리스티라는 첫 흑인 바비 인형이 나온 이래 다양한 인종, 다양한 피부색은 물론 통통하거나 키가 작은 바비 인형도 속속 태어났다. 60주년인 올해에는 휠체어를 탄 인형과 의족을 달고 있는 모습까지 등장해 아이들에게 다양성의 가치를 심어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바비 인형의 지난 60년 세월은 페미니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비현실적인 신체 비율로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겼다는 오명을 씻어내긴 어렵지만 출시 초기부터 우주비행사, 외과 의사, 공군 조종사 등 ‘직업인 바비’ 시리즈를 통해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온 직업의 경계를 허문 점은 평가할 만하다. 이런 이유에서 마블 영화 사상 최초로 여성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 ‘캡틴 마블’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슈퍼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남성이었고, 여성은 주인공의 연인이나 조력자에 불과했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들의 능력이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여성 슈퍼 히어로도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주연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은 “젊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를 당하고, 남성 네티즌들의 무지막지한 악플에 시달리고 있지만 흥행 전선은 오히려 불붙고 있다. 개봉일에 46만 857명을 불러모으며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3일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바비 인형과 캡틴 마블. 언뜻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여성 캐릭터지만 진화하는 페미니즘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닮은 모습이 엿보인다.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자기 팔 물어뜯은 침팬지, 알고보니 관람객이 던진 마약 복용

    자기 팔 물어뜯은 침팬지, 알고보니 관람객이 던진 마약 복용

    노르웨이 한 동물원에서 누군가 울타리 안으로 던진 액체를 마신 침팬지가 이상행동을 보이는 일이 발생했다. 데일리메일은 6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최대 도시 크리스티안산에 위치한 디레파르켄 동물원의 유일한 침팬지 율리오(39)가 관람객이 던진 물병 속 액체를 마신 뒤부터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해당 동물원 수의사인 롤프 아른 올버그는 “멀쩡하던 율리오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물어뜯기 시작해 사육사들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밝혔다. CCTV 보안 카메라 영상을 확인한 사육사들은 울타리 안으로 떨어진 물병 속 액체를 마신 뒤부터 율리오가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을 확인했다. 동물원 측은 율리오가 평소 탄산음료를 즐겨 마셨으며 해당 액체 역시 탄산음료인 줄 알고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다행히 율리오는 물어뜯은 팔을 꿰매는 수술이 끝난 뒤 이상행동을 멈췄다.  율리오의 혈액과 소변을 채취해 정밀검사를 한 동물원 측은 율리오의 혈액에서 불특정 다량의 마약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침팬지가 마신 것은 단순 음료가 아닌 마약이었던 것. 수의사 올버그는 “검출된 마약의 양으로볼 때 침팬지 상태가 이 정도인 것만도 다행이다. 율리오는 죽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체 조사를 끝마친 디레파르켄 동물원은 사건을 경찰로 넘기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사육사들은 누가 마약을 침팬지 우리에 던졌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율리오는 1979년 아직 새끼이던 때 어미에게 거부당한 뒤 지금의 동물원 원장 가족에게 입양되면서 유명해졌다. 1981년에는 노르웨이 방송사가 제작하 어린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후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있는 동물로 자리잡았다.  한편 노르웨이 경찰은 목격자의 증언과 CCTV 영상, 물병 등 증거품을 토대로 침팬지에게 마약을 던진 용의자를 추적하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이미숙 촬영거부 ‘오늘도 배우다’ 제작진에 “미친 거 아니야?” 분노

    이미숙 촬영거부 ‘오늘도 배우다’ 제작진에 “미친 거 아니야?” 분노

    배우 이미숙이 제작진에 촬영거부를 선언한다. 오늘(7일) 오후 9시 40분 방송되는 MBN 예능프로그램 ‘오늘도 배우다-오.배.우’(이하 ‘오배우’)에서는 제주도에 무(無)계획, 무(無)준비로 즉흥 여행을 떠나는 오배우의 좌충우돌 여행기가 펼쳐진다. 즉흥여행의 리얼함을 살리기 위한 제작진의 깜짝 이벤트(?)에 멤버들은 전원 집단 반발을 일으키고야 만다고. 이날 운동회 일정으로 모인 오배우 김용건, 박정수, 이미숙, 정영주, 남상미는 어느 때와 같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촬영장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 공항에 버스가 멈추자 화기애애한 버스안의 기류가 급 냉각됐다고. 특히 이미숙은 공항에 도착 후 오늘의 일정이 공개되자 “미친 거 아니야?”라며 분노를 폭발, 급기야 “나 안갈 거야”라며 강력하게 어필해 제작진을 애타게 만든다. 제작진에게 또 한 번 속은 다섯 배우들의 각양각색 반응들이 안방극장을 폭소로 들썩이게 만들 예정이다. 이에 버럭 귀염 박정수는 “언니가 라떼 사줄게”라며 평소와 다른 달달한 말투로 이미숙을 살살 달랜다고 해 이미숙이 분노를 삭이고 무사히 제주 여행길을 함께 오를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요즘 문화 완전 정복을 노리는 오배우의 제주도 즉흥 여행기는 오늘(7일) 오후 9시 40분에 방송되는 MBN ‘오늘도 배우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PD수첩’ 방용훈 사장 아내 故 이미란 죽음 의혹 추적.. “살아보려 애썼는데”

    ‘PD수첩’ 방용훈 사장 아내 故 이미란 죽음 의혹 추적.. “살아보려 애썼는데”

    ‘PD수첩’이 조선일보 대주주이자 코리아나 호텔 방용훈 사장의 부인 이미란 씨의 죽음에 대해 재조명했다. 지난 5일 방송된 MBC ‘PD수첩’에서는 방용훈 사장의 부인 고(故) 이미란 씨 사망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됐다고 보도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란 씨는 지난 2016년 9월 1일 한강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고인이 사망 전 친오빠에게 남긴 음성메시지에는 남편 방용훈의 이름이 언급됐다. 고인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조선일보 방용훈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겁은 나는데 억울함을 알리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방용훈 사장은 고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 둘째 아들이자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동생이다. 그는 코리아나 호텔 사장이면서 조선일보 4대 주주다. ‘PD수첩’ 보도에 따르면, 이미란 씨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전 4개월 동안 지하실에서 지냈다. 고인은 유서에 “4개월 간 지하실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냈고 강제로 끌어내 내쫓긴 그날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썼다. 또한 자녀들에 의해 사설 구급차에 실려 집에서 쫓기듯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어 “제 시도가 실패할 경우 방용훈이란 남편이 어떤 가혹한 행위를 할지 죽기로 결심한 두려움보다 그게 더 무섭다”고 말했다. 방용훈 사장이 고인에게 폭행을 해 온 사실도 적었다. 이 상황을 목격한 전 가사도우미는 “사모님이 안 나가려고 소파를 잡자 (자식들이) ‘도둑년아 손 놔’, ‘손 잘라버려’라고 외쳤다”면서 “자기네는 1층에서 파티처럼 밥 먹고 깔깔댔지만 사모님은 지하실에서 아침에 고구마 2개, 달걀 2개 먹고 나중에는 입에서 썩은 내가 올라올 정도로 속이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용훈 사장은 ‘PD수첩’ 측에 “우리 마누라가 애들을 얼마나 사랑한지 아세요? 우리 애들이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부인이 죽고, 이모가 고소를 하고, 할머니가 애들을 고소하고. 그 이유는 왜 안 따져보는가? 제 입장이 한번 돼 보시라. 저는 한가지로만 말씀드리고 싶다. 사람하고 이야기 하고 싶다”고 반박했다. ‘PD수첩’의 보도에 따르면, 고인과의 가정 불화는 유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용훈 아들 방모씨는 경찰 조사에서 20년 전 방용훈 사장이 어머니 이미란 씨에게 50억원을 맡겼는데 그 돈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미란 씨 언니는 “동생이 죽기 세 달 전쯤 너무 놀랐다고 말하더라. 남편이 자기한테 준 돈이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다시피 했다. 그런데 (방용훈 사장이) 아들 돈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네가 알아서 (돈을) 찾아서 가져라. 엄마가 돈을 다 썼기 때문에 유산이 한 푼도 없다’고 (방용훈 사장은 아들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고인의 어머니는 “친정에서 돈 빼돌렸다는 말 밖에 할 얘기가 없을 것”이라며 “그래서 우울증으로 죽었다고 밖에는 할 얘기가 없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란 씨의 친오빠는 “이혼을 생각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변호사들이 몸을 사렸다. 자신들에게 이야기한 내용도 없애라고 하더라. 법무법인이 망한다고”라고 했다. 경찰은 이 씨의 큰 딸과 큰 아들을 공동존속상해 혐의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으나 검찰은 강요죄로 죄명을 변경해 기소했다. 이미란 씨의 사망 이후에도 문제는 계속됐다. PD수첩은 2016년 11월 1일, 방용훈 사장과 아들이 각각 얼음도끼와 돌멩이를 들고 고인의 친언니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들기고 현관을 걷어차는 등 모습이 담긴 CCTV를 공개했다. 당시 방용훈 사장은 아들을 말리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CCTV에는 오히려 아들이 방용훈 사장을 말리는 모습이 담겼다. 그러나 용산경찰서는 방용훈 사장에게 불기소(혐의없음) 의견을 냈다. CCTV 자료에서 방용훈 사장이 아들을 말리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 CCTV 내용과 다른 결론에 제작진은 당시 수사를 했던 용산경찰서 이 모 경위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 경위는 CCTV 확인 요청을 거부했다. 외압이나 청탁이 있었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PD수첩’이 이 사건에 대해 방용훈 사장에 묻자 그는 오히려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게 쉽다”면서 “녹음하고 있을 테지만 편집하지 말고 확실히 해라. 살면서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 이건 협박도 뭐도 아니다”라고 했다. 한편,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된 ‘PD수첩’은 6.2%(이하 전국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는 올해 방송분 중 가장 높은 시청률 기록이다. 사진=MBC ‘PD수첩’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국경없는 예능…국뽕 기댄 예능

    국경없는 예능…국뽕 기댄 예능

    “작위적 설정·칭찬 남발에 시청자 거부감” 종영 ‘미수다’ 등 프로그램은 비판도 담아외국인이 대거 등장해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토론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어느덧 흔한 포맷이 됐다. 비슷한 형식 안에서도 차별화된 재미를 보여 주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외국인 예능들이 하나같이 스스로 만든 ‘국뽕’(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과도한 자국 찬양을 비꼬는 신조어)의 함정을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 20일 14회를 끝으로 시즌1 방송을 마친 올리브 예능 ‘국경없는 포차’는 방영 내내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국뽕있는 포차’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됐다. ‘국경없는 포차’는 프랑스 파리의 센 강변과 도빌 해변, 덴마크 코펜하겐 등에서 국내 연예인 출연자들이 한국식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현지 손님들과 교감하는 형식의 예능이다. 올리브와 tvN 합산 시청률 2~3%대로 시청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각종 논란으로 온라인상에서는 화제가 됐다. 첫 회에서 포장마차 홍보에 나선 샘 오취리는 그를 알아본 현지인들의 사진 요청에 단숨에 ‘글로벌 슈퍼스타’가 됐다. 영업 첫날 닭똥집, 떡볶이 등을 맛본 파리지앵들은 ‘영혼이 탈주’할 만큼 반했고,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이후 찾아오는 손님들의 면면도 눈길을 끌었다. 젊은 영국인 커플은 안정환을 알아보고 2002년 월드컵에 대해 얘기하는가 하면, 프랑스의 한 미남 배우는 ‘우연히’ 혼자 포장마차에 찾아오기도 했다. 기타를 든 악사는 갑자기 프랑스어로 개사한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불렀고, 덴마크에서는 퇴계 이황의 팬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는 등 매회 놀랄 만한 일들이 펼쳐졌다. 덴마크 싱어송라이터는 방송 출연 후 얼마 안 있어 한국 쇼케이스를 열기도 했다. 기분 좋은 수준의 자화자찬을 넘어 지나친 ‘국뽕 연출’과 ‘주작’(없는 사실을 꾸며 만듦)이라는 여론이 계속되자 제작진은 “시청자가 의심하는 섭외는 없었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덴마크 마지막 편에서 인기 록밴드 마이클 런스 투 록(MLTR)과 ‘덴마크의 BTS’라는 크리스토퍼가 출연할 때는 ‘섭외’를 명시했다.2017년부터 방송 중인 MBC 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온라인상에서 ‘어서와~ 국뽕은 처음이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 출연자의 친구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해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포맷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단기간 관광으로는 다 알기 힘든 한국 문화를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는 재미가 있지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연출에 눈살을 찌푸려질 때도 있다. 예컨대 한강변 편의점 즉석라면의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에 채식주의자로서의 정체성마저 잠시 포기한 호주 친구가 연신 “맛있다”며 감탄하는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다. 스튜디오에 있는 한국인 패널들은 “한국 사람 다 됐다”며 장단을 맞췄다. 자화자찬 연출과 편집에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한몫한다. ‘한국은 처음이지’ 출연자들 중 칭찬 일색의 감상만 쏟아 낸 친구들은 시청자들의 호감을 사고 재출연까지 하는 반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한국 문화를 이질적으로 느끼는 듯한 출연자에게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구독자 300만명이 넘는 인기 유튜버 ‘영국남자’의 콘텐츠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영국 친구들이 한국 음식을 처음 맛보는 게 핵심 콘텐츠인 그의 유튜브 방송은 대부분 감동에 빠진 반응이어서 인기가 높다. 잘생긴 백인 영국남자가 우리나라의 온갖 음식점 광고 모델로 활약하는 이유다. 과거 ‘미녀들의 수다’, ‘비정상회담’ 등 외국인 출연 예능이 외국인 시각에서 한국 문화의 장점을 보여 줘 자긍심을 높이면서도 곱씹어 볼 만한 비판을 곁들였다면 최근 외국인 예능은 한국 문화에 대한 자화자찬 일색에 가깝다. 관련 예능의 설정들이 ‘국뽕 치사량’에 이르렀다는 시청자 반응마저 나온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은 처음이지’가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면서 ‘국뽕’ 설정이 흥행코드로 인식됐고, 한류 등으로 국민적인 자긍심이 높아지면서 달라진 위상을 외국인들의 시선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다만 그런 프로그램이 한두 개 정도 있는 것은 괜찮지만 작위적인 설정을 동원해 칭찬을 남발하는 것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으로 반발을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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