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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입항 때 전범기 내려라” 서경덕, 日 해군에 항의메일

    “제주 입항 때 전범기 내려라” 서경덕, 日 해군에 항의메일

    다음 달 10~14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2018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 자위대가 ‘전범기(욱일기)’를 달고 참가할 예정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는 일본 해상 자위대 측에 “제주 입항 때 전범기는 달지말라”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13일 밝혔다. 서 교수는 이메일을 통해 “행사에 초대를 받아 참가하는 것은 좋으나,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를 군함에 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제대로 직시한다면, 스스로 달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독일은 전쟁 후 ‘나치기’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 후 잠시 동안만 사용을 안 하다가 다시 전범기를 부활시킨 것은 제국주의 사상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다. 부디 독일을 보고 좀 배워라”라고 질타했다.서 교수는 무라카와 유타카 해상막료장(해군참모총장)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와 함께 전범기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담긴 동영상 CD를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서 교수는 “우리 해군은 국제법상 일본 함정이 전범기를 단 채 제주 해상에 정박해 있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국민이 이해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자국민의 정서를 무시한 처사”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이번에 전범기 다는 것을 한국에서 제대로 대응 안 하면, 일본은 또 다른 곳에서 이번 일을 사례로 들며 전범기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 뻔하다. 그렇기에 이번에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서경덕 교수는 2018 러시아 월드컵 공식 인스타그램에 사용된 전범기 응원사진을 교체하는 등 세계적인 기관 및 글로벌 기업에서 사용해온 전범기 디자인을 꾸준히 바꿔오고 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슈퍼푸드 먹었더니 가슴 커지는 부작용” 호주 모델 경고

    “슈퍼푸드 먹었더니 가슴 커지는 부작용” 호주 모델 경고

    호주의 한 패션모델이 건강을 위해 섭취한 슈퍼푸드 때문에 가슴이 커지는 부작용이 생겼다고 밝혀 화제다. 12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 호주판 보도에 따르면, 호주 바이런베이 출신 패션모델 브리짓 쿠퍼가 최근 ‘마카’ 분말을 복용하고 나서 가슴 크기가 풀C컵에서 E컵으로 변했다고 밝혔다. 가슴 크기가 왜 그렇게 갑자기 커졌느냐는 팬들의 질문에 이와 같이 답한 것. 또한 그녀는 건강을 챙기기 위해 슈퍼푸드로 알려진 마카 분말을 먹기 시작했지만 한 달 만에 가슴이 이렇게 커진 데다가 생리 주기가 2주로 짧아지는 부작용이 생겨 두 달 전쯤 복용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리뷰를 보니 자신처럼 가슴이 커졌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자신은 살이 찌면 가슴부터 커지는 체질이며 친언니 역시 마찬가지라면서 겨울 동안 살이 쪘을 때 이렇게 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마카에는 여성 호르몬의 균형을 맞춰주며 그 과정에서 에스트로겐이 생성된다. 이에 따라 여분의 에스트로겐은 특히 배와 가슴 그리고 엉덩이에 지방이 쌓이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카 분말이 자기 가슴을 커지게 한 원인이라고 100%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부작용으로 생각되므로 이를 복용할 경우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때문에 지금도 자신의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놀림을 받고 있다면서 현재 이런 모습이 즐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팬은 그녀의 변화에 매료돼 마카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한 여성 네티즌은 자신의 친구에게 “우리는 마카를 복용해야 한다! 진지하게”라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난 지금 마카 분말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마카를 검색할 것”이라는 농담을 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한편 마카는 페루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뿌리 식물로 산삼의 사포닌 같은 특정 성분이 함유돼 국내에서는 ‘페루의 산삼’으로도 알려졌다. 마카는 과거 잉카 제국시대 전사들이 체력 보강용으로 사용했으며, 요즘에는 면역력 개선이 필요한 사람이나 불임을 고민하는 여성, 심신이 허약한 노약자, 갱년기 남성 등이 주로 찾고 있다. 미국에서는 우주인의 생리 기능 부조화를 개선하고 체력 증진을 돕는 우주식품으로 이용하고 있다. 사진=브리짓 쿠퍼/인스타그램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60년간 2000배 늘어난 우주쓰레기

    60년간 2000배 늘어난 우주쓰레기

    초속 8㎞로 돌면서 통신위성 등 위협 자동파괴·대기권 소각·그물 수거 연구 군사위성 비공개… 우주교통관리 골치# 올 초 중국의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 1호’가 지구에 추락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세계 각국은 비상이 걸렸다.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대부분이 소멸되겠지만 만에 하나 작은 조각이라도 인구밀집지역에 추락하는 경우 심각한 피해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톈궁 1호’의 잔재는 남태평양 해상에 떨어져 아무런 피해는 없었다. # 유럽우주국(ESA)에서 2010년 환경 감시 및 연구 목적으로 발사한 크라이오샛2(CryoSat2)는 지난 7월 2일 임무 고도인 700㎞ 상공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상관제국에서 위성을 향해 작은 우주 파편조각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긴급 강제 조종 모드로 바꿔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다. 1억 4000만 유로(약 1829억원)가 투입된 위성이 무용지물이 될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인공위성 95% 수명 다해 ‘좀비’ 전락 1957년 10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가 발사된 이후 수많은 위성이 우주로 올라가면서 토성의 고리처럼 지구 주변을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 현재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 위성 중 약 95%는 수명이 다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좀비’ 위성이다. 여기에 로켓 잔해, 위성에서 떨어져 나간 페인트 조각, 나사, 심지어 우주비행사가 우주 유영 중에 놓친 공구까지 수많은 우주쓰레기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이런 우주쓰레기들은 지구 궤도를 초속 8㎞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 운동하는 물체의 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1㎝ 이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정상 작동하는 인공위성과 충돌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 최신호에서는 민간 우주기업이 증가하면서 지구 주변을 도는 우주쓰레기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우주공학자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분석 리포트를 발표했다. ESA가 지난 5월 발표한 ‘우주환경 연간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1957년 이후 우주 물체는 1970년대 2000개, 2000년대 7500개, 2017년 현재는 2만여개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적으로 400개 이상의 위성이 발사됐다. 이는 2000년대와 비교했을 때 4배 이상 증가한 숫자다. ●부딪치면 파편 생겨 기하급수적 증가 미국 퍼듀대 항공우주공학과 캐럴린 프루에 교수는 “각종 우주물체가 지구 궤도를 가득 채우면서 우주공학자들은 이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잠재적 충돌 위험성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루에 교수는 “문제는 우주쓰레기와 부딪친 위성들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파편들을 또 만들어 내기 때문에 우주쓰레기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우주공학자들은 고열을 이용해 우주쓰레기를 태우거나 압축하는 방안, 위성이 수명이 다 되면 완전 분해에 가깝게 자체 파괴되도록 하는 방법, 우주쓰레기 수거용 위성을 발사해 거대한 그물로 수거하는 방안들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상에서 우주쓰레기에 레이저를 발사해 경로를 바꾼 뒤 지구로 떨어지도록 해 대기권에서 태워버리는 방법도 구상되고 있지만 당장 현실화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우주공학자들은 우주공간에 떠다니는 우주물체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새로운 위성을 우주쓰레기와 다른 궤도에 올리는 ‘우주교통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텍사스 오스틴대 모리바 자 교수는 “우주쓰레기로 인한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각국 정부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발사된 위성들의 정보까지 모두 포함시켜야 하는데 이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우주교통관리 시스템 도입에 걸림돌”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항모기동부대, 봉인깨고 나오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항모기동부대, 봉인깨고 나오다

    지난달 26일, 일본 사세보(佐世保)와 구레(吳) 해군기지에서 3척의 대형 전투함이 출항했다. 일본 서부 해역을 담당하는 제4호위대군 소속 전투함들로 구성된 이 함대는 제4호위대군 사령관 후쿠다 타츠야(福田達也) 해장보(海将補·해군소장)의 지휘 하에 편성된 일명 『ISEAD18』, 즉 인도-남중국해 임무부대(Indo Southeast Asia Deployment)-2018였다. 태평양에 모습을 드러낸 이 함대의 위용은 마치 미니 항모전단을 방불케한다. 공식 발표된 배수량은 2만 7000톤이지만 실제 크기는 미 해군 4만톤 급 강습상륙함 수준인 최신형 헬기항모 카가(かが)를 기함으로 일본 자체 기술로 개발한 미니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7,000톤급 최신형 방공구축함 스즈스키(すずつき), 6,000톤급 다목적 구축함 이나즈마(いなづま) 등 3척의 대형함정과 800여 명의 병력이 ISEAD18의 전력이다. ISEAD18이 미니 항모전단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전력 때문이다. 기함인 카가는 일본이 굳이 호위함(護衛艦)이라는 분류명을 붙이고 있지만, 크기나 형상, 설계 등 모든 면에서 사실상 항공모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군함이다. 길이 248m, 폭 38m가 넘는 비행갑판과 넓은 격납고를 이용해 최대 28대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으며, F-35B 전투기의 경우 별다른 개조 없이도 14대까지 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선체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갑판에 내열 처리만 한다면 미 해군의 와스프(Wasp)급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스키점프대 설치 없이도 당장 F-35B 운용이 가능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일본 방위성은 이 군함을 항공모함으로 전용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항모 임무 부여를 위해 여유 출력도 매우 넉넉하게 잡았고, 항공기용 유류고와 탄약고로 사용될 공간도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차후 미국 정규 항공모함처럼 사출식 함재기 운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전자기사출기(EMALS) 설치를 위한 예비 공간도 마련해 두었다. 방위성은 초기에는 이 군함의 항모 개조설을 부인했지만, 현재는 집권 여당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방어형 항공모함’이라는 이름으로 항모 개조 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카가를 호위하는 호위전력도 막강하다. 방공구축함으로 ISEAD18에 합류한 아키즈키급 구축함 스즈스키는 일본이 자체 개발한 위상배열레이더 FCS-3A를 탑재한 고성능 방공구축함이다. 미국 이지스함의 SPY-1 계열 레이더보다 더 진보한 질화갈륨(GaN) 소재 송수신모듈을 적용, 강력한 탐지 능력을 자랑하며 ESSM 함대공 미사일을 이용해 50km 거리에서부터 10개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이 군함에 최대사거리 460km인 미국제 SM-6 함대공 미사일과 최대 100km 이상 사거리를 갖는 자국산 03식 개량형 함대공 미사일 탑재 개량 사업을 진행 중인데, 이렇게되면 사실상 미국의 정규 이지스함에 필적하는 방공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한 척의 호위함인 이나즈마 역시 동급 범용 전투함 중에는 탑클래스 수준에 들어가는 전투함이다. 비록 회전식이지만 능동위상배열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으며, 32기의 수직발사관에 쿼드팩 방식의 ESSM 함대공 미사일 최대 128발을 탑재하고 동시에 최대 8개의 표적을 공격할 수 있다. 함수소나와 예인소나, SH-60K 해상작전헬기까지 탑재해 대잠 작전 능력도 우수하다. 일본이 군사작전을 목적으로 전투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공해상으로 내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2척의 군함을 묶어 군사외교 차원에서 해외 순방을 하거나, 소말리아 일대에서 해적 퇴치 활동을 했던 사례는 있었지만 부대 이름에 해외 전개(Deployment)라는 용어, 즉 특정 지역에 일정 기간 군함을 파견해 군사작전을 펼치는 개념의 파병은 해상자위대 창설 이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전개 개념의 해외 파병은 군사력의 해외 투사를 금지해온 평화헌법과 전수방위(専守防衛)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해외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해외에서도 자위대의 군사작전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11개 관계법령의 제·개정을 강행 처리한 뒤 자위대의 군사력과 해외 작전 능력 강화를 위한 노력에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에 출항한 ISEAD18 함대의 기함인 카가는 구일본제국 해군 항공모함 이름에서 함명을 따왔다. 카가는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중국 상하이 일대에 군 기지·민간 시설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을 일삼았던 악명 높은 군함이었으며, 태평양전쟁 시발점이었던 진주만 공습작전의 선봉에 섰던 배이기도 하다. 동행한 스즈즈키 역시 태평양 침략전쟁에서 동남아시아 일대로 침략군을 실어나르던 수송함대를 호위하는 제61구축함전대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구일본제국해군 스즈즈키(すずつき)에서 함명을 따 왔으며, 이나즈마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와 중국대륙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이카즈치(いかずち)급 구축함 이나즈마에서 이름을 따왔다. 전후 해상자위대 최초의 해외 임무 전담 함대의 구성 전투함들 모두가 공교롭게도 과거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군함들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들 함대는 사세보와 구레를 출항한지 4일만에 필리핀 서북 해상에서 미 해군 제7함대 소속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타격전단(Ronald Reagan Carrier Strike Group)과 합류했다. 이들은 남중국해에서 연합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며 중국에 대한 압박에 나섰는데, 이는 앞으로의 서태평양 세력구도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신호탄과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평화헌법이라는 봉인에 묶여있던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라는 명분하에 미군과 인도-태평양 전역을 휘젓고 다닐 것이다. 이미 해외 전개용 함대를 만들어 각지의 바다를 누비고 있으며, 멀리 중동에는 전후 최초의 해외 전진기지까지 건설해 군사력을 파견해 놓고 있는 상태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과 위협이 커질수록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더욱 노골적으로 지원할 것이며,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지역 패권 장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115년전, 세계 최강 패권국이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의 지원 하에 군사력을 키워 러시아를 격파한 뒤 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던 전례가 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의 태평양 진출 저지라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얻어 눈부신 경제발전과 세계 2위의 해군력을 건설한 바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일본은 초강대국을 등에업고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했던 과거 사례처럼 이제는 미·중 패권경쟁 구도를 이용해 또 한번의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역사의 반복이 일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러시아를 겨냥해 연마됐던 일본의 칼끝이 러시아를 쓰러뜨린 뒤 한반도와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향했던 것처럼 지금 중국을 겨냥해 커지고 있는 일본의 군사력이 미래 국제 정세 구도 변화에 따라 또다시 한반도로 향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키우는 한편, 일본을 제어할 수 있는 초강대국을 우리 편으로 붙잡아두기 위한 지혜로운 외교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 伊철거 극장 바닥에 숨겨진 ‘로마시대 금화’ 무더기 발견

    伊철거 극장 바닥에 숨겨진 ‘로마시대 금화’ 무더기 발견

    이탈리아의 한 폐극장 철거 현장에서 5세기 때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화가 무더기로 발견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9일(이하 현지시간) 이탈리아 현지언론을 인용해 지난 5일 이탈리아 북부 코모에 있는 크레소니 극장 철거 현장에서 발견된 오래된 용기 속에 로마제국 시대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화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 금화는 연대 결정을 위한 조사 이후 박물관에 보관될 예정이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에 발견된 금화들에는 수백만 유로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고고학자 루카 리날디는 현지언론 ‘쿠이 코모’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금화는 상품이 아니므로 정확한 가치를 말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이번 발견은 이례적이므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5세기 때 만들어진 이 금화들은 보존 상태가 너무 좋아 연대 결정조차 매우 빠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알베르토 보니솔리 이탈리아 문화부장관은 “우리는 이번 발견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아직 알지는 못한다"면서 "다만 이 지역은 실제로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금화가 발견된 크레소니 극장은 1870년 문을 연 뒤 1997년 문을 닫았으며 얼마 전부터 호화 주택을 짓기 위해 철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추가 발굴을 진행해야 하므로 철거 공사는 잠정 중단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이탈리아 문화부/페이스북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여운형 계열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워 자본주의적 퇴폐풍조 모더니즘 작품 함께 월남한 가족들 두고 홀로 北으로김기림은 해방 공간에 북한으로 간 것으로 돼 있다. ‘간 것으로 돼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190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 이후 스스로 북행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치돼 북으로 끌려갔다는 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납북설이 유력하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건으로 좌익으로 분류되면서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해금된 1988년 이전까지는 자진 월북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기림 연구자인 서울대 국문과 김유중 교수는 “최근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게 다수 의견”이라는 학계 분위기를 전한다. 좌익단체에 몸담은 것은 사실이나 순수 좌익이라기보다는 여운형 계열의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웠던 점, 가족과 더불어 월남했고 북으로 갈 때도 가족과 동행하지 않은 점, 이미 북한에서 지주 계급이라는 이유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는 점, 북에서의 행적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른 월북 문인들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대우받은 흔적조차 없는 점, 결정적으로 임화나 김남천 등 좌익 문인들이 남로당 불법화 이후 북행길에 올랐을 때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도 월북하지 않았던 점 등이 그 이유라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김 교수는 신문 보도, 탈북자 정보, 김기림을 아는 지인의 얘기 등을 종합할 때 그의 북한 행적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가 1958년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간첩죄로 체포된 북한군 정치부사단장 출신의 증언이다. 증언에 따르면 김기림, 정지용은 북한에 가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집필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본다”고 했다.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했으며, 자본주의적 퇴폐풍조로 분류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 창작활동을 한 그를 북한 당국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가 김기림이 북한에 가자마자 교도소 수감 생활을 했는데 친척, 지인, 제자들이 탄원서를 내 풀려났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한 차례 숙청을 당한 몸이라 좋은 보직을 얻지 못하고 평양에 있는 극장의 말단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남편과 별거 중인 극장 아나운서와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숙해도 못마땅할 놈이 부화뇌동해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당국의 눈총을 받고 재수감되었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까지 붙어 있다. 김기림은 7살 때인 1915년 임명 보통학교에 입학, 서울로 와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1930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와 시론들을 집중 발표했다. 문인과 기자로서 한창 명성을 얻던 1936년, 신문사를 휴직한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홀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졸업 이후 조선일보에 복직한 그는 학예부로 소속을 옮겨 보다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개시를 전후하여 신문사가 폐간되고, 총독부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그는 고향인 성진으로 가 한동안 인근의 경성(鏡城)고보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간간이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해방과 더불어 문단에 복귀한 그는 모더니즘의 실질적인 청산을 선언하며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한다.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 조선대 등에서 강의했다. 1930년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신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진출하였고, 시집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와 수필집 ‘바다와 육체’(1948), 시론집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49) 등을 냈다. 상당 기간에 한국에서는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의 시집의 소지조차 금기시됐으나 1988년 해금 조치되면서 출간이 잇따르고 연구도 활발하게 됐다.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으로 간 김기림 기념비 日에 건립… 평화 추구한 시인 재평가 되길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으로 간 김기림 기념비 日에 건립… 평화 추구한 시인 재평가 되길

    시인 김기림(金起林)의 기념비가 일본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대학 구내에 11월 30일 건립된다. 김기림 시비는 그가 다닌 서울 보성고(송파구 방이동)에 있으나 일본에 기념비가 건립되기는 처음이다. 일제 시대 교토의 도시샤대학을 다닌 윤동주(1917~1945) 시인의 기념비가 1995년 2월, 정지용(1902~?) 시인의 시비가 2005년 12월 도시샤대학 구내에 건립된 바 있다. 김기림이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다닌 도호쿠제국대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료 양성을 위한 도쿄·교토제국대학과는 달리 연구 중심의 대학을 표방하고 연구의 자유가 비교적 존중된 학교였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남기정 교수에 따르면 유대인 사상가 카를 뢰비트가 1936년부터 5년간 나치스를 피해 도호쿠대학에 재직했을 정도다. 1922년에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센다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기림이 도호쿠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아인슈타인에 있을 것이라고 남 교수는 추정한다.기념비 건립은 몇 년씩 걸리던 윤동주, 정지용 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센다이에서 김기림을 생각하는 한·일 시민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김기림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게 지난해 11월. 남 교수를 중심으로 김기림 연구의 권위자인 김유중 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진원 서울시립대 교수, 고선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교수 등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사업회가 기념비 건립준비위원회로 전환한 것은 지난 6월이다. 기념비 건립에 관심을 보인 외교부가 지원에 나서고, 도호쿠대학에서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준비위에 각계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다음은 기념비 건립위원회 한국 측 대표인 남기정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 →일본 정치 전공이다. 시인 김기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2년 도호쿠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우연히 김기림이 영문학과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살짝 흥분한 적이 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그가 평화를 중심으로 사고한 ‘평화주의자’임을 알게 됐다.→김기림 기념비가 윤동주 기념비, 정지용 시비와 다른 점은. -윤동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뒤 일본에 시집이 번역됐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희생된 시인이기 때문에 과거를 반성하는 일본 시민들이 ‘윤동주 읽기’를 전국적으로 전개했고, 평화운동의 상징적 의미로 읽혔다. 그에 비해 김기림은 일본에서는 덜 알려진 존재다. 센다이 지방에서 김기림을 일찍이 알고 공부한 아오야기 유코 같은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가 김기림을 읽는 모임을 만들고 자료를 축적해 책도 냈다. 기념비는 김기림을 일본에서 발굴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윤동주, 정지용 시비는 이미 알려져 있던 한국 문학가를 일본적 맥락에서 재평가하고 기리는 뜻이었다면 김기림 기념비는 그의 일본 행적, 문학적 성과를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도호쿠대학의 협조는 어느 정도인가. -부지 제공을 비롯해 대단히 협조적이다. 우에키 도시야 부총장이 7월 11일 서울에 왔을 때 김기림 얘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서 기념비 건립까지 생각하고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보다 3개월 전인 지난 4월 센다이총영사관에서 공공외교 차원에서 도호쿠대학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미 한·일 교류에 많은 관심을 총장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얘기가 빨랐다. 당시 도호쿠대학 측은 김기림의 학적부도 찾아서 보여줬다. 아쉽게도 졸업 논문은 센다이 폭격 때 불타고 없어진 듯했다. →부지는 결정됐나. -후보지 세 곳을 대학 측에서 제시했는데, 우리가 현장 답사해 보니 벚꽃 두 그루가 있는 개방적인 풀밭이 있었다. 여기가 더 좋겠다고 했더니 얼마 전 도호쿠대학 측이 “좋다”는 허가를 해줬다.→기념비 디자인은 누가 하는가. -시인 이상에 조예가 깊은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에게 상의를 했더니 관심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이상을 알아 봐준 김기림에 관심이 있다는데, 기념비에는 그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일정은. -10월에는 기념비를 발주하고 11월 29일 센다이에서 전야제를 가진다. 30일에는 기념비 제막식에 이어 ‘김기림과 평화’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센다이 시민 중심의 ‘문학의 밤’ 행사도 개최한다. 김기림이 한·일 시민사회를 가깝게 하는 상징이 되어 기념비가 세워진 뒤에도 모임을 갖고 연구가 진전이 됐으면 한다. 또한 남북 문인들이 김기림을 생각하는 기회도 마련됐으면 좋겠다. →기념비 건립의 의미라면. -김기림은 시도 시이지만, 많은 평론을 썼다. 해방 공간에서 시가 문학사에서 갖는 역할이 크지만, 김기림은 평론가로서, 경세가로서의 모습도 갖고 있다. 일본에 의해 굴절되지 않은 조선의 모더니즘을 그만큼 고민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왜 지금이냐’ 는 의미도 중요한데, 한반도의 그 시기를 살았던 지성인, 지식인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이념적 잣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남북이 평화 프로세스를 전개하면서 해야 할 것은 분단 정권 수립 이후 지나치게 양극단으로 가 있었던 부분들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통일과 화해로 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양극단 사이에 난 좁은 길에서 평화를 추구했던 김기림을 평가했으면 한다. 그는 정치적 주의·주장을 떠나 민족의 안팎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분열과 분단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marry04@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항일 기사’ 베델 고소… 英 두 번째 재판 후 中 감옥 수감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항일 기사’ 베델 고소… 英 두 번째 재판 후 中 감옥 수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이 만든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는 조선에서 신문 이상의 위상을 누렸다. 국채보상운동(1907~1908)을 주도했고 항일단체 신민회(1907~1911)의 산파도 맡는 등 독립운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국제 여론에 민감했던 일본은 자신들이 벌이던 만행이 신보와 KDN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는 사실이 매우 불편했다. 결국 베델을 조선에서 내쫓기로 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베델, 英·日 모두에 ‘눈엣가시’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의 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에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일본이 그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잘 묘사돼 있다.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1904년)하고 화폐개혁을 강제(1905년)할 때 베델은 신보와 KDN을 통해 음모를 폭로한다. 이때마다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나 탁지부(재정을 담당하는 중앙관청)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는 베델의 기사에 화를 내고 괴로워한다. 아래는 베델이 실제로 1907년 9~10월 신보와 KDN에 게재한 항일 관련 기사의 일부다. “서울 용산에서 한 조선인이 어린아이를 업은 부인을 데리고 일본군 병영을 지나갔다. 이때 한 일본 군인이 장난삼아 이들에게 총을 쐈다. 탄환이 여인의 옆구리를 관통해 아이 엄마가 즉사했다. 아이의 한쪽 손도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 아빠가 일본군군 병영에 뛰어 들어가 장교에게 항의했지만 되레 길거리로 쫒겨났다.”(KDN 9월 3일자) “수원에서 10여㎞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과 조선 의병 간 전투가 벌어졌다. 30명의 의병이 일본 군대에 포위돼 대부분 잔인하게 사살됐다. 일본군 장교는 분이 덜 풀린 듯 생포한 이들을 모두 끌어내 목을 베었다.”(KDN 9월 26일자) “한국 국민들이여! 독립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지 않은가? 미국과 그리스, 이탈리아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라. 지금 이들 세대가 누리는 행복은 바로 조상들의 피로 얻은 것이다.”(신보 10월 1일자)일본은 베델이 신보와 KDN을 창간할 때부터 진의를 의심했다. 그가 반일 논조를 고수하는 이유가 신문 창간 자금이 고종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것으로 봤다. 쉽게 말해서 그가 조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종과 러시아가 재정지원에 나서기 좋을 만한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 학계에는 베델이 러시아 스파이였다고 의심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베델 연구 1인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일본은 베델과 러시아 간 연관성을 찾고자 전방위적으로 나섰지만 어떤 증거도 잡아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日, 본격적인 베델 추방 공작 추진 1906년 12월 영국 ‘트리뷴’지에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칙서가 게재됐다. 영국기자 더글러스 스토리가 목숨을 걸고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 그러자 베델도 이듬해 1월 신보와 KDN에 이 기사를 전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조선이 일본에 자발적으로 외교권을 넘겼다”고 주장해 온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베델은 일본뿐 아니라 고향인 영국에서도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영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이권을 함께 나눠 갖고자 체결한 조약)으로 두 나라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때여서 그의 행보는 영국 입장에서도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하면 그를 조선에서 추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공작을 시작했다.일본은 1898년 태국에서 ‘태국자유신문’이라는 영자지를 발행하다가 추방된 J J 릴리라는 영국인 사례를 베델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살폈다. 릴리가 영국 정부의 동의하에 추방됐기 때문에 베델도 같은 절차를 거치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릴리 추방 당시 영국 하원이 이를 정쟁화했던 경험이 있어 영국 정부로서는 선뜻 베델의 추방을 묵인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영국 외무부는 베델을 굳이 추방까지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신보와 KDN이 재정난으로 휴간과 복간을 반복해 가만 내버려두면 곧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영국의 불확실한 입장 등을 감안해 베델을 직접 추방하려던 계획을 접고 영국 사법당국에 그를 고소해 처벌받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국 외무부는 “가능한 한 일본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겠지만 영국인이 조선에서 누리는 치외법권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재판에 나섰다.●첫 번째 재판 ‘치안 방해’ 혐의 6개월 근신형 베델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열렸다. 한국인과 영국인, 일본인이 참석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일본은 “베델이 신보를 통해 조선인들의 폭동을 선동한다”면서 “신보의 논설이 그대로 의병대의 창의문으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1871~1938)이 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베델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 방해’였다. 코번은 베델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본국의 제국주의 논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재판은 오전 11시에 시작돼 오후 4시 30분에 마무리됐다. 다음날 아침 코번은 베델에게 6개월 근신형을 명하고 보증금 300파운드를 납부하게 했다. 통감부 일간지 서울프레스는 이에 대한 보도를 최소화하고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베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첫 재판 판결 뒤 베델은 항일 논조를 더욱 강경하게 이어 갔다. 1908년 3월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 암살 사건 등을 대서특필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제는 영국에 “베델을 추방해 달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영국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그를 다시 한 번 재판정에 세웠다. 이번에는 기존 ‘치안 방해’ 혐의에다가 ‘공금 횡령’을 추가했다. 그가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은 의연금을 마음대로 썼다는 죄목이었다.●‘공금횡령’ 혐의 추가 두 번째 재판선 실형 두 번째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간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렸다. 이 재판은 미국 AP통신이 직접 참관하며 취재할 정도로 국제적 관심이 컸다. 이번에도 영국총영사 코번이 판사로 나섰다. 재판 마지막 날인 18일 코번은 베델에게 3주간 금고형(6개월 근신 포함)을 판결했다. 첫 실형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었다. 결국 영국은 베델을 중국 상하이에 있던 영사관에 마련된 감옥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틀 뒤인 20일 베델은 서울역에서 기차로 인천에 이송됐다. 판결 이후 장기간 서울에 있으면 군중이 몰려와 반대 시위에 나설 것을 우려해서였다. 당시 인천과 상하이 간 정기배편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 군함 ‘클리오’호가 단 한 사람을 데리러 인천에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첫 번째 재판 때만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서울프레스는 이번에는 부록까지 발행하며 판결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상징적이나마 베델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무척 신이 났던 것 같다.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상하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6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6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6회>소녀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녀는 뭔가 비밀스런 내용을 말해주겠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끌어당겼다. 나는 곁눈질로 그들을 쳐다봤다. 소녀는 파리 스타일의 하늘거리는 실크 가운을 입고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윤이 나는 머리에 꽂은 새털 장식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구부려 하기와라의 귀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는 분명 친밀함의 표시이자 존경, 그리고 유혹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기와라에게 잘 보이려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곧이어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 가는 듯한 그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좋아~좋아~” 하기와라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다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중화전(왕의 업무공간) 쪽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소녀는 나를 지나치며 살짝 웃어보였다. 우리가 꾸민 계획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중화전에는 황제(고종)가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망해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발 아래 놓인 여러 올가미들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노인이 된 황제는 오로지 낡은 것밖에 남지 않은 이 궁 안에서 소녀의 매력이 주는 신선함에 꽤 놀란 눈치였다. 그는 특이하게 누빈 자주빛 비단옷(곤룡포·왕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옷)을 입고 말총으로 된 왕관도 썼다. 신하들이 용상(임금의 업무용 책상) 아래에 모여 우리를 보며 웅성거렸다. 양의 눈을 한 대신들과 무당, 지관들이 마치 숙주에 기생하는 거머리처럼 왕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황제의 뒤편에는 달빛이 비추는 산들과 비늘로 덮인 용이 긴 꼬리를 멋지게 늘어뜨린 옛 중국스타일 그림(일월오봉도)가 놓여 있었다. 힘을 잃어 가는 나라의 그늘진 궁과 적당히 잘 어울리는 배경이기는 했다.(편집자주:원래 조선시대 일월오봉도에는 봉황 조각물이 있었지만 대한제국 시절에는 자주국임을 천명하고자 용으로 교체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당시 이런 상황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금색 매듭과 흰색 깃털이 있는 왕관을 쓴 그의 눈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소녀를 보자 잠시나마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중화전 계단 앞에서 잠깐 멈춰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소녀는 눈빛에 존경심을 가득 담아 군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봤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미모에 놀랐는지 잠깐 앓는 소리를 냈다. 버선 신은 발을 살짝 동동거리더니 곧바로 안정을 되찾고 우아한 손 동작으로 내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등장은 경운궁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듯 했다. 신하들은 황제의 등 뒤에서 흥분된 어조로 떠들어대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무당과 점쟁이는 이국의 소녀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왕 옆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하기와라는 이들이 ‘자신의 여자’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관심을 갖는 모습에 적쟎이 화가 난 표정이었다. 왕가의 일원이자 시종무관(임금을 호위하던 무관)인 민영환(1861∼1905)은 소녀와 황제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는 변치 않는 충성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인물이자 이 혼란스러운 궁 안에서 정확히 사리 판단을 할 줄 알던 거의 유일한 현자였다. 황제는 소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 아름다운 말로 그녀를 칭찬하며 위엄을 뽐냈다. 그는 “신께서 친절하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방 여인을 보내줘 무척 고마울 따름”이라고 경탄했다.겸손한 초상화가를 연기하던 소녀가 말했다. “폐하, 저는 미국인이며 과거 중국에서 황후의 초상화를 화폭에 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위엄은 멀리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전해 들었습니다. 황제의 용안을 초상화에 담지 못하면 제 인생에 큰 회한이 될 것입니다.” 소녀는 동양의 격식을 갖춰 겸손하게 얘기했다. 둘 간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은유가 풍부해서인지 왕의 품위가 한 층 더 돋보였다. 왕은 이 소녀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감시자인 하기와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뒤 “고문관과 상의해 그대의 청에 대해 답을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7회로 이어집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제주 국제관함식에 ‘욱일기’ 단 일본 구축함 참가 논란

    제주 국제관함식에 ‘욱일기’ 단 일본 구축함 참가 논란

    다음달 10~14일 열리는 ‘2018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에 욱일기를 단 일본 해상 자위대 군함이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될 전망이다. 연합뉴스는 6일 “제주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 구축함 1척이 욱일기를 달고 참가한다”는 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1998년과 2008년 우리나라에 열린 국제관함식 때에도 일본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참가했다”면서 “일본 해상자위대가 이 깃발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주최 측 입장에서) 일본 함정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사용한 깃발로 한국과 중국 등 일제 침략을 당한 지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해상 자위대는 욱일기를 여전히 부대 깃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물론 해외 곳곳에서 욱일기나 욱일기와 비슷한 문양을 상업적으로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하켄크로이츠 깃발이나 이를 연상케 하는 문양의 사용을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과 다른 양상이다. 해군 관계자는 이날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욱일승천기를 단 자위대 함정의 제주 입항 논란에 대해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은 우리가 주관하고 또 세계 해군을 초청해 열리는 전 세계 해군 축제의 장”이라며 “그래서 이러한 행사의 성격과 자국의 군함에 자국의 해군기를 다는 국제관례 등을 고려해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제주민군복합관광미항(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리는 이번 제주 국제관함식에는 국내외 50여척의 함정이 참여한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씨줄날줄] 교수노조/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교수노조/박현갑 논설위원

    근대 대학의 전형으로 독일의 훔볼트대학을 꼽는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을 이루던 프로이센이 근대화를 통한 위기극복 방안으로 1810년 세운 대학이다. 근대화를 위한 개혁 조치로 세웠으나 기술인 양성 등 단기적 성과를 추구하기보다 학문의 자유, 진리 탐구를 추구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다 20세기부터 대학은 학문의 상업화에 나선다. 자본주의 확산으로 인간교육보다 직업교육, 지식탐구보다 경쟁과 효율의 가치관을 우선시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늘 교수가 있었다.대학교수 하면 대체로 지성과 양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제자 성희롱에 학점을 앞세운 폭언, 자기 논문 공저자에 자녀 올리기 등 일그러진 모습만이 회자된다. 노동자 이미지는 어떤가? 이 역시 쉽게 연상하긴 어렵다. 교수님은 사회구조 최상부에 자리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당사자인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3년 전 대학신문에서 조교수 이상 전임교수 785명을 상대로 교수 위상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지식인의 죽음’, ‘대학은 죽었다’는 비판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47.6%나 됐다. 대학이 지식과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 양성소로 변하고, 인구 감소로 정원 채우기에 급급하면서 연구와 동떨어진 신입생 모집과 제자 취업 도우미로 내몰리니 걱정스러운 상황은 맞다. 그제 헌법재판소에서 대학교수노조 합법화 결정이 나왔다. 2001년 사학재단의 왜곡된 대학 지배를 위기의 본질로 규정한 교수노조 출범 이후 17년 만의 일이다. 헌재는 교원노조의 주체인 ‘교원’을 초·중등교육법상 교원으로 한정한 교원노조법 제2조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전국 430개 대학교원 9만여명의 단결권을 인정한 이번 결정으로 사학재단의 구조조정에 교수노조가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홍성학 교수노조위원장은 “2002년 계약임용제 시행 이후 비정규직화된 단기, 저임금 교원의 증가, 정부재정지원 사업에 따른 과중한 행정업무 증가 등으로 대학교원의 근로조건은 2001년 노조 설립 때에 비해 더 나빠졌다”면서 “국회는 속히 교원노조법 개정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비정년 트랙 전임교원은 대체로 1년 계약이 많으나 6개월짜리 계약도 있단다. 계약 아닌 위촉 형태로 일하는 비전임 교원인 시간강사도 사정이 딱하긴 마찬가지니 교원 처우개선 여론이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교수노조가 노조원 임금과 처우 개선도 해야겠지만 학문 연구와 질 높은 교육 실현에 앞장서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바람일까. eagleduo@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5회>소녀는 서울에 온 지 이틀만에 황제가 있는 덕수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티븐슨(더럼 화이트 스티븐슨)이 그녀가 왕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덕분이었다. 사실 스티븐슨 입장에서는 그녀의 미인계에 넘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를 감시하러 온 일본 고문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매우 영민했고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국제정세의 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도쿄의 내각은 오랫동안 진흙탕 속에 빠진 서울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열강의 외교놀음을 파악하고자 그에게 거액을 쏟아부었다. 만약 소녀에게 워싱턴 거물이 보내온 서신이 없었다면 스티븐슨은 그녀의 미모 말고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녀가 가져 온 소개장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워싱턴과 연이 닿은 것에 흥분해 소녀의 입궁을 도왔다. 소녀는 10월의 어느 맑은 날 아침 왕을 알현하려 궁에 도착했다. 내가 어떻게 소녀를 따라 궁에 들어갔냐고? 원래 난 조선의 황제와 신하들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대한제국 세관을 맡은 ‘골든엄브렐라’(소설 속 가상의 대한제국 세관 관리조직)의 책임자였으니까. 그때 나에게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마법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편집자주: 실제 이 시기 대한제국은 회계 업무가 가능한 세관원 출신 외국인을 대거 스카우트해 업무를 맡겼습니다. 1883년 우리나라 첫 공식 세관인 인천해관은 조선인이 아닌 10여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청나라 해관을 모델로 해외 경력자들이 조선으로 들어왔고 조선인도 영어시험을 거쳐 채용됐습니다. 당시 세관은 기상관측과 검역, 항만·등대 관리, 도로 측량, 우편사업 등 정부 업무를 대거 수행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궁에서 우리를 데리러 관용 마차가 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소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 본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임이에요.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해요. 엄청난 모험을 할 수 있게 돼서죠.”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며칠 전에 한 일본인이 당신 가방을 뒤지려고 호텔로 숨어들었잖아요. 그 사람은 서울의 있는 일제의 거대한 스파이 조직의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해요. 그들이 작심하고 덤빈다면...“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바보들...일본인들은 정말 서툴러요. 이 작은 갈색피부 친구들은 솜씨가 그닥 뛰어나지 않더라고요. 프랑스나 러시아의 예의 바른 비밀 요원들은 사람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죠. 트렁크를 뒤지고도 보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요. 하지만 이들은 어떤가요? 어설프게 강도를 보냈다가 결국 지난번 사달이 났어요.” 소녀는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황폐하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지나 마침내 궁에 다다랐다. 세미라미스(아시리아의 전설상 여왕으로 고대도시 바빌론의 창건자로 전해짐) 공중정원을 연상시키는 청동 장식물(덕수궁 석조전 앞 분수로 추정)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를 상하이로 훔쳐갈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 대담무쌍한 배짱에 매혹됐다. 지금 하려는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녀의 유혹에 말려 들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반쯤 넋을 빼앗겼다. 그녀의 미인계에 나도 빠졌다. 파리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하려 칼을 빼든 삼총사의 달타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대신들이 자리한 법궁에서 우리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작고 왜소했지만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전지전능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는 고종의 궁에서 가장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황제보다 더욱 환하게 웃곤 했다. 마치 이 궁의 진짜 주인은 조선 황제가 아니라 하기와라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내뿜으면 왕을 비롯한 궁궐의 모든 이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명령만 내려면 이들은 언제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다. 황제(고종)는 조상신보다 하기와라의 날카로운 이빨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더 무서워했다.우리는 왕을 만나기 전 겸열자인 하기와라에게 먼저 인사하려고 대기실로 갔다. 고양이가 넘나들 것 같은 문턱이 있는 이곳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고풍스럽게 대조를 이뤄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하기와라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소녀가 유혹에 가득 찬 눈길로 그에게 끼를 부렸다. ”오, 하기와라씨! 상하이 영사관에 있는 당신의 친구 미토노가 ‘서울에 가면 당신을 꼭 만나라’고 여러번 말했어요.“ 소녀의 벨벳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는 고양이의 털처럼 나른했다. “그는 당신이 덕수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고 알려줬어요. 결코 여성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 엄격한 분이시라는 것도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면 아주 특별한 여자가 돼야 한다고도...” “아, 그렇습니까?” 하기와라는 너무도 큰 기쁨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게 왠 횡재냐’는 반응이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험하고 무서운 궁궐에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약한 초상화가인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으실거죠?” “그럼요. 물론입죠” 하기와라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얼굴이 금세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소녀는 이자도 어렵지 않게 미인계로 낚을 수 있었다. 6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특파원 칼럼] 아베와 고이케 그리고 도쿄올림픽/김태균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아베와 고이케 그리고 도쿄올림픽/김태균 도쿄 특파원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 스포츠 제전으로서의 올림픽은 올림픽헌장 바깥에서는 존재하기 힘들다. 그동안 54회에 걸쳐 하계·동계 올림픽이 치러지는 동안 주최국이든 참가국이든 어디선가 누군가는 늘 정치적 손익이란 계산기를 두드려 왔다. 독재를 향한 분노의 함성과 하얀 최루탄 가스가 거리에 넘쳐나던 상황에서 치러졌던 30년 전 서울올림픽도 결코 거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2020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이 2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일본에 스포츠의 정치적 활용을 둘러싼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대회의 양대 축인 아베 신조 총리의 중앙정부와 고이케 유리코 지사의 도쿄도가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는 ‘올림픽 마케팅’을 본격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2년이나 남아 있는 행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성급하거나 억지스러운 조치들이 속속 취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머타임제 추진이다. 대회조직위원회는 7~8월 도쿄의 폭염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2019~2020년 2년간 시간을 2시간 당기는 서머타임제를 정부에 요청했다. 여론은 냉랭하다. 수면 부족, 근로 환경 악화와 같은 기본적인 어려움도 그렇지만 고작 보름 정도 치러지는 국제행사를 위해 왜 모든 국민이, 그것도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2년씩이나 ‘국위 선양’을 위해 희생해야 하느냐는 반발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 행사에 대한 무관심을 용인하지 않는 ‘전시 국가총동원령’이 연상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머타임은 일본 언론들도 대부분 반대하고 있다. 100년 이상 된 서머타임의 본고장 유럽에서 이뤄지고 있는 최근 서머타임 폐지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대회 자원봉사자 목표를 11만명으로 설정한 데 따른 무리수도 이어진다. 대학생 확보를 위해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대학들에 학사 일정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자원봉사의 생명인 자율성은 사라지고 거의 ‘차출’의 분위기로 가고 있다. 버려지는 휴대전화 등에서 추출한 재활용 금속으로 올림픽 금·은·동메달을 만들기로 해 놓고, 막상 은메달을 만드는 데 쓸 은(銀)의 수거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자 공립학교에 폐가전 수거함을 설치해 수집을 독려하기로 했다. 아베 총리는 자국 근대화의 출발점이자 제국주의 일본의 모태가 됐던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인물이다. 정치적 위기가 본격화한 올 2월 이후 주춤해졌지만, 자신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1월 초에는 신년사, 신년 기자회견, 시정방침 연설 등 대부분의 중요한 발표 자리에서 꼬박꼬박 메이지 유신 정신으로의 회귀를 강조했다. 정부가 국민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묶어 일본의 힘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강력한 인물이다. 고이케 지사는 극우적인 이념과 행동에서 아베 총리를 능가한다고 평가받는다. 지난 1일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식에 2년째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95년 전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학살행위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주변국을 침략하고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과거 집단적 사고와 획일성으로 다시는 되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일본 사회의 건전한 면역력이 2년 후 올림픽을 기화로 잦아질 정치 지도자들의 국가주의 시도에 얼마나 강력한 저지선을 형성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는 20일 치러질 자민당 총재 선거 결과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이미 승기를 굳힌 아베 총리가 총재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현행 ‘평화헌법’의 개정 시도를 비롯한 우익보수의 행보가 한층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windsea@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어머니인 의친왕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의 마지막은 늘 비극으로 끝났다. 대한제국 왕실의 비운은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게 아흔이 다 돼서야 받아들여져요. 아버지 의친왕의 잘잘못을 역사가 정확하게 평가했으면 합니다. 그게 제 마지막 바람이에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녀’ 이해경(88) 여사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 이 여사는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조선왕조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떤 연유에서 이 같은 생각을 떠올릴까 궁금했다. 이 여사는 고종 황제의 친손녀다. 아버지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순종 다음 서열이었으나 일제의 견제 등으로 동생인 영친왕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다. 동생인 영친왕이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의친왕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독립운동가와의 접촉이 잦았으며,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기도했다가 만주에서 일제에 발각돼 송환되기도 했다. 의친왕은 일제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하며 항일정신을 사수한 왕족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이 여사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미래를 바로 세우려 했던 고종 황제나 의친왕과 비슷한 고민을 문재인 대통령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면서 “생각한 대로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결과’는 ‘운명’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친왕의 13남 9녀 중 다섯째 딸이다. 세 살 때 생모와의 이별,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사동궁(의친왕부·義親王府) 생활, 그리고 8·15 광복, 이어진 6·25 전쟁, 1956년 가혹한 현실을 피하고자 선택했던 도미(渡美) 등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여정을 보냈다. 특히 그는 순탄치 않은 노년을 보낸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매일 술에 빠져서 살았다는 일제에 의한 역사적 오류가 아직도 그대로”라면서 “항일정신이 강했던 아버지는 일제의 핍박과 삼엄한 감시가 본격화되면서 매일 술집에 다니는 척해야 했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의친왕이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이토 히로부미가 대통(大統) 계승을 권유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고, 1919년 중국 상해(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유일한 ‘왕손’”이라면서 “의친왕의 열정과 행동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을 떠난 지 62년, 26살의 꿈도 많고 한도 많았던 앳된 여인에서 이제 미수(米壽)를 넘긴 ‘호호 할머니’로 변한 조선의 마지막 왕녀인 그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일제 치하에서 의친왕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사동궁을 찾았다. 그때마다 노래와 춤으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린 기억이 있다. 특히 길러주신 의친왕비(이하 지밀 어머니)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궁 밖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말을 옮길 수 있어서 조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역사 문헌 등을 보면 퍼즐처럼 맞춰지는 일들이 있다. 어렸을 때 갑자기 일본 경찰들이 집 주변에 늘었다든지,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사동궁을 찾았던 일 등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의친왕의 독립운동 행적은 어떻게 아는가. -미 컬럼비아대학 한국학과 사서로 27년간 일하면서 많은 한국 역사책과 자료를 접했다. 거기서 아버지의 흔적을 많이 찾았다. 또 유학 오신 한국 학자들이 나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가 있는 미 도서관 등을 알려줬다. 미국에서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했다. →여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텐데. -맞다. 어렸을 때는 상당히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역사 자료 등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심정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미국 생활이 아버지와 나를 연결해 준 것 같다.→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겠지만 특히 더 했던 것 같다. -한때는 드라마처럼 ‘궁’에서 호강하며 살았다. 어렸을 때 시녀들이 ‘공주마마’라고 부르며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줬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에 ‘왕족’이 ‘망국의 원흉’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친북 인사로 몰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62년이 지났다. 한국을 몇 번 찾지 않았다고 알려졌는데. -맞다. 사실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당시 왕족이라는 굴레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사회에 대한 반감 등 때문에 한국에서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왔다. 정말 안 가려다 생모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9년 만인 1975년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50년 중반에 미국 유학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닌가. -당시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어 왕족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지밀 어머니 등 가족들이 먹을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지밀 어머니가 나의 혼수품으로 주신 비단을 팔아서 연명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8군의 도서관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데이비드 스트릿맨이라는 군인의 아버지가 도와줘서 미 유학이 가능했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비행기 값을 마련하고자 지밀 어머니가 사 주신 야마하 피아노를 팔았다.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돈 80달러를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했던 것 같다. 다행히 텍사스의 메리 하딘 베일러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모두가 반대했던 미국행이라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한국과 연락도 끊었다. 사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도와줄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과 방학에는 식당과 백화점, 보육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먹고살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아무도 내가 조선의 왕녀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어도 누가 쳐다보지 않았다. →의친왕비가 자신의 호적에 이 여사만 올리는 등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생모, 낳아 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3살 때 헤어진 생모를 10년 후인 13살 때 화신상회(현 종로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서 만났다. 그 이후로 또 거의 본 적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잠시 같이 지냈다. 생모는 박금덕 여사다. 그는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정도로 정·재계의 마당발로 소문난 여성이었다. 의친왕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미모에 당찼던 것 같다. 내가 궁 생활을 힘들어 했던 것이 자유분방하고 당찬 생모의 성격을 닮아서인 듯하다. →일부에서 ‘공주’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건 분명히 잘못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고종 임금님이 황제가 되고, 왕자인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의친왕, 영친왕 등으로 봉작됐다. 그러니까 나는 왕자의 딸이지, 왕의 딸이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마지막 공주’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내 밑으로 여동생들은 궁 생활을 하지 않았고, 위로 언니들은 돌아가셨다. 그래서 ‘마지막 왕녀’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인연을 못 만나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결혼할까 고민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다. 복잡했던 우리 가정사를 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꿈꿨는데, 막상 선택의 순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내가 힘이 미약하고 나서는 것을 싫어해 숨어 있었지만, 일제에 의해 왜곡·날조된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일에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나도 미력이나마 돕고 싶다. 글 사진 뉴욕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이해경 여사는 누구 -1930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다섯 번째 딸로 출생. -1933년 생모인 박순덕씨 곁을 떠나 ‘궁’으로 거처 옮김. -1946년 경기여고 졸업 -1950년 이화여대 음악과 졸업 -1953년 미8군 사령부 도서관 사서 근무 -1956년 미국으로 유학 -1959년 미국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대 졸업(성악 전공) -1969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 사서 취직 -1996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과장 정년퇴직 -현재 뉴욕의 컬럼비아대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음.
  •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 작위 못 받은 이유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 작위 못 받은 이유

    영국의 축구 스타인 데이비드 베컴이 지난해 영국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 것은 조세 회피 의혹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더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정부가 사전 조사를 통해 조세 회피 의혹이 있는 이들에 대한 기사 작위나 훈장 수여를 배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국세청은 매년 수천명의 서훈 후보자들에 대해 이른바 ‘신호등 시스템’으로 불리는 적합성 조사를 하며, 위험 요소(리스크)가 큰 대상자는 빨간색, 그보다 적거나 중간일 경우 각각 녹색, 노란색으로 분류한다고 더타임스가 전했다. 베컴의 기사 작위가 미뤄지는 이유도 국세청의 적합성 조사에서 ‘레드’로 분류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 기록을 가진 웨인 루니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더타임스는 추정했다.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자선단체를 위해 연간 수백만 파운드 모금에 기여해 온 영국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가 ‘대영제국 장교 훈장’(OBE)을 받지 못한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들 유명인은 조세 회피가 아닌 합법적인 절세 행위였다고 주장하지만 영국 정부는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서훈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있다. 서훈 수여자가 추후 탈세자로 드러날 경우 국가적 작위나 훈장의 명성에도 해를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인식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3]러시아, 베델에 고종 납치 제안

    [황제 납치 프로젝트3]러시아, 베델에 고종 납치 제안

    서울신문은 대한제국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찾았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조선과 일본에 머물며 직접 취재해 쓴 이들 소설에는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이 담겨 있어 관심을 모읍니다. 대한제국이 배경인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먼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3회> “저는 조선 황제를 납치해 상하이로 모셔 가려고 서울에 왔습니다.” 소녀가 웃음기없는 얼굴로 똑똑히 말했다. 나는 이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의 반응을 살피던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눈도 반짝거렸다. 그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나는 짖궃게 악의없는 농담을 섞어 물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이게 다는 아니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내 반응이 너무 경솔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듯 작은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제가 좀 더 설명할게요. 베델씨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방금 이름을 알려드린 그분(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됨)은 앞으로 3주쯤 뒤 일본이 조선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매우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서 황제에게 무력시위를 할 것이라는 것도.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의 보호령 문서에 서명을 받아내기 위해서죠. 일본은 이미 영국과 미국에 이 사실을 알렸고, 두 나라는 조선 황제가 자발적으로 보호령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본과 말을 맞춰놓은 상태입니다.”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영국과 미국이 아닌 다른 열강들이 마지막 걸림돌이예요. 독일과 러시아가 대표적이죠. 이들 역시 조선과 같은 약소국을 자신들의 통제권에 두고 싶어하니까요. 이 때문에 이들은 조선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길 원한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는 이상 지금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에요.” 모든 문이 잠겨있는 이 방 안에서 가장 빛나는 눈을 가진 여성이 러시아를 대신해 우리에게 비밀 임무를 전달하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러시아는 최근 일본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패배해 사실상 한반도 지배권을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어떻게든 일본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다면 러시아로서는 적국인 일본의 대륙 침략 시도를 막아낼 수 있어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소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선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가지러 조선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이미 허버트(‘고종의 밀사’로 불리던 호머 허버트 1863~1949)를 미국 루즈벨트(시어도어 루즈벨트 1958~1919) 대통령에게 보내 이를 막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성과가 없었어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예요. 이토가 황제를 겁박해 서명을 얻어내려 해도 그 문서에 옥새가 찍혀있지 않으면 일본은 대한제국을 접수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조선이 진심으로 일본의 보호를 원해서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의혹이 퍼지면 독일과 러시아가 반드시 이 부분을 걸고 넘어질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하지만 왕이 옥새를 찍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그랬다가는 이토가 자신을 죽이고 새 왕을 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텐데...” 소녀가 내 표정을 읽은 듯 힘있게 대답했다. “그래서 러시아가 조선 황제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모험을 제안하는 겁니다. 황제가 조선을 빠져 나오면 일본은 조약 문서에 옥새를 찍을 수 없어요. 그가 외국에 나가 있으니 죽일 수도 없겠죠. 이쯤되면 독일과 러시아는 “도대체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질 것이고, 일본은 전 세계 언론의 비난을 사겠죠.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아직 일본은 다른 열강보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요. 국제여론을 악화시켜가면서 불 속에 뛰어드는 짓(을사늑약 체결)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요.” 소녀는 멋진 머리를 뒤로 젖히며 조용하지만 진심을 담아 웃음지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이 더욱 도드라졌다.“제 말이 꼭 숨은 역사를 설명하는 교수의 강의처럼 들리시나 보네요. 아무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조만간 보게 될 거예요. 상하이에 계신 그 분은 제가 두 분같은 ‘젠틀맨’(의로운 일에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신사도 정신의 소유자)과 힘을 합쳐 이 일을 해낼 것으로 확신해 큰 게임을 시작했어요. 제가 상하이를 떠나기 전날 밤 그분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가서 베델을 만나라. 그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요.”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4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2]고종 구하려고 조선 찾아온 소녀

    [황제 납치 프로젝트2]고종 구하려고 조선 찾아온 소녀

    서울신문은 대한제국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찾았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조선과 일본에 머물며 직접 취재해 쓴 이들 소설에는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이 담겨 있어 관심을 모읍니다. 대한제국이 배경인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먼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2회> 이제 소녀와 우리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05년 10월의 늦은 어느날이었다. 서울 남대문 외곽 애스터하우스 호텔(지금의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 로비로 낯선 백인 여성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호텔 바의 빈 테이블에 앉더니 웨이터 박군을 불러 뭔가를 부탁했다.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과 나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델은 늘 그랬듯 하세가와(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훗날 조선 2대 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헉......잠깐만!” 그는 말을 끊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는 버드나무처럼 가냘펐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마 위로 짙은 갈색 머리를 땋아 올린 그녀의 얼굴에는 보통 여성의 부드러움 같은 건 없었다. 나쁘게 말하면 눈이 매우 불규칙했고 입도 꽤 컸다. 하지만 뭐랄까...다른 여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묻어났다. 남자를 지배할 듯한 자립심과 통제력이 얼굴에 드러나 더 생기있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번역자주:실제로 베델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서대문에 있던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베델을 24시간 감시했던 일본 경찰의 기록에도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이고 또 서울에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했다. 선교사나 외교관 부인이 아니면 이곳에서 백인 여성을 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바에서 술을 마시던 호텔 주인 루이(이 시기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운영한 프랑스인 L. Martin의 실제 이름으로 추정됨)를 불러내 그녀에 대해 아는 걸 털어 놓으라고 채근했다. 루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듣기좋은 프랑스식 영어 어투로 말했다. “음...그녀는 여기에 혼자 왔어요. 큰 트렁크 하나에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만 챙겨서...음...라벨에 뭐라고 써 있더라...상하이 애스터하우스 호텔, 요코하마 오리엔탈 팰리스 호텔...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메일’ 신문도 있었던 것 같고...” 그때 웨이터 박군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베델의 팔을 툭 치며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새로 온 여자분이...보자고...합니다...선생님을...보고 싶다고....전해달래요.”베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조금 의아하다는 느낌도 담겨 있었다. 베델은 박군과 바를 떠나 한 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루이는 오늘 처음 본 그 신비로운 여성이 누구인지, 또 서울에 왜 왔는지 무척 궁금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산 ‘페르넷 브랑카’(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유명술로 알콜 도수 35도 이상인 고도주)를 마시며 마구 떠들어댔다. 마침내 베델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나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기분 좋은 취기를 띈 루이를 남겨둔 채 나는 베델을 따라 나섰다. “빌리, 중요한 일이야” 베델이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야.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베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뛰어올라 2층으로 갔다. 거기에는 ‘숙녀용 응접실’이 하나 있었다. 앞서 베델과 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소녀’(the girl)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녀는 우리가 들어가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보라색 눈에서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활짝 웃는 입가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베델이 우리를 인사시켰다. “그럼 저에게 하신 얘기를 제 친구 빌리에게도 들려주시면 좋겠군요. 당신과 같은 미국인이고 더군다나 아주 용감하죠. 그래서 늘 친형제처럼 신뢰합니다.” 베델이 날 이 정도로 아꼈나...갑자기 너그러워진 영국인 용사는 소녀에게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지 평소와 달리 나를 과장해 칭찬했다. 소녀는 재빨리 방 전체를 둘러본 뒤 복도를 살피고 문을 잠갔다. 매우 낡고 흔들거리는 램프 아래 세 명이 둘러 앉았다. 소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과거 여러 남성들을 휘하에 뒀고 지금도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걸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저는 지금 상하이에 있는 어떤 높은 분을 대신해서 서울에 왔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소녀는 허리띠에서 작은 금색 연필을 꺼낸 뒤 수첩에서 종이 한 페이지를 떼어 뭔가를 적었다. 나는 당장 그분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그는 러시아가 극동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제거하는 재능을 가진 인물로 동북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큰손’(당시 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됨) 정도로 알고 있으면 될 것 같다. 내가 종이에 씌여진 이름을 확인하자 소녀는 이를 잘게 찢어 조각낸 뒤 자신의 지갑 속에 집어넣었다.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3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TV 하이라이트] 1000년 전 고려로 시간여행… 문화·통일을 배운다

    [TV 하이라이트] 1000년 전 고려로 시간여행… 문화·통일을 배운다

    ■고려건국 1100년 특별기획 원 코리아 2부(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북한 개성의 만월대 발굴현장을 들여다본 1부에 이어 2부 ‘코리아, 고려를 만나다’에서는 10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남녀가 혼인을 하면 남편이 한동안 처가에서 산다. 사위는 장인과 장모를 부모처럼 섬기고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낸다. 유산은 성별 구분 없이 균등하게 나눈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고려인들의 생각은 외교에도 투영됐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원과 책봉,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지키는 등 실리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 외부로는 국왕, 내부로는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부르면서 국가적 자부심과 외교적 실리를 챙겼다. 세계가 우리를 부르는 이름 ‘코리아’의 어원은 바로 고려, ‘꼬레’다. 고려 수도 개성, 현재 남과 북의 수도인 서울과 평양은 모두 고려시대에 개발된 신도시다. 2018년 현재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고려의 유산은 무엇일까. 어떤 외세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뤄낸 완전한 통일이 아닐까. 소통과 평화, 하나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려 500년 역사를 현재에 되살려 그 단초를 찾는다.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빼돌린 경천사 석탑 집요하게 추적 보도… 반환 이끌어내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빼돌린 경천사 석탑 집요하게 추적 보도… 반환 이끌어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신문의 항일 비판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대세가 기울었다’며 일부 조선 언론이 스스로 친일 성향을 드러내던 것과 정반대의 행보였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멀쩡한 석탑을 조각내 훔쳐가고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도입하게 해 빚더미에 앉게 했다. 무력했던 조선 정부가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자 베델이 분개해 나섰다. 국제열강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 주변국 여론에 민감하다는 일제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반일 기사를 쏟아냈다.●‘문명 제국’ 일본의 반달리즘을 꼬집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천사지 10층 석탑 반환’이다. 현재 이 석탑은 원래 위치인 개성 경천사를 떠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와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국보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베델이 없었다면 이 석탑은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이 탑은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경천사에 13.5m 규모로 세워졌다.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1907년 1월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당시 조선 황태자였던 순종의 결혼 축하를 위해 조선에 왔다. 하지만 속내는 우리 문화재인 경천사 석탑을 일본에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2월이 되자 군대를 동원해 석탑을 140여점으로 조각냈다. 주민들이 반발했지만 일본은 이들을 총칼로 제압했다. 조각들은 달구지로 실어 항구가 있던 제물포까지 운반한 뒤 배로 일본에 반출했다.우리 국민들로서는 분한 일이지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신보가 나섰다. 같은 해 3월 7일자 기사로 석탑 밀반출 사건을 전하며 “다나카는 우리 국민을 만만히 봤다. 조선 인민은 그 만행과 모욕에 결연히 항거할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후 신보와 KDN은 10여 차례 기사와 논설을 실으며 일본의 석탑 밀반출 만행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이에 고종의 외교 자문이던 미국인 호머 허버트(1863~1949)도 움직였다. 허버트는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조언하는 등 ‘고종의 밀사’로 불린다. 그는 신보와 KDN 보도 이후 일본의 독립성향 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4월 4·18일자에 각각 ‘일본이 한국에서 보인 반달리즘(문화 파괴)’, ‘사라진 탑과 다른 사건들’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베델과 함께 개성 경천사를 다녀와 쓴 르포 형식의 글이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세세히 기록해 감성에 호소했다. 베델과 허버트의 노력 덕분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6월 2일자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도 주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여론이 일본에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도 모를 리 없었다. 스스로 ‘문명화된 제국’임을 강조하던 일본이 이런 일로 조선 지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미치자 조선총감부도 마지못해 “석탑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베델의 첫 보도 뒤 10년쯤 지난 1918년 11월 경천사 석탑은 조선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경복궁에 있었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2005년 최종 복원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잡았다. 원래 자리인 개성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해 보인다.●‘쾌한 자의 쾌한 일’ 기사로 항일하다 을사늑약 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공고화하던 1908년 3월,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전 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조선은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는 게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는 일본에 매수돼 이들의 하수인으로 행동하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스티븐스 발언에 격분한 재미교포 전명운(1884~1947)과 장인환(1876~1930)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스티븐스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향하려던 3월 23일, 전 의사가 스티븐스에게 다가가 저격했지만 실패했다. 전 의사가 스티븐스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장 의사가 이를 보고 스티븐스를 다시 저격했다. 장 의사의 총에 맞은 스티븐스는 이틀 만에 병원에서 죽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티븐스 저격사건’이다. 소식은 바로 한국에 알려졌다. 하지만 상당수 친일매체들은 이를 기사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의식 있는 언론들 역시 일제의 검열이 워낙 심해 이를 타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보는 주저하지 않고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신보는 3월 25일자로 ‘쾌한 자의 쾌한 일’이란 제목으로 “한국 외부 고문관 미국인 슈지분(스티븐스의 한국 이름)이 미국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총을 쏜 자는 상항에 사는 한국인”이라고 전했다. 이어 “우리가 두 사람과 거사 현장에 같이 있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이들의 애국 열성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내용의 논설도 게재했다. 뒤이어 28일자에는 스티븐스가 사망한 소식과 함께 실명이 밝혀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행적을 상세히 다뤘다. 이후로도 신보는 이들의 속보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훗날 미국 법원은 전명운에겐 무죄를, 장인환에겐 25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장 의사는 미국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19년 가석방됐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 미국인을 죽인 전명운과 장인환을 위로하는 논설을 싣는다는 건 당시 영국인 베델 소유의 신보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IMF 구제금융 때 금모으기의 원조가 되다 베델은 기사로만 항일 투쟁을 이어가지 않고 직접 행동에도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일본은 조선을 경제적으로도 예속시키려고 조선 정부에 차관 도입을 압박했다. 당시 조정은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다. 차관은 한없이 불어나 1300만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로 정부가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애국심이 강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차관을 갚자는 운동이 시작됐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때 나랏빚을 갚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의 원조 격으로, ‘경제주권 찾기’ 노력의 하나였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1850~1913)과 김광제(1866~1920), 윤필오(1860~1924) 등이 시작했다. 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지였다. 베델은 의연금을 보관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신보사에 설치하고 이 운동을 주도했다. 신보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꾸준히 알리고 지원했다. 1907년 4월까지 4만여명이 참여했고 5월에는 모인 금액이 20만원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조선의 침략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할 뿐 아니라 아예 조선 독립까지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베델의 행보에 대해 일본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1] 일본 압박에도 항일신문 찍어낸 베델

    [황제 납치 프로젝트1] 일본 압박에도 항일신문 찍어낸 베델

    서울신문은 대한제국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찾았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입니다. 작가가 조선과 일본에 머물며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이들 소설에는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이 담겨 있어 관심을 모읍니다. 대한제국이 배경인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먼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내가 조선의 옛 황제(고종) 퇴위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아니다. 그토록 온 세상이 원하던 소리(조선 독립)를 듣지 못하고 영혼의 자유를 얻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스티븐스(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는 더더욱 아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으니까. 당시 일본은 스티븐스 암살 사건을 빌미로 한국인들을 잔인하게 보복 살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오직 소녀와 나 둘 뿐이겠지... 지난 겨울 나는 중국 상하이의 애스터하우스 호텔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는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게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말에 몸서리치듯 괴로워하더니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빌리, 정신 나갔어? 이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나 다름없어.” 지금(이 소설이 출간된 1912년 12월) 나는 미국으로 돌아와 브루클린의 고급 아파트에 산다.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도 있는 꽤 괜찮은 곳이다. 하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지루하기는 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복도에 있는 저 ‘자메이카 머큐리’(사람을 닮은 동물 조각상으로 추정)는 하세가와(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훗날 조선의 2대 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의 충실한 심복(당시 일본 공사관원이자 훗날 외무성 통상국장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1868~1911)을 닮은 것 같은데... 나는 왜 뉴욕에 살면서도 낡고 오래된 서울에서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는걸까. 나는 왜 동북아 외교 정글에 갇혔던 기이한 늙은 황제 때문에 목숨을 잃은 3명(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민영환, 이토 히로부미)의 이야기를 신문에 쓰지 못해 안달이 난 걸까. 창밖을 내다보니 아래층에 사는 웬 미친 여자가 자기 사진을 보며 3시간째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허름한 옷 차림의 남자 하나는 술에 잔뜩 취해 소리를 지르고 있고...이윽고 내 머릿 속 커튼이 열리며 오래된 기억이 서울의 케케묵은 먼지 쌓인 그곳(이 소설의 시작점인 서울 서대문의 애스터하우스 호텔)으로 데려다줬다. 테러와 위험이 가득했던 그 때(1905년 10월~11월 을사늑약 체결 전후) 조선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모험을 다시 한번 감행하고 싶어졌다. 나는 이곳에서 평범한 시민이지만 한때는 조선 왕실의 비자금 관리처 ‘골든엄브렐라’(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한제국 세관조직)의 책임자였고 소녀는 조선 황제 납치의 주범이었다.우선 여러분에게 베델이 누구인지부터 말해주고 싶다. 그는 키가 작고 말이 많은 황소고집 영국인이었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러일전쟁이 끝난 ‘슬픔의 땅’ 조선을 점령한 일본인들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는 것 하나뿐인 듯 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른다. 일본 나가사키 아니면 고베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베델은 자신이 발간하는 네 페이지짜리 영자신문 코리아데일리뉴스(1904~1909)가 있는 ‘그림자의 도시’ 서울에 살았다. 그는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이에 아랑곳없이 조선인 조판공이 만든 활자로 신문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하기와라는 “베델이 러시아 비자금으로 신문을 만든다”라고 악의적 소문을 냈다. 하지만 나는 베델이 진심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또 자신의 펜으로 일본 제국주의을 무너뜨리겠다고 자신하는 무모함도 알기에 그 말을 믿진 않았다. 나는 그저 이 날카로운 성격의 ‘대영(大英)남자’가 어떻게 신문 하나로 하세가와와 메가타(탁지부 고문으로 대한제국 화폐개혁을 이끈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 조선 황제의 일본인 고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곤 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일제가 대한제국 백동화를 오사카의 일본제일은행권 화폐로 교환(1905년 화폐개혁)하면서 보여준 꼼수를 베델이 폭로하자 메가타는 길길이 날뛰었다. 일본인들이 소위 “군사적 목적으로” 한국 농부들의 토지를 가로채려던 속임수(1904년 황무지 개간권 요구)도 밝혀내자 하세가와 역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겉으로는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들을 착취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유교문화 특유의 간접적 방식으로 느리지만 치밀하게 한반도를 잠식해 나갔다. 베델은 이런 처지의 조선인들을 지켜주려고 나선 유일한 인물이자 조선 황제를 대신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의 온갖 술수를 하나하나 까발리며 조선인에게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저항하라고 소리쳤다. 물론 그도 가끔 사고를 내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의 암울한 현실에 지나치게 몰입해 보기에 불편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지금 서울 어딘가에 있을 이 친구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을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과 의지 만으로 조선인을 위해 싸웠다” ‘황제 납치 프로젝트’는 2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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