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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득권의 끝없는 탐욕… 여전히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기득권의 끝없는 탐욕… 여전히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한국 현대사회를 들여다보기에 근대는 좋은 거울이 된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에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문제들이 똬리를 틀어 지금의 정치·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근원이 됐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근대사회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 당시의 희곡들이 현대 연극계에서 꾸준히 되살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립극단은 한국 근대극 재조명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를 택했다. 일제와 미군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욕망을 채워 온 이중생의 파멸을 그린 작품으로, 친일 반민족주의의 청산과 새 시대에 대한 갈망을 해학과 풍자 속에 꾹꾹 눌러 낸 블랙 코미디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아들 하식과 하인의 아들 용석을 지원병으로 내보내며 일본으로부터 이권을 얻은 이중생은 해방 후엔 딸 하연을 미국인의 정부로 보내 가며 치부를 한다. 그러나 일이 꼬여 탈세와 배임, 공금 횡령 등의 혐의를 받게 된 그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짜 자살극을 꾸민다. 최근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인 김광보 연출은 재해석이나 변형 없이 원작을 그대로 무대에 옮기는 정공법을 택했다. 무대 세트부터 인물들의 특성, 대사까지 고스란히 살렸다. 기득권의 속물근성에 대한 희화화는 현대의 관객에게도 통렬한 쾌감을 안겨 준다. 이중생의 전 재산이 무료 병원 건립에 쓰이기로 결정되자 병풍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중생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탐욕스러운 기득권의 전복이 주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세대 갈등을 지금의 한국 사회와 비교해 바라볼 여지도 준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아들 하식이 이중생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떠밀다시피 보낸 젊은이가 소련 놈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쏘아붙이는 대목은 한국 사회가 떠안고 있는 세대 갈등과 포개진다. 원작은 이중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친일 반민족주의와 속물주의의 청산,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주제 의식을 또렷하게 새겼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이중생들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국립극단은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를 시작으로 내년에는 김우진의 ‘이영녀’, 유치진의 ‘토막’, 김영수의 ‘혈맥’ 등으로 근대극 재조명 시리즈를 이어 갈 계획이다. 오는 2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만~5만원. 1688-5966.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반총장, 풍자토크쇼서 ‘테러’ 걱정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0일(현지시간) 유명 심야 정치 풍자 토크쇼에 이례적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반 총장은 풍자 토크쇼의 성격인 해학과 유머 대신 시종일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테러에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반 총장은 이날 코미디 센트럴 채널에서 유명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진행하는 정치 해학 토크쇼에 출연해 시작부터 “극단주의에 의한 폭력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 인도적 차원에서 수용할 수 없다”며 테러 근절을 촉구했다. 특히 반 총장은 시리아 사태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의견 차이로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며 “유엔 헌장의 정신에 맞춰 조속히 비극적인 사태를 끝내야 한다”고 밝혔다. 사회자가 “각국이 (테러와 폭력 종식을 촉구하는)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반 총장은 “더 큰 힘은 각국 지도자가 아닌 젊은이와 시민·사회 단체에서 나온다”며 전 세계적인 테러 근절 노력을 강조했다. 풍자쇼에 어울리지 않게 시종일관 테러 근절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대담을 이어간 반 총장은 사회자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유엔평화유지군이 사용하는 푸른색 바탕에 흰색으로 ‘유엔’이라고 적힌 헬멧을 선물해 잠시 웃음을 유도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문화마당] 어른과 노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어른과 노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요즘 한국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리더십 강연과 서적이 10년이 넘도록 꼬리를 물고 있지만, 리더로서 갖출 테크닉(기술)만 천편일률적으로 되뇐다. 심지어 그런 테크닉을 상품화해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리더십 열풍 10년이건만 리더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리더십 열풍의 배경에는 리더를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요즘 식을 줄 모르는 이순신 열풍도 이런 현실의 산물이다.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총체적 와해 국면에 처한 누란지세(卵之勢)의 조선 땅에서 홀연히 일어나 외롭게 분투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이순신이었으니, 그가 출중한 리더임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오늘날 한국의 영화 스크린을 장악할 만하다. 그렇지만 지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사회에 정작 필요한 리더는 이순신같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 한 사람이 아니라, 이순신의 1%라도 실천하는 다수의 보통 리더요, 보통 사람들이다. 한국은 헌법상 민주주의 국가이고, 또한 실제로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leader’(리더)의 사전적 의미는 ‘지도자’이지만, 그 의미를 보다 잘 함축한 우리말로는 ‘어른’을 꼽을 수 있다. 진영과 정파 논리를 넘어 그 말에 정의로운 권위가 있는 어른, 상식을 실천하며 민초의 존경을 받는 어른,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한 언행으로 귀감이 되는 어른. 경륜이 묻어나는 연배와 함께 바로 이런 인격과 품행이 받쳐줘야 어른이라 이를 만하다. 그런데 요즘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왕산자락과 여의도는 아집과 이해관계로 갈라져, 어른이 자리할 여지조차 없다. 광화문과 서울광장까지 그렇게 물들어버렸다. 서울의 번뜩이는 마천루는 재벌공룡의 모습을 위압적으로 보여줄 뿐 어른의 그림자를 이 회색빛 양극화 도시에 드리우지는 않는다. 관악산을 비롯해 여기저기 자리한 상아탑도 교사와 학생의 바쁜 발자국 소리에는 익숙하나, 어른의 기침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조차 흐릿하다. 십자가의 의미를 전하는 곳은 헤롯의 성전처럼 번득일 뿐 어른은 늘 부재 중이다. 불법(佛法)을 닦는 곳도 불상은 점점 커가건만 이판(理判) 어른은 노상 출타 중이다. 정치인, 재벌, 교사, 종교인만 탓할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동네 어른이 더 절실하다. 전철에도 시장에도 파출소에도 등산로에도 길거리에도 어른이 필요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 깊은 우리 사회에서는 연세 지긋하신 분들일수록 어른의 잠재력이 강하다. 그렇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인격과 언행이 함께 따라야 한 가정과 한 사회의 든든한 어른이지, 그렇지 않다면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러운 한갓 노인일 뿐이다. 노인은 많고 어른이 없는 사회는 삶이 늘 팍팍하다. 요즘 ‘신386’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돈다. 193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금 80세 언저리의 사람들을 이르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산업화 시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축복 받은 세대임에도 아래의 젊은 세대들을 누르고 아직도 국가의 주요 실직을 줄줄이 장악한 현실을 빗댄 풍자이기도 하다. 어른이라면 유쾌한 풍자이겠으나, 노인이라면 우울할 뿐이다. 혹시 후자이기 때문일까.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까닭 말이다.
  • 브로드웨이 대박 뮤지컬 한국 무대서도 대박날까

    브로드웨이 대박 뮤지컬 한국 무대서도 대박날까

    연극·뮤지컬의 아카데미 시상식인 토니상을 거머쥔 브로드웨이 최신 뮤지컬 두 편이 연말 한국 시장을 공략한다. 2012년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을 포함해 8개 부문을 휩쓴 ‘원스’(12월 14일~2015년 3월 2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와 지난해 최우수 뮤지컬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킹키부츠’(11월 18일~2015년 2월 8일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가 연이어 라이선스 초연의 막을 올린다. ‘원스’는 2006년 개봉해 20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원스’가 원작이다. 거리의 기타리스트와 꽃을 파는 체코 이민자의 운명 같은 사랑이 허름한 술집이 전부인 소박한 무대에서 재현된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나 화려한 군무 없이 오로지 배우들의 힘으로 완성된다.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와 연기, 동작까지 해내는 ‘액터 뮤지션 뮤지컬’로 배우들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킹키부츠’는 2005년 동명의 영국 영화가 원작으로 1980년대 ‘디바’ 신디 로퍼가 넘버들을 작곡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경영 위기의 구두회사를 떠안은 젊은 사장 찰리가 드래그퀸(여장남자)들을 위한 부츠인 ‘킹키부츠’를 만들어 회사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로 디스코와 팝, 발라드를 오가는 넘버와 드래그퀸들의 화려한 쇼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두 작품의 성공 여부는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이라는 타이틀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1996년 수상작인 ‘렌트’의 2000년 초연을 비롯해 ‘라이온 킹’(1998), ‘프로듀서스’(2001), ‘헤어스프레이’(2003), ‘스팸어랏’(2005), ‘스프링 어웨이크닝’(2007), ‘빌리 엘리어트’(2009)가 라이선스로, ‘애비뉴 큐’(2003)와 ‘저지 보이스’(2006)가 내한 공연으로 각각 한국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작품성과는 별개로 브로드웨이와 유럽의 화려한 대극장 뮤지컬이 주름잡는 국내 뮤지컬 시장의 흐름을 바꿔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연계 관계자는 “유럽풍의 화려한 무대와 의상, 고음이 두드러지는 넘버를 갖춘 유럽 사극 뮤지컬이 대중적으로 흥행한다”고 짚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비주류적인 캐릭터와 현실에 대한 풍자, 실험성을 앞세운 작품들이 안착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쪽에서는 작품의 ‘한국화’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미국의 정치현실 풍자와 유머코드 등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브로드웨이 최신작에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문화코드가 짙은데, 번역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정서에 맞는 각색 작업을 거쳐야 성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하면 ‘킹키부츠’와 ‘원스’는 한국 시장에서 통할 만한 요소들을 갖춘 편이다. ‘킹키부츠’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걸맞은 화려한 쇼 뮤지컬이다. 드래그퀸들이 대거 등장하기는 하지만 거부감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종환 CJ E&M 공연사업부문 홍보차장은 “미국식 유머 코드나 성소수자 이야기보다는 동료애와 우정 등 보편적 메시지가 더 두드러져 한국 정서에 맞춘 각색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스’는 원작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많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영화 ‘원스’의 존 카니 감독의 신작 ‘비긴 어게인’이 국내에서 13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호재다. 최승희 신시컴퍼니 홍보팀장은 “화려한 쇼 뮤지컬이 아니라 배우들의 노래와 연주, 음악 자체의 힘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7개국 25개 공연 선물세트

    7개국 25개 공연 선물세트

    세계적인 공연들을 대학로에서 볼 수 있어 매년 화제가 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달 25일부터 다음달 19일까지 25일간 열리는 올해 축제의 부제는 ‘센스 더 에센스’(Sence the Essence). 공연예술의 정수(精髓)를 보여 준다는 포부다. 7개국 25작품 중에는 오태석과 이윤택 등 한국의 거장들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출가 및 안무가들의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9월 26~2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오태석(극단 목화) 연출 특유의 강렬한 현실풍자와 언어유희가 가득하다. 1992년 제28회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작으로, ‘심청전’을 모티브로 우리 사회의 무너진 도덕성을 싸늘한 블랙코미디의 문법으로 꼬집는다. 코마치후덴(9월 29일~10월 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이윤택(연희단거리패) 연출이 일본의 대표 극작가 오타 쇼고의 초기 대표작에 한국의 색채를 입혔다. 일본의 고대 설화인 ‘절세미인 코마치’에 한국의 전통 민요와 선율을 얹고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무대 미학을 통해 현대 연극으로 재창조했다. 2012년 제2회 오사카 한일연극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다. 노란 벽지(9월 25~2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이번 축제의 개막작. 현대 실험연극의 메카로 불리는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이 제작하고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케이티 미첼이 연출했다. 19세기 미국 여권주의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의 동명 단편소설을 각색했다. 배우들의 움직임이 무대 위 카메라로 촬영되고 즉석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무대 전면의 스크린에 상영되는 케이티 미첼의 전매특허인 ‘멀티미디어 시어터’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썬(10월 8~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영국 출신의 ‘신성’ 안무가 호페시 섹터의 지난해 초연작. 태양이라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 앞에 불의와 전쟁에 의해 분열된 세상을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들의 에너지 넘치는 군무로 형상화한다. 알리바이 연대기(10월 9~1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지난해 국내 연극상을 휩쓴 화제작. 아버지와 아들의 개인사에서 한국 현대 정치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동시에 국가 권력의 알리바이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억누르는지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보여 준다. (02)3688-0100.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인간의 탐욕을 ‘소름 돋게’ 비틀다

    인간의 탐욕을 ‘소름 돋게’ 비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어린 딸은 호숫가를 맴돌며 억지로 눈물을 짜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슬픈 복희’가 되기를 강요한다며 이내 밝은 표정으로 호숫가를 뛰어다닌다. 복희를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이들은 복희에게 ‘슬픈 복희’가 될 것을 강요하고, 복희는 ‘슬픈 복희’와 ‘즐거운 복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극작가 이강백의 신작 ‘즐거운 복희’는 집단이 만들고 믿는 ‘신화’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가 누구의 욕망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지, 그 이야기가 어리석은 군중에 떠받들여지면서 누구의 욕망을 채우는지를 과장된 인물과 상황을 통한 은유로 보여 준다. ‘파수꾼’(1974), ‘내마’(1975), ‘봄날’(1984)에서 엿볼 수 있는 이강백 특유의 정치 우화적 요소가 다분하다. 커다란 호숫가의 펜션을 분양받은 퇴역 장군이 죽는다. 장군이 죽자 근처의 다른 펜션들을 분양받은 7명의 주인들은 장군의 죽음을 이용해 펜션에 고객을 유치할 방법을 궁리한다. 그들은 장군의 유해를 국립묘지가 아닌 펜션 단지에 모시고, 복희에게 매일 아침 울면서 장군의 묘소를 찾을 것을 강요한다. 날마다 수십, 수백 명의 군인들이 복희를 보러 펜션을 찾고 일곱 주인들은 주머니를 두둑히 채우는 ‘슬픈 복희’ 신화의 탄생이다. 극은 슬피 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복희처럼 부조리투성이다. 대한제국 시절 증조부가 받은 작위를 물려받았다고 믿는 자칭 ‘백작’, “장군님이 세 번 임종하셨다”는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는 자서전 대필가 등 펜션 주인들은 하나같이 희화화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머리를 맞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치밀하게 돌아간다. 호숫가에 정체불명의 배가 떠오르자 ‘복희호’라 이름짓고, 밤에는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 음악회를 열어 호숫가를 슬픔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곳으로 만든다. 복희는 ‘슬픈 복희’이기를 거부하고 ‘즐거운 복희’가 되기로 결심한다. 신화가 감춰버린 진실이 꿈틀대는 순간이다. 나팔수와 사랑에 빠진 복희는 그와 함께 마을을 빠져나가려 하고, 펜션 주인들은 둘을 떠나지 못하게 막는다. 호수의 물결은 이들이 탄 보트를 집어삼키고 복희만이 목숨을 건진다. 펜션 주인들은 죽은 나팔수를 그리워하는 복희의 초상화를 그려 팔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작품은 세월호 참사와 포개지면서 정치적 우화의 색채를 더 강하게 내뿜는다. 배의 침몰과 영혼의 수장(水葬), 연인의 울부짖음과 방관하는 사람들까지, 지난해 초고가 완성된 작품에 비치는 세월호의 잔상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기막히게 치밀하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우화로 읽힐 여지도 충분하다. 돈 되는 상품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모든 이들의 욕망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어떤 풍경과 대입해도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소름 돋는’ 경험은 거장의 탁월한 통찰에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든다. 21일까지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1만 8000~2만 5000원. (02)758-2150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이태동 鐘樓에서] 홍성담의 걸개그림과 광주비엔날레의 품격

    [이태동 鐘樓에서] 홍성담의 걸개그림과 광주비엔날레의 품격

    2014년 광주비엔날레가 오는 9월 5일 개막을 앞두고 정치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1995년 한국인 전수천씨가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土偶)-그 한국인의 정신’이란 작품으로 특별상을 수상했던 그 해에 창설돼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가는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민중미술가 홍성담씨의 걸개그림 ‘세월 오월’이 문제가 돼 갈등을 빚고 있다. 홍씨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검은 안경을 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이번에 또 박근혜 대통령을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의 허수아비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풍자적 자극이나 아픔보다는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책임을 느낀 윤장현 광주시장은 수정을 요구했으나 홍씨는 박 대통령 얼굴 대신에 닭 그림을 그려 붙이자 주최 측은 그 그림을 ‘전시 유보’ 하기로 결정했다. 윤 광주시장이 이렇게 홍씨 그림의 전시 유보를 결정한 것은 다음 행사 때 예산 지원이 줄어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지만, 의사 출신으로 시장이 된 그는 메스를 쥔 수술실 의사의 심정으로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즉, 그는 홍씨의 그림이 풍자의 수준을 넘어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하는 현상을 감지했기 때문에 그 걸개그림이 국제적 미술전람회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 전시를 유보했으리라. 홍씨는 이에 반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의 행정적 조치에 저항해서 자신의 걸개그림을 철수했다. 홍씨가 광주비엔날레의 실험정신과 표현의 자유를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많은 국민들의 여론이다. 민주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씨의 걸개그림은 상대방이 꼭 국가 원수라서가 아니라 어느 여성 정치인에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치욕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더욱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주최 측이 수정을 요구했을 때 박 대통령 모습 위에 닭 그림을 덧붙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패러디 수법을 빙자하면서 봉건주의 시대의 가부장적 태도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은유적 여성 비하 행위를 자행하는 것은 21세기 시대정신으로 부각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물론 그가 주장하는 평등주의 사회 이념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홍씨의 걸개그림은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예술 작품으로서도 전시할 만한 가치가 없다. 만일 어떤 작품이 관객들에게 즐거움이나 인식론적 깨달음의 빛을 주지 못하고 불쾌감을 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주 비엔날레가 원래의 취지대로 ‘지구촌 시대 세계화의 일원으로 문화 생산의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지방색을 벗어나 파리 베르사유 궁전 뜰에서 전시하고 있는 이우환의 ‘관계항-별들의 그림자’ 등과 같은 작품이나 혹은 앞서 언급한 전수천의 작품처럼 해묵은 이념적, 지역적 갈등과 같은 편협한 주제보다 한국인의 존엄성 문제를 우주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한 품격 있는 작품들이 전시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주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해와 용서’를 위한 4박5일간 방한을 마치고 떠나기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한국인을 “고난 속에서도 품위를 지킨 민족”이라고 했다. 만일 교황이 홍씨가 그린 걸개그림에 나타난 박 대통령의 일그러진 추한 모습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우리는 외면적으로 품격 있는 민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 특히 정치적으로는 아직까지 후진적 감정의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품위를 잃고 누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문화 In&Out] 정치 갈등·알력 다툼… ‘사분오열’된 광주비엔날레

    [문화 In&Out] 정치 갈등·알력 다툼… ‘사분오열’된 광주비엔날레

    “윤장현 광주시장은 광주비엔날레재단에 모든 책임을 넘겼고, 이용우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는 사퇴 표명으로 갈음했어요. 지역 유지와 정치인들로 채워진 재단 이사회는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믿었던 자문위원회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무개입’ 원칙까지 내비쳤으니 피 튀기는 싸움이 언제 끝날지 답답할 따름이죠.” 광주지역의 한 중견 작가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광주비엔날레 20주년 기념 특별프로젝트인 ‘달콤한 이슬, 1980 그 후’에 참여한 이 작가는 요즘 지역 미술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가슴부터 먹먹해진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민중미술가 홍성담 화백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의 전시 논란으로 이달 8일 개막부터 파행을 겪어 온 행사는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다. 미술인들이 “위중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유는 사태가 ‘표현의 자유’를 넘어 정치 갈등과 지역 미술계의 알력 다툼으로 확산된 탓이다. 특히 “‘광주비엔날레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이용우 대표의 전횡이 문제를 키웠다”는 비난과 “이 대표를 흔들어 새 대표 자리를 움켜쥐려는 속내가 숨었다”는 반발은 이번 사태를 통해 곪았던 지역 미술계의 상처가 터졌음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애초 논란은 광주시나 재단, 혹은 전시작가들 중 한쪽의 양보로 타협의 물꼬를 틀 것이라 예상됐으나 지금은 아예 얽힌 실타래를 풀 동력마저 잃은 상태다. 21일 예정됐던 재단 자문위원회 취소가 결정타가 됐다. ‘세월오월’의 전시가 유보되면서 특별전 참여 작가들의 탄원이 빗발쳤고 재단은 궁여지책으로 자문위원회를 열어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와 시민단체 대표 등 전문가 23명으로 이뤄진 자문위원회는 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이를 돌연 취소했다. 자문위원장을 맡은 한 원로 화백이 “(걸개그림의) 전시 여부를 최종 결정할 수 없는 위원회 개최는 무의미하다”며 재단 측에 취소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도출하려던 재단의 의도도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남은 것은 다음달 16일로 예정된 ‘대토론회’다. 이런 가운데 다음달 4일 개막하는 제10회 광주비엔날레의 본 행사가 이번 사태로 인해 오히려 발목을 잡히게 됐다. 참여 작가들의 한숨이 깊어지면서 광주비엔날레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여기에는 그간 소통 부재와 폐쇄성을 드러낸 비엔날레의 이면이 자리한다. 20여명의 재단 이사진은 시장, 부시장, 지역미술관장, 단체장, 대학교수, 법조인, 기업인 등으로 채워지면서 비판받아 왔고 이번 사태에선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지역 예술가들은 “광주비엔날레가 그간 대주주 격인 광주시의 정치색을 대변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번 특별전이 광주시 예산 20억원으로 전액 꾸려졌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다음달 개막하는 본 행사는 시비 15억원 외에 국비 30억원과 기업 후원 등 모두 87억원으로 치러진다. 이는 ‘사분오열’된 광주비엔날레가 지역에 국한된 행사가 아니라 국민적, 세계적 행사임을 증명한다. 이번 걸개그림 사태를 그저 퍼포먼스처럼 훌훌 털어 버리고 훌쩍 일어설 ‘솔로몬의 지혜’는 과연 없는 것일까.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문화 In&Out] 예술과 정치 사이

    [문화 In&Out] 예술과 정치 사이

    예술과 정치의 ‘상관관계’는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또 그 경계를 어느 선까지 구분 지어야 할까. 이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사건이 최근 벌어졌다. 지난 8일 민중미술작가 홍성담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의 전시가 유보되면서 책임 큐레이터인 윤범모 가천대 회화과 교수가 사퇴하는 등 후폭풍에 휘말린 광주비엔날레의 특별프로젝트 ‘달콤한 이슬-1980 그 후’전에서다. 논란은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윤 교수를 비롯해 전시 큐레이터 4명과의 회의 끝에 결국 걸개그림 전시를 유보하기로 결정하면서 불거졌다. 윤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사퇴를 표명하고 회의장을 나왔으며 ‘세월오월’ 전시 유보라는 결정은 책임 큐레이터의 불참 속에서 강행된 결정”이라고 항변했다. 다른 참여 작가들도 “작품 전시를 하지 않겠다”며 행사 자체를 보이콧할 분위기를 띠면서 재단 측은 단단히 체면을 구기고 있다. 가로 10.5m, 세로 2.5m 크기의 작품 ‘세월오월’은 1980년 5월 ‘광주 정신’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는다는 취지에서 5·18 당시 시민군과 주먹밥을 나눠 주던 오월 어머니가 세월호를 들어 올려 아이들이 전원 구조되는 장면을 표현했다. 하지만 작품 속 박근혜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의 허수아비로 묘사한 부분 등이 문제가 되며 광주시에서 수정을 요구했다. 광주시는 매년 10억원 이상의 행사비를 지원하는 광주비엔날레재단의 막강한 후원자다. 미술계 안팎에선 “예술의 자유는 어디까지냐”는 원초적 질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행정 당국이 예술작품의 정치성을 문제 삼는 구태”라는 비판뿐만 아니라 “너무 직설적인 걸개그림이 예술적 차원의 풍자와 해학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번 문제를 단순히 예술적 표현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출범 20주년을 맞았다는 재단은 논란이 불거지기 전 이번 프로젝트의 대표작이라는 걸개그림의 완성 과정을 꼼꼼히 둘러봐야 했다. 이를 통해 예술적 표현과 정치적 한계 사이의 갈등을 미리 조율하는 것이 옳았다. 중심을 잡고 조율할 수 있는 재단의 능력이 출범 20주년이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게 바로 문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무더위 날릴 화제도서, 어떤 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무더위 날릴 화제도서, 어떤 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불륜/파울루 코엘류 지음/문학동네 펴냄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요나스 요나손 지음/열린책들 펴냄 최근 국내 소설의 활약이 주춤한 가운데 해외 인기 작가들의 신작이 잇따라 출간되며 여름 소설 시장의 ‘페이지터너’(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파울루 코엘류(67)의 ‘불륜’(문학동네)과 데뷔작 하나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53)의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열린책들)가 주목받고 있다. ‘불륜’의 줄거리는 간단히 압축된다. 잘나가는 기자이자, 부유하고 가정적인 남편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로 완벽한 삶을 사는 서른한살의 린다, 그의 삶에 불현듯 균열이 일어난다. 권태와 허무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에게 ‘지루한 삶을 채울 무언가’ 혹은 ‘구원’이 등장한다. 취재차 재회하게 된 유망 정치인이자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인 야코프다. 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된 린다는 위험한 외도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사랑을 얻는 다른 방법은 없으며, 거기엔 그 어떤 신비도 없다. 타인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의 적을 사랑하면 우리 삶에서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중략) 내가 저지른 실수들,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결정들,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해도, 오직 한 가지, 나의 사랑만은 우주의 영혼에 새겨질 것이다.’(356~358쪽) 제목처럼 하나의 ‘불륜 스캔들’에 지나지 않을 서사에 코엘류는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웅숭깊은 성찰을 불어넣었다. 작가가 8년째 살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의 고즈넉하고 세련된 풍경과 도시 정서를 읽어내는 것도 소설의 재미다. 하지만 ‘마음껏 사랑하는 것은 마음껏 사는 것’, ‘영원히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 등 사랑에 대한 작가의 순전한 믿음이 지루한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도 한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요나손 식의 통렬한 풍자와 황당무계한 설정, 강한 서사로 추동되는 작품이다.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 빈민촌에서 태어난 소녀 놈베코가 우연히 핵폭탄을 떠안으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세계사의 주요 변곡점과 맞물리며 쉼표 없이 내달린다. 놈베코는 빈민촌에서 탈출하려는 순간 ‘백인의 차에 치인 죄’로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남아공 핵무장 프로그램의 전모를 꿰뚫게 된다. 호색한의 허벅지에 가위를 꽂아가며 글을 배우고, TV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세련된 화법과 국제 정세를 배운 소녀는 가까스로 스웨덴으로 정치 망명을 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가 주문했던 영양 육포 상자와 핵폭탄 상자가 뒤바뀌면서 중립국인 스웨덴은 ‘본의 아니게’ 핵보유국이 되고, 주인공은 20여년 가까이 핵폭탄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정작 놈베코에게 핵폭탄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인간들. 그 사이에서 놈베코는 유일하게 영리하고 균형 있는 셈법으로 세상의 평화를 지켜낸다. 540여쪽에 걸친 대장정이지만 작가의 태연한 문체와 그와 대조적인 탄성 넘치는 서사 덕분에 주인공의 수십년 시행착오가 거침없이 읽힌다는 게 작품의 미덕이다. 블랙유머로 직조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표리부동한 행보와 소위 ‘잘나간다’는 인간들의 멍청한 판단은 주인공을 ‘까막눈이’, ‘길거리에 채이는 돌멩이’쯤으로 여기는 역설적이고 부조리한 세상을 조롱한다. 반면 놈베코는 우직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감으로써 세상을 구하는 개인의 가치를 드러낸다. 진지함을 뺀 채 시종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소설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인종차별과 이념 갈등, 정부 폭력, 핵무기를 둘러싼 각국의 복잡한 속내 등 바로 보기 힘든 진실을 직시하게 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불황타개 슬로건·극우 선동… 아베 재무장 행보 나치 닮았다

    불황타개 슬로건·극우 선동… 아베 재무장 행보 나치 닮았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 발표한 1일 저녁 도쿄 총리 관저 앞에서 열린 반대 시위에는 아베 총리의 얼굴에 콧수염을 붙여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에 빗댄 사진이 등장했다. 풍자 사진에는 ‘전쟁으로 가는 길’, ‘전쟁 전의 일본으로 되돌리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반대하는 일본 국민들은 아베 총리에게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시차를 두고 국가의 운명이 반복되는 역사의 평행이론일까.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 선언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전수방위’의 족쇄를 찼던 일본이 이제 무력을 대외 정책의 수단으로 삼으며 재군사화로 가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역사의 시계를 돌려보면 1차 세계대전에 패망했던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에 돌입해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침략의 참화를 일으켰던 패턴과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아베 일본과 나치 독일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히틀러는 1933년 집권 첫해인 10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독일 팽창정책을 선택했다. 1935년에는 1차 세계대전의 배상 책임과 군대 무장을 제한했던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에 돌입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베 총리는 집권 첫해인 지난해 4월 “침략에는 정해진 정의가 없다”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가 하면 무라야마·고노 담화 수정 의사를 밝혔고, 드디어 헌법 해석 변경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실현하며 평화 체제의 제거에 나섰다. 이제 자위대의 국방군 격상도 추진할 태세다. 일본이 20년 넘게 장기 불황인 상태에서 아베 총리는 극우 내셔널리즘에 기반을 둔 ‘강한 일본’과 ‘아베 노믹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마치 나치 독일이 1929년 미국·유럽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국가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과도 유사하다. 선동 정치 수법도 유사하다. 독일 국민들의 패배 의식과 불안감을 강력한 나치즘의 선동정치로 돌파했던 것과 오버랩되는 아소 다로 부총리의 지난해 8월 발언인 “나치의 헌법개정 수법을 배워야 한다”는 일본 내 우익 진영에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이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하며 국가적 자존심을 높이려는 것과 나치 독일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으로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도 유사한 행보라는 관측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2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3대 요건이 제시됐지만 일본이 그 자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며 “일본 내에서도 아베 정권이 나치 독일을 벤치마킹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분명히 있다”고 지적했다. 진 센터장은 “집단적 자위권이 투명하게 제도적으로 운용되지 않을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면밀히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구본학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재무장은 미국의 안보 공백을 대체하는 과정으로 미국이 일본을 제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지금&여기] 호주 언론으로부터 배운 것/백민경 국제부 기자

    [지금&여기] 호주 언론으로부터 배운 것/백민경 국제부 기자

    지난달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호주 최대 언론 매체 중 하나인 ‘페어팩스 미디어’를 방문했다. 호주 유력 일간지 시드니모닝헤럴드와 디에이지 등을 발행하는 곳이다. 출근한 기자들이 지정석 없이 아무 데나 앉는 점이 특이했다. 편집국장조차도 자기 책상과 의자가 없었다. 자료와 책 등이 차지하는 공간도 줄이고자 복도에는 전자 사물함도 있었다. 회사로 나오는 기자 숫자가 많지 않은 만큼 꼭 필요한 자리만 쓰고 나머지 공간을 임대해서 수익을 창출하려는 의도였다. 실험적인 면모는 또 있었다. 종이신문 감축이다. 페어팩스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신문을 발행하고, 주 중엔 온라인으로만 기사를 띄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직장인들이 주 중에 태블릿 PC나 데스크톱 컴퓨터 등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다. 논란이 있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선착순 자리제’와 더불어 비용 절감을 위해 애쓰는 언론사의 모습이 신선하긴 했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프레스 프리덤(언론자유)’ 만찬이었다. 호주 언론인들이 모여 테러리스트들에 억류된 알자지라 기자를 위해 모금을 하고, 정부 정책에 대해서 자유롭게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형 화면에선 한 시간이 다 되도록 토니 애벗 호주 연방 총리를 비꼬는 영상이 나왔다. 복지 분야와 메디케어(의료보험) 예산 절감 등 엄격한 긴축 정책을 내건 그는 이름보다 ‘컷(CUT)컷컷’총리로 더 많이 불렸다. 침을 튀겨가며 예산을 깎으라고 지시하는 우스꽝스러운 총리의 캐리커처가 연신 스크린에 등장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정치인이나 대통령을 그렇게 오랜 시간 비꼬고 풍자하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 한국에서는 ‘정치적 음해’, ‘명예훼손’ 운운하며 법적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 실제 자신을 풍자한 개그맨을 고소하겠다는 정치인도 나오지 않았던가. 호주나 한국이나 언론사가 재정 압박, 비용 절감 문제로 고심하는 것은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언론이 정부를 대하는 자세나, 정부가 언론의 풍자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다른 언론인의 불행을 걱정하는 배려도 기억에 남았다. 호주 언론과 정부는 적어도 ‘여유’가 있었다. 물론 문화적, 사회적 차이 때문에 비롯된 바가 크다는 것을 안다. 짧은 시간 보고 온 단편적인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도 안다. 그래도 부럽다. 풍자를 재미로 받아들이는 정부의 열린 언론관도, 자유롭게 최고 지도자를 ‘까는’ 언론의 자유로움도. white@seoul.co.kr
  • [이태동 鐘樓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꽃인가 ‘막말’의 향연인가

    [이태동 鐘樓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꽃인가 ‘막말’의 향연인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선진국에서 선거는 모든 국민이 즐기는 축제와 같은 행사로 치러진다. 그들은 선거를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선거가 끝난 후에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며 다음 선거 때까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간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의 선거는 축제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전쟁’과도 같다. 2012년 대선이 끝났지만, 지난 일 년 내내 선거 후유증으로 나라가 시끄러웠고 지금도 그 여진(餘震)이 남아 국민들을 불안하게 한다. 오는 6월 4일 치르게 될 지방 자치 선거 또한 즐거운 축제가 아니라 심한 상처만 입게 되는 ‘전쟁’이 되리라는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급조한 신당이 생겨나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져 막말을 사용하며 극한적인 대립의 양상을 보이는 계절이 왔다. 선거 때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정책 대결을 하는 것은 정당 중심으로 경쟁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이 선출됐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반대파들과 심지어는 일부 교구(敎區)의 사목(司牧) 신부들까지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고 미움과 증오로 막말을 토해내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나라의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인까지 ‘막말’을 한다면, 통합은커녕 사회분열은 더욱 첨예화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을 동반자가 아닌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하게 되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된다. 증오심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대방을 학대하고자 하는 심리는 본능적인 검은 악과 심층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한 번 ‘막말’이 시작되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제력을 잃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경우처럼 원시적인 본능의 노예로 변신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는 ‘까마귀’란 시에서 “어두운 밤 까마귀가 무엇을 한 번 쪼기 시작하면, 그 움직임에 취해 미친 듯이 쪼아댄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 정치인들은 ‘막말’을 악을 제거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적인 언어나 혹은 반어적인 의미가 담긴 풍자라고 주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인 디지털 시대의 대중에게는 수용하기 어렵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하는 우리가 왜 이렇게 ‘막말’을 많이 하는 국민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예(禮)를 중요시하는 유교문화가 무너지고 그것에 대체할 만한 수신(修身) 교육이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후 기독교 사상이 무너져 신념의 공백이 생겼을 때, 서양 사회는 강력한 인문학 교육과 예술의 힘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무너진 유교사상과 대체할 수 있는 인문학을 고사(枯死)시키는 교육 정책만 계속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과오와 불행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이어 찾아온 해방 공간에서 빚어진 치열한 이념적인 갈등이 국민들을 인간성의 이해보다는 흑백 논리의 포로가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은 전부 친일파, 기회주의자로 배우며 미움과 증오의 세월을 보내도록 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저돌적인 막말이 국민 정서는 물론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교육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후진적이고 희극적인 양상을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다. 힘겨운 생활 전선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국민들은 오늘도 ‘막말’로 빚어진 싸움보다 웃음이 꽃피는 바르고 고운 말이 들리는 평화의 정치판을 기대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여전히 ‘막말’이 아닌 존칭어를 사용해서 싸움·욕설·왕따를 추방했다는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어린이들보다 자신들이 지능적으로 훨씬 높고 훌륭한 어른들이라고 믿지 않는가.
  • 신임 주중美대사 이름은 ‘반드시 기침하다 죽는다’

    신임 주중美대사 이름은 ‘반드시 기침하다 죽는다’

    최근 중국에 새로 부임한 미국 대사 맥스 보커스(72)의 중국식 이름에 ‘반드시 기침하다 죽는다’는 뜻이 담겼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그의 이름이 베이징 스모그를 비꼬는 대표어로 통용되고 있다. 보커스 대사는 지난 11일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인 보아오(博鰲)포럼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당신의 이름 보카스(博卡斯)를 네티즌들이 바오커스(包咳死)로 고쳐 부르는 것을 아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중국에 오게 돼 매우 기쁘다”고 받아넘겼다고 환구시보가 12일 보도했다. 보커스 대사의 중국 이름인 보카스는 음역어(音譯語)여서 의미가 없지만 발음이 비슷한 바오커스에는 ‘반드시 기침하다 죽을 것임을 보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중국에 살면 스모그 때문에 기침하다 죽고 말 것이란 의미로 네티즌들이 베이징의 심각한 스모그를 풍자하기 위해 만든 자조 섞인 농담인 셈이다. 미국 대사와 베이징 스모그를 연결 짓는 것은 전임자인 게리 로크가 중국에 스모그의 심각성을 환기시킨 인물이란 점에서 보커스 대사의 역할에 대한 중국인들의 바람과 관련이 있다는 평이다. 로크 전 대사는 재임 중 중국 당국이 발표하는 대기오염 수치와 다른 미 대사관의 독자적인 측정치를 발표해 당국이 스모그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했다. 또 중국 인권 문제를 앞장서 비판하고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해 중국 공직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그러나 보커스 대사는 미·중 협력만을 강조하면서 별다른 활동도 없어 중국 당국의 호평을 얻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보커스 대사는 이날 포럼에서도 자신을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했으며, 최근 미·중 양국이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문제를 놓고 충돌한 데 대해서도 “우리(미·중)가 경제 관계를 활력 있게 만든다면 국가 안보는 이목을 끌지 못할 것”이라면서 양국 협력을 강조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이란·칠레서 유년 보낸 두 예술가의 전시회

    이란·칠레서 유년 보낸 두 예술가의 전시회

    소녀가 경험했던 아랍의 이란과 소년이 경험했던 남미의 칠레는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성인 예술가로 성장한 소녀와 소년은 남성 위주 사회가 지닌 억압과 군부 독재의 아픈 역사를 여태껏 기억에서 게워 내지 못하고 있다. 애써 억압의 색깔을 작품에서 지우려 하지만 그들의 잠재의식은 ‘취조실’ 같은 궂은 기억을 되새김질하곤 한다. 최근 한국을 찾은 작가들을 만나봤다. ■ 풍자된 중년의 욕망 이란 출신 탈라 마다니 “중년 남성은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존재예요. 인간의 부조리를 가장 잘 드러낸 갈등의 시기라고 할까요.”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작품들은 뭔가 사연을 담은 듯하다. 기존 미술의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이란 출신의 여류 작가 탈라 마다니(33)는 요즘 영국 화단에서 ‘뜨는’ 젊은 화가다. 육체적 요소에 블랙 유머를 적절히 섞어 사회의 관습과 모순을 꼬집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작품에는 끊임없이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이들의 욕망은 어둠 속 프로젝터를 통해 화면에 투사되는 감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어린 소녀는 치마를 들추며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이를 바라보는 중년 남성들의 눈빛은 반짝인다. 아예 넋을 놓고 있다. 다른 그림에선 한 중년 남성이 기저귀 차림의 자신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본다. 마다니는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충실한 남성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그는 미국 오리건주립대와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 왔는데 청소년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돋보인다. 작가는 15세 때 이란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런 성장 배경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작품 속 중년 남성은 모두 아랍인이죠. 이들은 뭔가 욕망을 표출하려 해요. 어린 시절 이란에서 성장했던 경험이 무의식 중에 투영된 겁니다.” 오는 5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PKM갤러리에서 이어지는 전시에는 마다니의 약혼자인 영국 출신의 나다니엘 멜로스(40)도 함께 참여한다. 둘 다 한국 나들이는 처음이다. 영상, 퍼포먼스 작업에 천착해 온 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굴 비유’를 담은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한 현대인이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 동굴벽화를 그린 원시인을 인터뷰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또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범벅이 된 셰익스피어의 뇌에 빨대를 꽂은 조각도 내놨다. 이성이 지배하는 현생 인류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얼마 전 결혼을 약속한 두 작가가 함께 전시를 여는 것은 처음이다. 과도한 표현 때문에 영국에서 전시가 취소됐던 작품도 포함됐다. 두 작가는 “예술 작품은 본능과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며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데 저항하는 건 예술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빛이 된 독재의 기억 칠레 출신 이반 나바로 “어떤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취조실’을 떠올린다고 하죠. 하지만 전 딱히 억압적인 이미지를 담으려고 의도하진 않았습니다.” 와인으로 유명한 칠레는 군부 독재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칠레 출신의 네온아트 작가인 이반 나바로(42)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산티아고에서 태어난 이듬해인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에 오른다. 이후 17년간 잔인한 철권통치가 이어졌다. 어린 시절 숱한 통행금지와 정전을 겪으며 쌓인 어두운 기억은 역설적으로 나바로를 빛의 예술 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스무살이 되던 해 “돈이나 벌어 보자”며 떠난 미국 뉴욕에서 그는 욕망의 분출구를 찾았다. “2003년 우연히 차이나타운을 지나다 벽에 걸린 별 모양 램프를 봤어요. 별이 끝없이 멀어지는 듯한 환영에 빠져들었죠.” 이후 작가는 다양한 종류의 거울로 실험해 왔다. 지금은 ‘네온아트의 떠오르는 별’로 불린다. 2009년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선 칠레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최근 뉴욕 매디슨스퀘어에 이민자의 지친 삶을 달래기 위한 네온 작품을 매달아 화제를 모았다. 작가는 오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전시회를 이어 간다. 빛의 속도를 뜻하는 ‘299 792 458 ㎧’가 전시 제목이다. 설치작품 14점을 선보이는 작가는 마법에 가까운 눈속임을 부린다. 불과 20㎝ 두께의 작품들은 볼수록 끝없이 이어지는 환상을 불러온다. 바닥에 설치된 ‘우물’ 작품은 나락으로 빠질 듯한 아찔함을 드러내 관람객을 뒷걸음치게 만든다. ‘스파이 미러’를 통해 유리 속 거울을 반사하도록 해 무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식이다. 작가는 2011년부터 유명 고층 건물의 도면을 네온 조각 작품으로 선보이며 미국 시카고 시어스타워 등을 소재로 활용했다. 이번 전시에선 건축 중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이미지를 담은 ‘짐’(Burden)이란 작품이 포함됐다. 전시장 지하에는 ‘현대 울타리’란 작품도 있다. 100여개가 넘는 백색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적 색깔을 지양하고자 작품 제목을 ‘남과 북’으로 하지 않았어요. 강요된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지요.” 백색 형광등은 거울에 반사되면 초록빛으로 변한다. 보통 초록은 신선하고 상쾌하지만 그의 초록은 시리고 아픈 느낌이다. 흰색으로 눈속임하지만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유권자를 매수하라!” 푸틴 정권 풍자 게임, 러시아서 인기

    “유권자를 매수하라!” 푸틴 정권 풍자 게임, 러시아서 인기

    “유권자를 매수해 공공사업자금을 전용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황제가 되라” 이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는 게임 내용의 일부다. 러시아 정치 상황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로 이 게임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러시아의 유명 정치인들과 비슷한 게임속 캐릭터들은 “투표 부풀리기 시작!”과 “투표율은 146%!”라는 멘트로 사용자들에게 알린다. 개발사 네스킨소프트에 따르면 2011년 12월 10일 스마트폰용으로 출시된 이 게임은 러시아 국내에서 150만 회 이상의 다운로드를 달성하고 현재도 매달 약 10만 명의 사용자가 가입하고 있다. 게임 이용자는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몇 가지를 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지폐 3장으로 양을 조달하고 이렇게 모인 양 3마리로 유권자 1명을, 유권자 3명이 되면 선거사무소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계속 권력의 정점까지 오르는 것이다. 또 이용자는 예산을 무시하고 헌법을 위반하거나 의원을 인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게임에는 푸틴 정권에 맞서는 야권 지도자이자 변호사인 알렉세이 나발니로 보이는 ‘투옥된 변호사’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를 이용하면 ‘KGB(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 대령’과 같은 게임내 악당들과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참고로 알렉세이 나발니 변호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정부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문서를 공개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그 게임은 약 20번의 업데이트를 거치면서 반(反)푸틴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여성 밴드 푸시라이엇부터 미국 가수 마돈나까지 등장한다. 이 게임 ‘데모크라티아’는 러시아판 페이스북인 오드노클라스니키와 포털 사이트 메일닷루와 같은 인기 사이트에서는 차단됐다. 게임 제작자인 발렌틴 메르즐리킨(37)은 나발니 변호사의 지지를 공언하는 모스크바 출신의 프로그래머지만, 현재는 민주주의가 거의 정착되지 못한 벨라루스로 이주해 살고 있다. 러시아 정부 역시 체제파의 관점을 담은 게임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계 미디어가 선전하는 게임 중 하나는 ‘스노데브 런’(Snowdev Run)이라는 좀비 게임으로 전 KGB 요원이 모스크바를 좀비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한 리뷰어는 게임 사이트 ‘맥레이더’를 통해 “게임 의도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찬양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사진=‘데모크라티아’ 스크린샷(앱스토어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유권자를 매수하라!”…푸틴 풍자 게임, 러시아서 인기

    “유권자를 매수하라!”…푸틴 풍자 게임, 러시아서 인기

    “유권자를 매수해 공공사업자금을 전용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황제가 되라” 이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는 게임 내용의 일부다. 러시아 정치 상황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로 이 게임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러시아의 유명 정치인들과 비슷한 게임속 캐릭터들은 “투표 부풀리기 시작!”과 “투표율은 146%!”라는 멘트로 사용자들에게 알린다. 개발사 네스킨소프트에 따르면 2011년 12월 10일 스마트폰용으로 출시된 이 게임은 러시아 국내에서 150만 회 이상의 다운로드를 달성하고 현재도 매달 약 10만 명의 사용자가 가입하고 있다. 게임 이용자는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몇 가지를 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지폐 3장으로 양을 조달하고 이렇게 모인 양 3마리로 유권자 1명을, 유권자 3명이 되면 선거사무소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계속 권력의 정점까지 오르는 것이다. 또 이용자는 예산을 무시하고 헌법을 위반하거나 의원을 인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게임에는 푸틴 정권에 맞서는 야권 지도자이자 변호사인 알렉세이 나발니로 보이는 ‘투옥된 변호사’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를 이용하면 ‘KGB(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 대령’과 같은 게임내 악당들과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참고로 알렉세이 나발니 변호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정부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문서를 공개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그 게임은 약 20번의 업데이트를 거치면서 반(反)푸틴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여성 밴드 푸시라이엇부터 미국 가수 마돈나까지 등장한다. 이 게임 ‘데모크라티아’는 러시아판 페이스북인 오드노클라스니키와 포털 사이트 메일닷루와 같은 인기 사이트에서는 차단됐다. 게임 제작자인 발렌틴 메르즐리킨(37)은 나발니 변호사의 지지를 공언하는 모스크바 출신의 프로그래머지만, 현재는 민주주의가 거의 정착되지 못한 벨라루스로 이주해 살고 있다. 러시아 정부 역시 체제파의 관점을 담은 게임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계 미디어가 선전하는 게임 중 하나는 ‘스노데브 런’(Snowdev Run)이라는 좀비 게임으로 전 KGB 요원이 모스크바를 좀비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한 리뷰어는 게임 사이트 ‘맥레이더’를 통해 “게임 의도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찬양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사진=‘데모크라티아’ 스크린샷(앱스토어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우유곽에 꾹꾹 눌러 쓴 현실 옥중서도 저항한 그를 기억하며…

    우유곽에 꾹꾹 눌러 쓴 현실 옥중서도 저항한 그를 기억하며…

    ‘빈 들에 어둠이 가득하다/물 흐르는 소리 내 귀에서 맑고/개똥벌레 하나 풀섶에서/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깜빡깜빡 빛을 내고 있다//그래 자지 마라 개똥벌레야/너마저 이 밤에 빛을 잃고 말면/나는 누구와 동무하여/이 어둠의 시절을 보내란 말이냐’(김남주-개똥벌레 하나) “어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던 김남주(1946~1994) 시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대학을 중퇴하고 1974년 등단한 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0여년간 투옥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우유곽, 담배 은박지 등에 꾹꾹 눌러쓰거나, 면회 온 사람, 출옥하는 사람에게 구술을 전해 세상으로 내보낸 그의 시들은 변혁과 저항의 표상으로 남았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지 6년도 채 안 된 1994년 그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문학평론가, 시인 등 18명의 필자들이 그의 문학세계 20년을 통찰한 ‘김남주 문학의 세계’(창비)를 펴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10년 가까운 감옥살이는 그의 삶에서 결코 공백이 아니었다. 0.75평밖에 안 되는 부자유의 공간 속에서도 그는 혁명투사로서 또 시인으로서 더욱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했다”며 “500편 가까운 김남주의 시들 중 4분의3정도가 감옥 안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세계문학사상 이런 예는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짚었다. 남진우 평론가는 “급진적, 정치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그는 시대 상황을 외면한 공허한 예술을 지양하고 현실적으로 즉각적이고 유용한 시적 담론을 추구했다”며 “그의 공격 대상은 단지 권력자나 외세에 부역하는 족속들에 머물지 않고 소시민의 유약한 허위의식을 여실히 들추어냈다”고 지적했다. 윤지관 평론가는 “김남주의 성공적인 시들은 관념성과 상투성의 함정을 뛰어넘은 경우에 생겨난다”며 “이 시들은 그 강렬한 호소력으로 여전히 독자의 정신에 충격을 주고 공적인 증오에 바탕한 신랄한 풍자의 칼날이 번득인다”고 평했다. 하지만 “노동을 다룬 시에서는 노동현장이나 노동자의 일상에 매개한 박노해의 노동 현실에 대한 이해와 달리, 김남주의 노동자 계몽은 어디까지나 전위적 지식인의 주입식 교육에 가깝다”며 한계를 지적했다. 그가 남긴 시 518편을 한데 묶은 ‘김남주 시전집’(창비)도 함께 출간됐다. 7부로 구성된 전집은 시인이 투옥되기 이전의 초기작과 옥중시, 출옥 이후의 시 등 집필 시기에 따라 나눠 엮었다. 중복 출간되면서 제목을 바꾸거나 고쳐 쓰인 작품은 텍스트를 확정해 원본과 가장 가까운 정본(定本)으로 완성됐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제64회 베를린영화제, 6일 화려한 개막

    제64회 베를린영화제, 6일 화려한 개막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6일(현지시간) 개막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시작으로 최고작품상인 황금곰상이 발표되는 오는 15일까지 10일간 펼쳐진다. 총 23편의 영화가 경쟁 부문에서 황금곰상을 놓고 치열하게 다툴 전망이다. 한국 영화는 지난해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경쟁부문에 나갔지만 올해는 단 한편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경쟁의 포럼부문에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이용승 감독의 ‘10분’·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이, ‘컬리너리 시네마(Culinary Cinema)’에서 김진아 감독의 ‘파이널 레시피’(Final Recipe)가, 파노라마부문에서 이송희 감독의 ‘야간비행’이 초청됐다. ‘설국열차’의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고아성, 틸다스윈튼, 존허트 등이 영화제를 찾는 데다 ‘설국열차’는 7~8일 이틀간 상영될 예정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영화가 강세다. 중국 영화감독 6세대의 기수인 로예 감독의 신작 ‘맹인안마’를 포함해 흥행감독 닝하오 감독의 ‘무인구’, 디아오이난 감독의 ‘백일화염’ 등 3편이 경쟁부문에올랐다. 일본영화는 야마다 요지 감독의 ‘작은 집’이 경쟁부문에 나갔다. 특히 링클레이터 감독과 이선 호크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보이후드’, 프랑스 감독 라시드 부샤렙이 연출한 ‘투 맨 인 타운’, 2009년 ‘밀크 오브 소로우:슬픈 모유’로 황금곰상을 받은 클로디아 로사 감독의 ‘어로프트’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경쟁부문 심사는 미국 영화 제작자 제임스 샤머스, 아카데미상을 2차례 수상한 크리스토프 발츠, 홍콩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 프랑스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 등 8명이 맡아 황금곰상 수상작을 결정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칸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권위있는 영화제로 정치 색채가 짙다. 지난해 공산주의 잔재가 있는 루마니아에서 돈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과 물질주의를 풍자적으로 고발한 영화 ‘차일드스 포즈’가 황금곰상을 탔다. 또 베를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와도 인연이 깊다.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특별은곰상을 받은 뒤, 1994년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알프레드바우어상을 수상했다. 2004년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가 감독상을, 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알프레드바우어상을 받았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어려운 용어 뒤 법의 실체를 폭로한다

    어려운 용어 뒤 법의 실체를 폭로한다

    저주 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프레드 로델 지음/이승훈 옮김/후마니타스/280쪽/1만 3000원 ‘부족시대에 주술사가 있었다면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문명사회에는 법률가가 있다’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의 문명사회를 운영하는 이들이 바로 법률가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회의원 가운데 법조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또 현 정부에서 국무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여당대표 역시 모두 법조인으로 채워져 있다. 사적인 삶에서도 법률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집을 사고팔거나 이혼할 때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길 때 또한 그렇다. 그런데도 보통사람들에게 법률가라고 하면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왜 그럴까. 우선 어려운 법률용어가 그렇고 법적 판단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나 도덕감정과 잘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40년간 예일대 로스쿨의 헌법학 교수를 역임했던 저자는 ‘저주 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를 통해 난해한 전문용어와 법 이론 뒤에 숨겨진 법의 실체를 폭로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승자를 자임하는 법원과 법관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경구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냉소적이고 때로는 조롱 섞인 말로 법률가들을 향해 거침없는 일침을 가한다. 정부와 기업, 개인의 사적인 활동이 어떤 논리적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혼란에 빠지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법률가들이 규칙을 만들고 전체 문명사회는 그들을 따르며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민주적 경쟁과 결정의 논리를 사법적 판단의 잣대에 맡기는 순간 정치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며 모든 정책과 결정사항들은 법률가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법률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거나 대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법률가들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법률가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일반인의 머릿속에 법의 작동방식에 대한 회의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뿌리기 위해 썼다”고 밝혔다. 1939년 첫 출간 당시 큰 반향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법 비판에 당시 미국의 법조계는 분노와 경악으로 들끓었다. 진정한 법률가의 모습을 다시금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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