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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에너지] 한국의 앨 고어들

    [환경&에너지] 한국의 앨 고어들

    정부의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정부 밖에서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을 당겨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을 맡은 고건 전 총리 말고도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이 녹색성장 분야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진현 전 장관은 지난해부터 ‘녹색성장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녹색성장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달성되기 어려우며, 정부·기업·시민단체 등 각 분야의 역량이 결집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포럼 발족 취지를 밝혔다. 한국경제신문과 문화일보 회장도 지낸 김 전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김명자 전 장관은 ‘그린코리아21 포럼’이라는 싱크탱크의 출범을 주도했다. 학계와 산업계,정·관계,언론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린 에너지 사회체계를 구축하는 데 과학기술적,산업적,학술적 측면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취지로 모였다. 김 전 장관은 지난해 포럼을 창립하면서 국가 전력 전달체계를 교류(AC)에서 직류(DC)로 전환하고, 전력 저장과 전기차 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한걸음 ‘앞서가는’ 정책을 제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전 장관은 이와함께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CDP는 전세계의 금융 및 투자 기관들을 대신해 세계 주요 상장기업들로부터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기구이다. CDP가 올해 정보공개 대상으로 지목한 한국 기업은 100개로 지난해 50개보다 2배나 늘었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의 지도자들이 퇴임후 기후변화나 녹색성장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다. 고어 전 부통령은 지난 2006년 기후변화의 문제점을 담은 ‘불편한 진실’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현재 싱크탱크인 사회·정치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기후변화 대응책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바보들의 행진/오풍연 법조대기자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것 때문에 패가망신해도 집착한다. 욕망의 충족조건은 재미다. 갈수록 흥미를 더해 가기에 손을 떼지 못한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은퇴한 선배들과 어울렸다. 한 분이 ‘3불’ 얘기를 꺼냈다. 예순이 넘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첫째, 주식투자를 하지 말라. 둘째, 도박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셋째,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 망한다. 주변의 사례까지 섞어 얘기하니 누구도 반론을 펴지 못했다. 구구절절이 옳았다.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경험담을 들었다. “우량 주식이라고 해 투자했는데, 제네시스가 티코가 되고 말았습니다.” 1년간 외국에 나갔다 온 노()교수의 푸념이다. 셋 다 중독성이 강하다. 한번 실패해도 다음에는 꼭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럼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면 바보짓이다. 우매한 게 인간이라던가. 바보들의 행진은 계속될 듯하다. 오풍연 법조대기자 poongynn@seoul.co.kr
  • [여의도 블로그] 김형오 국회의장-홍준표 윈내대표 두마음 행보

    [여의도 블로그] 김형오 국회의장-홍준표 윈내대표 두마음 행보

    “저런 국회의장과 여당 원내대표 사이는 처음 본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형오 국회의장과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를 두고 내뱉은 말이다. 중립의무를 가졌지만 ‘원적지’가 여당인 국회의장과 여당 원내대표가 사사건건 부딪치며 충돌하는 것은 정치권에선 낯선 풍경이다. 이를 두고 당내에서는 “두 사람 모두 정치인으로서, 미래의 꿈을 가지고 경쟁하니 그런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김 의장은 역대 국회의장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역대 국회의장들이 퇴임 후 정계를 은퇴한 것과 달리 그에게는 정치적 미래가 열려 있다. 김 의장은 올해 61세다. 원로 취급을 받을 나이는 아니다. 후반기 당 대표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때문에 친정인 한나라당에서는 “김 의장이 자기 정치를 하려고 한다.”, “이미지 관리만 하려 한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 홍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자기 도취에 젖어 이미지 관리만 하려는 태도는 선출직 공직자로서 옳은 태도가 아니다.”라며 김 의장을 압박하는 이례적인 장면도 연출했다. 홍 원내대표에 대한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지난해 12월 임시국회와 이번 임시국회에서 홍 원내대표가 김 의장과 사전 조율 없이 막무가내로 ‘돌격 신호’를 보내는 것에 어이없어했다.지난 2일 김 의장이 직권상정을 결심한 것도 홍 원내대표가 아니라 박희태 대표 등 당 지도부와 중진의원들의 설득 때문이었다. 지난해 1차 입법전과 달리 이번 협상 전면에 홍 원내대표가 나서지 못하고 한발 물러선 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도 김 의장의 요청이었다는 후문이다. “불필요한 행동을 자제하고 ‘오버액션’하지 말라.”는 김 의장의 뜻이라는 것이다. 의장실에선 “홍 원내대표가 한 건 하고 법무장관 등으로 입각하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홍 원내대표가 “이번에는 김 의장이 나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며 ‘이면합의설’을 흘리는 것에도 의장실은 “그런 말 한 적 없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맞수] (1) 鄭동영 vs 丁세균

    [맞수] (1) 鄭동영 vs 丁세균

    정치는 경쟁이며 승부다. 파괴력으로 싸우고 콘텐츠로 쟁취한다. 정치인과 정당, 정치 단체는 상대를 누르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과 실리를 추구한다. 민심을 얻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저마다 명분과 가치를 지향한다. 서울신문은 정책 이슈나 정치 쟁점 등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맞수의 면면을 조명한다. 여야의 맞수, 여당 내나 야당 내의 맞수, 학연이나 지연에 따른 맞수 등 다양한 라이벌 열전을 소개한다. #1. 2007년 3월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외곽 조직인 평화경제포럼 출범식에서 정동영(鄭東泳·56) 전 통일부 장관과 정세균(丁世均·59)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맞잡았다. 정(鄭)과 정(丁)은 4~5월 국회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와 대선 관련 심포지엄, 7~8월 봇물을 이룬 대선 후보 출마선언식에 잇따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수개월 뒤 의장직에서 물러나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을 맡은 정(丁)은 정(鄭)의 대선 행보를 도왔다. #2. 지난 8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칩거에 들어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정 전 장관이나 손학규 전 대표 등과 거리를 둬온 노 전 대통령은 정 전 장관 복귀설로 계파 갈등이 불거진 때에 정 대표의 방문 요청을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배경을 두고 당 안팎의 시선이 쏠렸다. 오는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서 소리 없는 ‘정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고향인 전주 덕진 재선거 출마를 저울질하는 정 전 장관과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정 대표측의 물밑 신경전이 가열되고 있다. 정 대표를 추대한 당내 386세력은 정 전 장관의 덕진 출마에 불만을 쏟아냈고, 정 전 장관의 지지세력은 “공천배제는 어불성설”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정(鄭)과 정(丁)은 전북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정(鄭)은 순창, 정(丁)은 진안 출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은퇴 후 무주공산이 된 호남의 패권을 놓고 라이벌로 성장했다. 두 사람은 78년 같은 해에 기자와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정계 입문 뒤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으로 정치적 행보도 같이했다.1996년 15대 국회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으로 같이 정계에 입문한 뒤 참여정부 때 잇따라 입각했다. 2004년 정(鄭)이 통일부 장관을 맡았고 정(丁)은 2년 뒤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됐다. 열린우리당 의장이 11차례 교체될 때, 정(鄭)이 2004년과 2006년, 정(丁)이 2005년과 2007년 각각 2차례씩 의장을 맡았다. 정 전 장관이 범민주계 17대 대선 후보로 나선 반면 정 대표는 현재 강력한 야당 대표 이미지를 굳히며 차기 대선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총선에서 연승한 정 대표가 4선인 반면 정 전 장관은 2차례 낙마로 재선이다. 이들은 지역적 동질성 탓에 다른 한쪽을 넘어야 하는 숙명적 관계다. 정 전 장관은 젊은 시절, 모친이 재봉틀로 만든 아동복을 동대문 평화시장에 직접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정 대표도 밥 세끼를 챙기지 못하는 형편 탓에 검정고시를 거쳐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장학금을 받고 인문계 고교로 전학했다. 정 전 장관은 대선 후보 선출 뒤 첫 유세장소로 평화시장을 택했고, 정 대표는 고향 후배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정 전 장관은 지난 대선에서 500여만표 차이로 낙선한 뒤 18대 총선에서도 고배를 마시고 도미(渡美)했다. 반면 정 대표는 열린우리당계와 386세력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7월 민주당 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정치 재개를 모색하는 정 전 장관과 굳히기를 시도하는 정 대표는 오는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치적 대립이 불가피하게 됐다. 내달 공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정 전 장관이 당 상임고문·최고위원 연석회의에 고문자격으로 참석, 의견을 개진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정 대표는 “뭐라 얘기하기 힘들다.”며 당내에 함구령을 내렸지만 정세균호(號) 출범 뒤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당내 소장파 모임인 ‘개혁과 미래모임’과 정 전 장관 계열이 참여한 ‘민주연대’도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0년 재선 의원으로 권노갑 전 고문을 상대로 ‘정풍 운동’을 일으킨 정 전 장관이 복귀 논란에 빠져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박연차 회장,노전대통령 자녀들에게도 돈 건네

    박연차 (64)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을 수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이인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녀 등 가족들에게도 돈을 건넨 정황을 포착하고 자금 흐름을 집중 추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조선일보가 19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 돈은 노 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퇴임 직후 차용증을 쓰고 박 회장으로부터 빌렸다는 15억원과는 별개의 돈이다. 이에 대해 박 회장은 최근 국세청 세무조사 자료를 들이대며 추궁한 검사에게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준 적은 있지만, 뭘 바라고 준 것은 아니다.”며 노 전 대통령 가족들에게 금품을 건넨 사실 자체는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한편 검찰은 박 회장을 대신해 태광실업을 사실상 운영하는 장녀를 최근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L씨, 정계 원로인 P씨와 K씨 등 정치인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박 회장의 진술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P씨로 지목된 박관용(71) 전 국회의장은 19일 “정계를 은퇴한 다음인 2004년쯤에 박 회장이 내가 설립한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에 후원금을 냈다.”면서 “현역 정치인일 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부모봉양=가정불화” 부양 꺼리는 노인들

    “부모봉양=가정불화” 부양 꺼리는 노인들

    ‘노인부양’에 대한 노인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과거 ‘동방예의지국’을 외치며 ‘자식의 부양’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노인들이 이제는 스스로 자식들의 부양을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퇴자협회에 따르면 20~70대까지 총 3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60대 이상 노년층의 79%가 ‘자녀에게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노후준비가 부족하다면 어디서 채우겠느냐는 질문에는 74%가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응답했다. 만성질환으로 몸이 불편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요양원에 가겠다.’는 응답이 절반이 넘는 55%였다. 과연 노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부양? 그딴 거 기대할 필요없어. 내가 젊을 때부터 대책을 세웠어야지.” 남편과 단둘이 생활하는 변화자(69·여·서울 중랑구)씨는 자식들의 부양을 단호히 거부한다. 분가한 아들, 딸들이 가끔씩 10만~20만원 정도의 용돈을 보내지만 결코 부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비의 대부분은 자신이 저축해 놓은 돈과 연금으로 충당한다. 변씨는 “자식들이란 가끔씩 찾아와서 얼굴 한번 비춰주면 그만”이라면서 “내 힘으로 자립할 수 있다면 자식에게 굳이 기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권범주(65·서울 용산구)씨도 변씨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예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자식들에게 의존해서 부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노후 대책이 없더라도 직업을 갖고 스스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많다.”면서 “물론 경제적인 기반이 너무 없는 사람은 자식이나 사회에 기대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대책이 있는 노인들은 대부분 자립을 원한다.”고 말했다. 권씨는 매일 서울의 한 노인병원에서 말기암 환자를 돕는 ‘호스피스’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일에 대한 만족감이 높고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퇴직 이후에도 큰 스트레스는 없다. 그는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금융자산으로 노후 준비를 충분히 해놓았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면서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면 부부 단둘이서 살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인 자립은 소외받는 세태에 대한 반기” 노인들은 흔히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 등과 함께 생활하는 와중에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두려워한다. 과거 가정의 ‘큰 어른’으로 군림하던 노인은 이미 가정과 사회에서 약자로 전락한 지 오래다. TV 시청에 익숙한 세대인 60~70대 노인들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정불화’를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해 ‘부모봉양=가정불화’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김철호(75·대전 중구)씨는 “요새 주변을 둘러보면 며느리나 자식에게 구박받는 노인들이 많아서 걱정이 많이 된다.”면서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큰 원인 아니겠느냐.”고 토로했다. 그는 “대다수 노인이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려 하는 것은 자식이나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볼썽사나운 꼴과 마주치기 싫어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인을 부양하는 가정이 점차 줄어들면서 한때 ‘효도법’이 이슈화하기도 했다. 효도법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도록 법제도로 강제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효도법 제정은 역설적으로 “현실성이 없다.”는 노인단체의 반발로 ‘정치쇼’로 끝나고 말았다. 노인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젊은층의 세태도 노인들의 자립을 부추기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인 유기 건수는 2005년 22건에서 2006년 43건, 2007년 34건으로 20~30건 수준을 유지하다가 지난해는 1~11월까지 38건으로 집계됐다. 노인 유기는 노인을 거리에 버리거나 연락을 완전히 끊고 방치하는 것을 말한다. 같이 살고 있는 노인의 건강이나 생활에 대해 무관심한 방임은 2005년과 2006년 각각 816건이었다가 2007년 941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는 1~11월까지 762건을 기록했다. 한국노인복지전문가협의회 박계승 회장은 “최근의 정책과 사회·문화적인 현상들을 살펴보면 노인은 가정의 약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변해가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이 부양을 반대하는 것은 젊은 층으로부터 소외받는 데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세대는 표현력 부족… 속마음 잘 파악해야” 모든 노인이 부양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노인들은 여전히 죽기 전까지 가족의 따스한 품에서 살기를 바란다. 성용철(72·부산 동래구)씨는 “부모가 자식과 같이 살기 싫다고 하는 것은 사실 다 헛말”이라면서 “마음 속으로는 자식과 살고 싶지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분가를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첫째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3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성씨는 “손자 보는 것 아니면 우리 나이에 무슨 낙이 있겠느냐.”면서 “과거 전통이 잘못됐다고 욕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이 살을 비비면서 살아야 서로간에 좋은 감정도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자식과 함께 살고 있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거꾸로 자식의 집에서 나와 독립하려는 노인들도 많다. 김성호(71·서울 중랑구)씨는 “노인연금이 한달에 16만원밖에 안 나온다.”면서 “어려운 사정에 자식 생활비도 못 대주고 있어 부담스러워서 요양보호사 자격을 땄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돈을 만지지 못했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면 자식의 집에서 나와 가스값이라도 내가 벌어서 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보험회사에 40년 이상 다니다 퇴직해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동수(77·서울 중랑구)씨는 “아들의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짐만 되고 있다.”며 가족에게 못다 푼 미안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4대 종손으로 집안 동생의 보증을 서줬다가 집이고 예금이고 모두 날리고 막내아들에게 얹혀 살고 있다.”면서 “안사람도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자식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근(69·광주 북구)씨도 “병원을 다녀야 하는데 마땅히 돈 나올 곳은 없고 자식들에게 미안한 감정밖에 남아있지 않다.”면서 “내가 빨리 죽기를 바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가끔씩 울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부양을 기피하는 노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자신들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세태가 바뀌면서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적 가족관계 단절… 새 규범체계 만들어야” 차흥봉(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전 복지부 장관은 “혼자 자살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외로움을 강하게 느끼는 것처럼 노인들도 다른 생각이 있기 때문에 본심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인들의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노인을 당연히 봉양해야 한다는 과거 규범적인 문화와 현재 바뀐 문화의 충돌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찾아오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현실적인 여건을 체득했기 때문에 ‘굳이 자식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핵가족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가족관계가 단절되고 전통적인 규범체계가 무너지면서 ‘가족문화의 아노미’가 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국가가 효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노인 규범체계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농촌지역의 노인 부양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차 전 장관에 따르면 자신이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경북 의성군 인근의 마을들을 조사한 결과 1만 8000여 노인가구 가운데 300여가구는 자식들이 있어도 1년에 한 번도 찾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10가구 중 2~3가구꼴로 노인요양시설에 노인을 보낼 여력이 있으면서도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이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하지 못하는 노인은 국가가 도와야 한다는 것이 차 전 장관의 지적이다. 차 전 장관은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노인들이 체감적으로 느끼는 복지정책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라면서 “경기침체로 자식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양의 일정부분을 정부가 채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현용 박건형 류지영기자 junghy77@seoul.co.kr
  • [서울광장] YS·DJ의 화해를 다시 바라며/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YS·DJ의 화해를 다시 바라며/이목희 논설위원

    지난해말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81회 생일 축하모임이 열렸다. YS가 틈만 나면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비난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를 잘 아는 한 참석자도 그날은 놀랐다. YS는 헤드테이블에 앉자마자 DJ를 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둘러앉은 이들은 YS의 기에 눌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DJ 언행의 객관적인 옳고 그름은 별개의 문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색하고 DJ를 비판할 이는 YS뿐이다. 이런저런 이들이 DJ를 겨냥해 보지만 경량급들의 얘기는 묻혀 버린다. 또 DJ 지지자들이 겁이 나 YS처럼 직설 어법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에서는 ‘짬밥’이 중요하다. YS·DJ 모두 이제는 정계를 은퇴했다. 그러나 40여년간 한국 정계를 주물러온 두 사람의 ‘짬밥’을 따라갈 이가 없고, 앞으로도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DJ의 정치 훈수 한마디에 야권이 요동치고, 정부·여당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대북 정책과 국회 운영을 둘러싸고 현 집권층과 계속 각을 세우고 있다. 그제는 용산 참사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이렇듯 DJ가 사사건건 나서는데 숙적 YS가 가만있을 리 없다. YS의 상도동계, DJ의 동교동계가 흩어지긴 했지만 그 끝자락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여야간의 극한 대립의 근원을 살피면 YS·DJ의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한다. 여권내의 친MB파와 친박파의 대립 역시 정도의 차는 있으나 양인간 갈등이 격세유전처럼 바닥에 깔려 있다. 인맥을 넘어 더 중요한 것은 정치행태다. 국회에서 폭력과 날치기가 횡행하는 헌정사적 책임 소재를 찾으면 YS·DJ에게로 향한다. 정치인들이 누구에게서 극렬 투쟁의 방법을 배웠겠는가. YS·DJ가 드리운 그늘의 큰 희생자는 그들 이후의 대통령들이다. ‘짬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가진 제도적인 힘에도 불구, 마음 깊은 곳의 경외심을 이끌어 내기엔 정치 경력이 너무 일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여의도 정치권을 멀리하려는 것 역시 그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YS·DJ를 어떻게 할 것인가. 2005년 양인을 화해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동서지역 화합, 민주화세력 재결합 등 구호가 거창했다. 정의화 의원, 한화갑 전 의원 등이 앞장섰다. 결과는 실패였다. 두 사람간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고, 화해하기에는 노인들의 고집이 너무 셌다. 최근 들어 몇몇 인사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YS·DJ간 화해를 재추진해 보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DJ가 왼쪽으로 갈수록 YS는 오른쪽으로 간다. 바라는 바는 YS·DJ의 고백성사다. 양인이 후배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면 좋겠다. ‘영원한 총재님’은 이제 없다고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 권위는 오랜 정치투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위치에서 나와야 민주사회로 나아간다는 점을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공동호소문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손이라도 맞잡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줬으면 한다. YS·DJ도 화해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화합하지 못할 일이 있느냐는 메시지라도 보낼 수 있다. 모레는 민족의 명절 설날. YS·DJ가 찾아온 정치권 인사들 앞에서 상대를 헐뜯지나 않았으면 한다. 덕담이 오가다 보면 조금씩 해빙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5080] 세상은 변했다…고부 관계 재조명

    [5080] 세상은 변했다…고부 관계 재조명

    “둘째며느리 고것이 찜질방을 가자고 그러잖아요. 날 태워 죽이려고.” 일요일밤 방송되는 인기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할매가 뿔났다’ 코너. 할머니로 등장하는 개그맨 장동민은 등장할 때마다 둘째며느리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겨 잔뜩 화가 나 있다. 코너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둘째며느리의 호의는 언제나 시어머니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하면 죽은 다음 영정사진으로 쓰기 위해서고, 밥을 많이 먹으라고 하면 배터져 죽게 하려는 음모가 된다. 관객도, 시청자도 시어머니의 과장된 오해에 폭소를 터뜨리지만 어쩐지 씁쓸하다. ●34년전 며느리의 애교작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사는 김진순(57·가명)씨는 34년 전 지금의 남편을 따라 경북 상주의 시댁을 처음 찾았다. 김씨를 처음 본 시어머니는 맘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김씨의 집이 가난했던 데다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는 김씨의 태도 때문이었다. 결혼 후 시어머니는 큰며느리와 사사건건 비교했고 차별대우를 했다. 큰며느리는 부엌에만 들어가도 “힘들면 쉬어라.”라고 하면서 일은 김씨에게 시켰다. 심지어 ‘이년 저년’이라는 소리도 했다. 물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도 없다. ‘서울댁’ 김씨가 택한 생존법은 ‘애교 작전’. 남편과 함께 거의 매주말 상주를 찾았고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좋게 대해주지 않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이자 시어머니의 태도도 누그러졌다. 넷이나 되는 시누이들에게도 김씨는 무작정 들이댔다. 집으로 찾아가 김치를 해주기도 했다.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시누이들은 김씨의 편이 됐다. 김씨는 “시댁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마음이 편해졌다.”면서 “친정 행사는 빼먹더라도 시댁 행사는 한 번도 안 간 적이 없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된 며느리 김씨는 “시어머니의 캐릭터를 그대로 인정하니 서운할 것도, 마음 상할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김씨는 남편이나 시누이들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김씨는 “정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런 생을 겪은 김씨는 며느리를 절대 차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05년, 2008년 두 아들을 차례로 장가보낸 김씨는 시어머니의 입장이 됐다. 두 며느리는 ‘곰’과 ‘여우’라고 할 정도로 캐릭터는 정반대다. 작은며느리는 자신의 젊은 시절처럼 시부모에게 애교를 부린다. 주말이면 영화를 보러 가자며 조르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작은며느리에게 마음이 더 간다. 김씨는 “일생의 대부분을 남으로 살아온 며느리를 진심으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서 “30년 넘게 겪으면서도 시어머니를 잘 알지 못했는데 며느리가 생긴 이후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는 며느리 전성시대 전통적인 고부갈등에서 시어머니가 우위에 있었다면 이제는 아니다. 대전에 사는 강보영(60·가명) 씨는 2월 초 생일을 앞두고 요즘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울에서 올 전화를 기다린다. 2년 전 결혼한 아들 내외가 첫 생일상을 차려주겠다고 내려왔을 때 한 말실수 때문이다. 강씨가 보기에 전날 저녁부터 며느리가 준비한 미역국은 간이 맞지 않았고 잡채도 맛이 없었다. 모인 가족들에게 이 음식을 도저히 먹일 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들어가 직접 음식을 손봤다. 식사가 끝난 후 넌지시 요리학원이라도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게 발단이었다. 얼굴이 굳어버린 며느리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말없이 있다 상경했다. 다음 주말 혼자 내려온 아들은 “엄마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다.”면서 난리를 쳤다. 아들 표현대로라면 강씨는 간 큰 시어머니이자, 세상 물정 모르고 시어머니 대접 받으려는 사람이었다. 충격을 받은 강씨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대부분 아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여대를 다니는 딸조차 “엄마 같은 시어머니가 요즘 어디 있느냐.”며 며느리 편을 들었다. 강씨가 음식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가 며느리에게 사과했지만 한 번 서먹서먹해진 상황은 2년째 그대로다. 결혼 전에 수시로 내려와 애교를 떨던 며느리는 그 후로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전화조차 잘 하지 않는다. 어쩌다 와도 며느리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 같아 영 불편하다. 강씨는 “이제나 저제나 생일상을 다시 차려주겠다는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면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며느리에게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정말 후회된다.”고 말했다. ●사위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장모 서울 일원동에 사는 이은우(65·가명) 씨는 시집간 외동딸에게 남편 몰래 집을 사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젊은 시절 정치를 하느라 바빴던 남편 대신 재산을 관리했던 터라 이씨는 강남 일대에 오피스텔 빌딩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재력가다. 처음 딸이 사윗감을 데려왔을 때 이씨는 속으로 탐탁지 않았다. 특히 시댁에서 전셋집만 마련해 주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귀하게 기른 딸을 별 볼일 없는 집에 보낸다고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아 신경도 많이 쓰였다. 이씨는 “집을 사주고 싶었지만 상대편 집 입장도 생각해야 하는지라 일단 참았다.”면서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집을 옮겨주겠다고 딸에게 약속했다.”고 말했다. 결혼 이후 딸과 사위는 이씨에게 극진하다. 차가 고장나면 사위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기사 역할을 할 정도다. 칠순이 넘은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흐뭇해하기만 하지만 이씨는 요즘 혼란스럽다. 딸은 집에만 오면 “집값이 많이 떨어졌는데 지금 사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보채고 사위는 옆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다. 가족끼리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동산 시장 얘기로 화제가 옮겨가고 결국 딸 내외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씨는 “돈이 있어야 대접받는다고 해서 집 얘기를 처음 꺼냈는데, 이제는 사위가 오로지 집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집을 사주고 난 이후에 사위가 어떻게 변할지 솔직히 겁이 난다.”고 말했다. 이씨는 최근 집을 보러 다니느라 바쁘다. 집을 사주지 않을 경우 지금 받고 있는 관심조차 줄어들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퇴해서 집에 있는 남편 모르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이씨는 “한번 사주는 집인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찾는 것도 어렵고, 사돈집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면서 “이렇게라도 사위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크게 아깝지는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스테디셀러 ‘고부 갈등’ 여전히 TV드라마 최고의 소재는 고부갈등이다. ‘너는 내운명’, ‘조강지처클럽’, ‘며느리 전성시대’, ‘겨울새´ 등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들에도 예외없이 고부갈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어머니’, ‘시댁’ 등의 검색어를 입력하면 수십만건씩 찾을 수 있다. 댓글도 수십개에서 수백개씩 달려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한다는 얘기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세계라는 의미에서 시댁을 부르는 ‘시월드’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들은 탈출구가 없다. 인터넷에서 남의 사연을 읽고 공감하고 익명으로 마구 욕을 퍼부을 수 있는 며느리들에 비해 시어머니들은 고작해야 친구들과 며느리 흉을 보는 일이 전부다. 그나마 친구들이 며느리 자랑이라도 하면 배만 아프기 일쑤다. 송지인(55·가명)씨는 “며느리가 시댁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다른 친구들한테 민망해서 하소연도 못하겠다.”면서 “아들한테 넌지시 얘기를 했다가 ‘바쁜 사람 왜 자꾸 부르느냐.’고 잔소리만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며느리가 줄어들면서 시어머니가 약자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노인의 전화 관계자는 “며느리나 사위가 절대 강자인 집안도 쉽게 찾을 수 있다.”면서 “며느리나 사위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하는 경우 나이 든 시부모나 장인 장모가 상처를 받고 전화를 거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최근 들어서는 ‘선진국형 가족갈등’으로 평가되는 역고부갈등(사위와 처가식구간의 갈등)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갈등도 많아지고 있다. ‘좋은 가정 만들기’, ‘생명의 전화’ 등 상담소들에 따르면 걸려오는 가족갈등 상담 중 역고부갈등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문제가 절반을 넘을 정도다. 이처럼 갈등이 다양해진 배경에는 며느리들의 사회 진출이나 육아로 인한 처가살이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신혼부부들의 결혼 당시 경제 지원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처가에서의 지원(18%)이 시댁 지원(11%)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박건형 류지영 정현용기자 kitsch@seoul.co.kr
  • [데스크 시각] 끼니 굶는 노인들… 심드렁한 대책/손성진 미래기획부장

    [데스크 시각] 끼니 굶는 노인들… 심드렁한 대책/손성진 미래기획부장

    어느 골프장에서 앞 팀의 진행이 더뎌 이유를 알아보니 4형제가 ‘부모 모시기’ 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는 사람이 부모를 모신다는 내기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씁쓸한 조크다. 70대, 80대는 일제강점기와 전후 빈곤기를 살아온 세대다.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그러고도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박탈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서울지하철에서 버린 신문지를 모아 팔아 하루에 3000원도 안 되는 돈을 벌어 연명하는 노인들이 수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동네 골목마다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노동할 여력이 있어도 마땅한 일감을 찾을 길이 없는 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뿐이다. 노인들이 힘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가족·사회와의 단절, 소득의 부족, 질병 등이다. 지속적인 핵가족화는 부모와 자식의 유대관계를 끊어 놓았다. 자녀나 형제, 자매가 있는데도 홀로 사는 독거 노인이 90%나 된다. 전통적인 봉양의 미덕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노인들은 자립 능력도 없이 독거 상태가 된다. 몇년 전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혼자 사는 노인이 17%가 넘는다. 도시보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 농어촌 지역에서 독거 노인의 비율은 더 높다. 독거 노인들의 수입은 한 달에 수십만원을 넘지 않는다. 평균 25만원가량이라는 통계도 있다. 정부에서 생활보조금을 받아야 하는데 부양하지 않는데도 부양능력이 있는 가족이 있으면 이마저도 받지 못한다. 노인들의 생활고는 농촌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농사를 지어도 씨앗값을 건지기 어렵고 나이가 더 들면 거동마저 어려워져 논일, 밭일도 하기 힘들다. 넉넉지 않은 자식이 부모를 모시려고 해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어 끙끙 앓는 게 요즘 노인들의 실상이다.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병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노인 5명 중 4명이 질병을 앓는다. 가난한 노인들에게 닥치는 병마는 치명적이다. 막다른 길에 이른 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비극적인 죽음이다.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의 자살은 젊은이들처럼 충동적이지도 않고 단호하다. 얼마 전 전남 장흥에서 75세 노인이 4년 동안 돌보던 병중의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8월 서울 용산의 쪽방촌에서는 폐지를 수집하며 살던 독거 노인이 목을 매 숨졌다. 하루에 만원을 벌지 못해 자주 끼니를 걸렀다고 한다. 고령화에 대한 갖가지 대책이 나왔지만 좀더 주도면밀한 방책이 나와야 한다. 연예인의 자살에만 사회적인 이목이 쏠릴 게 아니다. 노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세심하게 짜야 한다. 연금제도를 개선해 은퇴 이후의 소득을 보장하고 간병 치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젊은이들 일자리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노인들의 실상을 알면 그렇게 따지지 못한다. 노인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권이나 정부의 표정은 ‘심드렁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올 4월부터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은 독거노인의 경우 월 8만 7000원에 불과하다. 언발에 오줌누기다. 지난해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돼 거동이 불편한 노인 환자들을 국가가 돌봐주고 있지만 시설 부족 등 미흡한 점이 아직은 많다. ‘종일 장사해도 2만~3만원 번다.’며 대통령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의 모습을 벌써 잊은 듯하다.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좀 더 앞으로 당길 필요가 있다. 노령연금이나 요양보험으로 첫발은 떼었지만 더 폭넓은 지원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손성진 미래기획부장 sonsj@seoul.co.kr
  •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사나흘에 한 번씩은 가족과 통화했는데,요즈음은 매일 수십 차례 시도하는데도 잘 안 돼요.”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타메르 아부메드(26)의 말입니다.그의 가족은 가자지구 안의 칸 유니스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이스라엘군과 이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첫 교전을 벌인 가자시티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습니다.이스라엘군의 침공 이후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고향 땅에 가족들이 있는 이 청년을 지난 9일 인천 인하대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그는 2년 전부터 이 학교에서 IT(정보통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전액 장학금에 매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대학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아랍계 특유의 길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가족들과 언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느냐는 질문에 “그저께 겨우 한 번 통화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수십번 전화 걸어 한번 통화될까 말까  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기와 수도는 물론 통신시설까지 거의 마비됐습니다.그나마 아직까지는 휴대전화 기지국이 몇 남아 있어 다행이지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안위와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는 관계로 통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타메르도 10여번 시도하면 한 두번 겨우 통화에 성공하곤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마지막 통화 시점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합니다.교사인 아버지(55)와 역시 교사직에서 은퇴한 어머니(50), 3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4, 22, 20세이고 여동생은 각각 23,19세라고 했습니다.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은 가자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각각 영어와 IT(정보통신)를 전공한답니다.평소 같으면 기말고사 기간인데 이스라엘의 만행 때문에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출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통화 때는 바로 집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는 가족들의 전언에 요즈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접속해 혹시 가족이나 친지,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검색하곤 한답니다.  간간이 이뤄진 전화 통화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타메르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는 듯했습니다.이미 그의 집이 있는 칸 유니스에도 지난 6일 이스라엘군이 진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기도를 하는 것과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타메르는 떠나기 1년 전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 목소리를 최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말 끝에 “우리 이웃들이 많이들 죽었다.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나는 가자의 미래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침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속의 우리  기자는 이날 타메르를 만나기 전 서울 이태원에 들렀습니다.매주 금요일 무슬림들의 합동예배(줌마)가 있는 이슬람 서울성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직접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그렇기에 기자는 인천에 있는 타메르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난 것입니다.  기자는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하며 질문거리를 정리했습니다.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하지만 정작 그에게 던진 질문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영어가 ‘짧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요.하지만 가자지구의 역사를,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를 수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다하게 정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국교도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조차 그들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누구는 100명이라 했고 누구는 그보다 훨씬 적다고 했습니다.타메르의 경우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하지만 유학생 신분인 다른 3명과는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정도라고 했습니다.  타메르는 부패 때문에 총선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파타 대신 하마스가 통치하게 됐다며 이를 이유로 이스라엘이 침공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매우 불공정한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시간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와 ‘평화’였습니다.그가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니었습니다.가족의 안녕을,친구들의 안전과 건강을 바랄 뿐이라고 했습니다.  ●타메르 “자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 해달라”  나와는 상관없다고,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함께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한국이 보탬이 되지 못해 유감이다.미안하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한답니다.  한국 정부가 가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12일 전화를 통해 물어보았습니다.타메르는 “일단 한국은 가자와 너무 멀고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 않나.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이런 현상은 한국뿐 아니고 전세계의 문제다.전세계가 가자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가자에서 공격은 계속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그에 따르면 가자지구에는 일단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아 대사관도,기업 등의 현지 법인도 없습니다.주민들은 국내 기업의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삼성이나 LG 등 한국 기업 브랜드를 모르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가자지구 돕기 모금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 물었습니다.그는 “전세계적인 연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세계 정부는 무관심하지만 시민들은 매우 액티브하다.주로 아랍사람, 유럽사람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한국 웹사이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게 매우 효과가 크다고 느낀다.인터넷을 통해 연대와 저항을 표출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타메르는 기자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국 정부나 국민들이 가자지구에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무엇보다 식품과 약품,교육에 대한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한 가지는 알아뒀으면 좋겠습니다.지금 가자지구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생명들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요.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남편의 밥을 준비하던 아낙들이 굉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이 짧은 글에 담긴 그의 메시지가 팔레스타인에,이스라엘에 그리고 당신에게 닿기를 기도해 봅니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함께 하시고자 하는 분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홈페이지(http://pal.or.kr)를 꼭 한 번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글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eji@seoul.co.kr 영상 나우뉴스팀 김상인VJ bowwow@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임산부들 국민은행에 분노하는 이유 ☞[20&30] 불안한 미래에 점집 찾는 청춘들 ☞미네르바 말 한마디에 딜러들 달러 사쟀다? ☞발가벗은 동상에 옷 입혀준 사람을 찾습니다
  •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사나흘에 한 번씩은 가족과 통화했는데,요즈음은 매일 수십 차례 시도하는데도 잘 안 돼요.”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타메르 아부메드(26)의 말입니다.그의 가족은 가자지구 안의 칸 유니스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이스라엘군과 이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첫 교전을 벌인 가자시티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습니다.이스라엘군의 침공 이후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고향 땅에 가족들이 있는 이 청년을 지난 9일 인천 인하대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그는 2년 전부터 이 학교에서 IT(정보통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전액 장학금에 매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대학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아랍계 특유의 길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가족들과 언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느냐는 질문에 “그저께 겨우 한 번 통화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수십번 전화 걸어 한번 통화될까 말까 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기와 수도는 물론 통신시설까지 거의 마비됐습니다.그나마 아직까지는 휴대전화 기지국이 몇 남아 있어 다행이지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안위와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는 관계로 통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타메르도 10여번 시도하면 한 두번 겨우 통화에 성공하곤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마지막 통화 시점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합니다.교사인 아버지(55)와 역시 교사직에서 은퇴한 어머니(50), 3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4, 22, 20세이고 여동생은 각각 23,19세라고 했습니다.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은 가자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각각 영어와 IT(정보통신)를 전공한답니다.평소 같으면 기말고사 기간인데 이스라엘의 만행 때문에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출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통화 때는 바로 집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는 가족들의 전언에 요즈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접속해 혹시 가족이나 친지,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검색하곤 한답니다. 간간이 이뤄진 전화 통화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타메르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는 듯했습니다.이미 그의 집이 있는 칸 유니스에도 지난 6일 이스라엘군이 진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기도를 하는 것과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타메르는 떠나기 1년 전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 목소리를 최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말 끝에 “우리 이웃들이 많이들 죽었다.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나는 가자의 미래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침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속의 우리 기자는 이날 타메르를 만나기 전 서울 이태원에 들렀습니다.매주 금요일 무슬림들의 합동예배(줌마)가 있는 이슬람 서울성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직접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그렇기에 기자는 인천에 있는 타메르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난 것입니다. 기자는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하며 질문거리를 정리했습니다.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하지만 정작 그에게 던진 질문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영어가 ‘짧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요.하지만 가자지구의 역사를,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를 수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다하게 정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국교도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조차 그들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누구는 100명이라 했고 누구는 그보다 훨씬 적다고 했습니다.타메르의 경우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하지만 유학생 신분인 다른 3명과는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정도라고 했습니다. 타메르는 부패 때문에 총선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파타 대신 하마스가 통치하게 됐다며 이를 이유로 이스라엘이 침공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매우 불공정한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시간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와 ‘평화’였습니다.그가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니었습니다.가족의 안녕을,친구들의 안전과 건강을 바랄 뿐이라고 했습니다.   ●타메르 “자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 해달라” 나와는 상관없다고,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함께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한국이 보탬이 되지 못해 유감이다.미안하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한답니다. 한국 정부가 가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12일 전화를 통해 물어보았습니다.타메르는 “일단 한국은 가자와 너무 멀고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 않나.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이런 현상은 한국뿐 아니고 전세계의 문제다.전세계가 가자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가자에서 공격은 계속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그에 따르면 가자지구에는 일단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아 대사관도,기업 등의 현지 법인도 없습니다.주민들은 국내 기업의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삼성이나 LG 등 한국 기업 브랜드를 모르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가자지구 돕기 모금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 물었습니다.그는 “전세계적인 연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세계 정부는 무관심하지만 시민들은 매우 액티브하다.주로 아랍사람, 유럽사람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한국 웹사이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게 매우 효과가 크다고 느낀다.인터넷을 통해 연대와 저항을 표출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타메르는 기자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국 정부나 국민들이 가자지구에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무엇보다 식품과 약품,교육에 대한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한 가지는 알아뒀으면 좋겠습니다.지금 가자지구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생명들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요.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남편의 밥을 준비하던 아낙들이 굉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이 짧은 글에 담긴 그의 메시지가 팔레스타인에,이스라엘에 그리고 당신에게 닿기를 기도해 봅니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함께 하시고자 하는 분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홈페이지(http://pal.or.kr)를 꼭 한 번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글 /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국내 무자년 올 한 해는 국내외 인사들의 부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선 한국문학계의 두 큰 별이 졌다.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 선생이 5월5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선생은 1969년 현대문학에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94년 8월까지 원고지 4만장 분량을 탈고,한국 현대 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웠다.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 새겨진 개인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짚어냈다.폐암 진단 후에도 치료를 거부한 채 원주 토지기념관에서 기거했다.유해는 고향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기슭에 묻혔다. 4·19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청준(69)은 7월31일 역시 폐암으로 타계했다.소설 ‘서편제’와 ‘이어도’에서 토속신앙과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묘사했다.실화가 바탕인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한센인 병원에 부임한 원장과 원생들 사이 갈등과 화해를 통해 자유,구원의 상관관계를 그렸다.생전에 25권 전집이 발간된 흔치 않은 작가이기도 했다.박경리와 이청준,두 작가에게는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국악계의 큰어른 성경린은 3월5일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보유자로 1986년부터 국립국악원 사범으로 재직해 온 궁중음악계의 산 증인이었다.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한 뒤 61년 국립국악원장을 지냈다.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후신인 국립 국악고등학교 교장직도 역임했다.후학을 위해 2000년엔 관재국악상 기금으로 1억 7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대중문화계는 스캔들성 궂긴 소식이 이어졌다.톱탤런트 최진실(40)이 10월2일 스스로 생을 마감해 연예계는 물론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최씨가 탤런트 안재환 자살 및 사채업 괴담의 악플에 시달렸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성론이 일었다.그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란 CF광고 멘트로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뒤 20년 넘게 꾸준히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어린시절,매니저의 죽음,야구선수 조성민과의 이혼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사후에도 아이들 양육권과 유산상속을 놓고 조씨와 가족들간 분쟁이 이어졌다.그의 죽음으로 사이버 모욕죄 입법이 추진되기도 했다.앞서 탤런트 안재환(36)은 9월8일 서울 노원구 주택가 골목 승합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지난해 11월 개그우먼 정선희와 결혼한 새신랑이자 서글서글한 이미지로 사랑받던 터라 그의 죽음은 의문부호였다.수사 결과 40억원의 사채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로 인해 고리사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타살설 및 정선희씨의 방송진행 중단 등 후유증이 이어졌다. 해양법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독도 전문가인 박춘호(78) 국제해양법 재판관은 11월12일 작고했다.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때 한·일 어업분쟁을 보고 해양법 연구에 발을 들였다.1996년 우리에겐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엔 사법기구 고위직에 한국인으로 처음 진출했다.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된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 재판관으로 당선됐고 2005년 9년 재선에 성공했다. 재계에서는 동성제약 창업주 이선규 회장이 8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3월17일).이 회장은 한국 제약산업 1세대로 ‘정로환’ 등 토종 브랜드를 히트시킨 주인공이다. 주요 기업의 안주인들도 잇달아 타계했다.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이자 구본무 회장의 모친인 하정임(85)씨가 1월9일 타계했다.여든이 넘도록 제사상을 직접 차리며 살림을 꾸렸다.두산가(家)는 9월16일 정신적 지주 명계춘(95)씨를 잃었다.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부인이자 18살에 30명이 넘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장남 용곤(두산 명예회장),2남 용오(성지건설 회장),3남 용성(두산 회장) 등 6남1녀를 키워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 김홍조(97)옹은 9월 말일 세상을 떴다.생전 멸치어장으로 큰 돈을 벌어 아들의 정치인생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정계에선 그의 멸치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으면 정치인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을 정도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손자이자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김병관(74)씨도 2월25일 타계했다.89년부터 동아일보 사장 겸 발행인을 맡으며 동아일보를 이끌었다.서울신문 사장 출신인 원로 언론인 장기봉(81)씨도 8월28일 유명을 달리했다.65년 신아일보를 창간했지만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종간을 맞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 소설가 홍성원(71·5월1일),조선왕조 마지막 무동 김천흥(98·8월18일)옹,정진숙(96·8월22일) 을유문화사 회장,춘향가 예능보유자인 오정숙(73·7월7일) 명창,중문학 개척자이자 독립투사였던 차주환 (88·12월2일)박사,탤런트 박광정(46·12월15일) 등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 해외에선 ‘러시아의 양심’ 솔제니친(89)이 8월3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옛소련 반체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그러나 73년 옛 소련의 인권탄압을 기록한 ‘수용소 군도´ 를 내놓으면서 반역죄로 강제추방당했다.그는 16년 만인 90년에야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했다.조국에 돌아간 뒤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조국 부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지난해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했다. 32년간 철권통치를 펼치다 88년 반정부 시위로 물러난 수하르토(1월27일)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86세로 숨졌다.한때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국제투명성기구는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제보자)였던 윌리엄 마크 펠트 전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은 12월18일 95세로 사망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영원한 반항아였던 배우 폴 뉴먼(83)이 9월27일 암으로 숨졌다.‘상처뿐인 영광’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58년 마틴 리트 감독의 ‘길고 긴 여름날’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85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컬러 오브 머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 10회나 올랐다.감독으로 나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을 연출하기도 했다.지난해 6월 그의 은퇴의 변은 “기억력과 자신감,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연기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벤허’와 ‘십계’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4월5일)은 84세를 일기로 숨졌다. 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88)경은 1월11일 세상을 떠났다.53년 5월29일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후 20세기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문명의 충돌’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81) 하버드대 교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타계했다.고인은 “이념은 가고 문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을 예견한 석학이다.비교정치,민주주의 분야에서 제3의 물결 등 17권의 저서,90여편의 논문를 발표했다.그러나 그의 서구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생 로랑(71·6월1일)도 하늘나라로 떠났다.그는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정장을 도입해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혁명가였다.가브리엘 샤넬,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이은 상업화 세대 전 마지막 오트 쿠튀리에(고급맞춤복 디자이너)다.이브생 로랑은 “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상이 존재한다.”고 한 블랙예찬론자이기도 했다. 정리 이재연기자 osacl@seou.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 성공회대 총장 김성수 주교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 성공회대 총장 김성수 주교

    성자(聖者)의 시선이다.때묻지 않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마음을 열고 더불어 영혼들을 보듬는다.어려운 이웃들에게는 금쪽같은 촌정(寸情)을 나누고 희망의 불빛을 쬐게 한다. 전 성공회대 총장 김성수(78) 주교.소외된 이웃,정신지체장애인들의 영원한 대부로 알려져 있다.지난 2000년 3월 강화도 온수리에 정신지체 장애인 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개원한 것은 물론 성베드로학교 교장 등을 맡아 이들과 함께 살아왔다.그의 삶은 대부분 ‘낮은 곳을 향한 구도자의 길’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임식 고사하고 퇴임기념집 헌정만 받아 이같은 성품이 잘 드러나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지난 9월말 8년간의 성공회대 총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학생들은 그를 ‘총장 할아버지’ ‘장미꽃 총장’이라고 불렀다.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호주머니에서 점심밥 챙겨 먹으라며 식당 쿠폰을 몇장씩 꺼내 건넸고,“총장 할아버지!”하고 달려오는 학생들에게 “오늘 점심 먹고 영화구경 가자!”라고 격의 없이 제안하기도 했다.고민이 많아 보이는 학생들에게 뒷짐지고 다가가 장미꽃 한 송이를 불쑥 내밀어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가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찾아와 “총장님,등록금 좀 꿔주세요.”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기죽지 말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대학을 떠날 때도 주변의 끈질긴 권유를 물리치고 이임식을 치르지 않았다.그를 따르는 주교,신부,교수 등이 정성을 모아 ‘느티아래 강의실’이라는 ‘김성수 총장 퇴임 기념집’을 헌정한 것을 이임식으로 대신했다.그것 자체가 잔잔한 감동이었다. 퇴임한 뒤 3개월,그는 요즘 모처럼 삶의 여유와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부인 프리다(76) 여사와 마주 앉아 여생에 대한 얘기를 도란도란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총장 재임시절에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귀가하는 바쁜 일정이 계속됐기 때문이다.그는 총장 재임시절부터 “은퇴하면 ‘우리마을’로 돌아가 장애인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그래서 일 주일에 한 차례씩 ‘우리마을’에 가서 앞으로 같이 지낼 친구들과 낯을 익히고 있다.내년 3월쯤 현재 공사 중인 사택이 완공된면 그곳으로 부인과 이사할 생각에 천진한 아이처럼 꿈에 부풀어 있다. ●결혼 선물 양복 40년째 입고 다녀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김 전 총장을 만났다.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48평.1993년까지 오래된 23평 아파트에 살았으나 대주교가 되면서 “세계 성공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데 23평 집에서 손님이라도 한번 제대로 치르겠느냐.”는 주위 성화에 못이겨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초인종을 눌렀더니 프리다 여사가 문을 열어 반겼다.부인은 장애 유아들을 위한 도서관이자 유치원인 레코텍학교를 만드는 등 특수학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검소하고 소박한 성품도 천생연분이다.이날도 김 전 총장은 결혼 직전 부인이 손수 짠 털스웨터를 입고 있었다.또 김 전 총장은 결혼할 때 장인한테 받은 양복을 지금도 입고 다닌다.소매끝과 앞섶에 얇은 가죽을 덧대어 40년째 소중하게 입고 또 간직하고 있다.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티없이 살아온 성품이 그러해서인지 웃는 모습이 동안(童顔) 그 자체였다.건강 얘기가 나오자 “아직 큰 지장은 없으나 심장 스텐트 시술과 전립선 수술을 받아서 무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쁘신지. “푸르메재단 이사장,그리고 몇몇 단체 회장 등 얽힌 데가 좀 있어요.연말에 약속 날짜 보면서 한번씩 나가고 있습니다.빨리 정리를 해야 되는데 이름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자꾸 그래서 마음이 약해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장직 물러나시면서 퇴임식은 왜 안하셨나요. “떠날 땐 말없이 떠나야지,요란하게 할 필요 없어요.생각조차 못했는데 퇴임기념집을 헌정한다고들 하기에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고맙더군요.” →기념집에서 한 교수가 총장님을 가리켜 ‘짜식아,임마, 잘해.’외에는 별다른 말씀을 안 하신다고 추억하던데요. “난 무식하거든요.아는 게 없으니 함부로 나설 수도 없고,총장도 지도자이기에,다른 지도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참고 견뎌야 합니다.여러 소리를 하면 여기저기 옮기게 되고 결국에는 망하고 맙니다.‘짜식~’소리는 옛날 운동할 때 버릇이 남아 있어 그랬지요.좋아하는 사람들한테 그런 소릴 잘해요.인간미가 있잖아요.” 그는 배재중학 시절 아이스하키와 농구,검도 등을 즐겼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우리마을’에는 자주 가시는지요. “매주 화요일을 가는 날로 잡았어요.사위가 건축업을 하는데 그곳에 제가 지낼 사택을 짓고 있습니다.‘우리마을’ 원장인 허용구 신부가 고맙게 허락을 해주셔서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게 됐습니다.허 신부가 ‘화려한 백수’에게 일거리를 주셨지요.내년 봄에 이사를 하면 아마 ‘콩나물공장 공장장’으로 취임할 듯합니다.그게 제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되겠지요.” ‘우리마을’은 김 전 총장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강화도 온수리땅 2000여평을 기증해 8년 전 문을 열었다.현재 56명의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콩나물과 버섯재배 등 무공해 자연농법을 통해 재활의 길을 걷고 있다.아울러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부품조립 등의 수익사업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으며,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제빵교실,음악치료교실 등도 열고 있다. ●지도자는 더불어 가는 숲 가꾸는 자세 중요 →추운 겨울이고 연말입니다.경제도 안 좋고 사회가 점점 얼어붙는 느낌입니다만. “결국 우리가 많은 욕심을 부린 탓입니다.개인이나 단체,특히 정치권에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우리 모두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자신의 마음을 열면 자연히 나눔이 생기고,그러면 존경하는 마음도 우러나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금년이 어렵더라도 절약하고 검소한 자세로 돌아가면 내년은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어려운 사람도 많지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습니다.우리는 6·25전쟁도 겪었습니다.지금이 그때보다 어렵지는 않거든요.지도자는 더불어가는 숲을 가꾸는 자세가 중요합니다.우리 동화에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것이 나오지요.결국 부지런한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내용 아닙니까.그런데 앞으로는 잠자는 토끼를 깨우고 같이 가야 합니다.나무가 하나 있으면 비바람에 무너지지만 같이 숲을 이루면 절대 그럴 일이 없거든요.”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흔히 부모님들이 아이들 소풍가는 준비는 잘해 주지만 정작 천국 가는 준비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우린 IMF체제도 겪었는데 그걸 쉽게 잊어버렸어요.과거를 잊지 않고,또 준비하는 과정이 없으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열림’‘나눔’‘섬김’의 자세로 살면 어려움이 결코 닥쳐오지 않습니다.” 강화도 출신인 김 전 총장은 어릴 적 개방적이었던 할아버지가 성공회에 귀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어머니의 교육 열정으로 유치원을 거쳐 서울 교동국민학교에 들어갔다.개구쟁이였던 그는 공부보다는 학교 특별활동 등에 더 관심을 두었고 배재중학 때 보이스카우트와 군사훈련 대대장까지 했다.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8세 때 폐결핵을 앓으면서.친구들과 아이스하키 시합을 하다가 각혈을 하면서 쓰러졌다.병원에서 폐결핵 3기 진단을 받았다.6·25전쟁이 발발해 모두들 피란 보따리를 챙길 때도 꼼짝 못하고 석달 동안이나 집에 드러누워 지냈다.그러는 바람에 남들 나서는 의용군에도 못 들어가고 덕분에 인민군에도 징발되지 않았다.배재중학 졸업 무렵에는 연세대에 운동선수로 진학하려다 가족들의 정성 어린 기도 덕분에 병이 나으면서 부모님과 친지들의 권유로 신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성미가엘 신학원’ 재학 중 노동자의 삶을 알기 위해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이후 성공회대 안에 있는 정신지체장애아 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맡게 됐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뒤 이들이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선산인 온수리 땅에 ‘우리마을’을 건립하면서 장애인을 평생 친구이자 스승으로 삼았다.이런 그를 가리켜 주변에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사람,언제나 평화스러운 웃음을 띠고 손을 내미는 사람,장애인들의 대부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일컫는다.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아들은 연세대 체육학과를 나와 몸담고 있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홍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며느리는 미국에서 발레를 공부하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30년 인천 강화군 온수리에서 출생했다.배재중학(6년제)을 거쳐 연세대 신학과를 나왔다.영국 셀리오크신학대학을 수료했으며 연세대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았다.이후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대주교,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남북 기독교자회의 회장(스위스 글리온),대한성서공회재단 이사장,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성공회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현재는 푸르메재단 이사장,사랑의 친구들 회장 등을 맡고 있다.
  • [씨줄날줄]쿠데타 악법/이용원 수석논설위원

    5·16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부는 열달만인 1962년 3월16일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전면 중단시키는 법률을 제정,공포하였다.이름하여 ‘정치활동정화법’이다.그런 한편으로는 공화당을 사전 조직해 이듬해 있을 예정인 민정이양에 대비했다.한마디로 말하면,운동시합을 하는데 상대팀 주전선수들은 모두 출전금지시키고 만만한 선수들만 그라운드에 나오도록 강제한 셈이다.그 결과 ‘정치활동 정화’ 대상이 된 주요인사 4000여명이 정치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한 6년여동안 공화당은 각각 두번의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둬 통치체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정치활동정화법은 악랄한 법률이었다.대상을 심사해 적격 여부를 판정하는 일부터 그 판정을 해제하는 것까지 일체를 쿠데타 세력이 결정하도록 했다.게다가 헌법에 위배되는지에 상관없이 효력이 지속되도록 했으며 판정에 대해 행정소송 등 일체의 불복 신청을 하지 못하게끔 했다.당시 정치활동을 금지한 기준은 제2공화국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거나 행정부의 주요 직위에 오른 사람,민주당·통일사회당 등 정당의 간부를 지낸 이,쿠데타에 비판적인 언론인 등이었다.쿠데타 세력은 이 기준을 선별 적용해 정계를 움직이는 지렛대로도 악용했다. 정치활동정화법은 18년 후 ‘쌍둥이 동생’을 본다.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80년 11월3일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구시대 정치인’ 567명을 강제 은퇴시켰다.이 법의 적용기간은 당초 88년 6월30일까지였다.87년 대통령선거에서 독상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으리라.하지만 국민 저항이 거세지면서,85년 3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정치활동 금지는 단계별로 해제됐다. 정치활동정화법이 며칠 전에야 공식적으로 폐지됐다.그 법을 비롯해 5·16 직후 나온 6가지 법률이 사문화했기에 이를 폐지한다고 법제처가 12월19일자 관보를 통해 공포한 것이다.진즉에 죽었다고 여긴 이 법들이 이 시기에 다시 이름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행여나 민주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경고는 아닌지,괜히 섬뜩해진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부고] 이중재 前 의원 숙환으로 별세

    이중재 전 의원이 1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83세.전남 보성 출생인 이 전 의원은 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뒤,7~9대와 12,15대 의원으로 활동하며 신민당 정책심의위원회 의장 및 부총재,민주당 부총재 등 굵직한 직책을 역임했다.정치활동이 금지된 1980년대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민주인권연구회 회장,야당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보성고,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한나라당 상임고문과 고려대 교우회 고문 등을 지냈다.유족으로는 장남인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과 종욱(한국외국어대 경영학부 교수),종오(사법연수원 수석교수)씨가 있다.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발인은 22일 오전 7시.장지는 전남 보성군 선영이다.(02)921-2899.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박철언 ‘횡령 여교수’ 손배소

     박철언(66)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178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여교수를 형사 고소한 데 이어 손해배상 소송도 냈다.20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박 전 장관과 가족은 서울 H대학 무용과 교수 강모(47)씨와 그 가족 등을 상대로 “횡령한 178억여원을 돌려 달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박 전 장관 쪽은 “1999년부터 차명 계좌 관리를 강씨에게 부탁했는데 강씨가 통장을 위·변조하거나 몰래 인출하는 방법으로 178억 4900여만원을 빼돌렸다.”면서 “강씨 가족들이 돈을 나눠 쓰고 강씨를 숨겨 돌려 받기 어렵게 했다.”고 주장했다.돈의 출처에 대해 박 전 장관은 “정계를 은퇴하고 나서 복지·통일 재단을 설립하려고 40년간 저축한 돈”이라면서 “이목이 많아 차명계좌로 보관했다.”고 설명했다.검찰은 박 전 장관이 정치활동을 하며 모은 비자금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수사했지만 돈의 성격을 확인하지 못했다.  강씨는 올해 3월 박 전 장관 쪽의 고소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구한말 대한매일신보 도운 英외교관 헨리 코번 손자 내한

    구한말 대한매일신보 도운 英외교관 헨리 코번 손자 내한

    “외교관으로서 할아버지는 영국 정부의 정책을 따라야 했지만, 일본에 고문당하다가 탈출한 양기탁을 넘기면 다시 고문 당할 것이 너무 뻔했지요. 그래서 인간적·도덕적 이유로 양기탁의 인도를 3개월이나 거부한 것입니다.” 해외문화홍보원 초청으로 한국에 온 영국 일간신문 인디펜던트의 외교담당 대기자인 패트릭 코번(58)은 17일 주한영국 총영사를 지낸 할아버지 헨리 코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며 “몹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전혀 정치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 조용한 분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로 할아버지가 놀랍기만 했다는 것이다. 패트릭 코번은 지난해 12월6일 인디펜던트에 ‘헨리의 전쟁-강제인도에 대한 반대 투쟁’이라는 제목의 5장짜리 장문의 기사를 썼다.100년 전 일제 통감부가 한국 언론인 양기탁(1871∼1938) 선생을 고문하는 등 탄압한 사료를 찾아내 생생하게 반영했다. 영국 외무부와 한국과 일본, 중국의 총영사관 사이에서 오간 전문을 찾기 위해 영국 국가기록원을 뒤졌다. 때문에 이 기사는 당시 상황을 보도한 어떤 자료보다 정확하게 국제 정세를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헨리 코번은 1905년 11월17일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3일 뒤인 11월20일 주한 영국대리공사로 부임해 1908년 9월15일 귀국할 때까지 3년 남짓 한국에 머물렀다. 이 기간, 그는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발행인 겸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의 일제에 대한 저항과, 일제의 탄압을 목도하게 된다. 특히 1908년 7월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 선생이 일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영국이 관할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던 대한매일신보 건물로 피신하자 일본과 인도적 싸움을 시작한다. 일본 경찰은 양기탁 선생을 넘겨 달라고 요청했지만, 코번 총영사는 고문의 흔적을 내세우며 “고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거절했다. 영·일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도 양 선생을 넘기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코번 총영사는 무려 3개월 동안 인도하지 않았다. 패트릭 코번은 “할아버지는 본국에 보내는 전문에서 ‘만일 우리가 양기탁을 일본에 넘겨준 것이 알려지면 외교상 최악의 불명예를 만드는 것’이라고 외무부를 설득했다.”고 밝혔다. 당시 코번 총영사의 양 선생 인도 거부가 장기화됨에 따라 일제의 언론탄압과 고문 등 만행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마찰로 코번 총영사는 49세의 젊은 나이에 외교관에서 은퇴해야 했다. 코번은 “지금도 이라크를 비롯해 외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점령국의 피정복국민에 대한 고문 등 탄압에 저항한 제3국 외교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 사례 말고는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코번 총영사가 대단히 드문 일을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세상] 종부세 헌재 결정의 교훈/현진권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종부세 헌재 결정의 교훈/현진권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 사회를 첨예하게 대립시켰던 종부세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종부세 그 자체는 위헌이 아니나, 과세방법에 있어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세대단위의 과세는 위헌이고, 장기 1주택 보유자에 대한 과세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헌재 결정이 나온 이상, 더 이상 종부세 존폐에 대한 이념적 논쟁은 거두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제도로 인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치렀던 갈등과 비용을 생각할 때, 헌재 결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본래 조세정책이란 헌법정신과 조화를 가져야 하고,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이란 잣대를 꼼꼼히 따져본 후에야 정책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지난 정부는 이념적 정책목표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책수단의 적절성을 무시해 버렸다.6억원 이상의 부동산 소유자를 가진 자로 정의하고, 획일적으로 집행한 것이다. 고가의 부동산을 보유해도 소득이 낮은 계층과 은퇴한 고령자가 겪게 될 고통은 정책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조그마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세금이 높으면 이사가면 된다고 큰소리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종부세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과세단위가 개인이었으나, 세대 내에서 재산분할을 통해 세금을 절약하는 행동변화를 보고선,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세대단위로 바꾸어버렸다. 과거 재산소득에 부부단위로 합산과세한 소득세제가 위헌판정을 받았던 사실도 무시하는 등 수단의 적절성에 대한 고민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은 종부세에 대한 헌법상의 해석일 뿐이다. 종부세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갈등은 헌재 결정과 함께 종결되지는 않을 것이며, 향후 오랫동안 이러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자에게 세금을 높여서가 아니고, 부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간단하게는 소득세나 재산세의 누진구조를 강화해도 얼마든지 부자들의 세부담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금의 세율구조만을 조정함으로써 세부담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종부세는 우리 사회에서 2%만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므로, 많게는 98%까지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야기될 우리 사회의 갈등비용은 원대한 정치적 목표 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에서 종부세의 기본골격은 합헌으로 보았으므로, 판정내용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특정 계층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조세정책은 반드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마련이며, 더욱이 그 사회적 비용규모가 개방화된 세계경제 하에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크다. 그래서 조세정책이 소수를 대상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보편성 원리가 준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세정책은 국민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정책이며, 인류역사를 보더라도 조세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갈등구조를 보였다. 오늘날 조세법률주의는 이런 갈등의 역사를 거쳐 국민들이 성취하게 된 열매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들 간의 갈등을 조장한 종부세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뚜렷한 원칙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비록 종부세 구조는 위헌이 아니지만, 잘못된 제도로 인해 국민들간의 갈등비용은 헌재판정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치를 것이다. 조세정책은 이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책입안 단계부터 경제적 효율성과 형평성을 달성하는 데 헌법정신에 일치하고, 국민간의 갈등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과학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진권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 [부고] 北 ‘혁명 1세대’ 박성철 정치국 위원 사망

    북한의 박성철 정치국 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28일 ‘오랜 병환’으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전했다.96세. 경북 경주 출신인 박성철은 ‘혁명 1세대’로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다 광복 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15사단장, 노동당 국제부장, 외무상, 정무원 총리, 국가 부주석 등을 지냈다. 김 주석의 유일사상체계 및 노동당 유일지도체계 구축에 기여한 최측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성사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에 이어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서울을 방문, 이 부장과 회담했다. 특히 7·4공동성명에 따라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인 김 부장 대신 같은 해 12월 서울을 다시 비공개로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다. 1994년 7월 김 주석이 사망했을 때 국가장의위원회 서열 5위, 이듬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망 때는 서열 4위에 오를 정도로 최고위직을 역임했다.199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에 선임되면서 사실상 은퇴했다.‘공화국 영웅’(1992년) 칭호와 ‘김일성 훈장’(1993년)을 받았다. 1989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을 때 “이제는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힘을 써야 할 때”라며 행사 개최에 불만을 표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계가 껄끄러워졌다는 일각의 분석도 있다. 북한은 박성철의 장례를 30일 국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김 위원장이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고 북한 매체들은 전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홍준표 “이재오 복귀 당연…여권 한축 맡아야”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가 지난 4·9총선에서 패배한 후 현재 미국 유학 중인 이재오 전 의원의 복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홍 원내대표는 28일 BBS 라디오 ‘김재원의 아침저널’에 출연, “이재오 선배는 유학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정치활동을 할 분”이라며 “(이 전 의원이)정계 은퇴를 한 것도 아니니 돌아와서 당직이나 정무직으로 활동할 수 있고, 때가 되면 재보선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지금 여권내 지리멸렬한 분위기도 있고 하니 이 전 의원이 돌아와서 한 축이 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한 언론이 여권 핵심 관계자의 말을 빌어 이 전 의원이 내년 초 귀국할 것이라고 보도한 가운데, 홍 원내대표도 이 전 의원의 복귀설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그의 복귀에 따라 정국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가시화되는 분위기다.   그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등 경제팀의 경질 문제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홍 원내대표는 “지금의 금융위기가 일정 부분 안정이 되면 이명박 대통령이 널리 인재를 구하리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이는 현재 닥친 경제위기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문회 등 한달 이상의 일정이 소요되는 장관 경질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전날 최고위원회의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의 뜻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경제난국”이라고 지적한 뒤 “적어도 경제부처만은 좀 실력있고 카리스마 있고 시장에 먹혀 들어갈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강 장관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전날에 이어 후임인사의 예로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듭 거론하며 강 장관의 경질을 강하게 암시했다.  이 전 장관이 한나라당의 ‘땅 투기’ 의혹제기로 사퇴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는 “이 전 장관은 당시의 야당(한나라당) 때문이 아니라 여권 내부 386 세력들의 표적이 돼서 낙마한 것으로,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항변한 뒤 “시장에 먹혀 들어갈만한 분이라면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던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막말 파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의 사퇴요구에 대해 “’이명박 정부의 졸개’ ‘ 100일 사기극’ 등의 발언으로 원인을 제공한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같이 놓고 판단해야지 유 장관만 사퇴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 그는 “유 장관의 발언이 국민에게 모욕감을 줬다면, 이 의원의 발언도 한나라당 지지층에게 모욕적이긴 마찬가지”라며 일단 두둔하는 모양세를 취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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