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정치학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법조계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구의원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포토존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정의당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996
  • [대한광장] 질서자유주의의 요청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폐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십수년 신자유주의 정부 아래에서 경제가 회복돼 호황국면을 타고 있을지라도 정부의 재정상태와 시민의 사회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과거 영미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경제를 회복시켰지만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탈구시켰다.경제는 발전하는 듯 했으나 국민의 평균적 기술능력은 약화되고 사회는 역진과 퇴행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보수당 정부 하에서 영국의 부유층은 더욱 살찐 반면,국민 대중들은 경제발전과 성과분배로부터 배제되어 사회생활은 오히려 퇴락하였다.대기업과 금융업은 세계화된 무제한적 자유시장 속에서 중소기업과 근로자를 마음껏 요리하며 일취월장한 반면,75%의 취업자 대중은 노동 3권이 박탈되고 소득이 반감된 시간제 고용관계로 전락하였다.게다가 수많은 중소기업가와 근로자들은 기약없이 퇴출당하여 대량실업의 늪에 빠져들었다.이에 대한 연쇄작용으로실업자 생계비지원으로 인해 복지예산은 공약과는 반대로 오히려 늘어났다. ‘자르고돈주는’ 대처리즘은 끝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보수당정부는 공중도덕의 강화와 범죄의 박멸을 공언했지만,대량실업으로오히려 도덕적 타락과 범죄는 더 늘었다.청소년을 위한 고등교육 체계는 부족하였고 재원부족으로 이것을 확대할 수도 없었다.학비지원제도도 직업훈련 체계도 없고 고용창출정책은 폐지됐다.게다가 민영화된 의료체계는 병원비를 턱없이 올려 보건복지는 망가졌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가 시민생활조차도 침범하도록 북돋우었다.결과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내수시장의 위축과 국민의 노동능력,자긍심,도덕의식의 퇴락이었다.이것이 신자유주의적 ‘경제회생’의 진상이었던 것이다.대처리즘의 탈권(脫權)은 지당한 국민적 심판이었다. 토니 블레어는 18년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보수당은 노동시장에 불어닥친 세계적 변화의 영향 아래 사람들을 무책임하게방치하였다.최저임금도,사회협약도,최소한의 기준도 없었다.그들은 이것을‘규제철폐’라고 불렀다.그러나 이것은 오히려근로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노동시장의 준칙을 없애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그 결과 장기실업이 대량으로 야기되고 동기부여가 거의 없고 훈련도 형편없는 저임금 노동력의 양산이 초래되었다”선진국의 신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폐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들 나라의 최근 경제지수를 보면 아직도 부익부 빈익빈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한 것 같다. 문민정부는 당시 선진국에서 이미 퇴출당한 신자유주의를 ‘새이념’으로신봉함으로써 ‘자르고 돈주는’ 악순환체제를 도입하였다.IMF관리체제 하에서는 불가피하게 이 악순환이 더욱 강화되었다.이로 인해 지난 1년간 구조조정과 함께 부익부 빈익빈 추세가 나타났다.노동시장 유연화정책은 유연한 중소기업 노동시장이 아니라 경직된 대기업 노동시장에 꼭 필요하다.그렇다고신자유주의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우리 헌법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질서자유주의’를 명문화하고 있다.정부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가운데(제119조 1항)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적정한 소득분배 유지’,시장지배와경제력 남용방지,‘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2항) 규제,조정할 수 있다. 이 헌법취지는 시장질서를 해치는 규제의 철폐와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제도의 신설 간의 균형,공공과 민간부문의 균형,경제와 사회의 균형을 추구하는기든스의 ‘신혼합경제론’과 대동소이하다. 우리 정부가 부익부 빈익빈 추세를 공식 확인하고 이에 대항하여 추진하는일련의 생산적 복지정책과 노사간 ‘조화’정책은 헌법취지에 비추어 매우합당한 ‘질서정책’이고 선진국의 새 정책방향과 부합되는 것이다.만에 하나 정부가 저 추세를 방치한다면,오히려 직무를 ‘유기’하는 꼴이 될 것이다. 황태연/동국대교수·정치학
  • 학술단체협-5·18기념재단 주최 심포지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남겼는가.그리고 5·18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을 맞아 5·18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학술단체협의회와 5·18기념재단 주최로 최근 서강대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는 ‘5·18은 끝났는가’라는주제로 5·18의 의미와 평가,남은 과제들을 학술적으로 조명했다. 동국대 강정구(姜禎求·사회학과)교수는 “5·18은 우리가 추구한 반외세민족자주화를 통한 해방공간에서의 통일국가 형성의 역사적 계기를 복원한역사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그러나 어렵게 복원된 계기가 제대로 성숙해 민족통일의 터전을 닦기도 전에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미국 중심의 단일패권주의 구축 등 세계사적 전환과 IMF 경제신탁통치라는 내외적 강풍에 의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냉전과 탈냉전,동북아 질서의 변화,제3세계와 미국과의 관계,미국의 이윤축적 방식의 변화 등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우리의 민족자주화 운동은 숱한 고난을 겪어왔다”면서 “한반도는 특히 미국의 개입 정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고 주장했다. 강교수는 “5·18을 비롯한 일련의 민주화운동과 한반도의 통일은 하나로이어진다”면서 “5·18의 민족사적 의의는 한반도의 탈냉전에 기초한 국가통합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루이스 앤 클라크대 랜즈버그(경제학과)교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적인 발전에 대한 한국 민중의 투쟁에서 분수령적 사건”이라면서“신군부의 압제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단결해 대항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준 항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5·18이 ▲한국 엘리트들의 자본주의적 특권보호를 위한 폭압 ▲한국의 민주발전 촉진을 무시한 미국의 정책 ▲민주주의 발전 현실화의 장애물로 나타난 남북분단이라는 교훈과 통찰력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한국정치연구회 정해구(丁海龜·정치학)연구위원은 5·18이 한국의 지배체제에 대해서 갖는 의미에 대해 정리했다. 정연구위원은 한국의 지배체제를 ‘국가적·체제적지배체제’와 ‘정권적차원의 지배체제’로 나누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지배체제의 은폐된본질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또 이렇게 드러난 지배체제의 본질은 결국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급속히 약화시켜 오늘날 민주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와 함께 “5·18은 당시 민주화운동이 전개됐던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 지역공동체적 차원의 ‘민중’을 형성시키는 역할도 했다”면서 각 시대별 민주화운동의 예를 들며 한국 민주변혁운동 자체 맥락 속에서의 5·18의의미도 되새겼다. 전남대 나간채(사회학과)교수는 ‘관련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과제’라는 주제로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5·18운동의 과제에 대해 의견을 발표했다. 나교수는 “최근 5·18관련 운동은 유가족과 부상자,구속자 등 5·18 관련단체들이 법인화·통합화하고 기념재단 설립 등을 추진하는 추세”라면서 “5·18관련 책임자 처벌 등을 명시한 96년 ‘5·18재판’을 기점으로 5·18운동의 저항적 투쟁성도 기념사업활동이나 항쟁 정신을 구현하는 시민운동적성격으로 바뀌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는 5·18운동이 해결해 나가야 할 구조적 측면의 과제로 ▲관련단체들의내부 통합성 강화 ▲지역사회와의 연대성 강화 ▲비합법적·폭력적 방식에서 절차적 민주성을 실천하는 방식으로의 전환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 문제 등을 꼽았다. 이와 함께 활동적 측면의 과제로는 ▲진실규명과 과거 청산을 위한 문제 ▲미완의 처벌과 재심 문제 ▲불완전한 보상에 관한 문제 등 미해결 과제와 ▲각종 조형물을 포함한 기념사업 ▲학술연구회나 토론회 ▲5·18관련 사회운동 등을 제시했다. 나교수는 “이러한 모든 과제들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5·18을 포함하는광주문제의 완전한 해결 없이는 언제까지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5·18의 기본정신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고 변화된 현재의 환경 속에서 인권·정의·자치정신을 발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과제들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대 안병욱(安秉旭·국사학과)교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민족의 통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서 “한국 역사의 민주적 발전과 민족통일을 위해 꼭 넘어야 할 과제인 미국의 대한(對韓)정책과 한국인들의 대미(對美)인식의 전환문제가 광주항쟁을 통해 어떻게 투영됐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교수는 “민족의 통일로 가는 과정은 또 하나의 변혁운동”이라고 전제하고 “단순히 보편적인 개념이나 이론틀을 내세운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의 자취 속에서 그 구체적 의의를 추구할 때 5·18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남겨진 과제들을 발전적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전북 지역 대안매체 ‘열린 전북’ 새달 창간

    전북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소개하고 건전한 비판을 이끌어갈 ‘대안매체’로 월간지 ‘열린 전북’(가칭)이 다음달 창간될 예정이다.특정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한 대안매체의 창간은 이번에 처음 시도되는 것으로 지방화시대를 맞아 향후 다른 지방에도 파급이 예상된다. 최근 전북지역 지식인들은 “전북지역에 여러 언론매체가 있지만 지방행정에 대한 비판기능이 약할 뿐더러 건설적인 비판을 제대로 수용치 못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기존 언론매체를 자극하고 주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대안매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고 밝혔다. 지난 4월말 전북지역의 교수·개인사업가·지방의원·의사·출판인·언론인 등 34명은 ‘열린 전북’ 창간준비모임을 갖고 발행인겸 운영위원장에 송기도 전북대(정치학)교수,편집위원장에 김동민 한일장신대(언론학)교수를 선임했다.잡지운영은 30명 내외의 주주로 출발,장기적으로 전북지역 일반독자들도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창간호는 100쪽 정도의 규모로 발행할 예정이며구독료는 연간 2만원으로 정했다. 편집위원장 김동민 교수는 “대안매체 ‘열린 전북’은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있는 ‘자유발언대’와 같다”며 “전북의 현안과 관련,활발하고 진지한 토론의 마당을 제공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구좌번호:송기도(열린전북)전북은행 529-22-0354235,연락처:김동민 편집위원장(0652-230-5618)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 한국 근-현대사 정리 앞장 선 방선주-양기백박사 서훈 추진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문헌발굴과 정리에 평생을 바쳐온 재미 사학자방선주(方善柱·65)박사와 미 의회도서관 동양부 부장을 지낸 양기백(梁基伯·78)박사에게 정부의 서훈을 추진하는 운동이 관련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일고 있다. 건국대 신복룡(정치학과)교수는 “방박사는 한동안 금기사항으로 있던 현대사분야의 자료발굴로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분이며,양박사는 미국내에서 한국관련 자료수집의 최대공로자”라며 “근.현대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두 분이 한국관련 사료발굴·정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서훈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움직임은 4월초 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인천대 총장) 발족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이 단체는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정을 계기로 공공기록물의 효율적인 수집·관리·보존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현재 연구원측은 신교수 등과 공동으로 방·양 두 박사에 대한 공적 조서등 구비서류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과당국에 서훈 신청을 할 계획이다. 49년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도미한 양박사는 6·25전쟁으로 귀국치 못하고이듬해 8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방박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등 미국 내 한국관련 자료발굴의 ‘1등공로자’로 꼽힌다.그동안 방박사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100만 점 이상을발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미국군정·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방박사가 발굴한 자료중일부는 방박사가 객원교수로 있는 한림대 등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됐다.최근임정80주년기념 학술대회 참가차 귀국했던 방박사는 백범암살 관련 미공개자료를 입수,본사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바 있다.두 사람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金龍煥부총재 또 ‘내각제 행보’

    자민련 김용환(金龍煥)수석부총재가 내각제 목소리를 또 냈다.한나라당 일각의 내각제 공론화 주장과 맞물린다.오는 8월까지 논의중단 합의가 또다시무색해지고 있다. 김수석부총재는 4일 당 외곽단체인 ‘21세기 청년포럼’ 특강에서 내각제를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야당에서 내각제를 들고 나온다”면서 “좋다.환영한다”고반겼다.그러나 이 대목을 공개하지 않았다.논의중단 합의를 의식해서 그랬던 것 같다. 시점이 묘하다.김수석부총재는 최근 한나라당 의원들과 물밑접촉을 활발히전개하고 있다.이회창(李會昌)총재도 만났다. 이총재는 이날 “내각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 원내 제1당으로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또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는 한나라당과 자민련간의 ‘한·자(自)동맹’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고 일축하면서도“그러나 그럴 경우 내각제로 선회할지,정책연대를 할지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날 한나라당 중진의원 모임인 ‘무명회’에서는 내각제 공론화 방안을 논의했다.또 서청원(徐淸源)의원이 개인후원회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다. 김수석부총재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먼저 “하자는 얘긴지 안하자는 얘긴지,당당하게 해주길 바란다”고 의심을 품었다.또 “공동여당의 틈새를 벌려 정략적으로 정치입지를 확대하려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수석부총재는 전날 저녁 김종필(金鍾泌)총리와 저녁을 같이 했다.이완구(李完九)의원,이용만(李龍萬)경제대책위원장도 참석했다.김총리가 미국 페어리 디킨스 대학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축하하는 뜻에서 마련했다. 이 대학은 김총리가 처음으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곳이다. 박대출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0) 요동치는 軍:下

    장면(張勉)정부 국방정책의 큰 줄기인 ‘감군(減軍)’은 처음부터 장벽에부닥쳤다.장면이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군 병력을 줄이려는 이유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국정목표로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하려면 국방비를 줄여 그 돈을 경제건설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방비 규모는 국가예산의 40%를 넘을 정도였다.장면정부는 국방비가예산의 20% 수준으로 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할 계획이었다.모자라는 병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비 현대화,화력 증강 등으로 보완할 생각이었다.주한미군이 있는 한 국가안보에는 이상이 없으리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장면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0만 감군’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한국군과 미국 양쪽의 반발에 직면한다.장면이 새로 임명한 최경록(崔慶祿)육군참모총장부터가 앞장섰다.최총장은 민의원에서의 취임인사에서 “감군은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정부의 계획에 “원칙적으로반대한다”고 밝혔다.주한 유엔군사령부와 미대사관,미 국방부 등에서도 완곡한 반대 의사를 잇달아 흘렸다. ‘정군(整軍)’을 주장하는 영관급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전력 약화’라는 측면 말고도 그들이 감군을 거부하는 까닭은 또 있었다.그것은 인사적체에 따른 불만이었다. 예컨대 육사1기생은 절반쯤이 입대 5년 만에 별을 달았는데 그들보다 4년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대령 숫자도 10%가 채 안됐다.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상태에서 감군으로 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이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섣불리 감군을 발표한 장면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그렇다고 정책의 정당성과 목표를 홍보하고 설득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1960년 9월14일 열린군수뇌회의가 감군 규모를 5만명으로 줄여달라고 건의하자 장면정부는 이를받아들였다. 11월 초 권중돈(權仲敦)국방장관은 “일부 감군이 있지만 한국군 병력은 60만명을 유지한다”고 공식발표해 감군정책을 포기한다.국가정책의 전체적인틀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시도조차 못된 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감군의 무산과 함께 장면정부는 군인사에서도 실책을 거듭한다.어느 정부건 정권유지에 핵심이 되는 요소가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자체 인맥을 형성하는 일이다.그런데도 장면정부는 이를 경시했다. 장면이 총리가 되자 허정(許政)과도정부 수반은 그에게 “국방장관만은 이종찬(李鍾찬)을 계속 기용하라”고 권유한다.민주당에서 국방전문가로 통하는 이철승(李哲承)도 똑같이 이종찬을 추천한다.그같은 격변기에 군에서 두루 존경받는 이종찬이야말로 적임자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장면은 이종찬 대신 현석호(玄錫虎)에게 장관을 맡긴다.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앉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최경록도 이종찬처럼 이승만(李承晩)의 정치적인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꿋꿋한 군인이었다.특히장면이 부통령으로 출마한 ‘3·15부정선거’때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서경호를 도맡는 등 모든 일을 은밀하게 도와준 충실한 장성”(鄭一亨 당시 외무장관 회고록에서)이었다. 장면과 최경록은 그러나 처음부터 어긋난다.최경록은 감군정책을 공개리에반대했고,미 국방부 군원국장인 파머대장이 ‘정군 반대’를 밝히자 정면으로 반박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장면정부를 난처하게 만든다. 최경록은 61년 2월17일 육참총장에서 물러난다.임기는 2년이지만 실제로는반년도 못 채우고서였다.그가 해임되자 국회는 ‘총장 경질을 둘러싼 상황’을 전면조사하겠다고 나섰다.장면은 “최총장을 바꾼 이유는 공공연하게 반미감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장면과 최경록의 갈등은 군정책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편에서는 장면내각의 핵심세력과 수석 국무위원인 정일형 외무장관 사이의 다툼 때문이라고도 풀이한다.최경록은 가족관계로 정일형·이태영(李兌榮)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최경록의 후임에는 장도영(張都暎)중장이 취임한다.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장면정부의 군 인사 중에서도 최악이었음이 석달 뒤 5·16쿠데타 때 드러난다.그는 쿠데타가 추진돼 성공을 거두는 전과정에서 쿠데타군과 장면정부에 ‘양 다리를 걸쳐’ 쿠데타 저지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사실 ‘장도영 육참총장’은 누가봐도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장도영은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자유당정권의 2인자인 이기붕(李起鵬)국회의장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를 ‘아버지’로 모셨다.3·15부정선거 때는 2군사령관으로 후방 군부대의 부정선거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도영은 60년 9월17일 최경록 육참총장에게 예편신청서를 제출하지만 되돌려받는다.그는 참모총장 자리를 통보받았을 때 “내가 총장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당황했고 사양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장도영 총장 취임을 누가 주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5·16 이후 나온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단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 부부가 미8군 장성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으므로 미군쪽 추천이 강력하지 않았나 추측될 뿐이다. 감군 추진에 따른 군부의 반발과 잘못된 인사로 장면정부는 군 통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이승만정권에서는 군 출신을 각료의 10%쯤 배정한 것과는 달리 장내각은 군 출신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심지어 국방부의 장·차관 자리마저 배려하지 않았다. “장면정부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한 군부를 소외시켰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지적처럼 군에 무심(無心)했던 정부는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대한광장] 젊은 피 수혈론의 딜레마

    여권이 ‘젊은 피 수혈’을 공언한 후 30∼40대 청년들이 활발히 움직이고있다.새로운 비전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당찬 30∼40대의 한국 청년들은 지도층의 고령화로 인해 그간 각 조직에서 ‘어린이’로 취급받아 왔다.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젊은 피 수혈론’은 시의적절한 면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젊은 피 수혈론’의 그릇된 이미지와 이에 대한 각계 반응의과열로 인해 시대에 적절치 않은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을 수 있고 이미 일부에서 파행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의 최고지도자 그룹에 노장청(老壯靑)이 고루 포진하는 것은 지도력의세대간 조화를 가져오고 국민은 이 노장청이 조화된 국가상에서 안정감과 진취성을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다.이 경우 국민 각 세대는 국가지도층의 리더십을 각별히 신뢰하게 된다.노장들이 포진한 미국 상·하원과 젊은 클린턴정부의 조화,영국의 인자한 할머니여왕과 40대 젊은 블레어 정부의 조화,경륜의 독일국회와 젊은 슈뢰더 정부의 조화는 보기에도 좋다.물론 경륜의 국가원수와 젊은 참모들 또는 노장청이 조화된 국회와 정부도 보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가상은 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40∼50명에 달하는 정부와 정당의 최고지도자 집단의 평균 연령이 60세를 넘어가고 최고지도자 집단에 40대 지도자가 2∼3명에 불과한 것은 21세기를 코 앞에 둔시점에서 분명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다.하지만 국가지도층의 이 편중된 세대구성을 ‘젊은 피 수혈’이라는 정치 담론(談論)으로 교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파행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첫째,‘젊은 피 수혈론’은 21세기가 노령화 사회라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치 않고 있다.노령화 사회에서 노인문제의 핵심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55세에서 75세에 이르는 정정한 ‘젊은 노인들’의 문제다.국가는 21세기 노령화 사회에서 이들에게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활동기회를 제공하는 적극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젊은 피 수혈론’은 젊은 청년만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이 ‘젊은 노인’ 문제를 무색케 하는 부적절한 이미지를 풍긴다.따라서 각 부문의 ‘젊은노인들’은 이 ‘젊은 피 수혈론’에 대해 매우 씁쓸한 심정으로 반응하고 있다. 둘째,‘젊은 피 수혈론’은 세대교체론으로 오해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노장들의 위기의식을 초래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차세대대권주자들을 조기에 여론의 전면으로 부상시키는 파행적 결과를 낳는다.여론이 차세대로 쏠린다는 것은 현직 대통령의 위상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과거에 YS의 세대교체론이 자신의 레임덕을 앞당긴 사실을 되새겨 봐야 한다.‘젊은 피 수혈론’은 시의적절성 덕택에 일시적으로 여권의 정국주도권을 강화해 주지만 동시에 최고통수권자의 권력을 조기에 누수시키는 모순된 결과를 낳는 점에서 정치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셋째,‘젊은 피 수혈론’은 종국에 가서 청년들의 반발을 살 위험을 안고있다.‘젊은 피 수혈론’으로 현재 청년활동가들의 호응이 과열되고 있으나,당내의 ‘젊은 노인들’과 재야에서 수십년동안 민주화와 공익을 위해 활약해 온 ‘젊은 노인들’의 조용한 저항으로 실제에서 ‘젊은 피’ 수혈의 폭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수혈에서 탈락한 청년들의 큰 반발을 사는 후폭풍(後暴風)의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에서 ‘젊은 피 수혈론’은 그 명칭이 매우 부적절하다. 문민정부의 세대교체론을 반면교사로 삼아 ‘노장청 연대 정당’을 겨냥한‘신진세력 충원론’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 싶다.이 ‘신진세력 충원론’의 담론으로는 오해와 부작용 없이 노장청이 조화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또한 각 부문의 50∼60대 노장들도 충원대상이라는 메시지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에 각 세대의 호응을 받는 장점이 있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
  • 서울 온 유네스코 디엔 다문화교류국장

    “아프리카 문화탐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류 증진은 물론 이해의 폭을넓히는데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문화탐사 발표회를 앞두고 26일 오후 서울에 온 두두 디엔 유네스코 다문화교류국장은 대한매일과 가진기자회견에서 아프리카 문화탐사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아프리카 문화탐사 자문위원장인 알리온 센과 함께 내한한 디엔 국장은 “20세기는 여러가지 과학적·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저개발과 질병·기아등의 그늘이 지기도 했던 시기”라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교류가 없었던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이제 서로를 발견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립 가운데 가장 첨예한 것은 문화적 갈등”이라며 “따라서 전세계 문화는 서로 개발되고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아프리카 문화의 본질은 인간을 위한 예술,삶을 위한 예술 등에서 보듯 인본주의”라면서 이번 탐사를 통해 여성·소수민족·도시개발 등 아프리카의 다양한 문화가 한국을 비롯,아시아국가들에 알려지기를 희망했다. 디엔 국장은 “각종 문화사업을 후원해온 유네스코는 문화탐사에 풍부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형식적인 대화가 아닌 아프리카 문화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디엔 국장은 세네갈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법학·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지난72년부터 유네스코에서 일해 왔다. 임태순기자
  • [출판가] 잡지 ‘진보평론’ 8월 창간

    국내 진보세력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오는 8월 전문잡지 ‘진보평론’을 창간할 예정이다. 진보성향의 학계·실천운동가 100여 명은 지난 17일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진보평론’ 발간모임 발족식과 함께 ‘현시기 한국의 사회운동과 이론활동’이라는 주제의 창립기념 심포지엄을 가졌다. ‘진보평론’ 창간호를 위해 김진균 서울대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교수(정치학) 최갑수 서울대교수(서양사학)가 공동대표를 맡고 편집위원장에는김세균 서울대교수(정치학)가 선임됐다. 창간호는 특집으로 ‘마르크시즘의 오늘과 내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밖에 코소보사태,‘제3의길’ 비판,최근 프랑스의 사상·지성 흐름의 전환 등에 관한 글도 실을 예정이다.
  • [화제의 책] 망명자들 증언 토대 객관적으로 서술

    “과거 정권은 김정일을 형편없고 능력없는 사람,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그러나 우리는 김정일이 북한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처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어느 진보 정치학자의 ‘김정일관(觀)’이 아니다.김대중 대통령이 통일부 국정개혁 보고회의(3월24일)에서 지적한 얘기다. 최근 정창현씨(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가 펴낸 ‘곁에서 본 김정일’은 ‘김정일 바로보기’의 작은 노력으로 평가된다.정씨는 김정일의 최측근이자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씨(80년대 망명,98년 작고)와의 2년여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후계자 수업·집권과정 등과 김정일 개인의 사생활·리더십 등을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또 한국언론에서 화제가 됐던 ‘기쁨조’의 실체,김정일 본처의 망명이라며파문을 일으켰던 ‘성혜림 망명사건’,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의 김정일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다른 귀순자들의 증언과 상당히 반대되는 부분도 있어 주목된다.이 책에는 신씨 이외에도 김정일을 가까이서 만나본 신상옥·최은희 부부,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여연구(몽양 여운형 2녀),재미언론인 문명자씨 등의 생생한 증언도 담고 있다.저자는 “북한 최고지도자와 체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질 때 남북화해·협력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지적한다.토지 8,000원.
  • 李仁濟씨 귀국후 행보는

    이인제(李仁濟)전의원이 27일쯤 귀국한다.지난해 10월27일 미국으로 떠난지 6개월 만이다.현재 그는 국민회의 당무위원이다.당무 복귀와 정치 전면에 나설지 벌써부터 관심이다.그동안 그는 미국의 조지워싱턴대와 조지타운대에서 국제정치학을,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수업을 받았다.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고 재충전을 하려는 뜻에서였다. 미국 연수를 끝내고 지난달 30일부터는 유럽을 여행중이다.이탈리아 영국독일 프랑스를 거쳐 18일부터는 일본을 방문한다.독일에서는 발터 리스터 연방 노동사회부장관을,프랑스에서는 차기 사민당 당수로 유력한 피에르 기든의원을 만났다.일본에서는 가이후 전총리,호소카와 전총리 등을 만날 예정이다.유럽 및 일본 순방은 국제적으로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다.그는 전당대회가 8월로 늦춰져 6∼7월에 다시 외유를 떠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당무위원은 차세대 주자의 유력한 후보다.그래서 귀국 후의 행보와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게다가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젊은 피 수혈론을 밝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이 당무위원은 8월의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기용될 가능성이 점쳐지지만그의 한 측근은 “현재처럼 17명이나 있는 부총재를 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명실상부한 부총재는 맡겠지만 유명무실한 부총재를 할 생각은없다는 의미다. 이 당무위원은 전당대회를 계기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당내 역학구도에 변화가 있을지도 관심거리다.대권의꿈을 간직한 그는 내년 총선에서는 차세대주자 위치를 확실히 다진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곽태헌기자 tiger@
  •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協 정치개혁 심포지엄

    지역감정 및 당내 민주주의 결여 등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는 모두 ‘정치시장의 독과점’때문이며 이의 해소를 통해 진정한 정치개혁이 가능하다는주장이 제기됐다.이같은 분석의 틀은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대표 邊衡尹)가 16일 오후 개최한 ‘정치개혁,이대로 좋은가?’란 제목의 창립 1주년심포지엄에서 등장했다. 심포지엄에서 발표자들은 이런 틀에서 지역감정을 ‘특정지역에 기반한 소수 정치인에 의한 독과점 현상’이라고 규정했다.김일영(金一榮)성균관대 한국정치과 교수와 이성복(李成福)건국대 정외과 교수는 지역감정 해소책으로국민회의 당론인 소선거구제와 정당명부제의 결합을 원칙적으로 찬성했다.그러나 몇가지 전제조건을 걸었다. 김교수는 비례대표 의석 비율이 높을수록 지역주의 완화효과가 크므로 국민회의가 내건 지역 및 비례대표 의석비율 1 대 1을 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정당명부가 독점정치가의 측근들로 채워지는 것을 막고 ‘젊은 일꾼’의수혈통로로 기능하도록 후보의 일정지분을 시민단체와 전문가집단에게 할애하고 구체적 인물선정도 해당단체에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교수는 또정당명부제 실시로 지역구가 광역화되는 데 따른 지구당 사무실 증설을 막기 위해 지구당 사무실 폐지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내각제는 지역주의 이용 우려 [金一榮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내각제가 지역주의와 정경유착을 통한 정치적 독점구조를 심화시켜 국가사회 발전의 해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대통령제를 보완해서 써야 한다는목소리도 나왔다.내각제가 정당간 연합의 방식으로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것이란 일각의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다.두 교수는 우선,특정지역에 기반을 둔정당들이 지역감정을 자신의 정치적 자원으로 계속 이용하기 위해 그것을 온존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또 여타지역들도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적 조직화를 통해 연립정부 내 일정지분 확보를 위해 덤빌 수 있어 한마디로 ‘3김없는 3김정치’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정권장악을 위해 연립 파트너를 수시로 바꿈으로써 정치권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대통령제 보완대책으로 김교수는 허울뿐인 총리직을 없애고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부통령제를 두자고 강조했다.부통령제를 통해 지역연합을 꾀하면 임기가 보장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 있고 차기주자가조기에 가시화돼 예측가능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허울뿐인 총리보다 부통령제로 [李成福 건국대 교수·정치학] 이교수는 중·대선거구가 지역감정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중·대선거구는 또 미디어 선거를 가능케 해 선거비용 등 정치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봤다. 심포지엄에서는 또 정치개혁의 제1단계는 당내 민주화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국민회의가 추진하는 정당명부제와 젊은 일꾼 수혈론이 결실을 거두려면 무엇보다 당의 중요정책이 당수와 몇몇 측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김교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자신의독점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당내 독점정치가들이 자신의 독점권을 버리려 하지 않을 때는 시민사회단체가 압력을 가해적어도 지역구후보만큼은 반드시 경선을 통해 뽑도록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나병식(羅炳植)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 등은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은 전문가를 특위에 일정비율 참여시켜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추승호기자 chu@
  • 올 장애인의 날 KBS특집 ‘오체불만족‘

    기념일 특집이란 뻔하다? 올해 장애인의 날 특집 ‘KBS일요스페셜-오체불만족,오토다케의 즐거운 인생’은 모처럼 기대를 뛰어 넘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듯하다.(18일 저녁 7시50분) 지난해 10월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이란 책을 출간,일본에서 320만부판매라는 수퍼베스트셀러 기록을 세운 일본인 청년은 머리와 사지(四肢),즉오체가 모두 불만족스럽게 태어나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몸이지만 밝은 표정에선 좀체 장애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는 ‘즐거운 인생’이다.그래서 그는 장애인에 대한 선입관을 바꿔 놓을 뿐아니라 툭하면 힘들다고 푸념하곤 하는정상인들의 삶마저 부끄럽게 만든다. 오토다케 히로다타(乙武洋匡·23)씨는 현재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4학년.1976년생.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그의 팔다리 길이는 10㎝ 정도.그러나 그는 이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라 주장한다. 그를 이렇게 건강하게 성장시킨 것은 어머니와 선생님이었다.갓난 아들의모습을 처음 본 어머니는 놀라는 대신 ‘어머,귀여운 우리 아기…’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였고,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담임을 맡았던 교사 다카기씨는 그를 ‘보통아이’로 대우했다.오토다케를 맡은 4년간 무려 10권의 일기를 썼다는 다카기씨는 등산대회를 앞두고 ‘오토다케도 등산을 갈것인가’를 주제로 학급회의를 열게 했다.이때 반 어린이들이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오토다케가 빠져야 하느냐’며 동행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스스로를 ‘못말리는 아이’라고 말하는 오토다케씨는 옷 갈아입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빼고는 일절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오히려 술취한 친구를 전동 휠체어에 태워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줬다는 부분에 이르면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게 될 정도다. 만능 스포츠맨이라는 그는 현재 장애인과 고령자를 위한 ‘마음의 장벽없애기’운동을 펼치고 있다.이 운동은 거리의 장애물 제거운동으로 시작됐다. 오토다케씨는 16일 한국을 방문,국내 독자들과 첫 만남을 갖는다.17일에는초등학교를 방문,강연을 하고 KBS에서녹화를 하며 18일 출국할 예정이다.이프로는 장애인의 날 20일 낮 1시10분에 재방송된다. 허남주기자 yukyung@
  • 與 “인권거론 자격있나” 野에 반격

    인권문제 거론 ‘자격론’을 둘러싸고 여권의 대야 공세가 거세다.시민 사회단체도 가세하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이 정형근(鄭亨根)의원을 비정부기구(NGO) 대표자격으로 이신범(李信範)·김영선(金映宣)의원과 함께 17일부터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55차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에 보내겠다고 발표한게 발단이 됐다.한나라당 인권위는대표단을 통해 김대중(金大中)정부 아래에서의 인권탄압사례를 국제인권단체들에 공표하겠다는 자료를 냈다. 국민회의가 발끈했다.14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안기부 수사국장,차장출신의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을 집중 성토했다.정의원에 대한 ‘정계추방론’까지 제기했다. 국민회의는 전력과 자질,윤리적 측면 등 어떤 면에서도 정의원이 국제인권기구에서 현정부의 인권상황을 비판하겠다는 것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시각이다. 한 간부는 “국제인권기구에서 규탄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정의원 자신”이라며 정의원을 비판했다.또다른 참석자는 “국제기구에서 정의원이 연설을한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없을 것”이라며 그 의미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바깥세계에서 이같은 행태가 계속되면 국익에 심대한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약발’은 없지만 나라 전체로 봐 국익에 피해를 주는 ‘중대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국민회의 정동영(鄭東泳)대변인과 김현미(金賢美)부대변인은 “정의원은 고문을 당한 피해자로부터 고문혐의로 피소돼 있다”며 “정의원의 전력을 볼때,꿈에서도 인권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시민단체 등 각계도 ‘정의원 선정’에 곱지않은 시각이다.경실련 김영재(金英材)간사는 “정의원은 과거 우리나라 인권을 유린해온 책임자로 활동해왔던 사람”이라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권부분을거론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명지대 신율(申律)교수(정치학)도 “검증되지 않은 (고문)얘기를 나라 밖에서 공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인권유린행위”라며 “국익을 고려하는 정치인의 신중한 행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의원과 한나라당도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정의원은 “현 정부가 (인권)문제가 많아 겁이 나서 그런 것”이라며 “인권문제에 당당히 응할 것”이라는 반응이다.구범회(具凡會)부대변인은 정의원이 서경원전의원으로부터 피소된 것을 겨냥,“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한 서씨의 고소는 적반하장이며 서씨에게서 간첩꼬리는 뗄래야 뗄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인터뷰] 국민회의 孫世一신임총무

    국민회의 손세일(孫世一)신임총무는 “15대 국회를 제2의 제헌국회로 인식,국정전반 개혁을 위한 입법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앞으로 정치개혁법 작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음을 밝힌 셈이다. 손총무는 이를 위해 자민련과의 ‘물샐틈 없는’ 협조체제가 불가피함을 밝혔다. 야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국정의 동반자라는 인식 아래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겠다”고 말했다.같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와는 오랜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하지만 양보할 것은 양보하지만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양보할 수 없다는점은 분명히 했다. 손총무는 내각제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태도를 취했다.자민련에 대해서는 “지난 9일 청와대 4자회담에서 결정된 것을 기준으로 상의하겠다”고 했다.또 야당이 내각제 문제를 정치개혁 협상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운 부분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원내대책회의 활성화’라는 새로운 원내총무상 정립에 대한 뜻도 피력했다.형식적인 20여명 내외의 원내대책회의를 조속히 재구성,원내문제를논의하겠다고 계획이다.이를 토대로 전임총무단·새 지도부 등과 협의,제204회 임시국회 일정을 협의하겠다고 밝혔다.조만간 3당 총무회담도 열 생각이다. 손총무는 부드러운 성품이지만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경남고 후배로 90년 3당 합당에 반대,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택한 ‘강단’도 갖고 있는 언론인 출신 3선의원이다. ▲부산·64 ▲서울대 정치학과 ▲동아일보 논설위원 ▲11,14,15대 의원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국회 통상산업위원장 ▲국민회의 전당대회의장
  • “이젠 대화” 경색정국에 봄바람…2與 총무선출 이후

    여야 협상에 새로운 바람이 불것 같다.12일 공동 여당의 원내사령탑 정비를 계기로 여야가 새로운 관계 모색에 나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새 총무단 출범으로 일단은 여러가지 여건과 분위기는 좋아보인다.그래서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전총무와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의 사이처럼 ‘불편했던’ 관계는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개인 차원의 앙금을 떠나 국회운영 등 각종 현안 논의에서도 경색국면이 풀리고 봄바람이 불 것 같은 기미가 있다는 의미다. 먼저 여야 모두 대결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원하고 있다.손세일(孫世一)국민회의 신임총무는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야당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생각하고 협상하겠다”며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양보를 얻어낼 것을 얻어내겠다”고 말해 대화와 협상을 강조했다.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총재권한대행도 “지난 1년간 여야간 정치는 없었고 대결만 있었다”면서 “앞으로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복원하겠다”고 정치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한나라당도 서상목(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 처리건에서 얻은 것도 있는 만큼 무리한 장외(場外)투쟁은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여야 대화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서의원이 국회에서 처리된 것도앞으로 여야관계에는 괜찮은 재료다.여야 모두 더는 서의원건을 정략적으로다루거나 방탄국회로 다룰 명분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인 요인도 그렇지만 여야 총무간의 인간적인 관계도 앞으로의여야 총무관계를 좋게 보는 요인으로 꼽힌다.국민회의 손총무와 한나라당 이총무의 인연은 남다르다.손총무가 이총무의 서울대 정치학과 7년 선배다.또손총무와 이총무는 동아일보에서 6년(69∼75년)간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새로운 여권의 지도부 구성과 정치적인 요인들로 일단 여야 총무회담에는청신호가 켜진 것 같지만 낙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1년 앞으로 다가온 16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법 협상을 비롯한 정치개혁협상이 원만히 되는 게 우선 쉽지 않은 탓이다.여야가 정치개혁 협상에 최대의 관심을 쏟고 있는 만큼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게다가 손총무는 온건한 스타일이고 이총무는 강경론자로 분류되는 것도 여야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시각도 없지 않다.
  • 사무총장 金顯煜·대변인 李良熙의원 프로필

    金사무총장 프로필 국제정치학자 출신의 4선의원.두차례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맡은 외교통.13대때는 민정당 후보로 ‘JP바람’에 맞서 3선(選)을 따냈고,15대때는 ‘JP후광’을 업고 당선.달변이자 다변(多辯)이 장점이자단점으로 지적되기도.활달 호방한 성격으로 바리톤의 노래솜씨는 프로급.부인 金惠善여사(54)와 1남1녀. ▲충남 당진·60 ▲한국 외국어대,오스트리아 빈대학 ▲단국대 교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자민련 정책위의장 ▲11·12·13·15대 국회의원 李대변인 프로필 지난 95년 자민련 창당때 정계에 뛰어든 초선의원.당시창당부본부장으로 중간실무 작업을 주도한 ‘JP직계’.꼼꼼한 성격에 부지런하고 논리에 강해 97년 한보청문회 스타로 부상.다소 여성스러운 독특한 음성이 ‘등록상표’.한·일의원 바둑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아마6단의 바둑고수.부인 金鍈子여사(55)와 1남1녀. ▲대전·54 ▲대전고,서울대 법대 ▲대통령 정무비서관 ▲정무1차관 ▲대통령직인수위 경제1분과 정책위원 ▲자민련 수석부총무 ▲15대 국회의원
  • [포커스 투데이]유엔난민고등판무관 오카타 사다코

    “난민들이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지만 중요한 것은 돌아가서 이들이 안심하고 살수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대거 피란길에 오르면서 오카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72)은 세계에서 가장 바빠진 사람중 한명이 됐다. 지난달 24일 나토군의 공습 시작 이후 그녀는 본부가 있는 제네바와 난민들이 모여드는 알바니아,마케도니아 국경지대를 오가며 코소보 난민 현황 파악과 대책 수립을 총지휘하며 50만에 육박하는 난민들 구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카타 여사가 일본인으로선 드물게 유엔 ‘난민 전문가’가 된 것은 90년말.유엔 총회서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령탑으로 선출된 뒤 지금까지 9년간 재임하고 있다. 보스니아 르완다 사태 등 굵직한 국제분쟁 때마다 발생한 대량난민을 기민하고 헌신적으로 구호한 공로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아 내리 3선째 연임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를 받고 일본 국제기독대학 교수로 학자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78년 국제아동기금(UNICEF)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면서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비쳤다. 같은 시기 주 유엔본부 일본 전권대사도 겸임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유고공습이 확대되자 눈코뜰새 없어진 여사는 각국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코소보 난민의 국제적 인식을 높이는데 힘쓰고 있다. “코소보 난민들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하는 오가타 여사는 “20세기가 끝나면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으로 내쫓기는 일도 종언(終焉)을 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黃性淇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