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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鄭鎭奭대주교 장학금 5억 쾌척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鄭鎭奭대주교(사진)가 음성 꽃동네에 의해 설립돼 다음달 2일 개교하는 충북 청원군 현도사회복지대(총장 吳雄鎭신부)에 장학금5억원을 내놓아 화제다. 鄭대주교는 9일 오후 음성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에서 열린 吳신부의 총장취임식에 참석,기탁금을 전달했다. 이 장학금은 鄭대주교가 지난 61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신도들이 “생활비에 보태쓰라”며 한푼 두푼 내놓은 돈 등을 40여년 동안 근검절약하며 모은 전재산이다.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 데다 바지 한 벌을 20여년간이나 입는가 하면 밤중에도 전깃불 대신 촛불을 켜고 책을 보는 등 그의 청빈함과 절약정신은 정평이 나있다. 현도사회복지대는 鄭대주교가 기탁한 장학금으로‘정진석 장학재단’을 설립,매년 40∼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다.이 대학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운영해온吳신부가 전문봉사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법인이다. 吳신부는“대주교께서는 청주교구장 재임 시절부터 꽃동네 일을전폭적으로지원해 주시기도 했다”며“대주교님의 뜻을 받들어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대학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 예수탄생 기쁨 이웃과 함께/천주교·각 개신교단 다채로운 성탄행사

    기독교 최대의 경축일인 성탄절(25일)을 맞아 개신교와 천주교는 성탄예배와 음악회,사회복지시설 위문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IMF 한파로 아직도 고통받는 이웃이 많은 만큼 축제적 분위기보다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불우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내실있는 행사로 꾸밀 계획이다. 천주교는 25일 0시 전국의 성당에서 일제히 성탄 전야 자정미사를 올리며 25일 낮에도 계속해서 미사를 갖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대주교가 25일 0시와 정오 두 차례에 걸쳐 명동성당에서 성탄미사를 집전하며 각 교구장들도 교구별로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개신교계는 각 교회별로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와 공연,불우이웃 위문행사 등으로 성탄을 맞는다. 서울 중구 저동의 영락교회(예장 통합)는 22일 산하 복지시설인 보린원과 애니아의 집에서 성탄예배를 올렸다. 대한성공회는 서울 중구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25일 0시와 오전 7시·11시에 미사를 올리며 자정미사와 11시의 대미사는 정철범 대주교가 집전한다. 구세군은25일 0시 서울 중구 명동 상업은행앞에서 자선냄비 종료를 알리는 마감예배를 갖고 25일 오전 11시를 전후해 교회별로 성탄예배를 올린다.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24일 오후 6시30분 인터넷방송 개국및 성탄 축하예배를 갖는데 이어 25일 오전 7시부터 두 시간 간격으로 7차례의 성탄예배를 올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김동완 총무는 24일 오전 1시 서울 성북구 정릉4동 철거지역을 방문해 ‘실직자와 함께 하는 성탄예배’를 인도하고 25일 오전 11시 서울청량리 쌍굴다리에서 열리는 다일공동체의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 대축일예배’에도 참석해 축도를 드릴 계획이다.
  • 과제(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9·끝)

    ◎민족정론지 체계적 해석 필요/언론·정신사적 측면서 새 연구 첫발 디딜때/창간∼15호 찾기 급선무/北韓도 ‘대한매일’ 평가 남북 공동연구 가능할듯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국운이 풍전등화이던 1904년 7월18일 창간,두차례의 휴간에 이어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과 함께 강제 폐간됐다. 모두 6년1개월10일을 존속,전체 지령 1,651호를 발간해오면서 매 지면 구성을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일관했다. ‘저항’‘구국(救國)’‘우국(憂國)’‘개화’의 4대정신으로 요약되는 보도내용은 물론 대한매일은 근대적 신문의 모든 요소를 완벽히 갖춘 상업지의 성격을 분명히 해왔다. 논설 뉴스 외신 소설 등의 지면 형태를 비롯,월정 구독료 징수,광고비 안내및 광고게재,전국적인 지사운영 등. 이같은 측면에서 볼때 대한매일은 대한제국 말기의 귀중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연구의 1,2차적 사료가 됨은 물론 한일합방 과정 연구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사료가 된다. 그동안 대한매일에 실린 600여편의 가사(歌辭)와 16편의 연재소설은 우리 국문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 신문학적 연구에 있어서도 근대신문의 형태를 거의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대한매일 발행인 배설의 재판을 둘러싼 영국과 일본,그리고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논쟁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20세기초 근대외교사 연구의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한매일의 이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하다. 단행본 3권과 학위논문 20여편이 고작이다. 단행본은 ‘대한매일신보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 1986)‘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 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 1986)‘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 1987)이 있다. 학위논문도 대부분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국문학적 측면에서의 연구이고,의병·자주의식·산업진흥·광고 등에 관한 것들도 있다. 이제 대한매일의 재탄생을 계기로 민족정론지로서의 대한매일에 대한 체계적이고 새로운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이는 단지 언론학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민족정신사적 측면에서도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같은 대한매일에 대한 새로운 연구작업에 북한과의 공동작업이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남북한 간의 언론에 대한 관점과 역사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남북한의 언론 100년사는 상호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대한매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대부분 남북한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북한측의 해석은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부교수 리용필이 1985년 펴낸 ‘조선신문 100년사’(정진석 해제,나남 1993)에 잘 정리돼 있다. 이 책 제1편 ‘우리나라 근대및 일제통치하의 부르죠아’의 제2장 ‘애국문화운동의 전개와 근대 부르죠아신문의 발전’편 40여 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시기를 포함하고 있는 이 장에서 대한매일을 ‘애국적 정론가들의 주동적인 참가 밑에 창간’,‘일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 매국도배들을 반대배격하는 데서 비교적 예리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민의 반일애국투쟁이 더욱앙양되고 있었던 력사적 시기를 배경으로하여 발간됐기 때문’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한매일의 출현으로 하여 이 시기 우리나라 신문발전 력사는 정론적 수준의 가일층 제고로서 특징지어지게 됐다”고 평가하며 많은 논설과 가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결국 대한매일에 대한 남북한의 이같은 일치된 해석은 언론학 또는 항일투쟁사의 해석에 있어 남북한 간의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한매일의 공동연구는 남북한 간 언론학 뿐 아니라 일반 학문교류에 있어서의 단초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매일에 대한 남북한 공동과제는 아직 찾지못한 1904년 7월18일 첫 창간호부터 15호까지의 신문을 찾는 일이다. (현재 영인본은 16호부터 돼있으며 1905년 8월11일 재창간호를 대외적인 창간호로 하고 있음) 북한이 그 신문들을 보관하고 있다면 우리와 영인본을 교환할 수도 있으며 또 대한매일신보사의 당시 50여개 지사 가운데 북한에도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땅 어디엔가 대한매일의 귀중한 자료들이 흩어져 있을지도모른다. ‘다시 태어난 대한매일’연재를 마치며 이같은 민족 공통분모찾기에 북한측의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한다.
  • 일제·독재로 비틀린 역사 새로쓰기(서울신문이렇게바뀌었습니다:上)

    ◎양심적 개혁인사 칼럼 대폭 늘려 서울신문은 11일 대한매일로 새로 태어난다. 이에 앞서 이미 서울신문은 내용면에서 크게 달라졌다. ‘행정뉴스’면 신설과 여러 특집보도는 그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또한 외부 필진을 전면적으로 개편해 신념과 양식을 지닌 각계 인사를 폭넓게 포함시켰다. 이 모든 것은 새로이 출발하는 대한매일이 공익정론지로서 나아가는 데에 디딤돌이 될 것이다. ◎필진 다양화·논조 변화/양비론적 시각 탈피/임수경씨 글 호평 받아 공익정론지 대한매일로 재탄생하는 서울신문의 많은 변화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필진의 다양화와 논조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기 위해 칼럼을 비롯,각종 외부 기고를 대폭 늘렸다. 그리고 필진의 선정에 있어서도 그동안 제도권 언론에 의해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개혁인사들에게 과감히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 꾸며지는 서울광장,굄돌 등 고정칼럼은 오피니언 리더들의 다양한 지적 욕구를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광장은참여연대의 박원순 변호사,동국대 황태연 교수 등 젊은 지성들을 포함한 각계각층 필진 16인이 꾸며나가고 있다. 특히 지난 8,9월에 굄돌 필진으로 참여했던 임수경씨의 경우 젊은 통일운동가로서 진솔한 삶의 얘기들을 들려줘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또한 회사의 입장을 나타내는 사설과 사내 필진들에 의한 칼럼들은 공공이익과 국민복지,민족화합을 앞세우고 2000년대를 앞서간다는 대한매일의 다짐하에 집필되고 있다. 그동안 상당부분 치우쳐 있던 기회주의적인 양비론적 시각을 탈피하여 민족정론의 입장에서 분명한 태도를 밝혀나가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내 기명칼럼으로는 김삼웅칼럼,림춘웅칼럼,장윤환칼럼,박갑천칼럼,박강문코너 등이 있으며 논설위원 등이 집필하는 ‘외언내언’과 ‘시론(時論)’,데스크의 ‘데스크시각’,일선기자의 ‘오늘의 눈’,독자들이 참여하는 ‘기고’와 ‘발언대’ 등 풍부한 오피니언 난을 꾸미고 있다. 한편 독자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특집 시리즈물도 기획되고 있다. 특히한국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교수가 11일부터 주간 연재할 ‘문학과 사회와 역사’는 해방 이후 변혁기에 큰 역할을 해온 우리 문학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밝히는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대한매일신보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교수가 연재할 ‘대한매일 비사’는 한말 구국항일의 숨은 일화들을 낱낱이 파헤쳐줄 것이다. 아울러 대한매일의 문화면은 ‘문화국가’를 제창한 선각자들의 뜻을 좇아 문학,출판,공연,미술,문화정책 등 전 분야에서 우리것의 특화에 역점을 둔 지면으로 꾸며나갈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 건설에 보탬이 될 지면으로 특화를 이뤄나가고자 한다. ◎친일파·민주열사 연재/한국언론 새 지평 열어/금지문화·인생도 시리즈로 언론은 공정한 보도를 통해 정직한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서울신문은 과거 일부 왜곡보도에 대한 반성 위에 정직한 역사를 기록하는 올바른 언론의 길을 가기 위해 ‘정직한 역사 되찾기’ 장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정직한 역사 되찾기’는 친일파와 독재권력에 의해 왜곡됐던 현대사를 바로잡아 ‘정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로,서울신문의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재조명을 시작으로 지난 5월 시작된 ‘정직한 역사 되찾기’는 친일파와 독재권력에 의해 폄하됐던 金九 선생의 재평가와 ‘악법의 문제’를 점검한 후 지금은 ‘민주열사 열전’과 ‘친일의 군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친일의 군상은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했으면서도 해방 후 독재권력과 결탁하여 지배층을 형성했던 친일파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친일행위자들은 해방 후 당연히 단죄됐어야 했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 후에도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그 결과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정의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과 기회주의·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구조적 모순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총체적 사회문제의 원류는 친일파 청산의 실패임을 언론들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실상을 외면해 왔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만이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으로 현대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인 친일파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언론들이 감히 할 수 없었던 친일파문제를 서울신문이 처음으로 파헤치는 것은 한국언론의 새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일이다. 서울신문은 또 친일세력과 손을 잡은 독재권력에 저항하며 인간다운 삶과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민주열사 열전을 연재하고 있다. 민주세력의 처절한 투쟁이 민주화의 불꽃이 되어 오늘의 밝은 세상을 밝히고 있으나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독재권력에 의해 역사의 뒷무대에 묻혀 왔다. 독재권력에 의해 금지됐던 노래·공연·책 등을 소개하는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도 연재하고 있다. 서울신문이 시작한 ‘정직한 역사 되찾기’는 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에 의해 더욱 알차게 꾸며질 것이다. 대한매일은 1900년대 초 절망적인 시대상황에서도 구국활동,민족·독립정신 고취 등 민족의 자주성과 긍지를 일깨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과 공익을 위한 정론지로서 21세기를 여는 참언론의 길을 갈 것이다.
  • 대한매일 역사성과 새 좌표 세미나­주제발표 내용

    ◎국난때 정론 편 대표적 민족지 오는 11일 ‘대한매일’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는 서울신문이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드높였던 민족정론지였다고 평가하고 오늘날 또 다른 국난기를 맞아 그 같은 정신의 부활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새로운 천년,새 세기의 지평에서 공익언론·구국언론으로서 대한매일의 부활은 1세기 전 선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도전을 실현시킬 계기가 될 것임을 전망했다. 이날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민족운동과 시대적 상황’(신용하),‘대한매일신보의 논조와 민족 독립운동’(정진석), ‘대한매일의 정체성과 새 좌표’(김삼웅) 세 편을 요약 소개한다. ◎창간 당시 시대적 상황/애국세력 신민회 본부 사내에 설치/국채보상 일어나자 전국적 캠페인/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학 구한말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을 상실한 뒤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신문이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였음은 학계의 연구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 요인과 조건을,외국인 명의로 발행돼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런 외적 조건은 일면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한매일이 과감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내적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 전개 대한매일은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고용추대하고 梁起鐸은 총무가 되어 합작으로 1904년 7월18일 창간했다. 원래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의 처지와 한국정부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궁내부 예식원 관리인 양기탁 등이 배설을 고용해 창간했다. 예식원 영어통역관인 양기탁은 고종의 내탕금과 李容翊·閔泳煥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설치하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 임시통신원 배설을 사장으로 고용해 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양기탁의 주도로 창간됐으며,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사의 편집과 업무를 총괄했다. 대한매일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 내적 조건의 특징은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돼 그 본부를 대한매일 안에다 둔 사실과 직접 관련돼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다섯가지 애국세력이 연합해 창립했는데 그 첫째가 대한매일 집단이다. 양기탁이 총무로,申采浩가 주필로,張道斌(일시 주필)玉觀彬 李章薰 梁寅鐸 金演昶 兪致兼 李晩稙 등이 기자로,林蚩正 姜文秀 등이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민회 창립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밖에 서울 상동교회,구한국 무관 출신,민족자본가,미주(美洲)에 있는 공립협회(共立協會)등이 참여했다. 신민회에서는 특히 대한매일이 그 핵심세력이 되었다. 신민회 총감독(당수 또는 회장)이 양기탁이었고 본부를 대한매일 내에 두었다. 장도빈은 주도회원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부였다. 신민회 조직을 발의한 것은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였으나 미주에서는 효과가없으니 본국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해 안창호를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귀국 즉시 대한매일로 양기탁을 찾아갔고 두달 후 다시 만나 신민회를 비밀결사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신민회 창립 제의는 안창호가 냈으나 창립은 양기탁 중심으로 되었다. 당시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국내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을 뿐아니라 민중에게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양기탁이 신민회 총감독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대한매일의 조직과 세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전국에 지국을 가진 대한매일을 중핵으로 하여 단기간에 비교적 용이하게 지방지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에 있었고 대한매일 영업국장인 임치정과 직원 김홍서가 비밀사무를 보았다. ○安昌浩 중심 신민회 조직 발의 1909년 대한매일의 지사 숫자는 51곳으로 일제가 후에 파악한 신민회 지회 세력과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의 실행방법으로 ‘신문·잡지·서적의 간행’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는데 창립 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지는 않았다. 대한매일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도빈,일제 관원,독립운동가의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이 신민회 기관지로 전화한 1907년 4월 이후 논설·편집·보도는 매우 열렬하고 전투적으로 되었다. 일제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인 명의 신문이 가진 특권을 모두 없앴으며 대한매일을 해체하려고 배설·양기탁을 고소·구속했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굴복함 없이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대한매일 종사자들이 굳게 단결,신민회 노선에 따른 과감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의 민족운동에서의 애국적 전통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 한국 신문에서도 면면히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논조와 독립운동/李 침략 본격화 맞서 대항논리 제공/직필 논설 통해 항일의병투쟁 고무/鄭晋錫 한국외대 교수·정책과학대학원장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던 시기에 발행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일본과 영국은 대한매일이 창간된 때로부터 한일합방까지 대한매일을 외교적인 현안문제로 다루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언론사,독립운동사,한국문제에 관한 영·일 양국의 외교사,국제사법사 등의 핵심이 되는 연구과제이다.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 대한매일의 항일 언론이 한국의 언론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것은 이 신문의 발행시기다. 이 신문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한일합방이 공포되던 날까지 약 6년 동안 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대한매일은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항일운동의 논리를 제공했고 항일운동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둘째 대한매일의 외교사적인 중요성이다. 이 신문에는 한국 영국 일본 세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이 한반도의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나 한국의 황실과 민족진영이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논조는 항일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문이 침략정책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裵說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고 그 교섭 상대국은 영국이었다. 영·일간 교섭 과정에서 외교정책,사법 절차상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이 신문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영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과 양측의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일본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영국 시민 배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영국 정부 자체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일본이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과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본 대한매일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 국민들의 저항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항일투쟁에 가담했으므로 이 신문은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여섯째 언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발행되고 있던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의 필요성은 크다.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 국한문 한글 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이 벌인 국권수호운동은 1차적으로는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은 일본 침략을 규탄하고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항일 언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매일은 항일의 필봉만으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온나라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때에 의연금을 수합하는 총본부격인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고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은 논설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의병들의 무장항일투쟁도 대한매일의 논조에 고무된 바 컸다. 대한매일은 한국 언론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문이 세운 민족 언론의 전통은 일제 치하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대한매일은 결국 한일합방 직전에 일본측으로 넘어가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한매일 발행 당시의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언론 연구에도 그 선행연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체성과 새 좌표/굴종과 오욕의 역사 치열하게 자성/원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 국난극복·21세기의 비전 제시 노력/金三雄 본사 주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조화된 적폐들을 청산하자고 정권교체라는 시민혁명을 이룬 국민 절대다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추한 모습을 지닌 우리 언론을 바로잡자는 언론정화운동과 언론개혁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는 역사의 기승전결 법칙을 교과서적으로 무섭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서울신문이 제호를 변경하면서 출생의 뿌리를 찾고 그 정신을 새로이 하면서 새 출발의 전기를 확립하려는 의지는 바로 기승전결의 역사법칙이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러한 역사발전의 전기로,국운이 기로에 처한 1900년대 초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자주의 주권회복 기치를 높이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국난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21세기에 앞장서고자 한다. 제호 변경은 서울신문이 단순히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었다는 인연만으로 막연히 옛이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백색독재와 군사독재정권의 홍보지로서 본의 아니게 걸어왔던 갖가지 형태의 굴종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원래의 출발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계승함으로써 구국활동·개화운동·애국정신·민족사상·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제2창간의 역사적 동기를 부여코자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한매일신보는 당대의 대표급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만든 민족지였다. 신문 경영의 주체는 배설이지만 실질적 신문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민족사상이 투철한 항일 언론투사인 우리 선각자들이 맡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구국활동의 전위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 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하면서 그 부당성을 널리 폭로하고,의병 항거를 대서특필했다. 일진회의 합병 주장을 사흘에 걸쳐 통박하고,황성신문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민족지의 방향을 주도했다. 정간 2회,압수 45회라는 일제의 폭압적 상황 아래서 고종황제의 퇴위 기도를 폭로,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때는 이들이 반포한 격문을실었으며 군대해산 조치에 저항하여 일제를 통렬히 비난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도 그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함께 눈엣가시와 같았던 대한매일신보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합병조약이나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이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강탈도 원천 무효인 것이다.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이 신문의 발행인 명의가 친일 인사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대한매일신보사가 매일신보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사에 밝혀준다. 양기탁 선생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지사들이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결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매일에서 그 지령을 승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 1651호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하고,창간기념일은대한매일 재창간일인 11월11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서울신문의 제호 변경과 뿌리찾기는 서울신문이란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 한국 언론계가 반성,회개하며 거듭나고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든 언론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되새겨 21세기 참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의 다짐’을 통해 다음의 4가지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둘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셋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넷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대한매일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가 실천하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새로운 시대,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집약,표현하고자 한다.
  • ‘高宗 지원’이 통설/창간비용 어디서…

    ◎독일 여인 손택통해 가끔 내탕금 내려보내/궁내부 기사 심우택 “배설에 5,000원” 증언 대한매일의 역사에서 가장 베일에 싸인 부분이,배설이 창간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가 하는 점이다.배설 자신은 자기자본만으로 신문사를 차렸다고 주장한 반면 학계에는 고종이 지원했으리라는 추정이 통설처럼 돼 있다.또 일부에서는 러시아가 자금을 댔으리라는 의문도 제기한다. 먼저 배설에게 그만한 자금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배설공의 약전’은 ‘십오세된 소년으로… 일본에 이르니… 참는 마음과 검소한 도(道)로 부친의 업을 도와 거부의 집을 이루니… 자기 수중에도 육칠만환의 자본이 있었더라’고 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교수(한국외대)에 따르면 배설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전재산을 투자해 1901년 고베에서 깔개의 일종인 러그 생산공장을 차렸으나 일본인 조합의 반발로 문을 닫았다.따라서 그에게 신문 창간에 필요한 넉넉한 자금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종이대한매일을 지원한 사실은 법정증언 등 여러 형태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종은 궁중을 출입하던 독일여인 孫澤(Sontag)을 통해 민족지에 가끔 내탕금을 보냈다.손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진 뒤로는 궁내부 기사 沈雨澤 등을 통로로 이용했다.심우택은 1907년 통감부의 신문을 받으면서 ‘그해 4월 2,000원,6월에는 3,000원을 배설에게 전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고 창간 당시에도 고종이 적극 지원했다는 증거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자금설’은 대한매일이 처음부터 강하게 배일(排日)논조를 보이자 일본이 경쟁국인 러시아를 의심해서 주장한 것일뿐 근거는 별로 없다. 배설은 적은 자본으로 남의 인쇄시설을 빌려 창간했다가 8개월 만에 휴간하게 된다.다섯달 뒤 복간할 때는 고종의 지원금을 정기적으로 받아 운영한다.배설이 초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문을 계속 발행한 것은 한국인들의 열광적 지지가 뒷받침했기 때문이라고 정진석 교수는 분석했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LG상남재단 ‘일제시대 압수기시모음’ 펴내

    ◎민족언론 항일기사 ‘햇빛’/일어로 된 비밀자료 토대 원문 발굴/1년 작업 통해 1,061건 기사 수록/보도기사·논설·만화·시가 등 망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된 민족언론의 항일기사가 햇빛을 보게 됐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전 2권,정진석 엮음)을 발간했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은 당시 발간된 3개 민족지(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압수기사 원문을 발굴해 정리·해설한 것이다. 1920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6년까지 압수된 보도기사를 비롯,논설 및 해설,만화,시가(時歌),기명기사 등이 실렸다. 이들 압수기사에는 6·10만세운동,광주학생 운동,폭탄과 권총으로 일제를 응징했던 김상옥과 라석주 의거 보도 등 민족언론의 진수가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언론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의 언론과 세상’‘조선 출판경찰개요’등 일본어로 된 비밀자료를 토대로 원문을 찾아냈으며,원문이 소실된 기사의 경우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총 1억원을 들여 1년의 작업 끝에 발간된 이 모음집에는 1,061건의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일제가 우리 신문에 삭제처분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1920년 민간지가 허가된 뒤에도 인쇄된 신문을 먼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납본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중에도 도서과의 지시가 있으면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잡지는 원고의 사전검열,조판된 잡지의 대장검열,납본검열 등 3중 통제를 받았지만 신문은 사전검열을 생략하는 대신 ‘납본검열’을 시행했던 것이다. 편저자인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언론사)는 “일제치하의 항일언론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것이었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을 지키려는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한말 이래의 전통인 저항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3773­2161
  • 사법시험 최종합격자 604명 명단

    총무처는 제39회 사법시험 최종합격자 604명을 확정,18일자로 발표했다. 합격자 가운데 최고득점자는 제2차 시험에서 평균 64.07점을 얻은 이시열씨(29.서울대 물리학과 졸)가 차지했으며 최고령자는 백종인씨(45.단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최연소자는 위인규씨(22.서울대 사법학과 4년 재학)이다. 여성합격자는 전체 차석을 차지한 설윤정씨(25.서울대 공법학과 졸) 등 49명이었으며 전체의 8.1%를 기록했다. 총무처 관계자는 “2차 합격자 604명은 성적과 자질이 모두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 3차에서 한명도 불합격처리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올해 사법고시에는 2만551명이 응시해 35대 1의 경쟁율을 기록했으며 합격자 평균성적은 50.92이다. 합격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문기탁 변성국 이승현 장찬 장영달 오재혁 박춘하 김종수 최용석 허성욱 유기인 장경욱 신철민 이창환 정경모 어영강 이형범 이재우 노태선 손석천 권오석 오기형 최관수 최창훈 권두섭 이명수 최상원 구자헌 이병삼 이승민 박지훈 양중* 변태종 박정무 장정환 민경천 이상훈 안식 박정길 김완규 남순표 김태광 한정화 노호성 문대근 김중원 조성오 김홍경 강동욱 임동번 김순부 강인구 김태훈 신안재 최수영 이효제 정영식 조기민 윤웅기 이태관 양진호 이영환 조민석 최종민 고범석 정진우 임병석 김희제 신치수 박재윤 남현수 이용균 김성훈 부경복 이규주 정진석 김도균 김녕민 이영상 김재호 최재무 김창모 박병규 서형주 강종헌 이진렬 양문식 정경근 정재수 이재석 정인재 김민기 송태섭 윤원상 송석봉 이오영 박종국 신익철 손제현 김현영 서안교 고지환 정상규 한중석 김상연 채석현 김재용 양귀환 서동칠 손주철 당우증 손준성 이명신 경규석 이상호 김용환 조영하 이유형 허준서 박승권 김장구 김태우 허성희 김호운 조진구 김태권 권순정 김태균 김종견 강경국 김선웅 신인수 권낙균 석현수 김순렬 이정하 조웅 김규석 안영환 김제동 문홍식 구본성 황병주 이형관 정영학 황남석 조병규 신영욱 송승룡 주상용 조영식 장재영 박세현 박찬익 최종우 김학민 최낙준 이시열 이철원 배종렬 노정석 김용규 조현철 신대철 안정환 김윤천 이훈재 진상훈 김승주 정도성 염호준 신계렬 이경환 정대정 김정호 남기송 김기현 고경민 권형수 조봉규 이관희 박공우 김장생 김승태 이한조 최석규 이철호 김성우 정진웅 김진호 배성렬 배진덕 서해택 서창교 남수환 이웅 양시복 이준서 박선희 정수인 김병준 김재호 김명식 심현욱 전보성 조찬영 손창완 김지웅 이준택 정진 원대희 정재훈 박봉희 최승재 윤석주 정원 이민석 서성호 김춘수 한상철 이준철 한성수 이영삼 하재홍 이상현 채승우 민성철 정주백 마은혁 김영생 김형석 홍현필 노만석 김두헌 성낙일 채승원 임대진 소윤수 전병찬 박종운 손헌태 최석진 정성호 정경록 김영수 김영현 노진영 최성만 김형선 한기봉 임성환 정철(0138410) 유주상 이헌영 박종림 염우영 이준희 최성완 신승호 김영준 정철(0138426) 홍승현 채승준 문정환 김성진 정연헌 신길호 조형수 전승만 이철기 민기영 이민호 김상훈 형진휘 박재억 김종환 김봉원 구광현 박상진 윤태영 송선양 김문주 최재형 구상엽 김도현 임성훈 문준섭 위인규 김성문 이영철 방이엽 배창대 김경훈 유형영 기세운 심학진 이준식 오수환 박윤석 신병동 김현순 이재호 조재빈 김정호 최호영 전국진 이남석 김종근 유길룡 강우찬 구자현 김성환 김동빈 김정민 정문수 이경수 신봉수 강지현 손영호 유지원 소홍철 조중래 하성원 황혁 정경인 강창문 김기수 서경배 이원근 이창열 이진수 이상호 유창훈 박창주 이문성 강유호 박영준 안형준 권성수 윤영석 박대규 강창균 문성관 한창수 우관제 박상현 양석조 임영민 이종건 김성우 전종만 조명수 이상민 유지열 강문대 김정헌 배성효 김진욱 강현중 우인성 민철기 송강 김형배 정승식 김명환 이준엽 윤대해 신우정 김형준 김웅렬 노로 서기호 정영훈 조재호 전준용 조영호 정재욱 이종석 이남균 김영수 손호관 이종민 이경훈 김현철 안효정 최재원 이영광 도상범 이재성 최성도 강태환 우관수 양인철 김준배 김용빈 이상준 김봉규 정승규 박광배 김선재 최기엽 조면식 이병철 이종경 김동원 이재은 정진환 이종훈 백철우 한두희 오현철 김우정 최기영 주진암 김경민 정진형 송우룡 양승종 김효권 장창호 오대혁 윤정섭 최용규 장선 김양수 김형연 김준효 조영보 여운철 한범석 이상오 김형근 장훈열 이명재 마성영 최일권 이상준 송경호 이동건 이성훈 김웅 윤상호 김길수 이남권 허상수 김규일 장언석 유헌주 이승철 옥성대 전문우 송우섭 신현성 이수광 고창은 김택균 박억수 유경문 이은태 반성관 안종석 이경창 박형삼 송영환 최찬실 차경남 오종근 정호경 문흥만 채윤주 최주현 박길배 허일승 서재국 김권영 이정환 최상묵 김준성 김동규 박관수 이경천 조정웅 전영준 김범희 김기태 주용완 정재헌 박승규 신영식 김동욱 조현주 이영준 김승훈 박상국 박성문 이현곤 안관주 이석화 홍진표 신현일 이정훈 안영수 조경헌 윤희찬 성기권 김성원 김진한 김선일 권경일 이공재 황중연 서기원 신용호 박의호 윤복남 여영학 변필건 노승익 홍원의 김복기 엄상섭 황선철 박재호 이현용 이명상 김병주 조민제 조길원 김의식 위광하 양원석 김재훈 안종화 한석종 백종인 김판봉 민기호 나승권 김호춘 조성래 문종렬 배재일 김동오 김성률 신광식 조현호 박기준 이진효 이윤호 채시호 박운삼 김영준 박찬호곽용석 이강민 권성연 임지아 신한미 차진아 이지원 송현경 임정하 박순덕 김현아 김영심 이정민 임성희 김정민 정소민 설윤정 최은주 이영경 문경화 김태진 신교임 정옥자 백혜련 이영희 이진화 박은정 김선주 이미현 임선지 김윤영 문선영 장윤정 노행남 황은경 조영숙 김지연 송혜정 남해숙 김현정 이주영 이언주 박지영 박민정 홍종희 조혜정 신진화 윤은경 박선영 왕미양 공숙영 ◎수석합격 이시열씨/‘합금의 전자구조’ 연구한 물리학 석사/“재정·통상분야 국제변호사 되고파” “외국의 통상 압력에 맞서는 국제변호사로 국익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제39회 사법시험에서 평균 64.07점으로 수석을 차지한 이시열씨(29·서울 종로구 동숭동)는 이례적으로 이학도 출신이다. 91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93년 합금의 전자구조를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신병으로 1년반 가량 요양을 했던 이씨는 사법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95년 3월 서울대 법대로 학사 편입했다.현실사회의 전면에나서고 싶은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학문의 세계에서 안주하기 보다는 사회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어려서는 공부가 재미 있어 공부밖에 몰랐지만 점차 사회의 움직임에 눈을 뜨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가뜩이나 국가 우수인력이 고시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변신이 기초과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의 마음을 흔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고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비법대 출신 후배들에게는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좋겠지만 일단 전환을 생각했다면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공과 사법시험이 학문적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익혀둔 논리전개와 사고력이 시험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95년 1차시험에 실패한 뒤 이듬해인 96년 재도전,1차에 합격하고 올해 수석의 영광을 안았다. 앞으로 로펌(Law Firm)에 들어가 증권·금융 분야의 국제변호사로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이를 위해 사법연수원을 마친뒤 미국의 법대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이씨는 “우리나라에 경제 전문법률가들이 부족해 최근 IMF 협상이나 통상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통상산업부나 기업의 재정·통상 분야의 자문을 맡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연소 합격 위인규씨/초등교부터 수석 안놓쳐/“전문분야 법조인 될터” “공부하는 동안 건강 때문에 힘들었지만 고생하신 부모님께 합격의 기쁨을 안겨드려 기쁩니다” 최연소 합격의 영예를 차지한 위인규씨(21·서울대 사법학과 4년)는 “앞으로 전문분야를 가진 법조인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전남 여천 율촌 산수초등학교와 율촌중 순천고를 다니는 동안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이다.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후 3학년 2학기때인 지난해 9월부터 사시 공부를 시작,하루 10시간 이상씩 학교도서관에서 공부했다.농사를 짓는 아버지 위계춘씨(66)와 어머니 한기남씨(60)의 1남 4녀중 막내다. ◎최고령 합격 백종인씨/“고생한 아내에 보답” 눈시울 붉혀 최고령으로 합격한 백종인씨(45)의 성남시 중원구 금광2동 2평짜리 지하방은 모처럼 웃음꽃이 활짝 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백씨는 “45살의 나이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며 “모두 어렵게 공부했겠지만 아내에게 그동안 고생의 대가를 조금이라도 건네줄 수 있어 다행”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지난 85년 단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3년을 근무하다 사시에 뛰어들어 8전9기만에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고시원 비용마련을 위해 막노동에서부터 학원강사,대학정문 경비까지 했다.부인 이점숙씨(42)는 “지하 월세방에 살면서 비가 와 방안으로 물이 스며들 땐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합격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며 아들 수현군(2)과 딸 수진양(4)의 손을 꼭 잡았다. ◎이색 합격자 오기형씨/면접하루전 임용자격 회복 ‘행운’ 지난해 사법고시 2차시험에 합격했으나 시위 전력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멍에 때문에 3차 면접에서 탈락했던 오기형씨(31)가 17일제 39회 사법고시 최종 합격의 영예를안았다. 3차 면접 하루 전인 지난 11일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는 자격을 회복,‘하루 차의 행운’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공무원법은 ‘집행유예기간이 끝난뒤 2년이 지나지 않은 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8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오씨는 92년 12월12일 ‘서울대 활동가 조직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세무공무원 김영생씨 현직 세무공무원이 국세청 사상 처음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화제다. 국세청 납세지도과 김영생 사무관(34)은 84년 행정고시 28회에 합격한 뒤 13년만에 사시까지 합격했다.김사무관은 “”소송업무 및 부가가치세 예규 등을 담당하면서 조세제도 체계화의 필요성을 느껴 사시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김사무관은 “2년간 시험 준비를 해왔으며 퇴근후 집에서 5시간 가량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고 밝혔다.낮엔 본연의 직무를 다하고 밤에 시험공부를 하느라 남들보다 더 건강에 신경서야 했던점이 어려웠다고 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사무관은 행시합격후 서울지방국세청 송무4계장,영등포세무서 부가가치세 2과장,대방세무서 법인세과장을 지냈다.
  • ‘차기’ 추천할 로마교황청대사 최근 부임

    ◎서울대교구장 후보 3∼4명 압축/장익 주교·이문희 대주교 유력… 강우일 주교도 거론 지난 5월 교황청에 사퇴서를 제출해놓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후임인선이 본격화하고 있다.그동안 공석중이던 주한로마교황청 대사에 지오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 이탈리아 대주교(61)가 지난 12일 서울에 부임함에 따라 후임 추천권을 갖고있는 모란디니 대사가 과연 누구를 서울대교구장에 추천할 것인가에 교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교계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압축되고 있는 후보는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대주교 등 두 사람.다음으로는 김수환 추기경의 신임을 받고있는 서울대교구 강우일 주교와 주교회의 의장인 정진석 주교도 거론되고 있다. 올해 63세의 장익 주교는 고 장면 전 총리의 아들로 바티칸의 그레고리안대학 출신이며 로마교황청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 교황청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올해 62세의 이문희 대주교는 고 이효상 국회의장의 아들이며 프랑스대학 출신으로 국내에서 서울대교구 다음으로 큰 대구교구장이라는 장점이 있다. 올해 52세의 강우일 주교는 민주당때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고 오위영씨의 외손자로 일본 상지대학 출신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어 유망한 후보로 꼽혔다.그러나 강주교는 교구장 경험이 없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주교회의 의장인 정진석 주교는 66세의 고령인데다 대외 활동이 적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최창무·김옥균 주교가 있으나 이들은 교구장 승계권이 없는 주교일 뿐 승계권이 있는 대리주교가 아니어서 후보추천 대상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따라서 김추기경이 마산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서임됐던 것처럼 서울대교구밖에서 후보자가 나올 가능성이 많다. 교회법 제377조는 “교구장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해당국 주재 교황청대사가 해당교구와 주교회의 의견을 수렴해 후보 3명을 교황청에 추천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따라서 모란디니 대사가 추천한 3명의 후보자를 놓고 교황이 낙점하면 새 교구장이 탄생된다.이 과정은 교황을 선출하는 것 만큼이나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로마교황청대사 이외에 그 누구도 사전에 알수가 없다.이와 관련,모란디니 대사가 국내 교계의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걸려 올해 안에는 추천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로마교황청 대사의 추천에 따라 교황이 서울대교구장을 임명하면 새로운 대교구장은 서울대교구의 위상에 맞는 추기경으로 승격될 것으로 보이며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2명의 추기경이 탄생하게 된다. 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신보다 2살이 적은 김추기경의 사퇴서를 수리하지 않고 2∼3년동안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아 김추기경이 교구장을 계속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올해로 사제서품 45년째인 김추기경은 지난 68년 서울 대교구장에 임명된 뒤 29년간 교구장을 맡고 있으며 75년 평양교구장 서리로도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다. 후임 서울대교구장이 임명되어 김추기경이 은퇴한다 해도 김추기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가톨릭교회나 사회의 원로로 변함없이 존경받는 대상으로 남는다.
  • 광주대교구·전주교구/60주년 행사 풍성

    ◎신앙대회·성극공연 등 기념축제/40돌 맞은 부산교구도 행사 다채 천주교 광주대교구(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와 전주교구(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올해로 교구설정 6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경축행사를 마련했다.올해 교구설정 40주년을 맞는 부산교구(교구장 이갑수 주교)와 내년에 40주년이 되는 청주교구(교구장 정진석 주교)도 신앙대회와 북방선교 청소년선도 학교개교 등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 교구는 2000년 대희년을 3년 앞두고 맞는 교구설정 행사를 대대적으로 마련,그 의미를 새롭게 새길 예정이다. 광주대교구는 광주에서 기념심포지움을 여는 한편 10월 12일 목포 유달경기장에서 전 교구신자가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 기념축제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광주대교구가 목포 행사에 특별히 비중을 두는 이유는 올해가 목포지역 선교 1백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광주대교구는 이를 위해 목포 신정동성당에 목포선교 1백주년 기념관과 레지오 마리에(마리아의 군대) 전시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전주교구는 ‘새로 나자’를 주제로 오는 28일 교구신앙대회를 갖는 한편 20일 군산 시민문화회관,21일 익산 솜리문예회관,25∼27일 전주 삼성문예회관에서 전주 가톨릭예술단의 성극 ‘님이시여,사랑이시여’를 공연한다.기념행사를 위해 준비위원회 구성을 마친 전주교구는 성지순례와 성서통독,성체성사 등의 실천사항을 모든 신자들에게 제시했다. 부산교구는 10월 12일 사직체육관 야구장 및 실내체육관에서 미사와 체육대회,청년예술제·성가대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1784년 전래된 한국천주교는 1831년 서울대교구의 전신인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래 대구대교구(1911년)·원산대교구(1920년) 등이 설정됐으며 현재 북한에 있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를 포함,모두 17개의 교구를 갖고 있다.
  • 수도관 점검 인부 2명 맨홀 들어갔다 질식사

    30일 하오 5시쯤 서울 노원구 상계6동 상계 주공아파트앞 도로에서 상수도관 부식을 점검하기 위해 지하 맨홀로 들어간 삼공사 작업원 정석호씨(35·서울 강서구 화곡동)와 유용씨(27)가 차례로 쓰러져 숨졌다. 이들과 함께 작업을 한 정진석씨(26·경기 광명시 광명6동)는 “앞서가던 정씨와 유씨가 맨홀 뚜껑을 열고 4m 지하로 들어간 뒤 갑자기 쓰러졌다”고 말했다. 경찰은 맨홀안에 가득차있던 가스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고 가스의 종류와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 인간복제 실험금지 입법청원/천주교 주교회의 “인간존엄성 훼손”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정진석 주교)는 최근 세계적 논란을 빚고 있는 동물생명 복제와 관련,7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인간복제 관련 실험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우편으로 발송했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이 청원서에서 『생명복제는 윤리도덕의 기반이 되는 인간생명과 인격의 존엄성에 정면으로 배치될뿐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해 여러 악폐를 몰고 올 것』이라고 우려한 뒤 『우리나라의 생명공학 수준에 비추어 인간복제관련 실험금지법의 필요성이 절박하다』고 말했다. ◎환경·종교단체 반대집회 녹색연합·불교환경교육원·교회환경연구소·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YMCA·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등 환경 및 종교단체들은 7일 서울 광화문에서 집회를 갖고 인간의 유전자 복제 움직임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 어려운 가톨릭용어 쉽게 바꾼다

    ◎로사리오→묵주,본명→세례명,세족례→발씻김예식,진복팔단→행복선언 가톨릭교회에서 사용중인 용어가운데 「로사리오」 「본명」 「세족례」 「진복팔단」 등 어려운 용어가 「묵주」 「세례명」 「발씻김예식」 「행복선언」 등 쉬운 우리말로 바뀐다. 한국가톨릭의 교회용어가 가톨릭 전래당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어려운 한자어와 라틴어 직·번역의 낯선 외래어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 2년간 한글화 개정작업을 벌여온 천주교주교회의(의장 정진석 주교)는 최근 정기회의를 열고 이같은 내용의 「교회용어 개정안」을 최종 승인했다. 이번에 확정된 교회용어개정안은 일반용어 89개,전례복과 성당기물에 관한 용어 49개,미사통상문 변경용어 1백67개 등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 305개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거나 하나로 통일시켰다. 개정된 내용에 따르면 가톨릭과 개신교를 지칭하는 「구교」와 「신교」 그리고 「기독교」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이를 하나로 묶어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로 통일했다. 또 「산상수훈」은 「산상설교」,「축성생활」은 「봉헌생활」로 바뀌었으며 「말세」와 「세말」은 「종말」,「육화」는 「강생」으로 「교오·간린·미색·탐도·해태」는 「교만·인색·음욕·탐욕·나태」,「염경기도·묵상기도」는 「소리기도,마음기도」로 개정됐다. 또 「입교식」은 「예비신자 환영식」으로 변경됐고,「적 그리스도」 「가 그리스도」 「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적」이나 「거짓 그리스도」로 알기 쉽게 부르게 됐다. 〈미사통상문〉중에서는 「복사」는 「봉사자」로,「성신」은 「성령」으로 바뀌고 「주의 성체와 성혈」은 「주님의 몸과 피」,「영하다·배령하다」는 「모시다·받아 모시다」,「응송」은 「화답송」으로,「고성소」는 「저승」으로 바뀌었다.또 「백성」은 현대어에 맞게 「겨레」로 개정됐으며 「간구」「공번되다」 등도 쉬운 말인 「기도」「보편되다」 로 변경됐다.
  • 국회추천 방송위원 3명 임명

    방송위원회(위원장 김창열) 입법부 추천위원 3명이 11일 새로 임명,현행 방송법상 방송위원회구성이 완료됐다. 이날 새 방송위원으로 임명된 인사는 정진석 한국외국어대교수와 조강환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경숙 숙명여대총장 등 3명이다.
  • 여야,방송위원 3명 추천

    여야는 22일 방송위원회 위원중 국회가 추천토록 되어 있는 3명에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신방과 교수(이상 신한국당),조강환 전 동아일보논설위원(야당)을 각각 추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수한 국회의장으로부터 정식추천을 받아 이들을 신임 방송위원에 임명한다.
  • 언론 2세기 언론인의 자세/정진석 한국외대 교수(기고)

    ◎“국민신뢰 받으려면 자정 노력을”/서울신문 “정부­국민의 가교” 독립신문 정신 계승 한국의 언론은 불행한 시기에 출발하였다.그러나 훌륭한 선각자의 정신을 유산으로 이어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하다.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은 국민이 위기감에 떨던 무렵이었다.일본 암살객들이 한밤중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 직후였고,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긴 아관파천이 일어나던 무렵이었다. 개화의 선각자 서재필 선생이 미국 망명생활끝에 고국에 돌아와서 느낀 인상은 국민들의 절망감이었다.국민의 생활은 자신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보다 더 비참한 지경이었다.나라의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가르치는 일,그리고 정부와 국민간에 신뢰를 쌓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 서재필 선생의 결론이었다.이 두가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신문의 발행이었다. 독립신문은 이리하여 우리나라 첫 민간신문으로 탄생하였다.그러므로 서재필 선생은 신문의 상업적인 이익을 앞세우지 않았다.신문발행의 목적이 결코 취리하려는데 있지 않음을 명확히 밝혔다.불편부당,정부와 국민간의 가교,그리고 비판정신이 창간사를 통해서 천명한 신문발간의 목적이었다.세계 어느나라도 최초의 민간신문이 이와같이 시대적 사명을 명확히 밝히면서 출발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의 사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며 관리는 백성의 종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관존민비의 사상이 지배하던 전체군주 시대의 신문으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은 획기적인 문화혁명이었다.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서 자주·개화사상을 전파하여 국민의 자존심을 드높이고,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값을 헐하게 하여 독자의 부담을 줄이려 했던 경영방침도 신문발행의 목적이 개화와 자주,국민계몽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발상이었다. 서재필 선생은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을 함께 발행하여 우리의 사정을 국외에도 알리려 하였다.그는 1백년 전에 이미 신문의 세계화를 실천하였던 것이다.한마디로 그는 독립신문을 「조선 인민을 위한 신문」으로 규정하였다. 독립신문의 정신은 한국언론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1957년부터 언론계에서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여 자성의 하루로 삼기로 했던 것도 바로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언론인들의 뜻을 모은 것이었다.독립신문 시대에도 기사를 내어 달라고 신문사로 「촌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러나 서재필 선생은 그 돈을 받지 않았다.신문에 광고를 내기 위해서는 규정된 광고료를 받거니와 기사상관으로는 단 한푼도 받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는 돈을 넣어 기사를 청탁하지 말라고 준엄히 꾸짖으며 이를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에 실려있다. 언론계가 스스로 채택한 윤리강령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언론인들이 자정을 소리높여 외쳤고,언론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되풀이하기 몇 차례였던가,그런데도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오히려 높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오늘날의 언론인들에게 1백년 전의 독립신문 정신을 배울 것을 감히 권고해본다. 서울신문이 지향하고 있는 권위지,정부와 국민의 가교역할,그리고 상업주의 센세이셔널리즘의 탈피와 같은 시도는 바로 독립신문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의지로 평가하고 싶다.민간신문 창간 1백주년은 잔치의 행사가 아니라,새로운 탄생을 위한 아픈 고뇌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각자 서재필 선생의 가르침이 아닐까.
  • 특별정담 오늘의 서울신문을 말한다(서울신문 50돌 특집)

    ◎증면경쟁 탁류속 「소신의 질경쟁」 호감/정보 홍수시대의 「알짜정보지」로 “우뚝”/상업성­선정성 배격… 「건강한 신문」 특화/“연재소설 등 작가 창작정신 존중” 정평/1950년대부터 한글신문­가로짜기 실험 선도 서울신문은 창간 5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세계화를 선도하는 초일류 고급정론지로의 제2창간을 선언,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오직 독자를 주인으로 일체의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를 배격한채 언론의 정도를 걸어온 서울신문의 50년 역사는 그대로 현대사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시대의 영욕을 국민과 함께 나누며 성장해온 서울신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21세기에의 비전을 그려보기 위한 특별좌담회를 마련했다.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연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소설가 김주영씨가 자리를 같이 했다. ▲정진석 교수=서울신문은 구한말인 1904년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와 있던 영국인 베델이 만든 대한매일신보가 그 전신입니다.대한매일신보는 한글과 영문판으로 제작돼 당시 최대의 독자층을 향유한 대표적인항일민족지였고 일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지요.그러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총독부는 이 신문을 매입해 「대한」이라는 제호를 떼고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습니다.1910년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논조가 1백80도 달라졌지만 지령만큼은 계속 잇게 했습니다. 또 서울신문은 일제 전 기간동안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습니다.해방직후 명칭을 서울신문으로 변경했는데 정부·여당을 대변하는 쪽이었어요.물론 신문이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방적인 비판 또한 경계해야될 일이죠. ○항일민족지가 전신 ▲김주영씨=서울신문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시대를 앞서간 신문이었습니다.지난 54년부터 7개월여 연재된 정비석씨의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가 됐었지요.또 60년에는 현상공모 사상 처음으로 5백만환이라는 파격적 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해 문단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죠.저의 대표작 「객주」를 탄생케한 신문도 바로 서울신문입니다.79년 6월부터 84년 2월까지 1천4백65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당시 서울신문은 작가들의 창작정신을 최대한 존중해 「작품」이 잉태될 토양을 마련해주는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하나의 예로 저는 「객주」를 쓰면서 『신문사쪽에서 언제쯤 주문이나 간섭을 해올까』했지만 5년동안 단 한번도 클레임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경영진의 판단보다 담당 데스크의 재량에 맡기는 문화풍토였죠.독자의 말초적 구미에 맞춰 일회용 흥미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회 간섭을 일삼았던 타 신문에 비해 서울신문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곳이란 인식이 우리 작가들에겐 강했습니다.이는 여타 상업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서울신문만의 독보적인 영역이었다고 봅니다. ▲이연숙 회장=우리 여성단체협의회의 경우 넉넉치않은 재정형편에도 불구,지금까지 서울신문을 한번도 끊지않고 구독해오고 있습니다.소비자문제나 여성문제를 일관성 있고 성의있게 다루어주는 신문이기 때문이죠. ○서울만의 독보영역 ▲정교수=서울신문은 56년부터 4·19때까지 한글판 신문을 따로 낸 적이 있습니다.68년엔 한글전용으로 하고 글씨체와 편집방법에도 변화를 주는 등 선도적인 신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최근 한글전용이나 가로짜기를 시도하고 있는 신문들의 실험적 모델이었던 셈이죠. ▲이회장=저도 어릴때 서울신문이 한글신문이어서 굉장히 친근감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또 미국대사관에 근무할때 보니까 외국인들이 서울신문으로 우리말을 공부하기도 하더군요. ▲김씨=잃어버린 우리말 찾기운동을 지면을 통해 벌이기도 했습니다.지금도 박갑천씨의 컬럼은 시사문제에 대한 안목을 넓혀줄뿐 아니라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한 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수=사실 서울신문은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인적 자원과 시설등의 면에서 가장 뛰어난 언론사였습니다.또 김진섭,김동리,장만영씨 등 유명문인들이 편집책임자로 있던 종합잡지「신천지」는 50년 「사상계」가 나올때까지 당시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교양지였지요.「자유부인」같은 연재소설로 문학계에 더할나위없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4·19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그동안 역사적 격랑에 따라 시련을 겪으며 때로 침체되기도 했지만요. ▲김씨=역사도 역사이지만 우리의 의식과 감정도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감염되어 있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요즘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신문들이 정부의 대변지 역할을 하는 측면이 더 강해요.서울신문은 오히려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은 산간벽지 등 어느 지역 가지않는 곳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지요.또 요즘 신문들 가운데 면수가 가장 적습니다.증면경쟁으로 페이지가 늘어난 신문들을 보면 광고일색이에요.정보홍수시대에 알짜배기 정보를 섭렵하는데 편한 신문이 바로 서울신문입니다. ▲정교수=손주환 서울신문 사장은 올해 제2창간을 선언하면서 『물량경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질적인 경쟁만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증면경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젊은 기자나 언론학교수가 아닌 신문사의 최고 책임자가 이같은 한국신문의 「반사회성」을 과감하게 지적한 것을 두고 학계에서는 커다란 화제가 됐습니다. ▲김씨=굳이 신문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최근 신문들의 증면경쟁과 부수경쟁에 따라 지국으로 배달되는 신문이 곧바로 폐기장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국내 용지값을 기준으로해 1년에 무려 1천1백억원 이상의 돈이 낭비되는 이같은 폐단에 모두 비분강개하고 있지만 우리 언론은 스스로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회장=그런 점에서 서울신문이 신문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희망입니다.민간단체들은 비판을 하려고 해도 언론의 막강한 힘앞에 지레 겁을 먹고 독자들에겐 조직된 힘이 없고하니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교수=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역사를 통해 민족사의 험난한 굽이마다 이정표 역할을 해온 서울신문이 문민시대를 맞아 무한 물량경쟁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김씨=잘 알다시피 다른 신문은 모두 상업지입니다.그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은 서울신문만이 가질 수 있는 크나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 한글 교과서 ▲이회장=저는 서울신문이 정부만 의식하지 말고 정부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을 보다 많이 생각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합니다.이제까지는 다분히 오해받을 만한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만큼 창간 50돌을 맞은 이 시점에서 대대적인 환골탈태의 노력은 한층 절실한 것이라고 봐요. ▲김씨=요즘 신문사간의 보도경쟁의식은 뉴스가치 여부를 떠나 거짓정보를 양산하는데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일례로 최근 미국흑인남성대회를 주도한 인물이 유태인과 한국사람은 돈만 아는 민족이라고 말한 것으로 우리 각 신문이 보도했는데 실제로는 미국에 이민온 모든 이민족들을 향해 한 소리였어요.정확한 사실확인없이 일단 신문을 팔고 보겠다는 상업지들의 선정적 보도태도가 낳은 해프닝이었죠.상업주의를 배제하는 서울신문만은 이같은 폐해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정보를 취사선택해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회장=신문들이 국민의 세계관을 오도하는 경우도 많아요.언론인이 올바른 시각과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교수=한국언론은 한미관계나 한일관계 특히 대일문제에 있어서는 이성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맹목적인 애국심에 호소하려는 성숙되지 못한 보도자세를 보이고 있어요.이 역시 국익과 공익을 앞서 생각하는 서울신문이 주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언론사간의 무분별한 보도경쟁에서 탈피,서울신문만이라도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할 것입니다. ▲김씨=요사이 신문은 여배우의 아슬아슬한 사진을 실어대는 등 선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흘러 「읽는 신문」이 아니라 「보는 신문」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볼때 서울신문은 어느 신문보다 「정독하는 신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예를 들어 「두만강 7백리」「압록강 2천리」같은 기획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특히 이 기사는 그동안 접했던 단편적인 주마간산식 리포트가 아니라 현지 연변 조선족 작가의 눈을 통해 그려진 한폭의 세밀화라고도 할 수 있어요.저는 스크랩까지 해가며 읽고 있습니다. ▲정교수=「보는 신문」의 역할은 TV로 족합니다.신문성이 강화되어야해요.언젠가부터 각 신문들이 해외토픽란을 통해 지나치게 노출된 여성의 사진을 크게 다룸으로써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데 서울신문은 그렇지 않더군요.특별히 재미있고 눈길을 끌진 않지만 비교적 건강한 신문으로 온 가족이 함께 돌려 볼 수 있는 신문이라는 느낌이에요. ○딱한 이웃에 애정을 ▲이회장=요즘 신문들은 하지말아야할 일들은 하고 정작 해야할 일은 하지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민간단체들이 주최하고 언론이 소개·지원해야 마땅할 행사를 신문사가 직접 나서서 벌이고 있어요.사세과시적 행사보다는 애정어린 보도정신이 중요합니다.AIDS문제나 가족파괴 등 절실한 현안을 유야무야 지나쳐선 안되죠.여성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언론이 좀더 충실히 보도해주었으면 합니다.서울신문은 반세기의 연륜이 있으니 타 신문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으리라 여겨져요. ▲정교수=그렇습니다.영국의 「더 타임스」가 보수 대변지이고 그 독자가 따로 있듯이 서울신문도 그 색깔을 살리면서 타 신문과의 차별화를 이루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이 위치한 프레스센터는 모든 다양한 여론이 모아지는 자리입니다.그같은 의견들을 걸러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합니다.특히 서울신문의 「입법예고」라든가 「법령공포」같은 란은 정부와 국민의 가교역할을 자임하는 서울신문만의 특화지면이라고 할만해요.좀 더 알기쉽고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가평 꽃동네 요양원·종합병원 준공

    가톨릭 종합사회복지 시설인 「가평 꽃동네」(회장 오웅진 신부)가 오는 5일 경기도에서 심신장애요양원과 종합병원 준공식을 갖는다. 이번 준공을 본 「노체 리안드리 자애병원」의 명칭은 「노체」는 이지역 마을 이름이며 「리안드리」는 진로그룹 창업과 발전에 공이 많은 프랑스인의 이름을 딴것으로 건축비 44억원 전액을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이 부담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가톨릭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와 주한교황대사 조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 전국자문위원 주교사제단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 본사 발행 국내 첫 시사지/「주간서울」 5부 발견

    ◎47∼50년 발행,12면 타블로이드판/외대 정진석 교수가 본사에 기증 서울신문사가 1949년 발행한 「주간서울」5부를 한국외국어대 정진석(56·신문방송학과교수)가 발견,이를 본사에 기증했다.서울신문 창간 50주년을 맞아 다시 햇볕을 본 이들 자료는 해방후 첫 본격적인 시사주간지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 뿐 아니라 당시 각 분야의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현대사료로도 평가된다.서울신문사가 47년 8월5일 창간한 「주간서울」은 50년 6월26일자(93호)까지 발행됐다.당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폭넓게 사랑을 받았던 격조높은 시사해설지였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동안 실물을 대할 수가 없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정교수가 내놓은 49년 10월17일자(57호),31일자(59호)11월7일자(60호),14일자(61호),21일자(62호) 등은 귀중한 언론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발행인은 본지 3대 사장 월탄 박종화,편집인은 김진섭(6·25때 납북된 수필가)씨로 돼 있는 「주간서울」은 타블로이드판으로 12면을 발행했다. 기사의 60%이상이 중국문제,유럽원조계획,동남아정세 등 세계뉴스를 다루어 제2차 대전후 재편되는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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