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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위직 승진 여성할당제를”/市道 여성담당국장 회의

    ◎기획·정책부서 적극 발탁/행자부 차관­“사회복지 공무원 일반직 전환 검토” 전국 16개 시 도의 여성정책 담당국장들이 16일 정부 세종로 청사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는 각 시 도의 ‘여성정책 총수’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자리였다.‘관직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국장에 오른 16명의 여성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간담회의 주제는 당연히 여성 공무원의 능력개발과 승진기회를 확대하는 문제였다.참석자들은 인사와 후생 복지,교육 연수 등 인사정책과 여성담당부서의 업무활성화 방안을 깊이있게 논의하고 개선책도 내놓았다. 부산시의 金恩淑 가정복지국장과 대구시 李敬順 사회복지여성국장은 “기획 및 정책결정 부서에도 여성공무원을 발탁해 여성공무원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인천시의 李英美 여성정책실장은 “여성 공무원 할당제를 채용 때만 국한시키지 말고 5급 이상 승진 때도 적용하는 여성승진 할당제 등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전시의 李文玉 가정복지국장은 별정직 공무원 정년은 일반직에 준한다는 규정이 있는 만큼 별정직 여성공무원에게도 명예퇴직 제도를 실시해 줄 것을 촉구했다. 회의를 주재한 石泳哲 행정자치부 차관은 “별정직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을 일반직으로 바꾸는 문제 등 오늘 건의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겠다”면서 “과거와 달리 중앙정부가 민선단체장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권고하는 실정인 만큼 여러분들도 시 도 지사에게 적극적인 건의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 白凡 재조명:3­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일지/진솔한 필법… 自傳문학의 古典/벽촌 출생서 임시정부 주적까지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20여종 출간 상당수가 오류/97년 都珍淳 교수 定本 출간 백범일지는 金九 선생의 자서전이다.그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이다.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그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백범일지를 썼다고 밝혔다.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오른 민족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다.백범일지는 여러 단체·기관에서 추천 도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상권은 1928년 2월과 3월 사이에 집필을 시작,다음해 5월3일에 마쳤다.하권은 1942년에 탈고했다.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는 백범의 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백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다. 백범일지는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발간된 이후 20종 이상이 출판됐다.그중 상당수가 오류와 탈락으로 원본이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그러한 오류를 수정하고 누락된 부분을 보완한 백범일지가 첫 출간 50주년이던 1997년에 출간됐다.숙명여대 李萬烈 교수,창원대 都珍淳 교수 등의 ‘백범일지’다.都교수는 백범의 친필본(94년 집문당에서 영인),백범 아들인 金信 장군이 갖고 있는 필사본,백범의 측근이던 엄항섭씨가 만든 등사본,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씨의 필사본,국사원본,서문당본 등 중요한 출간본들을 비교·검토하여 백범일지 정본(定本)을 4년간의 작업 끝에 출간했다. 都교수는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집필했기 때문에 원전의 서술에서도 시기·인명·지명 등에 착오가 많다고 설명했다.그는 원문에 있는 오류를 각종 사료를 통해 보완했으며 난해한 문장은 읽기 쉽게 풀어썼다. 백범일지는 중국어와 일본어 판으로도 출판됐다.대만에서는 70년에 출판된 이후 20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에서도 94년 4,000부가 발행되어 매진됐다.중국은 곧 백범일지를 추가 발행할 예정이다.일본어백범일지는 73년에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다.미국에서도 영어판 백범일지가 올해 발행될 예정이다. ◎어린이 백범교실/청소년 민족캠프/조국 사랑 심는다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은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했다.그는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의 교육을 강조했다.그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식 조국사랑 등을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건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있다.‘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과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다. ‘청년백범 교사모임(대표 안성균 대광중학 선생님)’은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후원을 받아 1992년 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을 열었다.매년 여름·겨울방학에 한차례씩 지금까지 12회 교육을 실시했다.교육기간은 3일이며 한번에 초등학생 40명이 참여했다. 교육은 효창공원 옆에 있는 백범기념협회 강당에서 주로 실시돼 왔다.프로그램은 金九 선생에 관한 슬라이드 상연과 강연,효창공원 선열묘소 참배,독립군가 배우기,전통예절 배우기,심성훈련 등 다양하다. 청년백범 교사모임은 96년 여름방학 때부터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도 마련했다.교실을 떠나 자연속에서 백범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교육 내용은 백범교실과 비슷하지만 보다 다양하다.40명의 초등학생이 참가한다.첫번째는 속리산 보람원에서 두번째는 97년에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에서 열렸다.올 여름방학에도 7월27일부터 29일까지 베어스타운에서 캠프가 열린다.참가자격은 초등학교 4학년∼6학년 학생이며 선착순 마감이다.백범기념협회의 홍소연 총무주임은 “어린이들의 반응이 좋아 공고가 나가면 보통 하루만에 마감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앞으로 중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안성균 교사모임 대표는 “金九 선생의 생애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조국사랑과 통일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그밖에 우리 문화,전통예절,공동체 생활 등 교육은 민족문화에 눈을 뜨고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석규관 선생·곽태영 의장/‘백범일지’ 30년간 무료 보급/사재 털어 구입… ‘1가정 1권’될때까지 석규관선생(63)에게 백범일지는 ‘바이블’이다.그는 백범일지를 경전이라 부른다.중국어를 가르치는 그의 가방엔 중국어책과 함께 백범일지가 언제나 들어 있다.백범일지를 나누어주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생활의 한 부분이다.그와 함께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다.곽태영(63) 4·19혁명회 공동의장이다.그는 65년 안두희를 비수로 찌른 사람이다.백범기념사업협회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그들은 68년 ‘백범독서회’를 만든 후 30년 이상 백범일지 무료보급운동을 하고 있다.백범독서회 회장은 곽태영 선생이 맡고 석규관 선생은 운영위원장이다.김용삼·김삼열씨 등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그들은 사재를 털어 학교 도서관이나 개인들에게 백범일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곽태영 선생은 70년대 백범일지 7,000부를 사재로 구입,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석규관 선생은 오랫동안 자신의 월급에서 반을 떼어내 백범일지를 구입한 후 나누어주었다.그는 80년대 초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등에게 거의매달 2,000여부를 나누어주었다.79년부터 83년까지 대만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학원과 대학 등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백범사상도 함께 가르쳤다.백범독서회 사람들은 6월26일 백범서거 49주년 행사에서 3,000부를 나누어줄 예정이다.지금까지 나누어준 백범일지는 5만부가 넘는다.그들은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도 훈련소에서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그들의 더 큰 소망은 ‘1 가정 1 백범일지’의 꿈을 하루 빨리 실현하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 李昌淳·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白凡 재조명:3­1(정직한 역사 되찾기)

    ◎통일사상의 정수/“自主없는 통일 허구” 날로 새로워/列强 간섭 배제하고 ‘민족의 힘으로’ 역설/지역·이념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 일깨워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다.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시대의 흐름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의 벽은 넘지 못했다.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가는 일은 이 시대 우리들의 소명이다.그 일의 출발점을 金九 선생의 민족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론에서 찾으면 어떨까. 백범이 추구한 이상의 완결편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그는 생의 마지막 부분을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1948년 2월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백범은 냉전이라는 불리한 국제정세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구성하려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했다.북측에 의해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그러나 남북협상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민족의 자주적 힘에 의한 평화통일 노력 그 자체도 중요했다.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 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역사다. 백범은 한반도가 분단의 위기에 빠지자 정치·이념적인 반대세력과도 손을 잡았다.그의 통일노력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백범은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화됐다.한반도에는 이념적 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쪽에는 정치·지역감정에 의한 또 하나의 분단이 있다.그 ‘마음의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다시 확인됐다. 지역감정·혈연·이념 등에 의한 분열은 민족의 화합으로 바뀌어야 한다.백범의 애국적 민족사랑은 좋은 전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념과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백범의 민족사랑 정신은 세속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오늘의 유효한 통일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통일은 물론 우리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변수다.강대국들은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노력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백범의 자주적 통일론이 오늘의 통일정책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러한 변화를 남북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박제’됐던 백범의 민족화해와 통일론에 생명을 불어넣어현재화해야 하지 않을까. 백범은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걸어간 자국은) 遂作後人程(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휘호로 즐겨 썼다.그가 넘었던 38선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다시 넘는다.반세기만에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그의 더 큰 소망인 민족의 화해와 통일도 가까워질 것이다. ◎DJ와의 인연/상대후보 백범암살 배후 드러나 3選 의원에/효창공원 골프연습장 공사 중단시켜 “報恩”/기념사업회 이사… 동상 건립 적극 재정 지원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민족의 큰 지도자 백범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金대통령은 20대 초반이었다.그러나 두사람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그들의 인연은 60년대 중반 金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존경하던 백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며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67년 7대 총선에서 힘겨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朴正熙 정권은 야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당시 金大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집권당인 공화당의 물량공세로 金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목포는 흥청거렸다. 집권당의 전략적인 집중 공세로 金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상대방 후보였던 김병삼(당시헌병 대위)씨가 백범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측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金洙振(66·현재 국민회의 당총재 특보)씨는 선거 열흘전쯤 김병삼씨 관련 내용을 담은 책을 준비했던 金龍熙(77)씨를 찾아가 金大中 후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상대방 후보가 김병삼이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기로 했다.金씨는 李承晩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를 잡아 검찰에 넘긴 사람이다.그는 안두희의 고백과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병삼씨의 관련 내용을 담은 ‘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을 준비했다. 金大中 후보 진영은 절판됐던 이책을 비밀리에 다시 제작했다.투표 나흘전인 6월4일 목포역에 1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박순천 초대 신민당당수는 “공화당후보 김병삼씨는 백범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입니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폭로했다.‘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 3만5,000부가 즉석에 배포됐다.선거분위기는 급변했다.6월8일 투표결과 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金大中 대통령은 백범 추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그때의 간접적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백범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67년 서울시가 효창공원내 백범묘소와 3의사(義士) 묘소중간에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했었다.국회건설위 소속이었던 그는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는 백범기념사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매년 백범 추모제에 참석해 왔다.남산에 백범동상을 세울 때도 자금지원을 했다. ◎초라한 ‘묘역 성역화’/담장교체·소나무 식재 기념관 건립 예산 부족/구청 녹지과 관리맡아 “국가관리 필요” 여론 金九 선생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다.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 선생의 묘도 함께 있다.많은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였던 백범을 비롯 7명의 애국지사가 안장돼 있는 선열들의 묘를 국립묘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금 효창공원의 장·단기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단기계획(97년∼99년)에 따라 담장 교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용산구청의 유동렬씨는 1,326m에 이르는 담장공사는 연말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나무 600그루도 새로 심었다.호국이념을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높이 11.7m 폭3m)도 공원입구에 세울 예정이다.장기계획은 7명의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다.하지만 예산이 문제라고 유씨는 말한다. 성역화 작업이 진행중인 효창공원은 그러나 국립 현충원(국립묘지)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하다.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하지만 효창공원은 용산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관리한다.기능·고용직 공무원 7명이 관리인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金九 선생이 귀국후 45년 12월부터 49년 6월 암살당할 때까지 3년6개월간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세계화시대의 백범/都珍淳 창원대교수·한국현대사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엄항섭은 그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자신의 모습을 도장처럼 박아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표현하였다.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길 민족주의자 백범의 월인천강은 남아 있는가. ○개방과 주체 선택 강요 한반도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에 휩싸여 있어 선진 문물의 수입 등에서 적지 않은 장점도 있지만,사대와 식민 그리고 분단의 역사가 증거하듯 늘 강한 원심력이 작용하였다.따라서 한반도의 ‘역사적 화두’는 늘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어느 하나로 편향되는 경향을 띄었고,그 극단에 민족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개방과 선진만 쫓아가면 사대·식민·분열의 굴레로,주체와 자주만 강조하면 후진과 망국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지난해 말 나라가 환란(換亂)위기에 빠진 이후,이제 우리는 진정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른다.삼척동자도 IMF을 운위하고,뉴스는 언제나뉴욕 월가(Wall Street)의 동향을 전하며,국내 증시 또한 이에 따라 춤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현실에 굳건히 뿌리 내린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때문에 작금의 현실은 백범이나 민족주의를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과거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현재적 생명력으로 되살려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남북의 화합과 통일이라고,누구나 이야기한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습적·수식적 문구(文句)에 지나지 않고 생활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 위해 최근 외국의 한반도 문제 권위자나 기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느니,‘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유엔 관리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느니,‘남·북한이 민주적 분단관리체제로 영연방과 같은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 필요하다’는 등의 언급은 다름아닌 ‘분단체제에 대한 균형적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근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발언’이 아니라,역사와 구조를 지닌 ‘전략적 개념’들이다.북한이 강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통일하려 했던 한국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소련·동구권의 붕괴 이후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도 북한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력하고 일방적인 통일 한반도의 출현을 열강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분명 ‘냉전적 대립’에서 ‘평화적 교류’로 나아가고 있지만,그것이 통일의 기초가 될지 분단의 장기 지속을 초래할 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두번 깨어나야 한다.먼저 남북 사이에 누가누구를 삼킬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다음에는 평화를 넘어 통일에 이르는 길은 자주적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강대국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보장이다. ○강대국 역할 제한적 해방 직후 백범도 좌우·남북의 체제 대립적 정치구도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민족 분단의 위기가 박두하는 것을 목도하면서,그는 좌우·남북 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민족을 위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것이야 말로 백범이 남긴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그의 죽음도,그리하여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 白凡 재조명:2­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 사상/“민족만이 영원할 뿐”/열린 민족주의 바탕 인류의 평화 역설/문화의 힘 드높은 ‘아름다운 나라’ 소망 백범이 바라는 한국의 미래는 아름다운 문화국가였다.그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높은 문화의 힘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힘과 가치를 강조했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사랑의 문화평화의 문화로 우리와 인류전체를 잘 살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범사상은 이러한 문화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백범연구가들은 분석한다.그의 사상은 ‘백범일지’ 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 잘 나타나 있다.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을 두루 포용했다.그의 종교·사상은 민족애로 수렴됐다.백범일지에서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민족만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백범은 독립운동과 해방후 민족통일 노력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민족주의는 저항 민족주의였다.그러나 저항 민족주의는 식민통치라는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민족과 민족관계,국가와 국가관계는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족주의의 최대 과업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다.피압박 국가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세계평화의 기본적인 전제다”라고 말했다.백범의 민족주의는 이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르다.자유의 존중과 독재의 배격을 강력히 내세운 민주적 성격을 담고 있다.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열린 민족주의다.백범의 민족주의를 종족관념 또는 저항 민족주의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백범 민족주의의 원류는 열린 민족주의다. 백범은 보편성을 갖는 민족주의와 함께 자유의 소중함을 강조했다.그는 백범일지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다”라고 표현했다.백범이 말하는 자유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야 한다’는 주권재민 사상과 연계된다.“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렸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온다”고 백범일지는 강조하고 있다.자유 아님의 대표적 예는 계급독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로 보았다.소련식 공산당을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는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독재를 막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범의 민족주의·자유주의·문화주의는 각각 별개의 사상이 아니다.큰 틀속에 하나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백범 사상의 이상은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화의 힘을 통한 인류의 평화라 할 수 있다.그 이상을 실현하는 열쇠는 자유의 보장이다. 세계는 그의 이상대로 문화의 힘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백범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中國 피난처·臨政청사 복원 金九 선생이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있던 중국의 자싱(嘉興)은 우리에겐 잊혀진 도시였다.그가 일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듯이 자싱은 우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망각의 도시가 아니다.金九 선생이 숨어있던 집이 유적으로 복원되며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백범은 19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이후 일본경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상하이(上海)에서 서남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자싱으로 피해왔다.그는 자싱에서 추풍청(저보성)씨가 마련해준 집에서 은신했다.그곳은 추씨의 수양아들 별채였다.백범은 일본 정탐꾼이 자싱까지 오자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했다. 중국정부는 96년 백범이 약 2년간 숨어있던 두 곳을 복원해 유적지로 지정·관리하기 시작했다.자싱에 있는 백범 유적지는 메이완 거리에 있다.2층 건물 현관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한자로 쓴 녹색간판이 붙어 있다.백범이 당시 접견실로 썼던 1층 벽에는 백범과 그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추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2층에는 침대와 옷장 등이있다. 하이옌에 있는 피난처는 주쟈루이씨 집안의 별장이었다.주쟈루이씨는 백범을 하이옌으로 피신시킨 추씨의 장남 펑장(鳳章)의 부인이다.펑장씨는 자신의 부인을 백범의 부인으로 위장시켰다.대나무숲 속에 단장돼 있는 유적지에는 백범의 흉상과 함께 ‘김구 피난처’라는 한자 간판이 있다.전시실에는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추풍청,주쟈루이 등의 경력과 활약상을 담은 각종 사진과 자료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해외독립운동 구심점이었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도 93년 복원됐다.청사는 26년부터 7년동안 사용했던 3층 연립주택이다.삼성물산 등의 지원으로 61년만에 복원된 청사는 1층 회의실·접견실·부엌,2층 국무령 집무실과 직원사무실,3층 요인숙소 및 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실과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했던 책상·의자 등 집기와 비품이 갖춰져있다.3층 전시실엔는 尹奉吉 의사의 의거장면 등 독립운동관계 사료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는 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후 일제의 탄압과 추적공세가 강화되자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다 40년 충칭(重慶)에 정착했다.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충칭의 청사도 95년 복원됐다.중국은 백범이 경계한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민족사랑을 높이 평가,그의 발자취를 복원했다. ◎국민의 힘으로 기념관을/과거 집권층 왜곡­평가절하 탓/애국혼 깃들일 곳 없이 반세기/26일 종합계획 발표… 내년 기공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다.그러나 사후 반세기나 지났지만 그의 국내 발자취는 여전히 망각의 역사속에 묻혀 있다.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은 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기념관도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鮮于鎭 상무이사는 “기념관 건립과 발자취 복원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그의 위업을 왜곡하고 평가절하했던 집권층과 잘못된 사회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협회는 그러나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金泳三 전 대통령 집권때인 96년 8월14일에는 발기인대회도 열렸다.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金九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담당 비서관까지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기념사업협회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이후 기념관 건립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金대통령은 金九 선생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어 기념관 건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鮮于이사는 말했다. 그러나 건립기금과 장소선정 등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鮮于이사는 “국민성금과 정부지원으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러나 IMF시대의 경제난 때문에 성금 모금운동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그는 말했다. 장소도 문제다.金九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을 선정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고 기념사업협회측은 말한다.기념사업협회는 金九 선생 서거 49주년인 6월26일에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예정이며 서거 50주년인 내년에 기공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기념관은 총건평 1,200평의 지상 3층 건물로 구상되고 있다.1층은 유물 전시실,2층은 자료실·도서실·사무실,3층은 국제회의장·소회의실·영사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 건립은 金九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민족교육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실현돼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그들은 범국민운동을 펼치고 정부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金九 선생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재벌 자금운용 조사 철저히(사설)

    정부가 5대 재벌그룹 부실계열사를 퇴출시키기로 한데 이어 금융기관을 통한 이들 그룹의 자금조달 및 운용실태를 조사키로 한 것은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5일 ‘이제부터는 금융과 기업 구조조정 등 경제개혁을 연말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겠다’고 밝힌데이어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5대 재벌그룹 부실계열사 퇴출을 위한 전단계 조치를 실행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그룹들은 지금까지 우량계열사가 부실계열사에 대해 지급보증을 하거나 상품과 용역을 다른 협력업체보다 비싸게 사주는 등 부당내부거래를 통해 연명토록 함으로써 재벌계열사는 망하지 않는다(大馬不死)는 신조어가 생긴것이다.이러한 부당내부거래로 인해 그룹내 우량기업의 국제경쟁력마저 떨어지게 된 것이다. 5대 재벌그룹이 부당내부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매출액과 금융기관 차입금이 엄청난 데도 그룹계열사간 거래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결합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되지 않은데 있다.오는 99년말부터 이 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부당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5대 재벌그룹의 총매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고 이들 그룹의 금융기관 대출금은 전체 대출금의 1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특히 올들어 5월말까지 5대그룹이 발행한 회사채는 10조5500억원으로 전체발행액의 80%를 차지하고 있다.시중자금의 대부분을 5대 재벌그룹에서 독식함으로써 다른기업은 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고 이는 시중실세금리를 치켜 올리는데 한 몫을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5대 재벌그룹은 이같이 우량기업을 통해서 조달한 자금중 일부를 부실계열사에 지원,퇴출을 막아 줌으로써 최대 경제 현안인 기업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그러므로 정부는 5대 재벌그룹 부실계열사 정리가 곧 기업구조조정의 성패여부를 가름한다는 인식아래 이번 자금이동조사를 철처하게 실시할 것을 당부한다. 5대 재벌그룹계열사 가운데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 계열사를 상대로 집중적으로 자금조달 실태를조사한다면 조사의 정확성과 신속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또 이번 조사에서는 1차 부실판정직전인 지난 4월과 5월 은행들이 5대 재벌그룹 부실계열사에 대해 부당하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도 철저히 가려내어 적법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 문화부 조직개편 이후 3개월/208명 보직없이 불안한 나날

    ◎내년 3월까지 보직 못받으면 직권 면직/공보처·문제부 통합 때문… 묘안없어 고심 문화관광부가 대기자로 넘어온 전 문화체육부와 공보처 인력 처리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자체에서 처리할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보처가 문화관광부로 흡수되면서 발생한 초과인원은 294명.이 가운데 부처 자체가 없어진 공보처 인력이 166명이고 문체부의 기구 축소로 발생한 인원이 128명이다. 그러나 조직개편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초과 해소 인원은 공보처 출신 23명,문체부 출신 13명 등 36명에 불과하다.그것도 퇴직이 15명이고 타부서 전출은 고작 11명이다.따라서 아직도 보직을 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대기자는 기능직을 포함해 모두 208명이다. 현재 초과인원을 직급별로 보면 공보처의 경우 1급 1명,2급 7명,3급 6명,4급과 5급이 각각 21명과 13명이고 나머지 93명(기능직 48명 포함)은 5급 이하다.문체부는 2급 1명을 비롯,5급 이상이 28명(3급 4명,4급 6명)이고 5급 이하는 기능직을 포함해 87명이다. 이 대기자들은 갈 곳이 없어 문화부가임시로 마련한 몇몇 산하기관의 대기장소를 전전하고 있다.그러나 이렇다할 일거리가 없어 일부만 이곳을 찾는 실정이다.급여는 받고 있지만 장래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대기자들은 불안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1급과 별정직은 8월말까지 보직을 받지 못하면 직권 면직되며 2급 이하는 내년 3월31일까지 보직 발령을 받아야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수 있다. 그러나 문화부 관계자는 현재의 초과인원을 내년 3월31일까지 문화부 자체에서 완전히 해소하기 어렵다고 말한다.2급 이하 공무원의 승진 특채 등신규 충원 중단이나 직제증원이나 정년퇴직 등으로 생기는 자리만으로는 현재의 대기자들을 해소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부는 범정부 차원에서 잉여인력을 소화해주기를 바라고 있다.기구개편으로 발생한 문체부 인원이나 공보처에서 넘어온 잉여인력이 모두정부조직개편 과정에서 발생했으므로 문화부 홀로 뒷감당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행정자치부의 요청에 따라 최근 실업인구의 증가로 업무량이 폭증한 노동부 지방관서의 인력 충원을 위해 이달초 대기자 50명을 파견한 것.나머지 대다수 인원의 처리에는 여전히 묘안이 없다.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지방공무원 4만명 감축/2000년까지

    ◎전체의 12∼13%… 내년 2만명 ‘정리’/직권면직 허용·정년 1년 단축키로/무보직자 내년 6월·연말 순차 감원 정부는 6·4 지방선거가 끝남에 따라 29만여명에 이르는 지방공무원 가운데 13% 정도를 줄이는 등 지방행정조직 구조조정에 관한 기본 방안 마련에착수한 것으로 4일 알려졌다. 정부는 지방공무원 개혁이 지난 2월의 국가공무원 감축과 같은 수준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지방공무원도 직권면직할 수 있도록 지방공무원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정부는 개정 법안을 임시국회나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한 뒤 연말쯤 시행할 방침이다. 조직개편에 따라 잉여인력으로 구분될 무보직 별정직 지방공무원은 99년 6월까지,일반직 공무원은 99년 12월31일 또는 2000년 1월1일까지 유예기간을 두고 정리된다. 5급이상 지방공무원 정년은 99년 3월을 기준으로 61세에서 60세로,6급이하는 58세에서 57세로 낮추고 정년연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지방공무원법이 개정되면 2000년까지 3만7,000여명을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기본계획에 따라 내년에 약 2만여명의 지방공무원이 공직을 떠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상위직과 하위직의 감축이 균형을 이루도록 할 것”이라고 밝혀 중앙정부에 비해 상위직의 감축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의 경우 1만7,462명의 감축 인원 가운데 5급 이하가 1만7,201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정부구조개혁이 하위직에 편중됐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방은 특히 주민 수는 줄어들고 있는데도 공무원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지적을 받아왔기 때문에 지역복지센터로 전환될 읍·면·동 사무소의 공무원 감축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관계자는 “기능이 중복된 곳은 기구·인력을 줄여 복지 분야 같은 새로운 행정수요에 맞춰 재배치하고,환경위생·시설관리 업무는 민간에 경영을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 비리교원 4명 징계 회부/광주교육청

    【광주=金守煥 기자】 광주시교육청은 3일 전직 교육공무원인 鄭경범씨가 펴낸 교육계 비리 고발책자의 내용과 관련,자체감사를 벌인 결과 비위사실이 드러난 광주 B초등학교 등 교장 3명과 서부교육청 서기관 등 모두 4명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또 광주 서부교육청 사무관 1명과 교사 1명 등 3명을 경고조치하고 교육장 1명과 행정직 5명을 주의조치했다.
  • 여성정책 담당관 첫 공채 선발/교육부 南承希씨·농림부 朴聖子씨

    교육부 초대 여성교육정책담당관(4급상당 별정직)에 명지전문대 부교수 南承希씨(45·여)가 선임됐다.南씨는 3일 교육부의 공개모집에 응모한 12명의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겸임 발령을 받았다.앞으로 교수와 공무원으로 1인 2역을 해야 한다. 여성교육정책담당관은 여성교육정책의 수립·조정,여학생 진로교육,여교사 권익보호,여성의 사회진출과 교육참여 확대 등을 총괄하는 실무책임을 맡게 된다. 南씨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당당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는 풍토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대구 출신으로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나와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교육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명지전문대 부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여성사회교육회 부회장,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남편은 고려대 생명과학부 朴永仁 교수(47)이며,대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두 아들이 있다. ◎농림부 朴聖子씨/미혼의 재야 농민운동가 “여성농업인 목소리 반영” 농림부의 첫 여성정책담당관(별정직 4급)에 농촌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미혼의 재야 농민운동가가 임명됐다.朴聖子씨(44)가 주인공.농림부의 공개모집에 대학교수와 민간연구소의 박사 출신 연구위원 등 7명의 쟁쟁한 후보들이 몰렸지만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朴 담당관은 서울여대 공예학과를 졸업하고 84년부터 전북 부안에서 미취학 어린이를 대상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농촌과 인연을 맺었다.기독교농민총연합 간사,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 등을 거치며 농촌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다.15년여동안 현장에서 농촌의 ‘현실’을 지켜봐 농촌과 관련된 어떤 현안에 대해서도 훤하다는 평이다. 재야운동가에서 공무원으로 신분을 바꾼 朴 담당관은 앞으로 여성 농민들의 지위와 복지 향상을 위해 일하게 된다.3일 金成勳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여성농업인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대통령 비판 지나친 표현 사과”/金洪信 의원 회견

    ◎성당서 ‘통회기도’하며 자숙/선거후 검찰에 자진출두 예정 한나라당 金洪信 의원이 지난달 26일 ‘공업용 미싱’ 발언 이후 처음으로 1일 여의도 당사에 모습을 드러냈다.닷새동안의 칩거생활을 끝내고 자청한 기자회견이었다.“표현이 지나친 점은 사과하지만 ‘성역없는 비판’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요지다. 金의원은 A­4용지 두 장을 촘촘하게 메운 기자회견문에서 ‘대통령의 정직성을 요구하며­사법처리로 정치적 비판을 막을 수는 없다’라는 제목을 달았다.회견문에서 金의원은 “대통령의 정직성 문제와 국가경영의 신뢰성 결여를 비판하려 했던 우스개 소리가 정치적 표현의 지나침으로 대통령이 모욕죄의 고소 주체로 나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비화됐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金의원은 그러나 “자숙하는 뜻에서 모든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성당에서 ‘통회기도’를 계속했지만 여당이 선거전략 차원에서 너무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며 “정치적 사안을 법정으로 비화시켜서는 안되며 대통령은 대인다운 풍모를 보이는 것이 국민화합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그는 나아가 “현 정권이 언어의 멋인 해학과 풍자,육담(肉談)을 통한 비유까지 억누르면서 새롭게 대통령의 성역화를 시도하려 한다”며 “앞으로도 할말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러면서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라고 대통령에게 되물었다.金의원은 오는 4일 지방선거 직후 검찰에 자진 출두할 예정이다.
  • 교정직 공무원 대대적 승진 예상/4개 지방청장 사표수리

    ◎교도관 출신 교정국장 곧 나올듯 법무부가 30일 權태정 서울지방교정청장을 비롯,대구 대전 광주 등 4개 지방교정청장(2급)이 제출한 사표를 모두 수리함으로써 교정직의 대대적인 승진 인사가 예상된다. 이번 조치는 현재 검사장이 맡고 있는 법무부 교정국장을 교정직이 맡도록 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풀이된다. 金大中 대통령은 5월 12일 서울신문이 제정한 교정대상 수상자와의 청와대 오찬에서 “빠른 시일 내에 교도관 출신이 법무부 교정국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이에 따라 빠르면 8월로 예정된 검찰 정기인사 때 교정직 출신 첫 교정국장의 탄생이 점쳐진다. 현재 교정직 공무원은 모두 1만886명이다. 최고 자리인 교정이사관 2급은 4개 지방교정청장과 법무연수원 교정연수부장 등 5명이다.3급은 서울구치소장 등 규모가 큰 12개 구치소·교도소장과 법무부 교정심의관 등 13명,3급 또는 4급으로 보할 수 있는 3·4급 복수직은 법무부 교정·보안1과장,서울구치소 부소장,대구교도소 부소장 등 4자리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교정청장 4명의 사표를 수리한 것은 교정조직을 정비하고 교정국장을 발탁할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20세기 문화·예술인 20명 선정/타임·CBS 공동 주관

    ◎만화 심슨가족 주인공 ‘심슨’ 뽑혀 눈길/피카소·채플린·비틀스·원프리도 포함 【뉴욕 AP 연합】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신호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프랭크 시내트라,스티븐 스필버그,봅 딜런 등을 금세기 삶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20인의 예술가와 연예인으로 선정,발표했다. 미 CBS방송과 공동으로 각 분야의 ‘금세기 인물’을 선정해 발표해 온 타임은 사회 지도층 인사와 학자, 언론인 및 각 분야 전문가와의 협의를 거쳐 인물의 위대성보다는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기준으로 문화·예술분야의 인물 20인을 선정했다. 2주전 타계한 시내트라는 미국 대중음악의 핵심을 규정한 금세기의 가수로 선정됐으며,피카소는 20세기 모든 예술운동에 손길을 미친 거장이자 변화무쌍한 슈퍼스타로 꼽혔다. 문화·예술분야의 인물 20인 중에는 특히 만화 ‘심슨가족’의 주인공 바트 심슨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는데 타임측은 바트 심슨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귀여운 개구쟁이 이미지로 금세기의 대중문화를 구현해 냈다는 점을 선정 이유로밝혔다. 타임은 또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이 현란한 연주가 독창적인 가창법과 어우러지면서 미국 특유 음악의 원조로,영화배우 말론 브랜도는 가공되지 않은 정직성과 사색적인 매력으로 연기를 바꿔놓은 인물로 뽑혔다고 말했다. 여류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관객을 사로잡는 안무로 현대무용의 신세계로 이끌었으며 TV 사회자 오프라 윈프리는 특유의 온정적이고 친숙성있는 모습으로 TV토크쇼의 포맷을 바꾼 점 등이 높이 평가돼 문화·예술계 인물 20인에 포함됐다. 이들 이외에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소울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과 시인 T.S.엘리엇,비틀스,디자이너 코코 샤넬, 배우 찰리 채플린,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등도 금세기 문화·예술계 주요인물의 반열에 함께 올랐다. 한편 타임은 20세기에 인간의 삶과 정신을 바꿔놓은 10대 논픽션 저서로 알렉스 헤일리의 ‘말콤 X의 자서전’,안네 프랑크의 ‘한 어린소녀의 일기’,시몬느 보봐르의 ‘제2의 성’,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육아상식’ 등을 선정했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軍 징계기록 말소 완료/5,312명 인사 불이익 없애

    장교 및 하사관,군무원 등 군 장기 복무자 5,312명이 한때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 기록 때문에 두고 두고 진급 누락 등의 불이익을 당했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국방부가 80년 7월 1일부터 올해 2월24일 사이에 정직 감봉 등의 징계를 받았던 장교(준사관 포함) 2,513명 하사관 2,065명 군무원 734명 등 총 5,312명에 대한 징계 기록을 29일자로 말끔히 정리했기 때문이다.사면 대상자의 징계 종류별 인원은 정직 89명,감봉 428명,근신 901명,견책 1,952명,경고 1,942명 등이다.
  • 입법고시 409대 1 사상 최고/12명 모집에 4,914명 몰려

    올해 국회직 5급 공무원을 뽑는 입법고시의 경쟁률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26일 국회사무처가 입법고시 응시원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12명 모집에 모두 4,914명이 몰려 경쟁률이 무려 409.5대 1로 나타났다. 일반행정직은 4명 모집에 2,654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663.5대 1에 이르렀다.법제직은 4명 모집에 1,558명이 지원해 389.5대 1을,재정직은 4명 모집에 702명이 원서를 내 175.5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1차시험은 7월19일,2차 시험은 8월 25∼29일에 각각 치르며,최종합격자는 12월9일 발표된다.
  • 감사원 72개 부처·기관 조사… 실패·모범사례 발표

    ◎예산 집행/이것이 낭비 이렇게 절약/계획없이 설계용역 발주… 21억 쓰고 중단/보상금 지급 2년전부터 예산 따내 놀려 감사원은 작년 말 정부 72개 부처 및 기관을 상대로 실시한 예산집행 실태 감사결과를 지난 24일 발표했다.감사원은 해마다 11월쯤이면 모든 부처의 ‘연도말 불용액 사용 실태’를 중심으로 예산 상황을 점검한다.매년 실시되는 감사지만,어김없이 지적 사항이 발견된다.이번 감사에서도 모두 136건에 5,721억원에 해당하는 부당사례가 적발됐다.다음은 대표적인 사례. ▷굴포천 치수사업◁ 굴포천 치수사업은 민자유치사업으로 건설하게 될 경인운하에 연결하는 공사다.당연히 운하사업의 공정에 맞춰 예산을 편성,집행해야 한다.경인운하사업은 97년말 현재 사업자도 지정되지 않아 언제 공사가 시작될 지 모른다.그러나 건설교통부는 97년 및 98년에 각각 20억원과 27억200만원의 예산을 확보했다.97년 9월에는 한국수자원공사와 사업대행 계약도 체결했다.배정된 예산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감사원은 예산 편성 및 집행자 2명을 징계하도록통보했다. ▷가덕신항만◁ 부산 가덕도 신항만 건설로 발생하는 어민들의 피해 정도는 현재 용역기관이 조사중이다.결과는 99년에나 나온다.따라서 정부의 어업손실보상금 지급은 99년이후에나 시작된다.그러나 해양수산부는 97·98년 예산에 어업손실보상금 2,600억원과 1,507억원을 각각 편성해 달라고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에 요청했다.재경원도 아는 지 모르는 지 97년 960억원,98년 1,500억원을 각각 배정해줬다.해양수산부는 피해보상 대상자와 보상액도 산정하지 않은 채 97년 9월 960억원을 인출,부산시 수협 등 4개 조합에 부산항건설사무소 세입세출외 현금출납 공무원 명의로 예탁했다.감사원은 어민대표들을 설득해 미리 지급된 보상금을 일단 국고에 반납하도록 통보했다. ▷호남고속철◁ 건교부는 96년 호남고속철도 노반기본설계용역 예산 40억원을 따냈다.그러나 호남고속철은 기본계획도 확정되지 않은 사업이다.기본계획이 확정돼야 그에 따라 노반설계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건교부는 연말 예산 불용을 피하기 위해 12월에 36억4000만원을 주고 덜컥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그러나 97년 10월까지도 기본계획이 확정되지 않아 노반설계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해 12월30일 그때까지의 용역비 21억6,700만원을 지급하고 용역을 중단했다. 감사원은 호남고속철사업단장 등 관계자 2명을 정직하도록 건교부에 통보했다. ▷고엽제 환자◁ 고엽제 환자의 진료 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이에따라 최근 검진인원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그러나 국가보훈처는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예산을 신청했다.94년부터 97년까지 신청한 고엽제 환자 진료예산은 50억8,500만원.이는 4년간 실제 소요액의 31.7%∼62.4%에 불과했다.이 때문에 보훈처는 고엽제 환자를 치료하는 보훈병원에 36억2,6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다. 감사원은 국가사업 예산을 부족하게 편성해 지장을 주지 말도록 보훈처에 권고했다. ◎역무자동화 시스템 국산 개발 35억원 절약/폐기될 뻔한 기자재 대학실험실 재활용 감사원이 지난해 말 66개 정부기관과 6개 산하단체를 상대로 예산집행 실태를 점검한 결과 모두 136건에 5,721억원의 부당 사례가 적발됐다.정부의 예산집행은 아직도 주먹구구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감사과정에서 칭찬받을 만한 사례도 두 건이 발견됐다.­중소기업청 총무과의 孫炳度 주사보와 철도청 전기국 정보통신과. ▷孫炳度 주사보◁ 92년 8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국립기술품질원 관리과에 근무했다.당시 업무는 물품관리.孫씨는 96년 쓰임새가 없어진 ‘아미노산 장치’ 등 수입기자재 31점의 교체 가능성을 조달청에 문의했다.답변은 “소요기관이 없으니 자체 처분하라”는 것이었다.매각하려니 시세는 장부가액 5억4,300만원에 턱없이 못미치는 26만원.폐기처분하려니 아까왔다. 孫씨는 차라리 기자재를 교육용으로 전환하기로 마음먹고 건국대학교 등 64개 대학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그 결과 유한공업전문대 등 6개 대학과 민간시험연구원에서 기자재들을 요청했다.폐기될 뻔한 기자재는 지금도 학생들의 실험실습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철도청 정보통신과◁ 수도권 전철의 승차권 발행과 개·집표,수입금의 회계처리 및 승차권 통계업무.그것이 역무자동화 시스템의 핵심이다.그러나 몇년전까지 시스템이 국산화되지 않아 프랑스 CGA의 제품을 96개 역에 설치,운용해왔다.그 때문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수정하려 할 때마다 긴 시간이 소요됐다.또 프로그램 저작권 때문에 국내기술자가 손을 대기 어려운 문제도 발생했다. 정보통신과는 이에따라 95년 철도청장에게 건의,철도청 내에 역무자동화시스템 국산개발위원회를 설치했다.개발할 만한 기술을 갖춘 국내업체에 제안요청서를 발송한뒤 96년 접수된 서류를 근거로 구매규격을 확정했다.결국 한 중소업체가 자동화시스템 개발에 성공했고,그 결과 35억7,300만원의 예산이 절약됐다. ◎감사원 상훈(賞勳) 방침/선정된 모범 공무원 인사 반영토록 권고 감사반장인 河福東 1국1과장은 “공무원으로서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겠지만,해이한 공무원이 많은 현실을 감안해 특별히 모범사례를 선정,발표했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지난 93년 2월 李會昌 원장이 취임한 뒤 공직사회를 겨냥해 전례가 드문 고강도 사정을 실시했다.당시 감사원은개혁의 기수처럼 일컬어졌으나,공무원 복지부동(伏地不動)의 한 요인이 됐다는 지적도 받았다.93년 말 취임한 李時潤 감사원장은 매년 모범 공무원과 기관을 뽑아 시상했다.그러나 아직 우리 공직자의 복무 태도로 볼 때 감사원이 당근보다는 채찍을 휘둘러야 마땅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韓勝憲 감사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매년 3,4월에 실시하던 모범 공무원 및 기관 표창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감사원 관계자는 “감사과정에서 우수한 공무원이 발견되면 해당 부처 장관에게 통보해서 인사 때 반영하도록 권고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무보직 공무원 자리 찾아준다

    ◎각 부처 결원정보 수집… 근무희망자 연결/초과인력 처리단 가동… 고충상담창구도 운영 정부 조직개편으로 발생한 6천여명의 무보직 공무원을 재배치하기 위한 초과현원 처리작업단이 25일 본격 가동에 나섰다. 石泳哲 행정자치부차관을 단장으로 한 작업단은 부처·직급 별로 일부에 편중되어 있는 초과 현원을 체계적으로 각 부처에 재배치하는 일을 맡는다. 또 각 부처의 결원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무보직 공무원들로부터 희망 업무를 파악해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각 부처가 필요로 하는 인력 상황을 인터넷 행정자치부 홈페이지(www.mogaha.go.kr)에 싣는 등 무보직 공무원에게 정보도 제공한다.작업단은 이같은 정보제공 작업을 통해 이미 100여명 이상의 무보직 공무원을 다른 부처에 재배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작업단은 이와 함께 무보직 상태인 공무원들의 희망부서를 파악하고,고충을 듣기 위한 상담창구를 평일은 상오 9시부터 하오 10까지,토요일은 상오 9시부터 하오 5시까지 운영한다. 한편 행정자치부가 집계한 4월말 현재 초과인원은 모두 5,145명이다.이 가운데 일반직은 1,889명,기능직은 3070명,연구지도직은 20명,별정직은 166명이다.일반직 초과인원을 직급별로 보면 1급이 7명,2급이 21명,3급이 43명,3·4급이 16명,4급이 175명,4·5급이 31명,5급 이하가 1,596명이다. 초과현원처리작업단에 대한 문의는 행정자치부 인사복무국 (02)3703­4530·5525.
  • 서울신문 내일부터 지면 대혁신/행정뉴스 3개면 신설

    ◎오피니언 페이지 2개면으로 확대/정직한 역사 되찾기 연중 캠페인/컬러 10개면으로 늘리고 새시리즈 연재/본문 글자 줄이고 행간 넓혀 읽기 편하게 서울신문이 26일 아침부터는 전혀 다른 얼굴로 독자 앞에 펼쳐집니다. 서울신문은 IMF라는 어려운 환경을 맞아 새로운 시각의 정보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면체제뿐 아니라 내용을 전면적으로 혁신키로 했습니다. 정보의 시대입니다.정보가 곧 지식이고 재산이며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생활에 유익한 정보,모르면 손해보는 정보, 개인과 사회에 똑같이 이익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신문제작의 모든 노력을 모을 것입니다.또 다양한 독자들의 여론을 적극 수렴,이 시대 여론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현대사의 굽이마다 있었던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앞장설 것입니다. 모든 지면 하나하나를 알찬 정보로 꽉꽉 채우겠습니다. 읽기 쉬운 신문,시원한 지면을 구성하겠습니다. ■행정뉴스면 신설=지금껏 국내 언론이 등한시했던 공직사회를 지면에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행정과 관련된 실질적 정보는 물론이고 공직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를 기사화함으로써,정책의 입안에서 결정 및 집행과정을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이는 서울신문이 국내언론으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것입니다.행정뉴스면은 독자가 바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전면광고로 할애하던 제24면(맨 뒷면)에 게재합니다. 지역행정뉴스까지 포함,모두 3개면이 행정뉴스로 채워집니다. ■다양한 여론의 형성=오피니언 페이지를 대폭 확충했습니다.오피니언 페이지의 질적 개선을 위해 사설을 이 면으로 옮겼습니다.독자들의 견해를 충실히,다양하게 반영토록 각계 전문가들의 참여를 확대,여론의 큰 줄기를 읽도록 할 것입니다. 사내 필진에 의한 각종 칼럼도 대폭 보강했습니다.金三雄 주필,林春雄 이사,任英淑 논설위원 朴康文 문화생활팀장(부국장급)이 합류,신선한 시각의 칼럼을 제공할 것입니다. ■정직한 역사 되찾기=우리 현대사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굴절된 것은 바로 펴고 숨겨진 것은 역사의 양지 위에 바로 서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컬러 시리즈=컬러면에는 매일 서로 다른 주제의 생활·문화 관련 시리즈가 화려하게 전개됩니다.이 면은 독자 여러분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킴은 물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읽기 쉬운 신문=활자 크기를 다소 줄이는 대신,행간을 넓혀 읽기 편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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