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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보실 확대 개편’ JP가 나선 까닭은

    ◎국가 홍보기능 정상화 시급/정원 35명에 지원인력 46명/언론 모니터요원 직제조차 없어/충실한 정부자료 제공 어려워 金鍾泌 국무총리가 공보실의 국가 홍보기능 ‘정상화’ 의지를 천명하고 나서 결과가 주목된다.축소되고 기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보실 기능의 정상화가 골자다. 金총리는 25일 한나라당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갖는 자리에서 “공보실 문제는 이미 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내락을 받았다”고 밝혔다.金총리는 이에 앞서 24일 청와대에서 주례보고를 하는 자리에서는 “공보실을 형해화해서는 정부 홍보가 제대로 안되는 만큼 정기국회 때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金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金총리가 ‘정기국회’를 거론한 것은 법 개정까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대통령령인 공보실 직제를 바꿔 비현실적인 공보실의 인력구조의 숨통을 튼 뒤 정부조직법을 고쳐 문화관광부에 있는 신문·방송정책 기능과 해외문화홍보원 등을 공보실에 통합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金총리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현재의 기형적인 공보실 구조를 더이상 끌고가기는 무리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직제상의 공보실 정원은 35명.그러나 현재 실제로 공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인원은 81명이다.46명이 보직도 받지 못한 채 지원근무 형태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정홍보에 필수적인 공보지원단.12명이 신문·방송을 모니터하고,분석하는 작업을 하지만 직제에는 없는 조직이다.국민일보 사회부장 출신인 韓錫東 팀장(별정직)은 별도의 조치가 없는 한 이달 말이면 공직을 떠나야 한다. 사진팀도 공보처 시절에는 19명이었으나 이제 직제상으로 3명뿐.그러나 청와대와 총리실을 전담하는 두사람을 빼면 한사람이 다른 모든 업무를 맡는다.정부의 역사를 스틸 사진으로 기록하는 역할이 맡겨져 있지만 막상 기록할 인원은 없는 셈이다.현재 무보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8명은 내년 3월31일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공보실은 생각 끝에 언론모니터와 사진촬영 등의 지원 업무를 외부 용역팀에 맡기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현재보다 인건비가 3배나 더 든다는조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해외문화홍보원을 공보실 산하에 두려는 것은 외국언론의 국내특파원에 대한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실제로 최근 한 특파원이 우리나라의 노동문제 특집을 하겠다며 자료를 요청했으나,문화부 산하라는 한계 때문에 노동부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다.결국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자료를 토대로 취재된 내용이 보도돼 정부의 시각은 소홀했다는 후문이다.
  • 비리 변호사 3명 제명/변협,7명은 1년 이상 정직

    대한변협(회장 咸正鎬)은 25일 검찰이 징계를 요청한 변호사 108명 중 1차로 10명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어 서울 지방변호사회 소속 K·P변호사와 또 다른 K변호사 등 3명을 제명했다. 변협은 또 부산의 H변호사 등 2명에게 정직 1년6개월,수원의 S변호사등 5명에게 정직 1년씩을 내리는 등 징계대상 10명을 전원 중징계했다. 제명된 변호사는 앞으로 3년간 재등록이 금지돼 변호사 영업을 할수 없다. 변협은 다음달 14일까지 매주 초 징계위를 열어 변호사 133명에 대해 징계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 서울시(지방정부 싱크탱크:16·끝)

    ◎시정개발연·영입인사·소장파 고위간부/‘고건 서울호’의 3두 마차/시정개발연­중·장기 마스터플랜 입안.연 50건 넘는 보고서 제출/영입인사­시정개혁의 첨병 자임.강력한 실천력이 장점/소장파 간부­참신한 아이디어 제공.교통·여성정책 대안 제시 ‘작은 정부’라는 위상에 걸맞게 서울시정은 다양한 정책·기획그룹에 의해 골격이 짜인다.공식 조직을 통해 끊임없이 시정 아이디어를 내놓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시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하는 학계·전문가 그룹도 있다.그만큼 高建 시장을 둘러싼 인적 자원은 풍부한 셈이다. 서울시의 싱크탱크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시정의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짜는 시정개발연구원과 외부 영입인사 그리고 새로 물갈이된 소장파 고위직 간부 등이다. 시정개발연구원의 위상 강화가 특히 주목을 끈다.원장에는 시정개혁위원회 멤버로서 구조조정 작업을 무리없이 끝낸 康泓彬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임명됐다.앞으로 명실상부한 시의 정책수립기구로 활용하려는 高시장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5개 부서에 정규직 연구원 54명,위촉직 연구원 97명이 일하고 있다.기본과제와 용역과제로 연간 50여건의 연구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康원장은 앞으로 고유의 정책연구기능 외에 정책 연계성을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과거 6년여 동안 별정직 시정기획관·정책기획관 등을 지낸 경험을 살려 시정 수립에 있어서 핵심적인 브레인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시정개혁위에 실무진으로 참여했던 柳炅基 심사평가담당관(4급),金相範 건설행정과장(4급),高*錫 예산기금관리계장(5급) 등 차세대 젊은 관료들이 내놓는 각종 아이디어도 시정 운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柳 담당관은 시 기획조정계장을 거쳐 최연소 구청 국장(강동구 시민복지국장)을 지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金과장은 교통분야에서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조직개편에 따라 영입된 외부인사들도 ‘高建 서울호’의 개혁에 가속도를 붙일 것으로 보인다.핵심은 車東得 교통관리실장(1급)과 盧美惠 여성정책관(1급).미국의 노스웨스턴대 및 메릴랜드대에서 교통공학을 전공하고 국토개발연구원 연구위원과 교통개발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車실장은 난마처럼 얽힌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와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한국여성개발원 부원장을 역임한 盧정책관은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여성정책의 방향을 새롭게 풀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일 시청 1∼3급 인사에서 중용된 卓秉伍 기획예산실장(1급)과 徐贊敎 감사관(2급),林載五 시정기획관(3급),申東雨 산업경제국장(3급) 등 정통관료 출신들도 정책 브레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이들은 모두 40∼50대 초반으로 분야별로 강력하게 추진될 개혁적인 시정을 주도해 나가는 첨병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특히 구로구 부구청장에서 자리를 옮긴 金在宗 보건복지국장(3급)은 평소 강직한 성격에 추진력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앞으로 개혁작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기술직의 경우 崔昌植 지하철건설본부 차장(3급)과 秦哲薰 월드컵주경기장건설단장(3급)이 중심이 돼 시정의 한 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특히 기술·행정 통합 차장에 기용된 崔 차장은 시 차원 테크노크라트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이밖에 비선(秘線)그룹으로는 權源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金尙均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都哲雄 한양대 교통공학과 교수,金鎭愛 서울포럼 대표 등이 분야별로 자문을 하고 있다.
  • 클린턴 국정운영 ‘우수’ 개인 자질 ‘낙제’

    ◎WP·ABC방송 국민지지도 조사 【워싱턴 AFP 연합】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경제·외교정책에 대한 미국민의 지지도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반면 클린턴의 개인적 자질에 대한 지지도는 최저치로 떨어졌다. 워싱턴 포스트지와 ABC 뉴스가 지난 19일부터 21일 사이 성인 1,015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클린턴 대통령의 전반적인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는 66%를 유지했다.특히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4명중 3명,외교정책은 10명중 7명꼴로 지지를 나타냈다. 그러나 클린턴이 정직하고 믿을만하다고 밝힌 조사 대상자는 28%에 불과했다.또 그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높이 살만한 규범을 갖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9%로 여론조사 사상 최하위로 떨어졌다고 포스트지가 23일 밝혔다.
  •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학술대회 기조연설

    ◎동티모르 독립투쟁 아세안도 책임 다해야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가 제주4·3항쟁 50주년을 맞아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다. 한국위원회 대표 姜萬吉 고려대교수를 비롯 국내외 250여명의 학자와 법조인,예술인들이 참여한 이번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독립운동과 관련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21일 기조연설을 했다. 그의 ‘동티모르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인권’이란 제목의 연설을 요약한다. ○민주주의·법치추구는 순리 세계의 국가들은 점차 경쟁적이며 상호의존적이 되어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 이익이 단지 무역상의 우월함과 양적인 소득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는 없다.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와 윤리,원칙에 충실하고 독립과 정직을 존중하고 우방국 간의 의견차이를 인정할 때 그 나라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는 바로 신중한 외교정책의 룰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권과 법치를 향한 움직임은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이다. 고문이 성행하는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유례없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추구하는 전체 아시아 지역에 큰 의미를 지닌다. 수십년간 독재정권을 견뎌낸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용감하게 서울과 광주에서 군대에 대항하여 값진 승리를 거뒀다. ○미얀마 강력한 제재를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인권이 침해되는 지역이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도 그중의 하나다. 동티모르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아세안이 책임을 다한다면 많은 고통과 비참한 생명의 손실이 방지되고 국제적인 비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도 인권침해가 심하다. 그러한 미얀마 상황에 대해 유엔은 비난 결의안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 이상의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를 속인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종차별 정권에게 유엔총회에서 의석을 주지않은 것처럼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는 집단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공산세계에 대항한 서구의 개념이라고 들어왔다. 옛 소련이 이끈 동부와 중부유럽은 이데올로기에 인권을 주입시켜 유엔인권단체에서 탈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 붕괴 후에 이런 논리는 전제주의와 군사독재가 남아있는 특정 아시아국가로 전용됐다. ○인권침해 비난 당연 인권침해는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든 반드시 비난받아야 한다. 비정부기구(NGOs)및 남과 북의 민주정부는 세계에서 인권 최하위국들(쿠바,인도네시아,이란,이라크,수단,자이레)에 의해 결성된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확고한 인권수호의 의지를 나타내야 한다. 인권에 대한 논쟁은 선진국과 후진국사이의 갈등의 요소가 돼선 안된다. 그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와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몇몇 공산정권 사이에 이상과 원칙사이의 투쟁이 돼야 한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국가와 NGOs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다.
  • 女軍 성희롱땐 ‘퇴출’/국방부 전군에 지침 시달

    ◎사무실 나체사진 비치/성적수치심 유발 농담/적발땐 파면 등 중징계 국방부는 23일 군부대 사무실에 나체사진 등을 비치하거나 여군과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성희롱 방지지침’을 전군에 시달했다. 성희롱 유형은 나체사진 등 음란물을 비치하는 행위,여군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행,신체적 약점을 꼬집는 농담,상관 직위를 이용한 성접촉 압력 등이다.회식 중 술에 취한 척하며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행위,사적 모임에서 술 시중을 강요하는 행위,회식 뒤 개별적 술자리 동석 요구,업무와 무관한 모임 초청 등도 포함된다. 국방부는 지침에서 악수를 제외한 일체의 남녀간 신체접촉을 금지하고,상관은 회식 전 여군이 미리 통보한 주량 이상의 술을 권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침은 이밖에 남성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여군의 야한 복장과 언행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국방부는 각급 부대 감찰부에‘고충신고센터’를 설치,성희롱 신고를 접수하는 한편 관련자는 유형에 따라 형사처벌 또는 파면·정직·감봉·견책 등의 중징계 처분을 하기로 했다.
  • “먼저 퇴출” 공방/공직사회 갈등 증폭

    ◎구조조정 여파 세대·성별간 불신풍조 공무원들의 자리보존 불안 심리가 심각하다. 공직사회가 사상 처음으로 구조조정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다 자체내 경쟁체제가 도입되는 추세인 탓이다. 위아래 없이 언제든지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행정자치부의 인터넷 토론방인 ‘열린 마당’에도 여과없이 전달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무원내의 세대간,성별간 갈등으로도 비화하는 양상이다. 서로 ‘상대방이 공직사회에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부 공무원들은 대학졸업자 1만명을 인턴공무원으로 채용한다는 정부의 계획이 발표되자 “대신 기존 공무원이 그만큼 감축되는 것 아니냐”고 불안감을 나타냈다. 행자부의 인터넷 토론방에 의견을 올린 한 공무원은 “힘없는 7급 공무원이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밝혔다. 자라(구조조정)보고 놀란 공무원들의 가슴이 솥뚜껑(인턴 공무원제 도입)보고 화들짝 놀란 셈이다. 이런 심리적 불안은 서로를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일로 발전하고 있다. 어떤 일반직 공무원은 정부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 별정직,기능직,일용직을 우선적으로 감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렬 이기주의 모습이다. 咸창순이라고 밝힌 공무원은 “각 부처별로 장관이 취임할 때 새로 비서와 운전수들을 채용하는데,장관이 떠나고 나면 이들은 산하단체로 특채된다”며 “요즘 세상에 말도 되지 않는 조치”라고 시정을 요구했다.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새로운 증원을 반대한다는 집단이기주이다. 계약직 공무원이 자리를 못잡고 있는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 여직원은 남자직원에 비해 신분불안을 더 크게 느낀 듯 “남자도 걸레질하고 커피 심부름을 해보자”며 여성들도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젊은 교사는 “학교가 노인 교사들의 여가선용을 하는 양노원이 돼서는 안된다”며 “돈도 어느정도 벌었을 것”이라고 선배교사의 용퇴를 요구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金一鐵 교수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은 불가피 할 것이나 공직사회가 심리적으로 대단히 위축되고 있다”며 “관료사회내의 상호불신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 여성·미성년 마약사범 급증/상반기 적발 246명 분석

    ◎여성 작년보다 40% 증가 전체 20% 차지/‘차치기 거래’에 길거리 투약도 25% 넘어 마약류가 여성 및 미성년자들에게 급속도로 파고들고 있다. 심지어 미성년자 마약사범 중에는 고교생도 끼어 있다. 또 숙박업소나 가정집은 물론 자동차나 길거리에서까지도 버젓이 마약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지검 강력부(朴英洙 부장검사)는 21일 지난 1∼6월까지 상반기에 적발된 마약류 사범 246명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사범 중 202명이 구속됐다. 마약류 사범 가운데 여성은 49명으로 전체의 19.9%를 차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나 증가한 수치이다. 여성 가운데는 윤락녀 등 특정직업 종사자가 아닌 주부 5명과 고교 3학년생 1명이 포함되어 있다. 주부의 경우,마약사범이었던 남편을 통했거나 호기심으로 마약을 접했다. 마약을 사용한 가장 큰 동기는 47.7%에 이르는 110명이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별 생각없이 우연히’ 46명,‘영리목적’ 39명,‘주위의 유혹’ 25명,‘중독’ 24명,‘강제적인 사용’ 2명 등의 순이다. 영리목적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31명에 비해 25.8%나 증가한 반면 호기심은 2.6%가 감소했다. 범행 장소로는 숙박업소 28.8%,가정집 24.7%,자동차 15.7%,노상 10.1%,유흥업소 6.9%,공항 및 부두 3.2% 등이다. 특히 자동차와 노상에서의 범행비율은 지난 해보다 각각 54.1%와 78.5%로 크게 증가했다. 마약류 공급자들이 검거에 대비,‘이동식 차치기 거래’를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연령은 30대가 36.2%인 89명으로 가장 많고,20대가 32.1%,40대가 20.3%이다. 학력은 중졸 53.7%,초등학교졸 19.9%,전문대졸 11.8%,무학 9.4%,고졸 4.9%로 집계됐다.
  • 親日의 군상:2/국립묘지에 묻힌 日帝경력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성지’에 일제고관·황군장교까지/‘과거’ 검증 안된채 안장… 끝없는 논란/백강 선생 “나는 국립묘지 싫다” 유언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말고 생사를 같이한 임정요인들이 누워있는 효창원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93년 1월 타계한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趙擎韓 선생의 유언이다. 백강 선생은 왜 남들이 다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안장을 굳이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누워있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사 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인사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국립묘지 내에서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은 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 등 세 곳.국가유공자묘역에는 제1묘역의 白樂濬·陳懿鍾·白斗鎭·嚴敏永·黃鍾律·李殷相·李瑄根 등 7명,제2묘역의 趙鎭滿 등 모두 8명이 묻혀 있다. 문교장관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白樂濬은 1942년 4월 창간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陳懿鍾은 경성제대를 나와 일본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냈다. 白斗鎭 전 국무총리는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3공때 장관을 지낸 嚴敏永과 黃鍾律은 모두 일본 규슈(九州)제대 출신으로 嚴씨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하여 군수를,黃씨는 만주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 재정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문교장관,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李瑄根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協和會) 간부를 지낸 기록이 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趙鎭滿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해주지법 판사와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들이 해방후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일제 당시의 행적을 무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일제하 항일투쟁 공로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추서포함)받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친일의 ‘흠’이 있는 인물은 근처에도 가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친일단체 등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金鴻亮(77년 독립장),崔昌植(83년 독립장),李鍾郁(77년 독립장),尹益善(62년 독립장),李甲成(62년 대통령장) 등이 그들이다. 친일파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 林鍾國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金鴻亮은 황해도 도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崔昌植은 그의 아내 金元慶(63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 교민단체인 계림회에 소속돼 친일활동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승려로서 3·1운동에 가담했던 李鍾郁은 국민총력연맹 위원으로 불교계 친일에 가담한 일이 있으며 尹益善은 경성부(현 서울시) 원서정(苑西町) 총대(總代·지금의 동장에 해당)와 경성부 북부정회 총대회 간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해방 후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李甲成은 상하이에서 이와모토(岩本正一)라는 창씨명으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임정 서무국장 林義鐸,유관순 열사의 오빠 柳愚錫씨 등의 증언)이 그의 생전에도 끊이지 않았었다. 장군묘역에는 1,2,3묘역 모두에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누워 있다. 제2묘역의 육군중장 李應俊,제3묘역의 육군중장 李鍾贊과 육군대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군 ‘창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李應俊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당시 일본군 대좌(대령)였다.한국군 재임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참장군’으로 불리는 李鍾贊 역시 일본 육사출신(49기)으로 일본군 공병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3공 당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朴正熙 전 대통령(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국가원수묘역 안장)과 같이 만주군에서 장교를 지냈다.지난 2월 대전국립묘지(장군묘역)로 이장한金昌龍(사후 중장 추서) 전 특무부대장은 만주 관동군 헌병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군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건국후 창군과 6·25및 그 이후의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황군(皇軍)’의 장교를 지낸 인물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열들/일제 항거 애국열사 등 1,341위 모셔/임정묘역엔 박단식·양기탁 선생도 국립묘지내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은 애국지사묘역(대전분소 포함)과 임정묘역 두 곳이다.이곳에는 한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순국선열을 비롯해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이 안장돼 있다. 98년 8월 현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총 1,341위(대전분소 1,136위 포함),임정묘역에는 최근에 유해를 봉환한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 16위의 애국선열이 안장돼 있다.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애국지사들을 활동분야별로 보면,申乭石·李仁榮 등 의병장,李鍾一·洪秉箕 등 3·1운동 관련자,의거 당시 64세의 나이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 의사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金相玉 열사등 의열투쟁가,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순국한 朱基徹 목사,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여류독립운동가 南慈賢 여사,‘독립신문’을 창간한 徐載弼 박사 등 항일 독립운동계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93년에 조성된 임정요인묘역은 임정관계자중 국무위원급 이상의 요인들을 별도로 모신 묘역. 이곳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 선생을 비롯해 국무령을 지낸 李相龍·洪震·梁起鐸 선생과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낸 金仁全 선생·孫貞道 목사,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 선생,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을 지낸 申圭植 선생,국무원 통위부 총장 金東三 선생,그리고 임정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趙擎韓(94년 3월 애국지사묘역에서 이장함) 등이 안장돼있다.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金九 선생과 尹奉吉·李奉昌 의사 등은 효창원묘역에,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申翼熙 선생 등은 수유리 묘소에 안장돼 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가 만원이어서 최근에 작고한 애국지사는 대전 분소에 안장되고 있다. 柳寬順 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선열들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다.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인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 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 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은경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 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인사·자금 총괄… 엘리트중 엘리트(중앙부처 총무과장:上)

    ◎재경부 文昶模 과장­行試 수석후 줄곧 선두/통일부 朴興烈 과장­설득력 탁월 감원 줄여/국방부 郭柄茂 과장­9급에서 꾸준히 승진/외통부 沈允肇 담당관­外試 11회선두 日本通/법무부 李動圭 과장­한보 재수사 능력 발휘 중앙부처의 총무과장은 ‘과장 중의 과장’으로 불린다.인사와 자금운용을 총괄하는 핵심 자리다. 당연히 장·차관 등 부처 내 최고위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업무처리 능력은 물론 장·차관의 의중까지 읽어내는 능력까지 갖추지 않고는 수행이 불가능한 자리다. 따라서 총무과장이 된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승진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과장이지만 실제로는 과장 이상의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다. 국민의 정부 총무과장들,그들은 누구인가. 중앙부처 총무과장의 면면을 3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재정경제부 文昶模 총무과장(48)은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행정고시 18회에 수석 합격한 뒤 76년 재무부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태국 주재 재무관과 국세심판소 조사관,산업관세과장 등을 거치며 고시동기생 가운데 선두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3월 李揆成 장관 취임 직후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며 총무과장이 됐다. 文과장은 李장관의 대전고 후배이기도 하다. 조용하면서 무리없는 대인관계로 부처 사정에 밝고,차분한 성격에 일처리가 빈틈없다는 평이다. 통일부 朴興烈 총무과장(47)은 서울고와 한양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행시 22회로 국방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사무관 시절 통일부로 옮겼다. 한때 통일부 안에 인맥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 총무과장직을 수행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출신이 다양한 직원이 혼재한 상황이어서 인사에서 편향된 양태가 드러날 경우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반직과 별정직,옛 남북대화사무국 출신들로부터 고루 의견을 들은 뒤 인사안을 제출하는 방식이어서 신망이 높다.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가 통일부 인원을 12∼13% 줄이려 했을 때 직접 찾아가 정책실 1국1과 폐지안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설득해 결국 직제를 유지시키고 감원폭도 줄였다고 한다.국방부 郭柄茂 총무과장(56)은 65년 9급으로 국방부에 첫발을 디딘 뒤 통계과·심사분석과·감사관실 등을 거쳤다. 총무과는 국방부 내 대령 이하 현역과 일반직의 인사발령이 주된 업무다. 그동안 현역 준장이 맡아왔으나 93년부터 부이사관으로 바뀌었다. 다른 부처와 달리 일반직·현역·군무원·별정직 등 직종이 다양하고 특수한 업무성격 등으로 다소 어려움이 있다. 외교통상부와 법무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외통부는 인사기획담당관이,법무부는 검찰1과장이 인사를 총괄한다. 외통부 沈允肇 인사기획담당관(44)은 중앙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외시 11회의 선두주자.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과 동북아1과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통으로 꼽힌다. 소리가 안나면서도 일을 잘 처리하고,사교성도 좋아 선후배가 모두 좋아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법무부 검찰1과는 검찰의 인사·조직·예산을 담당하는 핵심 과이다. 따라서 검찰1과장은 이른바 검찰의 ‘황태자’자리로 불린다. 역대 검찰총장들이 대부분 이 자리를 거쳤다. 현(現) 과장인 李勳圭 부장검사(45)는 충남 온양 출신으로 연세대 법대를 나온 사법시험 20회 출신. 서울지검 남부지청을 시작으로 대전지검 공주지청장,대검 검찰연구관,인천지검 형사3부장,대검 중수1·3과장을 거쳤다. 李과장은 중수1과장 시절 한보비리 사건 재수사 때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검찰1과장으로서는 아직 평가할 만한 단계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검찰인사 만큼 말이 많은 인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달 말쯤으로 예정된 검찰 정기인사 결과에 따라 李과장에 대한 평가도 확실해질 전망이다.
  • 민주열사 열전:3/崔鍾吉 서울 법대 교수(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 사죄” 외친 참지식인/법학자답게 ‘정의의 저울’로 독재에 항거/반공주의자… 간첩혐의 조사받다 의문사 崔鍾吉은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그는 70년대초 유신독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그러던 어느날 그의 비판의 소리가 사라졌다.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 속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공작정치를 자행하던 중앙정보부는 그를 간첩이라고 발표했다.독재권력에 의해 그는 간첩으로 왜곡됐다.그러나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25일 “구속수사를 받던 崔鍾吉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崔교수가 사망한지 6일 뒤의 발표였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은 물론 崔교수를 아는 사람중 중앙정보부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대부분 고문으로 죽자 자살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다.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그의 죽음은 張俊河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유신시대 최대 의문사 사건이다.그의 의문사는 독재권력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탄압 및 공작정치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건 1년여 뒤인 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崔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러한 의혹은 당시 모 신문사 기자가 취재도중 입수해 사제단에 알려온 정보를 바탕으로 제기됐다”고 사건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P씨가 전한다.P씨는 사제단에 있던 한 신부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그는 “앞서 열린 1주기 추도식때도 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제기됐었으며 몇개 신문의 초판에 실렸던 관련 기사가 밤사이 누락됐었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88년 10월6일 서울지검 김두희 검사장 앞으로 崔교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고발장을 제출했다.사제단은 “崔교수 사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건 관련자로 이후락 정보부장 등 22명을 고발했다.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사건발생 1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했다.고발은 사건 당시 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있던 崔교수 동생 종선씨(미국 거주)가 비밀리에 작성했던 수기가 바탕이 됐다.그는 사건 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구가 있던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약 1주일간 입원하며 수기를 썼다. 그러나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일인 10월18일 “崔교수가 타살됐다는 증거도,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족들과 사제단의 자료,88년 검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당시 정보부 발표는 의혹 투성이다.먼저 정보부는 “崔교수는 퀼른대학 유학중 중학동창생인 이재원·노봉유(미체포)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유족들은 “주범이 체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섭된 사람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사고이후 시체를 현장에 두지 않고 급히 국립수사연구소로 옮긴 점,가족이나 변호인·의사의 검시 참여를 불허한 점,한장 뿐인 사체사진이 투신 자살(뒷머리가 깨지고,양쪽 손발이 부러졌다는 정보부 발표)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 점 등도 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했다.떨어진 지점이라는 곳도 종선씨가 그날 새벽 몰래 가본 결과 핏자국이나 이를 씻어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崔교수가 뛰어내렸다는 화장실 구조도 투신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지적됐다.162㎝의 작고 뚱뚱한 그가 수사관들을 6m 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150㎝ 높이의 창문턱을 잡고 올라 투신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건물구조를 잘 아는 동생 종선씨가 제기하는 최대 의혹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10년전에 지났다.그러나 진상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정부나 국회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민들은 당시 관련자들이 참회의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종선씨는 수기에서 “그들도 언젠가 증언대에 서면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착한 형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진실규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다. ◎외아들 光濬씨/“역사의 진실에 공소시효는 없다” 崔鍾吉 교수의 외아들인 光濬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는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학술회의 때문에 갔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부친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그러나 이번에도 새로운 것은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부친 모교인 퀼른대 출신인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알게 됐고,그 이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답답함만 더해 갔습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왜 간첩누명까지 써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부친의 은사였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 아버지가 만났던 교수 동료들을 만나 부친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시절 만났던 코헨,박스터,라이샤워 교수들에게도 전화나 편지로 도움을 청했다.“그들은 한결같이 부친의 결백을 믿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光濬씨는전한다.특히 세계적인 민법학자 케겔 교수는 75년 독일 슈피겔지에서 崔교수 관련 기사를 읽고 당시 법무장관에게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濬씨의 어린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1주기 추도식 때였어요.당시 명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정보부에서 막아 어머님이 저와 동생을 끌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 등을 몇차례씩 통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때문에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를 옮겨 조금만 있다보면 자신을 보는 친구나 선생님들의 눈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고.그는 결국 고등학교만 마치고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사건 이후 미망인 백경자씨(62·의사)는 “오로지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고 했다.그녀는 당시 열살,여덟살이던 光濬·希晶 남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사다니기를 반복해야 했고 ‘자랑스런 아버지’였다는 점을 심어주어야 했다.덕분에 光濬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민법학자가 됐다.希晶씨(32)는 성신여대를 나와 출가해 미국에 살고 있다. ◎왜? 촉망받던 그가 죽음을 당했나/권력핵심부 거침없는 비판/독재정권의 ‘눈엣 가시’ 崔鍾吉 교수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의식있는 지식인이었다.그는 모교인 독일 퀼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남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그러나 “모국에서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법대생들 앞에 서는 것이 내 소망이요 소명”이라고 뿌리치며 귀국했다고 가족과 당시 동료교수들은 전한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라이샤워,박스터 교수 등은 崔교수에 대해 ‘그는 애국자였으며,위대한 학자요,우리들의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코헨 교수는 후일 미국의 한 신문에 ‘우울한 한국(Gloomy Korea)’이란 기고를 통해 崔교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공작정치를 비판했다고 아들 광준씨가 전한다. 간첩혐의에 대해서 가족들은 “본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아들 光焌씨는 “아버님은 학도병 출신입니다.학도병시절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몇개월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말을 쓰며접근하는 사람을 매우 조심했다고 당시 친구분들에게서 들었어요.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해요.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崔교수를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시대적 상황은 무엇일까.사건 2달여전인 73년 8월8일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아울러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반 유신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서울법대에서도 연이어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이에 대해 崔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된다”“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보부는 결국 수사중이던 간첩사건(崔교수 출두전 간첩사건은 거의 수사가 종결돼 있었다고 사제단은 판단)에 崔교수를 엮어 반유신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것 같다.동생 종선씨는 88년“공공연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형님을 손보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조사도중 사망하자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어거지로 간첩혐의를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崔鍾吉 열사 연보 ▲1931년 충남 공주에서 4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1950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51년 학도병 입대 통역병 근무 ▲1957년 서울 법대 대학원 졸업 ▲1962년 독일 퀼른대학 법학박사 ▲1964년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 ▲1970년 2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수 ▲197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1월16일 중앙정보부(남산)에 출두 ▲1973년 11월19일 새벽 1시30분 사망
  • 귀휴 시행규칙 개정령(법령공포)

    ◎배우자 직계존속 결혼·사망·위독때도 귀휴 허용 앞으로 수형자는 그 배우자의 직계존속이 결혼을 하거나,사망 또는 위독한 경우에도 귀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직계 존·비속의 사망이나 결혼때는 휴가를 갈 수 있었으나 배우자의 직계 존속에 대한 규정이 없어 성차별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귀휴 심사위원회에 민간인을 최고 2명까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현재는 공무원 5∼7명으로만 운영이 되어 왔다. 법무부는 17일 시대변화에 맞게 귀휴요건을 확대해 교정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같은 내용의 귀휴 시행규칙 개정령을 이날자로 공포,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귀휴’는 이른바 휴가로서 수형자가 자신의 형기 동안 3번을 갈 수 있으며 한번에 최고 7일까지 가능하다. 이 휴가를 갈 수 있는 수형자는 최소한 1년이상 복역한 수형자로 형기의 2분의 1을 지나야 하고 뉘우치는 빛이 뚜렷해야 한다. 귀휴심사위원회에 교정직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을 최고 2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한 것은 교정행정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와함께 훈련·시험 등과 관련한 귀휴 요건도 ‘직업훈련을 위해서나,기능경기 대회의 준비 및 참가를 위하여 필요한 때,자녀를 입양시키는 때’ 등으로 구체화시켰다.
  • 예술의전당 개혁안 ‘낮잠’/문화부 “방침미정”3개월째 승인 미뤄

    ◎전당측 “감독 중심 체제 시행 차질 큰 부작용” 예술의전당이 의욕적인 자체개혁안을 만들어놓고서도 주무부처인 문화관 광부의 방관적 태도와 비협조 때문에 3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문화부 유관단체인 예술의전당은 직제개편과 인원조정을 할 경우 문화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문화부가 이를 미루는 바람에 실제 개편작업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추진중인 개혁안에는 관리직인 본부장 중심으로 짜여진 조직을 전문인력이 주축이 되는 예술감독 중심으로 전환하는등 조직,인력면에서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개편안은 본부장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체제를 3개 예술감독체제로 전환하는 동시에 팀제를 도입하고 168명인 정직원을 135명으로 줄이는 인원감축을 주내용으로 하고있다. 예술의전당측 관계자는 16일 이와 관련,“인원감축,조직개편은 노조측과도 협의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자체적으로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개편안 내용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다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시행은 되지 않는데서 오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고 호소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5월 개편안이 완성된 직후부터 이를 문화부측에 전달하고 협의를 가질 것을 요청했으나 문화부측은 지금껏 이 개편안을 공식접수조차 하지 않다가 지난 13일에야 뒤늦게 접수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문화관광부 행정관리담당관실의 한 관계자도 “예산위원회의 방침이 정해지기 전에 개혁에 착수했다가 자칫 방향이 틀려질 경우 이중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작업을 미루고 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특히 예산청에서 하고 있는 유관단체들에 대한 국고지원액수 조정작업이 이달말까지는 끝날 예정이기 때문에 “국고지원액수에 맞춰 개편작업에 착수하는 게 순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의 예산내역을 보면 조직개편은 국고지원액수와 관계없이 추진할 수 있도록 돼있다. 예술의 전당이 쓰는 연간 예산 200억원중에서 국고지원은 31억원으로 이는 정부소유로 돼있는 건물의 유지비로 지원되는 돈이다. 연간 소요되는 건물유지비 60억원중 절반을 이 국고지원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자체수익사업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국고지원이 인건비나 운영비로 쓰이는 돈이 아니기 때문에 국고지원액수의 증감에 관계없이 조직개편은 단행할수 있다는 게 전당측 관계자의 주장이다. 한편 문화관광부 공보관실은 예술의전당 구조개혁안과 관련,△예술의 전당측이 제시한 인원 감축안은 현 인원 132명보다 3명이 더 많은 것이어서 감축폭을 더 늘려야 하며 △국립극장,서울예술단 등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있어 일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문화부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LG그룹/具本茂의 정도경영(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인간존중·가치창조로 ‘초우량’ 지향/“더뎌도 올바른 길 가야” 취임식때 제2혁신 선언/“격식보다 자유토론 통해 의사 결정” 프로정신 중시 “강함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具本茂 LG회장을 두고 한 말일까. 13만여명을 거느린 재벌총수답지 않게 具회장은 ‘이웃 아저씨’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양주보다 소주가 제격이고 양식보다는 김치찌개가 더 어울린다. 그러나 이면에는 ‘프로정신’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1등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사의 잭 웰치 회장을 가장 좋아한다. 취임 일성도 “초우량 LG,1등 LG”였다. 그러나 지름길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소 더디더라도 바른 길만을 고집한다. 철저한 유교식 교육을 받은 탓인지 외도를 허용치 않는다. 이른바 정도(正道)경영이다. 95년 2월 ‘3세 경영’의 시대를 열때 具회장은 ‘강한 LG’를 강조했다. ‘제 2의 혁신’이란 말도 취임사에 여러차례 담았다. ‘안정경영’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종전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과거 LG는 삼성과 현대라는 재계의 양두마차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에 안주,2등과 3등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곤 했다. 과거의 영화(榮華)가 퇴색하고 있다는 굴욕적인 얘기도 들었다. 具회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더이상 3등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의 승부근성이기도 했지만 글로벌 경영에선 초일류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0년 안에 재계의 선두에 서겠다는 ‘도약 2005년’의 발표는 재계에 ‘선전포고’로 비쳐졌다. 미국의 대형 가전업체인 제니스사 인수에 이어 경전철 사업과 부산가덕도 신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사업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96년 6월 꿈의 통신으로 불리는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을 따내자 재계는 LG의 변신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그러나 LG는 ‘공격경영’이라는 말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LG의 경영이념이 왜곡됐다고 한다. LG가 과거와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한 것은 분명하나 공격경영이라는 표현에는 중요한 점이 간과돼 있다.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인간존중과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에 주력한다’는 정도경영이다. LG가 최고를 지향하는 것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다. 이윤을 추구하는게 기업의 ‘권리’라면 고객에게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임무’다. 다른 기업보다 뛰어난 기술로 1등을 했을 때만 ‘임무’를 100%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정하고 철저한 경쟁을 통해서다. 具회장이 지난 3월 사장단 회의에서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은 도태되고 고객 신뢰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법인은 LG브랜드를 공유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은 정도경영을 구체화한 사례다. 그렇지만 LG가 삭막한 프로의 세계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선대의 경영이념인 인화와 화합은 具회장에게로 이어졌다. 具회장은 격식을 싫어한다. 서류로 보고받기 보다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의사결정하기를 좋아한다. 회장실은 늘 열려있다. 과장이나 차장은 언제든지 노크할 수 있다. 회장 집무실은 그룹 임직원의 휴게실이기도 하다. 회장 전용헬기는 임직원들의 출장차량으로 활용된다. 具회장은 아직도 임·직원에게 존댓말을 쓴다. 회장과 직원이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 만나고 있다. ◎具 회장 진면목/남 배려할줄 알고 직원과 잘 어울려 승부근성 정평 나 얼마전 일이다. 서울 여의도 트윈빌딩 앞을 지나던 LG 具本茂 회장(53) 이승용차 안에서 보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힘겹게 길가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具회장이 비서에게 말했다. “저기에 의자를 설치하면 어떻겠소” 얼마후 정류장 부근에는 돌의자 63개가 마련됐다. LG 직원들에게 회장에 대해 물으면 무엇보다 남을 배려하는 세심한 마음씨를 꼽는다. 공장에 기념 식수 하나를 하더라도 기왕이면 휴게실 근처에 심어 직원들이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한다는 것. 하지만 “촌사람처럼 생겼다”는 본인 표현에도 불구하고,승부근성은 정평이 나있다. “내 골프 핸디는 고무줄 핸디다. 내기 할 때는 잘 하지만 그냥 치면 잘 못한다”라는 말에서도 그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잘 나타난다. 具회장은 광복 직전인 45년 2월 경남 진양군에서 具滋暻 현 명예회장의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고 15회 졸업생으로 63년 연세대 상대 1학년을 수료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애시랜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중매로 만난 부인 金英植 여사(46)는 金泰東 전 보사부장관의 딸로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LG사이언스홀/기업 ‘사회환원’에 좋은 본보기/민간 최대 과학관 10년째 운영/640평 규모… 관람객 200만명 돌파 벽과 바닥이 온통 파란색인 무대에 맨손으로 서서 허공에 공을 튀기는 동작을 하면 한쪽에 설치된 TV에 본인이 실제 농구장에서 농구공을 튀기며 경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대편 수비수를 제치고 덩크슛을 쏠 수도 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빌딩 서관 3층 ‘LG 사이언스홀’에서 체험할 수 있는 내용중 하나다. 총 면적 640평으로 민간 최대규모의 과학관인 사이언스홀은 연평균 15만명 이상이 찾고 있으며,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으면서 관람객수가 200만명을 넘어섰다. 이곳에 와 보면 기업이 사회를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첨단산업을 개척해온 LG가 청소년들에게 미래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87년 개관한 사이언스홀은 방학인 요즘도 하오 1시쯤 되면 대기표가 매진될 정도로 관람객이 많다. 덕분에 트윈빌딩 로비는 언제나 놀이공원 처럼 어린이들로 북적댄다. 관람객이 직접 미래 과학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기 비결. 10개의 전시관 가운데 눈길을 끄는 곳은 생명과학관,신기술관,환상체험관 등이다. 생명과학관에서는 컴퓨터 합성기로 얼굴을 찍고 잠시 기다리면 1∼50년 뒤에 자기가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기술관에 들어서면 4.3g짜리 손톱만한 로봇이 눈길을 끈다. 더 작은 로봇이 개발되면 사람 몸에 들어가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도우미가 설명한다. ◎‘락희화학공업사가 모태’ LG 성장사/47년 럭키그림­55년 치약 생산으로 기반/58년 금성사 설리베 흑백TV 최초로 생산/95년 LG로 그룹명 개칭… 사원만 10만명 “보통학교요?” 손위 처남이 불쑥 던진 권유에소년신랑 具仁會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이내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가슴이 콩콩 뛰었다. LG그룹 신화의 서곡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LG의 창업주인 고(故) 具仁會 선대회장은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한학을 익히던 具회장은 13세때 만석군 집안인 許씨 가문과 결혼한 뒤 처남의 권유로 보통학교에 편입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신학문에 눈을 뜬 具회장은 19세의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어 고향에서 소비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터득한 ‘장사 감각’을 바탕으로 1931년 진주에서 ‘구인회상점(具仁會商店)’이라는 포목상을 열면서 천부적인 상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45년 해방후에는 부산으로 진출,우연히 손을 댄 화장품판매업에서 짭잘한 이윤을 남긴다. 작은 성공이었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간파한 具회장은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팔기로 결심,오늘날 그룹의 모체(母體)인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설립했다. 이때가 47년 1월로 락희화학에서 만든 ‘럭키크림’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55년 ‘럭키치약’을 생산한 락희는 이어 세탁비누,화장비누,가루비누를 줄줄이 내놓았으며,67년에는 국내 최초로 샴푸도 개발했다. 화학 업계를 석권하는 과정에서 58년에는 전자 쪽으로 눈을 돌려 금성사(金星社)를 설립한다. 당시 일본 ‘통산성백서’에서 전자공업을 유망한 분야로 전망한 것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다. 59년 국내 최초로 라디오 개발에 성공한 금성은 이어 선풍기 자동전화기 세탁기 냉장고 흑백TV 등을 국내 최초로 생산,‘전자제품’하면 금성이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具회장은 69년 타계했다. 70년 1월 45세의 나이로 2대 회장에 취임한 具회장의 장남 具滋暻 회장은 25년 동안 재임하면서 취임 당시 8개였던 계열사를 20개로,2만명이었던 사원을 10만명으로 불려 현재의 ‘몸집’을 만들었다. 95년 1월1일을 기해 그룹이름을 ‘LG’로 바꾸고 제2의 도약을 선언한 具회장은 다음달 22일 돌연 장남인 具本茂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계열사 현황(*는 상장회사) 회사명 업종 설립 연월 *LG화학 종합화학 생활건강 47. 1 LG석유화학(주) 석유화학 78. 3 (주)LG실트론 반도체 재료 83. 4 LG얼라이드시그널 엔지니어링 프르스틱 89. 2 (주) CFC 대체 물질 LG오웬스코닝(주) 유리장섬유 제조 도매 90. 5 LG MMA(주) 유기화학제품 91. 3 *LG­Caltex 석유류 및 석유화학제품 67. 5 정유(주) LG정유판매(주) 석유류 도소매 70.12 *LG­Caltex LPG 수입,저장,판매 84. 9 가스(주) 호유해운(주) 유류수송 72. 8 원전에너지(주) LPG 도·소매 95. 6 *LG전자(주) 종합전기·전기·통신 58.10 LG전자부품(주) 종합전자부품,금형제조 70. 8 LG마이크론(주) 전자부품 및 전기사업용 83. 5 기계장치 LG포스타(주) 스피커,스피커시스템 제조 71. 9 LG소프트(주) 컴퓨터 S/W,컴퓨터 교 85. 2 육/출판/음반/영상 LG히다찌(주) 소프트웨어 개발/수출 시 86. 9 스템 자문,판매 및 관련 서비스 *LG정보통신(주) 종합정보통신기기 제조 79. 9 *LG산전(주) 산업용 전기·전자기기 및 87. 3 시스템,승강기,FA기기 및 메카트로닉스 LG하니웰(주) 자동제어시스템 및 기기 84. 5 *LG반도체(주) 반도체 소자 및 디스플 89. 5 레이 기기 (주)LG텔레콤 개인휴대통신(PCS)서비스96. 7 LG정밀(주) 방위산업장비,정밀계측기기,76. 2 차량용전장품 *LG산전(주) 환경산업설비,농업기계, 62. 5 산업기계,무선통신시스템, 케이블류,산업소재 LG기공(주) 전기·통신공사업 74. 7 *(주)LG금속 비철제련,특수소재,금속 36. 6 귀금속 가공 *(주)LG상사 종합무역의류제조,도·소매 53.11 *LG건설(주) 종합건설 69.12 LG엔지니어링(주) 종합기술용역 78.10 LG에너지(주) 발전,전기업 96.10 LG ENC 설계,감리 83. 3 LG엔지니어링(주) 종합기술용역 78.10 (주)LG유통 수퍼마켓,빌딩관리 단체급 71.12 식,편의점 (주)LG백화점 백화점 94. 2 (주)LG애드 종합광고대행 84. 7 (주)LG­EDS 정보처리서비스 87. 1 시스템 *LG증권(주) 증권 73. 6 LG투자신탁운용(주)금융증권,투자신탁업 88. 3 LG선물(주) 선물거래 92. 7 *LG화재해상 손해보험 59. 1 보험(주) LG신용카드(주) 여신금융 88. 3 LG신용정보(주) 채권추심 98. 5 *LG종합금융(주) 금융,부동산 73. 5 (주)부민상호 신용금고업 67. 7 신용금고 (주)LG스포츠 오락,문화,및 83. 1 운동관련 사업 한무개발(주) 관광호텔 85.11 (주)LG경제 경제·경영·환경연구 86. 4 연구원 및 자문 (주)LG레저 서비스 88.11 (주)LG홈쇼핑 종합유선방송,통신판매, 94.12 홈쇼핑프로그램 공급 LG창업투자(주) 금융96. 7 *극동도시가스(주) 도시가스 배관 자재 81. 3 (주)LG인터넷 부가통신 97. 7 (주)LG돔 돔구장의 건립 및 운영 97. 9 (주)LG교통정보 부가통신업 외 97.12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행정직­기술직/퇴출비율 舌戰 뜨겁다/忠南

    ◎산림직 등 대거퇴출에 “행정직 횡포” 반발/9개 시군 산림과 축산·산업과에 통합/해양수산과도 2개 시군서 폐지 방침 ‘기술직을 고사시키려는 처사다’­‘아니다. 새로운 행정수요에 맞춘 당연한 처사다’ 지방행정조직의 슬림화와 함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행정직과 기술직 공무원간에 ‘퇴출’ 비율을 두고 설전이 뜨겁다. 특히 산림직 등 기술직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대거 퇴출은 ‘행정직의 횡포’라며 설움을 털어놓는다. 충남도의 경우 15개 시·군에 산림과가 설치돼 있었으나 천안시 등 6개시만 남고 나머지 시·군은 조직개편과정에서 모두 축산과나 산업과에 통합된다. 도 산림과 관계자는 “충남도의 산림면적이 전체의 53%에 이르며 산림의 수요가 목재 생산 등 1차 산업적인 기능보다는 공익적 기능을 앞세우는 세계적인 추세에 비춰 조직개편에서 이를 무시하고 이에 따른 감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산림행정의 손발이 마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양수산과도 그동안 보령·서산시와 서천·태안·당진군 등 5개 시·군에 설치돼 있었으나 서산시와 당진군의 조직이 없어지게 됐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지방행정 조직의 개편은 전적으로 자치단체장이 냉정하게 업무를 진단해 추진하고 있다”면서 “과 단위가 폐지될 경우 과장급 인사들이 대거 대기발령을 받게되는 후유증 때문에 나오는 목소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행정직 관계자도 “공업화,정보화로 나아가는 사회적인 흐름을 조직개편 과정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기술직 공무원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 海警 개편 海洋部와 신경전

    ◎해양부 ‘문서’ 나돌자 해경 극도의 불쾌감 해양경찰 개편을 놓고 해양수산부와 해경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입장을 대변한 듯한 문서가 산하기관으로 전달되자 이에 반박하는 해경 직원의 편지가 나도는 등 양측간에 팽팽한 긴장이 형성되고 있다. ‘해양안전관련 행정체제개편안’이라는 문서가 각 지방해양수산청에 팩스로 전달된 것은 지난달 15일.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국정과제 추진상황 보고에서 “해경의 기능을 강화하고 해경직원의 신분을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직후였다. 이 문서에는 주요 추진방향으로 ▲해경직원의 비경찰화(특정직에서 일반직으로) ▲해경 명칭을 해양안전청으로 변경 ▲해경 조직을 통폐합해 미국의 해안경비대와 같은 조직으로 변경하는 방안 등이 담겨 있다. 부산·인천 등의 지방언론이 이 문서를 확대해석해 ‘해경 기능축소’로 대서특필하자 해경측은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부처간의 갈등으로 비춰질까봐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불괘감이극에 달하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대통령의 지시를 잘못 해석하여 의도적인 ‘해경 죽이기’에 나서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해경이 일반공무원으로 전환되면 현장 집행력이 약화돼 당장 해상안보에 문제가 생긴다고 반박하고 있다. 급기야는 지난달 20일 해경 개편 움직임을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가 전국 해양경찰서에 나도는 사태로 발전했다. 사정이 이에 이르자 해양수산부는 즉각적인 진화에 나섰다. 해경 개편에 관해서는 현재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고 대통령의 지시를 토대로 해경측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개편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 비리변호사 43명/변협,징계위 회부/오늘 36명 추가 논의

    대한변협(회장 咸正鎬)은 11일 윤리위원회를 열고 검찰수사 결과 사건브로커 고용 등 비리혐의가 적발된 변호사 112명 가운데 우선 43명을 자체 징계 위원회에 회부키로 했다. 변협은 이어 12일 조사위원회에서 형사사건 수임 비리 변호사 36명에 대한 징계위 회부여부를 논의한 뒤 오는 24일 열리는 징계위에서 최종적으로 이들에 대한 제명·정직 또는 과태료 등의 징계를 결정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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