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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주롱지의 화려한 ‘외출’

    주롱지 중국총리가 14일 미 매사추세츠주 공과대학(MIT) 연설을 끝으로 방미일정을 마치고 떠났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합의는 실패했다 치더라도 그의 방미결산은대부분 성공적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나타난 결과는 없지만 내용은 성공이었다는 역설은 그가 들른 곳마다 들리는 연설내용과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히 가늠된다. 그가 미국에 온 순간까지만 해도 미국내에서는 중국의 핵기술 절취를 비롯해 비윤리적 국가운영문제,반체제인사 탄압,티베트 독립,대미무역흑자와 높은 무역장벽 등 숱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비난이 한층 고조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와서 주목받는 신분의 위치를 십분활용,그 비난에대해 직접 하나씩 해명해 나갔다. 때로는 농담도 하고 지루해질만 하면 엄포성 발언도 섞었으며 중국에 대한비난에는 정면으로 대응해 나갔다. 그의 연설은 중국어 특유의 괴성섞인 억양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미국인들의귀에 ‘듣고 싶은 말씀’쯤으로 여겨졌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 그의 발언에 과장이 없다는 것이다.유치한 과장이나 공치사는 없이 철저한 자기파악이 전제된뒤 이어지는 비교적 정직한 그의 답변은 아무리 말하기 어려운 질문일지언정 토론에 익숙한 미국풍토에서 오히려 호소력이 있었다는 평이다. MIT의 연설에서는 반체제인사로 수감된 슈웬리의 딸이 강연장 밖에서 시위하고 딸의 친구가 “언제 중국은 독재정권을 끝낼 것인가”를 물었다. 주총리는 답변을 피하지 않았다.“중국의 인권문제는 개선점이 있다는 것을잘 안다”고 인정한 뒤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간 장내는 한 국가지도자의 고뇌를 공감하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만약 총리가 아니고 보다 아래급 관리가 와서 연설한다면 이같은 대답이 가능했으며 이런 주목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는 미지수이다. 15년만에 보여진 중국 정상 지도자는 특유의 유머와 센스를 지닌채 미국무대에서의 화려한 공연으로 중국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일조했다. 총리는 아니지만 이홍구 주미대사도 조만간 미국 도시를 돌 예정이다.바로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제 투자를 해도좋다는 홍보행사인 ‘캐러밴’행사를 위한 것이다. 그도 당당한 모습으로 많은 미국인 청중들의 관심을사로잡기를 기대한다. 최철호 워싱턴 특파원hay@
  • 5급이하 전 공무원 대상 양천구 ‘상벌점수제’ 운영

    서울 양천구(구청장 許完)는 15일 행정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 프로그램의하나로 5급 이하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원 상벌점수제’를 운영하기로했다. 일을 열심히 해 좋은 성과를 올린 직원에게는 등급을 정해 근무성적에 격려점수를 반영하는 ‘플러스 옵션’을 주고,일을 잘못 처리해 주민이나 구청에 피해를 준 직원에게는 ‘마이너스 옵션’을 부과해 인사·보수 등에 반영한다는 것. 구는 이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3∼4개월의 준비작업과 시범운영 기간을 거쳐 미비점을 보완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운영방안을 마련했다. 플러스 옵션에 적용할 격려점수는 A∼E까지 5단계로 나누어 최소 +0.1점에서 +1.5점까지 주어진다.집단 고질민원 해소나 주민서비스 개선 유공자에게+1.5점,기관표창 수상 공헌자나 국무총리 표창자,전국대회 수상자에게는 +1. 0점,시장 및 장관 표창자나 선행공무원은 +0.5점을 준다.컴퓨터 영어회화 한자교육을 이수하는 등 자기계발에 노력한 직원도 +0.1∼+0.4점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마이너스 옵션은 1∼10등급으로 나눠 징계를 받거나 민원불친절,복무규정 위반,직무태만 및 업무소홀,공무원 품위손상 행위,기타 공무원의 책임과 의무 위반 등 5대 항목에 해당되면 -0.1∼-1.5점까지 부과한다.견책은 -0.6점,정직은 -1.0점,일반 복무규정 위반은 -0.1∼-0.2점을 누진 적용한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댄 퀘일 대선출마 선언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댄 퀘일 전 미 부통령이 14일 오는 2000년 공화당대선후보지명전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날 모교인 인디애나주 헌팅턴 노스헌팅턴고교에서 행한 출마연설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의 부정직한 10년을 끝내고 미국을 새로이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89년부터 93년까지 조지 부시 전대통령 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그는 지난해부터 출마를 밝혀왔으며 76년 하원에 첫발을 디딘뒤 80년 상원의원 당선,86년 미국내 최대 표차 상원재선 등 탄탄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화려한 정치경력을 보여왔다. 상원재임시 군사위,예산위,노동위,인권위 등에서 굵직한 안건들을 많이 제안,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실업자들을 위한 직업훈련법 제정은 아직도 그의역작으로 꼽힌다. 88년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직 수행시 무려 47차례 외국 공식방문으로 외교관계를 탄탄히 다졌으며 국가 우주위원회,국가 경쟁력위원회 등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3자녀의 아버지로 신앙과 가족사랑,자유 방어를 바탕으로한 위대한 미국을기치로 다시 출마한 퀘일은 그러나 고향 인디애너를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이로써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는 부시 텍사스주지사와 엘리자베스 돌 전 적십자사총재를 비롯,봅 스미스 뉴햄프셔주 상원의원,패트 뷰캐넌 3번째 도전자,언론인 스티브 포브스,라마 알렉산더 전 테네시 주지사,그리고 애리조나주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모두 8명이 각축을 벌이게 됐다. hay@
  • 무주군 ‘벌점퇴출제’ 도입

    전북 무주군(군수 金世雄)은 12일 공무원들의 부패를 없애고 행정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읍참마속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제는 촉한의 제갈공명이 가장 총애하는 장수인 마속이군령을 어기자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에서 착안한 것으로 벌점 퇴출제와 훈계·경고 누진제,칭찬 카드제,옐로카드제 등으로 구성돼 있다. 벌점 퇴출제는 징계 및 문책에 대해 정해진 벌점(정직 10점,감봉 7점,견책5점,훈계·경고 2점,주의 1점)을 부여,연간 11점인 공무원은 퇴출대상자로분류해 심사하는 제도다.훈계나 경고를 연간 3회 받으면 감봉,2년간 5회면정직처분한다.복무규정을 어기거나 업무를 소홀히 한 직원에게는 옐로 카드를 발급,벌점 0.5점과 당직근무 1회를 부여한다. 반면 창의적인 제안자나 업무능력 우수자,민원인이나 동료의 칭찬을 받는직원은 칭찬점수 2점을 받는다.
  • 경찰 간부후보 면접시험 참관기

    “경찰관이 돼서 음주단속을 나갔는데 친구의 형이 걸렸다.그 사람이 야식이나 하라며 1만원을 줬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경찰 간부후보생의 면접시험이 치러진 지난 8일 인천시 부평구 경찰종합학교.53대 1의 필기시험 경쟁률을 뚫고 면접 관문에 선 수험생들은 면접관들의 질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서울대(6명) 연세대(3명) 고려대(3명) 출신을 비롯해 103명의 수험생은 모두 4년제 대학 출신. 서울대 출신 가운데는 법대 졸업자도 포함돼 있다.합격후 1년동안의 교육을받고 나면 경위(파출소장)로 부임하는 초급간부를 선발하는 만큼 면접관들의 질문도 날카로웠다. “경찰관은 기업체 직원과는 달리 국가를 대리해 업무를 수행하는 만큼 친구의 형이라고 봐준다면 국가의 기강이 흔들릴 것입니다.따라서 단호히 대처할 것입니다”한 수험생은 작지만 또렷하게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신문과 방송에 경찰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경찰의 고쳐야 할점은 무엇입니까.” 수험생은 “언론이 일방적으로 매도하기 때문”이라고언론 탓으로 돌렸다.원하는 경찰 개선방안을 듣지 못한 면접관은 보충질문을 던졌다.“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인데 일방적으로 매도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수험생은 “신창원 검거 등 경찰 직무는 위험한 일인데 언론이 너무몰아붙인다”며 여전히 경찰 개선과는 거리가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준비된 수험생’이 되려면 어떤 질문이 나올지 알아야 한다.경찰 면접은▲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 ▲경찰관으로서 발전가능성 ▲일반상식과 전공지식 ▲발표력 등을 묻는 게 기본원칙이다.구체적으로는 ▲님비현상이 뭐냐 ▲충성과 효도의 관계는 ▲경찰을 지원하게된 동기와 포부는 ▲출생부터 오늘이 자리에 앉기까지 자신을 소개해 봐라 ▲대학생활을 하면서 보람있었던 일과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가 등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진다. 경찰면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정직성이라고 한 면접관은 밝혔다.“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것보다는 진실이 담겨 있다면 어눌한 말솜씨도 상관없다.눈빛과 태도를 보면 정직성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긴장감을 푸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수험번호를 미처 밝히지 못하는 실수보다는 면접관을 쳐다보면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여유있는 수험생에게 호감을 갖게 마련이라는것이다. 긴장하게 되면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경우가많다는 게 면접관들의 지적이다.모르는 질문이 나왔더라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대답한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대학 전공을 묻고 나서는 경찰에서 어떻게 전공과목을 살릴 것이는지를 묻는 질문도 나온다.경찰내에서 발전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예를 들면 드물기는 하지만 화학전공자일 경우,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근무하고 싶다는 식으로 답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복장은 점퍼차림도 무난하다는 면접관도 있지만 좋은 인상을 주는 청결하고 단정한 정장차림이 바람직스럽다고 학교 관계자는 말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공무원 월급 민간기업의 87%

    일반 행정직 공무원 보수는 민간기업의 87.2% 수준이며 대기업체와 비교할때는 70.4%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행정자치부는 9일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민간기업 400개(대기업 200,중소기업 200개)의 사무관리직 평균임금을 조사해 동일한 근무연한의 공무원 보수와 비교·분석한 결과,이같이 파악됐다”고 밝혔다. 직급별로는 5급 이상 공무원이 민간기업의 85.9%,6급 이하는 91% 수준으로각각 나타나 직급이 올라갈수록 공무원과 민간기업의 임금격차가 벌어지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기업과 비교할 때 5급 이상 공무원은 대기업의 67.3%,6급 이하 직원은 79.5%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9급 1호봉의 월평균 보수액(시간외수당,연월차수당 등 개인편차가 있는 수당 제외)은 86만4,000원으로 같은 기준으로 산출한 대기업 고졸초임 사원 월평균 보수액 104만8,000원의 82.4% 수준이었다. 2·3급 상위직에서는 차이가 더 벌어져 30년 공직생활을 한 2급 24호봉 공무원의 월 평균보수액은 394만4,000원으로 같은 근무연한의 대기업 전무 월평균 보수액 751만7,000원의 52.5% 수준이었다. 반면 중소기업체와 비교할 때는 공무원 보수는 전 직급 모두 비슷한 수준이었다. 또 97년 말 기준으로 공무원 임금을 40개 국영기업체 임금과 비교했을 때,5급 이상은 84.2%,6급 이하는 89.2% 수준인 것으로 각각 나타났다. 정부는 94년부터 공무원 임금을 국영기업체 수준으로 현실화한다는 계획을추진해 왔으나 연봉제·성과급제 도입 등 공무원 보수 산정방식이 바뀜에 따라 앞으로 민간기업 보수를 기준으로 공무원 보수를 현실화해 나갈 방침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대다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민간기업 보수를 기준으로 공무원 보수를 정하고 있다”면서 “민간기업 임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중장기 공무원 처우개선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朴賢甲 eagleduo@daehanmail.com
  • [‘완벽대비’ 韓-日 어업협정](중)어민들 의식구조 바뀌어야

    한·일 어업협정 파동을 겪으면서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이 가장 아쉬워했던것은 정확한 기초통계 자료였다.해양부가 정확한 수산 관련 통계를 갖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정직하지 못한’ 일부 어민들의 잘못 또한 크다는 게 한결같은 지적이다. 해양부 朴奎石차관보는 “수산업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정부에 있지만 어획량이나 조업위치를 허위보고하고 불법어로를 일삼아 온 우리어업인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어자원관리를위해선 어민들의 의식도 새 해양체제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위보고 어민들이 절세와 영업비밀유지 차원에서 어획고와 조업위치를 그릇되게 보고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어선들이 1년에 얼마를 잡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선주외엔 아무도 없다고 말할 정도다. 어획고가 보상문제와 직결되면서 이전에 보고했던 어획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일쑤다.조업수역도 알짜는 빼놓고 보고했다가 막판에 가서야 사실대로 보고하는 일도 있다.이런 상황이니 우리가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다. 복어 채낚기의 경우 96년 집계에서는 100여척이 600∼700t을 동중국해에서잡는다고 보고했다가 최근 보고에서는 조업실적을 1만여t으로 갑자기 늘렸고 조업수역도 추가했다.협상팀 관계자는 “실제로 잘 잡히는 곳을 비밀로 유지하려다 공개하지 않으면 주요 어장을 잃을 상황에 닥치자 뒤늦게 추가한것 같다”고 꼬집었다. 해양부가 어업구조 개선작업의 일환으로 실시 중인 감척(減隻)신청 선박 중에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배도 끼어 있다. 지금까지는 이에 따른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지만 어업협정의 발효 이후 조업하는 배 1척,물고기 1t,한치의 조업수역이 모두 협상의 대상이 되면서 이같은 허위보고가 국익과 직결되게 됐다. ▒불법어로 어장과 수산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기업형 대형어선이 늘어나고 어획장비가 고도화되면서 어자원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는 것이 우리 수산업의 현실이다. 하지만 어업인들은 불법어로를 서슴지 않으며 어획량 확대에만 신경을 썼을뿐 자원관리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수산자원보호법 등 자원관리를 위한 법이나 행정절차는 당연히 무시됐고 어로금지구역 침범 등 불법·부정 어로행위도 끊이지 않았다. 일본 수역에서의 싹쓸이식 조업으로 일본 어민들과의 분쟁이 계속됐으며 외교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일부 소형기선저인망은 배 이름을 가린 채 일본 영해내 어업금지 해역에까지 조업을 감행,어업협정 파기의 빌미를 제공했다. ▒규격위반 어구사용 우리 어업인들은 수자원보호를 위해 잡지 못하도록 한치어들까지 모두 잡아 고기 씨를 말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수산자원보호령은 어자원 보호를 위해 그물눈 크기를 대형선망은 30㎜ 이하,대형기선저인망은 54㎜ 이하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그러나 대부분 해양부가 정한 오차범위(10%)를 훨씬 벗어난 촘촘한 그물을 사용하고 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31)문명기

    ◆경북 영덕 최고부자 文明琦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기자를 찾아와 친일파·현대사 인물 등에 관한 자료(정보)를 제공해주는 분이 한 분 계신다.겨우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 분의 신상에 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다만 그 분이 건넨 자료 가운데는 대단히 우수한 것들이 많음에 번번이 놀랄 뿐이다.자료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통해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뿐이다. 특히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고,누구는 누구와 사돈간이고… 등등의 ‘사람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공간(公刊)된 자료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때로는 문헌자료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지난 겨울에 찾아와 건넨 그 분의메모 속에는 일제때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에 군납(軍納)을 하면서 떼돈을 번 손창식(孫昌植)을 비롯해 여러 명의 친일파가 등장한다.그런데 그중 한명은 한 때 자신이 그의 ‘괴짜인생’을 교훈으로 삼을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70년대 초반 어느 신문에서 그 사람의 출세비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그때는 그의 친일행적을 전연 몰랐다는 것이다.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일제때 경북 영덕 읍내 영덕경찰서장집 마당에 아침마다 팔뚝만한 삼치 한마리가 떨어져 있곤 했다.이를 이상히 여긴 그 집 식모가 어느날 아침 이를서장에게 고하자 서장은 주인공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며칠 만에 식모가 삼치를 떨어뜨리는 주인공을 잡고 보니 그는 지게에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파는 생선장수였다.마침내 서장이 나와 무슨 연유로 매일 아침 마당에 생선을 놓고가느냐고 묻자 그 생선장수는 “서장님께서 치안을 잘 유지시켜 주시니 덕택에 저 같은 사람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해서제가 파는 생선이나마 드려서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탄복한 서장이 “내가 뭐 도울 것은 없소?”하고 묻자 그는 “특별한 부탁은 없습니다만…밑천이 달려 물건을 많이 받아올 수가 없어서 겨우 지게꾼 행상을 하는 것이…”하고는 말끝을 흐렸다.그러자 서장이 “그럼내가 생선도매점에 소개장을 하나 써주겠소” 하고 약속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경찰서장의 소개장 덕에 그는 이 일대에서 생선장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생선을 미끼로 출세길을 튼 이사람은 일제 당시 경북 영덕 일대 최대의 부자 문명기(文明琦·창씨명 文明琦一郞)였다.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민족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문명기는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문승환(文承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씨 부자가 언제,어떤 경로로 경북 영덕에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1935년 간행)에 따르면 그는 29세 때인 명치 40년(1907년)쯤 제지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있다. 생선장사로 돈을 모은 그가 제지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 일대가 종이원료가 풍부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그는 자기 공장에서 종이를 생산하면서 다른 공장의 종이를 사서 이를 만주로 내다팔기도 하였다.사업이 번창해지자 그는 제지업계의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광제회(廣濟會)라는 재단법인을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아울러 그는 이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산업과 제지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금광사업에투자하였다.일제 당시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조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운(運)을 담보로 한 금광사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분야는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로부터 별 간섭 없이 진출할 수 있던 분야이자 조선인 토착자본의 집중 투기대상이기도 했다.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에 있던 금은광산을 인수,자신의 이름을 따 ‘문명광산’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향후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경북지방의 모퉁이인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35년 그가 육·해군기 각 1대씩 비용으로 10만원을 헌납하면서부터다.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금광을 일제 당국의 주선으로 일본유수의 미쓰코시(三越)측에 12만원을 받고 매각하고는 그 대금 가운데 10만원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다.어림잡아도 현재의 10억원 규모의 거액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문명기호(文明琦號)’로 명명하였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의 해군대신 대리가 참석하였고 행사 후 해군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매일신보 1935.4. 7). 이후 그는 곧바로 영덕 국방의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다시 재향군인회 특별회원,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 등에 선임되었다.일약 이 지역의 명사로 등장한 그는 뒤 이어 경북도회 의원,중추원 참의에 피선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명성과 함께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그는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하고는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전개했다.이후 전국에서 군 단위나 단체별로 헌납 주체의 이름을 딴 ‘애국기헌납운동’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밀양 지역의 ‘밀양호 (密陽號)헌납운동’의 경우 총모금액은 10만원,모금대상은 전 밀양주민인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당시 ‘헌납병 환자’ 또는 그의 이름을 빗댄 ‘야만기(野蠻琦)’ 등으로 불린 그는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원,4만원을 헌납하였다.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제창하고는 솔선하여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하였다(매일신보 1943.1.24).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강요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동적·소극적 친일을 한 반면 그의 친일은 다분히 의도적·적극적이라는 데 분명한 차이가있다.중일전쟁이 발발(1939.7.7)하자 그는 황군(皇軍·일본군) 위문차 북지(北支·북중국)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전쟁 미화를 골자로 한친일연설을 하였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경부선 주변 각도시를 순회하며위문결과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듬해에는 의남(義男)단원을 강제로 모집,수많은 조선청년을 북지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일어판 친일지 ‘조선신문’사장,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협조에 광분하였다. 그의 대표적 친일행각 중 하나는 그가 전시하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조선 내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비치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가미다나’란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영부(靈符)를 안치한 것으로,이를 집안 높은 곳에 비치해 조상신으로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국으로 보급하기 위해 광제회라는 보급단체를 조직,자신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을 명예회장에 추대,남산 조선신궁에서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는 1차로 서울시내 각 정회 총대(町會 總代,동장) 130여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눠주었다.이후로 조선 내 각 가정에서는 신사참배와 함께 일본황실의 조상을 강제로 받들어야만 했다. 평소 일본 신도(神道)의 철저한 맹신자였던 그는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것으로도 유명하다.집안 치장이나 의복·언어는 물론 생활방식까지도 전부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였다.1943년 7월 그는 황도선양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1949.1.29)돼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호적에 따르면 이후 행방불명돼 생사확인이 곤란하다.
  • 朴仙淑 청와대부대변인의 요즘

    金大中대통령으로부터 ‘겉은 부드러우나 속엔 철사가 들어있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는 朴仙淑 청와대부대변인. 그녀는 요즘도 金대통령에게 받은숙제로 머리를 싸매는 때가 종종있다. 朴부대변인의 특장(特長) 가운데 하나는 감이 빠르다는 것.센스일 수도 있다.적게는 기자실에서부터 크게는 사회기류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읽어낸다.그리고 金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이 있으면 가감없이 전달한다.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잘한다는 점이다.“그만하세요”라며 스스로 삭이지,화를 내는 법이 없다.그래서인지 싫은 얘기를 듣거나 좋지못한 평가를 받으면 무척 억울해한다. 朴부대변인은 金대통령의 취임후 일반공보비서관(2급)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李姬鎬여사의 언론사 인터뷰와 金대통령의 국민과의 TV대화,金대통령의관광홍보가 그녀의 손을 거친 업무중 일부다. 최근 청와대 직제개편으로 일반공보비서관이 공보기획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직급도 지난달 29일로 1급(별정직)으로 올랐다. 39살의 최연소 1급여성비서관이 된 것이다.
  • 7급공채 평균경쟁률 99대1

    올해 7급 국가공무원 공채시험의 평균 경쟁률이 99대 1로 지난해의 절반 수준인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행정자치부는 1일 “올해 7급 공무원 공채시험 응시원서를 마감한 결과 475명 모집에 4만7,215명이 지원,평균 99.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250명 선발에 5만913명이 지원,20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모두 23개 직렬 가운데 경쟁률이 100대 1 이상인 직렬은 10명 모집에 5,392명이 지원해 539대 1의 최고 경쟁률을 기록한 검찰 사무직 등 12개 직렬이었다.지난해 검찰 사무직의 경쟁률은 719대 1이었다. 이밖에 3명 모집에 1,237명이 지원한 건축직이 412대 1,기계직 311대 1,전기직 306대 1,외무행정직 199대 1,행정(일반) 199대 1,토목직 189대 1 순이었다. 행자부 관계자는 “지난해보다 경쟁률이 떨어진 것은 모집인원을 지난해의250명에서 475명으로 늘린 때문”이라고 밝혔다. 7급 공채시험 필기시험은 오는 6월 20일 전국 16개 시·도에서 일제히 시행된다.
  • 금감위 증원 인원 제한규정 폐지방침에 논란

    금융감독위원회의 인력증원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금감위는 재정경제부로부터 금융기관 인·허가권을 넘겨받는 것을 계기로 현재 19명인정원을 50명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이를 위해 ‘금융감독기구 설치 등에관한 법률’의 “금감위 공무원은 회계·예산·의사 업무와 관련한 최소한의 인원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을 임시국회에서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은 재경부 출신 공무원들의 뒷자리를 봐주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특히 금감위 출범 때 사무국을 두지 않기로 한 여·야 합의사항을 어기고 인원을 늘리려 하는 것은 사무국 설립을 통해 관치금융을 재현하려는 관료주의의 부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감위 고위관계자는 1일 “금융기관 인·허가 업무를 총괄하고 법률 제·개정 업무를 재경부와 사전에 협의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원으로는 한계가있다”며 “인원제한 규정을 없애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금융기관 인·허가 업무를 담당했던 재경부 공무원들을 일시에 퇴직시킬 수는 없지 않으냐”며 “금감위 별정직 공무원들과 재경부 공무원 일부를 금감위 정원으로 흡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금감위 기획행정실과 구조개혁기획단은 연말까지의 한시 조직으로 돼있으며 기획행정실 8명,구조개혁기획단 18명 등 공무원 26명은 정원이 아닌별정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금감원은 금감위 인력을 증원하는 것은 심의·의결기구로 출범한 금감위의설립 취지에 정면으로 역행한다고 강조한다.관치금융의 부작용을 방지하기위해 최소의 인원으로 금감위를 두고 금감원을 통해 금융감독을 수행하는 금융개혁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금감원 노조는 성명서를 내고 “금감위 조직을 확대할 경우 감독행정 업무가 재경부 금감위 금감원으로 다원화,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피감독기관의 업무부담도 가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감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李憲宰 금감위원장이 어느쪽 손을 들어줄지 궁금하다.
  • 無보직 일반직공무원 32명 면직

    행정자치부는 지난해 제1차 정부구조조정에 따라 그동안 초과현원으로 남아있던 국가공무원 가운데 직권면직 시한인 31일에 직권면직된 사람은 32명인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일부 별정직 공무원은 지난해 7월 직권면직됐으나 일반직 공무원이 직권면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그러나 대상자 가운데 사표를 제출하는 형식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 최종 직권면직 숫자는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이날 직권면직된 공무원은 작년 구조조정때 보직을 받지 못하고 1년이 지난 사람들이다. 직권면직된 사람은 사무원과 위생원·교환원·방호원·운전원 등 모두 기능직이고,5급 이상 일반직은 한 명도 없다.행자부 관계자는 “직권면직을 제청한 부처가 한 곳도 없었다”고 밝혔다.5급 이상의 경우 임용권자가 대통령이어서 직권면직을 하려면 기관장은 행자부에 직권면직 제청을 하고,6급 이하는 소속 기관장이 직권면직하도록 돼있다. 각 부처는 대부분의 직권면직 대상자를 명예퇴직으로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문화관광부의 인사관계자는“13명의 직권면직 대상자가 모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徐東澈 朴政賢
  • [올 정부입법계획](中)통일·외교·안보·행정분야

    올해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및 일반행정 분야의 입법계획은 다음과 같다. (개=개정안,제=제정안)●남북협력기금법(개) 통일부장관은 대북 경수로사업비를 재경·산자부장관과 협의해 전기요금에 부과할 수 있도록 함.대북경수로사업비로 조성되는 자금은 별도의 계정을 설치해 관리함.기금의 여유자금은 외화자산 매입에 운용할 수 있도록 함.●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개)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응을 위해 5년간 우선취업을 보장함.거주지 보호기간을 2년에서 5년으로 연장함.정착시설 보호기간 중 고용보험 및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함.일정기간 조세를 감면하고 생활조정수당을 지급함.●외무공무원법(개) 외교직과 일반행정직을 외교통상직으로 통합·운영함.특임공관장은 연령정년제도를 적용하지 않음.●재외공관용 재산의 취득·관리 등에 관한 특례법(개) 재외공관장이 국외잡종재산을 관리·처분할 수 있는 근거를신설함.국유재산법상 잡종재산 처분방법,잡종재산의 대부기간 등에 대한 특례규정을 신설함.●재외국민등록법(개) 현행 20일 또는 3일로 돼 있는 재외국민의 주소·거소 또는 체류지 변경 신고기간을 일정하게 정함.등록신고를하지 않는 자에 대한 독촉,보호정지에 관한 규정을 삭제함.●국방대학교설치법(제) 국방대학원·국방참모대학·국방정신교육원을 통합해 국방대학교를설치함.입학대상에 사회단체 및 기업체 직원을 추가하고 교수 임용은 계약제로 함.●군인사법(개) 전군심사위원회를 폐지함.●병역법(개) 출원에 의한입영기일 연기대상 중 각군 모집에 응한 자 등에 대해 직권으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도록 함.병역의무부과통지서 교부를 지방행정관서에 위임할 수 있는 근거와 대학기관에 대한 병무행정 위탁규정을 신설함.●옥외광고물 등 관리법(개) 폐쇄명령을 받은 자에 대한 옥외광고업 신고를 제한하던 제도와 이법의 명령을 위반한 자에 대한 영업정지·폐쇄명령 제도를 폐지함.●선박 및 도선사업법(개) 유·도선 사업자에 대한 종사자 교육제도와 사고발생 보고제도를 폐지함.●온천법(개) 온천시설 및 온천이용시설에 대한 공무원 출입·검사제도를 폐지함.온천수와 지하수를 섞어 사용한 온천이용허가자 등에대한 온천이용 제한제도를 폐지함.●지적법(개) 토지소유자 또는 점유자의지적측량기준점 표석·표지 관리의무를 폐지함.●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개) 집회 및 시위 질서유지인 등의 준수사항 중 과도한 규제를 완화함.집회및 시위의 금지통고기간을 연장하는 등 규제를 완화함.●정부조직법(개)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개방형 직위 운영근거를 마련함.●도서개발촉진법(개) 개발대상 도서의 지정·변경,사업계획확정·변경시 대통령 승인제도와연도별 사업계획 확정시 국무총리의 승인제도를 폐지함.경미한 사업계획 변경 및 사업시행자 지정 권한을 시·도지사에게 이양함.●지방교부세법(개)지방교부세의 법정률을 현행 13.27%에서 17%로 상향조정해 지방자치단체의건전한 지방재정을 도모함.●소하천정비법(개) 소하천 공사의 착수기간 또는 준공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하지 않은 경우 허가가 실효되던 제도를 폐지함. ●대한지방행정공제회법(개) 회원을 일반회원과 특별회원으로 구분해 일반회원이 퇴직하면 특별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함.●지방공무원법(개)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위 등을 개방형 직위로 지정함.●민방위기본법(개) 읍·면·동 민방위기동대를 설치하고 민방위대 편성연령을 단축함.●도로교통법(개) 일반자동차운전학원의 등록,시설기준,지도감독 등에 관한 사항을 정함.●소방법(개) 소방검사제도와 건축허가 및 사용승인 동의제도를 개선함.●감사원법(개) 감사원장의 정년을 70세로 연장하고 예금계좌 추적권을 확대함.●지방세법(개)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간 세원배분체계를 조정함.●공무원연금법(개) 공무원연금기금을 공공기금으로 전환함.연봉제 도입 등 공무원 보수체계 변경에 따라 현행 공무원연금제도를 보완함.연금급여와 퇴직수당을 조정함.●지방자치법(개) 주민자치센터의 설치 및 기능과 육성·지원 근거를 신설함.●주민투표법(제) 지방자치단체의 폐치분합 등 주요결정사항을 주민투표 대상으로 정함.
  • [대한매일을 읽고]특정직 공무원 직급 조정 형평성 측면 환영

    일반공무원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특정직공무원의 직급이 조정될 전망이라는 기사를 보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대한매일 27일자) 우리 사회는 그 동안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빈부 격차가 너무도 컸던 게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 빈곤의 차이로 여러가지 사회적문제를 야기시켜왔다.이제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에게도 형평에 맞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차원에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외교관이나 판·검사 직급을 낮춰 일반직과 형평을 맞추는 것은 아주 좋은취지임에 틀림이 없다.다만 점차적으로 직종의 특성과 적합한 기준을 설정해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제도가 원만하게 잘 정착된다면 우리 사회는 진정으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세상이 될 것이다.이렇게 정당한 몫을 챙겨주는 사회가 될 때 불평등이 없는 공정한 사회로 국민의 공감대를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이형철 [모니터·회사원]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행정고시 1차시험 합격점 작년보다 1~2점 내려갈듯

    행정고시 1차시험(3월 14일)의 합격점은 일반행정직을 기준으로 지난해보다 1∼2점 내려갈 것으로 분석됐다. 본지 행정뉴스팀이 서울의 고시전문학원 및 전문가,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파악한 결과 전문가들은 문제복원이 되지 않아 정확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는점을 전제로 지난해보다는 다소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같이 밝혔다. 고시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신림동의 학원 두 곳은 어려웠다고 응답했으며한 곳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張澤東
  • 외교관·비상계획관 직급 내린다

    일반 공무원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특정직 공무원들의 직급이 조정될 전망이다. 기획예산위원회는 26일 정부 조직개편안의 확정에 따라 대사·총영사·공사등 외교관과 각 부처 비상계획관의 직급을 하향 조정,하반기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외교관은 1급보다 위에 있는 특1급과 특2급 공관장 66명을 포함,130명에 달하는 1급이상 외교관을 파견국과의 외교관계 등을 감안해 직급을 하향 조정해 정원을 감축하거나 특1,2급을 하나의 직급으로 합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또 외무고시가 내년부터 폐지돼 행정고시의 외교통상직으로 합해지면 직급도 일반공무원과 같은 방식으로 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부처별로 예비군동원,소집,비상시 부처조직을 관할하는 비상계획관도 국장급으로 둘 필요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직급을 현재의 2∼3급에서 3∼4급으로 내릴 계획이다. 법원과 검찰의 직급 인플레 문제는 다음달에 구성될 사법개혁위원회에서 추진한다.현재 초임검사나 판사들이 받는 급여(본봉)는 일반공무원 3급(부이사관) 수준으로 이는 일반공무원이 행정고시 합격후 평균 20년 지나야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권력기관일수록 직급 인플레가 심하다며 여건상 급여를 당장 줄이기 힘들면 일부를 수당으로 돌려 점진적으로 일반공무원과 형평을 맞추는 방안을 찾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 정부업무 개선·보완 미흡

    지난해 하반기 국무조정실의 심사평가조정관실이 국민연금 확대시행을 앞두고 도시주민의 실제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보완책을 촉구했는데도 보건복지부가 제대로 수용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무조정실은 26일 지난해 정부업무 심사평가를 통해 미흡한 것으로 지적된 정책 544건의 개선·보완책을 재점검한 결과 20건에 대한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는 ▒불공정거래에 대한 고발권을 검찰과 소비자단체로 확대 ▒직장보육시설 설치 및 공동육아협동조합 지원방안 ▒케이블 TV 전송망을 이용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중장기 자금소요 및 지원 계획 ▒국가차원의 벤처기업 창업공간 설치계획 ▒소액 다품종 수출 중소기업에 대한 해외물류거점 확보 ▒우수 지역 연구센터의 확대 설치계획 재검토 ▒자치단체의 도시교통정비계획 수립·시행 등이 포함돼 있다. 이와관련,심사평가실 崔慶洙 1심의관은 “지난해 각 부처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계획 가운데는 보고를 위한보고,과장 보고가 많았다”고 밝혔다. 다른 부처의 추진업무를 가져와 보고사항에 집어넣거나,몇 년까지 세계 몇위권에 진입하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보고가 대표적인 예로 지적됐다. 심사평가실에서 그런 보고에 대해 “주요 업무이니 평가대상에 넣겠다”고통보하면 해당부처 당국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만은 빼달라”고사정하기 일쑤였다고 한다.崔심의관은 “보고 내용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이이뤄져야 부처의 업무추진이 정직해진다”고 말했다. 李度運
  • 朴공보수석 강연서 지적“농·수협 정직해져야”

    농·축협의 비리사건과 해양수산부장관의 경질 이후 朴智元 청와대공보수석이 25일 수협을 찾아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얘기했다.그는 나름의처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강연을 마쳤다. 먼저 그는 농·축협이 수난을 당한것은 “농민과 축산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이 연장선에서 수협에도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아직 감사원 감사를 받지 않았으나 언론보도에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한·일어업협정 협상과정에서도 수협의 존재이유와 역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한·일어업협정 파문 이유도 우리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어민들이세금을 낼 때는 어획량을 줄여 신고하고 ●이해관계·권리를 요구할 때는 터무니없이 어획량을 과장하며 ●이에 대해 수협 임직원들과 관리들의 무책임과 무능으로 허술한 땜질식 대응을 했다고 질타했다.그는 한일어업협정 과정을 ‘충분한 내부 준비없이 안에서만 큰소리치고 활개치면서 밖에 나가서는눈치나 보며 어설픈 대응으로 일관한’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朴수석은 처방으로‘집에 불이 나면 뛰어드는’ 주인의식으로 무장한 자기개혁을 역설했다.또 국민의 피부에 와닿도록 조합차원에서 뼈를 깎는 자구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나아가 실무적으로 정확한 통계작업부터 다시 할것을 당부했다.그는 “어획량 등에 대한 믿을만한 통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일 어업협상에서 수모를 당했다.이제 어민도,조합장도,임직원도 보다 더정직해야 한다”고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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