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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협정 60주년] 1993년 NPT탈퇴 등 적대적 관계로

    [정전협정 60주년] 1993년 NPT탈퇴 등 적대적 관계로

    북한과 유엔의 ‘애증’ 관계는 40년 전인 1973년 북한이 국제의원연맹(IPU)과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해 유엔의 옵서버 자격을 얻으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전까지 북한과 유엔은 6·25전쟁에서 교전 당사자로 싸웠던 적대적 대결 관계였다. 유엔은 남한 정부 출범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남한 정부에만 국제적 정통성을 부여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북한은 유엔의 권능과 결정을 일절 부정하는 대(對)유엔 정책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북한의 대외 정책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유엔 가입을 추진, 1991년 9월 17일 남한과 동시에 유엔 회원국이 됐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진입한 뒤 대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유엔을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북한은 두 차례 유엔 가입을 신청했었지만, 이는 가입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남한만의 단독 가입을 막기 위한 정치적 대응 성격이 컸다. 실제로 북한은 유엔 가입 이후 대(對)서방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을 수용하는 한편 나진선봉 개방 및 경제특구 정책을 실시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개선 요구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1차 핵위기를 일으키면서 유엔과 적대적 관계로 돌아섰다. 1차 북핵 위기 당시 유엔은 북한의 NPT 탈퇴 선언 재고를 촉구한 결의 825호를 내놓은 데 이어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때마다 점차 수위를 높였으며, 2013년 2월 3차 핵실험까지 총 6개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3차 핵실험 이후에는 중국도 이전과 달리 유엔의 대북 제재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북한은 유엔 가입 이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북한의 유엔 탈퇴 가능성도 종종 거론돼 왔지만, 북한은 고립을 자초하는 대신 국제사회를 향한 항변의 통로로 유엔을 활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대남 비방 줄인 北… 개성공단 조속한 재가동 포석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이 이어지면서 북한이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남 비방은 크게 줄었고, 회담에 실무적으로 접근하려는 의지도 내비치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6일 전날 있었던 제3차 개성공단 실무회담 소식을 전하며 “쌍방이 개성공업지구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 초안을 내놓고 의견을 교환한 뒤 17일 4차 실무회담을 갖기로 했다”고 객관적 사실만 짤막하게 보도했다. 지난 10일 2차 실무회담이 끝난 뒤 3시간여 만에 결과를 보도하며 “남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났다”고 비난한 것과 대조적이다. 북한의 달라진 태도는 회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적인 요인을 최소화하고, 개성공단의 조속한 재가동 방안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지난 2차 실무회담 때 합의문 초안을 제시한 데 이어 3차 실무회담에서 합의문 수정안을 제안한 것도 의미있는 변화로 읽힌다. 북한 스스로 절충점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막상 회담에서 드러나는 남북 간 입장의 차이가 너무 커 쉽사리 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우리 측은 3차 실무회담에서 개성공단 재발방지대책 수립, 공단 국제화 등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개성공단의 조속한 가동이 급선무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분위기도 종전과 달리 냉랭했다. 일각에서는 협상이 장기화 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여기는 7·27정전협정 60주년을 앞두고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될 경우 회담 자체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지금까지의 회담이 개성공단에 대한 양측의 총론적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다면, 17일 개성공단에서 열리는 4차 실무회담은 보다 구체적인 각론을 논의하는 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3차 실무회담에서 우리측은 입주기업인들의 신변안전과 기업들의 투자자산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보완을 요구했다. 2차 실무회담 때보다는 구체화된 제안이다. 북측의 안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직 우리 정부가 수용할 만큼 무르익은 해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프고 아련한, 재미 이산가족·외국인 간호사의 한국전쟁

    아리랑TV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전쟁의 비극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 ‘미싱’(Missing)을 17일부터 4주간 수요일 오전 9시 방송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동편과 서편 출입구에서 제복 차림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은 뒤 5조 63항으로 작성된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한다. 주인공은 유엔군 수석대표인 미 육군 중장 윌리엄 케이 해리슨과 북한군 및 중공군 수석대표인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다. 두 사람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협정에 관한 협정’이라는 긴 제목의 문서에 서명한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각각 작성된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교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2분. 세계 최장의 정전 체계가 비롯된 한국 정전협정에 서명한 잉크는 말라버려 빛바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가슴 시린 사연을 폐부 깊숙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미싱’은 그들의 비극을 그린다. 1부에서는 재미 이산가족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미 이산가족들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북 이산가족상봉 협상 대상에서 제외돼 생이별의 아픔을 60년 동안 참아내야 했다. 상당수가 가족을 만나겠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2부 ‘전장의 나이팅게일’은 외국인 간호사들의 사연을 전한다. 외국인 간호사들은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부상병을 돌보다 숨져간 동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3부는 전쟁고아를 살리려고 군법까지 어겨가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어느 미군 장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중공군의 남하로 서울이 점령당하기 직전 한 학교에 피신해 있던 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후송한다. 그를 ‘아버지’로 기억하던 고아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한다. 4부에서는 세계 분쟁지역 아이들을 돕는 한국인들을 조명한다. 시리아는 60년 전 한국의 상황처럼 3년째 내전이 이어지고 있는 곳. 이곳의 소녀 디나는 부모가 처참하게 학살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디나를 구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나섰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미국·중국의 입장 美 ‘中 견제 전초기지’ vs 中 ‘대미 완충지대’… 전략적 인식 심화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한반도 분단의 조속한 종식과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의 여야 의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을 발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한반도 통일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통일 한국’은 친미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통일 한국’이 친(親)중국 성향으로 기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경우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소극적으로 변할 개연성이 크다.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11년 한 세미나에서 “그동안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룬 중국이 향후 수십년간 더욱 힘을 키워 미국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편승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설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에 매우 근접해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으로 부르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이런 계산법이 작용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발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한반도 방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이런 전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 방위 역량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것은 ‘미군의 북한 침략’이다. 중국의 대표 백과사전 격인 사해(辭海)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해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미군이 북을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 변경인 단둥(丹東)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키고 북한을 도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미화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화둥(華東)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남침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0년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했고, 그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이 돕겠다는 승락을 받았다”며 남침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관은 아직도 북침이다.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중국의 참전 결정은 마오가 소련과 밀착해 국내 정권 기반 강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국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참전 결정은 마오가 내린 것이고 마오는 중국의 국부여서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지만 당국이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물론 한반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은 중국에도 위협 요소여서 중국이 북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고 미국과 협력하면 북한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면서 “다만 이 경우 미군의 도움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분단 해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내다봤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러시아·일본의 시각 러 “北, 중·러 감정골 이용 땐 분단 상황 지속” 1948년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소련(현 러시아)은 영토 접경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소련은 영토가 크기 때문에 항상 완충지대를 만든다. 유럽의 핀란드, 중앙아시아의 몽골이 대표적이다. 북한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보루로 삼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소련이 갖고 있던 영향력의 우위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소련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북한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즈음만 해도 북한 지도부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시각에서 북한의 남침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이었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과 소련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북한이 이를 잘 활용하면서 분단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러시아는 한국이 통일되는 게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도 있는 등 한국의 통일이 러시아의 장기적인 이익과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분단의 ‘당사자’였다면 일본은 ‘수혜자’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한국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일본과 서둘러 맺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 일본은 정치적으로 ‘정상 국가화’ 됐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이 일본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교류 확대 통한 신뢰 구축이 내적통일 첫걸음”

    [정전협정 60년] “교류 확대 통한 신뢰 구축이 내적통일 첫걸음”

    동·서독을 가로막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올해로 24년째를 맞았다. 독일은 통일 이후 유럽 최대 경제 대국으로 등극했지만 독일 국민들 사이의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한반도가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경제 통합과 내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부터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일의 기독교사회당 계열 정치 재단인 한스 자이델 재단의 한국 사무소 대표인 베른하르트 젤리거 박사는 남한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북한을 현대화하는 과정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흔히 사람들이 통일 비용에 대해 우려하는데 이때 ‘분단 비용’을 간과한다. 군사비, 외교비,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한 북한 주민들의 삶 등과 같이 남북한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유무형의 비용은 통일을 하면 줄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싱크탱크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한국 사무소의 크리스토프 폴만 소장은 남북한 간의 군사 및 경제 협력, 문화·학술·스포츠 교류 활동 등을 통한 남북한 간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내적 통일을 향한 첫 번째 단계라고 말했다. 분단 이후 각 분야에서 남북한의 이질감이 극대화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 폴만 소장은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새터민들의 정착 과정을 돕는 과정에서 남북한의 내적 통합을 위한 해법을 모색할 것을 추천했다. 그는 “남한 사람들은 여전히 새터민을 ‘2등 시민’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새터민 역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인식한다”면서 남한 사람과 새터민이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거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만 소장은 아울러 “남한의 사회 경제적 조건과 이념적 성향의 차이에 따른 사회 대립이 심화되는 것도 한반도 통일의 해로운 요인”이라고 지적하면서 북한과의 신뢰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동시에 ‘남남 갈등’을 해소해 통일에 대한 국론을 통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환경부, 15일 광화문서 팟캐스트 오픈 스튜디오

    환경부는 서울 광화문 올레스퀘어 드림홀에서 15일 오후 7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비무장지대(DMZ) 생태환경대회 팟캐스트 오픈 스튜디오’를 마련한다. 이 행사는 오는 19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되는 ‘DMZ 60주년 생태환경대회’를 알리고 비무장지대 생태 환경 보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획됐다. 올해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 2㎞ 구간에 DMZ가 형성된 지 60주년 되는 해다. 환경부 팟캐스트 오픈 스튜디오는 감성 인디밴드 ‘캐스커’의 축하 공연으로 시작하며 오수진 KBS 기상캐스터와 개그맨 김기열이 진행을 맡는다. 이 자리에는 정연만 환경부 차관과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가 초대 손님으로 참석한다. 정 차관과 전 대표는 DMZ의 아름다운 자연, 생태계와 이를 보전하기 위한 환경정책, ‘DMZ 생태환경대회’ 행사 일정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환경부 팟캐스트 고정 게스트인 일렉트로닉 듀오 ‘캐스커’는 현장에서 콘서트를 열어 분위기를 띄우게 된다. 팟캐스트 오픈 스튜디오는 무료로 진행된다. 참석자는 온오프믹스 사이트를 통해 선착순으로 신청받으며 현장 입장도 가능하다. 광화문에서 라이브로 진행되는 팟캐스트 오픈 스튜디오 영상과 음원은 환경부 유튜브와 팟캐스트에 올려질 예정이다. 한편 지난해에 이어 열리는 환경부 팟캐스트는 자연 환경 정책을 쉽게 소개하고 영화, 다큐멘터리, 미술 등 다양한 문화와 자연의 만남 등 독특한 접근을 통해 생물 자원의 가치와 소중함을 전하고 있다. 오는 17일 공개될 예정인 시즌2의 마지막회에는 윤성규 환경부 장관이 초대 손님으로 나와 ‘미래를 준비하고 국민 행복을 완성하는 환경복지 실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세종 유진상 기자 jsr@seoul.co.kr
  • 15일 남북 3차회담… 잇단 돌발변수에 개성공단 재가동 안갯속

    15일 열리는 남북 3차 실무회담에서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동 중단 책임소재와 재발방지 대책 등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 워낙 크고, 2차 회담 이후 새로운 변수들이 불거져 일단 ‘난산’이 예상된다. 북한은 지난 10일 개성공단 2차 실무회담 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을 제안했지만,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카드’만을 받았다. 이에 북한은 이튿날 두 가지 제안 모두 보류한다고 통보해 왔다. 이와 관련,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3일 당시 북측이 보낸 전통문을 뒤늦게 공개했다.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명의로 된 전통문에서 북측은 이산가족 상봉 실무회담만을 수용한 우리 측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개성공업지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앞으로 북남관계에서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개성공단 문제에 ‘배수진’을 치고 협상에 임하겠다는 얘기로 우리측에 보내는 경고메시지로도 읽힌다. 통일부가 실무회담 수석대표를 전격 교체한 것도 변수다. 특정 사안에 대한 회담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책임자를 교체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14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을 거부당한 불만과 우리 측 새 수석대표 길들이기 차원으로 강력하게 나올 수도 있다”면서 “3차 회담은 4차 회담 날짜만 합의해도 잘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화가 단절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 북측은 조평통 전통문에서 “남측은 우리의 아량과 노력에 대해 오판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7·4공동성명과 6·15공동성명의 정신’을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인 7·4공동성명을 강조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의 ‘협력’을 바라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측의 국면전환 의지가 강력하기 때문에 대화를 접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실무회담을 계속하기보다 ‘급’을 높인 회담을 제안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4차 회담에서는 남북이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60주년 기념일이면서 자신들이 전승기념일이라고 주장하는 오는 27일을 즈음해 가시적 성과를 내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주년 기념메달

    정전협정 60주년 기념메달

    11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한국조폐공사 영업개발단에서 모델들이 6·25 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기념해 발행된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금·은메달 2종 각각 1000개와 3000개씩 발행됐다. 기념주화 및 메달은 오는 15~26일 풍산 화동양행과 농협 본점 및 전국지점에서 선착순 예약 판매할 예정이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열아홉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가 가족 품에 돌아오는 데는 꼬박 61년이 걸렸다. 그 사이 누나는 팔순을 훌쩍 넘겼고, 여동생은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1952년 6월 휴가를 나온 그는 고향(경북 문경)에 고구마를 심어 놓고 “가을에 캐서 맛있게 먹어라”라고 당부한 뒤 부대로 돌아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철호(1931~1953) 이등상사 이야기다. 정 상사의 손때 묻은 유품이 누나 정상남(87), 여동생 정경분(68), 조카 정용수(55)씨에게 전달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단장 박신한 대령)은 11일 유해발굴 당시 정 이등상사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유품, 전사자 신원확인서 등을 울산 울주군의 정용수씨 자택에서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오빠의 흔적을 맞이하려고 대구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여동생 정씨는 “1953년 전사통지서를 받은 어머니께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휩싸였다”면서 “1979년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등 평생을 한으로 보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고령인 누나는 복받치는 감정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고인은 1950년 11월 27일 입대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총명했고, 당시 시골에서는 드물게 중학교에 다녔다. 영어도 곧잘 했다’고 기억했다. 평남 영원전투와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횡성전투 등에 나섰다. 1953년 4월 상이기장을 받았고, 1954년 10월에는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될 만큼 전공을 세웠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가 발굴된 건 지난 5월 21일이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15~18일 중공군 60군 181사단을 상대로 국군 8사단이 한 치의 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철원 별우지구 현장에서 국유단이 유해와 철모, 야전삽 등을 발굴한 것.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픈 고인의 간절한 바람 덕일까. 유해와 함께 드러난 부식된 나무도장을 정밀감식한 결과 ‘鄭喆鎬’(정철호)란 이름이 나왔다. 병적기록부를 추적한 결과 6명의 동명이인이 확인됐다. 참가 전투 지역을 바탕으로 범위를 좁힌 국유단은 조카와 여동생의 DNA 시료를 채취해 혈연관계를 최종 확인했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는 유가족과의 협의를 거쳐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박근혜정부, 北 붕괴정책 없다”

    “박근혜정부, 北 붕괴정책 없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11일 “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며 “정부는 한반도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공론화하기를 원하지만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의도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북한을 상대로 ‘체제 위협에 대한 걱정 없이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나서라’고 설득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윤 장관은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을 기반으로 한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윤 장관은 또 “과거 한·중 관계에서 (한반도) 통일 문제는 터부시됐지만,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중국 지도자들과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북한이 주장해 온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에 대해서는 “비핵화에서 막히니까 평화체제로의 길도 막혔고, 이를 논의한다는 게 현실과 멀리 느껴지는 상황이 됐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남북 간 낮은 단계의 교류부터 경제·사회적 협력이 진전되고,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는 정치·안보적 신뢰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며 “박근혜 정부는 사전에 준비된 평화, 단단한 평화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북한과의 대화 재개 조건으로는 “남북 대화든 6자회담이든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진정성 있고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장관은 한국 등 워싱턴 주재 38개국 대사관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도청 의혹에 대해 “미국 정부의 회신 내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이날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북한정책포럼 조찬 강연을 통해 전날 북한의 금강산 관광 재개 실무회담 제의와 관련, “개성공단 정상화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경우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도 논의될 수 있다”며 선(先) 개성공단 정상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北 동시다발 대화 제의] 개성공단·금강산 ‘패키지’ 전략… 고립 탈피·경제 실리 복합 작용

    [北 동시다발 대화 제의] 개성공단·금강산 ‘패키지’ 전략… 고립 탈피·경제 실리 복합 작용

    북한이 10일 ‘금강산 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회담’을 ‘패키지’로 제안한 것은 현재의 남북 대화 국면을 발판 삼아 북·미 고위급 대화까지 밀어붙일 동력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 유관국과의 관계 개선과 대화도 원만히 이뤄질 수 없고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시다발적 대화 제의로 남북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착시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우리 국민의 감성을 자극해 남북 대화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패키지 제의에 끼워 넣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금강산 관광 재개 실무회담은 보류됐지만 북한이 오는 15일 개성공단, 17일 금강산, 19일 이산가족 상봉 실무회담 식으로 날짜를 바투 잡아 제안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18일에는 북한 여자축구팀이 동아시아연맹(EAFF) 축구선수권 대회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 간 화해·평화 무드를 대외에 과시할 수 있는 ‘황금주간’이 완성되는 셈이다. 7·27 정전협정 60주년 이전에 국면의 대대적인 전환을 꾀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은 15일 개성공단 3차 실무회담에서 전향적 자세를 취한 뒤 여세를 몰아 징검다리식으로 전기를 마련하려 했을 것”이라며 “이달 안에 3개 사안에서 진전을 이룩하려는 나름의 전략적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은 또 이날 오후 7시께 보낸 전통문에서 집중호우로 예성강 지역의 수위가 높아 자정에 예성강 발전소의 수문을 열어 수위를 조절하겠다는 내용을 우리 측에 통보했다. 황강댐 방류 사전 통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2002년 유럽-코리아 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북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안한 것을 계기로 시작한 사업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미국과 중국이 선(先) 남북 대화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립 국면을 벗어나려면 대화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위해 대화 가능한 모든 채널을 가동해 보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측과의 관계를 풀지 않으면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이 어려운 데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경제적 실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일단 이산가족들의 정서를 고려해 북한의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상봉 관련 실무회담만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북한의 제의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입장을 밝히지는 않겠다”면서 “북한이 대한민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신뢰받는 대화 상대방이자 책임 있는 성원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中, 김정일 밀랍인형 北에 선물

    中, 김정일 밀랍인형 北에 선물

    중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밀랍 인형을 만들어 북한에 선물했다. 중국은 오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을 포괄적인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승리 기념일’(10월 25일)로 간주해 당과 민간 차원에서 북·중 간 우의를 다지는 행사도 벌일 계획이다. 10일 관영 통신인 중국신문사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는 전날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 밀랍 인형 증정식’을 열고 북측에 김정일 밀랍 인형을 전했다. 북한 측 참석자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통신은 북한이 항미(미국에 대항해 싸움) 승리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27일 묘향산 국제우의궁에서 이 밀랍 인형의 제막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중국위인밀랍인형관이 제작한 이 인형은 말년의 김 위원장 모습으로 김 위원장이 외부 시찰 때 즐겨 입던 인민복과 야전 외투를 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에 김 위원장의 밀랍 인형을 선물한 것은 3차 핵실험으로 한동안 냉각됐던 북·중 관계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이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데 이어 3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양국의 고위급 교류는 완전히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의 방중을 계기로 관계가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잠시 헤어졌던 가족들 63년이나 못 만날 줄이야”

    [정전협정 60년] “잠시 헤어졌던 가족들 63년이나 못 만날 줄이야”

    “우리 어머니가 잘해 주셨던 콩비지, 그 맛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는 암만해도 맛이 없어. 동생들과 나눠 먹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경기 안양시에 사는 김인옥(왼쪽·90) 할머니는 북에 두고 온 봉숙, 봉옥, 인봉 등 세 동생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면서 “우리만 편하게 살아온 건 아닌지, 늘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은 채 살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김 할머니는 1944년 고향인 평안북도 삭주군을 떠나 서울 서대문구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왕래가 자유로워 동생들과 헤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60년 세월을 갈라놓은 휴전선이 너무 밉다”면서 “명절 때면 왔다 갔다 하며 동생들과 참 행복하게 지냈는데 죽기 전에 그저 같이 살아만 봤으면 원이 없겠다”며 흐느꼈다. “60년 세월, 이제는 늙고 쇠한 내 얼굴을 동생들이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이라는 그는 “동생들과 꼭 살아서 만나고 싶다. 꼭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인천 남동구에 사는 김근희(오른쪽·90) 할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부모님과 다섯 동생들만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도 열흘 후에 다시 볼 줄 알았던 가족과의 이별이 63년 생이별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불효자로 평생 가슴을 치며 살았다”면서 “언제 한번 장남 노릇을 해 볼지…. 이제 그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다”며 쉰 목소리로 흐느꼈다. 남쪽에 내려와 다방과 옷가게, 택시운전 등 안 해 본 일 없이 살아왔다는 그는 “명절 때만 되면 가 보지 못한 고향, 만나지 못하는 동생들, 내복 하나 챙겨 드리지 못했던 부모님이 떠올라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머릿속에는 어렸을 적 동생들의 얼굴이 생각나는데 동생들도 벌써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을 것”이라면서 “하루빨리 만날 날만 기다린다”며 두 손을 모았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국군포로·납북자 현황

    국군 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은 지난 60년 동안 저마다 가슴속에 커다란 ‘멍에’를 안고 평생을 견뎌 왔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정전 체제의 한반도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귀환한 국군 포로와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현재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를 5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2006년 6월 공개한 자료에서 탈북자 신문 등을 통해 국군 포로 총 1734명의 신원이 확인됐으며 이 중 생존자는 548명, 사망자는 885명, 행방불명자는 301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가운데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는 1994년 조창호 소위를 비롯해 80명에 불과하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교환으로 국군 포로 문제가 일단락됐으며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칭도 ‘국군 포로 출신’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포로 교환 당시인 1953년 유엔군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 8만 2318명 가운데 공산군이 최종 송환한 국군 포로는 8343명뿐이다. 북한이 2000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 교환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생사를 확인해 준 국군 포로는 19명이며 이 중 17명이 남측 가족과 상봉했다.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운동을 벌여 온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는 지난 4월 북·중 국경 인근의 북한 탄광 지역에 국군 포로 113명이 생존해 있다며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부가 추정하는 ‘전후 미귀환 납북자’ 숫자도 517명에 달한다. 대부분 선원들이다. 귀환한 전후 납북자 3318명 중 3310명은 납북 후 1년 이내에 송환됐지만 8명은 30년 이상 북한에 억류돼 있다 2000년 이후 탈북에 성공해 귀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전시 납북자’는 공식 집계된 인원만 1991명이다. 북한은 송환은 커녕 납북 사실을 시인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인 납북자 및 그 가족까지 돌려보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4일,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廢)코발트광산. 일제가 군사용 코발트를 확보하려고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해 1942년 폐광된 동굴 입구는 냉동 창고 문이라도 열어 놓은 듯 한기를 쏟아냈다. 안전모를 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들어선 갱도 바닥에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고 침침한 전구 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색의 갱도 옆 벽면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꼭 온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100여m를 더 들어가자 수직으로 뚫린 또 하나의 굴과 연결됐다. 동행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박의원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수직 동굴 저 위쪽에서 6·25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직 동굴 높이가 50m 정도인데 시체로 가득 차 더는 못 떨어뜨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골짜기 이곳저곳에 시체들을 묻었다고 해요. 동굴에서 기관총 탄피나 수류탄 흔적도 발견됐어요. 산 채로 떨어진 사람들을 확실하게 처리했던 모양이에요.” 1950년 7~8월, 이곳에서 민간인 3500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경산, 청도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명,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여명 등이다. 앞서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좌익에 전향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년 만에 보도연맹원 숫자는 30만명을 웃돌았다. 지역 할당제가 떨어지자 빨치산의 짐을 날라 주고 밥을 해 주고 심부름을 해 줬던 이들까지 보도연맹원으로 엮어 넣은 탓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과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 학살에 나섰다. 1950년 여름, 남한 전역 수십여 곳에서 벌어진 학살 중 대전 산내 골령골과 더불어 가장 희생자가 많은 곳이 바로 경산이다. 1990년대부터 경산코발트광산 사건 규명에 천착해 온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정말 논매고 밭매다 붙들려 간 억울한 분들도 있겠지만 희생자 대부분이 보도연맹원인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단순 부역을 했던 분들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법적 근거 없이 죽임을 당할 죄는 결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회는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유족들은 군사정권의 서슬에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을 죽였다. 2000년대 들어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이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정부와 경산시는 뒷짐만 졌다.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에 나서 420여구를 수습했다. 이전까지 유족회가 발굴한 유골이 80여구다. 그동안 이곳에는 골프장과 노인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수십~수백m 떨어진 폐광과 골짜기에는 여전히 3000여구의 유골이 방치된 상황이다. 2010년 특별법 종료와 함께 발굴은 중단됐고, 그나마 유족들이 발굴한 80여구마저 임시 컨테이너에서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5·16 이후 유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으며 현재까지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고 있으며, 특히 연좌제로 인한 사회적 차별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유가족 300여명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121억여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남편을 잃은 10여명의 부인들을 비롯한 유족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겪고 있다. 나정태 유족회 부회장은 “3000여구의 유골도 수습해야겠지만 시급한 건 컨테이너에 보관된 탓에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80여구를 처리하는 문제”라면서 “충북대에 보관 중인 420여구도 내년까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군 유해 발굴 사업처럼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똑같은 국민”이라면서 “유골을 모아 합동 화장을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와 작은 기념관 정도는 세울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산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지척의 北기정동에 형님 두고도 60년간 못 만나”

    [정전협정 60년] “지척의 北기정동에 형님 두고도 60년간 못 만나”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지만 평생 농사지은 경작지의 땅 한평조차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곳. 시집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시집간 딸은 주민이 아니어서 친정 왕래조차 쉽지 않았던 곳. 최북단 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DMZ)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민간인 거주지 대성동 마을의 얘기다. 대성동 마을은 ‘남북 비무장지대에 1곳씩 마을을 둔다’는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북측의 기정동 마을과 함께 1953년 8월 조성됐다. 행정구역상 경기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며 현재 50여 가구 2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대로 이 마을에서 생계를 일궈 온 주민들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영문도 모른 채 ‘특별구역’ 주민으로 60년을 살아왔다. 대성동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60년 분단의 ‘나이테’를 몸에 새긴 마을 주민 박필선(80), 김경래(77)씨를 3일 파주시 문산읍에서 만났다. 대성동 마을은 최근 남북 간 군사 긴장이 고조되면서 출입이 더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전쟁이 난 건 그날 아침에 알았어요. 그 전에도 포 쏘는 소리는 종종 들어서 양측이 또 교전을 하나 보다 했는데 웬걸, 전쟁이 터졌다는 거예요. 임진강을 건널 배도 없고 해서 그냥 살았죠.” 김씨는 14살이 되던 해 이 마을에서 전쟁을 맞았다. 밤에는 한국군이, 낮에는 인민군이 마을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마을 청년들은 숨을 죽인 채 3년을 살아야 했다. 인민군이 국군으로 위장하고 마을로 들어오는 바람에 환영을 나갔다가 붙잡혀 간 마을 주민도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잡혀간 주민 중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박씨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옆 마을 기정동에 친형님을 두고도 60년간 만나지 못했다. 박씨는 “왕래를 못 하니 아직도 큰형님이 기정동에 사는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아직도 지척인 옆 마을에 사신다고 생각하고 위안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이 한창일 때도 마을 청년들은 총을 들고 마을을 지켜야 했다.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판문점 반경 2㎞ 내에서는 교전이 금지됐지만 양측 군대가 조금씩 밀고 들어오면서 판문점과 1.5㎞ 떨어진 이 마을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씨는 “마을 청년 13명이 소총을 들고 지켰다”며 “마을 산기슭에까지 포탄이 날아들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마을을 지켜냈지만 휴전 이후에도 대성동의 수난은 계속됐다. 1997년 도토리를 줍던 마을 주민 홍승순씨 모자가 북한군에게 끌려갔다가 5일 만에 풀려났고, 이보다 앞선 1975년에는 마을 부근에서 북한군 2명이 농부를 강제로 납치하기도 했다. 김씨는 “1960년대에 마을 주민 한 명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는데 어찌나 끔찍하던지, 그때는 정말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북한의 ‘임진각 군사적 타격’ 위협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지기도 했다. 박씨와 김씨는 “남들은 우리 마을이 병역도, 납세 의무도 없다며 부러워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박씨는 “통일이 돼 집도 논도 없이 설령 빈손으로 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가장 큰 희망은 통일”이라고 말했다. 문산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4) 남북 군사 대치 (하) 北의 협정 위반과 일촉즉발 위기

    [정전협정 60년] (4) 남북 군사 대치 (하) 北의 협정 위반과 일촉즉발 위기

    북한은 지난 60년 동안 끊임없이 무력 도발을 시도했다. 정전협정이 무색할 정도다. 특히 무력 도발 빈도는 줄어든 반면 수위는 상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력 도발 방식 역시 다양화, 노골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부터 1994년 4월 말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행위는 무려 42만 5271건에 이른다. 특히 지금까지 무력을 동원해 우리 영토와 국민들을 직접 위협한 행위는 간첩 남파 등의 침투 도발이 1959건,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국지 도발이 994건이다. 60년 동안 해마다 평균 49건, 일주일에 1건씩 발생했다는 얘기다. 유엔군사령부가 1994년 5월부터 위반 사례를 집계하지 않아 더 이상의 자료는 없지만 북한의 도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1968년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이다. 북한 무장 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가 발각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1980년대까지는 이렇듯 무장간첩 등의 테러 도발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974년 8월 1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 기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탄 테러, 1987년 11월 28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1974년, 1975년, 1978년, 1989년에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도 발견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가 두드러졌다. 북한은 1991년 3월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수석대표에 우리 군 장성이 임명되자 불참을 선언했으며 1994년 4월에는 아예 군정위에서 철수했다. 이듬해인 1995년 9월에는 북한이 중립국감독위원회마저 봉쇄했다. 군정위와 중감위의 설치 근거인 정전협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북한은 이어 1996년 4월 정전협정 의무 이행 포기를 선언한 뒤 지금까지도 한·미 군사훈련 등을 구실 삼아 정전협정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또 북한의 해상 침투가 두드러졌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사건’이 발생해 무장 공비 13명이 사살되고 11명은 자폭했다. 1998년 6월과 12월에도 각각 강원 속초와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이 발각됐다. 2000년대부터는 남북 간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등 도발 수위가 이전에 비해 대폭 상승했다. 1999년 6월과 2002년 6월에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선박의 북방한계선(NLL) 무단 침입을 계기로 제1, 2차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이 중 2차 연평해전 때는 우리 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 11월에는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우리 해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대청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2010년 3월 26일에는 북한 잠수정 어뢰에 의해 우리 초계함이 격침당해 해군 장병 46명이 목숨을 잃는 ‘천안함 폭침 사건’까지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23일에는 북한이 연평도에 10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이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 공격으로 기록됐다. 북한은 또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전면에 내세워 국제사회를 압박하는 공세도 펴고 있다.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북한은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지난 2월 등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했다. 아울러 북한은 1998년 8월 사정거리 2000㎞급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시험 발사한 이후 지속적으로 장거리 로켓을 쏘아올리고 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화됐기 때문에 북한이 레토릭(정치적 수사) 차원의 비난 수위를 높일지는 몰라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면서 “다만 우리가 방심할 경우 이를 명분 삼아 틈새를 파고들 가능성이 있고, 그 위험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고 지적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남북 관계가 악화될 경우 NLL을 중심으로 한 무력 충돌 가능성이 상존한다”면서 “북·미 관계가 나빠진다면 핵실험 등 대량살상무기를 활용한 위협이 반복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北초소까지 1.2㎞… “우리도 北도 항상 상대 주시”

    [정전협정 60년] 北초소까지 1.2㎞… “우리도 北도 항상 상대 주시”

    임진강 하구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240여㎞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는 정전 협정의 산물이다. 협정은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양측 모두 2㎞씩 뒤로 물러나 너비 4㎞의 완충 지대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전 체제 60년이 이어지면서 DMZ는 ‘화약고’로 변했다. 북한군은 1960년대부터 DMZ 내부로 슬금슬금 초소를 옮겼다. 뒤질세라 우리 군도 일부 초소를 MDL 쪽으로 북상시켰다. 강원 철원군 ‘철의 삼각지대’에 자리 잡은 천왕봉 OP(관측소)도 그중 하나다. 6사단 청성부대가 주둔하는 이곳은 당초 남방한계선 이남에 있었지만 1975년 제2땅굴이 발견되면서 군사정전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1.4㎞ 북쪽으로 초소를 옮겼다. 천왕봉 OP에서 MDL까지는 불과 600m. 가장 가까운 북한군 GP(감시초소)는 1.2㎞다. 말 그대로 최전방이다. 천왕봉 OP 중대장 김방한(30·학군 44기) 대위는 “6·25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걸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입을 뗐다. 그는 “MDL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지점까지도 수색, 매복을 들어가는데 그곳에선 육안으로도 적의 활동을 볼 수 있다. 물론 저들도 늘 우릴 지켜보고 있다”면서 “우리만큼 저쪽도 똑같이 준비하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대위는 북한의 무력시위가 고조되던 지난 3월 부임했다. 그는 “민간에서는 북한의 특이 동향이 발생할 때 위협을 느끼겠지만 이곳은 늘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달라질 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인근 오성산 초소에 출몰했을 때 북한군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면서 긴장이 고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어떤 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최상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끔 군기 사고에 대해 민간인들이 ‘군이 썩었다’는 식으로 매도하면 장병들은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면서 “북한이 언제든 다시 위협해 올 수 있는 만큼 후방에서 진심 어린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철원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남북 군사 대치 (상)끊임없는 중무장 경쟁

    [정전협정 60년] 남북 군사 대치 (상)끊임없는 중무장 경쟁

    정전 체제가 이어진 60년 동안 남북의 군비 경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냉전 해체 이후 군축 바람이 불었지만 한반도는 예외였다. 국내외의 정치·경제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서로를 의식하며 꾸준히 방위비를 늘렸다. 상대가 없으면 존재 의미를 잃는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군비 경쟁은 몸의 일부가 붙어 있는 ‘샴쌍둥이’와 다르지 않았다. 영국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연차보고서 ‘밀리터리밸런스’(1987~1988년판)에 나온 1955~1985년 방위비 추이를 보면 남북은 1970년대부터 군비 경쟁에 나섰다. 먼저 치고 나간 쪽은 북한이다. 1970년 북한의 국방비 규모는 9억 3600만 달러로 남한(7억 5300만 달러)을 압도했다.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은 북한이 11%, 남한이 3.7%였다. 1차 율곡사업(1974~1981)이 착수될 당시 우리 군은 M1 소총 등 2차 세계대전 장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국방부가 펴낸 ‘율곡사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따르면 1974년 당시 한국군 전력은 북한군의 50.8% 수준에 불과했다. 1970년대 중반, 경제 도약과 더불어 남한의 국방비 지출도 늘어났다. IISS에 따르면 1975년 우리 국방 예산은 12억 8600만 달러로 북한(8억 7800만 달러)을 넘어섰으며 이후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연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1970년대 중후반 혹은 1980년대 초에 남한은 북한의 국방비를 넘어섰다. 국방비 누적액 또한 2000년 전후 북한을 추월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북한의 군사력 우위는 이후 한동안 이어졌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1992년 말 남한의 전력을 북한의 71%로 평가했다. 남북의 재래식 군사력은 2000년대 들어 반전됐다. 2004년 KIDA의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육군은 남한이 북한의 80%, 해군은 90%, 공군은 103% 수준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연구용역 과정에서 북한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남한 전력은 과소평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방예산 삭감을 우려한 군의 정책적 판단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KIDA는 남북한 군사력 비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전과 달리 주요 무기 체계와 병력, 성능을 고려해 전면전 상황에 대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주한 미군과 전시 증원 병력을 빼고도 한국군이 북한군보다 10% 정도 우세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핵과 미사일 등의 비대칭 전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방비를 늘리고 있다. 지난 4월 노동신문은 올해 예산의 16%가 국방비라고 밝혔다. 식량난에도 지난해보다 0.2% 포인트 늘었다. 북한이 국방비 비율을 높인 것은 2005년 이후 8년 만이다. 북한의 전체 국가예산 대비 국방비 비중은 2005년 15.9%로 처음 한국을 추월하고서 올해까지 9년째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국방비 총액은 GDP의 30% 수준인 연간 10조원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도 만만치 않다. 2003년 17조 5000억원에 그쳤던 국방비가 2005년(21조 1000억원)에 20조원을, 2011년(31조 4000억원)에는 30조원을 돌파했다. 올해 국방예산은 34조 3453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14.5%를 차지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은 최근 5년간 국방비의 연평균 증가율은 5.2%에 달했다. 같은 기간 전체 예산의 평균 증가율은 3.8%에 그쳤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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