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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의회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참여

    경기도의회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참여

    경기도의회가 8일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이번 서명운동은 “한국전쟁을 끝내고 휴전에서 평화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를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모아가는 국제 캠페인으로,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었던 2020년부터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진행되며 전 세계 1억명의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달 전국시도의회운영위원장협의회 제7차 정기회에서 서울특별시의회 운영위원장이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동참을 제안했고, 이에 경기도의회에서도 경기도민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염원을 전달하고 지혜를 함께 모으자는 뜻으로 장현국 의장을 포함, 142명의 경기도의원 전원이 캠페인에 참여했다. 특히 이날 이재명 경기도지사 및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등 집행기관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더욱 의미 있는 서명 운동이 진행됐다. 이날 사회를 맡은 경기도의회 정승현 운영위원장은 이번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 운동에 동참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며 “경기도는 분단과 대결의 장소였던 DMZ가 위치한 상징적인 지역으로 한반도 평화 번영과 남북한 화해 협력을 위하여 남북교류추진 특별위원회 구성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 차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도의회 서명부는 캠페인이 종료되는 2023년 한국전쟁 관련국 정부들과 유엔에 전달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펼쳐친 ‘그날을 향한 염원’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펼쳐친 ‘그날을 향한 염원’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이 거대한 야외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경기도가 주최하는 ‘Let´s DMZ 평화예술제’의 하나로 경기도미술관이 기획한 ‘DMZ아트프로젝트-다시, 평화’가 지난 20일 개막해 6월 15일까지 펼쳐진다. 소강 상태인 남북 교류가 재개돼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조각, 회화, 설치, 깃발, 영상 작품 등 200여점을 만날 수 있다. 강익중 작가는 20여년 넘게 구상해 온 ‘꿈의 다리’를 선보였다. 가로 5m, 높이 7m의 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7000여장의 그림 조각으로 완성됐다. 안쪽은 비무장지대 내 유일한 초등학교인 대성초 학생을 비롯한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이, 바깥쪽은 민요 ‘아리랑’ 가사를 소재로 한 강 작가의 ‘아리랑’ 연작으로 채워졌다. 임진강 위에 남과 북을 잇는 ‘꿈의 다리’가 실현될 그날을 향한 염원을 담은 이 작품은 1년간 설치될 예정이다.정현 작가의 ‘서 있는 사람’은 오래된 철로의 폐침목으로 만든 인간 형상의 조각이다. 남북 간 끊어진 철로의 상징적 공간인 임진각 평화누리 언덕에 정전협정 68주년과 평화로 나아가는 상징을 더해 총 70개의 작품을 배치했다. 미디어 작가 백남준이 2000년 1월 1일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전 세계에 송출했던 영상 ‘호랑이는 살아 있다’도 다시 만난다. 백남준은 “나는 한 마리의 호랑이로서 서구에 진출해 예술 현장에서 저들을 이기고 있으니 우리 민족도 세계사의 유례가 없는 분단국의 처량한 신세를 청산하고 이제는 어엿한 통일 국가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영상은 밤 12시에 평화누리 공원에서 상영됐다. 21년 만에 대형 LED 전광판으로 평화누리 공원에서 선보인다. 이 밖에 이영섭의 발굴조각 ‘어린왕자’, 송창의 회화 작품 ‘의주로를 밟다’, 최문수의 조각보 깃발 설치 작품 등이 소개된다. 전시 기간 중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오는 30일에는 안은미컴퍼니가 ‘북.한.춤’을 선보이고, 6월 13일에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평화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서울시의회, ‘한반도 평화선언 KOREA pEACE aPPEAL’ 서명운동 동참

    서울시의회, ‘한반도 평화선언 KOREA pEACE aPPEAL’ 서명운동 동참

    서울특별시의회(의장 김인호)는 4일 시의회 본관 로비에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함께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한반도 평화선언 Korea Peace Appeal’ 서명 운동을 진행하며, 동료 시의원과 서울 시민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은 “한국전쟁을 끝내고 휴전에서 평화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를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모아내려는 국제 캠페인이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인 2020년부터 정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2023년까지, 전 세계 1억 명의 서명과 각계각층의 지지 선언을 모으고 연결해, 한국전쟁을 끝내고 한반도 평화를 이루는 것이 그 목표이다. 현재까지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에는 한국의 7대 종단을 비롯해 360여개의 시민사회단체와 개인 제안자, 그리고 50여개의 국제 파트너 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김정태 운영위원장(더불어민주당·영등포2)은 이 캠페인의 의미에 대해 “우리 민족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에서 세계적인 모범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지난 세기의 냉전 속에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 것이다. 수백만의 사상자를 낳고 천만 이산의 고통을 가져온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 지난 세기의 정치군사적 대결과 대립, 그에 따른 피해와 불안은 지금도 우리 시민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이제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그 고통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한반도 평화는 시민들의 힘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남북한 정부와 주변 국가들도 나서야 한다. 이에 대해 김위원장은 “우리 현대사는 남북한이 상대를 불신하며 굴복시키려는 적대정책으로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커녕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불안정한 휴전상태로 한반도는 핵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며 세계적인 군비 경쟁의 촉발장이 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남북한 정부와 한반도 주변 당사국들이 함께 나서서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진지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닫힌 대화의 문을 열어달라는 서울 시민의 뜻과 마음을 담아 이 서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서울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의 동참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 그에 바탕한 시민의 안전과 행복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며 동료 시민과 서울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펑더화이와 마윈/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펑더화이와 마윈/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중국 당중앙 정치국원과 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는 공산 혁명을 위해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사선을 넘나든 혁명 동지다. ‘마오의 오른팔’로 불린 그는 1928년 공산당에 입당해 항일전쟁 때 주더(朱德) 총사령관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홍군을 이끌고 가장 위험하면서도 남들이 꺼리는 임무를 수행하며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칭병하며 사양한 린뱌오(林彪) 대신 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맡아 120만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다. 6·25전쟁 3년간 일진일퇴의 전투가 이어지면서 400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1953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함께 정전협정을 체결한 그는 중국에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한반도 분단과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을 낳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 나고 4000만명이 굶어 죽는 참상을 목도한 펑더화이는 1959년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은 올바르지만 조급한 게 문제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남겼다가 ‘반당집단의 괴수’로 찍혀 국방부장직에서 해임됐다. ‘우경 기회주의자’라는 누명을 쓴 직후 1962년 마오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8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으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1966년 문화혁명이 개시되자 홍위병에게 붙잡혀 혁명가의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히는 갖은 고초를 겪다 1974년 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중국 당국의 알리바바그룹 창업자 마윈(馬雲) 손보기가 끝을 알 수 없다. 자신이 안 되면 아들, 손자 등 자자손손 내려가며 기필코 산을 옮기겠다던 먼 옛날 우공처럼 결연하고 집요하다. 이번엔 알리바바의 핀테크 계열사 앤트그룹의 뒷배 색출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마윈이 실질 지배주주로 있는 앤트그룹이 40조원의 자금조달이 기대되는 기업공개(IPO)를 승인받은 과정을 중국 정부가 톺아보고 있다. 중국에서 통상 IPO를 승인받는 데 수개월이 걸리지만, 앤트그룹의 경우 이례적으로 빨리 마무리된 것을 두고 영향력을 행사한 관료가 있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조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상하이시 당서기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커촹반(科創板·중국판 나스닥) 설립에 관해 논의했을 정도로 그와 아주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저장(浙江)성 성장을 지내는 등 알리바바 본사가 있는 저장성에서 30년간 근무하며 마윈과 내밀한 관계를 지속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마윈의 시련은 당국을 겨냥한 거침없는 직언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10월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 등 중국 금융계 거물이 대거 참석한 상하이 금융서밋에서 정부가 ‘리스크 방지’를 내세워 지나치게 보수적인 정책을 편다고 비판했다. 며칠 뒤 그는 앤트그룹 경영진과 함께 당국에 불려갔고 하루 뒤 앤트그룹의 상하이·홍콩 동시 상장이 무산됐다. 앤트그룹은 “정부의 감독을 받겠다”며 백배사죄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국의 난타는 본격화했다. 앤트그룹에 알짜배기 온라인 대출사업은 접고 별로 돈이 안 되는 알리페이 서비스만 하라고 지시했고, 알리바바에 반독점 위반 조사 뒤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며 3조원의 벌금을 때렸다. 알리바바가 보유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지분 매각을 강요하고, 앤트그룹에 정부의 감독·관리를 받는 금융지주회사로 개편할 것을 명령했다. 급기야 앤트그룹에 지분 매각을 통한 마윈의 퇴출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도 아닌 편지 한 통에 피를 나눈 동지이자 전쟁영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물며 돈 좀 있다고 입바른 소리나 하고 정적과의 제휴설이 나도는 기업인쯤이야. 이게 권력의 속성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khkim@seoul.co.kr
  • ‘사통팔달 교통망 확보, 한반도 평화 진전 노력’ 최문순 강원지사 10년 성과 회고

    ‘사통팔달 교통망 확보, 한반도 평화 진전 노력’ 최문순 강원지사 10년 성과 회고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평창 알펜시아 매각, 춘천 레고랜드 테마파크 등은 임기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취임 10주년을 맞은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굵직굵직한 핵심 현안 사업에 대해 남은 임기내 정면 돌파로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 지사는 “평창 알펜시아 매각은 임기 내에 매각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파는 것”이라며 “싸게 비전 없이 파는 것보다 다음 도지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두르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또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문제는 환경부 스스로가 등산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공모 사업으로 시작한 사업”이라며 “정권과 장관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던 만큼 환경부 내부에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임해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동안의 성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 지사는 “분단으로 폐쇄된 변방의 맹지 상태이던 강원도를 평화의 열린 공간으로 바꾸려고 애를 쓴 10년이었다”며 “짧지 않은 시간 부족함도 많았지만, 강원도의 사통팔달 사회간접자본(SOC) 확충과 2018 평창동계올림픽 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반도의 중심이던 강원도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변방의 폐쇄된 맹지 상태가 됐고 이념적·경제적으로 고립됐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 교류 확대와 철도·도로·항만 등 SOC을 확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10년간 거의 모든 강원도의 교통망이 완성됐고 남은 영월∼삼척과 춘천∼철원 고속도로도 임기 내에 결정짓도록 하겠다”며 “10년 후면 교통 오지에서 교통 요충지가 되고 뻥 뚫린 교통망을 통해 경제성장도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경제적 팽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 지사는 “지역경제 규모는 지난 2011년 33조 873억 원에서 2019년 48조 6246억 원으로 47% 상승했다”며 “도민 1인당 GRDP는 지난 2011년 2208만 8000원, 개인소득 1312만 4000원에서 2019년 3206만 1000원과 1899만 70000원으로 각각 45.2%, 44.8% 증가 하였다”고 밝혔다. 아쉬움도 토로했다. 그는 “3년 전 오늘,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정전협정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합의를 끌어냈지만 안타깝게도 이 프로세스는 더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2024년 강원청소년동계올림픽이 남북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인 만큼 임기 이후에도 소명을 가지고 공동개최를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선 출마에 대해 최 지사는 “아직은 출마하라는 사람보다는 불출마하라는 사람이 더 많다”고 웃으며 “강원도 인구 3%의 질곡과 분단의 질곡을 스스로 돌파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해 출마 의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같은 당 소속 전직 강원도지사이자 이광재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이 의원 역시도 도민이 가진 인구 3%의 벽에 대한 정치인의 고뇌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며 “인구가 적어서 지역 연합의 대상으로 부족한 점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우리 정치 풍토 중 전임자가 추진한 일을 뒤집는 일이 반복되거나 비난 정치, 욕설 정치는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최근 논란이 된 ‘차이나타운’ 관련한 문제는 결과적으로 역풍을 맞았지만, 반중·반일 정서 등 사람 간의 혐오를 줄이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기고] 4·27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동의로 평화 보장해야/최철영 대구대 법학부 교수

    [기고] 4·27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동의로 평화 보장해야/최철영 대구대 법학부 교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10대 경제국으로 자리잡았다는 우리나라에 난데없는 ‘거지’론이 한창이다. 집값 폭등으로 인한 ‘벼락거지’론과 백신 공급 부족으로 인한 ‘백신거지’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제도적 규범이 없는 ‘평화거지’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 평화가 정전협정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전협정은 평화규범이 아니다. 정전협정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규범일 뿐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규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의 제도적 자산이 빈곤한 한반도에서 남북 정상 간의 합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 중요성으로 인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고,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의 구체적 평화 합의는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 재확인됐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평화통일 정책은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대북 송금 특검의 수사 대상이 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평화지대와 남북경제공동체를 포함한 정상 간 합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남북 합의 전면 무효화 선언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비핵개방 3000과 결을 달리하는 개성공단 폐쇄와 북한 영유아 영양 지원 정도의 한반도 평화통일 의제를 제시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정권의 변화에 따라 매번 혼란과 갈등의 부담을 지고 다시 새로운 남북 관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산길을 올라야 했다. 정권의 변화는 남북 관계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했고, 국민과 국회는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국민의 의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제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은 대통령의 정치적 어젠다가 아닌 온 겨레와 국민의 어젠다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동의와 지지가 필요하다. 물론 남북 간 합의는 법적 성격이 모호하다. 국제법상 ‘조약’이라면 상호 간에 국가성을 인정하게 되고 남북이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명제에도 어긋난다. 그럼에도 현행 남북관계발전법은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거나 입법 사항에 관한 남북 간의 합의에 대해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4·27 판문점선언의 이행을 위해서는 국내법의 개정이나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 국회는 4·27 판문점선언을 ‘합의서’로서 비준 동의를 통해 우리 국민이 최소한 평화거지에서는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 [씨줄날줄] 판문점/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판문점/박홍환 논설위원

    한국 현대사에서 판문점만큼 많은 슬픔과 감격의 기억이 공존하는 장소가 또 있을까.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판문점리. 남북의 상이한 행정구역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굳어진 지 벌써 68년이다. 정전협정 이후 판문점에서는 분단의 상처를 헤집는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았다. 1976년 8월 여름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유엔군 장병과 작업자들을 북한군이 무참하게 살해한 ‘도끼만행사건’은 한반도를 다시 한번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뻔했다. 트럭 피습 사건(1968년 4월), 헨더슨 소령 구타 사건(1975년 6월), 소련 특파원 망명 사건(1984년 11월), 대성동 주민 납치 사건(1997년 10월) 등이 판문점에서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2017년 11월 북한군 병사 오청성이 총탄 세례를 뚫고 판문점을 통해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CCTV 영상을 통해 그가 개성 방향에서 지프를 몰고 ‘72시간 다리’ 등을 질주하며 판문점 북측 지역으로 들어선 뒤 김일성 친필비와 통일각을 통과해 남측 지역으로 넘어오는 전 과정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북한군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남행을 막는 모습은 판문점이 언제라도 한반도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인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줬다. 판문점에는 평화의 씨앗도 뿌려져 그 싹도 시나브로 고개를 내밀곤 했다. IMF 외환위기로 고통을 받던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장중한 서사 드라마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1001마리의 소를 태운 트럭들이 판문점을 통과해 북측으로 향하는 모습은 남북 화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고, 결국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설로 이어졌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남북, 북미 데탕트의 역사도 판문점에서 시작됐다.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에서 손을 맞잡았다. 직박구리 등이 조율해 낸 차분한 배경음악을 뒤로한 채 남북 정상은 도보다리에서 단독회담했고, 그날 오후 발표된 ‘판문점선언’은 한반도의 봄을 세상에 알렸다. 이듬해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까지 포함한 남북미 정상이 한날한시에 판문점에 모여 한반도 평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판문점선언 3년, 지금 남북 및 북미 관계는 언제 그런 봄이 있었냐는 듯 차갑기만 하다.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3년 전 따뜻한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판문점에는 소수의 관광객 외 인적도 끊겼다고 한다. 판문점에서 만들어지는 희망과 감격의 드라마는 또 언제쯤 볼 수 있을까. stinger@seoul.co.kr
  • [서울광장] 서해 5도, 애달픈 서쪽 막내들/임병선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해 5도, 애달픈 서쪽 막내들/임병선 논설위원

    독도는 ‘애달픈 국토의 동쪽 막내’ 대접을 받는다. 이곳은 다르다. 이 섬들에 국민 9000여명이 살고 있어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저 국토의 서쪽 끝이란 믿음이 강해서일까. 그 섬들은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피격, 공무원 살해, 중국 어선과의 충돌 때나 조명될 뿐이다. 평화연구소 사무국장도 맡았지만, 나 역시 무지했다. 무관심했다. 2019년 7월에야 한강과 임진강 물길이 합쳐지는 강화도 교동 앞바다가 중립수역이란 것을 알았다. 정전협정에 이곳부터 파주 장단까지 중립수역으로 설정돼 무기를 배치하지 못한다. 시선이 서해 5도까지 뻗어 나가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석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부끄러움을 절감한 이유다. 한국 역사와 정전협정에 철저히 무지했다는 사실에 한없이 민망했다. 지난 5일까지 7회에 걸쳐 ‘서해 5도를 다시 보다’를 연재하면서도 부끄러움과 자괴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맨날 지도와 선만 그리느냐는 핀잔을 들으면서 속이 상하기도 했다. 참담한 분단, 나아가 우리의 관리 의식 부재가 낳은 뼈아픈 현실인데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친다.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기획은 관할권이 중첩되는 수역의 갈등 관리 능력에 취약한 우리의 현주소를 드러냈다. 서해 5도 수역은 북방한계선(NLL)을 포함해 관할권이 겹치는 수역으로 국제법 지위에 있어 논란이 있으며, 무력 충돌의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남북한과 중국 등 여러 주체의 복잡다기한 쟁점들이 상존하며, 다양한 국내법들이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지만 우리는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 및 국내 수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최근 중국의 해군 경비함이 동경 124도를 넘어와 백령도 40㎞ 근처까지 접근했다. 서해를 내해(內海)로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른바 ‘서해공정’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중국 해경법은 자국 해역을 침범한 외국 선박에 대한 무기 사용권을 법제화했다. 갈등 관리에 취약한 한국이 아주 불리한 상황에 내몰릴 수 있어 정부 차원의 대비가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싶다.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은 영해, 접속수역, 배타적 경제수역, 공해 등으로 모든 해역을 공간적으로 구분해 각 공간에서 연안국과 비연안국의 권리를 기능적으로 분배하는데, 서해 5도 수역은 국가의 관할권이 미치는 수역을 최소화하고, 남북한이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해당 수역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번 기획은 보여 주었다. NLL이 어떻게 설정됐는지, 정전협정에서 유래한 남북한 해양 경계가 어떻게 획정됐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급선무다. 한반도 해양 질서의 안정적 관리 및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을 위해 서해 5도 수역을 관리하고 활용하겠다는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한반도 주변 해역과 접경 수역은 북극해와 남중국해,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핵심 해로(海路)이자 군사활동 요충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합적인 해양법 정책의 운영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서해 5도의 안보적 특수성과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피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행해지던 국가의 지원 체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필요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서해평화선언, 서해 5도 수역 평화기본법, 그리고 관리기본법까지 법제화 프로세스를 제안한다. 이번 연재에서 ‘빠진’ 대목도 있다. 국민들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에 와닿게 알리고 깊고 다양한 학문 분야별 현장 조사를 꾸준히 해 백서를 발간하는 일이다. 백서는 국제법, 해양학, 정책학, 지역학 등 따로 나뉘어 진행된 연구를 통합하려는 취지다. 북한 연구는 NLL과 관련해서만 자료 조사가 이뤄진 점을 돌아봐 북한의 해양법 체계도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음달 초 가장 멀리 있는 백령도를 시작으로 다섯 섬을 답사한다. 이번 연재의 후속 작업으로 다음달 27일 서울에서 세미나도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연재에 통일부와 해양수산부, 인천광역시, 옹진군청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한 부처 관계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라면서 “이렇게 속도감 있게 문제 제기 및 백서 발간 준비 등에 나설지 몰랐다”고 말했단다. 연재에 참여한 교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입을 모으는데 독자와 중앙정부, 지방정부, 관련 공공기관 등이 귀 기울였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독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일부만이라도 서해 5도에 쏟아 달라.” bsnim@seoul.co.kr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7·끝] 서해평화를 법제화하자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7·끝] 서해평화를 법제화하자

    2020년 9월 서해 북단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됐다가 북한군에게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주검에 대한 수색이 11월부터 경비병행으로 전환된데는 몇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당시 해경이 밝힌 바와 같이 수색구역이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현재 함선 중심의 구역 집중수색이 한계에 도달한 점, 숨진 공무원의 가족이 해경에 시신 수색 작업을 중단해 달라는 입장을 밝힘 점, 그리고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에 대한 단속 강화 필요성과 함께 인명피해가 증가하는 동절기(11~2월)에 접어들며 사고 다발해역에 경비함정 집중배치 필요성 등 당면한 치안 상황이 고려되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2020년 12월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경비함이 동경 124도 이동(以東)으로 진입하여 백령도 40㎞ 근해까지 온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서해공정’ 등의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중국 해역을 침범한 외국 선박에 대한 무기 사용권한을 법제화한 중국 해경법이 작년 12월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통과한 후 올 2월부터 발효되면서 한국의 해경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해양안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서해5도 수역은 북방한계선(NLL)을 포함해 남북한과 중국의 중첩수역으로 국제법상 그 지위에 있어 논란이 있으며, 관할권 충돌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이미 남북한간 여러 차례 군사적 충돌과 대립을 경험한 바 있으며, 관할권 미획정의 상태를 악용한 중국의 불법어업 또한 성행하고 있는 지역이다. 결과적으로 남북한, 중국 등 다자간 복잡다기한 쟁점들이 상존하는 지역으로 그에 대응하는 다양한 국내법들이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으나, 동북아의 변화하는 국제정세 및 국내적 수요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상존하는 위험이 있는 지역에 상주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안전과 보호, 그리고 그들의 생업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이란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나, 이러한 특별법은 서해5도 수역을 분쟁수역으로 인정하고, 안보를 이유로 한 권익 제약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보상을 추진한 법률이다. 따라서, 서해5도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서 권익 제약 자체를 해소하려는 법제가 요구된다. 이러한 상황은 정전협정의 원칙에 부합하면서, 10.4 선언 및 판문점 선언의 실행을 위하여 서해5도 수역의 평화 정착, 남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기본법의 제정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서해5도 수역 법제화 프로세스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는 ‘서해평화선언’을 시작으로 현재 남북한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합의가 전제가 된 상태를 반영한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과 남북한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합의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남한이 남한 관할권 행사 구역 내에서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는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으로 구성된다.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과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은 본질적으로 그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지만, 관리기본법은 남북관계의 변수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사안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해평화선언 서해5도 수역의 평화기본법과 관리기본법은 모두 남북 정상의 합의의 이행을 위한 것이다. 남북 정상은 판문점 선언을 통하여 여러 중요한 합의를 이루었다. 해상 적대행위 중단 구역 설정 및 포사격 훈련 등의 합의는 그 후속 조치가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평화 수역 설정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 설정은 합의는 있지만, 실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결국 남측의 NLL과 북한 12해리 영해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서해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그 관문을 넘어서 전향적인 후속 조치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남북의 후속 합의는 남북이 공히 수용할 수 있는 원칙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정전협정에 의거하고자 한다. 정전협정은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평화상태로 나아가자는 공식 협정이며, 남북은 물론 미국과 중국도 관계된 국제적 규범이다. 그 정전협정은 해상에 군사분계선을 두지 않았으며, 서해 접경 수역에서 남북 배타적 관할수역을 3해리 인접해면(영해)로 정하고, 그 이원(以遠)의 수역에 대하여는 남북에게 개방된 곳으로 두고자 하였다. 우리는 바로 그것이 서해 남북 평화의 진정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서해평화선언(가칭)’을 제안해 본다. 서해평화선언의 기조는 바로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 고유의 관할 영역은 축소하고 남북 공동 이용 수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남북이 합의한 북측의 초도 이남 남측의 덕적도 이북의 적대행위중단 구역에서 남북의 영해를 각기 3해리로 축소하고 나머지 수역은 평화 협력수역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NLL은 본래의 성격대로 남측 초계활동의 북방한계선으로 유지된다. 서해평화선언(안) 보러 가기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안)은 기본적으로 모두 7개장 26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총칙, 제2장 기본계획의 수립 및 채택, 제3장 위원회 및 주무관청 신설 등, 제4장 서해5도 수역의 평화정착, 제5장 권익 보장, 제6장 사업의 시행 등, 그리고 제7장 벌칙 등이다.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안)은 정전협정의 원칙에 부합하면서, 10.4 선언 및 판문점 선언의 실행을 위하여 서해5도 수역의 평화 정착, 남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장을 목적으로 한다 (안 제1조). 이 법에서의 서해5도 수역이란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된 북한 초도 이남, 남한 덕적도 이북의 수역으로서 서해의 북방한계선 이남의 대한민국 관할 수역을 의미한다. 이 법의 어떠한 규정도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포함하여 서해5도 수역에 대한 남북한의 기존 합의를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 (안 제3조). 서해5도 수역의 평화 정착, 남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장에 관하여는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 (안 제5조). 통일부장관은 서해5도 수역의 평화 정착, 남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장을 위한 방안을 기획·수립·지원 및 추진하고, 그 추진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국방부, 해양수산부, 행정안전부 등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인천광역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협의하여 서해5도 수역 기본계획을 수립 및 채택하여야 하며, 동 기본계획은 매2년마다 재검토 한다 (안 제6조). 또한 해당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통일부 산하에 서해5도평화위원회를 두고 (안 제8조),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통일부장관 소속으로 서해5도평화청을 설치하며 (안 제9조), 정부는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관계 시·도지사와 협의하고 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수역을 구분하여 지정하고 그 보전과 개발·운영을 추진하거나 지원할 수 있다 (안 제10조). 정부는 서해5도 수역의 공동이용을 도모하기 위하여 남북어업협정과 남북공동어로구역 사업을 추진하고 (안 제11조), 서해5도에서 조업 제한 조치, 항행 제한 조치, 서해5도 주민들의 이동의 자유와 경제 활동의 제한에 대한 단계적 해제와 함께 해양경찰청의 관할권의 확대 조치를 취한다 (안 제15조).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안)은 기본적으로 모두 7개장 24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총칙, 제2장 기본계획의 수립 및 채택, 제3장 위원회 및 주무관청 신설 등, 제4장 서해5도 수역의 관리, 제5장 권익 보장, 제6장 사업의 시행 등, 그리고 제7장 벌칙 등이다.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안)의 목적 및 기본원칙은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안)과 동일하지만 남북 사이의 합의 없이도 실현 가능한 방안을 담은 만큼 몇몇 규정에서 차이가 있다. 그동안 남북 사이에서 이상적인 내용을 담은 다양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정치상황의 변화 등으로 성과가 지속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하여 실질적이며 필요한 조치들을 입법화하여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이 법은 이를 위하여 필요한 법이라고 본다. 우선, 관리기본법의 목적은 서해5도 수역의 평화정착, 남북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지역 주민들의 권익 보장이며(안 제1조), 이를 위하여 남북의 항구적인 평화와 화합의 증진, 공동이익의 증진 및 남북 공동번영의 추구, 남북 접경수역의 공동이용, 도모, 국민의 생명, 안전 보장 및 편의 제공, 해양환경 보전 및 해양자원의 보존, 국민의 인식 및 참여 제고를 통한 민족공동체 의식 고취를 기본계획(안 제2조)으로 선언하고 있다. 통일부장관은 서해5도 수역의 평화 정착,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 권익 보장 등에 관한 서해5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채택하며(안 제2조), 이러한 기본계획은 연도별 시행계획에 의하여 구체화된다(안 제6조). 법률에 규정된 업무를 집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통일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서해5도평화위원회(안 제7조), 통일부장관소속으로 서해5도평화청을 둔다(안 제8조). 정부가 취해야 할 필요조치에 대하여는 조금 차이가 있다. 평화기본법은 남북평화와 공동이용 구역 확대, 남북 비무장화와 안전어로 보장, 민용 선박의 자유 항행을 정부가 취할 조치로 열거하고 있지만, 관리기본법은 이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러한 조치들은 남북의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므로 국내법으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평화기본법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인도적 문제해결과 인권 개선, 인도주의와 동포애에 따른 북한 지원을 규정하고 있으나, 관리기본법은 남북한 사회문화적 교류협력 강화, 경제협력 방안 추진과 함께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규정하고 있다(안 제9조). 이 법은 북한에 대한 지원도 인도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평화기본법은 서해5도 수역 공동 이용을 위한 남북어업협정, 남북공동어로구역 사업, 중국어선 불법조업에 관한 대책을 규정하고 있으나 관리기본법은 이에 관하여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남북한 및 중국과 합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법에서는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관리기본법은 평화기본법과 마찬가지로 수역의 실태조사(안 제10조), 해양생태환경 및 해양문화유산 관련 사업(안 제11조), 남북 교류협력 지원 사업(안 제12조)을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서해5도에서 취할 조치로 서해5도 수역에서 조업 구역의 단계적 확장 및 조업 제한 조치의 단계적 해제, 항행 제한 조치의 단계적 해제, 서해5도 주민들의 이동의 자유와 경제활동의 제한에 대한 단계적 해제, 해양경찰청 관할권의 확대 등을 규정(안 제13조)한 것도 두 법안이 동일하다. 관리기본법은 평화기본법에서 남북 사이의 향후 합의가 필요하거나 다소 이상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서해5도 수역에서 남한이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사항들을 담았다. 어찌 보면 다소 맥이 빠지는 내용의 법안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법제화 프로세스를 힘있게 추진하자 현재 서해에 있는 다양한 수역들은 남북한과 중국의 관련 국내법, 유엔해양법협약, 한중어업협정, 정전협정 등의 국제법이 교차하면서 그 법적 지위에 있어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수역마다의 주요한 정책적인 방점도 어업자원 보호, 항행 안전 확보, 군사 안보 등 다양하다. 한중해양경계가 획정되지 않았고, 서해5도를 중심으로 NLL까지 설정되어 있어 남북한의 대립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복잡한 양상이다. 서해5도를 둘러싼 수역들의 법적 지위를 충분히 이해하고, 서해평화선언, 서해5도 수역 평화기본법, 서해5도 수역 관리기본법으로 구성된 서해5도 수역 법제화 프로세스를 통한 입법화 작업을 전향적으로 시도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시점이다. 정태욱 인하대 법전원 교수 water@inha.ac.kr 이석우 인하대 법전원 교수 leeseokwoo@inha.ac.kr 오승진 단국대 법대 교수 lawosj@dankook.ac.kr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7·끝] 서해평화선언을 제안한다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7·끝] 서해평화선언을 제안한다

    서해평화선언 서해5도 수역의 평화기본법과 관리기본법은 모두 남북 정상의 합의의 이행을 위한 것이다. 남북 정상은 판문점 선언을 통하여 여러 중요한 합의를 이루었다. 해상 적대행위 중단 구역 설정 및 포사격 훈련 등의 합의는 그 후속 조치가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평화 수역 설정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 설정은 합의는 있지만, 실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결국 남측의 NLL과 북한 12해리 영해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서해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그 관문을 넘어서 전향적인 후속 조치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남북의 후속 합의는 남북이 공히 수용할 수 있는 원칙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정전협정에 의거하고자 한다. 정전협정은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평화상태로 나아가자는 공식 협정이며, 남북은 물론 미국과 중국도 관계된 국제적 규범이다. 그 정전협정은 해상에 군사분계선을 두지 않았으며, 서해 접경 수역에서 남북 배타적 관할수역을 3해리 인접해면(영해)로 정하고, 그 이원(以遠)의 수역에 대하여는 남북에게 개방된 곳으로 두고자 하였다. 우리는 바로 그것이 서해 남북 평화의 진정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서해평화선언(가칭)’을 제안해 본다. 서해평화선언의 기조는 바로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 고유의 관할 영역은 축소하고 남북 공동 이용 수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남북이 합의한 북측의 초도 이남 남측의 덕적도 이북의 적대행위중단 구역에서 남북의 영해를 각기 3해리로 축소하고 나머지 수역은 평화 협력수역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NLL은 본래의 성격대로 남측 초계활동의 북방한계선으로 유지된다.본론 보러 가기
  • ‘위안부 논문’ 비판·한국전쟁 돌아보기...역사 되새기는 교양

    ‘위안부 논문’ 비판·한국전쟁 돌아보기...역사 되새기는 교양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 왜곡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 현대사와 문화유산을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교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잇따라 선보인다. ●커밍스 “램지어 논문, 수치스러운 글” 아리랑TV는 2일 오전 8시 ‘글로벌 인사이트’에서 위안부를 매춘부로 주장한 논문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와의 화상 인터뷰를 방송한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인 커밍스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을 강하게 비판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기록에 담긴 사실들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고 “한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치스러운 글”이라는 지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 태도의 문제점도 언급한다. ●처용무 등 한국의 유산 다룬 다큐 KBS는 공사 창립 60주년 기획을 연이어 마련한다. 매주 월, 화요일 1TV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무형유산들을 다룬 20부작 UHD 다큐멘터리 ‘한국의 인류유산’을 오는 5월 4일까지 방영한다. 1일 종묘제례악부터 남사당놀이, 아리랑, 판소리, 줄타기, 가곡 등 익숙하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유산들을 5분 안팎 미니 다큐멘터리로 전달한다. 사람과의 교감, 전수를 위한 굵은 땀방울, 맥을 잇기 위한 간절함 등 각 유산에 담긴 ‘결정적 한 장면의 이야기’를 담았다. 2일 오전 11시 50분에는 신라시대부터 1200년 넘는 역사를 이어 온 가장 오래된 민족 무용 ‘처용무’를 다룬다. 무속 제례 형태로 계승한 춤을 예술로 발전시킨 사람은 조선의 10대왕 연산군이었다. 그는 어머니 폐비 윤씨를 그리며 밤마다 처용무를 췄고, 춤에 담긴 광기와 애정은 처용무를 화려하고 웅장한 궁중 무용으로 발전시켰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부수석이자 처용무 이수자인 김청우가 연산군으로 분해 처용무를 재연한다. ●김영옥이 들려주는 한국전쟁의 아픔 이날 밤 10시 1TV에서 방송하는 ‘역사저널 그날’은 ‘한국전쟁과 이산가족’이 주제다. 이산가족 배우 김영옥이 출연해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들려 준다. 흥남철수와 1·4 후퇴를 겪으며 480만명이 피란길에 오르고, 가족 간 생이별을 부른 한국사의 비극이다. 방송은 1983년 정전협정 30주년으로 진행됐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의미도 돌아본다. 138일간 상봉 1만여건을 이뤄낸 초유의 프로그램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상봉 신청자 중 생존자는 5만여명밖에 남지 않은 현재, 이산가족 1세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짚어 본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서해 경계선 부정하던 北 불완전 합의로 서해교전 경제로 군사충돌 덮기로 ‘NLL’ 합의서 명시 진전

    정전협정의 해상분계선은 지상과 달리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서해의 경계는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道界)를 연장한 선으로 그어졌다. 그마저 이 선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섬들의 관할을 나타내는 표시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엔사는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해 초계활동과 어민들의 진출 범위를 제한해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 선은 군 내부용이었기 때문에 설정 당시 북한에 통보되거나 합의되지 않았다. ●미국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 제기 북한은 19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를 처음 제기했다. 북한이 이 문제를 들고나온 이유는 미국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은 데탕트 분위기에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이 해체되자 정전협정의 재논의를 염두에 두고 서해의 불완전한 경계선을 이슈로 삼으려 했다. 서해의 분쟁지역화는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의 대화로만 풀려 하는 중국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아울러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를 앞두고 영해선과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점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서해 경계선 문제가 남북대화에서 처음 논의된 것은 1990년대 초반 남북고위급회담에서였다. 남한은 NLL이 실질적인 분계선 역할을 해 왔다며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양측이 합의한 적이 없다며 새로운 해상분계선의 설정을 요구했다. 결국 양측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선에서 절충했다. 불완전한 합의는 1999년 이후 서해 교전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군사적 충돌의 원인이 해상분계선의 합의 부재 때문이라며 새로운 경계선 설정을 요구했다. 유엔사가 응하지 않자 북한은 일방적으로 해상경계선을 선포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서해에서의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조치를 마련하려고 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장성급회담이 개최됐지만, 남한의 NLL 고수 원칙과 북한의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 요구는 합의될 수 없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제안해 김정일 위원장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이 구상은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덮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북은 후속 회담인 국방부 장관·인민무력부장 회담에서 공동어로구역의 기준점을 두고 다시 맞섰다. 남한은 NLL을 기준으로 한 등면적 안을 제시한 반면 북한은 어로구역을 NLL과 자신들이 선포한 해상경계선 사이에 두자고 했다. ●2018년 판문점 선언서 평화수역 설정 합의 결국 이 문제는 2018년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통해 해결됐다.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물론 합의서에는 “서해 남측 덕적도 이북으로부터 북측 초도 이남까지의 수역”을 군사연습 중지구역으로 설정한다고 돼 있다. 이 안은 과거 북한이 공동어로구역의 범위를 강화만 일대까지 넓게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이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NLL을 합의서에 명시하는 데 동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북한이 NLL을 인정하더라도 그 위를 경제적 이해관계로 덮어버리면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 그 회담을 실무적으로 책임졌던 사람이 김영철 당시 통일전선부장이었다. 그는 1990년대 남북고위급회담부터 10·4선언 이후까지 NLL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북한도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를 포착해 서로의 이해관계를 얽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실리적 이해가 서로 얽히지 않으면 자칫 모래 위의 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쟁의 바다가 평화와 경제의 바다로 변화하길 기대한다. 예대열 고려대 한국사학과 강사dyyea@korea.ac.kr
  • 中 해양패권 방파제 역할 남북한 접경수역 이점 누려 양측 신뢰 땐 中 반경 줄어 한반도 새 관리모델 절실

    서해 NLL에 대한 북한의 인식 변화는 양측의 간극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서해의 남북 접경수역을 마주하는 중국의 태도는 더 복잡하다. 남북 NLL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해양안보 측면에서 서해 5도의 질서 변화는 중국에도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산둥반도 웨이하이(威海)에서 백령도까지의 거리는 약 178㎞에 불과하다. NLL의 서쪽 한계는 북황해로 이동하는 통로의 중앙까지 뻗어나간다. 산둥반도 위쪽이어서 북한과 중국 모두에 불편한 것은 틀림없다. 북한과 중국의 해상활동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그 길목을 위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임목(choke point)이다. 한국이 통제하는 형태의 NLL이 안정화되는 일은 중국에도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다. ●中 지역해 전략… 해양자원 확보·핵심 해상교통로 접근·美 진입 차단 지역해 전략에서도 서해 5도에 대한 중국의 이해는 해양자원 확보, 핵심 해상교통로 접근, 군사활동의 수월성, 제3국(미국)의 진입 차단에 달려 있다. 역설적이게도 신뢰의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한 남북관계는 중국의 이익을 적절히 투영하고 유지하는 발판이 됐다. NLL과 한강 하구를 싹쓸이하는 중국의 3무 어선(무허가, 무등록, 무검사)은 남북한 해상 경계선을 오가며 자원을 독점했다. 남북 해상 교류의 장벽이 된 NLL과 서해 5도 해역은 중국을 북황해와 남황해를 관통하는 핵심 통항로의 유일한 이용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 와중에 중국은 황해 124도를 작전구역으로 설정하고 광역 해양조사와 대형 부이를 설치하는 등 서해를 점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확대하고 있다. 남북한 접경수역의 민감성을 자국의 지역해 전략에 그대로 이용해 왔다. 서해 5도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민감하다. 중국의 해양패권을 견제하는 미국의 해양세력도 남북한 특수한 관계로 정의되는 NLL과 주변 수역 진입이 매우 조심스럽다. 이 지역은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가 관리하는 한강 하구, 북한과 유엔사가 합의한 비무장지대와도 다르다. 국제적 민감성은 서해 5도 주변 해역에서 남북한 외의 세력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중국엔 호재로 작용한다. 중국이 제3국의 간섭과 남북의 견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남북을 관통하면서 서해를 통제하고, 군사적 활동 반경을 확대할 수 있는 이유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질서가 중국의 서해 5도 진입과 역할 안정화의 근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70여년 이런 질서를 전환시킬 만한 반전의 시나리오는 없었다. ●中, 서해 접경수역 변화 없이 현상유지만 기대 중국에 남북 서해 접경수역의 질서는 현상유지가 최선이다. 국제적으로는 남북 갈등의 완충지대이면서, 제3국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파제다. 지역패권이 점증하는 분위기에도 이 지역만큼은 중국의 영역별 이익 진출이 여전히 가능하다. 남북한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이익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중국의 이 지역 진출 이익을 변화시킬 요소는 있다. 남북의 관리방식 변화다. 남북이 신뢰할수록 중국의 황해 활동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북 접경수역의 새로운 관리 질서라는 점에서 국제적 긴장 완화를 위한 지원도 강력한 억제 수단이 될 것이다. 서해 5도와 NLL을 축으로 하는 남북의 평화적 관리모델은 지역적 파급성이 매우 크다. 일단 NLL의 역할이 경계선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NLL은 산둥반도 이북의 38도선을 넘어 북황해 중심부에 진입하는데 새 관리모델은 이 선을 축으로 하는 일정 범위의 이북과 이남을 포괄해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해 5도에 대해 남북이 주도해 의사 결정을 하면 분단국 갈등 완화라는 국제적 당위성과 접목돼 호소력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남북한과 중국의 서해 경계가 획정되지 않더라도 중국의 진출은 제한되고 자제될 수밖에 없다. 서해 NLL과 새 관리 모델이 지역해 전체의 행위모델로 확대될 수 있다. 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정책연구소장 ceaser@kiost.ac.kr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6] 중국이 바라보는 서해 5도와 수역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6] 중국이 바라보는 서해 5도와 수역

    서해 NLL에 대한 북한의 인식 변화는 양측의 간극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서해의 남북 접경수역을 마주하는 중국의 태도는 더 복잡하다. 남북 NLL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해양안보 측면에서 서해 5도의 질서 변화는 중국에게도 매우 민감해서다. 산둥반도 웨이하이(威海)에서 백령도까지 거리는 약 178㎞에 불과하다. NLL의 서쪽 한계는 북황해로 이동하는 통로의 중앙까지 뻗어 나간다. 산둥반도 위쪽이어서 북한과 중국 모두에게 불편한 것은 틀림없다. 북한과 중국의 해상활동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그 길목을 위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임목(choke point)이다. 한국이 통제하는 형태의 NLL 선이 안정화되는 일은 중국에게도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다. 지역해 전략에서도 서해 5도에 대한 중국의 이해는 해양자원 확보, 핵심 해상교통로 접근, 군사활동의 수월성, 제3국(미국)의 진입 차단에 달려 있다. 역설적이게도 신뢰의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한 남북관계는 중국의 이익을 적절히 투영하고 유지하는 발판이 됐다. NLL과 한강 하구를 싹쓸이 하는 중국의 3무 어선(무허가, 무등록, 무검사)은 남북한 해상 경계선을 오가며 자원을 독점했다. 남북 해상 교류의 장벽이 된 NLL과 서해 5도 해역은 중국을 북황해와 남황해를 관통하는 핵심 통항로의 유일한 이용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 와중에 중국은 황해 124도를 작전구역으로 설정하고, 광역 해양조사와 대형 부이를 설치하는 등 서해를 점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확대하고 있다. 남북한 접경수역의 민감성을 자국의 지역해 전략에 그대로 이용해 왔다. 서해 5도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민감하다. 중국의 해양패권을 견제하는 미국의 해양세력도 남북한 특수한 관계로 정의되는 NLL과 주변 수역 진입이 매우 조심스럽다. 이 지역은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가 관리하는 한강 하구, 북한과 유엔사가 합의한 비무장지대와도 다르다. 국제적 민감성은 서해 5도 주변 해역에서 남북한 외의 세력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중국에겐 호재로 작용한다. 중국이 제3국의 간섭과 남북의 견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남북을 관통하면서 서해를 통제하고, 군사적 활동 반경을 확대할 수 있는 이유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질서가 중국의 서해 5도 진입과 역할 안정화의 근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70여년 이런 질서를 전환시킬 만한 반전의 시나리오는 없었다.중국에게 남북 서해 접경수역의 질서는 현상유지가 최선이다. 국제적으로는 남북 갈등의 완충지대이면서, 제3국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파제다. 지역패권이 점증하는 분위기에도 이 지역 만큼은 중국의 영역별 이익 진출이 여전히 가능하다. 남북한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이익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중국의 이 지역 진출 이익을 변화시킬 요소는 있다. 남북의 관리방식 변화다. 남북이 신뢰할수록 중국의 황해 활동범위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남북 접경수역의 새로운 관리 질서라는 점에서 국제적 긴장완화를 위한 지원도 강력한 억제 수단이 될 것이다. 서해 5도와 NLL을 축으로 하는 남북의 평화적 관리모델은 지역적 파급성이 매우 크다. 일단 NLL의 역할이 경계선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NLL은 산둥반도 이북의 38도선을 넘어 북황해 중심부에 진입하는데 새 관리모델은 이 선을 축으로 하는 일정 범위의 이북(以北)과 이남(以南)을 포괄해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해 5도에 대해 남북이 주도해 의사 결정을 하면 분단국 갈등 완화라는 국제적 당위성과 접목돼 호소력이 높아진다.이렇게 되면 남북한과 중국의 서해 경계가 획정되지 않더라도 중국의 진출은 제한되고 자제될 수 밖에 없다. 서해 NLL과 새 관리 모델이 지역해 전체의 행위모델로 확대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남북한만이 할 수 있다.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6] 북한이 바라보는 서해 5도와 수역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6] 북한이 바라보는 서해 5도와 수역

    ‘내재적 접근’의 필요성 평화는 실리적 이해가 서로 얽혀 있지 않으면 모래 위의 성처럼 쉽게 무너져 내린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경제적 실리로 군사적 대결을 덮어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최근 서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행동은 그 이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경쟁이 따르기 마련이고, 나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면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대화와 협상을 위해서건, 백전불태(百戰不殆)를 위해서건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는 것은 중요하다. 불완전한 정전협정과 NLL 설치 정전협정은 적대행위와 무력충돌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하지만 해상의 분계선은 지상과 달리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서해의 경계는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道界)를 연장한 A-B 선으로만 그어졌다. 그마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섬들의 관할 기준을 나타내는 표시였을 뿐이다. 다만 서해 5도는 A-B 경계선 북쪽에 있었지만 유엔사 통제 아래 두기로 결정되었다. 북방한계선(NLL)은 유엔사 내부적으로 초계활동과 어민들의 진출 범위를 제한하여 무력충돌의 발생 가능성을 줄이고자 설치되었다. 서해 5도 주변 수역은 정전협정에 명시된 인접해면 존중 원칙에 따라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가상의 선으로 연결한 NLL은 사실 북한과 합의되거나 설정 직후 통보된 적이 없다. 실제 유엔사도 1990년대 이전까지 서해에서 충돌이 발생하면 인접해면을 침범했다고 문제 삼았지, NLL을 넘어 왔다고 항의하지 않았다. 공동어로 제안을 통한 체제 우위 과시 북한은 1955년 3월 내각 결정을 통해 12해리 영해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전쟁 직후 북한은 12해리 영해를 담보할 군사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 사이 남한의 어민들은 해마다 5~6월이 되면 군 당국의 눈을 피해 북한 해역 깊숙이 들어가 조기를 잡았다. 북한은 어선들이 연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진입하게 되면 나포하여 조사를 벌였다. 조사 과정에 어부라고 판단되면 평양 관광도 시켜주고 어선도 수리하여 돌려보냈다. 북한은 1958년부터 남한 어민들이 일정한 규칙을 지키면 어장을 개방하겠다는 제안도 하였다. 1967년까지 계속된 이 제안은 남한의 경제 수준보다 앞섰다는 체제 과시의 표현이기도 했다.해상경계선에 관한 문제제기 북한은 19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해상경계선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북한은 정전협정 어느 조항에도 “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서해 5도에 출입하면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하였다. 북한이 해상경계선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첫째, 북미간 직접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1973년 11월 유엔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유엔군 사령관은 정전협정의 서명 주체이자 그 이행의 담보를 책임진 당사자였다. 북한은 유엔군 사령관이 사라지게 되면 정전협정이 개정되거나 평화협정으로 대체될 것을 기대하며 미국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북한은 서해 5도 수역이 불완전한 정전협정의 대표로 쟁점화하기 좋은 주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중국을 겨냥한 측면도 있었다. 북한은 데탕트 시기 한반도 문제가 미중간 대화를 통해 결정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언커크 해체 문제와 관련하여 주한미군 주둔과 연계시켜 미국과 직접 대화하려는 북한의 의도와 달리 미국의 뜻대로 표결 없이 처리하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 그러자 북한은 과거 중국 어선들도 활동했던 서해5도 수역을 분쟁 지역화하고자 했다. 실제 북한은 1962년 중국과 국경조약을 체결하며 압록강 하구의 섬들에 대해서는 중국의 양보를 얻어냈지만, 영해에 관해서는 압록강 하구인 동경 124도 10분 6초의 기준선에 합의함으로써 손해를 떠안았다. 셋째, 1973년 12월 개막된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 회의는 바다에 관한 국제사회의 규범을 제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남북한은 분단 후 처음 유엔 무대에서 각자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다. 즉 북한은 이 회의 개막 이틀 전에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EEZ) 등의 설정에 있어 남한보다 우위에 서려 했다. 북한은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가 진행 중인 1977년 6월에 200해리 EEZ를, 8월에는 경계수역을 각각 선포하였다. 처음으로 논의된 NLL 문제 NLL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90년 시작된 남북고위급회담에서였다. 이 회담에서 불가침경계선 문제는 첨예한 쟁점 중 하나였다. 남한은 ‘영역’을 내세웠고 북한은 ‘선’을 주장했다. 각각의 강조점이 달랐던 이유는 NLL 때문이었다. 남한은 NLL이 이미 해상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이남의 ‘영역’을 강조한 반면, 북한은 NLL을 인정한 적이 없다며 새로운 경계선의 설정을 요구하였다. 결국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에는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되었다. 남한은 NLL을 기준으로 한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에 방점을 둔 반면, 북한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 서해교전의 발발과 일방적 군사분계선의 선포 불완전한 합의는 1999년 6월 서해교전으로 이어졌다. 교전 당일 북한은 “당신 측이 멋대로 그어놓은 분계선을 인정한 적도, 통보받은 적도, 합의한 적도 없다”며 강력 반발했다. 한 달 뒤 북한은 충돌이 빚어진 것은 양측이 합의한 해상 군사분계선이 없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을 위한 회담에 나서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엔사가 응하지 않자 1999년 9월 일방적으로 해상경계선을 선포하였다. 2000년 3월에는 후속 조치로 좌우 폭 1마일의 ‘통항질서’도 발표하였다. 북한이 선포한 해상분계선은 정전협정 상의 A-B선을 기점으로 황해도 강령반도 끝단인 등산곶과 경기도 굴업도 사이의 등거리 점, 황해도 웅도와 경기도 서격렬비도 사이의 등거리 점, 중국과의 반분 교차점을 연결한 선이었다. 북한은 이 선이 A-B 선을 기점으로 했기 때문에 정전협정에도 부합하고, 등거리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유엔해양법협약 정신에도 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북공동어로 구역을 둘러싼 입장 차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서해에서의 무력충돌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2005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공동어로 문제를 공식 제의하였다. 김 위원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서해에서의 긴장 완화 문제를 함께 협의하자고 제안하였다.수산협력 실무협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적 조치였다. 북한은 장성급 회담에서 ① 무력충돌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해상분계선 확정 ② 공동어로 실현을 위한 군사적 대책 ③ 민간 선박의 해주항 직항 ④ 민간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를 안건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해상분계선 설정과 관련하여 남북이 기존의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통일 한반도의 영해 기선을 확정해 새로운 영해권을 내외에 선포하자고 주장하였다. 공동어로수역과 관련해서는 그 구역을 강화만 일대의 넓은 수역까지 포함하자고 제안하였다. 아울러 NLL 때문에 해주항으로 입항하는 민간 선박들이 백령도 서편으로 우회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며 제주해협 통과 문제와 함께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제주해협 통과 문제만 해운회담으로 이관되고 나머지는 모두 거부되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제안과 후속 회담의 답보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정상회담에서 서해 문제를 군사회담에서 논의하니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양 정상이 함께 풀어낼 것을 제안하였다. 노 대통령은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덮는 방식으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만들자고 역설하였다. 김정일 위원장도 노 대통령의 해주 특구 제안에 난색을 표하다가 점심 식사 후 전격 받아들였다. 그 결과 10·4 선언에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이 명시되었다. 정상회담 직후 국방부장관과 인민무력부장 사이에 국방장관회담이 개최되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을까, 양측은 공동어로구역의 기준점을 두고 팽팽히 맞섰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공동어로구역 설치를 위해 새롭게 해상경계선을 긋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NLL을 인정할테니 자신들의 해상경계선도 인정하라며 그 사이를 공동어로구역으로 삼자고 제안하였다. 반면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NLL을 기준으로 한 등면적 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분계선의 설정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고 진행된 회담에서 남북은 공동어로구역의 기준점을 두고 논쟁하다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북한의 변화와 실리를 통한 평화 정착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은 2018년 판문점 선언을 통해 원론적인 차원에서 재확인되었다. 아울러 그해 가을 평양에서 체결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구체화 되었다. 이 합의서에는 북한이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 조항의 삽입은 10·4 선언 직후 공동어로구역의 기준점 설정 문제로 최종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교훈을 되새긴 성과였다. 아울러 이 조항이 삽입돼 대선 과정에 불거진 ‘NLL 포기 발언’ 시비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북한은 NLL을 인정하더라도 경제적 이해관계로 덮어버리면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합의서에는 “서해 남측 덕적도 이북으로부터 북측 초도 이남까지의 수역”을 군사연습 중지 구역으로 설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북한이 공동어로구역 범위를 협의하면서 강화만 일대까지 넓게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이 실리를 따져 본 뒤 제안을 받아들인 사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의 실무 책임자가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90년대 남북고위급회담부터 10·4 선언 이후 장성급 회담까지 NLL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을 요구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무 책임을 맡은 회담에서 NLL을 인정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북한도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를 포착하여 서로의 이해관계를 얽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실리적 이해가 얽히지 않으면 모래 위의 성처럼 쉽게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쟁의 서해를 평화와 경제의 바다로 변화시키는 봄바람이 불어오길 바란다.
  • 서해5도 해상경계 획정 유연해져야

    1982년 체결된 유엔해양법협약은 해양에서의 모든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영토 및 영역을 이유로 주장될 수 있는 해양 구역을 규정하고 있다. 영해를 획정하는 일반 규칙은 제15조에 규정돼 있는데, 경계는 두 국가 간 중간선으로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 협약은 EEZ의 경계 획정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규정하지 않았다. 대향국 간 또는 인접국 간 EEZ 경계 획정에 관한 협약 규정은 제74조에 규정돼 있는데 “‘공평한 해결’에 이르기 위해 국제법을 기초로 하는 합의에 의해 이뤄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양경계 획정 관련 법 규범은 일반적으로 국제사법기관을 통해 형성된 판례를 통해 발전하고 구체화되고 있다. 2009년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의 흑해(黑海) 해양경계 사건에서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적용한 해양경계 획정의 소위 ‘3단계 접근’은 그 뒤 판결들을 통해 일반적으로 해양경계 획정에서 실행 가능한 통상적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3단계 접근법은 첫째 잠정적인 등거리선·중간선 설정, 둘째 형평에 맞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등거리선·중간선에 조정을 요구하는 요소들이 있는지 여부를 고려, 셋째 조정된 경계선이 각국의 해안선 길이 비율과 각 당사국에 속하게 될 관련 해양 면적 비율 간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해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결과를 도출하지 않도록 점검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3단계 접근법을 통해 서해 5도 수역의 최종 해양경계 획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첫 단계에서 설정한 가상 중간선이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에서 어떤 변형을 거쳐 최종적으로 획정될 것인지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남북한이 국제사법기관에 의뢰하면 분명해질 것이다. 남북이 양자 협상을 해결하려는 경우에도 3단계 접근법은 결과의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원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문제는 서해 5도 수역이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할권이 중첩되는 수역이라는 점이다. 남북한 사이에 해양 질서의 법적인 지위에 변화를 가하는 어떤 행위라도 양자 간에 해양경계 획정이 이뤄지지 않은 한국과 중국, 북한과 중국의 해양 질서를 법적으로 설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해당 수역의 관리와 분쟁 해결의 해법을 강구하면서 관할권 확보 및 해양경계 획정을 위한 전통적인 접근에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유엔해양법협약 체제는 영해, 접속수역, EEZ, 공해 등으로 공간을 나눠 각 공간에서 연안국과 비연안국의 권리를 기능적으로 분배하는데, 서해 5도 수역은 국가의 관할권이 미치는 수역을 최소화하고, 남북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1974년 한일 간 합의된 북부대륙붕경계선을 제외하고 주변국과의 해양경계 획정이 전무한 현재의 해양 질서는 주변 해양강국들의 역학관계가 낳은 산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또 한국이 한반도 수역에서 최소한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해양 질서의 안정적 유지 관리가 필수적이다. 정전협정에서 유래한 남북한 해양경계 획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한반도 해양 질서의 안정적 관리 및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을 위해 서해 5도 수역의 해양 공간 관리와 활용에 대한 인식 제고가 요구된다. 이석우 인하대 법전원 교수 leeseokwoo@inha.ac.kr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5] “정전협정 정신으로” “해상경계 획정 유연해져야”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5] “정전협정 정신으로” “해상경계 획정 유연해져야”

    정태욱-정전협정 정신으로 찾는 평화 해법 한국 정전협정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는 정전협정은 비록 한국전쟁의 산물이었지만,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법이었다. 그 기본 목적은 적대행위의 방지와 평화의 증진이었다. 그에 따라 서해5도 수역과 한강하구는 육상의 비무장지대와 달리 민간 이용에 개방된 곳으로 규정되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거의 망각하고 있다. 정전협정은 남북의 접경지대를 3개 부분으로 나누어 규율하고 있다. 육상의 비무장지대, 한강하구, 서해 5도 수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육상의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있으며, 민간인 출입과 왕래를 엄격히 통제하는 군사적 완충지대로 규정되었다. 반면에 한강하구는 군사분계선을 두지 않고, 남북 민용 선박 항행에 개방하였다. 다만, 군사정전위원회와 유엔사가 선박 등록과 민사행정을 관할한다. 서해 5도 수역은 더 나아가 군사분계선도 없을 뿐더러 유엔사의 관할 수역이 따로 지정되어 있지도 않다. 남북의 인접해면, 즉 영해 존중의 원칙만 천명하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영해만 침범하지 않으면 누구든(제3국 선박도) 국제해양법에 따라 해수 이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규정된 것이다. 원론적으로 우리 어선이 중국 양쯔강 유역까지 가서 조업을 할 수 있듯이, 북한의 남포 앞 바다에도 갈 수 있고, 마찬가지로 북한 어선도 우리 경기만에서 어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 상 인접해면만 침범하지 않으면 남북의 어선이 서로 오르내리며 조업활동을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하여 유엔사는 물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육지에 휴전선이 있으니 바다에도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분단 무의식’의 반영일 따름이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해상분계선 없어 서해 5도 수역은 ‘민간 자유 이용’ 규정 이후 EEZ 선포하면서 적대 현장 변질 남북이 다시 평화수역으로 만들어야 정전협정 체결 당시 국제법 상 ‘공해자유의 원칙(mare liberum)’이 확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아직 12해리 영해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해양법이 정립되기 전이었다. 따라서 바다를 남북으로 가르는 ‘휴전선’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해5도 수역 문제는 정전협정의 제1 의제인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제3 의제인 휴전감시 방법에서 다루어졌다. 해상 군사분계선은 애초에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휴전회담 당시 서해 5도 수역에서는 해상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섬들의 귀속이 문제되었다. 육상의 군사분계선은 유엔군과 공산군의 접촉선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육상의 군사분계선에 준하여 섬들의 귀속을 정할 경우 38선 이남, 황해도-경기도 도계(道界) 이북에 있는 섬들은 북한에 속할 우려가 있었다. 이는 남측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더욱이 당시 제해권은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 남측이 통제하던 38선 이남의 섬들 가운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다섯 개의 큰 도서군(島嶼群)들은 유엔사의 통제 하에 두고, 나머지 섬들은 북한에 귀속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서해 5도 수역 정전협정 규정의 또 하나의 쟁점은 남과 북의 연해(인접해면, 영해) 문제였다. ‘영해’는 정치적 문제로 간주되어 ‘군사’ 정전협정에서는 영해가 아니라 연해(coastal waters) 혹은 인접해면(contiguous waters)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당시 유엔사는 미국의 표준에 따라 3해리를 주장하였고, 북한은 제3세계의 경향에 따라 12해리를 주장하였다. 결국 그 범위는 타결되지 못하고 다만, 인접해면을 존중하며, 어떠한 봉쇄도 하지 않는다는 규정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3해리와 12해리의 다툼이 있었다면, 적어도 3해리에 대한 합의는 존재한 것으로 봄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정전협정 상 서해 5도 수역에는 휴전선은 존재하지 않고, 대신 남북 각기 그 육지를 둘러싼 3해리의 띠 모양의 영해가 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휴전 직후 우리 군이 어로 활동과 초계활동의 한계를 정하기 위하여 북한 3해리 영해를 기준으로 황해도를 둘러싼 형태의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북방한계선은 어디까지나 우리 어선이나 병력 진출의 북방한계를 정한 것이지, 북한 비무장 선박의 남하와 북한 어민들의 어로 활동을 제약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당시 남측의 해군력이 월등하였고, 따라서 남한 어민들의 어로 활동이 활발하였다. 북방한계선이 곧 우리 어민들의 어로한계선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해군력에서 열세였던 북한은 위와 같은 ‘공해자유의 원칙’과 ‘3해리 영해’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북한은 휴전회담 당시부터 해상 군사분계선을 언급했다. 정전협정 체결 후 군사정전위원회에서도 육상의 군사분계선의 연장선 혹은 황해도-경기도 도계의 연장선을 해상 군사분계선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북한은 인접해면의 범위를 12해리로 주장하였고, 1955년에는 내각 결의로 12해리 영해를 선언하였다. 서해5도 수역에서 남북 어민들의 나포와 분쟁이 잦아졌고 군사적 충돌도 발생하였다. 마침내 1968년 박정희 정부는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 조업한계선)을 현재 수준으로 남하시켰다. 이후 국제해양법의 발전으로 12해리 영해는 물론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이 주장되면서 북한은 1977년 서해 5도 수역에 군사경계수역과 해상경계선을 선포하였다. 그에 맞서 남한 역시 12해리 영해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공표하였으며, 북방한계선을 일종의 해상 군사분계선처럼 관철시켰다. 이렇게 서해 5도 수역은 남북의 배타적 관할 수역이 중첩되는 모순과 적대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3해리 영해를 제외한 수역에 ‘공해자유의 원칙’을 적용하여 남북이 모두 공유할 수 있게 한 원래의 정전협정 정신은 사라졌다. 서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1999년 연평해전을 시작으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남과 북은 다시 정전협정의 정신으로 회귀하여 평화의 해법을 찾으면 좋겠다. 서해 접경수역에서 남북의 배타적 구역을 3해리로 확인하고, 그 너머의 부분은 남과 북이 평화롭게 협력하여 함께 이용하는 수역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평화협정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태욱 인하대 법전원 교수 water@inha.ac.kr이석우- 수역 안정 유지하며 공간관리 인식 제고를 1982년에 체결된 유엔해양법협약은 해양에서의 모든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영토 및 영역을 이유로 주장될 수 있는 해양 구역을 규정하고 있다. 영해를 획정하는 일반규칙은 동 협약 제15조에 규정되어 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경계는 두 국가 간 중간선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 협약은 배타적경제수역의 경계획정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대향국간 또는 인접국간의 배타적경제수역의 경계획정에 관한 협약 규정은 제74조에 규정되어 있는데, “‘공평한 해결’에 이르기 위하여 국제법을 기초로 하는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상당한 기간내에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관련국은 분쟁해결 절차에 회부한다; 합의에 이르는 동안, 관련국은 이해와 상호협력의 정신으로 실질적인 잠정약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며, 과도적인 기간동안 최종 합의에 이르는 것을 위태롭게 하거나 방해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약정은 최종적인 경계획정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관련국간에 발효중인 협정이 있는 경우 경계획정에 관련된 사항은 그 협정의 규정에 따라 결정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 협약에서 배타적경제수역의 경계를 획정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명시하지 않아 해양경계획정 관련 법규범은 일반적으로 국제사법기관을 통해 형성된 판례를 통해 발전하고 구체화되고 있다. 2009년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흑해(黑海) 해양경계 사건에서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적용한 해양경계획정의 소위 ‘3단계 접근법’은 그 이후 2012년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간의 벵갈만의 해양경계획정 사건과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니카라과와 콜롬비아 사이의 경계획정 사건 등 후속 판결들을 통해 일반적으로 해양경계획정에 있어서 실행가능한 통상적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3단계 접근법은 첫째, 잠정적인 등거리선/중간선 설정, 둘째, 형평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등거리선/중간선에 조정을 요구하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는지의 여부 고려, 그리고 셋째, 조정된 경계선이 각국의 해안선 길이 비율과 각 당사국에 속하게 될 관련 해양 면적의 비율 간에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해 형평하지 않은 결과를 도출하지 않도록 점검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3단계 접근법의 이론적 완결성에 대한 여러 비판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 이 3단계 접근법을 배제하고는 현존하는 해양경계 미획정 지역에 있어 결과를 예측하여 협상에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 이론적인 적용 가치가 증대되고 있다. 즉, 해양경계획정 과정에 있어 예측가능성의 제고가 해양경계획정에 적용되는 동 3단계 접근법의 객관성을 보장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국제법에 당사국 간 공평한 경계 강조 서해5도 해상은 한중일 관할권 중첩 남북 관할권 미치는 수역 최소화하고 이해 조정해 통합 관리방안 강구해야 첫 번째 단계인 잠정적인 등거리선/중간선 설정에 있어 인접국 간 해양경계에 있어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등거리선이, 대향국 간 해양경계에 있어서는 양국 연안의 중간선이 잠정적 경계선이 되며, 이러한 등거리선 또는 중간선은 모두 해양경계획정을 위한 수단이므로 그 자체로 어떠한 법적 결과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서해5도 및 동해상 남북한 간의 가상중간선을 표시하면 첨부한 지도와 같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가상중간선에 형평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잠정적인 중간선의 수정 또는 이동을 요하는 요소들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하는데, 연안길이 간의 불균형, 어업활동, 안보 등을 해양경계획정을 위한 고려사항으로 보고 잠정적인 중간선에 수정을 가한다. 실제 해양경계획정과 관련된 협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이 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는 처음 설정한 조정된 중간선을 적용해 설정된 해양경계획정이 최종적으로 공평한 결과에 도달하였는지를 소위 비례성 테스트를 거쳐 획정한다. 그렇다면 3단계 접근법을 통해 최종적으로 획정될 서해5도 수역의 해양경계획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첫번째 단계에서 설정한 가상중간선이 두번째 단계와 세번째 단계에서 어떠한 변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획정될 것인가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남한과 북한이 동 사안을 제3자 국제사법기관에 의뢰하는 경우에 해당 방식을 통해 분명해 질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동 사안을 제3자 국제사법기관에 의뢰하지 않고 양자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3단계 접근법은 결과의 예측가능성을 담보하기에 원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서해5도 수역은 남북한만의 해양 문제가 아닌 한중일 3국의 관할권이 중첩되는 수역이라는 점이다. 남한과 북한간의 서해5도 수역에서의 해양질서의 법적인 지위에 변화를 가하는 어떠한 행위의 결과는 양자간에 해양경계획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과 중국, 북한과 중국과의 해양질서의 법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해당 수역의 관리와 분쟁해결의 해법 강구에 있어 관할권 확보 및 해양경계획정을 위한 전통적인 접근에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유엔해양법협약 체제는 영해, 접속수역, 배타적 경제수역, 공해 등으로 전 해역을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각 공간에서 연안국과 비연안국의 권리를 기능적으로 분배하고 있는데, 서해5도 수역의 경우는 국가의 관할권이 미치는 수역을 최소화하고, 남북한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해당 수역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1974년 한일간 합의된 북부대륙붕경계선을 제외하고 주변국과 해양경계획정이 전무한 현재의 한국의 해양질서 유지는 주변 해양강국들간의 역학관계의 부산물로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국이 한반도 수역에서의 최소한도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해양질서의 안정적 유지 관리는 필수요건이다. 현재 서해 NLL을 포함하여 정전협정에서 유래한 남북한 간의 해양경계획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한반도 해양질서의 안정적 관리 및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을 위해서 서해5도 수역의 해양공간관리의 활용에 대한 인식의 전향적인 제고가 요구된다.  
  • [씨줄날줄] 황해/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황해/임병선 논설위원

    2010년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는 바다안개(海霧)에 갇힌 배 안에서의 잔혹한 살육극이 몸서리가 처지는 영화다. 흐릿함과 끈적거림이 교직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중국과 남북한 해상 경계의 모호함을 방증하며 이곳에서 충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암시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두 차례 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의 상흔이 깊은 바다다. 국제수문기구에 따르면 황해는 제주도에서 상하이 부근 양쯔강 하구까지를 선으로 그어 동중국해와 구분한다. 보하이만(渤海灣)과 나누기도 하지만 합치기도 한다. 남북 1000㎞, 동서 700㎞로 평균 수심은 40m, 가장 깊은 곳이라야 105m로 거대한 대륙붕을 형성한다. 빙하기에는 거의 뭍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기원전 3000년대에 한반도에 농업이 전래되는 통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이 바다로 서진(西晉)에 사신을 보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황해 건너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고려 때 예성강 입구 벽란도(碧瀾渡)가 국제항으로 발돋움한 것도 황해를 통해서였다. 황해는 어찌 보면 동북아의 지중해라고 할 수도 있다. 황해란 명칭은 황하, 화이허, 양쯔강에서 흘러드는 강물 때문에 누런색 바다라고 해 붙여졌다. 1737년 프랑스인 당빌이 제작한 지도에 처음 이렇게 적혔다. 1952년 중국 국무원이 공식 인정했고 우리도 특별한 지정학적 이해 충돌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따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황하를 연상시켜 중국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며 ‘서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령도와 소청초의 연간 해무 일수는 100일이나 된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며 물살도 빨라 상업적이든 군사적이든 움직임이 쉽지 않은 바다다. 그런데 거의 매일 중국 해군 경비함이 동경 124도를 넘어와 공해에 진입, 이 일대를 ‘내해’(內海)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듯해 문제다. 동경 124도는 2013년 중국이 우리 해군 보고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한 선이다. 그래 놓고 자신들은 이 선을 넘어 10㎞나 한국 쪽으로 접근했다. 일부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뭘 했느냐고 타박을 한다. 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장은 어제 서울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정전협정에서 경계를 뚜렷이 획정하지 않았고 중국과 남북한 모두 민감해 이제껏 방관했다”면서 “중국이 전력 강화를 공언한 2013년부터 중국 해군의 군사행동이 차츰 늘어 정부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우리도 적절히 비례적 대응 원칙으로 대응해 왔다. 다만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bsnim@seoul.co.kr
  •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3] 국지전·불법조업·고립 “서해5도 사는 게 죄인가”

    [서해 5도를 다시 보다 3] 국지전·불법조업·고립 “서해5도 사는 게 죄인가”

    서해 5도는 1·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국지전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과 중국어선 불법조업으로 인한 생계의 문제, 외부와의 고립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이 있는 지역이다. 한국․북한․중국의 접경수역으로 해양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서해의 독도’로 ‘주민의 실효적 지배’를 통한 ‘해양주권과 안보의 정당성’을 확보한 곳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 서북도서는 DMZ, 한강하구와 함께 유엔군사령부 통제를 받고 있다. 5도서 주민들은 비무장지대 안에 민간인이 거주하는 대성동 마을처럼 남북 서해 접경수역 안에 있으나, 특별한 혜택 없이 안보규제를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지정학적 특성상 서해 연안 방비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해로의 요지다. 또한 바다의 수심이 얕고 조강에서 나온 모래와 플랑크톤으로 인해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어민들은 평상시 어업을 기반으로 생활하고 있으면서 전쟁, 해적선 출몰 등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군병으로서 또 하나의 의무를 지니고 살아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선진 조업기술이 들어오면서 5도의 조업환경은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연평도 조기파시 때처럼 어선과 상선이 많을 때는 2000~3000척에 달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익은 모두 일본인이 가져갔다. 연평도 ‘향리지’에 따르면 “그 당시의 어획고는 천문학적 수치로 연평어업협동조합의 일일 출납고가 한국은행의 출납보다 그 액수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후 미소 군사분계선 설정으로 서해 5도를 비롯한 옹진반도는 지금과 달리 남측에 속했다. 연평도의 경우 전쟁 당시 별다른 피폭도 발생하지 않았다. 향토지에 따르면 “6.25 동란 중 본도에 3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호주비행기가 적지인줄 알고 떨어뜨린 포탄이었으며 월백추야 연대 대원 1명이 죽고, 박신국씨의 소 1마리가 죽었다. 이것이 전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라고 한다. 오히려 북측 각지에서 내려온 3만여명의 피난민이 운집된 연평도는 일대 혼잡을 이뤘다. 식량과 식수 문제는 물론 모든 산이 오물로 뒤덮였고, 장질부사(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한국전쟁 이후 5도서 어민들에게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엔에 의한 정전협정이다. 국방부가 편찬한 ‘6.25 전쟁사 9’에 따르면 “거래 목적상 유엔군도... 옹진과 연안반도가 계속 공산군 측의 통제하에 놓이는 것에 동의해도 좋다”고 했다. ‘버려진 옹진반도’는 분쟁의 바다를 잉태했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갈등으로 이어졌다. 어민들에게도 안보에 따른 규제의 족쇄가 채워졌다. 5도서 수역의 남북 경계의 문제는 9.19 군사합의서에도 드러났다. 서해평화수역 조성의 핵심은 ‘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이다. 합의서에 명시한 ‘북경계선’과 ‘남경계선’의 기준을 양측이 합의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쟁점은 NLL과 북이 주장하는 경계선을 어떻게 풀 것이냐로 귀결된다. 해상경계선은 육지의 합의된 군사분계선과 달리 종전 또는 평화협정 체결 시 남북 간의 해상경계선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9.19 군사합의에 따른 조업의 자유와 남북 평화공존을 희망하고 있다. 미래의 공동어로구역과 NLL까지 조업 확장보다는 현재 어장 범위(시간, 면적, 허가)에서의 규제 완화를 최우선으로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쟁점수역(NLL~북 경비계선)은 해양생태조사를 선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해양생태보존수역으로 지정한 뒤 중국어선 길목 차단과 남북수산교역을 위한 해상파시, 남북수산업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수산과학기술교류, 옹진반도 공동어로(양식) 등을 단계별로 추진하고, 남북 경협을 위한 어민들이 참여하는 ‘사회적평화기업’을 정부에 제시한 바 있다. 두 번째는 2000년에 체결한 한중어업협정이다. 협정문 제9조에서는 “잠정조치수역 북단에 위치한 일부수역, 과도수역 이남에 위치한 일부수역에 대해서는 별도의 합의가 없는 한 현행 어업활동을 유지하며 어업에 관한 자국의 법령을 타방체약당사자의 국민과 어선에 대해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사실상 주권을 강제로 행사할 수 없다. 때문에 정부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국 외교적 대응 강화”, “해경의 단속 강화”, “처벌강화”등 세 가지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중국어선의 약탈과 불법은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선 후기 청과 일본은 조약을 내세워 국내 어업 영역을 무법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어민들은 생존권을 위협받자 스스로 외세와 직접 충돌했다. 1884년 백령도에서 벌어진 ‘청국인 살상·강도 사건’은 외교 문제로 비화됐으나 결국 백령도 어민만 효수했고 관찰사도 유배했다. 조선의 왕은 백성을 죽임으로써 안위를 지켰다. 지난해 제정된 ‘어선안전조업법’에 대해 어민들이 강력히 규탄하며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어민들을 군사 통제 대상이자 형사처벌 대상자로 인식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였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중국어선의 노략질에 재산권을 침탈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보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힘없는 선대 어민은 생존을 위해 권력에 순응하고 눈치를 보며 사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다고 여겼다. 국가 정책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다가 자칫하면 간첩죄로 몰린다는 불안함에 쥐죽은 듯 살았다. 북한에 인접한 “서해 5도에 태어나거나 사는 게 죄라면 죄지” 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자식들에게는 “나중에 섬에 살지 말아라! 뭍으로 나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떳떳하게 서 살아라!”고 말하면서 거친 풍랑을 해치며 바다로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2010년 연평도 포격이다. 당시 겁에 질린 1300여명의 주민이 터전을 버리고 어선 등을 타고 긴급히 섬을 떠났다.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국민 피난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마련해준 그해 겨울 첫 거처는 찜질방이었다. 주민들은 집단 이주를 요구했다. 정부는 “NLL을 사수하려는 우리 국방․안보정책상으로도 주민들이 빠져 나오게 하는 지원 대책을 저희들이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라며 피난 나온 지 한 달도 안되는 주민들을 다시 섬으로 들어가도록 종용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 다시 밀어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긴 세월 서해 5도 어민들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닌 12시간이었다. 안보를 이유로 47년 동안 여객선이나 어선 등의 야간 항행이 금지됐고, 조업의 자유와 이동권을 제약받으며 살아왔다. 어민들은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 해상시위, 중국 어선 나포, NLL 영해 헌법소원, 분단 후 최초 한강 뱃길 잇기, 해상 파시, 어장확장을 평화 깃발 게양 등 안보 민주화와 평화 경제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때를 알고 적시에 바다로 나가야만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인내와 희생은 계속 이어져 왔다. 누군가는 이들이 사는 것만으로 애국하는 일이라고 한 적도 있다. 정부는 어민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들이 현실적 의무를 다하듯, 정부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정권 모두 어민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번 한 약속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어민들에게 평화는 생존이며 자유다. 이 목소리는 인권이자 또 다른 주권의 표현이다. 이들에게 희생의 굴레를 벗겨주고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누리는 기본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서해 5도 평화수역의 가치를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서해평화 정책의 지속가능성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정학적 특수성과 평화와 안보에 관한 메시지를 왜곡 없이 학생을 비롯한 국민에게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바르게 전달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정전협정에 ‘족쇄’ 한중어업협정 탓 주권 강제 행사 못해 중국 어선의 약탈·불법은 오래된 숙제 안보 이유로 47년간 야간항행도 금지 NLL 영해 헌법소원 등 목소리 내기도 정부서 기본권 회복 위한 행동 나서야 평화와 안보 모두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분단으로 인한 이념 갈등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정쟁 수단으로 의제화됐다. 대체로 진보정권은 평화를, 보수정권은 안보를 앞세우고 있다. 최근에 발생한 개성공단 연락사무소 폭발, 서해 공무원 피살 등 남북 갈등 발생 시 평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럴 때마다 언론들이 찾는 곳은 연평도다. 남북 갈등은 다시 정쟁과 남남 갈등으로 이어지고 어김없이 국지전 발생이 높은 서해 5도가 이슈가 되는 게 현실이다. 만약 또다시 제2의 연평도 포격 같은 군사적 긴장 대결로 회귀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군사적 안보냐? 평화적 안보냐? 등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선택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평화와 안보를 진영 논리에 가두면 안된다. 동전의 양면처럼 보수도 평화를, 진보도 안보를 말해야 한다. 대북정책의 동력은 결국 국민의 상식과 지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독도가 ‘영토 주권’의 상징이라면 서해 5도는 ‘안보의 성지’에서 ‘평화의 공존’으로 확장돼야 한다. 독도의 존재와 당위성은 국민과 남북 사이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서해5도는 그렇지 않다. 지금이라도 초중고 교과서 기술, 국내외 평화의 섬 캠페인 등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독도를 품고 있는 국민들 마음 속에 서해 5도 평화수역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한반도의 허리인 횡측 접경 공간에 대한 통합적‧제도적 관리가 필요하다. 서해 NLL~한강하구~DMZ에 이르는 접경 비무장 지역을 정책공간 단위로 묶어서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 지역은 현재 국방부, 행안부, 해수부, 통일부 등 부처별 개별법과 단위사업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출입 통제는 유엔군사령부가 하고 있다. 남북 상황에 따른 접경 공간별 안보규제와 교류 진흥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 설립과 일관된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서해 5도 정책도 어민 등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의사결정의 거버넌스화를 제도적으로 마련해 정책의 정당성과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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